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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을 수 없어 더욱 애달픈 사랑의 맛

등록일 2021-05-19 20:19 게재일 2021-05-2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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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해양문화<br/>바다 음식 - ②고래고기, 개복치 요리

포항 죽도시장 고래고깃집에 앉아 낮술을 마신다. 2021년 5월 13일, 이 고래고기 노포에서는 고래고기를 부위별로 담아 모듬 수육으로 포장 판매하고 있다. 한 접시에 3만 원, 5만 원, 7만 원 등 세 종류다. 3만 원짜리 한 접시면 두 사람이 술 몇 병 마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싸 부담스럽지 않다. 고래고기 접시에는 뱃살, 갈빗살, 꼬리살, 옆구리 살, 간, 허파까지 고루고루 담겨 있다. 소고기처럼 부위마다 맛이 다 다르다. 그래도 역시 가장 맛있는 부위는 뱃살이다. 고래고기 한 접시에 거나해지고 말았다. 여행자에게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일제, 한반도 포경업 독점 1944년까지 8천259마리 포획 대형고래 씨말려

현재는 혼획만 허용… 포항 노포 가면 접시당 3·5·7만원 대에 열두 가지 맛

버릴 것 하나도 없어 기름 만들거나 화장품 재료로, 수염은 여성 코르셋에개복치는 돔배기와 같이 큰 일 치를 때… 탱글한 식감에 지느러미 더 별미

고래고기
고래고기

러일전쟁 이후 구룡포 등지에서 고래고기 먹는 문화 확산

이 땅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가 있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잡이배와 포경 도구들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7000년 전 신석기인들 중에 고래잡이를 전문으로 하는 해양 수렵 집단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암각화에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와 범고래, 참돌고래 등이 등장한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작살을 쏴서 이런 대형 고래를 사냥했다는 증거다. ‘삼국사기’에도 고래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동해인(東海人) 고주리(高朱利)가 고래 눈을 왕에게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고구려 민중왕 4년, 서기 47년>

2020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의 재발굴 결과 경주 서봉총에서 신라 왕족의 제사 음식이 다량 확인됐다. 어류에는 청어, 방어 같은 흔한 생선은 물론이고 성게알, 복어와 돌고래의 유체까지 나왔다. 신라시대에도 고래고기를 먹었다는 증거다. 고려,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고래에 대한 기록이 간간이 남아 있지만 선사시대처럼 포경업을 전문으로 하는 어로 집단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죽은 고래가 밀려오면 수습해서 사용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손암 정약전도 ‘자산어보’에서 죽어서 떠내려온 고래를 “삶아서 기름을 내고, 눈은 술잔을 만들고, 수염으로는 자를 만들고, 그 척추를 자르면 절구를 만들 수 있다”고 기록했다.

근대 유럽, 미국 등은 기름을 얻기 위해, 또 일본은 식용 고래잡이를 했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 조상들은 상업적 포경을 하지 않았다. 서양에서 고래잡이 산업이 급성장한 것은 급격한 산업화로 기름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850년대 북극 큰고래 한 마리에서 뽑아낸 고래기름은 275배럴이었다. 참고래 한 마리에서도 평균 130배럴의 기름을 얻을 수 있었다. 한반도 부근에서 포경이 합법화된 것은 1899년 고종이 러시아 포경업자에게 동해안의 포경을 허가해 준 때부터였다.

“러시아인 헨리 게제린그에게 경상도 울산포, 강원도 장진포, 함경도 진포도를 고래잡이 근거지로 허락해 주었다.” <‘고종 실록’ 1889년 3월 29일자>

물론 이전에도 동해에서 외국 포경선들의 고래잡이가 있었다. 1849년 한 해 동안 최소 130척의 미국 포경선이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했다. 조선 정부는 1900년 2월 ‘일본원양어업회사’에도 포경 허가를 내주었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은 한반도 근해의 포경업을 독점했다. 이 무렵부터 장생포, 구룡포, 서귀포, 흑산도, 어청도, 대청도 등 포경업 전진기지를 중심으로 고래고기를 먹는 문화도 확산됐다. 1903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선이 잡은 대형 고래만 8천259마리다. 공식 기록된 것이 그러하니 실상은 그보다 더 많은 대형 고래가 포획됐을 것이다. 일제 포경선에 의해 한반도 해역의 대형 고래는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항수협 위판장에서 그물에 걸려 죽은 밍크고래의 해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위>  경북매일신문DB고래고기 한상 차림.
포항수협 위판장에서 그물에 걸려 죽은 밍크고래의 해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위> 경북매일신문DB고래고기 한상 차림.

