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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여유롭고 넉넉한 웃음에 담겨진 ‘신라인의 미소’

낯선 도시를 방문한다는 건 그 공간이 간직한 고유의 문물을 접하고,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행위다. 우리는 이걸 ‘여행’이라 부른다.신라 천년의 빛나는 유적·유물과 즐겁게 조우할 수 있는 경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최고의 여행지 중 한 곳. 하지만,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과 경기도에 사는 지인들은 가끔 묻는다.“경상도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던데, 경주도 그래?”이 물음 앞에 설 때면 기자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100년의 역사를 지닌 경주 중앙시장. 무거운 짐을 옮기는 할머니가 있어 아주 잠깐 도와줬다. 그 작은 도움에도 기어코 잘 삶은 수육 한 점을 입 안에 넣어주는 늙은 상인의 환한 웃음이 생전의 내 할머니와 닮아 있었다. 따스하고 푸근했다.점심을 먹기 위해 한두 차례 들렀던 식당. 비싸고 거창한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손님들의 접시가 비면 청하지 않았음에도 거기 담겼던 반찬을 몇 번이고 다시 가져다주는 정겨운 풍경. 주인장은 32년 동안 경주에서 밥집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고 말했다.거리에서 길을 묻거나, 택시에 올라 “혼자 보기 아까웠던 추천 관광지가 있나요”라고 궁금증을 표했을 때도 상세하고 정겨운 설명이 돌아왔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경주에도 드러내지 않는 깊은 ‘속정’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니 무뚝뚝함과 불친절이란 경상도에 관한 선입견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얼굴무늬 수막새에 새겨진 ‘서라벌 사람의 웃음’높낮이를 달리하며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왕릉들, 철마다 피어 관광객을 설레게 하는 갖가지 꽃들, 1천 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사람들 앞에 선 국보급 유적과 유물들,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를 보여주는 박물관들….서라벌은 보물이 지천인 공간이다. 여기에 한 가지 보물이 또 더해질 수 있으니 바로 경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그들은 여유롭고 넉넉한 웃음을 지녔다. 세상 오만 가지 유혹에도 과한 욕심 내지 않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줄 안다.예술가와 역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이것이 바로 신라인의 미소”라고 말하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제2010호)를 몇 해 전 TV 화면에서 본 적이 있다. 담담하게 씨익 웃고 있는 달관의 표정.수막새는 목조 건물 지붕 기왓골 끝에 사용되는 기와다. 그 옛날 신라 사람들은 기와 한 장에도 해학적 감각을 담아낼 줄 알았다.오늘날 경주시민들의 핏속에 분명 신라인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을 터. 두 웃음이 닮은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경주 얼굴무늬 수막새의 내력은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신라시대 원와당(圓瓦當)으로 일제강점기 경주 사정리(沙正里·현 사정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1934년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가 골동상점에서 구입해 당시부터 고고학 자료를 통해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일본으로 반출됐으나 1972년 국내로 반환됐다.틀에 찍어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형태를 잡은 후 손으로 직접 빚어 얼굴의 세부 형상을 만들고 도구를 사용해 마무리한 작품. 자연스럽고 정교한 솜씨로 보아 숙련된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실제 사용한 흔적도 있다.오른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잔잔한 미소가 조화를 이루며 신라인들의 염원과 이상향을 구현한 듯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냈고, 당시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다.”웃음은 인간이 수난과 고통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이 돼준다. 그건 까마득한 옛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천년왕국 신라의 백성들은 보일 듯 말 듯 잔잔한 미소를 통해 때때로 닥쳐왔을 곤궁과 어려움을 저 멀리 밀어낼 줄 알았던 현명한 사람들이 아니었을지.‘미소’ 외에도 서라벌 사람들과 경주시민의 유사점은 또 있다. 바로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에 능하다는 것.◆ ‘이야기’가 지닌 귀한 가치를 알았던 신라인들올해만 열 번 넘게 경주를 찾았다. 당연지사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드물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면 친절하고 재밌는 어법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게 경주 사람들이다.‘이야기’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을 이어주는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다. 최소 1천 년 전 세상을 살았던 서라벌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가 뭐냐고?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출간한 ‘신라인의 생활과 문화’엔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위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읽힌다.“신라인들은 일상생활을 매우 다채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통하여 사람과 신성(神性)이나 혼령 사이에 관계와 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과 동식물의 관계와 소통도 있었다. 신라 사람들의 열린 상상력은 사람과 다른 존재들 사이의 관계까지도 설정하여 보여주었다. 용을 비롯한 온갖 동물과 식물, 불보살(佛菩薩·부처와 보살), 귀신 등 사람 아닌 존재들이 신라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했다. 신라 사람들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개방적이었고, 그래서 관계의 공간도 확장시켰다.”오래전 같은 땅에 살았던 서라벌 사람들의 기질과 성정을 DNA가 기억하는 것일까?오늘날 경주시민들도 타자(他者)를 접하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우호적이며 개방적이라 느껴졌다. 이는 경주가 ‘손꼽히는 관광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가 아닐지.위에서 언급한 책은 ‘이야기’가 지닌 귀중한 가치를 일찌감치 인지했던 신라인의 지혜를 이어서 서술하고 있다.“신라의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어주고, 잘 풀리지 않던 문제도 풀리게 해주었다. 이야기를 하고 듣는 사람들이 봉착한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나 수단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라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낙관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윤활제이며 동력이 됐다.”◆ ‘사람’ 때문에 다시 찾고 싶은 도시 경주앞서도 말했지만 경주 여행의 즐거움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잘 보존된 유적과 유물만이 아니다. 각종 박물관은 한국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귀한 공간이다. 남산과 보문호수 주변을 거닐며 소나무 향기에 매혹되는 낭만도 경주만이 가진 매력. 최근 ‘젊은이들의 거리’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황리단길에선 다양한 맛집을 찾아다니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이 모든 ‘경주의 즐거움’을 만들어낸 이들이 바로 ‘경주 사람들’ 아닐까?세상을 관조하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매개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줄 아는 사람들.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만약 한 도시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배려와 인정 때문이 아닐지.서라벌을 삶의 근거지 삼아 길고도 긴 생을 이어온 신라인들. 그들 후손의 선량한 웃음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라도 가까운 날을 정해 다시 한 번 경주에 가야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20-09-17

전설의 웅장한 사찰·목탑을 상상하다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와 끝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오만이나 착각일 수 있다.상상이 구체화되기 힘든 아주 오래된 사건이나 1천400여 년 전 까마득한 풍경 앞에서는 사람이 가진 상상의 힘이 무너지거나 무력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매번 신라의 고대 유적과 유물을 만날 때면 위와 같은 의문을 가졌다. 경주를 여행한다는 건 스스로의 상상력이 얼마나 큰 영역 안에서 작동하는지를 가늠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4명의 왕이 93년에 걸쳐 만들어낸 사찰, 80m 높이의 거대한 목탑이 우뚝 서있던 공간, 서라벌 사람들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했던 황룡사 또한 우리들 상상력의 한계를 위협한다. 머릿속에서도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바로 그 황룡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사적 제6호)를 찾은 날은 잠시 소강상태였던 ‘코로나19 사태’가 재발한 시기였다. 당연지사 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중년의 아버지와 20대 초반의 딸을 제외하고는 황룡사지를 거니는 여행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위가 조용했다. 그래서였을까. 발굴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거기선 상상력의 날개가 더 크게 펼쳐졌다. 황룡사는 대체 어떤 가람이었을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20권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사람들의 의문에 이런 답을 들려주고 있다.“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사찰로 짓게 하여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고 하였다. 착공 후 17년 만에 완성하여 다시 황룡사(皇龍寺)로 고쳤다. 그리고 사찰이 완성되고 5년 후 진흥왕 35년(574년)에 주존불(主尊佛)을 비롯하여 금동삼존불인 장육존상을 만들고, 진평왕 6년(584년)에 10년의 세월이 걸려 금당을 지어 모셨다. 이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율사의 권유로 645년에 구층 목탑을 세웠으며…(하략)”◆ 한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웅장한 사찰을 상상하다황룡사 조성은 6세기 중반에 시작돼 7세기까지 이어진 ‘서라벌의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규모가 컸음은 물론이고, 거기서 파생된 예술적 성취도 대단했다.공사엔 수천 명의 석공(石工)과 목공(木工)이 동원됐고, 심지어 갈등하고 대립하던 백제에서 일류 목공까지 모셔와 목탑 축조의 감독을 맡겼다. 신라 왕실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려 마침내 황룡사와 목탑이 모두 완성됐을 무렵의 서라벌을 상상해봤다. 미려한 건물들과 하늘을 뚫을 듯 웅장하게 솟아오른 구층 목탑. 거기에 수백 명 승려들의 예불 소리…. 재론의 여지없이 장관이었을 게 분명하다.앞서 언급한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당시 황룡사가 가졌던 위상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553년 처음으로 건립되기 시작한 황룡사는 선덕여왕 14년(645년)에 목탑이 완성될 때까지 진흥왕, 진평왕, 진지왕,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4대 93년 만에 완공된 신라 최고의 사찰이었으며, 신라 삼보(新羅三寶·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3가지 보물) 중에서 장육존상과 구층 목탑을 간직한 국찰(國刹·국가가 창건해 운영한 절)이었다. 신라가 멸망한 후 1012년엔 조유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구층 목탑을 수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1238년 몽골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리는 비운을 맞았다.”나무는 재료의 특성상 돌처럼 견고하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이란 무용한 일. 그러나,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황룡사와 구층 목탑이 목조가 아닌 석조 건축물이었다면 어땠을까? 끔찍한 화마(火魔)에 사라지지 않고, 세월의 파도를 이겨내며 지금도 그 모습이 제대로 남아있다면…. 아마도 중세 이탈리아 성당이나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Angkor Wat) 이상으로 미려함을 인정받는 세계적 관광유적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니 이 땅을 유린한 800년 전 몽골 군대가 미워졌다.◆ 오래된 절터에서 미당(未堂)의 시를 떠올리다형상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역사적 상상력이 그 기억의 복원에 힘을 더해준다. 황룡사는 1천400년 전에 만들어져, 까마득한 옛날인 고려 시대 때 사라진 사찰이다. 생존한 누구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 해도 한 민족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자부심이나 자랑거리를 온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는 법. 황룡사 발굴 작업은 상상력 저편 기억으로 남은 서라벌의 역사를 복원하는 행위다. 그래서 의미가 작지 않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976년부터 8년 간 황룡사지 일대 8만928㎡의 땅에서 발굴 조사를 벌였다. 사찰 배치의 전모를 밝히고,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절터를 정비·보존해 역사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이 작업을 통해 수만 점의 유물이 세상에 드러났고, 황룡사 구조와 내부 건물의 배치가 많은 부분 확인됐다. 출토된 연화하대석, 간주석, 초석 등은 현장에 전시돼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 반갑게 만나고 있다.2020년 오늘. 완전한 형태의 황룡사와 구층 목탑을 볼 수는 없지만, 학자들의 노력이 ‘상상 속의 7세기 신라’를 보다 뚜렷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절터를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며 그 옛날 황룡사를 찾았을 진흥왕과 선덕여왕의 모습을 상상했다.그때 떠오른 시 한 편이 있었으니 서정주(1915~2000)의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 이런 노래다.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동백꽃을 보러 고향 가까운 절을 찾아간 시인. 정작 보고자 했던 꽃은 보지 못하고 주모의 잡스럽고 속된 노래만 듣고 돌아와야 할 난처한 형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선 실망보다는 낭만이 더 크게 일렁이고 있는 게 보인다.‘동백꽃’으로 상징되는 성(聖)과 ‘육자배기’로 표현된 속(俗)이 결국은 멀리 있지 않다는 문학적 깨달음이 작가에게서 독자에게로 자연스레 전달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황룡사역사문화관이 다시 문 여는 날을 기다리며미당이 동백꽃을 보러 선운사에 갔다면, 기자는 황룡사지와 함께 황룡사역사문화관을 보기 위해 경주행 버스를 탔다. 황룡사 발굴 현장에 지어진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어떤 곳일까?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간략한 정보가 실려 있다.“신라왕경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황룡사지 바로 옆에 건립된 전시관이다. 황룡사지의 연구 및 발굴 조사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영상 시청각실과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역사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졌고, 황룡사 구층 목탑을 1/10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도 전시돼 있다.”우리는 올해를 ‘갑작스레 출현한 바이러스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 고약한 시절’로 기억할 듯하다. 안타깝게도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임시 휴관 중이었다.역사문화관 통유리를 통해 손에 잡힐 것 같은 황룡사 구층 목탑 모형을 바라보며, ‘코로나19 종식’ 이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그나저나 큰일이었다. 서정주에겐 ‘동백꽃’을 대신할 ‘막걸릿집’과 ‘육자배기’가 있었지만, 기자에겐 그게 없었던 것.그래서다. 한참을 더 황룡사지에 머물며 저 먼 6~7세기 서라벌과 그 시대를 살았던 신라인들을 상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9-10

