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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평생 땅·바람·나무와 살아온 사람들의 삶 사진에 녹여

갑오년 새해 청마의 역동적 기운을 받은 지난 11일 오전 10시30분, 어느새 망고씩스 양덕점은 두바퀴로 회원들의 정담으로 가득하다. 따뜻한 커피 한잔과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에 함께한 이들의 표정이 사뭇 밝다. “지금부터 인문학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안성용 포항예술문화연구소 소장님께서 사진학 강의를 해주시겠습니다. 주제는 `자리밭 마을의 신화`입니다.” 모성은 교수의 사회로 강의가 시작된다. 자리밭 마을 신화, 허물어져가는 농촌현실 보여줘소박한 사진찍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성찰 근거“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에 `자리밭`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12가구가 부락을 이루고 있으나 실제로는 7가구만 살고 있고 나머지는 빈집들입니다.8년 전, 저는 이 마을에 첫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사진 속에 담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인연으로 저 또한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어엿한 자리밭 마을 주민이 되었습니다.세월이 흐른 만큼 이젠 처음 이 마을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의 서먹함도 제법 사라졌습니다. 마을 할아버지들의 술벗도 되어주고, 할머니들의 이야기 동무도 되면서 마을 사람들과 정이 들었습니다.진솔된 표현의 다큐멘터리 사진근자에는 노령화된 이 농촌 마을에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느껴집니다. 마을 사람들이 농사짓는 일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대신에 조상들 무덤 조성에는 정성을 다합니다. 그도 그럴 일입니다. 마을에 무덤은 늘어가고 산 사람은 줄어갑니다. `자리밭` 사람들은 조상이 부르면 언제든 떠날 채비를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깝게 서 있는 탓인가 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 풍광이 좋은 사진, 자신의 예쁜 모습을 찍어 집에 걸어 둡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러한 패턴이 많이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인정합니다.`자리밭 마을의 신화`는 허물어져가는 우리 농촌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뼈를 발라내고 속살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피폐해지는 농촌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악에 받힌 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삶의 쉼터가 여기라고, 마치 도연명의 무릉도원인 듯 포장하지도 않습니다.다만 우리 땅에 `자리밭` 마을이 있고, 이러한 삶이 있다는 것을 낮은 목소리로 넌지시 건넬 뿐입니다. 기교를 앞세운 과시적 사진 찍기로부터 한 걸음 빗겨난 참으로 소박한 사진 찍기입니다. 무욕의 사진 찍기입니다. 저의 삶이 이미 `자리밭` 마을 사람들의 삶과 동화되었기에 가능합니다.이처럼, 사진가들이 눈이 번쩍 뜨이는 사건을 쫒는 대신에 도시 외곽이나 시골의 삶 속으로 눈을 돌린 시기는 1970년대부터입니다. 작가 에메트 고윈(Emmet Gown), 빌 오웬스(Bill Owens), 밀턴 로고빈(Milton Rogovin)의 사진 작업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각각의 소재는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된 관점은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주목 받지 못한 일상적 삶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미시적으로, 지속적으로 관찰해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근거로 삼습니다. 저의 사진 작업도 그 틀 속에서 이해가 가능합니다.이러한 사진 기법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입니다.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진솔된 표현 방법이며 가식이나 지나친 연출, 암실에서 억지로 만들어내어 조작된 것이 아닌 직설적인 표현 방법입니다.여러분들이 디지털 카메라나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을 할 때 여러분들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들을 순간순간 기록해 둔다는 자체가 다큐멘터리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이렇게 다큐멘터리 사진의 매력은 쇼킹한 사건이나 프로파간다(propaganda,어떤 주의나 주장 등을 대중에게 널리 설명해 이해와 동의를 얻으려는 활동) 혹은 거대 담론의 생산을 유도하는 이미지보다는 `자리밭 마을의 신화`같은 삶의 소소한 모습 속에도 숨어 있습니다.3가지 주제로 담은 마을 풍경`자리밭 마을의 신화`는 3가지 포괄적인 주제를 담아냅니다. 첫 번째는 제가 찍은 대상들을 통해서 어떻게 스스로 `자리밭` 마을의 한 일원이 되어가는 지에 대한 포오즈를 느끼는 것입니다. 처음에 `나`는 멀리서 원경으로 마을을 찍었습니다. 그 사진은 `이곳 사람들`과 `나` 사이에 놓인 심리적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보는 관찰자로서의 풍경입니다.제 사진 속에는 마을 풍경과 이곳 사람들이 함께 찍혀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람과 풍경이 하나로 보입니다. 마치 동고동락한 부부의 얼굴이 서로 닮아가는 것처럼, 이곳 사람들의 모습은 그대로 `자리밭` 마을의 대숲이기도 하고, 돌담이기도 합니다. 또한 무덤이기도하고, 다랑논이기도 합니다.이마의 깊게 팬 주름이나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등은 마치 마을 여기저기 보이는 덤불 같기도 합니다. 평생을 땅과 바람과 나무와 함께 살아 온 삶이 사진 속에서 녹아나 그대로 마을의 풍경이 됐습니다. 나의 망설임과 이방인의 눈으로 보는 관찰자(나)의 거리감에 비해 자리밭 풍경과 이미 동화된 이곳 사람들의 삶이 선명히 대비됩니다.두 번째는 마을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소소한 사건을 찍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진은 사건일 것도 없는 사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곳의 일상이고 생활 방식입니다. 아마 제일 큰 사건이라면 죽음을 찍은, 상여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정도입니다. 사건의 빈자리는 일상이 메웁니다. 바랑매고 이웃 나들이, 시부모 무덤 돌보기, 논일하다 잠시 멈추고 길에 서서 참 먹기 같은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그들의 일상이 사진가의 일상으로 전이되고 있습니다. 이제 카메라가 쉽게, 가까이서 삶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세 번째는 마을 사람 한분 한분에 대한 초상 사진 찍기입니다. 4×5 카메라로 아주 당당하게 정면에서 찍습니다. 그리고 롤지 크기로 인화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이분들의 존엄함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사진가 앞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사진가 역시 어색함도 주저함도 없이 이들의 얼굴 속으로 걸어갑니다. 이제 심리적 거리감이 소멸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 사진을 찍고 싶어 8년을 에둘러 왔는지 모릅니다. 풍상을 견딘 얼굴의 흔적을 깊은 애정을 실어 찍고 있는 것입니다.사진은 이들이 이 땅에 살아왔던 사람들임을 증명합니다. 이 무명인들의 삶이 땅의 생명으로 이어져 왔음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눈길 한번 받지 못한 이 땅의 `자리밭` 마을이 어디 여기뿐이겠습니까!마을 전체가 전시장·갤러리이곳에서 부대끼는 삶은 이런 것들입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영화를 본 일이 없다는 `마산 할머니`를 위해서 저는 처음으로 마을에 빔프로젝트를 설치하고, 영화 `동막골`을 상영했습니다.또 11월11일은 도시 사람들에게 빼빼로를 먹는 날, 일명 `빼빼로데이`겠지만 이곳 `자리밭` 마을에서는 일 년에 딱 한번 장이 섭니다. 사실 장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이곳에서 손수 만든 먹거리를 내놓고 가까운 이웃 마을의 지인들을 초대합니다. 이백 여명 남짓 모인 이곳은 일 년에 단 한번 활기가 넘치는 축제날입니다.그동안 이 마을 어르신들을 찍은 사진을 대형으로 인화해서 문패 대신에 집집마다 담벼락에 걸어두고 손님을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을 전체가 전시장이 되고, 집집마다 갤러리입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모델이고 갤러리의 주인입니다. 그 날 하루만은 모두가 무명인이 아닌 때 빼고 광낸 문화인이 되는 날입니다. `자리밭` 마을 속에서 우려낸 사진이기에 형식과 내용이 겉돌지 않고 아귀가 빈틈없이 꼭 맞습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밑바탕에는 사람 사랑하는 인간애가 강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감사합니다.”차분차분한 1시간 남짓의 강의가 끝나자 양덕동 김희정씨가 상기된 표정으로 청강 소감을 말한다.“안성용 교수님의 사진 강의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사진을 찍는 이유로 행복의 순간을 추억으로 간직하기위한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안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사진의 중요한 역할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진이 평범한 우리의 삶을 신화처럼 특별하게 담아주고 그 속에 사람 사는 향기도 있어 성찰의 기회를 준다는 사실입니다.”사진은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진이 있어 `자리밭 마을의 신화`는 또 계속될 것이다. 사진은 과거를 불러와 현재를 일으키고 현재를 담아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다.◇ 대표집필:모성은 교수(한국지역경제연구원 원장)◇ 초빙강사:안성용(포항예술문화연구소 소장)◇ 강의집필:이나나(경북미술비평연구소 소장)◇ 사진·영상:황종희(사진)·이재원(영상)◇ 강의 장소:망고씩스 커피전문점(양덕점,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30분),엔제리너스 커피전문점(이동점, 화요일 오전 10시30분)◇ 주관:(사)문화와 시민끝

2014-01-16

참나를 찾기위한 끝없는 성찰,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겨울바람이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한다. 올 2월부터 두바퀴로는 포항의 숨겨진 문화자산을 찾아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연오랑·세오녀의 이야기로 시작된 자전거 탐방은 어느새 차가운 겨울을 다시 맞는다. 처음엔 낯설어 서로가 서먹해 하던 얼굴들이 어느새 훈훈한 가족애로 가득하다. 물질만능 풍조로 가치혼돈 양상 두드러져궁극적인 인간의 행복 찾아가는 노력 필요□두바퀴로의 단상두바퀴로가 달려간 탐방지의 단상을 떠올려본다. 연오랑·세오녀의 해와 달의 못 일월지를 찾았다. 구룡포항을 가로질러 뱃공장 언덕으로 힘차게 밟았던 자전거 페달은 숨겨진 조선시대 충비 단량의 비석이 있는 광남서원으로 향했고, 5월에는 초파일을 앞두고 오어사를 탐방하여 원효와 자장의 오어(吾魚)를 만나기도 했다.호국보훈의 달 6월에는 이육사의`청포도`가 주저리주저리 영글었던 동해 석곡도서관에서 포항이 낳은 영남 한의학의 큰 스승 이규준을 만났고, 학도병의 애국정신과 넋이 서린 탑산에서 산불화재로 인해 검게 불타버린 수도산을 바라보며 치열했던 포항전투를 떠올리며 한 맺힌 영혼을 위로했다.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미처 한입 깨물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8월의 뙤약볕에도 두바퀴로는 달렸다. 칠포리 암각화와 성계리 고인돌 바위에 새겨진 선사인류 이야기를 통해 영일만 일대에 찬란한 고대문화가 형성되었음 알게 되어 가슴 벅찼다.9월에는 추석을 앞두고 동해안 최대 규모이자 포항경제의 심장인 죽도시장을 찾았고, 내연산을 찾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체험하였으며, 덕동 전통마을을 비롯해 그 밖의 많은 지역문화를 찾아 두바퀴로는 달렸다. □문화창조의 새로운 대안 - 인문학“이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실외 탐방은 추위로 인해 내년 돌아오는 봄을 기약하고, 대신 새로운 주제로 실내 탐방을 합시다. 두바퀴로 인문학 속으로 달립시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안성용 단장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두바퀴로의 새로운 실내탐방은 바로 인문학이다. 양덕동 `망고식스` 커피전문점과 `엔제리너스` 이동점에서 `커피향과 인문학`이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커피향과 인문학` 강좌는 현재 망고식스 양덕점(매주 수요일 오전 10시30분)과 엔젤리너스 이동점(매주 화요일 오전 10시30분)에서 강좌를 주최하고 있다. 커피 한 잔 500원이라는 착한 가격으로 시민들의 인문학적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누구든 커피 한잔을 마시며 들을 수 있다.이번 인문학 강좌의 팀장을 맡은 이나나 박사의 설명을 들어본다.“ `커피향과 인문학`의 근본 취지는 커피한잔을 마시는 잠시의 여유 속에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입니다. 역사, 문학, 그림, 사진, 고전에 담긴 인간의 살아온 길에서 지혜를 얻고, 인문학 속의 다양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것이 곧 자신의 지식이 되고, 삶의 지혜가 되고, 내면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도라고 할 수 있겠죠” □디지털시대에 더 필요한 인문학두바퀴로가 지난 1년 남짓 탐방했던 포항지역 유형의 자산도 과거의 역사가 남겨준 인문학적 자산이었다. 이제 그 문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가꾸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 대안 중의 하나가 인문학이다.첨단 시스템이 갖춰지고 디지털화 될수록 요즘 더욱 강조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며, 인문학적 사고이다. 창의적인 교육, 창의적인 인재, 창의적인 제품 등 창의적인 것을 강조할수록 인문학 열풍은 거세어진다.“여러분, 지금 사용하고 계신 아이폰 속에 인문학이 들었답니다. 아이폰의 신화를 일으킨 스티브 잡스의 말입니다. 그리고 3D영화인 아바타가 대히트를 친 결정적 이유도 바로 인문학이랍니다”모성은 한국지역경제 연구소 소장이 경제학자답게 한마디 한다.“기업 경영에 인문학의 중요성을 들고 나왔던 사람이 스티브 잡스 입니다. 2011년 봄 iPAD2출시 설명회에서 `애플사의 DNA속에는 기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 있으며, 기술은 교양 및 인문학과 결혼하여 우리 가슴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한다`며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 필요성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박계현 문화와시민 이사장도 한마디 거든다.최근 인문학의 유행은 스티브 잡스같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처럼 기술과 인문학을 접목하는 것이 그 유행의 핵심적인 이유다. 기술과 경제는 사람이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문학의 핵심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찾기 위해서이다.인문학이 필요한 진짜이유는 물질주의로 인한 가치혼돈의 시대에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내가 살아가는 방향`을 찾기 위해서다. 인문학은 `나는 왜 사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담고 있어 인간의 삶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준다.누군가가 말했다. “인문학은 `사람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한` 학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 배우는 학문이 인문학입니다”두바퀴로는 사람향기 풍기는 인문학 속으로 희망의 페달을 더욱 열심히 밟으며 우리지역에 인문학 열풍을 일으키는데 앞장설 것이다. 두바퀴로의 페달은 또 다시 바빠질 것이다.◇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사진), 이재원(영상)◇ 집필지도:이나나, 신일권◇ 취재동행:권기봉, 박중환, 이주형, 조현옥, 박창교, 이영숙, 이선덕, 이주형, 김효은, 노경훈, 정한탁◇ 장소제공:망고식스(양덕점), 엔제리너스(이동점)◇ 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12-19

