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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 돕고 싶어 시작”

▲ 지난 9일 폐지를 모아 후원금 100만원을 포항시니어클럽에 전달한 채옥순 할머니. 그는 “어찌 알고 며칠 전에 머리도 까맣게 염색했는데. 늙은이 예쁘게 좀 찍어줘”라며 환하게 웃었다.“아아~참아야 한다기에~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지난 15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 채옥순(83·남구 해도동) 할머니는 가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부르며 흐르는 눈물을 휴지로 닦았다. 그는 “아유~ 요즘 눈물, 콧물이 내 맘대로 조절이 안 돼. 요 휴지를 손에 달고 산다니까”라며 “옛날엔 노래도 참 간드러지게 잘 불렀는데. 이제는 목이 많이 녹슬었제…”라며 너스레웃음을 보였다.3평 남짓 방안은 `냉골`발에 맞는 신발 없어도폐지 모아 판 돈으로3년간 수백만원 지원`나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을 돕자`는 일념 하나로 폐지를 모아 온 채옥순 할머니가 올해도 이웃을 위한 온정을 더했다.2013년 포항시장학회 후원금 전달을 시작으로 지난해엔 홀몸노인 200명에게 가래떡 200㎏을 전달했다. 지난 9일 한 해 동안 폐지 모은 돈 100만원을 포항시니어클럽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어느새 `나눔 천사`활동 3년째다.황정애(53·남구 해도동) 독거노인생활관리사는 “할머니 발에 맞는 신발 한 켤레조차 없고 속옷 한 벌도 제 돈으로 안 사시는 분이다.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마스크 하나도 구입하지 않으시는 분이 매년 어려운 사람들 도우시는 것 보면 마음이 짠하다”며 “방이 냉골인데 보일러도 켜지 않아 내가 신혼 때 장만해 온 이불을 갖다 드렸다”고 말했다.실제로 3평 남짓한 할머니의 방 안은 바깥 공기와 다르지 않았고 발바닥으로 냉기마저 온전히 전해졌다. 마주잡은 할머니의 두 손 끝엔 차가움이 맺혀 있었다. 바닥엔 얇은 담요부터 두꺼운 이불까지 겹겹이 쌓여 있고 할머니가 앉아 있던 자리 주변으로만 온기가 남아 있었다.그는 “주위로부터 매번 도움만 받아 항상 미안한 마음이 컸제. 요 따뜻한 분홍색 조끼도 박승호 전(前) 시장님이 주신 것인데 덕분에 올겨울도 따뜻하게 날 수 있었지. 시장님이랑 찍은 사진이 여기 어디 있을텐데…”라며 불편한 허리를 이끌고 장롱을 뒤졌다.허리가 구부러져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는 매일 유모차를 이끌고 집 밖을 나선다. 무료급식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 뒤 동네를 돌며 폐지를 모으고 헌 신발이나 헌 옷, 버려진 장난감 등을 줍는다.만화캐릭터가 그려진 손바닥 크기의 작은 가방을 들고 나타난 할머니는 `보물상자`라고 소개하며 조심스레 입구를 열어 보였다. 가장자리에 손때가 묻어 그림이 닳은 화투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새벽에 일찍 잠에서 깼을 때, 요 녀석만큼 무료함을 달래주는 것도 없지. 얼마나 갖고 놀았는지 요즘엔 손끝이 따끔따끔 하다니까”라며 웃었다./김혜영기자

2015-01-20

“바라는 것 없이 주는 기쁨은 느껴본 사람만 알 수 있답니다”

