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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눈동자마저 물 들듯… 사파이어 빛깔 반짝이는 바다

세상엔 `아름다운 해변`이 적지 않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이탈리아의 아말피, 태국의 피피 섬…. 하지만, 청아한 물 빛깔과 새하얗고 고운 모래만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구 위 어떤 해변도 필리핀 중부 비사야제도에 미치지 못할 듯하다. 개인적 취향을 이야기하자면 기자는 산보다는 강을, 강보다는 바다를 더 좋아한다. 해서 `만약에 전생(前生)이란 게 있다면 아마도 나는 커다란 농어 또는, 나붓거리는 해초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하곤 했다. 어려서부터 사파이어 색채로 반짝이는 바다를 보면 사족을 쓰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적지 않은 나라의 해변을 여행했다. 바다를 편애하는 사람의 필리핀 중부지역 여행은 당연지사 즐거웠다. 비사야제도의 여러 해변을 기쁘게 만났다. 속절없고 바람 같은 인간의 생을 위로해주는 새파란 물결과 일시에 들끓다 허망하게 하얀 포말로 사라지는 파도. 그것들 속에서 울고 웃었다. 원시의 풍광을 지닌 발리카삭 섬, 석양이 기가 막히게 근사했던 팡라오 섬 알로나 비치, 물빛 고운 보홀 항구, 짙푸른 바다와 새파란 하늘이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지는 보라카이의 화이트비치, 관광객들이 만들어내는 북적임과 번잡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세부….그랬다. 위에 열거한 바다를 떠돌던 때 기자의 손에는 600원짜리 맥주 `산 미구엘`과 소다수와 라임즙을 섞은 필리핀 전통주 `탄두아이`(Tanduay)가 늘 들려있었다.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필리핀 비사야제도의 해변들. ▲ 한국 호텔에서 일하는 게 `꿈`이라던 필리핀 청년2번째로 필리핀을 여행했을 때는 수도인 마닐라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걱정과 우려 섞인 이메일을 보내왔고, 엄마는 여러 차례 국제전화까지 걸어와 “여행을 그만두고 어서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기자는 그때 마닐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일로일로), 다시 쾌속정을 타고 1시간 30분(바콜로드), 거기서 또 네그로스 섬을 횡단하는 로컬버스를 타고 7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도시인 두마게테에 있었다. 폭탄이 터진 지역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테러의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인터넷 속도가 한국의 10분1에도 미치지 못하는 두마게테의 PC방 컴퓨터를 이용해 지인들과 엄마를 안심시킨 후에야 비사야제도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제가 있는 지역은 폭탄테러가 일어난 곳에서 수백 km 떨어져있으니, 아무 염려 마세요. 저는 남태평양의 환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매우 즐겁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이메일 답신을 보내고는 갑자기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스콜(squall·강풍과 천둥을 동반하는 열대성 소나기)에 젖어가는 거리를 바라보며 향기 좋은 커피를 마셨다.그날 밤엔 두마게테의 한 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한다는 스물한 살 청년과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포켓볼을 쳤다. 기자보다 영어를 훨씬 잘하는 그가 “내 꿈은 한국의 호텔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호텔을 `경영`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호텔에서 일하는 게 꿈이라니. 그 말이 이상스레 쓸쓸하게 들렸다.지난 시절. 체 게바라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꿈`에 관해 말했고, 가수 조안 바에즈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꿈`을 노래했다.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하고, 차별받는 이들에게 평등을 선물하는 것이 청년에게 어울리는 꿈일 것인데, 너무나 현실적인 `꿈`밖에는 말할 수 없는 스물한 살 젊은이가 어쩐지 슬퍼 보였다. ▲ 팡라오 섬과 발리카삭 푸른 바다와 만나다여행을 하다보면 슬픔과 쓸쓸함도 경험하게 되는 법. 필리핀 청년의 맑아서 서러워 보이던 눈빛을 뒤로 하고 다음 날 오후엔 쾌속정을 타고 조용한 섬 보홀로 갔다.산호 가루로 형성됐기에 물빛이 사파이어 색채로 반짝이는 알로나 비치와 거기서 조그만 목선을 타고 들어간 발리카삭 섬의 원시적 풍광이 더없이 아름다웠다.발리카삭 섬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전기가 끊기는 곳이다. 국가가 운영하는 여행자 숙소가 하나, 구멍가게가 한둘, 식당이 두어 곳밖에 없는 조그맣고 소박한 섬. 주민이라곤 닭과 돼지를 키우며 관광객들에게 조개껍데기로 만든 기념품을 파는 원주민 수십 명이 전부였다.거기서 하루를 묵었다. 복잡하고 바쁜 한국 도시에서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불편을 감수할 만큼 즐거웠다. 잠시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낯설고 새롭게 다가오는 풍광과 순박한 섬 주민들 속에 섞여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먹음직해 보이는 참치구이와 신선한 망고주스로 저녁을 먹고는 동네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조그만 구멍가게에 설치된 노래방 기계를 이용해 팝송도 한 곡 불렀다. 노래 실력에 관계없이 박수를 아끼지 않았던 발리카삭 섬 사람들. 사파이어 색채를 닮아 짙푸르고 투명한 바다, 웃음의 힘으로 가난을 이기며 살아가는 필리핀 시골마을 사람들. 그들과 더불어 미소와 빵을 나눌 수 있었던 `특별하고도 의미 있는 하루`였다. 고등학교 시절 읽은 소설 중에 `팔색조`라는 게 있다. 거기에 이런 말이 등장한다. “이렇게 한 번씩 사로잡히고 나면 한참은 괜찮아져요.” 그 문장은 여행의 매혹이 없었다면, 다장조의 동요 같은 지루한 일상을 견디기 힘들었을 기자의 삶을 위로해왔다.여행은 그랬다. 언제나 그랬다. 크고 작은 비행기와 고속 페리, 창문이 없어 바람 속을 달리는 듯한 로컬버스와 매연을 뿜어대는 트라이시클(tricycle·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 인정 많은 기사가 운전하던 지프니(jeepny·지프를 개조한 필리핀 버스)와 에어컨이 고장 난 택시를 타고 떠돈 필리핀 중부 비사야제도에서의 2주일은 행복했다.그 시간이 앞으로도 한참 동안 기자의 단조로운 삶을 견디게 해줄 것임을 믿는다. 돈? 중요하다. 일?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것들이 전생에 와본 듯한 기시감(旣視感)을 주는 여행지에서의 한 조각 웃음보다 소중할 수 있을까? 