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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비 수원 출신 첫 시장 당선… “진실성 알아봐 주신 거죠”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선거였다. 이재준 수원시장은 지난 6월 1일 전국지방선거에서 인구 100만 이상 특례시 가운데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2위 후보와의 표차는 2천928표. 고작 0.57%p 앞지른 초박빙 승부였다. 이 시장은 포항시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했다. 수원은 전통적으로 지역색이 강한 도시다. ‘비 수원’ 출신으로 시장에 당선된 건 이 시장이 처음이다. 이 시장은 ‘수원을 사랑하는 마음’을 시민들이 알아준 결과라고 했다. -당선의 가장 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수원 출신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수원을 사랑하는구나’라는 진실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저를 지켜줬다고 생각한다.이 시장은 도시공학 박사다. 공학도로서 첫 걸음을 수원에서 내딛었다. 포항고등학교 졸업 후 출향(出鄕)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도시가 수원이었다.-어떻게 수원에 자리를 잡게 됐는지.△성균관대학교가 수원에 있다. 그걸 모르고 수원에 온 거다. 짐 싸들고 스무 살 때 처음 도착했다. 수원은 시골 촌놈인 내가 정착하기 좋은 도시였다. 집값도 안정돼 있고 선택해서 살만한 적절한 도시였다. ‘같이 어울려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공동체를 가진 도시였다.진학을 위해 수원에 들어왔고 젊은 나이에 교수가 돼 주거지를 정할 때도 수원을 떠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도시에 녹아들어 ‘수원 사람’이 됐고 인구 120만 대도시의 시정을 이끌게 됐다. 이 시장은 학창시절 포항시 남구 효자동에 살았다.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포항에 대한 기억은.△효자동에 살았다. 효자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머릿속에 포항제철 사원주택을 생각하는데 거긴 산 위 동네고 저는 아래에 가난한 동네에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많이 변했지만 예전에는 산 아랫동네와 윗동네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산 아래 효자동에 살던 소년은 산 위 포항제철 사원주택 단지를 동경했다. 녹지가 어우러진 단독주택과 문화 인프라는 소년에게 신세계였다.△산에 올라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이건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라고 생각했다. 위화감도 느꼈다. ‘우리 아버지는 왜 저런데서 못 사나’라고.이 시장은 우리나라 친환경 주거단지 연구의 선구자다. 15년의 학자 생활 동안 연구의 초점을 ‘자연 친화적인 주거 환경’에 맞췄다고 했다. 학자로서 포철 사원주택 단지는 지금 봐도 완벽에 가까운 도시 계획이라고 했다.-당시 포철 사원주택 단지가 어떤 점에서 ‘좋은 도시’로 평가받는 걸까?△공원 녹지 속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가 있다. 문화예술 극장(효자아트홀)도 있다. 체육시설도 잘 갖춰져 있는데 이런 곳이 전국에 없다. 지금 도시의 아파트를 보면 공원 녹지가 어디 있나. 그냥 의무적으로 몇 퍼센트 겨우 들어가 있는 정도다. 어린 시절 동경이 깔려 있어서 그런지 학자 시절 15년을 생태와 도시를 연구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친환경적인 주거단지 계획을 연구하기도 했다.-자연과 어우러진 도시 환경이 왜 중요한가?△우리가 원래 그런 데서 살아왔다. 인간과 자연이 근접해서 또 동화돼서다. 그런데 기술과 욕망이 발전하니 자연을 능가하려 한다. 한계를 넘어가면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코로나19와 같은 질병도 생긴다. 욕망이 너무 펼쳐진 결과다.학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엔 학생운동을 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었기에 차별에 분노했고 열심히 투쟁했다.△어릴 때는 막연하게 ‘학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 아버지가 노동자였으니까. 그런데 3학년 말쯤 돼서 ‘노동 운동 현장으로 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구로나 안산 쪽 현장이었다. 나도 선택을 해야 하는데 갈등이 생겼다. 내 아버지가 일용직 노동자인데 ‘노동조합을 구성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하나’라는 갈등이다. 아버지조차도 노조에 가입을 못 하는데….