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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맥주 한 모금, 이스파한 청년의 소박한 일탈

이란 사람들은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Isfahan Nesf-e Jahan)”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이는 이 나라 사람들이 이 도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문장이다. 수도 테헤란을 이틀 여행한 후 200여 개에 가까운 모스크가 멋들어진 모습을 뽐내는 `이란 최고의 관광지` 이스파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수백 년 전 만들어진 여러 개의 근사한 교량과 그 옛날 영화를 짐작케 하는 공중목욕탕까지 즐비한 곳. 유럽 각국의 시인들조차 그 번영의 역사와 휘황한 이슬람 문화유산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도시로.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한없이 수줍고 순진한 친구 `모하메드`술 대신 진한 홍차와 물담배로 밤 늦도록 국경없는 우정 나눠이스파한에 도착한 바로 그날 해질 무렵, 이맘광장 내부의 모스크 앞에서 덩치가 산만 한 청년을 만났다. 다소 험상궂다고 해도 좋을 외모와는 달리 한없이 부끄러움을 타는 그의 이름은 이란에선 흔하디흔한 모하메드. 독일에 본사를 둔 다국적기업에서 일한다는 그가 기자에게 “친구가 돼달라”고 청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낯선 곳에서 현지인과 친구가 된다는 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다름없기에. 이란식 물담배 `갤리언`과 엄청난 양의 설탕을 넣은 홍차를 파는 가게로 나를 안내한 모하메드는 한국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가 경험해본 외국이라곤 회사일 때문에 이틀 출장 다녀온 독일이 전부. 그렇기에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기자가 들려준 여행 경험담이 인상 깊고 고마웠던지 “내일 내 친구들과 만나 인사라도 나누면 좋겠다”고 했다. 이 역시 고마운 제안이었다. 다음 날 만나 악수를 나눈 모하메드의 친구들 역시 순박했다. 또한, 처음 보는 외국인을 편견 없는 친절한 태도로 대해줬다.그 장소가 한국의 어느 도시였다면 두말 할 것 없이 새로 사귄 남자친구들끼리 술집으로 몰려가 부어라 마셔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이란. 어디에도 술을 파는 곳이 없으니, 아쉽지만 찻집에서 밤늦게까지 홍차와 물담배를 가운데 두고 `미남들(?)의 수다`를 떨어야 했다.익숙지 않은 영어와 보디랭귀지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주고받던 어느 한순간. 모하메드가 조심스럽게 고백 하나를 했다.“홍(여행을 할 당시 많은 외국인들이 기자를 이렇게 호칭했다), 이건 비밀인데, 나도 딱 한 번 술을 마셔본 적이 있어. 독일 베를린에 갔을 때였는데 맥주란 걸 한 모금 먹었지. 그런데 말이야….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게 있었다니. 정말 놀랐어.”서른 살이 넘도록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에겐 맥주 한 모금이 준 취기가 그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어진 모하메드의 말에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내가 술을 마셨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돼. 이 사실은 아내에게도 비밀로 했으니까.”그랬다. 대다수 무슬림들은 종교적 신념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신념만큼이나 중요한 게 인간의 욕망 아닌가. 이란 사람들이라고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꿈꾸는 `일탈의 욕구`가 왜 없을까. 인간은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것들을 끝임없이 욕망하는 존재인 것을.한국인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한 잔의 술`이 모하메드에겐 자신이 믿는 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일탈이 될 수도, 아내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비밀이 될 수도 있는 게 세상사다. 우리는 그런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모하메드의 고백처럼 비밀스런 이야기를 들었던 경험은 또 있다. 이란 중부의 모래바람 부는 사막도시 야즈드를 여행할 때 머물던 호텔에서였다. 그곳 매니저로 일하는 스물여섯 살 미남청년 알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은밀히 기자를 부른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뜸 이런 부탁을 해왔다.“어이, 홍. 어제 우리 숙소에 여행 중인 네덜란드 여대생이 두 명 왔어. 그런데, 그중 하나가 나보고 데이트를 하자고 하더라고. 그런데, 큰일이야. 나는 어떻게 하면 여자가 기뻐하는지 알지를 못해. 네가 조언을 해줄 수 없을까?”대체 이런 질문에는 어떤 답변을 내놓아야 할까. 진지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와 어투에 농담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기껏 내놓은 해결방안은 이랬다.“그 네덜란드 여자애는 데이트를 해본 경험이 너보다는 훨씬 많을 거야. 그러니, 네가 뭘 해주려 하지 말고, 그 여자애가 리드하도록 데이트의 주도권을 넘겨봐. 그게 좋을 것 같네.” 이처럼 형편없는 어드바이스였음에도 알리의 얼굴은 대번에 환해졌다.너무나 닳고 닳은 세상을 살아온 우리. 그런 까닭에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방법을 처음 본 기자에게 물어보는 알리의 대책 없는 순진함이 감동적이기까지 한 순간이었다.이스파한을 여행할 때 만난 이란 여대생들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붉은 꽃 흐드러진 정원이 고풍스러움을 더하는 숙소. 그곳엔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댄 지역의 대학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하는 여대생 20여 명이 묵고 있었다.친구들과 함께 온 수학여행의 즐거움에 들뜬 스물, 스물한 살 소녀들은 밤에는 밖에 나오지 말라는 지도교수의 엄포에도 늦은 시간까지 정원 나무의자에 모여 앉아 기자와 체코에서 온 전기기술자에게 서툰 영어로 수십 가지 질문을 던지며 까르르 댔다.“당신들은 왜 아내도 없이 혼자 여행을 하나요?”“종교가 없다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한국과 체코 여자들은 남자가 보는 앞에서도 춤을 춘다고요?”쉴 새 없이 쏟아지는 바깥 세상에 대한 의문들. 여대생들의 웃음 끝에 매달린 순진함과 순수함이 더없이 좋아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어떤 질문도 피해가는 법 없이 솔직한 이야기를 이란 소녀들에게 들려줬다.기자와 전기기술자의 답변에 때로는 깜짝깜짝 놀라고, 때로는 자기들끼리 귀엣말을 속삭이며 웃는 그네들의 모습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한국의 스무 살 여대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머리에 히잡을 썼느냐 쓰지 않았냐만이 달랐을 뿐.이란 사내들이 즐기는 기호품은…끼니 외에 과자나 과일 따위를 먹는 걸 일컫는 `군것질`. 보통 군것질은 아이들이나 여학생들이 주로 즐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란에서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돼지고기와 함께 음주를 엄격하게 금하는 이슬람국가이기 때문이다. 술을 마실 수 없는 이란 남성들은 확실히 한국 사내들에 비해 군것질을 즐긴다. 공원이나 기차·버스 안, 심지어 거리를 걸으면서도 호두나 아이스크림, 과일주스를 먹고 마시는 콧수염 기른 건장한 남자들을 볼 수 있는 게 `신성 무슬림공화국` 이란이다.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기호품을 특히 좋아할까.▲설탕 듬뿍 넣은 홍차이란만이 아닌 중동의 많은 국가 사람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가 따뜻한 홍차다. 잘 단장된 찻집은 물론, 허름한 노점에서도 홍차가 담긴 잔을 든 남성들을 만날 수 있다. 더운 날씨로 인해 당분이 필요한 탓인지 한국보다 훨씬 달콤하게 마시는 게 특징이다. 조그만 찻잔에 설탕 3~4 티스푼을 넣는 건 기본. 좀 더 단맛을 원하는 이들은 아예 각설탕을 입술에 물고 홍차를 마시는 진풍경도 연출한다. 손님 접대에도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게 홍차와 집에서 만든 과자다.▲사과 향기 진한 물담배 터키와 동남아시아에서는 `나르길레` 혹은, `시샤`라고 부르는 물담배도 이란 남성들이 사랑하는 기호품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갤리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 흡연양식이 페르시아에서 최초로 시작됐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갤리언의 구조상 물을 통과한 연기를 흡입하게 되는데, 이때 말린 담뱃잎에 사과와 오렌지, 포도 등 각종 과일향을 첨가해 풍미를 더한다. 대부분의 이란 남성들은 사과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있는 물담배를 선호한다.▲갖가지 견과류이란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놀랐던 건, 버스나 기차 안 승객의 70~80%가 땅콩과 해바라기씨, 피스타치오와 아몬드 등의 견과류를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역이나 버스터미널 매점은 물론, 도로변 간이휴게소에도 견과류는 최고의 인기상품이다. 기자 역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아쉬움을 해바라기씨나 아몬드를 씹으며 달랬음을 고백한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 국장席 기자/hss@kbmaeil.com

2016-04-15

알리와 후세인에게 길을 묻다

인근 도시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알리라는 이름의 청년이 노트를 찢어 만들어준 `든든한 이란 가이드북(?)`만을 믿고 테헤란 버스터미널을 나섰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출근시간의 거리는 복잡했다. 누구에게 노트에 쓰인 문구를 보여줄까를 잠시 고민했다. 그리곤, 가장 착해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 앞을 가로막고 그걸 내밀었다.페르시아어 적힌 쪽지 내밀자1시간 넘게 숙소 함께 찾아줘이교도에도 아낌없는 형제의 정10명 중 7명 이름 `알리` `후세인`넉넉한 품성, 여유로운 미소 넘쳐위험한 나라라는 인식 바뀌어찾는 숙소와 그 숙소가 위치한 거리 이름이 페르시아어로 적힌 찢어진 노트 한 장. 그가 고민한 시간은 불과 10초도 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부탁에도 망설임이 없었다.회사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는 것은 물론, 교통경찰에게까지 물어가며 호텔을 찾아줬다.아까운 자신의 시간을 1시간도 넘게 뺏겼는데 귀찮다거나 싫어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 친절이 놀라울 뿐이었다.탈레반이나 IS와 같은 교조적 무슬림이 아닌 통상의 이슬람교도들은 여행자나 이웃에게 베푼 자비와 친절이 현세에서의 덕으로 축적된다고 믿는다.그런 이유로 무슬림들의 친절은 제스처나 포즈가 아닌 진실에 가깝다고 한다.이란의 도심에 자리한 관공서 벽에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슬림은 형제”라고 쓰인 문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기자는 종교를 가지지 않았으니, 이교도와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교도에게까지 형제의 정을 베푼 그 아저씨의 선량함과 배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국에서 사간 조그만 열쇠고리를 주겠다고 했지만, 소박한 사례까지 손사래 치며 거부하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다시 출근길을 서둘러야 할 터였다. 지각이 분명할 것이다. 그 사내를 불러 세워 내 이름을 큰소리로 말해줬다.여전히 웃음 가득한 얼굴로 자기는 “후세인”이란다.소리 없이 새겨지는 조용한 미소가 오래 전 헤어진 형 같았다. 그의 친절은 채 떨치지 못한 이란에 관한 의심과 공포를 남김없이 털어낼 수 있게 했다.이처럼 바라는 것 하나 없이 착하기만한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한들 그게 무슨 걱정이 될까 싶었다. 다행히도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이제 이란 남자들의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과장을 조금 더하자면 이란에선 사내들에게 이름을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다.10명 중 7명의 이름이 `모하메드` `알리` `후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명칭 모두는 혈연적 관계로 얽혀있는 초기 이슬람교 지도자다. 모하메드의 사위는 알리고, 알리의 아들은 후세인이다. 이란 사람들은 그들과 자신의 이름을 똑같이 짓는 것으로 존경과 흠모를 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이란을 여행한 17일 동안 최소한 100명이 넘는 후세인, 알리, 모하메드를 만났다.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열 명 중 아홉이 1970년대 한국의 시골 노인들처럼 순박하고, 순진하고, 정이 많다는 것이었다.이란 사람들의 조건 없는 친절과 인정으로 인해 아스팔트도 녹아내리는 섭씨 45도의 무지막지한 더위를 이겨낼 수 있었다. 차가운 맥주 한 잔 마실 수 없는 스트레스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으로 인한 짜증까지도. 눈가에 주름을 가득 만들어내며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이란 사람들의 모습엔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기품과 힘이 담겨있다.이미 수천 년 전 아시아 서부에서 아프리카까지를 자신들의 발아래 두고 통치했던 페르시아 제국.한때 지구 위에 존재한 인류 절반의 정치와 문화를 주도했던 기억을 가진 이란.그 영광의 시절은 지나갔지만, 자부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촌스럽다고도 느낄 수 있는 페르시아의 여유로운 미소에는 이유가 있었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강대국 미국과 대립함으로써 가혹한 경제제재를 포함한 각종 불이익을 겪어야 했지만, 이란 사람들은 그조차도 언젠가는 넘어설 운명이라 생각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의연함에 더해진 웃음의 배후에는 페르시아의 역사가 가져다준 도저한 낙관이 있지 않았을까.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 도시인과 촌부 모두가 얼굴에 담고 있는 환한 미소. 즐겁고 넉넉한 품성으로 여행객을 대하는 이란 사람들을 볼 때면 “이 나라를 여행하는 게 즐거운 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 때문이 아닐까”란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또한, 이란의 매력은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 각종 볼거리 역시 풍부하다.달리는 버스와 기차의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아득한 사막 풍경은 어린 날의 기억을 돌아보게 하고, 매혹 가득한 도시 이스파한에 웅장하게 들어선 이맘광장의 황금빛 모스크는 이슬람 건축예술의 절정을 관광객에게 선물한다. 2천500여 년 전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의 별궁(別宮)으로 사용된 페르세폴리스는 폐허조차도 장엄하게 아름답다. 이란은 우리가 상상한 것처럼 `모래바람 부는 황량한 벌판에 이슬람 경전과 폭탄을 든 테러리스트만 있는 국가`가 결코 아니다.기자가 이란 여행을 결심하고 이를 주위 사람들에게 알렸을 때, 대부분이 격려보다는 우려를 표했다. 아예 나서서 말리는 이들도 있었다.“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지구 위에 수도 없이 있는데, 왜 하필 위험한 이란이냐”는 이유에서였다.실체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나 할리우드 영화로 만나게 되는 이란은 사실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과연 이란의 전부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이란에 관해 대부분의 한국인이 가진 편견과 일그러진 선입견.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직접 그 나라를 가보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터. 이란으로의 배낭여행은 이처럼 소박한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이란의 대중교통동서양을 막론하고 서민들의 발이 되는 건 버스와 택시, 기차와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이다. 여행지에서 버스와 기차에 오른다는 건 현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이란에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대중교통 수단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어떻게 운용되고 있을까.■ 버스무슬림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가 아니라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이란 시내버스 안에선 매일 펼쳐진다.차량의 앞부분에는 여성들이, 뒷부분엔 남성들이 따로따로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다.버스가 만석을 이루는 출퇴근 시간이라고 해도 이 원칙은 깨지지 않는다.`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한` 여성은 남성들이 있는 뒤편으로, 남성은 여성들이 자리한 앞쪽으로 가지 못한다.시외버스도 이와 비슷하다. 매표소에서부터 좌석 배정을 남녀가 따로 앉아서 가게 만든다.이 원칙에선 외국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런 제약이 있는 대신 이란의 버스비는 엄청나게 저렴하다.기름 값이 싼 게 그 이유다. 시내버스는 약 50원, 시외버스로 10시간을 달려도 승차권 가격은 5천원 남짓이다. ■ 기차 유럽에서 사용하다가 폐기 직전에 수출한 것 같은 낡은 기차가 낙타처럼 느릿느릿 이란의 사막을 오간다.인접국 터키에서 출발해 72시간을 달려 수도인 테헤란으로 오는 국제열차도 1주일 1번쯤 있다.이란에서의 기차여행이란 `막막한 모래밭으로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달리는` 희귀한 경험을 관광객들에게 제공한다. 국토가 광활한 탓에 1박2일의 기차여행은 흔하다. 좁은 침대칸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는 게 고생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국에선 쉽게 해볼 수 없는 체험이라 도전해볼 만하다.이란 사람들이 나눠주는 해바라기 씨와 피스타치오 등을 나눠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하철과 택시테헤란의 지하철은 도심 곳곳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다.1구간권 티켓이 200원 정도라 부담 없이 수도의 주요 관광지를 오갈 수 있다. 서울이나 부산의 지하철만큼 깨끗하고 세련된 서비스를 기대하긴 어렵다.하지만, 거기 타는 순간 `연예인`처럼 주목받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택시의 경우엔 한국과 달리 미리 가격 흥정을 해서 목적지를 향한다.`합승택시`는 가는 방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서 운행한다.동승자를 모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다소 지루하지만, 일반택시보다 저렴하다는 점에서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에게 인기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16-04-08