필리핀은…7천여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라전통문화에 스페인·미국문화 혼합아시아 대륙 남동쪽 태평양에 흩어져있는 7천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라다.공식 명칭은 필리핀공화국(Republic of the Philippines). 적도 부근이라 대부분 지역이 1년 내내 열대기후다. 1565년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898년 독립을 선언했으나, 이후에도 오랜 기간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다. 온전히 독립을 쟁취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필리핀해(海), 남중국해, 셀레베스해가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위치해있다. 면적은 약 30만400㎢. 국토는 북부의 루손과 수천 개의 조그만 섬으로 이뤄진 중부의 비사야제도, 남부의 민다나오로 크게 3등분 할 수 있다.바다로 둘러싸인 해양국이기에 태풍의 발생지이며, 환태평양조산대에 자리해 있어 지진과 화산으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았다.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타이완과 영토·영유권 분쟁을 겪었고, 이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해안선을 모두 합치면 자그마치 3만6천289km에 이른다. 수도는 마닐라(Manila)고, 국민의 절반 정도는 타갈로그인(29%)과 세부아노인(15%)이다. 지역에 따라선 일로카노족(9%)과 비사야족(7%)이 다수인 곳도 있다. 필리핀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85%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톨릭교도다. 무슬림국가인 말레이시아와 가까운 민다나오는 지리적 영향으로 이슬람교도가 많다. 이로 인해 남부지역에선 종교간 갈등으로 오랫동안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사용하는 화폐는 페소(Peso). 1페소는 한국 돈으로 약 23원. 물가가 비싼 관광지가 아니라면 50~100페소 정도에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인구는 1억 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7천 개의 섬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하는 어려움을 감안하면 정확한 데이터는 아닌 듯하다. 평균수명은 71세.다양한 종족이 만들어낸 전통문화에 스페인과 미국의 문화까지 합쳐진 필리핀의 용광로 같은 `복합성`은 국민의 특성을 몇 마디 짧은 설명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최근에는 한국인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몇몇 사건들이 발생했지만 필리핀은 여전히 동서양의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휴양지다. 깨끗한 바다와 원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밀림, 환한 얼굴로 웃는 낙천적인 사람들과 신선한 해산물 요리, 거기에 저렴한 물가까지 생각한다면 필리핀 여행이 주는 매혹을 떨치기 어렵다. 유명한 휴양지인 보라카이, 세부, 팔라완에는 사생활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고급 빌라와 호텔도 많다. 적지 않은 신혼부부들이 이곳에서 허니문을 만끽한다. 휘영청 떠오른 달 아래 조용한 해변에서 둘만의 저녁식사를 즐기며.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3-31

여행, 낯선 사람들과 만들어가는 즐거움

나이에 관계없이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격 탓이다. 그런 경우 여행자로서는 낙제점이다. 다행이랄까? 기자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어렵지 않게 어울리는 인간형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불가리아 소피아에서도 적지 않은 낯선 이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가격에 비해 시설이 나쁘지 않은 숙소 호스텔모스텔에서 아침과 저녁까지 제공받으며 비교적 잘 지냈다. 익숙하지 않은 치즈와 홍차, 빵과 소시지, 소금에 절인 올리브로 아침을 먹는 것도 곧 익숙해졌다.저녁으로 나오는 스파게티도 한국에선 즐기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뭐 어떤가.미국과 영국, 크로아티아와 폴란드에서 온 젊은 친구들이랑 잡담을 주고받으며 달게 먹었다. 일본 친구와 먹은 중국식당의 볶음밥과 양념 돼지고기 구이도 좋았다. ▲ 8개월째 여행 중이라는 한국인 여행자와의 만남 그 숙소에서 지낸 마지막 날. 한국을 떠나 중국과 중동을 거쳐 유럽까지 8개월째 여행 중이라는 20대 중반의 사내와 만났다.그때는 기자의 배낭여행도 6개월을 지나고 있었기에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오랜만에 만난 같은 나라 사람이 그리웠을 시기다.스물여덟이라고 했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에게 선배로서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었다.“세상엔 저 외에도 긴 여행을 하는 사람이 많군요. 아무래도 형편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내가 나을 테니 저녁을 살게요. 뭐 먹고 싶어요?”돌아온 대답이 재밌었다.“아… 네. 여기도 KFC가 있던데, 그걸 보니 학교 친구들과 먹던 닭튀김에 시원한 맥주가 먹고 싶었어요.”모처럼의 식사 제의에 겨우 통닭이라니…. 그의 소박함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의 수도 서울과 달리 시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도시 소피아. 우리 둘은 수령(樹齡)이 족히 수백 년은 넘어 보이는 가로수들을 뒤로 하고 불가리아 KFC를 찾아나섰다.한국어를 하며, 한국인과 걸어 다녔으니 그곳이 외국인지 내 나라인지 헷갈렸다.어제 내린 비 탓에 부쩍 떨어진 기온. 한국의 초봄 날씨를 보이는 거리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고 프라이드치킨과 콜라, 감자튀김 등을 잔뜩 주문했다.이제는 오래 알아온 동생 같아진 스물여덟 후배가 말했다.“여행은 고칠 수 없는 병(病)인 것 같아요. 저도 15년 후쯤엔 선배님처럼 또 다른 도시를 떠돌고 있겠지요?”마치 시인 같은 그의 어법에 기자의 답변도 장황해졌다.그날, 우리 둘은 자정까지 숙소인 호스텔모스텔로 돌아가지 않았다.왜냐고? 술은 그런 날 마시라고 있는 것 아닌가.▲ 벨기에 걸스카우트 6인방, 요즘 앤트워프는 어때요?“여행이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다름없다”는 말을 믿는다.이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믿음이다. 만약 기자가 다시 길고 먼 여행을 떠난다면 그건 새로운 땅과 새로운 바다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일 것이다.소피아에서 만난 `스물여덟 사내` 외에 떠오르는 이들이 또 있다.불가리아를 떠나 도착한 다음 여행지는 마케도니아. 거기엔 막 청소를 끝낸 유리창처럼 맑고 깨끗한 호수가 아름답게 펼쳐진 오흐리드라는 그림 같은 마을이 존재한다. 