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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충절·기개·신의 포은의 정신, 현대성 접목한 교육으로 승화

고운 색깔의 한복을 갖춰 입은 학생들의 몸가짐이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예절 담당 강사의 조언에 따라 줄지어 손을 씻은 후 쪽마루에 오르는 열일곱 소년·소녀들의 움직임이 의젓하고 단정했다.작년 충효문화수련원 방문 수련생 총 1만5천여명포은정신 계승·전통과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인기``선비아카데미 전문·교양과정` 등 선비정신 계승 열정글 싣는 순서1.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포은의 생애와 사상2. 빛나는 사액서원(賜額書院)… 영천 임고서원을 찾아3. 포은의 숨결 되살리는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 영천시 임고면 포은로에 위치한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원장 김명환)은 평소에도 이런 교육생들이 적지 않게 방문하는 곳이다.비단 초중고교 학생들만이 아니다. 전통문화와 왕조시대 역사에 관심을 가진 성인 관광객과 각종 교육을 진행하는 공무원, 한국에 호의적인 눈길을 보내는 외국인들까지 충효문화수련원을 찾는 사람들의 층위는 넓고 다양하다.강의실과 예절실, 식당과 숙박시설을 갖춘 충효관과 수업과 토론을 진행할 수 있는 대강당과 소강당으로 이뤄진 연수관이 충효문화수련관의 주요 시설이다. 지난해 이곳을 찾은 수련생은 모두 1만5천300여 명.포은의 정신을 계승하고 미래세대에게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효과적으로 교육·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충효문화수련원은 영천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진 것인지 김명환 원장에게 물었다.“어느 때부턴가 영천의 문화관광에서 임고서원과 충효문화수련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이전에는 은해사와 거조암부터 찾던 관광객들이 요즘엔 임고서원을 먼저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충효문화수련원에도 입소의 방법과 교육과정을 묻는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그에 발맞춰 현재 50여 명 정도가 수용 가능한 숙박공간을 대폭 늘이기 위해 제2숙박동 건립이 진행 중이다. 내년에 완공되면 수련원을 찾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포은 정몽주의 사상을 선양하려는 영천시의 노력영천시청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문화와 관광의 인프라로 활용하는 21세기적 흐름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2012년부터 진행된 ▲임고서원 성역화사업 ▲생가 등 포은 유적지 성역화사업 ▲충효문화수련원 교육시설 확충 등이 그간 기울여온 노력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수련원 예절실에 모인 학생들을 잠시 지켜봤다. 스마트폰 게임과 무대에서 춤추는 또래의 연예인들이 평소 이들의 관심사였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점잖게 앉아 책을 펼치고 선현들의 행적을 더듬는 아이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또한 믿음직했다.충효문화수련원은 경상북도에서 유일하게 `선비아카데미 전문·교양과정`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수련원과 별빛중학교, 포은초등학교 등이 교육공간으로 사용된다. 영천시 일원이 선비정신을 되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것이다.전문과정이 유림(儒林)과 시민을 위한 것이라면, 교양과정은 아이들을 위한 `사자소학(四字小學·어린이용 한자 교과서)`과 `명심보감(明心寶鑑·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어린이 인문교양서)` 교육이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이다.이는 선현이 축조한 학문과 정신의 탑을 학생들이 다듬어 다시 세우려는 노력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였다. ◆ 전통에 현대적 요소 가미시켜 교육의 효과 높여김명환 원장은 말했다. “부모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진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회적 규범이 무시되고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도 만연해 있다. 이런 때일수록 충효를 실천하고 신의를 지킨 포은의 행적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수련원의 교육을 포함해 영화와 드라마, 오페라와 음악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포은이 지향했던 숭고한 이념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 김 원장과 5명의 직원, 10명의 강사들은 “어떤 방식이 아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시키는데 도움이 될까”라는 고민을 오늘도 하고 있다. 그 고민은 한국의 미래 청사진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지금까지 충효문화수련원은 전통문화를 위주로 한 교육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수련원을 찾는 아이들에게 `의미`와 함께 `재미`까지 전달해주기 위해 수업에 현대적 요소를 가미하려고 한다. “보다 높은 교육 효과를 얻기 위해서”라는 게 이원석 교학부장의 설명이다.흥미로웠던 취재를 마친 후 임고서원과 충효문화수련원을 한 번 더 천천히 돌아봤다. 사파이어 색채로 빛나는 푸른 하늘과 붉게 핀 배롱나무꽃이 대조를 이루며 여름이 무르익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어디선가 희미하게 달콤한 향기가 밀려오는 듯했다. 역사와 전통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당장은 별 소용이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작지만 꼭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은은한 향기 같은 것이 아닐까.