기와집과 마주하는슬기로운한옥생활

경주 여행이 처음인 사람이건, 여러 차례 방문한 이들이건 마찬가지다. 경주 톨게이트 위에 근사하게 올라앉은 기와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도시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수십 년 전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살아본 세대에겐 아련한 향수를 선물하고,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와 연립 주택에서만 지내온 아이들에겐 감탄을 부르는 풍경.경주에서는 기와를 얹은 한옥(韓屋)을 어디서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관공서와 대형 카페도 기와지붕이 흔할 정도다. 이런 형국이니 한옥은 ‘서라벌을 서라벌답게 보이게 하는’ 매력적인 보물의 하나가 분명해 보인다.시멘트나 벽돌이 아닌 나무가 주된 재료이기에 방에서 풍기는 향기부터가 현대식 주택과는 다른 한옥에서 하루쯤 머물고 싶다는 건 적지 않은 관광객들의 희망사항이다.경주 관광업계는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에 발맞춰 다양한 한옥 숙소에서의 하룻밤 체험을 준비해놓고 있다.◆ 한옥의 멋스러움을 찾아 황남동으로기자 또한 지난해 이끼 낀 오래된 검은 기와 위로 산새가 날아드는 안동 고택(故宅)에서 보낸 시간이 즐겁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기에, 경주의 한옥에서도 한 번쯤 달콤한 잠을 청해보고 싶었다.한옥 숙소는 물론, 살림집과 식당으로 사용되는 도시형 한옥이 즐비하다는 황남동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도보로 15~20분 거리. 낯선 도시에서의 가벼운 산책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그런데 어째서 타 지역에서는 사라진 한옥이 황남동엔 아직 다수 남아 있거나, 심지어 새롭게 만들어지기까지 하는 것일까?한국건축역사학회가 발행한 논문 ‘경주시 황남동 일대 한식 건물 주거지 형성에 관한 기초 조사연구’(구성준·이경아)는 이런 궁금증의 한 부분을 풀어주고 있다.“경주시 황남동 일대에서는 오히려 1970년대에 한식 건물이 대량 건설되어 같은 시기 타 지역과 차이를 보인다. 더불어 목조 외에 다양한 재료를 수용한 한식 건물이 도입되어 1980~90년대 신축의 주류를 차지하는 특수한 건축적 맥락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런 현상의 저변에는 1970년대부터 공공 차원에서 주거지 정비를 통한 역사적 경관을 형성하려는 기획이 배경으로 자리한다. 황남동의 경관 구축 과정은 그 성격에 따라 1960년대까지의 주거지 형성, 1970년대 역사적 경관 성격 부여, 1980~90년대의 비목조 한식 건물의 정착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여기서 키워드는 ‘공공 차원에서 주거지 정비를 통한 역사적 경관을 형성하려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경주는 누가 뭐래도 천년왕국 신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 도시’다. 바로 이 ‘역사’를 도시 발전에 기여할 관광 콘텐츠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한옥의 보존과 현대적 리모델링을 택한 것이 아닐지. 이런 추론에 힘을 실어주는 건 앞서 언급한 논문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1979년 발표된 ‘경주 구시가지 및 사적지 정비계획’은 문화유산과 상업 및 주거 기능이 혼재된 경주의 도시 구조에서 핵과 핵 사이를 연결하는 중심가로를 고도(古都·역사가 오래된 도시) 이미지에 맞게 개발하여 활성화를 유도할 것을 목표로 하는 계획이다…(하략)”국가 차원에서 보존해야 할 유적과 유물이 다수 존재하는 경주. 그것들을 중심으로 관광활성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기에 여타 지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지게 된 ‘독특하고 고풍스런 공간’ 황남동으로 들어섰다.기자가 묵기로 한 숙소는 1층과 2층에 각각 4개의 방을 갖춘 신축된 한옥 양식의 건물. 바닥에서 천장까지가 꽤 높아 쾌적하게 느껴졌다.◆ 그 많던 한옥은 왜 사라졌을까?딸과 함께 경주로 여행 왔다는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숙소 방문을 열어보더니 “에어컨을 켜지도 않았는데, 나무가 많이 사용돼 아파트보다 시원하다”며 웃었다. 그날은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날이었다.“내가 어릴 땐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나무와 황토로 만든 한옥에서 살았는데, 어쩌다 그런 집들이 이젠 다 사라졌는지 모르겠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할머니의 푸념을 들었던 주위 사람들도 대부분의 한국 도시에서 ‘한옥이 사라진 이유’가 궁금했을 터.그 의문에 최무현의 논문 ‘경주지역 도시 한옥의 시대별 건축 특성에 관한 연구-황남동 한옥보존지구를 중심으로’가 이런 답을 내놓고 있다.“한옥은 삼국시대와 고려조를 거쳐 조선왕조 500년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삶과 혼, 그리고 정체성을 담아온 귀중한 생명체와 같았다. 그러나 1876년 개항은 서구 문화의 급속한 유입을 불러왔고,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의식과 생활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외래 주거문화인 양식 및 일식 생활 패턴의 유입은 전통한옥을 외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세상 모든 사물의 내부엔 빛과 그림자가 있다. 한옥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를 반영했기에 한옥엔 포근함과 따스한 서정이 깃든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몸이 느끼기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그래서일까? 최근에 새롭게 지어지는 경주의 한옥은 부엌과 화장실 등이 젊은 세대의 요구에 맞춰 현대적 감각으로 꾸며지고 있는 추세다. 이는 변화하는 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클래식과 모던의 결합’이 아닐까 싶다.기자가 하루를 보낸 한옥 숙소 역시 외형은 전통방식을 따르면서도 내부는 편리함을 지향하는 형태를 보였다. 오래전 한옥과 달리 방 안에 샤워기와 양변기를 갖춘 욕실이 있고, 침대도 놓여 있었던 것.◆ 한옥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니…내부는 현대적으로, 외부는 고전적으로 꾸며진 한옥 숙소에서의 하룻밤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옆방의 소리가 다 들린다”며 방음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각자의 방에 든 여행자들은 밤이 깊어지자 서로가 조심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매너가 좋은 사람들이었다.자정 무렵. 조용히 마루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외갓집과 결혼한 작은이모가 살던 집은 둘 다 시골에 있었고, 외숙부와 이모는 낡은 한옥에서 생활했다.40년 전 기자는 먼 산에서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가 겁나서 방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혼자 가지 못하고 곤히 잠든 엄마를 깨우곤 했다. 귀찮다는 기색 없이 아들의 손을 잡고 선선히 마당으로 내려서던 젊은 시절의 엄마.캄캄한 밤하늘에서 점점이 빛나던 수많은 별과 착한 눈망울을 가진 소를 키우던 외양간 마른 풀 냄새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아무 것도 몰랐기에 세상의 어두움을 보지 못하고 마냥 행복할 수 있었던 유년. 우리 모두는 그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됐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한가?이제 더 이상 새의 울음소리 따위에 겁먹지 않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허위허위 살아가는 소시민.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묵은 추억을 꺼내 보게 하는 경주 한옥 마루에서의 상념이 사람을 나른하고 섬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쁠 것 없었다. 여행이란 자기를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기도 하기에.황남동 한옥 숙소에 누웠던 그 밤. 아주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몸과 마음 모두가 창호지를 통과한 햇살에 눈 비비며 일어나던 유년의 아침처럼 편안하고 평화로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0-09-03

21세기 서라벌의 밤, 그 찬란하고 설레는 천년의 이야기를 걷다

얼마 전 예순을 훌쩍 넘겨 일흔에 가까운 부부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두 사람이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을 봤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이거나 1980년대 초쯤이었을 터.경주 첨성대 앞에 나란히 선 부부는 말 그대로 금방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젊었다. 신부는 분홍색 한복을 입고, 신랑은 결혼식을 준비하며 샀을 것이 분명한 깔끔한 새 양복 차림.“우리 때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외국으로 놀러간다는 건 언감생심이었지. 비행기 타고 제주도를 가는 신혼부부도 드물었어. 그저 기차 타고 온양 온천에 가거나, 버스 타고 경주에 가는 게 최고의 신혼여행이던 시절이야.”40년 전 옛날을 추억하는 남편과 아내의 웃음이 너무도 환해서 보기 좋았다. 그랬다. 부부가 들려준 추억담처럼 경주는 한때 각광받는 신혼여행지였다.이와 관련해 ‘한국 일생 의례사전’은 20세기 우리나라의 신혼여행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신혼여행은 1950~1960년대까지도 여전히 도시 지역에 거주하며 경제적 여유를 가진 중산층 이상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신혼여행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면서 결혼식 후 승용차를 타고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호텔에서 1박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신혼여행은 널리 보급되어 경주·온양·속리산·제주도 등으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 ‘신라의 달밤’이 만들어준 허니문 베이비도 있을 듯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신혼여행은 낮에 하는 관광도 좋지만, 밤의 낭만도 중요한 여행.30~40년 전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난 선남선녀들은 어둑한 저녁이면 커다란 왕릉과 전설이 숨 쉬는 소나무 숲, 동궁과 월지 등을 산책했을 것이고 그들이 함께 보낸 로맨틱한 ‘신라의 달밤’은 적지 않은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프랑스 영화 제목처럼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속삭였을 그 시절 신혼부부들.세월의 흐름에 따라 밤의 경주는 많은 부분 변해왔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공간엔 예산이 투입돼 깔끔한 정돈이 이뤄졌고,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화려하고 빛나는 조명이 서라벌의 여러 유적과 유물을 돋보이게 꾸며주고 있다.아마도 1980년대 경주를 찾은 이들에겐 오늘날의 경주 야경이 더없이 낯설 수도 있을 듯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의 변화니까.그렇다면 이렇게 달라진 ‘경주의 밤’을 이제는 누가 즐기고 있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 어두워진 길을 달려 21세기 경주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황리단길을 향했다.지척에 동궁과 월지, 첨성대, 계림, 대릉원 등이 몰려 있으니 서라벌의 밤 풍경을 두루 살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경주시는 “한여름 8월에도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관광 슬로건으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때가 때이니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횡포를 막기 위한 마스크 착용 등 개인위생 규칙 준수는 매너 있는 관광객의 기본 중 기본.경주의 주요 여행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밤의 경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동궁과 월지, 월정교, 경주읍성 등 내로라하는 야경 명소들이 경주의 화려한 밤을 밝힌다. 거기에 더해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새로운 야간 관광콘텐츠가 생겼다. 엑스포공원의 ‘루미나 나이트워크’가 바로 그것. 루미나 나이트워크는 스토리가 있는 숲속 산책길이다.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착안한 ‘토우대장 차차’가 이승과 중간계, 지하세계를 넘나들며 천년왕국 신라로의 대장정을 안내한다.”◆ 야경을 즐기는 젊은 연인과 가족 단위 관광객들미리 예약해둔 숙소에 짐을 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황리단길로 나섰다. 평일임에도 꽤 많은 여행자가 삼삼오오 거리를 오가고 있다. 대부분이 20~30대로 보이는 연인들과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까짓 더위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라는 듯 손을 꼭 잡거나 다정하게 팔짱을 낀 젊은이들은 저녁을 먹으며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분위기 좋은 식당과 카페를 찾아다녔다.밤의 황리단길은 그런 연인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는 곳으로 이미 이름이 높다. 개조하거나 신축한 한옥풍의 건물엔 한식당과 일식당은 물론 아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여러 종류의 수제 맥주와 포도주를 판매하는 카페들은 실내 장식이 감각적이고 세련됐다. 서울이나 부산의 유명 카페 못지않다. 또한 여타 도시에 비해 음식과 음료의 가격도 합리적으로 보였다.기자가 들어간 곳은 한옥을 개조해 만든 이탈리아 음식점이었는데, 피자와 파스타 맛이 썩 좋았다. 곁들인 레드 와인도 저렴했다. 한국식 전통가옥에서 유럽 요리를 즐기는 것. 경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선 쉽게 하기 힘든 경험이다.반세기 전 신혼여행객들의 자리를 대신 채운 연인과 식구들이 식사 후 찾아갈 ‘서라벌의 야간 명소’는 어딜까?열 살쯤으로 보이는 아들을 앞세우고 걷는 젊은 부부의 뒤를 따라 기자도 ‘경주의 밤’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유럽과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수십 개 나라를 여행한 친구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취한 채 인적 드문 밤거리를 걸어도 위험하지 않은 세상에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야.”이 말이 터무니없는 과장만은 아니다. 사실 한국의 야간 치안은 어느 나라보다 좋은 편이다. 큰 도시와 소읍(小邑) 모두가 그렇다. 일단 곳곳에 가로등이 켜져 환하고, 범죄 예방 효과를 인정받은 CCTV도 요소요소에 설치돼 있다.경주도 마찬가지다. 첨성대에서 시작해 계림, 월정교, 동궁과 월지를 거쳐 대릉원 인근까지 2시간 가까이 밤의 경주를 유유히 산책했다. 당연지사 안전을 위협하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게다가 가는 곳마다 수백 명의 관광객들이 야경을 즐기고 있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헛갈릴 정도. ‘신라의 달밤’을 걷고 싶다는 로망은 몇몇 사람만의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아름다운 조명과 함께 여름밤의 낭만을...2020년 현재 낭만적인 경주의 밤에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건 어둠이 숨긴 고대 유적을 환히 비추는 색색깔의 조명인 듯했다.작은 산처럼 거대한 능(陵)을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하는 보랏빛 조명, 김알지 탄생 설화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계림 산책로를 밝힌 푸른 조명, 순간순간 색을 바꾸며 첨성대를 비추는 조명….동궁과 월지에 도착해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쉴 때면 갖가지 빛깔 조명 사이로 신라의 역사 한 장면이 영상처럼 흘러간다.사적 제18호인 동궁과 월지는 어떤 곳일까?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만든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질문에 답한다.“동궁과 월지는 임해전(臨海殿·신라 안압지 서쪽의 궁궐 건물)이 속한 통일신라의 동궁지로 알려진 곳이다.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雁鴨池)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나 2011년에 동궁과 월지로 사적 명칭을 변경했다. 월지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왕과 신하들이 모여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관광도시가 되려면 낮에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더불어 볼만한 밤의 구경거리도 두루 갖춰야 하는 시대가 왔다. 경주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황리단길-첨성대-계림-월정교-동궁과 월지-대릉원’으로 이어지는 서라벌의 밤거리는 현대적 감각과 역사적 유적·유물을 함께 만날 수 있기에 누구나 흥미를 가질만한 관광 코스가 될 수 있을 듯하다.세상은 매순간 바뀌고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행의 트렌드도 변한다. 1970~1980년대 신혼부부들에게 사랑받았던 ‘경주의 밤’은 이제 젊은 연인과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에게까지 즐거움을 주고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8-27

