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제주·경북의 해녀 분쟁 이후 경북 해녀 증가

등록일 2021-06-30 20:23 게재일 2021-07-01 13면
스크랩버튼
해녀③<br/>- 경북도의 입어권 반대 운동과 해녀 어업
태왁을 잡고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들.
태왁을 잡고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들.

1954년부터 표면화된 제주도 해녀와 경북어업조합 간의 생업 관할권 갈등은 법적 투쟁으로 치닫고 1968년 대구지법의 판결로 막을 내린다. 이 판결로 우리나라 해녀의 역사, 특히 제주와 경북의 해녀 역사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수산업법 법률 제295호가 1953년 9월 9일 공포되었다. 수산업법을 제정할 당시 제주도는 해녀 어장에 대한 제반 규정을 정비하고자 해녀 어장을 상공부장관의 허가제로 하고 경남 2천500명, 경북 2천 명, 전남 1천 명, 전북 300명, 충남 200명, 강원도 500명, 제주 2만 8천명 등 총 3만 5천 명의 ‘입어권(入漁權)’ 설정을 제안하였다. 입어권이란 공동어장 내에서 수산 동·식물을 채취할 수 있는 권리로 해녀 어장의 관습법상의 어장 이용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법률 용어다. 당시 정부는 해조류 증산 정책에 따라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해녀 어업 정책을 답습해 해녀 어장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입어권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혹시 모를 분쟁에 대비해 수산청장의 재정(裁定)을 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하였다.

 

경북도내 어업조합, 관내 해녀 수 증가·환경유지 투자 이유로 제주 해녀 어장 이용 막아

1967년 ‘입어관행권 소멸 확인 소송’ 재정 청구로 70년간 유지되어온 ‘입어관행’ 사라져

제주도는 이에 항의 ‘해녀 안 보내기 운동’ 전개… 이후 지역 정체성 가진 해녀들 성장해

‘고무옷’ 획기적 잠수복 등장… 추위 막고 수치심 덜어 작업시간 30분에서 3~5시간 늘어

독도의용수비대에 고용돼 이주한 해녀, 풍랑 속 식량 보급 나서는 등 독도역사에도 발자국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마중온 배에 오르고 있다.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마중온 배에 오르고 있다.

경북도에서 제주도 해녀의 어장 진입 막아

수산업법 제40조 입어관행 조항에서는 해녀가 입어료를 납부하면 어장 이용이 가능했지만, 경북도내 어업조합은 지역의 관습이라며 해녀의 어장 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제주도는 1954년 경북도내 어업조합의 어장 공매(公賣)를 규탄하는 진정서를 상공부장관에게 보냈다. 제주도와 경북어업조합 관련자들은 수십 차례 회의를 하였고 제주 지역구 국회의원 3명은 경북 도지사를 만나 입어권 인정을 요구하였다.

제주도어업조합은 1954년 4월 30일과 1955년 1월 31일 ‘제주도 출가잠수 일동 대표자 김종대’ 이름으로 수산청장에게 입어 어장에 대한 재정(裁定) 청구를 신청하였다. 1956년 1월 13일 상공부장관 김일환은 수산업법 제69조에 따라 양남어업조합 70명, 감포어업조합 121명, 양포어업조합 279명, 구룡포어업조합 434명, 대보어업조합 166명 총 1천75명에게 매년 5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제주 해녀에게 천초(우뭇가사리), 은행, 앵초, 패류어업을 허가해 줄 것을 명령하였다.

수산업법 10조에 따라 마을어장의 매매는 엄연히 금지되어 있지만 경북도내 어업조합은 어장을 공매하고 제주 해녀의 어장 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북도 어업조합 실무자들은 관내에 해녀 수가 상당히 불어났기 때문에 제주 해녀가 필요 없고, 패류의 양식과 미역바위 잡초 제거에 막대한 노력과 예산을 투자하면 제주 해녀가 채취해가서 두통거리라고 호소하였다. 경북도내 어업조합은 제주 해녀의 어장 이용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어장 이용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1967년 경북 감포·양포·구룡포·대보 어업조합은 ‘입어관행권 소멸 확인 소송’인 재정 청구를 대구지법에 청구하였다. 이 소송의 골자는 제주 해녀의 입어권을 부정하는 소송으로 입어관행은 소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1968년 8월 20일 대구지법 제6민사부는 수산업법 제40조 “관행에 따라 취득하는 입어권이라 함은 반드시 단체로 가지는 경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으로서도 입어관행이 있으면 그 개인이 가지는 권리도 말하는 것이므로 입어관행권 소멸 확인 소송은 성립된다”고 판결하였다. 즉 입어의 관행은 장기간 중단하거나 입어권자가 사망하면 소멸하고 상속이나 양도되는 것이 아니므로 말소 절차를 이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경북도 어업조합은 제정 신청을 통해 입어관행을 폐지하였고 이로써 70년간 유지되어온 제주 해녀의 입어관행이 사라졌다.

