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해양문화<br/>동해안굿과 포항의 무속 ② - 김석출 만신의 생애와 예술성
‘만신’은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김석출 만신의 가계도를 보면, 할아버지인 김천득(金千得)이 무업을 시작하였고, 그의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뒤이어 김석출은 3대로 무업을 계승하였다. 김석출은 그의 부인 김유선(金有善)과 함께 중요 무형문화재 제82-가호(동해안 별신굿)다. 그런데 김석출은 재주가 많아 동해안굿뿐만 아니라, ‘호적(태평소)의 1인자’이자 ‘지화(紙花) 제조의 1인자’로 명성이 높다. 현재 김씨 집안의 무업은 김석출 만신의 9남 1녀 중 변난호(邊蘭湖)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인 김영희, 김동연, 김동언과 김용택(김호출의 자), 김정희(김재출의 자)가 부산 일대에서 이어가고 있다. 또한 동해안 별신굿을 잇기 위해 양자와 양녀로 들인 이수자, 전수생도 있어 김석출 만신의 사망 후에도 동해안 무속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무녀 이옥분에 한눈에 반한 석출의 조부 김천득, 아내에게 무업 배우며 김씨 일가 무계 형성
“神 가뒀다가 心에 병 들었다” 무업 관둔 후 병든 할아버지 보며 신명에 순응하는 삶 받아들여
‘전라도 태평소왕’ 방태진 선생 만나 배운 호적 가락 다듬어 ‘김석출표 시나위’ 탄생시키는 등
강한 예술가적 욕구로 동해안 남부·북부 오가며 활동, 동해안굿의 새 전기 만들었다는 평가
1982년 일본 도쿄국립극장 초청 공연 시작, 전 세계에 한국 무속음악의 예술성 알리기도
무계를 형성하게 된 계기
김석출의 할아버지 김천득은 일찍부터 한지 장사를 하였다.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는 소문난 알부자였다고 한다. 김석출의 구술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이미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조랑말에 엽전 한 전대씩을 메고 다니며 마음껏 돈을 쓰던 한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항시 흥해장에 나가 풍어제(별신굿)를 구경하다가, 굿을 하는 열 살 아래의 무녀에게 반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이 무녀가 바로 김석출의 할머니 이옥분(李玉粉)으로, 김씨 집안의 내력을 바꿔 놓은 장본인이다. 당시 김천득 집안에서는 양반 가문에 ‘무당’을 데려왔다고 매를 때려 다스리려 했다지만, 집안의 대가 끊길까 봐 자식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김씨 일가는 양반 가문임에도 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안의 허락을 받은 김천득은 아내인 이옥분에게 무업을 배워 무당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후 김천득은 선창꾼으로 화랭이의 삶을 살았다. 꽹과리·장구·징·제금 등의 악기에 능했다고 전해지며, 염불이나 거리굿을 잘했고 선창꾼으로서 재주가 뛰어났다고도 한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천득은 마흔 살에 돌연 무업을 그만두었고, 바로 무과를 준비해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관직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공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까지 겪으면서 결국 병이 들었다.
