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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보다 가까운 곳서 보고 느끼며 아로새긴 ‘추억의 기록’

인간과 사물에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그것을 ‘보다 가까운 곳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곳곳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경북의 여행지와 각각의 시·군에서 만난 특별한 이력의 사람들도 바로 이 방식을 통해 본질에 접근할 수 있었다. 2019년 여름에서부터 겨울까지, 경북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 풍광보다 더 아름다운 경북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들에 관한 축적된 ‘추억의 기록’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내년 봄에도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직지사 ‘보물찾기’가 즐거운 김천김천에 가서 직지사를 가보지 않는 여행자가 있을까? 당연지사 없다. 산 중턱에 자리한 절에서 내려다보는 주위 풍광이 너무나 매력적이다.직지사가 창건된 건 지금으로부터 1천600여 년 전인 신라 눌지왕 때. 여기에 유명세를 보태게 된 역사적 사실 하나가 더 있으니 고려의 태조인 왕건이 중건(重建·절을 새롭게 보수함)했다는 사실이다.대웅전과 미려한 건축물 비로전 앞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삼층석탑이 서있고,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대웅전 삼존불 탱화 등은 모두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가 만만찮다.김천 관광의 또 다른 즐거움 하나는 평소 해보기 힘든 ‘말 타기 체험’. 김천승마장에선 저렴한 비용으로 말에 올라보는 흥미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다. 승마 전문조교가 도와주니 안전에도 문제가 없다.◇ ‘쏟아지는 별’과 만나는 영양더 이상 하늘과 별을 올려다보지 않는 사람들. 삭막해진 세태와 눈코 뜰 사이 없는 바쁜 일상이 우리를 ‘낭만을 잊은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슬픈 일이다. 이 서러움을 위로해줄 공간이 영양에 있다. 바로 국제 밤하늘보호공원. 영양은 ‘세계에서 밤하늘 별빛이 가장 찬란한 지역 중 하나’로 인정받은 도시다. ‘별 생태 체험관’과 ‘반딧불이 천문대’에서 오랜만에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그리고 시인처럼 하늘의 별을 노래해보자.‘지조론’을 펼친 명문장가 시인 조지훈의 흔적을 찾아 지훈문학관을 방문하는 것도 추천한다. 선바위와 남이포, 영양이 문향(文鄕)임을 증명해주는 두들마을을 지나 수비면 죽파리에 조성된 자작나무숲까지 가보는 것이 영양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명불허전’ 주왕산의 청송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것들에겐 그에 어울리는 이유가 있다. 이른바 명불허전(名不虛傳). 청송의 주왕산을 한 번이라도 찾아본 등산객들은 안다. 왜 이 산을 “사계절 내내 절경을 이룬다”고 모두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지. 청송이라는 지명에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신선이 사는 피안(彼岸)’이란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이런 낭만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한 여행지가 청송이다. 뿐이랴. 제철에 찾아가면 달콤하고 향기로운 사과의 환영도 받을 수 있다.주왕산과 ‘사이좋은 한 쌍’을 이루는 주산지는 애초에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 하지만 이젠 ‘최고의 인생사진을 건질 수 있는 관광지’로 각광받는다. 주산지가 생길 때 조선 왕이었던 경종(景宗)은 이런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터. 그렇다. 그게 역사고 인간의 삶이다.◇ 설명 필요 없는 옥빛바다 울릉도짙푸른 보석 사파이어 1천t을 싣고 가던 보물선이 바다에 빠진 후 1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 이런 빛깔을 낼 수 있을까? 어디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할 것도 없다. 울릉도를 둘러싼 전체 바다의 색채는 찬란한 청옥빛이다. 그 푸르름에 눈이 부시고, 때론 가슴이 뻐개질 듯하다. 삼선암, 관음도, 죽도, 도동항, 저동항, 코끼리바위, 통구미 마을, 행남 해안산책로, 대풍감 해안절벽…. 사는 동안 꼭 한 번은 찾아봐야 할 울릉의 명소를 일일이 열거하기엔 지면이 턱없이 모자란다.나리분지가 선물하는 ‘평화로운 고요’는 또 어떤 문장을 동원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뱃멀미 걱정을 떨치고 찾아가면 그만큼의 보상이 기다리는 섬이 바로 울릉도. 최근엔 섬 일주도로가 개통되고, 대중교통 이용이 비교적 쉽기에 ‘버스 타고 울릉도 일주’도 가능하다.◇ 자전거 타고 신나게 달리는 상주자전거와 경천대는 상주를 대표하는 핵심 관광자원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지 않고, 도시 대부분이 평지인 상주는 ‘자전거 타기에 최적인 공간’으로 이름이 높다. 여기에 자전거박물관까지 들어서 한국 자전거의 역사와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희귀한 자전거를 확인하게 해준다. 높이가 5m쯤 되는 자전거, 바퀴의 폭이 1m 가까운 자전거 등을 본 아이들이 탄성을 지른다. 일제강점기 ‘조선 자전거의 제왕’으로 불렸던 엄복동(1892~1951)과 관련한 자료도 적지 않게 전시됐다.자전거박물관 지척엔 경천대가 있다. 옛날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경천대와 어우러진 낙동강 경치에 매료돼 수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8.5m 높이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인공폭포와 TV 드라마 ‘상도’의 세트 촬영장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물안개 끼는 무섬마을의 영주영주 무섬마을엔 우물과 사당이 없다. “언젠가는 마을이 가라앉는다”는 풍수학자들의 예언 탓에 우물을 만들지 않았다. 홍수가 나면 조상들의 위패가 떠내려 갈 것을 걱정해 사당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건 기우(杞憂)였다.여행자들에게 무섬마을은 부드러운 물안개가 볼을 매만져주는 낭만적인 곳이다. 특히 새벽녘 풍경이 아름답다. 거기까지 가서 강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진 찍기에도 그저 그만이다.소수서원과 선비촌 역시 영주가 손꼽아 자랑하는 공간. 소수서원은 ‘왕이 현판을 직접 써서 선물한 최초의 서원’이다.언필칭 사액서원(賜額書院). 영주시민들은 말한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선비촌은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공들여 조성한 관광지다.◇ 양떼가 포근하게 반기는 칠곡조용하고 얌전한 걸음걸이, 하얗고 부드러운 털, 아기처럼 착해 보이는 얼굴. 양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기 충분한 외양을 갖췄다. 그래서일까? 칠곡 양떼목장은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에게도 만족감을 주고 있다. 작은 비용을 지불하면 양들에게 먹이를 줄 수 있고, 양젖을 짜는 체험도 가능하다. 트랙터를 개조한 관람차에 올라 목장을 둘러보는 것도 빼놓으면 섭섭한 유흥. 여기에 양떼목장에서 직접 만든 치즈와 양젖도 맛보는 게 가능하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행복한 목장’을 지향한다는 슬로건도 눈여겨 볼만하다.한국전쟁과 관련된 현대사에 관심을 가진 여행자라면 호국평화기념관에 가보기를 권한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겐 구상문학관이 제격이고, 겨울 들판을 걸어보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선 관호산성 둘레길이 기다린다.◇ 겨울밤도 분명 아름다울 청도역설로 말한다. 청도는 어둠이 깔려야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도시다. 환하게 불 밝히고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프로방스 마을과 와인터널에선 추운 겨울에도 즐거움이 넘쳐난다. ‘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장’이라 이름 붙인 공간은 날마다 축제가 벌어지는 장소다. 아이들은 아기자기한 인형들 사이에서 ‘꼬마 모델’이 돼 아버지 카메라 앞에 서고, 엄마는 그 뒤에서 세상 어떤 이들보다 밝게 웃는다. 최고의 가족 여행지 중 하나로 추천해도 모자람이 없다.와인터널에선 어른들, 특히 주당 여행자들이 즐겁다. 1898년 만들어져 현재 와인 저장고와 와인 바 등으로 이용되는 터널은 붉은 벽돌의 아치형 천정과 자연석으로 꾸민 벽면이 근사하다. 네온으로 장식된 커다란 와인 병도 이채롭다. 운문사와 공암풍벽 역시 빼놓으면 아쉬운 청도의 명소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19-12-25

한 해의 끝서 돌아보는 ‘경북의 내밀한 속살’

◇ 고택과 종가의 도시 안동의미와 흥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한 기획이었다. 삶의 기반을 경상북도에 두고 있으면서도 정작 ‘경북의 내밀한 속살’은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올 하반기 6개월간의 취재 여행을 통해 경북 16개 시·군이 숨겨놓은 관광 명소와 특별한 삶을 이어온 지역민들, 수십 군데의 박물관과 전시관·미술관 등을 만날 수 있었다. 행복한 기억 속에서 그곳을 찾은 경험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안동은 지향해야 할 한국의 전통과 옛것의 아름다움을 지켜온 도시다. 고풍스런 안동엔 날아갈듯 한 기와가 멋스러운 오래된 전통가옥과 수백 년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특유의 가풍을 간직하고 있는 종가(宗家)가 여럿이다. 학봉종택과 농암종택에서의 숙박체험은 오래 간직할 귀한 추억이 됐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임청각과 내앞마을 의성 김씨 종택에서 떠올린 가슴 찡한 감흥도 오래 갈 것이 분명하다.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내려다본 저물 무렵의 낙동강 풍경은 흡사 잘 그린 동양화를 방불했다. 안동 여행에서 도산서원과 하회마을을 빼놓으면 분명 섭섭할 터. 그곳을 찾게 될 미래의 방문자들은 두 곳 모두 꼭 가보시길. 안동에선 한지 만들기, 전통 탈 만들기, 국궁 쏘기, 목판 찍기 등의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호랑이와 만나는 청정산골 봉화바람에서 달콤한 향기를 맡고 싶은 사람이라면 봉화로의 여행을 추천한다. 경북 내륙 깊숙이 자리한 청정지역 봉화군은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이벤트 열차가 있고, 백두산 호랑이를 만날 수 있는 곳. 항일 독립운동의 흔적 또한 각처에 남아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분천역과 태백 철암역 사이를 오가는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아이와 부모 모두 웃음 짓게 만드는 매력적인 관광자원이다. 기자 역시 시원스레 달리는 열차에 올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오래지 않은 옛날엔 사방 1천 리를 장쾌하던 호령하던 신령스런 동물 백두산호랑이 2마리도 봉화의 자랑이다.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을 찾는다면 호랑이의 위엄 어린 얼굴을 직접 보길 권한다. 천 년을 간다는 소나무계의 명품 춘양목(春陽木)도 봉화의 특산물이다.◇ 걸을수록 깊게 정드는 경주한국의 대표적 역사 유적이라 할 불국사와 첨성대, 대릉원과 동궁·월지, 여기에 젊은이들의 감각을 매혹시킨 ‘황리단길’까지. 경주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행복한 화음을 선보이는 여행지다. 어디를 걷건 심심할 틈이 없는 경주는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독특한 공간.정겨움 가득한 낡은 간판을 단 문방구와 30~40년 전 고전적인 분위기까지 맛볼 수 있는 황리단길은 청년들만의 길이 아닌 ‘우리 모두의 길’로 자리매김했다. 2010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양동마을과 경주 최 부자 가문이 지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을 오늘에 전하는 교촌마을은 ‘뚜벅이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인기다. 거리를 걸을수록 깊어지는 정을 느낄 수 있는 경주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도시다.◇ 건강까지 좋아질 것 같은 영천영천은 60여 년 전부터 한약 재료가 모이는 지역이자, 한약 유통의 중심지로 알려졌다. 거래되는 약재만도 500종이 넘는다. 이런 사실을 여행자들에게 어필하고자 조성한 ‘동의참누리원 영천한의마을’은 그윽한 한약 향기로 가득하다. 들어서는 순간 건강이 좋아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약재로 만든 음식이 준비된 약선음식관, 한방차를 마련한 찻집, 한옥체험관, 전문의가 운영하는 한의원도 내부에 있으니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좋아할만한 모든 것을 갖춘 셈이다.‘영천전투 메모리얼파크’에선 6·25전쟁 당시 쓰러져 간 젊은 호국영령들을 추모할 수 있다. 영천전투는 한국전쟁의 전세를 드라마틱하게 뒤집은 기념비적인 전투로 기록돼 있다. 별빛 가득한 하늘이 그리웠다면 보현산천문대에서 그 그리움을 해소해보면 어떨까?◇ 젊은 도예 장인이 안내한 문경문경은 ‘도자기의 고장’이다. 조선시대 초부터 품질 좋은 백자와 분청사기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거기서 만난 무형문화재 김선식 도예가는 겸양과 자존을 더불어 지닌 젊은 예술가였다. 1년 내내 관음요(觀音窯)에서 도자기 제작에 땀 흘리는 김선식은 자신의 돈을 털어 ‘한국 다완 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박물관에선 작품급 도자기 수백 점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독립운동가 박열의 고향인 문경엔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묘지도 있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인간과 조국을 누구보다 사랑한 둘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 ‘박열 의사 기념관’이다.옛날엔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선비들이 넘었다던 문경새재. 이제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등이 생겨 이 지역 최고의 관광자원이 됐다.◇ 양궁과 곤충을 키워드로 본 예천1979년 예천여고 2학년생 김진호는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많은 국민들이 어린 소녀의 선전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고, 함께 기뻐했다. 예천은 김진호의 고향이다. 그녀의 이름을 앞세운 ‘진호국제양궁장’이 예천에 들어선 건 당연한 수순. 지금도 각종 양궁대회가 열리고 훈련장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곳은 해마다 1만여 명의 양궁선수와 선수 가족들이 찾는 한국 양궁의 성지다. 방문하게 된다면 국가대표급 코치의 지도 아래 활쏘기 체험을 해보시길.양궁과 함께 예천을 대표하는 또 다른 하나의 키워드는 곤충이다. 탁 트인 넓은 공간에 효율을 높여 설계된 ‘곤충생태원’은 살아있는 곤충을 직접 만나고, 곤충을 이용한 산업적 가능성까지 전망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사라진 왕국을 떠올리는 의성역사서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에 흔적을 남긴 고대 왕국 조문국(召文國). 의성군 일대에선 삼한시대 초기 강력한 제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문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유적지에선 신라의 금관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미적 감각의 금동관이 여러 점 나왔다. 조문국박물관을 찾는다면 출토된 각종 유물을 볼 수 있고, 낯설었던 역사의 실체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인근에 자리한 금성산 고분군도 빼놓을 수 없는 의성의 관광 명소.조용하고 호젓한 곳에서 내년 여름 휴가를 보내고 싶은 독자라면 의성 빙계계곡을 추천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는 빙혈(氷穴)과 풍혈(風穴)도 있으니 겨울 여행지로도 좋다. 유·불·선 모두에 능통한 최치원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고운사도 매력적인 사찰이다.◇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 경산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마시고 세상사 이치를 단숨에 깨달은 원효, 신라를 대표하는 3명의 문장가 중 1명인 설총, 비밀스런 고대의 역사를 흥미롭게 써내려간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경산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에선 이 세 선현의 행적과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캄캄한 동굴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을 여기서 가지면 좋지 않을까. 원효의 가르침처럼 “세상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니.유년시절 읽었던 동화의 배경처럼 아름다운 반곡지도 꼭 들러 봐야 할 경산의 명소다. 투명하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수면을 보며 잊고 살았던 ‘나라는 존재’를 확인해보시길.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찰을 찾는 여행자라면 환성사와 선본사를 권해주고 싶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2-18

빛나는 별의 흔적이 꿈인 듯 지나가고…

‘지조론’을 펼친 선비 조지훈의 자취를 찾아서영양군은 부정할 수 없는 ‘문인의 도시’다. 시인 오일도(1901~1946)와 조지훈(1920~1968), 소설가 이문열(71) 등이 모두 영양에서 태어나거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들의 생가는 물론,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만든 문학관과 문학연구소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100년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며 낭송될 작품 ‘승무’와 ‘낙화’를 쓴 조지훈은 빼어난 서정시인인 동시에 ‘영남의 선비’였다.그가 1962년 펴낸 ‘지조론’은 세태에 쉬이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자기중심을 굳건히 잡아가는 지식인의 태도를 담담한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특히 ‘선비의 도(道)’와 ‘민족(民族)의 길’ 같은 부분은 반세기가 흐른 지금 읽어도 그 감동이 여전하다.김소월, 유치환, 서정주 등과 동급으로 평가받는 조지훈의 문학은 “한국 전통의 운율과 고요함의 미학을 현대적 시학(詩學)과 효과적으로 결합해냈다”는 상찬을 받았다. 그는 민속학과 역사에도 조예가 깊었다.‘지훈 시 광장’, ‘조지훈 생가’, ‘지훈문학관’, ‘지훈 시 공원’, ‘시인의 숲’ 등이 조성된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은 바로 이 조지훈 시인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튀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예술적 향취가 배어 있는 지훈문학관을 찾은 날. 시인의 소년 시절을 담아낸 사진과 격동의 역사를 헤쳐 나온 작가의 흔적과 만날 수 있었다.오래 전 출간된 그의 저서 수백 여 권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여동생과 함께 낭송한 ‘낙화’도 녹음돼 있어 헤드폰을 낀 방문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줬다.오십 살을 채우지 못하고 짧은 시간 세상에 머물다 떠났지만, 그가 남긴 주례사 등의 자필 원고는 조지훈이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했던 시인이자 선비’라는 걸 짐작케 했다.문학관을 나와 조지훈이 태어난 ‘호은종택’으로 향하는 길. 차갑고 매운바람을 잠시잠깐 잊게 해주는 겨울 오후 햇살 한 점이 얼굴을 비췄다. 그건 시인 조지훈이 자신의 고향을 찾은 이에게 내민 손길이었을까?◇지훈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yyg.go.kr/jihun/‘국제 밤하늘보호공원’서 알퐁스 도데와 윤동주를 떠올리다기자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니 30년도 훨씬 지난 시절의 기억이다.교과서에 실린 알퐁스 도데(1840~1897)의 소설 ‘별’에서 ‘프랑스 아가씨’ 스테파네트가 목동에게 묻는다. “저게 뭐야?”그녀가 무인지경(無人之境)의 산 위에서 누추한 목동과 바라본 건 별똥별(流星)이었다. 소설은 그 이전의 순간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더없이 아름다운 문장이다.‘낮은 살아있는 생명의 시간이다. 반면 밤엔 죽은 것들이 세계를 횡행한다. 익숙지 않은 이에게 밤은 두려움이다. 그래서일까?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조그만 소리와 별것 아닌 낯선 빛에도 몸을 바들바들 떨며 내게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 아래쪽 호수에서 슬프고 긴 소리가 파동을 일으키며 우리들 쪽으로 메아리쳤다. 그때 선명한 별똥별 하나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구슬픈 음악 아래 빛나는 별의 흔적이 아가씨와 내 앞을 꿈인 듯 지나가고 있었다’.며칠 전이다.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진 늦은 밤. 영양군 ‘국제 밤하늘보호공원’을 찾았다.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총총한 별들을 올려다보며 떠올린 유년의 기억이 한때 소년이었던 마흔아홉 살 중년 사내를 낭만적 감정으로 이끌었다.그랬다. 1980년대에 청춘을 살아낸 이들에겐 누구에게나 마음 속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존재했다. 그랬기에 ‘별’은 ‘꿈’의 메타포인 동시에 가닿을 수 없는 ‘이상향’의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였다.영양은 국제밤하늘협회(The Internatio nal Dark Sky Association)가 공인한 ‘별의 고장’이다. 이 협회는 2015년 영양군을 지목해 “밤하늘 별빛이 가장 아름다운 지역 중 하나”로 인정했다. 동시에 영양의 마스코트라고 할 ‘반딧불이’까지 주목을 받았다.영양군 수비면에 자리한 국제 밤하늘보호공원의 ‘별 생태 체험관’과 ‘반딧불이 천문대’는 별과 관련된 추억을 가진 어른은 물론, 천문학자와 생물학자를 꿈꾸는 아이들에게도 인기 높은 공간이다.‘생태전시실’에선 곤충의 삶부터 죽음까지를 관찰하며 생생한 관련 영상을 볼 수 있고, ‘별밤극장’은 별을 소재로 한 다양한 동영상을 상영한다. ‘은하수여행관’과 ‘빛 공해 체험실’에선 과도한 빛이 공해가 될 수도 있다는 의외의 사실을 흥미로운 자료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연중 열리는 천문캠프와 파브르 곤충캠프, 반딧불이 축제에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다”는 게 영양 밤하늘보호공원측의 설명이다.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엄마나 아버지라면 아들과 딸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아 ‘20세기 식민지에서 21세기 예술가의 삶을 살아냈던’ 요절 시인 윤동주(1917~1945)의 ‘별 헤는 밤’ 첫대목을 조용하게 읊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개인적인 부탁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제는 더 이상 ‘별’을 쳐다보지 않고, ‘꿈’에서도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40~50대들에게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명소 남이포·두들마을영양군 입암면에 기이한 모양으로 우뚝 솟은 선바위. ‘입암’을 한자로 쓰면 立巖이니, 선바위는 입암의 한글 표현인 듯하다.절벽과 계곡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장엄하고 거대한 바위는 인근 남이포와 함께 영양이 자랑하는 천혜의 자연경관 중 하나다. 멀리서 바라보면 애틋한 이야기가 서렸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선바위를 둘러싼 설화도 흥미롭다. 직접 가서 확인해보시길.석보면 두들마을은 전통문화의 향기를 호흡할 수 있는 곳이다. ‘두들’은 언덕을 칭하는 경상도 방언. 여기는 17세기 조선의 유학자 석계 이시영이 병자호란 후 벼슬을 버리고 찾아와 제자들을 양성한 고을로도 유명하다.두들마을엔 석계가 글을 가르친 서당과 고택 등이 남아 있고, 최근엔 ‘음식디미방 체험관’ 등도 들어섰다. 고풍스런 북카페가 문을 열어 문학청년들도 적지 않게 찾는다. 소설가 이문열은 이 마을에서 유년을 보냈다.25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 ‘치유와 휴양의 관광지’를 만들려했던 노력도 결실을 맺고 있다. 수비면 죽파리에 조성된 자작나무숲은 “차세대 영양 관광의 핵심 포인트”라는 게 영양군청의 부연이다.축구장 50개를 합친 것만큼 광활한 땅에서 조화로운 협연을 펼치는 새하얀 자작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코끝이 시린 겨울에도 “우리 사랑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젊은 연인들에게 권할만한 여행지다./홍성식·장유수기자