이 시장은 학생운동을 접고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박사 과정까지 내리 달렸다. 34살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됐다. 이때부터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경실련에서 도시개혁센터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녹색연합 등에서 환경 운동을 했다. 이 시절 염태영 전 수원시장을 만났다.-선출직에 출마하겠다는 결심은 언제 하게 된 건지.△염태영 시장이 정치를 한다고 해서 도와줬는데 당선이 됐다. ‘열심히 하세요’ 하고 말았는데 갑자기 제2부시장 제도가 생겼다. 염 시장이 당선 3개월 뒤에 나에게 ‘당신이 정책을 만들어줬으니 시에 들어와서 집행을 좀 하라’고 했다. 부시장을 2년만 하려고 그랬는데 5년이나 하게 됐다. 그때도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임기 말 쯤 ‘정치와 행정이 가진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지난 6·1 지방선거 당선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이 시장은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는 수원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섬겼던 ‘도시의 천사들’ 덕이라고 했다.△예를 들자면 부시장 시절 업무추진비가 항상 많이 남았다. 그때 정치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여러 사람들 만나는데 썼을 텐데….(웃음) 한동안 ‘어디다 업무추진비를 쓸까’ 생각하다 ‘우리 도시의 천사들에게 밥을 사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모범운전사, 방범대원, 환경미화원 같은 분들이다. 그 분들이 나중에 말씀하시더라. ‘밥은 고사하고 찾아와 준 사람도 없다. 당신이 우리를 섬긴 것을 알고 있다’고.이 시장은 기업 유치를 통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했다.△수원은 매력적인 도시인데 지금은 쇠퇴하는 느낌이 있다. 기업이 많이 줄었고 일자리가 줄었다. 도시 생기가 점점 떨어지는 거다. 행정가로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수원은 기업을 유치하는 게 필요하겠다. 일자리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첫 번째로 하고 있다. 최근 생활고를 겪던 어머니와 두 딸이 숨진 채 발견된 ‘수원 세 모녀 사건’. 이 시장은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마을 공동체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역의 이웃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위기 가구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아이디어를 추진 중이다.△그들을 찾지 못한 행정이 잘못한 거다. 제도가 갖춰져 있다 없다 논의는 둘째 문제고 그런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 게 정부다.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다 안다. 누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지원을 받고 있는지. 공동체가 복지비도 사용을 하고 적극적으로 돕는 정책을 지금 추진 중이다.수원시와 포항시는 자매도시다. 2009년 두 도시가 결연을 맺은 이래 다양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2017년 포항지진 당시엔 수원시가 봉사단과 구호물품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 시장은 이번 포항불꽃축제를 맞아 포항을 방문한다. 시장 스스로가 도시간 우애의 상징이 됐다.△수원과 포항은 가장 끈끈한 자매도시다. 포항 출신이 수원시장이 되어 이번에 방문하게 됐다. 저로선 가슴이 벅차다. 이제까지 두 도시가 문화교류나 체육교류를 잘 해왔다. 나아가서 경제 교류까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재준 시장은1965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경북 포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83년 성균관대에 입학 했고 서울대학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쳤다. 협성대학교와 아주대학교 등에서 교수생활을 했고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정책위원장을 맡아 다양한 도시 관련 시민운동을 벌였다. 도시설계 전문가로 국내외 신도시 설계에 참여했다. 2011년부터 5년간 수원시 제2부시장 직을 맡았다.이재중TV조선 탐사보도부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 파리 테러, 네팔 대지진, 로힝야 사태 등 국제 분쟁·재난 취재를 해 왔다. 국제부와 사회부 법조팀 등을 거쳐 현재 탐사보도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2016 한국기자상 대상, 2017 관훈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2022-09-05