김석출을 인터뷰했던 국문학자 유영대 교수가 2006년에 쓴 글을 보면, 이런 할아버지에 대한 김석출과 가족들의 심경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출은 할아버지가 “장구체 놓고 신을 가뒀다가 심(心)에 병이 들었다”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신명(神明)이 가득한 사람이 그 신(神)을 풀어내지 못하자 결국 그 신이 몸에 병으로 나타난 것임을 무속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김천득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가족들은 그 후 누구도 무속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신명에 순응하는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천득과 이옥분 사이에 김범수, 김성수, 김영수 삼형제가 태어났는데, 김석출은 둘째 김성수의 아들이다. 김천득의 세 아들은 모두 예능적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김석출의 큰아버지인 김범수의 재주가 가장 뛰어나 화랭이로서 뿐만 아니라 농악과 창극 분야에서도 활동했다고 하니 예술가의 피가 면면히 흐르는 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범수는 포항 바깥으로 나가 활동하면서 얻은 음악적 기량을 동해안 무속음악에 접목해 발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석출의 아버지인 김성수 역시 고향에만 머무르지 않고,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드넓은 동해안굿 권역에서 활동하였다.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폭넓은 활동은 김석출에게도 영향을 주게 된다. 김석출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외지에서 굿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히 식견이 넓어지고 무업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다. 큰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은 조카인 김석출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또한 김석출의 아버지 대에 이렇게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인데, 김석출 가계의 무업이 이미 이 시기에 동해안 남과 북에 걸쳐 활동 범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김석출 주변의 예술인
김석출은 김성수와 이선옥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3남 모두 뛰어난 무속 재능을 갖고 활동하였고, 그 자녀들 역시 현재 동해안 무속을 이끄는 위치에 있다. 민속학자 윤동환이 김석출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김석출은 열세 살 위 형인 김호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큰형을 따라 일곱 살부터 굿판에 출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무업을 익혔고, 형님에게 본격적으로 무업을 배운 후 열두 살 무렵부터는 어른들과 비견될 만큼의 예능을 갖추었다. 열다섯 살에서 열여덟 살(1936~1939년) 무렵부터 부산에서 활동했는데, 굿을 하러 가면 인물이 좋아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는 얘기도 있다. 김석출의 재주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로, 광인굿을 연행하는 재주를 들 수 있다. 동해안의 화랭이는 광인굿에서 작두를 타는데, 김석출이 처음으로 작두에 오른 것은 열여섯 살 때로 재주가 비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석출이 열예닐곱 살 무렵에는 강원도 삼척에 거주하던 작은아버지가 맡은 굿에 불려가기도 했다.
김석출이 무악 인생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은 24세에 부산에서 전라도의 태평소왕이라 불리던 방태진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다. 방태진은 유랑 공연단체의 단원으로 의상 감독 겸 반주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석출은 방태진의 호적 소리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호적을 가르쳐주기를 청하였다. 방태진이 한 가락씩 일러주면 김석출이 그 소리를 따라서 내는 방식으로 배웠는데, 같은 가락을 세 번 이상 일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을 얻어듣기 위해 언제나 귀를 바짝 기울여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배운 호적 가락이 당시에는 겁 많고 수줍은 청년의 소리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농익은 김석출표 시나위 가락으로 탄생하게 되었음을 유영대와의 인터뷰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석출이 ‘호적의 1인자’라는 신화는 이러한 인연으로 시작된 것이다.
김석출 만신은 포항에서 태어나 자라 굿을 익혔지만, 성장 후에는 경상남도로 이주해 이 지역의 굿을 익혔다. 또한 그 활동 반경이 동해안의 북쪽과 남쪽을 아울렀기에 동해안 지역의 다양한 굿을 습득할 수 있었다. 김석출의 이러한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동해안 남부와 북부 지역의 굿을 상호 전파하고 교섭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김석출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한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화랭이로서 기량을 다지면서, 동시에 특별한 무엇인가를 위해 찾아 나서는 김석출 자신의 예술가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열정이 김석출의 예술 세계를 형성하고 만개하게 했으며, 동해안굿이 새로운 전기를 만나게 된 계기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해외 활동과 음반 활동
김석출 만신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해외에서도 활동하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동해안굿뿐만 아니라 전통연희나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정통 명인이기도 했기에 활동이 국내에 한정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82년 일본 도쿄국립극장 초청 공연을 비롯해 1994년 교토·오사카 공연, 1995년과 1996년에 요코하마 페스티벌 참가, 1996년 유라시안 에코스 호암아트홀 공연, 1997년 영국 런던 로열홀 공연을 통해 동해안 무속음악과 김석출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이러한 공연을 계기로 한국의 무속음악을 접한 해외 음악인들이 무속음악을 배우겠다고 한국으로 와 동해안 굿판에서 활동한 사실은 무속음악의 예술성과 예술인으로서 김석출의 실력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다.
해외 활동과 함께 굿 음악 음반을 통해 김석출의 음악이 대중과 만나는 기회도 이루어졌다. 그가 참여한 음반으로는 ‘높새바람’(삼성나이세스, 1993), ‘동해안 별신굿’(서울음반, 1993), ‘무악(巫樂) 동해무속사물’(삼성뮤직, 1994), ‘동해오구굿’(삼성뮤직, 1995), 94 일요 명인명창전 동해무속음악(실황)’(서울음반, 1996), ‘김석출 결정판’(삼성뮤직, 1997), ‘동해안 별신굿과 오귀굿’(국립국악원, 1999) 등이 있다. 남겨진 음반을 통해 김석출이 떠난 후에도 그의 예술 세계가 영원할 수 있게 되었다.
글 / 염원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