그곳에 머물 때다. 벨기에 앤트워프에 산다는 발랄한 여고 졸업반 소녀 여섯 명을 만났다. 한 달 후면 대학생이 될 열여덟 살 아이들.스카우트 대원인 그 애들은 대학에 다니는 선배 둘의 인솔 아래 이른바 `어드벤처 캠핑(모험여행)`을 왔고, 기자가 묵었던 숙소 근처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친절하고, 싹싹하며 나이답게 순수한 소녀들과의 더듬거리는 영어 대화가 더없이 즐거웠다. 벨기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쓰는 나라다.그럼에도 모두가 영어도 잘했다. 기자와 같은 숙소에 있던 열여덟 네덜란드 소년 루벤 역시 신이 난 눈치다.왜 안 그렇겠나? 열여덟 소녀를 싫어하는 열여덟 소년은 지구 위에 없다.형이 한국 유학생과 친한 탓에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를 봤다는 루벤에게 슬쩍 물었다.“걸스 제네레이션(소녀시대)과 쟤들 중에 누가 더 예뻐?”어색하게 웃으며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루벤. 맞다. 열여덟은 그런 나이다. 부끄러우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시간들…인상적이었던 건 그 벨기에 소녀들 중 매우 뚱뚱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전혀 기죽어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그 아이를 따돌리는 기색이 없다는 거였다.`왕따`라는 단어가 신문 사회면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의 상황이 동시에 떠올랐다. 너나들이로 어울리고, 평등하게 마음을 나누는 듯한 그 아이들을 보며 벨기에 교육의 어떤 면이 `왕따`를 막아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소녀들은 낮에는 산에 오르거나 배를 빌려 섬으로 소풍을 갔고, 해가 질 때면 돌아와 텐트촌에서 콜라나 우유를 마시며 서툰 솜씨로 요리를 했다. 누구랄 것도 없었다. 모두가 너무 귀여웠다.2유로(약 2천500원)짜리 선글라스를 호수에 빠뜨렸다고, 하루 종일 물가에서 놀았더니 피부가 햇볕에 타서 벗겨졌다고 칭얼대던 그 소녀들도 이젠 어엿한 대학생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금빛 머리칼이 곱던 벨기에 쌍둥이 자매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왕따`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고 자랐으니, 교사가 돼서도 그렇게 가르치겠지.푸른 보석 사파이어보다 환하게 웃던 여섯 명의 벨기에 스카우트 소녀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그 친구들의 청춘에 축복의 말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쳇바퀴의 일상 속에서만 살았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다소 지루했던 불가리아 소피아에서의 여정을 즐겁게 바꿔줬던 스물여덟 한국 청년과 오흐리드에서 만난 벨기에 앤트워프 꼬마숙녀 6인방.그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아저씨는 너희들의 행복과 건강을 빌어줄 것이다. 진심을 다해. 소피아를 제대로 즐기는 2가지 방법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도착해 찾아간 숙소.가장 먼저 들은 말이 “좀도둑에 주의하고, 가방과 지갑을 조심해라”는 것이었다.불과 며칠 전에도 프랑스에서 온 여성 여행자 한 명이 시장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정보와 함께였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사람살이의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재래시장은 도시의 어떤 곳보다 매력적인 장소다. 해서, 그곳을 피해갈 수 없었기에 용감하게(?) 길을 나섰다.다행히 운 좋게도 기자는 좀도둑과 소매치기를 만나지 않았다.넉넉한 인심을 지닌 불가리아 사람들의 따스한 미소로 기억되는 공간 소피아의 재래시장. 이와 함께 거리를 걷다가 만나는 여러 종교의 교당(敎堂)도 기억에 남는다. 이전 여행기에서 언급했듯 소피아엔 이슬람교도, 불가리아정교도, 가톨릭교도, 기독교도들이 함께 어울려 생활하고 있다.◇ 달콤한 과일과 싱싱한 채소가 한국의 반값소피아의 재래시장은 화려한 색채로 관광객을 유혹한다. 체리와 사과, 살구와 수박 등의 과일이 붉고 푸른 저마다의 빛깔로 달콤한 향기를 뿜어낸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새콤한 체리가 아기 주먹 크기다. 부드러운 식감의 살구 맛도 잊을 수 없다.토마토와 가지, 각종 녹색 채소 역시 새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천막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재래시장의 인심은 한국이나 불가리아나 크게 다를 바 없어서 “깎아주세요”라는 요구도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 인심 좋은 상인은 덤에도 인색하지 않다.게다가 가격도 한국의 절반 정도로 저렴하니, 소피아를 찾는 여행자들은 꼭 재래시장에 들러보길 권한다. 물론, 좀도둑을 조심하면서.◇ “저건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교당일까?”소피아엔 역사적·종교적으로 의미가 큰 건축물이 적지 않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 성 니콜라스 정교회, 성 게오르기 교회 등. 이처럼 세계적으로 알려진 교당만이 아니다. 도시 곳곳에 자리한 조그맣고 낡은 가톨릭교회, 이슬람성당, 불가리아정교회당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종교인이라면 더 좋겠지만, 종교를 가지지 않은 여행자도 풍경을 즐기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예쁘게 꾸며진 정원에 들어선 작은 교당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어 보는 것은 유의미한 체험이다. 주말엔 교당에서 젊고 아름다운 불가리아 신랑과 신부의 결혼식도 열린다. 만약 용기가 있다면 초대받지 않은 이방(異邦)의 축하객이 돼보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3-24

모로코에서 벽화를 그리고 싶다던 일본인 아카시

