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에 당시 조선문단을 대표하던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 한효, 한설야, 임화, 이기영, 김사량이 봉황각이란 중국요리집에 모인다. 친일에 대한 문인의 자기 비판이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이다. 이 자리에서는 지금도 음미할 만한 여러 논점들이 제시된다.이태준은 8.15 이전에 가장 위협을 느낀 것은 “문학보다 문화요 문화보다 다시 언어”였다면서, 조선어가 말살되는 상황에서 일본어로 글을 쓴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펼친다. 이태준의 이 발언은 이 자리에 모인 문인 중에서 일본어 소설 ‘빛 속으로(光の中に)’(문예수도, 1939.10)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까지 올랐던 김사량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일제 말기 조선의용군의 중심지인 태항산으로 탈출하여 항일활동을 벌인 김사량은 문화인이란 “이보 퇴각 일본 전진”의 자세로 싸우는 자이며,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가 논의될 문제”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심중에는 일본어 글쓰기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는지, 일제 말기 문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붓을 표면에서는 꺾었으나 그래도 골방 속으로 책상을 가지고 들어가 그냥 끊임없이 창작의 붓을 들었던 이”를 제시하며, 그런 문인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앞에 모자를 벗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문학자의 자기 비판’, 인민문학, 1946.2)라고 덧붙인다.사용이 금지된 조선어로, 그것도 발표를 기약할 수도 없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결단코 범인(凡人)이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서는 다행히도 조선어가 사라지고 일제에의 맹목적인 복종만이 요구되는 시대에도, 소중한 조선어로 우리의 삶과 자연을 노래한 문인들이 있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박목월(1916-1978)도 바로 그 자랑스러운 얼굴 중의 하나이다.윤석중(1911-2003)은 ‘어린이날 노래’, ‘퐁당 퐁당’, ‘고추 먹고 맴맴’ 등 약 1200편의 동시를 발표한 한국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이다. 그는 1940년대 도쿄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을 맞아 서울로 가는 길에 경주에 있는 박목월을 방문한다. 운석중은 1930년대 잡지 ‘어린이’, ‘소년중앙’, ‘소년조선일보’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동요작가인 박목월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박목월은 중학교 3학년이던 1932년부터 동요를 투고하다가, 1933년 6월 ‘신가정’에 ‘제비맞이’가 현상 당선되면서 정식으로 등단한 동요 시인이었다. 동요 시인으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목월(木月)이라는 필명 대신 본명 영종(泳鍾)을 사용하였다.윤석중은 박목월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밤을 새워 동요이야기를 하다가 “발표할 데도 없고, 불러 줄 아이도 없는 노래를 자꾸 지어서는 무얼 하누…”라고 탄식한다. 그 말을 듣자 박목월은 정색을 하면서 땅을 파고 묻어 두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윤석중, ‘목월과의 사귐’, 박목월, 순한 눈망울을 스쳐간 인연들의 회상록, 국학자료원, 2008, 35면) 이 당시 박목월은 실제로 주옥같은 시를 우리말로 써서 해방의 날까지 땅에 파묻어 두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록집’에 수록된 15편의 명시들이다.1916년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 571번지에서 태어나 자란 박목월은, 해방 이전까지 경주의 품 안에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산문 ‘나와 청록집(靑鹿集) 시절’에서 박목월은 문학청년 시절 경주에서 문학에 뜻을 둔 친구는 김동리, 이기현 등이 있었지만, 어울릴 기회는 많지 않아 “나는 늘 혼자였다.”며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古都)의 산천과 하늘뿐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경주의 동부금융조합 서기 일이 끝나면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경주에서 꽃 같은 젊음을 보내며, 왕릉에 누워서 달을 보거나 오래된 기와 조각을 툭툭 차면서 길을 걷는 박목월의 모습이 손에 잡히듯 생생하다. ‘청록집’은 “이 풀 길 없는 고독이 안으로 응결”(박목월, 문학사상사, 2007, 271면)되어 탄생한 것이다. ‘청록집’에 수록된 15편의 작품 중에서 ‘춘일(春日)’은 직접적으로 경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춘일(春日)여기는 慶州新羅千年……타는 노을아지랑이 아른대는머언 길을봄 하로 더딘 날꿈을 따라가며는石塔 한 채 돌아서鄕校 門 하나丹靑이 낡은 대로닫혀 있었다.