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공간은 장소가 되고 장소는 고유한 의미로 영존한다

김연수는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메타적 글쓰기, 풍부한 인문학적 교양, 혁명 이후 세대의 자의식 등으로 2000년대 한국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1970년 김천에서 태어난 김연수는 한국문단의 김천 출신 삼인방(김연수, 김중혁, 문태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김천에서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 삼인방은 세상이 모두 인정하는 친구 사이로 유명하다. 소설가 김중혁과는 ‘씨네21’에 일 년 동안 번갈아 가면서 영화관람기를 연재했다가 2010년에 ‘대책없이 해피엔딩’이라는 ‘대꾸 에세이집’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시인 문태준과는 상대방이 문학상을 받았을 때(문태준 2005년 미당문학상 수상, 2007년 김연수 황순원문학상 수상) 시상식에서 서로 축사를 해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도 하였다.‘뉴욕제과점’(2002)은 김연수의 자전소설로서, 실제 작가의 이력이 거의 그대로 반영된 작품이다. 김연수는 김천시 평화동에서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자랐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뉴욕제과점은 김천역사에서 나오면 시청 방향이 될 왼쪽 편에 있었고, 살림집은 시내를 관통하는 3번국도 건너편 법원지청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역 근처에서 자라면서 어린 김연수는 포장도로와 자동차와 철로 역전을 놀이터로 삼았다고 고백한 바도 있다.(‘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14, 56-59면)경북 김천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김천역이 설치되면서,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철도의 영향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길목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경상북도 서부권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여 1949년에는 일찌감치 시(市)로 승격되었다. 또한 한국근대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 명작으로 평가받는 염상섭의 ‘만세전(萬歲前)’(1924)에도 김천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동경 유학생 이인화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울로 가는 길에 부산을 거쳐 김천에 들른다. 김천에는 큰 형이 보통학교 훈도로 재직 중이었던 것이다. 긴 칼을 차고 나타난 형은 “여기두 좀 있으면 일본 사람 거리가 될 테니까 이대로 붙들고 있다가 내년쯤 상당한 값에 팔아 버리랸다.”라고 말하는데, 이를 통해 일제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는 김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그러나 김연수의 ‘뉴욕제과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김천이 1949년에 시로 승격되었다는 것이나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만세전’에 김천이 등장한다는 것과 같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아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니다. 이유는 ‘뉴욕제과점’이 “연필”로 쓴 작품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 작품은 “나는 이 소설만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연필로 쓴 글은 언제든지 지우개로 깨끗이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 ‘연필로 쓴 글’은 돌에 새긴 비석이나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글처럼 모든 이에게 동의를 강요할 수 없는 가변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나’의 기억을 통해 그려지는 ‘뉴욕제과점’이 공식적인 기록과는 무관한 사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 작품에서 형상화 된 뉴욕제과점이 하나의 장소에 해당한다는 것을 암시한다.인문지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구분해 왔다. 공간이 추상적이며 객관적이고 사회적이라면, 장소는 구체적이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공간에 개인만의 정서와 경험이 쌓이면, 이곳은 고유한 의미를 갖는 장소가 된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김천이 단순한 공간에 불과하다면, 김연수와 같이 김천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김천은 대체불가능한 장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자신이 태어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던 ‘뉴욕제과점’과 같은 곳은 ‘장소 중의 장소’이자 ‘장소의 원형’에 해당한다. 고향의 집은 인간 정체성의 토대이자 실존의 중심으로서 마음의 안정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자전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뉴욕제과점’은 감히 김연수라는 한 작가의 고유한 본질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뉴욕제과점은 작품 속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인간이 호명(呼名)을 통해 하나의 주체로 구성된다면, ‘내’가 “역전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불리워지며 성장했다는 것은 뉴욕제과점이 지니는 중요성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나’는 뉴욕제과점이 있었던 “그 거리에서 배운 것들과 그 거리 밖에서 배운 것들로 이뤄진 어떤 것”이지만, “그 거리에서 배운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또한 ‘나’의 몸 안에는 “어려서 본 상인들의 세계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는 세상의 힘에 떠밀려 30년 이상을 같은 자리에서 버텨온 뉴욕제과점은 결국 1995년 8월 문을 닫는다. 1960년대에 문을 연 뉴욕제과점의 전성기는 1980년대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다. 처음으로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찾아오면서, 빵이라면 고급 생과자만을 생각하던 사람들도 일상적으로 빵을 사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조금씩 쇠락하기 시작한다. 5공화국이 끝나갈 때쯤 손님들은 최신식 인테리어를 갖춘 제과점과 바게트와 같은 새로운 종류의 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주창하던 무렵, 김천에도 파리크라상이나 크라운베이커리 같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빵집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더 이상 새롭게 바뀔 능력이 없어서, 1980년대 풍으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던 뉴욕제과점도 결국 문을 닫고 마는 것이다. 뉴욕제과점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24시간 국밥집이 새로 문을 연다.양심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던 사람들이 자본의 공세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는 이야기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적당한 서사이다. 실제로 한국현대소설의 주류는 억울하게 삶의 터전을 잃고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 것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김연수가 뉴욕제과점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문제제기가 아니다. 작가는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인 삶의 진실을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는 명제가 이 소설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이다.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더라도, 인간에게 본원적인 정체성과 안정감을 제공하던 장소를 잃어버리는 것은 커다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일은 엄청난 속도로 앞을 향해 돌진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장소의 상실이 더욱 전면화 된다는 점이다. 현대인들은 장소 내부에서 진정한 장소감을 경험했다가 이를 자의든 타의든 상실하는 장소상실(placelessness)을 너무도 흔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뉴욕제과점’의 ‘나’는 이러한 장소상실의 경험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다.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카스텔라를 만들 때 나오는 기레빠시(부스러기)나 최신형 케이크 진열대나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나’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영생하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는 뉴욕제과점은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불빛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뉴욕제과점이 잘 나가던 시절, 이 작품은 제과점과 역전 근처의 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뉴욕제과점은 사라졌지만, 온 세상을 밝게 물들이던 그 불빛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반짝이며, ‘나’는 여전히 그 불빛의 힘으로 살아간다.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불빛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사라질 수도 없으며 빛이 바랠 수도 없다. 심지어 역전 거리의 불빛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애틋함과 슬픔으로 인해 “둥글게 아롱져” 보이기까지 한다.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만의 ‘뉴욕제과점’이 있을 것이다. 문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상화의 대구 수성벌, 이육사의 안동 원촌, 한흑구의 포항 바다, 김동리와 박목월의 천년 고도 경주, 권정생의 안동 조탑동, 이문열의 영양 석보면 등도 작가들을 탄생시킨 문학적 자궁으로서의 장소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사라져 가는 장소들을 소중하게 되돌아보는 일은 우리의 삶을 보다 깊이 있게 만드는 길임에 분명하다.작가 김연수는…1970년 김천 출생. 전통과 새로움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특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불분명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문장이 돋보인다. ‘작가세계’를 통해 데뷔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청춘의 문장들’ 등을 썼고, ‘대성당’ ‘달리기와 존재하기’ 등의 번역자다.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자이도 하다.끝/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6-29

채동구는 ‘숭명대의(崇明大義)’를 위해 목숨을 건 가출을 감행한다

성석제의 ‘인간의 힘’은 처음 ‘문학과 사회’에 연재(2002)되었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2003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가난한 시골 양반 채동구(蔡東求)의 출세기이다. 그는 1627년의 정묘호란이나 1636년의 병자호란과 같은 국가의 위기마다 가출함으로써 이름 없는 지방의 유생에서 사후(死後)에 문경공(文景公)이라는 시호를 받는 존귀한 자로 격상된다. 이 작품은 임진왜란이 끝나가던 1596년에 태어나 70여 년의 세월을 보낸 채이항이라는 실존인물을 기록한 ‘오봉선생실기’(채광식 역편, 인천 채씨 경헌공파 종문 1989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제 ‘오봉선생실기’를 찾아보면, 대체적인 내용이 ‘인간의 힘’과 부합하며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 정도가 바뀐 것(채이항이 채동구로, 몽선이 명선으로, 이후갑이 이원겸으로)을 확인할 수 있다.‘인간의 힘’은 채동구가 조상 대대로 경북 고령에 살아온 것으로 되어 있으며, 고령 지역에 대한 설명도 비교적 상세하다. 그러나 채동구의 모델이 된 채이항(蔡以恒)은 성석제와 마찬가지로 경북 상주에서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성석제는 자신의 집안이 노론에 속했으며, 같은 당색을 가진 집안인 상주시 이안면 여물리의 인천 채씨 집안과 계속 통혼을 해왔다면서, 그 인연으로 집필한 소설이 ‘인간의 힘’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아가 ‘인간의 힘’의 주인공이 살던 곳은 상주시 이아면이라고 분명하게 덧붙이고 있다. (영남일보, 2010.5.31.)나라에 변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집을 나서는 시골 양반 채동구는 칸트(1724-1804)가 말한 윤리를 완벽하게 실천한 인물이다. 성석제 식으로 능청을 떨자면, 아마도 칸트는 ‘실천이성비판’과 ‘윤리형이상학 정초’ 등에서 목 놓아 주장한 윤리를 완벽하게 실천한 인물이 자기보다 100여 전에 조선에서 살다 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칸트는 보편적인 윤리는 ‘자유로워라’라는 정언명령(定言命令,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그것 자체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에 충실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행복주의나 공동체의 규범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란 본래 다른 데에 원인이 없고 순수하게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만을 우선시한다면 ‘자기 안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본능, 욕망, 감정 등에 ‘나’를 맡기는 것이 되어서 ‘자유로워지라’는 정언명령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공동체의 규범에 순종한다면 그것은 타율적이어서 자유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채동구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창공의 별처럼 빛나는 ‘충성과 숭명대의(崇明大義)’라는 가치에 너무나 충실하여, 권하는 이 아무도 없고, 그래야 할 능력도 이유도 없지만, 나라의 변이 있을 때마다 칼집에서 뽑히지도 않는 칼을 차고 집을 나선다. 이괄의 난에는 임금이 피난한 공주까지, 정묘호란에는 강화도까지, 병자호란에는 남한산성까지, 나중에는 청의 수도인 심양까지 가는 것이다. 채동구가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고 벌이는 이 네 번의 소동은 모두 칸트의 ‘자유로워라’라는 정언명령에 충실한 결과이다.성석제 소설 ‘인간의 힘’.먼저 그는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행복주의를 극복하였다. 채동구의 가출은 자기 안의 자연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삶에의 본능을 이겨낸 행동이기 때문이다. 채동구의 모든 출도가 목숨을 건 행동이지만, 특히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까지 간 행위는 그야말로 삶을 깨끗이 단념했을 때만 가능하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지 6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군의 무력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거란족들은 입버릇처럼 “여진 군사가 만약 1만 명을 채운다면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여진족 기병의 전투력은 대단했는데, 1126년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기병 17명이 송나라 군사 2천 명을 간단히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묘호란 때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는데, 평안도에서 전쟁이 끝난 것을 미처 알지 못하던 조선군 1천여 명이 여진족 기병을 가로막자 겨우 10여 명의 기병이 조선의 관원 4명과 병사 50명을 죽이고 100필의 말을 빼앗았다고 한다.(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2019, 126-127면) 이러한 사실을 채동구라고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병자호란을 맞이하여 출도할 때, “동구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도 하기 싫고 가기 싫고 죽기 싫다는 마음”이 존재했다. 그러나 채동구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충성, 숭명대의’라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가출을 감행한다.동시에 채동구의 행위는 공동체의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충성과 숭명대의는 17세기 양반 사대부의 공통된 신념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허태구,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소명출판, 2019, 345-362면) 그렇지만 채동구가 직접 뽑히지도 않는 칼을 차고 전장으로 향하는 실천은 결코 공동체의 규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채동구는 조상의 음덕으로 군정(軍丁)을 면제받는 양반임은 분명하나 후취의 아들로서 별다른 학문도 없으며, 과거(科擧)는 처음부터 체질에 맞지 않아 벼슬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양반으로 갖춰야 할 혈통, 학문, 관직 중의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갖췄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인간의 힘’의 상당 부분은 채동구의 가출이 얼마나 엉뚱한 것인지를 보여주는데 바쳐져 있다. 동구의 형인 동정은 가출을 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집안을 위기로 몰아넣는 동구와 의절을 할 지경이고, 문중과 향토 사족들은 모두 동구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 이것은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가게 될 때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조선을 대표하던 사대부인 전 예조판서 김상헌, 전 지평 조한영과 함께 이전이나 지금이나 늘 학생(學生)일 뿐인 채동구가 심양으로 가게 되었을 때, 임금은 채동구에게 한글로 “너는 조한영처럼 직임을 맡아 벼슬을 한 것도 아니고 김상헌과도 처지가 다르니, 반드시 죽으려고 오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여 채동구의 심양행이 조선이라는 사회의 규범과는 거리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청나라 통역조차도 동구에게 “너는 벼슬도 살지 않았으면서 무슨 마음으로 감히 대국의 처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말을 늘어놓았는가?”라고 의아해할 정도이다.이처럼 동구의 가출은 행복주의나 공동체의 규범을 부정한, 그야말로 ‘자유로워라’는 정언명령에 충실한 윤리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동구가 “맨주먹과 가슴의 붉은 피” 하나만 가지고 행하는 가출이란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따르는 의지의 표상”이였던 것이다. 동구 역시 자신의 출도가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해야 할 바를 찾아서 할 일을 했을 뿐이네.”라며, “나를 두고 미친놈이라고 하던 놈이 한둘이던가.”라고 당당하게 말한다.‘인간의 힘’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은 심양에서 용맹으로 명성이 높은 용골대(잉굴다이)의 심문을 받으며, “나는 내 뜻을 내가 지키고, 내 머리를 내 목 위에 두고 산다. 내가 내 입으로 내 말을 하는데 너희가 무엇이관대 이래라저래라 한단 말이냐!”라고 동네 개를 꾸짖듯 일갈할 때이다. “오재오두(吾載吾頭, 내 머리를 내가 이고 있다)”라는 표현은 “자신이 정한 방식에 따라 스스로를 남김없이 불태울 줄 아는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며, 동시에 칸트적 윤리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채동구의 삶을 바라보는 서술자의 태도도 작품의 진행과 함께 점차 변한다. 처음 서술자는 전지적인 입장에서 행장 등의 기록이 채동구의 삶을 어떻게 미화했는지를 밝히는데 열을 올린다. 일테면 ‘국가의 위기시마다 가보인 칼을 뽑는데 그때마다 칼집에서 칼이 나오지 않는다’든가, ‘처음 보는 이에게 피끓는 우국충정을 토로하고 있는데 눈을 떠보니 상대가 어디로 가고 보이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가출로 채동구가 변모함에 따라, 서술자의 어조는 냉소에서 관찰로, 관찰에서 찬양으로 변해간다.이러한 서술자의 변모는 독자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독자 역시도 돈키호테적인 기인으로만 여기던 채동구를 마지막에는 자연스럽게 ‘진정한 힘을 보여준 인간’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목숨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으며, 남들의 조롱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으며, 초지일관해서 자신의 길을 간 채동구는 어쩌면 가장 전근대적인 외양을 하고서 가장 근대적인 윤리를 실천한 최초의 인류인지도 모른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6-22

산업화 이후 탐욕으로 오염된 농촌 ‘바보’ 황만근은 무얼 위해 살아가나

1994년 짧은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성석제는 근대소설의 서사적 틀을 갱신해 온 작가로 이름이 높다. 구술적 특성의 복원과 동양 서사 전통의 활용을 통해 그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해왔던 것이다. 또한 그는 ‘소설은 새로운 성격창조’라는 소설원론의 가장 충실한 실천자이기도 하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이전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되기 힘든 술꾼, 노름꾼, 깡패, 바보, 건달, 탐서가 등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광기와 자기 세계에만 집중하는 디오니소스적인 방외인(方外人)들로서, 소설적 재미와 감동의 근원이 되고는 하였다. 성석제가 거둔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은척’으로 대표되는 경북 상주를 적극적으로 소설 속에 끌어들인 것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성석제는 1960년 7월 5일 경북 상주군 상주읍 개운리 대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5년 3월 26일 서울시 영등포구 가리봉동으로 이주할 때까지, 만 14년 8개월 20일 정도를 상주에서 살았다. 모든 이에게 유년 시절을 보낸 공간이 그러하듯이, 성석제에게도 상주는 매우 각별한 곳이다. 그는 “상주를 거치지 않고는 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았다. 상주는 내 소설에 있어서 삼손의 머리카락이거나, 우렁각시가 살고 있는 항아리였다.”(영남일보, 2010.5.24)고 고백할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중에서 절반 이상이 상주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성석제에게 상주가 얼마나 각별한 공간인지를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0) 역시 상주와의 인연이 깊은 작품이다. 성석제는 1995년 여름에 첫 번째 장편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상주에 있는 오태저수지 못가 마을인 오대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시절에 있었던, 느꼈던, 보고 들었던 일들이 소설로 여러 편 태어났다”(영남일보, 2010.5.31)며, 구체적인 작품으로 ‘도망자 이치도’, ‘당부 말씀’과 더불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들고 있다. 또한 성석제는 한때 상주 내지는 경북 북부의 방언을 애써 소설에 담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으며, 그러한 시도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작가의 고백에 따른다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는 직접적으로 경북 상주라는 지명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은 상주의 지역성과 언어가 직접적으로 배어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인물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기록하는 전통적 서사양식 전(傳)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황만근을 신대 1리의 사람들은 “바보”라 여긴다. 이 마을에서 황만근이 차지하는 위상은 노래를 부르는 마을 사람들의 대체 경험과 정서가 녹아 있는 황만근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노래에서 황만근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백분(번), 찝원(십원), 여끈(열 근), 팔푼, 두 바리(마리)”인데, 여기에는 황만근의 바보같은 특징이 압축되어 있다. ‘백번’은 황만근이 땅바닥에 넘어진 횟수이자 황만근이 셀 수 있는 가장 큰 단위이고, ‘찝원’은 혀가 짧은 황만근이 십원을 발음한 소리이며, ‘여끈’은 동네 사람들이 아들의 몸무게를 물어볼 때 대답한 말이고, ‘팔푼’은 황만근이 여덟 달 만에 태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두 바리’는 황만근이 우체부에게 가족의 숫자를 말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마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한 실수나 바보짓도 늘 황만근에게 가탁해서 그를 점점 더 바보”로 만들어갔다. 거기다 마을 사람들은 “반근아, 너는 우리 동네 아이고 어데 인정없는 대처 읍내 같은 데 갔으마 진작에 굶어죽어도 죽었다. 암만 바보라도 고마와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라는 공치사를 늘어놓고는 하였던 것이다.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업신여김과 달리, 신대 1리는 황만근의 덕으로 유지되는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만근이 마을에서 사라진 지 하루만에 마을 사람들은 애타게 그를 찾을 정도로, 황만근의 역할은 크다. 염습, 산역, 똥구덩이 파는 일, 벽돌을 찍는 일, 풀깎기, 도랑 청소, 공동우물 청소처럼 “동네의 일, 남의 일, 궂은 일”은 황만근이 도맡아서 처리해 왔던 것이다. 실제로 황만근은 마을 어른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황만근의 처사는 “공평무사”하여, 마을 사람들이 시비를 물으러 가면 “언제나 공평무사한 자연의 이법에 대해 깨우치게 되고 분쟁은 종식”되었던 것이다.동네 사람들에 의해 “바보”로 불리는 황만근은 천하게 취급받는 인간 모멸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것에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가치를 추구하여 나름의 완성에 이른 것이다. 어쩌면 황만근은 기존의 질서 속에서 배제되고 외면 받았기에,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러한 황만근의 모습은 ‘장자(莊子)’의 ‘덕충부(德充符)’에 나오는 지인(至人)들을 연상시킨다. 장자는 ‘덕충부’에서 왕태(王99D8), 신도가(申徒嘉), 숙산무지(叔山無趾), 애태타(哀99D85B83)처럼 장애가 있는 이들을 그린다. 이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유사한데, 대표적으로 왕태를 살펴보면 그는 발이 잘렸지만 말로 하지 않는 교육을 행하며, 은연중에 사람들을 감화시킨다. 그렇기에 공자까지도 “천하를 모두 이끌어 그를 따를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완성된 경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외양의 모자람에 자포자기하지 않으며, 육체 이상의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한 결과 숭고한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정신적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이다.(‘장자’, 德充符편, 이석호 역, 삼성출판사, 1976, 225-235면) 장자는 장애가 있지만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물들을 통해 “덕이 훌륭하면 육체적 불구는 잊혀진다.”(德有所長而形有所忘)(위의 책, 233면)는 것을 보여주고 한 것이다. 황만근 역시 ‘덕충부’에 등장하는 지인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그러나 마을 대부분의 집이 6·25 직후에 지어진 신대 1리는 더 이상 황만근과 같은 지인(至人)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신대 1리는 이미 탐욕과 무례로 속속들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산업화 시대 이후의 농촌 배경 소설들이 보여주던 노스탤지어의 렌즈를 통해 낭만화 된 농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심지어 ‘고향의 고향’, 혹은 ‘장소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가족마저 따뜻한 삶의 공간이 아니다.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나 아들도 황만근을 “반쪽” 또는 “싸래기”로 취급하며, 황만근은 온갖 집안일을 정성스럽게 다하면서도 상도 없이 밥을 먹고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노비처럼 살아간다.또한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 총궐기대회’에 나가기 전날, 황만근이 민씨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 마을이 얼마나 이기심과 자본의 논리에 깊이 빠져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황만근은 “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 카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제 돈으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빚을 지게 되고 농사가 놀음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또한 농민에게 빚을 주는 사람이나 기관은 모두 농사꾼을 나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자신은 “바보”라고 아무도 빚을 주지도 않고, 보증을 서라고 하지도 않았다고 울분을 토한다. 그러면서 황만근은 민씨에게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그러나 황만근은 백 년은 커녕, 반백년의 삶도 살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는다. 황만근은 마을 이장의 말에 따라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 총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객사하는 것이다. 이장은 투쟁 방침에 따라 경운기를 몰고 총궐기대회에 참석하라고 했는데, 이 투쟁방침을 황만근만 곧이곧대로 실천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아이러니는 신대 1리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빚이 없는 황만근만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죽는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예의와 염치는 사라지고 고삐가 풀린 탐욕만이 가득한 이 마을에서 2000년 전 ‘덕충부’ 속 인물의 화신이자, 토끼와 밤새 대결을 벌이기도 하는 황만근이 자신의 천수를 누린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민씨는 황만근을 바보가 아닌 “황선생”이라 지칭하며,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 세운 사람이 아니랴.”라는 존엄한 문장으로 끝나는 묘비명(墓碑銘)을 바쳐 황만근의 넋을 위로한다. ‘성자가 된 바보’, 황만근의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라는 호언이 실현되는 세상 역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고향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풍자와 해학, 그리고 웃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삶의 다양한 층위를 문학적으로 해석한 성석제는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법학과에서 공부했고, 문예지 ‘문학사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삶의 근원과 존재의 근본에 대한 탐구를 시종 지속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새가 되었네’ ‘궁전의 새’ ‘호랑이를 봤다’ 등을 출간했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6-15