열두 가지 맛이 난다는 고래고기

1921년 4월 27일자 ‘매일신보’는 “조선의 경업(고래잡이)은 11월부터 익년 4월 말일까지 반년간에 했어도 항상 200두의 산획(産獲)을 유지한바, 산지는 주로 대흑산도, 대청도, 울산 전진이다”라고 전한다. 포획된 고래는 “모두 곧 배 안에서 처리되어 고기, 기름, 냉동 간장(冷凍肝臟), 증골(蒸骨) 등 광범위로 남김없이 이용”된다고 보도하고 있다. 포경선이 잡은 고래들은 위 기사처럼 배 안에서 처리되기도 했지만, 각지의 포경 근거지로 옮겨져 공장에서 가공 처리돼 대부분 일본으로 보내졌고 일부는 지역에서 유통됐다.

해방 후에도 한국의 바다에서는 한동안 고래잡이가 이어졌다. 하지만 무분별한 고래 남획으로 세계적으로 고래의 개체수가 줄어들자 1946년 국제포경위원회가 만들어져 규제에 나섰다. 국제포경위원회는 본래 전면적인 포경 금지가 아니라 적절하게 고래 수를 관리해 고래잡이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지만 고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1986년부터 상업적 포경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포항 지역의 고래잡이는 구룡포 강두수의 해승호가 1951년 12월 20일 제 1호 허가를 얻으며 시작됐다. 이때부터 구룡포항은 정부 시책에 따라 고래잡이 항으로 육성되었고 1977∼1978년에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다. 하지만 1980년을 고비로 고래 어획이 급감했다. 한국에서는 혼획된 고래들만 식탁에 오를 수 있다.

2019년 기준 한국 연안에서 혼획된 고래는 1천960마리였다. 상괭이 1천430마리, 돌고래 374마리, 낫돌고래 71마리, 밍크고래 63마리였다. 혼획은 그물에 우연히 걸려들거나 죽은 사체가 떠밀려 와 잡힌 경우를 말한다. 고의로 잡은 흔적이 없으면 혼획한 자가 고래를 유통 판매할 수 있도록 해경에서 허가해 준다. 포경 금지에도 고래고기 문화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 다만 상괭이 등 보호 대상 10종의 사체는 유통이 금지된다. 보호종이 아닌 밍크고래 등은 경매를 통해 유통된다. 하지만 혼획이 지나치게 많아 혼획된 고래라도 유통은 일정한 수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고래고기는 열두 가지 맛이 있다고 한다. 같은 포유류인 소고기와 맛이 비슷하다. 부위에 따라 날것으로도 먹거나 익혀서 먹는다. 회, 수육, 육회, 초밥, 튀김, 찌개, 두루치기, 전골 등 조리법도 다양하다. 고래기름은 연료뿐만 아니라 화장품, 비누의 원료로 사용됐다. 고래수염은 유럽 여성의 속옷인 코르셋을 만들기도 했다. 향유고래 배설물인 용연향은 최고의 향수 재료다. 고래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살코기뿐만 아니라 껍질, 갈비, 혓바닥, 창자, 콩팥, 염통, 눈, 허파 등 고래의 내장과 부산물도 삶아서 수육으로 먹는다. 일본 문화의 영향 탓에 아직도 고래고기 부위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고래 꼬리 1.5∼2m 사이의 붉은 살코기를 두툼하게 썰어 회로 먹는 것은 막찍기라 한다. 고래 꼬리를 소금에 절였다가 뜨거운 물에 데쳐서 썰어 먹는 것은 오배기다. 최고급 부위인 뱃살은 삼겹살처럼 보이는데 회로 먹기도 하고 삶아 먹기도 한다. 이것은 우네다. 꼬리살 바로 윗부분은 마블링이 좋아 최상급으로 여겨진다. 오노미다.