영일민속박물관, 군단위 민속관 최초 정부 준박물관 지정

점점 추워지는 계절, 초겨울 바람에는 향기와 낭만과 그리움이 스며있다. 먼 옛날 동해안 방어의 요충지로 넓은 들과 함께 농토가 비옥하다 하여 지어진 흥해를 찾아 떠나는 자전거 여행의 즐거움은 바다처럼 넓고 바람처럼 자유롭다.모성은 교수와 박계현 (사)문화와시민 이사장이 흥해의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문화유산인 흥해향교에서 만나자며 자전거에 먼저 오른다.흥해향교, 조선 태조때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공자 등 성현 위패 모셔… 지금은 제사기능만□흥해 향교조선 태조 7년(1398)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흥해 향교를 향해 떠나는 자전거 길은 초겨울의 신선한 바람으로 더욱 흥이 난다.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7호로 지정돼 있는 흥해읍 옥성리 132에 위치한 흥해 향교 대성전에 도착한 건 오전 9시. 이 지역에서 태어나 30년 이상을 이곳에서 살아온 흥해 토박이 채대원씨와 이병창 전교, 장두철·진석찬·정재학 전임전교가 반긴다. 전화로는 이미 여러 차례 통화해 구면 같은 사이다.“흥해 향교를 찾아오는 길은 지금도 아름답지만 경북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된 이팝나무 군락에 흰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도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 합니다.”이병찬 전교는 흥해 향교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시작했다.“옛날 한 가난한 선비가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요. 하루는 어머니가 흰 쌀밥이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쌀독을 보니 쌀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황. 어머니만 밥을 지어 드리면 틀림없이 아들에게 다 덜어줄 게 뻔했습니다. 아들은 고민하다 머리를 짜냈고 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서 하얀 꽃을 듬뿍 따다가 자신의 밥그릇에 담았습니다. 눈이 어두웠던 어머니는 아들도 쌀밥을 먹는 줄 알고 맛있게 잘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나무는 이밥나무가 됐고 음이 변해 이팝나무가 됐다는 설이 있습다. 혹자는 이씨(왕족)들이 먹은 하얀 쌀밥, 이씨들이 먹는 밥이라 하여 이밥나무가 됐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효자의 나무, 이팝나무 군락지는 봄이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장두철 전임전교는 “여기 꽃이 피면 온 산이 하얗게 돼 잎이 꽃에 묻힐 정도”라며 자랑을 그칠 줄 모른다. 고목들은 모두 한아름에 안을 수 없을 만큼 둘레가 크고 높게 뻗어 있다. 이 군락지에서는 매년 어르신들을 위한 이팝나무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군락지는 고려시대 충숙왕 때인 14세기 초 이곳에 향교를 세우면서 기념으로 심은 나무에서 종자가 떨어져 번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100~150년가량 된 고목이 34그루, 최근 심은 나무까지 모두 50여 그루의 이팝나무가 자라고 있다. 꽃나무 아래 벤치도 초겨울의 서정을 더해준다.박계현 문화와 시민 이사장이 문화적 해설을 시작한다.“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입니다. 흥해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지었다고 전하나, 연혁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때 대성전과 동무만 남고 모두 불타 없어졌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복원했습니다.”탐방단은 지금 남아 있는 건물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을 둘러본다.“대성전은 1970년에 기와를 새로 고치고, 1971년에 단청보수를 통해 복원했습니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이뤄진 대성전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의 끝을 날카롭게 했고, 위에는 구름 모양의 장식을 입혀 섬세하고 화려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둥 사이에는 위쪽의 무게를 받기 위해 당초무늬와 연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꽃받침을 설치했습니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영일민속박물관탐방단이 흥해읍 성내리 영일민속박물관에 하나 둘 씩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30분. 이팝나무 군락지에서 5분 거리다. 조선시대 흥해군의 동헌이던 제남헌을 수리해 민속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민속박물관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지정된 박물관이다.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야외 수업을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과 외국인 교사들도 감탄사를 연발한다. 먼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사용하던 생활용구와 농업 및 어업 기구, 고서적, 토기, 의복 등 4천600여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구 영일군과 영일문화원이 공동으로 향토 풍습과 민속 유물을 보존하고자 만들었다고 한다.조선시대 헌종 원년에 건설된 흥해군의 동헌 건물을 수리해 1983년 개관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하며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에 문을 닫는다.“1983년 10월 29일 개관 이후 1985년 5월 제2전시실을 신축하해 박물관의 면모를 갖춤으로써 당시 군단위 민속박물관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1987년 6월 30일 문화부로부터 준박물관으로 지정되었습니다. 4,297㎡의 대지에 약 495㎡ 규모의 전시실을 갖추어 지정문화재 1점(濟南軒)도 보관 하고 있습니다.”김환복 박물관 담당자의 설명에 이어 앞뜰에 있는 수령 600년된 회화나무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나니 뿌듯한 마음으로 다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진다.□ 흥해 5일장황진후, 하정민 지역 인사가 장터를 앞장선다.“장터국밥은 장날이면 맛볼 수 있는 서민들의 별식이기도 했지요. 거기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는데요. 오늘날 많은 5일장이 사라졌어도 도시 한복판에서도 `장터국밥` 메뉴를 내건 식당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한 번 찾아가 볼까요?”장터구경을 따라 나서니 이선덕 은하수로타리클럽 전회장과 여성 탐방대원들은 더욱더 신이 나는 모양이다. 동해안 최대의 상설시장인 죽도시장 못지 않게 물이 번득거리는 생선들이 싱싱한 비린내를 풍기고 식육점의 근육질의 어깨는 땀이 맺히고 그릇전에는 김장독 옹기들이 말갛게 얼굴을 씻고 나란히 앉아 있고 건어물 상가, 어패류 상가, 회집, 과일·야채 가게, 쌀 가게 등 없는 곳이 없다.장터 한쪽에 임시로 차린 국밥집의 가마솥에서는 돼지머리가 둥둥 끈 국이 김을 뿜으려 부글부글 끓고 있다.잘나고 못난 것도,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는 것을 빼고 있는 것은 흥해 5일장에 다 있었다.이 세상이 거기 다 있는 듯 했다.◇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문화가이드:박계현 (사)문화와시민 이사장◇자전거 협찬:서일주 포항녹색희망자전거사업단 단장◇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취재동행:이명희, 이영숙, 이선덕, 김효은, 노경훈,◇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12-05

가사문학 대가 박인로 `입암별곡`으로 빼어난 풍광 노래

오늘 두바퀴로 문화탐방은 `가을 스케치` 여행이다. 울긋불긋 단풍길 따라 죽장 입암서원과 상옥을 돌아 기북면 덕동전통체험마을까지 달렸다. 기북 덕동마을, 2011년 `기록마을` 제4호 등록고택·명승지 즐비한 여강 이씨 수백년 집성촌노계문학 뺴어난 작품 탄생한 곳소녀의 발그레한 볼처럼 수줍게 물이 오른 새빨간 사과 향을 맡으며 죽장 선바위 촌에 이르렀다. 포항의 오지 죽장은 산 좋고 물 좋고, 공기마저 상큼했다.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서 있다해 `선바위, 입암`으로 불리고 그 이름으로 인해 입암리가 됐다.놀라운 사실은 이런 오지에도 서원이 세워졌다. 1657년에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토월봉 아래에 창건된 입암서원은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 70호로 지정됐다.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이곳은 임진왜란시 이 지방에 피난와서 살았던 강공 장현광(1554-1637)을 봉안하고 지방 유림인 권극립, 정사상, 손우남, 수암 정사진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다.입암은 월성 손씨, 한양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대대로 살아왔다. 감히 오지라고 부를 수 없는 선비문화가 살아있는 곳이었다.무엇보다 선바위 촌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1600년에 건립됐다고 하는 `일제당`이다. 절벽에 의지하여 높은 자연석 축대위에서 가사천을 내려다보며 날아갈 듯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많은 싯구를 남겼는데 입암이 바로 그곳이다.문득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노계 박인로의 가사 `입암별곡`이 생각났다. 바로 그때, 문화에 해박한 박계현 (사)문화와시민 이사장이 어김없이 문화가이드를 시작한다. “당시 입암서원에 머물던 장현광 선생과 교분이 각별했던 69세의 박인로 선생은 입암의 풍광에 취하여 8차례나 죽장을 방문하였답니다. 그때 남긴 가사가`입암별곡`이며 시조`입암29곡`도 지었습니다.”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한 지주로 높이 평가받던 노계문학의 빼어난 작품이 바로 죽장 입암에서 탄생되었던 것이다.입암서원 옆 낮은 동산에서 수령이 꽤 되었을 노란 은행나무 한그루가 깊어가는 가을의 멋은 제 혼자 다 부린다. 이에 질세라 어여쁜 두바퀴로 선녀들이 여기서 찰칵, 저기서 찰칵, 저마다 함박웃음 한 바가지에 가을을 담는다. 한 폭의 그림이다.가을 해는 짧다며 안성용 두바퀴로 단장이 갈 길을 재촉했다. 입암의 풍광에 취한 기분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상옥초등학교에 이르렀다. 비록 10여명 남짓의 전교생들이 머문 자리이지만 아직도 아이들의 따뜻한 체온이 교정에 남아 있다. 구불구불 제멋에 팔다리를 드리운 소나무가 빈 운동장을 지키고 섰다. 독서중인 남녀 한 쌍의 어린이 동상이 우리를 반긴다. 오늘 두바퀴로 가을 스케치는 `배움`인가 보다.선비정신 흔적 남은 덕동마을다음 목적지 역시 기북면 오덕리 덕동에 자리잡은 `전통문화체험마을` 이다.덕동마을은 2011년 11월10일 국가기록원에 `기록마을` 제4호 로 등록된 문화마을이다.덕동마을은 조선의 대유학자인 퇴계의 스승 회재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의 4대손 이강이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360 여년간 대를 이었다. 여강 이씨 집성촌을 이루며 아직도 선조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보다 규모는 작지만 애은당 고택, 사우정 고택 등이 전통미를 뽐내고 있다.두바퀴로가 도착하자 마을 입구에서부터 벌써 선비의 정신이 살아있는 듯 남다른 기품이 느껴진다. 덕동은 예부터 덕(德)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덕동(德洞)마을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덕동마을은 오덕리라고 부릅니다. `선관오덕`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문화와시민 박계현 이사장이 문화적 해설을 시작한다. “오덕은 매미의 `선관오덕`에서 왔습니다. 왕이 정무를 볼 때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翼蟬冠)을 쓰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익선관은 매미선(蟬)을 써서 매미의 날개를 나타내는 말인데 이는 매미가 지녔다는 그 오덕(五德)에 기초한 거랍니다. 즉, 첫째 매미의 곧은 입은 선비의 갓끈과 같이 곧아 학문에 뜻을 가진 선비와 같고, 둘째로 사람이 힘써 가꾼 낟알을 먹어 축내지 않으니 염치가 있으며, 셋째로 집이 없으니 검소하고, 넷째는 때맞추어 가을에 죽으니 신의가 있고, 다섯째는 아침 이슬만 먹고 사니 맑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덕리`는 바로 선관오덕에서 나온 지명이다. 文, 廉, 儉, 信, 淸을 닮고자 하거나 명심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덕동은 많은 문사들이 배출됐다.덕동은 조선후기 문중 사당을 이해하는데 여주 이씨 가문의 세덕사 관련 자료 및 마을의 경제적 이면을 이해할 수 있는 18세기 고문서 등이 소장되어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덕동, 오덕리 일대는 `삼기(三奇)`, `구곡(九曲)`, `팔경(八景)` 등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명승지가 널려 있다.1546년에 지어진 용계정덕동에는 애은당(愛隱堂)과 사우정(四友亭), 여연당(與然堂), 용계정(龍溪亭) 등 경북도 지정 유형문화재와 민속자료들이 동네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 중 덕연(德淵)구곡의 제5곡에 1546년에 건립된 용계정이 위치하고 있다.용계정은 임진왜란 때 북평사를 지낸 정문부가 별장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정자원림을 경영해 왔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이다. 용계정은 용이 머문다 하여 `용방`, `용계`라고도 한다. 마을 수구막이 숲으로 조성된 덕동숲과 연어대, 합류대, 와룡담 등 자연계류가 잘 어우러진 역사문화 명승지이다.용계정은 고풍스런 고택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수백 년 된 은행나무와 향나무에 둘러싸고 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겨우 지붕만이 살짝보일 뿐이다.용계정은 1868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이것을 지키기 위해 밤새도록 용계정 외부에 담을 쌓아 오늘에 보존되고 있었다. 용계정 건너편 늠늠하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 군락지가 있다. 나무마다 주민들이 이름표가 붙여있는데 그 나무의 관리자 이름이다.용계정 숲 왼쪽에 연못이 하나 있다. 이 연못을 호산지당이라 부른다. 재미난 유래가 있었다.덕동마을은 산세가 강하고 물이 적어서 인물이 배출되지 않아 물을 가두어 두어야만 주위의 경관도 살리고 우수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공 못을 만든 것이다.`호산지당`상강수약축사지(山强水弱築斯池)산이 강하고 물은 적어서 못을 만드니동학풍광부유기(洞壑風光有奇)동리의 경치가 다시 또 기이하구나!적제경영성숙지(積歲經營成宿志)오랜 세월 경영한 뜻을 이루니장래여경야응기(將來餘慶也應期)장래 남은 경사를 또한 기약하리라◇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문화가이드:박계현 문화와시민 이사장◇자전거 협찬:서일주 포항녹색희망자전거사업단 단장◇ 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 집필지도:이나나, 신일권◇ 취재동행:이명희, 이영숙, 이선덕, 김효은, 노경훈,◇ 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11-28

