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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일보다 물질이 낫다는 포항 해녀

등록일 2021-07-05 20:12 게재일 2021-07-06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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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④- 포항 등 경북 해녀의 삶
물질을 마친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을 등에 걸쳐 맨 채 뭍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물질을 마친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을 등에 걸쳐 맨 채 뭍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포항 등 경북의 어촌 여성은 제주 해녀를 통해 물질 어업과 바다 자원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었다. 어촌의 기혼 여성이 밑천 없이도 애를 키우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포항 남구 호미곶면 강사2리 강 해녀는 “바다에서 돈벌이는 물질하는 거뿐이었어. 그러니까 인자 남자들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 여자들이 들어가야 되니까 여자들이 배워가지고 제주도 사람 말고 여기 사람도 많이 하게 됐어”라고 말했다.

강 해녀는 포항 해녀가 제주 해녀보다 물질을 더 잘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경북 해녀의 물질 기술은 제주 해녀를 능가할 정도로 발전하였고 해녀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1970년대 수산물 가격이 상승하고 천초(天草), 전복, 성게의 일본 수출길이 열린 것도 경북 해녀들이 본격적으로 물질 작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33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 물질을 시작한 구룡포 성정희 해녀는 “애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해녀뿐”이라고 하였다.

 

“애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해녀 뿐이었지… 바다 나가 돈 버니 주변서 부러워해”

10대부터 교육받는 제주해녀와 달리 경북해녀는 생계 위해 나선 기혼여성 대다수

맨살 드러내지 않는 고무 잠수복 덕에 직업적 자신감 올라 “다시 태어나도 해녀 하지”

테왁을 어깨에 걸친 해녀들이 물질을 하기 위해 나란히 바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테왁을 어깨에 걸친 해녀들이 물질을 하기 위해 나란히 바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해녀가 된 이유는 고소득이라는 거. 내가 바다를 좋아하다 보니까 수영은 잘하잖아요. 수영만 하면 된다 하대. 애 키우면서 하기는 좋아. 해녀는 서너 시간만 하고 오면 되잖아. 시간적인 단축이 있더라고, 애 키우는 데 좋지. 몇 시간만 애 맡아달라고 하면 되겠더라고. 그런 이점이 있더라니까

< ‘경북 해녀의 일·삶·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7>

 

경북 해녀는 생계 위해 뒤늦게 물질에 뛰어들어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김 해녀는 23살에 해녀가 되었다. 딸이 세 살 무렵이었다. 마침 앞집에 사는 경이 엄마가 제주도 해녀 출신이어서 그에게 해녀가 되는 과정을 배웠다.

 

제주도에서 나온 해녀들이 기술도 있고 물건도 마이 한다니께. 우리들하고 다르다니께. 제주도 사람들이 가만히 보이 생활력이 억수로 강하잖아. 여기 제주도서 나온 사람들 다 생활력이 강해. 내려가다 보면 물건을 봐도 이 귀가 먹어. 귀가 먹으면서 압력 때문에 수경이 빨려 들어가고 귀가 먹먹할 때는 물건 보면 얼른 한 마리만 따고 그 옆에 꺼는 못 따고 얼른 올라와야 해.

<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

 

영덕군 병곡면 금곡리 권 해녀는 32살부터 물질을 시작하였다.

 

나는 헤엄질도 할 줄 모르고 비닐봉지 머리에 덮어쓰고 이렇게 했다끼네. 물질은 가르쳐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보고 내가 해야 되는데 헤엄을 잘 못 치다 보니까 안 늘어. 하다 하다 안 될끼네 물질을 포기하고 미역 할 때만 나가지. 요새도 헤엄은 서툴러. 깊은 데는 못 가지.

<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

 

경북 어촌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물질을 배운 사람도 있고, 가족 중에 해녀가 있어 해녀가 된 사람도 있지만, 어촌으로 시집온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뒤늦게 물질을 배운 경우가 다수다. 제주에서는 대개 10살부터 숙련 과정을 거쳐 16살에 해녀로 입문하지만, 경북에서는 헤엄을 배운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 30살이 넘어 생계를 위해 물에 뛰어든 경우가 많다. 제주와 경북은 해녀가 되는 과정이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울진군 기성면 김 해녀는 1982년 32세 때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다.