한국, 일본뿐만 아니라 고래고기는 북극의 에스키모와 노르웨이에서도 즐겨 먹었다. 고래는 소고기 요리와 거의 흡사한 조리법으로 요리해 먹었다. 고래가 흔하던 시절에는 무를 썰어 넣고 고래 국을 끓였다. 그대로 소고기 뭇국 맛이었다. 고래 불고기, 전골, 두루치기 등도 소고기 대용의 요리였다. 소고기보다 고래고기가 흔하던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고가의 최고급 요리가 됐다. 가격은 비싸도 고래고기는 중독되면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잡을 수 없어 더 애달프게 만드는 맛, 고래는 애달픈 사랑의 맛이다.

 

개복치
개복치

포항에서 큰일 치를 때 내놓는 개복치

개복치는 몸길이 2∼4m, 몸무게가 최대 2t까지 나가는 거대한 물고기다. 개복치는 가장 많은 알을 낳는 물고기이기도 하다. 한 번 산란에 무려 3억 개가량의 알을 낳는다. 성체가 된 개복치는 범고래, 백상아리 등을 제외하면 천적이 없다. 하지만 3억 개 알 중 성체가 되는 개체는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개복치가 얼마나 귀한 물고기인지 알 수 있는 척도다. 개복치의 학명은 ‘Mola mola’, 라틴어로 맷돌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안진복, 골복짱, 깨복짱이라고도 하는데 복어목의 한 종이다. 개복치도 상어처럼 지느러미가 더 별미다. 중국에서는 등쪽의 흰 창자를 용창이라 해서 귀하게 여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수십 마리씩 잡혀 죽도시장으로 들어왔던 대형 개복치가 요즘은 하루 한두 마리 보기도 어렵다. 수온 변화 등이 원인으로 짐작된다. 개복치는 흔한 생선이 아니라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도 어렵고 맛을 본 사람도 드물다. 하지만 포항에서는 옛날부터 개복치 요리를 즐겨 먹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이 여전히 이어져 죽도시장에는 개복치를 취급하는 상점이 여럿이다. 대부분은 삶아서 직접 먹을 수 있게 유통된다. 개복치 살은 그대로 콜라겐 덩어리다. 개복치 살은 잘라도 붉은 피가 흐르지 않고 우유 빛깔이다. 네모나게 잘라놓으면 영락없이 묵이나 두부처럼 보인다. 개복치는 몸집이 워낙 커서 고래를 해체하듯 긴 칼을 들고 자른다. 먼저 지느러미부터 잘라내고 뱃살, 옆구리 살, 몸통, 머리 순서로 차례차례 잘라 나간다. 살은 부드러워 슬슬 쉽게 잘라진다. 잘라낸 개복치 살은 껍질을 벗기고 이물질을 제거해서 깨끗이 손질한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개복치 살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어서 삶는다. 삶은 개복치 살은 다른 조리 없이 작게 잘라서 양념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으면 된다. 맛은 야들야들 탱글탱글 곤약보다 쫄깃하다. 살 자체로는 무향 무맛이니 양념 맛이다. 무맛이란 맛이 없다는 게 아니라 순수한 맛이란 뜻이다. 껍질은 삶아서 우뭇가사리처럼 만들어 먹거나 수육으로 먹는다. 뱃살은 회 무침으로, 머리뼈와 머릿살은 찜으로 요리해 먹기도 한다. 근육은 갈아서 어묵 재료로 쓰기도 한다. 포항 사람들은 상어 살인 돔배기처럼 개복치도 큰일 치를 때 사용했다. 내륙 사람들이 애경사 등 대사를 치를 때 큰 몸집의 소나 돼지를 잡았던 것처럼 바닷가에서는 상어나 개복치 같은 대형 생선을 사용했다. 진짜 부잣집에서는 고래를 썼다. 포항에서는 큰일에 큰 물건을 쓰던 전통이 개복치를 먹는 풍습으로 남은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개복치를 먹을 수 있을까. 무조건 안 먹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사라져가는 대물들의 맛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바다 생태계 살리기에 더 적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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