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하늘과 땅의 경계가 불분명한 그 곳에서 만난 어린 칭기즈칸

열 살이나 됐을까? 조그만 꼬마가 말을 다루는 솜씨가 놀라웠다. 초원 위에서 펼쳐지는 `아슬아슬한 서커스`라고 해도 좋을 듯했다. 동행한 몽골의 안내원이 “이곳에선 저 정도는 놀라운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애들이 말을 아주 잘 타요”라며 껄껄 웃었다.몽골의 하늘은 광활한 초원의 색깔을 닮았고, 몽골의 초원은 드넓은 하늘과 유사한 빛깔이다.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초원인지 그 경계가 흐려진다. 먼지 한 점 보이지 않는 청아한 날. 몽골의 풍경은 원시적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자신을 지켜보는 여행자들의 박수와 환호에 신이 났는지 말 위의 소년은 갈수록 고난도의 기술을 보여준다. 맞다. 저 아이는 몽골인이다. 혈관 속으로 칭기즈칸과 쿠빌라이칸의 피가 흐르는.독일에서 온 관광객의 팔에 올라앉아 매섭게 눈을 빛내던 독수리도 소년의 승마를 잠자코 지켜본다. 기자는 `어린 칭기즈칸`을 만난 기분이었다.몽골이 아시아에서 시작해 유럽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 원나라의 기병(騎兵)들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큰 덩치를 가진 유럽의 병사들이 긴 창을 휘둘러 몽골의 기병들을 제압하려 애썼지만, 말의 등과 배, 양 옆구리에 자유자재로 매달려 화살을 쏘아대는 신묘한(?) 기마술을 당할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지금 말에 오른 꼬마의 실력을 보니 당시 몽골 기병들의 말 다루는 기술이 어느 정도였을지 미루어 짐작됐다.거대한 제국을 호령했던 칭기즈칸은 유언까지 호방담대(豪放膽大)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황제는 “나는 천 년 후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왕들 위에 군림한 진짜 왕으로”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초원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만나는 여행몽골을 떠올릴 때면 칭기즈칸, 기병과 함께 광대한 초원으로 쏟아지던 빛이 선명하게 기억난다.어느 세상 봄볕이 그처럼 환하고 따스할 수 있을까. 상상을 뛰어넘는 추위로 인해 겨울엔 몽골을 찾는 관광객이 드물다. 하지만 반짝하는 짧은 봄과 여름엔 여행자들이 넘쳐난다.4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도착한 울란바토르(Ulan Bator) 국제공항. 한국인과 너무나 닮은 몽골인의 모습에 놀랐다.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한국 사람이고 몽골 사람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그리고 다음 날. 마주한 초원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다시 한 번 놀랐다. 깨끗하고 소박한 풍광.가슴 속 지저분한 욕망이 조용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희망과 꿈의 은유인 `봄`을 노래한 이성부(1942~2012)의 시가 귓전을 울렸다.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유유자적 세상을 떠도는 여행자에게 `다급한 사연`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저 `지금 이곳`을 즐기면 될 뿐.하지만 이성부의 시는 그런 여행자까지도 `두 팔을 벌려` 무언가를 기다리게 하는 드문 체험을 제공한다.조금 이상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몽골의 초원 풍경은 어떤 간절한 기다림이 마침내 해소된 듯한 느낌을 준다.사실 인간이란 매일 무언가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가. ▲`칭기즈칸 보드카`에 취한 흥겨운 밤 몽골로 떠난 여행은 여러 명의 시인과 소설가, 출판사 관계자들이 함께 했다. 한 차례의 세미나와 몽골 문인들과 함께 진행한 공식행사 몇 건이 있었으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기자와 동행자들은 대부분의 여유 시간을 울란바토르 시내를 배회하거나, 차를 타고 도시 외곽으로 나가 초원을 서성이며 보냈다.호기심 많은 이들은 수흐바토르 광장에서 몽골 역사에 관한 책을 읽거나, 자연사박물관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에서 학구열을 보여주는 이들은 적었다. 게다가 문인들은 너나없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양고기를 안주 삼아 보드카를 마셨다.몽골 사람들의 술 실력은 러시아인 못지않았다. 아마도 겨울이 길고 추운 탓일 것이다.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우리 일행과 함께 다닌 몽골의 문인들은 식사 때마다 보드카를 가져와 거푸 권했다. 보드카 병에는 칭기즈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냉혹하면서도 엄정해 보이는 표정이었다.보드카는 알코올 함량이 40%를 넘는 독주다. 향과 색이 없기에 과일주스나 탄산음료를 섞어 칵테일로 마시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몽골인들은 그걸 생수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보는 사람이 기가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니 기자 역시 몽골에서 생산된 칭기즈칸 보드카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러시아 보드카 `벨루가`가 부럽지 않았다.티끌 한 점 없는 몽골의 밤하늘에선 커다란 별들이 휘황하게 반짝였고, 이동식 천막인 게르에선 전통방식으로 요리하는 양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갔다. 거기에 보드카가 선물한 취흥까지 도도했으니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흥겨웠던 밤으로 돌아가고 싶다.몽골은…수도는 울란바토르공용어는 몽골어지만영어소통 가능 청년도 많아과묵하고 진중한 성격이나외부인에게 따뜻하고 친절아시아 중앙에 위치한 내륙 국가다.몽골이라는 나라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13세기 초 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Chingiz Khan)`이란 이름은 익숙할 것이다.거대한 땅을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동서양 여러 국가에 미친 사회·문화적 영향력은 상당했다. 제국이 사라진 후엔 남아있던 영토가 1688년 청나라에 복속됐다.독립은 1921년에 이뤄졌고, 이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힘입어서였다.면적은 156만4천116㎢이며 수도는 울란바토르. 국민의 대부분은 몽골족(95%)이고, 소수의 투르크족 등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공용어는 몽골어. 하지만, 울란바토르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종교는 라마교(90%)가 주류고 이슬람교(5%)를 믿는 이들이 일부 있다정치적으론 공화제를 택하고 있으며, 사용되는 화폐의 단위는 투그릭(Tugrik)이다. 100투그릭은 한국 돈 약 45원. 인구는 320만 명인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수도에 거주한다. 평균 수명은 67세.북서쪽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오래 전부터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고 러시아와 몽골의 혼혈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남동쪽에는 중국이 자리한다. 인구는 적고 국토는 넓다. 그렇기에 개발 가능성이 곳곳에 존재한다.옛 소련연방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됐다.하지만 21세기 들어 경제난 해결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국제기구 가입과 개방외교,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도 동시에 추진했다.몽골의 남성들은 과묵하고 행동이 진중하다. 그러나 외부인을 따스하게 맞이하는 유목민 특유의 친절함도 지녔다.몽골에선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체험과 드라마틱한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 모험심 가득한 여행자라면 몽골 사람들의 이동식 텐트인 `게르`에서 자보기를 권한다. 분명 드물고 유쾌한 경험이 될 것이다. `고원국가`이기도 한 몽골은 국토 전체의 해발 고도가 1천600m에 이른다.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남부의 땅 중 30% 가량은 고비사막(Gobbi Desert)이다. 유목민들은 이 척박한 땅에서도 양과 낙타 등을 기르며 생활한다.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는 몽골은 혹한으로도 유명하다. 여름은 습기가 적어 무더위가 덜하지만 겨울 추위는 가혹할 정도다.울란바토르의 1월 기온은 영하 30도 이하로도 내려간다. 한국의 봄 날씨와 비슷한 6~8월이 관광 성수기.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이 기간에 몽골을 찾는다.글/홍성식기자사진제공/구창웅

2018-03-30

삿포로 투명한 눈 숲에서 떠올린 푸르다 못해 시린 첫사랑의 기억

홋카이도 여행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순백의 눈에 뒤덮인 아름다운 자연과의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드넓은 호수 너머로 펼쳐진 설산(雪山)과 어두운 하늘에서 보석처럼 뿌려지는 눈발. 쌓인 눈 위를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들…. 새하얀 눈이 주는 정감은 홋카이도의 시골마을과 현대화된 도시 삿포로가 다르지 않았다.홋카이도를 여행했을 때 동행한 엄마가 잠들면 홀로 나와 눈 쌓인 거리를 걷는 일이 잦았다. 늦은 밤. 이국의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누구라도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지나온 시간 또한 동시에 아련해진다.그 색채와 질감으로 인해 `눈`은 첫사랑의 은유나 상징으로 곧잘 사용됐다. 특히 시와 소설 등의 문학에서 그랬다. 기자를 포함한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첫사랑의 환희와 아픔.어지간한 초등학생의 키보다 높이 쌓인 삿포로의 눈을 보며 열여덟 문학청년 시절과 첫사랑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외로운 여행자가 겪어야 할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었다. ▲ 문학청년 시절의 꿈과 사랑을 돌아보다`첫사랑`.이 단어만큼 사람의 가슴을 크게 흔드는 게 있을까? 인간의 사랑 안에는 동물의 종족보존 본능과는 구별되는 희생과 배려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이 인간과 여타의 동물을 구분하는 하나의 요소로 적용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게다가 그것이 `처음`이라는 순수성과 순정함을 가질 경우 첫사랑이라 이름 붙여 그 아름다움에 날개를 달아줬다.`처음`이라는 말은 얼마나 큰 기대감과 희망을 가지게 하는 단어인가. 그런 이유에선지 첫사랑은 문학의 소재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용돼왔고 요즘도 마찬가지다.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리하여 꿈과 희망이 배반 당하는 좌절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누구나 예술가를 꿈꾸던 청년시절. 우리가 읽었던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의 `첫사랑`은 그 시절 고통스런 세상을 견디게 해준 삶의 방부제였다.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를 보며 아름다운 소녀가 은둔한 고성(古城)으로 잠시의 주저도 없이 달려가 맑고 투명한 뺨을 가진 그녀와 포옹하는 꿈을 꾸지 않은 남학생이 있을까.또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처럼 멋들어진 귀족 브론스키 백작과의 비극적인 로맨스를 동경하지 않은 여고생도 드물 것이다.유부녀인 로테를 사랑한 베르테르의 눈물과 죽음을 보며 로테의 남편 알베르트가 미워졌던 건 비단 기자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는 그런 때였다.삿포로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송이는 바로 이런 문학청년 시절을 돌아보게 했다. 아득하고 서럽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한없이 그리운 그 시간들. ▲ 세상 모든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눈으로 뒤덮인 도야 호수 주변을 산책하면서는 “어찌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그 위대성을 찬양하는 작품이 외국에만 있을까”라는 혼잣말을 했다.한국의 시인과 소설가들에게도 첫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문학의 소재였고 화두였다. 본시 문학의 본령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다름없다. 그런 이유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학에는 형태를 달리 하는 사랑이 담겨있다. 그러니 사랑이 주제, 혹은 소재로 사용된 작품 모두를 얘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소설가 정도상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각기 다른 사회적 갈등에 직면한 인간의 상황을 밀도감 있게 묘사했다. 그의 소설 중 독특하게 연애소설로 분류되는 것이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다.술과 환각제에 취해 인생을 낭비하던 고등학생 준석이 순정한 영혼을 가진 여자친구 채옥을 통해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란 말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낸 작품.불량학생 준석이 첫사랑을 시작하며 삶과 사회에 눈 떠가는 과정은 당시 10대 후반이던 기자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다. 그 작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준석과 채옥의 입맞춤에선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지.한국 문단 안팎에서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평가받는 성석제의 `첫사랑` 역시 잊을 수 없는 소설이다. 거대 도시의 변두리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두 남자 중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겪게 되는 사춘기의 통과의례와 생의 비의(悲意)를 담아낸 이 작품은 연애소설인 동시에 빼어난 성장소설이기도 하다.어서 빨리 어른이 돼 절망과 눈물이 반복되는 고향을 떠나 큰 도시로 가고 싶은 소년들. 아픔만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그들을 해방시킨 건 바로 사랑이었고, 둘의 화해와 포옹은 두 소년 모두를 그들이 상정한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게 해준다.예술적 관점에서 볼 때 이야기 속 그들이 성공한 어른으로 자랐건 절망한 폐인으로 살게 됐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둘이 겪은 `첫사랑의 기억`만으로도 소년들은 아주 오래 순정한 아이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 ▲ 설경(雪景) 속에서 한 줄의 문장을 읊조리다소설 속을 헤매다 현실로 돌아오니 기자는 눈 내리는 홋카이도의 풍경 속에 홀로 서있었다. 지나온 날도, 살아내야 할 오늘도, 견딜 수밖에 도리 없는 내일까지가 막막하게 느껴졌다.그 허허로움 탓이었을까? 아래와 같은 정도상의 소설 속 문장이 눈앞을 스쳐갔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안에서 안타깝게 놓쳐버린 첫사랑이 그립다. 첫사랑의 기억을 돌려준 삿포로의 설경 또한 그립다.“첫사랑은 자칫 시시하고 유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시하고 유치한 첫사랑을 통해 시시하고 유치한 세상에 눈뜨게 되고, 시시하고 유치한 세상에 눈뜨고 나면 이 세상에 시시하고 유치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진실에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훗카이도의 진주`로 불리는 삿포로는…시내를 운행하는 조그맣고 예쁜 전철, 거리를 활기차게 만드는 세련된 옷차림의 젊은이들, 일본과 러시아 사이 차가운 바다 오호츠크에서 잡아 올린 커다란 대게, 쏟아지는 눈 아래서 뛰노는 아이들…. 삿포로는 매력적인 동양의 여행지임이 분명하다. 이시카리 평야와 도요히라 강 일대에 만들어진 이 도시는 여름이 한창인 8월에도 평균기온이 영상 21도 정도로 매우 쾌적하다.겨울은 산악지대에 3m 이상의 눈이 쌓여 낭만을 제공한다. 물론, 스키와 스노보드 등의 레포츠를 즐기는 이들도 흔하다.삿포로가 본격적인 도시 건설을 시작한 시기는 18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계획도시였고, 시가지는 바둑판처럼 구획별로 잘 정돈됐다. 1886년 도청이 설치되면서 삿포로는 홋카이도의 행정 중심지가 된다.일본 특유의 조용함과 친절이 곳곳에서 확인되는 삿포로는 돼지고기와 닭 뼈, 각종 해산물과 채소로 맛을 낸 국물이 일품인 일본식 라면으로도 유명하다. 시내에는 문을 연지 50~60년이 넘는 오래된 라면가게들이 적지 않다.1972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이기도 한 삿포로는 일찍 지하철을 완공했고, 세이칸터널의 개통과 치토세공항의 개항으로 교통의 요충지가 됐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다수지만, 도심에서 벗어난 주변 지역은 농업과 축산업도 발달했다. 청정지역에서 생산되는 맥주와 우유가 맛있고, 식품가공업과 인쇄·출판업 등도 삿포로의 경제를 탄탄하게 만들어준 효자산업들이다.홋카이도의 최대 도시인 삿포로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지역으로도 손꼽힌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에는 최고의 설경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해마다 수많은 나라의 관광객이 몰리는 `눈 축제`도 빼놓을 수 없는 삿포로의 자랑이다. 많은 이들이 “모이와산 로프웨이 케이블카를 타고 삿포로 밤 풍경을 내려다보는 건 놀랍고 행복한 경험”이라고 말한다.삿포로를 찾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근 도시 오타루와 홋카이도대학,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대회가 열린 삿포로돔과 울창한 원시림이 반겨주는 조잔케이 온천을 찾아 일상의 고민과 힘겨움을 잠시 내려두고 휴양과 자유를 만끽한다.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8-03-16

기형도의 시를 떠올리며 홋카이도를 걷다

뿔 달린 고양이만큼이나 보기 힘든 게 `엄마에게 다정다감한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찍부터 시작한 객지살이. 엄마는 1년 중 하루도 아들을 떠올리지 않는 날이 없었겠지만, 아들은 1년 내내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보여주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식구에 대한 애정`이라고 믿었다.기자는 살가운 아들 혹은,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남자와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다. 그래서다. 48년 가까이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애정 표현을 한 기억이 없다. 서글프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10년 전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엄마는 부쩍 외로워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힘내고 건강 챙기시라”는 따뜻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기가 쑥스러웠다.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2~3년에 한 번쯤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삿포로와 도야 호수, 오타루 운하와 노보리베츠 온천을 찾아 떠난 일본 홋카이도 여행은 엄마와 기자가 함께 한 네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벗어나 엄마와 함께…태국의 푸켓, 필리핀의 보라카이, 중국의 청도를 향했던 이전 여행들은 자랑할 게 별로 없는 엄마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가 됐다.여행 일정을 알려줄 때부터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엄마의 웃는 얼굴을 내내 볼 수 있다는 건 효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아들의 즐거움이었다.`홀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이 기자의 방랑일지에 처음 새겨진 건 불과 9년 전. 그즈음 가슴을 치며 읽었던 시 한 편이 있다. 초식동물의 예민한 영혼을 가진 채 육식동물이 지배하는 세상을 겨우겨우 견디다 29살 젊은 나이에 사라진 요절 시인 기형도(1960~1989)의 `엄마 걱정`. 이런 노래다.열무 삼십 단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 옛날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찬밥처럼 방에 담겨` 시장 간 엄마의 귀가를 애타게 기다리던 어린 아들은 자라서 `엄마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된다. 그게 세상 이치다. 그렇다면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는` 시간은 누구에게 더 길까? 이는 답이 너무나 빤한 질문이다. 아들이 엄마를 기다리던 시간은 엄마가 삶 내내 아들을 기다리는 시간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 수준일 터. 시인 기형도의 엄마나 기자의 엄마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 자명한 사실이 시를 읽는 세상 모든 아들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이쯤 되면 기자의 여행 패턴에 `가끔은 엄마와 같이 떠난다`는 문장을 추가시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을 기다리게 하는 아들이 눈앞에 함께 있기에 기다릴 필요가 없는 시간은 세상의 엄마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그게 짧은 여행의 단 며칠간일지라도. ▲구운 옥수수를 먹으며 눈 내리는 거리를온천욕과 녹음 우거진 숲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홋카이도는 맞춤한 여행지였다.도야 호수 주변을 산책하면서, 삿포로 시내를 목적 없이 돌아다니면서, 오타루 운하에서 배를 타면서, 심지어는 지옥 계곡의 지독한 유황 냄새 속에서도 엄마는 내내 웃었다. 웃음으로 생겨날 주름 걱정도 하지 않고. 아들과 마주 앉아 먹는 모든 음식이 다 맛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육류와 밀가루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나이임에도 돼지 뼈로 육수를 내고 목살을 고명으로 올린 일본식 라면의 국물까지 남기지 않았고, 고추냉이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초밥집을 향하는 아들의 발걸음을 말리지 않았다.홋카이도의 차가운 바다 속에서 맛있게 살을 찌운 대게를 먹으러 가서는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 몫의 게살을 아들 접시로 옮겨주느라 바빴고, 거리를 산책하다가 발견한 노점의 옥수수 구이를 사 들고는 열두 살 아이처럼 즐거워했다.눈 내린 이국(異國)의 거리를 자식과 더불어 걸어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우리들의 엄마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기자는 세상사를 잘 모르고 살아온 듯하다. 홋카이도 여행 둘째 날이었던가. 호숫가를 걷던 엄마는 다리가 아프다며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마침 근처에 긴 나무 의자가 있어 거기 앉았다. 뒤에서 바라본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작고 가냘퍼 보였다.그 순간 기형도의 시가 다시 떠올랐고, 앞으로는 `엄마의 걱정`이 아닌 `엄마의 위로`가 되는 아들로 살고 싶어졌다. 지천명(知天命)이 가까워오니 이제 겨우 철이 들려는 걸까? 훗카이도를 여행한다면 이곳은 꼭!아이들 키 높이만큼 쌓여있는 새하얀 눈, 맵고 차가운 바람이 불지만 한없이 깨끗한 공기, 여기에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주는 온천. 홋카이도는 겨울에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해마다 수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눈축제로 유명한 삿포로와 곳곳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온천지대는 홋카이도의 자랑이다. 길고 오래 지속되는 겨울 추위를 여행자들이 좋아할만한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홋카이도의 저력.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에 더해 생선과 돼지고기, 유제품과 채소를 재료로 만든 각종 요리는 홋카이도의 매력을 높이고 있다. 게다가 한국과 멀지 않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재미와 소소한 감동이 있는 여행지 홋카이도로 떠날 계획을 세운 사람들이라면 아래 추천하는 곳은 빼놓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유황 냄새 진하게 풍겨오는 `지옥 계곡``지옥 계곡`은 홋카이도에서 손꼽히는 유명 온천마을 노보리베츠에 인접해 있다. 홋카이도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이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는 내내 계란이 썩으면서 내는 것 같은 유황 냄새가 풍겨왔다.지옥 계곡이란 명칭은 땅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와 그 냄새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이곳은 1만여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분화구인데, 일대에선 분당 수천 리터의 온천수가 솟아난다.그다지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나지만 지옥 계곡의 온천은 각종 피부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연중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사파이어 색채로 빛나는 `도야 호수`짙푸른 푸른빛으로 여행자를 반기는 `도야 호수`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홋카이도의 숨겨진 관광명소다.삿포로에서 남서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야 호수는 백두산 천지와 같은 칼데라호(화산 폭발로 주위가 붕괴돼 생성된 호수)다.주변은 눈이 쌓여 있지만 호수 자체는 어지간한 추위에는 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둘레가 43㎞에 이르고 가장 깊은 곳은 수심이 179m다. 날씨가 좋아서 물결이 잠잠한 날은 유람선이 운행된다. 배에 올라 바라보는 도야 호수의 경관은 세상 풍경에 무심한 사람들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 `오타루 운하`홋카이도 서쪽에 자리한 `오타루 운하`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오래된 건물 사이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길은 한 편의 서정시를 떠올리게 한다. 계절에 상관없이 많은 여행자들이 상념에 잠긴 채 운하 주변을 산책한다.오타루는 본래 홋카이도의 무역항이었다. 운하는 100여 년 전 몰려드는 선박들의 화물 하선작업을 위해 만들어졌다. `경제적 필요성`으로 건설된 것이 이제는 홋카이도를 상징하는 `문화상품`이 된 것이다. 오타루 운하 인근은 야경도 아름답다. 창고를 리모델링한 레스토랑에선 연인들이 낭만적인 저녁식사를 즐기기도 한다.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8-02-09