“묵묵히 계속해 나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

서울 연남동의 한 건물. 지하로 들어가는 문을 열자 밴드 ‘공중그늘’의 작업실이 펼쳐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게 꾸려진 창작의 공간에서 4명의 멤버와 마주 앉았다. 멤버들은 시종일관 밝고 선명했다. 인디 음악가의 거창하거나 추상적인 예술적 고뇌 대신 자신들이 지향하고 표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노래와 기타를 맡은 이장오와 드럼을 연주하는 이해인은 형제다. 기타를 치는 경성수와 베이스의 이철민까지 넷은 모두 어릴 적 친구사이다. ‘공중그늘’은 2016년 결성됐다. 거창한 시작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떻게 밴드를 하게 됐어요?△(이장오) 청소년기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에요. 놀던 사이죠. ‘뭔가를 좀 같이 해 볼까? 어차피 매일 같이 모여 있는데 생산적인 걸 해보면서 놀아도 되지 않을까?’ 하면서 시작한 것 같아요. ‘그냥 놀듯이 하자’ 이렇게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밴드의 SNS 관리나 대외 홍보는 해인이 맡고 서류 작업은 장오가 한다. 음반 심의 의뢰 등은 철민의 담당. 성수는 공연과 관련한 소통을 도맡아 한다. 대부분의 인디 밴드가 그렇듯 가내수공업이다. 화제가 됐던 ‘포크음악의 대모’ 장필순과의 협업 과정도 단순했다.△(이해인) 편곡을 할 당시에 ‘여기에 장필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어가면 진짜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락을 드려볼까 하는데 되게 사실 망설여지는 일이잖아요. 근데 좋은 음악을 만들어서 존경하는 음악가한테 같이 하자고 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웃음) 그냥 연락을 드려볼 수도 있지 약간 이런 생각으로 연락을 드렸던 거고 해주실 거라고 크게 기대는 안 했었어요.‘놀 듯’ 시작한 밴드는 어느새 청춘의 진지한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8년 발매한 싱글 ‘선’에선 경쾌하고 감각적인 연주 위에 대상과 닿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사로 얹었다. 같은 해 발표한 ‘산책’에선 ‘우리는 길을 잃었지만 산책이라 부르지’라는 가사와 희망적 멜로디를 통해 방황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노래했다. 독보적인 스타일과 문학적 가사는 평단과 인디 씬의 주목을 받았다. -스타일이 상당히 독특해요.△(이해인) 저희 스타일이 막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런 거라기보다는….△(경성수) 굳이 우리를 따라하지 않는 것 아닐까?(웃음)△(이장오) 저희는 정규적인 작곡을 배워서 쓰는 스타일의 곡들이 아니라서 좀 더 자유로운 부분은 있어요.정규앨범 ‘연가’는 지난해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 부문 후보에 올라 ‘섬세한 표현력과 몽환적 스타일을 내세워 음악 안팎에서 매혹적인 감응을 이끌어 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음악 자체와 더불어 비주얼 요소를 포함하는 공감각적 표현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공중그늘의 뮤직비디오는 실사(實寫) 대신 일러스트가 주를 이룬다.-뮤직비디오가 인상적이에요. 종합예술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주얼 작업에 공을 들이는 것 같습니다.△(이장오) 실사 보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표현하는 것이 저희와 결이 맞는 것 같아요. 음악을 깊이 있게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라는 생각보다는 작가주의적인 작업 방식을 택하기 때문에 그걸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기 위해 시각적인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뮤직비디오 작업에 특히 공을 들이는 이유이기도 하고요.실사보다 표현이 자유롭고 이를 받아들이는 대중들에게도 해석의 여지가 넓은 일러스트를 선택했단 얘기다. 첫 싱글이자 대표곡으로 꼽히는 ‘파수꾼’의 뮤직비디오에선 자칫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입체적인 도형들이 공간을 떠돈다. 선과 면으로 단순화된 오브제들이 반복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해인) 사실 어떤 일의 결과라는 것이 조금 허무할 수도 있고 의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일을 묵묵히 계속해 나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예요. 파수꾼의 일처럼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꾸준하게 하는 것이요. 