▲ 포은과 임고서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김영석 영천시장.인터뷰 김영석 영천시장 영천의 자랑 `임고서원` 성역화 완료충절의 역사 전 국민에 알리고 싶어김영석 영천시장은 포은과 임고서원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 역사에서 선현의 지혜를 배우고, 이를 미래 설계에 적극 반영하려는 김 시장을 만나 `영천의 자랑`이라 할 임고서원과 정몽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이고 주로 외교 관련 업무를 맡아왔다고 들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나 계기가 있는지.“육사는 확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요구한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다른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일을 하다 보니 역사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부분이라 관심을 가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역사를 통해 현재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포은은 충절과 절개, 효행과 학문 모든 방면에서 업적을 이뤘다. 김 시장이 주목하는 분야는 무엇인가?“하나만 꼽으라면 충절을 선택하겠다. 충절은 진실된 마음으로 우리의 법도와 제도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시대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올바르게 절의를 지킨 사람들은 추앙받고 후대의 표본이 된다. 충무공 이순신이 그렇고 포은 정몽주가 그렇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인권을 제대로 누리려면 우리를 보호해 줄 나라가 필요하고 그 나라는 우리가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임고서원을 효과적으로 홍보할 방안이 있는지.“임고서원의 명성에 걸맞은 기반시설 확보를 위해 성역화사업을 지난 2012년 마무리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계해 관광객 유치와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충효문화수련원을 생활예절, 서예 등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 시키고, 별빛나이트투어 등 관광상품도 개발하고 있다. 최근엔 영천시 SNS 서포터즈가 발족돼 영천의 명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공직자들은 포은 정몽주의 어떤 측면을 배워야 할까?“국가에 대한 충성, 믿음을 지키는 절개, 문무를 겸비한 당당함, 탁월한 협상력 등 어느 하나 배우지 않을 것이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애민정신을 배워야 한다. 포은은 구휼기관인 의창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오부학당과 향교를 둬 교육 진흥에 노력했다. 이는 백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고민의 산물이다.”- 취임 이후 포은의 사상을 선양하고, 임고서원을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197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임고서원 성역화사업으로 전시관, 생활체험관, 선죽교, 소공원 등이 새롭게 설치됐다. 포은의 시를 엮은 문집과 보물 1109호로 지정된 임고서원 전적들을 볼 수 있는 포은유물관을 운영해 누적 관람객이 18만명을 넘고 있다. 지난 2015년에는 우항리에 22억원을 들여 포은의 생가를 중창했다.”- 포은과 임고서원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면.“해외 주재 외교관으로 지내다 고향 영천에 돌아와 보니 임고서원 앞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 크기에 압도돼 연혁을 알아보니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있던 것을 1600년경 현재 위치에 복원할 때 옮겨 심은 것이라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임고서원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무의 생명력 덕이 아닐까 싶었다. 그 그늘에서 땀을 식히다가 나도 영천시민에게 이처럼 시원한 그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은행나무와 같은 생명력을 영천에 불어 넣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영천 3선현이 있다. 포은 정몽주와 가사문학의 대가 노계 박인로,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장군이다. 영천시는 이들의 행적을 기억하려 한다. 앞서 말한 임고서원 성역화사업 외에도 노계가사문학관을 건립 중이며, 최무선과학관은 2012년 개관해 관람객들의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역사의 향기가 가득하고 치산계곡, 강변공원이 있는 영천으로 여름휴가를 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17-08-04

500년 꼿꼿한 은행나무에 서린, 피고 지고 물드는 포은의 기상