온천탕에 시간을 내려놓은 엄마의 발그레한 뺨… 그녀는 예뻤다

일흔 살 엄마의 행적이 3시간 넘게 묘연했다.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노인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찾아나서야 하나,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전의 상황은 이랬다.“휴가를 내고 함께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결정을 전하자 엄마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어디서 들은 것인지 “거기는 온천이 유명하다던데 가면 실컷 해야지”라며 손뼉까지 쳤다.아침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했기에 새벽에 일어났다. 빠진 짐이 없는지 살펴보고, 며칠 비울 집의 문단속을 하면서도 노인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김해공항을 출발한 항공기가 3시간 남짓을 날아 홋카이도 치토세공항에 도착한 것은 점심을 먹기 전이었다. 일본 땅에 발을 딛자마자 또 물어본다.“오늘 밤엔 온천장이 있는 숙소에서 자는 것 맞지?”가리비와 모시조개가 앙증맞게 올라앉은 솥밥을 주문한 엄마는 평소와 달리 맞은편에 앉아 낮술을 마시는 아들에게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아주 좋다는 증거였다.기자 역시 깔끔한 일본 요리와 함께 마시는 알코올 함량 45%의 고구마소주가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로 유쾌했다.오후에는 풍광 좋은 호숫가와 화산지대를 돌아봤다.홋카이도의 자연은 어떤 인공조미료도 넣지 않고 끓인 뭇국처럼 소박하고 담백했다. 하늘로 뻗은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새들이 날아다녔다.새파란 하늘 아래서 사진을 찍어주며 엄마와 낯선 나라에서의 평화로운 산책을 즐겼다. 그 사이사이에 또 물어본다.“온천호텔에는 언제 가는 거냐?”유명한 온천마을 노보리베츠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건 오후 5시쯤.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가방을 침대에 대충 던져둔 엄마는 온천욕장부터 가자고 했다. 저녁을 먹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으니 그래도 될 것 같았다.여자 온천욕장 입구에서 “우리 방 번호는 503호”라고 한 번 더 일러줬다. 목욕을 먼저 마친 사람이 호텔 카운터에 맡겨놓은 열쇠를 찾아 방에 가있기로 약속했다.숙소의 규모가 커서 여자 욕장에서 남자 욕장까지가 꽤 멀었다. ▲자그마치 3시간 30분 동안 온천욕을 한 엄마는…온천장의 시설은 훌륭했다. 탈의실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고, 실내욕장과 노천욕장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독특했다.남자 목욕탕에서 사용한 수건이나 가운을 정리하는 직원이 여자라는 건 좀 놀라웠다.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벌거벗은 남자들 곁을 오가는 젊은 여자를 보니 일본과 한국의 문화 차이가 느껴졌다. 홋카이도의 다른 온천욕장 탈의실도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궁금했다. 어쨌건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30여 분 만에 목욕을 끝냈다. 개운해진 기분으로 열쇠를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그때가 대략 6시경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도록 엄마가 오지 않았다. 배는 고파오고, 도대체 어딜 간 것인지 궁금증은 커져갔다.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옷을 챙겨 입었다. 멀리 홋카이도 시골마을까지 와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아닌지, 그도 아니면 목욕탕에서 쓰러진 것은 아닌지 엄마 걱정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그런데 이건 뭔가? 행방을 찾으려고 막 숙소를 나서려는 순간 엄마가 문을 두드렸다. 발갛게 익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여기 온천은 물이 정말 좋네”라는 노인. 실내와 노천을 오가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목욕을 자그마치 3시간 30분이나 한단 말인가.엄마를 기다리며 마음 졸인 걸 떠올리면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지만, 천진난만하게 얼굴에 로션을 찍어 바르는 노인을 바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배는 안 고픕니까? 저녁 먹으러 갑시다.” ▲호텔 로비에서 시인 백기행을 떠올리다생선구이 한 토막과 따끈한 국물, 거기에 정갈한 반찬 몇 가지로 차려진 일본 가정식요리는 맛있었다.뜨거운 청주 한 병을 곁들여 저녁을 해결했다. 익숙 하지 않은 음식임에도 엄마 역시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홋카이도 외곽 온천마을의 밤은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다.창밖으로 부는 바람 소리마저 쓸쓸하게 느껴졌다.여행 첫날의 피로감 탓인지 엄마는 밤 10시도 되지 않았는데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숨소리도 고르게 잠들어 있었다.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태국이나 베트남이라면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을 시간인데 홋카이도는 달랐다.로비마저 괴괴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자연스레 이방(異邦)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을 빼어난 시어(詩語)로 노래한 백기행(1912~1996)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몇 구절이 떠올랐다.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익숙한 생활의 공간을 떠나 낯선 나라로 향하는 사람들은 크건 작건 `소설 같은 로맨스`를 꿈꾸게 된다. 기자라고 다를 리 없다. 홋카이도 여행에서 `나타샤` 같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꿈이었다.`깨어진 꿈`이 서글퍼 홀로 호텔 로비 안락의자에 앉아 맥주 몇 병을 마셨다. 나타샤도 없고 당나귀도 보이지 않는 심심한, 너무나도 심심한 홋카이도의 밤이었다. 홋카이도는 어떤 곳일까세계에서 21번째로 큰 섬`눈과 온천의 왕국` 불려중심도시 삿포로도 매력2월 초 삿포로 눈축제 볼만북해도(北海道)로도 불리는 홋카이도는 일본 최북단에 위치했다.중심 도시는 도청 소재지인 삿포로. 홋카이도라는 명칭은 일본의 옛 행정구역인 오기칠도(五畿七道)에서 따왔다.일본에서 혼슈 다음으로 큰 섬이고 세계에서 21번째로 큰 섬이다.북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에 접해있고 동쪽엔 태평양이 있다.원래는 아이누족(族)을 비롯해 오로크족, 니브흐족, 에벤크족 등의 거주지였다. 일본인들이 대거 옮겨와 살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다. 홋카이도는 `눈과 온천의 왕국`으로 불리며 동서양의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산지에서 동해 쪽으로 데시오강(江)과 이시카리강이 흘러 북쪽 해안부에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남서쪽은 화산대가 있는 산악지형이다.대부분의 지역이 냉대기후를 보이며 내륙은 일교차가 크다.동쪽 지역은 겨울에 많은 양의 눈이 내린다. 태평양에 접한 지역의 `여름 바다안개`도 유명하다.모험심 가득한 여행자들은 오호츠크해 연안으로 가서 유빙(流氷)을 관찰하기도 한다.아이누족이 살고 있던 시대엔 `에조치`로 불렸다.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탄광과 광산 개발을 위해 수십 만 명의 한국인과 중국인을 강제로 끌려왔던 비극이 공간이기도 하다.쌀과 콩, 감자와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고 사탕무, 박하, 아스파라거스 등의 작물도 재배된다.낙농업이 발달해 있어 유제품도 맛있다. 기후의 특성상 가문비나무, 졸참나무, 자작나무 등의 천연림이 풍부하다.오래 전부터 홋카이도 인근 바다는 세계적인 어장이었다.남획 등으로 인해 현재는 어획량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지만 명태와 오징어, 연어와 꽁치 등이 적지 않게 잡힌다. 특히 홋카이도 근해에서 잡히는 게가 맛있다. 아칸 호수, 다이세쓰 산, 시코쓰 호수, 도야 호수 등이 위치한 곳은 국립공원이다. 이 지역에는 온천장, 골프장, 스키장 등이 있어 계절에 상관없이 다수의 관광객들이 몰려든다.홋카이도의 중심 도시 삿포로는 여행자들을 매료시킨다.전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 인프라가 좋고, 동서와 남북을 가로지르는 지하철도 있다.도시 중앙부는 깔끔하게 정리된 가로수와 화단이 사람들을 반긴다. 오도리공원 일대는 일 년 내내 관광객으로 붐빈다. 1878년 설치된 시계탑과 옛 도청청사,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린 축구장 삿포로돔 등도 볼거리다.1972년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홋카이도에서 관광객들은 회와 초밥, 게찜과 일본식 라면 등을 즐긴다. 해마다 2월 초가 되면 독특한 형상의 얼음 조각들이 전시되는 `삿포로 눈축제`가 열린다.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8-02-02

`비극`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섬 오키나와

열대의 거리를 한가롭게 오가는 사람들,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며 재잘대는 새들, 한적하고 평화로운 바닷가 풍광만을 보자면 오키나와는 한없이 아름다운 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기에도 비극의 역사는 있었다.태평양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봄.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에선 2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그중 15만 명은 이른바 `천황의 군대(皇軍)`도 아니었고 `대동아공영`과 `빛나는 일본제국 건설`에 관해 아는 바 없던 섬의 무지렁이들이었다. 미국 전투기의 폭격이 이어지던 그 당시.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상륙한 미군에 잡히면 남자들은 손발이 잘리고 여자들은 윤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끔찍한 이야기. 패전을 예감하고 있던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자폭용 수류탄을 나눠줬다고 한다.폭격을 피해 산으로 숨어든 오키나와 주민들은 수류탄과 총알이 모자라면 몽둥이와 곡괭이를 이용해 딸과 아내를 죽였다. 자신이 미국 군인에게 살해당한 후 식구가 겪을 모욕을 미리 방지하자는 차원에서였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광기`에 가까웠다. 전쟁이 부른 아비규환. 그때 오키나와는 지옥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 못할 것은 당시 섬에 주둔한 일본군의 태도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중국, 한국, 심지어 저 멀리 미얀마와 인도네시아에서까지 양민들을 개나 돼지처럼 도륙한 일왕 히로히토 휘하 군인들 말이다. 오키나와가 점령되고 3주 후쯤 미군 사령부는 수 km에 이르는 비밀 지하기지를 발견한다. 아…, 거기에 찾은 건 일본군 4000여 명의 시체였다. 장교들은 할복(割腹) 했고 사병들은 서로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위. 수천 구의 시체가 동굴 속에서 썩어가는 냄새를 상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집단자살이었다. 자신들의 왕을 위해 자랑스럽고 명예롭게 목숨을 끊자는 이른바 `옥쇄(玉碎)`였단다.그 이야기를 들은 날. 기자는 우리의 역사를 떠올렸다. 그 옛날 계백이 이끌던 백제의 5천 결사대는 5만 명 당나라·신라 연합군에 대항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힘을 다해 싸우다 죽는다. 전쟁에 임하는 군인의 태도는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백제 결사대를 대입해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스스로 죽을 용기`를 가진 일본군 4천 명이면 미군 4만 명과 맞붙었을 것인데. 되짚어 생각해봐도 이른바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도대체 뭔지를 고민하게 된다.어쨌건 그 `역사적 비극의 현장`은 현재 `네이비 언더그라운드 파크(Navy Underground Park)`로 이름 붙여져 관광객을 받고 있다. 전시된 죽음이라니…. 이것 또한 아이러닉하다. ▲ 오키나와의 꽃과 사람들유쾌하지 않은 말이 길어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키나와는 위에 서술된 것과 같은 `비극`보다는 `즐거움`과 `따스함`이 더 많이 발견되는 여행지다.“실례합니다”와 “고맙습니다”란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 그들의 친절과 웃음은 낯선 곳을 찾은 관광객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하다.나하시(市) 중심가인 국제거리. 그곳 골목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동갑내기 사내를 만났다. 오리온 맥주를 사이에 두고 더듬더듬 영어로 나눈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그의 고향 사랑은 유별나다 싶을 정도라 부럽기까지 했다.프랑스의 시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전 세계를 타향으로 느끼는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이라 말했지만, 그건 위대한 작가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고 보통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돌아가 쉴 수 있는 모성의 품 같은 곳이 아닌가.오키나와를 떠나오던 날 예상치 않게 들른 미에바시역(驛) 근처 선술집의 주인아주머니도 기억난다. “당신, 장개석(蔣介石)과 닮았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기자를 당황하게 했던.동유럽을 여행할 때 김정일과 반기문을 닮았다는 말을 듣긴 했다. 백인들은 동양인의 얼굴 특성을 정확히 구분해내지 못하니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뜬금없이 타이완 총통을 닮았다니….어쨌건 그 술집에서 맛본 선어회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아주머니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부적(符籍)까지 선물했다.이들만이 아니다. 해변에서 만난 안전요원과 길을 물었을 때 친절하게 안내해준 백화점 점원과 여대생, 전통축제를 즐기던 노인, 거기에 말도 통하지 않는 기자를 앉히고 정성스레 이발을 해준 미용실의 헤어 디자이너까지 오키나와에서 만난 이들은 그곳 날씨처럼 따스한 가슴을 지닌 사람들이었다.한국과는 기후가 판이했기에 오키나와엔 처음 보는 꽃들도 많았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웠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열대의 꽃을 닮았다. 친절과 상냥함의 정점. 만약 기자가 아직도 오키나와를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건 거기서 만난 사람과 꽃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남은 이야기 몇 가지오키나와의 바다와 술, 음식과 사람, 꽃 이야기를 하느라 빠뜨린 것이 적지 않다.길거리의 별미 타코야키(문어풀빵), 국제거리를 산책하다 만난 전위적인(?) 패션의 학생과 꼬마들, 오키나와 주민들의 `식량·부식창고`라고 불릴만한 마키시 시장의 터줏대감 할머니들.3박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오키나와 여행은 작지 않은 즐거움을 준 것이 분명하다. 다녀온 이후 오키나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영화 `행복을 기다리며`와 `눈물이 주룩주룩`까지 찾아봤을 정도니까.다시 찾아온 혹한이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하는 요즈음. `일본의 열대천국` 오키나와가 그립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진미(眞味)“당신이 먹는 음식을 알려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다”라고 말한 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가. 각각의 사람이 즐기는 요리는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사람의 계급까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집에 머무를 때나 여행을 떠나 길 위에 있을 때나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신의 좋아하고 즐기는 음식을 찾게 되는 게 인지상정.하지만, 개인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꼭 찾게 되는 요리도 있다. 이탈리아에 가서 피자를 먹지 않는다거나, 동남아시아 여행에서 싱싱한 가재와 새우를 멀리한다면 그건 서글픈 일이 아닐까.남국의 정열이 가득한 오키나와 역시 `빼놓지 않고 맛봐야 할 것들`이 있다.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국제거리를 걷다가, 혹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호젓한 동네를 헤매다가 들른 식당에서 혀끝을 자극하는 맛있는 선어회(鮮魚膾)와 따끈한 국물이 “바로 이 맛이야!”라는 감탄사를 부르는 면(麵) 요리와 조우하는 것은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 숙성된 다랑어의 감칠맛… 국제거리 선술집참치는 이제 한국에서 대중화된 생선이다. 1980~90년대엔 조그만 캔에 담긴 통조림으로 맛보던 것을 이제는 일정한 값을 치르면 무한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남태평양이나 일본 근해에서 잡힌 참치를 안주로 판매하는 술집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참치의 다른 이름인 다랑어는 해동과 숙성 과정에서 맛이 판가름 난다. 식당 주인의 축적된 노하우와 실력이 중요한 생선이다. 그래서 참치 맛을 좀 안다는 사람은 늘 다니는 참치 요릿집 외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오키나와에 도착한 이튿날. 한적한 골목을 걷다가 지긋한 중년의 사내들이 모여 앉은 걸 보고는 망설이지 않고 조그만 선술집에 들어갔다. 현지인들이 많다면 그 가게는 `지역 맛집`일 가능성이 높은 법. 기자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 주문한 다랑어회는 실망을 시키지 않았다.한 사람이 먹기에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양을 담은 접시. 어떤 방식으로 숙성을 한 것인지 껍질은 쫄깃했고 뱃살은 부드러웠으며 등살은 담백했다. 함께 들이켠 일본 청주가 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다른 손님들이 보건 말건 연거푸 세 접시를 먹었다. ◆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돼지고기… 독특한 국수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따끈한 국물을 싫어할 리 없다. 기자 역시 그런 모주꾼 중 하나다. 여행지에서는 가벼워진 마음과 홀가분함으로 인해 과음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날이면 자연스레 국물을 찾게 된다.별 기대 없이 불쑥 찾은 숙소 인근 국수집. 어떤 향신료를 넣어서 얼마나 삶았는지 입에 넣자마자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돼지고기 고명의 국수가 기가 막혔다.국물 맛은 당연히 좋았고 면발 또한 쫄깃하고 탱글탱글. 이름이 궁금했다. 식당 주인이 “오키나와 소바”라고 웃으며 알려줬다. 요즘도 숙취에 시달리는 아침이면 이 국수가 한없이 그립다.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조경국