1968년 구룡포 장기리·계원리 해녀. /출처 : ‘구룡포 수협사’, 2016
1968년 구룡포 장기리·계원리 해녀. /출처 : ‘구룡포 수협사’, 2016

제주도의 ‘해녀 안 보내기 운동’ 그리고 ‘고무옷’의 도입

입어관행에 따라 공동 어장을 이용했던 해녀들의 권리가 부정됨에 따라 제주도에서는 ‘해녀 안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1969년 제주도 해녀 1만 9천805명 중 도외로 출향한 해녀는 1천160여 명으로 전체 해녀의 6%에 불과하였다. 제주도 해녀의 50%를 상회하던 도외 출향은 경북 재정지구 청구 패소 이후 1972년 917명, 1973년 867명, 1974년 683명, 1975년 509명으로 감소하였다. (‘출가 해녀 3년새 반감’, 제주신문 1976. 1. 6)

1968년 경북 어장으로 출향한 제주 해녀는 654명이었으나 1970년 85명, 1973년 199명, 1976년 92명으로 감소하였다. 1975년 7월 영남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경북도내 해녀는 1천937명인데 이중 제주도 출신은 381명, 지역 출신은 1천556명이다. (‘해녀 대부분 생활난-93%가 연간 30만 원 미만’, 영남일보 1975. 7. 10). 이 제주 해녀들은 지역 남자와 결혼했거나 이주한 해녀를 말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북 어장에는 지역의 정체성을 가진 해녀들이 성장하였다. 바다 작업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다 일을 천시하였고 여성의 바다일은 부끄러운 직업으로 여겼던 경북 여성들은 해녀가 되고자 물질을 배웠다. 처음에는 바닷가에서 고동도 줍고, 도박<홍조류 지누아릿과에 속한 해조(海藻)>도 뜯다가 점차 물질 실력이 향상되었는데, ‘고무옷’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해녀가 되었다.

포항 장기면 신창1리 김해녀는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농사를 거들면서 점심을 먹고 난 후 1~2시간씩 목욕하러 바다에 가서 물질을 배웠다. 전복이나 고동, 해조류 등을 따오면 부모님은 신기하고 기특하게 여기셨다. 딸이 바다에 갔다 오면 부식량이 늘어났기에 크게 반대를 하지 않았다. 김해녀는 결혼한 후 해녀가 되었다. 직업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해녀 직업을 선택하였고 고무옷을 외상으로 구입해 물질을 시작하였다. 김해녀가 해녀가 된 1975년쯤 경북의 모든 해녀가 고무옷을 입었다.

해녀의 잠수복인 고무옷은 해녀 어업의 기술적 변혁이다. 작업 시 추위를 막아주어 기존 30분 이내의 작업이 3~5시간으로 증가하였고 무엇보다 해녀에 대한 여성으로서 수치심이 사라졌다. 13살부터 해녀가 된 영덕읍 창포리 김해녀는 고무옷의 고마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도 어업인 기념사진(1964. 7. 19.). /송경숙 제공
독도 어업인 기념사진(1964. 7. 19.). /송경숙 제공

“우리는 고무옷을 입고 하니깐 괜찮지. 옷을 벗고 일하면 그렇지만은 옷을 다 입고 하면은 얼굴만 보이니깐 객지 사람들이 쳐다봐도 아무 불편 없지. 객지 사람들이 ‘저 사람들 해녀다. 저렇게 우째 하는교?’하면 좀 민망은 하지. 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가 돈을 벌지만 저런 직업을 가지고 사냐? 이래 생각할 수도 있지?”

 

독도로 간 해녀

해녀의 독도 진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 후반 제주 해녀는 독도 어장으로 이동하였다. 독도에는 물이 없고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주지도 없었으나 넓은 미역어장이 있었다. 해녀들은 서도 물골 자갈밭에 가마니 몇 장을 깔고 자거나 나무로 2층 단을 만들어 비바람을 피해 살았다.

1954년 조봉옥 해녀는 울릉도에 사는 시삼촌이 독도에서 물질을 하면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종용하자 세 살짜리 딸과 시아버지, 시누이, 동네 친구 2명과 함께 울릉도에서 전주(錢主)의 오징어 배를 타고 독도로 갔다. 같은 시기에 독도로 간 박옥랑, 김순하, 박애자 해녀는 오징어 장사를 하는 포항 친구의 권유로 울릉도를 경유하여 독도로 갔다. 해녀 개인별로 어장을 찾아 독도로 간 것이다.

1959년 19살에 독도에 간 김공자 해녀는 제주 해녀 36명과 남자 10명 등 45명이 함께 독도에서 미역 채취업을 했다. 당시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 어업권을 확보하면서 해녀를 집단 모집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처음 서도에 거주하였으나 동도로 이전하였고 해녀들은 서도 물골에 생활하였다. 미역어장이 넓게 분포되어 있지만 물이 없다면 살 수 없었기에 물이 나오는 물골을 신성시하였고 물골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해녀들은 독도의용수비대를 도와 독도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1954년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 독도에 막사를 지으려고 통나무를 싣고 왔는데 물가까지 옮길 수 없었다. 해녀들은 바다에 떨어뜨린 통나무를 물가까지 밀어주고 막사를 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식수가 떨어져 곤경에 처했을 때 해녀들은 서도 물골에서 물을 실어 동도에 살던 대원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파도로 울릉도 보급선이 독도에 접안할 수 없어 경비대원들이 아사 직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해녀들은 풍랑 속에 뛰어들어 부식물을 전달했다.

 

“이불을 뜯어 밧줄을 만들고 그 밧줄로 몸을 묶은 후 거센 풍랑 속으로 뛰어들었지요. 우리가 배에서 부식을 받아 헤엄쳐 오면 독도경비대원들은 이불 끈 밧줄을 끌어당기면서 우리를 도왔어요. 힘센 장정들이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바닷가에까지 다 나왔는데도 계속 끌어당기는 바람에 바위의 굴 껍질에 긁혀 상처가 많이 나서 고생했어요.” (김순이 해녀)

 

해녀들은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풍랑 속에 뛰어들어 독도의용수비대의 식량을 보급하는 등 독도 역사에 굵은 발자국을 남겼다.

 

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

사진 : 김수정(사진작가)

포항의 해양문화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