파시스트적 가속도가 지배하는‘가짜 낙원’에서 눈 뜬 아담…

‘기형도 산문집’(살림, 1990)은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으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시인 기형도가 별세한 1년 후에 출간된 산문집이다. 이 산문집의 첫 번째 글은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1988년 8월 2일부터 8월 5일까지 3박 4일간 ‘서울-대구-전주-광주-순천-부산-서울’로 이어지는 여행을 기록한 것이다. 기형도는 대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장정일에게 전화를 건다. 곧바로 대구백화점으로 달려 나온 장정일과 기형도는 차수를 바꿔 가며 맥주를 마시고, 문학과 영화 등을 포함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서울서 봤을 때는 말이 없었는데 대구라 그런지 말을 많이 하였고 발랄하였다.”는 기형도의 표현처럼, 장정일은 친한 선배를 만난 어린 후배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1962년 1월 6일 경북 달성에서 태어나 1977년 성서중학교를 졸업한 장정일은 대구에서 나고 자라, 그 곳에서 글을 쓴 작가였던 것이다.그러나 장정일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이 눈 뜰 때’(1990)가 “봄과 가을이 짧고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긴 분지도시” 대구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가 감각적 쾌락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은 향촌동이고, 올림픽이 개막되던 날 탬버린 치는 남자가 서있던 곳은 대구은행 본점 앞이며, 아담과 현재가 로이 부캐넌의 추모식을 여는 곳은 장정일이 ‘강정 간다’라는 시를 지었을 정도로 애착을 보여준 대구 인근의 유원지 강정이다.“자주 추문(醜聞)에 휩싸이는 불행한 사제(司祭)”(구모룡, 오만한 사제의 위장된 백일몽, 작가세계, 1997년 봄호, 42면)라는 말처럼, 장정일처럼 문단과 사회의 큰 화제를 몰고 다닌 문인도 드물다. 특이한 삶의 이력은 본인이 직접 ‘개인기록’(문학동네, 1995년 봄호)을 통해 밝힌 사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아다. 또한 그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를 통해 뜨거운(혹은 따가운) 관심을 받으며 약 4년간 법정 다툼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장정일이 결코 손쉬운 타협의 길이 아닌 불화와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고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 희곡, 소설을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작가이고, 여러 권의 ‘독서일기’를 출판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독서가이기도 하다.장정일은 많은 평자들에 의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포스트모더니즘과 1990년대 신세대 문학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작가로 평가받았다. ‘아담이 눈뜰 때’는 파격적인 외양과는 달리, 그 내적 본질은 근대소설의 정석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것은 자기 보존의 평범한 욕망에 만족할 수 없는 문제적 개인이 진정한 가치를 찾아 떠난다는 근대소설의 내적 형식에 이 작품이 맞닿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담이 눈뜰 때’는 1988년에 19살이 된 아담이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을 통해 정신적 성장과 사회에 대한 각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이 때의 성장은 구체적으로 ‘작가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렇기에 이 작품 전체는 ‘작가의 탄생기’라고 볼 수도 있다. ‘아담이 눈뜰 때’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작품의 마지막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이 소설은 열아홉의 재수생인 아담이 우여곡절 끝에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턴테이블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이 주요 서사이고, 이것을 얻은 후에 아담은 실제 타자기를 통해 이 소설을 창작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한 명의 작가가 탄생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 되는 것이다. 뭉크화집을 얻기 위해 아담은 키치(Kitsch)의 세계를 상징하는 40대 여성 화가에게 몸과 이미지를 바쳐야 했고, 턴테이블을 얻기 위해서는 비인간적 자본을 상징하는 오디오 가게 사장에게 항문을 바쳐야 했으며, 타자기를 얻기 위해서는 청소부 어머니의 오랜 꿈인 일류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담은 자신이 ‘가짜 낙원’에서 눈을 뜬 아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아담을 절망케 한 이 세계의 본질은 ‘파시스트적 가속도’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파시스트적 가속도는 “근대의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가 엄청난 자본과 연결되어 무서운 속도로 전진운동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생리가 지배할 때, 세계는 “전진하는 것만이 발전이며 성공”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파시스트적 가속도의 세계와 이에 저항하는 세계는 스피드족들과 오디오족들, 일렉트로닉 리스너(Electronic Listener)와 뮤직 러버(Music Lover)등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전자가 앞으로 내달리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새로운 정복지를 갈구한다면, 후자는 반추행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창조적 고독 속에 묻히려는 자들이다.이러한 파시스트적 가속도의 세계에 맞서 아담과 동년배인 은선과 현재는 자기들만의 방을 구축하고자 한다.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록(Rock)이다. 신기하게도 아담은 말할 것도 없고 은선과 현재도 3J라 일컬어지는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록의 거장들을 좋아한다. 이들은 “저항과 인간애”로 가득한 록스피릿(Rock Spirit)의 인격적 구현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록은 88 서울올림픽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 올림픽 준비로 전국이 떠들썩하던 8월 중순, 아담과 현재는 그 열기에 휩쓸리는 대신 자살한 로이 부캐넌의 추모식을 연다. 모래밭에 기타를 내려 놓고 석유를 끼얹으며, 그들은 부케넌의 ‘메시아는 다시 오시리’를 듣는 것이다. 지극히 소박한 이들의 추도식을 통해, 이들 세대에게 록음악은 88 서울올림픽을 능가하는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장정일파시스트적 가속도의 세계에 비한다면 아담과 현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세계는 너무나 미약하다. ‘아담이 눈뜰 때’에서는 ‘유리의 성’이라는 소설이 아담과 현재가 만들어 가고자 하는 방을 설명하기 위해 소환된다. ‘유리의 성’(현대문학, 1970.6)은 소설가 최상규의 작품으로 소년들이 집 안에 물을 가득 채운 후, 그것을 얼려 기존의 집을 부수고 유리의 성을 만든다는 내용의 환상소설이다. 이 작품은 소년들과 어른들, 유리의 성과 기존의 집이 대립항을 이루며, 일상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비상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물이 얼어 만들어진 ‘유리의 성’이 곧 녹아내릴 수밖에 없듯이, 아담과 현재가 섹스와 음악으로 만들어가는 ‘유리의 성’ 역시 지속되기는 어렵다. 결국 그 지속불가능성이 현재에게서는 자살로 나타나며, 아담에게서는 ‘가짜 낙원’에 대한 처절한 인식으로 드러난다. 아담은 현재의 자살 소식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가짜 낙원에서 잘못 눈을 뜬 아담처럼, 내 이브는 창녀였으며, 내 방은 항상 어둡고 습기가 차 있다. 어쩌다 책이 썩는 냄새를 없애려고 창문을 열면, 네온의 십자가 아래서 세상은 내방보다 더 큰 어둠과 부패로 썩어지고 있다.”는 절망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아담이 눈뜰 때’에서 이러한 파시스트적 가속도의 세계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형이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모두 A만을 받은 형은, “여기선 아무것도 더 기대할 게 없다.”며 미국으로 간다. 지하상가의 화장실 바닥을 밀대로 미는 어머니의 모습을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던, 그러면서도 왠만한 혁명서적은 모두 독파했던 형은 “고향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뉴욕으로” 날아간 것이다. 어쩌면 형은 “우주인과 두뇌 싸움을 하려고 지구 밖으로 날아가려 들지도” 모르는 사람, 즉 파시스트적 가속도에 자신의 몸을 온전히 맡긴 존재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담의 몸과 이미지를 빼앗고, 아담이 원하던 ‘사춘기’라는 그림은 있지도 않은 뭉크 화집을 화대로 지불한 중년의 여성 화가는 언제나 파리나 뮌헨 혹은 뉴욕에 “언젠가는 돌아갈 거야.”라고 다짐하곤 했다. YMCA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멋들어진 강연을 한 평론가도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없다.아담은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일류대학에 합격함으로써, 잘난 형이나 평론가처럼 파시스트적 가속도에 동참할 길이 열린다. 그러나 아담은 서울의 빌딩숲을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기성질서의 논리를 충실히 수행하다가 결국 미쳐버린 ‘탬버린 치는 사내’를 발견할 뿐이다. 심지어 서울에서는 사정조차 불가능하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심한 두통만을 느끼는 아담의 모습은 젊은 시절 장정일의 모습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원재길의 회고에 따르면, ‘아담이 눈뜰 때’가 배경으로 삼은 1988년 여름에 대구에서 장정일을 만났을 때, 장정일이 서울에 대해 썩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곳 생활에서 맛본 두려움이 너무도 커서, 자기최면을 걸듯이 ‘죽어도 서울은 안 간다’고 거듭 못박았다.”(‘파리’ 1996년 겨울-내가 만난 장정일, 작가세계, 1997년 봄, 34면)는 기억을 전하고 있다.결국 아담은 형처럼 뉴욕으로 심지어는 우주로도 갈 수 있는 가속도의 세계에 몸 담기를 거부하고, “한없이 느리고 덜그럭거리는 보통열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 작가가 된다. 이것은 “내 온몸으로 이 세계의 가속도에 브레이크는 거는 일”이며, “가짜 낙원을 단호히 내뿌리치고 잃었던 낙원, 실재, 진리를 되찾는” 일에 해당한다. 아담은 ‘가짜 낙원’의 작가가 됨으로써, 가속도의 세계에서 진정성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담의 결심은 이후 장정일의 행로를 통해, 1990년대 한국문학의 한 진경으로 솟아오르게 된다.최연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인 장정일은 1962년 경북 달성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1987년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이 당선됐다. 세상을 바라보는 독창적 시각으로 주목받은 그는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담이 눈 뜰 때’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을 썼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6-08

민중 중심 역사관을 바로세우다

김주영은 1939년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서 태어났으며 진보초등학교와 진보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에서 대구농림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공부한 후에는, 오랜 시간 안동에 있는 엽연초생산조합에서 일하였다. 1976년 상경할 때까지 안동 지역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안동문학’이라는 동인지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김주영이 창작한 방대한 문학세계는 도시 빈민들을 다룬 소설, 대하역사소설, 유년기 체험을 다룬 소설로 나눠볼 수 있으며, 이러한 문학세계는 “소외된 국외인들인 배고픈 유년, 도시빈민 악동, 과부, 유랑인을 묘사”(양진오)하거나 “의리 이데올로기를 내세움으로써 동양적 전통의 웅자(雄姿)한 남성문학의 전통”(하응백)에 이어진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김주영의 ‘객주’는 작가의 문학적 특징이 압축된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객주’는 1979년 6월 2일부터 1983년 2월 29일까지 총 1천465회에 걸쳐 연재된 대하 역사소설이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창작과비평사에서 3부(1부 외장(外場), 2부 경상(京商), 3부 상도(商盜)) 아홉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가 1992년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왔다. 2003년에는 문이당으로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이 나왔고, 2013년에 문학동네에서 10권이 출간됨으로써 삼십여 년 만에 완간에 이르렀다.‘객주’는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구체적 생활상 속에 생동하는 이념으로 육화시킨 대표적인 사실주의적 역사소설로 꼽힌다. 이전의 역사소설이 왕실이나 영웅 중심이었다면, ‘객주’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에서 맨 아래를 차지하는 상인 그 중에서도 최하층에 해당하는 보부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보부상은 봇짐장수로 앉아서 파는 보상(褓商)과 등짐장수로 서서 파는 부상(負商)을 함께 아우르는 말로, 떠돌이 행상을 말한다. 보부상은 상인 중에서도 특히 궁핍하고 불우한 처지에 속했던 자들로서, 대체로 가족이 없는 홀아비나 고아 또는 가난하여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임경희, ‘경상동에서 조선의 보부상을 만나다’, 민속원, 2014, 20면) 김주영은 보부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각 지역의 토속적인 산물과 풍속, 구전설화와 야담, 음담, 민요, 판소리, 타령, 탈춤, 무가 등을 전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중의 삶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작품을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떠돌아다니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보부상이 주인공인 소설답게 작품의 무대로 여러 곳이 등장한다. 삼남(三南)지방을 배경으로 한 1부에서는 문경, 상주, 안동, 예천, 하동, 구례, 전주, 강경, 연산, 군산포 등이 나온다. 2부에서는 주요한 무대가 서울로 바뀌고, 사적인 갈등을 다루었던 1부와는 달리 세도가인 김보현이나 거상 신석주 등을 통해 구한말 조선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차원으로 확대된다. 2부에서는 무교, 애오개, 약고개, 압구정, 두뭇개, 수철리, 시구문 등의 서울 지리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된다. 3부에서는 서울이나 평강과 더불어 원산이 주요무대로 새롭게 등장한다. 이 때의 원산은 단순한 지방 도시가 아니라,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1880년에 개항한 3대 항구(부산, 원산, 인천)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원산을 배경으로 한 3부에서는 자연스럽게 일본의 침략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게 된다.‘객주’를 지도 삼아서 답사를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작품의 배경이 된 공간들에 대한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이것은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답사 등을 하며 기울인 노력이 만만치 않음을 증명한다. 또한 등장인물의 형상화도 매우 실감나는데, 이것은 작가의 유년기 체험과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김주영이 나고 자란 진보라는 곳은 본래 장시(場市)가 성한 교통 요지였으며, 생계를 책임 진 어머니는 저잣거리 마을에서 품을 팔아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김주영은 ‘객주’를 쓰게 된 첫 번째 동기로, 어린 시절 집 밖의 유일한 큰 세계를 이루었던 저잣거리 사람들의 삶을 그려야 한다는 작가적 부채 의식을 꼽을 정도이다. 요컨대 김주영에게 장터와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너무나 익숙한 삶의 원풍경이었던 것이다.‘객주’는 민중과 권력층의 대립이라는 기본 갈등에 바탕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병렬적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민중과 권력층의 대결은 일방적으로 후자가 힘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민중들 역시 만만찮은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보부상들의 공동체 의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들의 지략과 완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객주’에는 음모와 협잡이 가득하여 배신은 물론이고, ‘배신의 배신’, 나아가 ‘배신의 배신의 배신’까지 일어난다. 여기에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보부상들의 공동체이다. 그들은 “동병상련으로 객고(客苦)를 달램에 유무상통하여 혈육지간보다 질긴 정분을 가지고 간담상조(肝膽相照)하고 환난상구(患難相求)하는” 윤리를 철저히 지켜나가며, 그것을 위반했을 시에는 엄격하게 응징한다. 본래 김주영은 고아, 넝마주이, 창녀, 고물장수, 백정 등의 주변 인물들을 주요한 문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왔으며, ‘객주’의 보부상들은 작가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민중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객주’는 후반부로 갈수록 임오군란과 같은 역사적 사건의 비중이 커지는 경향을 보이며 동시에 주요한 갈등이 민중과 지배층의 대결에서 조선과 일본의 대결로 변모한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은 1878년에서 1884년까지의 시기는 우리 민족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때이다. 작품의 전반부가 조선의 봉건적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에 집중했다면, 후반부에서 비판의 대상은 당시 가장 위협적인 외세였던 일본으로 옮겨간다. 이 작품의 인물 대다수는 반일의식을 공유한다. 주인공인 천봉삼은 이러한 반일의식을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인물이다. ‘객주’의 모든 갈등은 결국 외세/민족이라는 이분법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왜선을 공격하여 감옥에 가게 된 천봉삼을 빼내는 일에 조선의 모든 역량이 총집결되는 모습을 통하여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용익, 매월이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명성황후와 고종까지 천봉삼의 탈옥에 동조하는 것이다.2013년에 새롭게 덧붙여진 10권은 탈옥 이후 천봉삼의 삶을 다루고 있다. 1884년 갑신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10권에서 천봉삼은 울진 포구에서 현동 저자나 내성으로 가는 십이령길에 나타난다. 본래 울진과 봉화를 잇는 십이령길은 보부상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보부상들은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한 울진의 흥부장, 울진장, 죽변장에서 미역, 고등어, 건어물 등을 구매해 동서 방향 주 도로인 십이령길을 걸어 봉화로 향했으며, 봉화에선 비단, 담배, 곡식을 싣고 되돌아왔다고 한다. (송기역, ‘힐리로드-옛길에서 사람, 그리고 보부상을 만나다’, 이야기의숲, 2015, 231면)십이령길에 나타난 천봉삼은 조선을 대표하는 상인이자 일본에 맞서는 지도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남행하였다가 산적 무리에게 잡혀 그들의 염탐꾼 노릇을 하는 범부이다. 10권에서는 일본이 아니라 천봉삼과 십이령길의 상단을 괴롭히는 산적 무리를 징치하고 장시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핵심적인 과제가 된다. 소금 상단의 도움으로 구출된 천봉삼은 결말에 이르러 드디어 안정된 가족을 이루고 생달 마을에 정착해 촌장이 된다.천봉삼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생달 마을에 이상적인 마을을 건설한다. 이곳에서는 대낮에도 노루가 뛰어들고 솥에는 꿩이 저절로 날아들며, 오랫동안 버려졌던 묵정밭이 불과 2년여 만에 “꿀이 흐르는 문전옥답”으로 변한다. 이 곳은 바로 천봉삼이 그토록 찾아 헤맨 “길지(吉地)”이며, 다음과 같이 이상적인 장소로 이야기된다.“징세나 부역이 없고, 토호들의 발호나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없고, 양반도 없고 상것도 없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열매가 열리는 그런 땅이겠지요. 마당에 노루가 뛰어들고, 솥에는 꿩이 저절로 날아드는 그런 땅이겠지요.”천봉삼이 정착한 생달마을은 지난 날 조선의 방방곡곡을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사라진 이름 없는 보부상들이 꿈에도 그리던 이상향이자, 30여년 만에 작가 김주영이 천봉삼을 비롯한 보부상들에게 바치는 선물에 해당한다.외딴 마을에 사는 서민들의 물류를 책임치며 고단한 삶을 살다 간 보부상에 대한 선물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옛길박물관’과 ‘객주문학관’은 보부상을 기리는 현실의 장소들이다. ‘객주’는 경기도 송파지역의 쇠살쭈인 조성준이 자신의 전처와 간부(姦夫) 송만치가 살고 있는 문경에 가서 복수극을 펼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 복수극의 무대가 된 문경에는 지금 옛길과 보부상에 관한 유물과 유품이 전시된 옛길박물관이 있다. 또한 김주영의 고향인 청송군 진보면에는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객주문학관이 존재한다. 옛길박물관이나 객주문학관, 혹은 십이령길을 조용히 걷다보면 동료 보부상을 위해서 목숨도 흔쾌히 내놓던 천봉삼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문학평론가 이경재1970년 ‘월간문학’ 가작 입선, 이듬해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주영은 경북 청송 출신이다. 토속적인 농촌 배경의 설정, 향토색 짙은 문장과 현장감이 살아있는 비어와 속어의 능수능란한 구사 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여자를 찾습니다’ ‘아들의 겨울’ ‘천둥소리’ ‘홍어’ ‘빈집’ ‘객주’ 등의 작품을 썼고,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받았다.

