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해양문화<br/>동해안굿과 포항의 무속 ① - 한국 무속과 동해안굿
무속이란 민간층에서 무당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종교 현상으로 한국 민간신앙의 한 형태다. 민간신앙에는 한 가정의 주부가 중심이 되어 집안에 모시는 ‘가신신앙’, 마을 단위로 전승되었던 ‘마을신앙’, 민속 종교로 일정한 체계를 갖춘 ‘무속신앙’이 있다. 무속신앙을 말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일 것이다. 학계에서는 한강을 기준으로 통상 이남은 세습무권으로, 이북은 강신무권이라고 보았다. 강신무는 신병을 겪고 무당이 된 경우이고, 세습무는 무업을 배우거나 대물림하는 경우를 말한다. 실제로 두 지역의 굿이 연행(演行)되는 과정과 무속의 전통, 무당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
협업 중요한 어촌서 행해진 동해안굿은
세련된 리듬에 다이내믹한 장단이 특징
몇날 며칠 함께 즐기는 굿의 원형 살아있어
종교성에 예술성·놀이성도 갖췄다는 평가
동해안무속의 상징인 김석출 옹 궤적 따라
포항 중심으로 한 굿의 미래 가늠해 본다
한국 무속은 특정 지역별로 무가권이 구분돼
민속학자 김태곤은 한국 무속은 강신무 중심이며, 이는 북방계통에서 유래한 것이고, 세습무는 강신무에서 분화하여 변천된 것으로 보았다. 반면 민속학자 최길성은 강신무와 세습무를 별개의 문화로 보고, 한반도는 남방계와 북방계가 섞여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편의상 이원론으로 구분하지만, 최근에는 강신무와 세습무를 별개로 보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존재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사실 강신무에도 세습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세습무에도 신 관념이 뚜렷하고 신단을 모시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세습무권이라 하는 한강 남쪽 지역에서도 강신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서 이런 구분이 사실상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하지만, 강신무권과 세습무권이라는 구분이 아니더라도, 무속신앙은 ‘굿’이라는 제의를 연행하는 방법이나 굿에서 노래하는 신화인 서사무가(敍事巫歌)가 무엇을 전승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무가권(巫歌圈)’을 구분할 수 있다. 한국 무속은 특정 지역별로 무가권이 구분된다. 한강 이남 지역을 살펴보면, 강신무를 중심으로 한 서울굿, 충청도굿, 전라도굿, 남해안굿, 제주도굿과 함께 동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연행되는 ‘동해안굿’이 있다. 북한 지역은 조사하기 어려워 ‘북한 지역 무속’으로 포괄적으로 다루기도 했지만, 한국전쟁 때 월남한 무속인들을 대상으로 황해도굿과 함경도굿이 조사되었기 때문에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지역별로 무가권 연구가 이루어진다.
동해안굿은 예술성과 놀이성이 뛰어나
이렇게 지역별로 무가권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무속을 관통하는 공통 원리가 존재한다. 굿은 ‘청신(請神)-오신(娛神)-송신(送神)’의 순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정굿으로 굿을 시작하며 마지막에 굿을 끝내면서 잡귀잡신을 위한 굿거리를 마련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공통점이다. 이러한 공통점을 공유하면서 이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려는 동해안 무가권은 그 나름의 특징이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화랭이(세습무 집안의 남성 악사)의 재주를 보여주는 ‘놀이성’이 매우 뛰어나 몇 날 며칠 굿을 놀면서 구성원들이 함께 즐겼던 굿의 원형적 모습이 살아 있는 곳이 바로 동해안이다.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많은 토박이들이 굿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수많은 무속 연구자들의 연구 터전이기도 하다.
동해안 무가권의 범위는 강원도 고성을 최북단으로 하여 남쪽으로는 부산 다대포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에서 행해지는 모든 굿을 아울러 동해안굿이라 부른다. 동해안 무속은 말 그대로 어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어촌은 자연환경의 지배력이 크고, 협업을 통한 공동 노동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어로 작업의 위험성으로 인한 위기의식의 해소와 공동체적 유대가 반드시 필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개인 또는 공동의 소망을 주술 종교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려는 열망이 강하다. 어쩌면 그러한 열망의 결과물로 형성된 신앙이 동해안굿이라 할 수 있다.
굿은 지역사회의 종교 문화적 토대 위에 형성되어 지역적 특성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기에 동해안굿은 해안가의 특징과 전통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동해안의 각 지역민들은 굿을 통해 신앙 종교적으로 희구하는 한편, 예술적·놀이적 욕구도 충족해 왔기에 동해안굿은 종교성과 놀이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한국의 굿에서 동해안굿은 예술성과 놀이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에는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동해안굿의 음악은 리듬이 세련되며, 반복되면서 차츰 빨라지는 다이내믹한 장단이 큰 매력이다. 동해안 별신굿의 장단은 매우 다채롭다. 굿거리나 동살풀이, 삼공잽이 외에도 푸너리, 드렁갱이, 배기장, 삼오장 등 독특한 이름을 가진 장단으로 구성된다. 선율악기 없이 타악기로만 연주되는 동해안굿의 사물 장단은 섬세하며 기교가 뛰어나다.
동해안굿의 세습은 김석출에서 출발
오랫동안 동해안굿 현장을 연구한 민속학자 윤동환은 동해안굿을 전승하는 두 개의 세습무 집단을 모두 조사하였다. 김해 김씨 집안인 김석출(2005년 사망)과 은진 송씨 집안인 송동숙(2006년 사망) 무계는 동해안굿을 전승하는 두 개의 축이었고, 그들이 활동하는 곳은 동해안의 북단과 남단까지다.
김석출(金石出)은 1922년 경북 영일군(현재 포항시 북구) 흥해읍 환호동에서 태어났으며, 무속인 김성수의 둘째 아들로 김경남(金京南)이라고도 한다. 김석출의 본적은 조부의 출생지를 이어받아 경북 영일군 흥해면 옥성동 26번지다. 영일군은 1995년 1월 행정구역 개편 때 포항시로 통합되면서 폐지되었으므로 지금의 포항시가 김석출의 고향인 셈이다. 동해안굿의 세습을 설명하려면 김석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데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석출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82-가호 동해안 별신굿 보유자(악사)’이자 명예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예술적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동해안굿을 이해하게 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삶은 동해안 무속의 지도와 마찬가지다.
김석출은 굿판에서 일곱 살 때부터 잔심부름을 하고, 여덟 살부터는 징채를 잡았다고 하니 아주 어릴 때 무업에 입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동해안 굿판에서는 나이나 경력보다 ‘무업을 잘하는가’ 하는 점이 우선시된다. 그래서 재주가 많았던 김석출은 어린 시절부터 굿판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김석출은 열아홉 살에 결혼하고 나서도 한동안 포항에 살면서 무업을 계속했고, 형제들과 걸립을 다니며 각 분야의 민속 예인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예술 세계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이후 동해안 무속의 전승 주체였음은 물론, 해외 공연과 다수의 음반 활동을 통해 동해안굿의 예술성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딸들과 사위, 조카 등 김석출 만신의 가계에서 동해안 세습무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동해안굿의 근간은 김석출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연재될 글에서는 포항에서 나고 자라 동해안굿의 핵심 전승자가 된 김석출을 중심으로 동해안에서 행해진 별신굿과 오구굿이 어떤 굿인지 살펴보고, 특히 감염병을 극복하고자 했던 무속 제의인 손님굿을 자세히 이야기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포항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굿의 미래와 앞으로의 가능성을 가늠하려 한다.
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