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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고객들 두번 걸음 않도록‘야물딱지게’ 고쳐주는게 최고의 서비스 아닙니까

몇 해 전. 오랜 시간 동양철학을 공부한 학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일생 세상과 인간의 깊숙한 내면을 관찰해온 70대의 그는 “사람의 구두와 걸음걸이를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성격이 급한 사람은 구두의 앞부분이 먼저 닳고, 뻣뻣하고 거만한 이들은 구두 뒤축을 자주 갈 필요가 없다고 그랬다.“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도 뛰듯이 바쁘게 걸어가는 남녀를 보면서는 시간과 돈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마음 상태를 감지한다”는 말도 들었다.곰곰 생각해보면 설득력과 합리성을 갖춘 해석이다. 눈 밝은 이들에겐 개개인이 소유한 물건이나, 행위 자체가 ‘인간 해석’의 수단이 될 수도 있는 법.시인들 중에도 ‘구두’를 시의 소재로 삼았던 이들이 적지 않다. 검거나 혹은, 누런 구두를 보며 소의 짧고 서러운 생을 떠올리는 이경우의 ‘구두를 신다가’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이런 노래다.신장에서 구두를 꺼내다가문득 이 구두는한 많은 생을 마친 어느 소의가죽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평생이 겨우 반경 몇 킬로미터를 벗어나지 못한 채고단한 노동의 현장을 살다간 영혼이죽어서라도 자유롭게, 낯선 땅을 밟아 보고파한 켤레 인간의 구두로마무리 되었나보다신장에서 구두를 꺼낼 적마다나도 모르게어디든 떠나고 싶어지는 것은혹여, 소의 필생의 염원이다시 살아난 것은 아닐까가엾은 소의 영혼을 위하여구두창이 다 해지도록자유로워지고 싶은 시간왕방울 같은 눈을 끔벅이며순한 소 한 마리가코뚜레가 박힌 얼굴을 내밀고 있다.△ 구두와 함께 울고 웃어온 반세기 세월은…죽도시장 개풍약국 옆 노점에서 구두를 수선하는 안도호(70)씨는 20대 초반부터 수제화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무렵 저렴한 기성품 구두가 쏟아져 나오면서 수제화 시장이 위축되자 ‘구두 제작’에서 ‘구두 수선’으로 직업을 바꾼 안씨.만들거나 수선하며 그가 구두와 함께 살아온 게 자그마치 반세기다. 강산이 5번은 변하는 시간. 그쯤이면 안도호 씨도 앞서 인용한 철학자나 시인 정도의 깨달음을 ‘구두’를 통해 얻지 않았을까?대장장이는 눈앞에서 타오르는 불의 빛깔만 보고도 온도를 가늠한다. 긴 세월 설렁탕을 끓여온 할머니는 도축된 소고기의 촉감만으로도 신선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였다.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진 이유는.-구두를 얼핏 보기만 해도 그게 비싼 구두인지, 싼 구두인지 알 수 있나? 그리고, 구두굽이 닳는 속도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도 짐작되는지.(기자의 갈색 구두를 내려다보며) “100퍼센트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대충 가격까지도 알 수 있다. 비싼 구두는 세련된 디자인은 물론이고, 튼튼해서 오래 신는다. 가죽이나 밑창 등의 부속이 싸구려와는 다르다. 구두굽을 자주 갈아야 하는 사람은 느긋한 성격이 아닐 것이란 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지 않겠나.(웃음)”-구두와 인연을 맺은 건 언제부터인가.“경상남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포항으로 이주했다. 구두 수선을 시작한 건 40년에 가깝다. 그전엔 조그만 공장을 여러 곳 옮겨 다니며 수제화를 만들었다. 수제화 시장이 몰락하면서 막노동을 하거나 뱃일을 하는 등 직업을 바꾼 동료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구두 만들고, 수선하는 게 천직이라 생각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 죽도시장 입구에 자리를 잡고 구두, 가방, 우산을 고치는 일을 시작했다.” △ 무엇이건 쉽게 버리는 세태에 구두 수선도 줄어19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한 절대적 가난의 시대는 아니었지만, 지금보단 모든 게 부족했고, 절약이 보편적이던 1980년대. 당시 구두굽을 가는 비용은 500원이었다.죽도시장에선 점심을 때울 국수 한 그릇을 300원에 팔았다. 구두 한 켤레가 1~2만원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안씨의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어지간한 월급쟁이는 부럽지 않았으니까.2022년 6월 현재 굽 수선을 하려면 남자 구두의 경우 1만5천원, 여자 구두는 1만3천원을 지불해야 한다. 구두굽 교체 비용이 30배 오른 것이다. 그럼에도 안도호 씨의 경제적 형편은 1980년대만 못하다. 구두를 포함한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쉽게 사고, 고민 없이 버리는 세태 탓이다. -죽도시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변했을 것 같다.“맞다. 40년 가까이 한 곳에서 일하다보니 보지 않으려 해도 세상과 사람들이 보인다. 빗방울을 막아주는 아케이드가 생기고, 거리는 깔끔하게 포장됐다. 그런데, 그런 발전과 함께 사람들의 절약정신과 서로를 위해주는 애틋한 정은 사라진 것 같아 아쉬울 때도 있다.”-그래도 즐거운 기억이나 경험도 있을 것 같은데.“손님들이 내가 수선한 구두를 신고 이 앞을 지나다가 ‘잘 고쳐줘서 구두가 편하고 튼튼해졌다’고 말해주면 그날은 행복하다. 포항 KBS 최규열 아나운서도 그런 손님 중 하나였다.”-거리에서 일하다보면 마음 상하는 일도 있을 듯하다.“자랑할 만한 직업은 아니지만, 구두를 고치며 아이들 키우고 아내와 생활을 이어왔다. 다만, 오가며 술 취한 사람 등이 괜한 시비를 걸 때는 기분이 좋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나. 먹고살려고 여기 나와 있으니 웃어 넘겨야지.”△ ‘없어지면 아쉬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안씨는 “구두를 잘 고치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고 했다. 그저 오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작은 기술들이 하나둘씩 모여 좋은 구두 수선공을 만드는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그러나, 안도호 씨는 구두는 물론, 가방과 우산을 고칠 때마다 매번 최선을 다한다. 손님들에게 친절하고, 수선을 위해 다시 다른 가게를 찾지 않도록 ‘야물딱지게’ 고쳐주는 게 최고의 서비스라고 믿기 때문이다.조그만 몸피에 선량한 눈빛을 가진 안씨. 그래서였을까? 인사를 나누며 일흔 살이라는 나이를 이야기 들었을 때 잘 믿기기 않았다. 노인에게선 발견하기 힘든 소년 같은 순정함의 그림자를 느꼈기 때문.그걸 신는 사람의 많은 것을 은유적으로 알려주는 구두. 평생 구두를 만들고, 고치며 살아온 안씨의 꿈을 뭘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점포도 없이 길에서 일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서비스와 기술 좋은 구두 수선집’으로 기억해주고, 만약 내가 일을 그만둔다면 ‘그 사람이 없으니 아쉽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너무 거창한 꿈인가?(웃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6-07

아프리카에 희망 전하는 달콤따뜻한 ‘사랑의 호떡’

아직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지 않았지만,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릴 만큼 더웠다. 당연했다. 바로 코앞에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이 있었으니.포항 죽도시장 입구에 조그맣게 자리한 호떡 노점. 고명희(62)씨는 그 자리에서 14년을 일했다. 그녀에 앞서 고씨의 어머니가 1980년부터 ‘할매호떡’을 시작했으니, 모녀가 대를 이어 호떡을 구워 판 세월이 벌써 42년.지난해부터는 고명희 씨의 아들까지 일을 거들고 있으니 ‘호떡집 3대’라 불러도 무방하다.인터뷰는 호떡을 굽는 번철(燔鐵)을 사이에 두고 진행됐다. 3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기자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8월에는 얼마나 더 더울까?그럼에도 낙관적인 웃음이 그려진 고씨의 얼굴은 환하다. 고생을 고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이유가 뭘까.“오래전 엄마에게 방송사에서 인터뷰 제의가 왔어요. 그때 엄마는 ‘내가 이 일을 하면서 한 거라곤 내 자식 키운 것밖엔 없다. 남을 도와준 것도 아닌데 무슨 인터뷰할 자격이 있나’라며 거절했죠.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많아졌어요.”당연지사 그게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했다. 물었다.“그래서요? 생각 끝에 뭘 했습니까?”“얼마 전에 아프리카 우간다(Uganda)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작은 학교를 짓는데 2천만 원을 기부했죠.”정말이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들려주는 고씨의 이야기에 적지 않게 놀랐다. 할매호떡은 좌판을 차려 운영되는 가게다. 우간다에 기부한 돈 2천만 원이면 시장에 점포를 얻어 좀 더 편하게 장사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글쎄요…. 점포를 세낼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그것보단 어려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더 가치 있지 않을까요?” △ 호떡처럼 달콤한 사랑과 나눔긴 시간 노점에서 일하고, 가끔은 예의 없는 손님도 맞아야하는 고씨임에도 표정과 말투가 소녀처럼 밝았다. 그러한 삶에 대한 긍정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알고 싶었다.-호떡을 만들어 팔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엄마가 1980년에 여기 자리를 잡았다. 나는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부치는 엄마를 돕기 시작한 게 2005년 즈음이다. 3년쯤 반죽 제대로 만드는 것부터 호떡 맛있게 굽는 방법 등을 배웠고 2008년에 일을 이어받았다.”-짧지 않은 시간이다. 많은 것이 변했을 것 같은데.“1980년엔 호떡 한 개가 100원이었다. 내가 이어받았을 땐 500원이었고. 지난해까지 700원을 받다가 올해 밀가루 값과 식용유 값이 너무 올라 할 수 없이 1천 원으로 올렸다. ‘내가 못 먹는 음식은 만들지 말자’는 것이 우리의 장사 원칙이다. 그건 엄마와 내가 똑같다.”-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때는.“나는 신앙을 가졌다. 거기서 사랑과 나눔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에 갔었다. 그곳에서 가난 속에서도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아직 여러 분야에서 경제적인 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나라인 우간다는 학교를 짓는데 한국처럼 큰돈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내 형편껏 기부를 했는데, 아이들보다 내 마음이 더 행복했다. 그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었다.”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잘 웃는 고명희 씨의 맑은 얼굴은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나름의 긍지와 보람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어렵지 않게 짐작됐다.조건을 달지 않고,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기부와 봉사를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1천 원짜리 호떡을 얼마나 팔아야 2천만 원의 이익을 남길 수 있을까? 그걸 남에게 선뜻 내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고씨에겐 사랑과 나눔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감이 호떡보다 더 달콤한 것 같았다. △ 밀가루, 찹쌀가루에 비법 재료… 호떡의 9할은 반죽만두가게에 가면 만두 이야기를 해야 하고, 결혼식장에선 신랑과 신부 이야기를 해야 한다. 호떡집을 갔으니 호떡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할매호떡의 메뉴는 3가지. 대표 메뉴는 1천 원짜리 전통호떡이고, 치즈호떡과 씨앗호떡은 1천500원이다.-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렸다. 장사에 도움이 되는지.“지난 2년간은 매출이 30% 이상 줄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코로나19 사태 이전만은 못하다. 게다가 호떡은 겨울에 더 맛있게 느껴지는 음식이다. 11월부터 2월까지의 손님이 여름에 비해 2배는 많다. 하지만, 어려운 시절도 잘 버텼으니 이제 갈수록 좋아지지 않겠는가.”-세 가지 호떡 중 어떤 게 가장 많이 팔리나.“아무래도 전통호떡이다. 손님 열 명 중 일곱 명은 그걸 찾는다. TV드라마의 영향으로 포항이 흥미로운 여행지로 알려지면서 젊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그들은 씨앗호떡과 치즈호떡도 좋아한다.”-하루에 판매되는 호떡의 양은.“20kg 밀가루 한 포대를 반죽해서 아침 9시에 호떡을 굽기 시작한다. 재료가 다 떨어지면 문을 닫는다. 오후 3~4시가 될 때도 있고 6시쯤이 될 때도 있다. 가장 많이 팔았을 때는 한 포대 반, 그러니까 밀가루 30kg 반죽한 걸 모두 판매한 적이 있다.”고명희 씨는 “호떡이 10이라면 반죽이 9”라고 말한다. 2~3시간의 숙성이 필요하니, 고씨가 반죽을 시작하는 건 매일 새벽 4시 30분 무렵. 41년은 직접 손으로 반죽을 했다. 반죽기계를 구입한 것은 아들이 일을 돕기 시작한 지난해 가을.밀가루와 찹쌀가루를 일정한 비율로 섞고, 여기에 며느리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비법 재료’ 몇 가지를 더해야 반죽이 완성된다. 그 비율과 들어가는 재료는 고씨의 어머니가 장사를 시작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 아직 못다 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사랑고명희 씨의 아들은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직장생활보다는 장사가 내게 맞는 것 같다”며 호떡집 3대가 되기를 자처했다.회사를 그만둔 후 야시장에서 호떡을 구워 팔며 경험을 쌓았고, 지금은 포항시 이동에서 호떡 밀키트(Meal Kit·손질된 식재료와 조리법을 세트로 구성한 제품) 가게를 운영하면서 어머니를 돕고 있다.아주 어렸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돼서도 할매호떡을 찾아줄 때가 가장 즐겁다는 고씨.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조그만 호떡집이지만 여든일곱 살 할머니부터 스물여섯 살 손자까지 3대가 이어가며 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손님 모두가 우리 가게 호떡을 먹으며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 행복을 만드는 일이니 건강이 허락된다면 오래오래 하고 싶다.”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을 때 고씨는 “아직 아프리카에 나눠줄 사랑이 조금 더 남아 있다”며 웃었다. 우간다 아이들을 위해 기부를 더 하겠다는 이야기임을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호떡은 따뜻하고 달콤하다. 고명희 씨는 호떡보다 더 뜨겁고 달콤한 나눔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 분명해 보였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5-31