이런 생각을 비디오 작가님과 나누면서 나온 시각적인 아이디어예요. 반복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 이유에요.이들의 음악은 몽환적이고 부유하는 듯 한 정서의 연주 위에 과하지 않은 담담한 가사가 얹혀 있다. 순수하고 문학적인 가사는 어쩐지 인디음악 스럽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의 창작물은 기성의 장르에 맞춰 정의하기 어렵다.-장르를 굳이 얘기할 수 있을까요.△(이해인) 제가 그냥 우스갯소리로 ‘굿보이 사이키델릭’이라고(웃음) 저희도 뭐라고 표현을 못하겠어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는데 사이키델릭이라고 하면 날이 서 있고 그런 이미지인데 ‘너희 음악 정말 착하다’ 이런 얘기를 되게 많이 들어요. 사실 저희가 명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곡은 슬픔이나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너무 감정에 함몰돼 있지 않게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사이키델릭: 환각적·몽환적 분위기의 록 음악 장르)대중음악 씬에서 밴드가 귀해진 마당이다. 그렇기에 경연 프로그램을 비롯해 인기 매체에서의 섭외 요청도 수시로 들어온다. 하지만 이 오랜 친구들은 달콤한 유혹을 모두 거절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 같단 이유에서다. -오버그라운드에서 호출이 오면 나설 의향이 있어요?△(이해인) 섭외가 많이 왔었어요. 특히 경연 프로그램에서요. 그런데 다 거절했어요. 저희 음악이 퍼포먼스 자체로 사람들한테 엄청나게 인상을 주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하고 멤버들 성격 자체도 경연에 적합하지 않아서(웃음)….△(이장오) 다들 좀 내성적인 편이기도 하고 또 곡 같은 거 선정할 때도 음악가로서의 자존심 같은 걸 굉장히 생각하는 편이라서 대중한테 어떤 곡이 인기가 좋을까보다 어떤 곡을 들려주고 싶은지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요.함께한 시간만큼 멤버들의 우애도 각별하다. 작사와 작곡은 개인이 하지만 발표는 밴드 이름으로 한다. 한 멤버가 곡을 스케치 해 오면 함께 다듬어 가며 완성해 가는 식이다. 제각기 개성을 담아 곡을 쓰지만 앨범 안에선 일관성이 느껴진다.-작사·작곡이 공동으로 돼 있어요.△(이장오) 스케치를 만들어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작곡했다고 하는 게 되게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고 또 그냥 사이좋게 오래 하는데도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게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싸우진 않아요?△(이장오) 엄청 많이 싸워요. 또 그렇게 싸우고도 다시 풀릴 수 있는 정도 관계라서 계속 함께 하는 거 아닐까요. 저희는 보통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욕구 보단 누군가가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욕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팀이에요. 그래서 한 사람이 진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면 저희는 안 하려고 그래요. 하기 싫은 일을 하다 보면 오래 함께 하기 힘든 것 같더라고요.멤버 중 누군가의 ‘하고 싶지 않은’ 욕구를 존중하며 6년 째 섬세한 창작물을 묵묵히 만들어 가고 있는 이들. 지난 4월 발표한 ‘모래탑’에선 밴드의 자전적 읊조림이 들린다.“우리는 모래탑을 쌓을 거야바람에 흩날려 작아지더라도때로는 헤매는 사람들의멀리서 반짝이는 꿈인거야.”장오·해인 형제는 경상북도 포항시 출신이다. 청하면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향이 주는 영감이 있나요?△(이해인) 저는 청하에서 행복했던 기억이 많아요. 저희 집이 나무 농장이었거든요. 넓은 농장에서 매일 놀았어요. 학원도 없었고요. 여름이면 바다도 거의 매일 갔거든요. 그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 있어요. 시골에서 자연을 느꼈던 것들이 표현에서 조금씩 묻어 나오는 것 같아요.△(이장오) 포항에서 가장 답답했던 게 문화 격차가 너무 크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어요. 문화적인 지원이 많이 필요하겠죠.밴드 ‘공중그늘’은 오는 27일 오후 5시 포항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콘서트를 연다. 이재중 TV조선 탐사보도부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 파리 테러, 네팔 대지진, 로힝야 사태 등 국제 분쟁·재난 취재를 해 왔다. 국제부와 사회부 법조팀 등을 거쳐 현재 탐사보도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2016 한국기자상 대상, 2017 관훈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2022-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