2019-12-11

사랑스런 목가적 풍경도, 비극적 역사의 공간도 한달음 거리에

언덕배기 양떼목장서 양들과 친해지다하얗게 곱슬거리는 부드러운 털, 어떠한 세속적 욕망도 읽히지 않는 맑은 눈망울, 거기에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몸까지. 양을 본 사람들은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착하고 귀엽게 느껴져 쉽게 다가설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가축 가운데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도 양이 아닐까. 그래서다. 칠곡군 지천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칠곡 양떼목장엔 주말이면 ‘꼬마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목장에서 ‘양 먹이 주기 체험’을 진행하는 아주머니는 “처음엔 겁을 먹고 아빠나 엄마 뒤에 숨어있던 아이들도 건초를 날름날름 받아먹는 어린 양들을 가까이서 보면 금방 친해진다”며 웃었다. 하루에 한두 명쯤은 “양을 데려가 우리 집에서 키우겠다”며 부모에게 떼를 쓰는 애가 있다고 한다. 정겹고 재밌는 풍경일 듯했다. 이 목장에선 면양과 함께 젖을 짜는 양, 타조, 색깔이 고운 여러 마리의 닭도 함께 키운다. 트랙터가 끄는 관람차에 올라 목장을 한 바퀴 도는 체험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다. 책과 TV 화면에서나 보던 동물들을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 날씨 좋은 토요일이면 양젖을 짜는 체험장 역시 아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게 목장측의 설명이다. 살아있는 동물과의 교감은 아동들에게 풍부한 감성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이미 오래 전 아동학자들이 검증한 사실. 칠곡 양떼목장은 성인들에게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기자 역시 양에게 먹이를 주며 잠시잠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건 어른들에게도 뿌듯한 감정을 선물하는 법이니까.이곳을 찾아온 연인들은 목장에 마련된 조그만 상점에서 구워 먹는 치즈를 구입하기도 한다. 바로 옆 따뜻한 휴게실로 들어가 난로를 앞에 두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매캐한 연기 가득한 도시의 술집에서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는 치즈와는 또 다른 맛이리라.양떼목장 상점에선 직접 만든 치즈와 멸균된 양젖도 맛볼 수 있다. 직접 먹어보니 우유로 만든 치즈보다 담백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양젖 또한 평소엔 마셔보기 어려운 것이라 연거푸 두 병을 들이켰다.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관광·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 목장은 “동물이 행복한 농장, 동물의 행동이 자유로운 농장, 사람과 동물이 함께 하는 농장”을 지향한다고 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방문과 체험관광 예약이 가능하다.◇칠곡 양떼목장 홈페이지: http://79yangtte.kr/호국평화기념관서 ‘평화의 시대’를 생각하다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인간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또한 1950년부터 3년간 같은 민족끼리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눈 비극의 역사를 경험했다. 칠곡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침입을 막던 ‘최후의 저지선’ 역할을 수행했다. 50일 넘게 이어지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선 헤아리기 힘든 많은 수의 군인들이 포탄 아래 쓰러졌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는 그들의 희생 덕분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석적읍에 세워진 호국평화기념관은 70여 년 전 나라와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영혼들을 위로하고자 만들어졌다. 이와 더불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될 전쟁의 처참함과 비극성까지를 후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기념관 내부에 마련된 ‘호국전시관’에선 한국전쟁의 시작에서부터 낙동강 전투, 인천상륙작전, 정전 협정까지의 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한 세트장도 눈길을 끈다.‘4D 영상관’으로 입장하면 어떤 명예나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머니와 조국을 위해 전쟁의 불길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 ‘이름 없는 군인들’의 이야기와 만날 수 있다. 호국평화기념관 뒤편엔 55m 높이에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 아래 서면 한국전쟁 때 희생된 젊은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내가 두려움을 떨치고 죽음 앞으로 뛰어든 이유가 궁금하다고?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를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위대한 시인의 흔적을 찾아 구상문학관으로다수의 문학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는 신(神)의 품에 기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한 점잖은 작가”였다고.칠곡은 시인 구상(1919~2004)의 본적지다. 지척인 대구에선 영남일보 편집국장과 주필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니 칠곡군 왜관읍에 ‘구상길’이 있고, 거기에 구상문학관이 들어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작품 활동을 했고, 서울대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등 여러 곳의 대학에서 제자들을 길러낸 구상 시인은 독재정권의 사상적 탄압에 의연히 맞선 지사(志士)이자, 넉넉한 품과 혜안을 지닌 교육자였다. 칠곡군이 내세워 자랑해도 좋을 문인이다.구상문학관은 작지만 알차게 꾸며졌다. 시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필기구와 안경, 모자가 단정하게 놓였고, 친필 원고와 함께 구상 시인을 추모하는 후배 작가들의 작품도 여럿 전시돼 있다. 문학관의 동선은 시인의 탄생에서부터 소멸까지를 연대순으로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한 시절 단아한 선비로 살아온 예술가의 85년 세월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구상 시인이 기증한 3만 권에 가까운 책은 2층에 보관됐다.문학관 입구엔 ‘그리스도 폴의 강’을 새긴 시비(詩碑)가 방문자들을 기다리고, 지척엔 화가 이중섭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시인의 집필실 관수재(觀水齋)가 복원돼 있다.‘관호산성 둘레길’서 초겨울 산책을 즐기다해질 무렵 불어오는 찬바람이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끼게 한다. 이런 시기엔 평소 하던 운동도 이유를 만들어 피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춥다고 매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걷기’는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 중 하나다. 방한 점퍼와 머플러가 준비된 사람이라면 칠곡 ‘관호산성 둘레길’을 걸어보라고 권한다. 이곳에서의 산책은 건강이란 선물과 함께 초겨울 낭만까지 맛보게 해준다.낙동강을 따라 이어진 둘레길은 서로의 몸을 맞대고 서걱이는 마른 갈대의 노래들로 가득하다.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겨울’ 도입부가 절로 떠오른다.칠곡군 역시 이 길을 “최고의 도보여행 코스”라고 말한다. 호국의 다리를 지나 칠곡보까지는 25분, 칠곡보 입구에서 관호산성과 무림배수장으로 가는 구간은 1시간 남짓이 소요된다.건강과 낭만을 얻기 위해 그 정도 시간쯤 할애 못할 이유가 없다./홍성식·김재욱기자

2019-12-04

절대비경, 그 느린 시간 속을 버스 타고 한바퀴

짙푸른 바다가 주는 낭만을 사랑하는 관광객, 복잡한 도시에서의 일상을 벗어나고픈 여행자에게 울릉도는 지상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유토피아’에 가깝다. 어떤 필설로 도동항 파란 물빛과 나리분지의 적요한 평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울릉도에선 ‘아름다운 자연’이란 문장이 은유나 상징이 아닌 직설이 된다. 바로 이 울릉도를 최근 버스를 타고 일주했다. 그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포항을 출발한 배가 3시간째 항해를 계속했다. 파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울릉도를 향하는 썬플라워호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멀미약을 잔뜩 챙겨 온 게 후회될 정도였다. 19세기 유럽 표상주의의 거장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1854~1891)의 시(詩) ‘취한 배’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선내 방송이 울릉 도착을 알렸다. 섬의 관문인 도동항이다.“이곳이 울릉도입니다”라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선착장 곳곳에서 해풍과 햇빛에 맛있게 말라가는 오징어가 울릉 특유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다. 울릉도에 무사히 온 것이다.점심시간이 훌쩍 넘었기에 도동항에서 오징어회로 허기를 달랬다. 먹물을 뿜으며 펄펄 살아 뛰는 오징어 3마리를 회치고, 각종 양념과 쌈채소, 거기에 소주 1병까지를 더해 단돈 2만원. 육지라면 상상하기 힘든 저렴한 가격이다. 사파이어빛 바다를 마주하고 마시는 술이 달콤했다. 일상 탈출이 주는 ‘행복 에너지’ 때문이었을 터.21세기. 여행의 방식과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세대간 차이일 수도 있고, 남녀의 차이일 수도 있으며, 관광객의 취향 차이일 수도 있다. 모두는 각기 다른 형태로 각자의 패턴에 따라 여행지를 둘러본다.어떤 사람은 ‘가능하면 많은 곳’을 돌아보길 원하고, 혹자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여행’을 지향한다. 스스로 차를 운전해 관광지를 향하는 이가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기자가 울릉도 여행의 방식으로 선택한 건 ‘버스 타고 섬 일주’.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울릉도의 기막힌 풍광도동항을 출발한 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를 빠져나왔다. 마침내 펼쳐지는 원시의 바다 풍경. 눈이 시릴 정도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내수전 몽돌해변을 지나 얼마 달리지 않자 울릉도를 여행한 이들이 “최고의 비경”이라 입을 모으는 삼선암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3명의 선녀가 바위가 됐다는 전설. 게으름뱅이 막내 선녀가 변해 만들어졌다는 바위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재밌는 설화다.몇 년 전. 몬테네그로에서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적이 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아드리아의 바다 빛깔이 너무 고와서 3시간 넘는 이동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울릉도 버스 여행의 시작도 그와 같았다.삼선암 뒤로 밀려가는 물결에 관음도와 죽도가 미려한 자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젠가 본 단아한 매력의 승무(僧舞) 같았다.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관음도엔 2012년 보행연도교가 생겼다. 이젠 탄성 부르는 그 섬의 숲을 관광객 모두가 볼 수 있다.울릉도를 사랑한 시인 김선우(49)는 “섬에 핀 작은 꽃 한 송이, 조그만 풀잎 하나까지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 2박3일을 예정하고 떠났던 울릉 여행이 1개월이 돼버렸다던가? 울릉도의 풍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김 시인의 심정이 이해되고도 남았다.100만 달러짜리 풍경을 시시각각 보여주던 버스는 두루봉과 석포 일출전망대를 스치듯 지나 천부항에 닿았다. 40분 남짓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느낌이었다. 그 감흥을 안고 일단 차에서 내렸다.안개 낀 나리분지가 선물한 평화로운 고요해발 500m쯤에 자리한 나리분지는 겨울철 ‘무섭게 쏟아붓는 눈’으로 유명하다. “그 배경이라면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보다 더 근사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진담 같은 농담 혹은, 농담 같은 진담이 떠도는 곳.나리분지로 가기 위해선 천부항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출발까지는 시간이 30여 분 남았다. 6m 깊이의 바다를 바로 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해중전망대는 돌아 나올 때 가기로 했다. 대신 천부항 방파제 부근을 짧게 산책했다.인적이 드문 섬의 해변. 여행자를 반기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소금기 묻은 바람이 애인의 손길처럼 머리칼을 매만져주는 나른한 오후.그 분위기에선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 한 자락이 참으로 잘 어울릴 듯해 스마트폰으로 ‘하늘 가는 길’을 플레이시켰다. 때론 혼자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 삶의 깊은 상처를 치료해주기도 한다. 그건 여행의 힘이기도 하다.나리분지행 버스에 오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차창 밖 배경이 푸른색에서 향기로운 초록색으로 변했다. 울울창창 울릉도의 나무들 속엔 신령함이 깃들어 신선들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도동항-천부항 구간과 마찬가지로 천부항-나리분지 구간도 최고의 버스 여행 코스였다. 오르막길을 달려온 버스가 내리막으로 접어들자 나리분지가 나타났다.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로 불리는 나리분지는 동서와 남북이 약 2km 남짓. 작은 땅이다. 그러나 그 곳의 사람살이까지 작을 수는 없다.혹독한 자연조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지혜롭게 극복한 울릉도 사람들의 ‘건축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너와집과 투막집을 둘러봤다. 말 그대로 ‘투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가옥들.기자가 도착한 날은 옅은 안개가 나리분지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면 어디선가 밀려온 꽃향기가 몸 안으로 번져들었다. 주홍빛 열매를 매단 나무들이 예뻤다. 가끔씩 새가 울었고, 더 가끔 동네 사람들이 키우는 개가 울었다.고요하고 평화로웠고, 평화롭고 고요했다. 아스팔트와 네온사인이 점령군으로 행세하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살아온 기자는 나리분지의 고요와 평화가 진심이 담긴 울릉도의 선물로 느껴졌다.울릉도 서쪽을 굽이굽이 돌아 다시 도동항으로울릉도 버스 일주가 서장과 중장을 지나 종장으로 접어들었다.나리분지에서 천부항으로 돌아와 섬의 북쪽과 서쪽을 시원스레 내달리는 버스에 올랐다. 멀리 보이는 코끼리바위와 현포항을 지나 남서 일몰전망대까지의 풍경이 어떠했는가를 설명하려면 입 아프다. 당연지사 짐작했겠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통구미 몽돌해변에 잠시 내려 느린 걸음으로 주위를 배회했다. 목적이나 이유를 잠시 내려두고 근사한 자연을 벗 삼아 ‘어슬렁거린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우리는 너나없이 너무나 ‘목표 지향적’으로만 살아오지 않았던가. 답답하고 갑갑하게도. 통구미 마을엔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9마리의 거북이가 있다. 아니, 거북이 형상의 바위가 있다. 보는 위치에 따라 거북의 마리 수가 달라진다는 게 흥미롭다. 마을 절벽엔 향나무 수백 수천 그루가 좋은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천연 향수였다.통구미 해변에서 도동항까지는 금방이다. 차로 10~20분. 울릉신항과 울릉예술·문화체험장을 뒤로 하고 사동항을 지난 버스가 여행의 출발지였던 도동항에 기자를 내려놓았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를 방불했던 ‘버스 타고 울릉도 일주’가 끝났다.천부항에서 점심으로 먹은 국수 값까지를 포함해 1만 원 가량의 작은 돈으로 ‘해보기 힘든 방식의 여행’을 마무리한 것이다. 기분이 어땠냐고? 부연할 것 없이 “좋았다”.울릉도 곳곳엔 숨겨진 매혹의 장소가 적지 않다. 행남 해안산책로, 독도박물관, 울릉자생식물원, 대풍감 해안절벽,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엔 ‘우리 섬’ 독도까지 있다. 1박2일의 짤막한 울릉 여행은 아쉽고 싱겁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일주일쯤 그 섬에 머물러보길 진심으로 권한다.랭보는 삶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고 규정했다. 시인의 세계 인식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어둡고 비극적이다. 설마 인간의 생이 ‘지옥에서의 시간’만으로 구성됐겠는가. 폐일언. 울릉도 여행은 기자에게 ‘천국에서 보낸 3일’이었다. /홍성식·김두한기자