배를 타고 물질 현장에 도착한 해녀들이 배위에서 바다로 뛰어 내리고 있다.
배를 타고 물질 현장에 도착한 해녀들이 배위에서 바다로 뛰어 내리고 있다.

(물질을) 따로 배운 게 없고 처녀 때 고향에 있을 때 보면 저 두렁박도 없었고 해녀복도 없어가지고 검은 광목이라고 있었어요. 그걸 두 자씩 받아가지고 물옷을 만들어서 그거 입고 속에 팬티 입고 그랬어요. 티셔츠에 팬티 하나 입고 바다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래서 귀에 물이 들어가고 귓병도 앓고 그러다 보니 해녀들 다 귀가 잘 안 들려요. 그래도 내가 해녀 시작할 땐 잠수복 입고 시작했지.

<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야’, 영덕군·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

 

이런 사례처럼 경북 해녀는 제주처럼 훈련 기간 없이 스스로 물질을 배웠기에 귓병에 걸려 청력에 이상이 있는 해녀가 많다.

 

고무 잠수복 도입으로 물질 작업 크게 개선돼

1970년대 고무 잠수복의 보급은 해녀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재래 해녀복은 광목으로 만든 짧은 원피스형 해녀복이다. 이 해녀복을 입으면 수온의 변화에 따라 물질 시간이 정해지기 때문에 조업 시간이 짧고 수입도 적다. 경북 해녀는 밀가루 포대나 검은색 광목으로 재래식 작업복을 만들어 입었고 작업시간은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물질 중간마다 상륙해 하도불(불턱)에서 옷을 말리고 다시 물에 들어가기를 서너 차례 반복하였다. 1회당 1시간 정도 물질을 하지 않으면 수입이 나지 않았고 체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경북 어장에 도입된 고무 잠수복은 겉감에 고무 재질을 덧입혀 보온성이 강하였다. 이 잠수복은 목까지 내려오는 통으로 된 모자와 원피스 형태의 상의, 발목을 덮고 가슴만큼 올라오는 바지 형태의 하의로 수온에 관계 없이 3시간에서 5시간까지 조업이 가능하다. 또한 고무 잠수복을 입으면 부력 덕분에 쉽게 물질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실제로 영덕읍 석리 김 해녀는 이웃 해녀가 “고무옷 입고 오리발 신고 이래하면 된다”라고 권유한 덕분에 해녀가 되었다고 한다.

고무 잠수복은 맨살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부위를 고무로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어 해녀의 직업 의식을 강화시켰다.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 김 해녀는 재래식 해녀복을 입었을 때는 “내가 물에 하는 게 뭐 위축되고 자꾸 그래. 남한테 천대받는 것 같고 돈 벌어도 뭐 물에서 한 건데”라는 부끄러운 직업으로 여겼다. 하지만 고무 잠수복을 입고 나서 그러한 생각이 없어졌다. 13살부터 물질을 시작한 영덕읍 창포리 김 해녀도 고무 잠수복을 착용한 후로 물질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고 한다.

영덕군 영덕읍 대부리 전 해녀는 “다시 태어나도 해녀 해도 되지. 뭐 힘 안들고”라고 했고, 영덕읍 노물리 김 해녀도 “주변 사람들은 해녀 억수로 부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해녀들이 바다에 나가 돈을 많이 버니까 우리 여자들을 억수로 부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주와 경북은 해녀가 되는 과정도 다르지만 직업관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난다. 제주 해녀는 “물질보다 밭일이 쉽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면 물질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제주의 이야기는 해녀가 위험한 직업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향을 왕래하는 목숨값으로 인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반면에 포항 등 경북 해녀는 “밭일보다 물질이 쉽다”고 하며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갖고 있다.

제주 해녀는 가혹한 제주 역사의 산물인 반면에 경북 해녀는 이 같은 역사 체험이 없고, 기혼 여성이 밑천 없이 손쉽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으며, 특히 1970년대 고무 잠수복의 보급으로 물질을 용이하게 할 수 있게 된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

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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