2018-01-26

생선요리 강국이지만 스테이크가 더 맛있던 오키나와

오키나와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전엔 `류큐`라는 이름의 독립적인 왕국으로 존재했던 섬이다.또한, 세계 제2차대전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오랜 세월 이곳에 주둔한 미국 군대의 영향 탓인지 `생선요리의 강국`이라 불리는 일본이면서도 회보다 스테이크가 더 맛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들려오는 섬.한국 사람들이 제주도를 최고의 휴양지로 손꼽듯 오키나와는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내 여행지`다.그렇기에 외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하는 국제선공항보다 일본 각 지역을 오가는 비행기의 이·착륙지인 국내선공항이 더 크다. 이채롭고 재밌는 풍경이었다.최초의 한글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율도국`이 바로 오키나와라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풍문이다. ▲ 공항 검색대에서 환한 웃음과 만나다“절대다수의 일본인은 친절함이 몸에 배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입에 발린 수사가 아니란 걸 오키나와 국제선공항에서부터 확인했다. 기자의 조그만 여행 가방을 본 출입국사무소 보안검색원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3박4일 놀러온 것 치고는 가방이 너무 작네요.” 사실 그렇게 보일만도 했다. 중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작은 백팩 하나가 짐의 전부였으니. 그걸 재빨리 알아보고는 일본인 특유의 영어 발음으로 긴장해 있을 외국 여행자를 반기는 그들의 친절이 보기 좋았다.대중교통도 나쁘지 않았다. 오키나와 공항을 나서니 바로 근처에 시내로 향하는 모노레일(지상철)이 보였다. 그 덕분에 숙소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호텔이 보였다. 유럽이나 한국의 숙소와 비교하자면 보잘 것 없는 방 크기. 하지만, 필요한 것은 다 있고 편의성에 있어서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오키나와의 호텔.이곳이 과시보다는 실속 위주의 생활방식을 지향하는 일본임을 증명하듯 숙소는 정말이지 딱 필요한 것만 갖춘, 그러면서도 불편함을 찾아보기 힘든 환경이었다.별반 든 게 없는 작은 가방이니 그걸 풀고 정리하고 할 것도 업었다. 짐을 던져두고 기대했던 `오키나와 여행`에 돌입했다. 다음은 기자가 `탐구-체감-분석`한 오키나와의 면면들이다. ▲ 깨끗하고 소박한 오키나와의 해변사실 열대의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건, 사파이어빛 그득한 바다와 만나러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넘실대는 파도로 아름다운 태평양 가운데 자리한 오키나와. 당연지사 산호가 부서져 형성된 새하얀 모래밭과 푸른색 잉크를 뿌려놓은 듯한 바다를 기대했다.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인도 서남부 아라비아해와 태국 푸켓에서 바라본 안다만(Andaman Sea) 같은 장엄함과 매혹은 오키나와 해변엔 없었다. 시내에서 꽤 먼 거리를 달려야 만날 수 있는 `만좌모` 정도를 제외한다면.나미노우에 해변과 이케이 해변은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된 휴양지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인도나 태국의 바닷가에 비해 그 규모가 터무니없이 작고 평범했다.그렇다고 태평양 푸른 바다와 만난 감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는 품에 간직한 바다보다 해변을 `찾아가는 길`이 훨씬 더 매력적인 곳이다.이케이 해변으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나하 시내를 출발했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거짓말처럼 한적한 시골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선명한 녹색과 파란색으로 채색한 듯 아름다운 바다와 마을은 콘크리트 건물에 지친 여행자의 눈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거리는 방금 전 비질한 것처럼 어느 곳 할 것 없이 깨끗했다.거기에다 해변에서 가까운 도로를 지날 땐 한국에선 만나보기 힘든 맹그로브(Mangrove·열대 해변이나 하구의 습지에서 자라는 관목)까지 보인다. 낯선 곳에서 만난 이국적인 풍경이 기자가 일상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해줬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키나와 해변엔 드라마틱한 재미는 없다. 하지만, 자그마한 비치에 이르는 길을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놓은 주민들의 정성을 발견하는 소소한 기쁨은 넘쳐난다. 극적인 재미와 아기자기한 아름다움 중 어떤 것이 좋다고 느낄지? 이는 여행자의 취향과 지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즐거움을 더해준 오키나와의 술과 요리듣던 대로 오키나와의 스테이크는 일품이었다. 가재와 쇠고기를 큼직하게 잘라 철판 위에 구워 먹었다.육즙과 향이 기가 막혔다.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들이 먹는다면 고향을 떠올릴 것 같았다. 뒷맛이 깔끔한 오키나와 특산주 아와모리를 부르는 맛이었다.`고야 찬플`이라 불리는 음식도 특이했다. 쓴맛이 강한 오이를 재료로 만든 것인데 건강에도 좋다하고 한국에선 맛보기 힘든 것이라 부지런히 먹었다. 돼지고기를 각종 향신료와 함께 푹 삶아 고명으로 올린 `오키나와 소바`도 면 요리를 좋아하는 기자의 입에 딱 맞았다. 당연지사 이것들에도 아와모리를 곁들였다. 일본으로 여행 가서 회와 초밥을 먹지 않을 수는 없다. 한국 수산시장에서와 달리 살아있는 생선이 아닌 적절한 시간 숙성시킨 선어(鮮魚)로 만든 것이라 풍미가 이전에 맛본 초밥이나 회와는 달랐다. 허름한 선술집에선 땅콩으로 만들었다는 두부를 한 접시 서비스로 줬는데 그 맛이 놀라웠다. `쫄깃한 두부`가 있다니…. 상상이 되는가?아와모리에 대해선 한마디 더 해야겠다. 한국의 소주보다 알코올 함유량이 훨씬 높은 독한 술임에도 역한 향이 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숙취도 거의 없는 이 술은 오키나와에서 나오는 검은 쌀을 발효·증류시켜 만든다는데, 혀에 감겨오는 끈적함과 식도를 훑어가는 싸한 느낌이 근사했다.누가 뭐래도 아와모리는 오키나와에 머무르는 동안 기자의 여행을 즐겁게 만들어준 좋은 친구였다. 오키나와를 여행한다면 이곳은 꼭!온화한 날씨와 태평양의 푸른 물결이 여행자를 반기는 오키나와. 이국적인 풍경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만만찮게 밀려온다. 여기에 생선과 육류, 다양한 채소를 재료로 만든 요리는 맛있을 뿐 아니라 모양까지 예쁘다. 친절과 예의가 몸에 배인 일본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찾은 관광객들을 웃음으로 대한다. 특히 택시를 타보면 기사들의 친절에 놀라게 된다. “비싼 게 제값을 한다”는 옛말이 그저 나온 게 아니다. 오키나와 여행자가 꼭 가봐야 할 곳들을 추천한다.◇ 독특한 건축양식의 `슈리성(首里城)`나하시(市)에 위치한 옛 류큐왕국의 성이다. 슈리성의 건축양식은 중국 스타일도 아니고, 한국의 영향도 받지 않은 것 같다. 완벽한 일본풍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한마디로 `퓨전(Fusion)`이다. 이런 건축양식은 세 나라의 중간지역에 존재했던 오키나와의 지리적 여건이 만들어낸 듯하다.오키나와 도심을 가로지르는 모노레일을 타고 슈리역에서 내리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슈리성은 일본, 한국, 중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며 번영을 누린 류큐왕국의 화려했던 역사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성에 오르는 길이 가파르니 날씨가 더울 때면 시원한 녹차나 탄산음료를 준비하는 게 좋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국제거리`일본 청춘들과 함께 최신 유행을 즐기고 싶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다. 나하시는 오키나와의 중심 도시이고, 그 나하시의 중심에 국제거리가 있다. 환하게 불 밝힌 레스토랑과 카페, 오키나와 민속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호텔이 밀집된 국제거리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흔하다.1.6km로 조성된 국제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바꾼 일본인들의 피땀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기적의 1마일`로도 불린다. 초밥과 일본 라멘, 삶은 돼지고기를 얹은 우동과 스테이크 등을 판매하는 식당에서 제대로 된 저녁 한 끼를 먹는 호사가 즐겁다.◇ 잔디에 앉아 바라보는 태평양 `만좌모(万座毛)`나하시 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바깥 경치를 구경하다보면 닿게 되는 해변. 드넓은 벌판 아래로 펼쳐진 푸른 보석 빛깔의 바다가 여행자를 유혹한다. 아찔한 석회암 절벽 위에 위치한 잔디밭은 1만 명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그래서 `만좌모`라는 이름이 붙었다.푹신하게 돋아난 잔디에 드러누우면 짙푸른 하늘이 보이고, 앉으면 새파란 태평양이 인사를 한다. 그 아름다움에 취하면 쉬이 자리를 떠나기 힘들다. 코끼리 형상의 바위는 한국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산호초가 바다의 색깔을 얼마나 신비롭게 보이게 하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조경국

2018-01-19

따뜻한 그곳, 오키나와의 작은 해변이 그립다

연일 이어지는 추위에 사람들의 어깨가 한없이 움츠러든다. 폭설로 활주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제주공항은 비행기 운항이 일시 중단됐고, 그 외에도 많은 도시들이 혹한에 몸살을 앓고 있다. 비교적 따스한 지역이기에 눈을 보기 힘들었던 한반도 남부에도 보기 드물게 많은 양의 눈이 쏟아졌다. 이로 인한 교통체증 등이 불편을 부르는 상황.사람이란 게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동물이라 추운 날이 이어지는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고, 폭염이 짜증을 부르는 여름에는 시원함을 애타게 그리워한다. `사람살이`라는 게 어찌 보면 유치하고 우습다.2018년 벽두부터 시작된 한파가 연일 기승을 부리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요즘. 불어오는 동해의 바닷바람에 코트 깃을 세우는 추위는 자연스럽게 `따뜻한 남쪽나라`를 동경하게 만든다.혹한을 핑계 삼아 외부 일정을 잡지 않고, 종일 난방기가 가동되는 사무실에서 뜨거운 커피와 녹차를 거푸 마시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 나날들.이때 우연히 기억해낸 낯익고도 반가운 단어 하나가 있으니 바로 `오키나와(沖繩)`다.그랬다. 몇 해 전 기자는 그 섬에 나흘간 머물렀다. 사파이어 색채로 빛나는 짙푸른 바다와 청옥처럼 푸르고 높은 하늘, 그 따스하고 편안한 풍광을 배경으로 친절한 오키나와 사람들과 검은 쌀로 빚은 맑은 술 아와모리(泡盛)를 함께 나누며.▲ `작가의 망명지로 어울리는 곳`을 향해때때로 기억은 향수를 소환한다.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이처럼 혹한의 날들이 지속될 때면 `따뜻한 그곳` 오키나와가 고향처럼 그리워진다. 거기서 만들고 돌아온 잠시잠깐의 추억이 화인(火印)처럼 더더욱 선명해지는 걸 어쩔 수 없다.오키나와는 일본 류큐제도에 자리한 화산섬이다. 북쪽 지역은 산과 밀림으로 이루어졌고, 남쪽은 바위가 많은 구릉지대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남부에 거주한다.제2차 세계대전 때는 섬에 상륙하려는 미군과 이를 막으려는 일본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 공군기의 폭격이 여러 차례 있었고 죽거나 다친 사람 중에는 민간인들도 적지 않았다.이후 미국이 통치하게 된 류큐제도가 일본으로 온전히 반환된 것은 1972년. 오랜 미국의 지배로 인해 “오키나와는 일본의 영토임에도 회보다 스테이크가 더 맛있다”는 우스개가 전해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론 전쟁으로 인해 수천수만의 노인과 아이가 죽었던 비극의 공간이다.현재의 오키나와는 1인당 국민소득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오키나와 원주민들은 본토의 일본인보다 키가 작고 피부가 검은 편. 일 년 내내 온화하거나 더운 날씨로 인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등 열대성 농산물이 풍부하다. 오키니와는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려간 조선 도공(陶工)의 후손들이 1천여 명 가까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고전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바다를 건너가 만든 `율도국`이 바로 오키나와라는 풍문이 떠돌기도 한다.오키나와는 기자가 일본에서 첫 번째로 여행한 지역이다. 일본에는 오키나와보다 근사한 관광지가 많고도 많다. 그런데, 왜 하필 오키나와였을까?여행지를 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일본의 소설가들이다. 여행을 계획하던 어느 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을 읽다가 발견한 한 줄의 문장이 그 시작이었다.“오키나와는 작가들의 망명지로 어울리는 곳이다!”인종과 나이, 종교와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수많은 작가들이 모여들어 세기를 뛰어넘는 걸작을 집필한 프랑스 파리, 유럽의 예술가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인도네시아의 고도(古都) 우붓, `노인과 바다`를 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매혹한 쿠바의 아바나가 연이어 떠올랐고, 오키나와의 어떤 면이 이 해박하고 명민한 작가에게 위와 같은 강렬한 문장을 쓰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오쿠다 히데오를 매혹한 섬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도 오키나와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에 불을 붙였다.소설 속엔 젊은 시절 사회주의 학생운동에 경도됐다가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하는 사내가 등장한다. 기존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와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그가 최후의 도피처로 선택한 곳이 오키나와 본섬에서 멀지 않은 이리오모테였다.패배한 좌파 지식인이 이상향으로 꿈꾼 섬. 거기엔 대체 뭐가 있을까? 알고 싶었다.결정 이후의 실행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일본 소설가들이 던져준 궁금증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 오키나와로 가는 저렴한 항공권과 싸고 편안한 숙소를 수소문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일본 여행 관련 서적을 뒤적이다 보니 해결책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전세기 할인항공권과 3일치 호텔숙박권을 묶어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은 자유여행 상품을 찾아낸 것이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즉각 그 여행상품을 예약했다. 이제 배낭을 꾸리고 신발 끈을 조이는 일만 남았다.여행을 며칠 앞둔 날. 스스로는 “취미 수준이죠 뭐~”라고 말하지만 분명 그 이상의 솜씨가 묻어나는 사진을 찍어온 후배 하나가 동행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공항이 비교적 한적하던 평일 오후였다.비행기가 드넓은 태평양 위를 날았다. 일상을 탈출해 이제껏 해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을 찾아 낯선 나라로 간다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일본의 건축 양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히 중국풍도 아닌 오키나와 슈리성,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국제거리, 바다를 낀 드넓은 평탄 지형이 탄성을 부르는 만좌모(万座毛), 그리고, 오키나와의 맛깔스런 요리와 작고 예쁘장한 해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다음 주로 미뤄야겠다. 일본은…인구 약 1억2천700만 명의리·인간적 정 중시하는 편국물·구이 음식 등 미식가 호평아시아 대륙 동쪽에 위치했으며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등 4개의 큰 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4세기 초반에 소규모 통일국가가 세워졌고, 전국이 통일된 것은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서였다.인구는 약 1억2천700만 명이며, 면적은 37만7천915㎢.수도는 도쿄다.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실질적 정치 형태는 내각책임제. 종교는 토속신앙과 불교, 기독교 등이 공존하고 있다.국민의 대부분이 아시아몽고인종이며 인종에 관한 또 다른 학설로는 `아이누설`과 `코로포크설` 등이 있다.사용되는 언어는 일본어. 동경어를 기반으로 하는 언어가 언론과 교과서, 의회와 법원 등에서 표준어로 사용된다.물론 지역마다의 방언도 있다. 일본어는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졌다.일본인들은 “과오의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민족”이라는 비판과 “친절하고 정직하며 예의 바른 국민”이라는 칭찬을 동시에 받고 있다. 보는 사람과 관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다.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막부정치가 끝난 후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제도를 만들었다.그때부터 유럽 등지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문물이 급격히 유입된다. 1889년 제국헌법을 공포했고, 1890년에는 제국의회가 생겼다. 이는 아시아 최초다.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자본주의에 기반한 발전을 이뤄나간다. 동시에 약소국을 강제 합병하는 등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20세기 초반 한국을 식민 지배했고, 이로 인한 부정적 감정의 앙금이 한국인들에겐 여전히 남아있다. 일본인들 역시 한국에 대한 태도가 사람에 따라 긍정과 부정으로 극명하게 갈린다.만만치 않은 경제력으로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미국과 중국, 유럽연합 등과 함께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로 굴러가는 나라고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 철저히 존중되는 편이지만, 여전히 의리와 인간적인 정을 중시하고, 상하관계가 엄격한 측면도 존재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업에서조차 `가족주의 전통`이 중시됐다.생선회와 초밥, 국물 요리와 각종 구이 등의 음식이 깔끔하고 맛있기로 유명하다. 수도인 도쿄의 고급 음식점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전통 있는 레스토랑 이상으로 미식가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애니메이션과 영화 또한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많은 수의 국민들이 야구와 축구 등 스포츠 관람을 즐기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전통을 잇고 있는 스모(相撲·일본식 씨름)를 좋아한다.사진제공/조경국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1-12

`무슬림`에 대한 편견을 깨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슬람교와 무슬림(Muslim·이슬람교도)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자 역시 그랬다. 터키를 여행하기 전에는.우리가 거의 매일 접하는 TV 뉴스나 영화에선 “유일신 알라(Allah)를 신봉하라”고 외치며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향해 폭탄을 던지거나, 코란(Koran·이슬람교의 경전)을 교조적으로 해석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며 여성의 인권을 억누르는 무슬림이 자주 등장한다.그러나 과연 모든 이슬람교 신자들이 그처럼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일까? 이 물음에 관해선 단호히 답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지구 위에 사는 무슬림은 13억 명이 넘는다. 그들 중 탈레반(Taliban)이나 IS에서 활동하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무슬림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기자의 경험에 한정시키자면 이란, 말레이시아, 터키 등의 나라에서 만난 절대다수의 이슬람교 신자들은 선량하고 친절했다. 터키를 떠올릴 때면 길을 몰라 헤매는 여행자의 손을 이끌고 목적지를 찾아주던 수염 풍성한 아저씨와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리면서도 자기 손에 든 큼직한 빵을 낯선 외국인에게 나눠주던 아주머니가 자연스레 그려진다.착하고 정직하게 살고 있는 무슬림들과 한 달 가까운 기간을 부대끼며 지냈던 터키 여행은 그런 이유로 애틋한 그리움이 됐다. ◇ 이스탄불 좁은 골목길에서 맛본 행복아시아와 유럽의 가교인 터키 이스탄불은 1~2주 머무르는 것만으론 그 매력을 다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도시다. 한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불렸던 동로마제국의 수도였고, 이스탄불은 무슬림이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부터 불린 이름이다.일부 역사학자들은 “이스탄불이 가톨릭에게서 무슬림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대서양 바닷길이 열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유럽의 남아메리카 침탈과 박해의 역사가 여기서 시작됐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500년 가까운 시간을 오스만제국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로 역할한 이스탄불.기자가 묵었던 저렴한 호텔에서 5분만 걸어가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다는 이슬람 사원 술탄아흐멧 자미(블루 모스크)가 있었다. 지상으로부터 최소 50m가 넘는 곳에 위치한 모스크의 지붕 위로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면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이 떠올랐다. 종교와 이념 따위와는 무관하게 자유롭게 사는 새들. 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이스탄불 골목골목마다 들어선 고풍스런 카페와 바(BAR)에서 포도주와 커피, 설탕을 듬뿍 넣은 홍차를 마시던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서의 `불금`이 그립지 않았다.거기서 피우던 물담배. 뽀글뽀글 기포가 만들어내는 연기에선 달콤한 과일 냄새가 났고, 그 향기는 지친 여행자를 포근하게 위로해줬다.제법 커다란 배를 타고 이스탄불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지역을 1시간쯤 오가던 저물녘의 낭만도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스웨덴 여성 둘은 날마다 `석양 무렵의 싸구려 크루즈여행`을 다녀오는 기자를 보며 “어이, 한국 남자들은 다 너처럼 촛불 켜진 로맨틱한 식당에서 와인 마시는 것과 해지는 어둑한 시간에 배 타는 걸 좋아해?”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 곳곳에서 발견되는 터키의 매력비단 이스탄불만이 아니었다. 기묘한 모습의 바위가 수십 km 이어지는 카파도키아에선 동굴을 리모델링한 호텔에서 잠을 청했다. 그날 밤엔 기자가 살아본 적 없는 아득한 원시 시대를 꿈꾼 듯도 하다.터키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모스크 앞에서 만난 무슬림들 역시 기억 속에 선명하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모스크 앞 수돗가에서 손과 발을 씻던 그들의 뒷모습은 어떤 측면에선 경건하게 보이기까지 했다.새하얀 눈처럼 보이는 석회암이 산을 뒤덮은 파묵칼레의 온천에 몸을 담그던 추억은 또 어떤가. 어린 시절 읽던 동화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덩치 크고 선이 굵은 미남과 인형처럼 커다란 눈을 가진 미녀가 넘쳐나고, 거리를 걸으면 터키어는 물론 독일어와 프랑스어, 영어와 일본어까지 들려오는 터키의 관광지들. 기자는 그곳의 왁자지껄한 에너지가 좋았다. 그래서 매혹을 느꼈다.그래서였다. 한국에서라면 손사래를 칠 음식들도 맛있게 먹었다. 고등어를 바게트 빵 사이에 끼우고 양파와 상추 등을 곁들인 `고등어 케밥`과 오이와 양배추를 식초와 붉은빛이 감도는 향료에 절인 터키식 피클, 거기에 홍합 속에 쌀을 넣어 익혀 레몬즙을 뿌려 먹는 미드예 돌마(Midye Dolma)까지.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적지 않은 경험을 한 터키 여행이었다.기자가 전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숙부가 부러운 듯 말했다. “나도 더 늙기 전에 콘스탄티노플에 가보고 싶구나.” 그 말이 이상스레 쓸쓸하게 들렸다.여든넷이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돋보기안경을 쓴 채 `캡틴 제임스 쿡`(James Cook·1728~1779)의 여행기를 읽는 숙부를 모시고 다시 한 번 터키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오르고 싶다. 이스탄불은 어떤 도시일까?행정구역상 터키 이스탄불주(州)에 속하는 매력 가득한 곳.규모와 인구 면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하는 터키 최대의 도시이며,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푸른 파도와 맑은 물빛의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이어주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운데 두고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위치해 있다.유럽 지역은 유적과 현대화된 상가가 조화를 이룬다.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사람은 약 1천400만 명. 2010년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됐고, 2012년엔 유럽의 스포츠수도로 지정됐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기원전 667년 비잔티움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졌으며, 현재도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동양과 서양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던 공간으로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유구한 종교적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로 알려졌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7대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이곳에 만들어져있던 많은 수의 성당과 수도원을 이슬람교 예배당인 모스크로 개조했다. 로마제국이 만든 수도의 모습을 대폭 바꾼 것이다.메흐메드 2세는 정복자였으나, 무슬림이 아닌 종교인들에게도 일정한 인권을 보장했다. 또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살던 이슬람교도 다수를 이스탄불로 이주시켰다. 이런 정책은 이스탄불이 터키인,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어울려 살아가는 도시로 자리 잡게 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때는 그리스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터키어 명칭인 이스탄불이 모두 사용됐으나, 그때도 유럽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을 더 많이 썼다. 이스탄불이 도시의 공식명칭이 된 것은 1924년이다.1950년대 초반부터 이스탄불은 현대화에 착수한다. 새로운 광장과 거리가 건설됐고, 가까운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도시 외곽에는 공업지대도 들어섰다.현재의 이스탄불은 `터키 경제수도`로 불린다. 목화, 과일, 올리브, 비단을 생산하는 대규모 농지가 있고, 식품가공업, 섬유업, 석유업, 제약업, 전자업, 금속업과 도자기 제작까지 다양한 산업이 고루 발전하고 있다.탄탄한 경제적 기반은 이스탄불을 `억만장자들의 도시`로 만들었다. 2008년 한 경제지의 조사에 따르면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억만장자는 34명. 물론 다른 나라들처럼 빈부격차에 따른 갈등도 없지 않다.해마다 수백 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이스탄불은 그랜드 바자르, 돌마바흐체 궁전, 발렌스 수도교, 블루 모스크, 슐레이마니예 모스크, 소피아 성당,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스파이스 바자르, 탁심 광장, 톱카프 궁전 등의 수많은 볼거리와 독특한 먹을거리로 가득한 도시다.사진/류태규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1-05

