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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그는 ‘저항’시인이자탁월한 저항 ‘시인’ 이었다

시인 이육사는…1904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綠). 보문의숙과 대구 교남학교에서 공부했다. 21세에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1933년경부터 ‘육사’란 필명으로 ‘황혼’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시를 발표한다. 민족적 불행을 겪던 일제강점기에 뜨거운 저항정신을 드러낸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사망했다.◇ 짧았지만 빛나는 삶, 이육사항일활동으로 체포되어 차가운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만큼 저항시인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문인은 없다. 39년 8개월에 불과한 그의 삶은 조국 독립을 향한 수많은 투쟁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널리 알려졌듯이 필명인 이육사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 사건에 피의자로 연루되어 대구 감옥에 수감 중일 때 붙여졌던 수인번호 ‘二六四’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이육사는 필명으로 소리가 같은 육사(肉瀉), 육사(戮史), 육사(陸史)를 함께 사용하다가 1935년 이후에는 육사(陸史)를 주로 사용하였다. 다양한 뜻의 ‘육사’라는 말에는 모두 강렬한 항일정신이 담겨 있다.그의 항일투쟁은 안동, 대구, 일본, 서울, 중국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국에서의 활동은 일본 중심의 다른 문인들과는 구별되는 이육사의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활동은 글과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총을 든 행동으로도 연결된 것이었다. 그는 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원이였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이기도 하였다.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 고난의 삶은 이육사의 맏형 이원기가 1931년 이영우에게 보낸 서신의 다음과 같은 절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활군(육사)이 옥살이하는 정황을 탐문해보니 고통이 보통이 아니고 감방에서 병들어 누웠다고 합니다. 그 위독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니, 이 왜놈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입니까?(중략) 이따위 세상에서는 비록 부처가 살아 있다 해도 막다른 길에서 통곡할 뿐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확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 생명을 부지한다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럽습니까? (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 창비, 2017, 295면)그렇다고 그를 ‘저항’시인으로만 보는 것은 육사의 삶과 문학에 대한 명백한 과소평가이다. 그는 ‘저항’시인이기도 하지만 저항‘시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산맥의 등뼈와도 같은 그 단단하고 매운 정신은 결코 날 것으로 시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육사의 시는 충분한 미적 단련과 숙고를 거친 후에야 탄생한 결과물이다. 이육사는 1930년대 한국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한 계급문학, 순수문학파, 모더니즘, 생명파 등의 어느 유형에도 귀속되지 않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시세계를 펼쳐 나갔다. 그는 깊이 있는 사상과 세련된 언어, 거기에 새로운 감각과 진중한 생명의식까지 한데 아우르는 풍요롭고도 독창적인 시를 창조한 것이다.그의 시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을 꼽자면 유교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선비정신과 미적 전통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갈고 닦여진 미적·인식적·윤리적 단련의 세례를 통해 이육사는 자신만의 고유한 인장을 한국현대시사에 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이육사는 조선의 유학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츨생 당시는 원촌동) 881번지에서 육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고향인 원촌(遠村)을 빼놓고 이육사와 그의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마을은 이황의 5세손이자 육사의 9대조가 터를 잡은 마을이다. 이곳은 주자학적 질서가 삶의 전체를 촘촘하게 이끌어가는 곳으로서, 이러한 특징을 이육사는 “내 동리란 곳은 겨우 한百餘戶나 되락마락한 곳 모두가 내 집안이 대대로 지켜온 이따에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엇습니다.”(‘季節의 五行’, ‘조선일보’, 1938.12.24.)라고 밝힌 바 있다. ‘무서운 규모’란 수백 년 동안 원촌을 지배한 유교적 삶의 질서를 의미한다.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말한 바도 있는 이육사도 이러한 원촌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며 성장하였다. 이육사는 ‘전조기(剪爪記)’(‘조선일보’, 1938.3.2.)에서 자신이 여섯 살 때 ‘소학’을 배웠으며, ‘은하수’(농업조선, 1940.10)에서는 7,8세쯤에는 한시를 짓고 십여 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계절의 오행’(‘조선일보’, 1938.12.24.)에서는 열다섯에 이미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道를 다 배웟다고 스스로 달떠”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수백 년 길러온 선비정신은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역사학자 김희곤에 따르면,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고, 가장 많은 독립유공포상자(2010년 기준 320여 명)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1910년을 전후하여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약 90명 가운데 10명)를 배출한 곳 역시 안동이라고 한다.(김희곤, ‘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251면) 그 중에서도 원촌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하계는 그러한 항일정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안의병장을 지냈으며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단식하여 순국한 이만도도 육사의 친척으로서 원촌과 당재라는 작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하계 출신이다. 이육사의 그 뜨거운 삶과 문학의 모태는 안동의 원촌과 그곳을 지배한 유교적 세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육사는 총 44편(시조 1편과 한시 3편 포함)의 시를 창작하였는데, 이 중에서 직접적으로 원촌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시는 없다. 그렇지만 간접적으로 시인의 고향을 연상시키는 시는 여러 편이 등장하며, 필자는 이 중에서도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자야곡(子夜曲)’(‘문장’, 1941.4),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를 ‘육사의 고향 3부작’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들 시에는 육사의 전통적인 고향의 분위기가 깊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펴보려고 하는 ‘청포도’는 시인 자신이 생전에 “가장 아끼는 작품”(김희곤, 앞의 책, 199면)으로 고백했다고 한다.청포도내 고장 칠월(七月)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청포도’는 흰 색과 푸른 색의 강렬한 대비를 통하여, “내 고장”의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한껏 고양시키고 있다. 이곳은 결코 욕되고 더러운 세력이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없는 성지인 것이다. 또한 육사는 엄혹한 일제 시절이지만 반드시 오고야 말 “손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손님이 온다는 사실은 마치 칠월이 되면 늘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과 같은 불변의 자연적 질서인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맑고 깨끗한 이곳에서 반드시 올 손님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준비일 뿐이다. 1939년이라는 일제 말기에 수많은 지사들마저 변절의 길을 가는 상황에서, 이육사는 자연의 법칙처럼 도래할 광복의 미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청포도’와 관련한 기념물은 이육사의 고향 원촌에 집중되어 있다. 1993년에 안동시 원촌리 생가 터에 세워진 시비에도 시 ‘청포도’가 새겨져 있으며, 2004년에 개관한 이육사문학관 앞에는 청포도샘이, 문학관에서 육사 묘에 이르는 구간에는 청포도 오솔길이 만들어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경북 포항에도 여러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호미곶과 동해면 면사무소 앞에는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옛날 미쯔와 포도원 인근에는 청포도 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육사가 김대청의 안내로 식민지 시기 거의 유일한 포도원이었던 포항의 미쯔와 포도원을 방문한 후에 영감을 얻어 ‘청포도’를 창작했다는 증언에 따른 것이다.