▲ 중앙상가 카페 사랑싸개 박원호 대표. 청년 시절 방황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내 청소년들을 위한 멘토를 자처해 활동 중이다.“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늘 고민합니다. 나를 통해 누군가 닮고 싶다라는 희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 자신이 가장 `촌스러워져야` 합니다”모자를 눌러쓴 박원호 중앙상가 카페 `사랑싸개` 대표는 큰 눈만큼이나 손짓도 크고 웃음소리도 화통했다. 20대 점원들을 `친구`로 소개하며 서로 부등켜 안던 그는 “같은 비전을 갖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사랑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자주 꾸짖고 큰 소리도 내지요. 그래야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화해카페 운영하며청소년 멘토로 활동따뜻한 사람되고파-하는 일이 많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불러야 하나.△정확하게는 `원장님`이라고 불러 주길 원한다. 주로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커피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카페라는 공간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왜 커피인가.△커피는 소통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밥 한 끼 먹자는 말보다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이 더 따뜻하고 가까운 느낌을 전한다. 커피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교감할 수 있다. 커피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화해카페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의미가 있나.△사과하고 화해하는 것은 마음 속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다. 주위에서도 왜 사람들의 아픔을 건드리려고 하느냐며 말렸다. 화해는 관계를 회복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 자존심을 너무 세우려고만 한다. 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다. 욕심을 버리고 한 발자국만 다가가면 별 것 아닌 일인 것을.-학생들 사이에서도 `친구`로 유명하다.△청년 시절 서울에 잠시 머물면서 멘토의 중요성을 느꼈다. 화려한 스펙이 없던 나를 누구 하나 관심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나 남의 탓을 하면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미래가 없다는 깨달음이 얻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을 위한 멘토가 되고자 마음을 먹고 포항으로 내려왔다. 카페에도 유난히 학생들이 많이 찾아온다. 주로 방황하는 청소년들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제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카페에서 떳떳하게 행동하길 원한다. 뒤에서 숨기고 더 나쁜 행동을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청소년들에게 특별히 애정을 쏟는 이유는.△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은 어른들을 점점 믿지 않는다. 세월호 침몰 이후 더 심해졌다. 어른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도 경험한 것처럼 아이들을 타이르고 꾸짖는다. 진심이 담긴 잔소리인지 아이들은 대번 느낀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고자 나부터 앞장서서 행동한다. 아이들의 삶을 내 인생처럼 소중하게 여긴다.-멘토로서의 사명감은.△나에게 이야기를 꺼낸 그 순간이 상대방에겐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만큼 책임감을 느낀다. 청소년부터 부모들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희망을 전하는 기쁨이 있다. 바라는 것 없이 주는 기쁨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다.-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비전은 무엇인가.△포항 시내 상권이 점점 침체돼가고 있다. 중앙상가 내 상점들이 하나 둘씩 영업을 접고 떠나고 있다. 다들 떠나가는 시점에 나는 이곳에 발을 들여 새로운 시작을 했다. 포항이라는 도시에 사랑싸개라는 카페가 가슴 따뜻한 선물이 되길 바란다. 이곳에서 사랑이 피어나고 희망이 펼쳐지고 온기가 나눠지길 꿈꾼다./김혜영기자 hykim@kbmaeil.com

2014-12-05

“시민 손발되는 공직자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 포항시 새내기 공무원 김현지씨가 자신의 포부와 각오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취업난이 심각한 요즘 23대 1의 경쟁률을 뚫은 포항시 신규 공무원 29명이 지난 5일 임용식을 갖고 공직자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6일 오전 포항시 공무원으로 첫 근무를 시작한 포항 토박이 김현지(29)씨를 만나 향후 포부와 각오를 들어봤다. -공무원 임용시험 합격 소식을 접한 후 어땠나?△개인적으로 2년 동안 임용시험을 준비 했었다. 취업난이 심각한 가운데 포항시 공무원으로 합격하게 돼 개인적으로 상당한 성취감을 느꼈다. 그리고 합격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일반 시민의 입장이었지만 합격 소식과 함께 공무원으로서 책임성과 대표성을 띠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도 무거웠다.-포항 토박이 출신으로 당당히 임용됐는데.△대학생활을 제외하고는 포항에서 지냈다. 포항에 다시 올 수 있게 돼 개인적으로 너무 기쁘다. 사실 공무원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포항이라는 도시가 좋았기 때문이고 임용시험 준비 동안 상당한 동기 부여를 했었다.-임용식과 직후 일선에 배치됐는데.△지난 5일 임용식을 가진 데 이어, 곧바로 현장에 배치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선배 공무원들이 `부딪쳐 보면 모든 일을 처리 할 수 있다`는 조언을 해줘 자신감을 얻었다. 든든한 선배들이 있어 무슨 일이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웃음)-포항시장을 직접 만나 본 소감은.△지난 지방선거에서 이강덕 시장을 유세현장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인상이 매우 강직해 보였는데 임용식에서 막상 만나보니 인상이 매우 부드러웠다.-지역발전을 위한 제언 한마디.△개인적으로 여행을 자주 다닌다. 외국과 비교할 때 포항은 관광 산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동해안이라는 수려한 자연환경과 내연산, 형산강 등 자연환경을 이용한 농촌문화 체험시설과 슬로우시티 등을 활성화 한다면 관광도시로써 손색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새내기 공무원으로서 포부를 밝힌다면.△지금까지 포항 시민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포항시민의 수족이 되는 공직자의 삶을 살고 싶다. 포항시 공무원의 한 구성원으로서 시민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직사회를 만드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특히 시민과 함께 걸어가는 공직자가 돼 포항 발전을 앞당기는데 기여하고 싶다./김기태기자