글 싣는 순서1.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포은의 생애와 사상2. 빛나는 사액서원(賜額書院)… 영천 임고서원을 찾아 3. 포은의 숨결 되살리는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고금(古今)과 동서를 불문한다.지도자에게 바라는 보통 사람들의 요구는 크게 다르지 않다.`경제 발전`과 `문화 진흥`.이 두 가지 숙제를 풀어갈 능력을 가진 권력집단은 백성 또는 국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외면받지 않는다.그러나 당대의 경제와 문화가 가진 문제점과 그 해결 방안을 고루 살펴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차원 모두에서 사람들에게 만족을 줬던 권력자는 많지 않았다.이는 역사책을 뒤져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오늘날까지도 세계인들에게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인정받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경제적 선진성은 `아고라(agora)`에서 꽃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도시국가였던 그리스의 시민들이 모여 “무엇이 우리를 경제적 충족감과 문화적 충일감으로 이끌 것인가”를 토론했던 광장을 뜻하는 아고라.“놀랍고 찬란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리스의 문화예술적 성취는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시대를 뛰어넘어 서양과 동양의 통치권자는 유사한 고민을 했다. 조선의 왕들에게도 문화적 측면에서 `아고라`의 역할을 수행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서원(書院)이다.조선의 통치이념인 유학(儒學)을 진흥·교육하는 동시에 그 시대 사회를 이끌어가던 지역의 주요 인사들에게 문화와 학문의 거점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요구에서 생겨난 서원. ◆ 조선의 왕들, 임고서원에 편액(扁額)을 내리다그렇다면 이 서원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다름 아닌 `충절을 지킨 동시에 학문적 성취까지 이룬 선현(先賢)`이었다.그러한 상징적 인물을 서원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는 효를 행하며 유교의 경전(經典)을 연구하는 지역의 젊은 인재들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포은 정몽주는 서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자신이 섬긴 왕을 배신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심을 보였으며, 성리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던 인물이 바로 포은.정몽주를 추모하고 학문적 업적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 것이 바로 영천의 임고서원이다.조선의 13대 왕인 명종은 임고서원에 수많은 책과 함께 편액(扁額·종이나 나무판 위에 글씨를 쓴 액자)을 내렸다.조선의 왕이 직접 쓴 글씨가 걸린 서원은 특별히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불린다. 당시 임고서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영천 충효문화수련원 김명환 원장이다.“임진왜란 때 임고서원이 불에 타 무너졌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조(조선 14대 왕)가 지금의 위치로 서원을 옮겨 지었죠. 1603년의 일입니다. 그때 선조는 다시 한 번 편액을 내림으로써 임고서원의 지위를 높여주었다고 합니다.”두 명의 임금이 편액을 하사한 사실만 봐도 임고서원과 정몽주가 지닌 당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취재를 위해 임고서원을 찾았던 날. 가장 먼저 기자를 반긴 것은 `임고서원 은행나무`였다.경상북도 기념물 63호인 이 나무는 높이가 20m에 이르는 거목이다.수령이 5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의 당당한 기품이 포은의 드높았던 기상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했다.또한, 단풍으로 물든 가을날의 임고서원 풍광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포은문집`과 `지봉유설(芝峯類說)`, 포은 영정 등 만날 수 있어현대에 와서 임고서원이 새롭게 정비된 과정을 영천시청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2006년부터 임고면 양항리 일원에 198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유물전시관(포은유물관)과 생활체험관(충효관), 개성의 선죽교를 본뜬 다리 등을 만들었습니다. 유물전시관은 성리학의 보급과 생활 속 실천에 힘쓴 포은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합니다. 또한, 이곳을 찾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임고서원 연혁과 정몽주 선생의 일대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영상실에서 상영하고 있습니다.”자신을 신임해준 왕에 대해서는 충성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서는 효도를, 선배 학자에게는 신의를,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러움을 보여준 포은.임고서원에서 만난 충효문화수련원 이원석 교학부장에게 물었다. “전시된 유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어떤 것인가요?” 다소 거칠고 우매한 기자의 질문에 이 교학부장의 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포은의 인품과 학식을 생생하게 화폭으로 옮긴 영정 3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 외에도 `포은문집`과 `포은집`,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도 전시하고 있고요. 더불어 수백 권의 귀한 책들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을 귀하다고 지목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웃음)”영천 정신문화의 알짬을 간직한 임고서원 주변에는 포은과 관련된 유적지도 많다.대표적인 것이 ▲포은의 부모 묘소(서른 살이 되기 전 부모를 모두 여읜 포은은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에서 각각 3년을 시묘살이 했다) ▲유허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72호로 포은의 효심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孝子里(효자리)`라고 새겨진 비석을 영천 우항리에 내렸다) ▲조옹대(포은이 낚시하며 시상을 떠올리던 공간) ▲포은 생가(2015년 완공된 목조건물로 임고서원에서 차로 10분 거리) 등이다. 최근 들어서는 임고서원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그 옛날 한국 왕조였던 고려의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또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해외동포의 자녀들이 서원을 방문해 잊고 살았던 우리네 전통문화의 향기에 흠뻑 빠지는 경우도 많다는 게 영천시의 설명이다.