‘청포도’의 배경을 안동의 원촌이나 포항의 포도원으로 한정짓는 것은 결코 본질적인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육사가 ‘청포도’에서 진정 말하고자 했던 ‘고장’과 ‘마을’은 그 어떤 불의의 세력으로부터도 훼손되지 않는 숭고한 공간이자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되찾고야 말 공간으로서의 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선에는 매운 선비정신을 담뿍 머금은 원촌은 물론이고, 참신한 포도송이로 생명력의 향취를 내뿜던 마쯔와 포도원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육사의 그 굴강한 정신이 있었기에 한국근대문학사는 부끄럽지 않은 내면의 당당함을 갖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03

현실비판이 강했던 작가는 왜 일본문단에 목말라 했을까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 문인으로 ‘청포도’와 ‘광야’의 시인 이육사의 오른편에 앉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이육사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할 때,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인터뷰를 한 문인이 있다. 조선일보 1932년 3월 29일자 기사에서 이육사는 그 작가의 응접실 겸 침실 겸용인 서재에 찾아가, “그의 눈은 리지에 타는 듯이 빗낫다(빛났다)”고 감탄하기도 하며 그에게 수필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이 날 이육사를 이토록 격동시킨 인터뷰이(interviewee)는 과연 누구였을까? 놀라지 마시라. 그는 다름 아닌 친일파로 일본과 조선에서 명성이 높았던 “조선 출신의 대일본제국의 작가 초 가쿠추”(시라카와 유타카, ‘장혁주 연구’, 동국대 출판부, 2009, 344면), 바로 장혁주(張赫宙)이다.그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대표적인 친일문인으로서, 본명은 장은중이고, 일본명은 노구치 미노루(野口稔)이며, 귀화 이후 필명은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였다. 장혁주는 일반인들에게는 잊힌 작가이지만, 엄청난 열정으로 수많은 작품을 써낸 일제 시기의 유명작가다. 등단하여 해방될 때까지 장혁주는 장편 15편을 포함한 소설 90여 편(조선어 작품 10여 편)을 발표하였으며, 단행본으로 30권 이상을 출판하였다.장혁주는 일본어 글쓰기가 극히 드물던 1930년에 일본어 작품을 일본잡지에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조선어보다 일본어로 훨씬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문단의 페스토균’(1935)을 통해서 조선 문인들을 실력도 없이 질투나 일삼는 무리들로 매도한 바 있는 그는, 1936년 여름부터는 아예 도쿄로 이주해 버린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1939)이라는 일본어 논설에서는 조선의 완전한 ‘내지화(일본화)’를 주장하며, 이를 위해 한국인의 단점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후에도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여러 활동과 ‘이와모토 지원병’(1943)과 같은 국책에 순응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던 그는 1952년에는 일본인으로 귀화해 사망할 때까지 창작활동을 이어갔다.이육사의 인터뷰는 이번에 다루려고 하는 장혁주의 ‘餓鬼道(아귀도)’(가이조, 1932.4.)와 관련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인터뷰는 ‘아귀도’가 수록된 ‘가이조’ 4월호가 “각 서점에서 짐을 풀자마자 전화가 빗발치듯 하고 나는 듯이 팔려 그 다음날부터 절품”이 되었을 정도로 큰 주목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이 무렵의 장혁주는 사회주의 문인으로서의 풍모를 풍긴다. 장혁주의 서재에는 프리체의 ‘예술사회학’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과학 서적이 꽂혀 있으며, 가장 친한 친구로는 경주에서 함께 청년운동을 한 박로아를 들고 있다. 또 다른 글에서 장혁주는 ‘아귀도’를 쓸 무렵에는 “구레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 이하의 프로문학제이론의 영향이 외부적으로 졸작을 움직이었다”(‘정독하는 양 대가’, 동아일보, 1935.7.11)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구레하라 고레히토는 NAPF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일본의 경향 작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비평가였다.장혁주만큼 많은 작품에서 경북 지방을 소설의 배경으로 그린 작가도 드물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내력에서 기인한다. 장혁주 연구의 권위자인 시라카와 유타카 교수에 따르면, 그는 1905년 대구에서 구 한국군 장교를 지낸 아버지와 술집 등을 경영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순탄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어린 시절부터 생모를 따라 경상도 지방을 전전해야 했다. 이후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청송국 안덕면립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립보통학교의 교원이 돼 1929년 봄까지 머문다.이때의 경험은 예천군 지보면을 배경으로 한 ‘아귀도’를 창작하는 원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장혁주는 ‘나의 修業時代(수업시대)’(동아일보, 1937.8.13.-15)에서 “예천(醴泉)의 산촌교원을 하면서 거기서의 체험을 기록했다”고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장혁주는 조선을 그린 대부분의 소설에서 경북 지역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주로 대구 경북 지방에만 머물다가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일본으로 이주한 장혁주에게는 대구 경북 지방이야말로 자신이 아는 조선의 전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장혁주의 등단작은 1930년 10월 ‘다이치니타쓰’에 발표한 일본어 소설 ‘白楊木(백양목)’이지만, 본격적으로 작가의 이름을 알린 것은 1932년 4월 ‘가이조(改造)’ 현상공모에 ‘아귀도’가 당선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아귀도’는 경북 예천 지보면을 배경으로 당대 조선의 농민들이 겪는 온갖 시련을 알뜰하게 모아 놓은 일종의 ‘고통 박물관’과도 같은 작품이다.이 작품은 제목이기도 한, ‘아귀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생존의 막장이 펼쳐진 작품이다. 불교에서 유래한 말인 아귀도는 중생이 머무는 여섯 개의 세계(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도, 천도) 중 하나로 이곳의 중생은 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움을 겪는다. 이 작품에서는 1930년대 경북의 농민들이 겪는 괴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단편의 분량 안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다양하게 담아 놓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의욕으로 인해 인물들은 뚜렷한 개성이나 심리도 없이 무한고통의 세계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일종의 중생 차원에서 그려질 뿐이다.농민들의 고통은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가뭄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저수지 공사장의 비인간적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소작농의 불합리한 생산조건이다. 공사장에서는 감독과 십장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농민들 몫으로 배정된 알량한 돈을 가로채고, 농민들을 마소 다루듯이 채찍으로 때리기도 한다. 마을의 아녀자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농사를 짓지만 수확을 해보아야 대부분을 지주에게 빼앗길 뿐이다. 이 와중에 가난과 빚을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하는 농민이 나오고, 풀즙이나 먹던 아이가 좁쌀을 급하게 먹어 급체로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칡을 캐러 갔던 부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 결국 인간 생존의 극한 상황에 몰린 농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단결하여 십장과 감독들에게 저항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이 작품은 식민지 조선 현실의 핍진한 재현의 차원을 넘어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실천적 전망을 담아내고자 하는 경향소설로서의 성격도 선명하다. 