2014-11-07

“독도 명분 돈벌이 이젠 안돼 수호 위해 무엇할 지 생각을”

▲ 김현길 포항 호미곶등대지기가 독도 홍보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우리 땅 독도의 소중함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서 저의 작은 재능을 기부하고 싶습니다”경북 동해안의 등대를 지키며 스스로 습득한 능력으로 독도지킴이 활동을 펼치고 있는 등대지기가 있어 흐뭇한 미담이 되고 있다. 포항 호미곶등대지기 김현길(47)씨의 이야기다.김씨는 지난 1999년부터 포항지방해양항만청 해사안전시설과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경북 동해안지역 등대를 지키고 있다. 올해로 만 15년째다.기술직 공무원인 그는 1~2년마다 근무지를 바꿔야 하는 직업특성상 포항, 경주, 울진, 울릉에 위치한 6곳의 유인등대를 오가며 어민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그는 그동안 거쳐온 여러등대 중 우리나라 최동단 독도를 수호하는 독도등대를 가장 기억에 남는 근무지로 꼽았다. 초임지였던 경주 송대말등대에서 2년 간의 근무를 마친 그는 지난 2001년부터 2년여간 독도등대에서 근무하게 됐다.그는 “처음 독도에 갔을 때는 물이 부족(해수담수화설비를 이용해 바닷물을 끌어다 쓰는)해 비가 내리는 날에는 독도경비대원들과 비를 맞으며 샤워를 하기도 했죠(웃음). 온통 남자 뿐이라 부끄러울 이유가 없었거든요”라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하지만 육지에서 배를 타고 넘어와 1~2시간 머물다 떠나는 관광객들과는 달리 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외딴섬에서 보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이같은 이유로 김씨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독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는 일. 처음에는 취미삼아 한 컷, 두 컷 찍었던 것이 시간이 흘러 수십, 수백여개의 아름다운 작품이 됐다.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 걸쳐 독도에서 볼 수 있는 각종 동·식물과 수려한 자연을 렌즈에 담는 동안 그의 촬영기술도 나날이 발전했다.이같은 능력을 인정받아 독도에서 근무를 마치고 육지에 나온 뒤 포항, 진주, 양산 등지에서 독도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개인사진전을 열기도 했다.특히, 포항운하가 완공되는 시점에 맞춰 지난해 12월 26일부터 일주일 간 포항운하관에서 개최한 독도 사진전은 가장 잊지못할 가슴벅찬 일이었다고 회상했다.그는 이외에도 독도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재능기부봉사단(KTDC)에 작품을 기증하고 매년 10월 포항에서 개최되는 독도의 날 기념행사에서 전시하고 있다.김현길씨는 “우리나라에는 독도를 위해 설립된 단체는 많지만 독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며 “독도를 빌미로 돈을 벌려고 하기 보다는 우리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박동혁기자phil@kbmaeil.com

2014-10-17

“못다 이룬 꿈 축구꿈나무 통해 이뤄가겠습니다”