여행자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새해였으면…

또 1년이 갔다. 한 해의 마지막 무렵이 되면 생각이 많아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현재가 행복하지 않은 이들은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에 매달린다. 초등학생이 연주하는 단조로운 피아노곡 같은 지루한 날들을 살고 있는 기자 또한 `좋았던 과거`를 자주 떠올리는 요즘이다.몇 해 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나라 터키에서 한 달쯤을 보냈다. 그중 보름 이상을 이스탄불에 머물렀다. 추억은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어젯밤. 터키 여행 때 쓴 일기를 뒤적이다가 혼자 웃음 지었다. “저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구나”라는 혼잣말을 하며.2017년의 막바지. `현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 해묵은 일기의 몇 부분을 공개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2018년이 목전이다. 내년엔 여행 외의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해장국 없어도 이스탄불은 즐거운 도시터키 여행일기의 첫 부분은 아시아에서 출발해 동유럽을 거쳐 이스탄불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과 느낌을 적고 있다. 불면에 시달리는 어제오늘과 달리 그곳에서의 편안했던 잠도 기록돼 있다.`태국 방콕을 출발한 비행기가 우크라이나 키예프공항에 도착했다.이스탄불로의 비행까지는 4시간쯤이 남아있다. 달리 할 일이 없어 공항 안을 서성거렸다. 미인이 많기로 소문난 우크라이나.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공항의 여성 보안요원은 패션모델처럼 늘씬하고, 스낵바에서 맥주를 서빙하는 종업원까지 푸른 눈동자에 금발이 눈부셨다.대기 시간은 빨리 흘렀다. 마침내 키예프공항을 출발한 에어로스비트 항공기는 2시간 15분만에 나를 옛 동로마제국의 수도에 내려놓았다.버스를 타고 이스탄불 시내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눈에 띈 풍경은 이슬람 예배당 모스크의 둥근 지붕들이다. 한두 개가 아니고, 수십 수백 개였다.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Azan)이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이스탄불과 이전 여행지 동남아시아의 시차는 4시간. 한국과는 6시간이 차이 난다.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몸은 그 간극을 이기기 힘들었는지 자정이 되기 전 잠들었다. 이스탄불의 밤 12시는 방콕이라면 새벽 4시, 한국이라면 새벽 6시다.낯선 곳에선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내가 단 한 번도 뒤척이거나 깨지 않고 죽은 듯 잤다. 꿈 한 조각 없는 깊디깊은 잠이었다. 이슬람국가 터키에서의 잠은 달콤했다.깨어나 도미토리 숙박비 13유로(약 1만7천원)에 포함된 아침을 먹었다. 오이와 토마토, 치즈와 빵, 삶은 달걀과 각종 과일잼, 오렌지 주스와 우유, 시리얼과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 올리브, 커피와 홍차…. 북엇국이나 생태찌개 따위의 해장국이 없어도 좋았다. 사람은 어디서건 적응하며 살 수 있는 동물이고, 여행은 그 적응력을 단련하는 시간이 아닌가.` ▲그저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터키에 도착한 후 맞은 첫 번째 토요일과 일요일. 철없는 아이처럼 거리를 쏘다녔다. `낯선 공간의 탐험`이라 불러도 좋았다. 여행일기에는 즐거웠던 거리 탐험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겼다.`주말을 이스탄불에서 보냈다. 옛날, 아니 아주 옛날도 아니다. 작년 겨울만 하더라도 내가 튤립 가득한 이 고풍스런 도시에서 주말을 보내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의 생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도 내일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드라마틱하고 재밌는 게 인생이 아닐까.토요일 저녁엔 옛 직장 동료와 만났다. 서울을 떠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결혼해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유쾌한 여성. 같은 회사를 잠시 함께 다녔다는 인연만으로 그녀는 내게 한국식당에서 소주와 불고기, 냉면을 사줬다.짐작하다시피 외국에서 먹는 한국 음식은 비싸다. 소주가 한 병에 1만5천원이니. 식사비가 20만원 가까이 나왔다.나는 그녀에게 별로 해줄 게 없었다. 마르마라(Marmara) 바다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빌라에 산다는 옛 동료의 삶이 앞으로도 웃음으로 가득하기를 빌어주었을 뿐.일요일 밤엔 오만가지 국적의 사람들이 넘쳐나는 술탄아흐멧 광장과 공원, 이스탄불 유럽 지구에서 아시아 지구로 건너가는 배를 타는 항구, 어른 팔뚝만한 도미가 가지런히 진열된 생선시장, 향기와 색깔로 휘황찬란한 향신료 장터를 홀로 돌아다녔다.점심으로는 터키식 패스트푸드인 양고기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을 먹었기에 저녁은 해산물을 택했다. 싱싱한 생선은 소금 외엔 아무 양념을 더하지 않고 구웠는데도 혀를 놀라게 할 만큼 맛있었다.날생선을 절인 요리와 초록빛 해초무침도 입에 딱 맞았다. 수십 년 전 서울 중심가를 운행했다는 전차와 유사한 이스탄불의 트램(노면전차)을 타본 것도 즐거웠다.영화배우 말론 브랜도를 닮은 흰 수염의 할아버지가 운전하고, 조지 클루니와 판박이인 젊은 남자 차장이 차비를 받는 버스도 탔다.대다수의 터키 남자들은 건장하고 잘 생겼다. 겨우 거리와 시장을 돌아보고 대중교통에 올라 도시 외곽을 구경했을 뿐인데도, 하루 종일 내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새로운 경험. 인간이란 그 경험 속에서 커가는 것이다.` ▲ 어느 곳에서건 평화로운 꿈을 꾸는 새해이길생의 모든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지구 위에 없다. 많은 이들이 지지부진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 근사하고 멋들어진 `또 다른 삶`을 꿈꾼다.낯설고 먼 곳으로 훌쩍 떠나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콧노래 흥얼거릴 수 있는 여행 역시 그런 욕망이 반영된 행위다. 그러나 마음먹은 시간에 자신이 가고자 하는 어떤 곳으로건 훌쩍 떠날 시간적·금전적 여유를 모두 갖추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덜컹이는 기차 안에서 본 터키의 시골마을이 떠오른다. 한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새해엔 우리가 어디에 있건 그 풍경을 닮은 평화와 행복만이라도 꿈꿀 수 있었으면. 터키여행, 이것만은 꼭 해보자여행지에서라면 평소에 해보지 못한 것들을 용기 내서 해볼 수 있다.한국에선 엄두도 내지 못할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해변을 걷는다든지, 남들이 모두 일하는 낮 시간에 포도주나 맥주를 마시고 흥얼거리며 노래 한 곡을 불러본다든지, 높은 산에 올라 아이처럼 돌아올 메아리를 기다린다든지 하는 일들.일상을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꿈꾸는 것들은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다.소심했던 이들은 매일 같이 비슷한 일만이 일어나는 생활의 공간을 떠나있음에 사소한 일탈을 시도하기도 한다. 사실 그런 것이 바로 여행의 재미다.터키를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들 역시 흥미롭고 독특한 경험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그런 여행자라면 아래 정보를 참조하면 된다.◆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 해보기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슬람 예배당 모스크와 숯불 위에서 연기를 피우며 맛있게 익어가는 각종 케밥, 유쾌하고 웃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갈라타 다리`다.카라쾨이 지역과 에미뇌뉘 지역을 가로지르는 갈라타 다리 위에는 오후의 여유를 즐기는 낚시꾼들이 가득하다.먹다 남은 빵이나 과자를 미끼로 조그만 물고기를 낚는 이스탄불 사람들은 관광객과 쉽게 친구가 된다. 자신의 낚싯대를 빌려주거나 잡은 고기를 나눠주기도 한다.운이 좋다면 제법 큰 숭어를 잡는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 터키 동부에서 친절한 쿠르드족 만나기터키 동부지역에는 적지 않은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종족제 사회를 구성해 생활하는 쿠르드족은 20세기 초반부터 정치적 문제 등으로 터키 사람들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지만,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는 누구보다도 친절하다.이란이나 아르메니아에 접한 국경에서 만나는 쿠르드족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을 방문한 관광객을 귀한 손님으로 맞이한다.이는 이슬람의 전통이기도 하다. 조그만 시골 식당이나 카페에서 음식이나 홍차를 대접받는 것은 흔한 일이다. 조금 더 친해진다면 집으로 초대받아 쿠르드족 전통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혀를 녹일 듯 달콤한 터키 디저트 맛보기달콤한 음식은 때때로 삶의 에너지가 돼준다. 대부분의 나라엔 식후에 먹는 달콤한 디저트가 있다.터키도 마찬가지다.한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건 겹겹의 얇은 빵 속에 견과류를 넣은 바클라바(baklava).이 터키식 디저트는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만나면 `다이어트`라는 단어를 잠시 잊게 된다.터키의 대도시는 물론 소읍에도 달콤한 빵과 과자를 맛볼 수 있는 디저트 가게가 한두 개는 꼭 있다.모양도 깜찍하고 예쁜 터키 디저트를 처음 본 날. 기자는 너무 많은 디저트를 먹는 바람에 저녁 밥맛까지 잃기도 했다.사진제공/류태규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12-29

카파도키아, 자신이 사는 공간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것

`일상에서의 탈출`이라 부를 수 있는 여행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게 음식이다. 낯선 공간에서의 피로와 어색함을 털어내는데 맛있는 요리와 흥겨운 식사자리만한 게 있을까? 터키는 프랑스, 중국, 태국 등과 함께 독특하고 매력적인 요리가 많은 나라로 손꼽힌다. 오스만 제국은 한때 유럽, 발칸반도,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등의 지역을 지배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곳의 문화를 흡수했고, 이는 터키의 음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터키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 소개하는 요리를 꼭 맛보길 권한다. 대부분의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고, 더불어 가격 역시 형편이 넉넉지 않은 배낭여행자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하다.누구나 마찬가지다. 어떤 인간이라도 `지금 이곳`을 떠나 `새로운 다른 곳`을 열망하며 건. 익숙한 풍경과 매일 같이 만나는 사람들 곁에서 멀어져 새로운 하늘과 땅, 지금까지 접해본 바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어울려 살아보는 꿈.여행은 바로 이 꿈을 실현해주는 현실적 방편이다. 하지만, 멀리 떠난다고 해서 인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 서면 곤혹스럽다. 반복되는 일상을 버리고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하루하루의 삶이 지겨움과 동어반복의 지옥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없지 않다.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1871~1945)는 이런 말을 한다.“가장 아름다운 행복은 일상이다”.이 말에 담긴 함의를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시인은 직설이 아닌 은유로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시인처럼 사고할 수는 없는 법.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렴풋이 `세계와 인간의 진실`을 깨닫는 것이야 무엇이 어려울까. 단순한 동요처럼 반복되는 `일상`과 그 일상에서의 떠남을 의미하는 `여행`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황량한 풍경이 인간 내부에 숨겨졌던 열망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터키의 중부도시 카파도키아 괴레메에서였다. ▲`기암괴석(奇巖怪石)` 즐비한 도시몇 해 전 여름. 이슬람공화국 이란의 국경을 넘어 터키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자그마치 20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보라색 소금호수가 출렁이는 이란 북서부를 힘겹게 통과한 차는 터키의 중심부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이윽고 도착한 카파도키아(Cappadocia).지구가 아닌 화성이나 목성의 풍경처럼 낯선 모습이 기자를 반겼다. 곳곳에 솟아오른 기암괴석과 거대한 바위의 속을 뚫어 도시를 만들어놓은 곳.카파도키아는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를 일컫는 지명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종교적 탄압을 피해 바위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자신들의 신앙을 이어갔다.그 옛날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동맹국이었으나 점차 속국으로 변해가며 스스로의 독립성을 잃어갔다. 문헌에 의하면 카파도키아 지역은 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불의 신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져있었다. 기원전 190년경에는 셀레우스 왕조의 세력권에 포함됐고, 이후엔 로마의 식민지에 가까운 위상을 가졌다고 한다.실크로드의 중간거점이었던 카파도키아 지역엔 로마시대 그리스도교의 탄압을 피해 숨어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수천 개의 바위에 굴을 뚫어 만든 카파도키아 동굴수도원 등이 그 생생한 사례다. ▲오랜 수난은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고…오래 지속된 수난과 핍박 탓일까? 터키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의 속내를 다른 이들에게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살아가는 곳이 `영원하다`고 믿지 않는다. 축적된 역사가 준 상처 탓이다.카파도키아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도시 괴레메. 그곳에서 만난 터키인 삼촌과 조카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자신들의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모종의 열망에 들떠있음을 숨기지 못했던 선량한 그들.어떤 것은 `우주선`을, 또 다른 어떤 것은 `버섯`을 닮은 괴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규칙과 순서 없이 제멋대로 솟아오른 풍경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터키 중부의 조그만 마을 괴레메.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기자는 점심을 먹고 나면 동네 산책하듯 야트막한 언덕을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특별한 풍경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터키 맥주 에페스(Efes) 몇 병과 간단한 안주를 사들고 다니던 소풍.그러던 어느 날 오후. 괴레메에서 2km쯤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 나무 그늘에서 안주 없이 맥주를 마시던 터키의 중년 사내 한 명과 청년 하나를 만났다.나이가 많은 사내는 괴레메 인근 마을에서 목수로 일한다고 했고, 22살 청년은 카이세리(Kayseri)라는 도시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아시아 문화를 공부한다고 했던가…. 둘은 숙부와 조카 사이였다.수인사를 나누고 서로가 가져온 맥주로 목을 축였다. 기자는 터키어를 하지 못하고, 둘은 영어가 서툴렀다. 간단한 단어 정도만으로 의사를 나누며 그저 마주보고 웃었을 뿐. 그러던 시간이 잠시 흐른 뒤 터키 청년이 앞뒤를 자르며 대뜸 물었다.“우리 마을이 좋으세요?”예의상 아래와 같이 답할 수밖에 없었다.“네, 경치가 멋지고 사람들도 착해서 마음에 드는데요.”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서글펐다.“그럼, 여기서 사세요. 대신 아저씨 여권은 나를 주세요. 내가 한국 가서 살게요.”“그럴까요?”라고 웃으며 대답해놓고 보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 그들이 자신의 일상을 사랑하게 되길앞서 말했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사랑하며 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의 파괴와 파격을 원한다. 지루함을 즐기는 인간은 세상에 없지 않을까. 모든 일상은 지루함과 맞닿아 있다는 게 문제다.한국인들은 외계의 혹성을 닮은 카파도키아 괴레메의 기묘한 풍경이 보고 싶어 몇 백만 원의 돈을 들여 1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터키로 여행을 떠난다. 한국에서의 일상이 지겨워서다.반면, 어떤 터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지긋지긋해 한국에서의 삶을 열망하며 현재의 일상을 견디고 있다.`일상`과 `여행` 중 어떤 것이 우리를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줄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세상이 있을까? 그랬기에 기자의 바람은 소박했다. 한없이 착하게 웃는 그 숙부와 조카의 일상이 보다 행복지기를, 그들의 미소가 오래 지속되기를, 그저 그걸 빌었을 뿐이었다.싸고 배부른 한 끼… 되네르 케밥`케밥`은 대표적인 터키의 서민음식이다. 쇠고기, 양고기, 닭고기 등을 여러 가지 소스로 양념해 불에 구워 채소와 함께 먹는 것을 통틀어 케밥이라 부른다. 터키는 물론,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중해 지역의 사람들까지 즐기는 요리다.되네르 케밥(Doener Kebap)은 커다란 쇠고기나 양고기 덩어리를 걸어놓고 뜨거운 불로 익힌 후 기다란 칼로 잘게 썰어 빵에 넣고 채소와 곁들여 먹는 음식이다. 한국의 여행자들이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간편식. `터키식 샌드위치`라고 불러도 좋다. 독특한 체험을 원한다면… 이쉬켄데르 케밥익힌 고기와 싱싱한 채소 위에 듬뿍 뿌려진 새콤한 터키 요구르트. 여기에 색깔 선명한 지중해의 토마토 소스까지. 이쉬켄데르 케밥(Ishkender Kebap)은 되네르 케밥에 독특한 양념을 얹은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이스탄불을 포함한 터키 각 지역엔 전통이 100년을 넘는 이쉬켄데르 케밥 식당이 적지 않다.“고기 위에 요구르트를 뿌려 먹는다고?”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여행자도 없지 않겠지만, 한국에선 해보기 어려운 새로운 체험을 원한다면 도전해볼만 하다. 맛있는 꼬치구이… 쉬쉬 케밥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터키의 무슬림들은 오래 전부터 쇠고기와 양고기를 즐겼다. 쉬쉬 케밥(Shish Kebap)은 쇠고기와 양고기를 꼬챙이에 끼워 소금, 후추, 양념 등을 가미해 맛깔나게 구운 요리다.한국의 포장마차에서 볼 수 있는 꼬치구이와 비슷하기에 처음 접하는 여행자들도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다.터키 거리 곳곳에선 쉬쉬 케밥을 판매하는 식당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노릇하게 잘 구운 양고기에 고소한 터키 바게트와 홍차 한 잔을 곁들이면 부자들의 만찬이 부럽지 않다.사진제공/류태규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12-22