불가리아는 기자가 여행한 첫 번째 유럽국가다. 보통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의 서유럽을 즐겨 찾는 것과 달리 조금은 특별한 선택이었다.그래서였을까. 불가리아로 입국하기 하루 전 조그만 노트에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그간 살아온 아시아가 아닌 낯선 대륙을 향한다는 일종의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다.`불가리아 소피아로 가는 열차 출발시간이 1시간 50분쯤 남았다.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빨라서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거쳐 터키에 도착한지도 벌써 1개월이 넘어서고 있다.막상 떠나려고 마음먹고 보니 매일 보던 이스탄불의 석양이 유난히 슬프고 아름다워 보인다.이제 배낭을 정리해 숙소와 15분 거리인 시르케지(Sirkeci)역에서 기차를 타면 내일 낮 불가리아에 닿는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유럽이라는 다른 공간, 다른 인종, 다른 거리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생경함 때문일까? 기분이 묘하다. 이런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지금 마음으론 기차를 타고 프랑스까지 쭉 올라가볼 생각인데, 그게 또 어떻게 바뀌게 될지….` ▲1980년대 한국의 시골풍경을 떠올리다 14시간이면 도착한다던 기차는 3~4시간을 연착해 오후 늦게서야 기자를 불가리아 소피아역에 내려놓았다.터키 이스탄불을 어젯밤 10시에 출발했으니 적지 않은 시간을 기차에 머물렀다. 그러나, 편안한 침대칸을 예약했고, 같은 칸에 머문 유쾌한 핀란드 아저씨 덕택에 여행은 지루하지 않았다.아침에 일어나 기차 창밖으로 내다본 불가리아의 풍경은 한국의 1970년대 혹은, 1980년대 시골과 닮아있었다.붉은색 기와를 소재로 만든 야트막한 집들과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 넓이를 가늠키 힘든 감자밭과 옥수수밭, 거기에 낡은 트랙터로 농사짓는 사람들까지.수도인 소피아도 규모로만 보자면 한국의 소읍(小邑) 수준이었다. 낡은 트램(노면전차)이 덜컹거리며 오가고, 사람들은 동구권에서 오래 살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소피아 근교엔 소비에트연방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공장이 창문이 깨지고 벽이 허물어진 채 방치돼 있었다.불가리아 사람들은 이방인을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길로 그저 묵묵히 바라봤고, 아이들은 동양인을 신기해하며 힐끗거릴 뿐이었다.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정보를 가지고 `호스텔모스텔`이란 저렴한 숙소를 찾아갔다. 머물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유럽인으로 추정되는 백인이고, 동양인으로 보이는 건 기자를 포함해 3~4명에 불과했다. 일본 사내 하나, 중국계 미국인 여자 한 명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때 만난 서른두 살 일본인 아카시는 정말이지 독특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아카시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자.도착하자마자 허기가 밀려왔다. 다행히 호스텔모스텔 근처에도 조그만 식당이 적지 않았다.눈에 띄는 식당 중 한 곳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갓 구운 빵과 오이냉국 비슷한 차가운 수프, 포크커틀릿처럼 생긴 고기튀김을 먹었는데 다 맛있었다.불가리아 이전 여행지였던 터키와 이란에선 국 비슷하게 생긴걸 구경도 못했는데….냉국에서 요구르트 맛이 나긴했지만 오랜만에 국물을 맛보니 피곤함이 사라지고 기분까지 좋아졌다.기자 또한 “국과 밥이 최고”라고 말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모양이다.머물 곳으로 정한 호스텔모스텔도 마음에 들었다.하루에 1만원 가량인 숙박비에 비해 공동침실과 샤워실 등의 시설이 나쁘지 않았다.게다가 간단하게나마 아침과 저녁까지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어 여행경비를 아낄 수 있었다.시원한 해장국만은 못하지만 공짜로 먹는 것이니 치즈와 홍차, 소시지와 염장한 올리브로 차린 아침식사도 나쁘지 않았다.저녁에는 파스타와 맥주까지 넉넉하게 먹을 수 있으니 젊은 배낭여행자들이 모여드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끊임없이 지구를 떠돌고 싶은 사람을 만나다 앞서 말한 일본인 아카시를 다시 만난 건 소피아에 도착한 둘째 날 점심 무렵이었다.시내로 산책 나가보니 중국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었다. 한국에서 먹던 탕수육과 짜장면 생각이 나서 얼른 들어갔다.거기에 아카시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앉아있었다.둘 다 혼자였기에 “합석하는 게 어떨까?”라고 먼저 제의했다.흔쾌히 “그럽시다”라고 응수하는 아카시.푸른 눈동자의 백인 주방장이 요리한 볶음밥과 중국식으로 양념한 돼지고기 튀김을 함께 먹었다. 곁들인 불가리아 맥주의 풍미가 좋았다.아카시는 18개월째 혼자서 아시아와 유럽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아등바등 다녀 졸업해봐야 샐러리맨인데 그렇게 인생을 보내는 건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학교를 그만뒀다고 했다. 그 이후에는 잠시 일을 해서 돈이 좀 모이면 여행을 다니고, 돈이 떨어지면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일자리를 찾는 과정을 반복해왔다며 깔깔거렸다. 그 웃음에 거짓이 없는 듯해 보기가 좋았다. 한없는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 같아 부럽기도 했다.죽이 맞은 우리는 낮술에 취해 한 나라의 수도답지 않게 고적하고 조용한 소피아를 함께 돌아다녔다.성 니콜라스 정교회를 지나 불가리아 국회의사당 앞에서 담배를 나눠 피웠고, 1천6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는 인간의 유한함과 역사의 무한함을 떠올리기도 했다.이튿날 트램을 타고 교외로 나갔을 때는 조용한 공원에 앉아 서로의 첫사랑 이야기까지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에겐 저마다 각기 다른 `여행의 이유`가 있다.아카시 역시 그랬다. 그가 말했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내가 태어난 별 지구를 끊임없이 떠돌고 싶다”고.아름다운 지중해가 펼쳐진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벽화를 그리고 싶다던 아카시의 꿈은 지금쯤 이뤄졌을까? 문득 궁금하다.불가리아는 요구르트보다 빵이 더 맛있다?새로운 볼거리가 곳곳에 있는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오랜 시간을 걷게 된다.육체적 에너지를 일상생활에서보다 많이 소모하게 된다는 이야기다.그래서일까? 배도 자주 고프다. 새롭게 만난 나라와 도시에 싸고 맛있는 음식이 흔하다면 그건 여행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는 어떤 음식을 맛보면 좋을까? 아래는 소피아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맛본 불가리아 음식들이다.◇ 한국과는 달리 짭짤한 요구르트불가리아 사람들은 요구르트를 키셀로 믈랴코(Kiselo Mlyako)라고 부른다. 이를 한국말로 해석하면 `시큼한 우유`가 된다. 불가리아 요구르트는 유럽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유명하다. 자연환경이 유산균을 만드는데 최적화돼 있는 불가리아의 요구르트는 여러 나라에서 영양가 높은 음료로 인식돼 있다.그러나, `달콤한 요구르트`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짭짤한 맛이 나는 키셀로 믈랴코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기자의 경우엔 채 썬 오이를 요구르트에 듬뿍 넣어 일종의 수프처럼 만든 요리가 좋았다.◇ 큼직하고 저렴해서 더 맛있는 빵유럽은 지역마다 생산되는 밀의 품종이 다르다고 한다.그래서인지 밀을 주재료로 만드는 빵의 맛도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불가리아 사람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빵을 즐긴다.