화려했던 프로축구 선수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축구꿈나무들을 키워내고 있는 인물이 있어 화제다.화제의 주인공은 김종경(32)씨. 그는 “어린시절 자신을 축구선수의 길로 이끌어 줬던 코치 선생님처럼 좋은 지도자가 되는게 꿈”이라며 싱긋 웃었다. 그가 축구를 처음 시작했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당시 축구명문 포항제철동초등학교 축구팀 감독이었던 코치선생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다.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여느 사내아이처럼 운동장에서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던 그는 정식으로 축구를 배워보겠느냐는 코치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처음엔 좋아서 시작한 축구였지만 점점 혹독한 훈련과 엄격한 선후배 기강 등으로 힘든 날이 늘어났고, 그럴 때마다 선생님을 떠올리며 꼭 유명한 프로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하루하루를 버텨냈다.마침내 지난 2004년 광주상무에서 정식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경남FC, 전북 현대, 성남 일화, 대구FC 등 K리그 팀을 거친 뒤 지난 2010년에는 인도네시아 클럽팀에서도 약 2년간 선수생활을 하기도 했다.그가 은퇴를 결심하고 지도자의 길로 나서게 된 진짜 속뜻은 자신의 못다이룬 꿈(국가대표)을 축구꿈나무들을 통해 이루기 위해서란다. 그래서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지난 4월 북구 양덕동에 유소년 축구클럽을 탄생시켰고, 그의 축구클럽은 입소문을 타면서 벌써 30여명이나 등록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학생으로 구성된 축구클럽은 주말리그에 나가기 위해 요즘 맹훈련중이다.김씨는 매일 축구하며 땀 흘리는 아이들을 보면 꿈이 가득했던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클럽을 운영하며 개인적인 목표를 세운 것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좋아서 한다.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유소년 축구클럽 중 최고가 돼야 한다”고 하거나 “1등 해야지”라고 강조하지는 않는다. 최고라는 말보다는 `김종경에게 배운 축구꿈나무들이 잘한다`라는 말이 더 듣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털어놨다.김씨는 `어릴 때 선생님이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축구와의 인연은 취미로 끝나지 않았을까`, `축구를 하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진짜 속마음은 `축구를 하길 잘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그는 “축구 선수가 되는 과정에서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 미리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며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하다 보면 반드시 길은 열리고, 꿈은 이루어 진다”고 말했다./고세리기자manutd20@kbmaeil.com

2014-10-10

“힘들고 우울할 때 할머니 얼굴 떠올리면 힘이 절로 솟아납니다”

▲ 촬영에 앞서 황정애 독거노인생활관리사는 “아이고, 신문에 나오면 할머니들이 제 사진 예쁘게 오려서 밥풀 묻혀 벽에 붙여 놓을덴데!”라며 옷매무새를 만졌다.“할머니 한 분 한 분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독거노인생활관리사 황정애(52)씨는 할머니들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의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는지 그녀의 눈은 반짝였고,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하나뿐인 아들이 중학교 1학년 때 중국으로 훌쩍 유학을 떠났다. 주위 사람들의 추천으로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위덕대학교에 07학번 늦깎이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야간 수업과 봉사활동을 병행하면서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황씨는 현재 해도동에 홀로 살고 있는 30여 명의 할머니들을 담당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가정방문을 하고 주 2회 전화를 걸어 할머니들의 안전을 묻는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그를 `수호천사`라고 부른다.처음엔 할머니들과 친해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딸처럼 가까이 다가가 손도 한 번 쓰다듬고 무릎도 주물러 드린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골목 어귀에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으면 창문을 내리고 반갑게 인사한다. 이제 해도동에 파란색 마티즈 차량이 떴다하면 할머니들은 황씨가 온 줄 알고 버선발로 반긴다.이 일을 어느새 8년째 하고 있다. 이제 그녀는 더이상 할머니들의 말벗이 아니다. 한가족처럼 지낸다. 자신이 죽으면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며 통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미리 말해준다.말수가 적은 한 할머니는 황씨가 방문할 때마다 꽁꽁 숨겨 두었던 요구르트를 슬쩍 꺼내 내민다. 겨울엔 이불 밑에 넣어 뒀다 꺼낸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났지만 황씨에게 주려고 마시지 않고 간직한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해 가방에 담아 챙겨 온다고.“작년엔 담석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그 당시 할머니 세 분이 실버카를 끌고 나와 버스정류장 근처 전봇대에 묶어 두고 문병을 오셨더라고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 눈물이 핑 돕니다”황씨는 가정방문을 통해 할머니들이 불안을 느끼거나 위험한 환경에 처해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미리 예방책을 세운다. 그 결과 지난 5년간 기업과 단체로부터 지속적인 봉사활동과 후원금이 이어지고 있다. 할머니들에게 생필품과 난방비 등을 나눠줄 수 있게 돼 요즘 매일매일 신바람이 난다.“저도 힘들고 우울할 때가 있죠. 그 때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할머니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힘이 절로 솟아 납니다. 치매에 걸려 가족도 못 알아보면서 유독 저만 찾으시는 할머니도 있어요. 그 분들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이제 제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족입니다”/김혜영기자 hykim@kbmaeil.com