천년의 전설 품은, 그 수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다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세상에 전해오는 신화와 전설은 언제나 흥미롭다. 인간의 상상력과 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감성을 자극하기에 그렇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늘의 신(神) 몸의 일부분이 파도가 일으킨 거품과 뒤섞여 조개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프로디테였다. 신화에 매혹된 수많은 조각가들이 대리석을 깎아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그 옛날 북유럽 사람들은 남쪽의 뜨거운 불꽃이 거대한 얼음 기둥을 녹였고 거기서 생겨난 거인이 자신들의 선조(先祖)라는 전설을 믿었다.그리스와 로마,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떠도는 이러한 신화와 전설이 한국이라고 없겠는가. 당연지사 있다.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계림(鷄林·사적 제19호)은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비한 설화가 서린 공간 중 한 곳이다.계림은 신라의 다른 이름이며,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신성한 숲을 왜 용의 숲이나 봉황의 숲이 아닌 ‘닭의 숲’이라 불렀을까?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5권 ‘신라의 토착종교와 국가제의’가 이 궁금증에 답해준다.“닭은 신라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김씨 시조설화를 보면 닭이 울어서 김알지의 탄생을 인간 세상에 알렸다. 이에 알지가 나온 시림(始林)을 계림이라 고치고 국호로 삼았다 한다. 신라인들이 닭을 숭상했음이 인도에까지 알려졌다는 기록도 있다…(중략) 김씨 집단은 닭을 특별한 의미를 가진 동물로 여겼고, 그들이 5세기 이후 왕위를 독점하는 왕실세력을 이룸으로써 신라는 닭의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천마총에서 계란 실물이 토기에 담겨 출토된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서늘한 숲이 반기는 ‘전설 깃든 계림’으로의 피서계림을 찾았던 때는 견디기 힘든 폭염이 전국을 뜨겁게 장악한 날이었다. 한 조각 작은 그늘조차 애타게 그리운 여름.대릉원 입구에서 내려 첨성대 쪽으로 잠시 걸어가니 저만치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계림이 모습을 드러냈다.브램 스토커(Bram Stoker·1847~1912)의 소설에 등장하는 드라큘라. 그 흡혈귀가 산다는 동유럽의 숲은 빽빽한 침엽수와 축축한 늪 탓에 낮에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듯 음산하다고 한다. 더위를 피해 피크닉을 즐기기엔 적당하지 않을 것 같다.하지만, 계림은 달랐다. 회화나무와 왕버들,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이 환한 햇살 아래 저마다 멋을 뽐내는 계림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정하게 방문객을 반기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찰랑거리며 숲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개울이 정감을 더해줬다.20여 분 걸으며 셔츠를 적셨던 땀이 계림 안에 마련된 조그만 나무의자에 앉으니 금방 식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오래전 연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최적의 피서지’인 이곳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 계림이라 불렀다. 탈해왕 4년에 왕이 금성 서쪽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환한 빛이 가득해 신하를 보내 살피도록 했다. 가보니 금으로 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왕이 궤짝을 여니 그 속에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이 아이를 하늘에서 보낸 것으로 믿어 태자로 삼았다. 이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캄캄한 밤, 조용한 숲에서 갑자기 비산하는 환한 빛, 느닷없는 하얀 닭의 울음소리, 새벽에 발견된 황금으로 만들어진 궤짝, 그 안에 담긴 귀여운 아기…. 그야말로 신화나 전설의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재밌는 이야기다.사람이 드문 평일 한낮의 계림. 전설 혹은, 신화 속으로 피서를 온 기분이 들었다. 더위를 피할 곳을 고민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계림 여행을 권하고 싶어졌다.사실 독특한 출생 설화를 가진 신라 사람들은 김알지 외에도 여럿이다. 탈해왕은 동해 아진포로 밀려온 배의 작은 상자 속에서 부모를 알 수 없는 상태로 발견됐다는 옛이야기가 전한다.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14대 왕 유례이사금은 어머니 박씨가 밤에 길을 걷다가 별빛이 입에 들어오면서 잉태됐다고 한다. 믿기 어렵지만 별이 아버지가 된 셈이다.이처럼 ‘기이한 출생 배경을 지닌 아이가 현명한 노인에게 발견돼 왕으로 키워지는 과정의 서술’은 신라의 설화가 가진 특성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공간느린 걸음으로 계림을 돌아보다가 ‘계림비각(鷄林碑閣)’ 근처에서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었다. 번잡한 도심에선 맛볼 수 없는 적요함이 좋았다.쏟아지는 햇볕 아래서 구릿빛으로 몸을 태우며 수영하는 바닷가에서의 휴가도 좋지만, 때로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조용히 사색에 잠기는 시간도 현대인들에겐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의 선택에 의해 피서의 방법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으니까.세월의 이끼 낀 멋스런 기와 아래 계림비각은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육각형의 비각으로 계림의 내력과 김알지의 탄생 설화를 새긴 ‘경주 김알지 탄생기록비(慶州 金閼智 誕生記錄碑)’가 내부에 자리했다. 대석, 비신, 개석으로 이뤄진 이 비석은 영의정 남공철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경주부윤 최헌중이 썼다고 알려졌다. 비각을 둘러싼 야트막한 토담이 예스러워 사람을 자꾸 돌아보게 만든다.계림은 교촌마을과도 지척이다. 숲을 빠져나와 거길 가려고 하다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새긴 향가비(鄕歌碑)와 우연히 만났다. 사전에 어떠한 정보도 없이 마주친 1천300여 년 전 신라의 옛 노래가 기자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젊은 화랑 기파랑의 고매한 품성을 자연에 비유한 향가. ‘삼국유사’에 실린 ‘찬기파랑가’의 서두를 현대적으로 풀어쓰면 이렇다.‘슬픔을 지우며 나타나 밝게 비친 달이흰 구름을 따라 멀리 떠난 것은 무슨 까닭인가…’이 구절을 조용히 혼잣말로 읊조리자 8월의 무더위를 잊게 해줄 달 환한 서라벌의 여름밤 풍경이 떠올랐고, 무심히 떠가는 흰 구름이 마지막에 가 닿을 곳은 어디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면 계림은 보통 사람을 예술가로 만드는 힘을 가진 숲이다.◆ 계림의 형태와 속성에 대한 연구도 활성화돼야…천년왕국 신라의 흥미로운 설화가 깃든 계림은 더위를 피할 최적의 장소이며,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전설과 신화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여행지다. 가족이 함께 찾는다면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무궁무진할 듯했다.이와 함께 25종 510개체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계림은 우리가 귀하게 보존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향기로운 숲’이기도 할 것이다.그럼에도 ‘설화의 공간’이 아닌 ‘숲’으로서의 계림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것 같다.한국조경학회지에 실린 논문 ‘문화재로서 경주 계림 내 생육수목 현황 및 공간정보 구축 연구’(홍석환·안미연·강래열)는 그 아쉬움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계림의 중요성은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지속되는데, 신라시대부터 신라의 신성한 숲으로 보호되었으며,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이듬해 1월 사적으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문화재로 인식돼 왔다. 문화재의 조기 지정은 이 당시까지 숲이 훌륭하게 보전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계림은 문화재 지정 이후 60년 이상을 적극적으로 국가가 관리하고 있는 역사적 숲임에도 불구하고, 지정의 근본적 이유인 숲의 형태와 속성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현재까지 없는 상태이며…(하략)”역사의 현장이 관광 콘텐츠가 되기 위해선 하드웨어에 대한 철저한 조사도 필요하다. 전설과 신화라는 소프트웨어에 더해 ‘숲에 대한 연구’까지 활발히 진행된다면 계림은 둘 모두를 갖춘 서라벌의 보물로 우뚝 서지 않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0-08-20

말 갑옷 입고… 화려하고 찬란한 신라시대로 여행

지상에 유토피아(Utopia·불합리와 부조리가 사라진 완벽한 사회)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인류의 역사는 그걸 증명한다.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보자.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불문하고 ‘빈틈없는 온전한 세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 ‘유토피아가 실재할 수 있다’는 희망을.천국은 유토피아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이상사회(理想社會)를 꿈꿔 왔다. 그 연장선에서 소설가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도서관을 유토피아 혹은, 천국이라 지목했다. 축적된 인류의 정신적 자산이라 할 책이 진열된 도서관을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장소로 본 것이다. 수긍이 가능한 주장이다.그렇다면 박물관은 어떨까? 의미와 가치를 동시에 지닌 책을 포함한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적 유물, 여기에 갖가지 예술품 등을 한데 모아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박물관. 이곳 또한 실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닐지.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사태’. 여기에 물난리와 태풍까지 겹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기 힘들어진 2020년 여름을 겪는 이들에겐 “세상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다”란 문장이 실감으로 다가온다.답답함과 우울함이 모기떼처럼 밀려오는 폭염과 폭우의 나날. 밑으로만 가라앉는 기분을 달래려 경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과연 ‘우리 안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신라의 역사와 핵심적 문화·예술품을 한곳에서‘뚜벅이 여행자’라면 터미널에서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박물관까지 걸어보길 권한다.많은 이들이 말하듯 “경주는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다.대릉원, 황리단길, 첨성대, 동궁과 월지 등을 친구 삼아 국립경주박물관까지 유유자적 걷는다면 택시 안에선 볼 수 없는 세세한 풍광들과 만나게 된다. 이 40분쯤의 즐거움은 흐르는 땀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때가 때이니만치 경주박물관 입구에선 입장객들의 체온을 체크하고, 마스크 착용을 부탁하고 있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주말엔 동시 입장객의 숫자도 제한해 보다 안전한 관람을 유도한다.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커다란 종(鐘)과 시원한 그늘이 사람들을 반겼다. 군데군데 마련된 벤치 중 한 곳에 앉아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열었다. 눈앞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펼쳐진다.“경주박물관에선 압축된 신라 천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경주 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로 들러 미리 공부한 후 곳곳의 문화유산을 만나면 알찬 여행이 될 것이다. 박물관은 대표 전시관인 신라역사관을 비롯해 신라미술관, 월지관 등의 상설전시관 세 곳과 기획전시가 열리는 특별전시관으로 구성됐다.신라역사관은 신라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일련의 역사를 나눠 전시한다. 신라 불교 미술에 대해 알고 싶다면 신라미술관으로 가면 된다. 월지관은 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를 토대로 출토 유물을 정리해둔 전시관이다. 상설전시관에선 전시해설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박물관 뜰에 전시된 국보급 문화재다. 이곳을 둘러보며 성덕대왕 신종과 고선사지 삼층석탑 등 귀한 유물과 만나보자.”기자가 경주박물관을 찾은 날은 여름 방학을 맞아 부모와 함께 온 어린 학생들이 주된 관람객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전시관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뛰어다니지 않았고, 의젓하게 신라의 불상과 토기 등을 살피며 관람 매너를 지키고 있었다.신라역사관에선 열 살 남짓의 남매가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을 설명해주는 젊은 아버지의 조용한 목소리에 흥미롭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몹시도 다정해 보였다.◆ 박물관, 옛것을 본받아 새로움을 만들어 가는 공간여간해선 직접 보기 힘든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을 살핀 뒤 입장한 신라역사관은 4개의 전시실로 운영되는 공간.이곳이 매력적인 이유는 1천 년 가깝게 이어져온 신라의 역사, 그 시작과 끝을 짧은 시간 안에 요약해 보여준다는 것이다.첫 번째 전시실엔 구석기 시대부터 6세기 초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돼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천년왕국의 기틀을 마련한 때다.제2전시실에 들어서면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화려한 금관을 비롯해 정교하게 제작된 각종 금·은 장신구 수백 점이 관람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지금은 전시환경 개선사업이 진행 중인 3전시실과 4전시실에선 신라의 영토 확장과 중앙집권제 국가로의 성장 과정,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적 특성, 신라 멸망의 이유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사업이 완료되는 올해 11월 말 이후면 이 두 전시실도 다시 사람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대구교육박물관 김정학 관장은 최근 출간된 ‘박물관에서 무릎을 치다’를 통해 역사를 주제로 한 박물관의 중요성과 지향점을 아래와 같이 말했다. 새겨들어볼 가치가 충분하다.“역사 공부의 가장 큰 덕목은 그것이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옛것에 미루어 새로움을 발견하고 옛것을 본받아 새로움을 만들어 가는 삶을 생각하면,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박물관은 참으로 귀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중략) 박물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규모의 장대함보다 콘텐츠를 통한 체험과 감동의 크기다.”사실 역사를 그저 흘러간 시간의 부스러기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 믿음이 옳은 것일까?과거에 기대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없다. 미래를 계획하는 데에도 과거는 중요한 재료로 역할한다. 바로 이 과거의 총합이 역사가 아닐지. 그렇기에 현인(賢人)들은 “역사를 배척하고는 앞날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해 왔다.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국립경주박물관은 배척해서는 안 될 귀한 역사 유산을 가득 담은 서라벌의 보물인 동시에, 관람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양질의 콘텐츠를 다수 간직한 ‘미래지향적 공간’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빼놓을 수 없는 월지관과 신라미술관마음먹고 온 길이니 월지관과 신라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었다. 금동용머리장식과 금동심지가위 등 보물급 유물 여러 점이 여행자를 기다리는 월지관에선 통일신라시대의 왕실·귀족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1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레바퀴 자국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불교미술실, 황룡사실, 국은기념실로 구성된 신라미술관은 남산 장창골 미륵삼존불,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기와, 말탄무사모양 뿔잔 등을 전시하고 있다. 족히 일흔은 넘어 보이는 노부부 한 쌍이 백률사 약사불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이 따뜻하고 애틋했다.특별전시관에선 ‘말, 갑옷을 입다’는 타이틀의 전시회가 진행 중이었다. 왜 사람이 아닌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혔을까?신라의 말 갑옷과 말 투구는 물론 백제와 고구려의 다양한 말 관련 유물이 관람객들의 흥미와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특별전은 8월 23일까지 열리니 위 의문에 대한 해답은 경주박물관을 찾아 직접 풀어보시길.꽤 넓은 박물관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거닐다 보니 3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어린이박물관과 수장고 전용 건물 신라천년보고(寶庫)의 로비전시실은 다음 기회에 조카들과 함께 방문하기로 하고 귀가를 서둘렀다.돌아오는 버스 안. 국립경주박물관이 ‘우리 안의 유토피아’ 중 한 곳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기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지금도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찾고 있다는 것./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0-08-13