고급 제과점에서 먹는 비싼 빵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맛있다.하지만, 젊고 가난한 여행자들이 매번 그런 곳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는 없는 일. 다행히 불가리아는 길거리에서 파는 빵도 맛과 식감이 나쁘지 않았다.과일잼이나 크림이 든 커다란 불가리아 빵 하나면 허기가 금세 사라진다. 가격까지 싸서 금상첨화다.◇ 프랑스 와인만큼 향과 맛이 좋은 포도주불가리아인들은 기원전 6천년 경부터 포도를 먹었다고 전해진다.자연적으로 자라난 것이건 재배한 것이건 포도를 먹었다면 포도주 또한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불가리아 포도주의 역사와 전통은 만만찮다. 유럽 사람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포도주를 좋아하지만, 불가리아 와인도 이에 못지않게 높이 평가한다고 들었다.소피아의 슈퍼마켓에 들어가면 여러 종류의 불가리아 포도주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1병에 2유로(약 2천500원)짜리 포도주의 향과 맛이라곤 믿기기 않을 정도인 것들이 많다. 주당에겐 큰 즐거움이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3-17

무신론자, 정교회성당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다

`모스크와 케밥(kebab)의 도시`로 불리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야간 국제열차를 타고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향했다. 야식으로 챙긴 소시지와 샌드위치를 안주 삼아 마신 포도주 한 병에 기차여행의 즐거움은 배가됐다.그러나, 여행자가 늘 즐거울 수만은 없는 법. 갑작스런 2번의 여권 검사 탓에 좋았던 기분을 망쳤다.터키-불가리아 국경을 넘은 건 안개 낀 새벽이었다. 불가리아 국경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제복 입은 여성이 잠든 기자를 조심성 없이 툭툭 쳤다. 억지로 눈을 뜨니 웃음기 하나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묻는다.“어디 가세요?”“저요? 이거 불가리아행 열차잖아요. 소피아에 갑니다.”“왜요(Why)?”아니, `왜요`라니.이런 불친절한 검문 방식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이란과 터키 국경에서 환하게 미소 짓던 친절한 경찰과 세관원을 만나온 터라 더 기분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긴 내 나라가 아닌 외국.화를 내서 좋을 게 없다. 상황만 악화될 뿐이다. 발끈하는 감정을 얼굴에서 숨기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점잖게 대꾸했다.“소피아가 멋진 도시라고 해서 놀러 가는데요.”기자의 대답엔 일언반구의 응대도 없이, 쌀쌀한 표정으로 여권을 돌려주며 제 볼일 다 봤다는 식으로 휙 돌아 기차 침대칸을 빠져나가는 불가리아 경찰(또는 세관원).3시간 후쯤엔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반복됐다. 막 동이 틀 무렵이었고, 또 억지로 잠에서 깨어야 했다.이번엔 제복 입은 남성이었다. 그 역시 기계로 만든 로봇처럼 표정이 전혀 없었고, 던진 질문 역시 앞 상황과 맞추기라도 한 듯 똑같았다.“어디 가세요?”“왜요?”제2차 세계대전 이후 권위적인 사회주의 독재 속에서 오래 살아온 탓인지, 불가리아 사람들의 첫인상은 차갑고 사무적이며 시니컬했다. 친절과 따스함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길을 물으면 관광객의 손목을 끌고 목적지까지 바래다주는 터키와 이란 사람들 같은 호의적인 태도를 소피아에선 기대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본 TV 광고처럼 요구르트가 맛있지도 않았다.입국 때부터 기분이 상해있어서였을 것이다. 소피아에서의 보낸 3박 4일은 기대만큼 즐겁지 못했다.도심 한가운데 칼로 두부를 자른 듯 직각으로 서 있는 웅장한 건물들까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대부분 독재정권 시절 축조된 관공서로 짐작되는 것들이기에 그랬다.소피아 중심가를 피해 사람들의 표정에 웃음이 조금은 녹아있는 재래시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1kg에 1유로(약 1천200원)도 하지 않는 크고 달콤한 분홍빛 체리가 우중충한 기자의 기분을 아주 조금 달래주곤 했다.▲ 조그만 정교회성당에서 홀로 들은 노래그러던 그 나흘 중 어떤 하루였다. 소피아 변두리를 어슬렁거리던 기자는 무슨 마음에선지 불가리아 정교회성당엘 들어가게 됐다.시내 중심가에 지어진 이름난 성당에 비하면, 작고 낡고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실내는 어둡고 눅눅해 어디선가 곰팡이 냄새가 풍겨올 것만 같았다.그 흔한 성화(聖畵) 한 점 걸려있지 않은 소박한 성당.뭘 해야 할지 모를 어색하고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때, 신부인지 수사인지 모를 한 사내가 온몸을 휘감은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흔들리는 조그만 향갑(香匣)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게 불가리아 정교회의 성가(聖歌)였는지, 일종의 기도양식이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웅얼거림에 가까웠던 음률은 어제 들은 듯 귓가에 선명하다.노래는 장엄하면서도 평화로웠다.신부 혹은, 수사의 노래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긴 나무 의자에 얌전히 앉아 귀와 마음을 동시에 열었다.당시의 평안했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웅얼거리는 노래가 끝난 후 그가 보일 듯 말듯 한 작은 미소를 보냈다. 그 잔잔한 웃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았다.기도하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기자는 40년 넘게 무신론자로 살아온 사람인데.▲`소피아 여신상`을 지나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으로아주 드물게 겪은 종교적 공간에서의 체험은 불가리아 사람들의 종교에 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소피아엔 이슬람 성당이 적지 않다. 또한, 불가리아 사람들 대부분이 믿는 정교회의 교당도 많다. 거기에 적은 수지만 가톨릭교회도 있다.꽤 긴 시간 종교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주의국가에서 살아온 불가리아 사람들. 그들에게 신(神)과 종교는 어떤 의미였을까?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기자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소피아 여신상이었다.1990년대 초반. 여신상이 서있던 자리엔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1870~1924)의 동상이 자리했었다.사회주의가 몰락한 자리에 들어선 신의 형상. 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커보였다.