“안전과 타협은 없다” 아버지때부터 지켜온 철칙이죠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포항시는 환경정화 차원에서 형산강변에 줄줄이 늘어서 있던 포장마차를 단속·철거했다.포장마차 운영으로 자식들 공부시키며 삶을 이어가던 상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책을 세워 생존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궁여지책으로 낮에는 천막으로 된 포장마차를 걷었다가, 저녁에 다시 펼쳐 장사를 하는 방식이 포항시와 상인들 사이에서 합의됐다.그런데, 예상치 않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당시의 포장마차는 천막을 철제로 된 기둥과 볼트로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이걸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과정이 2~3시간 소요되는 중노동이었던 것.그 시기 아버지와 함께 죽도시장에서 부산천막을 운영하던 윤성원(52) 대표는 반짝이는 사업 아이디어를 동서(同壻)에게서 얻었다.“서울에서 판매되는 접이식 천막을 가져와 팔아보면 어떨까요?”사소한 조언이 부산천막의 매출액을 단기간에 급증시켰다. 1개월 동안 자그마치 200여 동의 접이식 천막을 판매·설치해준 것.3시간 가까이 걸리던 작업 시간을 10분으로 단축시킬 수 있으니 포장마차 업주들 모두가 너나없이 구매하겠다고 나서는 건 당연했다.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천막을 주문하는 게 보편화되기 전이라 생산자와 소비자를 효율적으로 연결시켜준 윤 대표는 짭짤한(?) 재미를 봤다고 한다. 그가 아버지에 이어 천막 제작·설치를 직업으로 택한 초반 무렵 이야기다. △ 아버지 뒤 이어 천막 제작·설치를 ‘평생의 업’으로이제는 경력 30년의 베테랑이 된 윤성원 대표가 천막 제작과 설치를 처음 시작한 건 20대 초반이었던 1993년 11월.윤 대표의 아버지는 1970년대 초부터 천막 관련 일을 해왔으니, 부자가 50년간 같은 일을 하며 나이 들어온 것이다.고등학생 때도 여름방학이 되면 아버지의 작업을 도왔다는 윤 대표. 그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들을 보는 게 좋았다고 한다. 아버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수입도 월급쟁이보다 훨씬 나았다고.그렇게 윤 대표는 부친과 함께 ‘천막’을 자신의 평생 업(業)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새파란 청년이었던 윤성원은 이제 20대 중반의 딸을 둔 중년의 가장이 됐다.-처음 죽도시장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해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을 텐데.“아버지가 이 일을 시작할 땐 죽도시장 인근 대부분의 집이 천막을 사용해 만들어져 있었다. ‘집수리’가 곧 ‘천막 수리’로 이해되던 시절이다. 천막가게가 호황을 누렸던 때였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많이 어렵다. 짐작하다시피 천막 제작과 설치는 이제 사양 산업에 가깝다.”-천막 가게도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을 받았는지.“직접적 영향은 크지 않았다. 다만, 식당이나 창고업 등 천막을 필요로 하는 업소의 상인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힘든 것보다는 우리 가게에 작업을 의뢰하던 손님들이 매출 감소 등으로 힘겨워하니 그걸 보는 게 마음 아팠다.”-천막 가게의 주요 고객은 어떤 사람들인가.“상점을 운영하는 이들 모두가 고객이다. 사실 천막은 우리 생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차양막과 어닝(햇볕과 비를 막아주는 동시에 디자인 개념까지 포함된 천막), 농작물을 건조하는데 쓰이는 비닐, 회사나 학교 행사에 사용되는 그늘막, 포장마차 등이 넓게 보자면 모두 천막이다. 그러니, 고객의 범주도 상당히 넓다.”-그럼 캠핑 장비인 텐트도 천막인 것인지.“텐트는 보다 세밀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품목이다. 단가와 제작 장비, 재단 기술의 차원에서 볼 때 천막이라 부르기엔 적당하지 않다. 텐트 아래에 까는 방수막은 천막으로 봐도 무방하다.”△ ‘안전 문제’에 관해선 고객과 타협하지 않아세월의 흐름 속에서 천막을 만들고 설치하는 일이 호황을 누릴 때도, 불황을 겪는 지금도 윤성원 대표는 변함없이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아침 8시면 가게 문을 열고, 죽도시장의 하루가 끝나는 해질 무렵까지 부산천막을 지키거나 천막을 주문한 곳으로 가서 설치 작업을 진행한다. 해가 긴 여름에는 밤 8시까지 하루 12시간 작업이 이어진다.주 5일제 근무가 보편화된 요즘도 윤 대표는 토요일은 일하고 일요일만 쉰다. 30년째 주 6일 근무다.천막을 주문하고 설치를 의뢰하는 고객들이 많던 과거엔 2~3명의 직원을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좋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혼자서 일하는 경우가 흔하다.조금 큰 규모의 외부 작업을 나갈 때는 일당을 주는 일용직을 찾거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천막 관련 일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온 시간 안에서 얻은 보람이 없을 수 없다. 강산이 3번 바뀔 만큼의 기간이었으니 거기서 생긴 ‘사업운영의 원칙’도 있을 법 했다. 그래서 물었다.-부산천막을 운영하며 가장 기뻤던 때는.“특별히 기억되는 순간은 없다. 다만 이 일을 하며 결혼해서 두 딸을 낳고 공부시켰다. 아이들이 잘 커줬고 스물일곱과 스물셋이 된 딸들이 이젠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돼준다. 남들은 어려웠다는 IMF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노력해 우리 가게가 입주해 있던 건물도 매입했다.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나름의 장사 원칙이 있을 것 같다.“손님이 요구하는 건 대부분 들어주려고 한다. 그러나, ‘안전’에 관한 건 타협하지 않는다. 일하다가 사람이 다치면 안 되니까 그렇다. 결과물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만든다. 하지만, 작업 과정에서의 안전 문제는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 △ “월급쟁이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변하는 세태에 따라 천막을 만드는 일은 갈수록 유망한 업종에서 멀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천막 주문이 들어오면 윤 대표와 아버지가 직접 치수를 재고, 제작해 고객의 업소에 설치까지 했다.헌데 지금은 대형 공장에서 대량으로 기성품 천막을 만들어 판매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주문제작 천막과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쏟아내는 기성품 천막은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 부산천막 역시 어쩔 수 없이 기성품 천막을 판매한지 오래다.윤 대표도 전업(轉業)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함께 일할 숙련된 기술자를 구하기가 힘들고, 고객도 줄어들면서 우유 대리점을 해보려고 했었다”는 게 그의 고백.그러나, 평생 천막을 만들고 설치하면서 살아왔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 천막 제작이란 걸 고심 끝에 깨달은 윤 대표는 부산천막 간판을 내리지 않았다.“외부 작업은 나이를 먹으면 힘이 부쳐 어렵다. 하지만, 가게에서 하는 천막 제작은 일흔 살까지는 할 수 있다. 앞으로 20년쯤은 더 일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웃는 윤성원 대표.처음 시작할 때는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보다 벌이가 훨씬 좋았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직장생활 30년차의 월급보다 부산천막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적을 수밖에 없는 시대다. 하지만, 윤 대표는 아직 희망을 말한다.“장사는 경험의 축적이다. 죽도시장에서 오랜 시간 가게를 꾸려온 다수의 상인은 젊은 시절부터 시행착오를 겪고, 땀 흘리며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한군데, 한군데의 가게다. 그것들이 쉽게 무너지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5-24

최고의 재료에 정성 한가득… 방송도, SNS도 인정했다

장사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고,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까지 줘야하는 행위. 결코 쉽지 않다.음식 장사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돈 주고 사먹는 음식에 까다롭고 예민하다. 이는 철저한 준비 없이 만든 음식점이 오래 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어느 분야 할 것 없다. 무한경쟁의 21세기. 시장이나 도심 상가에서 어제 본 간판이 오늘 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동네마다 미식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인 한국. 한 가지 음식만으로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30년을 이어왔다면 그 가게의 맛과 영업 전략은 보통이 아닌 게 분명하다.포항운하가 지척인 죽도시장 끝자락에 위치한 유화초전복죽.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은 전복을 듬뿍 얹은 연녹색의 맛깔스런 죽은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도 포항시민과 관광객들을 유혹 중이다.유화초전복죽의 주인은 유화초(76)씨. 자기 이름을 걸고 음식점을 운영한다. 맛이건 위생이건 자신 있다는 이야기다.“우리 가게는 1kg당 8미(마리)짜리 전복을 쓴다. 죽에 사용되는 전량을 완도에서 가져오고 있다”고 유 대표가 말하기에 되물었다.“그럼 1마리가 130g쯤 된다는 말인데, 그게 큰 건가?”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해물탕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복은 1kg이 20마리쯤 된다.”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면 손님이 먼저 안다”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난 유 대표는 인심 좋은 아버지 밑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입맛 까다로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맛있는 것, 멋스런 것을 먹고 보며 자랐다.결혼 후 포항에 정착한 것은 서른네 살 때. 처음엔 미장원을 운영했고, 이후엔 횟집도 한 경험이 있다.전복죽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아들이 어릴 때다.대부분의 음식점이 부침(浮沈)을 겪듯, 유화초 대표의 전복죽집도 잘 될 때가 있었고, 조금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유 대표의 죽을 접한 손님들의 평가는 한결같았다. “맛있고 푸짐하다”는 것.지난 ‘코로나19 사태’의 광풍 속에서도 유화초전복죽은 고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택배를 통한 주문량은 늘었다고 한다.-코로나19로 인해 음식점들이 어려움을 겪었는데.“전복이 면역력 강화에 좋다고 알려져 오히려 많이 팔았다. 젊은 손님들이 나이 드신 부모를 위해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상 밖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손님이 조금 줄었다. 하지만, 남들 안 될 때 우리는 장사를 잘 했으니 섭섭하지 않다. 지금까지 고생한 다른 가게도 함께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나?(웃음)”-30년을 큰 어려움 없이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은.“처음 죽집을 시작하며 다짐한 게 있다. 좋은 전복을 사용하고, 딸려 나가는 반찬의 재료 또한 최고의 것을 쓴다는 것이다. 조금 비싸도 돈보다 가게의 앞날을 먼저 생각했다. 싱싱한 전복으로 정성을 다해 끓이면 그 누구보다 손님이 가장 먼저 알아준다.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유화초전복죽은 이른바 ‘유명 맛 전문가’가 음식점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도 한두 차례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손님들은 방송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가게를 찾진 않는다. 그런 가게라면 유화초전복죽 말고도 많다.유 대표는 직접 먹어본 사람이 인터넷에 남기는 ‘식당 방문 후기’가 영업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는 유화초전복죽의 든든한 우군(友軍)이다.△ 생에 대한 낙관과 웃음으로 건강 유지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일흔여섯은 적지 않은 나이다. 종일 주방에 서서 일해야 하고, 많게는 하루 100그릇의 전복죽을 만들어 포장하는 건 손자가 대학생인 할머니에겐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유 대표는 항상 웃는 얼굴이다. 목소리도 우렁우렁 활기에 차있다. 멍게젓과 꼴뚜기젓, 동치미와 고추장아찌 등 내오는 반찬 인심도 넉넉하다. 게다가 반찬 하나하나가 죽만큼이나 맛있다. 노령임에도 크게 아픈 곳 없어 보이는 유화초 대표의 건강을 지켜주는 건 아마도 생래적인 낙관성과 환한 미소가 아닐지. 그런 성격은 인터뷰에서도 드러났다.-처음 죽도시장에 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가.“젊은 시절엔 미장원과 횟집도 운영해봤다. 죽도시장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건 전복죽집을 하면서다. 어떤 사람은 ‘예전이나 현재나 살기가 어렵다’고 앓는 소리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이 아무리 어려워도 처음 장사를 시작하던 47년 전보다야 백번 낫다.”-유화초전복죽은 어떤 사람들이 찾는지.“죽집엔 나이 지긋한 손님이 대부분일 것이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젊은 손님이 훨씬 많다. 30~40대가 8할은 되는 것 같다. 그들이 먹어보고 부모님들 몫으로 포장을 해가거나, 택배 주문을 한다.”-전복죽 이상으로 딸려 나오는 반찬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메인과 서브가 두루 맛있다니 음식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듣기 좋은 말이다.(웃음) 반찬 만드는 특별한 방법이 있냐고? 없다. 그저 제철에 나오는 좋은 멍게를 깨끗하게 까서 좋은 소금에 절이는 게 전부다. 동치미도 제주산 무를 사서 직접 만들고, 고추장아찌도 내가 담근다. 앞서 말했듯 그 과정에선 식재료의 가격보다 품질을 먼저 본다.” △ 죽도시장서 인천 소래포구로 이어진 ‘손맛’유화초 대표는 2015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드는 전복죽을 특허청에 상표 등록했다. 가게엔 특허청장의 직인이 찍힌 서비스표등록증이 걸려 있다.유 대표의 정갈한 손맛은 며느리에게로 이어졌다. ‘유화초’라는 이름을 걸고 전복죽을 만들어 팔 수 있는 곳은 전국에 단 두 곳. 포항 죽도시장과 인천 소래포구에만 있다.인천 유화초전복죽도 손님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유 대표가 알려준 30년 축적된 노하우로 만들어지는 죽과 반찬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포항의 몇몇 산부인과는 유 대표의 빼놓을 수 없는 단골이다. “옛날부터 산모의 젖이 모자라면 전복을 먹였다”는 게 유 대표의 설명. 아기를 낳은 후에도 먹지만, 임신 중 입덧이 심할 때도 전복죽을 먹으면 속이 편안해진다고 한다.“호주와 싱가포르에서 온 관광객도 손님으로 받은 적이 있고, 서울과 강원도는 물론, 전복을 공급받는 완도에서도 전복죽 택배 주문이 온다. 그럴 때면 고생은 까맣게 잊고 웃음 짓게 된다”는 유 대표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이제 막 식당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조언할 게 있냐”는 물음에는 간명하면서도 당연한 이야기를 들려줬다.“내 식구가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들 시작할 땐 그런 초심을 가진다. 그걸 잊는 순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유화초전복죽이 유명해지면서 체인점을 하고 싶다는 이들도 늘었다. 지금까지 제의받은 것만도 60여 건. 여든 살쯤 되면 적절한 대가를 받고 그들에게 맛있는 죽과 반찬 만드는 방법부터 음식점 운영 방식까지 모두 알려준다는 게 유 대표의 계획이다.“이후엔 뭘 할 거냐고? 그땐 나도 좀 쉬어야지. 좋아하는 노래 배우러 노래교실도 다니고…. 지금껏 고생했으니 그래도 되지 않겠어?”/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5-17