파여진 바위·산 군데군데 부처님들이 큰 뜻을 품다

비단 종교인만은 아닐 것이다. 무신론자들도 세상살이 번잡함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을 땐 절이나 성당, 또는 교회를 찾아간다. 주위에서 그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기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낯선 곳으로 떠난 여행에선 오래된 사원이나 이름난 중세 성당을 빼놓지 않고 방문하곤 했다. 종교를 떠나 인간 모두에겐 안식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찾았던 몇 해 전엔 불가리아 정교회 교당에 갔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성직자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안정과 편안함을 얻었다. 그 감정은 일상에선 얻기 힘든 특별한 선물 같은 것이었다.◆ 평화로운 산사(山寺)의 여름 풍경을 만나러…여름이 진홍빛 복숭아처럼 무르익고 있다. 햇살은 뜨겁고 장마는 길었다. 곧 폭염과 열대야가 지루하게 이어질 게 분명하다. 답답한 도시에 갇혀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스스로는 스트레스에 지쳐가는 계절. 이럴 땐 시원스런 매미 울음과 짙푸른 녹음이 몸과 마음을 위로해주는 조용한 산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잠시잠깐이지만 푸르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 자신을 던져 넣고 싶어지는 시기다.경주시 양북면에 자리한 기림사와 골굴사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요구에 맞춤하는 안식처가 될 수 있을 듯했다.지척에 위치한 두 사찰은 오르는 길의 매혹적인 풍경과 조용한 절의 공기가 여행자를 유혹한다. 곳곳에 핀 색색깔 꽃들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도 세파에 시달려온 우리를 위로해준다.동국대학교 한상길 교수는 “불교 사찰은 좁은 의미에서는 수행과 포교를 위해 수행자가 거주하는 곳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1천500년 이상을 가꿔 온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이 함축되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기림사와 골굴사 또한 경주의 역사와 문화, 전통이 집약돼 있는 ‘서라벌의 보물’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기자가 탄 차는 어느새 기림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크고 작은 꽃들이 반기는 기림사10~15분 남짓, 절로 향하는 길이 더위에 지친 이들의 어깨를 다독인다.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은 시원스럽고, 숲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은 더없이 자유로워 보였다.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가 발행한 핸드북은 제목부터가 관광객을 설레게 한다. ‘나를 위한 행복여행’. 거기선 기림사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래 옮긴다.“여러 문헌에 의하면 인도의 승려인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제자 안락국에게 ‘해동의 신령한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한 길지(吉地)에 임정사(林井寺)를 창건하고, 오정수(五淨水)를 길어 차를 달여 부처 앞에 공양 올리며 수행하라고 했다. 이를 통해 신라시대에 이미 기림사에서 차가 재배되고 있었고, 이 도량의 역사가 차와 함께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중략) 기림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훈련 주둔지이기도 했다.”기림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미적 완성도를 갖춘 건축물과 함께 무더위 속에서도 자신의 빛깔을 간직한 갖가지 여름꽃들이 사찰을 찾은 연인과 가족을 반겼다. 그 앞에서 8월의 폭염이 한풀 꺾이고 있었다.독특한 점은 또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제 833호)과 명부전 등 기림사 내 건물들 앞엔 주련(柱聯·벽이나 기둥에 쓰인 글귀)을 해석한 푯말이 서있다. 다른 절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대부분이 한자이기에 그 뜻이 궁금해도 어쩔 수 없이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여행자들에겐 기림사 주련을 읽는 재미도 만만찮을 것 같았다.기자 역시 “세상에 악을 행하는 사람은 많지만, 착하게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은 적다”라는 푯말 앞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여러 번 읽어야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문장이었다.기림사를 찾는다면 누구나 보게 되는 대적광전은 정면 5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 기림사의 본전으로 신라시대 때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제 모습을 많은 부분 잃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조선 정조 10년(1786년) 경주부윤이었던 김광묵이 중창(重創·낡은 건물을 고쳐 다시 지음)한 것.안팎이 두루 아름다운 기림사는 여름에도 좋지만,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더 유명하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달게 마시고 대적광전 계단에 앉아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열었다. 거기선 이런 설명이 이어졌다.“기림사는 선덕여왕 때인 643년 창건됐다. 당시 이름은 임정사였는데 원효대사가 기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엔 불국사를 비롯해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대한 사찰이었다. ‘비로자나 삼신불’이 봉안된 대적광전과 약사전,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진남루 등 귀한 유산을 품고 있다. 대적광전을 마주보고 좌측 계단에 오르면 3천 개의 하얀 불상이 본존불 주변을 둘러싼 삼천불전(三千佛殿)이 있다.”유유자적 기림사를 구석구석 돌아보곤 다가오는 가을에 다시 한 번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울긋불긋한 단풍을 만날 수 있겠지. 그 기대만으로도 지루한 여름을 견뎌낼 힘이 생겨났다.이제 기림사에서 자동차로 5~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골굴사와 만날 시간이다. 거기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한국의 둔황’으로 불리는 골굴사고상현의 논문 ‘골굴사와 선무도의 축전 문화콘텐츠 연구’는 이렇게 시작된다.“골굴사는 경주 양북면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석굴사원(石窟寺院)이다. 조선시대에는 골굴사 내에 12곳의 석굴사원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에선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581호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골굴사 역시 가람(伽藍)으로 올라가는 길이 적요해서 인상적이다. 온갖 소음과 네온사인 불빛이 사람을 어지럽게 만드는 도시에선 경험해보지 못한 여유로운 산책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이런 게 피서지로 산사를 찾는 이유가 아닐지.경주 시내에서 동해 쪽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골굴사는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6세기 무렵 10개가 넘는 석굴을 만들었고, 이것들은 법당으로 사용됐다. 응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인공 석굴사원이기에 ‘한국의 둔황(敦煌)’으로도 불리는 골굴사.20~30대 시절. 인도와 라오스를 여행하던 기자는 크고 작은 동굴 안에 만들어진 불상의 신비스러움에 매료되곤 했다. 조그만 한 점도 깎아내기 힘든 단단한 바위에 거대한 부처의 형상을 새기고, 그 공간을 불당처럼 조성한 옛사람들의 신심(信心)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골굴사를 포함한 세상의 석굴사원 모두는 신을 향한 인간의 믿음이 어떤 일을 이뤄낼 수 있는지를 실물로 보여주는 진경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신론자가 보기엔 놀라운 모습. 경내에서 올려다보는 깎아지른 절벽과 새파란 하늘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골굴사는 삶의 유한함과 꿈의 무한함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여기저기 돌아보며 흐른 땀을 식히려 그늘을 찾아가던 길. 골굴사가 ‘선무도(禪武道)의 본산’이며 승려들의 시범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정보도 알게 됐다. 오래전부터 불가(佛家)의 전통적 수행법으로 내려왔다는 선무도. 신라의 화랑들도 수련한 무예라고 하니, 궁금한 사람들은 공연 시간에 맞춰 골굴사를 찾으면 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8-06

파도·바람·바위·시간이 빚어낸 보물이 숨쉬는 경주의 바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는 특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입에서 발음되는 순간, 그 즉시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경주가 가진 이미지는 고풍스럽고 묵직하다.천년 세월 동안 이름을 간직한 오래된 사찰, 거대하고 부드러운 반구(半球)의 형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수많은 고분들, 남산에 뿌리를 내리고 세파를 견디며 숲을 이룬 부드럽게 굽은 소나무….경주는 위와 같은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진녹색의 풍경 속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도시 서라벌. 이는 산과 가람, 왕릉 등이 결합해 만들어낸 압도적인 이미지다.그래서일까? 경주를 찾은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바다’를 떠올리는 경우는 드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경주에도 바다가 있다. 그것도 청량한 파도 소리가 귓전을 간질이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바다.“앞으로는 장마와 더위가 긴 기간 이어질 것”이란 기상 예보가 들려온 7월 하순 어느 날 오후. 낭만적인 피서지를 찾아 경주 시내를 벗어나 양남면을 향했다.승용차로는 약 40~50분, 경주시외·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도 1시간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서라벌의 푸른 보물’이 있으니, 바로 ‘주상절리(柱狀節理)’와 ‘파도소리길’이다.◆ 기묘한 형상으로 사람들을 반기는 양남 주상절리차에서 내려 바다를 향해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앞에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검은 병풍을 눕혀놓은 듯한 모습을 한 양남 주상절리다.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이 풍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2012년 양남면 읍천리에 자리했던 군부대가 옮겨가면서 숨겨져 있던 보물이 세상에 나왔다. 파도, 바람, 바위, 시간이 빚어낸 보물 양남 주상절리군(群)이다. 주상절리는 화산암 지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로 솟은 모양의 육각형 돌기둥을 뜻한다.양남 주상절리군에서는 위로 솟은 주상절리뿐만 아니라, 부채꼴 주상절리, 기울어진 주상절리, 누워있는 주상절리 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를 관찰할 수 있다. 발달 규모와 형태의 다양성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됐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둥글게 펼쳐진 부채꼴 주상절리.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형태다.”주상(柱狀)은 기둥의 형상, 절리(節理)는 암석에서 볼 수 있는 나란한 결, 또는 갈라진 틈을 의미한다. 그러니 주상절리란 나란한 결로 갈라진 기둥 형태의 바위라고 보면 될 듯하다.여행자가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양남의 주상절리는 제주도 중문의 주상절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낸다. 몇 해 전. 비행기를 타고 가서 본 제주의 주상절리는 바다와 대립된 수직의 자세로 우뚝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꺾으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웅장하고 남성적인 모습이었다.반면 경주의 주상절리는 파란 물결과 하나가 되려는 듯 바다를 향해 발을 뻗고 있는 수평의 형태다. 제주의 그것에 비해 작은 규모지만 온화하고 여성적으로 느껴졌다.자연이 펼치는 마술은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영역이다.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주상절리란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생긴 것이겠지만, 양남 바닷가에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만난 주상절리는 자연이란 마법사가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내기 위해 만들어놓은 ‘기묘한 예술품’으로 다가왔다.양남 주상절리가 형성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천60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까마득한 시간의 저편.지금 기자가 보고 있는 풍경을 1천500년 전 신라인들도 봤다고 생각하니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시간의 연속성’이 실감으로 전해진다.제대로 된 교통편이 없었던 옛날. 서라벌의 소년들은 무리 지어 모험을 떠나듯 발걸음을 재촉해 동남쪽 양남 바닷가로 더위를 피해 왔을 것이다.그리고, 그중 하나는 주상절리 끝자락에서 몸을 던져 함께 온 친구들에게 수영 실력을 과시하지 않았을까? 변변한 수영복도 없이.한없이 평화로운 해변 풍광 속에서 접혀 있던 상상력의 날개를 펴는 짙푸른 경주의 여름. 너무나 아름다워 혼자 즐기기엔 아까웠다.◆ 신경림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파도소리길‘일상’이라는 이름의 감옥 속에 갇혀 있던 현대인들에게 돌아가고픈 원시의 풍경을 선물하는 경주의 바다. 여기까지 왔으니 1시간쯤 할애해 잘 정돈된 해변 산책로를 걸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양남엔 괜찮은 음식점과 근사한 카페가 적지 않다. 가볍게 요기부터 한 후 얼음 섞인 차가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파도소리길’에 들어섰다.누구의 작명인지 몰라도 산책로 이름을 기막히게 잘 지었다. 초입에서부터 무더위를 저 멀리 내쫓는 시원스런 파도 소리가 여행자를 반긴다.들머리에 1.7km 가량 이어지는 파도소리길에 대한 경주시의 친절한 설명이 안내판에 적혀 있다.“양남 주상절리를 곁에 두고 거닐 수 있도록 읍천항에서 하서항에 이르는 해안 산책로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이 조성됐다. 데크로드, 정자, 벤치, 구름다리 등이 잘 정비돼 있고, 중간엔 주상절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으니 꼭 찾아보시길 권한다.”앞서 걷는 어린 아들과 젊은 아버지의 등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저토록 비밀스럽게 나누고 있는 것일지. 부자의 뒷모습이 먼 기억 안에서 사람살이의 풍경을 노래한 시인 신경림(84)의 ‘동해 바다’를 소환시켰다. 그 절창 중 한 대목을 아래 옮긴다.‘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깊고 짙푸른 바다처럼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20~30년을 먼저 냉혹한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아버지. 아직 물정 어두운 아들에게 조그만 충고라도 해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 신경림의 시는 바로 그런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아들이 타인에게는 너그럽고, 자신에겐 엄정하기를 내심 기대한다. 그런 이타적인 사람으로 커가길 열망한다. 그건 15세기 전 서라벌 아버지나, 2020년 오늘의 아버지가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어때요? ‘생명의 시원’ 바다로 떠나는 경주 여행양남 주상절리를 옆에 끼고 해변 산책로를 다정하게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국문학자 김윤식(1936~2018)이 말한 ‘존재의 시원(始原)’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거기서 의미를 조금 더 넓혀 드넓은 바다를 떠올린다. 인간의 생성과 소멸이 좁은 차원에서의 ‘존재’ 문제라면, 보다 확장된 의미로서의 지구 위 모든 ‘생명’은 바로 바다에 그 시원을 두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움트고 생겨난 곳.길었던 여름 하루가 지는 해와 함께 까무룩 사라지는 양남 바닷가. 드문드문 오렌지 빛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다정한 부자는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알고 주상절리 검은 바위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기자 역시 기대 이상의 감흥을 선사한 경주의 여름 바다에 작별을 고했다. ‘곧 다시 찾아올 것’이란 소리 없는 약속을 전하며./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7-30