결국 인간이 마지막에 기댈 곳은 사상이 아니라 신이라는 뜻일까?무신론자인 기자의 심사가 복잡해졌다. 생각은 촉수를 뻗어 신과 종교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거대한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당의 황금빛 지붕이 저녁 햇살을 받아 묘한 색채로 빛났다.그 아래로 불가리아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처럼 성(聖)과 속(俗)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게 아닐까.불가리아는…인구 720만명 다민족 국가다큐멘터리·인형극 수준 높아유럽 동남부 발칸반도에 위치한 나라다. 공식 국명은 불가리아공화국(The Republic of Bulgaria). 면적은 11만879㎢, 해안선의 길이는 354㎞로 몇몇 해변은 휴양지로도 이름이 높다. 인구는 약 720만 명. 수도는 소피아(Sofia)다.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불가리아인이 전체 인구의 83%를 넘고, 터키인(9.5%), 마케도니아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그리스인이 함께 생활한다. 전형적인 다민족 국가라고 할 수 있다.불가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터키어와 마케도니아어를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국민의 대다수가 불가리아정교(83%)를 믿고, 소수의 이슬람교도(12%)와 가톨릭교도(2%)가 있다. 화폐 단위는 레바(Leva). 1레바는 한국 돈 약 615원이다.주된 산업은 농업으로 1950년대엔 구(舊) 소련 방식의 농업집단화를 실시했다. 소련 붕괴 직전인 1989년부터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받아들여 기술력을 높이고, 생산방식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변화에 따라 현재는 농업생산물의 질적 향상을 추진 중이다. 국내총생산은 516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6천700달러다.한국과는 1990년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1994년에는 문화 협정과 이중과세방지 협정, 무역 및 사증면제 협정을 맺었다. 한국은 합성수지, 승용차, 섬유 등을 불가리아로 수출하고 금속광물, 사료 등을 불가리아에서 수입한다.1990년 한국전통무예단이 불가리아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992년 한국·불가리아 문화교류협회가 발족했다. 이후 서울에서 `불가리아 아트 페스티벌`이 열리는 등 양국 간 문화교류가 활발한 편이다.디나르 알프스산맥과 연결된 발칸산맥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어 국토는 2개의 유역으로 나뉜다. 발칸산맥 북부는 겨울이 길고 눈도 많이 내린다. 반면 발칸산맥 남부는 겨울이 온화한 대신 여름철 기온이 매우 높고 덥다. 국토의 40% 가량이 산지로 이뤄져 석탄, 석유, 철, 망간, 납, 아연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다큐멘터리와 인형극의 수준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수의 국민들이 축구, 레슬링, 배구 등의 스포츠를 좋아한다. 다뉴브강(江)과 흑해에서는 낚시와 요트를 즐기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강력범죄는 잘 발생하지 않지만 소매치기나 좀도둑은 적지 않다. 복잡한 곳에서는 여행자 스스로 가방과 지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류태규

2017-03-03

사라예보 가톨릭 구역에서 정신을 잃고 헤매다

전말을 알게 되면 누구나 통곡할 수밖에 없는 발칸반도의 역사. 상호배제와 끔찍한 학살, 비명과 고통이 수백 년간 반복돼온 아픔의 땅.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는 `인간으로서의 희망`을 보스니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무심한 햇살과 그 아래 새하얀 비석들 수만 개가 아프게 눈을 찔러오던 사라예보의 공동묘지.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동자로 사납게 짖어대던 개를 막대기로 쫓아준 꼬마들이 또래다운 호기심을 발휘해 드물게 보는 동양인인 기자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왔다.하지만 그날 그 아이들에게 어떤 질문을 들었고, 무슨 대답을 했는지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시간은 증발했고 기억은 휘발됐다. 그건 단지 기자와 꼬마들의 힘겨웠던 의사소통 탓만은 아니었을 터.아이들이 하나둘씩 산을 내려가고도 한참동안 더 묘지에 앉아 있었다. 시들어버린 장미와 암녹색 이끼, 해독할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비석을 눈앞에 두고. 참담함이라고 해야 할까, 향하는 곳이 분명치 않은 분노라고 불러야 할까? 당시의 심정을 아직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어둠이 사라예보의 산과 묘지를 온전히 뒤덮은 다음에야 벗어놓은 슬리퍼를 꿰신고 시내 중심가로 내려왔다. 이 막막함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뒤집혀진 마음 상태론 술을 마시는 것 외엔 할 게 없었다. ▲ 하얀 비석을 뒤로 하고 내려와 마구잡이로 폭음술을 팔지 않는 무슬림 구역을 지나 숙소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가톨릭 구역으로 휘청거리며 걸었다. `학살의 그날` 새겨진 총탄 자국 선명한 건물들이 스쳐갔다.보스니아 내전 기간 동안 사라예보는 세르비아계 군인과 민병대에 포위돼 있었다. 식량이나 물을 구하러 거리로 나온 아이와 노인들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을 맞고 생이 꺾이곤 했다. `죄 없는 죽음`이 곳곳마다 넘쳐났다. 사라예보 한복판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을 담은 조형물이 있다. 그건 내전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것이고, 총탄 자국이 흉한 건물을 새로 단장하지 않는 이유는 `슬픔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런 구체적인 사실을 기자는 한국에 돌아와서야 책과 인터넷을 뒤져보며 알게 됐다.마침내 도착한 가톨릭 구역. 조그만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싸구려 위스키로 시작해 러시아 보드카와 맥주, 나중에는 알코올 함량이 60%를 넘나드는 라키아(Rakia·유럽산 자두나 청포도를 증류한 투명한 술)까지 벌컥댔다. 끝도 모르게 이어진 폭음이었다. 저녁도 거른 채 급하게 들이켠 술은 엉망의 취기를 불러왔다. 주위에 앉은 보스니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윙윙거리더니 한순간 사라져버렸고, 술집 앞 거리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환시가 보였다. 나중에는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가… 사람이 사람에게 그럴 수가…”라는 혼잣말까지 지껄였던 것 같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기억의 회로가 끊겨버렸다. 