2020-06-01

피울음처럼 전하는권정생의 ‘오래된 미래’ ‘랑랑별 때때롱’

20세기를 양분한 이데올로기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들 수 있다. 두 이데올로기는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이지만, 근대의 자식으로서 공유하는 지점도 적지 않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생산력주의이다. 생산력주의란 어마어마한 물질적 진보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성장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생산력주의는 산업적 근대성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대중의 물질적 행복을 제공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믿음이다. 물질적 진보를 향한 인간의 꿈으로 인해, 지난 세기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생활의 편리와 풍요를 이룬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꿈은 반복적으로 악몽으로 변해 전쟁, 착취, 독재, 환경의 파괴 등을 불러왔다.물질적 풍요를 절대적인 과제로 삼고 달려오는 동안, 인류는 자신 역시 지구라는 생태계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했던 것이다. 그 결과 20세기에는 그 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연 파괴가 이루어졌으며, 그 속도는 광적으로 빨라지는 상황이다. 1990년부터 30년간 지구를 괴롭힌 오염 총량이 과거 2000년간 누적된 총량을 능가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이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물질적 풍요만을 향해 달려간다면, 결국에는 유한한 지구 별이 망가진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결코 이 단순한 과학(아니 산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를 불편하고 공포스럽게 하는 코로나19는 이토록 명백한 진실을 깨우쳐 주려는 자연의 마지막 메시지인지도 모른다.권정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물질적 풍요를 향한 인간의 광적인 신앙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지구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가 존엄한 가치를 지니며, 인간만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편견은 존재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여러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일반적으로 권정생의 문학세계를 단편 동화를 주로 창작한 초기(1969-1980), 소년소설을 창작한 중기(1981-1990), 장편 판타지를 창작한 후기(1991-2007)로 나누고는 한다.(엄혜숙,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 소명출판, 2017, 340면) 초기의 작품들은 주로 기독교적 희생과 사랑의 사상을 담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강아지똥’을 꼽을 수 있다면, 중기의 작품들은 한국 근대사의 고통스런 체험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몽실언니’를 꼽을 수 있다. 후기에는 지구 생태계가 유기적 통일체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생태주의에 바탕한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이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작가가 마지막으로 창작한 장편동화 ‘랑랑별 때때롱’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2006년 1월-2007년 2월)되었고 작가가 별세한 다음해인 2008년에 보리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랑랑별 때때롱’은 지구에서 보면 북두칠성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랑랑별에 사는 때때롱과 매매롱이, 지구에 사는 새달이 미달이와 우정을 나누는 장편 판타지이다. 이 작품에는 세 개의 시공이 등장하는데, 첫번째는 새달이와 동생 마달이가 사는 지구이고, 두 번째는 때때롱과 동생 매매롱이 사는 지금의 랑랑별이고, 세 번째는 500년 전의 랑랑별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환상적인 요소는 랑랑별이라는 가공의 행성이라고 할 수 있다.소설에서 환상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크게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값싼 위안을 줄 수도 있으며, 이와는 달리 기존 현실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거나 새로운 현실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랑랑별 때때롱’에 등장하는 ‘500년 전 랑랑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성찰을 하도록 이끌고, ‘지금의 랑랑별’은 권정생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5백 년 전 랑랑별은 ‘지구의 미래’이고, 현재의 랑랑별은 ‘지구의 미래를 극복한 미래’인 것이다.새달이와 마달이가 살아가는 지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환경오염이다. “지금 지구 나라는 온통 쓰레기뿐이고 사람 사는 곳이 못 된다.”고 이야기된다. 그 중에서 한국은 본래 물이 하도 맑아서 선녀들이 미역을 감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런 깨끗한 곳이 남아 있지 않으며 공기에도 먼지가 가득 섞여 있다. 환경오염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대표해서, 이 작품에는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왕잠자리가 등장한다. 왕잠자리는 “유리창을 날카로운 못 끝으로 찍 찍 긋는 듯한” 목소리로 눈물까지 흘리며, “다 죽었다! 다 죽었다!”라거나 “지구 별은 나쁘다, 지구 별은 나쁘다, 나쁘다, 나쁘다…!”라고 절규한다. 왕잠자리를 만난 이후 “새달이와 마달이는 목숨이 위태로우니 조심하여라.”는 때때롱의 편지를 받는데, 이것은 왕잠자리가 처한 상황이 새달이와 마달이에게도 곧 닥쳐올 것임을 암시한다.때때롱은 왕잠자리에게 “랑랑별에서는 농약도 안 치고 쓰레기도 안 버린다.”며 랑랑별에 오라고 권한다. 새달이와 마달이는 맘껏 뛰어놀며 풀을 뜯어먹고 싶은 누렁이를 비롯한 흰둥이, 나비, 매미, 메뚜기, 온갖 벌레들, 개구리, 물고기들과 함께 랑랑별에 간다. 이후 새달이와 마달이는 ‘500년 전 랑랑별’과 ‘지금의 랑랑별’을 둘러보고 지구로 귀환한다.‘5백 년 전 랑랑별’은 지금 인류가 물질적 풍요를 향한 꿈에 취해 별다른 반성 없이 살아갈 때, 마주하게 될 세상의 모습이다. “과학이 너무 발달”한 그곳에서는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한 로봇이 거의 모든 일들을 대신한다. 이 곳의 아이들은 좋은 유전자만 골라다가 만든 맞춤 인간이기에 하나 같이 잘나고 어른 같다. 이들의 몸 속에는 열 사람도 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로 있으며, 당연히 함께 사는 가족이라는 개념도 없다. 모든 인간들은 기계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기에, 어른들도 아이들도 놀 줄을 모르고, 웃을 줄도 울 줄도 화낼 줄도 슬픈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른다. ‘5백 년 전 랑랑별’은 인간성의 본질을 잊고, 과학만을 맹신하며 나아갔을 때 인류가 도달할 디스토피아에 해당한다.때때롱과 매매롱이 사는 ‘지금의 랑랑별’은 권정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고 집에서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학교에는 떠들기 시간이 따로 있고, 옷이 찢어지면 스스로 기워 입는다. 아빠는 엄마가 하는 요리를 다 할 줄 알고, 때때롱 매매롱 형제도 스스로 밥을 지어 먹을 줄 안다. 이 곳에서는 ‘뚱뚱보’가 많은 지구 별과는 달리 세 가지 반찬만 먹으며 열심히 일하고 뛰어논다. 또한 이 곳에는 새달이나 마달이는 물론이고 누렁이와 흰둥이도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보존되어 있다.흥미로운 것은 그토록 과학 기술이 발전한 ‘5백 년 전의 랑랑별’을 극복한 ‘지금의 랑랑별’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과거의 우리와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는 “집안의 대장”으로 대우 받으며, 사람들은 호롱불을 켜 놓고 밥을 먹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화장실이 아닌 들판과 같은 곳에서 볼 일을 해결할 정도이다. 과거야말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오래된 미래’였던 것이다. ‘랑랑별 때때롱’의 의미는 이 작품이 출판된 같은 해에 개정증보판이 나온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2008)에 실린 산문들과 나란히 놓고 볼 때 보다 선명해진다. 여기에 수록된 ‘태기네 암소 눈물’에서 권정생은 “우리가 옛날에 가지고 있던 모든 걸 되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우리는 본래의 조선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장, 발전, 물질과는 무관하게 참된 삶을 추구한 반근대인의 초상을 확인할 수 있다.‘우리들의 하느님’에 수록된 산문에는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 권정생의 절절한 육성이 직정적으로 표현돼 있다. 대표적인 것들만 정리해보아도 다음과 같다. “자연을 망가뜨리고 더럽히는 건 인간의 욕심과 낭비 때문이다.”(물 한 그릇의 양심),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결국 가난한 동족의 몫을 빼앗고 모든 자연계의 동식물의 몫을 빼앗는 행위밖에 또 무엇이 있는가?”(태기네 암소 눈물), “이 땅의 주인은 인간들만이 아닌데 인간중심의 인간제국을 건설하려는 오만이 결국 인간상실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녹색을 찾는 길), “산과 들이 깨끗하고 아름다울 때, 우리들의 모습도 아름답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울 것이다.”(쌀 한톨의 사랑), “우리는 경제성장의 뒤편으로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몇갑절이나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새소리가 들리던 시골 오솔길의 아이들), “사람이란 동물은 어쩔 수 없는 악마일지도 모른다.”(새야 새야), “그동안 일어난 여러 일들을 보고 과연 문명은 발전인지 퇴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골프장 건설 반대 깃발이 내려지던 날)여기에는 인간중심주의와 생산력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모든 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이 담겨 있다. 어쩌면 이러한 말은 수많은 사람들이 전달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 속에 담긴 정신을 실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말들이 피울음처럼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메신저가 실제로 겸손한 자연의 삶을 실천한 권정생이기 때문이다. AC(anno covid19) 원년이라는 지금, 인류는 ‘500년 전 랑랑별’로 가느냐, ‘지금의 랑랑별’로 가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권정생이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우리 모두 자연을 봅시다.”(제발 그만 죽이십시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5-25

생명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모성 넘어선 위대한 여성성 ‘몽실’

20세기 한국 소설이 가장 많이 그리고 진지하게 다룬 제재는 6.25이다. 6.25가 우리 민족에게 가져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권정생은 아동문학의 영역에 6.25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적극적으로 가져온 대표적인 작가이다. ‘몽실언니’(1984)는 ‘초가집이 있던 마을’(1985), ‘점득이네’(1990)와 함께 권정생이 발표한 ‘6.25 전쟁 삼부작’ 중의 한 편이다. ‘몽실언니’는 장편소년소설로서 1981년 처음 연재를 시작해, 198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오랜 동안 사랑받아 온 스테디셀러이며, 1990년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권정생의 대표작이다.‘몽실언니’는 6.25를 전후한 시기에 몽실이라는 소녀가 일곱 살부터 열한 살에 이를 때까지 두 명의 아버지(정씨, 김씨)와 두 명의 어머니(밀양댁, 북촌댁)를 모시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 세 명의 동생(김영득, 김영순, 정난남)을 돌보며 온갖 고난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이다. 해방 뒤 귀국하여 살강마을에서 어렵게 살던 몽실의 어머니 밀양댁은, 남편 정씨가 일자리를 찾아 집을 떠난 사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몽실을 데리고 댓골마을의 김씨에게 시집을 간다. 이후 밀양댁이 아들을 낳자 김씨는 몽실을 구박하고, 몽실은 김씨의 폭력으로 평생 다리 하나를 평생 못 쓰게 된다. 노루실의 정씨에게 돌아온 몽실은 정씨가 새로 얻은 북촌댁과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나 전쟁이 터져 정씨는 전쟁터로 끌려 나가고, 북촌댁은 아기를 낳은 후 삼일만에 병으로 죽는다. 약해진 몸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정씨는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는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몽실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꿋꿋하게 인생을 헤쳐 나간다.‘몽실언니’의 주요 배경은 안동 일직면 운산리를 중심으로 한 경북 의성과 청송 등이다. 안동의 대표적 시인인 안상학에 따르면, 일본에서 귀국한 몽실의 가족이 처음 살던 살강마을은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있으며, 몽실의 엄마인 밀양댁이 김씨에게 새로 시집 가서 살던 댓골마을은 경북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에 있다고 한다. 댓골마을은 몽실이처럼 귀국동포였던 권정생 가족이 일본에서 돌아와 1년 반 동안 살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엄마 북촌댁과 함께 살던 노루실은 안동시 일직면 운산장터에서 남쪽으로 5리 밖에 있으며, 몽실이 구걸을 하여 동생 난남이를 먹여 살리던 장터는 운산장터를 말한다고 한다. (안상학, ‘권정생이 그린 몽실의 길과 마을’, 창비어린이, 2011.3, 183-192면) 권정생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통하여 생동감이 넘치는 몽실의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던 것이다.한민족 중의 그 누구도 6.25의 상처로부터 예외일 수 없겠지만, 권정생 역시도 그 고통의 한복판에 있었다. 전쟁이 나자 권정생의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도 모르게 되었다. 또한 권정생이 평생 동안 살면서 작품을 집필한 안동 조탑마을은 6.25 전쟁 때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 격전지 중 하나라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마을 사람들의 억울한 희생이 많았다고 한다.(원종찬, ‘속죄양 권정생’, 권정생의 삶과 문학, 창비, 2008, 107면) 권정생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전쟁의 다양한 모습은 ‘몽실언니’라는 장편의 실감나는 서사적 육체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몽실의 가장 큰 특징은 약자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우선 몽실언니라는 제목처럼, 몽실은 동생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보여준다. 김씨네서 구박을 받다가 고모를 따라 아버지에게 가는 길에도, 김씨와 밀양댁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 영득이를 두고 어떻게 가나?”라고 걱정을 한다. 나중에 밀양댁이 영득이와 영순이를 남기고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노루골에서 댓골마을을 오가며 영득이와 영순이를 돌보기도 한다. 특히 정씨와 북촌댁 사이에서 태어난 난남을 향해 쏟는 사랑과 정성은 초인적이다. 북촌댁은 난남을 낳고 사흘만에 죽는데, 이후 몽실이는 식모살이를 하거나 구걸을 하면서까지 난남을 키워낸다. 그러한 몽실의 사랑은 같은 핏줄을 지닌 가족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념이나 인종의 경계도 뛰어넘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것이다. 몽실은 “인민을 못살게 하는 반동 분자는 죽여야 해!”라고 말하는 의용군에게 반발하며, 의용군의 총구 앞에서도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다. 몽실의 박애(博愛)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검둥이 아기”를 돌보려고 애쓰는 장면이다.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된 “검둥이 갓난아기”를 보고, 지나던 사람들은 “화냥년의 새끼!”라며 침을 뱉고 발길로 걷어차 죽이려 한다. 이 때 몽실은 자신의 온몸을 던져 아기를 보호한다.“검둥이 아기”를 위해 몸을 던지는 몽실의 모습은 2007년에 작성한 유언장의 마지막과 닮아 있다. 유언장은 “제 예금 통장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베트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이충렬,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산처럼, 2018, 401면)로 끝난다. 여기에는 권정생이 평생 간직한 아이들과 평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통일에 지향이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마음은 결코 한민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티베트 아이들에게까지 열려 있는 것이다.몽실이는 결코 동생과 부모의 사랑을 다투고, 성장에 따르는 심신의 스트레스로 힘겨워하는 철부지 언니가 아니다. 권정생이 그려낸 몽실언니는 차라리 위대한 모성을 지닌 어머니에 가까운 모습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권정생 문학의 변치 않는 중요한 요소이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무명저고리와 동화’도 희생적인 어머니를 그린 작품이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권정생에게 어머니는 참으로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권정생의 자전적 산문인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1986)에는, 작가의 어머니가 베풀었던 사랑이 눈물겹게 묘사되어 있다. 1957년 권정생의 어머니는 객지생활을 하다가 폐결핵에 걸린 아들을 집으로 데려가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결핵균이 신장과 방광으로 번지는 상항에서 권정생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으며, 이 때마다 어머니는 함께 잠을 자지 않으며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산과 들로 다니며 약초와 메뚜기, 뱀, 개구리를 잡아와 먹였고, 벌레 한 마리도 죽이는 것을 꺼리시던 어머니가 이 때 껍질을 벗겼던 개구리만 해도 수천 마리가 넘을 거라고 회상한다. 이런 어머니의 정성으로 죽기만을 기다리던 권정생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난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권정생은 사실상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몽실을 왜 굳이 ‘어린 언니’로 만들었을까? 이것은 독자인 소년 소녀들을 위한 배려일 수 있다. 동시에 몽실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과 순수한 인간애를 발휘하기에 어머니는 적당하지 않은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대는 폭력적인 가부장제가 철통같은 지배력을 발휘하는 시기였다. 실제로 ‘몽실언니’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지극히 폭력적이며 이기적이다. 몽실이에게 폭력을 휘둘러 평생 다리 하나를 못 쓰게 한 김씨는 말할 것도 없고, 친아버지인 정씨 역시 몽실을 “술 취하고 때리는 것”에 있어서는 똑같다. 그렇기에 몽실이 “어느 쪽이 김씨 아버지인지 어느 쪽이 정씨 아버지인지 잘 가려내지 못할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아버지들의 모습은 “사람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6.25 전쟁과 닮아 있기도 하다.여자는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 수 없단다”나 “여자라는 건 남편과 먹을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단다.”와 같은 말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어머니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은 남편의 핏줄과 관련된 존재로만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실제로 이 작품에서 몽실의 친엄마인 밀양댁에게서 가부장제가 강제한 가족주의의 한계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밀양댁은 처음 몽실이를 데리고 김씨네 집에 가지만, 김씨의 아들 영득이가 태어나자 끝내 몽실이를 정씨에게 보내는데 동의하고 만다. 나중에 북촌댁의 죽음으로 돌봐주는 이가 없게 된 몽실이가 갓난아기인 난남이를 데리고 왔을 때는, 자기와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순이에게는 젖을 먹이면서도 암죽만 먹어 뼈만 남은 난남이는 본 체 만 체한다. 이러한 행동 모두 김씨의 핏줄만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가 낳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몽실은 죽은 밀양댁과 북촉댁, 그리고 미군에게 몸을 팔아 살아가는 금년이를 생각하며 “여자라는 것 때문에, 어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엄마 몽실’이 아닌 ‘언니 몽실’만이 혈육은 물론이고 이념과 인종마저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권정생의 ‘몽실언니’는 6.25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아동문학의 틀로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는 의미도 크지만, 가족(특히 가부장)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의의를 부여받는 기존의 모성을 뛰어넘는 위대한 여성성을 제시한 작품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필요가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5-18