그것은 이러한 빈궁과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는 차원을 벗어나서 뚜렷한 저항의 모습까지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의 의식은 매우 선명한 것이어서, 이 작품의 도처에는 너무나 많은 복자(伏字, 검열을 통해 글자를 삭제하고 대신 X와 같은 기호로 표시한 것)로 인해 독해가 불가능한 부분도 여러 곳이다.장혁주는 초창기에 복자로 독해가 어려울 정도의 정치의식이 강렬한 작품을 주로 발표하지만, 이러한 정치의식은 점차 약화된다. 나중에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으로까지 변절한다. 이러한 변모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러한 비극은 작가 장혁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타자가 늘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아귀도’를 비롯한 경향소설에 가까운 작품을 쓰던 시기는 “일본 문단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침체기에 접어 들어가고 있어, 한국 작가의 ‘동반자문학’이 참신하게 보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장혁주는 이육사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일본 문단에 “조선의 사정을 한번 소개”하려는 것을 들고 있다.소설가 장혁주의 작품집.조선 농민에 대한 장혁주의 천착은 간절한 내적 고뇌와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문단의 인정에 목말라 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이 견뎌낼 수 없는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는 동물화 된 조선 농민의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흥미로운 이국적 소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상징적 아버지가 일본(좁게는 일본 문단, 넓게는 일제)인 장혁주이기에, 일본의 요구와 태도가 변화되어 감에 따라 그는 동반자 문학가에서 순수 문학가로, 다시 순수 문학가에서 국책 문학가로 몸을 바꿔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자신을 지탱시켜 나갈 상징적 아버지가 너무나도 미약한 정신적 고아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대 일본인 작가들이 장혁주를 겁이 많고 나약한 인물로 평가한 것도 한번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해방 이후 장혁주는 친일 행적으로 조국은 물론이고 재일조선인 사회로부터도 배척받았다. 그러나 1997년 별세할 때까지 창작활동은 계속 이어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말년에 영어로 소설 창작을 시도했고, 실제로 1991년 12월에는 ‘Forlorn Journey’라는 영문 장편소설을 출판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어 창작이 지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북의 벽촌에서 문학을 시작한 장혁주가 일본보다도 더욱 강력한 아버지를 영어(미국)에서 발견한 것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평생 자신을 옥죄던 한글과 일본어라는 굴레(한국과 일본)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을 꿈꿨던 것이었을까? 장혁주는 해방으로부터 수많은 날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한국문학의 정체와 양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소설가 장혁주는…1905년 대구 출생. 보통학교 교원 등으로 일하다가, 1932년 일본어로 쓴 소설 ‘아귀도’를 시작으로 본격적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사실감 있게 그려냄으로써 비판적 현실 인식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일본 문단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엔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무지개’, ‘삼곡선’, ‘여명기’, ‘인왕동시대’ 등이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1-27

‘쇠같은 뜨거운 오열의 노래’로 민족혼을 일깨우다

‘백조’ 동인으로 함께 활동한 박종화는 이상화의 등단작인 ‘말세의 희탄’에 대해, “강한 백열(白熱)된 쇠같이 뜨거운 오열(嗚咽)의 노래”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비단 그의 시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그의 몸 안에 흐르는 뜨거움이 없었다면, 42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 많은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문인을 넘어 사회활동가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3.1 운동을 비롯한 여러 독립활동에 참여하여 수감되기도 하였고, 신문사 총국을 운영하거나 교사로 재직하며 청년교육에 열과 성의를 바치기도 했다. 이상화의 열정적인 삶을 말하는데 있어 몇 번에 걸친 그의 뜨거운 연애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그의 문학적 업적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생전에 한 권의 시집도 출판하지 않았고 60여 편의 시를 남겼을 뿐이지만, 그는 한국시사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였다. 이상화는 한국 근대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며 병적 낭만주의의 시들을 발표하였다. 대표작 ‘나의 침실로’에는 3.1운동의 실패와 상징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비애와 절망, 퇴폐와 죽음의지 등이 격정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이후에는 파스큘라(PASKYULA)와 카프(KAPF) 등의 진보적 문인단체에서 활동하며 날카로운 사회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명시를 통해서는 미적 감동을 동반한 저항시를 발표하였다.1901년 대구 서문로에서 이시우와 김신자 사이의 4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이상화에게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은 거의 생래화 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조부 이동진이 설립한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교육을 받았다. 우현서루는 단순한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대구를 비롯한 전국에서 온 독립지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이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조부나 백부 등의 영향으로 이상화는 항일의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다.그러나 프랑스 상징주의의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백조’ 시기 작품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상화에게는 민족정신으로만 해명되지 않는 모더니티 지향적인 성격도 분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그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화는 젊은 시절 고향 선배 박태원을 통해 영어와 서구 문학 등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는다.이 무렵 보들레르를 비롯한 베를렌느 랭보 등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관심이 모아져 이상화는 파리로 가기 위한 중간경유지로 도쿄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2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상화는 일본에서 첨단의 서양문학을 공부하는 것과 더불어 함흥 출신의 신여성인 유보화와 깊게 사귄다. 그의 도쿄 체류 시기는 근대(서구)지향이 첨단에 이른 때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시간들은 ‘마돈나’를 애타게 찾는 ‘나의 침실로’를 통해 문학적 열매를 맺는다.그러한 근대지향은 자의든 타의든 이상화의 삶을 이끄는 절대적인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가 일본에서 경험한 관동대지진은 그가 결국에는 조선인일 수밖에 없음을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폭력적 사건으로 작용한다. 1923년 9월 일본 간토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폭도로 몰아 끔찍한 학살극을 벌였다. 죽음을 코앞에 둔 이상화도 죽음의 문 앞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이러한 체험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관동대지진 이전에도 이상화는 맹목적으로 일본이나 유럽을 지향하는 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이 다 되도록 일본의 서울을 헤매어도/나의 꿈은 문둥이 살기 좋은 조선의 땅을 밟고 돈다”로 시작되는 ‘도-교-에서’(1922년 가을 창작. 1926년 1월 발표)라는 시를 보면, 새로운 것을 향해 일직선으로만 달려가기에 이상화의 몸에 흐르는 고향과 고국에 대한 애정은 너무나 뜨거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아시아의 모더니티를 대표하는 도쿄에서 누군가는 문명의 찬란함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 모조품적 성격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그 모던의 성채 앞에서 이상화는 문둥이 살갗 같은 ‘조선의 땅’과 ‘조선의 하늘’을 그리워했던 것이다.1924년 귀국한 이상화의 시세계는 크게 변하여, 민족과 국토에 대한 애정이 전면화된다. 