“어느 순간부터 언론 보도와 입소문을 통해 포은 정몽주와 임고서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인터넷카페, 블로그, 밴드 등을 통한 온라인 홍보도 이곳을 찾는 학생들이 늘어난 이유 중의 하나일 겁니다”라고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측은 부연했다. ◆`영천 선죽교`를 거닐며 개성 선죽교를 떠올리다마지막으로 개인적 체험 하나를 이야기하고 싶다.남북관계가 좋았던 2000년대 중반. 20여 명의 남한 국어학자와 함께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찾았다.북한의 국어학자들을 만나 `남북한 통합 국어사전`의 제작을 논의하는 자리에 취재기자로 참석한 것이다.길고 길었던 학자들의 회의가 끝난 후 평양에서 파견된 북한측 안내원이 “고려박물관과 선죽교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학자들과 기자들 모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개성의 선죽교는 생각보다 작고 초라했다.고려 말 대표적인 충신이자 대학자가 지조와 신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그 고적한 풍경 속으로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날 본 개성 선죽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그리고 2017년 여름. 다시 선죽교와 만났다.이번엔 개성이 아닌 영천에서였다. 포은의 피살지인 동시에 기울어진 왕조 고려의 멸망을 상징하는 다리가 개성과 똑같은 크기와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善竹橋(선죽교)`라고 쓴 글씨를 탁본해 세운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충효와 단심(丹心)이란 단어가 한없이 가벼워진 오늘날. 우리는 포은의 삶과 죽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임고서원은 어떤 의미로 후대의 가슴 속에 남을까?역사를 연구해온 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민족의 미래는 결코 어두울 수 없다”고. 그렇기에 포은과 임고서원은 우리의 과거인 동시에 미래다.이어지는 여러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쯤, 관복을 갖춰 입은 푸근한 얼굴의 포은이 느린 걸음으로 임고서원을 산책하는 모습이 보였다.그것은 환시(幻視)였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7-28

일백번 고쳐 죽어도 변치않는 충절… 포은의 넋, 영천에서 찾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자. 때는 지금으로부터 625년 전인 서기 1392년. 한 왕조가 초라한 그믐달처럼 이지러지고 있었다. 3명의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쉰여섯의 대학자(大學者)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예견했다.새롭게 떠오른 권력집단의 핵심 인물로부터 “이제 힘을 잃은 당신의 왕을 버리고 우리와 함께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점잖게 시(詩)로써 거부하면서부터 그의 죽음은 이미 예정돼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삶의 막다른 길.하지만 학자는 의연했다. 어차피 직면한 죽음이라면 두려움을 떨치고 당당하게 맞이하고 싶었다. 해가 떨어지고 달이 차올랐다.물에 젖은 무거운 담요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밤.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말에 거꾸로 올랐다. 왜 그랬을까?새로운 권력자의 하수인 몇몇이 조그만 돌다리 아래 몸을 웅크리고 학자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의 손에 들린 건 쇠도리깨와 철퇴,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었다. 마침내 학자가 탄 말이 그 다리에 이르렀다. 성마른 암살자 하나가 먼저 철퇴를 휘둘렀다. 이어 달려온 자객들의 무자비한 칼질이 이어졌다. 학자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그의 이름은 정몽주(1337~1392). 우리가 포은(圃隱)이라 칭하는 고려의 충신이었다.포은이 사망한 후 3개월. `고려`라는 이름의 나라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기울어가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충신· 3년 시묘살이 두차례나 한 효자 약관 20세에 국자감시 합격, 여진족·왜구 토벌하는 등 무신 기질도 다분글 싣는 순서1.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포은의 생애와 사상2. 빛나는 사액서원(賜額書院)… 영천 임고서원을 찾아 3. 포은의 숨결 되살리는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 ◆ 우리는 포은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학창시절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앞서 서술된 글을 끝까지 읽지 않더라도 위에 등장하는 `옛이야기`가 누구에 관한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더불어 `망해가는 왕조`가 고려란 것도, `새로운 왕조`가 조선이란 것도, 포은 정몽주를 유혹한 권력집단의 핵심 인물이 훗날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이 되는 이방원(1367~1422)이란 것 역시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이방원 앞에서 점잖게 읊조린 시가 `단심가(丹心歌)`라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알고 있다.왜냐? 이 에피소드는 이미 수십 차례 영화와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한국인에게 소개됐기 때문이다.하지만 “대중적 영상을 통해 알고 있는 포은의 모습이 그의 진면목일까”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대부분의 사람들이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정몽주의 몇몇 모습만을 보고 있는 건 아닐지.