권정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

권정생은 우리 시대 위인이다. 그가 위인인 이유는 귀신도 부린다는 돈이 많아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이 있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학벌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위인인 이유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채, 평생 교회 문칸방이나 좁은 흙집에 살며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 나아가 민들레와 흙덩이를 위해 묵묵히 교회종을 치거나 원고지를 채웠을 뿐이다. 그는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가고, 비천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다른 모습이라는 성경 속의 세계를 이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살다가 간 사람, 어쩌면 ‘우리 시대 성자’인지도 모른다.권정생은 ‘강아지똥’, ‘무명저고리와 엄마’, ‘깜둥바가지 아줌마’, ‘하느님의 눈물’, ‘몽실언니’, ‘점득이네’와 같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동화나 소년소설을 100편이 훨씬 넘게 남긴 아동문학계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모든 작품이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서 쓰여졌다는 점이다. 1937년에 태어나 해방 직후까지 지냈던 일본에서의 유년 시절과 부산에서 일하던 10대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2007년 별세할 때까지 안동을 떠나지 않았다. 1968년부터 안동 일직교회 사찰집사(주요 업무는 교회 문단속과 시설 관리, 그리고 종지기)로 교회 문간방에 살았고, 1983년부터는 마을 청년들이 빌뱅이 언덕 아래에 지어준 5평 크기의 흙집에서 살며 글쓰기에만 전념하였다.동화 ‘강아지똥’은 1969년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수상작이며 권정생의 등단작이다. 이 작품에는 권정생이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펼쳐갈 사랑과 생명의 사상이 씨앗처럼 쏙쏙 박혀 있다. 주인공인 강아지똥은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으로 “똥 중에서도 제일 더러운 개똥”이다. 그래도 강아지똥은 착하게 살고 싶고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결국 봄이 와서 싹이 돋아난 민들레를 만나고, 자신이 거름이 되어 민들레의 몸 속으로 들어가면 별처럼 고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아지똥은 너무나 기뻐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아 버리고, 사흘 동안 내린 비에 자디잘게 부서져 민들레 뿌리로 흘러들어가 결국 민들레꽃을 피운다.이 아름다운 동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주인공이 다름 아닌 강아지똥이라는 점이다. 권정생 이전의 동화에서 주인공은 대개 왕자나 공주 혹은 왕자나 공주가 되려는 천사같은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권정생은 동화에서 “대부분 벙어리, 바보, 거지, 장애인, 외로운 노인, 똥, 지렁이, 구렁이 등 정상인들로터 멸시받거나 그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계삼, ‘진리에 가장 가까운 정신’, 권정생의 삶과 문학, 원종찬 엮음, 창비, 2008)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왕자와 공주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라는 흙덩이의 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강아지똥이 결국 민들레꽃을 피워내는 귀한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는, 이 땅의 모든 가난하고 병든 약자들에게 힘을 주지만 아마도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힘을 얻은 독자는 권정생 자신이었을 것이다. 권정생이야말로 이 땅의 많고 많은 ‘강아지똥’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권정생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부모님을 잃고, 형제들과도 자연스럽게 떨여져 살게 되었다. ‘강아지똥’을 쓸 때까지 젊은 권정생은 악몽처럼 떨쳐낼 수 없는 가난과 병고로 몸부림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1956년 당시 불치의 병으로 인식되던 결핵에 걸린 후, 평생 그 병을 짊어지고 살았다.이 시기 권정생이 그토록 동화작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자신이 이 생애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자취는 글밖에 없다고 생각”(이충렬,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산처럼, 2018, 31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등단하기 불과 3년 전에 권정생은 콩팥과 방광을 떼어 내고 의사로부터 길어야 2년 정도를 더 살 거라는 말을 들은 상태였다. “항상 나는 죽는다는 그거, 그게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강아지똥’ 이거 하나라도 써놓고 죽어야지”(권정생·원종찬 대담, ‘저것도 거름이 돼가지고 꽃을 피우는데’, 창비어린이, 2005년 겨울호)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썼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목숨 걸고 쓴다’는 말을 하지만, ‘강아지똥’이야말로 조금의 과장도 없이 작가가 ‘목숨 걸고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한 작가의 초기작일수록 한 인간을 작가로 내몬 내면적 고민의 흔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강아지똥’은 권정생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빈곤과 병환으로 인해 겪을 수밖에 없던 인간적 고통과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고투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아마도 권정생은 이 무렵 자신을 강아지똥과 같은 존재로 여겼을지도 모르며, 이를 극복하는 길은 작품 속의 강아지똥이 자신을 자디잘게 부셔서 민들레꽃을 피워냈듯이, 자신의 병약한 몸에 남은 생명의 진액을 뽑아서 동화를 쓰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나아가 ‘강아지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강아지똥’이라는 근원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별처럼 아름다운 민들레꽃이 개똥과 비와 따뜻한 햇볕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 만물은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강아지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첫 번째 동화집 ‘강아지똥’(세종출판사, 1974)의 ‘작가의 말’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작가의 말’은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버린 끝에 참다 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됩니다.”로 시작된다. 거지라는 표현에는 권정생이 이 작품을 쓸 때까지 겪었을 그 처절했던 고통이 잘 압축되어 있다.그러나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라는 문장을 작가의 어려웠던 삶에 대한 고백으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바로 이어 작가는 “하기야, 세상 사람치고 거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있다면 ‘나 여기 있소’하고 한번 나서 보실까요? 아마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좀 편하게 앉아서 얻어먹는 상등거지는 있을지라도 역시 거지는 거지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이 모두 깊이 연결되어 서로간의 도움과 배려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자기만 잘났다고 뽐낼 수는 없는 일이다. 절대성 앞에서 모두는 ‘강아지똥’이자 ‘거지’알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새로운 세계는 개시되는 것이다.‘강아지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참으로 놀랍다. 그것은 죽음을 통한 존재의 완전한 전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 위대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이 작품이 쓰여지던 시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발상이다. 이 시기는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도 오직 발전과 성장에 모든 것을 걸던 때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필연이며, 낙오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이런 시대에 권정생은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버림으로써 꽃을 피우는 강아지똥을 그려낸 것이다.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꽃피운다는 이 희생과 헌신의 자세는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본질에 해당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보여준 사랑의 정신이며, 작품에서도 별만큼 고운 민들레꽃을 피운 것은 바로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었다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동시에 가장 보잘것없고 무시 받는 존재가 좋은 일을 행하여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상상력은 우리 민족의 원형적 상상력에도 맞닿아 있다. 서사무가 ‘바리공주’의 바리공주가 바로 그 성스러운 주인공이다. 일곱 번째 딸인 바리공주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남과 동시에 버림받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 바리공주는 행복하게 자란 여섯 명의 언니 대신 온갖 고생을 하며 약을 구해와 아버지를 살려낸다. 그 결과 바리공주는 최고의 높은 정신적 경지에 오른다. ‘강아지똥’이 창작된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꾸준하게 읽히는 이유는, 담고 있는 사상이 인류 보편의 아름다운 정신에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아마도 이 땅에는 ‘삶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강아지똥이 조용히 살다 갔음에 분명하다. 그들이 소리 없이 피운 민들레꽃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희생과 사랑이라는 낱말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작가 권정생은…1937년 일본 도쿄 빈민가에서 출생. 1946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가난 탓에 식구들과 헤어져 살았고, 유년시절부터 고구마 장수, 가게 점원 등으로 일했다. 결핵을 앓는 등 몸도 약했다. 1967년 안동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기독교교육’, 조선일보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검소하고 성실한 삶으로 시종했기에 많은 독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5-11

하근찬 “우리가 겪은 전쟁을 증언하는 것이 문학적 사명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폭력의 세기’에서 “20세기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가 되었으며, 그러므로 전쟁과 혁명의 공통분모라고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폭력의 세기가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렌트의 말은 러일전쟁을 시작으로 하여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 베트남 전쟁 등을 20세기 내내 겪은 한국인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마지막 장면은집으로 돌아오던 두 부자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팔 하나가 없는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다리 하나가 없는 아들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산 고등어를 손에 든 채 외나무다리를 건넌다.…우리가 겪은 전쟁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문학적 사명이라고 여긴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하근찬이다. 1931년에 태어난 하근찬은 “전쟁의 그늘 속에서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랐고, 또 꿈 많던 시절을 전쟁 때문에 괴로움으로 지샌 것만 같이 회상”된다면서, 자신의 작품들을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전쟁피해담”(‘전쟁의 아픔, 기타’, 산울림, 겨레, 1987, 4면)이라고 말하였다.하근찬이 전쟁에 대한 고발을 자신의 문학적 사명으로 여긴 이유는, 본인이 누구보다 큰 전쟁의 피해자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아버지가 아무런 죄도 없이 반동으로 몰려 총살당하는 끔찍한 일을 경험하였으며, 본인도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국민방위군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겪은 하근찬은 6.25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그것은 사람이 만든 지옥이었다. 열아홉 살이던 나는 그때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전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끝없는 절망을 느꼈었다.”(‘인간에 대한 끝없는 절망’, 내 안에 내가 있다, 엔터, 1997, 33면)고 6.25를 회고할 정도이다. 하근찬은 일제 말의 폭력도 나름대로 체험하였는데, 전주사범학교 1학년 때이던 1945년 4월부터 8월 15일까지 경험한 4개월여의 기숙사 생활을, “이른바 일본군국주의 교육의 맛”(‘과거와 현재의 오버랩’, 文藝, 1988년 여름호, 313면)을 실컷 보았던 때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전쟁피해담이라고 규정한 하근찬의 소설은 경북 영천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근찬은 1931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 성장하다가 열 살 무렵 교사였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고향을 떠난다. 이후에는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전북 지역에서 살다가, 1948년에 영천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귀향한다. 이후 1956년에는 영천초등학교 동료교사와 결혼하여 영천에 신혼집을 마련하였으며,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난이대’가 당선되었다는 소식도 영천에서 듣게 된다.고향을 떠나 있을 때에도 하근찬은 고향 영천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진정한 고향은 마음 속에’라는 산문에서 6.25가 일어나기 한 두 해 전에 혼자서 고향에 갔을 때의 감상과 다짐을 밝히고 있는데, 그때 가슴 속에 고향에 대한 목마른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나중에 작가가 되면 “반드시 경상도 사투리를 쓰리라고 다짐했다.”(‘내 안에 내가 있다’, 엔터, 1997, 16-17면)는 것이다. 실제로 하근찬이 창작한 대부분의 작품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경상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하근찬의 소설세계는 대부분 가난한 농촌을 배경으로 일제 말기나 한국전쟁과 같은 민족사의 비극과 이로부터 비롯된 여러 사회문제를 형상화한 것들이다. ‘수난이대’는 작가의 등단작이자 대표작으로 하근찬 문학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다.‘수난이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제목처럼 아버지 박만도와 아들 박진수이다. 아버지 박만도는 일제시대에 징용에 끌려가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화약으로 동굴을 파다가 팔 하나를 잃었다. 그런 그가 아침부터 신이 났다. 이유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삼대 독자인 아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 고등어까지 사서 손에 든, 만도의 눈 앞에 진수는 다리 하나를 잃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만도는 너무나 큰 실망에 진수에게 화를 내기도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모르겠다는 아들을 향해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능 기다.”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은 집으로 돌아오던 두 부자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팔 하나가 없는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다리 하나가 없는 아들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산 고등어를 손에 든 채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이 부자(父子)는 눈물 나는 협동을 통해 전쟁과 거짓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삶이 있는 본래의 삶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실개천이 흐르고 주막이 있는 ‘수난이대’의 농촌 마을은 영천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김동혁이 작가의 전기 자료, 작품의 줄거리, 현지답사를 통해 실증적으로 밝혀 놓았다. 이 작품에 나타난 주인공 만도의 동선은 ‘용머릿재-외나무다리-주막집-시장-정거장-주막-외나무다리’로 정리해 볼 수 있는데, 용머릿재는 마현산 일대, 외나무다리가 놓인 시냇가는 남천, 주막집은 남천의 둔치 인근, 시장은 영천의 재래시장, 정거장은 영천역에 해당하는 것이다.(김동혁, ‘문학적 공간’의 분석을 통한 ‘지리적 공간’의 재구성, 어문론집 46집, 2011, 239-266면)하근찬은 자신의 몸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고향 영천을,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전형적 공간으로 형상화하였다. 보편적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이유는, ‘수난이대’가 미학적으로도 매우 잘 짜여진 작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난이대’는 텍스트의 모든 효소들이 함께 작동하면서 작품의 의미를 확립시켜주는 유기적 통일성(organic unity)을 갖춘 작품이다. 잘 짜여진 레고 블록처럼 하나의 사건이나 장소 혹은 소도구 하나도 허투루 쓰인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 작품에서 만도는 진수를 만나러 가는 길에 주막을 떠올리고, 서술자는 굳이 “만도는 여간 언짢은 일이 있어도 이 여편네의 궁둥이 곁에 가서 앉으면 속이 절로 쑥 내려가는 것이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 주막은 나중에 만도와 진수를 정서적으로 결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처음 다리 하나를 잃은 아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만도는, 주막에 들르고서야 아들을 향한 본연의 따뜻한 부정(父情)을 회복한다.그리고 아들을 위해 산 고등어도 이 작품의 감동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고등어가 없었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마지막 장면에서 진수가 만도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진수가 고등어를 손에 들고 다리를 건넘으로써, 만도 역시도 진수에게 의지하는 모양새가 된다. 고등어는 단순한 밥반찬이 아니라, 전쟁으로 상처 받은 두 부자가 힘을 합쳐 본래의 삶을 되찾는다는 작품의 주제를 가능케 하는 주인공인 것이다. 이처럼 서사의 경제학이 철저하게 지켜진 결과, 이 작품은 단편의 분량으로 민족사의 아픔과 극복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살뜰하게 담아내고 있다.‘수난이대’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웃픈(웃기고 슬픈) 소설이기도 하다. 슬픔을 자아내는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와 아들의 훼손된 육체이다.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도 없는 이들 부자에게 훼손된 육체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웃음을 자아내는데, 그것은 대부분 인물들의 언행에서 비롯된다. 만도는 기본적으로 단순하고 다분히 익살기가 넘치는 인물이다. 만도가 주막에서 주모와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든가, 냇가에서 오줌을 누는 장면 등이 그러하다. 향토색 짙고 정감 넘치는 경북 방언 역시 순박한 두 부자의 맑은 심성을 부각시키며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주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능 기다.”라는 낙관이야말로 그 어떤 외나무다리도 건널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흔히 ‘수난이대’(1957), ‘나룻배 이야기’(1959), ‘흰 종이 수염’(1959)을 하근찬의 초기 3부작으로 꼽는다. 이들 작품은 모두 농촌마을에서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끔찍한 장애를 입고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이들 작품에서는 고향과 타향이 선명한 이분법을 이룬다. 고향이 따뜻한 사람들의 인정이 가득한 자연의 세계라면, 타향은 전쟁의 포성이 가득한 거짓 문명의 세계이다. 이 시기 하근찬은 문명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폭력과 거짓으로 가득 찬 부정적인 대상으로 보았다. ‘수난이대’에서 정거장에 있는 시계는 고장난 채 유리가 깨어져 있으며 먼지가 꺼멓게 앉아 있다. 또한 ‘나룻배 이야기’에서 양복을 입거나 어깨에 총을 멘 사람들은 멀쩡한 고향 사람들을 데려다가 못 쓰게 만드는 고약한 사람들이다.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지만, 결코 그 대단한 전쟁이나 문명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극복해내고자 한다. 그러한 힘은 바로 자연에 가까운 그들의 순수함과 생명력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극복에의 의지가 ‘수난이대’에서는 외나무다리 건너기로, ‘나룻배 이야기’에서는 잘난 외지인들을 배에 태우지 않는 것으로, ‘흰 종이 수염’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추상적인 공간에서 전쟁에서 비롯된 존재론적 고통을 이야기하던 전후(戰後)에, 하근찬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인물과 공간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매우 의미 있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작의 한복판에는 경북 영천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한번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소설가 하근찬은…1931년 경북 영천 출생. 전주사범과 동아대에서 수학했다. 이후 교사와 잡지사 기자 등으로 일했다. 창작집 ‘수난이대’ ‘일본도’ ‘서울 개구리’ ‘내 마음의 풍금’ 등을 냈고, 장편 ‘야호’ ‘제복의 상처’ ‘여제자’ ‘은장도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조연현문학상, 요산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인정과 향토성이 짙은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들이 겪는 민족적 수난을 묘사한 작가로 잘 알려졌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4-27

올곧은 선비정신이 독특한 고전미의 세계를 구축하다

한 나라의 문화는 전통 지향성과 새것 지향성이 서로 힘겨룸을 하면서 발전해 나간다고 할 수 있다. 옛 것에만 집착할 경우 그 문화는 고루해져서 결국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며, 새 것만 지향할 경우에는 그 문화가 정체성을 잃고 독자적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문학 역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전통 지향성과 새것 지향성의 힘겨룸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한국의 현대사는 새것 지향성이 문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을 압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광풍 속에서도 우리 고유의 것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문인들이 있었으니, 그 중의 대표적인 시인이 바로 조지훈(1920-1968)이다. 조지훈은 시인으로만 한정하기에는 그 쌓은 업적의 산이 매우 높다. 그는 시인이면서 논객이고, 동시에 지사이자 학자이다. 그가 여섯 권의 시집을 통해 남긴 그 완미한 시, 4.19나 5.16과 같은 역사의 격동기마다 토해낸 사자후(‘선비의 직언’, ‘지조론’ 등), ‘멋의 연구’와 같은 논문을 통해 구축한 한국학의 세계는 후대의 기림을 받을만한 것이다.그러한 삶을 뒷받침한 것은 바로 조선 500년을 이어온 선비정신이다. 조지훈의 고향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주실이라고도 함)으로, 이곳은 한양 조씨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다. 그의 조상은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다가 쓰러진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이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지훈의 증조부인 조승기는 의병대장으로 항일활동을 하다가 한일합방 이후 자결한 순국지사이며, 조부 조인석도 학문과 덕망으로 추앙을 받은 한학자였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조지훈은 일제가 주도하는 신교육 대신 전통적인 유학을 주로 배우며 성장하였다. 어린 조지훈이 신교육을 받은 것은 영양보통학교에 잠시 다닌 것이 전부이다. 수백 년간 주실 마을을 채워온 올곧은 선비정신 속에서 조지훈은 정신의 뼈와 살을 형성한 것이다.거기에 덧보태 조지훈은 한국의 정신을 형성하는 또 하나의 축인 불교에도 전문가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1941년 불교계 학교인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를 졸업하였고, 1941년 4월에는 오대산 월정사의 외전강사로 입산하여 1년 여를 머물렀다. 이 당시 조지훈은 각종 경전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선(禪) 체험을 갖기도 했던 것이다. 수필 ‘돌의 미학’(1964)에서는 월정사에 가기 일 년 전에 일본 교토의 묘심사(妙心寺)에서 선(禪)에 든 적이 있다는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이러한 성장배경을 통해 조지훈의 독특한 미의 세계를 일찌감치 알아본 이가 바로 정지용이다. 정지용은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의 작품으로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키며 “詩에 있어서 깃과 죽지를 고를 줄 아는 것도 天成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니 詩壇에 하나 新古典을 紹介하며……뿌라보우”(‘詩選後’, 문장, 1940.2.)라는 추천사를 남겼다. 정지용은 조지훈의 문학이 지닌 ‘고전적 성격’을 예리하게 포착했으며, 그러한 개성이 우리 시단에 축복이 될 것을 알았던 것이다.실제로 조지훈의 시는 한국의 고유의상이나 한국불교의 전통 춤과 같은 제재뿐만 아니라 형태나 기법 역시도 전통적인 세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조지훈의 시에는 시조나 한시(漢詩)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는데, 이것은 그가 한시를 직접 번역하고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조지훈 전집에는 무려 36편의 번역 한시와 19편의 창작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조지훈을 일컬어 ‘동양적인 세계를 우리의 새로운 시사에 수립한 거장’(박목월), ‘현대를 살다간 이조적(李朝的) 사림의 마지막 인물’(박노준), ‘우리 민족의 크고도 섬세한 손’(오탁번), ‘보편적 인문주의자’(윤석성)라고 칭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조지훈이 자신이 나고 자란 경북을 주된 시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의 시세계 중에서 네 번째 시기에 해당하다. ‘조지훈 시선’(1956)과 ‘청록집 이후’(1968)의 후기에서 조지훈은 스스로 자신의 시세계를 여섯 단계로 나누었다. 그 각 단계는 ①서구적 감각의 화사와 퇴폐의 시(습작기와 문단 데뷔 직전의 동인지 시기), ②민족정서에 대한 애착과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수의 시(‘문장’지 추천 시기), ③선미(禪味)와 관조의 시(오대산 월정사의 시기), ④방랑과 운수심성(雲水心性)의 자연 은둔시(해방 직전, 조선어학회 시대), ⑤인생 사랑과 미움에 대한 고요한 서정의 시(해방 전후의 시기), ⑥현실 참여 및 사회 비판시(사회적 변동의 시기)(오세영, ‘조지훈의 문학사적 위치’, 조지훈, 최승호 편, 새미, 2003, 45면)로 나뉘어진다.이 중에서 경북이 문학적 대상이 된 때는 암흑기에 해당하는 일제 말기이다. 월정사에서 나온 조지훈은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사업을 돕다가 회원 전원이 검거되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일제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우리 민족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는 조선어학회를 가혹하게 다루었고, 조지훈은 간신히 검거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 무렵을, 조지훈은 ‘나의 역정’(고대문화, 1955.12.5.)에서 성지순례와도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다녀오거나 여러 곳을 방랑한 시기라고 회고하였다. 경주 순례와 낙향 중의 방랑시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芭蕉雨’, ‘落花 1’, ‘落花 2’, ‘靜夜 1’, ‘靜夜 2’, ‘枯木’, ‘落葉’, ‘玩花衫’, ‘鷄林哀唱’, ‘倚樓吹笛’, ‘北關行 1’, ‘北關行 2’, ‘送行 1’, ‘送行 2’, ‘밤길’ 등을 들 수 있다.조지훈이 1942년 봄에 경주로 박목월을 방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둘의 만남은 이후 청록파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단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조지훈은 보름 정도 경주의 곳곳을 방문했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한 것이 바로 ‘鷄林哀唱’이다.鷄林哀唱임오년 이른봄 내 불현듯 徐羅伐이 그리워 飄然히 慶州에 오니 복사꽃 대숲에 철아닌 봄눈이 뿌리는 四月일네라. 보름 동안을 옛터에 두루 놀 제 鷄林에서 이 한首를 얻으니 대개 麻衣太子의 魂으로 더불어 같은 韻을밟음이라, 弔古傷今의 하염없는 歎息일진저!1보리이랑 우거진 골 구으는 조각돌에서라벌 즈믄해의 水晶하늘이 걸리었다무너진 石塔우에 흰구름이 걸리었다새소리 바람소리도 찬돌에 감기었다잔띄우던 구비물에 떨어지는 복사꽃잎玉笛소리 끊인골에 흐느끼는 저풀피리비가오나 눈이오나 瞻星臺 위에 서서하늘을 우러르는 나의 넋이여!2사람가고 臺는 비어 봄풀만 푸르른데풀밭 속 주추조차 비바람에 스러졌다돌도 가는구나 구름과 같으온가사람도 가는구나 풀잎과 같으온가저녁놀 곱게 타는 이 들녘에끊쳤다 이어지는 여울물 소리무성한 찔레숲에 피를 흘리며울어라 울어라 새여 내설움에 울어라 새여!계림은 경주의 옛 이름이다. 시인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의 혼으로 이 시를 쓰고 있다. 마의태자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로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통곡하며 금강산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시인 역시 마의태자와 같은 망국민으로서 그 찬란한 신라의 유적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과 서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경주를 노래한 시 중에 조지훈의 ‘계림애창’ 만큼 애상적인 시는 드물 것이다.이 무렵에 발표된 15편의 시에는 슬픔과 상실감과 좌절의 정서가 가득하다. 특히 그것은 떨어지는 꽃이나 잎의 이미지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낙화), “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완화삼), “하나 둘 굴르는/落葉을 따라”(낙엽), “꽃 지는 소리/하도 가늘어”(낙화 2), “소리 없이 떨어지는/은행 잎/하나”(정야 1), “한두 개 남았던 은행잎도 간밤에 다 떨리고”(정야 2), “기울은 울타리에 호박꽃이 떨어진다”(북관행 1), “자욱히 꽃잎이 흩날리노라”(송행 1)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꽃이나 잎은 생명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꽃이나 잎이 떨어지고 죽어가는 상황은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져가던 일제 말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한다.또한 “달빛 아래 고요히/흔들리며 가노니……”(완화삼), “이 밤을 어디메서/쉬리라던고”(파초우), “나그네는 홀로 가고/별이 새로 돋는다”(고목), “산골 주막방 이미 불을 끈 지 오랜 방에서”(정야 2) 등에 나타나는 정처 없는 방랑자의 이미지 역시 조국과 자연을 상실한 식민지인의 자기 표상에 해당한다. 어떤 경우에는 망국민의 슬픔을 “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낙화)라고 직접적으로 표출하거나, “산새가 구슬피/우름 운다”(완화삼), “鶴이 운다/사슴도 운다”(의루취적), “산길 七十里를 뻐꾸기가 우짖는다”(북관행 2)처럼 주변의 동물에 의탁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조지훈의 경주 순례와 낙향 중의 방랑시편은 누구보다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했던 시인이, 일제 말기에 경험한 그 참담한 아픔을 고전적인 미적 기율에 바탕해 표현한 우리 현대시의 소중한 얼굴이다.작가 조지훈은…1920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동탁(東卓). 어린 시절엔 한학을 익혔고, 중학교 과정을 독학했다. 혜화전문학교 졸업 후 ‘문장(文章)’을 통해 등단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한 우아하고 섬세한 시로 유명하다. 경기여고와 고려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0년대 후반엔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4-20