실용적인 맞춤 요금제로어르신들 쌈짓돈 지켜요

훤칠한 키에 환하게 웃는 얼굴부터가 호감이 간다. 인사성도 밝다. 이른바 ‘어르신들이 사위 삼고 싶어 할 청년’으로 느껴졌다.복개된 포항 죽도시장 칠성천 입구에서 핸드폰을 판매하는 행복텔레콤 고은성(32) 대표는 나이 지긋한 시장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사이에서 ‘손자 같은 상인’으로 통한다.고 대표가 건넨 명함 뒤쪽엔 이 청년상인이 마음속에 세워둔 장사의 원칙이 적혔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손님들이 의심하지 않게, 진심을 담아, 나가는 분들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간명한 문장이지만 그 옛날부터 물건을 사고파는 원칙이라 할 상도(商道)가 고스란히 담겼다.스스로 “이 일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그는 죽도시장에서 가게를 열기 전 삼성에서 소프트웨어 관련 업무와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맡아 일했다.고등학교 때는 자동차에 관심을 가지고 정비 등을 배웠다. 무언가 만들고 고치는 일이 좋아서였다.대학은 조리학과를 다녔는데, 일식 요리를 익혔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웃음과 만족감을 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있었다.“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무 비싼 요금제의 핸드폰을 쓰는 게 안타까웠어요. 보통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의 요금제를 사용하시는데, 사실 월 1만1천 원의 요금으로도 크게 불편 없이 쓰실 수 있거든요. 어렵고 치열한 시대를 힘들게 살아오신 어르신들에게 복잡한 서류 작업을 대신 해주고, 적절한 금액의 핸드폰과 요금제를 안내해드리고 싶었어요.”이는 고은성 대표가 말하는 ‘노인들이 많이 찾는 죽도시장에서 가게를 연 이유’다.삼성에서 소프트웨어 관련 업무와 노인 대상 강의를 맡아 일하다 1년 전 가게를 열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무 비싼 요금제의 핸드폰을 쓰는 게 안타까웠어요. 보통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의 요금제를 사용하시는데, 사실 월 1만1천 원의 요금으로도 크게 불편 없이 쓰실 수 있거든요. 복잡한 서류 작업을 대신 해주고 적절한 금액의 핸드폰과 요금제를 안내해드리고 싶었어요. 요금제는 유튜브와 관련 인터넷 사이트 등을 보면서 조금만 정보를 수집해도 자신에게 꼭 맞는 걸 선택할 수 있답니다. △ 환하고 깨끗한 매장은 죽도시장 어르신들의 쉼터고 대표가 운영하는 핸드폰 매장은 보통의 전통·재래시장 가게와 달리 채광이 좋아 밝고 환하다. 거기에다 깨끗이 정돈돼 있어 흡사 카페처럼 보인다. 사탕과 바나나 등의 간식도 늘 준비돼 있다.1년 전 죽도시장에 정착하며 안면을 익히게 된 몇몇 어르신들은 행복텔레콤 매장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한참 동안 쉬어가기도 한다.-아무래도 어르신 손님이 많이 올 듯하다. 어려움은 없는지.“젊은 사람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편합니다. 예전 직장에서도 어르신들을 자주 만났던 터라 노인 응대가 어색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분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나를 귀여워해주던 조부와 조모의 모습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아서 좋아요. 저렴하고 실용적인 핸드폰과 요금제를 추천해주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칭찬도 해주시는데 그럴 땐 보람을 느끼죠.”-가게를 연 후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핸드폰을 4대나 가지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어느 날 가게에 들어와 핸드폰을 바꾸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때 놀랐습니다. 한 달 핸드폰 요금이 40만 원이 넘더군요. 그분은 사실 그만큼 요금이 나온다는 것도 잘 모르고 있었어요. 차분하게 설명을 해드리고 해지하는 걸 도왔습니다. 우리 매장에서 핸드폰을 구입하지는 않았기에 내게 이익은 없었지만, 밝게 웃으며 나가시는 모습만으로도 좋았습니다. 그분은 그날 이후에도 가끔 오셔서 내가 손자처럼 보인다고 하시며 쉬다 가시곤 합니다.”△ 꼼꼼한 비교와 정보 수집이 저렴한 핸드폰 구입의 비결-자기에게 적절한 핸드폰과 요금제를 고르는 노하우를 알려준다면.“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싼 물건은 꼼꼼하게 비교하면서 구입하는데, 핸드폰처럼 고가의 물품은 머리 아프고, 귀찮다고 고민 없이 구매 서류에 사인을 해버립니다. 보험과 적금, 펀드도 가입할 때 여러 조건이 있는 것처럼 핸드폰 요금제도 마찬가지에요. 유튜브와 관련 인터넷 사이트 등을 보면서 조금만 정보를 수집해도 자신에게 꼭 맞는 걸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렵지도 않아요. 만약 제게 도움을 청한다면 보다 좋은 조건으로 선택해 고를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웃음)”각각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고 대표의 또래 친구들은 아무래도 개인 사업을 하기보다는 직장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기자와는 세대가 다른 30대 초반의 청년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했다.“‘코로나19 시대’가 3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친구들이 ‘안정적인 직장생활이 편하다’는 이야기를 하긴 합니다. 상황이 녹록지 않으니 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친구들도 개업을 망설이긴 하죠. 하지만, 직장 안에서 겪는 상사와의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떨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흥하든 망하든 자신의 책임 아래서 삶을 살아가는 게 개인 사업의 매력이니까요.”그렇다면 고은성 대표가 안정적 직장생활을 떠나 핸드폰 매장 운영이라는 사업의 길을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뭘까? 그 궁금증에는 이런 답이 돌아왔다.“직장에선 크건 작건 차별과 부조리함을 만나게 되고, 동료들과의 실적 다툼을 하게 되죠. 자신이 회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남들보다 더 빨리 승진하기 위해 무한경쟁의 톱니바퀴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죠. 반면 사업은 주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수가 있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가 안고 가야 하기에 남에게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찾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성장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은 것 같아요.” △ 지금의 꿈과 앞으로 10년 후 미래 계획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가지고 바쁘게 살아가는 젊은이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건 희망의 에너지를 주변에 선물한다. 고 대표도 그런 사람인 듯 보였다.그러나 정작 자신은 죽도시장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험한 세파 헤쳐 온 나이 많은 상인들에게서 힘을 얻는다고 하는 고은성 대표.“쉬는 날 없이 부지런히 일하시는 주변 어른들을 보면서 많은 걸 배웁니다. 죽도시장 상인들 대부분에겐 넘치는 열정과 자부심이 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은 ‘자기가 사장인데 아무 때나 쉬고, 마음대로 가게 문 열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보다 일찍 아침을 열고, 늦게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매일 더 좋은 장사 방법과 손님 응대 방식을 고심하는 선배 상인들을 보면서 사업 초보자인 저는 존경의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앞으로 10년 후엔 보다 많은 손님들에게 신뢰를 얻어 매장을 넓히고, 저렴한 핸드폰과 요금제를 권유하며 사업을 키워가고 싶다는 고 대표.현재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을 벗어나, 내 집 마련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옹골찬 미래 계획을 이야기하는 그는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마지막으로 물었다.“이 말은 빼놓지 않고 꼭 하고 싶은 게 있다면?”“당신의 핸드폰 요금은 안전한가요?”라고 되묻는 고 대표.자신의 의사를 짤막하고 재치 있게 전달하는 이 어법만을 놓고 보자면 반짝이는 작은 귀고리가 썩 잘 어울리는 고은성 대표는 영락없는 ‘21세기 신세대 청년’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5-10

내 잔치인듯 정성… 돈보다 더 귀한 보람 얻어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유교적 전통이 여전한 20세기 영남의 어느 도시. 카메라는 기와가 근사한 한옥을 훑어간다. 젊은 며느리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제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마침내 자정이 가까워서야 시작된 제사.그러나, 며칠을 제수(祭需) 준비부터 요리까지 하느라 고생한 며느리는 제사상 근처에도 가질 못한다. 부엌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성일 뿐. 그것만이 아니다. 시어머니에게 야단까지 맞는다.“너는 생선을 이렇게 이렇게밖에 못 굽니. 나물은 또 이게 뭐냐? 너무 오래 데쳤잖아.”세상의 변화 속도는 빠르다. 2022년 3월 현재. 이런 풍경은 TV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촌극’에 가깝지 않을까?포항 죽도시장에서 15년 넘게 ‘포항 전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자(64) 대표는 요즘 고부(姑婦)들이 장보는 모습을 궁금해 하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정하게 함께 와서 튀김과 전은 어떤 걸 선택하고, 문어는 얼마만한 걸 구입하고, 탕국은 어느 정도 양으로 할지 의논해서 주문합니다. 옛날하곤 전혀 다르죠. 요즘엔 직업을 가진 여자들이 대부분이잖아요. 게다가 며느리 타박하는 무서운 시어머니도 이젠 대부분 사라졌어요.” △ 폐백, 돌잔치, 제사까지… 수십 가지 음식 모두 가능포항 전집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은 20가지가 넘는다. 옥호는 ‘전(煎)집’이지만, 단순히 전만 부쳐 내는 건 아니다.폐백 음식, 돌잔치 음식, 제사 음식, 이바지 음식까지 우리가 살아가며 겪게 되는 기념할만한 날에 사용될 대부분의 음식을 만든다고 보면 된다.그래서다. 죽도시장 한편에 자리한 포항 전집에 들어서면 예전 시골 잔칫집 마당에 넘쳐나던 음식 냄새가 그대로 풍겨온다. 유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농담 섞어 말하자면 김 대표는 남의 집 잔칫상과 차례상을 대신 차려주느라 정작 자신은 설과 추석에도 쉬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보면 쉽지 않은 직업이다.-남들 쉴 때 더 바쁘다. 힘들지 않나.“세상에 자기 마음에 꼭 드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이걸 하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키웠다. 가게를 찾아주는 손님들 모두가 귀하다. 특히 ‘음식이 참 맛있다’는 말을 들으면 새벽부터 나와 전 부치고, 닭 삶으며 흘린 땀이 웃음과 함께 식는다.”-15년 내내 한여름에도 뜨거운 철판 앞에서 요리하며 살았는데.“나이를 먹으면서 가끔 힘에 부친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젊어서부터 남에게 싫은 소리는 듣지 말고 살자는 나름의 원칙을 가졌다. 일을 하는 동안은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음식이나 응대에 대해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살려한다. 정 바쁘면 큰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런다.”-가벼운 질문 하나 하자. ‘맛있는 전’을 만드는 노하우가 있는지.“특별한 비결이나 그런 건 없다.(웃음) 신선하고 좋은 고기와 채소로 금방 부쳐 낸 전이 가장 맛있다. 만약 식감이 퍼석하거나 물컹하다면 그건 재료가 좋지 않았거나, 만든 지 오래된 것이다. 전과 튀김은 요리할 때 기름 온도도 중요하다. 그것 정도만 신경 쓰면 누구나 맛있는 전을 만들 수 있다.” △ ‘이바지 음식’이 최고가… 300만 원짜리도 있어일상적으로 대하는 밥상이나 술상과 달리 사람이 일생에 한 번밖에 못 받아보는 ‘상’이 있다. 돌잔치 상이 그렇고, 폐백 음식과 이바지 음식이 차려지는 상이 그렇다.이바지 음식은 혼례를 전후로 신부 쪽에서 신랑 집으로 보내는 음식을 뜻한다. 예의와 정성이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만드는 비용도 만만찮다.“과일, 떡, 해산물, 고기 등등을 격식에 맞게 차려내는 이바지 음식은 그걸 신랑 집으로 보내는 고객의 마음을 생각해 나 역시 정성을 다해 만든다. 수십 가지 음식이 준비되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 보통으로 해도 100만 원 이상이다. 그때그때 식재료의 가격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만들어본 최고가의 이바지 음식은 300만 원짜리였다.”장사를 하는 사람의 기본은 큰손님만이 아닌 작은 양을 구입하는 손님도 차별 없이 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김 대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인터뷰가 진행될 때 손님 한 명이 포항 전집을 찾았다. 기자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반갑게 고객을 맞은 김 대표는 튀김 5천 원어치를 팔면서도 깍듯하고 다정했다.-‘포항 전집’의 주요 고객은 어떤 사람들인가.“딱히 어떤 분들이 자주 온다고 말하기는 그렇다. 나이 든 사람도 있고, 젊은 주부들도 주문을 많이 한다. 고부가 함께 오는 경우도 있다. 무속인들도 상을 차리기 위해 방문한다.”-인터넷을 통한 주문이 늘어나는 추세인데.“우리 가게도 전화 주문은 물론, 인터넷으로도 주문을 받는다. 시대가 바뀌니 거기에 맞춰가는 것이다. 나는 인터넷 사용이 서툴지만 딸이 잘 도와준다. 대형 마트와 인터넷 쇼핑몰이 전통시장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지만, 사실 이 문제를 극복할 뾰족한 방법은 없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더욱 잘 하는 것으로 단골을 만들고, 단골이 입소문을 내주면 이렇게 또 가게를 유지하며 장사를 할 수 있지 않겠나.(웃음)” △ 어쨌거나 고생스러운 일, 딸은 다른 직업 가졌으면지난해 겨울부터 올봄까지 매주 죽도시장 상인들과 만나며 느낀 게 있다. 음식 장사를 하는 이들은 일종의 ‘사명감’ 같은 걸 가진 듯했다.‘돈 주고 사먹는 걸 함부로 만들어선 안 된다’는 공통된 태도를 그들에게서 본 것이다. 김영자 대표도 다르지 않았다.“손님으로부터 ‘이거 어제 구운 전 아니냐’라는 말을 들으면 종일 기분이 우울하다”는 그녀는 “며칠 전에 먹어보고 맛있어서 또 왔어요”라는 소리에 돈보다 더 귀한 보람을 얻는다고 했다.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추우나 더우나 하루 12시간 이상을 불 앞에서 전을 뒤집고, 기름 끓는 솥에서 튀김을 건져내고, 만들어진 음식을 예쁘게 담아내는 건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니 지극히 어렵고 힘든 일일 터. 그래서일 것이다. 아래와 같은 대답이 나온 것은.-가끔 일을 돕는다는 딸에게 가게를 물려줄 생각은 없는지.“아니다. 고생스러운 건 나 하나로 족하다. 매일 불판 앞에서 가스 냄새 맡고 사는 딸의 모습을 보기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딸이 원한다고 해도 내가 말릴 생각이다. 또 하나, 만약 딸이 장사를 한다면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나. 얼마 후면 일흔이다. 그때까지만 일하고 나도 내 시간과 여유를 가지며 살고 싶다.”과장과 숨김이 없는 사람. 1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며 든 생각이다. 그런 김 대표의 정직한 어법은 식재료를 고르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릴 때의 태도로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을까?20년 가까운 세월, 남의 잔칫상을 자신의 잔칫상을 차리는 심정으로 만들어온 김 대표. 그러니, 적당한 때가 되면 편하게 쉬어야 마땅하다. 그래서다. 일흔 살이 되면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그녀의 꿈을 기자 역시 응원한다.스스로 정한 김영자 대표의 정년퇴직이 이제 5~6년쯤 남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포항 전집 파전과 오징어튀김, 경북 제사상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돔배기 구이 맛은 변함없을 테니 단골들은 미리 걱정하진 마시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3-29