샛노란 달이 처연하게 밝은 밤이었다.멈췄던 기억의 회로가 다시 작동을 시작하고 정신이 돌아온 건 다음날 아침 게스트하우스에서였다. 지갑과 여권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침대 머리맡 가방에 그대로 들어있었다. 어떻게 술집에서부터 숙소까지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술값을 제대로 지불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게스트하우스 직원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사라예보에 도착한 첫날부터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기자가 건네는 물음에 친절하게 대꾸해주던 금발의 20대 여성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미안한 일이었지만 거두절미하고 질문부터 던졌다. “저기, 제가 어젯밤 언제쯤 들어왔죠?”“새벽 2시가 좀 넘었을 거예요. 얼마나 마셨는지 엄청나게 취해 보였어요.”“아 그래요…. 혹시, 결례를 하지는 않았나요?”“아뇨. 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쓰러져 잤으니까요.” ▲ 슬픔과 부조리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그쯤이면 천만다행이지 싶었다. 자신의 슬픔을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키거나, 신파조의 슬픔을 무기 삼아 주위를 괴롭히는 건 마흔을 넘긴 사내가 젊은이들에게 할 짓은 아니지 않나. 고통과 아픔을 홀로 삼킬 줄 알아야 어른이라 할 수 있다. 별다른 실수가 없었다는 걸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그녀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젯밤에 친구랑 거리를 지나다가 술집에 혼자 앉아있는 당신을 봤어요. 심각한 표정이던데 왜 그랬어요? 사라예보가 싫은가 봐요?”그 예상치 못한 물음에 이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렇지 않아요. 사라예보는 좋습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싫죠.” 그 여자 앞에서 주제넘게 철학자 흉내를 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자도 가끔은 `대체 인간이란 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같은 종(種)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다. 악독한 행위다. 그러나 자신의 생존과 행복이 아닌 다른 존재의 행복과 생존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다. `희생`은 인간만이 사용하는 단어다. 양립되기 힘들어 보이는 극단을 오가는 인간. 바로 그 인간들이 만들어온 것이 역사다. 쉽게 이해되고 수긍할 수 있는 역사가 있다면, 불가해하고 일그러진 역사의 시간 역시 분명 있었다. 그렇다면 그 불가해하고 일그러진 역사로부터 인간은 무엇을 배워야할까?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반성하지 않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보스니아 사람들은 내전과 학살의 아픈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그리고 2017년 오늘. 한국은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나.`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영화와 만나다영화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어렴풋이나마 추측하게 해주는 대리체험의 교과서다.참혹했던 `보스니아 내전`의 전개 과정과 인간존재의 의미를 되묻게 만드는 `인종청소`의 끔찍함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다.아래 소개하는 3편의 영화는 여기에 더해 감동과 카타르시스까지 주는 작품들이다.보스니아를 필두로 발칸반도의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감상해보길 권한다.▲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 `그르바비차`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 `그르바비차` ▲ 사라예보 외곽의 작은 마을 그르바비차에 사는 소녀 사라는 아버지가 없다. 엄마인 에스마는 “아빠는 전쟁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죽었다”고 말한다.사라는 그런 아빠가 자랑스럽다. 하지만, 엄마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수학여행을 앞둔 딸에게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있었으니, 사라의 아버지는 전쟁영웅이 아니라는 것. 어린 딸에게는 숨기고 싶었던 불행한 과거를 들키게 된 엄마.모녀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지는데…. 보스니아 출신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데뷔작으로 베를린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 `웰컴 투 사라예보`마이클 윈터바텀 감독 `웰컴 투 사라예보` ▲ 사라예보의 참상을 취재하러 온 종군기자 플로이드와 마이클. 둘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할 말을 잃어버린다.직접 보면서도 믿기 힘든 전쟁의 잔인한 맨얼굴에 치를 떨던 그들 앞에 고아 소녀 에미라가 나타난다.어떻게 해서건 이 소녀를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시키고 싶은데…. 1997년 제작된 작품으로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최초의 영화로 알려져있다.종교간 대립과 인종갈등이 인간을 어떻게 악마로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전쟁을 기록하는 종군기자의 윤리문제에도 카메라 렌즈를 가져다댄다.▲ 안젤리나 졸리 감독 `피와 꿀의 땅에서`안젤리나 졸리 감독 `피와 꿀의 땅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젊은 여성 아일라는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납치돼 수용소로 끌려간다.그곳에선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끔직한 일들이 매일 벌어지는데….할리우드 인기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연출을 맡아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원제는 `In The Land Of Blood And Honey`. 사람이 사람을 죽고 죽이는 비극의 현장인 전쟁터.그 참화 속에서도 사랑의 숭고함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영상으로 전함으로써 보스니아 사람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준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2-24

비극의 역사 없이 세워진 나라가 있을까