서정주 “목월은 남방적 향토정서를 표현한 최고의 시인”

한국근대시사에서 방언(方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백석(1912-1996)을 들 수 있다. ‘여우난골族’(1935)과 같은 작품은 “명절만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엄매’, ‘아배’, ‘진할머니’, ‘진할아버지’는 모두 백석이 나고 자란 평안북도 정주 지방의 방언이다. 백석은 방언의 전면적인 사용을 통하여 개체 차원은 물론이고 민족 차원의 시원(始原)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던 독특한 개성의 시인이다. 백석과 더불어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시인으로 김소월(1902-1934)을 들 수 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김소월이 남긴 230여 편의 시에는 방언 내지 방언에 준하는 말들이 80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김용직, ‘방언과 한국문학’, 문학과 방언, 역락, 2001) 김소월은 방언을 통해 독특한 시의 리듬을 창출하고 민족적 정서를 노래하는데 성공한 민족시인이다.이와 관련하여 시인 정지용(1902-1950)이 1940년 9월에 박목월을 문단에 추천하면서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박목월이가 날 만한다. 소월의 툭툭 불거지는 朔州龜城調(삭주구성조)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 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시선후기’, 문장, 1940.9)는 추천사를 남긴 것은 주목할 만하다. 김소월이 그러했던 것처럼, 박목월 역시 방언의 적극적인 사용을 통해 향토적 서정과 전통적 가락을 창조하는데 성공한 시인이기 때문이다.서정주가 박목월을 일컬어 “남방적 향토정서를 표현”(한국의 현대시, 일지사, 1969)한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한 것처럼, 박목월은 가장 향토성이 강한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오세영은 이러한 향토정서를 구현하는 수단으로써, 박목월이 “향토에 대한 서경적 묘사”, “향토적 삶의 소도구”, “경상도 방언”을 활용했다고 말한다.(오세영, ‘박목월론’, 현대시의 실천비평, 이우출판사, 1983) 이러한 향토성을 구현하는데 모어이자 토박이말인 방언이 활용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본래 방언은 서민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언어로서, 지역성과 현장성을 진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방언이 많이 사용된 박목월의 대표적인 시로는 ‘아가’, ‘눌담’, ‘산그늘’, ‘목단 여정’, ‘한정’, ‘낙랑공주’, ‘진주행’, ‘적막한 식욕’, ‘치모’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시에 나타난 영남 방언으로는 “상기(늘)”, “해으름(해거름)”, “고누는(겨누는)” 등의 단어와 “아인기요”나 “안는기요”와 같은 종결형 어미가 꼽힌다. (이상규, 방언의 미학, 살림, 2007) 이 중에서도 ‘사투리’는 제목처럼, 박목월에게 사투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사투리우리 고장에서는오빠를오라베라 했다.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오오라베 부르면나는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나는 머루처럼 透明한밤하늘을 사랑했다.그리고 오디가 샛까만뽕나무를 사랑했다.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이슬마꽃 같은 것을……그런 것은나무나 하늘이나 꽃이기보다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참말로경상도 사투리에는약간 풀냄새가 난다.약간 이슬냄새가 난다.그리고 입안이 마르는黃土흙 타는 냄새가 난다.-‘난(蘭). 기타’(신구문화사, 1959)이 시에서 사투리는 언어 이전에 생명 그 자체이다. 언어가 천연색(天然色)의 입체를 흑백의 평면으로 바꾸는 것이라면, 사투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미메시스(mimesis)하는 경이로운 수단이다. 그렇기에 “경상도 사투리”에는 풀냄새와 이슬냄새와 입안을 마르게 하는 황토흙 타는 냄새까지 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실감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기에, 소녀가 시인을 “오빠”가 아닌 “오오라베”라고 불러줄 때, 시인은 “앞이 콱 막히도록 좋”은 것이 아니라 “앞이 칵 막히도록 좋”다. 시인이 사랑하는 나무나 하늘이나 꽃은 “내 고장의 그 사투리”로만 표현이 가능하며, 그렇기에 시인이 “내 고장”과 “내 고장의 자연”과 그리고 “내 고장의 사람”에 다가가는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사투리일 수밖에 없다.시인이 추구한 방언의 미학이 꽃을 피우는 것은 ‘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의 대부분에는 영남 방언이 적극적으로 구사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만술아비의 축문’은 자연스러운 시적 리듬과 방언의 능숙한 구사를 통하여 한국인의 심성 깊숙한 곳에 담겨진 인생 철학을 보여주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萬術 아비의 祝文아베요 아베요내 눈이 티눈인 걸아베도 알지러요.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축문이 당한기요.눌러 눌러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윤사월 보리고개아베도 알지러요.간고등어 한손이믄아베 소원 풀어드리련만저승길 배고플라요소금에 밥이나마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여보게 萬術 아비니 정성이 엄첩다.이승 저승 다 다녀도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亡靈도 感應하여, 되돌아가는저승길에니 정성 느껴느껴 세상에는굵은 밤이슬이 온다.-‘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전통 사회에서 축문(祝文)은 가장 엄숙한 언어의 형식이다. 그것은 유교 사회에서 신(조상신)을 섬기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술은 그러한 권위를 뒷받침할 지식(“낸 눈이 티눈”)도 능력(“등잔불도 없는”)도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죽은 아버지 배고프지 말라고 소금밥이나마 꾹꾹 눌러 담는 정성 뿐이다. 그런데 2연에서는 이 정성이 기적을 일으킨다. 죽은 아버지는 만술의 정성에 감동해서(“엄첩다”) 감응을 하는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마음뿐인 만술의 정성은 이승과 저승을 건너뛰고, 결국에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까지도 넘나든다. 이 거룩한 사투리 축문이 읽히는 고요한 밤에, 세상에는 감응의 증표인 “굵은 밤이슬”이 오는 것이다. 만술과 죽은 아버지, 이승과 저승,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벽이 허물어지는 이 장엄한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방언 이외의 다른 말을 떠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1960-70년대 박목월의 시에서 방언의 사용이 늘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던 시세계가 일상적 삶을 대상으로 하는 시세계로 변모하면서 발생한 현상으로 이해하고는 하였다. 이와 관련해 방언과 방언을 낳은 표준어의 간략한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표준어는 19세기 서양에서 발생한 국가주의 시대의 산물로서, 국민의 의사 전달 수단을 통일하여 국가적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의 경우 ‘서울말’을 중심으로 한 표준어 개념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처음 도입되었고, 1930년대에는 조선어학회의 주도로 표준어 사정(査定)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 결과물이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으로서, 이 책은 표준어를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정의하고, 6천111개의 단어를 표준어로 선정하였다.(정승철, 방언의 발견, 창비, 2018) 한국사회는 광복 이후에도 표준어를 정책적으로 채택하였고,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력하게 표준어 정책을 추진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방언은 소멸되어야 할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어 교정과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다. 이것은 중앙집권적인 사회 체제의 심화현상과도 맞물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향토를 사랑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정서와 가락으로 시를 썼던 박목월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방언이 지닌 미학과 가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일제 말기 박목월이 ‘환상의 지도’에서 아름다움을 구현하며 광기의 시대를 건너려 했다면, 효율을 최우선시하며 모든 것이 표준화 되는 산업화 시대에는 ‘향토의 언어’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삶의 진실을 건져 올리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술의 그 갸륵한 마음이 담긴 방언이 무지와 차별의 표시가 아니라 개성과 존엄의 표시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시인의 꿈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간직해야 할 꿈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4-13

경주라는 헤테로토피아가 있었기에 창조된 유토피아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에 당시 조선문단을 대표하던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 한효, 한설야, 임화, 이기영, 김사량이 봉황각이란 중국요리집에 모인다. 친일에 대한 문인의 자기 비판이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이다. 이 자리에서는 지금도 음미할 만한 여러 논점들이 제시된다.이태준은 8.15 이전에 가장 위협을 느낀 것은 “문학보다 문화요 문화보다 다시 언어”였다면서, 조선어가 말살되는 상황에서 일본어로 글을 쓴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펼친다. 이태준의 이 발언은 이 자리에 모인 문인 중에서 일본어 소설 ‘빛 속으로(光の中に)’(문예수도, 1939.10)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까지 올랐던 김사량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일제 말기 조선의용군의 중심지인 태항산으로 탈출하여 항일활동을 벌인 김사량은 문화인이란 “이보 퇴각 일본 전진”의 자세로 싸우는 자이며,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가 논의될 문제”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심중에는 일본어 글쓰기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는지, 일제 말기 문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붓을 표면에서는 꺾었으나 그래도 골방 속으로 책상을 가지고 들어가 그냥 끊임없이 창작의 붓을 들었던 이”를 제시하며, 그런 문인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앞에 모자를 벗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문학자의 자기 비판’, 인민문학, 1946.2)라고 덧붙인다.사용이 금지된 조선어로, 그것도 발표를 기약할 수도 없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결단코 범인(凡人)이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서는 다행히도 조선어가 사라지고 일제에의 맹목적인 복종만이 요구되는 시대에도, 소중한 조선어로 우리의 삶과 자연을 노래한 문인들이 있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박목월(1916-1978)도 바로 그 자랑스러운 얼굴 중의 하나이다.윤석중(1911-2003)은 ‘어린이날 노래’, ‘퐁당 퐁당’, ‘고추 먹고 맴맴’ 등 약 1200편의 동시를 발표한 한국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이다. 그는 1940년대 도쿄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을 맞아 서울로 가는 길에 경주에 있는 박목월을 방문한다. 운석중은 1930년대 잡지 ‘어린이’, ‘소년중앙’, ‘소년조선일보’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동요작가인 박목월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박목월은 중학교 3학년이던 1932년부터 동요를 투고하다가, 1933년 6월 ‘신가정’에 ‘제비맞이’가 현상 당선되면서 정식으로 등단한 동요 시인이었다. 동요 시인으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목월(木月)이라는 필명 대신 본명 영종(泳鍾)을 사용하였다.윤석중은 박목월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밤을 새워 동요이야기를 하다가 “발표할 데도 없고, 불러 줄 아이도 없는 노래를 자꾸 지어서는 무얼 하누…”라고 탄식한다. 그 말을 듣자 박목월은 정색을 하면서 땅을 파고 묻어 두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윤석중, ‘목월과의 사귐’, 박목월, 순한 눈망울을 스쳐간 인연들의 회상록, 국학자료원, 2008, 35면) 이 당시 박목월은 실제로 주옥같은 시를 우리말로 써서 해방의 날까지 땅에 파묻어 두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록집’에 수록된 15편의 명시들이다.1916년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 571번지에서 태어나 자란 박목월은, 해방 이전까지 경주의 품 안에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산문 ‘나와 청록집(靑鹿集) 시절’에서 박목월은 문학청년 시절 경주에서 문학에 뜻을 둔 친구는 김동리, 이기현 등이 있었지만, 어울릴 기회는 많지 않아 “나는 늘 혼자였다.”며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古都)의 산천과 하늘뿐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경주의 동부금융조합 서기 일이 끝나면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경주에서 꽃 같은 젊음을 보내며, 왕릉에 누워서 달을 보거나 오래된 기와 조각을 툭툭 차면서 길을 걷는 박목월의 모습이 손에 잡히듯 생생하다. ‘청록집’은 “이 풀 길 없는 고독이 안으로 응결”(박목월, 문학사상사, 2007, 271면)되어 탄생한 것이다. ‘청록집’에 수록된 15편의 작품 중에서 ‘춘일(春日)’은 직접적으로 경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춘일(春日)여기는 慶州新羅千年……타는 노을아지랑이 아른대는머언 길을봄 하로 더딘 날꿈을 따라가며는石塔 한 채 돌아서鄕校 門 하나丹靑이 낡은 대로닫혀 있었다.‘춘일(春日)’은 교촌에 있는 향교가 배경이며, 열릴 듯 안타깝게 닫혀 있는 향교문과 ‘타는 노을’의 이미지를 통해서 천년 고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감추듯 드러낸 작품이다. 이러한 애수는 일제 말기라는 상황과 맞물려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는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일반적으로 박목월의 시세계는 크게 자연을 대상으로 한 초기 ‘청록집’(을유문화사, 1946), ‘산도화’(영웅출판사, 1955), 가족과 일상을 소재로 한 중기‘난(蘭)·기타’(신구문화사, 1959), ‘청담’(일조각, 1964), ‘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 존재의 근원을 탐구한 후기 ‘무순’(삼중당, 1976)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박목월에게는 경주를 소재로 한 작품이 ‘청록집’ 시절부터 말년에 해당하는 ‘무제(無題)’(심상, 1977.7)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나타난다. ‘불국사’, ‘선도산하’, ‘사향가’, ‘춘일’, ‘청운교’, ‘토함산’, ‘왕릉’, ‘보랑’, ‘무제’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으며, 이들 작품은 불국사, 선도산, 청운교, 토함산, 안압지, 석가탑 등의 명승고적을 박목월 식의 절제된 언어와 빼어난 음악성으로 표현한 가작(佳作)들이다. 특히 ‘사향가’는 경주가 시인에게 얼마나 신성한 곳인지를 잘 보여준다.경주는 시인이 사는 서울에서 하룻밤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서울과 경주는 “막막한 地域”과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해당할 정도로 대비적이다. 시인의 경주에 대한 동경은 점차 확대되어 서울과 경주는 “이승과 저승”에 해당하는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경주가 이토록 위대한 것은 이름난 곳이 많아서가 아니라 경주에 사는 사람들이 “千年을/한가락 微笑로 풀어버리고” 사는, “연꽃하늘 햇살속에/그렁저렁” 사는 위인들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의 삶을 “귀양온 영혼의/무서운 刑罰”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에게 경주는 어머니의 몸과도 같은 영원한 귀의처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곳은 마지막 연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현실에서는 도달가능한 곳이 아니다.한동안 박목월이 시로 표현한 자연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일테면 ‘나그네’의 “술 익은 마을마다/타는 저녁놀”이 피폐한 일제 말기의 조선 현실을 미화했다는 식의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충분한 반박이 있었으며, 현재는 ‘나그네’와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어둠의 극단에 이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 창조한 상상의 공간이자 미의 유토피아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박목월 자신도 일제 말기의 그 어둡고 불안한 시대에 푸근하게 은신할 수 있는 곳이 그리웠으나, 당시의 조국은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되바라진 땅이었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환상의 지도”(박목월, ‘구강산(九江山)의 청록(靑鹿)’, 박목월, 문학사상사, 2007, 316면)를 마련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사향가(思鄕歌)’에 나타난 그 절절한 향수를 떠올린다면, 박목월이 창조한 그 아름다운 ‘환상의 지도’는 분명 경주라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현실화된 유토피아)가 있었기에 창조된 유토피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작가 박목월은…본명은 영종(泳鍾). 경북 월성군(현재의 경주시)에서 태어나 유년기엔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1930년 대구 계성중학에 들어갔다. 그 시절부터 책 읽기와 습작에 몰두한다. 중학교 때 이미 빼어난 작문 솜씨를 인정받았다. 해방 이후엔 오래 교직에 있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고 수필 분야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아세아자유문학상과 대한민국문예상 수상자이기도 하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4-06