`문맹`의 여행자에게 베푼 그들의 친절

문자를 해독할 수 없는 사람들을 문맹(文盲)이라 한다. 세계에서 문맹이 가장 적은 국가들 중 하나에 속하는 한국. 그러나, 그건 한국 사람이 한국에 머물 때 이야기다. 낯선 문자를 읽지 못하고, 처음 가본 나라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순간부터 꼼짝없이 `문맹 아닌 문맹`으로 살아야하는 것이 여행자의 운명이다. 이란에 도착하면서부터 기자는 문맹이 되고 말았다.터키와 국경을 접한 한적한 이란의 시골마을. 손짓부터 발짓, 거기에 의성어까지 총동원해 어렵사리 이란의 수도로 향하는 버스가 정차된 터미널을 찾았다.매표소에서도 `밤늦게 출발해도 좋으니 오늘 중으로 테헤란 가는 버스를 타야합니다`란 요구를 몸짓으로 전달했다.콧수염과 턱수염은 물론 풀린 셔츠 속으로 보이는 가슴에까지 털이 무성하게 자라 `삼국지`의 맹장 장비를 떠올리게 하는 버스회사 직원이 버스표를 건네주며 “Stay Here(여기서 기다려요)”라고 했다. 이란에 들어온 지 대여섯 시간 동안 들은 가장 긴 영어 문장이었다.그런데 문제는 또 이어졌다. 승차권을 들여다보는데 도대체 단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다. 출발하는 시간과 좌석 번호, 버스비와 승차장의 위치까지가 모두 다 스파이들이 사용한다는 `난수표`처럼 난해해 보였다. 영어가 아닌 페르시아어였던 것이다.숫자 역시 대부분의 국가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페르시아식 표기다. 1과 2, 10과 100도 구별이 불가능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가 글자까지 읽을 수가 없으니 청맹과니와 다름없는 형편이었다. 바가지 쓰지 않고 버스요금을 제대로 지불한 것인지, 출발 시간은 대체 언제인지, 줄을 지어 서있는 수많은 버스 중에서 테헤란으로 가는 건 어떤 건지 도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당연지사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주위가 빙빙 돌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제 여행의 시작인데, 처음부터 이러면 앞으로는 더 곤란할 터.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니 차가 곧 출발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터미널 부근에서 밥부터 먹기로 했다. 바자르간에서 테헤란까지는 최소 12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다른 여행자들로부터 들었다. 온통 정신없는 상황에서 허기까지 밀려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일단 배부터 채우자.`이란에서의 첫 식사. 그런데, 이건 또 뭐라고 해야 하나? 밥알 하나하나가 모두 따로 떨어져 논다. 찰기라고는 없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형국이다. 그 위에 얹은 양념한 양고기에서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냄새가 났다. 익숙하지 않은 중동의 향신료를 엄청나게 사용한 듯했다. 손짓으로 주문한 그 요리를 먹으면서 콜라를 2병이나 마셨다. 한국에선 거의 마시지 않는 청량음료였지만, 그게 없었다면 밥을 삼키기가 힘들었을 것이다.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데다가, 전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 “이번 여행은 쉽지 않겠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그뿐인가. 이란은 `신성 무슬림 국가`라 술을 마시지 못한다. 어디서도 술집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음주가 불법인 나라를 찾은 술 좋아하는 여행자. 비극은 예정돼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런 우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끗하게 사라졌다. 기자는 그때까진 몰랐던 것이다. 이란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얼마나 친절하고 착한지를.제일 큰 문제였던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조금 우습게도 테헤란 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해결됐다. 글자를 읽지 못하니 `화장실`이란 표지판이 아닌 `남자 그림`을 찾아 볼일을 해결해야 했다. 헌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남자화장실임에도 소변기가 없었다.`아이쿠, 여자화장실로 잘못 들어왔네`라는 생각에 얼른 돌아 나가려는데 눈썹과 코가 잘 생긴 청년 하나가 웃으며 영어로 알려준다. “여기가 남자 화장실이 맞아요.”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란 남자화장실엔 소변기가 없다. 그 나라 사내들은 칸막이 속으로 들어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작은 볼일`을 본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고, 무슬림만의 독특한 화장실 문화다. 살다보니 화장실에서도 `문화충격`을 받게 되는구나 싶었다. 어리둥절한 상태 그대로 화장실을 나오니 방금 전 말을 건넨 청년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냐”고, “이란은 처음이냐”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그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란에 도착해 이틀간 겪어야했던 의사소통의 힘겨움을 넋두리처럼 풀어놓았다.“말이 하나도 통하지가 않아요. 앞으로 여러 도시를 가봐야 하고, 숙소를 찾아다녀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눈앞이 캄캄합니다”라고. 내려앉은 하늘 아래 선 듯한 기자의 고충. 그러나, 그가 내놓은 해결방안은 의외로 간단했다.“찾으려 하는 동네 이름과 호텔 이름이 뭐냐”고 물어본 청년은 대답을 듣자마자 자신의 노트 한 장을 찢어 `난수표처럼 난해한` 페르시아어를 두어 줄 휘갈기고는 그걸 건네준다. `OO거리 XX호텔을 찾아가는 한국인입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세요`라는 문장이라고 했다.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때부터였다. 이란에 머물며 이스파한과 페르세폴리스, 쉬라즈와 야즈드 등의 도시를 찾아다닌 17일 동안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란 사람을 만나면 일단 다음날 찾아갈 도시와 호텔 이름부터 알려줬다. 그러면, 그는 페르시아어로 그걸 써주었고, 그게 가장 든든한 가이드북이자 여행지도가 됐다.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걸 보여줘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 종잇조각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고민은 이란에서라면 하지 않아도 좋다. 기자의 경험에 의하면 이란 사람 10명 중 9명은 그 쪽지를 본 순간 여행자의 손목을 잡고 가고자 하는 바로 그 동네, 그 장소까지 정확하게 데려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이란여행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최근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풀리고, 그로 인한 개방의 물결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란. 하지만, 아직은 오랜 시간 지속돼온 무슬림사회의 경직성과 종교적 금기가 완벽하게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이란여행에선 외국인이 조심해야 할 사안이 몇 가지 있다. 상대방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도 아래 열거하는 것들은 주의하자.▲ 여성과의 신체 접촉은 금물 : 이슬람교는 친족을 제외한 남성이 여성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는 외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도인 테헤란의 개방적인 소수 여성들을 제외하면 모르는 남성과 말을 섞는 것조차 저어하는 게 대부분의 이란 여성들이다. 특히 시골로 가면 멀리서부터 외국인 남성을 피해 대문 안으로 숨어버리는 히잡 쓴 여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무리 반갑더라도, 또는 친절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하더라도 이란 여성에게 악수를 청하거나 그녀들의 어깨를 두드려서는 안 된다. 가벼운 목례로 감사를 전하는 게 이란 여성을 위한 예의이자 배려다.▲ 모스크에 들어갈 땐 손발을 씻어야 : 무슬림들의 교당인 모스크는 이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신성한 공간이다. 이슬람교도들만 입장이 가능한 모스크가 많지만, 일부 모스크에서는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의 출입도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스크 안에서 큰소리로 떠들거나, 무슬림들의 기도를 방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곤란하다.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에는 입구에 마련된 수돗가나 우물에서 손과 발을 씻고, 머리칼을 정돈하는 무슬림식 예의를 갖추는 것도 여행자가 잊지 않아야 할 사항이다.▲ 술 반입 때는 강제 추방될 수도 : 무슬림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종교적인 이유에서다. 소도시 조그만 밥집에서부터 번화한 대도시 중심가와 유명 관광지의 식당가 어디에도 돼지고기를 요리해 판매하는 곳은 없다. 술도 마찬가지다. 이란의 남성들은 술 대신 홍차와 물담배, 견과류 등을 즐긴다. 이러한 이슬람의 `금주 원칙`은 외국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단 한 방울의 술도 이란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만약 국경검문소나 출입국사무소에서 술을 가진 것이 적발되면 강제 추방될 수도 있다. 모주꾼들이 특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16-04-01