단골 한 분이라도 와준다면, 문 닫을 일 없을 겁니다

32년과 53년.“성공하려면 한 우물을 파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간단하게 쓸 수 있는 앞의 문장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격언처럼 오랜 시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것일 터.살아오는 내내 같은 일을 하며 삶의 절반 혹은, 2/3 이상을 보낸 이들을 볼 때면 경이와 존경의 마음이 함께 돋아난다. 길고도 긴 시간이 주는 압도적인 감정에 기가 질릴 때도 있다.‘포스코신문’이 발행되던 지난 2010년. 원고 청탁을 받고 인천에 있는 포스코 협력사를 찾아갔다. 철광석에서 주철을 만들어내는 제철소의 고로(高爐). 그 고로의 핵심 설비부품 중 하나인 풍구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거기서 32년을 일한 사람과 만났다. 섭씨 450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풍구 반제품을 앞에 두고 용접을 하며 그 세월을 보냈다고 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열기를 견디지 못한 팔뚝에 물집이 잡히는 작업.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 공장에 들어간 32년 베테랑 용접공은 “시간이 빠르다. 올해 내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니…”라며 웃었다. 터무니없이 맑고 환하던 그 미소가 12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그리고, 지난주 죽도시장에서 김성준(71) 씨를 만나 악수를 했다. 삼화상회라는 이름의 생활용품 판매점을 운영하는 그는 “같은 장소, 같은 가게에서 53년을 일했다”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앞의 용접공보다 21년이 더 길다. 그 정도 세월이면 김성준 대표가 파온 ‘한 우물’은 누구도 깊이를 쉽게 가늠하기 힘들 듯하다. △ 열여덟 소년 점원에서 삼화상회 주인이 되기까지1960년대 후반. 경주시 양북면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낸 ‘소년 김성준’은 포항으로 이주해 죽도시장 조그만 잡화점에 점원으로 취직한다.당시 죽도시장엔 세찬 비와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는 차양막이 드물었다. 뿐이랴. 장마철이면 주변 거리가 온통 질척거리던 시절.그 당시 대부분의 소년 노동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씨 역시 부지런히, 열심히, 가게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했다. 요즘 같은 주 5일제 근무는 물론, 일요일 휴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던 시대다.우산과 빨래집게, 수세미와 양말 등 비교적 저렴한 생활용품을 판매하고, 많은 양을 주문한 고객들에겐 집으로 배달도 해줬다. 연탄집게와 고무신처럼 지금은 보기 힘들어진 물품도 잘 팔리던 때였다.국경일이고, 일요일이고 없었다. 가게 주인이 “오늘 고생했다. 내일은 쉬어”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매일 출근하는 생활이 오래 반복됐다. 젊음이라는 지치지 않는 에너지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21세기 청년노동자들에겐 보편화 된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이란 단어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던 한국의 1960~1980년대.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20년을 점원으로 살아온 ‘청년 김성준’이 힘들게 아껴 모은 돈으로 자신이 일하던 잡화점을 인수했다.나무로 만든 낡은 건물을 콘크리트를 사용해 다시 짓고, 새로운 간판을 달았다. 대대적 재건축이었다. 김 대표가 점원에서 ‘삼화상회’ 주인이 되던 순간이다.-점원에서 주인이 된 후 가장 좋았던 건 뭔지.“지금은 아침 8시에 가게 문을 열고 저녁 7시엔 닫는다. 11시간쯤 일하는 건데, 이것도 짧지는 않다. 토요일엔 영업을 하지만 일요일은 무조건 쉰다. 나는 교인이고 교회에 가야하니까. 점원일 때는 설과 추석을 제외하면 거의 365일 쉬지 못했다. 왜냐고? 점원이 제 마음대로 할 수야 없지 않은가.(웃음)”-대형 마트와 인터넷을 통한 물품 거래가 일상화되면서 재래시장 생활용품 판매점 운영이 어려울 텐데.“솔직히 말하자면 활로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나이도 있고 해서인지, 인터넷에 익숙하지 못하다. 다만 오랜 세월 우리 가게를 찾아준 손님들을 위해 앞으로도 문을 닫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젠 어딜 가도 구입하기 쉽지 않은 참빗과 비녀 등을 찾는 할머니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 않겠나.” △ 외상 대금 못 받았던 서글픈 기억도 이젠 추억으로김성준 대표는 크지 않은 몸피에 넉넉한 인품이 묻어나오는 웃음을 지녀 누구라도 “사람 좋아 보인다” 할 만한 인상이다. 긴 시간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만들어진 얼굴이 분명해 보였다.장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게다가 김 대표처럼 “손님은 왕이다”란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시절에 상인이 된 이들은 더 그렇다. 고객 앞에선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다.인터뷰 도중 두 명의 손님이 삼화상회에 들어왔다. 한 사람은 김치 등을 보관하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구매하러, 또 다른 이는 방금 사간 행주의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교환하러 온 것이었다.이 두 손님을 응대하는 김 대표의 표정과 몸짓에선 53년 장사를 하며 농익은 친절이 그대로 보였다. 그가 물건을 팔고, 바꿔주는 모습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러웠다.김 대표의 인품은 종교적 독실함과 더불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해온 반세기의 시간이 만들어준 것 같았다.몇 가지를 더 물었다. 지금 떠올려 보니 김 대표는 표정만이 아니라 중저음의 다정한 목소리까지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줬다.-점원 시절부터 손님에겐 언제나 친절했던 것인가.“내 마음이 조금 상하더라도 우선 손님을 배려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니 매일 그럴 수야 없고, 그렇지 않다고 느낀 손님도 없지는 않을 거다.(웃음)”-장사를 하다보면 잊지 못할 손님이 있을 것 같은데.“여기서 일하며 집을 사고, 아들을 키웠다. 그런 삶을 만들어줬으니 찾아준 손님들 모두가 고마운 사람이다. 이건 조금은 서글픈 기억인데…. 오래전 몇 번 외상 대금을 받지 못해 마음고생을 했던 게 떠오른다. 그래도, 그 시절엔 상인이나 손님이나 다들 어려움 속에서도 신뢰와 정이 있었으니 외상 거래도 하고 그랬다. 이제는 다 그리운 추억이다.”△ 상인들 눈물 배인 생활 터전, 쉽게 무너지지 않아온전히 빠져나올 기미가 아직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사태’의 어둡고 습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게 햇수로 3년째다. 김 대표의 삼화상회도 고충이 작지 않다.“가장 힘든 게 시장을 오가는 사람이 줄었다는 겁니다. 대략 셈해도 매출이 절반쯤 떨어졌어요. 몇 차례 소상공인 지원이 있었지만, 그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고 주변 상인들은 말합니다. 다행히도 내 경우엔 임대료 부담이 없지만, 가게 월세를 내는 것도 힘겨워하는 분들을 보면 마음 아파요.”김 대표의 설명처럼 시장 전체가 간단치 않은 상황에 처해있지만, 그래도 손 놓고 멍하니 앉아있을 수만은 없을 터.죽도시장 상인들 대다수는 수십 년간 가게를 운영하며 어려운 상황을 이전에도 여러 번 겪었고, 그 어려움을 이겨낸 경험이 축적돼 있지 않은가.아직은 마트나 슈퍼마켓과 달리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에누리하는 재미를 잊지 못해 전통·재래시장을 찾는 나이 지긋한 고객들이 있다. 거기에 TV를 통해 소개된 죽도시장 내 ‘맛집’을 찾아 먼 곳에서 오는 젊은 관광객들도 늘어나는 추세.누가 뭐래도 죽도시장은 김성준 대표를 포함한 수천 명 상인들의 생활 터전이며, 그들의 축축한 땀과 눈물 배인 삶의 현장이다. 그런 곳이 쉽게 무너질 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3-22

그리운 ‘엄마의 손맛’ 전국 곳곳으로 전합니다

영남에서 태어나 20~40대의 상당 기간을 서울과 호남에서 보냈다.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산과 바다가 인접한 한국은 적지 않은 식재료와 다양한 조리법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 연장선에서일 것이다. 즐기는 음식도 지역마다 다르다.경기도 사람들이 젓갈 사용을 줄여 담백한 김치 맛을 즐긴다면, 영호남인은 멸치나 갈치로 만든 젓을 듬뿍 넣은 농익은 김치를 찾는다.전라도에선 콩국수에 설탕을 넣어 먹는데, 소금으로 간을 맞춘 콩국수를 먹어온 경상도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깜짝 놀란다.참기름 섞은 소금에 구운 삼겹살 먹는 서울내기들은 멸치젓국에 돼지고기를 찍어 먹는 제주도민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바뀌고 있다.30년 전쯤 “부친은 양념한 콩잎을 좋아한다”는 기자의 말에 영남 외에 다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의아해했다. “깻잎이 아닌 콩잎도 먹는 거야?”포항 죽도시장에서 3년 전부터 영업을 시작한 반찬가게 ‘짭쪼롬밥상’의 최고 인기 아이템은 갖은 양념에 무친 콩잎이다. 이 가게 장금순(59) 대표는 말한다.“주변으로만 양념콩잎을 택배로 보내냐고요? 서울과 강원도는 물론, 제주도와 전라도, 심지어 서쪽 바다 건너 백령도에서도 주문이 옵니다.” △ 여고생일 때부터 TV 요리 프로그램을 즐겨 보던 소녀는….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나고, 1~2인 가구가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반찬가게도 동시에 성장했다. 시장과 주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 힘든 이들이 ‘믿고 구매해 먹을 수 있는 반찬’을 찾고 있는 것.선호하는 반찬의 지역 간 경계도 무너졌다. 이제 양념한 콩잎은 영남 사람은 물론, 서울 사람도 좋아하고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도 인기다. 예전 경상도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홍어요릿집을 지금은 대구와 부산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처럼.지역 특산물도 전화나 인터넷 메지시를 통해 주문한 다음 날이면 받아볼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동해의 대게’ ‘서해의 조개’ ‘강원도의 감자’ ‘제주도의 갈치’라는 말도 무색해졌다. 손가락 하나로 요청해 내일 먹을 수 있는 게 지천이다.반찬가게도 마찬가지. 장금순 대표가 만든 ‘짭쪼롬밥상’의 양념콩잎과 ‘빡빡장(강된장)’은 이제 포항만의 별미가 아니다. 백령도와 광주에 사는 이들의 따끈한 밥에도 올려지고, 비벼진다.젊은 시절엔 여러 군데의 식당에서 주방 책임자로 일했던 장 대표가 “당신과 우리만 나눠 먹기엔 아깝다”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죽도시장에 점포를 얻은 건 ‘코로나19 사태’ 직후다. 그리고는, 금방 자리를 잡았다. 안착의 이유는 간명했다. 장 대표가 만들어내는 반찬이 맛있었기 때문.-언제부터 요리하는 걸 좋아했나.“결혼 전부터다. 아니,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방학 때면 TV에서 방영하는 요리 프로그램을 보고 그걸 따라해 아버지께 드리곤 했다. 지금 반찬가게를 하고 있는 건 내 적성을 찾은 것이니 몸은 힘들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짭쪼롬밥상’에서 판매하는 반찬의 가짓수는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그걸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인지.“대략 30개쯤 된다. 그중 3~4가지는 1차로 가공된 걸 사와서 내가 2차로 양념을 더한다. 나머지 90퍼센트는 직접 만든다. IMF와 각종 전염병 파동이 있기 전에는 큰 음식점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런 시기가 거듭되면서 나를 포함한 주방 책임자들이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음식을 만드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면.“시작하기 전부터 작은 가게지만 나와 딸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반찬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다. 죽도시장엔 반찬가게가 셀 수 없이 많다. 여기서 자리 잡기 위해선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조리 과정에서의 철저한 위생관리와 깔끔한 포장, 친절이 우리 가게의 무기라면 무기다. 또 하나를 더하자면, 좀 비싸더라도 재료는 항상 최고의 것을 선택해 사용한다. 좋은 식재료는 조리 시간도 줄여준다.” △“엄마 반찬은 다이어트의 적”이라는 말은 듣기 좋은 칭찬기자 주위엔 혼자 사는 남성이 적지 않다. 집밥을 자주 먹게 되는 ‘코로나 시대’이니 요리에 서툴다면 부득불 반찬가게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짭쪼롬밥상’을 함께 운영하는 장 대표의 딸 김자연(37)씨도 이런 세태를 잘 알고 있었다.“주부들이 반찬가게를 가장 많이 찾는 건 분명하죠. 근데, 요즘엔 혼자 사는 남자 손님들의 비율이 30퍼센트는 되는 것 같아요. 할머니나 어머니가 해주던 반찬 맛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우리 가게 단골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어머니 장금순 대표가 각종 나물을 무치고, 된장을 맛깔나게 끓여내는 손재주를 가졌다면, 딸 김씨 역시 또 다른 차원에서 손재주가 빼어나다. SNS를 이용해 가게를 홍보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입소문과 더불어 디지털 홍보에도 소홀함이 없는 ‘짭쪼롬밥상’은 가게에서 판매하는 것만큼이나 퀵서비스와 택배를 통한 반찬 판매량도 많다.어린아이를 가진 주부들은 시장을 직접 찾아 물건을 구매하기가 쉽지 않다. 그럴 경우엔 퀵서비스로 반찬을 주문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SNS를 보고 택배로 양념콩잎과 강된장을 찾는 이들도 차츰 늘어나는 추세다.김자연 씨 또래의 단골들은 장 대표를 “엄마”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단다. 장난처럼 “엄마 반찬 때문에 내가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가 없어요”라고 애교를 부리는 손님 이야기를 하며 모녀가 웃었다. 유쾌한 엄마와 딸이었다.-가게의 ‘시그니처 메뉴’인 양념콩잎 재료는 어디서 구하는지.“포항 신광면에서 재배한 콩잎을 쓴다. 그곳은 황토와 마사(磨沙·화강암이 풍화된 모래)가 섞인 토질이라 콩잎 품질이 좋다. 콩잎무침 열풍이 불면서 벼농사 대신 콩 농사를 짓는 할머니들이 많아졌다. 2~3농가가 기른 콩잎을 우리가 전부 구매하고 있다.”-잊지 못할 손님도 있을 것 같다.“반찬 사러 오면서 ‘엄마 드세요’라며 과일과 피로회복제를 선물하는 젊은 손님들이 고맙다. 또 한 분 기억나는 사람은 40대 위암 환자다. 봄이면 열무와 무를 채 썰어 담은 김치와 강된장을 만든다. 아팠던 손님이 그걸 먹고는 잃었던 식욕이 돌아오고, 속이 편안해졌다는 인사를 해왔을 땐 내심 뿌듯했다. △ 딸에게 대물림될 수 있게 건강한 음식 만들고 싶어장금순 대표는 선량한 미소를 가졌다. 그러나 반찬의 재료를 살필 때는 누구보다 냉정해진다.평소와 달리 좋지 않은 식재료를 보내온 도매상은 장 대표의 타박과 함께 그걸 되돌려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대신 품질 뛰어난 재료는 가격을 따지지 않고 흔쾌하게 사들인다. 때론 매몰차게 거래처를 대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다.“누군가 내가 만든 반찬을 맛있다고 해주면 몸이 힘든 것도 잊고 신나서 일을 한다. 이건 장사하는 사람으로서의 보람인 동시에 어려움이다. ‘엄마’라고 부르는 손님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닌가?”이런 어머니를 잘 알고 곁에서 지켜본 딸 자연 씨 역시 “사람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한다면 변치 않는 소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덧붙였다. 지극히 옳은 말이니 부연해 더 물을 것도 없었다.장 대표는 자신이 일을 그만둘 때가 되면 딸에게 ‘짭쪼롬밥상’을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맛과 더불어 음식을 대하는 태도까지 그대로 대물림되기를 바란다.죽도시장엔 오늘도 맛깔스런 반찬을 만들어놓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손님을 기다리는 모녀가 있다. 그녀들이 봄날이 누구보다 환하기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3-15

일과 마치는 시간이요?그건 손님이 정하는거죠

옛 어른들은 허투루 버려지는 밥 한 톨, 김치 한 조각도 안타까워했다. 벼와 배추를 기르는 농부의 수고와 그걸 밥과 김치로 만든 이들이 흘린 땀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비단 농산물만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맥주에 곁들이는 안주로 쉽게 접하는 마른 오징어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반찬으로 즐겨 먹는 마른 멸치 등의 건어물도 많은 이들의 고생스런 손길을 거쳐 술상과 밥상에 오른다.간단치 않은 그 과정을 생각한다면 음식을 함부로 버리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포항 죽도시장엔 1970년대 후반 노점에서 시작해 50년 가까이 건어물을 팔아온 할머니가 있다. 중앙건어물 최병숙(75) 대표다.최 대표의 아들인 김종하(52)씨는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했다. 졸업 후엔 중견 건설업체에 취직해 스키장과 골프장이 만들어지는 현장에서 전공을 살려 일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IMF의 광풍을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당시 종하 씨는 갓 결혼한 상태. 국내는 물론 해외 출장까지 잦았던 직장을 정리하고, 죽도시장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돕겠다고 결심했다.모자(母子)가 본격적으로 손발을 맞춰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그로부터 22년의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의 경력을 합하면 건어물과 함께 살아온 게 벌써 70여 년이다. △ 멀리서 경매가 열리는 날엔 새벽 3시에 일어나야건어물 판매와는 무관한 일을 하던 서른 살의 김종하 씨는 의지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모르는 건 배우고, 관행처럼 이어져온 경직된 장사 방식도 바꾸겠다는 결심을 했다. 포항으로 돌아온 직후 1~2년은 각종 해산물이 경매되는 경상도와 전라도 수산시장을 가리지 않고 무수히 돌아다녔다. 경험의 축적을 통해 목표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건어물 상점의 변화를 위해 어떤 일을 했던 건가.“어머니가 장사를 시작하던 시절엔 가져다주는 물건을 받아서 팔기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활로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보다 저렴하게 좋은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이윤도 늘고, 동시에 손님들의 만족도도 높아질 것 아닌가.외가가 부산 남포동에서 건어물 상점을 크게 한다. 일을 시작한 초기엔 그 인프라를 보고 배우기 시작했다. 건어물이 어떻게 유통되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 꽤 오랜 기간 전국을 돌아다녔다.”-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건 피해갈 수 없었을 것 같다.“보통 해산물 경매는 오전 9시에 시작된다. 2시간 전에는 현장에 도착해 구입할 물건을 살펴서 정해둬야 한다. 그래야 중매인에게 구입을 부탁할 수 있으니까. 먼 지역에서 경매가 열리는 날은 새벽 3시에 일어난다. 일을 마치는 시간? 그건 손님이 정하는 것이지 내가 정하지 못한다.(웃음) 가능하면 저녁 8시 전에는 마치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바쁠 땐 하루 14~15시간 일하는 셈이다.”중앙건어물의 ‘큰 대표’는 최병숙 씨다. 그러면 김종하 씨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위와 같은 노력이 있었으니 이젠 중앙건어물 ‘작은 대표’라 칭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듯하다.20년 이상을 다뤄온 물건이 말린 해산물이니 김 대표는 이제 자타공인 ‘건어물 전문가’다. 그래서 독자를 대신해 이런 요구를 해봤다.“좋은 건어물 고르는 방법 좀 귀띔해 주시죠.”답변은 금방 돌아왔다.“안동이나 영천 등 내륙에 사는 분들은 이전부터 봐온 게 있어 색깔이 노르스름한 건어물을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근데 그건 유통망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을 때 이야깁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바다에서 막 건져 올려 말린 게 맛있는 건어물이 됩니다. 싱싱하고 신선한 걸 건조·가공한 게 좋지요.”△ 건어물계의 스테디셀러는 누가 뭐래도 ‘멸치’유행이나 세태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오랜 기간 꾸준히 잘 팔리는 책이나 물품을 스테디셀러(Steady seller)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건어물계의 스테디셀러는 뭘까? 멸치다.-죽도시장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건어물은 뭔지.“죽도시장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건어물이 멸치다. 통영과 여수 멸치가 품질이 좋다. 멸치로 우려낸 국물, 멸치볶음, 멸치젓갈….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루에 한 번쯤은 먹게 되는 게 멸치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중앙건어물에선 한 달에 멸치가 얼마나 거래되나.“햇멸치가 나오는 7월쯤이면 한 달에 1억 원 정도가 팔리기도 한다. 대형 마트와 각 지역 부녀회 등에서 대량으로 공동구매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간단히 말해 부녀회원 1천 명이 한 사람당 2박스만 구입해도 2천 박스가 판매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공동구매의 경우엔 이문이 박하다. 판매 대금의 2% 정도가 우리 수익이니 1억 원어치를 팔아도 어머니와 내가 손에 쥐는 건 200만 원 정도다. 그래도 좋은 물건을 소비자에게 넘길 땐 기쁜 마음이 크다.”‘코로나19 사태’의 파도는 건어물 판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앙건어물도 함께 일해 온 직원을 어쩔 수 없이 내보내고 물건 구입과 배달은 김 대표가, 죽도시장에서의 판매는 어머니가 전담해 맡고 있다. 코로나19 이전보다 매출이 30%가량 줄었다고 한다.중앙건어물의 경우엔 판로 다양화와 다각화로 긴 시간 이어진 위기를 견디고 있지만, 소규모 건어물 가게는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들어 마른 멸치와 오징어를 사가던 조그만 식당과 주점이 문을 닫는 경우가 빈번한 탓이다. 비극적이게도 경제는 이처럼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래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두어 달 전통·재래시장을 드나들며 느낀 게 적지 않다. 거기서 만난 상인들의 절대다수는 정말이지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그들은 큰 욕심도 없어 보였다. 그저 아이들이 정직하게 커주고, 부모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제 몸을 아끼지 않는 ‘진짜 서민들’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건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거둔 소중한 수확이다.김종하 대표는 말했다. “어지간한 월급쟁이보다는 수입이 낫다”고. 그러나, 그 수입이란 돈을 쓰러 다닐 시간이 없을 정도로 휴일도 잊고 오랜 시간 땀 흘린 결과다. 그러니 부러워할 것도, 시기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가슴 속에 새긴 장사의 원칙이 있는지.“거창할 것 없다.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한다. 물론 장사는 이익을 남기기 위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익을 남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 몸이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 좋은 물건을 구해 손님에게 권하고, 까다로운 고객도 친절하게 응대하고, 포장에도 신경을 쓴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의 마음일 것이다.”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김 대표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고.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의 솔직하고 소박한 꿈이 기자의 가슴을 쳤다.“젊었을 땐 맹목적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이제야 욕심이 조금씩 사라지고, 나도 여유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죽도시장엔 힘들고 어렵게 사는 분들이 적지 않다. 노점을 하는 할머니들, 평생 밤낮 없이 일만 해온 어르신들이 조금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면 좋겠다. 물론 나와 어머니도 그렇게 살고 싶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3-08