2019-11-27

고고한 멋을 간직한 선비의 고장, 속 깊은 가을빛에 젖다

조선시대의 왕은 요즘의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일정 기간 동안 통치권을 행사하는 ‘최고위직 국민의 심부름꾼’이다. 반면 조선의 왕은 한번 자리에 오르면 죽을 때까지 하늘을 대신해 ‘백성 위에 군림하는 천자(天子)’로 행세했다. 그 시절엔 비단 조선만이 아닌 아시아 여러 국가의 황제, 유럽의 제왕도 마찬가지의 지위를 누렸다.그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 특정한 교육기관의 현판을 직접 써주고, 여기에 땅과 책, 노비까지 선사한다는 건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왕의 신뢰와 애정을 받은 조선의 사립대학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부른다.영주의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그렇기에 영주시민들이 ‘선비의 고장’이라는 프라이드를 가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조선 중기 유림의 거두 주세붕(1495~1554)은 풍기군수를 지냈다. 그가 세운 서원이 백운동서원. 이후 ‘조선 성리학의 시스템을 완성했다’고 추앙받는 퇴계 이황(1501~1570)은 왕에게 이 서원에 현판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했고, 명종(조선의 13대 왕·재위 1545∼1567)은 퇴계의 부탁을 받아들여 ‘소수서원’이란 현판과 많은 책들을 선물한다. 더불어 면세·면역의 권한까지 부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액서원이 된 소수서원은 조선 말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건재할 수 있었다.기자가 소수서원을 찾았던 시간은 늦가을 해질 무렵. 바람 소리와 은은하게 풍겨오는 소나무의 향기가 가득할 뿐 서원 주위는 고요했다. 건물 기와에 내려앉은 햇살이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조선 유림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세월의 때가 묻은 강학당 툇마루 아래 서니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는 젊은 선비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고, 사방을 둘러싼 은행나무가 노란 옷을 갈아입은 경렴정에선 주세붕의 그림자가 환영처럼 어른거렸다.어두워지기 전에 바쁜 걸음으로 취한대와 탁청지, 서원의 스승들이 생활하던 일신재 등을 돌아봤다.물론 ‘紹修書院’이란 쓴 명종의 글씨와 70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색채가 선명한 ‘대성지성 문선왕 전좌도(大成至聖 文宣王 殿坐圖)’도 만날 수 있었다.소수서원을 둘러본 후엔 이곳을 찾는 관광객 10명 중 9명은 찾게 되는 선비촌으로 향했다.“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영주의 전통을 잇고,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마땅히 계승해야 할 선비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조성한 공간”이란 게 영주시청 관계자의 설명.선비촌은 영주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터전을 복원함으로써 그들의 정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만들어졌다. 고풍스런 집들과 조그만 마을길이 여행자를 포근하게 안아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TV 드라마도 여러 편 이곳에서 촬영됐다고 한다.‘입신양명’, ‘우도불우빈’, ‘수신제가’, ‘거구무안’이라는 유학적 가치에 따라 공간을 구성한 영주 선비촌에선 전통가옥 체험과 예절 교육을 경험할 수 있다.대장간, 한지공방, 도예촌, 민속공예실 등은 도시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것들이라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에게 인기라고 한다.시간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조선 유교와 관련된 각종 유물이 다양하게 전시된 소수박물관까지 방문해보기를 권한다.영주시 풍기읍 창락리에 자리한 인삼박물관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소설가 김종광(48)의 장편 ‘조선통신사’였다.1763년부터 이듬해까지 일본을 다녀온 ‘계미통신사’의 행적을 맛깔스럽게 소설로 옮긴 이 작품 속엔 당시 일본인이 조선의 인삼을 어떻게 생각했었는지가 짤막하게 등장한다.“먹으면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과장된 소문으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가느다란 인삼 한 뿌리조차 귀한 보물 모시듯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통신사 일행에게 적은 양의 인삼이라도 얻고자 온갖 아양을 떨었다고 한다.비단 옛날 일만도, 일본만도 아니다. 터키와 불가리아 등의 나라에선 현재까지도 인삼이 ‘희귀한 병을 치료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삼 성분이 소량 함유된 과립까지 인기가 높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귀한 대접을 받은 약재이니 우리에게도 인삼에 대한 궁금증이 없을 수 없다. 영주 인삼박물관은 이런 세간의 궁금증을 깨끗하게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풍기 지역에서 재배한 인삼은 통상 10월 중순이나 11월에 수확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수확 시기가 1개월 정도 늦다. 이로 인해 잎과 줄기의 영양분이 뿌리에 축적되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소백산이 선물한 맑은 공기와 특유의 토질이 조직이 치밀하고, 향이 강한 인삼을 만들어준다”는 평가 또한 있다. 영주 풍기인삼은 약탕기에서 여러 번 끓여도 쉽게 물러지지 않는다. 최고의 인삼 산지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한 영주에 ‘인삼박물관’이 들어선 건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인삼박물관측은 “한국 인삼의 역사와 효능을 관광객에게 알리고, 인삼과 관련된 유물을 한곳에 모아 전시하기 위해 ‘시간을 이어온 생명의 숨결’이란 주제로 박물관을 조성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박물관은 인삼의 전파 경로를 소개하고 기획전시를 여는 로비와 한국 인삼의 기원과 인삼의 생육 환경을 요약해 보여주는 ‘인삼 전시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1층에서 2층 입구로 이어지는 통로엔 인삼이 오가던 길을 흥미롭게 재현한 곳이 있어 어린이 방문객들의 호기심과 탄성을 불러낸다. ‘인삼 나라’라고 이름 붙인 체험관에선 인삼포 만들기, 산삼 캐기 놀이 등을 즐길 수 있다.널찍한 카페와 야외무대도 갖춘 영주 인삼박물관은 건강 정보와 함께 즐거움까지 얻을 수 있는 흥미로운 가족 여행지다.한국사를 전공한 선배에게 영주에 갈 것이란 말을 전하니 “금성대군 신단에 꼭 가보라”고 했다. “왜냐”고 되묻자 이런 슬픈 대답이 돌아왔다.“아끼던 조카(단종)가 임금 자리를 뺏긴 것도 마음 아팠을 텐데, 형(세조)에게 죽임까지 당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 삶이냐. 아픈 역사도 역사니까 듣지야 못하겠지만 가서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전하는 게 좋지 않겠니.”‘세조(수양대군)-금성대군-단종’은 피로 이어진 혈족 관계였다. 그러나 보통의 친족들처럼 서로를 감싸주며 아껴주지 못했다. 조선 초기의 아픈 역사를 이야기 때 수없이 등장하는 스토리이기에 더 이상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 숙부와 조카, 형과 아우가 다투다가 억울하게 피를 흘린 이 사건은 영화와 드라마, 연극으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쓸쓸하게 서있는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은 조카 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귀시키려던 금성대군이 이에 실패하고 형 세조에 의해 죽음을 맞은 후 세워진 제단(祭壇·제사를 올리는 단)이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된 금성대군과 추종자들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세조의 성격은 거칠고 불같았다고 한다. 그랬기에 당시 금성대군이 있던 순흥부는 폐읍(廢邑·일정 지역을 없애버림)의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가을날 영주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세상사 대부분이 그러하듯 환한 빛의 반대편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하는 법. 찾아오는 사람들 드문 금성대군 신단. 조그만 비석 하나만이 이곳이 그 옛날 ‘골육상쟁(骨肉相爭) 왕조사’의 현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권력은 무엇이고, 왕의 자리란 과연 무엇일까. 동생과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차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홍성식·김세동 기자

2019-11-20

광활한 가을이 머무는 산사서 천년 세월을 건너 남겨진 혜안을 찾다

균형과 절제·조화와 우아함을 갖춘 부석사유서 깊은 절을 찾아가는 길. 가로수로 서있는 은행나무에서 눈이 부신 황금빛 잎사귀가 무더기로 떨어지며 함박눈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읽던 동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가운데 웅장하게 들어선 부석사. 초입에서부터 경내까지 나무란 나무는 모두 가을 옷을 갈아입고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그 노랗고 붉은 형상이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일주문으로 들어서자 오면서 본 ‘은행나무의 화려한 페스티벌’이 한 번 더 펼쳐졌다. 이어서 관광객들에게 눈 호강을 시켜주는 천왕문과 안양루가 나타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무량수전. 정면 5칸·측면 3칸의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이 미려하기로 이름 높은 국보(제18호)다.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은 건축을 전공한 학자들로부터 “한국에서 가장 멋들어진 목조 건물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60여 년 전에 국보로 지정된 이 건축물은 배흘림기둥(조화와 안정을 위해 기둥 중간 부분의 배가 약간 볼록하도록 꾸민 양식), 귀솟음(건물의 귀기둥을 가운데 기둥보다 높게 꾸미는 기술), 안허리곡(건물 가운데보다 귀퉁이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도록 만든 것) 등의 공법으로도 주목받는다.나무 문 하나, 기둥 하나에까지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나는 부석사 건축물들은 균형과 절제, 조화와 우아함을 모두 갖췄다.꽃 피는 봄과 눈 내린 겨울 풍경이 절경이라는 부석사. 하지만 사람을 설레게 하는 면에선 부석사의 가을 풍광이 최고일 듯했다. 이 사찰엔 국보도 여러 개다.앞서 말한 무량수전을 필두로 측면을 바라보는 독특한 형태로 제작된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부처의 위엄이 잘 표현돼 있다”는 평가를 얻었다.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무량수전 앞에 오연하게 서있는 석등(石燈) 역시 국보다. 3m쯤되는 이 석등은 신라시대 석공의 돌 다루는 기술이 얼마나 세련되고 정교했는지를 알려준다. 볼거리 가득한 절 안을 이리저리 돌아보다 조사당(국보 제19호) 앞에 섰다. 그곳엔 사찰을 만든 의상대사의 형상이 안치돼 있었다. 그걸 본 순간, 기자의 상상력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로 날아가 부석사가 만들어질 무렵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을날이었다. 범종루 근처에서 들려오는 법고(法鼓) 소리가 맑고 선하게 살아오지 못한 지난 삶을 반성하게 했다. 부석사는 ‘착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고민하게 하는 절이다.내성천 아슬아슬 외나무다리 건너 ‘무섬마을’이른 아침. 보드라운 물안개가 관광객들의 볼을 어루만졌다. 저 멀리 강을 건너기 위해 나무로 만든 다리가 보였다. 산속에선 작은 새가 청명한 소리로 울고 있고…. 도시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포근한 둥지처럼 자리 잡은 무섬마을. 이곳엔 사당과 우물이 없다.옛날 풍수학자들은 “마을이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내놓았고, 이를 믿은 사람들이 우물을 만들지 않아서다. 사당 역시 홍수가 날 경우 조상들의 위패가 떠내려 갈 것을 우려해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또 하나 무섬마을이 특이한 것은 농사짓는 땅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엔 농부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 탄현리까지 가서 모내기와 벼 베기를 하곤 했다.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가 생기고부터 배는 사라졌다.‘무섬’이란 단어는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의미한다.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인 것. 그 이름처럼 무섬마을은 물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휘돌아 앞을 흐르는 내성천은 서정적인 풍경을 이 마을에 선물했다. 그런 이유로 일 년 내내 관광객이 적지 않다.하지만 마냥 좋았던 시절만 있던 건 아니다. 조선 후기까지 경상도 각 지역 특산품이 모여드는 큰 마을이었지만, 장마 때면 불어난 물에 의해 다리가 떠내려가고 마을은 어김없이 수해를 입었다. 무섬마을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전통을 이어온 귀한 공간이다.무섬마을을 대표하는 건 목재 외나무다리.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이 다리는 폭이 30cm에 길이가 150m에 이른다. 무섬마을을 찾았다면 꼭 한 번 걸어보길 권한다. 현재는 물이 얕아 빠져도 큰 위험은 없을 것 같았다.‘양반의 고장’답게 무섬마을엔 고택과 문화재도 숱하다. 해우당고택, 만죽재고택, 김규진 가옥, 김위진 가옥 등을 살펴보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전통한옥에서 생활하고 잠드는 체험관광도 가능하다. 문의는 054-633-1011(무섬마을 전통한옥 체험수련관).600살 대장부 ‘영풍 태장리 느티나무’자그마치 600살이라고 했다. 속을 텅텅 비워내면서까지 견뎌온 그 아득한 시간이 실감으로 와 닿지 않았다. 기자가 ‘무한’이 아닌 ‘유한’을 살아가는 인간이라서 그랬을 터.곧게 뻗은 소나무와 초봄에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한다면,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에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 느티나무는 ‘대장부의 넉넉한 품’이라 부르면 좋을 듯했다.둘레가 9m에 가깝고 동서와 남북으로 뻗어 내린 가지가 25m에 육박하는 태장리 느티나무는 제 몸 안에 웅장함과 수려함을 두루 가지고 있다.만약 여름날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온다면 족히 2~3학급 아이들 모두에게 넉넉한 그늘을 나눠줄 수 있겠다 싶었다.세월의 흐름과 지나온 영주의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 현명해 보이는 고목. 하지만, 세상의 현자(賢者)가 그러하듯 나무는 모든 것을 알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멋질 수 있는 것 아닐까? 태장리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74호다. 마을 사람들은 휴식처를 제공하고, 마음의 위안을 선물해온 이 나무를 무엇보다 아낀다고 한다. 해마다 정월 보름이 되면 나무 아래서 동제(洞祭·마을의 공동 제사)를 지내며 안녕과 행운을 빈다.프랑스의 시인 이지도르 뒤카스(Isidore Ducasse)는 “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라고 했다. 이 짧은 문장에 담긴 깊숙한 은유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태장리 느티나무와 만나는 것이다.조선의 장관 3명이 생활한 ‘삼판서고택’판서(判書)란 지금으로 말하자면 장관에 해당하는 고위직 벼슬이다. 특정한 어떤 한 집에서 3명이나 되는 판서(장관)가 나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 가문으로선 영광이고 혈족들에겐 큰 자랑이다. 영주시 가흥동 언덕 위엔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 있다. 여기서 3명의 판서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활동한 영주 출신의 정운경, 황유정, 김담을 지칭한다. 이들 모두는 앞서 말한 삼판서고택에서 살았다.고려 말기에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에 해당)를 지낸 정운경은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으로 불리는 삼봉 정도전의 아버지다. 삼봉의 어머니는 순흥 안씨로 알려져 있다.정운경의 사위인 황유정은 조선이 개국된 초창기 공조, 예조, 형조에서 판서로 일했다. 그 역시 정도전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고, 마찬가지로 개국공신이었다.조선 세조 때 이조판서로 봉직한 김담은 황유정의 외손자. 황유정은 사위에게 집을 물려줬는데 그 사위의 아들이 ‘장관’이 된 것이다. 김담의 어머니는 삼봉의 여동생이다.삼판서고택을 찾은 날은 볕이 좋았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고택의 검은 기와가 흑진주처럼 빛났고, 돌아본 집 내부에선 은은한 향기가 났다.입신양명(立身揚名)의 절정에 섰던 ‘3명 판서’의 기운을 받기 위해서인지 주말이 아님에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산책 나온 영주시민도 여러 명이었다. 이 집에선 판서만 나온 게 아니다.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교리, 훈련원 녹사, 단성 현감, 통례원 좌통례 등의 벼슬아치도 태어났고, 천문학 교수 김만인도 여기서 첫울음을 터뜨렸다. 원래의 삼판서고택은 1961년 영주 대홍수 때 상당 부분이 파손됐고 이후 철거됐다. 현재의 고택은 영주 유림들이 뜻을 모아 2008년 복원한 것이다. /홍성식·김세동 기자

2019-11-13

적요하게 흐르는 강의 호흡을 따라 기암절벽 위서 부르는 ‘상주별곡’

아찔한 절벽은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수십 만 위나라 병사들과 맞섰다는 적벽(赤壁)과 닮았고, 울울창창 늙은 소나무 군락은 조선 선비의 지조를 보여주듯 푸르게 꼿꼿했다. 상주 경천대(擎天臺)와 마주선 첫 느낌이었다.이곳 경치에 매료된 옛 문인들은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무우정(舞雩亭)에 올라 “경천대야말로 낙동 제1경이로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3분쯤 걸으면 바로 그 무우정과 만날 수 있다. 푸른 솔숲이 호위하듯 들어선 이곳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를 수행한 우담 채득기(1605~1646)가 은거하며 책을 읽던 장소. 사벌면 경천로 낙동강변에 자리한 경천대 주위엔 볼거리가 적지 않다.8.5m 높이에서 굵은 물줄기가 시원스레 떨어지는 인공폭포와 TV 드라마 ‘상도’가 촬영됐던 세트장에는 어린애들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전투 체험이 가능한 ‘밀리터리 테마파크’도 인기가 좋다.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경천대에 왔으니 무지산(159m) 꼭대기에 들어선 전망대를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에서 만난 70대 노인은 “여태껏 내가 본 강(江) 풍경 중 최고”라며 엄지를 세웠다. 기자 역시 고개 끄덕여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상주시 관계자는 “야영장, 출렁다리, 어린이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등도 갖추고 있어 가족 모두가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라고 경천대를 설명한다.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적요한 가을날 오후. 무우정 뒤편 소나무 그늘을 지나 경천대에 올랐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조심스레 딛고 섰다. 펼쳐진 풍광이 저절로 한 편의 시를 불렀다. 권준호 시인의 ‘수향별곡’을 떠올린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날이었다.가을빛 저녁 강 노을 속으로물새 한 마리 스며들었네홀로 강을 건넌 내 사랑처럼숨어버렸네…(후략)현재 상주시는 경천섬을 관광지로 바꾸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낙동강 물의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삼각주인 경천섬은 남이섬의 1/2 크기.원래는 인근 농민들이 감자와 무 등을 재배하던 곳이었는데, 여기에 다리를 놓고 꽃밭과 산책로를 깔끔하게 조성했다. 경천섬과 회상나루 관광지가 연결된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주민들은 “상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생겼으니 내년엔 관광객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높이가 족히 4m는 돼 보이는 자전거, 단단한 쇠를 꽈배기처럼 꼬아 만든 자전거, 몸체와 바퀴를 나무로 만든 자전거…. 세상에 존재하는 희귀한 자전거를 모두 모아놓은 것처럼 보였다.상주시 용마로에 위치한 자전거박물관은 ‘자전거 마니아’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 공간이다. 내부엔 자전거에 얽힌 유래와 역사, 각종 에피소드가 재밌는 소설처럼 펼쳐져 있다. 194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만든 자전거는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자그마치 쌀 1가마 가격에 팔렸다고 한다. “자전거는 부자가 타는 교통수단”이란 말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대가 불과 40~50년 전이었다.오르막과 내리막이 드물고, 대부분 평지로 이뤄진 상주는 오래 전부터 ‘자전거의 도시’로 불렸다. 자전거의 도시에 자전거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 아니었을까?일제강점기. 쟁쟁한 일본 선수들을 단박에 꺾으며 ‘조선 자전거의 황제’로 대접받았던 엄복동(1892~1951)의 경주용 자전거 복제품도 상주자전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없고, 바퀴의 일부가 나무로 만들어졌다.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엔 이외에도 초창기 자전거부터 외국의 자전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제품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바퀴 폭이 1m를 넘는 우스꽝스런 것도 있다.4D영상관에선 자전거를 탄 듯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역동적인 화면에 푹 빠진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귀여운 조형물이 가득한 포토존도 마련돼 가족끼리 추억을 남기기에도 좋다.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상주자전거박물관에선 자전거를 빌릴 수 있고, 안전 점검까지 가능하다. 자신의 체형과 체력에 꼭 맞는 자전거에 올라 시원스레 뻗은 낙동강 주변 도로를 달려보는 것도 ‘건강하고 행복한 여행’의 한 방법이 아닐까.엄마의 치마 끝을 붙잡고 종종거리던 네댓 살 꼬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눈앞에서 살아있는 듯 생생한 호랑이가 사슴을 쫓아 달리고, 이빨이 주먹만한 상어가 자기 머리 위에 나타났기 때문.상주시 도남동 국립 낙동강생물자원관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평소엔 그림책이나 아동용 애니메이션에서나 보던 온갖 날짐승과 길짐승, 희귀한 꽃과 풀, 곤충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웃음으로 환했다. 생물자원관 전시실과 로비엔 커다란 백상아리와 새하얀 북극곰, 등껍질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대모거북과 ‘낙동강의 귀한 손님’으로 불리는 재두루미가 각기 제 모습을 뽐내며 어린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낙동강생물자원관은 ‘미래 생물주권의 확보와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해 만들어졌다. 여기에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공간으로도 역할한다”는 것이 생물자원관측의 부연이다.야외 공간엔 옥외풍경원과 전시 온실, ‘계절의 화원’과 ‘생명의 샘’ 등을 조성해 정원을 산책하듯 자연스러운 관람을 유도하고, 철마다 피는 아름다운 꽃을 아이들과 만나게 해주고 있다.생물자원관은 놀이와 학습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각종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이를 통해 방문자들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들의 놀라운 능력과 사라질지도 모를 생물들의 보존 필요성을 배운다.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곳이니만치 부모가 미리 관람 예절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전시된 생물 표본을 만져서는 안 되고, 계단이 많아 뛰어다니면 위험하다. 사진을 찍는 것은 좋지만 플래시를 터뜨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니 조심해야 한다.2015년 7월 개관한 낙동강생물자원관의 방문객은 지난달 100만 명을 넘어섰다. 한 해 평균 25만 명이 찾는다는 이야기다. 적지 않은 숫자다.◇국립 낙동강생물자원관 홈페이지: https://www.nnibr.re.kr나이 지긋한 관광객들은 경천대와 상주자전거박물관을 돌아본 후 당연한 순서처럼 도남서원을 향하게 된다.상주의 유림이라면 이곳에 대한 자부심이 없을 수 없다. 그들은 “조선 유학의 정통성은 영남에 있다”고 말한다.선조 39년(1606년)에 세워진 도남서원은 숙종 때 사액서원(賜額書院·왕이 이름을 써 편액을 내린 사원)이 됐다.1871년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렸으나, 1992년 상주 유림들이 뜻을 모아 복원을 시작했다. 2002년 ‘유교문화 관광개발사업’으로 옛 모습을 찾은 도남서원엔 정몽주, 이황 등 9명의 선현이 배향돼 있다고 한다.주위는 강을 따라 서원을 바라보며 산책하기에 좋다.지척에서 수백 년을 유유히 흘러온 강물은 도남서원이 간직한 온갖 사연과 충절과 기개로 일생을 살아낸 그 옛날 선비들의 삶을 지켜봤을 것이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도남서원 일대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여행자들은 인근 ‘회상나루 관광지’를 찾아가보면 어떨까? 그곳엔 주막촌, 객주촌, 낙동강문학관 등이 자리했다. 잊고 살았던 조선시대의 풍류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홍성식·곽인규기자