2014-10-03

“죽음의 두려움 이기면 행복해져”

▲ 포항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서 9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김경희 씨.연간 7만4천여명의 사망자를 유발시키고 8천명의 새로운 환자가 발생하고 있는 국내 사망원인 1위인 암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수술과 항암치료로 새로운 삶을 얻기도 하지만 암세포가 퍼져 회복가능성이 사라지고 기대수명이 예측될 경우 `말기 암환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우리 사회 저편으로 멀어지게 된다.9년째 `말기 암환자` 돌봐간병인서 상담사역할까지환자들에 더 많은 것 배워각종 수술과 항암치료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돌던 이들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곳이 호스피스 병동. 삶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죽음은 두려움 혹은 공포가 아닌 아름다운 한 장의 추억이라는 것을 전하는 이가 있어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포항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9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김경희(61·여·포항시 남구 대잠동)씨가 바로 주인공.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김씨는 지난 2005년 자신이 다니고 있는 성당의 소개로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됐다.김씨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20여명의 다른 봉사자들과 조를 나눠 일주일에 한 번씩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 환자들의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다.봉사자들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씻겨주는 간병인 역할에서부터 죽음을 앞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좌절에 빠져있는 환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주는 고민상담사 역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김씨는 처음에는 단순히 환자를 돕는다는 심정으로 봉사에 참여하게 됐지만 오랫동안 병동을 오가면서 수많은 환자를 만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그녀는 “몇년 전에 간암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왔다가 세상을 떠난 40대 남성에 대한 기억은 아마도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운을 뗀 뒤 “일반적으로 환자들이 이곳에 오게 되면 슬픔에 잠겨있거나 분노에 가득찬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남성은 병실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 남성의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밝은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아 이유를 물으니 `죽음 이후에 또다른 세상이 나를 찾아올 것인데 무엇이 두려운가`라며 반문했다.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해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결국 이 남성은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지 2달여만에 숨을 거뒀고, 그의 임종을 지켜본 많은 환자들과 봉사자들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게 됐다.“죽음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계에 먼저 발을 디딘다는 부분에서 두려움이 큰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해 잘은 모르지만 환자들이 갖고 있는 이같은 두려움을 최대한 덜어주고 편안한 상태에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돕고 있습니다”이렇듯 죽음에 대한 공포로 실의에 빠져있는 호스피스 병동 환자들을 수년간 돌보며 곁을 지키고 있는 김씨는 `백의의 천사`와는 또다른 의미의 천사로 다가오고 있다./박동혁기자phil@kbmaeil.com