청하현감 부임 겸재 정선, 내연산 배경 진경산수화 남겨

두바퀴路의 이번 문화 탐방지는 내연산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갑인추 정선(甲寅秋 鄭敾)`이 각인돼 있는 연산폭포를 최종 목적지로 정했다. “여러분, 오늘은 속세의 욕심은 모두 내려놓고 내연산을 오르면서 자연과 하나 되어 다함께 신선이 됩시다” 박계현 (사)문화와 시민 이사장의 출발신호와 함께 내연산으로 향했다.쌍생폭포에 이르러 잠시 땀을 식히며 고개를 드니 왼쪽에는 우뚝 솟은 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용추의 물은 검푸른 빛을 띨 만큼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두 줄기 폭포가 눈발처럼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이 더욱 장관이다.좁은 오르막을 한참이나 올랐나 싶더니 갑자기 계곡이 확 트이면서 암자에서 들려오는 독경소리가 온 계곡에 울려 퍼졌다. 가슴속에 쌓였던 속세의 때가 모두 씻기는 듯하다. 관음폭포를 둘러싼 봉우리는 마주 솟아 병풍처럼 이어지고 그 안은 다시 확 트여 하나의 거대한 선경을 이루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서 내려다본 관음폭포는 유리처럼 푸르고 맑았다. 그 아래의 계곡을 굽어보니 정신이 아찔하였다.눈앞에는 만 길의 높은 절벽이 담처럼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속에 마침내 연산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절벽에 폭포가 걸려 있는데, 절벽 틈을 따라 폭포수가 깎아지른 벼랑에서 곧장 떨어지는데 떨어진 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져 골짜기가 온통 안개와 흰 눈 속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 세상을 훌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연산폭포 사방 암벽에는 머물다간 명사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인간의 욕심인가 싶지만 그래도 그 흔적을 남겨두어 후손은 과거를 탐지하는 재미가 있어 그 역시 좋다.겸재는 이 기암절벽 어딘가에 자신의 흔적을 바위에 새기고 내연산의 진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바로 그때 신일권 박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찾았습니다. `갑인추 정선`, 글자가 주변 다른 각자(刻字)에 비해 너무 작게 새겨져있고 마모돼 두 눈 부릅떠야 보이네요.”겸재는 1733년에서 1735년까지 청하현감을 지내면서 청하 고을의 `청하성읍도`와 내연산의 비경을 담은 `내연삼용추`, `내연산폭포도`, `고사의송관란도`등의 작품을 남겼다.우리나라의 진짜 산천 그린다는 의미에서 `眞景`연산폭포 기암절벽에 `甲寅秋 鄭敾` 희미한 刻字명승지 소재로 내면적 주관 표현“이 박사님 진경산수화가 무슨 뜻입니까. 실제 경치를 그렸는데 실경산수화와 다릅니까?” 박계현 이사장이 미술사학을 전공한 이나나 박사에게 설명을 부탁했다.“노·장 사상을 근원으로 하는 산수화는 속세와 단절된, 때 묻지 않은 깊고 그윽한 심산유곡(深山幽谷)을 그린 것입니다. 즉 기암절벽과 짙은 운무가 가득하여 인간의 발길이 닿기 힘든 산을 그린 그림입니다. 조선전기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산수화는 중국산천을 그렸습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산천을 그리지 말고 조선의 산수를 그리자는 주장이 일어났습니다.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지닌 가장 큰 의의는 바로 우리나라의 명산과 명승지를 소재로 삼았다는 것과 그 속에 담아낸 작가의 이념입니다. 정선의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를 보면 모두 실경을 소재로 하였지만 `실경산수화`라 부르지 않고 오히려 `진경산수화`라고 합니다. 실경을 대상으로 그려진 그림이지만 `형사(형태를 같게 그림)` 보다는 문인화의 요체인 `신사·사의·전신(정신을 그림)`의 묘사에 그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원대의 황공망이 `천지석벽도`나 `부춘산거도`에서 실경을 기하하적으로 시각화하여 대상을 재현했던 차원과 유사하며, 명의 심주가 실경을 재해석하여 점·선·면으로 조형화시킨 표현과 흑백의 대비로 음양의 조화에 주목하는 원리와도 같습니다.정선의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는 실제 금강산과 인왕산이 지닌 특수한 현장감이 크게 부각되면서도 흑과 백의 대비라는 음양의 원리에 입각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음과 양은 `주역`에서 세상만물의 근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금강전도`의 화면구성은 암산(陽)이 토산(陰)을 감싸는 태극모양의 원형구도입니다.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금강산의 특징을 절묘하게 드러냈습니다.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백색의 암산은 북종화 기법의 강한 부벽준으로 표현되어졌고, 수림이 우거진 토산은 서정적인 남종화의 부드러운 묵법으로 처리되어 이 역시 음양의 조화로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왕제색도`는 비온 후 맑게 갠 인왕산 모습이 기운생동하게 농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정선은 인왕산의 백색 암산이 비에 젖어 거무스름한 바위로 변화되어 보이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비로 인해 검게 변하여 더욱 중량감 있어 보이게 표현된 암산[양]과 비에 젖어 온통 검게 보이는 숲을 백색의 운무(음)로 감싸듯이 표현하였습니다. 정선은 바로 여기서 흑(바위)과 백(안개) 그리고 강함(바위)과 부드러움(안개)이라는 음양의 대비로 해석하여 조형화하였습니다. 중국풍 산수화와 분명히 달라정선의 산수화를 `실경`이라 하지 않고 `진경`이라 부르는 것도 외형적 사실 보다는 작가의 내면적 주관을 더욱 중시해 표현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참(眞)`은 `거짓(假)`의 상대개념입니다. 즉 중국의 산수를 `거짓(假)`으로 보고, 우리나라의 산수를 `참(眞)`으로 본 것입니다. `진경`이란 중국의 `거짓 산수`가 아닌 우리나라의 `참 산수`를 그린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사실적`이라는 말은 `참(眞)`이란 뜻으로, 오늘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사실화와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겸재의 산수화는 중국의 산천이 아닌 우리나라의 진짜 산천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진경산수화`라 부릅니다. 겸재의 그림은 우리나라나 산천을 그리되 그 속에 있는 사물들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빼기도하고 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이러한 `진경`의 의미를 모르는 일부 비전문가들이 겸재의 `고사의송관란도` 속에 있는 소나무가 비하대에 실존한다면서 `겸재송`이라고 부릅니다. 겸재의 산수화는 우리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도 있지만 중국풍의 남종산수화도 있습니다. 진경산수화와 중국풍의 산수화는 분명히 다릅니다.첫째 그림 속의 인물이 다릅니다. 중국풍에는 중국의 고사나 문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입은 복장은 모두 중국 고대 의복입니다. 하지만 겸재의 진경산수화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조선의 선비들이 산수를 즐기고 있습니다. 둘째는 지명입니다. 진경산수화는 실경이기 때문에 `내연산삼용추`와 같이 실명이 기록됩니다. 그러나 중국풍은 실존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에 `만추`와 같이 계절과 관련되거나 고사 인물의 이름이 사용됩니다. `고사의송관란도`는 그림 옆에 `삼용추폭하 유연견남산`(三龍湫瀑下 悠然見南山, 삼용추폭포 아래서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본다)고 쓰여 있습니다. `유연견남산`은 겸재가 도연명의 시 `음주` 20수 중 제5수의 싯구를 차용한 것입니다. 즉 이 그림은 겸재가 삼용추폭포 아래에서 도연명과 같은 은자의 삶을 동경하며 그린 중국풍의 남종산수화입니다. 그림 속 인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 그림 속에 나오는 고사들의 복장과 머리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높은 인품을 가진 은자를 상상해서 그린 것으로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고사가 의지하고 있는 소나무 또한 실재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이나나 박사의 명쾌한 설명에 모두들 감탄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오늘 한 중앙지에 `억지스토리 전국문화관광 축제의 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지자체가 주최·주관하거나 지원하는 문화 사업에 억지스토리가 난무한다고 한다.지원금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한 인사는 배점표에 스토리텔링 항목이 있으니 확실한 문헌 증거도 없는데 무리한 스토리를 만들어 넣고, 억지스러운 스토리텔링으로 덧칠한다고 지적했다.포항 내연산의 뛰어난 절경과 겸재 정선이 남긴 내연산 그림들은 충분히 문화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겸재송`이라든지 청하의 내연산을 겸재 진경산수화의 발원지로 과잉 포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좀더 심도 깊은 학술연구를 통해 합당한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지역 문화의 발굴이 될 것이다.◇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문화가이드:이나나 미술사학 박사◇ 자전거 협찬:서일주(포항녹색희망자전거사업단 단장)◇ 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 집필지도:이나나, 신일권◇ 취재동행:박계현, 이명희, 이영숙, 이선덕, 김효은, 노경훈◇ 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11-14

원형보존 잘된 세계 최대 고인돌, 유일하게 세워진 구조

“와! 토요일이다” 두바퀴로의 지정 모임장소인 시립중앙아트홀 만남의 광장은 오늘도 문화탐방대원들의 반가운 미소로 가득하다. 이제 지역의 문화를 찾아가는 일이 익숙한 모습들이다.오늘따라 박계현 (사)문화와시민 이사장은 더욱 상기되어 있다.평소 영일만 일대의 고인돌에 대한 관심이 특별났기 때문이다. “여러분, 오늘은 HCN 최성필 PD가 함께 동행 합니다. 영일만 일대의 고인돌에 대한 다큐를 제작해 포항 고인돌의 가치를 전국에 알렸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함성과 함께 큰 박수로 화답하였다.최성필 PD의 설명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서해안에서는 화순과 고창이 집단군을 이루며, 동해안에서는 영일만 일대를 중심으로 대거 분포합니다. 특히 오늘 탐방하는 기계면 일대의 고인돌은 칠포리 암각화 등과 함께 영일만 일대에 찬란한 고대문화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사료적 가치가 높습니다.”이때 해맞이 포럼 이명희씨가 한마디 한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찬란했던 삼국문화 이전에 그 기반이 되었던 고대문화가 우리 포항 지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은 포항의 자랑입니다.”“맞아요. 우리는 우리지역의 문화에 너무 무관심 했던 것 같습니다.” 한마음 후원회 권기봉 회장도 한마디 거든다.그렇다. 인근 경주에서 신라가 찬란한 삼국문화를 꽃피우기 이전에 영일만 일대에는 삼국문화의 기반이 되었던 큰 규모의 고대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기계면 일대만 1백수십기… 청동기시대 흔적 뚜렷고대 문화유적 귀중한 자산 방치돼 안타까움 더해영일만 일대는 남방식 고인돌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고인돌은 의미 없는 하나의 거대한 돌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돌덩이 아래에서 마제석검, 청동검 등 고대 생활도구가 발굴됨으로써 당시 지도자의 돌무덤으로 밝혀졌다.고인돌은 돌을 괴어 만든 무덤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한다.고인돌의 크기는 지도자의 권력과 힘의 크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큰 규모의 고대문화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고인돌의 구조는 받침돌과 덮개돌로 되어 있다. 형식에 따라 북방식 · 남방식 · 개석식으로 구분된다. 북방식은 주로 북쪽에서 많이 발견된다. 4개 혹은 2개의 굄돌을 세운 뒤 평평한 덮개돌을 얹은 모양이 마치 탁자모양을 하고 있어서 `탁자식`이라고도 한다. 남방식은 몇 개의 밑돌을 놓고 덮개돌을 얹는다. 마치 바둑판과 같아 `바둑판식`이라고도 부른다. 개석식은 받침돌 없이 덮개돌을 얹은 형식이다. `무지석식`이라고도 한다. 성계리를 비롯한 기계일대의 고인돌은 대부분 남방식이다.고인돌은 전 세계에 약 7만기가 있다. 한반도는 고인돌 왕국이라 할 만큼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인 4만기가 분포하며 크기와 규모도 세계 최대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지난 2000년 12월 종묘, 불국사 등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6번째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고대문화연구의 주요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두바퀴로 탐방단은 포항 시가지를 약간 벗어나 황금물결 일렁이는 넓은 들을 따라 기계면 성계리에 도착했다. 마을 풍경이 색다르다.집안 담벼락 옆에서 호박 넝쿨을 덮어 쓴 고인돌, 장독대 옆에 놓여 있는 고인돌, 마을 길가에 서있는 고인돌, 고인돌과 고인돌 사이에 있는 집, 집과 집 사이에 있는 고인돌 등 마을이 커다란 돌덩이들 사이에 있는지, 커다란 돌덩이들 속에 마을이 있는지 구별이 안 간다. 고인돌과 생활을 같이하는 마을 풍경이 인상적이다.`칠성바위`라 부르며 신성시성계리 마을 안에만 해도 7기의 고인돌이 있다. 성계리는 원래 `칠성동`이라고 불렸다. 마을 사람들이 고인돌을 `칠성바위`라고 부르며 신성시한데서 유래됐다고 한다.성계리 고인돌은 타 지역에 비해 대부분 규모가 크고 거대하다. 최성필 PD의 안내를 따라 숲을 헤치며 풀 향기 가득한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오르는 길에서도 4,5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산 정상에 굄돌을 한 고인돌이 위엄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인적 끊긴 노당재에 고인돌이 지키고 있었다.성계리 산중턱에 세워진 이 고인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원형 보존이 잘된 고인돌이다. 또 눕히지 않고 세워 둔 유일한 고인돌이다. 안강과 기계를 연결하는 노당재 길목 중간지점에 세워짐으로써 더욱 웅장하고 위엄이 돋보인다. 워낙 커서 굄돌의 크기만 해도 일반 고인돌 크기이다. 수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꿋꿋이 서있는 고인돌을 보니 당시 고대인들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과 운반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인돌 유적지 관광자원화 해야 강화 고인돌 문화축제는 벌써 14회를 이어가고 있다. 채석·운반·가공·축조 등 고인돌을 세우기 위한 과정을 재연하는 행사를 통해 강화의 고대 문화유산으로 관광자원화 시켰다. 순천은 고인돌 공원을 만들어 선사시대 보존 교육장과 관광지를 조성했다.이에 반해 우리 포항 일대의 고인돌은 그 문화적 가치의 중요성은 제쳐두고서라도 존재에도 관심이 없다.포항은 성계리만 해도 수십 기의 고인돌이 있고, 기계에는 100기가 넘는 고인돌이 있다. 그러나 표지하나 없이 방치된 현실이 유감스럽다. 강화·고창순천은 이보다도 적은 수의 고인돌을 보유하고도 고인돌을 관광자원화 하는데 성공했다. 영일만은 우리나라 최대의 고인돌 분포지역이다. 기계면 일대의 고인돌은 칠포리 암각화 등과 더불어 고대문화 박물관으로 활용돼야 할 것이다.경주에 신라의 불교문화가 있고, 안동에 조선의 유교문화가 있다면, 포항에는 고대문화가 있다.◇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문화가이드:최성필(HCN 피디),◇자전거 협찬:서일주(포항녹색희망자전거사업단 단장)◇ 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 집필지도:이나나, 신일권◇청소년 기자단:최요한, 신창민, 장혜원, 이나영,◇ 취재동행:권기봉, 정경식, 이길호, 김영미, 진효승, 김명헌, 김병수, 박창교, 임채완, 장미향, 김하늘, 권태성, 이석호(한마음 후원회), 박계현, 이명희, 이영숙, 장재향, 이선덕, 김미숙, 이주형, 김효은, 노경훈, 최성룡◇ 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10-31

5원에 팔던 죽값이 3천원, 서민들 애환 스민 삶의 현장

“오늘은 죽도시장을 탐방합니다. 영남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재래시장입니다.”`두바퀴로`호의 새로운 선장 포항예술문화연구소장인 사진작가 안성용씨가 지휘봉을 잡았다.죽도시장은 평소 출발지점인 중앙아트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다. 많은 차량과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포항의 도심, 인체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포항경제의 심장 죽도시장죽도시장은 포스코가 있기 전 포항경제의 근간이 된 곳이다. 포항시 북구 죽도동 한복판에 장이 섰다. 부지면적 14만8천760㎡, 점포수는 약 1천200개에 달한다. 매일 5만명 가량의 사람들이 찾는 영남권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이다.1950년대에는 갈대로 무성한 늪지대였다. 포항 내항이 연결되어 있는 곳에 노점상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자연적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다. 과거부터 죽도시장은 경북 동해안 및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 집결지인 동시에 유통의 요충지였다. 1969년 10월 죽도시장번영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고 1971년 11월 포항죽도시장의 개설허가가 이루어졌다.죽도시장의 배치동쪽 포항내항을 바라보며 가장 가까운 곳에 수협 위판장이 형성되었다. 그 가까이에 200여개의 횟집이 밀집되어 있는 회센터, 어시장, 건어물거리가 위치한다. 또 의류거리, 식품거리, 이불거리, 한복골목, 그릇집, 가구거리 등이 구역별로 조성되어 있어서 편리하게 시장을 이용할 수 있다.최근의 일이지만 재래시장 현대화사업으로 700여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12개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죽도시장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수산물시장이다. 새벽5시가 되면 벌써 수협 위판장은 시끌벅적하다. 연근해에서 방금 잡은 생선으로 가득 채워진 만선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새벽에 시작된 경매는 일반적으로 오전 8시면 거의 끝나게 된다. 살아있는 수협 위판장갑자기 위판장이 시끌벅적해 졌다. 문어가 경매물건으로 나오자 수산물 중매인들의 손놀림이 바쁘게 움직인다. 엄청난 크기의 살아있는 문어가 33번 중매인의 15만원에 낙찰 되었다. 또 다시 방어와 미주구리가 나왔다. 손놀림이 빠른 45번 중매인에 의해 방어는 한 마리 5만원에 낙찰되었고 미주구리는 상자당 12만원에 팔렸다.죽도시장 위판장 지정중매인은 47명이며 중매대리인까지 포함하면 약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수 백t의 고깃배를 통해 포항 내항으로 들어오는 연간 600억원에 달하는 물량들은 바로 이들에 의해 전량 소화된다.이때 기자단의 눈에 고래만한 크기의 물고기가 들어왔다. 엄청난 크기의 초대형 병어나 복어 모양을 하고 있었다. 괴물 물고기인가. 해맞이 포럼 노경훈 부대표가 “이 고기 이름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더니 해체작업을 지휘하던 태영수산 박정자 대표가 “개복치!”라고 소리친다.몸통에 비해 주둥이가 너무 작아 기이하게 생긴 물고기였다. 해체한 물고기의 뱃속 살은 하얀 연두부같이 허물허물하게 생겼다. 그러나 이것이 포항지역 상가 집에 제공되는 필수음식이다. 하얀 묵같이 생긴 개복치 고기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일미란다.군침이 도는 이야기를 들었더니 `먹자골목`이 떠올랐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죽도시장에선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떡과 분식은 물론이거니와 단돈 2천원이면 맛볼 수 있는 따끈따끈한 수제비는 역시 일품이다. 옛날식으로 푸짐하게 차린 1인분에 4천500원 하는 영양식당의 고등어 정식도 유명하다.죽도시장 상인협동조합 이창혁 대표가 “맛있는 죽을 먹으러 갑시다” 제안하더니 할매죽집을 향해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먹자골목 할매죽집골목을 따라 두 번 정도 방향을 꺾으니 할매죽집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며느리인지 딸인지 세 여인이 나란히 죽을 끓이면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죽의 종류도 호박죽, 녹두죽, 팥죽이 전부였다. 죽 값도 너무 저렴하다. 한 그릇에 단돈 3천원이다. 시골할머니의 인심처럼 그것도 대접에 넘치도록 담아 준다. 죽이 얼마나 맛있는지 순식간에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죽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인심 좋은 할머니의 미소 띤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 이 맛있는 죽을 3천원에 팔아 이문이 어디 남겠습니까?” 그런데 할머니는 웃기만 하시고 대답은 없다. “…. ”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장사를 하셨나요?”묵묵히 대답 없는 할머니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할머니는 손사레를 치다가 한 참후에 이야기 보자기를 풀어 놓으셨다.할머니는 27세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막내딸을 낳은 지 90일 만이었다. 강원도 태백 소재의 대한중석에 다니던 남편이 산업재해로 1969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살길이 막막해 4남매를 데리고 친척이 있는 포항으로 이사를 왔다. 그것이 1970년도였다.남의 집 창고살이도 했고, 4평짜리 달셋방을 얻어 다섯 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죽도시장 난전에서 메밀묵을 팔았다. 그러다가 노점 1평반 공간에서 수제비와 죽을 쑤어 팔기 시작한 이후로 벌써 43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한 그릇에 5원, 50원, 500원 받던 것이 이제 3천원까지 올려 받게 되었다며 미안해하는 할머니의 표정이 마치 보살이다.막내딸에 의하면 죽을 쑬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할머니는 수 십 차례 실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폐가 나빠 기침을 많이 하신단다. 큰아들은 삼성그룹의 부장출신이고, 둘째아들도 경북대학에 보냈다. 그리고 딸 둘은 오빠들 때문에 대학을 보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함께 포즈를 취해 달라는 부탁에, 굽어진 허리를 잡고 일어서는 할머니의 모습이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 졌다.지역문화와 삶의 터전 거듭나야죽도시장은 이렇듯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리고 포항의 근대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60년이나 된 장기곰탕집도 있고, 87세 할머니가 운영하는 포목점 형제주단도 있다.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진 가게를 다시 개축한 3대째 내려오는 건어물 도매상 동일상회도 있다.최일만 죽도시장 번영회장이 말을 이었다. “포스코가 세워지기 전 당시 포항경제는 죽도시장에 달려 있었습니다.” 주민들 대부분이 죽도시장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죽도시장은 포항경제를 움직이는 근원지였다.시장은 경제적 기능 외에도 사회·문화적 기능, 특히 지역주민들의 의식구조와 생활양식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이제 두바퀴로 기자단의 눈에 죽도시장은 다르게 비춰진다. 죽도시장의 경제적 기능과 사회·문화적 기능이 보인다. 포항경제를 위해서라도 죽도시장의 경기는 활성화 되어야 한다. 그리고 문화창조도시의 구현을 위해서라도 시장의 사회·문화적 기능을 제고해야 한다.모성은 교수가 한마디 곁들인다.“포항의 재래시장은 수원의 못골시장을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재래시장 활성화 사업은 아케이트나 주차장을 설치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다. 경영방식이나 서비스 기법을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문화를 창달하는 터전으로 상인들의 삶의 터전으로 죽도시장이 거듭나야 한다.◇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문화가이드:최일만(죽도시장 번영회장), 백남도(죽도시장 농산물협동조합 회장), 이창혁(죽도시장 상인협동조합대표) 김외준(죽도수산시장상인회 사무국장)◇자전거 협찬:서일주(포항녹색희망자전거사업단 단장)◇ 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 집필지도:이나나, 신일권◇ 취재동행:박계현, 권기봉, 이영숙, 노경훈◇ 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10-17