기차로 34시간 달려 겨우겨우 얻은 이란行 비자

차도르와 모스크의 나라 이란으로의 여행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1개월짜리 여행비자를 얻기 위해서 인접국 터키의 세 도시를 숨 가쁘게 오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왜 그처럼 이란 여행을 열망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지금으로부터 15년 전. `9·11 뉴욕-워싱턴 테러`가 일어났다. 미국은 테러의 진원지를 발본색원하겠다며, 배후로 지목된 이라크를 공격했다. 기자와 작가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1개월짜리 여행비자 얻으려100여개 항목 신청서 써내가까스로 이란 도착하니영어 한마디도 통하지 않아“적지 않은 기자들이 이라크로 가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바그다드를 취재하겠다고 자원한다는데, 당신들은 그들이 이해되는가?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총알에는 눈이 안 달렸다. 기자들을 피해 총알이 날아다닐 리가 없다. 미군의 폭격에 일흔 노인과 일곱 살 아이도 죽어가고 있는데… 정말 대단한 용기들이다.”사실 기자는 용기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랬음에도 이라크 바로 옆에 위치한 나라이자, 당시엔 국제사회로부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불량국가`로 찍혀 있던 이란에 왜 가려고 했을까? 아마도 일생 한 번도 가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미지의 공간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다고 짐작해보지만, 그것 또한 정확한 이유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란을 여행했던 몇 해 전 봄. 우크라이나 키예프공항을 경유해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이란대사관을 찾아 여행비자를 신청한 것이었다.당시엔 인터넷을 통해 비자신청서를 접수해야 했는데, 적어야 하는 항목이 족히 100개가 넘었다.도대체 이런 건 왜 묻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항목도 많았다. 결혼 여부에서부터 이미 사망한 내 아버지의 이름, 이스라엘 여행 여부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되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대체 눈동자 색깔은 무엇 때문에 적으라는 걸까.게스트하우스 공용 컴퓨터 앞에서 몇 시간 동안 땀을 훔쳐내며 항목 하나하나를 채워나갔고, 그걸 이란대사관으로 전송한 후 자그마치 2주를 기다렸다. 그 기간 동안은 이스탄불 시내 곳곳과 교외까지를 여행했다. 최근 폭탄테러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탁심거리`와 `술탄아흐메트 광장` 역시 당시 돌아본 곳이다.비자신청서를 보낸 지 보름째 되는 날에도 `여행비자가 발급됐으니 수령하러 오라`는 답변 이메일은 오지 않았다. 그쯤 되고 보니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이렇게 한단 말이지. 기다린 게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이란에 가고야만다”란 혼잣말을 했다. 이란을 여행한 경험이 있는 터키 사람을 만나 물으니 “이란 여행비자는 이스탄불보다 트라브존에서 신청하는 게 쉽게 받을 수 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터키 동부로 가는 기차의 출발지인 하이다르파샤역으로 가서 티켓을 예매했다. 자그마치 1200km를 달려야 하는 에르주름행 기차표엿`다.서유럽이나 일본, 한국처럼 시속 300km를 넘나드는 고속열차가 있다면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터키 기차의 평균시속은 50km에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연착도 잦았다. 결국 기차에서 네 끼를 먹고 34시간 만에야 에르주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란 비자를 얻을 수 있는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트라브존까지는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더 가야했다. 지독하게 먼 길이었다.트라브존 중심지를 벗어난 곳에 자리한 이란영사관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이스탄불에서 쓴 100여 개 항목의 질문이 있는 비자신청서를 다시 써야한단다.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을의 입장이니 어쩔 것인가. 또 쓸 수밖에.돌아가신 부친의 이름을 또 한 번 썼고, 눈동자 색깔을 적는 칸엔 `다크 브라운`이라고 써넣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주관식 문항이었다. “여행에서 돌아가면 곧 할 것”이라는 거짓말까지 했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미혼의 단독여행자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날 알았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서야 가까스로 `Islamic Republic of Iran`이 선명하게 날인된 1개월짜리 여행비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영사는 여권을 돌려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가시처럼 돋은 수염에 험상궂은 표정과는 전혀 다른 착한 웃음이었다.이슬람성당인 `모스크`와 이를 호위하며 서 있는 커다란 기둥 `미나레트`,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에잔`과 여성의 온몸을 검게 휘감은 `차도르`로 상징되는 이란. 바로 그 이란과 만나기 위해 어렵게 얻은 여행비자를 가방에 고이 모셔 넣고, 이란에서 가까운 터키 동북부 시골마을 도우베야짓을 향했다. 또 10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야했다. 멀미까지 날 지경이었다.`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는 풍문이 떠도는 도우베야짓. 거기서 사흘을 머물며 이란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저 했다. 현금지급기가 없는 이란에선 신용카드나 체크카드가 무용지물이라고 했다.넉넉하게 달러를 환전하고, 엄청나게 느린 인터넷 속도를 참아가며 `안전한 이란여행`이란 키워드로 포털사이트를 검색하기도 했다.그리고, 마침내 이란으로 입국하는 날이 왔다. 이국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빛나던 봄날 오후.터키 국경검문소를 넘어 이란 출입국사무소를 통과했다. 양국의 군인들이 총을 든 채 오갔지만, 대부분의 군인이 사람 좋게 웃고 있었기에 위협적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런데,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영어가 전혀 통하지를 않았다. 동남아시아와 우크라이나, 터키 이스탄불에선 억지스럽게라도 먹혀들던 `여행자용 단문 영어회화`조차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시내라고 해봐야 끝에서 끝이 훤히 보이는 손바닥만한 이란의 국경마을 바자르간. 거기서 길을 잃을 줄이야.막막하기 짝이 없었다.한국처럼 이란 역시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난 것인지 거리엔 노인들이 많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도 “버스터미널이 어디에 있나요”라는 질문에 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거 시작부터 왜 이러지”라는 말이 한숨에 섞여 나왔다.이란은…유럽과 아시아 중간지점 동·서문명 교류지 역할무슬림 종교 특성상 술과 돼지고기 찾기 어려워아라비아반도와 인도 사이에 위치한 국가.파키스탄, 이라크, 터키, 아제르바이잔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유럽과 아시아대륙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탓에 오래 전부터 동·서문명의 교류지 역할을 해왔다.1906년 근대헌법이 공포되고 1925년 팔레비왕조가 들어서 친서방 정책을 펼쳤다.1979년 친서방-개방정책에 반대하며 이슬람 순혈주의를 지향했던 호메이니가 회교혁명을 통해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했다.면적은 164만8천㎢, 인구는 약 8천1백만 명, 수도는 테헤란이다.페르시아인(51%)과 터키인(18%)이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소수의 쿠르드인(7%)과 인근 아프가니스탄 등의 국가에서 유입된 이들도 각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여타 중동국가와 달리 공용어는 페르시아어. 이슬람 시아파의 `맏형 국가`로 불린다.이란 이슬람교도 중 시아파의 비율은 약 89%. 적은 수의 유대교와 기독교 신자가 있고,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이들도 있다.최근 미국이 주도했던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풀림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한 국가발전에 기대를 거는 국민들이 많아졌다.세계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이며 외형적으로는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사실상의 정치권력은 무슬림 최고지도자인 이맘(Imam)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호메이니에 뒤를 이은 현재의 이맘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국민들은 한때 `지구 위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불렸던 페르시아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색창연한 왕의 궁전과 왕비의 사원이 존재하는 이스파한, 다리우스 황제의 여름별궁으로 사용됐던 페르세폴리스,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사막 가운데 건설된 도시 야즈드, 카스피해의 매력을 듬뿍 담고 있는 반다르 안잘리 등이 주요 관광지. 화폐단위는 이란 리얄(Rial).공식적으로는 100리얄이 한화 약 4원이지만, 암시장에서의 외환거래는 공식 환율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무슬림국가의 특성상 돼지고기 요리와 술을 찾아보기 힘들다.밀가루 반죽을 넓게 펴서 화덕에 구운 빵과 치즈, 양고기와 닭고기 바비큐, 토마토와 오이 등 각종 채소가 서민들의 주식이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2016-03-25

사랑, 인종과 국경을 넘다

우려가 많았던 알바니아 여행.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그런 우려를 불식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예의 바르고 친절한 미국 사내와의 저녁식사는 즐거웠다. 어둠 내린 티라나의 거리를 나란히 걸어 레스토랑을 찾았고, 그가 “가능하면 여행지의 음식을 먹어보자”는 제의에 따라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번성했던 옛도시 베라트의 흔적이라곤산 위에 황량하게 남겨진 성곽뿐…국적 다른 커플의 위대한 사랑에 감동타인에 베푸는 넉넉한 마음도 선사 받아수염을 기른 무슬림들이 탁자마다 자리를 메운 서민들의 식당. 다진 양고기와 채소를 반죽해 숯불 위에 구운 요리를 주문했다. 맥주 한 병씩을 곁들이니 더할나위 없는 만찬이다. 한 사람당 겨우 6000원의 상차림임에도 만족도가 높았다.그 미국인과 남·북한과 미국의 관계,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의 차이점까지를 화제 삼아 이야기를 나눴다. 알바니아 티라나의 스칸데르베그광장이 정치토론장이 된 느낌이었다. 서툰 영어로 그처럼 많은 말들을 쏟아낼 수 있었던 건 미국 사내의 배려와 `술의 힘`에 기댄 탓이 컸다.많은 한국인들이 알바니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기자는 미국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상호주의가 아닌 자기중심주의에 기반해 사고하고, 약속국을 깔보는 태도를 가졌으리라는 선입견. 그러나, 그날의 만남은 그런 편견과 선입견의 일정 부분을 깨뜨렸다. 그렇다. 세상에 단순한 하나의 잣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것이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티라나에서 이틀을 머물고 베라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인구가 수천 명에 불과한 조용한 시골마을을 찾아간 것이다. 베라트는 야트막한 강이 마을을 가르며 소리 없이 흐르고, 야트막한 산에 계단식으로 지어진 집들이 독특한 풍경을 이루는 곳. 시끌벅적한 카페와 네온사인이 없는 소읍(小邑). 옛날엔 번성했던 도시라고 하는데 당시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이라곤 산 위에 황량하게 남겨진 성곽뿐이었다, 중심가에도 인적이 드물어 마치 `유령의 마을` 같았다.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에잔(Ezan)만이 낡은 모스크 기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하루 5번 울려나오는 조용하고 또 조용한 마을.그러나, 도시가 주는 적요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배낭여행자를 위한 숙소는 그 마을에 딱 하나. `베라트 백패커스 호스텔`이었다. 그곳에 머문 덴마크와 잉글랜드, 핀란드와 체코, 독일과 호주, 캐나다와 네덜란드에서 온 젊은이 20여 명은 금세 너나들이로 친해졌다. 네덜란드를 떠나 독일과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를 거쳐 거기까지 온 독일 커플은 이제 겨우 열아홉 살. 오로지 `히치하이크`로만 1천km가 넘는 길을 왔다고 했다. 놀라웠다. 어렵지 않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나 살아온 열아홉 소년과 소녀의 가슴엔 나라간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방학을 맞은 그들은 슬리퍼 끌고 이웃 마을 놀러가듯 대여섯 개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었다.지뢰와 철조망으로 막힌 휴전선을 지나지 않으면 육로를 통해서는 다른 나라로 갈 수 없는 한국. 우리들 뇌리를 잠식한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에는 이유가 있었다. 때론 인간이 태어난 지리적 위치가 그들의 의식을 온전히 규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놀라움과 함께 허탈감이 왔다.베라트에 도착한 이튿날. 마을 광장 찻집에서 국적이 다른 한 쌍의 커플을 만났다. 그들은 독일 남자와 알바니아 여자로 연애를 시작한지 3년이 됐다고 했다. 비교적 경제적 형편이 나은 독일 남자가 시간이 날 때마다 연인이 사는 알바니아로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한단다.독일 기독교신자와 알바니아 이슬람교도의 연애와 사랑. 종교적으로 볼 땐 축복받기 힘든 어색한 조합이다. 특히 여자 쪽이 더 힘들 것이다. 다소 교조적인 이슬람 교리를 지키는 무슬림국가에서는 다른 종교를 가진 남편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차마 질문을 던지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애틋한 감정은 주위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가 어려울 게 분명했다.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독일 남자의 눈길은 한없이 따스했고, 독일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 뜨개질을 하는 알바니아 여자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왜 그렇지 못할 것인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사랑은 그 어떤 금기와 제약도 기꺼이 이겨낼 힘을 주는 것이 아닌가. 삶은 물론, 죽음의 이유까지 될 수도 있는 사랑이 그까짓 국경과 인종을 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그들의 빛나는 사랑에 축복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새삼스레 두 사람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둘은 이미 왜곡된 세상의 시선을 넘어선 위대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기자는 포도주 한 병을 주문해주는 것으로 축복의 말을 대신했다. 독일 사내와 알바니아 처녀를 만난 바로 그날 밤. 취한 채 느지막이 숙소로 돌아왔다. 잠을 청하며 누웠으나 새벽까지 불면에 시달려야 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내게 저런 사랑이 온다면 그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겠는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알바니아 여행이 끝나던 날. 아드리아해의 파도가 출렁이는 항구도시 듀레스에서 이탈리아 바리(Bari)로 향하는 페리가 굴뚝에서 연기를 뿜었다. 부끄러움 많고 잘 웃는 알바니아 사람들. 그들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낸 짧은 시간이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이탈리아처럼 높은 첨탑의 유명한 성당도, 프랑스처럼 고급스런 휴양지도 없는 나라 알바니아. 그러나, 기자는 직접 밟아본 그 땅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다. 그건 아마도 마피아가 득실댄다는 오해 속에서 간난신고의 삶을 이어가면서도, 타자에게 베풀 넉넉한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 매료된 탓일 게다. 멀어지는 알바니아 항구를 바라보며 읊조린 바람이 떠오른다.“삶이 열정을 나눌 여인을 허락한다면, 나 역시 베라트에서 본 그 연인들처럼 금기와 국경을 넘어서는 사랑을 하리라.”맛 볼 만한 음식은…평소에는 맛보지 못했던 생소한 음식을 즐겨보는 건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다. 이탈리아에 가서 피자를, 베트남에 가서 쌀국수를, 일본에 가서 초밥을 맛보지 않고 돌아온다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핀잔을 들어 마땅하다.음식은 하나의 문화다. 여행하는 지역의 문화를 제대로 경험해보는 건 여행자의 특권인데, 그 특권을 제대로 누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알바니아에도 많은 음식들이 이방인의 입맛을 자극한다. 그중 세 가지 정도는 알아두고 방문하면 메뉴 선택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적을 것이다.● 건강에 좋은 올리브:작열하는 태양에 의한 적절한 일조량과 비옥한 토양을 갖춘 남부 유럽은 올리브가 자라기에 좋은 환경이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알바니아는 올리브의 주요 생산지. 수도인 티라나의 현대화된 마켓은 물론, 작은 도시의 재래시장에도 올리브 본연의 맛에 각종 향신료를 가미한 올리브 절임이 지천이다.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해 노화예방에 좋고, 미용식품으로도 각광받는 올리브는 알바니아 토속주에 곁들여도 좋고, 맥주 안주로도 그만이다. 한국 돈 2000원 정도면 꽤 많은 양의 염장 올리브를 구입할 수 있다. ● 양고기를 이용한 각종 요리: 아시아에 비해 유럽은 동물의 내장을 식재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알바니아엔 양의 내장은 물론, 뇌를 재료로 만든 요리도 맛볼 수 있다. 베라트 한 레스토랑의 메뉴판은 여행자들을 놀라게 한다. `LambBrain Stew`(양뇌 스튜)라는 음식이 적혀 있는 것. 하지만, 굳이 없는 용기를 발휘해 이런 요리에 도전할 필요까지는 없다. 무슬림국가인 알바니아 국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대신 양고기와 닭고기를 이용한 요리가 발달했다. 남유럽의 독특한 향신료를 첨가해 익힌 양고기 스테이크와 부드러운 닭 가슴살 구이는 한국인의 입맛에도 딱 맞는다.● 싱싱하고 값싼 과일과 채소: 한국의 채소와 과일도 세계 어느 나라 것들 못지않게 맛있다. 하지만, 지구의 반대편에서 만나는 과일과 채소는 그 나름의 매력으로 관광객들의 미각을 유혹한다. 원색에 가까운 빨강, 노랑, 초록의 알바니아 과일과 채소 또한 저렴한 가격에 사각거리는 식감이 좋다.몇몇의 여행자들은 낯선 외국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서민들이 이용하는 시장을 찾는다. 밀착된 위치에서 그곳 사람들의 삶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티라나의 재래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새빨간 토마토와 선명한 연두색의 오이, 그 시원한 맛이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2016-03-18