‘신과 인간이 결합된 등신불’은 ‘한국 인간주의’ 요체

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이다. 한국적인 특성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무녀도’ 등에서 보여준 우리 민족 고유의 무(巫)였다면, 다른 한 기둥은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문학적 형상화와 관련해서도 그가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경주는 불교 왕국이었던 신라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흔히 경주를 ‘담장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일컫는데, 그 박물관을 채우는 구체적인 세목은 대부분 불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한국인이라면 한번쯤 가본 적이 있는 불국사, 석굴암이나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곳곳에 아로새겨진 남산만 떠올려보아도 경주와 불교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불교가 경주에 남긴 무형의 정신자산도 대단한데,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수놓은 그 많은 대승고덕들의 주요 활동무대도 다름 아닌 경주이다.김동리는 불교에서 소재나 정신을 취해온 여러 작품을 남겼다.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등신불’(사상계, 1961.11)이다. 이 작품은 다솔사 소속의 광명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20대 중반 시절, 백형 범보와 만해 한용운이 나누는 소신공양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훗날 이를 토대로 완성해 낸 것이라고 한다. (김동리, ‘만해 선생과 등신불’, 나를 찾아서, 민음사, 1997)‘등신불’의 한복판에는 주인공 ‘내’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머문, 양자강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에 안치되어 있는 등신불(等身佛)이 있다.이 등신불은 당나라 때 소신공양(燒身供養-부처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을 한 스님 만적(萬寂)의 타다 굳어진 몸에 금물을 입힌 불상을 말한다. 만적(속명은 기·耆)은 어머니의 학대로 집을 나간 이복형 사신(謝信)을 찾아 나섰다가 스님이 되고, 나중에 소신공양까지 하게 된다. 만적이 몸을 태우던 날 여러 가지 신기하고 영험한 일이 일어나 새전(賽錢)이 쏟아지며, 이 돈으로 타다 남은 그의 몸에 금물을 입혀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등신불이다.‘나’는 등신불을 보고서는 아래턱을 덜덜덜 떨면서 “저건 부처님도 아니다! 불상도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의 큰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이유는 등신불이 너무도 인간적인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등신불은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한 여타의 불상과는 달리,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꽉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인간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이 등신불이 인간적인 속성만 지닌 것은 아니다. 금불각의 가부좌상은 고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어떠한 대각보다도 그렇게 영검이 많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자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적 특징과 신적인 특징이 혼합된 존재로 형상화된다.‘내’가 경험하는 충격은 대부분의 종교가 신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인 위계를 설정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신과 인간이 결합된 형상으로 드러난 등신불 앞에서 그토록 당황하는 것은 “습관화된 개념으로써는 도저히 부처님과 스님을 혼동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신과 인간이 결합된 등신불’은 김동리의 ‘한국 인간주의’라는 독특한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동리는 ‘한국문학과 한국 인간주의’(김동리 문학앨범, 웅진, 1995)에서 ‘한국 인간주의’가 근대 인간주의(르네상스 휴머니즘)를 발전시킨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중세 기독교의 신본주의(神本主義)에 대립하여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적극적인 반신적(反神的)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근대 인간주의는 무신론과 허무주의로 변모하여 급기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비극까지 낳았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신과 인간의 합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인간주의’를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의 ‘한국 인간주의’는 신과 인간의 합작인 동시에 신과 자연의 합작이어서 ‘신을 내포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테제(정립)로서의 신본주의에 안티테제(반정립)로 일어난 근대 인간주의가 진테제(종합)로 전개된 것”이 바로 ‘한국 인간주의’라는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등신불’은 김동리의 사상이 응축된 ‘한국 인간주의’의 상징이다. 이러한 ‘한국 인간주의’는 ‘무녀도’에도 나타난 대칭성의 사고와도 통한다. 동시에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으며 부분과 전체는 하나라는 대칭성의 사고는 불교의 핵심에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김동리의 문학은 불교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다.‘등신불’에서 만적이 등신불이 되어 가는 과정은 대칭성의 사고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적의 어머니는 ‘신과 인간’이나 ‘인간과 자연’의 융합은커녕 극단적으로 자기만을 내세우는 인물이다. 그녀는 일찍 남편을 여의자, 아들인 만적을 데리고 사구(謝仇)라는 사람과 재혼한다. 사구에게는 신(信)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씨 집의 재산을 탐낸 만적의 어머니는 신의 밥에 독약을 감춘다. 이 일로 신은 집을 나가고, 신을 찾아 나선 만적은 결국 출가를 하게 된 것이다.출가 이후에도 만적은 참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 만적은 자신을 거두어준 취뢰(吹7C5F) 스님이 열반하였을 때 그 은공을 갚기 위하여 처음 소신공양을 시도한다. 그러나 당대의 선지식인 운봉(雲峰) 선사는 “만적의 그릇(器)됨을 보고 더 수도를 계속”하라며 소신공양을 허락하지 않는다. 운봉 선사는 만적이 5년 동안 더 수행을 하고, 우연히 문둥병이 든 사신을 만나고 돌아온 후에야 소신공양을 허락한다. 사신을 만났을 때 만적은 자신의 염주를 벗어 사신의 목에 걸어주는데, 이 행동은 만적이 자기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한다.불교에서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보살(bodhisattva)은 대칭성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자이다. 순수한 증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금강반야경’에서는 “위대한 보살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이라는 세 가지 생각조차 떨쳐버리고 보시(布施)해야 한다.”라고 밝힌다. 처음 소신공양을 시도할 때, 만적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취뢰 스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소신공양을 원할 때는 그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고, 그렇기에 운봉 선사는 만적의 깨달음을 인가(印可)하는 차원에서 소신공양을 허락한 것이다.‘등신불’에서 ‘나’의 이야기와 만적의 이야기 사이에는 천년을 넘는 시간과 중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의 거리가 가로놓여 있다. 이러한 거리는 만적의 이야기를 마친 원혜(圓慧) 대사가 ‘나’를 향해 “자네 바른손 식지를 들어보게”라고 말함으로써 사라져버린다. ‘나’의 바른손 식지에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진기수(陳奇修)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고 살을 물어 뗀 상처가 남아 있다. ‘나’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진기수 씨를 만났을 때, 식지 끝을 물어 뜯어 거기서 나온 피로 ‘願免殺生 歸依佛恩’(원컨대 살생을 면하게 하옵시며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코자 하나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만적처럼 자신의 온목숨을 바친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피를 흘리면서까지 뭇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또 하나의 만적’이었던 것이다.김동리는 ‘한국 인간주의’에서 신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근대 인간주의가 극단화된 결과의 구체적 사례로 20세기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들고 있다. 이와 관련해 ‘등신불’의 배경이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1943년이고, ‘나’가 학병으로 끌려온 청년이라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전쟁이야말로 자타의 구별이 가장 선명해지는 무대이며, 이 무대에서 인간은 신(神)은 고사하고 하나의 사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쟁을 배경으로 했을 때, ‘신이 된 인간’ 혹은 ‘인간이 된 신’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등신불’ 이외에도 김동리는 “우주만상은 헤아리기 어렵고 인연 관계로 얽혀 있다는 화엄사상의 일면을 주제”(김동리, ‘불교와 나의 작품’, 소설문학, 1985.6)로 한 ‘까치소리’(현대문학, 1966.10)와 윤회 사상을 서사화 한 ‘눈 오는 오후’(월간중앙, 1969.4)와 ‘저승새’(한국문학, 1977.12) 등의 작품을 남겼다. 김동리의 문학에서 우리 고유의 무(巫)와 세계종교인 불교는 대칭성이라는 사고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조화롭게 어울린다.이러한 공존은 신라 이후 계속되어 온 한국의 종교적 다양성을 해명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30

가장 한국적인 그러므로 가장 세계적인 꿈을 꾸다

김동리(1913-1995)의 묘비에는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던 한국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거인 김동리와 평생을 교유하며 한국문학을 이끌었던 또 한 명의 거인 미당 서정주(1915-2000)이다. 함께 한 시간의 깊이와 최고 시인의 안목이 만난 결과인지는 몰라도, 이 묘비명만큼 김동리라는 인간과 문학을 요령 있게 압축해 놓은 글도 드물다.한국문학사에서 김동리는 많은 힘을 누렸던 문인이었다. 좌익의 내로라하는 맹장들에 맞서 순수문학을 옹호했던 김동리는 40대에 이미 한국문단의 원로였다. 1953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에 부임했고, 1954년에 41세의 나이로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예지 ‘현대문학’,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는 문단 조직, 후배 문인 양성, 발표 지면이라는 문학장의 핵심적인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이러한 문단권력자로서의 모습은 김동리의 당당한 실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를 넘나들며 신춘문예를 세 번이나 통과한 재사이다. 더군다나 그의 뒤에는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이름이 높았던 맏형 김정설(1897∼1966)이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힘의 근원에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비약하던 그의 작품이 존재했다.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고 불린다. 이것은 작가가 “우리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것, 혹은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무속과 나의 문학’, 월간문학, 1978.8)을 추구한 결과이다. 이러한 필생의 과업을 수행하기에 김동리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신라 천년 고도(古都)인 경주에서 나고 자랐던 것이다. 경주는 화랑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고유한 정신이 가장 많이 남겨져 있는 곳이다. 김동리는 자신의 정신은 물론이고 육신에까지 경주의 고유한 정신과 풍속을 깊이 새기며 성장하였다.‘巫女圖(무녀도)’(중앙, 1936.5)는 경주라는 신성한 자궁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요한 배경인 성건동은 일명 ‘무당촌’이라고 불릴 만큼 무당이 한 집 건너에 있는 무속 짙은 마을이었다. 김동리는 경주시 성건동 189번지(현재는 284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도 골목에 무당집이 많았다고 한다. 주인공 모화가 마지막에 굿을 하다 빠져 죽은 소는 예기소이다. 서천 변 금장대 절벽 밑에 있는 예기소는, 예기(기생)가 사람을 유혹하듯이 물이 사람을 유인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김정숙, ‘김동리 삶과 문학’, 집문당, 1996, 68-75면) 욱이가 처음 집을 떠나 머물렀다고 하는 기림사는 일제 시대 경주 지역의 14개 사찰을 관할하던 대사찰이었다.‘무녀도’는 작가의 출세작일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무척이나 아낀 작품이다. 이것은 ‘무녀도’가 장편 ‘을화’(1978)로 개작될 것까지 포함하여 무려 세 번이나 개작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무녀도’는 무당인 모화와 기독교인인 아들 욱이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신동으로 소문난 욱이는 공부를 하기 위해 아홉 살에 모화의 품을 떠났다가 약 10년 만에 ‘신약성서’를 들고 돌아온다. 이때부터 모화는 욱이를 “몹쓸 잡귀에 들린 것”으로 여기고, 욱이는 모화를 “사귀 들린 여인”으로 여기며 서로 갈등한다. 그 갈등은 점차 고조되다가 결국 모화가 욱이를 칼로 찌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모화와 욱이의 갈등에는 김동리의 유년기 체험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동리의 아버지 김임수는 자수성가한 당당한 인물이었는데 50세를 전후한 시기에는 그만 술로 인생을 탕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유교적 가풍에 젖은 아버지는 아내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아 둘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술을 가리켜 “마귀의 음식”이라고 하고, 술에 취한 아버지는 “예수 잡자, 너구리 잡자”라며 미친 듯 어머니에게 달려드는 일이 매일같이 펼쳐졌으니, 어린 김동리가 받았을 충격과 공포는 대단했을 것이다.(김윤식, ‘김동리와 그의 시대’, 민음사, 1995, 103-105면) 이러한 부모의 싸움은 어린 김동리의 내면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것이 ‘무녀도’에서 모화와 욱이의 종교적 갈등이라는 명작을 낳았다는 것이다.김동리에게는 이때의 어머니가 모화이자 욱이이고, 또한 아버지가 모화이자 욱이였을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 자와 배척하는 자라는 면에서 욱이는 어머니이고 모화는 아버지일테지만, 자신의 신앙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욱이가 아버지이고 모화는 어머니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핵심은 어린 김동리에게 무서움, 전율, 절망, 비분, 저주스러움을 전해준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처절한 싸움의 원체험이 ‘무녀도’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결국 욱이는 죽지만, 그의 노력으로 이 미개하고 낙후된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당이 서고 전도사가 들어온다. 대신 모화는 기독교를 믿게 된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다. 이 상황에서 모화는 일생일대의 시험에 나선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예기소에 몸을 던진 김씨 부인의 혼백을 건지는 굿을 함으로써, 자신의 영검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화는 김씨 부인의 혼백을 건지는데 실패하고, 대신 예기소 검푸른 물속으로 스스로 들어간다.모화와 욱이의 대결은 끝내 둘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둘의 승부는 욱이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도 있다. 욱이는 역사의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러했듯이, 죽음을 통해 그토록 자신이 꿈꾸던 복음의 전파라는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둘의 대결에서 패배자는 모화이고, 모화의 죽음은 소멸해 가는 세계에 대한 비극성을 보여준 것으로 규정하였다.그러나 과연 모화는 거대한 시대의 변화에 맞서 무력하게 패배한 비극의 주인공이기만 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작가 스스로 ‘무녀도’에 대해 말한 ‘신세대의 정신’(문장, 1940.2)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김동리는 ‘무녀도’의 모화가 보여준 무(巫)는 우리 민족 고유의 이념적 세계인 신선(神仙)관념의 발로이며, 신선의 이념은 “한(限) 있는 인간이 한(限)없는 자연에 융화(融和)”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동리는 민족의 고유한 정신인 신선 관념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연속성과 동일성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세계적인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1908-2009)가 말한 대칭성의 사고와도 상통한다. 대칭성의 사고에서에는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으며, 부분과 전체는 하나라는 직감만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할 뿐이다.이와 관련해 모화의 특징으로 만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화가 소통하고 교감하는 대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돼지, 고양이, 개구리, 지렁이, 고기, 나비, 감나무, 살구나무, 부지깽이, 항아리, 섬돌, 짚신, 대추나뭇가지, 제비, 구름, 바람, 불, 밥, 연, 바가지, 다래끼, 솥, 숟가락, 호롱불…”이 해당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녀와 서로 보고, 부르고 말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성내고 할 수 있는 이웃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화는 그 모든 것을 “님”이라 부른다.모화가 검푸른 예기소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춤과 물의 너울은 같은 박자 같은 율동으로 어우러지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고 표현된다. 어쩌면 모화는 단순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물이라는 대자연과 ‘같은 박자 같은 율동으로 어우러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우리 고유의 신선이 된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그녀는 죽음을 통해 만신(萬神)에서 신(神)이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만물을 영혼 있는 존재로 여기며, 그것과 융화되기를 갈망하는 정신. 이것은 근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미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지금 대구·경북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서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에볼라, 사스, 메르스에 이어지는 인수공통 감염병으로 살 곳을 잃은 야생동물이 인간과 접촉하면서 탄생한 재앙이라고 말한다. 인간만을 절대시하고 자연을 한갓 수단으로 여긴 결과, 자연의 보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정신의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제2, 제3의 코로나19는 언제든지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구리, 살구나무, 부지깽이마저도 영혼 있는 존재로 여겨 ‘님’이라 부르는 모화는, 어쩌면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얼굴인지도 모른다.1913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전통의 세계, 종교의 세계, 민속의 세계에 천착해 이를 바탕으로 빼어난 작품을 써낸 소설가”로 평가하고 있다. 대구 계성학교와 서울 경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35년엔 중앙일보, 이듬해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대표적인 우파 진영의 작가.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무녀도’ ‘등신불’ ‘황토기’ ‘사반의 십자가’ 등을 썼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23

‘애국부인전’ 조선의 잔다르크 탄생을 고대하다

장지연(1864-1920)은 한말의 유학자요 역사가이자 또한 언론인이며 문필가이고 애국독립사상가이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에 발표한 명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민족의 울분과 기개를 온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구한말을 대표하는 우국지사인 장지연은 경북 상주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으로 경북 상주군 동곽리에서 태어나 한학을 깊이 있게 배우며 성장하였다.황성신문, 시사총보, 해조신문, 경남일보 등의 언론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대한자강회’, ‘국채보상운동’의 사회단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지연의 모습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한때 소설을 창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는 단 한번 소설을 창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숭양산인(嵩陽山人)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애국부인전’(광학서포, 1907)이다. 이 때의 애국부인은 백년전쟁(1337년부터 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에서 활동한 프랑스의 잔다르크(Jeanne d‘Arc, 1412-1431)이다.흔히 개화기라고 불리는 19세기 후반부터 한일한방에까지 이르는 시기는 우리 민족에게 큰 위기이자 작은 기회의 시대였다. 이 시기 우리 민족의 절대적인 과제는 여러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과 전근대의 미몽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현실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이 이러한 시대정신에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개화기의 시대적 과제에 민감하게 반응한 소설로, 이인직 이해조 최찬식 등이 창작자였던 신소설과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이 창작자였던 역사전기소설을 들 수 있다. 신소설은 주로 반봉건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신소설을 대표하는 이인직의 ‘혈의 누’(1906)에서 부모를 잃은 일곱 살의 옥련은 문명개화라는 절대적 이념을 따라 평양에서 출발해 오사카를 거쳐 워싱턴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달려 나간다. 그 절대의 이념 앞에 조선이나 민족을 위한 자리는 놓여 있지 않다. 이에 반해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으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애국지사들이 창작한 역사전기소설은 주로 반제 독립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로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서사건국지’(1907), ‘이태리건국삼걸전’(1907), ‘애국부인전’(1907), ‘을지문덕’(1908), ‘이순신’(1908) 등을 들 수 있다.여기서 다루는 인물들은 모두 민족적 위기를 극복한 영웅들이다. 신채호가 ‘을지문덕’ 서문에서 “과거의 영웅을 그려 미래의 영웅을 불러온다.”는 영웅대망론을 제시한 것처럼, 역사전기소설은 과거의 영웅들을 통해 외세의 위협 앞에 놓인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은 잔다르크가 17세의 나이에 참여한 오를레앙 전투(1429)부터 영국에 의해 화형을 당할 때(1431)까지를 다루고 있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이 상호 작용하는 끊임없는 대화”(E.H.Carr)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란 그 시대정신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쓰여진다. 과거는 불변이며 미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역시도 현재의 관점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애국부인전’의 잔다르크도 시공의 머나먼 거리를 뛰어 넘어 장지연의 관점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잔 다르크이다.소녀의 몸으로 나라를 구하고 결국에는 화형까지 당한 잔 다르크처럼 극적인 삶을 산 인물도 드물다. 그 결과 잔다르크는 참으로 많은 관심을 받으며 다양한 얼굴로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하였다. 잔다르크를 대상으로 한 문학작품은 잔 다르크가 처형당한 직후부터 창작되었으며, 지금까지 그녀는 성녀, 신비주의자, 전사, 예언자 등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심지어 셰익스피어는 ‘헨리 6세’에서 잔다르크를 “파렴치한 마법사요 마녀”로 그리기도 했으며, 대표적인 계몽주의자인 볼테르는 “형편없는 시골 처녀에다 불쌍한 정신착란자”로 규정하였다. (헤르베르트 네네, ‘잔다르크’, 이은희 옮김, 한길사, 1998, 174-179면) 장지연이 ‘애국부인전’을 통해 재현한 잔다르크는 성녀도 마녀도 아닌 ‘국민의 역할을 다하는 애국자’이다.잔다르크가 활동한 시기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형성되기 수백년 전인 중세의 한복판이며, 잔다르크가 목숨을 내걸고 활동한 것은 자기가 속한 고향과 왕세자에 대한 연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국부인전’에 나타난 잔다르크의 모습은 민족지사이자 애국지사였던 장지연의 관점이 개입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프랑스에서도 잔다르크가 전투적 국가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1870년 이후이며,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모리스 바레스와 레옹 블루아는 증오심에 찬 자기들의 국수주의를 위해 잔 다르크의 이름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헤르베르트 네네, 앞의 책, 189면) ‘애국부인전’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로는 국가, 국민, 애국 등을 들 수 있다. 잔다르크는 출정을 말리는 부모님에게 “제 몸은 비록 여자이오나 어찌 법국의 백성이 아니리까. 국민된 책임을 다하여야 비로소 국민이라 이를지니”라고 말하고, 프랑스 장군 포다리고와의 대화에서 “우리 국민된 의무를 극진히 하여 법국 인민됨이 부끄럽지 않게 할 따름이요”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국민의 의리”, “국민된 자의 염치”, “법국의 동포 국민된 유지하신 제군들”, “국민된 한 분자의 의무”, “국민의 책임”, “국민을 위함” 등의 말이 계속 해서 등장한다.장지연의 민족주의적 문제의식은 매 회의 마지막에 작가가 덧붙인 논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2회에서는 우리 민족을 외세의 침략에서 구원한 양만춘, 을지문덕, 강감찬의 행적을 언급하며, “법국은 이때에 양만춘 을지문덕 강감찬 같은 충의 영웅이 뉘 있는고.”라는 논평을 마지막에 제시한다. 이것은 ‘애국부인전’의 잔다르크가 앞에서 언급한 영웅들과 같은 민족영웅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잔다르크에 투영된 장지연의 강렬한 민족의식은 한일합방 직후 일제가 ‘애국부인전’을 불허가출판물로 지정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개화기 역사전기소설에 호출된 영웅들은 대부분 남성들이었다.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은 프랑스혁명 당시 활약한 롤랑부인(Madame Roland, 1754-1793)의 일대기를 그린 ‘라란부인전’(1907)과 더불어 드물게 여성인물을 다룬 역사전기소설이다. ‘애국부인전’은 여성을 비하하고 국가 사업에서 소외시키는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가득하다. “어찌 남자만 나라를 위하여 사업하고 여자는 능히 나라를 위하여 사업하지 못할까. 하늘이 남녀를 내시매 이목구비와 사지백태는 다 일반이니 남녀가 평등이어늘 어찌 이같이 등분이 다를진대 여자는 무엇하려 내시리오.”라는 잔 다르크의 비판이나, “슬프다. 우리나라도 약안 같은 영웅호걸과 애국충의의 여자가 혹 있는가.”라는 작가의 논평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장지연은 이 작품을 읽은 여성들이 적극적인 애국활동에 나서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다. ‘애국부인전’이 여타의 역사전기소설과는 달리 순한글체로 발표된 것도 당시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을 주독자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이 시기 장지연은 여성들의 계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애국부인전’을 발표한 다음 해에 출간한 ‘여자독본’(1908)은 일종의 열전(列傳)으로서, 모범이 될 만한 동서양의 여성들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또한 장지연이 관여한 ‘가정잡지(家庭雜誌)’도 여성을 계몽하려는 의도의 여성잡지였다. ‘애국부인전’, ‘여자독본’, ‘가정잡지’는 모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여성교육”(배정상, 위암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연구, 현대문학의 연구 30집, 2006, 79면)을 위해 기획되었던 것이다. 유학을 기본적인 교양으로 익힌 장지연이 여성의 계몽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그러나 ‘애국부인전’을 공적 담론에서 소외된 부녀자만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한정짓는 것은, 이 작품의 담론효과를 좁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동시에 남성들에게도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의 딸로 태어난 17세의 어린 여성이 나라를 구한다는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조선 여성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주었을 테지만, 동시에 어린 여성보다는 나은 지위에 있는 가부장제의 남성들에게도 분발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지연이 이러한 효과를 다분히 의도한 대목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쟁터에 나가겠다는 잔다르크의 충성심에 감복한 아버지가 “너는 여자로서 애국하는 의리를 알거든 남자된 자야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오.”라고 한탄하거나, 잔 다르크의 연설을 들은 남성들이 “원수는 일개 연약한 여자로서 저러한 애국열심이 있거늘 우리들은 남자가 되어 대장부라 하면서 도리어 여자만 못하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오.”라고 스스로를 꾸짖는 대목 등이 그러하다.장지연이 그토록 원하던 조선의 잔다르크는 과연 얼마나 탄생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변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어두운 식민지의 하늘을 환하게 밝힌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훈장과 포상을 받은 여성 독립유공자만 수백 명에 이른다. 이 위대한 여성들을 잊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을 제대로 읽는 독법인지도 모른다.1864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필력 좋았던 언론인이자 계몽운동가로 유명하다. 을미사변 때는 의병들이 일어나기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각 지역에 발송했다. 1905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린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발표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체포되기도 했다. 교육 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를 만들었고, 경남일보사 주필 등으로 일했다. ‘유교연원’ ‘대한신지지’ 등의 책을 썼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16