그것은 서양과 근대 문물에 대한 충분한 세례를 받은 후의 애정이기에 한층 미학적으로 정련된 결과물을 낳았다. 마치 2년 동안의 일본 체류 기간 동안 담아놓았던 고국과 고향에 대한 애정을 쏟아놓기라도 하려는 듯, 이상화는 자신이 평생 남긴 작품의 절반 이상을 1925년과 1926년 사이에 맹렬하게 발표한다.이상화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6)가 쓰여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김학동이 쓴 ‘이상화 평전’(새문사, 2015)에 따르면,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구상한 것은 연인 유보화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얼마 뒤 서울 교외의 푸른 보리밭을 거닐 때였다고 한다. 이상화는 해가 지도록 쉬지 않고 걸었지만 제목만을 간신히 얻어서 돌아왔다.결국 이상화는 이 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대구로 갔으며, 그 중에서도 대구 근교의 수성 벌판에 광활하게 펼쳐진 보리밭을 걷고 또 걸으며 명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명작이 육화(肉化)된 차원의 진실에서만 비롯된다는 예술일반론을 증명하는 사례인 동시에, 시인 이상화에게 대구가 얼마나 중요한 시적 모태인지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이 시는 좋은 시가 갖추어야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시에는 이상화의 시를 일관하는 ‘쇠같이 뜨거운 오열(嗚咽)’이 선명한 이미지와 공감력이 최대치에 이른 비유 등을 통해 아름답게 시화되고 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서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간결하지만 단단한 고발이 담겨 있으며, 그럼에도 생명의 순환 법칙처럼 오고야 말 광복을 에둘러 토로하고 있다. 그러한 견결한 메시지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원융무애의 상상력과 우리 국토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바탕한 것이기에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1927년 초봄에 대구로 돌아온 이상화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대구를 떠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작품 창작은 뜸해지지만, 그 뜨거운 정신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사회활동은 계속 된다.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개인적인 영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려는 공익이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대구’라는 지명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시 ‘대구행진곡’(별건곤, 1930.10)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4연 16행의 이 시에는 비슬산, 팔공산, 금호강, 달구벌, 도수원과 같은 대구의 상징과도 같은 지명이 그대로 등장한다. “넓다는 대구감영 아무리 좋대도/웃음도 소망도 빼앗긴 우리로야/임조차 못 가진 외로운 몸으로야/앞 뒷들 다 헤매도 가슴이 답답다”라는 부분에서는, 시인의 지사적 정신에서 비롯된 ‘쇠같이 뜨거운 오열’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일제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이상화의 삶도 힘겨워진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고 왔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는가 하면, 무보수로 일하던 교남학교(현 대륜중·고교의 전신)에서 더 이상 우리말 수업이 불가능해져서 그마저도 그만두게 된다. 결국 그 뜨거운 오열을 가슴에 품은 이상화의 몸은 더 이상 일제의 무지막지한 칼날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일까?위암이 발병한 이상화는 1943년 4월 25일 숨을 거두고 만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대구가 낳은 또 한 명의 걸출한 문인 현진건이 별세한 날이기도 하다. 현진건은 어린 시절을 대구에서 함께 보낸 죽마고우일 뿐만 아니라 이상화를 백조에 소개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가능케 했던 문우였다.지금 수성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여, 이상화가 노래했던 “가르마 같은 논길”, “종다리”, “삼단 같은 머리를 한 보리밭”, “착한 도랑이”, “나비 제비”, “맨드라미 들마꽃”,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흙”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의 봄도 나름의 아름다움으로 상춘객의 마음에 “봄 신령”을 지피게 한다.다행히 수성 못가에는 시의 전문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봄날의 우리 들판을 누구의 강압도 없이 맘껏 즐길 수 있게 된 지금, 그 아름다움에 한번이라도 도취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쇠같은 뜨거운 오열의 노래’로 민족혼을 일깨운 이상화를 위해 시비 앞에서 한번쯤은 모자를 벗고 예의를 표할 일이다. 나부터 봄이 오면 만사를 제쳐 두고 대구행 기차에 오르고 싶다.작가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앙고보를 수료하고 일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박종화와 더불어 ‘백조’ 동인으로 활동한 그는 1922년 시인으로 데뷔했다. ‘빈촌의 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등의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대구 교남학교 교사 시절엔 독특하게도 복싱부를 만들어 주목받았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1-20

‘나’는 그의 기묘한 행색과 표정에서 ‘조선의 얼굴’을 본다

…그는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선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고” 있다. 같은 찻간에 있는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도코마데 오이데 데스카?”라거나 “네쌍나얼취?”라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실없는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일본인과 중국인은 모두 그와 말 상대를 해주지 않고, 결국 같은 조선인인 ‘나’에게 “어데꺼정 가는기오?”라고 말을 건넸을 때에야, ‘나’의 “서울까지 가오”라는 대답을 듣는다.…현진건(1900-1943)은 김동인, 염상섭과 함께 근대적 단편소설의 미학을 확립한 한국근대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가이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일상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반어적 기법의 능란한 사용 등으로 독창적인 미학을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근대적 사실주의 문학의 초석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운수 좋은 날’이라는 작품 하나만으로도 한국인들의 가슴에 뚜렷하게 각인된 작가라고 할 수 있다.대표작이 있는 예술가는 행복하다. 그 대표작을 통해 그 작가는 대중들과 쉽게 만나고 오래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표작은 예술가에게 온전한 축복만은 아니다. 그 대표작이 하나의 굴레가 되어 그 예술가가 평생을 기울여 창조해 놓은 세계의 일부만을 대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진건에게는 ‘운수좋은 날’이 축복이자 굴레이기도 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김첨지를 통해 펼쳐지는 1920년대 경성의 풍경은 참으로 정밀하고도 풍요롭다. ‘동소문 근처의 집-전차 정류장-동광학교-남대문정거장-인사동-창경원-동소문 근처의 집’으로 이어지는 여로를 통해 근대도시의 풍광을 갖춰가던 경성의 모습과 그 속에서 철빈의 나락에 떨어진 하층민의 삶이 자상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또 하나의 대표작인 ‘빈처’ 역시도 경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고, 현진건의 사회생활이 대부분 경성에서 이루어졌기에 현진건의 문학적 공간으로는 서울을 떠올리기 쉽다.그러나 현진건은 대구와도 인연이 깊은 작가이다. 그는 1900년 9월 2일 대구 명치정 2정목(현 중구 계산동 2가)에서 대구부 전보사 주사 등을 역임한 아버지 현경운과 어머니 이정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으며, 이후에는 1913년 상경할 때까지 부친이 설립한 대구노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자랐다. 