2019-11-06

사방이 만산홍엽(滿山紅葉)… 이 좋은 계절을 어찌하나

몇 해 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여행했을 때다. 키가 기자의 허리에나 미칠 정도인 5~6세 꼬마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안장도 얹지 않은 말에 용감하게 올라 바람처럼 내달리는 아이의 해맑고도 진지한 표정이 오랜 시간 동안 잊히지 않았다. 덩치가 2배나 큰 유럽 병사들이 원나라(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족의 왕국) 기병에게 쩔쩔맸다는 건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때부터였다. 말을 타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승마(乘馬)는 한국에선 ‘귀족 스포츠’로 인식돼 있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말에 올라 시원스레 달려볼 수 있을까?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 김천승마장에서 짧은 ‘승마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은 것.볕이 좋았던 지난주 화요일. 김천시 남면 봉천리에 자리한 김천승마장을 찾았다. 단단하고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진 승마 체험 조교가 반겨줬다. 안전을 지켜줄 헬멧을 쓰는 등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말 앞에 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말은 외형부터가 근사한 동물이다. 근육질의 다리와 늘씬한 등과 배, 거기에 사심(邪心) 한 점 없어 보이는 순정한 눈망울이 멋졌다.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출장 갔을 때 마차는 타본 적이 있다. 그걸 끄는 말은 흰색 털에 갈색 점이 드문드문 박힌 ‘잘 빠진’ 준마였다. 김천승마장에서 기자와 만난 말 역시 ‘잘 생긴’ 녀석이었다. 등과 배는 희고 얼굴은 초콜릿빛 적갈색.마차의 좌석이 아닌 말의 등에 오르는 순간, 오추마(烏9A05馬)를 타고 하루에 1천 리를 내달리던 ‘초한지’의 항우가 된 듯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두려움이 함께 엄습했다. 올라탄 말의 등이 예상 밖으로 꽤 높았던 것. 조교가 “지상에서부터 170cm 정도”라고 미리 설명했지만, 내려다본 체감 높이는 3m가 넘어 보였다. 하지만 곧 안정감이 찾아왔다. 기자를 태운 말은 점잖고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둥글게 디자인된 실내의 흙길을 여러 바퀴 돌았다. 90kg에 육박하는 작지 않은 남성을 태우고도 거친 숨소리 하나 없이. 말은 의연하고 강한 짐승이었다.김천승마장은 주로 아동들을 위한 ‘승마 교육’을 진행한다. 유치원이나 놀이방 등에서 단체로 승마장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기자처럼 ‘꼭 한 번 말을 타보고 싶은 성인’도 사전에 예약하면 간단한 승마 체험이 가능하다.말은 3세 아이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 그렇기에 목덜미를 쓰다듬어 칭찬해주는 걸 좋아한다. 반대로 말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건 금물이다.“말에게 다가갈 때는 반드시 앞쪽에서 서서히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한 조교는 “사람이 지나치게 떨면 말 역시 두려워하니 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김천승마장 체험 예약: 054-433-8773벚꽃이 하늘과 땅을 환하게 밝히던 지난해 봄. 직지사를 다녀온 이모가 말했다.“칠십 평생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 봤다”고.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모, 가을날 직지사는 더 좋던데요.”만산홍엽(滿山紅葉)이 가을이 완연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에도 곧 단풍이 절정을 이룰 것이다.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고색창연한 고찰(古刹)’. 직지사를 찾은 날은 평일이었음에도 방문객이 적지 않았다. 멀리서 본 절은 노랗고 붉은 나뭇잎을 배경으로 한 동양화 같았고, 가까이 다가서니 대웅전 처마 너머로 펼쳐진 푸른 하늘이 일상의 스트레스로 막힌 가슴을 뻥 뚫어 주었다.신라 19대 눌지왕 시절인 418년에 묵호자(墨胡子)가 도리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알려진 직지사는 고려 태조가 중건한 절로도 유명하다. 사찰 안에는 대웅전 앞 삼층석탑과 비로전 앞 삼층석탑,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대웅전 삼존불 탱화 등 보물이 가득하다. 때론 아이들만이 아닌 성인들에게도 ‘보물찾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선물처럼 다가온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은 또 있다. 김천시 지례면 부항댐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물빛이 그저 그만이다. 댐 인근을 산책하다보면 ‘자연이 그려낸 그림’은 어떤 빼어난 화가도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부항댐 주변엔 레인보우 스카이워크와 짚와이어도 설치돼 있어 보다 ‘역동적인 여행’을 원하는 이들의 요구도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 김천시의 설명이다. 주말이면 김천부항댐물문화관을 찾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도 많다고 한다.오묘한 하늘 색깔로 1천 년 변함이 없는 고려시대의 청자. 몇 세기 전부터 유럽의 왕가와 귀족 가문에서 사용해온 언필칭 ‘명품 식기’….고귀한 것의 생명은 세월을 뛰어넘는다. 우리는 그걸 일컬어 귀물(貴物)이라고 한다. 세상에 드물게 존재하기에 얻기 어려운 물건. 김천시 대항면 ‘세계도자기박물관’엔 귀물이 가득했다. 고려의 청자와 조선시대 진품 백자는 물론이고, 여기에 덴마크, 프랑스, 헝가리, 이탈리아, 영국의 도자기들이 미려한 자태를 뽐내며 박물관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박물관의 입장료는 단돈 1천 원. 동서양의 진품·명품 도자기를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가격치곤 매우 저렴하다. 이윤에 앞서 도시의 홍보를 중요시하는 김천시가 운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박물관 안 도자기들의 전체 가격을 궁금해 하는 기자에게 입구를 지키는 직원은 “모르긴 몰라도 당신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며 웃었다. 전시된 도자기 중에는 최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있기에 요즘 젊은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가격 대비 만족감’이 높다고 할 수 있다.유럽 귀족 가문의 저녁 식탁을 재현해놓은 테이블이 흥미롭다. 거긴 온통 크리스털 식기로 반짝인다. 우리 도자기 30여 점과 유럽 도자기 500여 점, 크리스털과 유리로 만든 식기와 술잔 510여 점이 전시된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전통자기를 그윽한 눈길로 살피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부터 그릇과 찻잔에 새겨진 문양만 봐도 “이건 어느 나라 어느 회사가 만든 제품이야”라고 단박에 알아내는 식기애호가 주부들까지 흥미로워할 공간이다.◇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gimcheon.go.kr/mini/museum10살 안팎의 한국 아이들은 ‘기차’라고 하면 시속 300㎞에 가까운 속도로 번개처럼 달리는 KTX만을 떠올릴 게 분명하다. 자신들의 부모가 청년이던 시절엔 ‘비둘기호’ 혹은, ‘통일호’라 이름 붙인 시속 50㎞ 내외의 느린 기차를 타고 피크닉을 다녔다는 건 분명 모를 터.기차는 낭만을 부르는 교통수단이었다. 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운행을 멈춘 ‘옛날 기차’를 카페로 꾸민 공간이 김천의 ‘독특한 여행지’가 됐다.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은 대항면 직지사역에 들어선 열차카페 ‘옛길’. 이곳에선 커피와 주스 등 마실 거리와 돈가스 등의 간단한 경양식을 판매한다. 폐차된 새마을호 열차 내부를 아기자기하게 찻집으로 꾸민 손길이 돋보인다.실내는 아늑하고, 흘러나오는 음악도 1970~80년대 유행했던 통기타 곡들이다. 30~40대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찾아와 “엄마와 아빠가 서로 좋아할 땐 말이지, 기차를 타고…”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맞춤인 공간이다.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회갑을 훨씬 넘긴 할머니들. 주문 받는 것과 서빙이 조금 느리더라도 어머니를 떠올리며 너른 마음으로 웃으며 이해하는 게 좋다. /홍성식·나채복 기자

2019-10-30

정성스레 그린 동양화·수 만개 조명의 향연… ‘일거양득’ 만추 기행

추색 짙은 풍경, 천천히 걸어 즐긴다 ‘공암풍벽’·‘운문사’길이 끊긴 높고 거대한 절벽에 꽃빛 닮은 단풍이 흐드러졌다. 재론의 여지없는 절경이다. 인간의 능력 밖에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가을 풍경이 놀라움을 불러왔다.‘공암풍벽(孔巖楓壁)’. 청도팔경 중 4번째로 손꼽히는 수려한 경관이 기자를 매혹했다. 오래 전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풍벽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강 속 바위는 쪼개진 채 몇 해를 살아왔나비탈길 오르고 좁은 길 통과하니 서늘한 기운산수 좋은 곳에 산다고 부질없이 말해왔건만나, 오늘에야 참된 별천지를 보았노라.’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서 경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공암풍벽은 30m에 육박하는 기세 좋은 바위에 오색 단풍의 손길이 더해져 여행자를 불러 모은다.반원 형태의 절벽은 사철 내내 감탄사를 선물하지만, “가을에 보는 풍광이 최고”라는 게 청도군청 직원의 설명이다.운문댐이 만들어지면서는 풍벽 아래로 가는 길이 끊겼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신비감과 서정적 낭만을 더해준다. 원래 ‘진짜 아름다움’은 만질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 아닌가.공암풍벽을 찾아가는 길. 조그만 시골마을 여러 개를 통과하게 된다. 빠알간 감이 익어가는 소읍의 풍경이 그저 그만이다. 잊고 살았던 1970년대 유년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소환됐다.막막한 생의 절벽 끝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꿈꾸는 삶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한탄하는 사람, 절망감에 혼자서 오래 울어본 사람들에게 공암풍벽과 마주해보길 권한다. 희망은 먼 곳에 있지만 온전히 사라지진 않는다.신라 진흥왕 18년(557년)에 창건된 천년고찰 운문사도 빼놓으면 서운한 ‘최고의 가을 관광지’다. 공암풍벽에서 15분쯤 차를 달리면 널찍한 땅 위에 큰 규모로 들어선 운문사와 만나게 된다.이 절은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생긴 후부터 여성 스님들의 사찰로 유명했다. 올라가는 길 주위로 수백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운문사에는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 9점이나 있다. 절 안을 돌아보며 금당 앞 석등, 동서 삼층석탑,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신불회도, 달마대사 벽화, 석조여래좌상 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만만찮다.공암풍벽과 운문사는 천천히 걷는 것이 어울리는, 느림이 얼마든지 용인되는 청도의 가을 여행지다.기자가 20대 초반이던 시절.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제목이 참으로 시적(詩的)이라며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난다.밤이 낮보다 아름다운 곳은 또 있다. 화양읍에 자리한 ‘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장’이 바로 그곳. 앞서의 영화 제목처럼 말하자면 “아이들의 밤은 어른들의 낮보다 아름답다” 정도가 될 듯하다.수천수만 개의 환한 조명이 청도의 밤을 밝히는 빛축제장은 해가 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관광지.“폴 세잔,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등 이름난 화가들이 사랑한 프로방스(포도주로도 유명한 프랑스 남동부 도시)의 분위기를 청도로 옮기고자 했다”는 것이 관계자의 말이다.터지는 빛의 향연에 넋을 빼앗긴 꼬마들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거울로 만들어진 미로를 헤매다가 유령 차장의 안내에 따라 열차에 오른다. 반짝이는 야광 물고기와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프로방스 스튜디오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빛이 없는 어두운 벤치에선 갓 연애를 시작한 젊은 남녀가 밀어를 속삭이기도 한다. 나이 지긋한 여행자들은 그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밤이 내린 ‘청도 프로방스’는 아이들에겐 즐거움을, 어른들에겐 낭만을 선물하는 공간이다.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장 지척엔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와인 터널’이 있다. 청도 특산이라는 ‘감 와인’이 애주가의 눈길을 끈다.대한제국 말기인 1898년 만들어진 이 터널은 붉은 벽돌의 아치형 천정과 자연석 벽면으로 조성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터널 중 하나’로 불린다. 지난 2006년부터 와인 숙성고와 와인 바로 사용됐다고 한다.“내부는 항상 섭씨 13~15도 정도로 유지된다. 여름에는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려는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게 와인 터널 입구에서 만난 동네 주민의 자랑 섞인 설명이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와인과 동창과 가족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날짜를 써 붙여 만든 와인 저장통, 꽤 큰 규모의 와인 바가 이곳을 처음 찾은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터널로 들어가기 전 조그만 상가에선 곶감과 감식초, 청도의 농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손님을 부르는 아주머니들의 경상도 사투리가 정겨웠다.여기까지 와서 ‘감으로 만든 와인’ 한 잔쯤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진열·판매되는 와인도 부담스런 가격은 아니다.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로 만들어진 와인을 맛보는 색다른 즐거움에 와인 바에 마주앉은 노부부의 얼굴이 미소로 환했다.□청도 프로방스 홈페이지: http://www.cheongdo-provence.co.kr“아는 만큼, 애정을 가진 만큼 보이는 것”이 유적이고 관광지다. 기왕지사 청도를 찾았으니 가능하면 많은 곳들을 둘러보고 싶었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운문면에 시원스럽게 들어선 ‘청도 신화랑풍류마을’은 충절을 지키고 예술을 아꼈던 화랑의 정신을 계승하고, 미래를 살아갈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화랑의 정체성을 알리고 연관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 연수교육과 수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화랑오계관, 국궁장,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인 화랑촌, 오토캠핑장 등을 갖췄다. 가상현실 체험이 가능한 화랑정신기념관도 흥미롭다.애초엔 소를 키우는 목동들이 재미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청도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의 하나가 됐다. 바로 ‘소싸움’이다. 한국 농경사회의 전통이 사람들의 피 속에 존재하는 호전성을 일깨운다. 살아있는 동물들의 다툼이라 호오가 갈릴 수 있으나 흥미롭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주말에는 실전 소싸움을 관람할 수 있다. 경기가 없는 평일에 청도를 찾은 사람들은 ‘청도 소싸움테마파크’에서 아쉬움을 달랜다. 역사관, 문화관, 기획전시실이 청도 소싸움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싸움소와 힘을 겨루거나, 가상의 소와 달리기를 하는 독특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소싸움장은 물론 테마파크도 입장이 무료다.차를 타고 청도 시내를 달리다가 발견한 특별한 풍경이 있다. ‘범곡리 지석묘군(凡谷里 支石墓群)’이다. 우리의 기억 아득한 곳에 존재하는 옛날 사람들이 삶을 다하고 묻힌 곳. 이 곳의 지석묘들은 상석을 지면에 밀착시켜 만든 남방 스타일이다. 그렇기에 얼핏 보기엔 커다란 바위들이 풀밭 위에 불규칙하게 들어서 있다는 느낌을 준다. 기자 또한 그냥 지나칠 뻔했다.5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동편에 22기, 서편에 12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 유적으로 볼 때 청도엔 작지 않은 규모의 집단거주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학계의 견해다. 범곡리 지석묘군은 경북기념물 제99호.차를 멈추고 잠시 여기를 걸어보았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의 삶은 얼마나 짧고도 덧없는 것일까? 불쑥 다가온 형이상학적 질문들 곁으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홍성식·심한식기자