우연히 만난 포항 바닷가자연의 아름다움에 살다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을 대표하는 세네카(BC 4년 추정-65년)는 “모든 예술은 자연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년-1890년)도 “자연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라. 그렇게 하는 게 예술을 더 깊게 이해하는 진정한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두 선인의 말은 해방 이후 한흑구 수필을 해명하는 나침반과도 같은 명언이다.해방 이후 한흑구는 월남하여 서울에서 미군정의 통역을 맡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1948년 경주로 여행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포항 바닷가에 들렀다가 그 아름다운 풍경에 반하여, 아예 그곳에 정착한다.(이강언·조두섭, ‘대구경북 근대문인연구’, 태학사, 1999, 295면) 포항에 정착한 이유가 보여주듯이, 이후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깊이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해방 이전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던 한흑구는 해방 이후에는 주로 수필에 자신의 창작열을 집중한다. 총 31편의 수필(한흑구 문학선집(민충환 엮음, 아시아, 2009)과 한흑구 문학선집Ⅱ(민충환 엮음, 아르코, 2012)에 수록된 수필의 합계) 중에서 해방 이후에 발표된 것은 24편인데, 이 수필들의 제목은 ‘닭 울음’, ‘나무’, ‘여름 단상’, ‘보리’, ‘눈’, ‘비가 옵니다’, ‘감’, ‘진달래’, ‘밤을 달리는 기차’, ‘새벽’, ‘길’, ‘제비’, ‘동해산문’, ‘한여름 대낮의 움직임과 고요’, ‘코스모스’, ‘석류’, ‘들 밖에 벼 향기 드높을 때’, ‘흙’, ‘노목을 우러러보며’, ‘낙엽과의 대화’, ‘봄이 오면’, ‘흰 목련’, ‘나의 필명의 유래’, ‘모란봉의 봄’이다. 이러한 제목들은 한흑구의 해방 이후 수필이 한두 편을 제외하고는 자연을 그 대상으로 삼았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자연을 대상으로 한 한흑구의 수필에는 예술적 감동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빼곡하다. 몇 가지만 꼽아보면, 비오는 날의 보리를 “보리 수염들이 파랗게 버티고 서서 은구슬 같은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비가 옵니다’, 1956)라고 표현하거나 나무들과 온갖 초목들을 “7색 무지개의 빛을 지닌, 하나의 커다란 옷”(‘감’, 1956)에 비유한 것을 들 수 있다.또한 봄의 샘물소리를 “마치 갓난애의 손가락같이 보드러운 감촉을 느끼게 하는 그 새맑은 소리”(‘봄이 오면’, 1975)라고 표현한 것도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작가가 자연과 짙은 교감을 나누었을 때만 탄생할 수 있는 것들이다.이 대목에서 필명 ‘흑구’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일제시대 ‘흑구’가 죽어도 변치 않는 애국심을 지닌 청년을 형상화한 것이었다면, 해방 이후 포항에 정착한 이후의 ‘흑구’는 한가롭게 동해 바다를 떠다니는 지족의 현인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필명의 유래’에도 마지막 부분에 유유자적하는 갈매기의 모습을 재미있게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조국의 광복을 찾은 뒤에, 검은 갈매기들이 사라호 태풍에 밀리어서 동해에까지 날아와 살게 되었”으며, 그들은 “제비와 같은 철새는 아닌지 그대로 남아서,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의 광복 뒤에 동해에 와서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검은 갈매기야말로 한흑구의 해방 이후 모습에 그대로 대응한다.해방기에 쓰여진 수필에는 해방 이전의 ‘흑구’와 포항 정착 이후의 ‘흑구’가 함께 나타난다. 식민지 시기 애국청년이었던 이력을 증명하듯이, 자연을 통해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처음 발표된 ‘닭 울음’(1946)에서는 닭 울음과, 해방 2주년의 국경일을 맞이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새로운 국가를 이룩하리라”는 희망으로 부르는 애국가를 연결시킨다. 이듬해에 발표된 ‘나무’(1947)도 “잎마다 잎마다 햇볕과 속삭이는 성장(盛裝)한 여인과 같은 나무”의 아름다움과 “성자(聖者)와 같은 나무”의 후덕함을 감각적이고 유려한 문장으로 찬미한다.동시에 미국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가 편지마다 썼던 “너는 십일홍(十日紅)의 들꽃이 되지 말고, 송림(松林)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라의 큰 재목(材木)이 되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한흑구의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보리’(1955)에서도 “모든 고초와 비명”을 견뎌낸, 그리하여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보리는 식민지와 전쟁을 이겨낸 우리 민족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킨다.인생의 말년에 창작된 수필에서는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검은 갈매기’ 한흑구의 모습이 보다 뚜렷해진다. ‘한여름 대낮의 움직임과 고요’(1971)에서는 “오늘과 같이 조용한 날엔 고요한 바다 위를 떠오르는 해가 보고 싶다”며 “송도(松島)의 다리를 건너고, 새로 심은 플라타너스들을 눈여겨보면서 영일만(迎日灣) 사장(沙場)”까지 걸어간다. ‘노목(老木)을 우러러보며’(1974)에서는 청하에 있는 보경사(寶鏡寺) 앞뜰에 앉아서, 하늘 높이 솟아오른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자연을 향한 외경심을 느낀다. ‘흰 목련’(1975)에서는 보경사에서 “두부장수의 손종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모양” 같기도 하고, “옥수수 이삭을 짜개서 펼친 듯한 모양” 같기도 한 목련에 취하기도 한다.그러나 한흑구의 자연을 대상으로 한 수필이 감각과 감상으로만 가득찬 음풍농월(吟風弄月)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주적 규모의 형이상학이 존재하니, 그것은 다름 아닌 생태주의이다. 생태주의(ecology)는 지구라는 생태계가 그 안의 모든 생명들이 분리될 수 없는 필연성으로 깊이 연결된 유기적 통일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자연을 인간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중심주의를 배격하고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로서 자연과 상호관계를 맺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동해산문’(1971)과 ‘흙’(1974)에는 생태주의의 기본 입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표현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동해산문’에는 “이 지구 위에서 인간이라는 동물들은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물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모든 다른 생물들도 흙과 물에서 살고, 또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 운명을 도피할 자는 이 지구 위에는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유기체로서의 지구를 강조한다. 또한 “깊고 넓은 볼륨 속에는 모든 생물들과 인간의 슬픈 역사가 고이 간직되어 있는” 바다에 비할 때, “나는 한낱 인생인 것이다”라고 하여 인간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준다. ‘흙’에서도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면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다른 모든 생물들이 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데, “이제 사람은 흙에 대한 애정을 잃어가”서 “지구의 피부와 살을 다 뜯어먹고, 긁어먹고, 자기의 한 몸뚱이를 영원히 담아서 쉬게 할 곳도 없는 슬픈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한탄한다.본래 생태주의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담보하고자 하는 시대적 열망에서 탄생한 사상이다. 한국 문학에서 생태주의적 문제의식이 본격화 된 것이 1990년대 이후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한흑구의 수필은 매우 선구적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흑구의 수필에서 생태주의적 입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기가 1970년대라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한국 전체는 물론이고, 그가 뿌리내리고 사는 포항이 거대한 산업도시로 변모한 시기이기 때문이다.한흑구의 포항 생활은 한 명의 문인으로서나 인간으로서 복된 시간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달관의 성자 한흑구도 어쩔 수 없는 아픔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향민으로서의 향수이다. 그동안 주목받은 적은 없지만, 그의 수필에는 실향민의 정서가 곳곳에 묻어난다. 봄을 맞아 꽃을 피운 진달래를 보며 “어릴 때에 보던 모란봉 위의 진달래”와 “영변 약산 동대의 진달래”(‘진달래’, 1957)를 떠올리며,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밤 열차에서 “죽어도 집에 가서 죽는다”며 퇴원을 한 노인을 보면서 “이북에 있는 나의 집을 한번 다시 머릿속으로 그려”(‘밤을 달리는 열차’, 1957)보는 식이다.이러한 향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생생해진다. 제비를 보며 “집과 고향은 자기가 난, 단 하나의 곳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도 그리워하는 것일까?”라며 “깊은 노스탤지어”(‘제비’, 1969)에 사로잡히고, 벼가 익어가는 계절을 맞이하여 자신의 유년기를 회고하며 “38 이북에 두고 온 내 고향과 어린 시절의 낭만과 꿈을 되찾을 길이 없다.”는 “설움”(‘들 밖에 벼 향기 드높을 때’, 1973)을 느낀다. 타계하기 일 년 전에 발표한 ‘모란봉의 봄’(1978)은 평양을 항공 촬영한 것처럼, 평양의 대표적인 명소가 생생하게 묘사된 수필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한흑구의 마음속에서는 금수산,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기자림 등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타계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작가의 영혼이나마 남과 북의 하늘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09

시대의 아픔 통찰한 탁월한 수필가이자 포항의 대표 문인

수필은 물론이고 시와 소설, 평론, 논문, 번역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한흑구(본명 한세광韓世光, 1909-1979)는 포항을 대표하는 문인이다. 태어난 곳은 평양이지만 1948년 포항으로 이주한 이후 1979년 별세할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포항에서 흐름회(1967), 포항문인협회(1970),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1979)를 창립하며 포항문학의 토대를 닦았다. 이를 기리는 많은 기념물이 포항에는 남아 있다. 청하 보경사 숲에는 한흑구 문학비가 1983년에 건립되었고, 2012년에는 호미곶 구만리에 한흑구 문학관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두 권의 ‘한흑구 문학선집’이 만들어져, 그의 문학적 자취를 찾아보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지침 역할을 해준다.포항에서 활동하던 무렵의 한흑구는 “온후하고 은둔적인 사색가”(서정주), “겸허와 달관으로 인생을 값있게 보내신 분”(수필가 빈남수), “겸허와 진실이 체질화된 사람”(손춘익)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평가는 동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 중 하나인 은자(隱者)를 떠올리게 한다. 한흑구는 부귀공명에 집착하여 자신의 지조와 생명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속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유유자적하는 갈매기와 명리를 초월한 한흑구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그러나 이 흑구(黑鷗·검은 갈매기)라는 필명이 만들어진 계기는 낭만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필명에는 조국 잃은 청년의 짙은 슬픔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인한 신념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청년 한세광이 1929년 3월 대양환(大洋丸: 2만 톤급의 여객선)을 타고 아버지 한승곤이 있는 미국으로 갈 때, 검은색 갈매기 하나가 일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고 한다. 한흑구는 그 검은 갈매기와 자신의 모습이 두 가지 측면에서 같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옛 길을 버리고 새 대륙(大陸)을 찾아서 대양(大洋)을 건”너는 개척자적인 모습이고, 두 번째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는 유랑민의 모습이다. 흑구라는 필명에는 당시로는 드물게 시카고의 노스파크대학(North Park College)과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Temple University)에서 각각 영문학과 신문학을 공부한 선구자의 자부심과 조국을 잃어버린 식민지인의 비애가 담겨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흑구의 흑에는 “외로운 색, 어느 색에도 물이 들지 않는 굳센 색, 죽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부표(符表)의 색이라는 생각에서 ‘흑(黑)’자를 택하기로 했다.”(나의 필명의 유래, ‘월간문학’, 1972.6)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변치 않는 애국심과 지조가 아로새겨져 있다.해방 이전 한흑구는 필명 흑구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열혈청년이었다. 한흑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한승곤 목사를 빼놓을 수 없다. 기독교적 민족주의자인 한승곤은 미국에 간 지 3년만인 1919년에 흥사단 본부 의사장에 선임될 정도로 흥사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흑구도 미국에서 1930년 3월 흥사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으며, 1934년 귀국한 이후에도 평양에서 동우회 활동을 이어갔다. (한흑구의 흥사단 활동에 대해서는 한명수의 ‘한흑구는 민족시인이다’(포항문학 46호, 2019)를 참고)일제 시기 민족운동은 크게 무장투쟁론과 실력양성론으로 나눠볼 수 있다. 무장투쟁론을 대표하는 이는 단재 신채호이며, “부지깽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는 명제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은 의열단의 투쟁 선언문으로 작성한 ‘조선혁명선언’(1923)에 잘 나타나 있다. 실력양성론은 조선이 식민지가 된 이유를 실력의 부족에서 찾고,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다방면에 걸친 민족계몽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실력양성론을 대표하는 이가 도산 안창호이며, 그의 사상을 실천하는 단체가 바로 흥사단이다. 한흑구가 도산의 사상에 연결되어 있음은 도산의 체포 소식을 듣고 지은 ‘잡혀간 님-도산 선생님께 드림’(新韓民報, 1932.10.6.)이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벌써 벌써 주고 간 님의 뜨거운 맘-아! 나를 어찌 떠나리이까?”라고 절규하는 이 시는 한흑구에게 도산이 거의 육친화 된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1937년에는 아버지 한승곤 목사와 함께 흥사단의 후신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고통을 받는다. 이 때 일제는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180여명을 검거하였으며, 도산 안창호는 이 사건으로 사망한다.흥사단 이념에 충실하여 민족독립운동에 매진하던 한흑구의 모습은 일제 시기 창작된 수필에 잘 나타나 있다. 수양동우회(흥사단과 같은 계열의 단체)의 기관지인 ‘동광’에 발표된 ‘젊은 시절(時節)’(1933)은 세상에 당차게 맞서고자 하는 젊은이의 의기로 가득하다. 이 글에서 한흑구는 젊은이의 신조로 “사어이상(死於理想)!”을 내세운다.‘재미(在美) 6년간 추억 편편(片片)’(신인문학, 1936.3)은 제목처럼 미국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한 수필이다. 여러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정신은 이 시기 한흑구의 마음 속에 가득한 민족의식이다. 한흑구는 “영문으로 창작을 힘 쓰는 동안 조선문 창작이 퇴래(退來)할 것”을 걱정하면서 “영문 공부도 조선인적 태도”로서 할 것을 결심하기도 하고, “해외에 있을 때 조선인적 태도를 몰각하는 사람”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템플대학에 다닐 때 동양 학생 강연회에 조선 학생 연사로 나서, 5분간이나 연단에서 머리를 숙이고 침묵하는 장면에서는 나라 잃은 청년의 고뇌가 묵직하게 느껴진다.이 시기 한흑구는 미국 흑인들의 삶과 문학에 주목하는데, 이는 같은 피억압 인종으로서의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재미(在美) 6년간 추억 편편(片片)’에는 방랑 중에 남부 흑인들이 사는 촌락을 지나며 “흑인종은 무엇하려 낳나? 목화송이나 따려 낳지!”라는 구슬픈 노래를 들으며 발을 멈추는 모습이 등장한다. 한흑구는 10여 편의 소설을 창작했는데, ‘황혼의 비가’(백광, 1937.5)는 텍사스의 목화 농장에서 여전히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흑인들의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또한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동광, 1932.2) 등의 평론을 통해서 흑인문학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하였다.한흑구는 자신의 수필관이 담긴 ‘수필의 형식과 정신’(월간문학, 1971)에서 “수필은 하나의 산문시적인 정신으로써 창작되어야 할 것이며, 줄이면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수필의 예술성을 중요시하였다. ‘봄의 초조(焦燥)’(백광, 1937)는 일제 시기 수필 중에서 한흑구의 민족 의식과 예술적 형상화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명작이다.이 수필은 “봄이 오는 것이 반가운 한편 무섭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반가운 것이 “생의 신비와 충동과 초조”라는 단어들로 표현되는 봄의 가공할 생명력이라면, 무서운 것은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춘궁(春窮)의 고통이다. “겨우내 찬밥도 못 먹고 끼니를 굶던 젊은 색시는 늙은 부모와 그 지아비와 옷 벗은 빨가숭이 어린애를 버리고 눈물과 한숨의 겨울을 원망하며 꽃 피는 봄을 찾아 걸어보지도 못한 산길을 더듬어 도망”가는 것이다. 도망간 젊은 색시가 향하는 곳은 한반도 너머의 저 먼 곳이다. 그것은 “이렇듯 춘궁(春窮)의 한숨은 두만강을 넘고 춘궁의 눈물은 압록강을 넘는다.”는 시적인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심지어 생존의 고통에서 도망간 처녀는 “아지랑이 같이 엷은 처녀의 꿈은 도시의 항간(巷間)을 헤매고 혹은 버드나무 푸르게 서 있는 우물(井) 속에 잠겨 버린다.”라는 암시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의 어둠 속을 헤매거나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동포의 삶과 현실에 누구보다 민감한 한흑구에게 봄은 낭만과 도취의 대상이 아닌 초조함을 가져오는 잔혹한 현실(‘봄의 초조’)인 것이다.식민지 시기 한흑구는 참으로 단단한 정신과 해박한 지성으로 민족의 고단한 현실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통찰한 수필을 남겼다. 그것은 한흑구의 본래 성품에서 비롯된 바도 있겠지만,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이 서정보다는 지성을 긍정보다는 비판을 요구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의 아픔을 탁월한 수필로 승화시킨 한흑구는,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고고하게 떠올라 날카롭게 지상을 응시한 한 마리 검은 갈매기였던 것이다.본명은 세광(世光).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숭인상업학교와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했고,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포항 수산초급대학 교수를 지냈고, 수필가, 번역문학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수필 ‘젊은 시절’ 시 ‘북미 대륙 방랑시편’을 썼고, ‘어떤 젊은 예술가’ 등의 소설도 집필했다. 1948년 포항으로 거처를 옮겨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고, 담백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02