현진건이 첫 번째로 문학 활동을 펼친 곳도 바로 대구다. 1918년 일본의 세이조오 중학교를 다니다 귀국한 현진건은 대구에서 이상화, 이상백, 백기만과 함께 등사판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며 활동했던 것이다.이러한 그의 삶을 반영하여 대구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바로 ‘고향’이다. 작품의 ‘나’는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맞은편에 앉은 기묘한 차림의 그를 만난다. 한중일 삼국의 특징을 한 몸에 체현하고 있는 그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는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선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고” 있다. 같은 찻간에 있는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도코마데 오이데 데스카?”라거나 “네쌍나얼취?”라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실없는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일본인과 중국인은 모두 그와 말 상대를 해주지 않고, 결국 같은 조선인인 ‘나’에게 “어데꺼정 가는기오?”라고 말을 건넸을 때에야, ‘나’의 “서울까지 가오”라는 대답을 듣는다. 질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했을 때, 즉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닌 조선인이 되었을 때에만 그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온전한 한 명의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한중일을 기괴하게 결합한 그의 외모와 언행에는 지나간 그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 그는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딴 동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가 살던 고향은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그곳에서 그는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땅이 동양척식회사의 소유로 넘어가자 동척과 중간 소작인에게 모두 소작료를 내야 해서 그의 손에는 소출의 삼 할도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를 비롯한 백 호 남짓한 주민들은 남부여대하여 타처로 떠나가야만 했다. 그 역시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서간도로 이주한 것을 시작으로 신의주로 안동현으로 가서 품을 팔다가 일본에 건너가 구주 탄광과 대판 철공장에서도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왔던 것이다. 9년여의 시간 동안 재산을 모은 것은 고사하고 부모님만 모두 잃어서, 그는 무일푼의 혼자가 되었을 뿐이다.‘고향’의 그가 열일곱 살에 떠난 고향을 9년 만에 찾아갔을 때, 고향은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놓은 것” 같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집도, 사람도, 개 한 마리도 없는 고향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만난 유일한 고향 사람은 어린 시절 혼담도 오고 갔던 여자 하나뿐이다. 그녀는 열일곱 살 되던 겨울에 아비 되는 자가 이십 원을 받고 대구 유곽에 팔아 넘겼다. 이후 이십 원 몸값을 십 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빚이 육십 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병이 들고 나이가 들자 주인 되는 자가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준 것이다. 그녀는 지금 읍내에 있는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십 년 동안에 배워 두었던 일본말 덕택에 그 취직자리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유곽에 팔려간 이후의 모진 삶이 일본인과 관계된 것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그와 그녀는 일본 우동집에 들어가서 괴로움에 술만 실컷 먹고 헤어진다.‘고향’을 읽는 포인트는 이 기묘한 행색을 한 ‘그의 얼굴’을 ‘내’가 ‘조선의 얼굴’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다. 마치 이 작품이 조선일보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제목이 ‘그의 얼굴’이었다가, ‘고향’으로 제목이 바뀌어 수록된 작품집의 제목이 ‘조선의 얼굴’(글벗집, 1926)이었던 것처럼 말이다.처음 ‘나’는 기묘한 차림에다 일본어와 중국어로 횡설수설하는 그가 밉살스러워서 쌀쌀맞게 대한다. 그러나 그의 사연을 들을수록 “나는 그 신산(辛酸)스러운 표정이 얼마쯤 감동이 되어서 그에게 대한 반감이 풀려지는 듯”해진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차를 탈 때에 친구들이 사준 귀한 정종을 그와 함께 나누어 마시기까지 한다. 둘의 이 조촐한 공감과 연대는 그의 음산하고 비참한 눈물 속에서 “조선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중에 둘은 취흥에 겨워서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리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볏섬이나 나는 전토는신작로가 되고요말마디나 하는 친구는감옥소로 가고요담뱃대나 떠는 노인은공동묘지 가고요인물이나 좋은 계집은유곽으로 가고요실제로 한반도의 어느 곳인들 일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겠지만, 대구도 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도시다. 전영권 지리학자에 의하면, 박중양은 일본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해 대구읍성을 허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고종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1907년에는 대구읍성이 완전히 허물어졌으며, 지금은 그 흔적이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등의 지명에 남았다는 것이다.(‘대구여행’, 푸른길, 2014, 46쪽) 또한 식민지 시기에는 실제로 수많은 조선인들의 살기 위해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던 때이기도 하다. ‘고향’이 창작된 1926년까지 만주로만 옮겨간 조선 농민들이 35만 명에 달하고, 해방 전까지 만주나 일본 등에 살던 조선인이 4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그의 쓰라린 경험과 행색은 나름의 민족적 보편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작가 현진건도 대구노동학교를 거쳐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에, 일본의 세이소쿠 예비학교와 세이조 중학교, 중국의 후장대학 독일어 전문부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물론 현진건이 생계를 위해 일본이나 중국을 전전한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인으로서의 유학생활이 결코 비단길을 걷는 것처럼 편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던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언론계에서 물러난다. 이후에는 생활고로 큰 곤욕을 치르면서도 여러 편의 역사장편소설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무영탑’(‘동아일보’, 1938.7.20-1939.2.7)은 천년고도인 경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석탑의 축조 과정을 통해 아사달의 초인적 예술혼과 민족정신에 대한 작가의 열렬한 옹호를 드러낸 이 작품에서, 아사달의 예술혼인 “신흥(神興)”은 한국인의 고유한 정신에 맞닿아 있으며, 아사달이 모든 것을 바쳐 완성하려 하는 무영탑은 조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영탑’은 현진건의 여타 역사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시대적 압박에 맞서 우회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전망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문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인 병마와 생활고 그리고 그보다 몇 곱절 쓰라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의연하게 민족의식을 견지했던 현진건의 문학과 삶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대구 두류공원에 1996년 세워진 그의 문학기념비는 그 불굴의 문학적 영혼에게 바치는 대구 시민들의 작은 술잔이다.작가 현진건은…190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보통의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2살 때 일본 세이조중학으로 옮겨 공부를 이어갔다. 조숙했던 그는 1918년 이상화, 백기만 등과 함께 동인지 ‘거화’를 내기도 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고,‘술 권하는 사회’ ‘운수좋은 날’ ‘고향’ 등의 단편과 ‘무영탑’ ‘타락자’ 등의 장편을 남겼다. 사실주의 작풍을 선도한 그는 ‘근대 한국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1-13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에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 할 뿐...”