청하 현감 부임한 겸재, 진경산수화 중요 작품들 남겨

입추가 지난 지 벌써 한 달이다. 아직 한낮의 열기는 버겁지만 아침, 저녁바람엔 시원함이 묻어난다. 알게 모르게 지역문화 지킴이가 되어버린 두바퀴路 탐방대원들이 하나 둘씩 청하중학교 관송전 아래로 집결한다. 두바퀴路 안성용 단장이 일정을 알린다. “오늘은 청하면사무소에서 겸재의 `청하성읍도(淸河城邑圖)`에 등장한 회화나무를 살펴본 후 청하중학교 소나무 숲과 기청산 식물원을 둘러 볼 것입니다.” 겸재 `청하성읍도`로 당시 건물·수목 배치 짐작청하中 관송전·기청산 식물원서 심신 힐링 만끽400여년 세월 지킨 회화나무청하는 겸재 정선이 1733(58세)년 청하현감으로 부임되어 1734년까지 2년 남짓 머물렀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중요 작품들을 남겼다.겸재의 `청하성읍도`는 현재의 청하초등학교, 청하면사무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청하읍성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서 당시 읍성 내의 건물 배치 상황과 수목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지금 여러분이 바라보는 이 회화나무가 바로 겸재의 `청하성읍도`에 나오는 나무로 추정됩니다. 문화와시민 박계현 이사장의 말이다. 옛 부터 회화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길상목으로 손꼽아 온 나무이다.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인물이 난다고 한다.중앙상가에서 중앙콘텍트렌즈를 운영하는 이희우 사장이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회화나무 밑을 지나가면 부부 금실도 좋아져 백년회로 한답니다. 자, 모두들 나무 밑을 한 바퀴씩 돌까요?” 그 한마디에 좌중들 까르르 엔돌핀이 돈다.회화나무는 나무 가운데서 으뜸으로 치는 신목으로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대궐같은 곳에 심었다.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한테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청하성읍도`를 그린 그 시절의 인걸(人傑)은 간데없는데, 회화나무만 400여년 그 자리에 서 있다.청하중 교정의 관송전(官松田)탐방단은 `내연산과 진경산수화` 편으로 겸재의 상세한 이야기는 미루고 다시 청하중학교를 향했다.크지 않은 청하중학교의 교정은 온통 싱그러운 숲 향기로 가득하다. 먹구슬나무, 모감주나무, 벽오동나무도 있고 섬초롱, 금낭화, 참나리, 구절초, 쑥부쟁이, 해국 등 야생화도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띠는 것은 역시 솔밭이다.관송전은 `관덕관송전(觀德官松田)`의 준말로 솔밭을 의미한다. 세종대왕(1427) 시기에 바람과 홍수에 대비하고 관에서 쓰이는 목재 조달을 위하여 청하현감 민인(閔寅)에 의해 조성되었다.이때 이영백 포항시서각협회장이 한마디 한다. “관송전의 또 다른 유래도 있습니다. 이 숲의 동북쪽에 활쏘기 훈련장이 있었는데 활을 쏠 때 덕을 품고 과녁을 보아야한다는 뜻으로 `관덕`이라 불렀으며, `관송전`은 국가 소유의 솔밭이란 뜻이랍니다.”갖가지 꽃과 나무로 풍성한 청하중학교 교정은 마치 식물원 같았다. 특히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각상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술사전문 이나나 박사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전능자, 하나님, 시인을 의미합니다. 단어에 내포된 공통된 의미는 `창조`입니다.” 라고 하였다.교정의 첫 인상에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무지개`를 떠올린다.“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며늙어서도 그러하리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관송전 푸른 숲과 꽃향기를 맘껏 맡고 `생각하는 사람` 모각상을 보며 성장한 이곳 아이들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화가나 시인, 음악가 또는 다른 각자의 분야에서 창조적인 사람으로 활동하리라 기대된다.자전거에 몸을 실은 두바퀴路 탐방대원들은 학교 운동장을 따라 둥글게 원을 그리며 숲 향기에 힐링한다.기청산 식물원의 노거수(巨樹)청하중학교와 기청산 식물원은 서로 이웃하고 있다.기청산 식물원 이삼우 원장을 만났다. “큰나무가 있으면 민족성이 달라집니다. 큰 나무 밑에 큰 나무가 자랍니다. 이 땅 곳곳에 노거수가 서 있어야 합니다. 거대한 민족, 거대한 숲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러주어야 합니다.”옛말에 `왕대밭에 왕대난다`고 했다. 겸재가 그린 청하읍성의 회화나무같은 노거수가 포항의 가로수로 울창한 숲을 이룬다면 그 아래 뛰노는 아이들이 꿈꾸는 미래는 창대할 것이다.식물원은 야생화, 은행나무, 팽나무, 이팝나무 등 2000여종의 갖가지 토종 식물이 있다. 복수초(福壽草)는 `복을 많이 받고 오래 살라`는 뜻이다. 지방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땅 위에 불쑥 꽃만 튀어나온다고 땅꽃, 얼음 사이에서 핀다고 얼음새꽃 또는 눈색이꽃, 새해가 시작될 때 피는 꽃이라서 원단화, 눈 속에 피는 연꽃과 같다는 의미로 설연로 불리고 있었다. 꽃말 역시 재밌다. 동양에서는 `영원한 행복`인데 서양에선 `슬픈 추억`이란 의미를 지닌다.`생물자원보전` 동아리에 참여하고 있는 경주여고 이나영 학생은 “생태환경에 관심이 많은 저는 오늘 탐방이 참 유익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단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한 소중한 자산으로 인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며 자신의 생각을 단호히 말했다.두바퀴路 탐방단은 기청산 앞뜰, 푸른 숲이 베풀어준 그늘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맛있는 카레밥과 파전, 시원한 수박과 막걸리 한잔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집필책임:모성은 교수◆문화특강:이삼우 원장(기청산 식물원)◆사진(영상)촬영:안성용, 황종희, 이재원◆집필지도:이나나, 신일권◆동행취재단:박계현, 김영숙, 이선덕, 이영백, 이희우, 김미숙, 권기봉, 권태성, 박중환, 박창교, 정경식, 이길호, 김영미, 김명헌, 손광호, 박기룡, 이석호, 서미경, 김형철, 채철원◆어린이·청소년취재단:신중규, 최요한, 이나영, 신창민(IDG생물자원보전)◆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09-05

수천년 시공간 뛰어넘어 선사인류 숨소리 들리는듯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8월의 뜨거운 열기다. 지역문화 탐방을 위한 두바퀴路 취재단은 칠포리 암각화를 찾아 출발의 깃대를 높이 올렸다. 이번 탐방지는 선사인(先史人)의 숨결이 녹아있는 곳이다. 포항 역사의 시원(始原)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칠포리 바닷가 사이 길로 접어들었다. 주변 전경과 어우러진 숲 속에 마치 한 마리 거북이가 납작 엎드린 것 같은 바위위에 돌칼모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천여 년 전 선인들이 분주히 바위를 쪼는 모습과 시끌벅적한 그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포항지역 암각화·고인돌 등 유적 다양한 분포창조적 문화창출 위한 새 원천으로 활용 필요포항의 시원(始原), 칠포리 암각화문화길라잡이 박재환 회장이 해설을 맡았다. “칠포리 암각화는 포항 흥해읍 칠포리 곤륜산을 중심으로 청하면 신흥리에 이르기까지 주변에 넓게 분포합니다. 곤륜산에서 발견된 검파형 암각화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조사된 유형중 최대 규모입니다.”칠포리 구릉지 상두들 농로를 따라 여러 기의 고인돌이 보인다. 그 중 5기에는 암각화나 바위구멍, 선각이 새겨져 있었다. 북두칠성형과 윷판형 암각화 그리고 제단형식의 구조를 지닌 바위도 있었다. 바위에는 많은 구멍이 있고, 그 구멍들은 서로 선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재미있다.청하면 신흥리 마을 뒷산에는 이름도 재미난 오줌바위 암각화가 있다. 옆으로 길게 누운 바위에는 선각으로 연결된 별자리형 바위구멍이 나 있다. 전경희 해설사의 설명이다. “이 바위구멍은 W자 형태인데 한 가운데에 있는 원 속의 바위구멍은 북쪽 하늘의 카시오페아자리이고, 원으로 둘러싸인 바위구멍은 북극성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4점의 윷판형 암각화도 있습니다.”풍요와 다산 기원 의미 담겨암각화 전문가인 이하우 박사가 설명한다. “바위에 새겨진 그림을 암각화라 합니다. 바위에 형상을 쪼아서 새긴 다음 그 각선에 따라 단단한 도구로 가볍게 갈아서 제작합니다. 암각화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암각화는 명칭도 다양하다. 인면(사람얼굴)형 암각화, 방패형 암각화, 검파형 암각화, 패형 암각화, 신체문 암각화 등이 있다. 그 중에 포항 기계 인비리와 칠포리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석검(돌칼) 형상을 하고 있어서 석검형 암각화라 한다. 이러한 칠포리형 암각화는 석검의 손잡이 모양, 즉 검파형 기하무늬를 하고 있다하여 검파형 암각화라 한다.신화중 문화해설사가 덧붙인다. “석검의 손잡이에서 여성 신체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검파형 기하무늬는 지모신상으로 농경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합니다. 여성의 생식력과 땅의 번식력이 재생성이라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어서 기원의 의미가 담긴 주술성을 띱니다. 특히 검파형 암각화와 윷판형 암각화는 우리 한반도에서만 발견됩니다.”문화와 시민 김효원 이사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질문한다. “왜 검파형이라고 지칭되며 포항 영일만에 많이 나타납니까?문화와 시민 박계현 이사장이 간밤에 암각화 공부를 예습했다면서 자신 있게 대답한다. “석검 유물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포항 지역은 동남쪽 구석에 치우쳐 문화적 발전이 늦어 청동기 제련기술이 없었습니다. 한반도 선조들은 비파형 동검을 모방하여 석검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돌에 구멍을 뚫기 어려운데 석검의 손잡이에 구멍을 내고 검에는 골까지 팠지요. 이런 문화가 형산강 수계에서 발견되었고 영남지역에서만 나타났습니다.”이상령 문화길라잡이 전회장이 부가 설명한다. “원래 검(劍)은 찌르는 도구인데, 당시의 석검은 거의 의장용, 의식용 이었습니다. 손잡이는 모두 구멍이 있어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상징적 도구였습니다. 검(劍)은 유라시아에서 천둥 번개를 의미하는데 비오기전에 천둥과 번개가 치는 것은 농경생활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비파형 동검 손잡이에는 남녀 나신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암각화는 선사인들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포항미술사 시작으로 봐야세계의 미술사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로부터 시작하는 서구 중심의 미술사다. 따라서 포항 주변의 산재된 암각화를 포항 미술사의 시작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미술사학자 이나나 박사가 한마디 한다. “암각(岩刻)은 새기는 것이며, 화(畵)는 그림입니다. 암각화는 최초의 그림 이라는 미술사적 의의를 갖습니다. 포항 미술의 시원도 이미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촬영에만 열중하던 황종희 작가가 질문을 했다. “우리 포항도 이런 역사적 자원이 있었나요? 사실 저는 우리 지역엔 고대사 관련 자원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이번 탐방을 통해 알지 못했던 포항의 역사를 알게 되어 기쁩니다.”“우리 포항도 암각화와 고인돌의 분포가 높습니다. 포항시 중심으로 암각화 역사박물관을 운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포항 시민의 큰 자긍심이 될 것입니다.” 장재향 학원장이 센스 있게 한마디 한다.옳은 말이다. 울산의 경우 울산암각화박물관을 건립하여 반구대 암각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 영일만 일대 칠포리 주변의 암각화나 고인돌만 해도 박물관 건립은 충분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한마음사랑후원회 권기봉 회장도 흥분한다. “맞습니다. 우리 포항에도 암각화, 고인돌 등 선사 유적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분야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자료 수집과 발굴이 뒤따른다면 새로운 문화 창조의 콘텐츠로 활용가치가 높을 것입니다.”선사인류의 숨결로 창조도시를암각화 주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암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그들이 남겨준 그 시대의 이야기가 느껴진다. 선인들이 남긴 것을 잘 보존하고 새롭게 가꾸어 이 시대의 문화로 재창출해야 할 것이다. 즉, 암각화의 역사성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오늘날 새로운 문화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수천 년 전의 유적이 오늘날 창조경제의 모티브로 활용된다. 특히 미술분야에서 암각화의 단순한 조형을 창작의 모티브로 삼기도 한다. 칠포리를 중심으로 영일만에 산재한 암각화는 이 천 여년의 시공간을 훌쩍 넘어 디지털 문명에 새로운 지평과 콘텐츠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두바퀴路가 꿈꾸는 도시의 환경은 사람과 문화와 자연이 공존하는 도시다. 바위에 새겨진 선사인류의 숨결이 오늘날 포항 문화의 새로운 원천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해 본다.△집필책임:모성은 교수△문화특강:이하우(암각화 전문가) 박재환, 전경희, 왕승호, 신화중(KYC 문화길라잡이)△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집필지도:이나나, 신일권△동행취재단:박계현, 김영숙, 장재향, 김효원(문화와시민) 권기봉, 박중환, 박창교, 정경식, 이길호, 김영미(한마음사랑후원회)△어린이취재단:박찬희, 신중규△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08-29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 느린 가락에 깃든 풍류