2019-10-23

투명한 물빛·눈부신 단풍… 신비하고 찬란한 찰나에 발길 붙들려도 좋아라

과객이 되어 머무르고픈 ‘아흔아홉 칸 집’ 송소고택규모부터가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큰 건물을 이야기할 때면 등장하는 ‘아흔아홉 칸 집’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松韶古宅)이다.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어 집을 따스하게 안고 있는 형상이고, 앞으론 널찍한 들판이 펼쳐졌다.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기자가 보기에도 명당(明堂)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2개의 사랑채와 안채, 별채, 넓은 정원 등으로 이뤄진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시절 거부(巨富) 심처대의 후손인 심호택이 1880년 경 조상이 살던 덕천마을로 돌아오면서 만든 집이다.솟을대문과 홍살, 팔작지붕에 빗살무늬 교창 등이 19세기 후반 한국 상류층 주택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여기에 송소고택에 살던 사람들은 경주 최부자와 함께 ‘양심적인 사회 공헌’으로도 이름이 높았다.해질 무렵 천천히 고택 안을 돌아봤는데, 어찌나 넓은지 과장을 좀 섞자면 ‘집 안에서 길을 잃을 지경’이었다.드나드는 손님들이 여성이 생활하는 안채를 함부로 쳐다볼 수 없도록 만든 ‘마당 속 또 다른 담’과 집 안에 만든 3개의 우물이 특히 이색적이었다. 안채에선 요즘 보기 드물게 전통 방식으로 곶감을 말리고 있었다.현재 송소고택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심재오 씨.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살다가 9년 전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왔다. 만만찮은 저택 관리에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조상들 이야기를 할 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장작불을 넣은 뜨끈한 아랫목에서 잠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기서의 숙박이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기자 역시 그랬으니까.□ 송소고택 홈페이지: https://songso.modoo.at/늙지 않는 신선이 사는 ‘별천지’절경 중의 절경 주산지·주왕산기암과 단애(斷崖)가 줄지어 늘어서 감탄을 자아내는 주왕산과 맑고 투명한 물빛이 유혹하는 주산지에 가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왜 이곳의 관광 슬로건이 ‘산소카페 청송군’인지. 청정하고 달콤한 공기가 여행자의 몸은 물론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준다.주왕산면에 한적하게 자리 잡은 주산지는 299년 전 조선 경종(景宗) 때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다. 물 아래로 뿌리를 내린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나무가 기가 막힌 풍경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사진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카메라를 메고 ‘인생 작품’을 남기기 위해 방문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km 가량 주산지로 걸어 오르는 산길은 우거진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향기로운 그늘과 도시에선 밟아보기 힘든 황토의 색채가 여행자들의 환한 웃음을 불러낸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지향한다”는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가족 혹은, 연인과 주산지를 찾은 이들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 관우(關羽)의 팔뚝보다 훨씬 굵은 수백 마리의 잉어를 보며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봄과 여름에 만나는 주산지도 좋지만, 노랗고 빨간 단풍과 함께 어우러진 ‘가을날의 주산지’는 절경 중 절경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다. 청송이란 지명은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신선이 사는 세계’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1시간쯤 주산지 주변을 산책하니 이 말이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산에 오르는 걸 즐기는 여행자들에겐 ‘가을 주왕산’이 귀한 선물처럼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청송군 부동면 일대에 펼쳐진 백두대간 한복판의 경치가 그저 그만이다. 독특한 형상의 바위가 사람들의 눈앞으로 성큼 다가서고, 그것들을 등 뒤로 하고 갈라치면 눈부신 단풍이 오감을 아찔하게 흔들어댄다. 이만큼 드라마틱한 산행이 어디에 또 있을까? 1976년 한국의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주왕산은 그 품 안에 대전사, 백련암, 주왕암 등의 사찰과 주왕계곡, 절골계곡, 주방계곡, 학소대 등을 안고 있다. 등산 코스가 다양해 초보 등산객은 물론 등산 전문가들까지 만족감을 드러낸다고 한다. 관광객이 늘어나는 계절엔 인근 식당과 숙박업소도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청송군은 소상공인 보호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70억 원 규모의 ‘청송사랑화폐’ 발행 계획도 세우고 있다.작가 김주영의 예술혼이 살아 숨쉬는 ‘객주문학관’1939년 청송에서 태어난 김주영은 치밀하고 성실한 취재, 유장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소설가. 그는 ‘작가로서의 삶’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 바 있다.“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들은 모든 소유물을 몽땅 가지고 다닌다. 비단과 향수, 그리고 씨앗과 소금, 요강과 유골, 하물며 고통과 증오까지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격정적인 삶으로 그 모든 것이 탕진되는 날, 하나의 무덤이 거친 바람이 흩날리는 초원에 마련될 것이다.”‘객주’, ‘홍어’, ‘화척’ 등의 작품을 쓴 김주영은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등을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하나. 청송이 내세워 자랑할 만하다.진보면 진안리 폐교를 리모델링해 조성한 객주문학관은 바로 이 김주영의 생애와 작품 전반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공간. 그간 출판된 소설과 산문은 물론 작가의 취재수첩과 펜, 작품의 소재가 꼼꼼하게 메모된 공책 여러 권이 문학청년들을 기다리고 있다.사진 촬영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김주영은 1998년 선배 작가, 언론사 사람들과 함께 북한을 여행했다.객주문학관엔 그때 사용한 카메라와 현상한 사진 수십 점도 함께 전시돼 있다.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평양 등 현재는 여행하기 힘든 우리 땅 반쪽의 풍경을 보는 건 이곳에 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너스다.“운이 좋다면 1년에 절반쯤은 청송에 머무는 작가를 여기서 만날 수도 있다”는 게 객주문학관 해설사의 귀띔이다.돌에 핀 꽃을 찾아서 ‘꽃돌박물관’30년 넘게 수석(壽石)을 모아온 선배가 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이 돌 안에 세상과 인간이 있어. 너는 안 보이지?” 당연지사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타깝거나 아쉬울 것도 없었다. 돌, 범위를 좁혀 수석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청송 수석꽃돌박물관’은 흥미로워할 것 같다. 왜냐? 그 돌들 속에는 환하게 핀 ‘꽃’이 보이기 때문이다. 매화, 장미, 국화 등 종류도 다양하다. 예술적 심미안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얼마든지 ‘돌의 아름다움’을 완상할 수 있다. 박물관을 채운 ‘꽃돌’은 청송의 지역적 특수성이 만들어낸 것이다. 화산암 중 구과상유문암에 속하는 암석을 꽃돌이라 부른다. 수석 용어로는 화문석. 유문암은 유리처럼 반짝이는 결정을 가진 화산암인데, 청송군 진보면 괴정리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고 한다. 전문가들도 희귀한 돌로 인정하는 한국산 ‘꽃돌’의 80%가 청송에서 나왔다. 조그만 박물관엔 청송 꽃돌을 포함한 수백 점의 수석이 전시돼 있다. 청송 수석꽃돌박물관 지척엔 유교문화 체험관과 도예촌도 있으니, 한국의 전통문화에 빠져드는 시간도 가져보면 좋을 듯하다./홍성식·김종철기자

2019-10-16

한 템포 천천히… ‘예쁜 저수지의 도시’를 만나다

인간은 모두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상을 살면서는 그 사실을 잊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늘은 높아지고 날씨는 선선해졌다. 경산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 속의 또 다른 자아(自我)’를 찾아보기에 좋은 여행지다.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반곡지, 환성사, 선본사를 찬찬히 걷다보면 이 말이 과장이 아니란 걸 느끼게 될 것이다.충분히 영민했으나 보다 더 큰 깨달음을 얻고자 열망했던 신라의 한 승려가 멀고 먼 당나라로 공부를 하러 떠난다. 그 여정의 어느 하루. 동굴에서 잠들었던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다. 타는 듯한 갈증을 풀어준 시원하고 달콤한 물. 그러나 해가 뜨고 주위가 밝아졌을 때 그 바가지는 사람의 두개골이었고, 물 또한 새카맣게 썩어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거기서 크게 돈오(頓悟·갑작스런 깨달음)한 승려는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경산시 남산면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에 들어서면서 떠올린 원효의 에피소드다. 우리는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를 설명할 때 곧잘 사용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추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진리를 깨우친 원효는 이후 당대 백성들의 ‘정신적 스승’이 됐다.“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원효의 가르침은 싸움을 멈추고 하나의 마음으로 화합해 더 높은 경지를 지향하려는 화쟁사상(和諍思想)과 함께 현재까지도 ‘동굴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등불이 돼주고 있다.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은 경산과 관계를 맺고 있는 3명의 성현(聖賢·학식과 인품이 모두 뛰어난 인물)이 남긴 정신적 유산과 만날 수 있는 곳이다.경산시는 원효와 더불어 ‘신라의 3대 문장가’로 불리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표기법 ‘이두(吏頭)’를 만든 설총,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까지를 함께 이곳에 모셨다. 원효, 설총, 일연의 삶과 사상적 궤적을 연대순으로 알기 쉽게 전시해놓은 삼성현 역사문화관은 조용히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공간으로 보였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VR)을 통해 원효가 겪었던 ‘동굴에서의 밤’을 드라마틱하게 경험해 볼 수 있는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장’도 이채로웠다.경산시 관계자는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을 “세 분 성현의 정신적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체험공간인 동시에 도시 생활에 지친 가족들에게 여유로운 힐링의 시간을 선물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성인 관람객들이 역사문화관을 돌아볼 때 아이들은 26만㎡의 널찍한 부지 위에 들어선 유아숲체험원, 야외공연장, 분수대, 이야기정원, 레일썰매장에서 그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깊이 있는 인생’을 살았던 역사 속 인물을 만나보고 싶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직은 맑은 가을 햇살 아래서 뛰노는 게 더 좋은 아들과 딸 모두에게 어울리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홈페이지 https://samseonghyeon.gbgs.go.kr/밥과 고기가 사람의 육체를 살찌운다면, ‘사색의 시간’은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는 몸의 키가 아닌 ‘마음의 키’가 큰 사람을 더 매력적이라 느낀다.남산면 반곡리에 동화 속 풍경처럼 자리잡은 ‘반곡지’는 아름드리 왕버들이 풍성한 머리카락을 풀고 관광객을 기다리는 저수지다. 이곳을 느린 발걸음으로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더없이 낭만적이다.경산에 가겠다는 기자의 말에 지난봄 반곡지를 다녀온 후배 하나가 이런 말을 들려줬다.“그늘에 앉아 물에 비친 내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이 세계가 현실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겉모습만이 아닌 자신의 마음 속 풍경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려고 애쓴 사람이라면 이 말이 어렵지 않게 이해될 터. 기자 역시 떨어지는 나뭇잎이 둥근 파문을 일으키는 반곡지 수면을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평소엔 가져보기 힘든 귀한 사색의 시간이었다. 반곡지는 청송군 주산지와 더불어 아름다운 시골 풍광을 간직한 최고의 사진 촬영 장소로 이름이 높다.경산시민들은 “농촌마을의 한적한 모습과 연못, 여기에 왕버들과 짙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봄부터 겨울까지 일년 내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곳”이라고 반곡지를 자랑한다.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이기도 하다. 또한 원체 풍경이 빼어나 영화나 TV드라마의 공간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물빛을 바라보며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영남대학교 부근 남매지와 대구대학교 앞 문천지도 반갑다. 경산은 ‘예쁜 저수지의 도시’라 불러도 좋은 곳이다.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더위에 힘겨워하는 계절이 가고, 산 속 나무가 붉고 노란 옷을 갈아입는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이런 시기에 조그만 사찰로 향하는 오솔길을 걸어본다는 건 인간인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중 하나가 분명하다.경산시 하양읍 팔공산에 자리 잡은 환성사는 신라 흥덕왕 때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한 절이다. 고려 말기에 소실된 것을 1635년 중건했다고 한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매력을 지닌 사찰로 보였다. 일주문을 지나면 확인할 수 있는 ‘3단 형태의 대지’가 특히 이색적이었다. 대웅전과 수월관, 심검당과 요사체가 ㅁ자 모습을 이루는 환성사는 수미단, 석탑, 석등, 부도 등의 유물이 적지 않아 경내를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기자가 환성사를 찾아간 날은 보슬비가 내렸다. 그 비가 선물한 고요함과 평화로운 감정이 도시에서 받은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시원스럽게 날려줬다.팔공산 관봉 아래에 위치한 선본사 역시 역사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빼놓을 수 없는 경산의 볼거리다. 491년 창건된 이 절에는 ‘진정한 효(孝)’의 의미를 알려 주는 보물 제431호 ‘관봉석조여래좌상’이 우뚝 서 있다. 높이가 4m를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 어떤 것의 높이가 효심의 진성성보다 높을 수 있을까?이외에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삼층석탑의 미려함도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가족과 함께 팔공산을 찾아 등산과 사찰을 둘러보는 즐거움을 함께 맛보는 여행자들은 약수 한 잔에 오르막길을 걸어온 힘겨움을 어렵지 않게 떨쳐 내고 있었다. 오랜 시간 환성사와 선본사에서 자리를 지킨 유물 앞에서는 아이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도 볼 수 있었다.만산홍엽(滿山紅葉),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인 10월. 유서 깊은 경산의 사찰들을 찾아 마음 속 묵은 때를 씻어내고자 하는 이들이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주말의 가을 산행을 고대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홍성식·심한식기자

2019-10-09

잠시 돌아와 마음 뉘일 고즈넉한 시간과 마주서다

넉넉한 인심과 수려한 풍광이 찾는 이들을 매혹하는 예천군. 오염되지 않은 맑은 강과 하늘을 향해 뻗은 푸른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숲. 재론할 것 없다. 예천은 아름다운 도시다. 내달 펼쳐질 ‘세계 활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예천을 다녀왔다. 회룡포와 삼강주막이 선물한 낭만과 곤충생태원에서 느낀 즐거움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활과 화살만 잡으면 당 태종 이세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고구려 장수 양만춘이나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떨어뜨렸다는 윌리엄 텔처럼 명궁(名弓)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청복리 널찍한 공간에 시원스레 조성된 예천 진호국제양궁장을 찾은 날. 강사의 도움을 받아 양궁체험장에 섰다. 활은 무거웠고, 화살은 과녁에서 자꾸 멀어졌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즐거움에 빗나가는 화살을 보면서도 웃었다. 1979년. 예천여고 2학년 ‘소녀 김진호’는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5관왕에 오른다. 예천 진호국제양궁장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각종 양궁대회가 열리는 이곳은 해마다 1만여 명의 양궁선수, 임직원, 선수 가족들이 찾는다. 지역경제 발전에도 한 몫 하고 있는 것. 예천군체육사업소 관계자는 “인도네시아와 홍콩의 양궁선수들에게도 ‘최적의 훈련지’로 호평받고 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진호국제양궁장 인근엔 활 체험장과 다목적 운동장, 풋살 경기장도 만들어졌다. 주민들에게 ‘운동을 통한 건강한 삶’을 선물하기 위해서다.양궁 경기가 없을 때면 많은 방문객들이 ‘활쏘기’의 짜릿함을 즐기려 이곳을 찾는다. 기자는 초보자용 ‘리커브 활쏘기’를 체험했다. 좀 더 역동적인 걸 원하는 사람이라면 ‘국궁 체험’이나 움직이는 목표물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AR 무빙 타깃 활쏘기 체험’에 도전하면 된다. 팀을 구성해 실력을 겨루는 ‘활 서바이벌 체험’은 젊은층에게 인기다. 활은 구석기시대 때부터 사용됐다. 1만5천 년 전 그려진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에서도 화살을 든 사람을 볼 수 있다. 한국 역시 고구려 무용총 벽화(수렵도)와 김홍도의 민화 등에서 활과 화살을 확인할 수 있다. 활쏘기는 우리 선조들이 심신을 단련해온 수단 중 하나였다. 세계전통활연맹(WTAO)이 창립되기도 한 ‘활의 고장’ 예천군은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2019 예천세계활축제’를 연다. 양궁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활을 문화관광 상품으로 키워나가기 위해서다. 축제에선 외국 공연단의 활쏘기 시범과 전통 무예 등을 관람할 수 있고, 전국 양궁동호인 대회도 이 기간에 열린다.예천군은 “다양한 공연이 펼쳐질 개막식과 거리 퍼레이드가 관광객들에게 흥겨운 볼거리를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예천 전국가요제와 어르신 노래자랑, 도립국악단과 무용단의 화려한 무대 또한 기대해도 좋을 프로그램. 축제 현장에선 예천 특산물과 공예품이 판매되고, 여행자의 입을 즐겁게 해줄 푸드트럭도 운영된다. 아이들은 플래시 몹(Flash mob)과 불꽃놀이를 기다릴 듯하다. 연초부터 축제의 기본 구상을 시작한 예천군청은 ‘2019 예천세계활축제’의 성공을 위해 철저한 안전관리 계획을 수립했고, 곧 자원봉사자 발대식도 열 계획이다. 상세한 축제 프로그램과 행사 일정은 예천세계활축제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ywa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조그만 생물 곤충, 인류의 귀한 동반자”예천 곤충생태원서 만난 ‘미래의 비전’“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문장은 긴 고민의 시간을 인간에게 던진다. 새끼손가락 손톱보다 작은 ‘곤충’들. 이것들은 대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예천군 효자면에 자리한 ‘예천 곤충생태원’은 위에 언급한 질문에 답하는 공간이다. 살아있는 곤충을 직접 보며, 그것들이 가진 ‘미래의 비전’까지를 유추할 수 있는 곤충생태원은 한국에선 전례가 드문 곤충 전문전시관.이곳을 찾은 부모들은 ‘세계의 나비관’에 전시된 날개 고운 나비와 ‘3D 전시관’ 속 화면을 종횡하는 곤충들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살아있는 곤충과 교감할 수 있는 ‘신기신기 곤충체험실’과 개미와 꿀벌의 생태를 관찰하는 ‘찰칵찰칵 벅스하우스’는 그곳에서 체험한 유년의 기억을 오래 떠올리게 할 것이 분명하다.과학자를 꿈꾸는 소년·소녀들에게 예천 곤충생태원은 ‘친절한 선생님’으로 역할한다. 갈색거저리, 흰점박이꽃무지, 장수풍뎅이 등은 식량자원이 고갈된 지구에서 유용한 식용 곤충이 될 수 있는 것들. 예천군은 식·양용 곤충의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을 위해 5개의 농업법인도 설립했다.대구에서 온 강석훈(42) 씨는 “평소 벌레를 무서워하던 아들이 장수풍뎅이를 직접 본 이후엔 곤충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며 웃었다. 강씨 아들의 장래 희망은 이제 곤충학자가 됐다.동화 속 공간처럼 만들어진 ‘예천 곤충생태원’엔 동굴곤충체험관, 훨훨 나비터널 등이 있어 방문객들의 환호성을 부른다. 거기까지 운행되는 모노레일에 탑승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싱그럽다.생태원 관계자는 “조그만 생물인 곤충이 우리와 함께 살아갈 귀한 동반자임을 깨닫게 된다면, 인간의 삶도 보다 풍요롭게 변화하지 않을까”라는 철학적인 견해를 전하기도 했다.곤충생태원 지척엔 금당실 전통마을과 초간정, 용문사와 석송령, 선몽대 등 예천군이 내세우는 관광명소도 적지 않다. 돌아보기를 권한다.내성천이 빚어낸 절경 ‘회룡포’ 감상 후엔옛 정취 가득 ‘삼강주막’서 낮술 한잔 ‘캬~’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맑은 날도 좋지만 흐린 날이라고 유명짜한 풍광이 달라질 리 없다. 풍광 좋은 예천. 그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회룡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근사하게 묘사된 한국화를 방불케 한다. 누가 붓을 든 것일까?식상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회룡포 일대는 ‘눈부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유려하게 꺾어지는 물길과 빛나는 모래사장. 거기에 깃을 털며 날아오르는 하얀 새들의 몸짓까지.회룡포를 찾아 예천군 용궁면까지 달리는 길도 매력적이다. 짙푸른 녹음과 적요해서 더욱 눈길을 끄는 비포장 시골 도로. 그 끝에 출렁이는 강이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 길을 “신선이 사는 곳에 이르는 여정”이라고 말한다.KBS 오락·여행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 회룡포는 내성천 푸른 물길과 그 안에 자리한 조그만 마을이 만들어내는 기막힌 절경이 방문객들을 압도한다.여기까지 찾아간 이들이라면 당연지사 ‘삼강주막’도 가야 한다. 이른바 “한국의 마지막 주모‘가 있던 낭만의 공간. 그 옛날, 과거 급제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림으로써 부모의 자랑이 되고자 했던 청년들이 지친 다리를 쉬어가던 곳.예천군 풍양면 삼강주막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134호. 선비들만이 아닌 보부상과 뱃사공의 힘겨움까지 넉넉하게 안아주던 이곳은 방과 마루, 요리를 만들던 부엌으로 구성돼 있다. 아궁이엔 아직도 옛날 그을음이 그대로다.지난 2006년 ‘우리나라 마지막 주모(酒母)’로 불리던 유옥련 씨가 사망한 후엔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됐다. 이듬해 주막이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된 것은 “전통을 복원하고, 이를 스토리텔링화 하겠다”는 예천군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회룡포 전망대를 내려와 갈 곳을 찾는 이들에게 삼강주막은 없어서는 안 될 곳이다. 지금도 저렴한 안주와 막걸리를 팔고 있으니, 백일몽을 부르는 ‘낮술’ 한잔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9-25