“작가가 바라보는 문중의 모습은 향수(nostalgia)의 프리즘을 통해 이상화되고 낭만화된다. 본래 향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해 발생하는 감정으로서, 상실된 것에 대한 아이러니한 그리움이다. 이러한 그리움 속에서 사라진 과거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이상화되고 낭만화 된 상념인 것이다. “아, 사라진 것들은 아름다웠느니….”야말로 문중으로 대표되는 고향을 대하는 작가의 기본 태도라고 할 수 있다.”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1980년에 민음사에서 처음 출판되고, 1986년에 나남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온 연작장편소설이다. 문단에 갓 등단한 현우가 귀향하여 겪거나 들은 사나흘 동안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현우는 옛 모습을 잃어가는 고향 암포(岩圃)에서 어림대, 청려당, 옛주막, 벽계학교, 장터, 지서, 고옥, 폐원 등을 방문하고, 그 곳의 주인이었던 입향조(入鄕祖), 교리어른, 정산선생, 종손, 장자(長者) 등을 회상하거나 만난다.암포는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에 등장하는 무진(霧津)이나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1973)에 등장하는 삼포(森浦)처럼 실제 지명이 아니다. 그러나 암포는 이문열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작품의 주인공인 현우가 등단한 지 얼마 안 된 작가라는 설정은 자연스럽게 그 무렵에 등단한 이문열을 떠올리게 하고, 암포에 대한 묘사 역시 작가가 여러 지면을 통해 설명한 고향의 모습과 통하기 때문이다.이문열은 경북 영양군에 대대로 살아온 재령 이씨로서, 이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갈암 이현일을 들 수 있다. 류철균에 따르면, 갈암은 기해예송 당시 노론인 우암 송시열과 대결한 영남 남인의 대표였고, 인현왕후의 폐비와 장희빈 소생의 세자 책봉을 둘러싼 기사환국 당시에는 남인 전체의 영수였다고 한다.(류철균, ‘이문열 문학의 정통성과 현실주의’, 이문열, 살림, 1993) 갈암 이외에도 조부 운악 이함, 아버지 석계 이시명, 형 존재 이휘일이 불천위(不遷位-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인물을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국가에서 허가한 신위)로 모셔지고 있다.(장윤수, ‘영덕 갈암 이현일 종가’, 예문서원, 2013) 작가의 산문 ‘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이문열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4)에 따르면, 석계 이시명은 장흥효의 딸과 결혼하여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이문열이 고향으로 삼는 영양군 석보면은 갈암 현일의 동생인 항제 숭일이 자리 잡은 땅이다. 이문열은 항제 숭일의 후손이다.이문열이 경북 영양군 석보면에 비교적 장기간 머문 기간은 크게 세 번이다. 첫 번째는 6.25가 발발하고 아버지가 월북하자 살 길을 찾아 1951년 귀향하여 1953년 안동으로 이사할 때까지 머물렀던 시기이고, 두 번째는 밀양중학교를 중퇴한 1961년 귀향하여 1964년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의 시기다. 1948년생인 이문열에게 첫 번째 시기는 그다지 강렬한 인상을 준 것 같지는 않다. 고향과의 본격적인 친화는 두 번째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이문열은 “그때 처음으로 문중이란 것을 알았고, 자연과의 친화를 경험했으며, 노동과 생산을 이해하게 되었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라고 고백한 바 있다. 고향에 머문 세 번째 시기는 스무살 때 내려와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을 때이다. 이 때 이문열은 고향을 세심한 관찰의 눈길로 보게 되었으며, 이 무렵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소설의 소재 대부분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고향에서 배운 윤리와 삶의 감각은, “나의 뿌리는 고향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집단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의식도 강한 전통 지향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삶이 외견상 뿌리 없이 보이고 때로는 극단의 일탈을 보일 때도 나는 그것들을 언제나 한시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으로만 받아들여 왔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이문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작품이야말로 이문열이 고향에 대해 가진 애정과 영향력을 증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작가는 이 소설을 발표한 지 6년만에 개작본을 발행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드러내었던 것이다.이렇게 작가가 애정을 쏟는 고향은 ‘후기’의 “내게 있어서 고향의 개념은 바로 문중(門中)”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로 문중(門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문중과 非(비)문중’, 공간적으로는 ‘문중이 사는 언덕’과 ‘타성받이들이 사는 장터’라는 이분법이 여러 편의 단편을 가로지른다. 이 중에서 작가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것은 전자이며, ‘다시는 가지 못하는 고향’이란 다름 아닌 문중과 문중의 풍습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1980년대에 창작된 소설에서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만큼 동항(同行), 족인(族人), 숙항(叔行), 질항(姪行), 질서(姪壻), 입향조(入鄕組), 문회(門會)와 같은 유교적 전통의 단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그러나 ‘에필로그’에서 분명히 밝힌 것처럼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에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다”. 문중은 사라져버린 것이기에, 작가가 바라보는 문중의 모습은 향수(nostalgia)의 프리즘을 통해 이상화되고 낭만화된다. 본래 향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해 발생하는 감정으로서, 상실된 것에 대한 아이러니한 그리움이다. 이러한 그리움 속에서 사라진 과거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이상화되고 낭만화 된 상념인 것이다. “아, 사라진 것들은 아름다웠느니….”야말로 문중으로 대표되는 고향을 대하는 작가의 기본 태도라고 할 수 있다.‘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의 첫 번째 작품인 ‘롤랑의 노래’에서 문중의 상징과도 같은 어림대(御臨臺)라는 바위를 일제로부터 지켜낸 교리 어른은 “우리들 옛 정신의 권화, 은성(殷盛)했던 시절의 흰 수염 드리운 수호부(守護符)”로 미화된다. ‘正山 先生(정산 선생)’의 정산은 공맹 사상과 조선에 대한 충성의 마음으로 현대를 살다 간 기인이다. 그러나 현우는 정산 선생이 고향의 한 기인(奇人)이 아니라 진정한 스승이었음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으며, 마지막에는 “아아 스승이여, 내 스승이여”라는 찬양의 말까지 남긴다. ‘종손’에서는 비록 고향을 떠났지만, “크고 환하다고 밖에 형용할 길이 없는 어떤 인간정신의 아름다움”을 지닌 종손이 등장한다.그러나 이문열은 흔히 말하듯이 양반지향적 상고주의에 맹목적으로 붙들려 있는 작가는 아니다. 