가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힘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인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를 거쳐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로 향하는 국제버스에 올랐다. 때는 유럽대륙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있던 한여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폭염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냉전·폐쇄정책·독재로 서민들의 경제 어려워도자신의 나라에 온 손님에게 작은 할인의 선물도소박하고 선량한 친절을 간직한 티라나 사람들그 더위에 냉방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낡은 버스를 타고 7시간을 넘게 달려야 했으니, 마케도니아 스트루가를 출발해 티라나에 도착했을 땐 기자만이 아닌 탑승자 모두가 지쳐있었다. 무엇보다 시원한 음료 한잔이 절실했다.머물 숙소를 찾기 전,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러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하나 꺼내들었다. 맥주 이름이 도시 이름과 똑같은 `티라나`다. 동유럽 도시들은 이름이 예쁘다. 루비아나, 포드고리차, 소피아, 벨그레이드, 부카레스트 등등…. 티라나 또한 단어가 주는 느낌이 앙증맞다.막 도착해 환전소를 찾기 전이라 알바니아 화폐인 레크가 없었다. 맥주의 가격은 우리 돈으로 약 800원. 계산 방식을 묻는 내게 구멍가게 주인은 0.5유로(약 650원)만 내란다. 그리곤 “알바니아에 온 걸 환영하는 뜻에서 해주는 할인”이라며 웃었다. 낯선 도시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베푼 소박한 친절에 기자 역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게를 나와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곤혹스러웠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알바니아엔 번듯하게 지어진 버스터미널이 없다. 인접국을 오가는 국제버스를 포함해 알바니아 국내를 돌아다니는 버스들까지 모두 `길거리` 일정 장소에 정차한다. 뿐만 아니라, 출발지와 목적지별로 정차 장소까지 다르다. 그러니, 여행자는 자신이 하차한 곳이 어디인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평소에도 길눈이 밝지 않은 기자는 숙소 찾는 걸 도와주고, 시내 지도 등을 얻을 수 있는 관광안내소부터 찾았다. 하지만, 한참을 돌아다녀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경찰에게 도움을 청했다. 교통경찰인 듯 보이는 사내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서너 번을 반복해 듣고서야 기자가 찾는 숙소의 이름을 알아채고는 말이 아닌 몸짓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뻗었다가 돌리기도 하고, 횡단보도를 설명할 땐 두 발을 모은 채 폴짝 뛰기까지 하면서. 그 광경을 누군가 봤다면 그를 경찰이 아닌 마임 배우로 착각했을 것이다.그 성의가 고마워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다. 그 또한 어깨동무를 하며 환하게 웃었다. 조그만 가게 주인과 경찰의 사소한 배려가 알바니아의 첫인상을 좋게 만들고 있었다. 고군분투(?)한 경찰의 설명 덕분에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바니아가 개방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에 소년시절을 보낸 청년 두 사람이 공동경영 하는 숙소였다. 다소 낡았지만 정원에는 향기 뿜어내는 나무가 여러 그루 서있고, 그 아래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인 소박하지만 정감 어린 호스텔. 그 풍경이 지난시절 한국의 민박집을 떠올리게 했다. 기자가 유년을 보낸 부산의 어느 변두리 같은 풍경에 마음이 편안하게 풀어져,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야외 탁자에 앉아 `티라나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해 마셨다.냉전시대, 폐쇄정책으로 일관한 독재자가 장기집권 했던 알바니아. 아직도 경제적인 부분에선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나라를 찾아온 여행자에게 선량한 미소를 보낼 줄 아는 사람들. 그 웃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낮에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달콤했다.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본다. 경제적 궁핍이 인간성마저 메마르게 하는 모습을. 하지만, 몸이 가난하다고 마음까지 곤궁해지는 게 과연 당연하고 옳은 일일까? 알바니아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고민하게 하는 공간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궁핍을 면하고 있지 못함에도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은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곳. 그 미소의 발원지가 궁금해졌다. 사실 내부와 외부 모두가 완벽한 세상, 정신적인 부분과 물질적인 부분 모두에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누군가 “정신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풍요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가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힘. 그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알바니아는 쉽사리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아직까지는 여행자가 그닥 많지 않은 알바니아. 기자가 머문 숙소도 겨우 10여 명 남짓의 손님이 전부였다. 그러나, 국적은 다양했다. 한국과 독일,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온 여행자와 몬테네그로 커플까지. 대부분이 20대 초·중반인 그들은 금방 친해졌고, 해가 저문 호스텔 정원은 분위기 좋은 야외카페로 변신했다. 그때 눈길을 사로잡은 이가 한 명 있었으니,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홀로 발코니 의자에 떨어져 앉아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갈색 머리칼의 사내. 나이도 제법 지긋해 보였다. 편안한 표정과 선한 눈빛을 가졌기에 호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미국 워싱턴에서 왔다는 그는 정치인들의 연설문이나 보도자료를 대필해주는 것으로 생활을 해결한다고 했다. “당신이 돕는 정치인들이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고 물었다. 웃음 머금은 얼굴로 그가 답했다. “조지 부시를 좋아할 만큼 바보는 아니죠. 민주당쪽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서툴고 거친 기자의 영어는 당연지사 그가 모국어로 사용해온 세련된 영어와 충돌했다. 이런 경우 여행자들의 대화는 중단되기 쉽다. 서로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였을까. 그날 우리의 대화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그것은 순전히 단어를 조합하는 수준에서 던지는 말에 귀 기울여주고, 쉬운 문장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미국 사내의 배려 덕택이었다. 똘레랑스(tolerance)가 프랑스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닌 듯했다.알바니아를 보다 즐겁게 여행하려면…여행이란 문화와 생활방식이 다른 지역을 몸소 경험해보는 것이다. 알바니아 역시 한국과는 판이한 환경을 지닌 국가. `다른 문화와 생활방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아래 사항을 미리 알아두자.● 한국식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을 기대하면 실망이 클 것이다. 대중교통 인프라가 잘 정비된 서유럽을 먼저 여행한 사람이라면 알바니아의 교통시스템에 경악할 수도 있다.알바니아엔 조그만 도시와 시골은 물론이고, 수도인 티라나에도 버스터미널이란 게 없다. 목적지에 따라 자신이 알아서 버스가 정차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관광객들에게 친절하다. 자신이 가고자하는 여행지를 그들에게 알려주면,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버스가 정차하는 장소로 안내해줄 것이다.● 다소 경직된 이슬람 문화와 자유방임의 유럽 문화가 뒤섞인 공간이 알바니아다. 음식에서도 그 특성은 드러난다. 유럽과 오스만투르크의 맛이 묘하게 융합된 요리는 여행자의 입맛을 사로잡는다.길거리 허름한 식당에서 알바니아 서민들과 섞여 구운 양고기와 감자튀김을 먹는 것도 좋지만, 촛불 밝힌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정찬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독특한 향신료가 가미된 스테이크와 올리브를 듬뿍 넣은 샐러드를 추천한다.● 한국에선 이미 사라진 낡은 기차를 타고 느린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알바니아가 관광객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평균 시속이 50km도 되지 않기에 KTX에 익숙해진 이들에겐 짜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하지만, 그 속엔 알바니아 사람들의 삶이 숨겨져 있다. 지난시절 우리가 사이다와 삶은 달걀을 챙겨 기차에 올랐다면, 알바니아인들은 빨간 사과와 통밀빵을 들고 여행을 떠난다. 환하게 웃는 꼬마들에게 한국식 게임을 알려주고 함께 즐겨보길 권한다.● 무슬림들의 성당인 모스크를 방문해보는 것도 색다른 체험이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대부분 모스크를 찾는 관광객들을 반긴다. 이슬람교도가 폐쇄적이란 건 일종의 편견이다.그들의 낙천적인 성격이 외지인에게도 자신들 종교의 속살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게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높은 천장 아래 푸른 타일이 예술적으로 배열된 모스크에서 잠시잠깐 세속의 번잡함을 잊어보는 것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기자/hss@kbmaeil.com

2016-03-11

영화 속 `마피아`는 알바니아에 없다

가톨릭과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는 유럽에서 `소수자`인 무슬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기에 더해 “당신들 나라 사람들은 악랄한 범죄조직에 몸담고 사는 이가 많다”는 오해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설상가상이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기자는 아직도 알바니아가 타의에 의해 소외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외로운 섬`처럼 느껴진다. 그랬다. 알바니아는 유럽대륙 안에 외따로 존재하는 섬이었다.외로움과 고립됐다는 감정은 사람의 정서를 부수기 쉽다. 하지만, 그런 소외감 속에서도 인간은 강직한 마음과 선량함을 향한 신념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게 인간만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알바니아를 여행했을 때, 외부로부터의 수난을 이기고 선함에 가닿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해서, 알바니아 여행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근거 없는 편견을 깨는 여행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마피아(Mafia)`는 지구 위 모든 사람들이 아는 악랄한 범죄조직이다. 인신매매와 마약거래, 청부살인 등의 끔찍한 범죄를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불법집단. 알바니아는 크나큰 오해 속에서 산다.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악당 중 하나가 알바니아 마피아”라는 편견이다. 물론 알바니아에도 범죄집단과 악인은 존재한다. 미국과 서유럽에 그 뿌리를 내린 알바니아 마피아 역시 매춘, 마약밀매 등의 반인륜적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들이 행하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와 극악한 폭력이 악명 높은 것도 맞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보다 훨씬 부풀려진 과장에 가깝다. 그렇다면 무엇이 `알바니아 마피아`만을 지목해 그들의 악명을 드높였을까.그것은 할리우드 영화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는 그 어떤 것보다 문화적 파급력이 강하다. 전세계를 조밀하게 연결하는 할리우드의 배급망이 가진 거대한 힘. 그것은 사실을 과장할 수도 있고, 축소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과 오해 역시 역시 피해갈 수 없다.할리우드는 자신들이 발 딛고 선 `미국 자본`에 적대적인 것들에겐 쉬이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미국의 주류종교인 기독교의 대척점에 선 이슬람교, 자신의 나라에 우호적이지 않은 정권이 지배하는 국가들을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곱게 볼 리 없다. 그들에 대한 `영화적` 비하와 혐오는 그에 따른 당연한 수순이다.일례로 기자 또래의 40대 영화팬들은 소년시절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람보` 시리즈를 보며 자랐다. 그러나, 그 영화 속에서 묘사되던 베트남전은 과연 진실에 가까웠던가? 강자가 기술한 역사 속에 숨겨졌던 `베트남전쟁`의 잔인한 진상은 `람보`가 보여준 불요불굴의 정의로움과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용기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게 바로 할리우드 영화가 가진 한계다.자신의 입장만을 강변하며 서술하는 역사는 왜곡되기 십상이다. 영화에서 보는 화면 속 장면과 그것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진실은 분명히 다르다. 알바니아는 바로 이 `영화 속 화면`과 `진실` 사이에서 오해받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기자는 그 오해를 여행을 통해 몸으로 부딪치며 풀었다.SNS를 통해 알바니아를 여행할 것이라고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알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여행을 말렸다. “그 나라는 악랄한 마피아가 밤거리에 득실대는 곳이니 위험하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걱정이었다. 몇 해 전 적지 않은 관객을 동원한 할리우드 영화 `테이큰`에서 묘사되는 알바니아는 그야말로 `심각한 국가`다. 철없는 10대 미국 소녀들을 납치해 마약을 먹이고, 성폭행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매춘부로 팔아치우는 `알바니아 마피아`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인면수심의 괴물들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알바니아가 아닌 실제의 알바니아도 그럴까.알바니아는 유럽 국가 중 이슬람교도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그 때문에 이슬람과 적대적 관계를 지속해온 미국과 할리우드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은 아닐까.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 상식에 기반해 생각해보자.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6·25전쟁 직후의 한국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게 일상인 곳이다.마피아 같은 범죄조직이 존속할 수 있으려면 그 공간에 `검은 돈`이 떠다녀야 한다. 범죄와 폭력으로 삶을 영위하는 집단은 투명한 사회에선 존재할 수가 없다. 어두운 거리와 음침한 방에서 주고받을 `검은 돈`이 없는 곳에 범죄조직이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알바니아 대부분의 도시엔 검은 돈이 없다. 알바니아 사람들의 대다수는 산자락 조그만 땅에 농사를 짓거나, 양을 키우며 살아간다. `마피아`처럼 거대한 범죄집단이 침을 흘릴만한 투명하지 못한 자본이 생겨날 곳이 없다. 그러니, `알바니아=마피아의 소굴`이란 등식은 그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알바니아 마피아가 실제 한다면 그들은 이미 수십 수백억 원의 `검은 돈`이 부당하게 거래되는 파리나 베를린의 암흑가로 떠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위와 같은 생각 아래서 마케도니아를 출발해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로 향하는 국제버스를 탔다. 기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알바니아는 때 묻지 않은 산과 강 아래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선량한 무슬림국가였다.더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수도 티라나는 북적이는 한국의 대도시와 대조를 이뤘고, 나지막한 담 너머로 서로가 농사지은 포도와 올리브를 주고받는 강변마을 베라트 사람들의 웃음은 환했으며, 이탈리아를 마주 보는 듀레스 해변의 적요한 파도소리는 색다른 아름다움으로 여행자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지금도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알바니아에서의 추억. 바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기에 남의 것을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자기 것을 타인에게 나눠주는데 익숙한 알바니아 사람들. `마피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들의 미소를 어떻게 짧은 필설로 온전히 형용할 수 있을까. 알바니아는…유럽 동남부 발칸반도 위치가난해도 친절한 매력 듬뿍유럽 동남부 발칸반도에 위치한 국가. 1479년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다가 1912년이 돼서야 독립했다. 그 영향으로 유럽 어느 국가보다도 무슬림의 비율이 높다. 인구는 약 360만 명. 국민의 70% 가량이 이슬람교를 믿는다.가톨릭신자는 인구의 약 10%로 추정된다. 공식적인 명칭은 알바니아공화국(Republic of Albania)이지만, 알바니아인들은 스스로를 `독수리의 나라`라고도 부른다. 국기에도 머리가 둘 달린 독수리 문양이 그려져 있다.수도는 티라나. 조용하고 고풍스런 마을 베라트와 근사한 바다풍경을 만날 수 있는 사란다 등이 주요 관광지로 손꼽힌다.동쪽으로 마케도니아, 남쪽으로 그리스, 서쪽으로 아드리아해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몬테네그로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알바니아계 주민이 90% 이상으로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인접국 세르비아와는 인종과 종교 문제로 오랜 갈등을 겪기도 했다.동서 구간은 비교적 짧고 남북 간의 길이가 340km에 이르는 길쭉한 나라로, 얼마 되지 않는 평야를 제외하면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뤄져있다.냉전시대엔 소련, 중국 등과 교류하며 폐쇄적인 정책을 이어갔다. 1990년대 초반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따라 민주정부가 수립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고, 현재는 개방적인 국가로 변모 중이다.국토의 77%가 산악·구릉지역인 탓에 농사보다는 임업과 목축업 등이 발달했다. 갈탄, 천연가스, 크롬, 니켈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한 편으로 1990년대 이후엔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쳤다. 보통의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유럽과 달리 아직도 `소달구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빈국이지만, 그 가난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소탈하고 친절하다.양고기나 닭고기를 재료로 만든 요리에 염장한 올리브와 빵을 곁들이는 것이 서민들의 주식이다. 시골의 노인들은 양이나 염소의 젖을 발효시켜 묽게 만든 전통음료를 즐기기만, 티라나 같은 대도시 젊은이들에겐 콜라와 세븐업 등의 탄산음료가 더 인기다.화폐 단위는 레크(Lek)로 1레크는 현재 가치로 한화 약 10원. 북·서유럽에 비하면 물가가 매우 저렴해 1천500레크 정도면 깔끔한 레스토랑에서 전채와 메인요리, 디저트까지 즐길 수 있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2016-03-04

