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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고래 세 마리는 위판되었다”

등록일 2021-08-04 20:26 게재일 2021-08-0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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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잡이④<br/>고래 전문 중매인 최원복 인터뷰
1968년 장생포항의 참고래 해체 작업. 참고래의 무게 65t, 길이 33m, 높이 4m. 사진 : 서진길(사진작가)

1937년생인 최원복 씨는 1962년부터 1982년까지 구룡포에서 고래 전문 중매인을 했다. 구룡포의 고래 중매인 중 최연장자로 구룡포의 고래 역사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이다.

 

밍크고래는 17자(5.1m)부터 25자(7.5m)까지 가장 많이 잡혀

1980년대엔 고래고기가 소고기값 3분의 1… 포경금지후 ‘로또’

쌀이 귀할 때라 끼니마다 고래고기를 먹기도

고래고기 팔러 버스타고 죽도어시장 가는 길은 정말 험해

도로포장 후 기분 좋아 한 번 달려본 후 일부러 왕복하기도

포경업 강두수 씨, 제1동건호 기증 김건호씨 등 수산업 하던 분들

광복 직후 개교한 중·고교 살리는 등 좋은 일도 많이 해

12가지 맛 고래고기? 천만에, 50가지 맛나 소주 안주로 그만

고래고기는 껍질이 두꺼워야 살코기가 기름지고 맛있어

김도형(김) : 근황은 어떻습니까?

최원복(최) : 시간 나는 대로 궁도장에 나간다. 1985년부터 건강도 챙길 겸 궁도를 하고 있다.

김 : 어릴 때 구룡포는 어떤 곳이었는지요?

최 : 아버지는 김천 사람이고 어머니는 칠곡 사람이다. 1935년에 부모님이 구룡포로 왔다. 구룡포 북방파제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정어리가 많이 나고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열 살 때 구룡포에 콜레라가 닥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나도 힘든 인생을 살았다.

김 : 고래고기 중매업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최 : 1962년 군 복무를 마치고 구룡포에서 시작했다. 1968년까지는 고래만 하다가 그 이후로는 다른 생선도 취급했고, 고래고기 중매는 1982년까지 했다.

김 : 당시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주신다면.

최 : 1970년대 초반 구룡포에 참치 원양업이 성행했다. 참치 밑밥이 꽁치인데 마침 그때 구룡포가 꽁치 주어장이어서 원양어선에 꽁치 대주는 장사를 1982년까지 했다. 그때 돈을 좀 벌었는데 오징어 장사하다가 다 까먹었다. 1986년에 일본 사람과 ‘선동(船凍) 오징어’(배에서 잡아 바로 얼린 오징어)를 거래해서 얼마간 회복했다.

김 : 1970년대는 구룡포가 활황일 때지요?

최 : 구룡포와 대보(현 호미곶) 합쳐서 인구가 3만 명이 될 정도로 활기가 있었다. 지금은 구룡포 인구가 만 명도 안 될 거야.

김 : 요즘 오징어가 많이 비싸지요?

최 : 광복 전에 구룡포에 정어리가 그렇게 많았다고 하는데 다 사라졌고, 명태도 사라졌지. 오징어도 어떻게 되려는지 모르겠어. 오징어가 얼마나 비싼지 최근에 6만 5천원에 한 상자 샀지.

김 : 고래 거래하실 때는 밍크고래 위판이 많았겠군요.

최 : 그렇지. 밍크고래는 17자(5.1m)부터 25자(7.5m)까지가 가장 많이 잡혔다. 하루에 세 마리는 위판되었다. 그만큼 밍크고래가 많이 잡혔다는 얘기지.

김 : 고래고기 가격은 어느 정도였는지요?

최 : 1980년대 초반까지 소고기 값의 3분의 1이었다.

김 : 고래 중매업은 어땠습니까?

최 : 치열했다. 새벽에 수화(手話)로 일하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수화가 그럴듯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정말 힘들다. 그 때문에 집안에서 누가 장사한다고 하면 말리게 된다.

김 : 수입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최 : 치열하게 경쟁해서 고래를 사들여도 벌이는 신통찮았다. 쌀이 귀할 때 고래고기 장사를 한 덕분에 끼니마다 고래고기를 먹기는 했다. 그때는 구룡포 사람들이 고래고기를 많이 먹었다.

김 : 고래고기는 어디에서 많이 팔았습니까?

최 : 구룡포시장 좌판에서도 팔았지만 포항 죽도어시장에 가서 많이 팔았다. 여기서 해체한 고래고기를 삶아서 궤짝에 넣은 다음 버스를 타고 포항 가서 죽도어시장 수산회사에 넘겼다.