2014-09-26

결혼이주여성 한국사회 적응 도와

▲ 포항지역 결혼이주여성의 대모로 불리는 황릴리벳 씨.필리핀 출신 한국인으로서 포항지역 결혼이주여성의 올바른 한국사회 적응을 돕고 있는 이가 있어 화제다.고민상담사 역할 `톡톡`고국가족 아프거나 사망땐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지원지역 이주여성 대모로 불려주인공은 10여년전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인 남편과 결혼에 골인, 이제는 한국인 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황릴리벳(45·여·포항시 남구 연일읍)씨.필리핀에서 사업체를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녀는 지난 2000년 국내유명기업인 S기업의 직원으로 입사해 한국땅을 처음 밟았다. 당시 서울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필리핀과는 너무도 다른 한국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한국기업에서 2년간 근무한 뒤 퇴사한 그녀는 힘든 한국생활을 이어갈지 아니면 고국으로 돌아가 편하게 살 것인지 여부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난 사람이 바로 현재 남편인 황상철(53)씨.“그때만해도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았고, 부모님도 국제결혼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고 해 남편을 결혼상대로 생각하지는 않았어요”그런데 남편과 만난 후 며칠 뒤 그녀가 급성맹장염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생각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입원소식을 접한 남편 황상철씨가 하고 있던 일을 모두 제쳐두고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의 곁을 지켜준 것.황릴리벳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가족도 친구도 하나 없는 타국에서 몸이 아픈 것만큼 외롭고 힘든 순간이 없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다해 병간호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이 남자와 결혼하면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한 그녀는 남편이 살고 있는 포항으로 와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생활 8년만인 지난 2008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며 어엿한 한국인이 됐다.특히 지난 2005년부터는 포항 죽도성당 내 다문화센터에서 결혼이주여성회장을 맡아 결혼이주여성들의 대모역할을 수행하고 있다.황씨는 “몇년 전 한 필리핀 여성이 고국에 있던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났음에도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 슬픔에 잠겨있는 모습을 보며 결혼이주여성 모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됐다”며 “이제는 모임이 매우 활성화 돼 고국에 있는 가족들이 아프거나 사망했을 경우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그녀는 문화차이로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주여성들의 고민상담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그녀는 “한국에 이주한 여성들 중 대부분이 국제결혼소개소에서 처음 본 남성과 성급하게 결혼을 결정해 결혼생활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며 “하지만 이같은 선택은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결혼이주여성 본인의 선택으로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단기간에 이뤄진 성급한 결정도 결국 자신이 한 것이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처음에는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에게 남편은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씨를 몸소 보여줬다”며 “이제는 당당한 한국인 `아줌마`로 남은 여생을 알차고 보람있게 살아가고 싶다”고 전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4-09-23

졸업생 이름 새긴 이색조형물 설치

포스텍 한 교직원이 졸업생들의 이름을 아로 새긴 이색 조형물을 설치해 화제다. 주인공은 포스텍 기계공학과 교직원 이경수(47)씨.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직경 70cm 크기의 4개 서각(書刻)지구본에 2010학년도부터 2012학년도 졸업생까지, 모두 3년 동안의 졸업생 236명의 이름을 촘촘히 새겨 기계공학과 구성원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제5공학관 계단 통로 벽면에 설치했다. `포스텍 ME,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지구본 서각은 학과 고유의 조형물을 통해 소속감을 높이고, 자긍심을 키우고자 하는 의도로 지난해 3월부터 본격 작업에 착수, 1년 넘게 걸려 제작한 것.이 씨의 서각작업은 이번에 두번째. 2년 6개월여 전에도 가로 5.4m×세로 3.2m 크기의 세계지도 모양의 대형 서각에 포스텍 기계공학과 1회 졸업생부터 2009학년도 졸업생을 포함, 소속 교직원 등 모두 1천500여명의 이름 등 총 4천998자의 글자를 새겨 넣은 조형물을 설치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 시간 꼬박 작업에 매달리면 약 10자 정도를 새길 수 있음을 감안하면 그가 이 서각에 쏟은 땀과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이번에 만든 지구본 서각은 신규 졸업생이 배출됨에 따라 자연히 이름이 누락될 수밖에 없는 2010년 이후 졸업생들이 많이 아쉬워한데다 `서각`이라는 취미 활동을 통해 더 큰 보람을 찾기 위해 도전, 이뤄냈다. 앞으로 다른 비어있는 지구본 세 개도 이렇게 채워나갈 계획이다. 이씨가 일과 후 저녁 시간은 물론 휴일도 잊은 채 1년 넘게 몰두한 서각 작업의 대가는 전혀 없다. 포스텍 기계공학과가 200여만원 정도의 원재료인 은행나무 자재 구입과 건물 한 켠에 작업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 전부다. 다만, 나무조각을 지구본 같은 구형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해준 기계공학과 학생들의 `재능 기부`는 이번 작업에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은행나무로 속은 빈 지구본 제작에 애로를 겪자 이 학과 대학원생 유태종씨 등이 나서 전문지식을 활용해 보기에도 깔끔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원리를 가르쳐 준 것.이 조형물은 20개의 정육각형과 12개의 정오각형 등 모두 32개의 은행나무 조각을 연결시켜 축구공처럼 제작돼 있어 처음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허강열 포스텍 기계공학과 주임교수는 “아주 큰 돈을 들인 인테리어와도 비교될 수 없는 정성과 땀이 깃들어 있기에, 학생들의 동기 부여가 되고, 동문들의 모교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며 이 씨의 노고에 고마움을 전했다.이경수 씨는 “서각에 대한 개인적 취미가 내가 속한 일터의 발전과 다른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 오히려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라며 “사실 힘들고 고된 작업이기는 했지만, 멋진 조형물로 포스텍 기계공학과의 역사와 함께 계속할 것이기에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다”고 말했다./김기태기자 kkt@kbmaeil.com