언젠가는 다시 만날 아드리아의 바다여

크로아티아 내전이 남긴 상처를 눈앞에서 지켜봐야했던 아픈 경험을 뒤로 하고 두브로브니크와 작별할 날이 왔다. 여행은 인간에게 즐거움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때로는 슬픔도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돼준다. 그런 즐거움과 슬픔의 체험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는 것이고, 바로 그 `정신적 성장`을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해 여행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건축물 간직한 도시 `스플리트` 로마 황제 별궁에서 고대 낭만·매력 충만두브로브니크를 떠나던 날도 붉은 지붕 위 햇살은 눈부셨다. 머물렀던 사흘의 시간을 통해 정이 들었던 것일까. 이별의식이 길어졌다. 민박집 부부는 기자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들이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전쟁과 그로 인한 상처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으므로. “언젠가는 꼭 한 번 크로아티아에 다시 오세요. 그때도 당신을 위해 방을 비워둘게요“라는 작별인사가 따뜻하게 들렸다. 선량한 얼굴과 착한 마음을 가진 부부를 뒤로 하고 버스터미널을 향해 가파른 돌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이런 소원을 빌었던 것도 같다. “상처 입은 저 사내와 곁에서 그 상처를 어루만지며 살고 있는 여자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상처를 이겨내고 행복에 이르렀으면.”스플리트를 향하는 버스가 두브로브니크를 출발했다. “또 다른 아드리아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스플리트 역시 짙푸른 바다와 고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 거기에 로마 황제의 별궁까지 들어서 있어 매력을 더한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아기자기한 광장엔 수백 명의 여행자들이 시끌벅적 몰려다니며 과일향 진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주스를 마시고, 생선과 새우 바비큐를 안주로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모처럼의 휴가를 맞은 사람들의 표정은 더없이 환했고, 목소리 또한 경쾌한 고음으로 술렁였다. 그러나 기자는 보통의 관광객들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가슴으로 들어온 비극의 정서가 표정을 무겁게 바꿔놓았다. 크로아티아 내전과 죽음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섬 여행`이었다. 스플리트 항구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의 섬으로 가서 사흘을 보냈다. 조그만 섬이라 외출해봐야 볼거리가 별로 없으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숙소 발코니에 홀로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종교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날이 저물면 섬마을 성당으로 내려가 낡은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벽화 속에 그려진 마리아를 올려다보곤 하던 날들이었다. 예기치 않은 경험은 지적 열망을 낳기도 한다. 발칸반도의 비극적 현대사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비단 크로아티아 내전만이 아닌,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학살 등에도 관심이 갔다. 한국으로 돌아와 관련 서적을 찾아보고, 크로아티아 내전을 소재로 한 영화를 여러 편 관람한 것은 그 열망을 향한 나름의 실천이었는지도 모른다.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리트, 두어 개의 섬을 떠돈 아드리아해 여행을 마치고 스플리트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로 향하는 티켓을 예매했다. 친절한 매표소 직원은 “버스는 밤 9시나 돼야 출발하니 어디 가서 저녁이라도 먹고 오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로마 황제의 별궁 인근에 늘어선 식당 중 한곳에 자리를 잡았다. 치렁치렁한 짙은 갈색 머리칼에 늘씬한 체형을 가진 여성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옆 테이블에서 샴페인을 마시던 그녀 역시 두브로브니크의 숙소 여주인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됐을까? 동석한 친구들과 즐겁게 재잘거리던 그녀가 거리에 놓인 야외 스피커에서 탱고의 선율이 흘러나오자 일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함께 온 남자들 서너 명과 파트너를 바꿔가며 추는 춤의 맵시가 비전문가인 기자가 보기에도 보통의 수준은 넘어서고 있었다. 갓 태어난 병아리색의 노란 티셔츠에 분홍빛 미니스커트가 멋지게 어울리는 미인의 춤은 근처 레스토랑에 자리한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산책하던 동네 주민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그녀의 스텝에 따라 함성과 박수가 이어졌고, 댄스 파트너가 되겠다는 남자들이 이곳저곳에서 등장했다. 즐겁고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억될 인상적인 밤을 여러 사람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소간 마음이 누그러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자는 두브로브니크 민박집 주인사내에게서 확인해야 했던 내전의 고통, 그리고 발칸반도 비극의 역사에 관한 상심을 온전히 떨쳐내지 못했음에도 아래와 같은 바람을 조용히 읊조렸다.“해맑은 웃음의 저 청년들에겐 내전과 학살이라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종교와 인종의 다름을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패악이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춤추고 노래하는 행복한 날들을 몇몇 선택된 자들만이 아닌 인류 모두가 누리기를.”기자는 요즘도 가끔 꿈을 꾼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민박집 주인여자의 선량한 미소와 그녀 남편의 삶을 파괴한 전쟁. 그리고, 로마 황제의 별궁 앞 광장에서 정열적인 춤을 추던 스플리트 여자에 관한 꿈이다. 그 아름다움과 비극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언젠가는 아드리아해로 떠날 배낭을 다시 꾸리게 될 것 같다. 유럽에선 디스카운트가 불가능하다?해외여행은 이미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아닌 일상이다. 몇몇의 사람들만이 아닌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한두 번쯤은 외국으로 휴가나 관광을 다녀온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렇기에 해외여행을 둘러싼 여러 가지 풍문도 떠돈다. 그중 하나가 `동남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서는 기념품 가격이나 숙박비를 깎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그곳이 동남아건 유럽이건 풍속에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살이의 모습은 크게 다를 게 없다. 아래 `3가지 팁`만 기억해둔다면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에서도 어렵지 않게 디스카운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성수기 피해 비수기를 노려라많은 사람들이 바캉스를 떠나는 한국의 8월과 마찬가지로 유럽에도 여행성수기가 있다. 구름처럼 사람이 모여 있고, 그들 모두가 호텔을 찾는 시즌엔 “가격을 깎아주세요”라고 요구하기가 힘들뿐더러, 식당과 숙소 주인들도 디스카운트를 해줄 이유가 없다.가능하면 사람들이 몰리는 성수기를 피해 여행비수기를 택해 휴가를 떠나보자. 한적한 해변과 호수를 독차지하는 색다른 경험과 함께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레스토랑과 숙소를 이용할 수 있다. 크로아티아 역시 성수기와 비수기의 숙박료가 크게는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대접받는 여행`을 만끽하고 싶다면 남들이 가지 않을 때를 노려보자. ◆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자“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건 한국만이 아닌 전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속담이다. 아무리 한적한 여행비수기라도 잔뜩 찌푸린 얼굴로 불만을 말하듯 디스카운트를 요구한다면 어떤 사람이 이를 좋게 받아들이겠는가. 웃음에는 비용이 필요 없다. 활짝 핀 웃음으로 “호텔비가 우리에겐 너무 비싸요. 조금만 깎아주시면 복 받으실 겁니다”라고 말하는 손님 앞에 야박하게 굴 숙소 주인이 있을까.특히나 크로아티아나 마케도니아 등의 동유럽 국가는 서유럽에 비해 아직 `자본의 때`가 덜 묻은 지역이라 미소를 `할인의 무기`로 이용해도 전혀 부끄러울 게 없다.◆ “고마워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오늘날 일본이 언필칭 `관광대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친절함이 있었다. 2008년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리는 오키니와를 여행했다. 당시 만난 일본인들은 “실례합니다”와 “감사합니다”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입버릇처럼 사용했다.우리도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상대방이 베푸는 작은 친절과 배려에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을 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숙박비를 할인해주는 호텔 지배인, 식사비를 일정 부분을 디스카운트 해주는 레스토랑 주인에게 웃으며 “고맙습니다”라고 말해보자. 다음 날은 그 할인폭이 더 커질 게 분명하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2016-02-26

크로아티아를 붉게 물들인 상처와 만난 새벽

오렌지색 가로등이 어두운 거리의 가파른 계단을 비추던 자정 무렵. 숙소로 돌아갔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두브로브니크는 활기 넘치는 낮과 달리 고요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민박집 문을 여니 낮에 본 사내가 거실에 혼자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한국이었으면 “함께 한잔 할까요”라고 청했을 테지만, 붉어진 그의 눈동자와 어두운 표정을 마주 보기 어색했다. 가벼운 인사만을 남기고 방에 들어가 깊은 잠에 들었다.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남자의 가슴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생채기가 짐작되던 밤이었다.그리고, 아침. 귀가한 여주인이 레몬차를 만들어줬다. 한국식 해장국만은 못했지만, 윙윙거리는 두통이 멀리로 물러나는 기분이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배려와 마음씀씀이가 따뜻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남편은 어젯밤의 과음 때문인지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기척이 없었다.두브로브니크에서 보낸 둘째 날도 즐거웠다. 고적하고 조용한 해변을 찾아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낯설지만 아름다운 풍경들은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했다. 피크닉 온 현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점심식사 자리에 차려진 크로아티아식 샐러드를 한 접시 얻어먹기도 했다. 파도 잔잔한 바다에서 헤엄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애정 어린 눈빛은 크로아티아와 한국이 다르지 않았다.항구에서 배를 타면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섬 `로크룸`에서 보낸 오후도 기억에 남는다. 어떤 동화책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그 섬엔 공작새 수백 마리를 풀어놓고 기르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금발머리의 꼬마들이 신기해하며 공작의 예쁘장한 꼬리 깃털을 뽑으려 종종거렸다.아름다움은 두브로브니크 곳곳에 산재해있었다. 깨끗한 바다와 고풍스런 건축물, 멋들어진 중세 성곽과 낭만 가득한 주위의 섬들. 그러나, 아름다움 곁에는 언제나 잠복한 슬픔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지 않았던가.올드타운으로 돌아와선 대를 이어온 유서 깊은 식당에서 독특한 향과 맛을 가진 `앤초비 피자`를 먹고, 숙소 근처 언덕에 올라 석양을 바라봤다. 붉은 지붕과 붉은 태양,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천상의 풍경이었다. 딱딱한 경상도 사내의 성정이 부드러워지는 느낌이었다.낯선 도시를 헤매 다닌 피로감 탓일까. 그날은 일찍 잠들었다. 곤한 잠에서 깨어난 건 남자의 취기 어린 목소리와 여자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주인 사내와 아내였다. 크로아티아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상황은 충분히 짐작됐다. 새벽 4시에 남자가 언성을 높인다거나 여성이 눈물을 보인다는 건 부부싸움이 분명했다. 한참을 이어지던 남자의 성난 목소리와 여자의 소리 죽인 울음은 동이 터올 무렵이 돼서야 잦아들었다. 부부싸움의 이유를 알려준 건 여자였다. 오래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그녀는 기자의 얼굴에서 궁금증을 읽어낸 듯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로 이런 말을 전했다. “잠을 깨워 미안해요. 남편은 착한 사람인데, 가끔 술에 취하면 못 견디게 힘들어지나 봐요. 젊은 시절 전쟁에 나갔었는데... 그 상처 때문일 거예요.”그랬다. 전쟁이 준 정신적 상처 탓이었다. 이른바 `크로아티아 내전`. 1990년대 초반 종교와 인종이 달랐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국들은 갈등의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길은 전쟁으로 옮겨 붙었고, 크로아티아 역시 그 화마를 피해가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내전은 몇 년에 걸쳐 나라를 바꿔가며 계속됐다. 발칸반도가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던 시절이었다.세르비아정교도들은 수만 명의 가톨릭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입에 담기에 끔찍한 여성학대도 곳곳에서 발생했다. 히틀러의 유대인학살만큼 잔혹한 제노사이드(genocide)였다. 크로아티아 또한 1년이 넘는 시간을 그 지옥불 속에서 견뎌야했다.민박집 주인 사내가 터지는 포탄과 피 묻은 칼, 증오와 보복살인이 넘쳐나던 크로아티아 내전에 군인으로 동원됐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0대 초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얼마나 잔인한 광경을 많이 봐야했을까.전쟁은 상대를 죽이거나 무력으로 제압해야만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으로 인간을 내몬다.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비인간적인 공포는 사람의 내면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하다. 그게 부정할 수 없는 전쟁의 본질이다. 크로아티아 내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민박집 주인 남자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세르비아 군인들을 죽였거나, 함께 참전한 전우가 자신의 눈앞에서 전사하는 걸 지켜봐야했던 게 아닐까. 아니, 꼭 그렇게 극단적인 입장에 처하지 않았더라도 전쟁은 인간을 완벽히 다른 성격의 존재로 바꿔버리고도 남을 악마적인 힘을 지녔다. 발칸반도의 비극적인 과거가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해버린 것이다. 측은하고 마음 아팠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내전의 시기에 크로아티아에 있었다면 기자 역시 유사한 전쟁체험을 했을 것이다. 전쟁이란 개인의 의지만으로 피해지는 것이 아니므로. 방에서 잠들어 있는 주인 사내를 깨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연민의 감정이었다.아름다운 크로아티아 땅 도처에 잠복한 역사의 상처. 대체 무엇이 있어 전쟁의 기억으로 고통 받는 개인을 온전히 치료해줄 것인가.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움에 가려진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생채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다.두브로브니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바닷가 언덕에 올라 생소한 이름의 위스키를 마셨다. 민박집 주인 남자와 여자를 생각하니 마신 술의 취기는 즐거움이 아닌 우울함을 불렀다. 그러나, 여행자가 마냥 슬픔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는 일. 또 다른 `아드리아해의 보석` 스플리트가 멀리서 손짓하고 있었다. 발칸반도에선 가능하면 종교 이야기는…발칸반도에 속한 나라들, 즉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코소보 등은 1990년대 초반 혹독한 내전을 겪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하면서 각각의 국가들은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어제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어울리던 이웃사람들이 서로에게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발칸반도 내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한다. 세르비아정교, 가톨릭, 이슬람교 등. 내전 시기엔 정교회 신자들이 무슬림과 가톨릭교도를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 이슬람이 권력을 거머쥐었던 시대엔 무슬림이 타 종교를 가진 이들을 학대하기도 했다.이러한 `발칸반도 내전`의 불씨가 사그라진 건 불과 20년도 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학살을 주도한 정치인은 국제전범재판소에 의해 기소되기도 했다. 그들의 재판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여행을 하다보면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과는 급속도로 친해지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친절하게 자신을 대한다고 해서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 논쟁을 하다가는 낭패를 겪기 쉽다. 어느 시대 할 것 없이 종교는 평화와 사랑의 이념이기도 했지만, 갈등과 분열의 이유가 될 수도 있는 법.종교와 인종 관련 화제 외에도 여행자들의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다. 독특한 문화와 음식, 전통음악과 영화 등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눠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겐 매우 심각한 주제가 될 수도 있는 종교와 인종에 관한 논쟁은 피하는 게 발칸반도를 즐겁게 여행하기 위한 노하우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2016-02-19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어두운 그림자`를 보다