3천200명 아이 이름 지어준 ‘죽도사랑방’ 지킴이

비단 포항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오가는 장소는 아니다. 대게와 과메기 등 맛깔스런 해산물이 가득하고, 온갖 농산물과 각종 생활용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죽도시장은 이미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점포 수가 2천여 개에 달하는 대규모 전통·재래시장의 위상을 지켜가고 있는 곳. 바로 그 죽도시장 한가운데서 43년 동안 지역민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철학원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 명리학자 황하수(85) 원장.명리학자란 명리학(命理學)을 공부하는 사람. 그렇다면 명리학이란 뭘까? ‘두산백과’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사주에 근거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아보는 학문. 태어난 연(年)·월(月)·일(日)·시(時)의 네 간지(干支), 곧 사주(四柱)에 근거해 사람의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학문으로 사주학(四柱學)이라고도 한다.”황하수 원장은 1968년 설립된 사단법인 한국역술인협회 고문이다. 또한, 성명학(姓名學·성명의 좋고 나쁨이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이름을 짓거나 풀이하는 학문) 명인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좋은 이름을 짓는 특별한 방법을 가진 어르신’으로 통한다.자신의 이름을 딴 황하수철학원을 운영하며 현재까지 황 원장이 이름을 지어준 아이들은 무려 3천200여 명. 물론 이름을 잘 지어서만은 아니겠지만, 그중 판사가 세 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고위직 공무원과 교장 등도 적지 않다.황 원장은 결혼식을 올리기에 좋은 날짜를 잡아주는 택일(擇日)과 결혼할 남녀의 사주(四柱)를 통해 그들이 부부로서 잘 살아갈 것인가를 예측하는 궁합도 봐준다. 그런 인연으로 50쌍이 넘는 부부의 주례도 섰다. △ 나물 팔아 번 돈으로 손자 이름을 지어달라던 할머니젊은 시절엔 포항과 전남 여수 등지에서 여러 차례 사업을 벌였고, 죽도시장에서 의류 판매점도 크게 했던 황하수 원장.한때는 남들 못지않게 부자로 살아봐서일까. 지금 그에게선 돈에 연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유 있게 나이 들어가는 기품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기자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주례를 봤던 결혼식 중 잊지 못하는 사연이 있을 것 같다.“경제적으로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부부들이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다. 그런 부부들 17쌍의 주례를 섰다. 물론 사례금은 받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신랑과 신부의 얼굴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이름을 짓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실례되는 질문일 수 있지만 이름을 짓는 비용은 얼마인가.“(웃음) 정해진 가격은 있다. 30만 원이다. 하지만, 누군가 찾아와 ‘돈이 없는데 자식의 이름은 꼭 좋은 걸로 지어주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그걸 매정하게 거절하겠나?죽도시장 노점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가 손자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게 기억난다. 그럴 땐 ‘가진 것만 주시면 된다’고 말한다. 5만 원도 받고, 10만 원도 받는다. 물론, 형편이 좋은 의뢰인의 경우엔 책정된 가격보다 더 주기도 한다.”-이른바 ‘점(占)’과 명리학을 헛갈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미신과 학문이 같을 수는 없다. 명리학은 축적된 데이터와 자료를 통해 인간의 길함과 흉함, 행과 불행을 예측한다. 무당처럼 신기(神氣)에 의존하지 않는다.” △ 85년, 우여곡절 많았던 한 인간의 삶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6·25전쟁의 참화를 딛고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는 현대적 국가의 모습과 점을 봐주고 굿을 하는 무속인의 집 앞에 걸린 ‘신장(神將)대’-무당이 쓰는 막대기나 나뭇가지-는 불협화음으로 느껴졌을 터.황하수 원장을 포함한 한국역술인협회 회원들은 도시 곳곳에 무분별하게 들어서 있던 신장대를 정리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 일로 당시 내무부장관의 표창도 받았다고 한다.‘사주보감’ ‘성명보감’ 등 여러 권의 책을 쓰기도 한 황 원장. 그는 100년에서 15년이 빠지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공간을 거쳐 한국전쟁과 4·19 혁명, 5·16과 12·12 쿠데타, 여기에 산업화시대에서 민주화시대로의 이행을 지켜봤다는 이야기. 그 정도면 개인적 삶에도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몇 가지를 물었다.-고향은 어디인가.“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태평양전쟁의 혼란 속에서 경북 안동으로 이주했다. 초등학교 때였다. 젊은 시절에 포항으로 와서 사업도 하고, 명리학도 공부하고, 철학원도 차려 지금까지 살고 있다.”-아직도 중국에 형제가 남아있는지.“형님의 아이들이 중국에서 살았다. 40년 넘게 소식이 끊겼다가 이산가족을 찾는 전국적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 그들을 만났다. 이후 한국으로 불러 국적을 취득하는데 도움을 주고 취직도 시켜줬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정말이지 어렵게 살았는데 이제는 김치공장 사장 등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으니 숙부로서 흐뭇하고 기쁘다.”-오랜 시간을 죽도시장과 함께 했다. 이곳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내 나이쯤 되면 누구라도 아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과도 몇몇 안면을 트고 지낸다. 시장 사람들이 억울한 일이 있거나, 예기치 않은 송사(訟事)에 휘말릴 땐 변호사나 법무사도 소개시켜주고 그랬다.1990년 병을 앓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재혼하지 않고 아들 넷을 혼자 키워서 결혼시켰다. 그 세월 동안 왜 어려움과 고충이 없었겠는가.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은 다 수난과 시련을 겪으며 산다. 그걸 극복하는데 작은 도움이나마 줬던 게 보람으로 남았다.”△인자하게 나이 들어가는 동네 할아버지처럼…30년 넘게 어머니 없이 자신들을 키워준 아버지의 노고를 알았던 것일까. 황하수 원장의 네 아들 모두는 열심히 살고 있다. 장남은 대기업 상무를 지냈고, 아래 동생들도 무역회사 등에서 세상이 자신에게 맡긴 몫을 다하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황 원장은 말한다. “귀하고 천한 직업을 나눌 필요 없다”고. “돈은 있다가 허망하게 사라질 수도 있지만, 수양한 인격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고.열일곱 살 때부터 한문을 공부한 황 원장은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오래전 스승으로부터 사주의 기초를 배울 때부터 현재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다짐은 “나는 미신에 기대 점을 치는 게 아닌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우리가 사는 곳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로 나이 들어가는 그의 잔잔한 미소를 보면서 시인 백석(1912~1996)의 단아한 시 ‘선우사(膳友辭)’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이런 노래다.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후략)/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3-01

젊은날의 고생은 즐거움 인생을 걸어야 성공하죠

만으로 열아홉 살에 해병대에 입대해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제대하고는 대학을 마쳤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스물넷 젊은이.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죽도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아버지가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졌다.누군가는 아버지가 해오던 일을 맡아야 했다. 스스로는 선택한 바 없음에도 ‘장남’이라는 묵직한 책임감이 김재원(29)씨를 억눌렀다. 그러나, 망설이지도, 우물쭈물 피해가지도 않았다.그로부터 5년. 많은 것이 변했다. 아픈 아버지를 속이고 돈을 뜯어가려던 이들이 보란 듯 물려받은 가게를 정상화해 성장시켰고, 아들을 믿는 엄마와 여동생의 든든한 기둥이 됐다. 이상은 까치얼음 김재원 대표의 짤막한 ‘청춘 이력서’다.굳이 범주에 포함시키자면 김 대표는 이른바 ‘MZ세대’다. 진지함보다는 재미에, 복잡한 과정을 생략한 편리함에 휘둘리기 쉬운 나이. 그의 또래 친구들은 희생하는 삶보다는 ‘즐기는 삶’에 익숙하다. 그걸 탓할 이유는 없다.하지만, 사람의 인생에는 각기 다른 색채가 있고,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혹은 푸른색인지를 선택하는 건 개인의 몫이다. 젊은 사람이 극히 드문 전통·재래시장에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한판 승부를 보고 싶었던 게 김재원 대표의 선택. 자신이 선택한 색채의 길을 걸은 짧지 않은 5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 아직 제주도 여행 한 번 못해본 ‘20대 청년 상인’얼음을 판매하는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은 2017년부터 2022년 오늘까지 김 대표는 제대로 편하게 쉬어본 적이 없다.국경일과 자신의 생일에도 거래처의 주문이 있으면 두말없이 얼음을 배달했다. ‘그래도 일요일 하루는 내 시간을 갖자’고 생각한 건 불과 1년이 되지 않는다.그러니, 요즘 20~30대가 방학이나 휴가 때면 당연한 듯 즐기는 해외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아직 제주도도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김 대표.“제주도는 배 타고 가는 것 아닌가요? 포항에도 제주도 가는 비행기가 있어요?”라고 묻는 그의 진지한 얼굴과 어투에 기자는 조금 놀랐다.스물넷에서 스물아홉까지, 김재원 대표는 워커홀릭(Workaholic·일 중독자)으로 살았다. 자신의 선택이고, 가끔은 그걸 즐기기도(?) 했으니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다.열심히 살아온 삶에는 보상이 따르는 법. 위생적이고 현대화된 시스템으로 얼음을 만들고 보관할 창고를 지으려고 죽도시장 인근에 조그맣게 땅을 샀고, 얼마 전엔 오토바이 애호가들 사이에서 ‘꿈의 바이크’로 불리는 할리 데이비슨(Harley-Davidson)을 계약했다.오토바이의 가격? 어지간한 중형 승용차보다 비싼 4천만 원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궁금한 게 많았다. 그래서 물었다.-5년 전 얼음가게를 이어받던 시기의 상황은.“아버지는 쓰러졌고, 주위엔 좋지 못한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장남인 내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것, 둘째는 아버지가 고생해서 키워온 가게를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심이 나를 지켜준 힘이 됐다.”-아버지가 ‘이것만은 지키며 장사를 해라’는 이야기를 했을 법하다.“신뢰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거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거래처와의 약속은 지키려고 한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아버지의 사례를 잘 알기에 웃으며 친절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더 조심하고 있다.(웃음) 사기꾼은 절대 먼저 화를 내지 않더라.”-아버지 때와 비교해 까치얼음은 얼마나 성장한 건가.“현재 거래처는 100군데 정도다. 절반쯤은 아버지가 운영할 때 거래하다가 교류가 끊긴 걸 내가 복원했고, 나머지 절반은 개척한 거래처다. 배달하는 직원분이 있지만, 아무리 바빠도 가능하면 내가 직접 얼음 배달을 나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나를 격려해주고, 우리 가게 얼음을 사용해준 고마운 분들의 얼굴을 자주 보고 싶어서다.”△ 하루 13시간, 바빠서 밥도 못 먹는 여름이 싫지만…‘이 추운 겨울에 얼음을 어디에 쓸까?’라고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을 듯하다. 김 대표에 따르면 시중에 유통되는 얼음은 크게 ’식용 얼음‘과 ’비식용 얼음‘으로 나뉜다.이름 그대로다. 비식용 얼음은 먹지 못한다. 그것들은 죽도시장 생선 아래 깔리는 게 대부분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상인들이 판매하는 물고기 등 해산물의 신선도를 유지해주는 것.다음은 식용 얼음. 이건 사람이 먹을 수 있다. 아이스 커피와 아이스 티(Ice Tea)에 들어가고, 눈처럼 갈아서 달콤한 팥빙수도 만든다.잘 알다시피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을 고집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커피)라고 부른다던가? 어쨌건.김재원 대표의 까치얼음이 취급하는 건 식용 얼음이다. 포항 곳곳에 자리한 대형 마트와 구멍가게까지가 까치얼음의 거래처. 여름은 물론 바람 매서운 1~2월에도 김 대표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유다.-아무리 그래도 여름에 더 팔리는 게 얼음 아닌가.“맞다. 한여름엔 아침 8시부터 배달을 시작해 밤 10시가 가까워야 일이 끝난다. 점심과 저녁을 거르는 경우가 흔하다. 요즘엔 집집마다 아이스 박스 하나 정도는 다 있다. 바캉스 시즌이면 거기에 고기와 음료수, 술 등을 시원하게 보관하기 위해 얼음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러는 게 한두 집이 아니다. 그 시기엔 조금 과장을 보태면 얼음을 만지면서도 땀을 바가지로 흘린다.(웃음)”-당신이 지키고 있고 앞으로도 지켜갈 장사의 원칙은.“대형 마트는 얼음을 대량으로 구매한다. 반면 동네의 조그만 가게는 거래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다른 얼음가게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두 군데 모두에 같은 가격으로 얼음을 공급한다. 차별하지 않는다. 그건 처음에 일을 시작하면서 고객과 한 약속이니까.”△ 죽도시장에서 할리 데이비슨 탄 젊은이를 보거든앞서도 말했지만, 전통시장에서 자신의 미래와 비전을 설계하는 ‘청년 상인’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게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래서다. 김재원 대표에겐 ‘시장 친구들’이 거의 없다.“아주 작은 성공의 입구에 들어섰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5년간 흘린 땀과 쏟은 열정의 대가로 ‘신뢰할 수 있는 얼음 공급자’라는 김 대표의 자리는 확고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해봤다.“직장생활이 아닌 작더라도 자기만의 사업으로 성공을 일구고 싶은 20~30대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요?”“긴 말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두를 걸어야 합니다. 인생과 생애를 걸지 않고서 이룰 수 있는 성공이 세상에 있을까요? ‘공짜 점심’을 바라고 있다면 그건 젊은이답지 않습니다.”스물네 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청년 상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가졌던 김 대표의 꿈이 있었다.서른 살이 되면 20평쯤의 깔끔한 냉동창고를 세워 현대화 된 시설에서 만들어진 깨끗한 얼음을 고객들에게 주고 싶다는 것.곧 만 서른 살이 되는 김 대표의 꿈이 70%는 이미 이뤄졌다. 거기에 보너스처럼 더해진 게 4천만 원짜리 할리 데이비슨.혹여, 죽도시장에 갔다가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김재원 대표를 본다면,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에 다가서고 있는 그의 어깨라도 한 번 두드려주시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2-22