‘춘일(春日)’은 교촌에 있는 향교가 배경이며, 열릴 듯 안타깝게 닫혀 있는 향교문과 ‘타는 노을’의 이미지를 통해서 천년 고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감추듯 드러낸 작품이다. 이러한 애수는 일제 말기라는 상황과 맞물려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는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일반적으로 박목월의 시세계는 크게 자연을 대상으로 한 초기 ‘청록집’(을유문화사, 1946), ‘산도화’(영웅출판사, 1955), 가족과 일상을 소재로 한 중기‘난(蘭)·기타’(신구문화사, 1959), ‘청담’(일조각, 1964), ‘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 존재의 근원을 탐구한 후기 ‘무순’(삼중당, 1976)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박목월에게는 경주를 소재로 한 작품이 ‘청록집’ 시절부터 말년에 해당하는 ‘무제(無題)’(심상, 1977.7)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나타난다. ‘불국사’, ‘선도산하’, ‘사향가’, ‘춘일’, ‘청운교’, ‘토함산’, ‘왕릉’, ‘보랑’, ‘무제’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으며, 이들 작품은 불국사, 선도산, 청운교, 토함산, 안압지, 석가탑 등의 명승고적을 박목월 식의 절제된 언어와 빼어난 음악성으로 표현한 가작(佳作)들이다. 특히 ‘사향가’는 경주가 시인에게 얼마나 신성한 곳인지를 잘 보여준다.경주는 시인이 사는 서울에서 하룻밤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서울과 경주는 “막막한 地域”과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해당할 정도로 대비적이다. 시인의 경주에 대한 동경은 점차 확대되어 서울과 경주는 “이승과 저승”에 해당하는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경주가 이토록 위대한 것은 이름난 곳이 많아서가 아니라 경주에 사는 사람들이 “千年을/한가락 微笑로 풀어버리고” 사는, “연꽃하늘 햇살속에/그렁저렁” 사는 위인들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의 삶을 “귀양온 영혼의/무서운 刑罰”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에게 경주는 어머니의 몸과도 같은 영원한 귀의처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곳은 마지막 연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현실에서는 도달가능한 곳이 아니다.한동안 박목월이 시로 표현한 자연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일테면 ‘나그네’의 “술 익은 마을마다/타는 저녁놀”이 피폐한 일제 말기의 조선 현실을 미화했다는 식의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충분한 반박이 있었으며, 현재는 ‘나그네’와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어둠의 극단에 이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 창조한 상상의 공간이자 미의 유토피아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박목월 자신도 일제 말기의 그 어둡고 불안한 시대에 푸근하게 은신할 수 있는 곳이 그리웠으나, 당시의 조국은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되바라진 땅이었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환상의 지도”(박목월, ‘구강산(九江山)의 청록(靑鹿)’, 박목월, 문학사상사, 2007, 316면)를 마련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사향가(思鄕歌)’에 나타난 그 절절한 향수를 떠올린다면, 박목월이 창조한 그 아름다운 ‘환상의 지도’는 분명 경주라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현실화된 유토피아)가 있었기에 창조된 유토피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작가 박목월은…본명은 영종(泳鍾). 경북 월성군(현재의 경주시)에서 태어나 유년기엔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1930년 대구 계성중학에 들어갔다. 그 시절부터 책 읽기와 습작에 몰두한다. 중학교 때 이미 빼어난 작문 솜씨를 인정받았다. 해방 이후엔 오래 교직에 있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고 수필 분야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아세아자유문학상과 대한민국문예상 수상자이기도 하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