전쟁과 테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다수 전쟁과 테러의 원인이 `종교와 인종의 다름`에 있었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이어 유고슬라비아 연방도 몇 개의 나라로 분리·독립했다. 바로 그 즈음, 크로아티아는 혹독한 내전을 겪었다. 독립을 막으려는 세르비아계와의 전투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들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여행. 그러나, 세상사 어떤 일도 자신의 뜻대로만 되는 건 없다.아름다운 아드리아해를 피로 물들인 내전의 상처를 안고 사는 중년의 사내. 그와의 만남은 크로아티아 방문 첫날 이뤄졌다. 두브로브니크 국제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여자가 대우에서 생산된 자동차를 운전해 데려간 민박집은 수백 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하는 도시 외곽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푸른 하늘 아래 붉은 기와지붕이 줄줄이 늘어서 장관을 이루는 올드타운과 관광객들이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해변과는 다소 떨어진 거리였다. 여행자가 머물 숙소로 입지조건이 그다지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를 따라나서겠다는 관광객이 없었던 게 이해가 됐다.그러나, 숙소의 조그만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두브로브니크의 풍경은 교통의 불편함을 상쇄해주고도 남았다. 여자가 시원한 레몬차를 내왔다. 여전히 푸른 눈동자에 웃음을 담은 채. 적당하게 새콤하고, 알맞게 달콤한 레몬차가 여행자의 피로를 녹여줬다. 향 가득한 홍차와 빛나는 바다… `엽서사진` 같은 두브로브니크병원에서 야간 간호사로 일한다는 40대 초반 여자의 친절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메모지와 볼펜을 가져와서는 현지인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른바 `두브로브니크 맛집`과 근사한 향을 자랑하는 홍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 해변에서 올드타운을 거쳐 숙소를 오가는 시내버스의 번호까지를 알려준 것이다. 그 성의와 친절이 따스했기에 감동스러웠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내일 새벽이 돼야 퇴근할 터이니, 숙소로 들어올 때 사용하라며 작은 열쇠를 건네주는 것으로 그녀의 `방문객 브리핑`이 끝났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요”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시원한 레몬차 3잔을 거푸 들이켜며 들은 설명만으로도 처음 방문한 도시가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그때다. 그녀가 출근을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조용하던 건너편 방의 문이 열렸고,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남편인 듯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가벼운 눈인사만을 전했다.사내 역시 친절한 미소를 보였지만, 얼굴 한 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지닌 그림자 뒤편 지워지지 않은 깊은 상처를 기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확인하게 된 건 두브로브니크를 떠나던 날 새벽이었다.여자는 출근하고, 남자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 지갑과 디지털카메라만을 챙겨 두브로브니크 시내로 나갔다. 눈부신 햇살 아래 더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의 빛깔.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새빨간 지붕과 짙푸른 아드리아해. 누가 찍어도 세칭 `엽서사진`으로 손색이 없을 풍경이 도시 전체에 펼쳐지고 있었다.작품에 가까운 옛 건축물들, 크로아티아인 미적감각 짐작케 해때는 한여름. 한국과 마찬가지로 철부지 아이들은 윗도리를 벗고 두브로브니크 고성 인근 바닷가에서 저마다의 포즈로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13세기 축조된 성벽 아래 사파이어빛으로 출렁이는 아드리아 바다는 그 다이빙에 깜짝깜짝 놀라며 새하얀 포말을 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뿜어내기 바빴다.백사장에선 병아리처럼 노오란 색깔의 머리칼을 가진 아기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엄마의 뒤를 쫓아다녔다. 동화책에서 보던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올드타운으로 들어서자 단순히 주거시설이라기 보단 작품에 가까운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로아티아인들의 미적 감각을 짐작할 수 있는 집들이었다. 예스럽고 미려했다.이쯤 되니 앞서 크로아티아를 여행한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를 연발하는 게 절반은 이해가 됐다. 파도가 바로 눈앞까지 밀려드는 식당 야외좌석에 자리를 잡고 생선 바비큐와 맥주를 먹고 마셨다. 풍광과 분위기에 취해 맥주를 여러 병 마셨다. 거기에다 옆 테이블 사람들과 웃음을 주고받으며 마신 칵테일 두어 잔이 더해지니 이국의 꽃향기가 어디선가 밀려왔다.아마도 취기 탓이었을 것이다. 동유럽 어느 전설처럼 아드리아해에 손발이 닿아 몸 전체가 새파란 보석으로 변한 사람의 환영을 본 것은.청옥빛 파도가 심장까지 밀려들어와 울렁이는 밤. 푸른색 바다를 배경화면 삼아 붉은 빛을 토하며 사라진 태양이 곤한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풍광과 우울한 감상의 교차는 다음 날 새벽 기자가 겪게 될 일을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크로아티아의 속살 엿보려면…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그레브-플리트비체-스플리트-두브로브니크`의 경로를 선택해 남하하거나, 같은 도시를 역순으로 북상하며 크로아티아를 돌아본다.휴가 기간이 비교적 짧은 이들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 코스는 크로아티아의 핵심 관광지를 모두 돌아보는 비교적 합리적인 경로로 알려졌다. 그러나, 2~3주 이상의 여유로운 일정으로 크로아티아를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아래 방법을 통해 보다 달콤한 여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유명 관광지 인근 소규모 해변 방문하기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리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들 중 하나다. 하지만, 거기엔 언제나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그 시끌벅적함을 피해 보다 조용한 곳에서 아드리아해를 즐기고 싶다면, 시내버스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 유명 해변 인근 조그만 바닷가를 산책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인적 드문 바닷가의 조용한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즐기는 여유로움이 색다르게 느껴진다. 당연지사 음식 값과 음료수 가격도 도심보다 훨씬 저렴하다.■ 배를 타고 평화로운 섬 찾아가기아드리아 바다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섬들이 가득하다. 당일치기로 두브로브니크 인근 로크룸섬에 다녀오거나, 스플리트 근처 흐바르섬에서 2~3일 묵어보는 것은 더없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로크룸섬 나무그늘 아래 편안하게 누워있으면 공작새의 아름다운 깃털이 당신의 얼굴을 간질일 수도 있고, 저물녘 흐바르섬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번잡했던 마음속 잡념을 떨칠 수도 있다. 크로아티아 주위에 점점이 박힌 섬들은 유유자적과 안빈낙도가 무엇인가를 풍경으로 설명해준다.■ 렌터카 혹은, 기차 이용하기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입국한 여행자라면 렌터카를 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바닷가 해변도로를 달리다가 아름다운 풍광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차를 멈추고 순간순간 운치를 즐길 수 있는 렌터카 여행은 신혼부부들에게 인기다. 스플리트와 자그레브 구간을 기차로 달려보는 것 역시 크로아티아의 속살을 제대로 엿볼 수 있는 방법이다.서유럽이나 일본의 기차처럼 빠른 속도와 세련된 서비스를 기대하긴 힘들지만, 발칸반도에서 기차를 타보는 흔치 않은 경험이라 의미가 작지 않다. 게다가, 기차여행에선 마주 보는 좌석에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자끼리 인종과 국적을 넘어서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이 또한 여행이 주는 기쁨이 아닐까.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기자/hss@kbmaeil.com

2016-02-12

우연인 듯 `아드리아해의 보석`과 만나다

`크로아티아`라는 나라가 한국인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온 시기는 2013년 쯤이다. 방송 tvN은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풍광을 소개했다. `꽃보다 누나`가 방영된 후엔 “여름휴가 때 크로아티아에 가면 외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많이 만나게 된다”는 과장 섞인 풍문이 떠돌 정도로 이제는 익숙한 여행지가 된 크로아티아.기자의 경우엔 이탈리아 남부에서 1년쯤 생활하며 요리를 공부한 친구에게 크로아티아란 국가가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녔는지 이야기 들었다.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연어샐러드에 포도주를 마시며 나눈 대화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보자.“네가 살던 이탈리아 남부쪽 사람들은 휴가 때 주로 어딜 가냐?”“아드리아해를 건너면 크로아티아가 있어. 거길 많이 가더라고.”“거기서면 프랑스 남부 해변도 가까울 텐데...”“이탈리아 애들 말로는 크로아티아 해변이 더 아름답고 멋지데.”친구의 말에 의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구 위 어느 곳이 로마와 나폴리, 베네치아와 시칠리아, 피렌체처럼 멋지겠나.그런데, 바로 그 이탈리아인들이 “아름답고 낭만적인 휴양지”라고 입을 모으는 크로아티아는 얼마나 근사한 나라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궁금증을 가슴에 안고 찾은 곳이 푸른 바다와 붉은 지붕이 하모니를 이루는 크로아티아 최고의 휴양도시 두브로브니크였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이탈리아 사람들의 극찬은 과장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는 소문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도 쉽게 지울 수 없는 생채기는 있었다. 그 상처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자. 아드리아해를 만나는 기대에 5시간 여정에도 지루할 틈 없어기자가 선택한 크로아티아 입국 방법은 몬테네그로 코토르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운행하는 국제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약 5시간이 걸리는 여정. 한국에서라면 스마트폰과 책을 챙겼을 테고 지겹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기자에겐 그것들이 없었다. 5시간이 지겨울 수도 있겠다고 지레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낡은 버스가 코토르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달리는 내내 아드라아해의 빛나는 풍경과 만날 수 있었고, 그런 까닭에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의 체감시간이 불과 10분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움과 그 바다의 색채를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온전하게 전달이 가능할까. 직접 보고 왔는데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필설로는 형용이 불가능하다”는 수사는 이럴 때 사용돼야 한다.무솔리니가 주도했던 파시즘을 비판적 시각으로 성찰하고, 이와 함께 1930년대 전투기 조종사들의 낭만을 보여줌으로써 `명작 애니메이션`의 반열에 오른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라는 작품이 있다. 그 애니메이션의 공간적 배경이 바로 2차대전을 목전에 둔 아드리아해의 작은 섬이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낭만주의시대, 작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필기구인 만년필. 그 펜촉에서 흘러나오는 네이비블루 잉크 또는, 영롱하게 빛나는 청색 사파이어로 아드리아해의 바다 색깔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면, 눈 덮인 산에서 바라보는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하늘의 색감을 아드리아 바다의 빛깔과 비교할 수 있을까.30분 전 본 바다와 모래밭이 최고로 아름답겠거니 하면, 10분 후 더 근사한 해변이 뽐내듯 그 모습을 드러내고, 5분 후엔 신이 모든 정성을 다해 깎았다고 느낄만큼 매혹적인 절벽 아래서 푸른색 물보라가 영화 속 한 장면인양 튀어올랐다. 그야말로 절경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인간의 감정에 의해 빠르게 느껴질 수도,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알게 됐다. 그리고, 버스는 예정된 시간에 `아드리아해에 접한 동유럽 도시 중 가장 아름답다`는 두브로브니크에 기자를 내려놓았다. 여행 성수기땐 빈방을 싸게 민박 형태로 빌려주는 현지인 많아시내 외곽의 국제버스터미널 대합실. 각국에서 몰려든 여행객으로 안팎이 시끌벅적했다. 배낭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럴 때는 그냥 `이 도시에 관해 아무 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으면 자연스레 숙소가 해결된다. 어느 도시건 역이나 버스터미널에는 인근 숙소의 호객꾼들이 몰려있기 마련이다. 기자가 두브로브니크를 여행한 시기는 서유럽 사람들의 여름휴가가 절정을 이루던 7월. 유럽 전역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여행 성수기를 맞고 있었다. 여기서도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자본의 논리가 현실화된다. 해마다 그 시기가 되면 자기 집 빈방을 민박 형태로 빌려주는 현지인들이 많아지는 것. 두브로브니크 역시 빈 방 사진을 여행자에게 보여주며 숙박료를 흥정하는 호객꾼들이 적지 않았다.그들 중 여성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다른 호객꾼들처럼 야단스럽게 자기 숙소를 홍보하거나, 대폭 할인된 가격에 머물게 해주겠다고 큰소리 치지 않는 조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먼저 다가가 그녀에게 물었다. “숙소는 어디쯤이죠? 얼마를 주면 사흘쯤 머물 수 있나요?” 예상했던 가격과 거의 일치하는 숙박료가 답으로 돌아왔다. 긴 흥정은 여행자를 지치게 하는 법이다. 게다가 성수기엔 큰 폭의 할인을 받는 게 어려운 일. 웃음으로 동의의 뜻을 전하고 뒤를 따라나섰다. 대우에서 생산된 소형차가 버스터미널 인근에 주차돼 있다. 그녀의 것이었다. “이게 당신 나라에서 만든 차일 거예요. 타세요.” 가는 길에 그녀의 단골집이라는 빵가게에 들렀다.기자에게 따끈한 베이글 한 개를 건네며 여자가 웃었다. 눈동자가 아드리아해처럼 맑고 푸르렀다. 크로아티아는…전유럽 연결하는 국제버스 이용인접국 국경도 넘나들수 있어한국인 무비자 90일간 여행가능유럽 아드리아해 동부에 위치한 나라다.지역에 따라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며, 면적은 5만6천594㎢. 인구는 약 450만 명으로 수도인 자그레브에 110만 명 이상이 거주한다.크로아티아인(90%)과 세르비아인(5%)이 다수를 이루며, 소수의 슬라브계 회교도, 헝가리인, 슬로베니아인, 이탈리아인도 살고 있다. 공식 언어는 크로아티아어. 가톨릭 신자가 전체인구의 88%에 이르며, 적은 수의 세르비아정교(4%) 신자가 있다. 화폐 단위는 쿠나(kn)로 1쿠나는 현재 한화로 약 171원. 매혹적인 꽃 아이리스가 국화다. 북서쪽으로는 슬로베니아, 북쪽으로는 헝가리, 동쪽으로는 세르비아, 남쪽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서쪽엔 `동유럽의 보석`으로 불리는 아드리아해가 빛난다. 자그레브를 가로질러 흐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경계를 이루는 사바 강과 헝가리 국경으로 흐르는 드라바 강, 세르비아와의 경계가 되는 도나우 강의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한국의 한 케이블TV 인기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리트 등의 휴양지는 사파이어빛 바다와 고대 건축물이 조화를 이뤄 동양인은 물론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아름다운 폭포와 울창한 산림이 동화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역시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동유럽과 서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항공편을 이용해 수도인 자그레브와 주요 관광지로 갈 수 있고, 유럽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국제버스를 통해서도 인접국의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 한국인은 여행이 목적이라면 비자 없이 90일간 머물 수 있다. 현지인들은 오징어에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리그네`, 생선을 토마토와 함께 끓여낸 `브로데트`, 쇠고기 또는 돼지고기를 갈아 만든 크로아티아식 떡갈비 `체밥치치` 등을 즐겨 먹는다. 바다와 인접한 국가라 싱싱한 해산물 요리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된다. 해변 야외레스토랑에선 큼직한 생선 바비큐와 풍미 좋은 유럽 맥주를 즐기는 여행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기자/hss@kbmaeil.com