경이로운 아름다움 그 자체…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중년들 중 경주에 관한 추억 한 조각 없는 사람이 있을까?분명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박철화 역시 마찬가지. 그는 1981년 경주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서라벌의 보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목했다. 신라와 신라인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원고를 아래 싣는다.필자인 박철화는 서울대 불문과와 프랑스 파리 8대학·10대학에 공부했다. /편집자 주고교 2학년 가을. 내가 경주 수학여행을 가기로 한 것은 불국사가 아니고 순전히 바다 때문이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강원도 내륙 도시 춘천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때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사진을 통해서나 불과 몇 달 전 시작한 칼라TV 방송에서 간접적으로 파란 바다를 보긴 했다.태어나서 내내 온 사방을 둘러싼 산을 보며 자란 내게 바다는 놀라우리만큼 단순하고 명쾌한 풍경이었다. 상당한 시각적 충격이었는지 그 풍경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당시 감기 끝물에다 장염에 시달리던 내가 약을 복용하면서까지 수학여행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는 그것이었다.가는 길은 지루했고, 중간에 들른 장소들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다만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경주와 신라의 문화에 대한 선생님들의 소개가 있었다. 하지만 10대 후반 소년들에게 그 말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알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신비한 설화나, 하얀 피를 뿌리며 순교하여 이 땅에 불교를 받아들이는 전기를 마련했고, 그 불교문화의 찬란한 중심지가 바로 경주여서, 이번 수학여행의 목표가 그런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이라는 이야기 등등.그런데 대체 그게 시커먼 교복을 입고 한 반에 70명 넘게 구겨 앉아 있다가 풀려난 우리들의 청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떼로 몸을 뒤틀며 우리는 저녁 무렵 경주에 도착했고 여관에 짐을 풀었다. 첫날은 경주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불국사를 거쳐 감포 문무대왕릉과 울산 조선소 탐방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10대 후반의 고삐 풀린 청춘들이란 어디서나 본능적으로 이성을 찾아간다. 좁은 버스 안에서 몸을 비비꼬다가 간신히 풀려난 우리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엇비슷한 시간에 버스에서 내린, 건너편 여관에 묵을 여고생들이었다. 전주에서 왔다는 그 여고생들에게 친구들은 선생님들 눈을 피해 수작을 걸었다. 키가 180cm 가까웠던 나는 얼굴마담 노릇하느라 앞에 섰고 ‘말빨’ 좋은 친구가 곁에서 여학생과의 약속을 받아냈다. 경주의 첫인상은 그러했다.문제는 내가 저녁을 먹자마자 약을 먹고 인솔교사 방에서 잠이 들어버린 거였다. 그 사이 친구들은 선생님들의 철벽 방어를 뚫고 몇몇이 몰래 나가서 여학생들을 만났는데, ‘신라의 달밤’이 신통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컨디션을 회복하고 나타난 내게 책임지라며 투덜거린 것을 보면. 그 가운데 한 여학생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펜팔 요청 쪽지를 건네받았지만 그걸 간직하지 않았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온 여행이었다. 아침 먹고 올라온 불국사 경내 어딘가에서 그 쪽지를 버렸다.그것은 황홀한 아름다움에 대한 경배였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어서 절에 간 경험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버지가 재직한 관할 면의 소양댐 안 청평사 정도에 가봤을 뿐이다. 그런 내 눈에 불국사와 석굴암은 놀라움 자체였다. 자연과 인위, 무심함과 정교함, 화려함과 절제, 위엄과 겸손까지…. 무엇 하나 보태고 뺄 것이 없었다. 짧은 인생 경험으로 보기에도 가장 완벽한 미의 원형이었다. 내가 그 여학생의 쪽지를 버렸다는 말은 그러니 수정되어야 한다. 정신이 팔려서 아예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는 기억조차 못하고 잃어버렸다. 석굴암을 나와 부지런히 혼자 다시 찾아가 둘러본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불국사를 품고 있는 산부터 경주의 모든 것이 지워지지 않는 의미가 된 것이다.그날 아침 이후로 수학여행의 의미가 바뀌었다. 바다가 뒷전이었다. 물론 처음 본 바다가 놀랍지 않을 리 없다. 모래, 바다, 하늘로 선이 그러진 3등분의 세계는 굳이 표현하자면 미니멀리즘의 극치였고,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추상회화의 원조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숨결이 들어 있지 않다. 인공낙원의 향취가 없는 것이다.그것보다는 가는 길에 본 감은사지 석탑 주변 쇠락한 삶의 자취, 인위적 흔적의 황량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감포 끝자락에서 본 문무대왕릉도 놀랍긴 했지만 이미 불국사와 석굴암에 마음을 빼앗긴 내게는 역사적 사연 가득한 자연물 정도였다. 그 점은 경주를 지나 울산 조선소에 가서 본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능가하는 배가 품은 산업화의 근대문명을 마주하면서 이번에는 그 과도한 인위에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최선의 조화를 이룬 이상적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때로 생각한다. 예술적이지 않은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내가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왜 문학과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물론 타고난 기질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 기질도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그토록 두드러지게 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돌이켜보면 1981년의 수학여행은 내게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 동경을 심어준 계기가 아니었을까? 기질이 화약이라면, 불국사와 석굴암과의 만남은 영혼의 뇌관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 경주는 늘 내 영혼의 처소 깊숙한 곳에 머물다 호출되곤 했다. 박물관에서 전시를 보다가, 책을 뒤적이다가 경주가 나오면 나는 곧장 그 수학여행의 아침으로 되돌아가곤 한다.프랑스문학을 전공한 터라 대학을 마치고 유럽에서 몇 년 더 밀린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물렀다. 현대시가 전공이었지만 미술과의 관계를 다루는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핑계로 유럽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물론 유럽은 놀라운 곳이다. 근대문명을 만든 주인공들답게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 것을 능가하는 문화유산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고 내 핏속에는 우리의 역사와 자연에서 우러난 개별적 미의 원형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휘황한 문화유산 앞에서도 나는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한가운데에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지금이야 많이 알려졌지만 1990년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한국은 동아시아 한구석의 크게 의미 없는 존재였다. 중국의 스케일과 일본의 경제력과 정교함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거의 몰랐다. 우리가 한글이라는 독자적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에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도 가끔 한국을 궁금해하며 가보려는 외국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경주를 권했다. 내가 박가여서 신라 왕족의 후예라는 허풍 섞인 이야기까지 얹어주면 순진한 그들은 마냥 좋아했다. 그리고 돌아온 반응은 놀랍다는 것이었다.당시 한국까지 갈 정도면 아시아 문화와 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유럽인이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라는 찬사가 거의 다였다. 경주 남산의 석불들, 대릉원, 곳곳의 폐사지들….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불국사와 석굴암이었다. 유럽 문명의 후예로 그들 나름의 미적 기준을 갖고 있는 개성 중시의 외국인들에게도 불국사와 석굴암은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단순한 이국 취향에 머물지 않았다.문학평론가 박철화.신라 천년왕국이 빚어낸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는 이상적 아름다움의 뚜렷한 증거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유럽에서 돌아온 뒤로 여러 번 경주에 갔다. 보문단지의 벚꽃, 감포 문무대왕릉, 찰주에 보름달이 걸리던 심야의 감은사지, 용장사곡 삼층석탑처럼 남산에 숨어 있듯 남은 다 닳은 석탑과 석불들….거기서 쇠락한 문화의 쓸쓸함에 전염되기도 했지만 나는 늘 불국사와 석굴암의 정돈된 아름다움, 인간의 세속적 삶을 넘어 종교의 영원한 성스러움이 번져나가는 그 자리의 끈질김과 단단함에서 영혼의 기운을 얻곤 했다.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거의 40년 전 아침, 불국사 마당에서 듣던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2020-07-23

동탑·서탑 나란히 마주서 나라를 지키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생의 허무와 쓸쓸함이 견딜 수 없는 감정으로 밀어닥치는 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고,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혼자서 고요 속으로 침잠하고 싶은 날은 누구에게나 온다.그럴 때 당신에게 잠시잠깐이나마 위로와 편안함을 선물할 여행지를 알고 있다.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35km쯤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양북면 감은사지(感恩寺址).지척에서 바다가 출렁이는 이 ‘오래된 절터’는 주요 유물이 출토된 거대한 석탑과 금당(절의 본당)·강당(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학습장)터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청아한 소리로 우는 여러 마리의 새가 몰려드는 감은사지 뒤편 산속. 바람이 일으키는 파동에 따라 술렁이는 대나무와 소나무의 합창은 번잡한 도시에선 경험할 수 없는 평화로움으로 우리를 이끈다.장마와 폭염을 앞둔 7월 초 한가한 평일 오후. 감은사지를 찾아 2개의 석탑 주위를 찬찬히 돌아보고, 야트막한 산 아래 그늘에 앉아 1천300년 전 신라 사람들의 숨소리를 느껴봤다. 답답하게 막혔던 가슴 한 구석이 트이는 기분이었다.‘서라벌의 숨겨진 보물’이라 불러도 좋을 감은사지는 주위 풍경이 기막힐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찰이 있었던 곳이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감은사가 세워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동해안에 위치하고 신문왕 2년(682년)에 그의 아버지 문무대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하였다. 부근 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인 대왕암이 있다. 문무왕은 빈번히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호국사찰을 조영하던 중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이 승려 지의(知義)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신문왕은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었다는 감은사 금당1950년대 감은사지 일대를 찍은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1천년 가까이 지속된 천년왕국 신라. 그중에서도 삼국통일을 이끈 문무왕과 통일왕국의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축조한 신문왕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새겨진 그곳에 살던 70년 전 경주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어떤 걸 느꼈을까?자신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공간 옆에 자리한 역사의 현장. 매일 밤마다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됐다는 문무왕과 아버지를 위해 용이 쉴만한 거대한 지하공간을 절 아래 만들었다는 신문왕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을지.그리고 2020년 오늘. 기자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이어폰을 통해 바그너(Richard Wagner)나 쇼스타코비치(Dmitrii Shostakovich)의 장엄한 음악을 들으며 감은사지에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환희와 환멸을 두서없이 떠올린다.단조롭고 무심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선물 같은 여행지’가 돼준 감은사지. 여기서 본격적인 발굴·조사 작업이 시작된 건 60년 전쯤이다.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간다.“1959년 시작한 감은사의 발굴은 우리나라 연구자들에 의한 최초의 사지(寺址) 발굴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3차에 걸친 발굴과 조사를 통해 유물을 수습하고 사지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남아시아 힌두사원이나 페르시아 이슬람 유적처럼 입이 딱 벌어질만한 웅장한 규모도 아닌 감은사지. 하지만, 석탑을 포함한 유적·유물의 미학적 완성도는 다른 어떤 사찰에서 발견된 것들보다 높다는 게 역사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2개의 탑이 마주 선 사찰인 감은사는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성됐다는 것,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중회랑을 두었다는 것 등이 특이한 점이다. 2층으로 기단을 쌓고 기단의 각 면 중앙에 돌계단을 놓은 감은사지 금당은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지면과 건물 사이에 꽤나 높고 넓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는 것.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건축 양식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비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흥미롭다.◆ 호국사찰인 동시에 예술적 사찰이었던 감은사지인의 자동차를 타고 화장된 문무왕의 뼈가 묻혔다는 봉길리 앞바다 수중릉을 만나고, 감은사지를 돌아보던 날. 인적 드문 그곳에서 1천300년 전 신라를 상상했다. 아버지의 애국심과 아들의 효심이 만들어낸 14세기 전 유적들. 아득한 시간이 부유물처럼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어디선가 돌탑을 깎고 다듬는 석공의 가쁜 호흡과 금당 서까래를 올리는 목공들의 기운 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절터에 돋아난 키 작은 풀들은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감은사가 만들어지던 그 시절과 다름없이. 들뜬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며.사실 감은사는 문무왕의 호국의지가 담긴 절이면서, 빼어난 불교 유물이 발견된 ‘예술적 사찰’이기도 하다.동국대 한정호의 논문 ‘감은사지 삼층석탑 창건 과정과 의장계획(意匠計劃)에 대한 연구’의 첫머리를 아래 옮긴다.“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문무왕과 신문왕 시기에 걸쳐 창건된 감은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감은사가 창건되던 시기는 삼국통일을 통해 한반도를 장악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흡수·통합하여 전제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시기로 새로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통일국가의 위상을 표방하기 위한 왕실 주도의 조영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다. 이와 함께 신라의 불교미술에서도 전대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양식이 대두되는 일대의 변혁기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앞서 말한 것처럼 1959년 감은사지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시작됐다. 그즈음 서쪽 삼층석탑을 해체·수리하던 사람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발견을 한다.신라인들의 예술적 감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함과 사리병 등 사리를 봉안하는 일체의 장치)가 나온 것이다. 이것들은 1963년 보물 제366호로 지정된다.1996년엔 동쪽 삼층석탑의 해체·조사 과정에서 서쪽 석탑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사리장엄구가 발굴 팀에 의해 수습된다. 또 한 번의 ‘의미 있고 유쾌한 발견’이었다. 이와 관련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8권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선 통일신라 초기의 불교예술과 사리장엄구에 관한 서술을 확인할 수 있다.“삼국통일 전쟁이 끝난 후 통일신라에서는 안정된 문화가 발달했으며, 특히 불교를 중심으로 한 조형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사리장엄구 역시 통일 직후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 경에 가장 화려한 양식으로 구현됐다. 이 시기의 사리장엄구는 고신라의 문화적 전통과 새로이 전래된 당나라 문화의 영향이 결합돼 새롭고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삶, 예측할 수 없기에 희망도 있는 게 아닐지‘통일신라시대 초반의 뛰어나고 정교한 금속공예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받는 감은사지 사리장엄구를 바로 눈앞에서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61년 전 그걸 처음으로 발견한 조사원의 심장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뛰었을까? 그리고, 1천300년 전 신라의 공예가는 자신의 예술품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후손들과 만나게 될 것을 짐작이라도 했을까?우리 또한 까마득한 과거에 존재했던 신라의 예술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인간은 어느 시대, 어느 땅에도 없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누구도 앞날을 알 수 없기에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희망을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닐지.대숲과 솔숲에서 풍겨오는 향기 사이로 걷는 감은사지에서의 산책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으로 우리를 이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생각들이 허망함과 외로움을 떨쳐낼 작은 힘이 돼주니 고마운 일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7-16