굽이굽이 고갯길 넘어 백두대간 품속을 찾다

“여름휴가요? 저야 도자기 만들고, 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니 올여름 내내 작업장에서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고 해야겠죠.”무형문화재 김선식(49) 도예가의 말에선 자부심과 겸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폭염과 폭우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2019년 성하(盛夏)를 시뻘건 장작불 타오르는 뜨거운 가마 앞에서 보냈다. 작년도, 지지난해도 마찬가지였다. 여유롭게 시간을 내서 어디로 놀러 다닌다는 건 김씨의 ‘상상밖에 존재하는 일’이다.문경은 조선 초기부터 분청사기와 백자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이름이 높았다. 미려하고 다양한 형태는 물론 오묘한 빛깔로도 호평 받는 문경 도자기의 명성은 21세기에도 여전하다.수집가들 사이에서 문경은 도예 부문 무형문화재와 명장(名匠)의 ‘작품 도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김선식 도예가가 운영하는 관음요(觀音窯)는 8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공간으로 적지 않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씨의 선조인 김취정(金就廷)은 조선 영조 때인 18세기 중반부터 발물레를 사용해 백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전통은 8대까지 이어져 김선식에 이르렀다. 자그마치 250년에 이르는 세월이다.그 장구한 시간 동안 김선식 씨의 윗대 사기장들 모두는 전통 도자기의 발전에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았다. 김 도예가가 자신의 일에 긍지와 책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문경에는 전통 방식의 도자기 제작법을 지켜가고 있는 장인들이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그렇기에 해마다 ‘찻사발 축제’를 열고, 제법 큰 규모의 도자기박물관도 세웠다. ‘한국 도예의 전통을 지켜가겠다’는 지자체의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보내는 작업장에서 전통 발물레로 다완(茶碗·찻사발)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 김선식 씨는 손을 씻은 후 사재를 털어 만든 ‘한국 다완 박물관’(문경읍 하리 소재)으로 기자를 데려갔다.“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한국 찻사발의 매력을 알리고, 찻사발 대중화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설립했다”는 이 박물관은 한국, 중국, 일본의 ‘작품급 다완’ 2천여 점 이상을 소장했다.전시 공간에 한계가 있어 현재는 약 700점을 관람객들에게 선보이고 있고, 나머지는 도자기 보존에 적합하도록 기온과 습도 조절이 가능한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한국 다완 박물관’은 찻사발만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국내 최초의 박물관이라는 것이 김씨의 설명.“우리의 전통 도자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밥그릇과 국그릇으로도 편하게 사용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한 김선식 도예가는 “내게 맡겨진 역할이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면 웃으면서 일하는 게 좋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그의 미소가 세상사 티끌이 묻지 않은 아이의 그것처럼 맑았다. 김씨의 아들 민찬 씨도 9대째 ‘패밀리 비즈니스’를 잇고자 현재 도예를 공부하는 중이다.‘한국 다완 박물관’에선 김선식 씨가 만들고 구운 ‘경명진사 달항아리’, ‘철화 금채항아리’, ‘청화백자 국화문 항아리’, ‘분청철화 어문 자라병’ ‘관음 댓잎 다기(茶器)’ 등도 감상할 수 있다.□ 관음요 홈페이지: http://kuy.kr한국다완박물관: 054-571-5780문경은 아나키즘(Anarchism·무정부주의)을 사상적 배경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박열(1902~1974)의 고향이다.호서남면 모전리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열은 일본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20년 넘게 옥고를 치러야했다. 그럼에도 체포와 재판 과정은 물론, 감옥에서까지 ‘조선 장부’의 기개를 꺾지 않았다.소설가 안재성(59)은 박열을 지목해 “선과 악, 정의와 불의, 투쟁과 굴종 등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은 여러 문제들을 고민하고 회의하고 또 질타하는 그의 연설문과 논문은 오늘의 현실에도 길을 안내하는 등불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일본 권력자 계급에 전한다’, ‘나의 선언’ 등에서 보이는 박열의 문장은 단호하고 장려한 선비의 결기로 가득 차 있다.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는 일본인임에도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당대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싸웠고, 이후 사랑했던 남자의 땅 문경에 묻혔다. 둘의 이야기는 지난 2017년 이준익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우뚝 선 박열의사기념관은 견인불발(堅忍不拔)의 태도로 조국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를 기억하기 위해 조성됐다. 주위 기념공원엔 ‘의사 박열 선생 추모비’와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도 자리했다.기념관 전시실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유물과 유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자료가 방문객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무정부주의와 항일 역사 사이의 시대적 상관관계에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봐야 할 곳이다.□ 박열의사기념관 홈페이지: http://www.parkyeol.com관련 문의: 054-572-3396입신양명(立身揚名)의 푸른 꿈을 안고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선비들이 넘어가던 문경새재.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세가 그대로 느껴지는 이 고개의 이름은 ‘새들도 힘에 겨워 쉬면서 넘는다’는 의미라고 한다.영남 지역과 기호 지방을 잇는 문경새재는 문물과 재화가 오가던 상업 거래의 중심지였고, 국방 분야에서도 요충지라 할 수 있었다. 1981년 일대 5.5㎢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됐고, 이듬해엔 문화재 보호구역이 됐다. 문경새재도립공원은 완만한 산길을 걸으며 여유롭게 등산을 즐기는 관광객들로 1년 내내 붐빈다. 특히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제3관문까지의 6.5km 구간이 방문자들에게 인기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신을 벗어 들고 흙 위를 걸어가는 모습이 재밌다. 기자 역시 이 행렬에 잠시 동참하며 그들과 즐거움을 함께 했다.문경새재도립공원 주변엔 옛길박물관, 문경 에코랄라, 사계절 썰매장, 국민 여가 캠핑장, 철로 자전거, 짚라인(Zipline) 등 관광·레저시설이 마련돼 있어 가족단위 여행객들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 ‘불멸의 이순신’, ‘해를 품은 달’이 촬영된 장소로 유명한 ‘문경새재 오픈세트장’도 공원 입구에서 가깝다.기자가 이곳을 찾은 날도 고려와 조선시대를 실감나게 재현한 건물들 사이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 선 중년의 한 관광객은 “서울만이 아니라 문경에도 광화문이 있네”라며 환하게 웃었다.문경새재에서의 산행은 자신의 몸 상태를 감안해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제1관문에서 시작해 마당바위, 제2관문, 동화원 터를 지나 제3관문에 이르는 코스는 누구나 도전해도 좋은 산책길에 가깝다. 체력이 좋고 경험이 풍부한 등산객이라면 제1관문을 출발해 여궁폭포와 해국사를 지나는 ‘주흘산 3코스’가 제격이다.□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054-571-0709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선 가을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축제들이 문경시 곳곳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9월과 10월에 문경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아래 소개하는 정보가 도움이 될 것이다.20일부터 22일까진 동로면 일원에서 “100세 청춘, 문경 오미자”라는 슬로건 아래 오미자축제가 열린다. 문경에서 생산되는 오미자는 해발 고도 300m 이상의 깨끗한 자연에서 친환경 방식으로 재배돼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축제에선 ‘오미자 퍼포먼스’, ‘전국 노래교실 경진대회’ 등이 펼쳐지고, 오미자를 재료로 만든 각종 요리가 마련된다.거정석(약돌)을 사료에 섞어 먹여 특유의 육질을 가진 한우를 맛볼 수 있는 문경약돌한우축제는 28일과 29일 영강체육공원에서 개최된다. “약돌한우는 육즙이 풍부하고 담백한 감칠맛을 가졌다”라는 게 축제 주최측의 설명. 행사장에선 약돌한우는 물론, 여러 종류의 문경 농·특산물이 판매될 예정이다.문경사과축제는 10월 12일에 시작돼 27일까지 16일간 이어진다.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 사과’라는 홍보 문구가 재밌다. 문경 사과는 중산간 지역 비옥한 토질에서 자란다. 당도가 높고 맛과 향이 뛰어나 ‘꿀사과’라는 별칭도 있다. 문경새재 제1관문 앞 무대에서 펼쳐질 개막 퍼레이드와 축하공연, 사과 관련 체험 프로그램 등이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9-04

셀 수 없이 오래된 시간의 흔적과 만나다

잠시 존재했다가 영원히 사라진 제국은 인간의 상상력을 민감하게 자극한다.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쯤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르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화려한 고대 문명을 꽃피웠다는 설화 속 섬나라 아틀란티스(Atlantis)가 그렇고, 2천500년 전 지구의 30% 이상을 지배했다가 서서히 몰락해간 페르시아(Persia) 또한 그렇다.두 왕국을 떠올릴 때면 허구와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 거대한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촛불처럼 초라하게 소멸해간 한 민족의 발자취가 자연스레 그려진다. 그걸 더듬는 행위는 쓸쓸하고 허허롭다.의성에도 삼한 시대 초기엔 강력한 제국이 존재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 등에 흔적이 남아있는 조문국(召文國)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 의성읍 남쪽에 위치한 금성면에 조문국의 유적지가 다수 분포돼 있다. 조문국의 당시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과 청동기로 제작된 각종 유물들. 이 두 가지는 당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조문국을 통치했음을 알려준다. 초기 고대국가로의 발전을 지향했던 조문국 유적지 일대에선 신라의 금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 금동관이 다수 출토됐다. 또한 왕족과 귀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古墳)도 존재한다. 조문국은 인접한 나라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충지에 자리했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국가의 멸망을 앞당기는 이유가 됐다는 게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삼국사기’는 이 사실을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벌휴왕 2년(185)에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가 조문국을 정벌했다.”사라진 제국의 한가운데 자리한 ‘의성 조문국박물관’은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역사에 관심 있는 여행자들을 반겨준다. 기자가 찾은 날도 입구를 지키는 박물관 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2013년 문을 연 조문국박물관에선 조문국의 생성에서부터 소멸까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의성의 역사·문화유산을 보존해 전시하고, 학술 연구와 교육 프로그램까지 진행하는 곳”이라는 게 박물관측의 설명. 조문국박물관은 민속유물전시관과 고분전시관까지 갖추고 있다. 보물 제880호인 ‘정만록’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3호 ‘울릉도 사적’, 학미리 1호 고분에서 나온 은제환두대도(銀製環頭大刀), 붉은 간토기, 돌 화살촉,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동 신발, 나비 모양 관 장식 등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지금 조문국박물관을 찾는다면 특별기획전 ‘조문국의 부활’도 관람이 가능하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지도 속에 선명하게 기록된 ‘召文(조문)’이란 글자를 볼 수 있다. 이는 사라진지 2천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선 조문국이 살아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아이들과 함께 방문했다면 ‘어린이 고고 발굴 체험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는 것도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될 듯하다. 체험을 원한다면 사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조문국박물관 홈페이지 http://jmgmuseum.usc.go.kr관련 문의: 054-830-6915조용하고 호젓해서 좋다. 번잡한 해변이나 유명 관광지의 호객 행위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의성군 빙계계곡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눈앞에서 청량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맑은 물이 답답한 도시 생활에 찌든 눈과 귀를 행복하게 해준다. ‘경북 8경’의 하나인 춘산면 빙계계곡을 찾은 날. 기묘한 형상의 바위 사이로 숨어든 젊은 남녀 몇몇이 뜨거운 여름을 더 뜨겁게 달구며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물장구치며 깔깔거리는 그들의 웃음이 보기 좋았다. 독특한 이 계곡의 이름은 한여름에는 얼음이 얼고, 추운 겨울엔 뜨거운 바람이 불어온다는 빙혈(氷穴)과 풍혈(風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쾌하고 재밌는 작명이다. 참고로 ‘빙계 8경’은 용추, 물레방아, 바람구멍, 어진바위, 의각, 석탑, 얼음구멍, 부처막이다. 의성 중심가에서 차를 몰아 빙계계곡으로 들어서면 입구에서 빙계서원(氷溪書院)이 환하게 웃으며 여행자에게 손을 내민다. 권위적이지 않은 시원스런 처마와 널찍한 대청마루가 인상적이다. 고풍스러운 빙월루(氷月樓)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1556년 김안국과 이언적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빙계서원은 선조 때 사액서원(賜額書院·왕이 편액을 내린 서원)이 됐다. 이후 유학자인 김성일, 유성룡, 장현광을 추가로 배향(配享)했다고 한다.아직 여름휴가를 다녀오지 못한 독자들이 있다면 시원한 계곡과 조선시대의 역사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빙계계곡과 빙계서원으로의 여유로운 여행을 권하고 싶다.20세기 초반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이 묘사해놓은 풍경 같았다. 짙푸른 풀밭이 드넓게 펼쳐졌고, 그 위로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거대한 봉분 수백 기가 솟아 있다. 쏟아지는 여름 햇살 때문인지 오가는 사람은 드문데, 도도한 자태를 뽐내는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불어오는 바람에 고대 왕국의 귀족처럼 여유롭게 흔들렸다. 지상의 풍경처럼 보이지 않았다.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의 ‘고분군(古墳群)’은 약칭 ‘금성산 고분군’ 혹은 ‘대리리 고분군’으로 불린다. 고분이 위치한 지역은 까마득한 옛날 존재했던 조문국의 도읍지로 짐작된다. 현재의 금성면 대리리, 학미리, 탑리리 일대다. 21명의 왕이 369년간 지배권을 행사했던 조문국. 금성산 고분군은 이 왕국의 대표적 유적지다. 모두 200여 기의 고분이 높이를 달리하며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경덕왕(신라의 경덕왕이 아닌 조문국의 왕)의 능(陵)과 고분전시관 등이 방문자를 기다린다.고분전시관은 지난 2009년 발굴된 대리리 2호분의 내부를 재현했다. 출토된 여러 점의 유물을 볼 수 있고, 2천 년 전 매장 풍습 중 하나인 순장(殉葬·왕이나 귀족이 사망하면 산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법) 문화에 관해서도 설명해주고 있다.이곳은 분명 일종의 ‘공동묘지’임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주위 풍광이 빼어나 산책하는 이들은 그 사실을 깜빡깜빡 잊게 된다. 봄에는 작약이 화려한 꽃을 피워 아름다움과 운치를 더한다고 한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잠든 프랑스 파리의 묘지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 못지않다. 만약 내년 5~6월쯤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있다면 금성산 고분군의 소나무와 작약꽃을 두 사람 사랑의 증인으로 세우고 사진을 찍어보면 어떨까?약사전, 석가여래좌상 등 보물급 문화재가 몸을 숨긴 절은 물론 좋았다. 더불어 사찰로 올라가는 길 역시 매력적이었다.고운사(孤雲寺)는 신라 때 유교·불교·도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던 학자 최치원(857~?)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절이다. 그는 두 명의 승려와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었다. 681년 창건 당시엔 고운사(高雲寺)라 불렀는데, 이후 최치원의 호가 사찰의 이름이 됐다고 한다.‘명당 중 명당’이라는 반쯤 핀 연꽃을 닮은 지대에 창건된 고운사는 도도한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어 의성군 단촌면에 당당한 위세를 자랑하며 우뚝 서있다.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 아래에서부터 걸어온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푸른 그늘’을 이야기했다. 고운사로 오르는 길은 시원스럽고 미려하다.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여름날, 더없이 좋은 선물이다.사찰 경내엔 진분홍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었다. 그 붉은색이 초록색의 수목과 잘 어울렸다. 어디선가 풍경 소리가 들려왔고, 떠들썩하고 분주했던 마음 한 켠이 물속처럼 고요해졌다.규모가 제법 큰 절이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곳곳에서 흥미로운 유물을 만나게 된다. 산을 내려온 청설모도 한두 마리 눈에 띄었다.동승(童僧)의 순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싶은 관광객이라면 고운사 주변 풍광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것이 분명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28

하늘과 땅 사이 떠도는 바람에서 달콤한 향기가…

숨 쉬는 공기의 맛이 달랐다. 보다 시적(詩的)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늘과 땅 사이를 떠도는 바람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경북 내륙 깊숙이 자리한 봉화군. 백두대간 청정한 계곡을 달리는 기차가 있고, 백두산 호랑이를 만날 수 있으며, 항일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도시. 춘양목 내음 그윽한 봉화에서의 1박 2일은 재론의 여지없이 즐거웠다. 그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산타마을 분천역서 출발 1시간 남짓태백 철암역 사이 계곡 달리는 코스기차는 ‘낭만’과 ‘향수’를 부르는 교통수단이다. 철길을 따라 눈부시게 나타났다가 아스라이 사라지는 풍광은 저마다 지나온 먼 과거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경북 봉화군 분천역과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사이를 오가는 ‘백두대간 협곡열차’도 마찬가지. 맑고 깨끗한 계곡을 따라 질주하는 이 기차의 별칭은 ‘V-train’. 영어 대문자 V는 계곡의 형상과 닮았다.무더운 여름에 추운 겨울을 상상하게 해주는 봉화군 산타마을. 분천역 앞에 자리한 그곳에서 세상 가장 유명한 사슴 ‘루돌프’와 사진을 찍은 아이들은 산타클로스의 안내에 따라 분천역 플랫폼에 모여들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누구랄 것 없이 입가엔 웃음이 가득 매달렸다. 산타클로스의 옷처럼 새빨간 열차는 아기자기한 장식을 더해 철암까지 달리는 1시간 남짓의 시간을 지겹지 않게 해준다. 중간중간 친절한 안내 방송은 물론이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땐 흥겨운 음악과 객차 천장에서 빛나는 야광 장식이 꼬마 손님들의 탄성을 부른다. 잠시 정차하는 승부역에선 고소하게 삶은 옥수수와 시원한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먹고.분천역이 아이들의 ‘행복 공간’이라면, 철암역은 나이 지긋한 관광객들의 추억을 소환하는 장소다. 역 지척에 위치한 철암탄광역사촌은 1970~80년대 탄광마을을 고스란히 재현해 ‘가난했지만 따스함을 잃지 않고 살았던’ 과거 모습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당시 사람들이 드나들던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 갤러리와 박물관으로 꾸민 게 소박해서 더 눈길을 끌었다. 철암에서 분천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데 최적의 장소이기에 망설임 없이 추천한다. 지난 2013년 개통한 한국 최초의 개방형 관광열차인 ‘백두대간 협곡열차’ 인기는 겨울만이 아닌 여름에도 높았다. 활짝 연 차창으로 들어온 시원한 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져 주는 색다른 기차여행이었다.□ 백두대간 협곡열차 탑승 문의: 054-672-7711(분천역)아시아 수목원 중 가장 큰 5천여ha 규모230kg 진짜 호랑이 지척서 보는 행운이단 한 번의 포효로 하늘을 나는 까치와 까마귀까지 숨죽이게 만드는 거대한 짐승. 사방 1천 리 밀림을 통치하는 호랑이는 예부터 ‘신령스러운 동물’로 불렸다. 바로 이 호랑이를 봉화군 춘양면에 자리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만났다.백두대간이란 북쪽 백두산에서부터 남쪽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긴 산줄기를 지칭한다. ‘한국 생태계의 보물창고’로도 불리는 이 공간의 한가운데 조성된 것이 바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총면적이 5천179ha로 아시아 수목원 중 가장 크다.돌과 고산식물을 조화롭게 배치한 ‘암석원’과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만병초원’, 백두대간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꼼꼼하게 관찰할 수 있어 학습 효과가 높은 ‘백두대간 자생식물원’과 함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춰 남녀노소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다. 지하 46m 터널 속엔 야생 식물종자 저장시설도 마련했다. 기후 변화와 자연 재해로부터 산림생물의 다양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다.약용식물원과 수변생태원, 야생화 언덕과 무지개정원 등도 많은 여행자들이 찾지만, 이 수목원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는 곳은 누가 뭐래도 ‘호랑이 숲’. 당당한 자태를 드러내는 백두산 호랑이 2마리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건 흔하게 다가오는 기회가 아니다. 수목원 입구를 출발해 5분쯤 트램(Tram)을 타고 돌틈정원에서 내려 숲길을 800여m 올라가면 형형한 눈빛에 검은 줄무늬가 인상적인 백두산 호랑이들이 방문자를 반긴다. 땡볕이 내리쬐는 오르막길을 20분이나 걸어갈 때는 힘들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좁은 동물원 우리 속이 아닌 널찍한 풀밭을 유유히 오가는 230kg의 ‘진짜 백두산 호랑이’를 지척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힘겨움과 더위는 어느새 잊게 된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모습조차 ‘품격 있는 황제’와 닮았다. 심지어 흔들리는 꼬리의 움직임까지 기품이 넘쳤다.지구 위에 존재하는 호랑이 중 몸집이 가장 큰 백두산 호랑이는 흥미롭게도 아이들보다 기자를 포함한 40~50대 어른들이 더 좋아했다. 아마도 할머니의 옛 이야기 속에 가장 자주 등장하던 친숙한 동물이어서가 아닐까?□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홈페이지: www.bdna.or.kr□ 관련 문의: 054-679-1000독립탄원서 초안 작성된 ‘역사의 현장'해저리 마을도 독립유공자 17명 배출여름날 오후 늦게 찾아간 봉화읍 해저리(海底里). 고즈넉한 풍경 속에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석양이 만회고택(晩悔古宅) 뒤편으로 사라지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중요민속자료 제169호인 만회고택은 1690년 춘양목으로 지어진 기와집이다. 조선시대 높은 벼슬에 오른 이들이 많이 나온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한국 독립운동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이 집에서 일어났으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이 집의 주인은 심산 김창숙(1879~1962)과 의성 김씨 혈족이었다. 양심적인 교육자이자 독립운동에 열정을 바쳤던 심산은 만회고택 명월루(明月樓)에서 ‘파리장서(巴里藏書·1919년 김창숙을 포함한 유림들이 파리 평화회의에 보낸 독립탄원서)’의 초안을 작성했다고 한다.운 좋게도 바로 이 명월루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현재 고택을 지키고 있는 만회의 후손 김시원 씨는 “17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마을에서 생활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명월루를 포함한 집 곳곳에 여전히 살아있는 선조들의 우국충정을 잊지 않았다”는 말을 들려줬다.바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시원한 명월루. 잠을 청하려 누웠다. 휘영청 밝은 달이 산과 들, 동네의 크고 작은 고택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심산이 ‘파리장서’를 쓰던 그날 밤도 분명 달은 환했으리라.□ 만회고택 홈페이지: https://manhoegotaek.modoo.at/□ 숙박 문의: 054-673-7939닭실마을 청암정·거촌리 포암정 등한 폭의 동양화 보듯 기품이 넘쳐‘소나무계 명품' 춘양목에게선수십년 지나도 특유의 향기 ‘솔솔'봉화군은 100개가 넘는 정자(亭子)를 가진 지역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경치가 수려하다는 이야기다. 곳곳에 자리 잡은 정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무더위에 지친 마음을 편안하게 다독여준다.봉화읍 닭실마을의 청암정(靑巖亭)은 조선 중기의 학자 충재 권벌(1478~1548)이 1526년에 세웠다. 푸른 이끼가 낀 거북 모양의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선 미려한 정자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마당에서 정자로 건너가는 좁은 돌다리 또한 운치가 있다. 안내해준 사람의 설명에 따르면 정자를 둘러싼 연못엔 가끔 수달이 나타나기도 한다고.연꽃이 피는 시기면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다는 도암정(陶巖亭)은 봉화읍 거촌리에 위치해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팔작지붕에 홑처마다. 단출하지만 전통적인 멋스러움이 은은하게 스며있다. 조선 효종 시기의 문신 황파 김종걸(1628~1708)이 선비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세상사를 논하던 도암정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54호이기도 하다.이외에도 봉화군엔 한수정, 뇌풍정, 사미정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정자가 있다.춘양목(春陽木) 또한 봉화의 자랑거리 중 하나.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 높은 산에서 자라는 소나무인 춘양목은 색깔이 곱고, 어떤 나무보다 단단해 고급 건축재와 가구 재료로 사용된다. “나이테가 보통의 소나무보다 훨씬 조밀하고, 성장 속도는 느리지만 뒤틀림이 없으며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것이 봉화목재 정진혁 대표의 설명. 특유의 향기 역시 가공된 상태에서 수십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니, ‘소나무계의 명품’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21