2016-01-29

그리운 써니레이크 호스텔 친구들

인간이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뭘까? 무언가를 모르면 그것에 관해 배우면 된다. 그래서 학교와 교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며 세상 속에 섞여 살다보니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게 편견과 선입견이란 걸 알게 됐다.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불화의 대부분은 바로 이 편견과 선입견에서 시작된다.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무슬림들은 모두가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폭탄을 든 테러리스트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동남아의 밤길은 위험하다” “처음 보는 여행자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등등. 여행은 바로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자신의 마음 안에서 허무는 과정이 아닐까. 나 역시 배낭을 메고 세상 곳곳을 홀로 떠돌기 전엔 가슴 속에 작지 않은 편견과 선입견의 덩어리를 지니고 살았다.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는 바로 그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려준 도시다. 10대 때부터 록음악을 좋아했다. 마케도니아를 여행지로 선택해 그곳에 가보기 전엔 그 나라의 예술적 환경과 문화적 토양에 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조그맣고 가난한 나라에 무슨 록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어`란 선입견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마케도니아에 록밴드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선입견은 선입견에 불과했다. 오흐리드의 써니레이크 호스텔에서 만나 단 며칠 만에 죽마고우처럼 속마음까지 터놓게 된 라제 파마코스키는 프로 뮤지션이었다. 오흐리드에서 결성된 록그룹 `백도어 밴드(Backdoor Band)`의 기타리스트고, 인근 불가리아 TV에도 소개된 나름의 유명인이었던 것. 유튜브를 통해 그의 연주와 인터뷰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내 안에 존재하던 편견과 선입견의 한 조각이 깨졌다.사실 유럽을 여행하며 적지 않은 외국인 청년들에게 “한국은 중국어를 사용하느냐 아니면, 일본어를 사용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들은 한국이 인접한 강대국의 언어를 사용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다. 한국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유럽인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들에게 세종대왕에 관해 이야기해주며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선입견은 존재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다시 이야기를 오흐리드의 써니레이크 호스텔로 돌리자. 같은 장르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친해진 라제와는 거기 머물던 내내 어울려 다녔다. 때로는 벨기에에서 캠핑을 온 여대생들과 포도주를 함께 마셨고, 어떤 날은 아일랜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다는 스물여섯 아가씨 앞에서 마케도니아와 한국 노래를 번갈아 불러주기도 했다.라제에게 빌린 기타를 멋들어지게 연주한 터키의 청년들과는 오흐리드의 재즈바로 우르르 몰려가, 19세기 프랑스의 표상주의 시인 랭보와 베를렌이 즐겨 마셨다던 초록빛이 아름다운 술 `압생트`를 거푸 몇 잔씩 들이켜는 호기를 부리기까지 했다. 필자처럼 오흐리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열흘 이상을 써니레이크 호스텔에 머물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소녀 미리엄, 알리나와는 뱃놀이도 다녀왔다. 둘은 투명한 오흐리드 호수 위에 뜬 조그만 배 위에서 황금빛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로렐라이처럼 노래를 불러 일행을 행복감에 젖게 해줬다.사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아주 가끔 자신의 인종과 나이를 잊는다. 어울리는 이들이 40대이건 10대이건 그건 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종과 나이를 뛰어넘어 우정을 나누는 시간이 바로 여행이기 때문이 아닐까. 마케도니아를 다녀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우리는 잊을만하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어이, 언제 다시 한 번 봐야지. 올 여름 오흐리드 써니레이크 호스텔 정원에서 다시 만나는 건 어때?”써니레이크 호스텔 정원에선 밤마다 인종과 나이를 뛰어넘은 다국적 친구들의 우정이 빛을 발했다. 사용하는 언어가 각기 달랐던 터라 자기 나라의 간단한 인사말 등을 서로에게 가르쳐주던 것도 기억난다. 너나들이로 친해진 라제는 한국어에 깊은 관심을 표했고, “악센트가 강해서 멋지다”는 평가까지 내놓았다. 고양이와 호랑이를 마케도니아어로 말하며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진다.라제에게 배웠던 마케도니아어 중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건 “라 스트라비아”와 “팔라”다. 앞에 건 “건배” 뒤에 건 “고맙다”란 뜻. 라제 역시 술을 좋아하는 친구라, 우리가 머물던 호스텔 정원 야외탁자에선 “마시자”라는 한국식 건배사와 “라 스트라비아”가 끊임없이 외쳐졌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친구들이 합석을 하는 날은 여기에 독일식 건배사인 “프로스트”가 추가되기도 했다. 라제의 약혼녀 일레나와 함께 했던 저녁식사도 즐거웠다. “요새 라제는 하루 종일 당신 이야기만 해요”라며 소리 내 웃던 그녀는 화이트와인과 탄산수를 섞어 마시는 생소한 주법도 가르쳐줬다. 일레나의 빛나던 금발과 라제의 근사한 턱수염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멋진 커플이었다. 만약 다시 마케도니아로의 여행을 결심하게 된다면 그 이유의 절반 이상은 라제와 일레나를 포함한 오흐리드의 친구들 때문일 것이다. 라제와 일레나 외에도 오흐리드가 선물해준 친구는 또 있다. 필자가 여름 한철 내내 머문 숙소 써니레이크 호스텔의 주인 지코 스파세스키. 민머리에 굵직한 음성만으로 봐서는 성격도 거칠 것 같지만, 사실은 보기 드문 휴머니스트가 지코였다. 임대한 건물에서 어렵게 소규모 호스텔을 운영하면서도 마음 씀씀이가 따뜻하고 컸다. 가난한 여행자들에겐 별다른 조건 없이 숙박료를 파격적으로 할인해주는 게 그의 특기(?)다. 여기에 커피와 빵, 소시지 바비큐와 삶은 달걀 등을 장만해 이웃 노인들에게 대접하는 `한국형 경로사상`까지 보여준 친구.마케도니아 여행에서 만난 그들은 편견과 선입견에 관해 되돌아볼 시간을 가지게 해줬다. 만약 인간이 친구에게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그 친구의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오흐리드에 머문 그해 여름, 써니레이크 호스텔에서 만난 모든 친구들은 필자의 인식을 한 뼘쯤 넓혀준 `어린 스승들`에 다름없다. 그들 중 라제에겐 이런 편지라도 한 통 보내야 할 것 같다.“잘 지내고 있지, 라제. 요즘도 써니레이크 호스텔 정원에 밤이 내리면 국적 다양한 친구들과 흥겨운 취기를 에너지 삼아 노래 부르며 살고 있겠지. 화내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늘 미소 띤 네 얼굴이 가끔은 그립다. 네가 따라주던 마케도니아의 자랑이라는 술 라키아. 한국에도 그것만큼 멋진 소주라는 술이 있어. 그것 몇 병 배낭에 챙겨 넣고 다시 오흐리드로 갈 날을 꿈꾸며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단다. 너 또한 일레나와 함께 생을 견디게 해줄 어떤 의미를 찾아내기를.”▲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매력적인 숙소 `써니레이크 호스텔`의 주인 지코.낯선 여행지에서 외국인 친구 만들고 싶다면마케도니아 오흐리드에 머물며 20대 초반 벨기에 여대생부터 30대 중반 아르헨티나 전직 축구선수, 40대 호주 전기기술자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가졌다. 자신의 나라와 멀리 떨어진 낯선 공간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건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특권이다. 비단 마케도니아만은 아니다. 세계 어느 곳이라도 아래와 같은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진다면 국적과 인종, 언어를 뛰어넘어 각국의 여행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1. 먼저 마음 문을 열어야 한다.낯선 사람에게 선뜻 말을 건네거나 “하이”라고 인사하는 게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을 먼저 드러내고 다가가는 이들에게 마음을 닫아거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숙소의 복도에서, 머무는 곳 인근 식당에서, 혹은 거리에서라도 먼저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보자.이후부터는 여행이 좀 더 편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마케도니아에서 적지 않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식 예의범절, 즉 먼저 마음을 열어 반가운 인사를 전하는 태도가 있었다. 2. 굳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같은 국적의 친구라면 굳이 해외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동일한 피부색을 가지고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은 지금도 충분히 많지 않은가. 동유럽은 그 숫자가 적지만 프랑스, 독일 등의 서유럽엔 한국인 또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넘쳐난다.적지 않은 여행자들이 의사소통이 용이하고,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이유로 이런 숙소를 이용한다.하지만, 여행은 낯선 문화를 체험하고 낯선 사람과의 교류를 기대하며 떠나는 것이 아닐까.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선 한국인 이외의 친구를 만들기 어렵다.이 말에 동의한다면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여행자들이 머무는 숙소를 이용하길 권한다. 그게 미국인이건, 그리스인이건 만나고 인사부터 해야 친구가 될 것 아닌가. 3. 영어를 못한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물론, 영어는 `여행자들의 공용어`처럼 사용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전문적인 단어를 써가며 정치나 종교문제를 토론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그저 반갑게 인사를 전하고, 상대방의 말에 가볍게 대꾸해줄 정도만 된다면 영어 사용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영어가 서툰 걸 미안해 할 필요도 없다.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여행 중에 내가 만난 영국인, 프랑스인, 브라질인, 독일인은 단 한 명도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그렇다고, 그게 두렵거나 미안해야 할 일인가?어떤 외국인도 당신만큼 유창하게 한국어를 할 수 없다는 자긍심을 가져라. 그러면 동시에 배짱도 생긴다.또한, 상황에 따라선 몸짓과 눈빛만으로도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기자/hss@kbmaeil.com