좋은 제품 싸게 파는 장사법으로 코로나 버텨요

1997년의 ‘슬픈 기억’을 잊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해마다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며 ‘주목받는 아시아의 용(龍)으로 커가던 한국’이 밑을 예측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해.부득불 IMF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지하며, 국민 다수가 일찍 터뜨린 샴페인의 병을 다시 닫자고 한 목소리를 냈다. 그 시절 신조어로 등장한 것이 있으니 언필칭 ‘아나바다 운동’이다.흥청망청 사용되던 것들을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전 국민적 캠페인.그때부터 아까운 줄 모르고 쉽게 버리곤 했던 옷을 리폼(Reform·낡고 유행에 뒤떨어진 의류를 새롭게 고치는 것)하는 게 유행처럼 한국에 번졌다. ‘아나바다’ 중 아껴 쓰고, 바꿔 쓰자는 항목에 해당하는 운동이었다.‘부속가게’가 의도치 않은 호황을 맞았던 시기다. 헌데, 부속가게가 뭐지? 이런 의문을 가질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포항 죽도시장에서 옷을 만들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속가게를 운영하는 이승건(39)씨가 간명한 답변을 들려준다.“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옷을 구성하는 단추, 지퍼, 레이스, 안감, 실 등을 판매하는 곳이죠. 의류를 만들어 입는 분들이나, 퀼트(Quilt)를 취미로 가진 손님들이 우리 가게의 주요한 고객들입니다.” △ 20대 초반부터 고민해온 옷과 옷 관련 용품과의 ‘동고동락’이른바 썩 잘 만든 ‘기성복’이 지천인 세상이다. 아주 비싼 명품이 아니라도 꼼꼼한 바느질과 세련된 디자인, 여기에 유행의 흐름에 발맞춘 옷이 주위에 널린 게 2022년 오늘.하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지금 중년으로 살고 있는 이들은 호롱불 혹은, 삼십 촉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나일론 양말을 눈 부비며 꿰매던 어머니를 보고 살았다.큼직한 점퍼나 허리가 넉넉한 치수의 바지를 사서, 그걸 몇 년에 걸쳐 자식들에게 입히며 낡으면 꼼꼼한 바느질로 새 옷처럼 만들어주던 그 어머니들은 아직도 여전히 부속가게를 드나든다.죽도시장에 2개밖에 남지 않은 부속가게 중 하나인 이화부속 이승건 대표는 어릴 때부터 양장점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옷과는 멀어지려고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운명 같은 게 이 대표에겐 있었던 것이다.비교적 일찍 결혼해 중학생 아들을 둔 이 대표가 다니던 직장을 접고 옷과 옷에 관련된 물품과 함께 울고 웃어온 것도 벌써 17년. 20대 초반부터 시장 조사를 하며 생각해온 그 ‘동고동락(同苦同樂)’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물었다.-부속가게를 운영하겠다고 결심한 동기나 계기가 있었나.“늘 예쁜 옷을 보며 자랐다. 2008년에 결혼을 했다. 그때 회사를 다녔는데 월급이 150만 원 정도였다. 혼자서야 살지 못할 돈이 아니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돈으로 생활을 해결할 수 있을까란 걱정이 생겼다. 남아 있는 40~50년 인생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그래서, 사회복지사와 요양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그런데, 그걸 한다고 해도 많지 않은 급여로 육아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직업을 찾고 싶었다.”-단도직입으로 묻자. 그래서, 월급쟁이보다는 나은가?“일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나았다. 그런데…”-갈수록 좋아지는 게 아니라, 어려워졌다는 이야기인지.“처음 부속가게를 시작할 땐 죽도시장에 같은 업종의 가게가 4개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11년 2개가 사라졌다. 지금은 죽도시장을 통틀어 2개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 2010년 정도까지는 가게가 잘 됐다. 하지만, 저렴하고 잘 만든 기성복이 많이 나오다보니 갈수록 부속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코로나19 사태’가 햇수로 3년째다 가장 큰 거래처인 세탁소와 옷 수선집이 적지 않게 문을 닫았다. 정말이지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삶의 활로(活路)’를 찾아갈 수밖에….아무도 청하지 않았건만 2020년 벽두 소리도 없이 무서운 기세로 지구를 침공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25개월째 세상을 공황에 빠뜨리고 있다.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며 인간이 수천 년간 축적해온 병균에 대한 다양한 저항법들 모두를 무력화시키고 있으니.어떤 나라보다 소상공인이 많은 한국은 생물학적 공포와 함께 경제적 피폐를 동시에 겪고 있다. 이승건 대표의 이화부속이라고 그 격랑을 피해갈 방법이 있을까? 당연지사 없다. 매출액은 코로나19 사태 이전보다 70% 급감했다.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는 일. 이 대표에겐 아직 어린 아들과 딸이 있고, 속된 말로 남은 인생이 ‘구만 리’ 아닌가.-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결국은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한다는 장사의 정공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부속가게의 주요 거래 물품 중 하나가 레이스다. 손님들은 다양한 색깔의 레이스를 원한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평범한 색의 레이스는 공장에 맡겨 만들어도 된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선 여러 색채의 레이스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최저임금이 높아진 탓에 공장에 일을 맡겨서는 수지타산을 맞추지 못한다. 고민 끝에 책을 사서 읽으며 공부하고, 염색 약품을 구입해 수차례 실패를 거듭하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색깔의 레이스를 내가 만들고 있다.”-그래도 아직은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젊은 나이다. 힘든 시절을 이겨낼 용기를 주는 분들이 주위에 있을 것 같은데.“10년 가까이 찾아주는 내 아버지 연배의 단골손님이 있다. 아내분은 옷 수선을 하고, 남편분은 개인택시를 한다. 그분들이 와서 힘들어하는 날 보고 차 한잔 마시자며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만이 아니라 다들 어렵다. 이런 때일수록 성실함을 잃지 말고 버티면 좋은 시절이 다시 올 거야’라는 말이 큰 위로가 됐다.”막중한 책임감을 어깨에 맨 아버지로 살아온 시간이 또래보다 오래여서일까? 이승건 대표는 예스럽게 표현하자면 점잖고 진중하다. 잘 웃지 않고, 목소리에도 무게가 실린다.이 대표의 딸은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 10살이다. 그럼에도 아빠의 일을 곧잘 돕는다. 주말이면 가끔 이화부속에 나와 의류 관련 소품들을 정리하거나, 포장하는 일을 한다.“일을 도와주면 정확히 계산해서 작은 돈이라도 줍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어릴 때부터 애들에게 제대로 된 경제관념을 심어주고 싶은 내 나름의 교육 방식이죠.”이쯤 되면 두말할 것 없다. 의젓하고 합리적인 ‘젊은 아버지’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는 수선가게로 이어나갈 터모든 어려움에는 해법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는 어떤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갈수록 어려워지는 부속가게의 운영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을 앞에 둔 이승건 대표의 답변은 이랬다.“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부정할 수 없이 힘든 상황이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어려움이 당장은 풀리지 않겠지만,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가장입니다. 그래서 요즘엔 초발심(初發心)을 다시 떠올립니다. 내가 회갑이 되고, 아이들이 결혼할 때까지 바뀌는 시대와 세대에 맞춰가며 가게를 오래 유지하고 싶습니다.”이 정도의 마음가짐과 태도라면 무엇인들 이루지 못할까. 코로나19 사태의 차가운 바람도 따스한 아버지이자, 쉬이 흔들리지 않는 이 대표의 진정성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게 분명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2-15

소박하지만 든든한 한끼 포항 주부들 힐링푸드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개인적 경험부터 먼저 한 토막.6년 전이다. 모친과 일본 북부를 여행했다. 70대 노인에겐 이국(異國)의 낯선 음식이 편하지 않기 마련. 그래서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은 삿포로 시내의 한식당에 갔다.한국에 비한다면 별 볼일 없는 김치찌개임에도 맛있어하는 모친에게 물었다. “엄마가 한 것만 못하잖아요.” 돌아온 대답이 흥미로웠다.“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뭔 줄 아냐? 남이 해준 음식이야.”일생 엄마와 아내가 해준 요리만을 먹어본 아들과 남편은 알 수 없는 사실이다. 기자 역시 그런 아들 중 하나였다.포항 죽도시장엔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적지 않다. 그중 손꼽히는 것 중 하나가 이른바 ‘수제비 골목’. 수제비와 칼국수, 여기에 둘을 반씩 섞은 칼제비가 주된 메뉴다. 가격도 싸다. 한 그릇에 4천 원이니.그 골목엔 아침 7시를 조금 넘긴 이른 시간에도 손님이 적지 않다. 장을 보러온 주부들이 수제비나 칼국수를 맛있게 먹는 풍경이 매일 그려진다고 한다.손님의 대부분은 대형 마트나 인터넷을 통해 식재료를 구입하는 게 익숙한 젊은 주부가 아닌 60대 이상의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다. 이들은 일생 ‘남의 밥’을 해주는 데는 익숙하지만, ‘남이 해주는 음식’은 자주 맛보지 못한 사람들.새벽부터 일어나 차가운 바람 부는 시장에서 식구들에게 먹일 반찬을 준비하기 위해 생선과 채소를 고른 후 맛보는 따끈한 수제비 한 그릇. 어쩐지 입맛이 다셔지기보단 찡한 마음이 앞선다. △ 20년 전 시어머니가 시작해 며느리가 함께옥호(屋號)가 포항수제비인 가게는 죽도시장 수제비 골목 한편에 조그맣게 자리했다. 시어머니가 20년 전에 시작했고, 며느리 이태경(50)씨가 8년 전부터 함께 했다.몸이 편찮은 남편을 챙겨야하는 시어머니의 형편을 알고 일을 돕기 시작한 이태경 씨도 이젠 수제비와 칼국수의 ‘핵심 중 핵심’이라 할 제대로 된 국물 맛을 낼 줄 아는 베테랑 상인으로 진화 중이다.“아침 7시부터 수제비를 먹으러 오는 사람이 있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 씨는 위와 같은 답을 들려줬다. 모르던 걸 알게 된다는 건 언제나 크건 작건 충격이다.혹시 기자의 모친도 경남 마산의 어시장에서 제사상에 올릴 조기와 나물을 구입한 후엔 수제비나 칼국수 한 그릇을 달게 먹었던 게 아닐까?-죽도시장에 수제비 골목이 생긴 건 언제인가.“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있었으니 적어도 40년쯤은 되지 않았을까? 현재 여기서 영업하는 수제비 가게는 우리 집을 포함해 딱 열 곳이다.”-가게를 여는 건 언제이고 마치는 건 몇 시인지.“아침 7시 조금 넘으면 문을 열어 해가 지는 6시에 마친다. 주말에는 조금 더 일찍 나온다. 평일엔 시장을 찾는 주부들이 주된 고객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엔 이 골목에 대한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젊은 커플과 관광객들이 많다. 주 5일제가 일반화됐지만 우리는 가게들이 합의해 돌아가며 일주일에 하루만 쉰다.”-수제비 가게를 하기 전에는 뭘 했었나.“마흔 살 넘어서까지 쭉 주부로만 살았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시장에 나오는 게 쑥스럽고, 손님을 응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가한 시간에 밥을 먹을 때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웃음) 그런데, 그런 부끄러움과 어색함은 8년이란 시간이 해결해줬다.”△아가씨였던 손님이 결혼해 아기 데려 오기도사실 수제비나 칼국수가 대단한 요리는 아니다. 밀가루를 반죽해 손으로 뜯거나, 칼로 썰어 뜨거운 국물에 넣어 먹는 어찌 보면 간단한 음식.죽도시장 수제비 골목 가게들은 여기에 양념장과 잘게 썬 매운 고추, 맛깔스런 깍두기를 곁들여 내놓는다.양이 모자라다고 말하는 손님에겐 국물은 물론 수제비도 더 준다. 1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면 두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2천 원이 남는 것.가파르게 오르는 물가에 힘겨워하는 서민들의 ‘소박하지만 든든한 한 끼 식사’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2~3년 전 3천500원이던 음식 가격은 몇 해 사이 겨우 500원이 올랐다. 반면 수제비와 칼국수의 주재료인 밀가루는 최근 몇 달 만에 20% 이상 인상됐다. 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에선 어려운 상황일 것이 분명하다.죽도시장 수제비 골목은 글자 그대로 골목(실외)에 있다. 난방이 되지 않는 시장 거리에 자리했다는 이야기. 가게 주인들은 겨울마다 매서운 추위와 싸울 수밖에 없다.그럼에도 이태경 씨는 웃는 얼굴이다. -겨울엔 고생스러울 것 같은데.“물론 춥다. 하지만, 손님이 많이 오면 추위도 잊게 된다. ‘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 어느 해 명절엔 수제비와 칼국수를 100만 원어치 팔았다. 한 그릇에 3500원 하던 시절이니 300그릇 가까이 판 거다. 그럴 땐 고생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지금은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져 죽도시장이 한산하다. 가게도 예전만 못하다. 다시 손님들로 북적이는 좋은 때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장사를 하다보면 가슴 뿌듯한 순간도 있을 것 같다.“아가씨 손님이 연애를 시작해 남자친구와 함께 오고, 시간이 지나 아들의 손을 잡고 다시 찾아올 때면 웃으면서 서로 인사를 나눈다. 손님이 데리고 온 아기들이 우리 가게 수제비를 좋아하면 더 즐겁다. 그런 게 사람 사는 정인 것 같다.”-보람을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하루 12시간을 바깥에서 지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손님 수제비 그릇이 깨끗하게 비어있고 ‘설거지 할 것도 없을 겁니다’라고 말해주면 내가 음식 만드는 사람이라는 게 행복하게 느껴진다. 체력이 따라준다면 앞으로도 10년쯤은 더 일하고 싶다.”△7가지 재료가 빚어낸 소박하지만 맛있는 음식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남·북아메리카까지 여행하며 요리에 관한 글을 쓴 언론인 시노다 고코는 자신의 책 ‘요리와 인생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맛본 소박한 요리를 잊지 못한다. 그 음식들은 혀끝의 기억만이 아니라, 마음을 포함한 오관의 체험으로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 인간이 세계를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음식을 통해 세계를 음미하는 건 누구나 가능하지 않을까?”포항수제비를 지키고 있는 이태경 씨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전엔 음식을 잘 하지 못했다”고. 그랬기에 시어머니로부터 수제비와 칼국수 반죽을 제대로 하는 방법과 7가지 재료로 맛있는 국물을 만들어내는 노하우를 열심히 배웠다.꾸준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게 된다. 그게 변하지 않는 세상의 이치다.그래서다. 이제 이태경 씨의 수제비와 칼국수는 아들의 친구들까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음식이 됐다. 시노다 고코의 표현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소박하고 맛있는 한 끼’가 된 죽도시장 수제비.“꿈이 뭐냐고요? 나뿐만 아니라 시장 사람들 모두가 지금보다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고생하는 만큼 수입도 높아지고, 살림살이도 활짝 피어나고요.(웃음)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코로나19가 어서 사라져서 마스크 벗고 수제비를 만들었으면 좋겠네요.”이태경 씨의 꿈 역시 그녀가 만들어내는 수제비처럼 소박했다. 그래서 더 진솔하고 간절해 보였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2-08