여행이란 `감동`과 `실망`을 함께 맛보는 과정이 아닐까

`직접 경험`은 인간의 태도를 바꾸기도 한다. 여행은 직접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현자(賢者)`라고 부르는 이들은 “인생의 자산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여행”이라고 말한다.경험하지 못하고 짐작만으로 인간과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 판단은 선입견과 편견에 근거해있기 십상이다. “이슬람국가의 사람들은 모두 코란(Koran)만을 광신하는 종교적 독단에 빠져있다”는 것도 편견 중 하나다.기자는 이슬람국가인 이란을 17일, 터키를 한 달쯤 여행했다. 당연지사 적지 않은 이란인과 터키인을 만났다. 99.9%가 이슬람교 신자였다.그러나, 그들에게서 종교적 독단이나 타 종교에 대한 혐오를 느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친절하고 상냥했다. 아래 기자가 직접 겪은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친절을 소개할까 한다.▲ 여행자의 손목을 잡아끄는 터키 사내들터키에서 이란으로 떠나기 위해 트라브존이란 도시에서 비자를 신청했다. 그런데 비자 비용을 영사관에서 받는 게 아니라 특정 은행에 가서 납부하고 영수증을 가져오란다. 난감했다. 시내 지리도 전혀 모르고 터키어도 읽지 못하는데.그러나, 로마에서는 로마법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리를 터덜터덜 걷다가 별 기대 없이 지나는 사람 중 하나를 붙들고 “혹시 이 은행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물었다.기자가 내민 쪽지를 들여다보던 수염 덥수룩한 사내가 갑자기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잠자코 그가 이끄는 골목으로 따라갔다. 거기에 찾던 은행이 있었다. 사내의 친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비자 비용 영수증 발급을 도와주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밖으로 나와 감사의 뜻으로 담배 한 갑을 건넸으나 그는 한사코 거부했다. “좋은 여행하길 바랄게”라는 짤막한 인사를 전하고 돌아서는 사내의 등이 크고 따뜻해 보였다.해변도시 안탈리아에선 우연히 만난 퇴직 교사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근사하게 차려진 터키 가정식을 배부르게 먹고나니 퇴직 교사의 손녀가 홍차를 가져왔다 “나는 한국 음악을 너무 좋아해요”라며 수줍어하는 터키 소녀의 때 묻지 않은 미소가 세파에 찌든 기자에게 감동의 시간을 선물했음은 물론이다.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슬람국가 터키에서 보고 느낀 친절과 감동을. “나는 여행을 통해 이슬람국가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파묵칼레, 하루 종일 `릴리`를 기다렸는데…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터키에서 겪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재밌는 일화 하나를 들려주는 게 좋겠다.`도미토리(Dormitory)`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본래의 뜻이 있겠지만, 여행자들에겐 한 방에 여러 개의 침대를 놓아두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침대 하나씩을 차지하고 자는 숙소를 지칭하는 단어로 받아들여진다.이런 숙박업소에선 보통 화장실과 욕실도 함께 쓴다. 혼자 사용하는 것보다 불편하지만 대신 가격이 싸다. 이슬람국가인 터키에도 드물게 이런 숙소가 있다. 기암괴석 즐비한 카파도키아를 돌아보고, 지중해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안탈리아에서 사흘을 머문 후 터키 서부 내륙에 위치한 파묵칼레(Pamukkale·목화의 성)라는 마을에서 지낼 때다. 거대하게 형성된 석회암 덩어리와 따스하게 몸을 담글 수 있는 온천, 그 인근에 위치한 고대 로마 유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당시 기자의 숙소가 도미토리였다. 제법 큰 방에 싱글베드가 3개 놓인. 첫날은 캘리포니아 출신 미국 사내와 함께 방을 사용했다. 형광등 켜고 끄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는 `매너 좋은 남자`였다. 그는 발소리까지 줄여가며 걸었다. 최상의 `도미토리 파트너`라 할 수 있었다.사건(?)은 미국인 사내가 떠난 다음 날 벌어졌다. 숙소 직원으로 일하는 터키 청년과 술 한 잔을 나누며 너나들이로 친해졌는데 그가 낭보를 전한다.“이봐 홍, 오후에 캐나다 여대생 한 명이 여기 도착한데. 이름이 릴리(Lily)인데, 네가 묵는 도미토리를 전화로 예약했어.”`이것 봐라. 팔자에 없이 여대생과 같은 방을 쓰게 생겼잖아. 릴리? 이름이 너무 예쁘네. 백합같이 청초했으면 좋겠다. 와인이라도 한 병 사둬야겠군.`오만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솔직히 그녀가 도착한다는 밤이 기다려졌다. 태국 후아힌(Hua Hin)에서 만난 스웨덴 여대생 에밀리에처럼 쾌활해서 시종일관 사람을 웃게 해주거나, 캄보디아 시아누크빌(Sihanoukville)에서 만난 영국인 타니아처럼 매력적인 금발 미녀라면 좋을 텐데.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하루가 길었다. 포도주를 사다놓으려다 지나치게 `오버`하는 것 같아 참으며…. 그리고, 마침내 길었던 해가 서쪽으로 막 기울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왔다. 이름이 `백합`인 22살 캐나다 소녀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숙소가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아, 이걸 뭐라고 말해야하나? 덩치가 역도선수 장미란보다 더 컸다.숙소에 딸린 식당에 앉아 있던 기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헬로우” 인사를 하고 2층 방으로 올라간 릴리. 외모와는 상관없이 예의 바르고 명랑해 보였다.그런데, 아침에 소식을 전한 터키 종업원은 뭐가 웃긴지 한참을 깔깔거렸다. 하기야 기자도 웃어야지 어쩔 것인가. `파묵칼레에서의 희망 가득했던 기다림`도 나중엔 즐겁게 떠올릴 `여행의 추억`이 될 텐데. 그런 생각 끝에 혼잣말을 했다.“와인은 사러 가지 않아도 되겠군.”터키를 여행하게 된다면 이 도시는 꼭!나라 곳곳에 고대와 중세시대 유적이 가득하고, 어지간한 일은 미소로 넘길 줄 아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 고소하고 담백한 빵과 여러 종류의 케밥(Kebab·양고기와 닭고기 등을 양념해 구워 채소와 함께 먹는 요리)이 두루 맛있는 터키.어느 한 도시를 지목해 “여기가 터키 최고의 여행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마다 취향과 여행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하지만, 아래 소개하는 세 도시는 문화, 풍광, 음식 모두에서 최고의 수준을 인정받은 공간이라 추천을 하지 않을 수 없다.인솔자를 따라가는 패키지여행이 아닌 배낭을 메고 떠난 자유여행자라면 방문해도 후회가 없을 것이다. ◆ 흑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트라브존`트라브존은 싱싱한 도미와 고등어 숯불구이의 맛을 잊을 수 없는 도시다. 흑해에 접해있는 터키 동부의 항구라 해산물이 저렴하다. 거리에선 러시아 선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도시로 예전에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목이었다.시내엔 비잔틴 양식의 성당이 우뚝 서있고, 돌아볼 만한 박물관도 적지 않다. 특히 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공원에서 친절한 터키 사람들과 견과류를 안주로 시원한 맥주 한잔 나누는 재미가 각별하다. ◆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와 만나는 `안탈리아`짙푸른 지중해가 넘실대는 매력적인 해변을 가진 안탈리아는 터키 안탈리아주(州)의 주도다. 동서로 길게 뻗은 해안선을 따라 해수욕장이 형성돼 있고 수영과 휴양을 즐기는 유럽 관광객들이 많다.떠도는 풍문에 따르면 페르가몬의 왕이었던 아탈로스가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에 의해 세워진 도시가 안탈리아라고 한다. 고대 비잔틴 유적과 로마시대 유적인 하드리아누스의 문, 셀주크왕조의 이슬람사원 등을 둘러보다가 지겨워지면 유람선을 타러 가면 된다.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에 감탄사가 나올 것이다. 승선료도 5천원 정도이니 저렴하다. ◆ 바위 속 기묘한 집들이 있는 `괴레메`인간은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 길을 찾아가는 존재다.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의 대표적인 여행지 괴레메는 위의 명제를 증명하는 도시.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를 깎아 만든 360여 개의 동굴수도원을 보며 혀를 내두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괴레메는 도자기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육개장과 비슷한 맛을 내는 `도자기 케밥`이 괴레메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곳을 찾는다면 바위 동굴을 리모델링 해 새롭게 꾸민 호텔에 묵는 걸 권한다. 그 숙소는 경험하기 힘든 `원시의 밤`을 당신에게 선물할 것이다.글/홍성식기자·사진/류태규

2017-09-15

`유럽의 입구, 아시아의 출구` 이스탄불에서 받은 두가지 선물

터키의 이스탄불은 묘한 도시다. 15분만 배를 타면 유럽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 게 가능하고, 낚시꾼들로 가득한 갈라타 다리 밑 카페에 앉아 터키 전통주 라키(Rakı)를 마시고 있자면 좌와 우로 유럽과 아시아가 한눈에 들어온다. 몇 해 전 봄. 이 `묘한 매력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보름쯤을 머물렀다.어느 날은 무료함을 견디기가 힘들어 어디를 가겠다는 계획도 없이 숙소를 나와 배를 타고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외관이 썩 근사한 하이다르파샤역(驛)에 도착했다.그 역은 동서(東西)로 수십 시간을 달리는 국제열차의 출발지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까지 가는 기차도 일주일에 한 번 다니는데 소요 시간은 자그마치 70시간. 연착이라도 할라치면 나흘을 기차 안에서 먹고 자야한다.하지만 그런 장거리 열차만 있는 건 아니고, 한국식으로 말하면 짧은 거리를 왕복하는 `교외선 기차`도 오간다. 어차피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에 가장 먼저 출발하는 전철에 무작정 올랐다. 그게 기자의 여행스타일이기도 하다.이스탄불에 오는 관광객은 모두 다 세인트 소피아 성당(Hagia Sophia)과 블루 모스크(Blue Mosque), 토카프 궁전을 본다. 하지만, 그것만 보고 도시를 떠난다면 대체 무슨 재미인가? 그곳들은 사진으로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기자는 사람 우글거리는 공간을 싫어한다. ▲ 이스탄불 예술고등학교 학생들과 친구가 되다기대 없이 올라탄 기차. 그런데 재밌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기차에 이스탄불 예술고등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는 열일곱, 열여덟 예쁘장한 여고생들이 40명이나 탔던 것.`달리는 열차 안에서 승객들 모습 크로키 하기` 따위의 특이한 사생대회를 하는 모양인데, 꽤 유명한 학교인지 방송국에서 취재까지 나와 있었다. 녹화용 TV카메라가 여러 대 보였다.기차에 오른 아이들 중 맹랑한 꼬마아가씨 둘(튜바와 제랄드)이 다가와 망설임 없이 물었다.“어디서 왔어요?”“한국에서 왔는데.”“우리랑 함께 앉아서 갈래요?”그 질문에 보통의 40대 아저씨라면 당연히 이렇게 답해야 옳다.“아니야. 나는 여기서 경치를 보며 가는 게 편해. 너희는 가서 그림 그리렴.”그런데, 기자는 보통이나 보편을 거부하는 성정. 해서 이렇게 대답했다.“Sure. Why not?”이런 날이 아니면 언제 친구 딸 또래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볼 것인가. 둘은 복잡한 기차 안에서 완성한 그림들을 보여준다.거기엔 기자의 얼굴도 있었다. 그림의 미적 완성도와 솜씨를 떠나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방인에 대한 따스한 관심이 담겨 있는 그림이니 말이다.`페이스북 친구`가 되자며 이메일 주소를 알려준 튜바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제랄드.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해줬다.`오냐, 친구 하자. 뭐 어떠냐. 우정에 국경과 나이가 무슨 상관이라고.`그날 이후 둘은 페이스북 친구가 됐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여전히 기자의 가장 어린 친구들로 남아 있다.10년 후쯤 다시 이스탄불을 찾아 재회할 땐 튜바와 제랄드 모두 렘브란트와 살바도르 달리를 뛰어넘는 멋진 화가가 되어있기를. ▲ 아이들 사이엔 `종교`와 `인종`을 가르는 벽이 없다이스탄불 교외선 기차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터키 친구들을 얻었다면, 이스탄불 바다 위를 떠가는 배 위에선 인종과 종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해질 무렵. 유럽 지역을 출발해 아시아 지역을 한 바퀴 경유한 후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는 보트 투어를 했다.터키에서만 맛볼 수 있는 드라마틱한 대륙 넘나들기. 승선 요금은 12리라.우리 돈으로 대략 4천원.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바다건, 강이건, 호수건 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배 타는 걸 좋아하는 기자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이스탄불에서 지내는 동안 무려 4번을 같은 배에 올랐다.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국경을 넘지 못하는 나라에서 살아온 국민인지라 잠깐 동안에 `대륙을 넘나드는` 생경한 매력에 흠뻑 빠졌던 것 같다.각설하고. 그날 배의 객실. 이스라엘에서 놀러온 여행객들과 마주 보는 좌석에 앉았다. 똘똘해 보이는 여섯 살 사내아이가 귀여웠다. 엄마와 이모도 친절했고, 꼬마를 안고 함께 사진을 찍은 아저씨 역시 서글서글 사람이 좋았다. 그들은 두말 할 것 없이 유대인. 우리 좌석 뒤에는 히잡(Hijab)을 쓴 무슬림 가족이 탔다. 그 가족 중엔 이스라엘 꼬마아이와 동갑인 여섯 살 소녀도 있었다. 그 아이도 너무 귀여웠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자”고 하니 부끄러워하면서도 포즈를 잡는다. 역시 어려도 여자는 여자였다.그런데 두 꼬마아이, 그러니까 유대인 소년과 무슬림 소녀 사이엔 종교와 인종이라는 무섭고, 무거운 벽이 존재하지 않았다.빨간색 사탕과 뻥튀기 과자를 서로 건네며 마치 어린 연인들인양 손을 잡고 놀았다. 갑작스런 깨달음이 눈앞으로 휙 지나갔다.우리가 모두 아이였다면 인종과 종교가 불러들인 전쟁과 학살, 탐욕과 엇나간 욕망이 초래한 수많은 비극들이 애초에 없었을 것을.그날, 기자는 인류가 화해와 상호이해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아이들의 크고 맑은 눈동자에서 보았다.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시원했고,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본 이스탄불의 석양은 아름다웠다.맞다. 우리는 모두 한때 `아이`였다. 인류의 불행은 `아이의 마음`을 잃거나, 잊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니,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터키는…동방~서방 문화 연결 가교관광지선 영어 통용돼국민 절대다수 이슬람교도아시아 대륙 서쪽 끝에 자리한 나라로 “유럽의 입구, 아시아의 출구”로 불린다. 1920년대 술탄(Sultan·이슬람국가의 정치 통치자) 제도가 없어지기 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1297~1922)으로 존재했다. 1923년 10월 공화국이 됐다. 이와 동시에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근대화정책도 속도를 냈다.공식 명칭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 동쪽으로는 이란과 아르메니아, 조지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남쪽에는 이라크와 시리아가 있다. 북서쪽으로는 불가리아, 그리스와 접한다,북쪽엔 흑해, 남쪽엔 지중해, 서쪽엔 에게해와 마르마라해가 있다. 모두 아름다운 바다지만, 옛날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유권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으로 역할 해왔고, 역사적으로도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연결하는 가교였다. 이와 같은 위치적 특성 탓에 정치적인 부침이 극심했다.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의 후계를 잇는 국가임을 자임한다.많은 수의 주민은 터키인(75%). 1980년대 중반부터 동쪽 지방에 거주하는 쿠르드족(18%)이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여러 차례의 유혈사태로 번졌고 현재도 종족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터키인과 쿠르드인 외에도 그리스인과 불가리아인 등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면적은 78만3천562㎢. 해안선의 길이는 7천200km에 이른다. 수도는 앙카라(Ankara). 하지만, 매년 수백만 명의 여행자가 몰리는 곳은 인상적인 모스크(mosque·이슬람교의 예배당)와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는 이스탄불이다. 이즈미르, 안탈리아, 카파도키아 지역 등에도 많은 외국인이 방문한다.▲ 이스탄불 유람선에서 만난 꼬마.공용어는 터키어. 하지만 관광지에선 영어가 어렵지 않게 통용된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이슬람교도(99%)다. 1% 정도의 사람들만이 천주교, 기독교, 유대교를 믿는다. 사용되는 화폐는 터키 리라(TL). 1터키 리라는 한국 돈 약 330원이다. 100 터키 리라 정도면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인구는 8천만 명이고, 평균수명은 73세.내륙지방은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해안은 해양성 기후다. 북동부와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는 여름엔 기온이 높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가장 추운 시기는 1~2월. 이때 평균기온은 0℃~10℃다.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은 지중해성 기후. 여름은 고온·건조하고 겨울은 온화하지만 습기는 높다. 연평균 기온은 18℃~20℃.한국전쟁 당시 많은 수의 군인들을 파병했다. 그런 이유에선지 나이 지긋한 터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부른다. 여유롭고 친절한 국민성으로 관광객들을 대한다. 또 하나 재밌는 특징은 설탕을 듬뿍 넣은 홍차를 너나없이 즐긴다는 것. 하루 10잔 넘게 홍차를 마시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도 있다.글/홍성식기자·사진/류태규