작가 역시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 소위 문중으로 대표되는 양반사회의 문제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奇想曲(기상곡)’과 ‘상처’에서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長者(장자)의 꿈’에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奇想曲’은 과거 문중의 영광을 뒷받침하기 위해 희생당한 천민이 유령이 되어 나누는 한스러운 노래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들은 사라진 문중의 어른들이 화려한 의미로 빛나는 것과 달리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실제로는 죽었으나 상징적으로는 죽지 못한 유령이 되어 떠돈다. ‘상처’는 핏줄에 바탕한 양반의식이 낳은 비극을 보여준다. 문중은 “설령 불천위(不遷位)를 열 개나 모시고 있는 집안의 후예라도 일단 떠돌아 들어온 타성은 천민이나 다름없이 여길” 정도로 타성(他姓)에 대해 배타적이다. 따라서 문중의 딸들과 타성의 아들들 사이에서 염문이 돌면, 문중에서는 결코 그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딸의 죽음으로 마감되기도 하였다. ‘상처’는 바로 그 “옛 고향의 치유될 수 없는 상처중의 하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長者의 꿈’의 윤호는 잃어버린 ‘옛 고향을 되찾겠다는 신념’으로 치밀한 준비 끝에 귀향하여 온갖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데,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기계가 값싼 노예노동을 대신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윤호의 그 치열했던 노력은 “우리 문화의 정화(精華)”인 양반문화는 ‘노예노동’의 뒷받침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영양군 광산문학연구소를 찾아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설가 이문열.이문열은 1986년의 개정판에서 ‘암포 신문인협회’를 비롯해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을 새롭게 수록하였다. 새롭게 덧보태진 여섯 편의 작품을 통하여 ‘과거의 고향’과 ‘현재의 고향’이 라는 이분법은 더욱 강렬해진다. ‘암포 신문인협회’와 ‘분호난장기(糞胡亂場記)’는 문중의 가치가 사라진 현재의 고향이 얼마나 비루하고 타락한 것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문중으로 대표되는 가치와 풍습이 사라진 정도에 비례하여 과거의 것은 더욱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에서 평생 갓을 만들다 쓸쓸하게 죽은 도평노인은 시대착오적 무능력자나 기인이 아니라 고고한 지사의 모습마저 풍기게 되는 것이다.핵가족을 넘어 1인 가족이 보편적인 삶의 형태가 되어 가는 오늘날 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 나타난 문중에 대한 지향은 긍정보다는 부정의 대상으로 여기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문중보다도 더 큰 공동체에 대한 지향이 뒷받침되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오늘날 우리의 삶이 ‘과객’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 자식으로만 이루어진 “지극히 사적(私的)이고 폐쇄적인 삶의 방식”에 머무는 것이라면, 문중에 대한 그 열렬한 그리움을 부정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중에 대한 그 열렬한 지향. 그것은 그 안에 담긴 부정적인 속성까지 포함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사라진 고향’임에 분명하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1-06

수직의 땅 위(창수령)에서, 수평의 땅 끝(대진 바닷가)에서 ‘삶의 해답을 찾는 여정’

경북 출신 작가들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발전 과정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그들 시와 소설에 대한 면밀한 탐구와 문학적 배경이 된 도시에 관한 연구는 충분하지 못했다. 중견 문학평론가 이경재가 본지 연재기사를 통해 경북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라 할 수 있는 현진건, 이상화, 이육사, 조지훈, 한흑구, 김동리, 박목월, 권정생, 김주영, 이문열, 김원일, 김원우, 성석제, 김연수 등의 문학적 궤적을 따라가며 빛나는 ‘경북문학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을 다시 읽다아일랜드의 문인 오스카 와일드(1854~ 1900)는 “예술이 삶을 모방한다기보다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유미주의자의 궤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곰곰이 되씹어보면 적지 않은 진실을 담고 있다. 소위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조형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처음 출판되었을 때부터 많은 이들에 의해 ‘젊음의 문학’ 혹은 ‘젊음의 소설’로 일컬어졌던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민음사, 1981) 역시도 한동안 예술을 사랑하고 참된 삶의 가치를 고민하는 청춘들에게는 따라 배워야만 할 젊음의 필독서로 인식되었다. 시라고 보아도 무리 없는 유려한 문체 속에 담겨진 그 진지하고 현학적인 분위기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매혹적인 대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설령 ‘젊은 날의 초상’에 바친 이러한 찬사가 과장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이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처음 문학에 뜻을 두었던 여드름 투성이의 10대 소년이었던 나에게는 예술을 지망하는 청년의 진정성을 표상하는 작품으로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이 ‘젊은 날의 초상’이기 때문이다.문청(문학청년)으로 이 책을 처음 읽은 후에, 나의 젊음도 ‘젊은 날의 초상’에 나오는 영훈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얼마나 많은 다짐을 했던가? 특히나 폭설이 내리는 창수령을 넘어 동해바다를 향해 가던 영훈의 여로는 문청이라면 의당 다녀와야만 하는 일종의 순례길로 내게는 깊이 각인되었다.그리해서 친구 몇 명과 함께 학기를 마치자마자 떠나서 조우했던 창수령은 내 영혼의 어딘가에서 지금도 폭설을 맞으며 의연하게 서 있다. 이제 그 현학적 분위기와 유려한 미문의 한계도 짚어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눈 내린 창수령을 넘어 푸른 대진 바닷가로 향하는 영훈의 모습은 내 가슴을 뜨겁게 한다.성장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은 중편 ‘하구’, ‘기쁜 우리 젊은 날’, ‘그해 겨울’로 이루어진 연작장편소설이다. 이 세 편은 소년기를 벗어나 청년기에 들어서는 삼년 여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하구’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형이 사업을 하는 강진에 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합격하기까지의 이야기라면,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대학에 입학한 후에 문학과 술과 사랑과 번민으로 시끌벅적한 대학시절의 이야기이다. 시기상 마지막에 해당하는 ‘그해 겨울’은 영훈이 대학을 그만두고 참된 가치를 찾아 방황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젊은 날의 초상’에서 펼쳐진 3년간의 시간은 이문열의 젊은 시절 약력(검정고시와 서울사대 입학, 그리고 뒤이은 낙향)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세 편의 중편 중에서 경북을 주요한 무대로 한 것은 ‘그해 겨울’이다. 