겨울이면 줄지었던 관광버스 3년째 보이지 않아요

한국은 자본주의국가다. 자본주의의 최고 가치는 잉여가치의 창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원칙을 숭배하며 산다. 시장의 장사꾼들도 다를 수 없다. 남는 게 없는 장사란 할 이유가 없는 법.그러나, 언제나 자본이 인간에 우선해야 할까? 우리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관한 의미 있는 답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멀쩡하게 잘 자라주던 열일곱 살 아들이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장애인이 됐다. 사고 이후 눈물 마를 날 없던 어머니는 24시간 혼자서는 거동이 힘든 아들 옆을 지켜야 했다.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아직 먹어본 적 없는 대게를 한 번 먹어보고 싶어요”라고 했다. 어머니 역시 그때까지 대게를 먹어보지 못했다. 아들을 부축하고 죽도시장에 온 엄마가 대게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대게는 가격이 얼마나 하고, 어떻게 먹는 건가요?”대충의 사연을 들은 가게 주인이 한 마리에 3만 원은 받을 수 있는 대게 3마리를 쪄서 5만 원을 받고 모자(母子)가 마주 앉은 식탁에 올렸다. 두 사람이 먹기 좋게 손질을 해 접시에 담은 것은 물론, 대게 내장과 참기름을 섞어 볶은 밥은 서비스로 내놓았다.대게를 맛본 것이 이유만은 아니었겠지만, 사고 이후 우울증과 무기력감에 시달리던 아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에 엄마도 함께 웃었다. 대게 가게 주인 역시 더불어 기뻐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어떤 이데올로기가 사람보다 중요할까?죽도시장 ‘영포 회·대게타운’ 6호 가게를 운영하는 박수현(52) 대표에게 “장사를 하며 기억에 남은 사람이 누군가요? 한꺼번에 100만원어치쯤 팔아준 손님이 가장 고마운 기억 아닌가요”라고 물었을 때다.박 대표는 “많이 사주는 손님요? 물론 고맙죠. 하지만, 잊지 못할 손님은 따로 있어요”라며 위에 언급한 일화를 들려줬다.한국의 모든 전통·재래시장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장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에겐 때로 높은 이윤보다 따스한 인정이 훨씬 높은 가치로 다가올 때가 있지 않을까?우리는 차가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살지만, 더운 피가 흐르는 심장을 가진 사람이고, 어떤 이데올로기도 인간에 우선할 수 없으니.조그만 몸피에 크고 동그란 눈을 가진 박수현 대표는 외형만으로 보자면 겁이 많고 연약해 보인다. 하지만, 강단(剛斷)이 만만찮다.젊은 시절 포항 오거리에서 소머리국밥집으로 시작해, 북부해수욕장(현 영일대해수욕장) 포장마차를 거쳐 죽도시장에서 대게를 팔기 시작한 게 2012년. 서른 살 들어서자마자 시작한 장사 경력이 20년을 훌쩍 넘겼다.손님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울어본 적도 있고, 당장이라도 설거지하던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가게를 집어치우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러나,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이 땅 서민들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팍팍한 가시밭길의 명제.박 대표는 그 길을 정 많은 동갑내기 남편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묵묵히 걸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쉽지 않다고 했다.-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코로나19 시대’다. 장사가 예전만 못하지 싶다.“내가 알기로 죽도시장에만 대게를 판매하는 가게가 200~300개는 된다. 경쟁은 심하고 손님은 줄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엔 겨울 성수기에 대게 200kg 이상을 팔았다. 하지만, 지금은 딱 절반 이하로 줄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우리 가게만이 아니라 죽도시장 대부분 대게 가게의 매출 곡선이 크게 꺾였을 것이다.”-구체적으로 어떤 게 어려움인가.“대게는 사다놓은 걸 팔지 못하면 버려야하는 생물 장사다. 모여 앉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극소수로 정해놓고, 먹을 수 있는 시간까지 한정해놓으니 손님이 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국가의 지원책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해마다 겨울이면 가게 앞에 줄지어 섰던 관광버스가 3년째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실물 경기도 얼어붙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는데.“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첫해엔 잘 몰랐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시간을 시장이란 좁은 공간에서 보내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지난해와 올해 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먹을 걸 안 먹을 순 없고, 예전엔 외식비로 10만 원을 썼다면 이젠 5만 원으로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고. 단골들이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대게를 고르는 기술과 대게 맛있게 찌는 방법은…호떡 가게에 가서는 호떡 이야기를 해야 하고, 찐빵 가게에선 찐빵 이야기를 해야 한다. 기자가 대게를 판매하는 상점에 가서 인플레이션을 논하는 경제학자나 서민들 가계를 걱정하는 정치인 흉내를 내는 건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아니라 오버액션이 될 터.그래서다.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우리가 대게에 관해 궁금한 모든 것’을 박 대표에게 물었다.-겨울철 대게가 맛있는 이유는 뭔가.“여름을 보낸 대게의 살이 오르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몸이 단단해지고 그 안에 달짝지근한 살이 가득 차오른다. 바닷물의 온도가 차가워져야 대게가 맛있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대게를 잡을 수 없는 금어기다. 그 시기엔 러시아에서 수입한 대게, 킹크랩 등을 판다. 러시아 대게는 한국 대게보다 크지만, 감칠맛은 아무래도 동해에서 잡힌 것만 못하다.”-한국산 대게와 외국산 대게의 차이점은 뭐고 어떻게 구별이 가능한가.“러시아 대게는 작아도 1kg이 넘는다. 한국 것보다 큼직하다. 하지만, 다리는 짧다. 인근 동해에서 잡히는 대게는 다리가 가늘고 길며 배가 투명하다. 살점의 색깔 역시 맑은 하얀색이다.”-집에서 대게를 요리하게 된다면 어떤 걸 주의해야 할까.“솥에 담을 때 대게가 물에 닿지 않게 해야 한다. 끓는 물과 대게가 직접 닿으면 물기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대게의 내장이 흘러버린다. 고구마를 찔 때처럼 대게를 올린 채반과 물 사이에 거리를 두고 쪄야 맛있다. 1kg짜리 대게를 찌는 시간은 25분이 적당하다. 대게의 배가 위로 향하게 해서 쪄야 하는 것도 잊지 말고.”△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살고픈 ‘대구 언니’로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다. 시장에서 같은 품목을 파는 상인들끼리는 경쟁심 탓에 서로 친하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한다.죽도시장에서 대게를 포함해 해산물을 판매하는 상인들은 서로의 경사보다는 애사(哀事)를 더 꼼꼼하게 챙긴다. 기쁨과 더불어 고통과 슬픔까지 나누는 성숙한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박 대표는 말한다. “웃음과 눈물의 시간을 함께 하는 이웃 상인들은 가족 이상의 존재”라고. 여기에 진짜 식구에 대한 애정도 빼놓지 않았다.“올해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고요? 남편은 새벽부터 울진 후포항과 죽변항으로 대게를 실으러 다녀요. 미끄러운 길을 사고 없이 안전하게 오갔으면 더 바랄 게 없겠죠.”죽도시장엔 주문하는 이들의 요구에 최대한 맞춰 먹기 좋게 손질한 대게를 손님 식탁으로 내오는 인심 넉넉한 사람이 있다. 태어난 지역을 딴 별명 ‘대구 언니’로 불리고 싶은 박수현 대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1-19

바늘 하나로 즐거운 인생고운 마음 담아 지어요

소녀는 헝겊과 바늘을 가지고 노는 게 좋았다. 때는 1960년대. 그 시절만 해도 결혼을 앞둔 신부는 어머니와 함께 한복을 짓고, 신랑과 사용할 베갯잇을 직접 만드는 경우가 흔했다.포항 외곽의 크지 않은 동네. 열두어 살 아이 이용순(현재 66세)은 시집 간 언니와 엄마가 한복과 이불 홑청을 만들고 남은 헝겊으로 인형 옷을 꿰매며 놀았다. 그러니, 바늘과 헝겊은 50년을 함께 한 이용순 씨의 오랜 친구다.죽도시장에서 백합주단을 운영하는 이용순 대표는 지금도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가게에 앉아있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재도 이 대표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바늘과 한복 원단이다.수십 년 고운 색채와 부드러운 촉감을 지닌 옷들과 더불어 지내왔기 때문일까? 이용순 대표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회갑을 넘겼지만 목소리가 소녀 같다.지난 2011년엔 대구에서 열린 ‘미즈 모델 선발대회’에 나가 신사임당상(賞)을 받았다니, 비단 기자만 그렇게 보고 느낀 게 아닌 듯하다. 그 대회에선 이 대표가 직접 지어 입은 한복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사양길 걷고 있는 주단 가게, 그렇지만…“바늘 하나로 즐거움을 만들며 인생을 보냈다”고 미소 짓는 이용순 대표. 스물여덟 살에 첫 한복을 만들고, 포항 송도의 상가에서 10여 년을 보낸 후 죽도시장에서 정착한 게 벌써 22년째. 주단(綢緞)은 품질이 빼어난 비단을 의미하는 한자다. 한눈팔지 않고 삶의 3분의 2를 손님이 원하는 한복을 지으며 살아온 이 대표의 인생도 어찌 보면 ‘주단’ 같았던 것이 아닐까?-한복을 만드는 주단 가게가 예전과 달리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맞다. 한창 땐 죽도시장에 주단골목이 있을 정도로 성업했다. 하지만, 이제 20~30개 정도의 가게만 남은 것으로 안다. 사람들이 한복을 잘 입지 않는다. 입는다고 해도 대여하는 비율이 80%다. 맞춤 한복을 선호하던 시대에 비하자면 지금은 주단 가게 모두가 너나없이 어렵다. 특히나 나처럼 맞춤(제작) 전문인 경우는 더 그렇다.”-주단 가게의 주요 고객은 어떤 사람들인가.“결혼식을 앞둔 신부와 혼주들이다. 한복의 매력을 알고 격식을 따지는 경우엔 고모, 숙모, 이모 등도 함께 맞춰 입는다. 20여 년 전쯤엔 결혼식이 많은 계절이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한꺼번에 10벌을 동시에 작업하기도 했으니까.”-주단 가게도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두말하면 잔소리다. 일단 3년 전부터 사람들이 결혼식을 미루거나 안 하는 경우가 많아졌지 않나. 사실 코로나19 영향 탓도 있지만, 결혼하는 젊은 남녀가 줄어들면서 주단 가게가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다. 내가 죽도시장에 처음 들어오던 20년 전과 비교하면 한복 판매가 10분의 1로 줄었다.”-그럼에도 가게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40년 가까이 한복을 지으며 살아왔다. 지금 와서 다른 일을 찾을 수 있겠나? 또 하나. 대도시인 대구나 서울에서 내가 만든 한복을 입고 결혼식과 폐백에 참석한 사람들이 ‘옷이 예쁘다는 칭찬을 받았다’며 찾아와 고마움을 전하는 순간의 기쁨을 잊지 못해서다. 그럴 땐 평생 옷을 만들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40년 세월… 자장면 가격 10배 오르는 동안 한복은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가 예전보다 좋아지거나 발전해야 하는 게 세상사 이치. 하지만, 한복을 짓고 빌려주는 주단 가게의 상황은 오히려 뒷걸음질 쳐왔다.현재 적절한 원단으로 고운 한복 한 벌을 만들어 입는데 드는 비용은 약 60~70만 원. 이 대표의 말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에도 그 가격이었다고 한다. 물가 변동을 알아보는데 흔히 사용되는 자장면의 가격.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1986년 자장면 한 그릇 값은 약 500원이었다. 2022년 오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으려면 5천 원은 지불해야 하니 10배가 오른 것이다. 그간 한복의 가격은 제자리걸음을 거듭했다. 주단 가게 운영자로선 한숨이 나올 수밖에.그럼에도 이용순 대표는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웃음을 잃지 않고 산다. 기억에 남은 손님과 추억 속에 돋을새김 된 결혼식도 없지 않았다. -죽도시장에 온 이후 잊을 수 없는 손님은.“20년 전쯤이다. 울릉도 신랑과 포항 신부가 결혼을 했다. 우리 가게에 와서 한복을 800만원어치 맞췄다. 신부는 사계절 바꿔 입을 한복 3~4벌을 주문했고, 신랑과 신부의 부모는 물론, 고모와 숙모, 이모와 외숙부 한복까지 모두 맞췄다. 나는 가게를 하는 사람이다.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옷을 지어간 분들이 고맙고 기억날 수밖에.”-또 다른 추억 속의 손님은.“20대 젊은 커플을 만났다. 절대다수가 연미복과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시대임에도 ‘우리는 꼭 한복을 입고 결혼할 거예요’라는 말로 나를 감동시켰다.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건 아마도 평소 한복을 자주 입었다는 그들 부모님의 영향이 컸지 않았을까.”△한복, 입으면 단아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절로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입고 벗기가 번거롭고 만드는 과정도 까다롭지만, 한복을 허례허식의 도구처럼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프랑스 예술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니피앙(외형적 형식)과 시니피에(내적 의미)의 중요성을 치우침 없이 두루 이해하고 용인해왔다.이용순 대표는 이런 말로 한복이 지닌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 충일함을 설명한다.“곤룡포(886E龍袍)를 입고 있을 땐 그 사람이 왕이란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옷을 벗는 순간 누가 왕과 백성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겠는가? 입은 옷이 사람을 말해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이 대표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한복은 입는 순간 몸가짐은 물론 마음가짐도 단아해지는 마법을 부린다”고. 웃음 섞이지 않은 진지한 어투였기에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2017년 11월. 포항에서 지진이 났을 때다. 송도의 집에선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헛갈려 하던 이 대표. 다음 날 아침 죽도시장에 와서야 현실을 체감하며 크게 놀랐다.진열된 한복 뒤편에 놓였던 원단과 옷 짓는 재료들이 모조리 쏟아져 내려 가게가 엉망진창으로 변해있었다. 그런 순간에도 이 대표는 마냥 절망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바늘과 옷감과 있으면 행복할 수 있었다. 아침에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가게로 나오면 해가 질 때까지 일 년 내내 한복과 함께 살았다. 크게 기쁜 날도 있었고, 견딜 수 없이 슬픈 날도 있었지만, 그것들 모두가 다 지나가는 것이더라.”한 우물을 파며 진솔하게 살아온 이들에겐 어떤 경지의 깨달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이용순 대표의 ‘낙관주의’는 선승(禪僧)이 평생 정진해 얻어낸 빛나는 공안(公案)보다 못할 게 없지 않을까?올해 예순여섯이 된 이 대표가 운영하는 가게의 건물주는 나이가 아흔에 가까운 할머니. 그 할머니 역시 젊은 시절엔 양복점에서 옷을 짓는 일을 했다고 한다.함께 한 22년 짧지 않은 세월과 같은 일을 해왔다는 동지의식은 두 사람을 모녀의 관계처럼 만들어줬다.“나이는 잊고 힘이 닿는 데까지 내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이 대표가 몸과 마음 모두를 단아하게 바꿔주는 ‘한복의 마법’ 속에서 오래오래 죽도시장을 지켰으면 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1-12