2014-09-12

“감사전화 올때 가장 보람느껴”

▲ 김윤정 포항시 민원콜센터장은 민원인들에게 첫째도 둘째도 친절이라고 말했다.하루 700~800통 전화 받아감사편지 한달 10여통 답지취객 억지불만땐 가장 곤혹“대낮에 술취한 민원인이 억지불만 털어 놓을 때가 가장 곤혹스럽습니다. 하지만 친절하게 도와줘서 고맙다며 감사전화가 올 때에는 쌓였던 피로감도 눈 녹듯이 사~르르 녹습니다.”포항시 민원콜센터 김윤정(41)센터장은 콜센터 상담사들의 고충과 애환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지난 2012년 포항시 민원콜센터가 생기면서 센터장으로 근무를 시작하게 된 그는 민원인들에게 첫째도 친절, 둘째도 친절이라고 강조했다.김 센터장은 지난 8월 대구에 사는 김모(78)씨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김씨는 차량문제로 포항시에 전화를 하게 됐는데 일면식도 없는 민원콜센터장이 너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줘 일을 말끔하게 처리하게 됐다면서 그 은혜를 잊지못해 감사편지를 올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콜센터장 같은 분은 분명 타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며 시장이 큰 상을 주고 사기를 북돋워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같은 감사편지는 한달에 10여통 정도 온다.포항시 민원콜센터 상담사는 센터장을 포함해 모두 12명. 아침 8시30분에 출근해 오후 6시30분 퇴근할 때까지 상담사들이 받는 전화는 대략 700~800여통. 이들 콜센터 상담사를 일컬어 흔히들 `감정 노동자`라고도 부른다. 전문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230개 직업군중에서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상위군에 상담사가 포함된다는 것. 스트레스의 강도는 해직 근로자의 그것과 맞먹는 수준이다.김 센터장은 아침 일찍 민원인들과 전화통화를 하다보면 웃지못할 온갖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 술에 취해서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다짜고짜 “시장 바꿔라, XXX국장 연결해라”면서 무조건 호통을 치는 민원인들, 여기가 마치 소방서나 경찰서인양 실종된 사람을 찾는다는 전화까지 다양하게 온다는 것. 그래서 상담사들은 왠만큼 정신무장이 돼 있지 않으면 이곳에서 근무할 수 없다고 했다. 김센터장은 지난 2일 상담사들과 함께 평소 안부전화를 드리던 50여명의 홀몸노인들의 가정을 찾아 생필품을 전달하고 자식역할까지 자처했다.포항시 민원콜센터장으로 첫발을 내디디게 된 것은 KT대구콜센터에서 6년 동안 일한 경력이 계기가 됐다. 당초 KT 포항콜센터에서 근무하던 그는 KT대구 콜센터와 통합되면서 대구로 근무지를 옮겼고, 출·퇴근의 번거로움과 주말부부 등으로 불편을 겪어오던 중 KT대구콜센터 소장의 추천으로 포항시 민원콜센터를 노크하게 된 것.김 센터장은 “주말에 아이들과 영화관람을 하는 것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법이다. 이제는 내공(內功)이 쌓여 왠만한 일에도 끄떡없이 일할 수 있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김명득기자mdkim@kbmaeil.com