고풍스런 기와·멋스런 초가, 때묻지 않은 풍광은 한폭의 그림 같아라

본문에 앞서 먼저 사적인 경험 한 토막.1970년대 초·중반. 영남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외가를 자주 찾았다. 그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TV는 물론, 라디오와 전기밥솥도 없거나 드물던 곳. 모든 것이 지금과 비교하자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그럼에도 벽촌 구석구석까지 인터넷이 개통되고, 여든 살 촌로들도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2020년 오늘보다 매력적인 게 분명 존재했다. 동네를 걸으면 콧속으로 스며들던 향긋한 아카시아 향기, 기와를 머리에 인 고풍스런 집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드물지 않게 멋스런 초가(草家)가 있었고, 장작을 때던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매캐했지만 더없이 낭만적이었던 마을. 이것들을 보고 느낀 기억이 4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또렷하게 떠오른다.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위와 같은 경험을 해본 50대 여행자들에게 견딜 수 없이 아릿한 노스탤지어를 소환해준다. 어디서도 쉽게 맛볼 수 없는 느낌이다. 기자 역시 그랬다.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 향수를 선물하는 양동마을은 젊은 세대들에겐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 나를 키워냈구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한다.◆ 초여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을 거닐다간헐적으로 쏟아지는 빗방울과 이르게 찾아온 더위가 반복되던 7월 초순. 양동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정거장에서 마을로 가는 길. 일찍 잠에서 깬 매미가 ‘너의 유년을 기억해보라’는 듯 청량하게 울었다.이곳은 조선시대 빼어난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대를 이어 살아오는 집성촌(集姓村). 미려한 산세는 물론, 풍수학적으로도 빼어난 지세(地勢)라 예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만한 지역’으로 이름이 높았다. 인재가 모여들고, 권세가 생겨날 만했다.2010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된 양동마을. ‘서라벌의 주요 관광자원’을 소개하는 경주시는 이 마을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봉우리에서 네 줄기로 능선과 골짜기가 뻗어 내려와 물(勿)자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골짜기에 160여 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초가가 모여 있다. 조선조 과거급제자가 116명이나 나왔고, 우재 손중돈, 회재 이언적 등 명망 있는 관료와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주요 고택(古宅)으로는 회재 이언적에게 왕이 하사한 집 향단, 월성 손씨의 종택인 서백당(송첨종택), 회재 이언적의 부친이 기거하던 집 무첨당, 우재 손중돈이 살던 관가정 등이 있다.”내려쬐는 햇살을 등에 지고 그 옛날 반가(班家)의 자손처럼 서두름 없는 발걸음으로 마을을 돌아봤다.높이 솟아 우뚝한 조선의 성리학자 이언적의 흔적은 무첨당(無堂·보물 제411호)에 남아 있었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종가의 일부로 손님을 접대하고, 책 읽는 공간으로 사용된 일종의 사랑채다. 여강 이씨 문중에서 1560년경 건립한 심수정(心水亭)도 톡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안타깝게도 화재로 무너진 것을 20세기 초반에 복구한 것인데, 정자와 행랑채 등을 원래 모습 그대로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인 서백당과 보물 제412호인 향단 역시 양동마을을 방문한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백당은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고, 향단은 조선의 양반집이 가졌던 일반적 건축 구조와 다른 형태를 지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경주와 인근 형산강을 품에 안은 형태로 조선의 청백리 손중돈이 분가해 살던 관가정(觀稼亭)과 ‘물과 같이 맑고 구름과 같이 허허롭다’는 담백한 뜻을 담아 축조된 정자 수운정(水雲亭) 또한 살피지 않으면 아쉬운 양동마을의 자랑거리다.◆ 시간을 잊고 천천히 돌아봐야 더 아름다운 공간양동마을이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빛나는 문화유산’이 된 건 비단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 때문만은 아니다.마을 곳곳에 자리한 초가와 한가롭고 때 묻지 않은 풍광은 방문객들을 조선시대 혹은, 1960~70년대로 데려간다. 마치 타임머신에 몸을 실은 듯하다. 여기선 여타의 여행지처럼 걸음을 빨리 해 유명한 고택 앞에서 이른바 ‘인증 샷’을 찍고, 서둘러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여행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리운 과거로 왔으니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기자를 포함한 여행자들은 소리소문 없이 은근슬쩍 찾아온 여름의 뜨거움을 핑계로 천천히 양동마을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살폈다.흐르는 시간 따위 잠시 잊어버리고 천천히 마을의 안팎을 어슬렁거렸다. 모두가 쉽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며.설창산과 장태골, 성주봉과 안락천에 둘러싸인 한적하고 평화로운 양동마을은 오래 전부터 인심이 좋고, 후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다.‘경주연구’ 제21집 1호에 실린 신상구의 논문 ‘양동의 공간적 가치, 그리고 현실적 문제’는 ‘논어’ 이인편(里仁篇)을 인용해 양동마을이 인(仁·어질고 자애로움)의 덕목을 지켜낸 공동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서술이다.“양동마을은 600여 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름다운 가치(仁)를 지키며 살아온 마을이다. 600여 년 간을 한결같이 처음 마을을 형성하면서 지니고 있던 삶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도 더 숭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킨다는 것에는 그만큼 어려움과 번거로움을 인내해야 하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양동마을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가치를 세계인이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므로 행복한 것이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세계적인 역사·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이 마을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감내해 왔는가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보존 가치가 있는 전통을 간직하고 이어가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위 논문의 지적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마땅할 것으로 보인다.경주만이 아니라 안동시, 청송군, 봉화군 등 경북 지역엔 이름난 고택과 종가(宗家)가 적지 않다. 건물 자체가 문화재나 보물인 그곳엔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그런데, 그곳들 중엔 지금도 후손들이 생활하는 집이 흔하다.남의 집에 들어설 때는 주인에게 허락을 얻는 게 보편의 상식. 그럼에도 양해를 구하지 않고 들어가 여성들이 거주하는 안채에서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고, ‘출입 금지 표지판’이 세워진 고택과 종가의 비밀스런 공간까지 함부로 돌아다니는 행위는 한국이 관광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다행히 갈수록 그런 몰지각한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전통문화의 속절없는 붕괴를 맛본 현대인들에게 양동마을이 주는 위로와 위안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그걸 생각한다면 보다 세련된 시민의식이 관광객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지….◆ 양동마을을 벗어나 보다 먼 곳으로 산책을 권하며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양동마을문화관에서 전시된 유물을 살펴보는 건 학생들에게 평소엔 접하기 힘든 좋은 공부가 된다.앞서 열거한 각종 보물급 고택과 문화재인 정자와 비각(碑閣), 강학당(講學堂)을 꼼꼼하게 둘러보는 것 역시 이 마을을 방문한 여행자의 즐거움임이 분명하다. 기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 권하고 싶다. 바로 1~2시간쯤을 투자해 양동마을 주변을 산책해보라는 것. 그 옛날 선비의 마음가짐과 걸음걸이로.마을회관과 양동초등학교를 지나 이향정과 심수정을 거치면 두곡고택과 동호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지척엔 울울창창 고목이 반기는 장태골이 있다.관가정과 향단을 뒤로 하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영귀정과 물봉동산이 당신을 반기고, 조금 더 힘을 내 설창산을 향해 가면 경산서당의 미려함과 기쁘게 만날 수 있다.근암고택, 상춘헌, 사호당, 서백당, 낙선당, 창은정사, 내곡정으로 이어지는 ‘안골 방면 산책길’의 정취도 빼어나다.조선 성리학의 한 축을 만들어냈다는 자긍심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양동마을. 그 진가를 발견해내는 길은 여러 가지다.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양동마을 여행의 기술’을 스스로 찾아보시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7-09