13시간 넘는 고단한 일과, 단골의 情으로 이겨내요

6천935일간 새벽에 문을 열어 해가 지고서야 가게를 닫았다. 예외는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쉬었던 날은 겨우 38일. 1년 중 설과 추석 당일에만 피곤한 몸을 뜨끈한 방바닥에 종일 누일 수 있었다. 결코 쉽지 않았을 삶이었다.너무나 바쁘게 살아온 탓에 남들처럼 살뜰하게 살피지 못했음에도 두 아들은 바르고 건강하게 자랐다.올해 스물여덟인 장남은 육군 대위, 작은 아들은 인테리어 업계에서 일한다. 주위 사람들은 인물 좋고, 인사성 밝은 아들들 칭찬에 입이 마른다.“이제 자식들도 자리를 잡았고, 당신들 나이도 적지 않으니 이번에는 함께 며칠간 휴가라도 다녀옵시다.”지인들이 간곡하게 청했지만, 지난해 여름에도 예년처럼 부부는 휴가를 가지 않았다. 지루한 폭염과 폭우 속에서도 매일같이 ‘삶의 현장’을 꿋꿋이 지켰다.죽도시장에서 19년째 옥천만물상회를 함께 운영하는 박두인(60)·이방숙(57) 부부 이야기다.갖가지 과일과 함께 두 사람의 청춘이 활짝 폈다가 저물고 있다. 그러나, 쓸쓸하거나 서럽지 않다. 아니, 그런 감정을 느낄 틈이 없다.박 대표는 웃으며 말한다. “어릴 때 잘 보살피지 못했음에도 아이 둘 모두 잘 커줘서 너무 고맙다. 자식들이 사회에서 제 몫을 하며 성장하는 걸 볼 때면 나와 아내의 고생이 가치 없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 부부 건강도 나쁘지 않다. 앞으로 20년은 너끈히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으니 새로운 활로 찾아야부부가 일하는 옥천만물상회를 찾았을 때 박 대표는 바쁘게 과일 박스를 배달한 후, 팥죽과 쇠고기무국으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덩치는 크지 않은데 몸을 쓰는 육체노동을 해서인지 식사량이 상당했다.단골손님이 끓여온 따끈한 팥죽과 아내가 준비한 국으로 달게 식사를 하는 박 대표 옆에 앉아 궁금한 것 몇 가지를 물었다. 기자와 남편의 이야기가 이어지자 아내 이방숙 씨도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코로나19 사태’ 이후 시장이 많이 위축됐을 듯하다.“매출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말하는 상인들이 많다. 모두가 어렵다고 한다. 장사를 수십 년 해 와서 단골이 많은 분들, 자기 건물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은 코로나19로 인한 피해가 좀 덜하다. 반면 임대료 내기가 벅차다고 하는 상인도 있다. 다행히 우리 건물주는 좋은 사람이라 가장 힘들었던 시기 3개월 동안 임대료를 절반으로 낮춰줘 작지 않은 도움이 됐다.”-수입이 절반으로 줄었으니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는가.“내가 투 잡(Two job)을 뛰고 있다. 밤에는 오토바이로 퀵 서비스를 한다. 죽을 맛이다.(웃음)”-여러 업종 중 과일가게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20대 중후반 젊을 때 장사를 시작했다. 가진 돈이 별로 없었기에 트럭을 구해 봄과 여름엔 과일을 팔고, 겨울엔 붕어빵을 팔았다. 과일 장사는 진입장벽이 낮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우리 부부가 가진 돈으로 할 수 있는 걸 찾다보니 과일을 팔게 됐다. 과일 장사는 부지런히 한다면 먹고사는 건 어렵지 않은 직업이다.” △제철인 귤과 딸기, 맛있는 걸 고르는 비법은…하루 종일 가게와 집에서 부부가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좋은 점도 있지만, 불편할 때도 없지 않을 것 같았다. 관련한 질문을 던졌다.아내 이방숙 씨가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훨씬 많다. 과일가게란 게 남자의 힘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시시때때로 무거운 물건이 옮겨야 하니까.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시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하자, 박 대표가 능청스런 말투로 이렇게 받았다.“여전히 24시간 보고 있어도 좋다. 그리고, 과일은 여자들이 많이 사러오는데 나처럼 미남이 있으면 판매에 도움이 된다.”우스개를 던지는 남편의 얼굴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내.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 왁자한 웃음 끝에 유쾌한 이야기가 계속됐다.-지금 이 계절에 가장 맛있는 과일은 뭔가? 그리고, 실패하지 않는 과일 고르기 비법을 알려주면 좋겠다.“겨울엔 귤과 딸기가 맛있다. 딸기는 처음 나오는 이즈음이 가장 달콤하다. 참외도 한여름보다 4~5월 처음 나올 때가 맛있듯. 빛깔이 선명하고 진한 딸기와 귤을 고르면 된다. 귤의 경우엔 윗부분이 매끄럽지 않고 조금 까칠한 게 당도가 더 높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면 좋다.”-오랜 시간 장사를 해왔다. 기억에 남는 손님은.“오늘처럼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오는 15년 이상 된 단골들이 여러 명이다. 서로가 정을 나누는 관계가 됐으니 이젠 장사꾼과 손님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남을 이어간다. 매일 새벽 6시 이전에 시작해 저녁 7시 30분까지 하루 13시간 넘게 일하는 피로를 그런 관계 속에서 풀고 있다.”-어려움이나 힘겨웠던 시간도 있었을 텐데.“남편이 과일을 배달하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3번이나 났다. 너무 놀라고 걱정했다. 다행히 입원을 할 정도는 아니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우리는 다쳐도 입원을 하기가 어렵다. 배달을 기다리는 손님도 많고, 언제 가게로 손님이 찾아올지 모르니 아파도 참고 일을 하게 된다.”-아들 둘도 과일을 좋아하는가.“별로 안 좋아하더라. 왜 중국집 아이들은 자장면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어릴 때부터 매일 봐온 과일이 지겹기도 할 것이다.(웃음)”-짤막한 질문이다. 두 분에게 죽도시장이란.“식상한 이야기 같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더 멋있게 말하자면 인생 그 자체다. 우리 삶의 3분의1을 보낸 곳이 죽도시장 아닌가.” △서민들의 새해 꿈은 모두가 비슷하지 않을까최근 부쩍 오른 물가 탓에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의 물건 사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게 박 대표 부부의 이야기다. 예전엔 처음 들른 가게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흔했는데, 몇 달 전부턴 귤 3천원어치, 딸기 5천원어치를 사면서도 대여섯 군데 과일가게를 방문해 꼼꼼하게 가격과 양을 비교하는 주부들이 늘어났다.당연한 이야기지만 장기화 된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이들이 서민이다. 재래시장은 높은 물가에 대처하는 그들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그래서일 것이다. 박두인·이방숙 부부의 2022년 꿈도 지극히 서민적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종식되고, 나라 살림의 주름이 펴져서 국민 모두가 지금보다 나은 경제적 환경을 가지게 되는 것.박 대표가 덧붙였다. “그게 어디 나와 아내의 꿈이기만 하겠어요. 한국의 서민 모두가 비슷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할 겁니다.”그 말이 맞다. 그래서, 더는 덧붙일 말이 없었다. 이처럼 소박하고 성실한 서민들이 흘리는 땀이 이 나라를 여기까지 끌고 왔으리라.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1-05

성실·정직 있는 한 ‘죽도시장 전성시대’는 계속됩니다

시장은 맥박 치는 삶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공간이다. 오랜 시간 명맥을 이어온 전통·재래시장일수록 더 그렇다. 1969년 무성한 갈대밭 인근에서 노점상들이 시작한 포항 죽도시장의 역사가 53년째 접어들었다. 이제는 동해안 최대 규모로 자리 잡은 죽도시장은 점포 숫자가 2천500여 개를 넘나든다. 거기에 삶을 의탁해온 수천 명 상인의 애환과 눈물과 웃음이 묻어 있는 질박한 사연을 모아 사람들 사이에 숨겨진 ‘생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2022년 시작하는 첫 번째 기획연재다./편집자 주 약관(弱冠)에 시작해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오늘까지 죽도시장에서 30년간 잔뼈가 굵은 포항수협 77번 중매인(해맞이수산 대표) 권순찬 씨(51)는 서글서글한 웃음에 소탈한 어법을 가졌다.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어찌 보면 귀여운(?) 인상이다.성큼성큼 걸어와 악수를 청하며 이야기 나눌 찻집으로 안내하는 권 대표의 앞뒤로 커다란 문어를 삶아 내건 점포들이 즐비했다. 죽도시장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권 대표의 ‘특화 전공’ 역시 문어다.“시장은 서민들의 울고 웃는 삶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곳 같습니다. 동료 중매인들, 상인들, 손님들과 함께 짧지 않은 세월 기쁨과 슬픔, 빛과 그림자의 시간을 함께 했어요.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보람과 긍지도 있지요.”2년을 이어진 ‘코로나19 사태’의 파도 속에서도 문어를 포함해 한 해 7억~8억 원어치의 해산물을 거래하는 당당한 생활인으로 자리 잡았지만, 권 대표의 시작은 소박했다.20대 초반. 여러 군데 이력서를 내고 일자리를 찾던 권 대표에게 바다가 지척인 죽도시장이 보였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익숙했던 동해의 해산물을 사고파는 시장.권 대표가 시작한 일은 죽도시장에서 해산물을 나르는 것이었다. 육체를 사용하는 노동은 인간의 정신을 명료하고 명징하게 해주는 법. 과장과 거짓이 느껴지지 않는 권순찬 씨의 태도는 이미 스무 살 무렵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새벽부터 시장에 나와 문어와 각종 생선을 사고 판매하는 쉽지 않은 일을 하며 낳고 키운 아들이 이제 20대다.권 대표는 아들에게 성실과 정직을 이야기한다. 삶에서 체화된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니 자식에겐 그보다 귀한 가르침이 없을 듯했다.“좋은 문어 골라서 맛있게 먹는 방법요?”오랜 시간 문어를 구매하고 판매하며 쌓인 노하우가 있을 테니, 독자들을 대신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질문들이다.“실수하지 않고 좋은 문어를 고르는 방법은 뭡니까?”“문어는 대부분 숙회로 먹는데 맛있게 삶는 방법이 있나요?”“동해에서 잡히는 대형 문어를 대왕문어라 부르죠. 얼마나 큰 걸 봤나요?”말 그대로 ‘문어 전문가’이니 답변에 과시와 허세가 섞였을 법도 하지만 천만에. 돌아온 대답은 상식적이고 간명했다. 군더더기 없는 설명이 이어졌다.“사람도 혈색이 좋으면 건강한 것 아닙니까. 얼굴색이 검으면 간이 안 좋고…. 문어도 마찬가지죠. 지나치게 검거나 탁한 빛이 돌면 별롭니다. 빛깔이 선명하고 생생한 움직임을 보이는 문어가 맛있지요.”문어숙회는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인 먹을거리다. 삶는 시간이 짧으면 덜 익어 비리고, 길면 질겨져 비싼 식재료의 역할을 못한다. 얼마나 삶아야 최고의 맛을 지닌 문어를 맛볼 수 있을까? 이 궁금증에 관해 권 대표가 웃음을 섞어 짤막하게 대꾸한다.“크기에 따라 다릅니다. 1kg짜리와 10kg짜리 문어가 적절하게 삶아지는 시간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문어를 살 때 주인에게 문의하면 크기에 맞는 조리 시간을 알려줍니다. 고민할 것 없이 그냥 물어보세요. 그게 편해요.” 문어 삶는 솥에 섞여드는 정성과 30년 노하우사실 직접 바다로 나가 커다란 문어를 잡아본 사람은 드물다. 보통의 사람들은 수산시장 플라스틱 대야에 담긴 조그만 걸 보거나, 삶아서 진열한 걸 보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권 대표는 38kg과 42kg짜리 살아있는 문어를 봤단다.“문어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어라고 생각하죠? 엄청납니다. 40kg 안팎의 문어가 8개의 다리를 쫙 펴고 물 위에 떠있으면 6인용 텐트만 하죠. 심장 약한 사람이 보면 무서울 정돕니다.”그래서일까? 아직도 몇몇 나라에선 문어를 흉물로 생각해 먹지 않는다. 뱃사람들이 어렵사리 포획한다고 해도 그냥 버린다.10여 년 전 기자가 여행한 인도가 그랬다. 하지만, 인도 사람들이 ‘죽도시장 스타일’로 잘 익힌 문어숙회를 한 번 맛보게 된다면…. 인도 식탁에서 문어의 위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상상은 언제나 재밌다.문어를 한자로 쓰면 ‘文魚’다. ‘글월 文’자를 사용하는 것. 1930년대 어떤 시인은 ‘(문어와 낙지는) 미물이지만 그 안에 먹물을 지녔으니 공맹(孔孟·공자와 맹자를 함께 이르는 말)의 법도를 안다’고 썼다.물론, 문학적 과장이겠으나 아직도 ‘유학(儒學) 존중’의 풍토가 엄연한 영남에선 제사상에 큰 문어를 올리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해산물을 놓고 보자면 결코 저렴하다고 할 수 없는 문어의 가격.권 대표는 한참을 별러 문어 한 마리를 사러 오는 서민 주부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래서다. 문어를 삶는 솥에 정성과 30년의 노하우를 더불어 담는다. 자신에게 구입해 간 삶은 문어가 조상에게 예를 올리고, 식구들의 행복한 식사시간을 선물할 걸 알기에.내친김에 문어를 숙회가 아닌 다른 형태로 먹는 방법도 물었다. 역시나 재밌는 대답이 돌아왔다.“얇게 썬 뒤 채소와 섞어 샐러드에 넣어도 좋고, 다른 해산물과 곁들여 먹어도 잘 어울립니다. 특히 라면을 끓일 때 문어 살과 내장 몇 조각을 넣으면 우스개가 아닌 진짜로 ‘신이 내린 맛’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아들과 아들 친구들도 좋아하고, 나이 드신 분들도 그 맛을 보시고는 잊지 못하겠다 하더군요.”“죽도시장 전성시대 다시 오길”지금도 진행 중인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태풍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막아서고 있다. 포항은 여름도 좋지만 겨울이 더 낭만적이다. 이 시기는 문어와 대게, 과메기와 싱싱한 생선회가 맛있는 계절이기도 하다.그랬기에 코로나19 사태 이전엔 11월부터 2월까지 수많은 관광객들이 버스를 전세내거나 자가용을 타고 죽도시장을 찾았다.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2020년 겨울부터 2022년 1월까지 시장의 추위를 녹이던 손님들의 온기가 상당 부분 사라졌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권 대표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시 밝아올 내일을 말한다.“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은 언제나 있어왔지요. 살아온 과정이 내내 평탄하거나 순조로웠던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어느 자리에서건 희망을 잃지 않고 시장 사람들과 거친 풍파를 이겨내려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코로나 바이러스 전성시대’는 저만치 사라지고, ‘죽도시장 전성시대’가 다시 열리지 않겠어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적지 않은 이들이 파탄 지경에 이른 서민경제를 걱정하는 시절이다. 이는 장밋빛 꿈으로 열려야 할 신년 벽두가 마냥 환하지만은 않은 이유이기도 할 터. 그러나 권 대표의 말처럼 어려운 시절은 유사 이래 언제나 있어왔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아닐지.“친구들과 모여 앉아 죽도시장의 갖가지 해산물을 가운데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는 권 대표. 그런 시간이 다시 돌아와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그의 희망이 머지않은 때 이뤄지길 기자 역시 바란다.작별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 권 대표를 봤다.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그의 죽도시장 30년 생활이 그대로 느껴졌다. 앞으로의 30년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