경주, 길을 잃고 사색에 잠기다

여행자는 알고 있다. 때로는 ‘길’을 잃는 것이 ‘또 다른 길’을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경주엔 조용히 홀로 앉아 들뜬 마음을 차분히 달랠 공간이 적지 않다. 경주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들을 위해 ‘길을 벗어나’ 사색과 힐링을 즐길 수 있는 장소 몇 곳을 소개한다.너무나도 선명한 진녹색이 전해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에 ‘이곳이 과연 현실 속 공간이 맞나?’라는 의문마저 들었다.지척의 도로에선 차량이 질주하고 있음에도 그곳만은 매미와 풀벌레가 울어대는 피안(彼岸) 같았다.족히 수백 년은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을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낸 시원스런 그늘. 그 아래 접이식 간이의자를 펴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자연스레 그악스러운 8월의 더위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경주시 보문동엔 신라 진평왕의 능이 자리해 있다. 널찍한 평야 한복판에 들어선 거대한 봉분. 그 풍경만으로도 돌올하지만 진평왕릉의 진가(眞價)는 주변 거대한 녹지에서 드러난다. 소나무를 비롯한 갖가지 수목과 ‘초원’이라 불러도 좋을 넓은 초록 풀밭, 여기에 고전적으로 디자인된 목조 벤치까지 그림처럼 준비돼 있었다.소음과 매연 가득한 도심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 이런 ‘사색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름이 알려진 여타 관광지와 달리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 조용한 휴식이 가능해 보였다. 시원한 그늘에서 야외 독서를 원하는 이들에겐 안성맞춤.1969년 사적 제180호로 지정된 진평왕릉을 호위하고 선 것은 궁궐의 병사들이 아닌 키 큰 나무 몇 그루였다. 그럼에도 왕의 깊은 잠을 방해할 이들은 없었다. 그만큼 주위 풍광은 고요하고 평화스럽다. 1천 년 전 서라벌 사람들도 이곳에서 피크닉과 데이트를 즐겼을 법하다.기자가 능을 찾았던 날엔 대구에서 왔다는 중년 부부 한 쌍이 진평왕릉을 한 바퀴 돌아보곤 벤치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겹고 보기 좋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았던 이유는 1천400년을 이어진 진평왕의 곤한 잠을 깨우기 싫어서였을까?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싶은 여행자에게 권하고픈 장소다.아르헨티나의 작가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천국은 도서관”이라고 했다.시와 소설, 평론에 두루 뛰어났던 사람이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유물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어떤 공간을 천국으로 느낄까? 아마도 박물관일 것이다.1월 1일과 설·추석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방문객을 맞는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 역사와 불교미술, 고대 유물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과 지적 갈증을 풀어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곳.상설전시관인 신라역사관, 신라미술관, 월지관에선 신라 건국에서부터 멸망 과정, 화려했던 신라의 불교문화, 월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야외 전시장에도 적지 않은 국보와 보물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눈을 크게 떠야 한다.운 좋게도 기자가 박물관을 찾았을 땐 특별관에서 ‘금령총 금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령총은 경주시 노동동 고분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1924년 진행된 조사·발굴 과정에서 기차 한 량을 가득 채울 만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재발굴이 진행 중이다.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천마총이나 금관총에서 나온 금관에 비해 크기가 작고(머리띠 지름 15cm), 옥(玉)으로 된 장식이 없다. 학계에선 나이 어린 왕자가 썼던 것으로 추정한다.당장 오늘이라도 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 간다면 ‘진품’ 금령총 금관과 화려한 금허리띠를 만날 수 있다. 저절로 눈길이 가는 선명한 노란색과 정교한 세공 기술이 감탄사를 부를 것이다. 신라가 ‘황금의 나라’로 불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국립경주박물관을 찾는다는 건 ‘역사의 오솔길을 사색하며 걷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금령총 금관 전시는 31일까지 계속된다. 여기에 보너스 하나. 모든 전시장은 무료입장이다.“나라를 지키는 용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며 바다에 묻히기를 자처한 문무왕.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양북면 봉길리 대왕암을 만나고 경주 시내로 돌아가는 길.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용당리 감은사지(感恩寺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쓸쓸한 풍경 속에 우뚝 솟은 2기의 삼층석탑이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감은사는 문무왕이 일본군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뜻에서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신문왕이 ‘호국 사찰’로 완성시켰다. 여타 절과는 달리 독특하게도 지하에 용도를 추측하기 힘든 큰 공간을 만든 감은사. 신문왕은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그곳에서 쉴 수 있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옛사람들의 효심은 왕족이나 평범한 백성이나 매한가지였다.사적 제31호인 감은사 터는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위치했다. 석탑과 금당(金堂) 터, 초석과 장대석 등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봄가을이면 신라 역사에 관심을 가진 중·고교생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여유롭게 절터와 삼층석탑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 하지만 푹푹 찌는 여름엔 그것도 마냥 쉬운 게 아니다. 그럴 때면 석탑 뒤편 촘촘한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는 대나무 숲으로 숨어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신라가 번창하던 시기에도 분명 감은사 대나무 숲이 있었을 터. 입이 없어 말하지는 못했겠지만, 그것들은 문무왕을 그리워하는 신문왕의 애끓는 심정을 눈앞에서 지켜봤을 것이다.푸르고 또 푸른 빛깔로 하늘을 향해 뻗은 감은사지 대나무 사이에서 바라보는 절터와 석탑은 실력 빼어난 동양화가가 그려놓은 수묵화의 형상으로 여행자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화려한 색채보다 담담한 흑백의 풍광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때가 있다. 감은사지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짙은 대나무 그늘 아래선 서정인의 소설이나 로트레아몽(1846~1870)의 시를 읽는 게 어울린다.돗자리를 깔고 나란히 누운 젊은 연인은 기자가 다가가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서로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상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세심한 손길이 질투와 부러움을 불렀다. 펴놓은 돗자리가 싸구려면 어떠랴. 두 사람은 삼릉(三陵) 솔숲에서 인생의 가장 ‘값비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경주시 배동 울창한 소나무 숲속엔 신라 왕들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3기의 능이 있다. 여기에 잠든 이들은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신덕왕과 경명왕은 신라가 기울어가던 시기의 통치자였다. 당연지사 외부의 침입이 잦았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도 극심했다. 국력이 쇠하니 영토 또한 터무니없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신라 전성기의 왕들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장식의 왕릉을 만들 여력이 없었을 터.삼릉 모두는 봉분이 낮고 능을 지키는 석상(石像)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름답다. 허물어진 역사의 폐허에 숨겨둔 보석처럼 반짝인다. 의외로 이런 비극의 현장에서 감동을 느끼는 여행자가 많다고 들었다. 아주 가끔은 번듯함보다 남루함이 빛나는 시간이 있다.삼릉을 삼릉답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오브제’는 주변을 둘러싼 기묘한 형상의 소나무 수백 그루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서늘한 음지는 폭염에 시달려온 여행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밀어(蜜語)를 속삭이고 싶은 아베크족들에게도 성지로 다가온다.삼릉은 경주국립공원 남산 지구의 시발점이다. 이곳을 출발해 금오봉-용장사지-용장골까지 가는 4.6km 등산 코스도 인기가 좋다. 산을 오르는 게 익숙한 사람의 경우 3시간이면 주파가 가능하다고 한다.“등산길에선 100개가 넘는 갖가지 형태의 불상과 석탑, 절터 등을 볼 수 있어 심심할 겨를이 없다”는 게 경주국립공원사무소의 설명. ‘사색’과 ‘레저’를 한 번에 맛보기 원하는 관광객들에겐 제격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07

경주, 길에서 길을 묻는다

‘길’이나 ‘특정 지역’이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경우 슈테판 대성당 주위 ‘슈테판 플라츠’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1년 내내 붐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주변 거리와 일본의 츠키지 수산시장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다.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과 부산 국제시장의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골목길, 대구 중구의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등은 한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길이다.여기에 또 하나의 ‘복병’이 얼마 전부터 주목받고 있으니 바로 경주 황리단길. 앞서 언급한 ‘길’과 ‘지역’은 이미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했다.황리단길은 곳곳에 숨어 있는 젊은 감각의 ‘맛집’과 멋진 한옥의 내부를 모던하게 개조한 ‘예쁜 카페’가 특화된 상품이다.여기에 낡았지만 정겨움을 느끼게 해주는 간판을 단 세탁소, 문구점, 한의원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1970~80년대 풍의 클래식한 분위기까지 맛볼 수 있다. 이는 비단 20대 남녀만이 아닌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황리단길을 아끼는 이유다.기자가 이 거리를 찾았을 때는 평일 한낮. 그럼에도 전국 각처에서 경주를 찾아온 젊은 여행자들이 적지 않았다. 야외 테라스에서 차가운 커피 한 잔을 주문해놓고 사색을 즐기는 중년들도 눈에 띄었다.황리단길에는 흥미롭게도 3~4개의 점집이 있다. 여기에 들러 재미로 사주나 관상, 애정운 등을 확인하는 것도 경주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보행자가 많고 차량도 함께 통행하는 거리이니만치 황리단길에선 예쁜 옷가게와 일식집 수조를 헤엄치는 커다란 농어에만 지나치게 눈길을 줘서는 곤란하다. 언제나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게 안전이니까.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곳이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들이 모여 사는 세거지(世居地)로 500년을 이어왔다. 지난 2010년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됐다.입장료 4천원을 지불하면 1~2시간 동안 조선 중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보물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무첨당, 향단, 관가정, 서백당, 심수정, 수운정의 날렵한 검은 기와와 동네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선비화(花)’ 배롱나무 꽃을 보는 것은 마음 설레는 일.기와집의 매력에 필적하는 건 잘 보존된 양동마을의 서민적인 초가(草家)들이다. 이 둘 사이를 오가노라면 더운 날씨도 잊고 야트막한 언덕을 힘 있게 오르내릴 수 있을 것이다.기자가 방문한 날도 섭씨 33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덮쳤지만, 한국 관광객은 물론 대만에서 경주를 찾은 30여 명의 단체관광객들도 얼굴에서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옛 추억을 끄집어내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행위일 터. 양동마을엔 흐르는 땀을 식힐 커다란 나무 그늘도 부지기수다. 시간이 넉넉한 여행자라면 양동마을 체험관에 들러 전통 엿도 만들어보고, 쉬엄쉬엄 걸어 장태골까지 가보기를 권한다. 양동마을 문화관(문의 054-779-6127)도 빼놓으면 아쉽다. 시간을 맞추면 양동마을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해설사의 안내도 받을 수 있다. 경주시민과 경로우대자, 보호자와 함께 온 7세 미만 어린이와 국가유공자는 무료 입장이다.대릉원 입구와 첨성대 앞 도로변엔 삼륜 전동차, 소형 오토바이, 자전거를 빌려주는 가게가 많다. 5천~2만 원 정도를 지불하면 바람을 가르면서 교촌마을, 월정교, 국립경주박물관, 동궁과 월지를 효과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좋은 목재로 만든 교촌마을 초가집에선 은은한 향기가 풍겨올 듯하다. 경주 최 부자 가문이 지향했던 ‘가진 자의 긍휼’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조성된 한옥마을이 바로 교촌. 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씨 고택(古宅)과 경주교동법주 등이 볼거리. 이외에도 깔끔하게 정리된 마을 거리엔 아기자기한 찻집과 맛있는 간식을 판매하는 가게가 방문자의 발길을 붙잡는다.거기서 5분만 달리면 월정교가 나온다. 옛 이야기 속 원효대사가 요석궁을 가기 위해 건넜다는 다리다. 이어지는 요석공주와의 ‘러브 스토리’는 이미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배웠을 터. 복원된 월정교는 웅장하고 세련됐다.다시 자전거와 삼륜 전동차가 한여름 더위를 꺾어줄 바람을 일으키며 달린다. 귓가를 스치는 성하(盛夏)의 향기가 달콤했다.이때 오른편에 나타나는 게 국립경주박물관.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아쉽다. 박물관 내부엔 국보와 보물이 적지 않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박물관을 나와 조심스럽게 길을 건너 좌측으로 3분만 가면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 왕자가 머물렀던 근사한 건물이다. 당시의 신라 귀족들은 월지를 바라보며 연회와 유흥을 즐겼다. 입장료 3천 원이 아깝지 않은 공간.이제 빌린 삼륜 전동차와 자전거를 반납할 시간이 가깝다. 하지만, ‘신라 천년의 역사 속을 달렸다’는 인증샷을 남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동궁과 월지를 나와 대여점에 이르기 전에 소박한 연꽃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 오래오래 간직할 추억이 될 사진 한 장 찰칵!사실 경주는 거리 전체가 ‘유적지’와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대하게 솟은 왕릉들을 보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1천500여 년 전 조상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대릉원은 자그마치 3만8천 평의 땅에 23기의 능(陵)이 불규칙하게 들어서 신비롭고도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릉원을 산책한다는 건 ‘992년 신라의 역사를 돌아본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현재는 진분홍 색채로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백일홍이 만개했다. 재론의 여지가 없다. 아름답다.심장을 흐르는 피가 뜨거운 청춘 남녀들은 더위도 잊고 손을 꼭 잡은 채 산재한 왕릉 사이를 걷는다. 가끔은 예쁜 한복을 차려 입은 여고생들도 눈에 띈다. 물론 이곳에도 외국인 여행자들이 적지 않다.대릉원을 나와 길을 건너면 첨성대가 버티고 서있다. 대릉원과 첨성대는 지척에 있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축조된 첨성대는 국보 제31호. 상상조차 하기 힘든 까마득한 시절에 하늘의 별과 달을 관찰하는 건축물을 만든 신라인들의 공학 기술이 놀랍다.첨성대 주변 너른 벌판엔 갖가지 꽃들이 경주를 찾은 이들을 저마다의 몸짓으로 유혹한다. 당연지사 ‘인생 사진’을 찍기엔 최고의 장소. 따가운 햇살은 고맙게도 ‘잘 찍힌 사진’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예약을 하면 귀여운 동물 모양의 캐릭터를 형상화한 조그만 관람차를 타고 첨성대 인근을 찬찬히 살펴볼 수도 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엄마와 아빠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소리 내 웃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다.한국 고대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대릉원 내에 있는 천마총을 찾아보는 게 필수 코스다. 금관과 벽화, 신라시대 토기 등을 꼼꼼하게 살피는 ‘학구파’들이 ‘연애파’ 못지않게 많았다.검은색 교복을 입고 양은 도시락통을 달그락거리며 학교에 다닌 중년들이라면 경주의 골목길이 향수를 자극할 것이 분명하다.대릉원을 등지고 왼편으로 100m 정도만 가면 호젓한 골목이 손짓해 부른다. 정원 가득 오렌지빛 접시꽃이 반기는 오래된 집과 울퉁불퉁한 좁은 길이 잠시나마 ‘타임머신’을 탄 듯한 황홀감을 선물한다.매력적인 풍경을 보며 자동차 운전을 즐기려면 보문호를 끼고 경주 외곽으로 달려보기를 권한다.문무왕릉이 있는 감포에서 포항 구룡포를 잇는 해안도로 드라이브도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코스다. 구불구불 모퉁이를 돌면 기막힌 절경의 바닷가 마을이 손짓하고, 조금 더 가다보면 울울창창 시원스런 숲이 “어서 오라”고 인사를 건넨다.신라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감포와 경주, 장기와 경주를 이어준 ‘왕의 길’은 이름부터가 흥미롭다.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나간 곳이고,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나라의 우환을 없앨 수 있다는 전설 속 피리)을 찾으러 간 길이기도 하다. 등산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용연폭포까지 3.9km 구간을 이열치열, 땀 흘리며 올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는 독특해서 잊지 못할 경험이 될 터.기자의 경우 국내 여행이건 국외 여행이건 빼놓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재래시장이다. ‘가장 현실적인 현지 사람들의 냄새’가 가득한 공간이 바로 시장 아닐까.경주의 성동시장(윗시장)과 중앙시장(아랫시장)은 위와 같은 기대에 거의 완벽하게 부응했다. 웃음 섞인 에누리 흥정과 눈과 코가 동시에 행복해지는 저렴한 먹을거리들이 지천이었다.환한 웃음으로 손님들을 반기며 친절하게 길 안내까지 해준 두 시장 상인들이 “경상도 사람들은 딱딱한 말투에 불친절하다”는 세간의 편견을 깨끗이 지워줬다. 언제건 경주에 온다면 또 다시 찾고 싶은 시장들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31