2017-09-08

그곳, 코발트블루의 아득한 바다 그저, 무색의 빛으로 스며들다

여름도 끝자락에 이르렀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 여름. 폭염과 폭우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도시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는 먼 바다로 떠나는 꿈을 꾸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통유리와 자동차의 소음. 이는 도시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그것들을 몰아내면 어떤 공간이 그려질 수 있을까? 아마도 푸른 파도의 나지막한 노래가 몸과 마음의 피로를 녹여주는 바다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기자는 그간 `아름다운 해변`이라 불리는 국내외 여행지를 여러 곳 돌아봤다.적지 않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진다. “네가 가본 바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디야?”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잠시 후에 내놓기로 하고 먼저 기자의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공간`으로 자리 잡은 몇 개의 해변을 말해볼까 한다.▲ 낭만 가득한 석양… 인도의 베나울림 해변일출이 희망과 다시 시작함의 은유라면, 일몰은 스산한 낭만과 적멸의 메타포다. 낙관적인 인간들은 일출에 감동하고, 비관과 냉소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몰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기자는 후자에 가깝다.인도를 홀로 여행했던 10여 년 전. 석양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고아(Goa)에서 보름쯤을 머물렀다. 그 붉은빛이 “사람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든다”는 아라비아해의 석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과연 그랬다. 거기 머문 보름 동안 해질녘만 되면 석양빛에 감동한 심장이 쪼그라들었다.고아의 해변들 중에서도 유럽 여행객 사이에서 인기 높은 안주나 해변이나 팔롤렘 해변보단 아직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친 베나울림 해변이 가장 좋았다. 거기서 5일을 묵었다.20대를 인도에서 히피로 보냈다는 이탈리아 할머니, 프랑스 여대생 살리나와 함께 베나울림 해변의 모래밭에 앉아 아라비아해의 서쪽으로 까무룩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던 그날들.그 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영혼까지 핏빛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것 같다.▲ 푸른 잉크를 쏟아 부은 듯… 아드리아해동쪽으론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를 끌어안고, 서쪽으로 이탈리아를 품은 아드리아해. 그곳 물빛은 네이비블루 잉크 수십 만 병을 쏟아 부어 만든 것 같다. 그 역시 투명한 푸른빛으로 유명한 필리핀 비사야 군도(群島) 외딴섬 발리카삭의 바다보다 더 푸르렀다.아드리아 바다의 푸른빛 아름다움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주는 건 고풍스런 붉은색 지붕으로 축조된 동유럽의 집들이다. 야트막한 산에 올라 옅은 붉은색 지붕과 근사한 조화를 이루는 짙은 푸른색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낭만, 놀라움,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도트프린터의 소리를 내며 머릿속으로 `촤르륵` 지나간다.동쪽에서 서쪽으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최고의 `뷰포인트(view point)`는 크로아티아의 고도(古都) 두브로브니크다. 사람이 서넛밖에 없는 매끄러운 자갈 깔린 조그만 해변에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면 `행복의 절정`이 뭔지 실감하게 된다. 이 말이 과장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두브로브니크를 가보고도 그 생각을 바꾸지 않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드리아해가 지구 위의 사파이어라면, 두브로브니크의 이름 없는 작은 해변들은 아드리아해가 선물한 보석이다.이탈리아의 남부 해변도시 아말피와 포지타노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최고의 뷰포인트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도시.절벽을 끼고 2차선 좁은 도로를 낡은 버스가 위태롭게 달린다. 그러나, 누구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엽서 같은 풍경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앞에 두고 터뜨리는 감탄사는 동양인과 서양인, 백인과 흑인, 노인과 아이가 다르지 않다는 걸 그 길에서 알게 됐다.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포지타노의 한 레스토랑. 웨이터가 아일랜드 배우 콜린 파렐보다 잘 생겼다. 이탈리아는 그런 나라다. 아름다운 해변을 오가는 미남과 미녀들.오른쪽에서 본 착한 사람이 왼쪽에서 본다고 나쁜 사람이 될 리 없다. 아드리아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보건, 서쪽에 서서 동쪽을 향해 눈을 맞추건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다시 만나고 싶은 바다 아드리아. 그리고, 두브로브니크 붉은색 지붕들.▲ 기자가 만난 최고의 바다… 피피섬이제 앞서의 질문에 답할 시간이 됐다. “당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어디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별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태국의 피피섬 물빛을 잊을 수 없다”고.인간의 눈으로 보는 바다의 빛깔은 그 아래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서해와 동해의 바다 색깔이 다른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혹당하는 바다의 빛깔은 청옥색. 이른바 코발트블루 색채다. 바다가 그 빛깔을 띠기 위해서는 아래에 산호가 있어야 한다.그 눈 시린 푸른색은 서로에게 심상한 `아주 오래된 연인들`까지도 낭만적 감상으로 내몰아 바닷가에서 정열적으로 입을 맞추게 할 정도다.태국과 인도 사이의 바다인 안다만(灣). 그곳을 여행한 사람들은 안다만의 백미(白眉)로 피피섬을 지목한다. 피피섬 일대 바다는 왕조시대 청옥을 수만 보따리 빠뜨린 것처럼 맹렬한 코발트블루 색채를 띤다. 무성한 산호숲을 품에 안은 바다.2006년과 2011년에 여행한 피피섬. 첫 번째로 그 섬을 방문했을 땐 태평양 일대를 폐허로 만든 쓰나미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이었다. 수십m의 파도에 휩쓸려 가버린 호텔과 집을 복구하며 땀을 흘리던 까만 얼굴의 태국인들을 기억한다. 그렇다. 피피섬은 바다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인간이 이어가야 할 삶의 소중함까지 기자에게 가르쳤다. 푸른 물결이 유혹하는 태국 해변들누가 뭐라 해도 태국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사파이어빛 바다와 백옥처럼 빛나는 모래밭에서 누리는 휴양이다. 여기에 각종 해양스포츠도 태국 해변을 찾는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해안선과 아찔한 절벽으로 가득한 수천 개의 섬이 손짓하는 나라. 물살을 가르며 제트스키를 타거나,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거나, 싱싱한 새우와 생선으로 만든 요리를 맛보거나….태국의 바다를 즐기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아래 태국의 대표적인 휴양지 세 곳을 소개한다.◆ 태국에서 가장 큰 섬 `푸켓`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푸켓은 태국의 진주다.” 방콕에서 남쪽으로 891km 지점에 위치한 푸켓은 태국에서 가장 큰 섬이기도 하다. 일 년 내내 동서양 관광객이 몰려드는 해변은 에너지로 가득하다.넓은 백사장과 얕고 완만한 경사의 바다는 수영을 즐기기에 최적의 여건을 제공한다. 지척에는 한국인들에게 인기 높은 피피섬이 있고,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국적인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높았다.◆ 130개의 아름다운 섬을 만날 수 있는 `크라비`태국 남부 크라비주(州)의 해양도시다. 푸켓에서 뱃길로 45㎞ 지점에 위치한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는 건기인 12월에서 3월까지다. 하지만 스콜이 잦은 9~11월에도 나름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13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크라비 군도엔 수백m의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정글과 원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석회암 동굴도 멋진 볼거리다.◆ 조용한 휴가를 즐기고 싶다면 `코사멧`잔잔한 물결 일렁이는 바다와 하늘을 물들이는 붉은 석양. 코사멧은 유명 휴양지의 시끌벅적함을 피해 조용한 휴가를 즐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섬이다. 방콕에서 남동쪽으로 220km 가량 떨어진 코사멧은 `카오 렘 야-무 코사멧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19세기 발표된 태국의 서사시 `프라 아파이 마니(Phra Aphai Mani)`의 배경이 된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를 증명하듯 해변엔 서사시의 주인공인 왕자와 인어가 동상으로 서있다.글/홍성식기자사진제공/구창웅

2017-09-01

달달한 연인들 속삭임에 도망쳤던 그 밤, 쓴 술잔은 강처럼 넘치고

많은 돈을 쓰고 다닌다면 여행은 편해진다. 넓고 안락한 호텔에서 자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신선한 재료로 만든 희귀한 요리를 먹고, 버스나 기차가 아닌 기사가 운전하는 리무진에 올라 경치 좋은 곳을 돌아보는 여행이 나쁠 것은 없다.그러나 이런 호사스런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보통의 여행자들은 가능한 돈을 아껴가며 새로운 문물과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자 한다. 기자 역시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면서 여행을 좋아하는 터라 `절약하는 여행자`에 가깝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 갔을 때도 “하루에 1만 원 정도로 이 도시를 즐겨보자`는 마음을 가졌다. 그때 겪은 일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가난한 연인들5시간쯤의 비행 끝에 방콕에 도착한 첫날. 버스를 타고 카오산 로드로 가서 숙소부터 잡았다. 1980년대 한국의 여인숙 같은 허름한 곳이었다. 열대과일 썩는 냄새가 풍겨오는 골목 끝자락에 무너질 것처럼 자리 잡은 싸구려 숙소는 이름까지 작고 초라했다. `미니 게스트하우스`.손님을 맞이하는 주인 할머니의 키도 조그맣고, 방도 조그맣고, 오래된 목조건물이라 계단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형편없는 숙소를 잡은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왜냐? 저렴하니까. `미니 게스트하우스`의 하루 숙박비는 200바트(한국 돈 7천원).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골방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숙소 골목을 빠져나와 카오산 로드의 흥겨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느긋한 표정으로 오가는 세계 각국 여행자들을 구경하며 맥주에 싸구려 위스키를 섞어 마셨다. 그것만으로도 일상의 스트레스가 절반은 풀리는 느낌이었다.밤이 깊어지니 피곤이 몰려왔다. `미니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갈 시간. 숙소 문을 밀고 들어가 낡은 계단을 오르다 젊은 태국인 커플과 마주쳤다. 둘 다 선량한 표정과 순수한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사실 방콕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건 백인 남성과 태국인 여성 커플이다. 방콕을 포함한 태국 대부분의 관광지엔 은퇴하고 태국에서 여생을 즐기는 60대 이상의 유럽인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지처 역할을 하는 태국인 여성과 함께 생활한다. 보기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커플들만 보다가 젊은 태국인 연인을 만나니 참 좋았다. 어디 먼 시골마을에서 방콕으로 놀러온 것인지 짐도 무거워 보였다. 환한 얼굴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커플의 방은 2E. 기자의 방은 2D였다. 그런데, `미니 게스트하우스`의 조악한 방음 시스템 탓에 곤란한 일이 생겼다. 방 사이를 아주 얇은 베니어합판 하나로 막아놓은 구조라 옆방의 숨소리까지 들렸던 것이다. 자칫 트림이라도 하면 그 소리가 합판을 넘어갈 게 분명했다.듣고 싶지 않았지만 옆 방 연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 나지막한 웃음소리, 심지어 입 맞추는 소리까지 모두 들렸다.옛날 한국의 여인숙이 벽의 윗부분을 뚫어 형광등 하나로 2개의 방을 밝혔다던가. 그날 기자의 방 분위기가 딱 그 모양새였다.도무지 민망해서 더 이상은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방을 나와 다시 카오산 로드로 갔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칵테일을 마시는데 이상하게 술맛이 썼다.새벽까지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쏘다니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간 건 새벽 무렵이었다. 전날 밤 나의 고통과 고난(?)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찍 일어난 태국인 커플이 마당에서 인사를 건넸다. 환하게 웃는 그들 앞에서 기자 역시 웃을밖에 도리가 없었다.간밤의 해프닝은 `싸구려 숙소가 선물한 색다른 경험이라 생각하면 되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때 떠오른 게 신경림(81)의 시 한 구절이었다.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그렇다. 태국이건 한국이건, 그 연인이 부자건 가난하건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더위 피하는 좋은 방법방콕의 더위는 악명이 높다. 한국의 여름 날씨는 그곳에 비한다면 짜증스러운 것도 아니다.끈적거리는 땀과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squall·열대지방의 세찬 소나기), 아스팔트를 녹일 것처럼 이글거리는 태양…. 이것들 모두가 방콕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이다.특히 카오산 로드에선 에어컨이 가동되는 식당이나 카페가 아니라면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전까지 더위를 피할 곳이 마땅찮다. 기자가 몇 차례 태국을 여행하면서 얻은 `더위 피하는 노하우` 하나를 살짝 알려줄까 한다.카오산 로드에서 10분쯤 가면 `차오프라야 보트 선착장`이 있다. 말 그대로 차오프라야강(江)을 오르내리는 배가 승객을 싣는 곳이다. 시원한 강을 따라 1~2시간 정도 천천히 운행되는 배의 승선료는 겨우 15~25바트(500~800원). 그걸 타고 종점까지 쭉 가보는 거다.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배에 오르면 일단 선수(船首)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앞쪽엔 좌석이 비어 있을 가능성이 높고 전망도 거기가 훨씬 좋다. 게다가 깨끗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강물도 튀지 않는다. 그렇게 앞쪽 좌석만 확보한다면 호화로운 `보트 투어`가 부럽지 않다. 서울 한강 유람선이나 포항운하 유람선에 비하면 가격도 공짜에 가깝다. 그 배를 타고 차오프라야강을 떠가다 보면 태국 동전에 선명하게 새겨진 `왓 아룬(Wat Arun)`의 거대한 석탑이 보이고, 왕궁 지붕도 보인다. 사원과 수상가옥, 높게 솟은 방콕의 마천루도 한눈에 들어온다.그렇게 저렴한 뱃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면 폭염의 오후가 끝나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루 1만원의 적은 비용으로 돌아본 태국이 그립다. 무지막지했던 방콕의 더위까지 그리울 정도다. 태국 여행에서 꼭 맛봐야 할 것들태국 요리는 그 나라 사람들의 느긋한 성품과는 달리 향이 강하고, 자극적인 맛을 낸다. 팟타이, 카오팟, 솜땀, 톰얌쿵 등 이름도 재미있다. 해산물과 육류, 각종 향신료를 사용해 만드는 다양한 요리를 맛보는 건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의 하나다.여기에 망고, 파인애플, 바나나 등의 신선한 과일과 저마다 화려한 색깔을 뽐내는 칵테일도 태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반가운 친구다.◆태국 카페에선 싱그러운 칵테일 `모히토`를영화 `내부자들`에서 배우 이병헌이 “모히토 가서 몰디브 한잔 마셔야겠다”는 대사를 남겨 유명해진 칵테일이 바로 모히토다. 민트와 화이트 럼, 소다수와 설탕 등을 넣어 만드는 모히토는 특유의 초록 빛깔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화이트 럼의 양을 줄이면 술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즐길 수 있다. 특히, 태국에선 신선한 민트가 많이 생산돼 모히토의 향이 뛰어나다. ◆ 거리에서 맛보는 볶음밥과 볶음국수적지 않은 여행자가 말한다. “태국이야말로 길거리 음식의 천국”이라고. 기자 역시 이 의견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카오산 로드는 물론이고 관광지라고 이름 붙은 곳이라면 어디서건 즉석에서 볶음밥, 볶음국수, 과일 팬케이크를 만들어주는 노점을 볼 수 있다. 싼값으로 한 끼를 해결하려는 젊은 여행자들은 이런 태국 길거리 음식에 환호한다. ◆ 해변에서는 싸고 맛있는 생선과 새우를 푸켓, 코사무이, 코사멧, 크라비, 피피 섬 등 태국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지천이다. 새파란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다가 배가 고파지면 바닷가에 줄지어 늘어선 식당에 들어가 큼직한 새우나 바닷가재를 구워달라고 주문해보자. 그 감칠맛을 잊기 힘들 것이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열대의 생선들도 독특한 맛을 낸다. 한 번쯤은 먹어볼 만하다.글/홍성식기자사진제공/구창웅

2017-08-25

배낭 여행자들의 `꿈의 나라` 바가지와 사기꾼 넘치는 곳 카오산 로드의 `빛과 그림자`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다양한 인종들이 뿜어내는 색색깔의 에너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미지의 땅을 탐험하려는 수백 명의 청년들….장기간의 배낭여행을 꿈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태국 방콕의 카오산 로드(Khaosan Road)는 `꿈의 공간`처럼 인식돼온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곳의 독특한 문화를 소개한 책도 여럿이다. 실제로 카오산 로드엔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와 음식점이 넘쳐난다. 그곳에서 1~2개월을 머물며 태국을 포함해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의 동남아 국가를 여행하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태국 왕궁에서 1㎞ 정도 거리에 위치한 방람푸 시장. 카오산 로드는 그 일대에 형성된 `여행자들의 거리`를 지칭한다. 지금으로부터 40~50년 전 유럽의 청년들이 그 주위를 아시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유명해졌다.그 명성은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오늘도 카오산 로드엔 `아시아의 문화`와 `매력적인 요리`에 호기심을 가지거나, `뜨겁고 빛나는 태양`을 그리워하는 스웨덴과 독일, 네덜란드와 캐나다의 여행자들이 넘쳐난다.그런 이유로 몇몇 사람들은 카오산 로드를 “배낭여행자의 베이스캠프”라고 부르기도 한다. 약간의 과장이 섞였겠지만 선뜻 나서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견해다. ▲ 카오산 로드의 빛… 정보를 교류하고 친구 만드는 공간카오산 로드가 초보 여행자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선 짧게는 몇 개 월, 길게는 몇 년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길 위에서 생활하는 베테랑 여행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그들에게 얻어내는 여행 관련 정보는 생생하고 현실적이다. 여행에 있어서 정보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여행지의 교통 현황과 현지에서의 안전수칙 등은 계절과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에서 구하는 정보는 정확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곳을 먼저 다녀온 선배 여행자가 제공하는 정보가 유용하고 귀한 이유다.쉽게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것도 카오산 로드가 주는 선물이다. 같은 입장에 처해있다는 것만으로도 젊은 여행자들은 빠르게 친해진다. `여행`이 공통의 화제로 등장하니 나누는 이야기도 재미있다.0.5㎞ 가량 이어지는 카오산 로드 골목골목엔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주점과 카페, 클럽과 기념품가게, 마사지숍과 여행사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북적대는 거리엔 바나나 팬케이크와 볶음국수, 과일주스를 파는 노점상도 수백 명이다.여기선 국적과 인종을 넘어서는 우정이 맺어지기도 한다. 밤마다 크고 작은 파티가 이어지고, 청년들의 뜨거운 가슴을 얼음 섞은 시원한 맥주가 식혀준다. 거리에서 춤을 추건 노래를 부르건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 중년의 여행자들은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껴보려고 일부러 카오산 로드를 찾기도 한다. ▲ 카오산 로드의 그림자… 바가지 상혼과 사기꾼들하지만 카오산 로드에 청춘의 낭만과 여행자의 우정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곳에도 냄새 고약한 어두움이 있다. 기자는 태국을 네 번 여행했다. 몇 해 전엔 카오산 로드에서 1개월 이상 머문 경험도 있다. 다른 여행자들처럼 값싼 숙소와 특유의 분위기에 끌려서다.카오산 로드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즐겁게 보냈지만, 언제나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풍문이 전해준 “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적도 여러 번이다.하기야 카오산 로드를 극찬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엔 이 거리를 “여권을 버리고 남의 나라에 몇 년씩 불법 체류하는 부랑자들이 모이는 곳” 혹은 “매춘부와 사기꾼이 득실대는 고약한 동네”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기자 역시 카오산 로드의 `그림자`를 몇 차례 본 적이 있다.한 번은 1천200바트(약 4만 원)를 주고 낡은 호텔을 잡았다. 카오산 로드에서 그 정도면 아주 싼 숙소는 아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불결하고 불친절했다. “차라리 2만 원짜리 한국 시골 여인숙이 낫겠다”는 혼잣말이 나올 정도였다. 좁디좁은 욕실엔 언제 닦았는지 알 수 없는 깨진 거울이 있었고, 바닥 타일은 쥐덫처럼 끈적였다. 수건은 걸레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공짜로 잠을 재우는 것도 아니면서 너무한다 싶어 항의를 했다. 돌아온 종업원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란다. 사람들이 몰리는 시기니 객실과 욕실의 상태를 지적하는 손님은 받지 않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돈을 주고도 `노숙자 취급`을 받은 그날의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카오산 로드엔 관광객을 상대로 크고 작은 사기를 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현지 여행사, 레스토랑, 술집에선 이런 사기꾼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볼 수 있다.“당신에게만 이 가격으로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이라는 말을 믿고 캄보디아행 항공권을 샀다. 하지만 그 티켓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행사의 동일한 항공권보다 20달러가 비쌌다. 그 사실을 확인한 후 황당해하는 기자를 향해 일본인 여행자가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런 사례 외에도 `카오산 로드의 그림자`라고 불릴만한 건 많다. `레스토랑`이라 이름 붙여놓고 화장실을 1970년대 공동변소 수준으로 관리하는 식당 주인의 배짱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화장실 바로 옆에서 시커먼 기름에 손님이 주문한 새우를 튀기고 있는 장면은 또 어떤가.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카오산 로드의 술집 주인들은 취했다고 생각되는 이들의 계산서엔 마시지도 않은 맥주 2~3병 가격을 더 써놓는다. 그걸 발견한 기자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항목을 짚어 따지자 슬그머니 “실수했다”며 비굴하게 웃는 얼굴을 봐야하는 심정이라니….그랬다. 세상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카오산 로드 역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거리였다. 국민 90% 불교 신자 느긋하고 조용한 나라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가운데 위치한 국가다. 19세기 유럽 강대국이 진행한 `아시아 식민지화 열풍` 속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걸 막았다.비슷한 시기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위해 행정과 사법제도의 개혁도 추진했다. 1932년 입헌군주국이 됐고, 1939년엔 나라 이름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꿨다. 태국(泰國)은 타이의 한문 음차다.면적은 약 51만4천㎡로 한국의 2.3배쯤 된다. 열대몬순 기후를 나타나며 비가 많은 우기는 7월에서 10월, 비교적 건조한 날씨가 계속돼 여행하기 좋은 시기는 11월부터 2월까지다. 수도는 방콕(Bangkok)이고 인구는 6천500만 명. 인종적으론 태국계(75%)가 많고, 중국계(14%)와 말레이계(11%)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평균수명은 73세.공용어인 태국어가 있지만, 대부분의 관광지에선 영어가 사용된다. 조그만 잡화점을 운영하는 사람도 기본적인 영어는 구사하기에 북미와 유럽 관광객은 어렵지 않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국민의 절대다수가 소승불교 신자(90%)다. 엄청난 숫자의 사찰이 나라 곳곳에 존재하고, 심지어 술집에서도 부처에게 기도를 올리는 종업원을 볼 수 있다. 적지만 이슬람교도(6%)와 기독교도(2%)도 있다.태국에서 왕은 상징권력 이상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다. 현실 정치는 총리가 담당한다. 최근 10여 년 사이엔 몇 차례 정치적 혼란이 있기도 했다. 서북쪽으론 미얀마가 자리하고, 북동쪽엔 라오스가 있다. 동쪽 국경은 캄보디아, 남쪽 국경은 말레이시아와 접해 있다. `태국의 보석`은 누가 뭐래도 짙푸른 사파이어 색채로 빛나는 안다만해(Andaman Sea)이다. 해안선의 길이도 자그마치 3천219㎞에 이른다. 그 바다에 산재한 아름다운 섬들은 일 년 내내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한국인 관광객들도 적지 않다. 국민들은 `동남아시아에서 강대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사용되는 화폐 단위는 바트(Baht). 1바트는 2017년 8월 현재 한국 돈 약 34원이다. 유명한 관광지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물가지만, 다소 한적한 마을에선 20~30바트 정도에 볶음밥이나 쌀국수를 먹을 수 있다.국민성은 느긋하고 조용한 편이다. 외국인에게 편견을 가진 이들도 드물다. 북부 치앙마이(Chiang Mai)와 치앙라이(Chiang Rai)는 역동적인 트래킹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고, 코사무이(Ko Samui)와 크라비(Krabi) 등 남부의 해변도시는 신혼부부와 젊은 연인들에게 인기 높은 여행지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8-18