옛 선비들은 정신수양을 위해 음악을 몸소 익혔다. 그들이 익히고 부르던 노래를 정가(正歌)라 한다. 바른 마음을 가지기 위해 혹은 바른 마음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부터 호남 판소리, 영남 정가라 부르기도 했다. 두바퀴로 취재단은 이번 주엔 우리 고유의 무형 문화자산인 정가공연을 찾았다. 한 여름의 찜통 같은 날씨였다. 하지만 취재단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차량행렬은 포항시 달전리에 소재한 만지락 전통문화체험 공방을 향했다.호남 판소리와 견주어 영남 정가라 불러포항·경주지역에 정가 이수자 다수 활동취재단 전용 승합차에서 박계현 (사)문화와시민 대표가 인사를 했다. “오늘은 역사지 탐방보다는 우리의 전통 무형문화자산을 배우러 갑시다.”그때, 뒷좌석에서 포항 예술고 신노을 학생이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정가가 무엇인가요?” 박 대표는 씨익 웃어 보이더니 진지하게 설명을 한다.“우리 조상들은 계층에 따라 다양한 음악을 즐겼습니다. 정악은 사대부 양반들이 즐기는 가곡·가사·시조를 통칭합니다. 그리고 이를 `정가`라고 부릅니다. `정가`는 맑고 청아한 음색과 절제된 시김새가 특징입니다.”청아한 음색·절제된 시김새 특징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는데, 해맞이 포럼 김명희 이사가 질문을 했다. “그러면 가곡·가사·시조는 무엇인가요? 가곡은 `비목`이나 `그리운 금강산`같은 노래를 의미하나요? 가사는 노랫말을 의미하고, 시조는 국어책에서 배웠던 시를 말하는지…. 하하!”이번에는 옆에 있던 이나나 박사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가곡·가사·시조는 이사님이 말한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조금 있다가 백솔이 선생님께 여쭈어 보도록 합시다.”한마음후원회 권기봉 회장이 넉살스럽게 턱을 당기며 말을 잇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안동 권씨 양반가문인 제가 정가를 한 번 불러 보겠습니다.”“♬~ 태평~성~대~….”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끊어질 듯한 권 회장의 몸짓에 두바퀴로 취재단은 깔깔 넘어간다. 덩달아 숨이 넘어간다.무더위도 쫒아버린 웃음 속에 어느덧 취재단은 언덕 위 체험공방에 도착했다. 유기청, 김용희 원장 내외가 잘 단장된 정원으로 안내했다. 푸른 잔디 위 원두막에서 백솔이 선생이 날아갈 듯 단아한 한복차림으로 취재단을 맞이했다. 그녀의 치맛자락 사이로 버선코가 살그머니 내보였다.한껏 뽐낸 그 고운 자태에 왁자지껄 취재단은 숨소리도 멈추었고, 국악 반주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백 선생의 정가가 시작되었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을 창작 국악으로 불렀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시는 길에 고이 뿌리 오리다…. ♬”때마침 하늘에서 부슬비마저 내려 애절한 가락에 운치를 더한다. 순간, 두바퀴로 취재단은`여기가 인간계인가 천상계인가!` 정가에 젖어들었다.연이어 전통 가곡 `이수대엽`을 부른다.“♬~ 언약~이 늦어가니 정매화도 다지거다(기다려도 님은 오지 않고, 뜰의 매화도 지는구나) ~ ♪아침~에 우든 까치 유신타 하랴마는(아침에 우는 까치를 믿을 수 있겠느냐만) ~ ♪그러나 경중 아미를 다스려 볼까 하노라(그러나 거울의 눈썹을 화장할까 하노라). ~ ♬”사대부 양반들이 불렀던 노래백 선생은 천천히 마이크를 고쳐 잡고 대답했다. “정가는 옛날 우리 사대부 양반들이 부르던 노래입니다. 옛날에는 시에다 가락을 붙여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시조`라고 합니다.”즉, 자기 무릎에 손장단을 맞추며 편안히 부르면 `시조`가 된다. 하지만 여러 악기의 반주까지 갖추어 제대로 부르면 `가곡`이 된다. `시조`보다 `가곡`이 정형화 된 노래를 의미한다.”한문학을 전공한 신일권 박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국어책에서 배운 `시조`와 여기서 말하는 `시조`는 다른 것입니다. 국어책에 나오는 `시조`는 옛날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지금 설명하는 `시조`는 시에 가락을 얹어 부르는 노래를 의미합니다.”안성용 박사도 한마디 거든다. “저도 정가 중 `가사`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가사` 또한 조선 시대 풍류를 즐기던 양반들에 의해 발전했습니다. `가사`는 가곡과 민요가 섞여 있는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가사`는 `가곡`과 비슷하면서도 민요의 화려하고 섬세한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예 맞습니다. 또 `가곡`의 노랫말은 형식이 있지만, `가사`의 노랫말은 형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훨씬 자유로운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가사`는 서민층에서도 즐겨 불렀습니다.” 시립교향악단 임희도 단무장의 깔끔한 정리가 있었다. 예부터 호남 판소리, 영남 정가라 부르기도 했다. 현재 포항과 경주 주변에는 다수의 정가 이수자들이 활동 중이다. 몸과 마음 바르게 해 주는 정가“`월하탄금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달밤에 한 선비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그림입니다. 옛 선비들의 철학과 음악에 대한 관점을 잘 드러낸 그림으로, 마음으로 거문고를 연주하며 자연과 합일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미술사 전공자 이나나 박사가 덧붙였다.마침 두바퀴 취재에 동석한 신경정신과 김종호 원장이 쑥스러운 듯 “서양음악은 맥박을 리듬으로 삼는데, 정가는 호흡을 길게 노래합니다. 속도가 느리지만 풍류가 있어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는 정가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임희도 단무장은 말을 이었다. “한국의 선비들은 음악을 단순히 즐기는 차원을 넘어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도구로 사용했지요. 지금은 대학교 국악과에도 정가 전공이 있지만, 일반시민들이 거의 정가를 모르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세상에서 가장 느린 신선의 노래정가는 한국의 산과 옛 건축물·춤·한복 등에서 볼 수 있는 단아하고 유현한 아름다움을 연상케 한다. 이처럼 자연을 닮은 소박한 선율을 노래하다보면, 어느새 자연과 물아일체되어 노래자신이 마치 신선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한마음후원회 이길호 사무국장은 “정가는 실로 맛과 멋을 겸한 `명품`문화입니다. 이런 전통을 발굴하여 우리 지역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 주어야합니다.”“맞습니다.” 예술문화연구소 이영백 사무국장도 싱글벙글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앞으로 구역사 주변을 시민문화 광장이나 전통 국악예술원으로 조성하여 정가와 같은 격조 높은 음악을 누구나 쉽게 전하고 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그렇다. 정가와 판소리는 둘 다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음악이다. 문화 창조도시의 한 대안으로 정가와 판소리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도 포항문화의 정착에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문화에 목말랐던 두바퀴로 취재단 일행은 김용희 원장이 준비한 전통차 시연으로 목을 축이고, 더불어 천연 쪽 염색 과정도 체험했다.이번 두바퀴로 취재는 무형의 유산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정가와 같이 무형의 전통문화가 우리지역의 품격을 높여주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집필책임:모성은 교수문화특강:백솔이(정가), 유기청, 김용희(체험공방)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 이재원집필지도:이나나, 신일권동행취재단:김종호, 박계현, 이영숙, 임희도, 이영백, 김명희, 권기봉, 이선덕, 김효원, 노경훈, 정경식, 이길호, 김영미, 신노을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08-02

실패하면 동해바다로… 우향우 정신이 이룬 영일만 신화

“부릉, 부르릉~“ 두바퀴路 전용승합차가 출발한다. 포항 중앙아트홀에서 포스코 역사관으로 향하는 길이다. 모성은 교수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유럽 11개 선진도시를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선명하고 기이한 꿈을 꾸었어요. 포스코 역사관을 방문하려고 그랬던지.. 꿈에서 용광로의 불길이 제 연구실 벽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와! 굉장한 꿈인데…. 매우 길한 징조입니다!” 주역에 능한 신일권 박사의 말에 동승자들의 눈이 반짝인다.1973년 제철소 준공, 조국 근대화 상징 우뚝포항의 문화·정신 대변… 새 가치 추구할 때문화와 시민 박계현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오늘 방문하는 포스코 역사관도 제철보국의 위대한 꿈과 그 실현과정을 전시한 곳입니다. 포항에는 유형의 문화자산도 많지만 포스코 정신과 같은 무형적 자산도 있습니다. 오늘은 저 용광로 불길같은 무형의 포스코 정신을 학습하고자 합니다”차창 밖으로 용광로를 지나 그 꿈이 정리된 역사관에 도착했다. 역사관 입구에서 기다리던 도우미가 먼저 롬멜하우스로 안내했다. 롬멜하우스는 포항제철 건설당시 지휘본부인 셈이다. 사막의 영웅 롬멜장군이 모랫바람이 휘날리는 곳에서 전쟁지휘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지어진 이름이다.무형 문화 `포스-피리트`나영기 전 경실련 공동대표의 강연이 시작됐다. “포스코를 떼놓고 포항을 떠 올릴 수 없습니다” 33년간 포스코에 근무했던 나 대표의 말은 부드럽게 이어졌다.“포항의 뿌리로 연오랑 세오녀를 뗄 수 없듯이, 포항의 문화형성에 포스코를 뗄 수 없습니다”그렇다. 우리는 포항의 문화를 생각하며 포스코 정신과 노란제복의 포스코 맨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를 포스코(posco)와 스피리트(spirit)의 신조어로서 포스-피리트(pos-pirit)라 부르고자 한다.포스코는 1968년 설립됐다. 그 후 45년 동안 포항을 국내 최고의 산업도시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연산 1천750만t 체제를 갖춘 세계 3위의 철강기업으로 우뚝 선 것이다. 특히 한국을 세계 속의 유수한 조강국가로 만들어 놓으면서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주인공이다.정부는 1967년 제2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다. 일관제철소 계획을 수립하면서 그해 7월 포항을 제철소의 적지로 결정했다. 무거운 원재료를 운반하기 용이한 곳으로 선정한 것이다. 정부가 3억원, 대한중석이 1억원을 출자하여 1968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를 설립했다.제철소 건설을 위해 국제차관단(KISA)이 결성됐다. 하지만 기대했던 차관도입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이때 대일 청구권 자금이 남아 있다는 정보를 알고 일본을 압박했다. 그 결과 대일청구권자금 등 외자 370억원과 내자 230억원 등 총 6백여억원을 확보해 1973년 7월 일관제철소를 준공하였다.故 박태준 회장의 `우향우 정신`포스코는 한국경제발전의 상징이다. 이 과정에서 고 박태준 회장의 집념이 돋보였다. 이 공장이 실패하면 동해바다로 뛰어든다는 일념으로 공장건설에 박차를 기했다. 포항에서 서울을 향해 섰을 때 동해바다는 오른쪽이었다. 이것이 훗날 박태준 회장의 우향우 정신인 셈이다. 이러한 사생결단의 우향우 정신은 포스코 맨들에게 뿌리 깊게 각인된다. 이것은 포스코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1978년 포스코는 추석 1주일 전부터 추석휴가반납 캠페인을 벌였다. 추석 당일에는 건설현장에서 함께 합동제례를 지냈다. 추석 휴가까지 반납하며 포스코 3기 공사를 마무리 하게 된다.인재양성, 미래지향, 복지우선포스코의 경영철학은 공장건설 과정에서 더 살필 수 있다. 그것은 인재양성, 미래지향, 복지우선이었다.땅을 다지고 공장을 짓기도 바빴다. 그러나 인재육성이 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포스코의 경영철학이었다. 조업기술과 건설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직원을 해외로 연수를 보냈다. 사내 교육기관을 개설해 자체적인 인재육성에도 힘을 썼다.처음에는 해안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공장을 배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는 규모를 확장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포스코는 과감하게 계획을 바꾸었다. 연간 500만t 이상의 대단위 제철소를 꿈꾸는 데 쉽고 편한 계획에만 연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 해안선을 파 들어가는 굴입항만을 선택했다. 10년 후를 생각하며 공장 배치 계획을 바꾼 것이다.초창기 포항은 한적한 항구도시였다. 주변의 주거시설과 교육시설은 변변치 못했다. 또 한번의 결단을 내렸다. 현장 건설과 조업도 중요하지만 먼저 직원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직원들을 위해 먼저 사원주택단지를 조성하고 학교도 지었다. 대단위 복지센터도 건립했다.포스코맨 노란 제복이 포항 상징청년들이 몰려들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 각 지역의 청년 수재들이 포항으로 밀려왔다. 그리고 독신아파트에 몸을 담았다. 이들은 밤낮으로 일을 했고 여가시간에는 포항 곳곳에서 그들만의 낭만을 이루고 문화의 싹을 튀운 것이다. 이들은 포항 최초의 실내체육관과 최초의 잔디구장에서 스포츠를 즐겼고, 최초의 음악당에서 클래식을 감상했다. 그리고 송도 축항에서 트럼펫을 불었고, 또 형산강에서 흐르는 물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멋진 복지센터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가시간을 보냈다.노란제복은 최고의 인기였다. 서울 말씨에 하얀 얼굴 그리고 안정된 봉급생활은 포항 처녀들의 가슴을 두드리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노란제복만 입으면 시내 어느 주점에서도 외상거래를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들이 결혼해서 인덕아파트와 지곡아파트로 번져나갔다. 포스코 맨의 생활과 활동은 송도와 해도 죽도 그리고 오거리 육거리를 통해 포항의 새 문화를 형성했다.이렇듯 포항문화의 중심에는 포스코가 있었다. 제철보국의 사명감과 우향우 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포스코 맨. 이들은 영일만 신화를 확산시켜 국가경제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하지만 최근 들어 포스코가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 철강산업의 불황과 신성장엔진 발굴의 어려움으로 창사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에 처해있다. 설상가상으로 원가절감으로 인력구조가 경직되게 운영되고, 전례없는 안전사고도 연달아 발생하고 있다. 직원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시민들은 근심어린 눈길을 주고 있다.헌 것을 버리고 새 것을…권기봉 회장이 힘을 주어 말한다. “이제 기존의 포스코 정신을 수정할 때입니다. 21세기가 원하는 네오-포스피리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조선시대를 보내고 근대사회를 맞이한 것처럼 새로운 시대정신에 입각해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그렇다. 무조건 `하면 된다` 식의 정신이 지금에는 덕 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45년 전의 성공 인식이 오히려 21세기 창조형 인재들에게 사기만 저하시킬 뿐이다. 최근 우리는 밀어붙이기식 행정이 얼마나 시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지를 목도하고 있다.모성은 교수가 말을 잇는다. “포스코 맨의 사기를 높이고 지역주민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전략이 필요합니다.”이선덕 회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붙인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시와 기업과 산업도 언젠가는 쇠락할 수밖에 없습니다”이제 신성장 동력 발굴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포스코의 경영전략과 포항의 발전전략을 연계시키고 조율해야 한다. 반 백년을 보낸 우향우 정신을 수정하여, 새로운 창조경제의`네오-포스피리트`를 만들어야 한다.◇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문화특강:나영기 전 경실련 공동대표◇ 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 집필지도:신일권, 이나나◇ 취재동행:박계현, 이선덕, 신중규, 권기봉, 동행단체 한마음사랑후원회(천태성, 정경식, 박창교, 이길호, 김영미, 이영숙)◇ 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07-19

학도병 피묻은 편지엔 “어머니, 전쟁을 왜 해야 하나요?”