2016-01-22

어떻게 잊을수가 있을까, 오흐리드의 석양을

마케도니아의 조용한 시골마을 오흐리드를 떠올릴 때면 해질 무렵의 빛깔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배경으로 서서히 붉게 떨어지는 태양. 물론, 석양이 아름다운 곳은 세상에 많다.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과 앙코르와트가 있는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만난 저녁 풍경도 일품이었고, 사막을 여행하며 본 이란 야즈드의 석양 역시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흐리드의 일몰은 여기에 매력 하나가 더 추가된다. 여행자의 마음을 한없이 평화롭게 가라앉히는 순정함이 바로 그것. 편안함과 나른함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호수와 진홍빛 석양. 오흐리드는 석양으로 기억되는 도시다.낮 동안 빛과 열기를 토해내며 동네와 숲을 달구던 태양이 호수 저편 수평선 뒤로 사라지는 시간. 하늘과 그에 맞닿은 호수는 물론,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까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풍광. 그림 같은 고적함 속에서 백조가 우아하게 헤엄치고 있었다.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대부분이 걷는 `평범한 길`이 아닌 스스로 만든 `자신만의 길`을 걷고 싶어 한다.아침이면 졸린 눈을 부비며 출근해 점심으로 칼국수나 갈비탕을 먹고, 저녁이면 피곤에 찌든 채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누군들 벗어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거길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이 주는 안정감과 세상에 자신의 고정된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는 자족감을 떨치기가 힘든 까닭이다. 마음속에선 방랑의 유전자가 요동치지만,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선 현재 하고 있는 일과 낯익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한다. 그 공백이 주는 두려움 앞에 누구나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를 포기해야 다른 하나를 얻는 법.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지만 여행 또한 삶의 통과의례라 할 선택의 과정 중 하나고, 그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로 그 용기를 발휘해 `정주의 삶`에서 잠시잠깐 떠나 `유랑의 길`에서 만난 마케도니아의 소도시.`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부끄러워했던 경상도 사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게 만든 호숫가마을. 거기가 바로 오흐리드다. 잠시잠깐 머물렀던 그곳의 매력에 빠져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슬로베니아까지 올라갔다가 이탈리아 베니스행 열차 티켓을 환불하고는 하룻밤 사이 세 나라의 국경을 숨 가쁘게 넘어 돌아왔던 오흐리드.그 마을로 돌아갔던 이유는 앞서 말한 저물녘 풍경이 그리워서였을까?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오흐리드의 어떤 부분에 매료됐고, 거기 무엇이 있기에 대책 없는 사랑에 빠진 것일까.오흐리드는 인구 4만 명의 작은 소읍이다.관광객들에게 기념품과 호수 풍경이 프린팅 된 셔츠 등을 파는 시내 중심가는 걸어서 10분이면 모두 돌아볼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올드타운`도 크기가 겨우 손바닥만 하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 안에 들어찬 아름다움으로 인해 휴가철이면 거리와 숙소마다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온 여행자들이 흘러넘친다. 붉은 지붕이 햇살 아래 빛나는 정교회 교당과 무슬림을 위한 모스크, 지어질 당시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고대 원형극장 등은 오흐리드의 자랑거리다. 여기에 1천 년 전 축조된 요새가 마을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잡아챈다.무엇보다 매력적인 오흐리드의 보물은 드넓은 호수. 이미 수백만 전부터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흥망성쇠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호수는 인접국 알바니아까지 뻗어있어 그 크기부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게다가 수심 수십m 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깨끗함까지 갖췄다.호숫가 전망이 좋은 지대엔 유럽풍과 오스만투르크 건축양식이 조화롭게 버무려진 근사한 레스토랑과 예쁜 카페가 지천이다. 가격 역시 서유럽 관광지에 비하면 저렴하다.스프와 샐러드, 생선 바비큐에 아이스크림까지 제대로 갖춰 저녁식사를 한다고 해도 1000데나르(한화 약 2만1천원)면 충분하다.카페 테라스에서의 커피 한 잔도 2000원 내외. 거기서 보낸 40여 일은 소박한 호사를 마음껏 누린 잊을 수 없는 한시절이다고대 극장과 카페에서 보내는 낮 시간이 지나면 곧 저물 무렵. 태양이 제 집으로 돌아가는 때가 되면 편안한 슬리퍼 차림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동네를 산책하듯 석양과 만나기 좋은 곳을 향했다. 빨간색 물감 수만 통을 한꺼번에 뿌려놓은 듯 명징하게 붉은 오흐리드의 석양은 볼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현실의 풍경이라 믿기지 않는 저물 무렵의 태양 아래로 산책 나온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아주 느리게.그럴 때면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기들은 물론, 세파에 찌든 노인들의 얼굴까지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들이 오래 헤어져 살아온 식구 같았다. “헬로우”라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먼저 인사를 하면, 너나없이 반가운 몸짓과 환한 미소로 이방인을 반기던 오흐리드 사람들. 그곳에서 머문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과의 친밀도는 더 높아졌다. 한 달쯤이 지났을 땐 허술한 낚싯대로 손가락보다 조그만 물고기를 잡던 동네 소년들과도 친해졌다.말이 통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맑고 투명한 호수와 아이들이 그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만을 앞에 놓고도 한참을 숨넘어가듯 함께 깔깔거리곤 했으니까.그랬다.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낮은 평화롭고 고요했으며, 붉은 태양을 선물하는 저녁은 어떠한 빼어난 은유법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낭만 그 자체였다. 그런 낭만적 풍경 속에 잠겨있을라치면 당연지사 술 한 잔이 절실해진다.유럽의 맥주는 풍미가 좋기로 유명하다. 마케도니아 맥주 `스콥스코` 역시 시원스럽게 넘어갔고 거품이 풍부했으며 향도 달콤했다. 여행객들이 스콥스코를 선호한다면, 현지인들은 `킹 마르코`란 이름의 맥주를 즐겼다.자두나 청포도를 원료로 만든 증류주 `라키아`도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발칸반도를 대표하는 술이라 할 수 있다.알코올 도수가 50~60도를 넘나드는 독주지만, 탄산수나 소다수로 희석해 마시면 깔끔한 맛을 내고, 다음날 숙취도 거의 없는 게 특징. 여기에다 동네 슈퍼에서 판매하는 수십 종의 포도주도 빼놓을 수 없다. 오흐리드엔 가격은 싸고 품질은 좋은 포도주가 지천이니 그걸 거부할 이유가 없다.오흐리드의 석양과 마주하고 마시던 스콥스코는 까맣게 잊고 있던 생에 대한 열정을 새삼 떠오르게 했고, 잘 꾸며진 숙소 정원 나무의자에 앉아 20대 대학생들과 함께 마셨던 마케도니아 와인 `멧돼지의 피`는 사라지고 있던 문학소년의 심정을 되찾아줬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아닌 것 같다. 마케도니아,제대로 즐기는 3가지 방법유럽 문화와 오스만투르크의 문화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마케도니아.여기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자연환경까지 더해져 스코페, 오흐리드, 스트루가 등 마케도니아의 도시는 저마다의 매력을 뿜어낸다. 아래 마케도니아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 3가지를 추천한다.1. 스코페의 올드타운 천천히 걸어보기정교회 교당과 가톨릭 성당, 거기에 이슬람 모스크까지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 특히 올드타운엔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조그만 교량을 경계로 신도심과 구도심이 나눠져 있는데, 현대적 감각의 레스토랑과 카페가 즐비한 신도심도 좋지만, 수백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구도심이 보다 매혹적이다. 울퉁불퉁한 돌이 깔린 거리를 천천히 걷다보면 터키식 커피 향기와 풍겨오는 케밥 냄새가 관광객을 유혹한다.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기념품 가게를 돌아다니다보면 예쁘장한 도자기나 그릇을 싼값에 구매하는 행운도 누릴 수도 있다.2. 도시 외곽의 와이너리(Winery·포도주 양조장) 방문하기프랑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동유럽의 포도주도 독특한 향과 맛으로 지구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마케도니아 역시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흔하다. 스코페와 오흐리드의 호텔이나 여행사에서 팀을 구성해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1박2일 단기 여행상품`을 소개받을 수 있다. 햇살 눈부신 한적한 시골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마케도니아 포도주를 마셔보는 것도 여행의 낭만을 더하는 한 방법이다. 가격도 저렴해서 2유로(한화 약 2천600원)면 포도주 1L를 살 수 있다.3. 호숫가 안락의자에서 하루종일 뒹굴기유명 건축물 앞에서 여러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교과서에서 보던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며 바쁘게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것은 한국인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는 여행법이다.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여행이란 단어 안에는 `일상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편히 쉬는 시간`이란 의미도 분명 포함돼 있을 터.수백만 년 전 생성된 투명한 물빛의 호수가 자리한 오흐리드나 스트루가에 간다면 하루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호숫가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누워 책을 읽거나, 남부 유럽의 따스한 바람이 달콤하게 익힌 새빨간 체리를 먹으며 유유자적 해보기를 권한다.그렇게 즐기는 한가로운 시간은 바쁘게 달려온 현대인들을 위한 작지만 의미 있는 선물이지 않을까.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2016-01-15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빠질 줄, 그땐 몰랐다

인간은 누구나 정주(定住)와 유랑(流浪)의 가운데서 삶을 이어간다. 머물러 있는 자는 떠남을 꿈꾸고, 자신이 살던 삶의 터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은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게 세상사 이치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가 말한 바 `가장 아름다운 행복`이 정주하는 일상이라면, 여행은 낯선 유랑의 공간과 만나는 시간이다. 여러 여건 탓에 쉽사리 정주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유랑은 꿈이다. 잠시 기자의 길을 접고, 유랑의 다른 이름인 여행을 통해 집이 아닌 길 위에서 꿈을 찾으려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기록과 단상을 통해 익숙한 곳이 아닌 낯선 곳에서의 경험, 반복되는 일상이 아닌 생경한 체험이 주는 즐거움을 새해부터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여행기는 발칸반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나라 터키, 이슬람국가 이란, 인도차이나반도 등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수도 스코페엔 정교회성당·가톨릭교회·이슬람사원이 옹기종기노벨평화상 수상 테레사 수녀 고향다운 화합의 도시 이미지 물씬그리스와 출생지 다툼 벌이는 `알렉산더 대왕` 조형물도 눈길몇 해 전. 신곡 발표를 앞두고 있던 가수 전인권(61)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날의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누군가에게 기다림을 줄 수 있는 사람, 자신을 설레게 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행복하다”.비단 사람만일까. 자신이 태어나 줄곧 삶을 이어온 공간이 아닌, 또 다시 찾고 싶은 `낯선 공간`을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 역시 행복하다.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마음 속 이상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연재기사를 기획하며 그 첫 시작을 어느 나라로 해야 할 것인지 여러 날 고민했다. 그 고민의 끝에서 내린 결론은 “마케도니아 이야기부터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여행을 하기 전에는 그 이름조차 낯설었던 국가가 어째서 필자의 가슴 안에 언젠가는 다시 찾아가고 싶은 `이상향`이 되었는지를 먼저 설명하려 한다.독특한 석회암 지형과 노천온천으로 유명한 터키의 관광지 파묵칼레를 여행할 때였다. 한국의 육개장과 유사한 굴라시를 잘 끓여내는 한 식당에서 중년의 한 부부를 만났다. 미국 플로리다에 산다는 한국인 여성과 미국인 남성 커플이었다. 여성은 도서관 사서, 남성은 교수라고 했다. 터키 이후의 여행지를 고민하던 필자에게 그 부부는 입을 모아 한 나라를 권유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케도니아가 있어요. 오래 전 거기서 1년쯤 살았는데, 풍광이 아름답고 사람들도 친절하더군요. 수도인 스코페에서 2시간 남짓 달리면 오흐리드라는 마을이 나와요. 크고 깨끗한 호수가 인상적인 시골마을이죠. 우리 둘 다 여행을 꽤 많이 한 편에 속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워지는 마을이에요.”지구의 반대편에서 만난 한국인. 숱한 사연을 간직한 듯한 그 여성의 말투와 표정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마케도니아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나라의 조그만 호숫가 촌락 오흐리드와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빠질 줄은. 두 번에 걸쳐 2개월 가까운 시간을 그곳에 머물며 적지 않은 현지인 친구들까지 사귀게 될 줄은.마케도니아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터키 이스탄불을 출발한 야간열차가 그 이름도 예쁜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향해 달렸다. 자정을 넘겨 터키-불가리아 국경에 도착한 기차. 여행객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하차해 졸린 눈을 부비며 출국심사를 받아야 했다. 거기에 더해 새벽녘 기차 안에서 이어진 불가리아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의 여권검사가 몇차례. 예정된 도착시간을 훌쩍 넘겨 다음날 정오쯤에야 도착한 소피아. 거기서 다시 마케도니아 국경을 넘는 국제버스를 갈아탔다. 삼면이 바다인데다 북쪽은 동일민족이지만 이념이 다른 국가 북한이 가로막고 있는 탓에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으면 넘을 수 없는 한국의 국경. 그러나, 유럽은 달랐다. 육로로 이어진 동유럽의 국경은 간단한 입국심사만 거치면 걸어서도 통과가 가능했다. 이런 체험조차 생경하고 신기했으며 또한 즐거웠다. 그렇게 꼬박 1박2일만에 도착한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 거리마다 생소한 키릴문자가 넘쳐났다. 한 나라의 수도라기엔 너무나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스코페의 중심가. 규모로 보자면 포항의 구도심인 중앙로 일대의 크기에도 못 미쳐보였다. 가장 먼저 여행자의 눈길을 끌어당긴 것은 도시의 규모와 불협화음을 이룰 만치 거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청동조형물. 높이가 족히 수십 미터는 될 듯했다. 사실 알렉산더의 출생지를 놓고 마케도니아는 오랫동안 그리스와 다퉈왔다.서로가 “알렉산더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지구 위 대부분의 인접국들이 그렇듯,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도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지금은 유럽 경제불황의 여파를 톡톡히 겪고 있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그러니, 그 반대급부로 한때 유럽은 물론 서남아시아로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알렉산더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서로가 뺏기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다툼은 이방인의 눈엔 과장스럽게 보이는 동시에 쓸쓸하게 느껴졌다.그리스, 세르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과 국경을 맞댄 마케도니아는 1991년 9월 요시프 티토(1892~1980)가 주도했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분리, 독립했다. 한 때 같은 연방국에 속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 등이 인종과 종교간 갈등으로 비극적인 유혈사태를 겪은 것에 비해 비교적 평화적인 독립이었다. 그런 이유에선지 스코페 올드타운엔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그리스인과 불가리아인, 터키인은 물론, 유럽 전역을 떠돌며 괄시받는 집시들까지 큰 불화 없이 섞여 살고 있다.조그만 도심에 마케도니아 정교회성당과 가톨릭교회, 이슬람사원까지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도 종교간 갈등이 이제는 물밑으로 가라앉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종교적 화해와 화합의 배경엔 아마도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1910~1997)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먼 인도 콜카타의 빈민촌에서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로 살았기에 `성녀(聖女)`로까지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는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태어났다. 인종과 종교로 경계 지어진 벽을 평화적으로 허문 화합의 도시와 그녀의 이미지는 썩 잘 어울렸다. 그래서일까. 스코페에서의 사흘은 필자에게도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마침내 400만 전에 생성된 거대한 호수가 있는 시골마을 오흐리드로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마케도니아는…유럽 발칸반도 내륙 위치한반도 8분의 1 면적4개 국가와 국경 맞닿아유럽의 동남부 발칸반도 내륙 북부 중앙에 위치한 나라다. 바다와는 접하지 않은 국가. 북쪽으로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동쪽으로는 불가리아, 남쪽으로는 그리스, 서쪽으론 알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면적은 2만5천713㎢. 한반도의 8분의1 크기다. 계곡과 분지가 이어지는 산악지형이고 가장 높은 지대는 코라브산(山) 일대로 해발 약 2천753m. 백두산과 비슷한 높이다. 인구는 210만 명 내외로 대부분이 수도인 스코페를 비롯한 도시에 거주한다.인구의 67%는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23%)도 다수 거주하며, 터키인(4%)도 일부 생활하고 있다. 화폐 단위는 데나르(MKD)인데, 사용되는 지폐의 디자인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데나르는 현재 한화로 약 21원. 종교는 마케도니아정교(67%)와 이슬람교(30%)를 믿는 이들이 대다수다. 소수의 가톨릭교도도 존재하는데, 인도에서의 봉사활동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테레사 수녀가 알바니아계 마케도니아인이다.국민의 70% 이상이 마케도니아어를 사용한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는 불가리아어에 가깝다. 표기는 통상 키릴문자로 한다. 최소 4백만 전에 형성된 것으로 조사된 투명한 물빛의 `오흐리드 호수`와 마케도니아 전통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자연스레 어우러진 스코페의 `올드 타운(구도심· Old Town)`이 대표적 관광지로 꼽힌다.마케도니아로 가는 방법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로 입국해 거기서 마케도니아 국경을 넘는 국제버스를 타는 게 배낭여행자들에겐 보편적이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금전적 여유가 있는 관광객이라면 이스탄불과 유럽 주요도시에서 스코페나 오흐리드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할 수도 있다.사진제공/류태규국장席 홍성식 기자 /hss@kbmaeil.com

2016-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