`영원한 스물일곱` 짐 모리슨을 만나다

20대 초반부터였다.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싶었던 건. 3만5천 점의 고대와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는 `루브르 박물관`이나 고흐와 모네 등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명작이 줄줄이 내걸린 `오르세 미술관`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파리를 상징하는 불 밝힌 에펠탑 아래서 인증사진을 찍거나, 몽마르트르 언덕 `화가의 거리`에서 싸구려 초상화의 모델이 되고 싶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기자에게 파리는 `페르 라셰즈` 혹은 `짐 모리슨`(Jim Morrison·1943~1971)과 등호였다.1960년대 활동한 록밴드 도어스(The Doors)의 보컬리스트였던 짐 모리슨은 절망과 희망, 빛과 그림자, 고통과 환희, 삶과 죽음…. 이 모든 심각한 단어의 절정을 살아냈다.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질주하고자 했던 영혼이 지구에서 증발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만 스물일곱. 삶의 허리가 가혹하게 부러진, 두말 할 것 없는 요절(夭折)이었다.`플래툰`(베트남전쟁의 비극을 다룬 작품)과 `JFK`(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소재로 한 작품) 등의 영화를 통해 1960년대 미국의 역사에 천착해온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감독도 젊은 시절부터 짐 모리슨에 매료돼 있었다.“차가운 얼음 속에서 뜨겁게 타고 있던 불꽃”이라 불러도 좋을 짐 모리슨의 굴곡 많았던 일대기를 그려내고자 한 올리버 스톤의 영화가 바로 `도어스`(제작 1991년)다. ▲ 영화에서 만난 `페르 라셰즈`를 찾아 지하철에 오르다우울한 얼굴과 곱슬거리는 긴 머리칼을 가졌던 짐 모리슨의 인생이 독한 위스키와 마리화나, 마구잡이의 난교(交)만으로 이뤄졌을 것이라 착각해온 관객들은 이 영화에 경악한다.사실 짐 모리슨은 10대 때부터 프랑스의 표상주의 시인 랭보와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던 조숙한 문학청년이었다.어릴 적 여행에서 본 아메리카 인디언의 죽음을 평생 잊지 못했던 그는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삶의 이면(裏面)을 꿰뚫어 본 사람이었다.제 또래 군인들이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걸 마음 아파했던 짐 모리슨은 `반전(反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그런 짐 모리슨이었으니 `광기`로 가득한 1960년대를 정면에서 마주 보기 힘들었을 터. 자학과 다를 바 없는 폭음과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무대에서의 기행(奇行·짐 모리슨은 수천 명의 관객과 경찰들이 지켜보는 콘서트에서 바지를 벗어버리기도 했다)은 그가 1960년대를 견디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어쨌건, 미국인이었던 짐 모리슨은 프랑스 파리에서 죽는다. 시체 인수를 거부한 아버지 탓에 시신은 파리에 묻힌다. 그곳이 바로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도어스`의 마지막 장면은 카메라가 짐 모리슨의 무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3~4분의 과정을 담고 있다. 배경음악으론 알비노니(Albinoni)의 `아다지오`(Adagio)가 비장하게 흐른다.그 영화를 본 게 스물한 살 때였던가?25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짐 모리슨의 묘지를 찾아가게 된 기자의 심정은 첫 키스를 앞둔 열일곱 소년처럼 떨리고 있었다. 숙소 인근 브레게 사방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페르 라셰즈역을 향했다. 역에서 10여 분을 걸어가니 묘지의 입구가 보였다. 초여름, 파리의 새파란 하늘에서 갑작스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밤처럼 어두워진 거리에서 심장은 더욱 세차게 뛰었다.“문학과 영화, 음악이 없다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던 10대 소년이 자신의 우상을 마흔여섯 살이 돼서야 만나게 된 것이다. 비록 짐 모리슨이 지상의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가슴 떨림은 제어할 길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엔 짐 모리슨 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다.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와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극작가인 동시에 배우로도 유명했던 몰리에르(Moliere)도 부침(浮沈)이 거듭됐던 고단한 생애를 그곳에 눕혔다.페르 라셰즈는 규모 또한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소나기를 맞으며 3시간쯤을 헤매 다녔다. 그럼에도 묘지의 10%도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짙은 초록색 이끼가 낀 오래된 조형물들의 미적 완성도를 보자면 페르 라셰즈는 공동묘지라기보다 조각전시장에 가까웠다. 묘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사라졌던 태양이 어두운 하늘 구름을 헤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짐 모리슨의 묘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생각보다 작았고 의외로 초라했다.1년이면 수만 명의 숭배자들이 찾아온다는 사실은 무덤 앞에 놓인 수천 장의 낡은 쪽지가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크메르어와 스와힐리어까지. 짐의 죽음을 슬퍼하는 메시지는 수십 개의 언어로 적혀 있었다. 같은 대상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쉽게 친해질 수 있다.`도어스`의 음악에 매료된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은 짐 모리슨의 묘지 앞에서 금방 친구가 됐다.이스라엘에서 온 두 명의 청년은 기타를 연주하며 `피플 아 스트레인지`(People are Strange)를 불러 참배객들의 박수를 받았고, 몸 곳곳에 피어싱을 한 네덜란드 여대생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웨이팅 포 더 선`(Waiting For The Sun)의 리듬에 맞춰 요정처럼 춤을 췄다.노래와 춤으로 추모할 대상이 있는 그들은 어느새 `우리`로 변해 있었다.기자 역시 페르 라셰즈에서 펼쳐진 `기이한 축제`의 일원이 돼있었다. 청춘의 열기로 뜨거워진 짐의 무덤 앞으로 잠시잠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그 바람에 실려 온 짐 모리슨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었다.“열정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 청춘은 영원하다. 해서,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도 그런 삶을 살아라.” 파리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여행자의 취향에 따라 결정되는 게 여행 패턴이다. 어떤 사람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미술관을 방문하며, 오래되고 멋진 건축물을 만나는 `낮 관광`에 방점을 찍는다. 또 다른 부류는 `밤 여행`을 즐긴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안개 낀 낯선 골목의 분위기가 선물하는 이질적인 감정을 만끽하는 것이다.프랑스 파리의 `낮`에 관해선 너무나 많은 정보가 넘쳐난다. 가이드북만 펼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게 `파리의 낮`이다. 해서, 기자는 정보량이 다소 적은 `파리의 밤`에 관해 잠시 이야기해볼까 한다.◇ 파리의 청춘들, 센 강변에서 노상방뇨를파리를 찾은 첫날 밤. 엄청난 시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면으로 뒤척이다가 결국은 호텔을 나섰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센 강의 검은 물결이 보고 싶어 강변을 향해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늦은 밤이었음에도 가슴 속 뜨거운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파리의 청년들이 센 강 둔치에서 맥주와 포도주를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 봐라. 가로등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곳에선 노상방뇨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놀라운 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낯이 뜨거워진 건 그들이 아니라 이 광경을 지켜보는 기자였다. 이튿날 파리에 거주하는 지인을 통해 왜 그런 풍경이 반복되는지 들을 수 있었다. “센 강변엔 공중화장실이 적어요. 게다가 모두 유료거든요. 술값을 아끼려고 카페가 아닌 둔치에서 맥주를 마시는 애들이 돈 주고 화장실을 가겠어요?” ◇ 몽마르트르 언덕엔 올빼미가 산다 낮에는 힘없이 드러누워 있다가 밤이 되면 눈동자 번득이며 활동을 시작하는 게 비단 흡혈귀 드라큘라(Dracula) 백작만은 아니다. 밤의 커튼이 드리워져야 활기를 찾는 `올빼미족`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한국에도 흔하다.프랑스의 수도 파리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가장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 몽마르트르 언덕 사크레쾨르 성당 주변이다. 계단에 앉아 도란도란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은 새벽 2시가 넘어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상대를 향한 애정 어린 손길과 키스는 누가 보건말건 무시로 오간다. 맞다. 청춘이 사랑을 나누는데 공간이 뭐 중요하며,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덧붙여 중요한 정보 하나 더.밤에 담배가 떨어져 곤란에 빠진 헤비 스모커나 포도주 한 병이 간절해 철문이 굳게 닫힌 슈퍼마켓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는 여행자가 있다면 아랍인이나 중국인이 운영하는 잡화점을 찾으면 된다. 그들의 가게는 새벽까지 술과 담배를 판매한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8-11

파리의 연인들, 누구도 거부 못할 낭만 속을 걷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낯선 곳에서 맞는 아침은 어색하다. 평소 살아온 공간으로부터 수천 km가 떨어진 곳. 전날의 과음으로 인해 편치 않은 위장을 달래줄 방식이 한국과는 판이한 프랑스. 콩나물국이나 뜨끈한 새우죽을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해장 방법을 찾아야했다. 아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을 뜨지 않은 새벽 6시. 허한 속을 달래줄 뭔가를 먹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다행이었다. 가까운 곳에 빵집이 있었다.바게트, 크루아상, 베이글, 샌드위치…. 이른 시간임에도 파리의 제과점은 갓 구운 빵들의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했다. 검은 머리칼이 한 올도 보이지 않는 은발의 할머니가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와 따스한 웃음이 세련돼 보였다.그런데, 빵을 고르고 값을 치르는 방식이 한국과는 많이 달랐다. 할머니의 새벽 빵집을 찾은 손님 중 어떤 사람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한 걸음 떨어져 빵의 냄새를 맡아보고, 색깔로 구운 정도를 확인한 후 아주 천천히 몇 개의 빵을 고른 파리 사람들은 전혀 급할 것 없다는 태도로 줄을 서서 자신이 값을 치를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후다닥~` 소리가 나도록 급하게 치즈케이크와 단팥빵을 쟁반에 주워 담고는, “빨리 계산해 주세요”라고 서두르는 `한국적 방식`을 보아온 기자는 조금 놀라웠다.어떤 방식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이런 게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프랑스 사람들의 `여유`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허겁지겁 골라 재빨리 값을 치르고 먹은 어떤 빵보다 자그마치(?) 20분을 기다려서야 먹을 수 있었던 그날의 크루아상이 유난히 맛있었던 게 기억에 남아있다. ▲ 가난한 거리의 연주자들… 그러나 얼굴엔 미소가파리에서 보낸 며칠을 떠올려보면 `한가로움`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소급된다. 프랑스가 지닌 `문화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인 파리 국립도서관과 퐁피두센터를 찾았을 때다.100m가 넘는 긴 줄을 서있음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조급함을 발견할 수 없었다. 행렬 속에 선 고등학생들은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고, 기자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40~50대 파리 시민들도 손에 든 신문이나 잡지를 들여다보며 나른한 봄날의 햇살을 즐기는 듯 보였다.비단 도서관이나 문화센터만이 아니었다. 파리 거리와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코디언이나 바이올린을 꺼내들고 버스킹(busking)을 하면서도 그들은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넉넉한 웃음이 그들을 `거리 연주자`가 아닌 유명한 공연장 무대에 선 `인기 뮤지션` 이상으로 멋져보이게 했다.삶은 받아들이는 자들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기엔 궁핍하고 곤궁할 수도 있는 예술가의 삶.하지만, 가난에 굴복하지 않고, 그걸 넘어 삶의 어떤 `궁극`에 닿으려는 노력이 있다면 허름한 입성의 거리 연주자가 연미복(燕尾服)을 갖춰 입은 유명 연주자만 못할 것이 무엇인가. 애초부터 예술은 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가난에 주눅 들지 않은 파리 거리의 음악가와 화가들을 보며 이런 물음을 던져봤다. “그들이 곤궁함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그건 다름 아닌 자신과 더불어 타자의 삶을 바라보는 `대범함`과 `여유`였다. 물질적 이유만으로 누구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는 당당한 자세에서 오는. ▲ 야트막한 파리 시내, 거기엔 높은 인간적 이상이…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우리가 `프랑스의 장점`으로 인정해온 것들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망명객 홍세화가 말한 `톨레랑스(관용의 정신)`도 흔들리고 있는 것이 2017년 파리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지속적으로 유입된 아랍계 이민자들에 대한 거부감은 적지 않은 프랑스의 청년들이 극우정당 `프랑스 국민전선` 대통령 후보인 마린 르펜(Marine Le Pen)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과도한 톨레랑스와 여유가 프랑스 젊은이들을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바뀐 세상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먹고사는 문제가 걸리면 모두는 예민해진다. 그건 동양인과 서양인, 젊은 세대와 노년층이 다르지 않다.하지만, 단순히 자신의 밥그릇이 위협받는다고 불합리한 이유와 온당치 않은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숟가락을 빼앗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는 다시 한 번 오래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이런 딜레마는 비단 프랑스만이 아닌 한국도 겪고 있는 사회변화의 과정이기도 하다.이러저러한 상념에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려 센 강 주위를 산책하기도 하고, 어둠이 깔린 파리를 배경으로 유유자적 떠가는 유람선에 올라 수천 년을 소리 없이 흘러온 강물을 바라보기도 했다.파리에 도착한지 사흘째였던가? 짙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던 날,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휘청휘청 몽마르트르 언덕을 향했다. 스스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놀라게 하는 눈부신 오후.사크레쾨르 성당 앞 난간에 올라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한눈에 들어오는 도시의 풍경.10층 이상의 높은 건물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 소박하고 야트막한 풍경에서 기자는 보았다. 정체와 퇴행으로 오해될 수 있는 `프랑스의 모든 오류`가 버릴 수 없는, 아니 버려서는 안 될 `인간만의 이상`으로 전이하는 광경을. 그건 분명 취기에 의한 환시(幻視)가 아니었다. `키스`와 `포도주`의 나라 프랑스그곳이 아시아건, 유럽이건, 아프리카건 어느 국가나 그 나라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는 있다.한국의 김치와 일본의 스시(壽司)는 두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인 동시에 그 안에서 국민성의 일부분까지 읽어낼 수 있는 문화코드이기도 하다.아프리카 국가들의 역동성과 이란 사람들의 한없는 친절도 그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역시 나라를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것들이 여럿이다.그것들 중 두 가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바로 `키스`와 `포도주`. 앞으로도 오랫동안 `프랑스` 하면 이것들이 자연스레 떠오를 듯하다. ◇ 주야불문, 장소불문… 파리 연인들의 입맞춤40대 중반을 넘어서니 어쩔 수 없이 `애정표현`에 있어선 다소간 보수적이 돼간다. 그런 기자에게 `키스하는 연인들`은 질투심과 부러움의 감정을 동시에 일으킨다.파리를 여행한 7일 동안 키스 장면을 얼마나 봤던가? 골목에서, 카페에서, 강변에서, 심지어 슈퍼마켓 안에서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키스를 하는 프랑스 사람들. 젊은 커플들이 많았지만, 중년도 있었고 60대로 보이는 노인들도 입을 맞추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보수적인 경상도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겐 도시 전체가 `로맨스 영화 촬영장` 같아 보일 것이다.파리 사람들은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란 말을 100% 신뢰하는 듯했다. 어둑어둑 해가 저무는 몽마르트르 언덕을 내려오며 보았다. 아시아계 남성과 유럽 여성이 애틋하게 서로를 안고 키스하는 모습을. 아름다웠기에 부럽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는 사랑에 빠지기 쉬운 도시다. ◇ 4유로짜리 와인의 근사한 맛과 향기 백포도주와 적포도주는 물론, 핑크빛 로제 와인과 기포가 입 안에서 시원스레 터지는 샴페인까지. 프랑스엔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수십 수백 종류의 포도주가 판매되고 있다. 게다가 가격도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다. 와인을 좋아하는 기자에겐 숙소 인근 조그만 슈퍼마켓의 주류 코너가 천국의 입구처럼 느껴졌다.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작품을 쓰던 카페에서 평소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생떼 밀리옹` 같은 고급 포도주를 마셔보는 호사는 파리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배낭여행자도 걱정할 필요 없다. 구멍가게나 슈퍼마켓에선 4~5유로(5~6천원)면 맛과 향이 썩 괜찮은 포도주를 구할 수 있다. 치즈 몇 조각을 함께 산다면 여행에서 만난 숙소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4-28