백신애, 규정된 ‘서발턴’을 거부하다

서발턴(하위주체, subaltern)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사용했던 것으로, 민족, 계급, 연령, 젠더(성), 직위 등 모든 측면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계층을 가리킨다. 그들은 민족적으로도 온갖 핍박을 받아야 하는 식민지인이고, 계급적으로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이며, 젠더적으로도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가부장제의 타자들이다. 백신애가 자신의 작품에서 즐겨 그리는 여성들이야말로 이러한 서발턴의 개념에 부합하는 존재들이다.백신애의 작품 중에서 남성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서너편에 불과하다. 작품의 양에 있어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작품의 수준도 높은 것들은 서발턴에 해당하는 가난한 농촌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복선이’, ‘채색교’, ‘소독부’, ‘광인일기’, ‘식인’, ‘적빈’ 등)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백신애가 나고 성장한 경북의 지역성과 작가의 체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우선 이들 작품을 채우는 언어부터가 경북의 것이다. 백신애 연구의 초석을 놓은 김윤식은 백신애를 가리켜 “무뚝뚝하고 인정머리 없는 경상도 방언에 저려 있는 사람”(백신애연구抄, ‘경산문학’ 2집, 1986)이라고 평하였다. 국어학자 김태엽은 논문 ‘백신애 소설에 나타나는 경북 방언’(‘우리말글’ 44집, 2009)을 통해 일제강점기 경북 방언의 흔적을 잘 나타낸 작가로 백신애를 들고 있다. 백신애 작품의 상당 부분은 거친 경북 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난한 촌민들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이러한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백신애 전집.백신애의 실제 농촌 체험도 무시할 수 없다. 백신애는 1936년 12월 반야월 괴전마을 과수원에 새 집을 지어 이사하고 직접 농사도 지으면서 농민들과도 마주했던 것이다. 수필 ‘과촌민들’(‘여성’, 1937.9)에서는 과수원을 경영하며 겪은 촌민들과의 일들을 기록하였다. “까다롭고 깍정이같이 밴질거리는 사람은 서울 놈이라 하고, 순박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촌놈이라고 하지마는 요지음의 촌사람도 여전히 순박하고 어리석은 줄만 알다가는 큰코다치기 쉽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수필에서 백신에는 촌민들의 불결함, 우둔함, 염치없음 등을 조근조근 펼쳐놓고 있다. 물론 “이들이 순박성을 일어버린 것은 너머나 남의게 속어만 오고, 없수임만 받어온 까닭”이라고 하여 그들을 이해하려는 태도도 보여주지만, 여타의 작가들이 자신의 이념이나 감상에 따라 농민을 이해한 것과는 달리, 백신애는 농민들의 삶을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서발턴을 등장시킨 대표적인 작품으로 ‘식인(食因)’(‘비판’, 1936.7)을 꼽을 수 있다. 주인공 옥남이 처한 상황은 가난은 가난이되, 작가의 또 다른 소설 제목과도 같은 완벽한 ‘적빈(赤貧)’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남편 최가가 아무것도 없는 옥남에게 돈 오전을 내놓으라고 막장의 욕설과 폭력을 퍼붓는 것으로 시작된다. 올해 스물아홉인 옥남은 지금 네 번째 임신을 하고 있는데, 앞의 아이들은 최가의 폭력으로 모두 죽었다. 해산이 임박한 옥남은 살기 위해 김문서의 농장으로 품을 팔러 간다.과거의 인연으로 인해, 김문서의 농장에서 품을 파는 것은 옥남이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고 싶은 일이다. 옥남과 같은 동네에서 자란 김문서는 아내를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옥남에게 청혼하였는데, 이 때 옥남은 김문서의 청을 거절하고 대신 “얌전한 총각”이었던 최가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김문서는 착실하게 일하며 재산이 불같이 일어났고, 최가는 “잔인하고 무도한 비인간”이 되고 말았다.그러나 살기 위해 옥남은 김문서의 농장에 가서 일을 하고, 허기에 지친 옥남은 밭에 나 있는 무를 허겁지겁 뽑아 먹다가 아이를 낳는다. “밭 가운데서 어린애를 더구나 사내애를 해산했으니 그 밭 임자에게 무한한 복이 올 징조”라는 미신으로 김문서 아내는 옥남을 도와준다. 그러나 해산한 지 팔일 만에 집에 돌아온 최가는 밥을 지어내라며 옥남과 아이를 걷어찬다. 결국 이번에도 아이는 죽고 만다. 작품은 며칠을 굶은 옥남이 동네 건물 상동식에 쓰려고 준비한 음식을 먹으려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죽는 것으로 끝난다.이처럼 옥남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존재이다. 그녀에게는 돈은커녕 당장 죽음을 면할 땟거리가 없다. 동시에 남편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욕과 폭력을 당하는 여성이며, 심지어는 같은 처지의 동네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 민족, 계급, 연령, 젠더, 직위 등 모든 측면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서발턴인 것이다.이 작품은 ‘여류 단편 걸작집’(1939)에 수록될 때에는 ‘호도(糊途)‘로 제목이 바뀐다. 제목이 바뀌는 것과 더불어 내용도 적지 않게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옥남의 비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남편은 옥남에게 하는 욕설이 아직도 모자라다는 듯이 “이런 빌어먹다가 얼음판에 가 자빠져 문둥 지랄병을 하다가 죽을 년아.”, “목탕목탕 썰어 죽일 년 같으니”, “사람을 잡아먹고 아이 새끼로 입가심 할 년”과 같은 말을 퍼붓는다. 또한 젠더적인 차별의식도 보다 선명하게 강화된다. 아이의 성별이 아들에서 딸로 바뀌었으며, 최가는 “계집아이는 낳아 머 한다고, 재수 없게 이년, 이까짓 것 먹일 것 있거든 내나 먹자.”라며 갓 태어난 아이를 때려 죽인다.또한 옥남이 너무나 허기가 져서 무를 뽑아 먹을 때, 주위 농민들이 “무를 그렇게 뽑아 먹으면 어째, 도둑년!”이라고 욕하는 장면이 첨가되었다. 반대로 부자인 김문서 집의 호의는 생략되었다. ‘식인’에서 김문서의 마누라는 자기 밭에서 해산한 것은 좋은 징조라 하여 쌀 한 되, 미역 한 묶음, 명태 다섯 마리를 보내고, 나중에는 밥해 먹을 솥이 없는 것을 알고 냄비와 나무까지 지여 하인을 보내 밥과 국을 끓여먹게 한다. ‘호도’에서는 이 모든 일이 “쌀 한 말을 가져다주었다.”는 한 문장으로 축소되었다.이러한 변화에는 ‘호도’가 창작될 때까지 3년 여 간 백신애가 경험한 일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백신애는 1938년 5월 남편과 별거를 시작하고, 같은 해 1938년 11월에는 정식으로 이혼한다. 이 무렵에 그녀는 오빠 백기호를 찾아 중국에 갔다가 칭따오와 상하이 등을 수개월간 여행하고 돌아온다. 이러한 일을 거치며 세상을 보는 그녀의 안목은 보다 깊어지고, 남녀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욱 예리해졌을 것이다.무엇보다도 ‘호도’의 마지막에 동네 공동 건물의 상동식에 사용할 음식에 입을 댔다가 옥남이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식인’에서는 옥남의 죽음이 암시만 되며 끝나는데, ‘호도’에서는 “그의 입을 가린 수건 사이에 콩나물 한 개가 걸려 있을 뿐. 그는 눈을 뜬 채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져 갔다.”고 구체적으로 묘사된다.이 때 ‘침묵’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람시가 처음 사용한 서발턴이라는 용어는 별로 언급되지 않다가 인도 출신의 탈식민주의 학자 스피박이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서발턴의 가장 큰 고통은 아무런 자산이나 능력도 없기에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발턴은 고작해야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 의해서만 자신들의 처지가 재현되고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 때 재현되고 해석되는 것은 ‘실제의 서발턴’이 아닌 재현하고 해석하는 이들의 의지와 욕망에 물든 ‘허구의 서발턴’일 가능성이 높다.일테면 누군가는 억압받는 식민지인으로만, 누군가는 가난한 자로만, 누군가는 힘없는 여성으로만 서발턴을 해석하거나 재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온갖 고통이 중첩되어 있는 서발턴이 그 어느 하나로만 해석된다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자 왜곡일 수밖에 없다. 서발턴은 억압받는 조선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민이며, 또한 집에 가서는 그 잘난 남편이나 아들을 돌보느라 허리가 휘는 여성인 것이다.백신애의 소설들이 더욱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러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백신애는 그 많은 고통을 짊어진 이들을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고, 함부로 특정한 맥락 속에 위치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호도’의 마지막에 표현된 옥남의 “영원한 침묵”은 그 어떤 담론이나 이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옥남의 고유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기 농민들을 형상화한 여타 소설과는 구별되는 백신애의 고유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성은 가족-사회, 전통-근대, 윤리-욕망, 공동체-개인, 중앙-지역, 남성-여성이라는 수많은 이분법 속에서도 끝내 자신만의 고유성을 유지하려고 한 백신애의 고투가 낳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24

전통과 모던의 이분법, 그 긴장을 끝끝내 감내하다

백신애는 영천의 작가이다. 문학평론가 서영인은 “백신애는 영천에서 태어나 영천에 묻혔고, 그녀의 문학 역시 영천에서 태어나고 발견되었으며 더 깊이, 새롭게 읽혔으니 백신애는 과연 영천의 작가이다.”(‘백신애 문학의 안과 밖’, 전망, 2018, 10면)라고 명쾌하게 규정하였다.이러한 백신애는 두 개의 ‘최초’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경북 최초의 여성 교사이자 최초의 여성 신춘문예 당선자인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범인이 흉내낼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반적인 선구자의 삶은 그녀의 것일 수 없었다. 백신애는 이광수와 같은 고아가 아니라 영천·대구 일대에서 소문난 갑부인 백내유의 외동딸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은 전통적인 가치와 인습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역이었다. 백신애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전통 사회의 각별한 보호와 관심 속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을 반영하여 그녀는 신식교육과 더불어 오랜 시간 한문학자인 이모부에게 한문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남녀차별이 극심한 사회의 여성이었기에, 그녀가 겪어야 할 심정 갈등은 더욱 컸을 것이다.백신애가 처한 환경에서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조차 축복이 될 수 없었다. 박화성, 장덕조,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 이선희와 자리를 함께 한 ‘여류작가 좌담회’에서 백신애는 거의 침묵을 지키다가 “글을 쓰면 당장에 축출을 하려는 아버지 아래엿고 놀면서도 여가 업는 터이라, 한 가지 무엇이나 쓰려고 하면 밤중 남들이 다- 잠든 후 이불 속에서 전등불을 감초아 원고지만 빛어 놋코 가만히 씁니다.”(‘여성’, 1936.2)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부덕(婦德)에 안주하기 백신애는 너무나 큰 개성이었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10대에 단신으로 상경하여 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시베리아·일본·중국을 드나들 정도로 백신애는 강하고 모던한 여성이었던 것이다.시대를 앞서가는 개인의 재능과 그것을 거부하는 사회적 환경이라는 굴레는 백신애를 문제적 인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문제적 성격은 그녀가 남긴 두 개의 대조적인 독사진에서도 확인된다. 20세 무렵에 찍은 사진은 전통적인 한복을 입고 곱게 머리를 빗어 넘긴 모습인데 반해 일본 체류 시절 찍은 사진은 화려한 양장을 차려 입고 도발적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가족/사회, 전통/근대, 윤리/욕망, 공동체/개인, 중앙/지역, 남성/여성이라는 수많은 이분법 속에서 백신애는 자신의 고유한 삶과 문학을 힘겹게 펼쳐 나간다.앞에서 열거한 여러 이분법에서 비롯된 갈등은 백신애 문학의 시작과 마지막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나의 어머니’(‘조선일보’, 1929.1.1.-6)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混冥에서’(‘조광’, 1939.5)는 이러한 갈등을 거의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두 작품은 22편(콩트·소년 소설 4편 포함)에 이르는 백신애의 소설 중에서 자전적인 성격을 갖는 예외적인 작품들이다.‘나의 어머니’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신식 여성인 ‘나’와 전통적인 가치관에 충실한 어머니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딸은 교원으로 근무하다 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하고, 지금은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하거나 책과 씨름을 하며 지낸다. 어머니는 이런 딸을 “언제든지 놀고 있는 것”으로만 여기며 늘 걱정한다.소설은 청년회의 문예부에 관여하는 ‘내’가 연극 준비를 하다가 한밤중에 귀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머니는 잠도 자지 않고 밤늦게까지 딸을 기다린다. 연극연습을 하다가 왔다는 딸의 말에, 어머니는 “아무리 상것의 소생이라도 계집애가 그런 데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니? 모이는 자식들이란 모두 제 아비 제 어미는 모른다 하고 사회니 지랄이니 하고 쫓아다니는 천하 상놈들만 벅적이는데”라며 나무란다. 이 말을 통해 어머니는 사회운동을 이해하지 못 하며, 특히나 “계집애”가 그런 바깥 활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면서부터 완고한 옛 도덕과 인습에 폭 쌓인 어머니”인 것이다.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확대해 볼 수 있다. 트레머리(신식 여성 헤어스타일)를 한 여인이 사오인에 불과한 이 “완고한 시골”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연극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부끄러워하거나 부모의 야단이 두려워서 연극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다.‘나의 어머니’는 자전적인 작품으로 이 당시 백신애의 신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백신애는 등단하기 이전에도 영천공립보통학교와 경산자인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영천청년동맹, 신간회 영천지회, 근우회 영천지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녀는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으며, 사회 변혁에 대한 관심이 큰 여성이기도 하였다. 작품 속의 ‘내’가 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백신애도 서울에 가 사회주의 여성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이 탄로나 학교에서 권고사직을 당한다. 또한 이 작품에 언급된 오빠의 모습도 실제에 부합한다. 어머니와 ‘나’의 가장 큰 근심은 XX사건으로 ‘나’의 오빠가 감옥에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백신애의 오빠인 백기호는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여간 옥살이를 하였다.보통의 혁명적인 서사라면 ‘나’는 당연히 이 고루한 어머니와 결별하고 역사의 새벽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경멸과 반감만큼이나 강렬하게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느낀다. 어머니가 “자신의 편함과 혈육(血肉)을 사랑하는 것 밖에 아모것도 모르고 도덕과 인습에 사모친” 인간이라 생각하면서도, 어머니가 오빠와 자기로 인해 받는 고통을 생각하며 가슴 쓰린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반감과 애정은 작품의 마지막에 압축되어 나타난다. ‘나’는 자신처럼 “불행과 저주에 헤매는 가난한 신세”인 장래의 남편이 될 연인이 있으면서도, 어머니가 결혼하기 원하는 김(金)가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에 “죄송함”을 느낀다. 그러나 바로 자신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김가에게도 이 몸을 바치지 않을 것”이고, 내일 밤에도 연극연습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가엽슨 나의 어머니.”라는 탄식으로 끝낸다. ‘나’는 가족과 사회 혹은 개인의 욕망과 전통의 윤리 중에 그 어느 곳에도 완전히 자신을 투신하지 못하는 것이다.이러한 갈등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백신애가 췌장암으로 경성제대병원에서 사망(1939년 6월 23일)하기 한 달 전에 발표된 ‘혼명에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나’는 “가족들의 정성을, 아니 그보다 어느 때든지 그들을 배반하고야 말 인간임을 확실히 자인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을 배반할 수 없으며, 나에게 이 고통을 주는 가족을 미워하여야 될 것이로대 그 반대로 지극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과 태도를 보여준다. 어머니로 대표되는 가족에 대한 이러한 사랑과 반감은 ‘나’의 결혼과 이혼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나’에게 결혼은 “내 주위의 억센 힘들이 재주끝 던저 올린 돌맹이!”처럼 억지스런 일에 해당하고, 이혼은 하늘로 던져진 돌맹이가 도로 땅 위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틀림없는 자연 법칙”에 해당한다. 이혼 이후에도 가족은 “이혼한 여자란 불명예를 회복시키”고자 근신할 것을 명하지만, 일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산(生)다는 뜻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눈물”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작품에서 ‘나’는 S를 통하여 “옛날의 용기와 정열”을 다시 가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다시 만나기로 한 S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러한 ‘나’의 의지와 신념의 지속 가능성이 다시 혼탁하고 어두워지며(混冥) 작품은 끝난다.시대를 뛰어넘는 의지와 재능을 지녔기에 늘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갈등하며 살아야 했던 백신애의 삶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을 옥죄던 수많은 이분법에 갇혀서도, 그녀는 결코 손쉬운 타협이나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끝끝내 그 두 가지 세계의 긴장과 갈등을 온전히 감내하고자 했던 그 정직함으로 인해 한국문학의 빛깔은 한층 다양해졌다.1906년 경북 영천읍 창구동에서 태어났다. 영천 공립보통학교와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서 공부했다. 경산 자인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상경해서는 조선여성동우회와 여자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고,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문학과 연극에 몰두한다. ‘복선이’ ‘채색교(彩色橋)’ ‘악부자(顎富者)’ ‘빈곤’ 등의 작품을 썼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17

죽음을 마주한 절대의 순간 유언처럼 피어난 詩 ‘광야’

지난번 연재에서 필자는 육사의 시 중에서 고향을 연상시키는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자야곡(子夜曲)’(문장, 1941.4),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를 ‘육사의 고향 3부작’으로 규정하였다. 이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자야곡’은 ‘청포도’와 거의 반대되는 이미지와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청포도가 흰색과 푸른색의 청신한 대비를 통하여 아름다운 고향과 자연의 법칙처럼 반드시 오고야 말 광복의 희망을 감미롭게 노래했다면, ‘자야곡’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희망의 밝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제목부터 생명의 푸른빛이 가득한 ‘청포도’에서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한 ‘자야곡’으로 바뀐 것이다. 자야곡은 자야(子夜)의 노래라는 뜻으로서, 자야는 자시(子時, 밤 11시부터 새벽 1시)인 한밤중을 의미한다. 또한 6연 12행으로 되어 있는 ‘자야곡’의 첫 번째 연과 마지막 연은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이다. 수만호는 빛이 아름답고 광택이 나는 석영의 하나인 수마노(水瑪瑙)를 의미하는데, 본래 고향은 그 아름다운 빛깔로 가득해야 하건만 지금은 그 빛은 바랄 수도 없고 노랑나비도 오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 결과 무덤 위에 죽음을 연상시키는 푸른빛을 지닌 이끼만 가득할 뿐이다. 시의 나머지 부분에도 “검은 꿈”, “짜운 소금”, “바람”, “눈보라”, “매운 술” 등의 표현이 고향의 암담하고 괴로운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청포도’로부터 ‘자야곡’까지는 고작 2년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토록 고향의 느낌은 달라진 것일까? 그 원인은 시대적 이유와 작가 개인 차원의 이유 두 가지를 모두 생각할 수 있다. 2년여의 시간 동안 일제의 탄압은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1939년 10월에는 국민징용령을 실시하였고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된다. 1940년 2월에는 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실시하였고, 8월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 당한다. 1941년 3월에는 초등학교 규정을 공포하여 조선어 학습을 전면적으로 폐지하였다. 바야흐로 일제는 조선인의 말과 성을 빼앗고, 황국신민화의 단계로까지 우리 민족을 내몰았던 것이다.누구보다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해왔던 이육사 개인에게도 이 시기는 고통과 비극이 점차 강화되는 시기였다. 1941년 이육사는 폐질환으로 경주의 옥룡암 등에서 요양을 해야 했으며, 가을에는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한다. 이 때 친동생처럼 가까이 지내던 시인 이병각이 이육사가 입원해 있는 성모병원에서 폐병으로 요절하는 아픔을 겪는다. 또한 이 해에는 유교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아버지 이가호가 별세하는 참극을 경험한다. 이러한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서 탄생한 시가 바로 ‘자야곡’이라고 할 수 있다.이후로도 이육사가 겪는 고난의 강도는 가파르게 상승한다. 1942년 6월에 어머니가 별세하고, 두 달 후에는 가장 역할을 하던 맏형 이원기마저 사망한 것이다. 의지할 가족은 사라지고 자신의 폐병도 극한에 이른 상황. 범부라면 자신 하나도 추스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육사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앞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간다. 1943년 4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조국 광복을 위해 홀연히 베이징으로 떠난 것이다. 역사학자 김희곤에 따르면, 이육사가 베이징에 간 것은 당시 중국지역 독립운동계의 양대 세력인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의 전선통일에 그가 일조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이육사의 중국행은 시인의 개인적 사정이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일종의 순국을 향한 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결국 그는 1944년 1월 16일에 베이징 감옥에서 짧지만 강렬한 삶을 마감한다. 그 죽음을 마주한 절대의 순간 유언처럼 창작한 시가 바로 ‘광야’이다.‘광야’는 ‘꽃’과 더불어 해방 이후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된 이육사의 유작이다. 이것은 마치 일제 말기 또 한 명의 저항시인이라 불리던 윤동주의 작품들이 해방 이후에야 유작의 형식으로 우리 민족의 품에 전달된 것과 비슷하다.이 작품은 광야(廣野)와 황야(荒野)의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고유한 시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시이다. 제목이기도 한 광야(曠野)는 “아득하게 넓은 벌판”과 “버려두어 거친 들판”이라는, 즉 신성한 땅이라는 광야(廣野)와 황폐한 땅이라는 황야(荒野)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육사는 다분히 이러한 중의성을 의식하면서 시적 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이 작품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질서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는데,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곳은 ‘광야(廣野)-황야(荒野)-광야(廣野)’로 변하는 것이다.과거에 이 땅은 닭 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며 그 강한 산맥조차 넘볼 수 없는 신성한 곳(廣野)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곳은 눈이 내리는 고난의 땅(荒野)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이 곳을 다시 신성한 곳(廣野)으로 되돌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그러한 도전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여전히 남아 있는 매화향기이다. 또한 이 매화향기는 이 시의 광야를 만주 대륙과 연결지어 바라본 그동안의 논의를 교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매화는 황해도 이남 지역에서 자라기 때문에 만주에서 매화를 발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홀로 아득한 매화향기를 통해 이 시에 등장하는 광야는 시인의 고향인 원촌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매화는 매서운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절의(節義)의 상징으로서, 조선 시대 선비들이 아끼던 꽃이다. 특히 이육사의 선조이기도 한 퇴계 이황은 매화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퇴계는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이 했으며, 죽기 직전에 시자를 시켜 매화에게 물을 주도록 했다고 한다. 이육사는 ‘전조기’(조선일보, 1938.3.2.)나 ‘은하수’(농업조선, 1940.10)와 같은 산문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집의 화단에도 옥매화, 분홍매화 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이러한 매화향기를 바탕으로 이육사는 이 땅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자 한다. ‘청포도’에서 손님은 자연의 순환질서처럼 반드시 올 존재이지만, 지금은 그러한 기다림을 뛰어넘는 필사의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투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이 땅은 초인이 오는 광야(廣野)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난과 시련이 심해질수록 더욱 강렬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저항하는 것은 오직 고매한 정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수많은 문인들은 일제 말기에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온갖 오욕의 난경을 보여주었다. 이육사는 그 어지러운 난무 속에서도 진정한 의로움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청포도’, ‘자야곡’, ‘광야’로 이어지는 이육사의 고향 3부작은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써내려간 양심의 기도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