호국보훈의 달, 6월이다. 두바퀴路 문화탐방단은 포항시 북구 용흥동 탑산에 소재한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을 찾았다.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함으로써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경이다. 전쟁이 일어 난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유엔연합군은 시간을 벌기 위해 왜관, 기계, 포항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해야했다. 이 방어선이 뚫리면 부산마저 순식간에 점령될 것이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오직 펜 대신 총을 들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학도의용군은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의 학생들로 전국에 약 5만명이 참전했다.학도병 47명 전사한 포항여중 전투 가장 치열北 유격대원 3천여명 기습, 軍 지휘없이 방어학도의용군이 참가한 대표적인 전투는 1950년 8월11일에 일어난 포항여중 전투였다. 당시 포항중학교 5학년으로 천마산 전투에 참전하여 고막을 잃고 겨우 목숨을 건진 학도의용군 생존자 최기영 전승기념관 고문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학도병 단독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육군 제 3사단 소속 71명의 학도의용군은 개인당 소총 한 자루와 실탄 200여발 그리고 약간의 수류탄만을 받은 채 군의 지휘도 지원도 없이 홀로 싸우다 꽃다운 나이에 산화 하였습니다”포항전투, 영화로도 만들어져숭고한 호국·희생정신 담아11시간의 긴 전투 끝에 결국 47명이 전사하였고, 북한군은 260여명이 사망했다. 학사모를 쓰고 교복을 입은 채 학도의용군으로 참석했었다는 이석수 전 부지사는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71명의 학도의용군은 새벽 4시경 북한군 제5사단 및 766 유격부대원 약 3000여명의 기습공격을 받아 목숨을 건 싸움을 펼쳤습니다. 포항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국토 수호의 마지막 보류였기에 71명의 학도의용군이 목숨을 바쳐 북한군을 막았습니다”라고 증언한다.2010년 이재한 감독의 영화 `포화속으로`는 포항전투에 참전했던 학도병 71명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담고 있다. 1950년 8월11일, 당시 71명의 학도병 중 한 명이었던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이 어머니께 미쳐 부치지 못한 피 묻은 한 통의 편지가 배경이 되었다.“…. 어머니, 전쟁을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소년은 결국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전사했다. 중국 당나라 진도(陳陶, 812-888)의 시 `농서행`이 떠오른다.誓掃匈奴不顧身 흉노 소탕을 맹세하고 제 몸 돌보지 않더니五千貂錦喪胡塵 오천 전사들 오랑캐 말발굽아래 죽어갔네.可憐無定河邊骨 가엾어라, 무정하 강변에 뒹구는 백골들은猶是深閨夢裏人 여전히 여인네들이 꿈에 그리던 사람들이네.한나라 무제(武帝)때 이릉(李陵)의 병사 오천명이 흉노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한 고사를 인용한 시이다. 전쟁터에서 오랑캐 칼끝에 백골이 되어 이름 없는 강변에 나뒹구는 주검들, 멀리 고향집 여인들 꿈속에선 여전히 살아있는 아들이오, 남편이다.어머니가 꿈속에서 그리던, 그 학도병들의 혼은 다 수습 되었는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르던 어린 학도병들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충혼탑은 말없이 포항 시가지를 내려다본다.바로 그때, 싸이렌 소리가 울리고 뒤이어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 노래 소리와 함께 충혼탑 광장은 포항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의 `독도 플래시몹`이 펼쳐졌다. “여러분, 독도를 지켰던 신라 장수 이사부의 용기와 포항을 사수하며 목숨 바친 71명 학도의용군의 뜻을 이어, 이제 우리 손으로 이 포항과 독도를 발전시킵시다.” 한 여학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펴지고 학생들의 씩씩한 율동과 땀방울에서 그날 학도병들의 타오르는 눈빛을 보았다. 문화기자단 뿐만 아니라 기념탑을 참배하던 시민들도 플래시 몹 행렬에 동참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탑산은 뜨거운 애국심으로 달구어 지고 있었다. 탑산에서 내려다 본 산불 현장포항전투 치열했던 격전지 같아플래시몹도 멈추고 모두의 흥분이 가라앉을 즈음 정경식 한마음 사랑후원회 사무국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바로 지난 5월에 발생한 대형 산불 화재의 시발지군요. 다행히 충혼탑과 전적비는 무사합니다만 ….”5월9일 오후 3시50분경 탑산에서 시작된 산불로 용흥동 일대를 거쳐 수도산, 포항여중을 잇는 산들 및 그 주변 집들의 화재현장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었다. 강한 바람과 험한 산세로 진화에 어려움이 있어 약 17시간 만에 불길이 잡혔다. 인명과 주택 53가구가 피해를 입었다.은하수로타리클럽 이선덕 전회장이 한마디 한다. “탑산에서 내려다본 화재의 현장이 마치 1950년 포항전투의 치열했던 격전지 같습니다.”“이번 화재현장인 탑산과 수도산, 포항여중 일대는 학도병의 애국정신과 넋으로 지켜진 곳입니다. 대한민국을 지킨 마지막 방어선으로 서울 수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중요한 역사적 공간입니다. 화재로 잿더미가 된 채 방치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포항예술고 예진영 선생의 굳은 표정에서 도심재생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이제 우리들의 몫이라는 비장함이 서려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화염에 휩싸였던 지역 대부분이 포항의 역사적 공간이자 구도심권으로 도심재생에 대한 논의의 쟁점 지역이기도 하다.전쟁 폐허 위에 철강도시화재 잿더미 위에 문화도시건설업체를 이끌고 있는 유희경 사장이 한마디 한다.“포항은 전쟁의 폐허 위에 철강도시를 세워 영일만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메카로써 산업근대화를 견인해온 역동적인 도시입니다.”탐방 내내 연신 싱글벙글 웃고만 있던 이철진 포항예술고 미술부장이 말문을 열었다.“맞습니다. 하지만 `철강도시`라는 이미지 때문에 상대적으로 `문화도시`라는 이미지는 매우 취약한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동빈내항과 포항역, 수도산, 탑산 일대를 연결 짓는 복합문화 공간을 조성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이때 송상헌 포항예술고 선생도 질세라 자신의 생각을 던졌다.“현재 오거리에 있는 역사가 2014년 KTX 신역사 준공을 앞두고 이인리로 이전됩니다. 포항 역사를 이용한 시민광장이나 수도산 주변의 경관을 이용한 박물관이나 국악예술원 조성 등은 시민의 휴식과 예술 공간으로 새로운 문화적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구도심은 포항 발전의 상징이자 역사적 공간입니다. 구도심 자체를 문화 공간으로 변모시킨다면 시민의 문화욕구를 충분히 만족 시킬 것입니다.”문화대원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내며 활짝 웃었다.예술이든 인간의 역사든 그것이 진정한 문화가 되고 전통이 되려면 형식과 내용이 충실해야 한다. 철강의 메카로써 첨단과학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갖춘 포항이 문화예술이라는 내용(정신)적 아름다움과 결합한다면 진정 천년을 넘나들 `영일만 문화`가 창조 될 것이다.포항이 전쟁의 폐허 위에 철강도시를 세웠다면, 이제 화재의 잿더미 위에 문화도시를 세워야 할 때이다.△대표집필:모성은 교수△문화특강:최기영 고문(국가유공자), 이석수(전 부지사)△한시감수:신일권(한문학자)△집필지도:이나나(미술사학 박사)△청소년기자단:포항예술고등학교 학생들(플래시몹)△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동행취재단:김효은, 박계현, 김병기, 김형철, 이영숙, 이선덕, 서명호, 곽귀남, 원지혜, 유희경, 최성주, 이미자, 포항예술고등학교(이철진, 예진영, 송상헌, 이종길 선생님), 한마음 사랑 후원회(권기봉, 정경식, 이길호, 김영미, 김명헌, 권태성, 황일석, 서상봉, 박창교, 권유석, 권민석, 김정은, 김동은)△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06-28

사상의학 이제마와 근대 한의학계 양대산맥 이뤄

어느덧 (사)문화와 시민의 `두바퀴路`가 5회째를 맞는다. 이번에는 조선말 한의학자 석곡 이규준을 찾아 나섰다. 취재단은 포항시 동해면으로 `두바퀴路`의 노란깃발을 펄럭이며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숨겨진 향토문화자산을 찾아내는 재미가 솔솔 일기 시작했다. `두바퀴路` 문화탐방단의 가슴에는 저마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수줍은 소녀처럼 콩닥콩닥 심장이 뛴다. 취재단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광복을 염원하던 이육사의 `청포도`가 주저리주저리 영글었던 동해 석곡도서관이었다.포항 동해면 출생, 일반인에 잘 안 알려져양기로 病 설명한 扶陽論 등 뛰어난 업적 향토사학자 황인 선생이 `두바퀴路` 취재단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석곡도서관에는 석곡의 문집들과 관련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석곡 이규준(1855~1923)은 사상의학으로 잘 알려진 이제마(1837~1900)와 함께 근대 한의학계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포항이 낳은 영남 한의학의 큰 스승이다.  이규준은 1855년 동해면 임곡에서 출생한 후 석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들 지명을 따서 호를 `석곡(石谷)`이라 하였다. 석곡은 석곡서당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육경주소(六經注疏)에 자신의 주장을 담은 토를 달아 `경서주소(經書注疏)`를 남겼다. 특히 석곡은 한의학자로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주요 의서는 `동의보감`을 요약한 `의감중마(醫鑑重磨)`와 `내경소문`을 요약한 `황제내경소문대요(黃帝內經素問大要)` 등이 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이 체질에 따른 조화를 중시하는 의학이라면, 이규준의 부양론(扶陽論)은 양기의 부족 때문에 병이 생김을 역설하고, 부족한 양기를 도와주어 본래의 건강한 기운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향토사학자 황인 선생의 특강이 시작되었다. “이제마와 이규준의 의학 이론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완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석곡의 부양론은 아직 일반인에게 생소합니다.”감춰진 향토 문화자산을 찾아 나선 취재단의 눈빛이 반짝인다. 황인 선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심지어 선생의 고향인 우리 지역에서 조차 그 존재감은 미흡합니다. 석동에 위치한 석곡 선생의 허름한 생가 부엌 한구석에는 600여 개의 목판이 나뒹굴었으나 지금은 그 절반이 사라지고 364장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최근에야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보관 상태는 매우 불량한 편입니다.”누구보다 먼저 석곡의 소중함을 알고 그 목판본이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힘쓴 주인공이 오늘 특강을 맡은 것이다. 석곡도서관이 세워지기까지 불철주야 의기에 찬 황인 선생의 지난 모습이 눈에 선하기만 하다.한의원을 경영하는 김학동 한의사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석곡이 남긴 의서를 연구하고, 그의 의술과 뜻을 기리는 전국 한의사들로 구성된 학회가 있습니다. 1991년 석곡의 제자인 무위당 이원세 선생을 모시고 한의사들이 석곡학회를 창립하였고, 이듬해 다시 소문학회로 명칭을 개정하여 현재에 이릅니다.” 영남문인 화맥 석재와 각별한 교류 부산대에서 한문학을 강의하는 신일권 박사가 덧붙였다. “석곡의 재조명은 그의 학맥에서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석곡의 유학은 당시 영남지역의 주류인 퇴계학맥에서 벗어나 율곡 이이 → 우암 송시열 → 매산 홍직필 → 임재 서찬규 · 입헌 한운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영향아래 있었습니다. `석곡산고`를 살펴보면 석곡 자신은 임재 서찬규에게 나아가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석곡과 석재의 교유관계를 연구했던 이나나 박사가 한마디 거든다. “석곡은 석재 서병오와도 교유하였습니다. 서병오는 호남 문인화맥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추사 김정희 → 석파 이하응 → 석재 서병오로 이어지는 영남 문인화맥의 개조입니다.”1901년 3월14일 석곡은 스승인 임제 서찬규를 문안한 후 석재 서병오의 집에 열흘간 머물렀다. 당시 팔능(八能)으로 전국에 알려졌던 서병오의 집은 날마다 풍류와 서화로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석곡산고`에는 `석재의 서화가 오묘함을 알고 그것을 배우려 했지만 잘 할 수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서병오 또한 중국 주유 중에 서화가 포화(蒲華)의 병을 고쳐줄 정도로 의술 역시 일가를 이루었는데 의학에 밝은 석곡과 서화에 뛰어난 석재는 서로 두터운 통섭의 교유관계를 이룬 것으로 판단된다.  포항 문화인물로 재조명 필요 석재가 석곡의 죽음을 애도하여 계해년(1923)에 지은 시가 있다. “先生大道本於天  석곡의 큰 도는 하늘을 근본 삼았으니俛仰羲皇立志堅  복희씨를 우러러 세운 뜻이 견고하였네.一自河圖生八卦  한번 하도에서 팔괘를 만들어鴻荒重闢二千年  태고의 시대에 거듭 이천년을 열었네.”이 시는 석곡의 사상이 복희씨를 근본으로 했다는 내용이다. 즉 석곡이 서당을 열어 글을 가르치고 의술을 펴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여러 저술을 남긴 것들이 모두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쳐 사람답게 살도록 한 것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내용이다.석곡과 가까이 했던 석재는 이미 영남 최고의 근대 서화가로서 대구 지역에서 크게 조명되었다. 이제 석곡 이규준도 근대 영남 최고의 한의학자로서 포항의 문화인물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마침 부산대학교에서는 5월28일 `석곡 이규준의 현대적 의미와 학제간 모색`을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석곡의 학문이 이제 학계에서 조차 깊게 조명되는 시점에 이르렀으니 이제 포항지역에서도 이러한 소중한 향토문화 자산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것이다.문화와 시민 박계현 대표가 한마디 한다. “그 동안 몇몇 지역을 두 바퀴로 달리며 느낀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지역에도 정신적 문화유산이 충분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문화유산이 아무렇게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메타입시학원 장재향 원장이 박 대표의 말을 잇는다. “이제 포항에도 이러한 문화자산을 제대로 관리하고 보존할 수 있는 박물관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포항의 향토문화인물의 발굴은 시대를 초월한 그들의 정신과 만남이며 포항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여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포항 오는 사람은 석곡 만나야” 이번 `두바퀴路`는 지난 어느 답사보다 인문학적으로 열띤 학습의 장이었다. 취재단 구성원들이 마침 석곡 이규준을 중심에 둔 한문학, 향토사학, 한의학, 영남서화에 전문성을 지닌 관련 연구자들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심도 있는 문화탐방이 된 것이다. 인문학의 중요성이 논의되자 한마음사랑후원회 권기봉 회장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추사 김정희는 중국 전역을 유람하는 것보다 옹방강(翁方綱)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역시 누군가 저에게 포항에 가볼만한 곳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포항 전역을 보는 것보다 석곡 한 분을 만나는 것이 낫습니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문화탐방에 동참한 취재단의 함성과 함께 우뢰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대표집필:모성은 교수△문화특강:황인 (향토사학자), 손국락, 정기석△집필지도:신일권 (한문학자)△청소년기자단:김보름, 김유민△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동행취재단:박계현, 강성주, 김학동, 박창현, 권기봉, 김명헌, 정경식, 박창교,  이길호, 김영미, 이나나, 장재향, 김경희,△제작책임