취재를 위해 만난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 이원석(53) 교학부장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충절을 지킨 지조 있는 신하였고, 3년 시묘살이를 두 차례나 한 지극한 효심의 소유자였으며, 고려 때 사람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인식하던 명나라와 일본을 도합 7차례나 다녀온 탁월한 외교관”이라고 포은을 설명했다.임고서원은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위치한 사액서원(賜額書院·왕이 편액을 내린 서원)으로 포은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서원 입구에서 `東方理學之祖(동방이학지조)`라 쓰인 거대한 빗돌과 만났다.이 송탑비는 포은이 `동쪽 나라 성리학의 대학자`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난(蘭)·용(龍) 등장하는 꿈이 선물한 영특한 아이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난 포은은 성장하면서 세 차례 이름을 바꾼다.어머니의 태몽에 난초가 나타났다 하여 몽란(夢蘭)이라 지어졌던 이름이, 포은이 여덟 살이던 시절 몽룡(夢龍)으로 바뀐다.검은 용이 나무에 오르는 꿈을 꾼 후 나타난 아들을 본 게 개명의 이유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몽주(夢周)는 관례를 치르고 난 후에 얻은 이름이다.포은은 어린 시절 영특함이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다고 전해진다.충효문화수련원 김명환(73) 원장은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래와 같은 에피소드를 웃음 띤 얼굴로 들려줬다.“정몽주가 아홉 살 때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집에 데리고 있는 여종의 남편이 전쟁터에 나갔어요. 얼마나 지아비가 걱정되고 보고 싶었겠어요.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전할 길이 없어 고민하던 그 여종이 주인집 도련님인 포은에게 `편지 한 통만 대신 써주세요`라고 부탁을 했지요. 글을 모르는 여종의 입장을 이해한 포은이 아주 짤막한 편지를 써줬는데 그 내용이 뭔 줄 아세요? `妾心不移(첩심불이)`였답니다. 그게 `당신을 기다리는 저의 마음은 어느 곳으로도 옮겨가지 않습니다`라는 뜻이잖아요. 변치 않는 사랑으로 남편을 기다리겠다는. 얼마나 명민했으면 겨우 아홉 살 아이가 어른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 그토록 간결하고도 명료한 표현을 했겠어요. 이 이야기만 봐도 삶의 어떤 순간에서도 지조를 버리지 않은 포은의 품성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까?”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선비 절차탁마한 포은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공민왕 6년인 1357년이다.그해 포은은 국자감시에 합격한다. 그때 그의 나이 약관 20세.3년 뒤에는 문과(文科) 장원으로 향후 큰 뜻을 펼칠 기틀을 완성하게 된다.보통의 사람들은 빼어난 시문(詩文)과 문장을 남긴 포은을 `문신(文臣)`으로만 기억한다.하지만 정몽주는 문약한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살기를 거부했던 사람이다.1363년에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해 여진족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고, 1383년엔 동북면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가 돼 함경도 지방을 유린하던 왜구를 토벌하기도 했다. `무신(武臣)`의 기질도 다분했던 것이다.문무 겸비의 포은은 명석한 두뇌와 두둑한 배짱을 바탕으로 `고려 최고의 외교관`으로 인정받았다.1377년엔 일본으로 건너가 인질로 잡혀간 백성 수백 명의 석방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명나라를 오가면서는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깊은 식견을 보여줘 중국 대신들의 기를 죽였다.포은을 `동방이학지조`라 부르는 것은 이 같은 연유에서다. 알다시피 `이학`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다.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 앞에서는 생명도 가벼이 여겼던 포은의 결기와 강단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고려의 문신 김득배(1312~1362)는 포은을 문과에 급제시킨 은인이다. 그가 모함에 의해 처형됐다. 누구 하나 시체를 거두려는 이가 없었다. 그때 왕에게 청해 김득배의 시신을 장례 치르고, 제문을 지어 안타까운 죽음을 위로한 이가 포은이었다. 자신도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희생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앞서 정몽주는 개성 선죽교에서 맞닥뜨렸던 죽음의 순간 말을 거꾸로 탔다고 했다.왜 그랬을까? 오랜 기간 포은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해온 나이 지긋한 역사학자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포은은 이성계와 이방원에게 목숨을 빼앗길 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미웠을 것이다. 그러나 다리 아래서 자신을 기다리던 자객들은 결정권이 없는 이방원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사람이니 그들을 미워할 이유는 없었다. 포은은 죽음의 순간 그들의 눈동자를 보지 않음으로써 철퇴와 칼을 휘두른 자객을 이미 용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학식과 지조를 갖추고, 충과 효를 실천으로 증명한 포은 정몽주.그의 몸은 625년 전 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남아 고향 영천 사람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되고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