김 : 과거에 포항 가는 길이 힘들었을 텐데.

최 : 말도 마라,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특히 청림 쪽을 지나갈 때는 정말 힘들었다. 구룡포에서 대구까지 트럭 타고 가는 데 4시간 30분 걸렸으니. 1962년에는 구룡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15시간이나 걸렸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후 트럭을 타고 달려보니 장판에 구슬 굴러가는 것 같더라. 구룡포에서 포항 가는 도로가 포장된 후에는 한 번 달려본 다음에 일부러 다시 왕복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김 : 혹시 고래고기를 일본에 팔기도 했나요?

최 : 1982년쯤 그러니까 고래고기 장사를 거의 접을 무렵이다. 포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 가는 선어(鮮魚) 수출선이 있었다. 아우와 둘이서 고래고기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판로를 찾다가 포항 효창수산을 통해 그 선어 수출선으로 일본에 보냈다. 일본에서 온 영수증을 보니까 내가 판 고래고기 내용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당시 구룡포에도 한 수산업자가 시모노세키 가는 선어 수출선을 갖고 있었다.

김 : 포항 쪽 고래 유통에 대해 아시는 게 있는지요?

최 : 포항 사정은 시의원을 한 최일만 씨가 잘 안다. 논산훈련소 동기이기도 해서 각별한 사이다.

김 : 포경 금지 후에 고래 값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 : 엄청 올랐다. 나가수(참고래) 한 마리가 몇 년 전에 1억 원 넘게 위판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죽하면 바다의 로또라 하겠는가.

고래 전문 중매인 최원복 씨.
고래 전문 중매인 최원복 씨.

김 : 일제강점기 포경업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는지요?

최 : 일제강점기 때 장생포 포경선이 구룡포에 와서 고래 위판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나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포경선을 우리 사람들이 넘겨받아 포경업을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

김 : 구룡포에서 포경업을 한 강두수 씨는 어떤 분인가요?

최 : 일제강점기 때 구룡포에서 수산회사에 근무하다가 광복되면서 포경선을 넘겨받아 포경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인심이 좋은 분이었고, 지금 그분 아들이 70대 중반인데 구룡포에 살고 있다.

김 :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제1동건호는 김건호 씨가 기증했다고 들었습니다.

최 : 김건호 씨는 강두수 씨의 생질로 강두수 씨한테 수산업을 배웠다. 70대 중반에 작고했는데, 구룡포 길거리에 벚나무를 심기도 했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김 : 수산업 하던 분들이 구룡포 지역사회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습니다.

최 : 그렇게 볼 수 있다. 광복 직후 중·고등학교 개교하고 운영이 어려울 때 수산업 하던 사람들이 학교를 살렸다.

김 : 구룡포에서 포경선 탔던 분 중에 생존자는 몇 명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최 :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구룡포에 고래 해체하는 사람도 서너 명 있었는데 모두 돌아가셨다.

김 : 요즘 고래고기 전문 식당은 어떤가요?

최 : 장사가 괜찮을 것이다. 이문도 좋고 고래고기를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으니까. 최근에 강구에서 고래가 정치망에 걸려 구룡포의 한 고래고기 식당에서 사왔다고 하더군. 구룡포 어판장에서 해체한 고기를 5만 원어치 사서 친구 여남은 명과 어울려 소주 한잔했는데 소주 한 박스를 비웠다. 소주 안주에 고래고기는 그저 그만이다.

김 : 고래고기는 12가지 맛이 난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떻습니까?

최 : 천만의 말씀, 50가지 맛이 난다. 부위별로 독특한 맛이 있다. 고래를 그냥 삶으면 비린내가 나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고래 삶을 때 소주와 마늘, 생강, 커피 가루를 넣으면 비린내가 싹 사라진다. 육회는 된장에 찍어 먹어도 맛이 좋다. 나가수는 삶으면 살이 퍼지는데 밍크고래는 살이 제 모양을 유지하고 부드럽다. 고래고기는 소화가 잘되고 많이 먹어도 살찌지 않는다.

김 : 맛있는 고래고기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지요?

최 : 껍질이 두꺼워야 한다. 껍질이 두꺼우면 살코기에 기름기가 있고, 껍질이 얇으면 살코기에 기름기가 별로 없다. 멸치부터 고래까지 모든 생선은 껍질이 두꺼워야 맛이 좋다.

대담·정리 : 김도형(THE OCEAN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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