시끌벅적, 그러나 낭만적인 파리의 밤

비행기에 오른 지 10시간이 넘어섰다. 견딜 수 없이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멀고도 멀었다. 이전까지 경험한 최장시간 비행은 태국 방콕에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까지 날아갔던 8시간 남짓.인천공항에서 파리까지는 그보다 4시간쯤이 더 걸린다고 했다.집을 떠나 길 위에 나선 여행자를 설레게 하는 기내식과 무제한 제공되는 샴페인과 맥주도 서너 시간 정도의 지루함을 달래줄 뿐이었다.황지우의 시집과 프랑스여행 가이드북을 건성으로 뒤적이기도 하고, 비행기 좌석에 설치된 모니터로 영화를 보고,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클래식음악에도 귀를 기울여봤지만….시간은 대체 왜 이렇게 더디 가는 것인지.“인간이 처한 상황에 따라 시간은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인 속도로 흐른다”란 어느 철학자의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사실 비행기 안에선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좀 야박하게 말하자면 땅으로부터 수백m 혹은 수천m 위에 뜬 한정적인 공간에 수백 명의 승객이 갇혀 있는 꼴이다.형편이 넉넉지 않은 여행자라면 일등석은 물론, 비즈니스석도 언감생심.좁디좁은 이코노미 좌석에 불편하게 앉아 건네주는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어떻게든 착륙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기자는 183cm에 85kg쯤 되는 체격. 이코노미 좌석에선 차렷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그런데, 옆 좌석에 앉은 백인은 100kg이 훨씬 넘어 보였다.키도 기자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는 아까부터 죽을상이다.`그래, 참자. 저 사람에 비하면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라는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 마침내 `샤를 드골 국제공항` 일단 담배부터 한 개비당신이 만약 문학과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은 프랑스 여행을 꿈꾸었을 것이다.젊은 날 가슴 설레며 읽었던 앙드레 지드와 알베르 카뮈의 책들. 그 작가들의 흔적과 숨결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와 영화 `레옹`을 연출한 뤽 베송이 활동한 나라, 거기에 매혹적인 여배우 줄리 델피, 에바 그린, 마리옹 꼬띠아르가 태어난 곳이 프랑스다.프랑스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비단 `예술`만이 아니다. 다채롭고 화려한 요리, 아름답고 매력적인 건축물, 사람들 몸에 배인 관용(tolerance)의 정신까지가 일종의 `관광자원`이다. 거기에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까지 덤으로 즐길 수 있으니 여행자가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기자 역시 프랑스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그런데, 그 기대는 의외의 지점에서 보기 좋게 깨졌으니…. 12시간의 지루함을 견딘 끝에 비행기는 마침내 샤를 드골 국제공항(Charles de Gaulle Airport)에 도착했다. 입국수속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발걸음을 재촉해 공항 밖으로 나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참고 참았던 탓일까. 목으로 넘어가는 연기가 달게 느껴졌다. 파리 시내로 들어가려면 전철을 타야했다. 그런데, 한국의 지하철보다 지저분하고 번잡스러웠다. 정차하는 역들의 플랫폼에도 빈 과자봉지와 담배꽁초 등이 널려있고.기자가 파리를 찾았을 때, `유럽 축구선수권대회`가 한창이었다.초록색 유니폼 셔츠를 맞춰 입은 아일랜드 축구팬과 노란색 유니폼 셔츠로 축구사랑을 과시하는 스웨덴인들 수십 명이 전철 안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조용하고 매너 있는 유럽인들`이란 선입견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기자가 머문 숙소에도 유럽 각국의 축구팬이 20명 넘게 투숙하고 있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와 호텔 복도에서 큰소리로 응원가를 합창하던 이들은 아일랜드인들이었을까, 스웨덴 사람들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프랑스 축구팬들이었을까? ▲ 환경미화원들의 파업 오물 냄새 진동하는 파리 거리예약한 숙소에서 가까운 브레게 사방(Breguet Sabin)역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니 이건 또 뭔가? 얼마나 오래 방치한 것인지 거리에 쓰레기더미가 가득했다.냄새가 코를 찔렀다. 기자가 품고 있던 프랑스와 파리에 대한 환상이 다시 한 번 무참히 깨졌다.호텔을 찾아가는 길에선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샤워를 마치고 로비로 내려오니 L이 와있었다. 한국에서 신문사를 다녔던 L은 몇 해 전 아내와 함께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왔다.선배의 소개를 통해 한두 번 전화로 인사한 것이 전부인데, 마치 오래 만나온 사람처럼 살갑게 대해주는 게 고마웠다.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L에게 물었다. “파리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네요. 왜 쓰레기를 며칠씩 치우지 않는 거죠?” 너털웃음을 터뜨린 그가 이유를 알려줬다. “아, 그거요. 지금 몇 주째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을 하고 있어요. 보통 땐 지금보다는 낫죠. 하지만, 파리가 그렇게 깨끗한 곳은 아니에요. 밤에 센(Seine)강에 가보세요. 거긴 노상방뇨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어쨌건 프랑스에서 기자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시끌벅적한 전철과 악취였다. 즐겁고 행복한 첫 만남이라고 할 순 없었다.하지만, L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 해 질 무렵의 몽마르트르 언덕과 환하게 불 밝힌 에펠탑을 둘러보고, 샹젤리제 거리의 조그만 식당에서 포도주를 곁들여 맛있는 요리를 먹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졌다.건너편 식탁.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커플은 다른 사람들이 보건 말건 오랫동안 달콤하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래, 여기가 수많은 시인들이 “낭만의 절정”이라고 노래한 파리구나. 죽은 에디트 피아프가 부활해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를 불러줄 것만 같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프랑스는…이탈리아·스위스·독일과 접경`문화·예술의 나라` 명성 자자가장 많은 노벨문학상 수상국유럽대륙 서부에 위치한 국가로 지중해와 대서양 가운데 있다. 정식명칭은 프랑스공화국(La Republique de France).왕정과 제정, 공화정을 반복하다가 1871년 공화정부 수립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탈리아·스위스·독일과 동쪽 국경을 접하고 있고, 북동쪽에는 룩셈부르크와 벨기에가 있다. 북서쪽 바다를 건너면 영국이다.남부지역은 지중해·에스파냐와 맞닿아 있다.본토는 육각형 모양이고,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기아나 등이 프랑스령(領)이다.중앙아프리카·콩고·세네갈 등과는 프랑스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수도는 파리(Paris). 인구는 약 6천650만 명. 이 중 230만 명 정도가 파리에 거주한다.면적은 64만3천801㎢로 한국의 2.5배 정도이고, 이는 EU(유럽연합)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이다.중북부 유럽에서 이주한 켈트족과 게르만·노르만계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라틴계와 아프리카인, 정치·사회적 문제로 입국한 아랍인들도 함께 살고 있다.피레네산맥 북부에는 약 50만 명의 바스크족이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가톨릭교(82%)와 이슬람교(7%)와 유대교(2%)와 불교(1%), 여기에 그리스정교(0.5%)까지 다양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섞여서 살아간다.사용되는 화폐는 유로(Euro). 1유로는 현재 한국 돈 약 1천200원이다.약 1만7천 명의 한국인이 현지에서 취업하거나 유학생의 신분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중 1만3천 명 가량이 파리에 산다,아주 오래 전부터 `문화와 예술의 나라`로 불렸다.실제로도 수많은 화가와 음악가, 철학자와 작가들이 태어나고 활동한 곳이다.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로도 유명하다.대부분의 지역이 온대성 기후를 보이지만, 남쪽 일부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낸다. 원유, 자동차, 석유제품 등을 주로 수입하고, 항공기·우주장비, 향수·화장품 등이 주요 수출품목이다.수도인 파리는 물론, 남부의 해변도시 등에는 해마다 수천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든다.맛있는 음식과 유럽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풍부한 볼거리, 여기에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와 관용의 정신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프랑스에 관한 환상`을 제공하고 있다.청(靑)·백(白)·적(赤) 3색으로 구성된 프랑스 국기는 자유·평등·박애라는 인간적 이상을 상징하고 있다.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만들어진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의 선율도 우리들 귀에 익숙하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4-21

양철지붕 아래의 가난, 그러나 얼굴엔 웃음이…

현대인이 일상에서 모험을 즐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여행에서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다소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기자는 여행지에서의 `스릴`을 즐기는 편에 속한다. 그래서일까? 안전성 면에서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 큰 비행기보다 작은 비행기를 더 좋아한다. 소규모 난기류에도 심하게 흔들리고, 대형기에 비해 추락의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되는 소형기들 말이다. 여러 차례의 제주도 여행에서도 60인승 정도의 작은 비행기를 탔던 게 가장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필리핀 여행에서도 소형기를 자주 탔다. 필리핀은 대략 7천50개 정도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고, 각각의 섬들을 이어주는 유용한 교통수단이 작은 비행기와 페리(ferry·여객운송선)다. 필리핀에는 에어필리핀, 필리핀항공, 세부퍼시픽, 동남아시아항공 등 크고 작은 항공사들이 여러 개 있다.보라카이 섬의 관문인 카티클란에서 수도 마닐라로 이동했을 때는 동남아시아항공의 비행기를 탔다. 승객이 채 30명도 되지 않았다.물론, 비행기 역시 버스보다 작았다. 객석에 앉으면 조종사의 뒷모습이 보이는 소형기에서 내려다본 필리핀의 바다와 육지 풍경은 때론 아름다웠고, 어느 순간은 남루해 보였다.기자를 태우고 세부공항에서 칼리보공항까지 날아간 세부퍼시픽 항공기 역시 60~70명의 승객만을 태울 수 있는 소형기였다. 필리핀과 독일의 피가 섞인 스튜어디스는 친절한 눈빛과 편안한 미소로 난기류의 울렁임을 두려워하는 노인 승객을 안심시키고 있었다.비행기가 아래위로 요동치는 그때의 상황을 즐기고 있던 건 기자 하나뿐이지 않았을까? 당시 흔들리는 창밖으로 보이던 각양각색의 필리핀 가옥 지붕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질적 단어인 가난과 낭만이 섞인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 여행이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여행 또는, 일상에서의 떠남이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자신의 내부`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체험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훈훈한 바람에 실려 오는 한 점 먼지도, 햇살 아래 피어 있는 조그만 보랏빛 꽃 한 송이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시간을 선물 받는 게 여행이지 싶다.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인용하자면 “언어란 존재의 집”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어떤 시인은 “언어만이 인간을 문학으로 데려갈 수 있다”고 했다. 언어로 존재의 집을 짓는 게 비단 시인이나 소설가만은 아닐 것이다.우리들 대부분은 자신만의 언어로 수백 년 무너지지 않을 성(城)을 축조하고싶다는 꿈을 아직도 온전히 버리지 못한 존재가 아닐까. 비단 문학청년, 문학소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필리핀 비사야제도를 얼음 섞인 차가운 맥주에 취해 떠돌며 이런저런 상념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던 시간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은 행복했다.“대체 나는 누구에게 존재를 온전히 확인시킬 수 있을까?” “세상의 가난과 불행은 어째서 해결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일까?”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과연 절대적일까?”라는 평소에는 하기 힘든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가슴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비단 필리핀 여행만이 아니었다.동유럽과 중동, 아시아의 다른 국가를 여행한 후에도 기자는 훌쩍 자라있는 `정신의 키`를 실감하곤 했었다. 평소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나의 내부`를 제3자의 입장에서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작가 한수산이 장편소설 `부초(浮草)`를 탈고한 후 “곡예사들의 유랑과 새로운 출발에 관해 쓰면서 내 정신의 키가 한 뼘은 자랐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고백한 것처럼. ▲ 가난에 주눅 들지 않은 필리핀 서민들을 기억하며네그로스와 발리카삭 같은 적요한 비사야제도의 섬들과 이와는 정반대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관광지 보라카이, 세부의 해변을 이리저리 헤매 다니던 필리핀 여행이 끝나가던 무렵.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마닐라에 도착한 기자는 가지고 있던 수첩에 아래와 같은 메모를 남겼다.“여기는 한때 `동양의 진주`라 불리던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네온사인 휘황한 화려한 신도시 `마카티`에서 택시를 타고 15분만 달리면 거주자의 절반이 매일 끼니 걱정을 하는 거대한 빈민가 `톤도`가 앙상한 뼈를 드러내는 곳.자비와 긍휼의 구세주가 아니더라도 나 또한 가난한 아이들의 때 묻은 작은 손을 잡아주고 싶구나. 세상과 삶이 불공평하다는 걸 누가 모를까? 그러나, 어쩔 것인가? 한국 역시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에서의 삶과 철거민촌의 생이 공존하는 땅. 지구는 생겨나면서부터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별이었던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지구가 만약 `불평등과 불합리의 별`이라면 우리는 어떤 힘으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 답은 간명할 것 같다. 바로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아닐까.필리핀을 떠돌 때 기자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서민들이었다. 낡은 버스와 트라이시클을 몰던 기사들, 관광지 거리에서 구운 소시지와 열대과일을 팔던 장사꾼들, 검게 탄 등 위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 힘겹게 나르던 일꾼들…. 그들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이어가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필리핀 사람들의 웃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미소는 남루와 빈한함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아껴줄 식구와 이웃을 향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랬다. 어떤 참혹한 가난도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이게 필리핀 여행에서 기자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다. 필리핀 `길거리 음식`과 만나다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젊은 패기와 모험심을 여비 삼아 떠나는 배낭여행이 `청춘 트렌드`의 하나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단기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모은 100~200만원 안팎의 여행경비로 동남아시아 몇몇 나라를 짧게는 1주일, 길게는 3~4주씩 돌아본다. 이들에겐 저렴하면서도 색다른 맛을 지닌 `길거리 음식`이 작은 축복이다. 해물볶음밥이 맛있는 태국과 쌀국수가 유명한 베트남처럼 필리핀에도 가볍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이 적지 않다. 아래 기자가 마닐라와 세부, 일로일로와 보라카이에서 맛본 것들을 소개한다.◇ `밀크피쉬 구이`에 쌀밥 한 접시필리핀 사람들이 `방구스`라고 부르는 밀크피쉬(Milk-fish)는 남태평양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생선이다. 청어처럼 생겼는데 맛은 한국에서 먹는 고등어와 비슷하다. 주로 구워서 소금이나 간단한 양념을 뿌려 먹는다. 흔한 물고기이기에 비싸지 않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가격 이상의 만족감을 준다. 거리의 좌판에서 밀크피쉬 한 마리를 굽고, 여기에 쌀밥 한 접시(필리핀은 밥을 그릇이 아닌 접시에 담아주는 경우가 많다)를 구입하면 점심으로 손색이 없다. ◇ 독특한 향과 맛의 필리핀 소시지한국인들과 비슷하게 필리핀인들 역시 돼지고기를 즐겨먹는다. 비사야제도의 조그만 섬에서 새끼돼지를 통째로 바비큐 해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이 요리를 레촌(Lechon)이라 불렀다. 큰 잔치가 있을 때 준비되는 요리 같았다. 레촌이 `특별식`이라면 소시지는 필리핀 사람들의 `일상식`에 가깝다. 모양과 색깔이 다양한 소시지가 주렁주렁 매달린 노점이나 수레를 세부와 마닐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바게트를 갈라 가운데 소시지를 넣으면 가벼운 한 끼 식사로 그만이다.◇ 달콤하고 새콤한 열대의 과일들망고, 파인애플, 바나나, 망고스틴, 스타애플, 람부탄, 파파야, 두리안…. 하나씩 이름을 부르다보면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새콤하고 달콤한 과일이 지천인 곳이 필리핀이다. 한국에선 꽤 비싼 값에 판매되는 열대과일을 거의 공짜에 가까운 가격에 맛볼 수 있기에 과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필리핀이 `새콤달콤한 천국`으로 느껴진다. 슈퍼마켓에서 kg 단위로 사는 것도 좋지만, `나 홀로 여행자`라면 노점상 좌판에서 조각으로 썰어 놓은 파인애플이나 두리안을 구입할 수도 있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4-14

일흔 살 한국 엄마와 열아홉 살 필리핀 엄마

2008년 봄. 엄마는 남편을 잃었다. 38년을 함께 살아온 사내의 간에서 시작된 암이 대장으로 번졌고 수술 등의 치료가 이미 늦은 상황. 담담하게 100여 일을 앓다가 비탄의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한 줌 재로 사라진 남편.살아오는 내내 말수가 적었던 남편은 이렇다 할 유언 따위도 남기지 않았다. “집이 춥다. 따뜻한 곳으로 옮겨 살아라”란 말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게 더 슬퍼서였을까? 엄마는 소리 없이 오래 울었다.기자 역시 아버지를 안타깝게 떠나보냈지만, 더 큰 아픔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야 할 엄마를 곁에 두고 크게 울 수 없었다. 그저 이런 약속을 했을 뿐이다. “아버지 대신 내가 해외여행도 함께 가고 할 테니 너무 슬퍼마세요.”크건 작건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법. 필리핀은 기자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은 두 번째 외국 여행지였다. 짙푸른 바다와 따뜻한 날씨를 좋아하는 엄마는 여행 몇 주 전부터 이미 들떠있었다. 보라카이 해변에서 입을 유행 지난 옷가지를 가방 속에 챙겨두고.마침내 비행기가 필리핀을 향해 날개를 펼치던 날. 창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아이처럼 티 없이 웃는 그녀를 보며 기자의 기분도 좋아졌다. `아버지도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 걸…`이란 생각에 기자도 엄마도 잠시 서글퍼졌지만, 어쩔 것인가. 죽은 사람과는 관계없이 살아있는 자들의 삶은 어떻게든 이어져온 게 인간의 역사이니.필리핀 중서부 칼리보 국제공항(Kalibo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한 후 버스를 타고 2시간쯤을 달렸다. 이윽고 카티클란 선착장. 보라카이 섬으로 들어가는 조그만 배들이 줄지어 선 그곳에서 엄마는 놀란 얼굴이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이처럼 보석처럼 푸르고 맑은 바다도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왔단 사실이 새삼스러웠을 것이다. ▲ 슬픈 깨달음… `엄마도 새우를 좋아한다`새벽밥을 먹고 부지런히 공항으로 가서 아침 비행기를 탄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보라카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에 짐을 푼 우리는 해변으로 나갔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그곳에서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일상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은 노인에게나 젊은이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왔다.키가 훌쩍 큰 필리핀 청년 하나가 다가와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해 지는 모습을 구경하시죠”라고 청해왔다. 그 정도 말은 영어를 하지 못해도 눈치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평소처럼 엄마는 걱정부터 했다. “배 타면 돈 많이 달라고 하는 거 아니냐?”하지만, 막상 조그만 무동력 요트에 오른 엄마는 소녀처럼 신이 났다. 보라카이 섬 바람만을 이용해 꽤 빠른 속도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요트 위에서 신발을 벗고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태평양의 석양 빛깔로 물들어가고 있었다.배에서 내리니 허기가 몰려왔다. 보라카이의 일몰을 뒤로 하고 싱싱한 해산물이 펼쳐진 좌판에서 자신이 먹을 새우나 게, 생선을 직접 고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아기 주먹보다 더 큰 새우를 2kg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잠시 후 새콤달콤한 양념을 뿌려 요리한 새우와 필리핀 전통주 탄두아이, 망고주스까지가 식탁에 차려졌다. 기자는 그날 알았다. 엄마도 새우를 좋아한다는 걸. 사실 한국에서 큼직한 새우나 꽃게는 저렴한 식재료가 아니다. 기자가 어렸던 시절. 수산시장에서 새우나 꽃게를 사올 때면 엄마는 두 아들이 먹기에도 모자란 그걸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엄마가 새우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둘이 먹기엔 지나치게 많아 보이는 새우구이 앞에서 엄마는 음식 취향을 숨기지 않았다.그처럼 많은 새우 껍질이 자신 앞에 쌓여있는 걸 그녀는 몇 번이나 보며 살아왔을까? 진원지가 불분명한 슬픔이 밀려왔고, 이상스레 술이 빨리 취했다. 그랬다. 아들이란 마흔 살이 넘어도 엄마 앞에서라면 철들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엄마`라는 존재가 품고 사는 내밀한 심경을 100%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필리핀 여행에서 돌아온 후 기자는 한국에서도 가끔 엄마와 함께 새우나 게를 요리하는 식당으로 간다. 연인에게는 자주 사줬던 그것들을 엄마에겐 40년 동안 대접해본 기억이 없다는 걸 반성하면서. ▲ 한적한 바닷가마을에서 만난 필리핀 모자(母子)보라카이 섬에서 보낸 나흘. 일흔 살 엄마와 40대 중반 아들은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며 즐거워했다. 이름 그대로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얀 화이트 비치(White Beach). 사파이어빛 파도에 몸을 맡긴 엄마는 얼굴이 타는 줄도 모르고 온종일 수영을 했고, 멀찌감치서 그걸 지켜보며 기자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의 책을 뒤적거렸다.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는 화이트 비치에서 트라이시클(오토바이를 개조한 필리핀 삼륜차)을 타고 보라카이 섬 한적한 마을을 둘러보러 갔다. 화려한 관광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나무로 허술하게 지은 집은 무너져가고, 그 앞에 나와 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한없이 어두웠다. 엄마는 또 한 번 놀라는 표정이었다.젖먹이를 품에 안고 나타난 열아홉 살 `어린 필리핀 엄마`가 일흔 살 `늙은 한국 엄마` 앞에서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늙은 한국 엄마`는 지갑을 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어린 필리핀 엄마`에게 건넸다. 그 늙은 엄마 역시 한국에서는 콩나물 값 500원을 깎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날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가난한 필리핀 모자의 모습에서 자신과 아들의 젊은 날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 필리핀 해변에선 뭘 할까?7천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니 필리핀은 눈길 닿는 곳곳이 해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세부나 보라카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섬은 1년 내내 휴양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해변 주위에는 첨단시설을 갖춘 호텔과 바닷가재와 커다란 게를 요리해 판매하는 고급 레스토랑도 지천이다.하지만, 필리핀에는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해변도 적지 않다.중부 비사야제도에 흩어져있는 섬들이 그렇고, 남부 민다나오 인근의 바다가 그렇다.숨 가쁘게 달려왔던 일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조용한 해변에서 여유롭게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분명 그 의미가 클 것이다. ◇ 선베드에 누워 평소 읽지 못했던 한 권의 책을…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나가게 되면 마음 편히 독서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게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다.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거운 휴가가 분명하지만, 인적 드문 조용한 바닷가에 드러누워 시인 김선우의 산문집이나 이청준의 소설 한 권을 펴드는 것 역시 멋진 휴양이 될 수 있다.휴가 기간이 한국보다 훨씬 긴 유럽의 여행자들은 2~3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필리핀 해변에서 보내기도 한다.그들이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고 선베드에 누워 두꺼운 추리소설이나 로맨스소설을 읽는 모습은 어떤 측면에선 부럽기도 하다.진정한 휴가와 휴양은 마음은 비우고 머리는 채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 요트 위에서 석양을 즐기는 소박한 호사를…`요트`라고 하면 화려함이나 사치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런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지중해나 서유럽 해변엔 한 척에 수백억 원이 넘는 호화스러운 요트가 수십 척씩 정박해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만나는 요트는 소박하다. 그러면서도 멋스럽다. 4~5명의 승객을 태우고 돛을 펼쳐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를 30분에서 1시간쯤 항해하는 요트 위에서의 낭만을 한국 돈 1만원 안팎이면 즐길 수 있다. 조그만 요트를 가진 필리핀 청년들은 저물녘이면 해변으로 나와 관광객을 상대로 흥정을 벌인다.“제 요트에 타세요. 당신에게 필리핀의 석양을 선물할게요.” 그 제의를 거부하지 말고 `작고 예쁜 요트`에 올라 잠시나마 태평양 저녁 바다의 낭만을 즐겨보자.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