2013-05-31

“저것이 내 물고기” 원효·혜공이 법력 다툰 오어사

“초파일을 앞두고 오늘은 포항 운제산 오어사를 탐방합니다.” 두바퀴路 네 번째 문화탐방은 청림초등학교 집결에서 시작되었다. 이번에 특강을 맡은 포항청년연합(KYC) 문화길라잡이 회원들과 한마음사랑후원회의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5월의 햇살아래 `아프로디테(포항여류화가모임)` 5인방의 아름다운 미소는 봄날의 싱그러움을 더해 주었다.“아~! 이번에는 비교적 고도가 높은 곳을 탐방하는 관계로 승합차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문화와 시민 박계현 이사장의 구수한 말솜씨로 취재단은 전용차량에 탑승을 하였다.신라 `四聖` 원효·혜공·의상·자장 머문 곳비경의 천년고찰 곳곳엔 고승들 설화 얽혀신라 사성 머물렀던 그 길 위에“오어사는 신라 진평왕(579-632)때 자장율사가 지은 사찰입니다. 신라 정신을 이끈 원효·혜공·의상·자장 등 사성(四聖)이 머물렀던 천년 고찰이기도 합니다.”문화길라잡이 박재환 회장의 설명이었다. 주변의 비경도 뛰어나지만, 이들 고승들에게 얽힌 설화들도 흥미진지하다. 원래 운제산 북쪽에는 자장암, 그 아래 혜공암, 서쪽에 의상암, 남쪽에 원효암이 있었단다. 그러나 지금은 원효암과 자장암만이 1천여 년 세월을 꿰어내고 있다.사성들이 오르내렸다는 운제산 구름다리, 오어지(吾魚池) 입구에 들어서니 연초록빛 수목들이 싱그러움을 토해내고 있었다.“잠깐! 차를 멈추고 모두 내리세요. 여기서 모두 배를 타고 오어사 일주문 앞에 도착할 것입니다”이상령 KYC 문화길라잡이 전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깜작 놀라 모두 차에서 내렸다.현재의 오어지(池)는 운제산 계곡을 막아 만들어졌고, 지금의 저수지 자리에는 오어사가 있었다고 한다. 오어사가 옮겨진 뒤 초기에는 길이 없어서 배를 타고 오어사를 왕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포항, 신라 정신문화의 뿌리어디선가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운제산 계곡을 뒤덮고 있다. 두 선승의 모습이 계곡의 상류에 있는 반석 위에 보인다. 이들은 그동안 수도한 법력을 겨루고 있는 것이다. 개천에서 노는 고기를 한 마리씩 잡아먹고 그것을 다시 살려내는 내기였다. 이들은 즉시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는 각기 변을 보았다. 그런데 물고기는 한 마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물고기는 물살을 가르면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금방 바윗돌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본 두 선승은 서로 `저것이 내 물고기`라며 목청을 높인다.이들이 바로 원효와 혜공이었다. 삼태기를 메고 저작거리에서 뛰며 놀며 민중과 고락을 함께 했던 호기넘치는 시절이었다. `내 고기` 사건의 시대적 배경은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 해골 바가지 물을 마시기 전의 일이다. 즉, 원효가 유학을 포기하고 대중과 호흡하는 불교를 펼치기 시작한 이전의 일이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원래 이름이 항사사(恒沙寺)였다. 그러나 원효와 혜공의 `물고기` 법력 경쟁이후 `내 오(吾)`, `고기 어(魚)`를 써서 `오어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해강 김규진의 친필 일주문 현판 `吾魚寺` 글귀는 서로 시비하는 승려들을 비웃듯이 힘차게 꼬리치며 도망가는 물고기 형세를 하고 있다.“방금 구름다리 밑에서 보았던 물고기 중 한 마리가 바로 그 물고기는 아니었을까?”오어사는 그 자체가 신라정신의 근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대업은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 시기 전후로 의상과 자장은 왕실귀족불교를, 원효와 혜공은 민중불교를 융성시켰고 이들 사성 모두가 이곳 오어사에서 불도를 닦았기 때문이다.“이 네 분의 고승들이 모두 운제산에서 법력 공부에 힘썼던 만큼, 포항은 신라 정신문화의 뿌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아프로디테 장미화 선생은 특유의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한마디 던진다.한마음사랑후원회 권기봉 회장은 “우리 고장에도 이렇게 유서 깊은 곳이 많은데 그동안 밖으로만 눈을 돌렸습니다”라고 말했다.박계현 이사장도 덧붙였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 포항의 역사를 살려내고 계신 KYC 문화길라잡이 회원님들의 노력에 새삼 머리가 숙여집니다. 저 역시 포항 문화 찾기에 더욱 노력해야겠습니다.”이렇게 두바퀴路의 열정은 점점 담금질되고 있었다.취재단의 발길은 대웅전에 멈춰 섰다. 조선 영조 17년(1741)에 중건된 오어사 대웅전은 문화재 자료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서 취재단이 눈여겨 본 것은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는 문살모양이었다. 문살무늬는 맨 아래 꽃봉오리가 맺힌 모습에서부터 점점 올라 갈수록 봉우리가 벌어져, 맨 위에는 활짝 핀 꽃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이 꽃봉오리는 깨달음의 과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인의 세심한 불심이 돋보여 더욱 가치가 높습니다”라고 박 회장은 설명했다.깨달음의 과정 그린 `심우도`경내를 거니는 관람객들을 비집고 두바퀴路 일행은 대웅전 뒤쪽 외벽에 그려진 `심우도(尋牛圖)`로 눈길을 돌렸다.벽화는 한 동자가 소 발자국을 찾는 데서 시작된다. 그 발자국을 따라 숲속에 숨겨진 누런 소의 엉덩이를 발견한다. 소의 고삐를 잡자 누런 소가 천방지축 날뛴다. 장면이 바뀌면서 소의 색깔이 점점 하얗게 변해간다. 이윽고 완전히 하얗게 변한 소의 등위에 동자가 올라타고 피리를 부는 것으로 벽화는 마무리된다. 즉, 이것도 깨달음의 과정이다.`심우도`는 득도의 과정을 설명한 그림이다. 소는 곧 도(道)를 상징한다. 주로 불가에서 득도하는 과정을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방편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심우도`는 소의 색깔 변화에서 그 의미가 파악된다. 소의 색깔이 도의 경과에 따라 누런 색에서 흰 색으로 변하는 수도의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대웅전 벽에 그려진 `심우도`를 보고나니 눈앞에는 육중한 범종과 그 종각이 나타났다. 종각 아래에는 범종 외에도 지옥중생을 위하여 갖추어야하는 법고·목어·운판 등 사물(四物)이 있었다. 범종소리에 지옥중생들의 고통이 줄어들고, 법고소리에 축생이 제도되고, 목어는 수중생물을 제도하기 위하여, 운판은 날짐승을 제도하기 위하여 친다고 한다.오어사 최고 보물 `동종`무엇보다 오어사 최고의 보물은 동종(銅鐘)이란다. 1216년 고려 말에 만들어진 동종은 1995년 11월 저수지 준설작업 중 78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동종은 보물 1280호로 지정되었고 종각 옆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이 범종은 동종을 모방하여 만든 것입니다.”오어사 주지 장주스님이 말씀하신다. “범종을 자세히 보면 만공월면선사의 시 `팔공산성전(八公山聖殿)`이 새겨져 있어요” 그리고는 조용히 싯구를 읊었다.後夜雨中事(후야우중사) 깊은 밤 빗속의 일.千聖未徹在(천성미철재) 모든 성인들조차 깨닫지 못했네.不識也不識(불식야불식) 모르겠노라 모르겠노라.鐘聲道得去(종성도득거) 종소리가 울려 퍼지네.“모르겠노라(不識)!”깨달음을 얻은 역설적 표현이다. 운제산 그림자 거꾸로 드리운 오어지에 어느 듯 어스름한 어둠이 내리고, 여운이 아직 남은 두바퀴路 취재단의 등 뒤로 오어사의 범종 소리가 들린다.“둥(모르겠노라)!” ~ “둥(모르겠노라)!” ~.저무는 태양에 하루를 갈무리하는 탐방단의 얼굴위에 저마다 염화미소(拈華微笑)가 번지고 있었다.△대표집필 : 모성은 교수△문화특강 : 이상령, 박재환 (KYC 문화길라잡이)△한시감수 : 신일권△집필지도 : 이나나△사진촬영 : 안성용, 황종희△동행취재단 : 박계현, 이선덕, 장미화, 백광자, 하은희, 사공숙, 서명호, 김재옥, 장재향, 오기준, 노경훈, 권기봉, 정경식, 오정숙, 서미경, 이길호, 김영미, 권태성, 최귀숙, 신정호, 채철원△제작책임 : 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05-24

충절 지킨 여종 단량의 비석, 한맺혀 스러진 듯 초라

지난달 27일 오후 1시 포항시립 중앙아트홀 앞 광장. 초여름 같은 따스한 햇살 아래 `두바퀴路` 문화탐방 참여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성급하게 반팔차림을 한 청소년 취재기자의 모습도 보였다.여기는 다시 구룡포 읍민도서관. 2층 강당에 스무 명이 넘는 취재단이 둘러앉았다. “안녕하십니까. 구룡포 방문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천민계층의 문화를 이야기 하기 위해 충비(忠婢) 단량(丹良)의 비를 답사하고자 합니다.”서인만 구룡포 읍민도서관장은 말을 이었다. “역사는 영웅의 편에서 기록됩니다. 기득권과 권력자의 역사에 가리워진 비주류의 역사에 심한 갈증을 느낍니다.”상전인 영의정 황보인 계유정난때 척살되자손자 `단` 물동이에 숨겨 8백여리 야반도주현재 포항시 대보면 정착, 황보씨 가문 이어포항에 여자 종 비석 3기나그렇다. 아직 노비의 비석을 본 기억이 없다. 노비 즉, 노(奴)는 남자종, 비(婢)는 계집종을 말한다. 그런데 포항에는 조선시대 충비 즉, 계집종의 비석이 3기나 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자산임에 틀림없다.먼저 구룡포에 있는 단량의 비석을 탐방하기로 했다. 단량은 조선시대 영의정 황보인의 여종이었다.세종대왕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즉,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려고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영의정 황보인은 수양대군의 편에 서지 않고 끝까지 단종의 편으로 분류되어 척살되지 않을 수 없었다.1453년 10월10일 밤 황보인이 살해된다. 계집종 단량은 가문의 멸문지화만은 피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영의정 황보인의 손자 `단`을 물동이에 숨겨 머리에 이고 탈출을 시도한다.정처없는 야반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길고 험난한 태백준령을 물동이를 인채 여인의 몸으로 홀로 넘었다. 밤낮 없는 고단한 걸음은 계속되었다. 황보인의 막내사위 윤당이 살고 있는 봉화군 상운면 닥실리까지 팔백여리 길을 걸어서 도망한 것이다.그러나 그곳도 여의치 않았다. 다시 정처없는 길을 떠나 동해안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로 두 번째 피신을 시도한다. 그곳이 오늘날 포항 남구 대보면 집신골이었다. 이곳에서 단량은 황보단을 지극 정성으로 키워 훌륭한 성인이 되었다.영조, 황보인에 `충정공` 시호이렇게 영천 황보씨(永川 皇甫氏)의 가문은 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단`의 증손 `억`이 구룡포 성동리로 이주하여 새 삶의 터를 형성하였다. 290년이 지난 후 숙종 때 이르러 신원되어 영의정 황보인과 그의 아들 `석`과 `흠`은 관직을 회복했다. 황보인은 영조로부터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정조 15년에는 지방의 선비들이 광남서원(廣南書院)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황보인과 두 아들의 충과 의를 기리고 있다. 황보인의 비석과 함께 서원 뒤편에 충비 단량의 얼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충비 단량의 덕으로 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구룡포에는 마을 단위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황보 성씨가 살고 있다고 한다.”서 관장의 강의가 끝나자 취재단은 페달을 밟았다.구룡포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뱃공장 언덕에 올랐다. 부둣가를 가로질러 언덕에 오르는 자전거의 힘찬 페달, 그리고 시원하게 얼굴을 때리는 해풍은 상쾌하게만 느껴진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바다`라는 전설처럼 빼어난 절경과 풍부한 어장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북쪽 건너편 언덕위에 적산가옥들도 보인다. 적산(敵産). 자기 나라의 영토 안에 적국의 재산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과거 건축해 살았던 가옥들을 개조해 근대문화 역사의 거리로 꾸민 곳이다.먼 바다에는 귀신고래가 물을 뿜으며 헤엄을 친다. 그 뒤를 쫒는 포경선의 부산함도 환영처럼 가물거린다. 극단가인이 공연한 `구룡포 프리덤`을 너무 감명 깊게 관람해서일까. 정혜 작가의 글이 너무 감동적이라서 일까.북서쪽 산기슭에는 `조선의 마지막 군마`들이 풀을 뜯는다. 말목장성에서 재복이가 마지막 군마 태양이를 훈련시키는 모습은 너무나 한가롭게 느껴진다.“…. 읍내에는 철이 아닌데도 과메기 냄새가 진동한다. 가게마다 구룡포 대게의 홍보물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삶은 대게의 비릿한 냄새와 과메기의 비린내를 혼돈했을 것이다.”구룡포 이야기가 끝없이 꼬리를 문다. 그러나 항구에만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숨겨진 문화자산 충비 단량의 비석이 있는 광남서원으로 향했다.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3리 236번지가 그 곳이다. 서 관장의 말씀에 성동리 메뚜기마을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두바퀴路` 취재단은 31번 국도에 몸을 실었다. 구룡포항에서 출발해 포항 공항 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 장기·감포 쪽으로 가다가 7km지점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니 성동 메뚜기마을이 나왔다. 지난번 뇌록을 채취하려 오른 뇌성산 반대편 기슭이다. 구룡포와 장기면의 경계선 쯤 된다고 하겠다.단량 비석, 문화재 지정해야광남서원의 터는 참으로 안온했다. 사방이 낮고 동글 동글한 산으로 둘러싸여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목한 분지 같은 곳에 광남서원은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의 가구 수는 약 20 가구정도 된단다.서원은 1791년 11월에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세덕사(世德祠)라고 불렀다. 그후 1831년 8월부터 광남서원으로 호칭을 바꾸어 불렀다.서원에 들어서니 내부는 한가로웠다. `두바퀴路` 취재단 이외의 다른 관광객은 보이지 않는다. 중심건물은 `숭의당(崇義堂)`이라고 쓰여 있었다. 황보인의 절개와 변하지 않았던 의를 기리기 위해 쓴 글인 것 같다. 그 뒤편 계단을 오르니 조그만 사당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충비 단량지비(忠婢 丹良之碑)` 라고 쓰인 낡고 초라한 비석이 보였다.너무나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다. 그토록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가진 비석이 문화재 지정은커녕 외부에 그대로 방치되고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원 비석을 그대로 둔 채 이를 다시 해석해 세운 모조 비석이 오히려 비각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한마음사랑후원회 권기봉 회장이 한 마디 건넸다. “우리나라에서 노비를 위해 세워진 비석은 많지 않아요. 광남서원의 충비 단량의 비석은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입니다. 포항시에서는 다른 노비의 비석과 함께 문화재 지정에 노력해야 합니다.”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박계현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미천한 계집종의 비석을 세워 평등과 충절의 얼을 기린 것은 분명 문화적 의미가 깊습니다. 작은 비석에 얽힌 소중한 정신, 후세에 남겨 줄 귀중한 문화자산일 것입니다.”이미자 `구룡포 처녀` 들으며취재단은 읍내 모모식당으로 향했다. 선착장을 지나 중앙다방 골목길로 50m 들어오니 식당이 보였다. 구룡포에서 가장 특징있는 만찬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모모식당은 3대째 고래 고기만 파는 식당이란다. 얼큰한 고래국밥으로 허기를 채운 뒤 해산 인사를 건냈다.귀가 길은 해변도로를 타고 돌았다. 구룡포항에서 석병리, 대보리, 호미곶을 거쳐 대동배리로 돌아 포항의 환상적인 일몰을 즐기기 위함이었다.승합차 속에서 `구룡포 처녀`가 울려 펴졌다. 누군가가 스마트폰으로 1970년대 들었던 이미자씨의 노래를 검색한 것이다. 만능 엔터테인먼트 김효은 원장이 이에 어깨춤을 추며 박수를 치며 흥을 돋우었다.귀가길에 선 `두바퀴路` 참여자들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 올랐다.△대표 집필:모성은 교수△문화 특강:서인만 구룡포 읍민도서관장△고증 자문:황인 구룡포 향토사학자△청소년기자:모영준, 손혜진, 최요정, 김명채△사진 촬영:안성용, 황종희△동행취재단:박계현, 김효은, 신일권, 이나나, 권기봉, 정경식, 김병수, 김명헌, 박창교, 송광호, 김향미△제작 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05-03