2014-09-04

“아내·가족 소중함 다시 깨달아”

▲ 최영만 전 포항시의회 의장이 인터뷰 중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지난 2010년 4월 최영만(67) 전 포항시의회 의장은 중견배우 현석씨와 함께 복요리를 먹고 복어 독(毒)에 중독돼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현석씨는 3일 만에 깨어났으나, 최 전 의장은 한 달이 넘도록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었다. 그는 입원 내내 곁을 지켜준 가족의 헌신으로 입원 45일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가까운 사물조차 인지 못할 정도로 시력을 잃었고, 거동하기조차 힘들어 하는 등 복어독 후유증이 심각했었다. 그동안 건강과 관련, 이런저런 말들이 나돌기도 했으나 4년이 흐른 지금 그는 예전못지 않은 건강을 되찾았고, 표정도 무척 밝아 보였다. 눈 뜨면 아령으로 하루 시작지인 도움으로 봉사활동도시민상·中 명예시민증 받아-복어독에서 깨어 날 때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났나.△눈을 떴을 때 아내가 가장 먼저 보였다. 곁에 있어 준 아내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건강을 과시한 탓에 벌어진 일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아울러 퇴원 후, 45일간의 병상일지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아내와 딸이 입원내내 나의 상태를 꼼꼼히 기록했다. 나를 지켜준 가족과 지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너무나도 고맙기도 했다.-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복어독 중독 이후, 3년 동안 대외 행사는 자제했다. 후유증으로 하루 3번의 신장 투석은 물론 병원 치료를 받았고, 보행도 불편해 외출이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운동과 식이요법 조절 등 재활에 상당한 시간을 쏟았다. 아내의 내조 덕분인지 지난해부터는 신장 투석도 많이 줄였고, 걷는 것도 아주 좋아졌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있고, 요즘은 외출도 쉬워져 지인들을 자주 만나는 편이다. 또한 친구, 후배들의 도움으로 주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건강 회복과 함께 지난 6월에는 포항시민상을, 최근엔 포항시와 중국 장가항시와 자매결연의 물꼬를 튼 공로로 장가항시 청년연합회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는 등 좋은 일들이 겹치고 있다.-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특별한 비결은.△솔직히 건강해졌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 지난 4년간 해온 꾸준한 운동이 삶을 새롭게 바꾸고 있다는 느낌은 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령부터 잡고 실내 자전거 운동 기구에 올라 수백번의 페달을 밟는다. 그리고 놀이터에 설치된 철봉대에 매달리는 운동을 한다. 매일 산책하는 것은 빼 놓은 수 없는 일과 중 하나다. 약을 먹는 것보다 식이요법과 운동이 보약인 것 같다. 즐겁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고 있다.-함께 복어독에 빠진 현석씨는 자주 보는가.△생사고락을 함께 한 탓인지 사고 후 더욱 애틋해졌다. 특히 현석씨는 드라마 `불꽃속으로` 촬영차 포항을 자주 내려왔는데, 그 때마다 만났다. 30년지기 친구인 현석과는 더욱 돈독한 인연이 지속될 것 같다.-전직 의장을 역임했다. 포항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KTX가 뚫리면 포항이 큰 변화를 맞이 할 것으로 본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문화 체육 분야에 좀 더 많은 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포스텍 연구진 등을 잘 활용해야 한다. 그들은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다. 그들의 머리를 빌릴 필요가 있다. 이강덕 시장이 포항의 미래를 상당히 걱정하던데 잘 하리라 믿는다./김기태기자 kkt@kbmaeil.com

201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