시내 한복판 담장 너머 거대한 능 수십 기… 역사를 품다

“벚꽃이 흐드러졌을 때 여기 못 와보셨죠? 아이고, 그때 오셔야 했는데…. 올해는 나라 전체가 바이러스로 난리가 나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내년에 꼭 한 번 다시 오세요. 아마, 풍경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릉원 돌담길로 가는 5분 남짓의 짧은 시간.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 아저씨의 자랑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런 게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일까? 웃음 섞인 그의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난분분 춤추는 벚꽃 잎으로 환히 불 밝히는 봄날의 대릉원 돌담길은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다른 계절의 아름다움이 그것만 못할까. 그렇지 않았다.장마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일기 예보에 우산을 챙겨 들고 나선 길. 다행히 굵은 빗방울과 만나지는 않았다.대릉원 후문에서 시작돼 500m쯤을 이어지는 돌담길. 여름날의 대릉원도 봄의 대릉원 못지않았다. 여행자의 취향에 따라선 오히려 인적 드문 길의 호젓함이 더 좋아 보일 수도 있을 듯했다.‘경주를 경주답게 해주는 최고의 유적’이라 할 고분(古墳) 스물세 기가 높낮이를 달리하며 진기한 풍광을 만드는 대릉원. 그 정취를 만끽하며 걸을 수 있는 대릉원 돌담길.천마총과 황남대총, 미추왕릉은 물론, 철마다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이 어우러져 최고의 포토 존을 만들어내는 이곳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서라벌 최고 관광지’ 중 하나다.벚꽃, 목련, 백일홍이 그 자태를 뽐낸 후에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이 여행자를 유혹하고, 날씨가 추워져 눈이 내릴 때면 설경(雪景) 또한 그저 그만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매력이 각기 다른 ‘사계절 관광지’라는 말.일상을 벗어난 여유로운 오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대릉원 돌담길을 걸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가끔씩 담 너머로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고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담벼락에 새겨진 여러 편의 시(詩)를 읽으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벚나무 수백 그루와 동행했기 때문이다.◆낭만 넘치는 돌담길을 지나 대릉원 입구로대릉원 후문에서 시작되는 돌담길을 따라 느긋하게 10여 분을 걸으면 주차장에 인접한 정문이 나타난다. 입장권을 판매하는 매표소도 있다. 이쯤에서 대릉원이 어떤 곳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궁금증 해소를 위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신라고분발굴조사단 심현철의 논문 ‘경주분지의 고지형과 대릉원 일원 신라 고분의 입지’ 도입부를 인용한다.“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지역에는 수백 년 동안 무수히 많은 고분들이 축조되었다. 이 중 신라의 최고 지배계층인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은 대단위 토목공사를 통해 완성된 거대한 토목구조물로서 현재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릉원 일원의 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이 일대에 조영된 고분의 주 묘제가 적석목곽묘(신라 특유의 양식으로 지하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에 목곽을 짜 놓고, 사람 머리 크기의 자갈을 덮은 후 그 위에 흙을 입혀 다진 무덤)라는 것과 일부 석실묘, 그리고 그 하부와 주변에 목곽묘, 석곽묘 등이 축조되었다는 점이다.”시내 한복판에 작은 산처럼 거대한 봉분 수십 기가 솟아있고, 그 아래로 자전거를 탄 관광객과 시민들이 오가는 모습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경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놀라며 감탄사를 터뜨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망설이지 않고 사적 제512호인 대릉원 안으로 들어섰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지었다고 한다.아주 오래 전부터 서라벌의 역사를 지켜봤을 나이 많은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황남대총의 웅장함과 거기서 미추왕릉으로 가는 흙길에서 풍겨오는 초여름 향기를 즐겼다.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대릉원이 위치한 곳은 1천500여 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묘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천년 역사의 아득한 저편을 떠올리며 걷는 연인 몇 쌍의 표정이 밝고도 진지했다.대릉원 일대의 유택들은 문자화된 기록(비석 등)이 없어 조성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출토된 유물들로 미루어 볼 때 대략 서기 4~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천마총, 고대 고분의 내부를 직접 보는 경험학업을 마친 후 20년 이상 경주에서 신라의 역사와 유적을 연구해온 한 선배가 “대릉원에 갔다면 천마총을 빼놓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경주시 역시 대릉원 관광의 노하우를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 있다.“12만6천500㎡의 대릉원은 그 규모가 작지 않다. 그중 5만 점이 넘는 유물이 나온 2개의 고분이 쌍봉낙타 등처럼 남북으로 이어진 황남대총과 함께 대릉원을 대표하는 고분이 천마총이다.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타고 다닌다는 말이 지상에 내려온 듯 상서로워 보이는 천마의 그림, 말다래에 그려져 있던 ‘천마도’가 바로 이 무덤에서 나왔다. 천마총은 내부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덤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꼭 찾아봐야 할 유적이다.”사실 기자가 천마총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고대를 살았던 신라인의 흔적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설렘과 감흥은 여러 차례 거듭된 방문에도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가슴 두근거림을 또 한 번 맛본들 어떠랴.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행자 세 명이 금관을 비롯한 전시물들 앞에서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들도 시간이 흐르면 역사가 그저 무심히 지나버린 세월만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 분명하다.그들이 “천마총의 주인은 누구이고, 어떤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려줘야 할까?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20권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구해 읽어보라는 답을 들려주면 될 것 같다. 거기 이런 문장이 나온다.“천마총에선 금관 등이 출토돼 왕릉으로 인식하기도 하였으나, 규모나 여러 양상이 황남대총과 비교할 때 처지는 점에서 피장자(被葬者·무덤에 매장된 사람)를 왕에 버금가는 왕족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황남대총을 중앙에 두고 같은 규모의 고분인 천마총과 90호분이 좌우에 배열돼 있어 피장자가 왕의 동생 등으로 추정된다. 축조 연대는 500년(지증왕 원년) 바로 전쯤으로 판단되고 있다. 단곽식의 적석목곽묘로서 지상식으로 분류되며, 신라 적석목곽묘의 발전상 가장 늦은 단계의 특징을 나타내는 전형적 고분으로 꼽힌다.”◆서양의 묘지처럼 삶을 돌아보는 유의미한 관광지로…동양 철학자들은 삶과 죽음을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삶의 소중함은 죽음을 통해 증명되는 경우가 흔하다.또한 그들은 ‘삶=빛·죽음=어둠’이란 단순한 이분법적 분리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그런 이유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죽음이란 삶의 대극(對極)이 아닌 일부’라는 문장에 설득 당해 고개 끄덕인 독자들이 적지 않다.서라벌 가운데 자리한 대릉원은 현대인의 삶과 고대인의 죽음이 교차하고, 신라 사람의 사라진 꿈과 21세기 경주시민의 비등하는 꿈이 겹치는 공간이 아닐까? 결국 산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 이 둘 모두는 인간 내부에 똬리를 튼 아주 오래된 욕망들.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파리에도 대릉원처럼 ‘관광지로 역할하는 묘지’가 있다. 지하에 만들어진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무덤 카타콤(Catacomb)과 오노레 드 발자크, 마르셀 프루스트,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등 다수의 예술가가 묻힌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가 그렇다.1년이면 수백만 명의 여행자들이 찾는다는 카타콤과 페르 라셰즈. 이 사실을 놓고 보면 서양인들 역시 동양인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죽음 곁에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새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해 질 무렵. 대릉원 천마총과 황남대총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15세기 전 죽은 그 옛날 신라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신은 짧은 삶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7-02

전통한옥의 고즈넉한 멋… 고대와 현대가 숨쉬는 곳

경주 나들목을 지날 즈음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가 교촌마을 기와를 적시고 있었다.오래 전 멋을 그대로 간직한 고풍스런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경주향교 처마 아래서 가늘게 흩뿌리는 비를 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어디선가 학자들의 웅성거림과 학동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1천 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 온 왕조. 신라는 우리들 기억 속에서 여전히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제국’이다. 곳곳마다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적과 유물이 가득한 경주. 수십 번을 다시 찾아도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던지는 공간.교촌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자그마치 1천300여 년 전 나라의 인재를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 서라벌의 지도자들은 최고의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국학(國學)이었다. 경주 교촌은 바로 그 국학이 자리했던 곳이다.기자가 교촌마을 찾은 건 이번이 3번째. 지지난해 늦여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땐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을 깨달았기에 땀 흘리며 마을을 돌아본 보람이 있었고, 다음 번 가을에 찾아갔을 땐 고대와 현대가 불화하지 않고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교촌마을은 말끔하게 정비된 주차장이 있고, 첨성대, 동궁, 월지 등 경주의 다른 명소와 가까운 까닭에 적지 않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근처엔 이른바 ‘경주의 맛집’도 적지 않다.◆ 교촌마을의 중심 ‘경주향교’에 얽힌 이야기궂은 날씨 탓인지 여행자가 많지 않았던 초여름 평일 오후. 한참을 국학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경주향교 아래서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고 있자니, 교촌마을의 자랑이자 신라의 보물이기도 한 이곳이 어떤 이유로 세워진 것인지 궁금했다. 이 의문에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편찬한 책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이 친절한 답을 들려준다.“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제도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신문왕 2년(682)에 국가 최고 교육기관이며 국립대학이라 할 국학을 확충하고 크게 정비하였다. 국학은 이후 약 1세기 동안 적지 않게 발전을 하였다. 왕들이 역대로 국학에 나아가 박사(博士)들에게 경의(經義)를 강론케 하는 등 명실상부한 유교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지금이나 옛날이나 통치자들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국학은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지금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주향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다. 대성전, 명륜당, 전사청, 내신문 등이 세월의 이끼를 끌어안고 존재하는 곳.이곳은 신라시대 국학이 설치된 위치고, 고려 때는 향학(鄕學)이 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학문을 탐구해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청년과 선비들의 열정은 신라, 고려,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고 있었다.얼핏 보아도 수많은 ‘흥미로운 스토리’를 간직한 교촌마을과 경주향교. 그래서일까? 이화여대 김민정의 논문 ‘스토리텔링을 적용한 문화적 장소 브랜드 디자인 연구’는 교촌마을의 변화·발전 방향을 아래와 같이 조언한다.“오늘날은 문화적 역량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다. 문화는 국민의 삶의 질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되었고, 그중에서도 전통문화는 한 국가와 민족의 문화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수단으로 자리했다. 가히 문화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인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하며 가치를 높이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몫이다.”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재와 유적은 지방자치단체의 관광 경쟁력과 직결된다. 이 사실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특히 경주처럼 한국 어느 지방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국보·보물급 유적과 유물을 다수 가졌다면 이것들의 향후 보존·개선 방안을 수립할 때 위에 인용된 김민정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가진 자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경주 최부자집경주향교를 지나 우산 아래 다정하게 걸어가는 중년 부부의 뒤를 따라 교촌마을 곳곳을 돌아봤다. 곳곳에 세워진 관광안내판이 친절하게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외국인도 두어 명 만났다. 비교적 간략하게 경주의 유명 관광지를 요약·설명하고 있는 경주시 문화관광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니 교촌마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중요민속자료 경주 최씨 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경주 교동법주가 자리 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은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후략).”예나 지금이나 양심적인 부자가 되기는 어렵다. 물질적인 것이건 정신적인 유산이건 인간이 그걸 포기하거나 나누는 건 양보의 태도와 너른 마음씨 없이는 행해질 수 없기에.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앙가주망(Engagement·지식인의 사회 참여)이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짧지 않은 기간 동안 최상급의 부를 누리면서, 재산을 아낌없이 주위와 나누고자 했다는 지향만으로도 최부자 가문은 ‘높은 도덕성’을 지녔으리라 짐작된다.여기에 이 문중 사람인 최준(1884~1970)은 일제강점기에 가혹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니, 경주 최씨 집안은 그저 돈이 많은 가문만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최준에 관한 보다 많은 정보는 교촌마을 안내판에서 얻을 수 있었다.“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심한 옥고를 겪었다. 이와 함께 최준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 등과 ‘동경통지(東京通志)’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기여하였다.”존재하는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현재의 경주 최씨 고택은 17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영남 지방 주요 건축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췄고, 사용된 재목들도 일반 가옥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고급품이다. 한때는 부지 2천 평의 99칸 대저택이었으나, 1969년 화재로 사랑채과 행랑 등이 소실됐다. 여러 개이던 쌀 보관창고도 하나를 제외하고는 사라졌다. 기자가 찾은 날도 문화재청의 주도로 보수가 진행 중이었다.경주 최씨 고택은 빼놓을 수 없는 ‘서라벌의 보물’ 중 하나다. 많은 이들이 빨리 제 모습을 복원해 그 위상을 이어가길 기대하고 있다.◆ 활짝 갠 ‘빛나는 날’이 다시 오기를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폭풍이 한국을 휩쓸기 전 교촌마을은 예스런 전통가옥 안에서 이에 어울리는 각종 체험관광을 즐기는 여행자들로 붐볐다. 그런 흥겨운 시끌벅적함이 일상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은 딸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카메라 앞에서 재롱을 부렸고, 어린 아들은 엄마를 따라 서툰 솜씨로 색깔 예쁜 국수를 밀었다. 국악을 들으며 신나게 떡메를 치는 관광객들의 웃음이 가득했다. 최근 찾은 교촌마을은 지난해에 비해 눈에 띄게 한산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루이제 린저(Luise Rinser·1911~2002)의 말처럼 세상에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은 없고,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주는 고통과 어려움 또한 마찬가지일 터.교촌마을을 나와 인근 식당에서 더위를 식혀줄 냉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바로 앞에선 내물왕릉이 비를 맞고 있었다.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돌올한 풍경을 보며 활짝 갠 교촌마을의 빛나는 날이 어서 다시 오기를 기원했다. 그건 비단 기자만의 바람은 아니었을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6-25