다산, 첫 유배생활 비통함과 외로움 詩心으로 달래

“유배지는 충신에게 외로움과 고통의 공간입니다. 권력의 영고를 되새기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충신들의 얼과 엄청난 문화적 가치가 숨겨진 곳이기도 합니다.” 문화와시민 박계현 이사장은 말을 잇는다. “우리 포항에도 조선 최고 학자들의 유배지가 있습니다. 그곳의 가치를 살피기 위해 오늘은 장기면을 탐방합니다.” 따스한 봄날이었다. 약간의 미풍은 있었지만, 하늘에서 쨍쨍 내리 쬐는 햇살은 어깨에 걸친 외투를 부끄럽게 했다. 흥겨운 자전거의 행렬은 문화와시민의 노란 깃발을 휘날리며 목적지로 향했다. 마치 E. A. 게스트(Edgar Albert Guest)의 `깃발`을 연상케 했다. 장기,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 등 17명 귀양살이국내 유일한 단청재료 `뇌록` 산지로도 유명작고 작은 나의 일곱자 몸 / 사방 한 길 방에 누울 수 있네 / 아침에 일어나다 머리를 찧지만 / 밤에 쓰러지면 무릎은 펼 수 있다네향토사학자 금낙두 선생 만나먼저 향토사학자 금낙두 선생(73·전 장기중학교 교장)을 방문했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신창길 9에 위치한 장기 충효관 이었다. 그곳에는 노인대학이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기와지붕으로 된 1층 건물 충효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20여명의 동행취재단이 자리를 갖추자 하얀 백발의 금낙두 선생은 말을 이어갔다.장기읍성, 척화비, 보석사, 봉화대, 모포줄, 우암과 다산, 뇌록지 등 장기면에 얽힌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장에서 옅은 녹색 돌맹이 몇 개를 내놓았다. 뇌록(碌)이라고 했다. 동행취재단들의 눈빛이 반짝였다.“이것이 바로 옛날 탱화를 그릴 때나 목조건물 단층작업 등에 사용했던 천연 안료입니다. 뇌록은 목조건물에 벌레가 생기거나 부식,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줄이기 위해 사용했지요.”뇌록의 국내 유일한 생산지가 바로 장기면 뇌성산 뇌록지란다.“조선조 영건도감이나 동국여지승람에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지을 때 경상도 장기면의 뇌록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금낙두 선생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끌끌차며 말을 이었다.“포항시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수십 년째 문화재 지정에서 외면 받고 있어요….”하지만 유배문화지를 취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촉박했다. 우선 오늘 취재의 주된 목표인 다산 정약용의 시와 그 흔적을 찾아 떠났다. 다산의 시비는 장기초등학교에 자리 잡고 있었다.“다산 유배 200주년을 맞아 지난 2001년 장기초등학교에 사적비를 세웠습니다.” 취재를 지원한 이외국 장기면장의 설명이었다. 다산의 비는 장기지역을 형상화하여 포구의 둥근 이미지와 동해에 떠오르는 해를 나타냈다고 한다.다산은 1801년 3월 신유박해로 장기에 유배되었다. 그것으로 정약용의 장기생활은 시작된다.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기 직전의 일이다. 깊은 산골이면서 어촌이기도 한 장기지역은 조선시대 유명한 귀양지였다. 다산이 유배 오기 전에도 1675년 우암 송시열이 4년6개월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모두 17명의 학자들이 귀양살이를 했던 유배지였다.220일 유배생활 130수 시 남겨다산은 1801년 2월28일 유배의 길에 올랐다. 한강 남쪽 사평을 거쳐, 탄금대와 조령, 문경과 함창을 지나 3월9일에 장기에 도착했다. 열흘간의 여정이었다.그는 장기읍성 동문 밖에 있는 포교 성선봉(成善封)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성선봉의 집은 현재 장기초등학교 근처로 추정된다. 이곳은 이미 120여년전 우암 송시열이 귀양살이를 한 곳이기도 했다.당시 다산의 시를 보면 성선봉의 집이 얼마나 열악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작고 작은 나의 일곱자 몸 / 사방 한 길 방에 누울 수 있네 / 아침에 일어나다 머리를 찧지만 / 밤에 쓰러지면 무릎은 펼 수 있다네.” 고시 27 “이곳에서 7개월 즉, 220일간 유배돼 있는 동안 다산은 130수의 시를 남겼습니다. 이틀에 한수 이상을 남긴 셈이지요.” 한문학자 신일권 박사가 덧붙였다. “이는 유배문화의 자산으로 남아 장기지역에서 오랫동안 빛을 볼 것이라 확신합니다.”장기초등학교 옆 장기천(동천)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다산의 `유림만보(楡林漫步)`를 감상했다. 과거 천변에는 울창한 느릅나무 숲이 있었다고 한다.시냇가 사립문 밖에서 지팡이 끌고 / 고운 모래 밟으며 천천히 걷네. / 육신은 병들어 허약해지고 / 옷자락은 바람결에 펄럭이네…./ 햇살은 하늘거리는 풀에 비치고 / 봄은 고요한 꽃에 깃들었네…. 유림만보 장기는 다산의 첫 유배지였다. 당시 다산의 개인적 충격과 비통함은 매우 심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비통함을 다산은 시로써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봄날 오후 두바퀴의 페달을 밟으며 장기천 둑 위에서 또 한 편의 시 `제상(堤上):둑 위에서`를 감상했다.“저녁 무렵 갠 날씨 따라 둑 위를 걷노라니 / 봄 산의 짙푸름이 참으로 마음에 흐뭇하다. / ... 우연히 흰 구름 만나면 혼자 멍하니 서 있고 / 문득 향기론 풀을 보곤 뜬 인생을 생각하네. / 산골에서 밭 갈며 숨어 살 날 언제인가 / 흰머리 털 오늘 아침에도 벌써 몇 가닥일세.” 제상(堤上) 다산은 장기읍성의 동문에 올라 해돋이를 보는 것이 일과였다. 그리고 장기천을 따라 신창리 앞바다에 나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오징어·백로·뇌록에 대한 시구도그는 마을 사람들이 보리타작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고 담배농사를 짓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보리타작하는 것을 보았던 곳은 지금의 모포리(牟浦里)였을 것이다. 보리 `모(牟)`라는 지명답게 예부터 보리농사가 특히 잘 되었던 곳이다. 그곳에서 `모포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산은 생전 처음으로 해녀의 물질을 구경했고, 오징어와 백로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기도 했다.“오징어가 물가로 돌다가 / 갑자기 백로 그림자를 보았네 / 머리들고 백로에게 말하기를 / 그대 뜻을 나는 모르겠네 / 기왕에 고기를 잡아 먹으려면 /무슨 멋으로 청백한 체 하는가….”오징어 노래 향토사학자 금낙두 선생이 역설하는 `뇌록`에 대한 시구도 있었다.“동산의 뇌록도 그 역시 진기하여 / 돌에 박힌 파란 줄기가 복신처럼 생겼구나 / 염국에서 공물로 그를 받지 않았기에 영롱의 종유혈이 천년 내내 계속이라네”기성잡시 이 시를 감상하며 두바퀴 지역문화 취재단은 뇌록지로 향했다. 약 20분 정도 올랐을까. 숨이 차오르고 온 몸에는 땀이 베어났다. 이윽고 목적지에 이르러 석성(石城)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돌무더기가 발견되었다. 그 사이에 옹달샘같은 약간의 물이 고여 있었다. 이곳이 바로 뇌록지라고 가리켰다. 샘이 너무 맑아 손으로 퍼서 한 모금 마시려니 “이 물에는 구리가 녹아 있어 마시면 안됩니다.”라고 금낙두 선생이 주의를 주었다.다산의 싯구처럼, 암벽단층사이에 결을 따라 1~2cm 폭에 1m 정도의 녹색 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암벽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녹색의 빛깔을 띤 돌들이 무수히 많았다.“가장 큰 뇌록을 찾은 사람에게 상을 드리겠습니다.”라는 이나나 박사의 말에 동행취재단은 돌맹이와 바윗틈 사이에 뇌록 조각을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바위에서 생수 나오는 날물치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신창리로 방향을 돌렸다. 다산이 보았던 신창리 생수암(날물치)의 감동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장기천에서 흘러 신창리 앞바다가 만나는 곳, 두 개의 바위가 바로 생수암이다.바위에서 생수가 나온다고 장기사람들은 날물치(물이 나오는 곳)라고 부른다. “바위섬에 꽂혀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와 그 위에 떠오르는 해돋이가 장관이어서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촬영책임을 맡은 안성용 작가는 `이곳을 동해안의 가장 아름다운 일출지로 꼽는다`고 했다.두바퀴로 취재단은 유배지의 혼과 숨결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장기읍성에 올라 다산과 함께 해돋이의 시상에 감동하고, 장기천을 따라 날물치 모포 앞바다까지 페달을 밟으며 충신의 얼을 느낀 것이다.아쉬움에 고개를 돌리니, 다산이 거닐던 모포리 보리밭과 우암이 바라본 동해바다에도 어느덧 봄 노을이 덮고 있었다.`두바퀴로 문화취재단`은 장기면에 너무나 많은 문화자산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중 잘 알려지지 않은 다산 정약용 등의 유배문화와 뇌록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그리고 앞으로 장기지역은 유배문화촌을 만들고, 뇌록지를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더욱이 여름철 관광산업을 위해 신창리 물날치 해수욕장과 모포리 해수욕장 개발을 제안했다.△대표집필:모성은 교수△문화특강:금낙두 (향토사학자)△한시감수:신일권 (한문학자)△청소년기자단:강소리, 최민주, 방서영△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동행취재단:박계현, 이선덕, 임희도, 김효은, 박종일, 곽진환, 천정룡, 이나나, 이영백, 이은경△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2013-04-19

포항과 포스코 역사의 뿌리 찾아 첫 페달 쌩쌩

어링불은 지금 포스코 자리한 일대현대 한국 경제원동력 중심지로 부상연오랑세오녀 역사 곳곳 깃들고이육사 시 `청포도` 탄생 배경되기도`어링불`.포항의 지명이다. 그러나 포항사람들도 이 곳이 어디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굳이 포항지명을 거명하지 않는다면 마치 외국어 아닌가 착각할 것 같다.어링불은 포스코가 자리잡고 있는 옛 바닷가 넓은 모래밭과 그 일대를 지칭한다.우리 선조들의 혼이 서린 곳,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국 산업의 쌀을 쏟아내 경제를 일으킨 원동력을 만든 자리다.`두바퀴路` 첫 탐사를 하면서 어디를 처음으로 택할지 고민이 적잖았다. 회원들간 논의 끝에 그래도 포항의 역사가 서린 어링불이 채택됐다. 포항사람도 잘 모르는 그곳으로 출발“청소년과 함께 하는 자리니까 더 좋은 것 같아요”역사학자 이영희 미래창조아카데미 교수는 `두바퀴路`기획 의도를 듣고는 흔쾌히 동행에 동의했다. 젊은 층이 포항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면서….지난 23일, 청소년 기자단과 지역출신 대학교수, 화가, 작가, 무용가, 사진작가, 도예가, 국악인, 그리고 봉사클럽 회장들 등 이 사업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첫 탐방길.포항 오천 해병대 가는 길은 완연 봄이었다. 예년보다 3월 기온이 올라가서인지 노란 개나리가 곳곳에 선을 보이며 자태를 뽐냈다. 그 풍경 속에서의 노란 깃발을 단 자전거 대열도 그림은 괜찮았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포항 오천 해병대.간단한 신원조사 끝에 서문을 통과했다. 동행인들 중 누군가가 해병 창건 이래 민간 자전거 대열이 철통 경비대를 뚫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두바퀴路` 탐험대가 완만한 길을 따라 다다른 곳은 어링불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일월지(日月池)였다.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사단법인 문화와시민 박계현 이사장은 자전거를 타고 떠난 첫 탐험이 남다른 듯 감회에 젖었다. 그는 “청소년들과 자전거를 타고 포항 구석구석을 한번 다녀 보는 것을 그토록 원했는데 이제야 첫 발을 디뎠다”며 회원들을 얼싸안았다.포항이 낳은 역사학자 이영희 교수의 진면목은 여기서부터 빛났다. 이 교수는 청소년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갔다.“이곳을 알기 위해서는 신라 8대 아달라왕 즉위 4년인 서기 1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연오랑 세오녀가 도일(渡日), 즉 일본으로 가기 전이었지. 신라 석탈해왕의 후손인 연오는 이곳에서 세오가 사철을 녹여 만든 무쇠로 긴 칼을 만들었어. 그리고 모자반으로는 소금도 만들었지. 고대국가에서 `무쇠`와 `소금`은 권력의 상징이야. 형산강 모래에서 채취한 사철은 송진이 많은 적송 숯을 사용하여 무쇠라는 절대 권력의 도구로 탄생될 수 있었다고 보면 돼. 포항에 철이 생산되는 것이 어쩌면 필연이라 할 수 있어.”일월지의 유래를 잘도 풀어나가는 이 교수다. 특히 스토리 전개가 압권이다. 포항제철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사연“삼국유사에는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가는 통에 신라는 암흑천지가 되었다고 하고 있지. `제철공장`의 수장인 세오녀와 `단야공장`의 우두머리인 연오랑이 떠나면서 어링불 제철소의 불이 꺼졌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돼. 제철 기술자가 떠났으니 자연히 용광로 불빛으로 밝았던 몰개월(청림의 옛 지명, 뜻은 `모래[몰개] 위[우] 호수[얼]`라는 고어)은 어둠이 지배하게 되었을 테고. ”“삼국은 제철에서 태어난 정권이라 할 수 있어. 특히 제철은 국가를 일으키고 지켜나가는 역할을 톡톡히 했지. 삼국 중 신라는 대단한 제철기술을 지닌 국가였지. 그 때문에 결국엔 삼국통일을 했고. 제철이 삼국통일의 가장 큰 동력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지.”열강중인 이 교수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혔다.“용광로의 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적송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곳 어링불의 숲은 그 양을 충족시키지 못했지. 연오랑 세오녀가 왜(倭), 즉 일본으로 떠나간 것은 그곳에 나무가 풍요로웠기 때문이기도 하지. 당시의 정황을 추정해보면, 경주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포항 어링불을 무대로 한 세력다툼에서 종지부를 찍을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보여. 그것은 바로 `무쇠`였어.”“삼국유사에서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제사를 올렸더니 다시 밝아졌다는 기록은 불이 꺼진 제철소를 다시 일으킬 비법을 비단에 적어 전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 이후에 불리게 된 점을 기억해야 해. 따라서 연오랑세오녀가 일본으로 간 그 당시 왜(倭)는 고대국가로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고 짐작돼. 연오랑세오녀가 간 일본 땅은 영일만에서 직선거리로 가면 나오는 일본 큐슈지역 쯤 인 것 같아. 거기에는 `왕비의 섬`이라는 이름을 가진 섬이 있어. 제철기술을 가져간 연오랑세오녀가 그곳에서 왕이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어.”물론 이 교수의 강의는 확인할 길은 없다. 그래서 오늘도 역사학자들이 끊임없이 연구할 터. 한평생 연오랑세오녀를 연구해 온 노학자가 새삼 존경스럽다.민족시인의 시심을 자극하던 자취도일월지는 연오랑세오녀 외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시의 배경이 아닌가.눈앞에 바라보이는 동해바다가 새롭다.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이곳엔 만 평이나 되는 동양 최대인 삼륜포도원이 있었다한다. 안동이 고향인 민족시인 이육사는 1938년 여름, 몰개월에 사는 친구 집으로 요양을 왔고, 시인은 당시 포도밭이 자리한 일월지 주변과 영일만을 바라보며 광복을 염원하는 시 `청포도`를 지었다.“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중략)/아이야 우리 식탁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해와 달의 정기가 서린 일월지와 영일만에서 시인은 구국의 소망을 오롯이 시 속에 녹여냈다. 하필 다른 데도 아니고 이 곳 몰개월, 영일만에서 광복을 향한 열망과 확신을 마음에 새겼을까. 앞으로 `자전거 문화탐방`에서 두 바퀴를 저으며 우리 고장을 누빌 우리들이 풀어야 할 과제라는 것을 직감한다.현재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는 호미곶 해맞이광장에 위치해 있다. 하루빨리 일월지와 몰개월 포도원이 있던 곳으로 시비를 옮겼으면 좋을 듯 하다.일월지 둘레 길을 따라 걸으며 연오랑 세오녀와 정몽주, 이육사를 떠올린다. 흙바닥을 구르는 솔방울에서도, 담방담방 물비늘을 일렁거리게 하는 차가운 바람결에서도 포항 어링불의 문화와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대표집필=모성은 지방행정연수원 교수△문화특강=이영희 미래창조아카데미 교수△청소년기자단=강소리, 최민주, 방서영△집필지도=정혜 작가△사진촬영=안성용 사진작가△동행취재단=박계현, 권혁대, 이선덕, 임희도, 김효은, 박종일, 오기준△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협찬=포항녹색희망자전거사업단

2013-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