영훈은 “애초부터 잘못 지어진 옷”과 같았던 대학생활이 가져온 피로와 혼란, 그리고 가까운 친구의 죽음으로 자극된 허무와 절망에 내몰려 경상북도 어느 산골의 술집 겸 여관에서 방우(허드레일꾼)로 지낸다. 영훈이 방우 생활을 하던 경북의 산골은 이문열 작가의 형이 운영하던 곳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작가는 ‘귀향을 위한 만가’(작가가 쓴 작가의 고향(조선일보사, 1987)에서 “내 나이 스무 살 때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역시 여기저기 다니며 고생하시던 큰형님이 고향 장터 거리에다 여관 겸 술집을 여시고 계셨는데, 서울사대를 첫 번째 휴학하고 떠돌던 내가 그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 여관 겸 술집에 대해서 ‘그해 겨울’에 비교적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영훈은 나름대로 만족함을 느끼며 방우 생활을 하지만, 이내 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길 위에 선다. 참된 가치를 스스로 찾기 위해서 그리고 모종의 결단을 요구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따르기 위해서 대진(경북 영덕군)의 바닷가를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이 여로의 클라이맥스는 700미터 높이의 창수령(蒼水嶺)이다. 수직의 땅 끝에 위치한 창수령에서 영훈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감각하고 그에 헌신할 자신의 삶을 예감한다. 이 때 묘사되는 창수령의 모습은 한 편의 시라고 보아도 모자람이 없으며, 한국문학사가 가닿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 중의 하나이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영훈이 넘었던 창수령은 영덕군과 영양군을 연결하는 해발 700m의 고갯길로서, 고대부터 영양, 봉화 등 내륙 주민이 영덕 영해시장과 동해안을 연결해주는 핵심적인 길이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이 고향인 이문열에게 창수령은 무척이나 익숙한 곳이었으며, 그러한 육화된 체험이 있었기에 수십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감동을 주는 명문장을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결국 때로 목숨을 걸기도 하며 다양한 공간을 횡단하여 바닷가에 도달했을 때, 바다는 영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 허망한 침묵 앞에서, 수평의 땅 끝에 이른 영훈은 “신도 구원하기를 단념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구원할 그 무엇도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역설적으로 그 완전한 침묵은 영훈에게 삶의 의지를 가져다 주고, 끝내는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갈 힘을 준다.허무와 절망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새로운 삶에 연결된다는 이 역설적인 인식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주어진다는, 그렇기에 백지와도 같은 삶을 채워나가는 것은 무거운 짐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선물일 수도 있다는 실존주의에 맞닿아 있다.이러한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나름의 준비를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바닷가로 오는 여정에서 만난 친척 누나는 유부남과의 사랑으로 인생의 쓴 잔을 마신 적이 있는데, 고뇌하는 영훈에게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라는 말을 이미 해주었던 것이다.영훈의 여로에는 배신한 과거의 동지를 죽이기 위해 대진으로 가는 칼갈이 사내가 함께 했다. “나는 죽이러 가고 자넨 죽으러 가는 것”이라는 칼갈이 사내의 말처럼, 영훈과 칼갈이 사내는 일종의 거울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훈이 바다에서 미래를 채워갈 삶의 의미를 구하고자 했다면, 칼갈이 사내는 바다에서 과거를 구원할 삶의 해원(解寃)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훈이 그 의미를 구할 수 없었던 것처럼, 칼갈이 사내 역시 해원에 실패한다. 그렇기에 둘은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약병(감상)과 칼(망집)을 함께 바다에 던진다. 완전한 무(無)의 철저한 깨달음을 통해 가능성으로 충만한 현재는 둘 앞에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이다.‘그해 겨울’을 가득 배우는 색채의 이미지도 참으로 아름답다. 창수령을 넘을 때는 삼십년래의 폭설이 내려서 작품이 온통 순백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이 순백의 색채는 고뇌하는 영훈의 배경색으로는 참으로 적당하다. 이외에도 불과 물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아서, 이 작품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영훈은 방우로 지낼 때 남포동과 장작불의 빨간 불빛을 보며 큰 영혼의 위로를 받는다. 대진 앞바다의 푸른 빛깔도 생명이라는 절대의 가치를 환기하기에 모자라지 않다. 이러한 불과 물의 이미지는 시련과 정화, 그리고 재생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성장소설로서의 ‘젊은 날의 초상’이 지닌 주제의식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킨다.학창 시절부터 여러 번 읽어온 작품이지만, 이번에 읽으며 새롭게 눈에 띈 사람들과 공간이 있다. 그것은 처음 본 영훈에게 흔쾌히 밥과 술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집이다. 길에서 만나는 “행인은 모두가 나의 좋은 길동무”이고, 잠자리는 밤늦도록 불이 켜진 채 두런거리는 방이나 시골 동장의 집이나 혹은 동방(洞房)이나 4H회관에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심지어 영훈은 자신을 검문한 전투경찰과 한 패가 되어 술추렴을 하고, 전투경찰의 하숙집에서 아침과 해장술까지 대접받을 정도이다.이 따뜻한 마음의 장삼이사들로 인해 영훈의 여로는 속까지 훤히 비치는 고향길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훈훈하고 편안하다. 이들이야말로 200리에 가까운 영훈의 여로를 채우는 진짜 주인공들이며, 지식으로 가득찬 “창백한 폐병쟁이”보다도 더욱 통렬하게 영훈의 지적 허영을 조소하는 거리의 성자(聖者)들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창수령에는 왕복 2차선으로 잘 포장된 지방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그 밑으로는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강산은 이토록 빠르게 변할지라도, 그곳의 주인인 성자들의 모습만은 그대로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문학평론가 이경재연재기사의 필자는…1976년 인천에서 태어난 이경재는 서울대학교에서 학부와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숭실대학교 국문과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문학과 공간의 연관성 탐구’를 지속하고 있는 그는 ‘단독성의 박물관’ ‘끝에서 바라본 문학의 미래’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등의 책을 썼으며, 제29회 김환태평론문학상 수상자다.

202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