품격의 도시서 맛보는 체험의 묘미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평소 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게 아닐까? 안동엔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곳곳에 마련돼 있다. 한지를 뜨고, 고택에서 한복을 입어보고, 과녁을 향해 국궁을 날리고…. 그 ‘체험의 현장’으로 기자가 직접 찾아갔다.수천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장생불사’ 귀물을 만나다한지만들기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 게 99%의 인간이다. 다른 생물들의 수명은 어느 정도일까? 주목(朱木)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다시 천 년을 산다”는 말이 전한다. 이는 주목으로 만들어진 물품의 내구성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이야기.그렇다면 한지는 어떨까. 종이 전문가들은 “잘 만들어진 한지는 1천 년에서 최대 8천 년까지 원상태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한지의 내구성은 장생불사(長生不死)를 넘어서는 귀물(貴物) 수준. 안동시 풍산읍에 위치한 안동한지(회장 이영걸)는 15개쯤 남은 한국의 한지 생산업체 중 가장 큰 곳이다.업체 간부는 닥나무 채취에서 시작해 가마솥에서 찌기, 메밀을 태워 잿물을 만들고 여기에 가공한 닥나무를 넣는 과정, 표백과 티 고르기, 닥나무 반죽 두드리기와 종이 뜨기, 물 빼기와 건조를 거쳐 한 장의 고풍스런 종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안동에서 만들어지는 한지는 이탈리아 학자들이 “유럽 문화재 복원에도 사용 가능한 뛰어난 품질”이라 호평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역시 방한 때 선물 받은 안동한지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어려운 여건에서도 안동한지 임직원이 자긍심을 가지는 이유다.안동한지에선 한지 제작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한지 뜨기 체험’을 비롯해 닥종이 인형 만들기, 한지 무드등 만들기, 한지 천연 염색 등을 직접 해볼 수 있다. 이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한지 뜨기. 한지 뜨기란 일정 과정을 거쳐 물에 섞여 죽처럼 된 닥나무 반죽을 나무로 된 발 위에 고르게 펴 종이의 형태를 만드는 것. 20~30년 경력의 숙련된 기술자가 돼야 실수 없이 할 수 있다. 하지만, 뜨기를 거쳐 말린 종이가 다소 거칠고 두껍더라도 자신이 만든 ‘한지 한 장’을 가질 수 있다는 흐뭇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 체험 비용도 3천원으로 비교적 저렴하다.전화: 054-858-7007홈페이지: http://andonghanji.com옛 기억 살리고픈 어른도, 꼬마 관광객도 다소곳이…한복체험“당신이 먹는 음식을 알려준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음식은 개개의 인간을 유추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기에 백번 수긍할 수 있는 문장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취향, 타자와의 관계까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인의 대부분이 한복을 입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루마기, 대님, 저고리, 버선 등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세월의 흐름 속에 지난 시대의 생활문화가 속절없이 잊히고 있는 것. 일단 주위를 돌아보자. 요즘은 명절이나 제삿날에도 한복을 입은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안동시 민속촌길에는 몇 채의 예스러운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안동반가(대표 이태숙) 체험장도 거기에 있다. 주요 체험 프로그램 중 하나가 전문 강사의 도움 아래 격식에 맞춰 한복을 입어보는 것이다.저고리와 바지는 물론, 허리에 두르는 장신구와 한복에 맞춤한 신발까지 제대로 갖춰 입으니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안동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준비된 갓까지 쓰고 댓돌 아래로 내려섰다.“체험을 제대로 즐기는 분들은 400년 전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 오는 월영교와 민속촌, 인근 예움터 한자마을에서 한복 입은 멋지고 예쁜 모습을 ‘인증 샷’으로 남긴다”는 것이 김은혜 체험팀장의 설명. 비가 내린 탓에 기자는 그렇게까지는 못했지만 날렵하고 미려한 한옥 처마 아래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남기는 사진 한 장도 나쁘지 않았다. 좋지 못한 날씨임에도 대만에서 방문한 여행객 20여 명이 안동반가 체험장을 바쁘게 오갔다.한복 체험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성인은 물론 부모의 손을 잡고 안동을 찾은 ‘꼬마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김 팀장은 말했다. 하기야 어떤 아이가 신기해 보이는 예쁜 옷을 입고 엄마 앞에서 애교 가득한 포즈를 취하는 걸 싫어할까? 전화: 054-821-5222·841-0050홈페이지: http://andongbanga.co.kr가양주 빚고, 고추장 담그고, 국궁을 쏘다안동반가에선 고추장 만들기, 가양주 빚기, 목판 인쇄, 전통 활쏘기 등의 체험도 가능하다. 각각의 프로그램마다 강사가 배정돼 개별 체험에 관한 설명을 들려주고, 진행 과정이 매끄럽도록 도와준다.▲전통 활쏘기: 서양엔 200보 거리에서 활을 쏴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조그만 사과를 명중시켰다는 윌리엄 텔이 있다. 우리나라도 만만찮다. 고구려의 장수 양만춘은 그보다 먼 거리에서 적군의 우두머리 당 태종 이세민의 왼쪽 눈을 화살로 꿰뚫어 버린다. 국궁(國弓·한국의 전통 활)을 쏘아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 활쏘기를 만만하게 생각한 첫 경험에서 팔목 안쪽을 다친 적이 있어 조심스럽게 활과 화살을 잡았다. 이 체험 또한 전문가가 옆에서 안전수칙을 알려주고 명중의 노하우를 들려준다. 그러나 명궁(名弓)이 되겠다는 건 마음뿐. 하기야 잠시잠깐의 연습으로 아무나 양만춘이 될 수 있겠는가.▲고추장 만들기: 한국의 전통 장류(醬類) 중 하나인 고추장은 끼니마다 사용되는 중요한 양념이지만, 지금은 주부들도 직접 만드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의 가정이 공장에서 생산된 것을 구입해 먹고 있다. 기자 역시 고추장을 만들어본 것은 처음. 고춧가루와 메줏가루, 식혜와 소금 등을 섞어 주걱으로 한참을 저어주다 보면 이마에 땀이 흐른다. ‘사람 입에 들어가는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체험이 끝난 후 만들어진 고추장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가양주 빚기: “마시는 사람 따로 있고, 빚는 사람 따로 있다”는 술. 기자는 전자에 속했다. 가양주(家釀酒)란 자신의 집을 찾는 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빚는 술이다. 고두밥, 누룩, 물이 기본 재료지만 여기에 각종 약초와 과일 등이 더해질 수도 있다. 맨손으로 물에 젖어 눅눅한 누룩과 고두밥 혼합물(?)을 주무르는 느낌이 묘했다. 거칠고 서툰 손길을 보며 강사가 웃었다. 빚은 술 역시 예쁜 통에 담아 체험자에게 준다.▲목판 인쇄: 네모반듯한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 그 위에 먹이나 잉크를 칠하면 여러 장의 종이에 같은 모양을 찍어낼 수 있다. 일종의 클래식한 인쇄다. 안동반가에선 ‘훈민정음 해례본’과 까치와 호랑이가 주인공인 민화를 새긴 목판을 이용해 인쇄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아이들의 경우 옷에 잉크가 묻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목판 제작에는 고로쇠나무, 박달나무, 거제수나무(자작나무의 일종) 등이 주로 사용됐다”는 게 체험을 함께 한 김영환 강사의 설명이다.소소하게 즐기는 체험거리안동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줄 체험거리는 풍천면 하회마을 입구에도 있다.잘 단장된 하회세계탈박물관은 ‘나만의 탈 만들기’ ‘바구니 탈 만들기’ ‘가방 꾸미기’ ‘탈 열쇠고리 만들기’ ‘석고 방향제 꾸미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도산면 가송리 팜카페에서는 손두부·청국장·김치·간장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기암괴석과 푸른 강물이 만들어내는 주위 경치도 아름답다. 이곳을 찾는다면 ‘농촌 체험’과 ‘눈요기’ 일거양득이 가능하다. 체험 활동이 불가능한 시기도 있으니 미리 문의(전화 054-841-7006) 해보는 게 좋다.안동민속박물관을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지척에 자리한 가죽공예 배움터를 찾아보길 권한다. 이 곳 전시관에선 전통문화 체험교실 수강생들의 다양한 가죽공예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한지로 장식한 ‘자기만의 예쁜 손거울’을 만들어보고 싶다면 풍산읍 안동한지 연화공예관이 제격이다. 양귀숙 원장을 비롯한 한지공예 전문가들이 체험객들을 친절하게 맞이한다.이밖에도 안동에선 규방공예 체험, 장승 만들기 체험 등이 가능하다. 물 맑은 안동호와 임하호에선 바나나 보트·제트스키 타기, 안동 물길 카누투어를 즐길 수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24

수백 년의 역사가 축적된 귀한 곳 종택, 그 지난한 세월과 마주하다

경북도 23개 시·군과 대구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관광지,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과 즐길거리, 맛봐야 할 요리와 특색 있는 음식점이 가득하다. 본지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기획연재 ‘경북을 하다’를 통해 기자와 맛칼럼니스트가 직접 체험하고 맛본 대구·경북의 ‘숨겨진 보물들’을 소개한다.‘종택 체험’ 100배 즐기기안동의 모든 종택과 고택이 관광객을 위해 대문을 열고 내부를 공개하는 건 아니다. 종택에서의 숙박도 마찬가지. 집 자체가 문화재급 기념물인 경우가 많기에 훼손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란 것이 개방하지 않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의 사생활 침해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 자칫 사람들의 실수로 종택의 유물이 파손될 경우 이를 보수·복원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형편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안동의 종손들이 자신의 집이 민박으로 사용되는 걸 저어하는 상황이 충분히 이해된다. 종택은 수백 년의 역사가 축적된 귀한 곳이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잘 경우엔 보통의 숙박업소에서 머무를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래 몇 가지를 소개한다.▲젊은 층이 종택에서의 숙박을 결정할 때 가장 먼저 묻는 게 있다. “내부에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있나요?” 답을 말하자면 각각의 종택마다 다르다. 농암종택 긍구당엔 방 안쪽에 폭 1.5m 정도의 조그만 화장실이 있다. 샤워도 가능하다. 하지만, 화장실과 샤워장이 외부에 있는 종택이라도 걱정할 건 없다. 대부분 현대식 시설로 개조해 말끔하게 관리되고 있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의 추억을 불러일으켜 재미를 느꼈다는 관광객도 있다.▲건물 앞에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표지판이 세워진 경우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종택에서의 예의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살림살이 공간인 안채는 함부로 출입하지 않는 게 ‘점잖은 손님’으로 대접받는 노하우.▲종택과 고택은 단순히 돈 때문에 숙박객을 받지는 않는다. 종손과 종부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하지 않아야함은 당연하다. 여기에 비싸지 않은 조그만 선물 하나쯤 마련해 종부에게 슬쩍 건네는 센스를 발휘한다면, 아침 밥상의 반찬이 보다 화려해질 수도 있다. 종택을 지키는 이들도, 찾는 이들도 ‘주고받는 정’을 아는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마지막으로 자신이 묵을 종택이나 고택에 관련된 자료를 미리 읽어둔다면 안동에서의 여행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농암종택 별당 ‘긍구당’서 특별한 하룻밤을…풀벌레와 이름 모를 새의 울음만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 소리에 섞여 적요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 가득한 도시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할 농밀한 암청색 어둠. “진짜 밤은 검지 않고 푸르다”고 노래한 기형도의 시(詩)가 떠올랐다. 16세기 조선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한 농암종택(聾巖宗宅)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시내에서 30분만 차를 몰면 일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 속을 달리게 된다는 사실이 일생 번잡한 곳에서만 살아온 기자에겐 낯설고 생경했다.안동시 외곽에 자리한 농암종택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현보(1467~1555)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연산군 앞에서도 ‘바른 소리’를 할 만큼 호방담대 했고, ‘어부가’와 ‘효빈가’ 등의 시조도 썼다. 안동부사와 성주목사로 봉직할 때는 청렴함을 인정받았고, 탁월한 문장으로 자연을 노래한 문인으로도 이름 높았다.종택을 지키는 이성원 종손은 잘 마른 수건 두 장을 긍구당(肯構堂) 마루에 놓아두고 일찍 잠을 청했나 보다. 예부터 집을 찾은 손님을 맞는 별당으로 사용된 긍구당은 경북유형문화재 제32호다. 문화재에서 잠드는 드문 체험에 마음이 설렜다. 깨끗하게 정돈된 보송보송한 침구를 보니 이곳이 손님을 귀하게 모시던 반가(班家)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밝아온 다음날 아침. 종택과 분강서원, 강각, 예일당, 명농당, 농암사당까지를 천천히 돌아봤다. 옮겨와 복원한 건물들임에도 고풍스런 분위기와 드러나는 미적 감각은 만들어진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종택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깎아 세운 것 같은 청량산 적벽이 밀려온 새벽안개와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했다. 농암이 정2품 벼슬인 ‘지중추부사’를 마다하고 고향에 머무르고자 한 이유가 짐작되는 순간이었다.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종손·종부와 마주했다. 그들은 종가와 종손으로서의 삶을 조용조용 들려줬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더없이 온화했다. 바로 그때다. 농암종택 사랑채 기와에서 부서지는 햇살에 놀란 까치 한 마리가 청옥빛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전화: 054-843-1202 홈페이지: http://www.nongam.com‘불천위’ 모신 학봉종택엔 보물지정 문화재만 500여점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의 15대 종손 김종길 씨 목소리는 겸손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학봉을 포함한 선조들의 행적을 들려주던 종손은 “날이 밝으면 운장각과 사당의 불천위(不遷位)를 꼭 보라”고 조언했다.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한 학봉종택(鶴峯宗宅)은 들어서는 입구부터가 여타 고택과 달랐다.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와 나무, 거기에 기묘한 형상의 수석까지 즐비한 정원이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와 사당, 학봉기념관과 유물전시관인 운장각까지 어디를 돌아봐도 먼지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권력 앞에 굴종치 않는 태도를 견지했기에 ‘조정의 호랑이’로 불렸던 학봉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한 탓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직됐다. 이후 명예 회복을 허락한 왕의 명령으로 관군을 독려하고, 의병을 규합하는 경상도 초유사의 역할을 수행하다 전쟁 중 숨졌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한 씨는 파락호(破落戶)로 자신을 위장하면서까지 만주 독립군에게 거금을 보내는 용기를 보여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기자가 묵었던 풍뢰헌(風雷軒)은 학봉종택의 별채다. 초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음에도 바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한옥 특유의 구조 때문인지 새벽엔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잠자리는 시원하고 쾌적했다. 종부가 차려준 다과상에 오른 다식은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뻤다.묵직한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운장각엔 학봉의 친필 원고인 ‘경연일기’ ‘해사록’을 비롯해 ‘고려사절요’ ‘사기’ 등의 오래된 책과 왕의 명령서인 교서, 민화, 벼루 등의 유물이 가득했다. “이 건물 안에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503점이 있다”는 게 김종길 종손의 설명.학봉종택 사당에선 난생처음 불천위를 눈앞에서 확인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문과 인격 모두에서 유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의 위패인 불천위는 영원히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모셔 후손들이 제사 지내게 된다.학봉종택 불천위 제사에서 사용한다는 울향(蔚香). 그 내음이 아직 셔츠 깃에 남아있는 듯하다.전화: 054-852-2087 홈페이지: http://www.hakbong.co.kr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가 추천하는 ‘안동의 고택’ 임청각·의성 김씨 종택·수졸당·지례예술촌종택을 포함한 문화재 보호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는 꼭 방문해야 할 안동의 고택으로 임청각, 의성 김씨 종택, 수졸당, 지례예술촌(지촌종택) 등을 꼽았다.임청각은 문재인 대통령 방문 이후 더욱 유명해졌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이곳은 ‘독립운동의 산실’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로 철거된 건물의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척엔 ‘법흥사지 칠층전탑’과 탑동종택이 자리했다. 탑동종택은 현재는 개방하지 않고 있다.의성 김씨 종택이 자리한 임하면 내앞마을은 의성 김씨들의 집성촌. 격변하는 세월 속에서도 500년을 꿋꿋이 자리를 지킨 의성 김씨 종택 역시 지금은 보수 중이다. 내앞마을에선 중요민속문화재 제267호인 귀봉종택과 독립운동가 김대락이 건축한 ‘백하구려(白下舊廬)’도 만날 수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도 내앞마을에 위치했다.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의 종택인 수졸당은 종부가 만드는 건진국수 맛으로 유명하다. 처마 밑에서 시래기가 말라가는 풍경이 정겨웠다.젊은이들 사이에서 ‘인생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로 회자되는 지례예술촌엔 지촌 김방걸의 종택이 있다. 임하호의 푸른 물빛과 고택의 예스러움이 어우러진 풍광이 기가 막힌다.도산면 퇴계종택은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 34칸 한옥인 지금의 건물은 퇴계 이황의 13대 후손인 이충호가 1929년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 우측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다. 차로 5분 거리엔 도산서원이 자리했다. 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건립됐다.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연구했던 도산서당 영역과 그의 덕행을 기리는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뉜다.서후면 경당종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장계향의 친정이다. 지난해 장성진 종손와 권순 종부가 공중파 다큐멘터리에 소개되면서 종가의 음식을 맛보려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 팔순의 종부가 가져다준 식혜 한 잔이 더위를 시원스레 날려줬다.안동 여행에 나섰다면 풍천면 하회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 제자와 자손들이 서애의 유덕을 기려 지었다. 대문에 붙은 ‘國泰民安(국태민안)’의 서체가 미려했다. ‘하회마을의 양심적인 부자’로 존경받은 북촌댁의 정식 당호는 화경당. 석류나무, 모과나무, 탱자나무가 사이좋게 늘어선 정원이 인상적이다. 현재는 화재 위험 등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기에 숙박은 불가능하다.이외에도 하회마을엔 양오당, 염행당, 양진당, 하동고택, 작천고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서애가 ‘징비록(懲毖錄)’을 쓴 옥연정사도 하회마을에 있다. 마을 입구에서 비포장길을 10여 분 달리면 서애와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한 병산서원이 나타난다.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풍경이 아름답다.이밖에도 안동엔 미처 소개하지 못한 종택과 고택이 적지 않다. 관련된 정보가 궁금하다면 안동시청이 운영하는 문화관광 홈페이지(http://www.tourandong.com/main.htm)가 도움이 될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