기와집 골목골목 걸으며… 옛 정취와 낭만을 머금다

‘길은 길 위에서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길’은 ‘집’과 더불어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가장 주요한 공간 중 하나다.길은 또한 변화의 장소다. 수백 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는 길은 없거나 매우 드물다. 시대와 세상의 흐름에 따라 길은 형상을 달리하며 시시각각 변한다. 그게 길의 타고난 운명이다.한때는 호화찬란한 건축물이 가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 막막한 폐허가 되기도 하고, 인적 드문 곳에서 산새만이 조용히 지저귀던 오솔길이 거대한 도읍(都邑)의 광대한 길로 바뀌기도 했던 게 우리가 지나온 역사였다. 그래서 길을 살핀다는 건 축적된 인류의 문화를 탐구하는 것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트렌드를 읽어내는 요긴한 수단이 되고 있다. 여기 명멸해온 ‘길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곳이 있으니 바로 경주의 ‘황리단길’이다. 경상북도의 청년들은 물론 인근 대구와 부산, 멀리는 서울과 경기도의 젊은이들까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길’로 떠오르고 있는 서라벌의 핫 스폿(Hot spot).한바탕 시원스런 빗줄기가 지나간 후 다시 맑게 갠 하늘이 푸르던 6월의 둘째 주. 경주 관광의 핵심 포인트로 부상하고 있는 황리단길을 찾아갔다.◆ 2020년 오늘, 경주의 자랑으로 부상한 새로운 ‘길’지금으로부터 10~15세기 전.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고, 궁궐과 석탑, 불상과 금관 등 매혹적 조형물을 만들어냈던 신라. 그 문화재와 유적들은 고스란히 경주의 매력적인 관광 자산이 됐다.하지만 무엇이건 과거에 멈춰있거나, 지난날의 영화에만 의지해 현재와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의 손때 묻은 각종 국보와 보물이 신라의 옛 자랑이라면 황리단길은 2020년 현재 경주의 자랑이다.이를 감안한 듯 경주시가 운영하는 인터넷 문화관광 홈페이지엔 아래와 같은 말로 황리단길이 지닌 위상이 설명되고 있다.“황리단길은 경주에서 가장 젊은 길이다. 내남사거리에서 시작해 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의 도로를 기준으로 양쪽의 황남동, 사정동 일대의 지역을 일컫는다. 몇 해 전부터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분위기 좋은 카페, 아기자기한 소품점, 기념품 가게, 개성 있는 식당들이 생겨났다. 초기에는 도로변을 중심으로 상점들이 들어섰는데 황리단길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골목마다 개성 있는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이 길은 ‘핫’하다 못해 경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코스가 됐다. 검색해뒀던 카페를 찾아 가거나, 거닐다 눈에 들어오는 식당 문을 두드려 보거나, 경주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찾아가 경주를 기념하는 기념품을 찾거나…. 황리단길에서 먹고 마시며, 즐겨 보자.”실제로 찾아본 결과 경주시가 가진 황리단길에 대한 자긍은 과장이 아니었다. 기자가 황리단길을 방문한 건 평일 한낮. 한국의 어느 관광지에도 사람이 드문 시기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창졸간에 찾아온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폭풍은 5개월 가까이 한국을 공황 상태로 몰아갔다.지금도 대부분의 여행지와 관광지가 예전처럼 찾아주지 않는 방문객들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그럼에도 그날 황리단길엔 많진 않았지만 마스크를 쓴 채 손을 맞잡은 20~30대 연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구입하는 것들은 바로 현장에서 경주의 지역경제 재활성화에 그대로 직결될 터였다.황리단길은 타 지역에서 거길 찾는 이들이 편하게 접근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적한 거리를 걸어 겨우 15분이면 황리단길과 만날 수 있는 것.터미널 주변엔 자전거와 스쿠터, 전동 킥보드를 대여해주는 상점들도 있다. 몇천원에서 1~2만원 정도면 황리단길을 포함한 ‘서라벌의 보물’로 불리는 유적지를 연인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황리단길의 연인들 “한적하고 세련된 카페가 좋아요”황리단길로 들어가는 내남사거리에서 대학원생과 대학생, 한 쌍의 연인이 타고 가던 분홍색 스쿠터를 세우고 물었다.“두 분은 경주가 처음인가요? 여기 어때요?”대구에서 왔다는 커플은 이미 경주를 여러 차례 찾았다고 했다. ‘조용하고 독특한 데이트 장소’로 대릉원과 교촌마을을 치켜세운 남학생은 “지난해부턴 세련된 카페와 특색 있는 맛집이 하나씩 늘어가는 황리단길에서 식사를 해결할 생각”이라며 빙긋 웃었다.그들의 말처럼 이탈리아 파스타에서 베트남식 스프링 롤, 푸짐한 한식에서 깔끔한 일본 요리까지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황리단길의 메뉴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이 추세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황리단길 곳곳엔 낡은 가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현장이 적지 않았다. 그곳들의 대부분은 분명 색다른 레스토랑이나 분위기 좋은 카페로 변신을 시도하지 않을까? 더워지기 시작한 날씨 탓인지 30분쯤 걸어 다니다 보니 갈증이 찾아왔다. 시원하고 쾌적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천년왕국 경주가 아니라면 쉽게 지을 수 없었을 ‘능(陵·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이라는 이름의 커피숍이 눈에 들어왔다. 신라 여왕의 유택처럼 서늘하고 조용한 카페에서 얼음 섞인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누리는 재충전의 시간이 더없이 좋았다. 곧이어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식당 역시 저렴한 가격에 갈비탕과 도가니탕, 해장국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기대 이상의 맛도 맛이지만,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영어, 일어, 중국어까지 쓰여 있는 친절한 메뉴판이 더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상당수의 황리단길 식당이 이런 메뉴판을 갖췄다고 한다. 이는 ‘글로벌 관광지 경주’를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게 분명해 보였다.몇 해 전이다. 비엔나(Vienna), 오흐리드(Ohrid), 티라나(Tirana) 등 동유럽 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이곳들 역시 경주처럼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곳. 경험에 따르면 거기에도 고풍스런 성당과 원형 경기장 등 중세의 향기를 간직한 유적과 멀지 않은 곳에 젊은이들의 즐겨 찾는 ‘새로운 길’이 병존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유사(類似) 황리단길’은 동유럽에도 존재하는 셈이다.독일 속담 가운데 “집에선 좋은 식구와 이웃이 필요하고, 길에서는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게 있다. 지금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고, 아니면 걸어서 황리단길을 돌아보는 청춘들은 앞으로 살아날 기나긴 날을 함께 동행할 ‘친구’를 만들고 있는 줄도 모른다. 아쉽게도 찰나처럼 짧았던 청춘의 시간을 통과해버린 중년과 노년들에겐 부러운 풍경이었다.◆ ‘젊은 길’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고분(古墳)들“경주 황리단길은 새롭고 젊은 공간”이라는 것에 이론(異論)을 재기할 사람들은 많지 않다. 새롭게 모습을 바꾼 고옥(古屋) 속에 채워지고 있는 21세기형 문화·관광 콘텐츠들.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맛집과 찻집, 신세대 감각에 적절하게 부응하는 사진관과 액세서리 가게, 여기에 옛 가옥을 예쁘게 단장한 독특한 숙소들까지.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의 요구를 다양한 측면에서 만족시키는 황리단길. 여기에 보너스 같은 아름다움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거대한 고분들.황리단길 끝자락에 서면 쌍상총, 서봉총, 금령총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척엔 천마총과 황남대총도 있다. 고분 앞 벤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1천 년 전 신라를 상상하는 즐거움도 빼놓으면 아쉽다.세상보다 한 걸음 앞서 걸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은 “나는 똑똑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해 문제 해결에 노력했을 뿐”이란 말을 남겼다.서라벌의 ‘오래된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고대 유적과 ‘새로운 보물’로 떠오르고 있는 황리단길. 이 두 가지를 어떤 방식으로 조화롭고 균형 있게 보존·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를 위해 경주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최고의 여행지 경주’를 만들기 위해 남겨진 문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6-18

1천300년 전 고귀한 숨결 품고 다시 태어나다

‘천년왕국’ 신라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있는 경주는 ‘거리 자체가 박물관’이란 수식어에 맞춤한 도시다. 산처럼 솟은 거대한 왕릉과 역사서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찰들, 곳곳에 산재한 석탑과 불상, 여기에 화랑도와 풍류정신처럼 1천년을 이어져온 무형의 자산까지.고고학자들에게는 신화적 상상력을 제공해 역사 탐구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관광객들에겐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선물한 서라벌의 유적과 유물들. 이것들은 여러 말 할 없이 한민족(韓民族)의 소중한 보물들임이 분명하다.경주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물 외에도 새롭게 주목받는 여행지와 복원된 문화 유적, 유명세를 얻은 젊은이들의 거리, 깔끔하게 잘 조성된 전통마을이 적지 않다. 이들 역시 ‘서라벌의 새로운 보물’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본지는 경주의 소중한 관광자원이자 세계인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유적, 유물, 새로운 관광지, 정신적 자산까지를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 그 가치를 알리고자 특집기획기사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을 연재한다.◆ 서둘러 온 여름, 월정교에서 땀을 식히다‘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여파가 아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평일의 경주시외버스터미널은 한산했다. 터미널에서 월정교까지는 버스를 이용해도 좋고, 택시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자가용이 없어도 경주를 둘러보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다. 택시에 오른다면 목적지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올 봄엔 관광객들이 없어서 많이 힘들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에 60대 후반의 택시기사는 “이제 조금씩 좋아지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주를 찾고 있어요”라며 웃었다. “한국 어디를 가도 경주만한 관광지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경주에서 태어나 평생을 경주에서 살았다고 했다.왼편으로 월정교가 보이는 도로 한 편에 차를 세워준 택시기사가 미소로 여행자를 배웅했다. 6월 초순에 어울리지 않게 한낮의 햇살이 여름처럼 뜨거웠다. 기자가 월정교를 찾은 날엔 이른 ‘폭염주의보’가 내렸다.서둘러 찾아온 더위를 피해 월정교로 들어섰다. 푸른색과 붉은빛으로 칠해진 긴 다리는 위가 막혀 있어 그늘을 만들어냈고, 그 아래 서니 흘러내린 땀이 식었다.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월정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다리다. 역사의 비바람 속에 조선시대에 유실돼 사라졌지만, 신라 왕경 8대 핵심유적 복원 정비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됐다. 새롭게 복원된 월정교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 2018년 봄.‘삼국사기’엔 월정교가 경덕왕 19년(76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다리는 당시 서라벌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고 있었다.1984년과 1986년 2번에 걸쳐 진행된 자료 수집과 발굴 조사를 통해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가 현재 위치에 있었음이 확인된 바 있고, 이후 오랜 작업을 통해 길이 66.15m·폭 13m·높이 6m의 교량 복원이 이뤄졌다. 월정교는 국내에서 가장 큰 목조 교량이기도 하다.월정교에서 바라보는 주위 풍광은 아름답다. 일찍 시작된 초여름. 건너편 교촌마을의 한옥 기와가 햇볕 아래 빛났고, 고목을 스쳐 지나는 바람 소리가 한낮의 고요함을 깨고 있었다.연인이나 부부라면 낮에 보는 월정교보다 조명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는 밤의 월정교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고전적 건축물과 현대적 빛이 만들어내는 낭만적인 하모니 곁에서 오래 기억에 남을 사진 한 장을 남겨도 좋을 테고.◆ 1천300년 전 서라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다리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듯 경주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아주 먼 옛날을 더듬어 상상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복원된 월정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1천200~300년 전 신라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 고문헌에 의하면 그 옛날 경주를 가로질러 흐르던 남천과 서천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월정교와 춘양교를 비롯해 금교, 귀교, 유교, 굴심천교, 심원교, 효불효자교 등이 바로 그것. 그러나, 세월무상.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 지금까지 그 자취가 남아있는 교량은 극히 소수다.다만 근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와 지속적인 추적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남천보다 서천과 북천에 더 많은 다리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서라벌은 왕경의 북쪽과 서쪽이 더 번성했고, 여기에 많은 수의 백성들이 거주했다”는 추정을 내놓고 있다.월정교는 앞서 언급한 북·서 방향이 아닌 남쪽에 만들어진 교량이다. 월정교 인근에 존재했던 다리로 보이는 건 춘양교와 교촌교, 그리고 조선시대에 축조된 오릉 근처의 교량 정도다. 어쨌든 아득한 과거에 신라는 빼어난 석·목조 기술로 만들어진 다리 수십 개가 도시의 북과 남, 동과 서를 이어주던 낭만적인 고도(古都)였음이 분명하다.이중 월정교와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춘양교는 통일신라시대의 미려한 건축 양식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고대의 보물’.월정교 발굴에 참여했던 역사학자들은 “월정교와 춘양교는 다리 교각의 모양과 크기, 그리고 교대 날개벽 석축과 퇴물림식 축조 방법은 물론 석재의 색깔과 재질도 유사했다”고 증언하고 있다.2020년 오늘을 사는 우리들로선 눈앞에 존재하는 (고증을 통해 복원된)월정교와 함께 춘양교의 옛 모습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경주시에 의해 춘양교 석재 유물 정비 등이 진행되고 있다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어쨌건 두 교량에 관한 현대인의 궁금증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간단하게나마 해소해준다.“경덕왕 19년 2월 궁의 남쪽 문천상에 월정, 춘양 두 다리를 놓았다.”여기에 학자들은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여 월정교가 가졌던 당대의 위상을 알리고 있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20권 ‘신라의 유적과 유물’ 중 일부 내용을 아래 인용한다.“월정교와 춘양교 두 다리는 우리나라 고대 교량의 축조 방법과 토목기술을 보여준다. 이뿐 아니라 월정교는 신라 왕경 서쪽 지역의 주된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춘양교는 경주 남산과 남쪽 외지를 연결했을 것으로 추정돼 과거 서라벌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는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낭만적 사랑의 설화가 전하기도 하는 월정교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전설이나 민담을 볼라치면 ‘다리’는 이승과 저승, 인간계와 선계(仙界), 피안(彼岸)과 차안(此岸)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한 그 어떤 것’이었다. 다리 한쪽 편에 고통과 번뇌가 가득하다면, 반대편엔 해탈과 영원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다수다. 그렇기에 ‘다리를 건너간다’는 문장엔 단순히 물질적 이동만이 아닌 정신적 변이의 의미까지 담겨있는 것이 아닐지.역사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월정교엔 금기된 사랑의 장벽을 ‘건너가고자 했던’ 승려의 낭만적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원효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다.원효가 누구인가. 청년 시절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 어느 날 동굴에서 잠을 청했고, 갈증 탓에 깨어나 물 한 잔을 달게 마셨다. 이튿날 그 물이 사람의 머리뼈에 고인 썩은 물임을 알고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의 궁극적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이후 그는 머리칼도 깎지 않고 거리를 떠돌았다. 또한 “배우고자 한다면 스승이 누구인지를 가릴 필요가 없다”며 파계(破戒)도 불사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에게 열광한다. ‘삼국유사’는 원효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원효가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덕을 알게 되었다.”도그마와 경직된 율법이 지배하던 고대에 근대적 방식의 해탈을 꿈꾸었던 전위적 승려 원효. 그는 요석공주와의 사랑을 위해 다리(월정교라는 이야기와 문천교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또, 월정교와 문천교가 같은 다리라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학설이 공존한다) 위에서 강으로 몸을 던졌다.젖은 옷을 말린다는 이유를 들어 요석궁에서 공주와 몸을 섞었고, 그로 인해 태어난 인물이 바로 신라 유학계의 거두(巨頭) 설총이다.이 설화가 아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원효의 꿈에 기반한 것이건, 홀로 된 딸이 현자(顯者)와 어울리기를 원했던 왕의 욕망이 만들어낸 것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1천300년이 흐른 지금 전하는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그러니, 우리는 신라 건축 양식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재현한 월정교를 거닐며, 드라마틱하고 흥미로운 고대의 사랑 이야기에 매혹되면 될 일이다. 그게 ‘서라벌의 보물’을 만나는 보통 여행자의 즐거움 아닐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