사람살이의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재래시장은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그간 여행한 나라마다 시장은 빼놓지 않고 들렀다. 하지만, 박물관이나 유적 등에 관한 흥미는 크지 않다. 사람마다 여행스타일이 다르니까 그렇다.사라예보에서도 굳이 박물관을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라틴 다리 인근 노천카페에 앉아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시원한 보스니아 맥주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더 좋았다.그런 여유를 즐기는 가운데 멀리 산마다 새하얗게 들어찬 것들이 눈에 띄었다. 저게 뭐지? 궁금증이 일었다. 사라예보는 야트막한 산으로 빙 둘러쳐진 지형이다. 그 산마다 하얀 기둥 혹은, 막대기 같은 게 지천이다. 뭘까? 궁금증은 즉각 해소해야 한다. 게다가, 게으른 여행자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이니 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산에 올랐다. 비구상 같던 풍경은 금세 실체가 돼 눈앞에 펼쳐졌다. 하얀색 비석이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일이십 개도 아니고, 일이백 개도 아니다. 수천수만 개였다. 비석, 무덤, 떼죽음, 학살(Genocide), 비극, 인종, 종교….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단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으로 휙휙 지나갔다. 그때가 한여름이었음에도 한기가 몸을 엄습해왔다. 어디서 온 것인지 탁한 침을 흘리는 개 몇 마리가 기자의 주위에서 으르렁거렸다.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돼 있었다. 위협적이었다.▲ 파란 하늘과 하얀 비석… 죽은 자들의 공간그 순간, 전후 맥락도 없이 왜 원로시인 고은(84)의 `문의마을에 가서`라는 시가 떠올랐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문득 팔짱 끼어서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모든 것은 낮아서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아무리 돌을 던져도죽음에 맞지 않는다겨울 문의여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갑작스러운 두통이 밀려왔다.아시아의 참혹한 학살 현장인 캄보디아 `킬링 필드`(Killing Fields)를 본 후 겪었던 것과 유사한 공황상태에 빠졌다.“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를 혼잣말로 반복해 읊조리며 망연자실 서 있는 기자 앞으로 보스니아 아이들이 다가와 개를 쫓아줬다. ▲ 때론 환멸을 부르는 인간들의 악행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단어를 치고 엔터키만 누르면 줄줄이 나열되는 정보를 혼자 아는 척 길게 인용할 필요는 없다. 해서 기자가 알고 있는 동서양 현대사의 `비극적 죽음`에 관해 짤막하게 요약하려 한다.먼저 1980년 광주항쟁. 18년을 장기집권 하던 독재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았다.최측근으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비명에 간 것이다. 이어진 12·12 쿠데타. 전두환과 노태우, 박준병과 정호용 등 권력을 잡은 육군사관학교 동기들. `신군부`로 불리던 이들에겐 휘어잡은 헤게모니를 공고히 해줄 희생양이 필요했다.광주가 피를 흘렸다. 수백 명이 죽었고 수천 명이 다쳤다. 제 나라 군인이 쏜 총탄에 자국민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5·18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로부터 37년의 세월.아직도 5월이 되면 광주엔 고통을 호소하며 정신병원을 찾는 환자가 다른 달보다 많다고 한다. 다음은 1976년 크메르루즈(Khmer Rouge)의 캄보디아 대학살. 1975년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경도된 프랑스 유학생 출신 게릴라들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장악한다.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원시적 공산체제를 꿈꾸었던 이들은 무지막지한 개혁을 단행한다. 아니, 개혁을 빙자한 학살을 자행한다. 크메르루즈는 지식인과 유산계급의 씨를 말리려 했다.손에 굳은살이 박이지 않았다고,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안경을 썼다고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심지어 공무원과 교사의 어린 자식들까지 마구잡이로 죽였다.폴 포트, 카잉 구엑 에바브 등이 주도한 학살이었다. 4년간의 크메르루즈 집권기간 동안 캄보디아 인구 800만 명 중 150만 명이 살해됐다.그리고, 보스니아 내전. 1990년대 초반 소련연방 붕괴 후 동유럽 전역은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는 서로 다른 민족들의 목소리로 뜨거웠다. 유고슬라비아연방에 속해 있던 보스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민투표를 통해 연방에서 탈퇴한 1992년. 보스니아 국민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세르비아계는 그들과 종교가 다른 무슬림이 나라의 패권을 쥐는 걸 저지하려 했다. 유고연방의 주도국이었던 세르비아의 지원 하에 학살자들이 보스니아로 속속 들어왔다. 당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의 최고 정치지도자와 군사령관이 합세해 수도 사라예보를 포함한 보스니아 전역에서 `인간 도살`을 시작했다.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일이 수년간 일상처럼 벌어졌다. 20만 명 이상이 죽고, 25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했다. 여섯 살 여자아이와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까지 이마에 조준사격을 해 죽였다.수천·수만의 무슬림들이 학대와 강간을 당했고,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 격리됐다. 부정할 수 없는 `야만의 시간`. 이전 여행기에서 언급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등이 주도면밀하게 진행한 학살이었다. 유럽에서 맛보는 이슬람 요리낯설고 물선 외국에서 독특하고 생소한 요리를 맛본다는 건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하나다.보스니아는 유럽 대륙에 위치해있음에도 이슬람교의 생활양식이 보편화된 국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음식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국민의 거의 절반이 무슬림이기에 그렇다. 사라예보에 머무는 관광객들이라면 한 번쯤 무슬림식당에 들러 이슬람 요리를 맛보는 것도 즐거운 체험이 되지 않을까.◇ 독특한 향신료를 사용한 양고기와 닭고기 요리돼지고기 먹는 걸 금기로 여기는 무슬림들은 단백질과 지방 보충을 위해 양고기와 닭고기를 즐겨 먹는다.재료를 숯불에 구운 것에서부터 기름에 튀기거나 물에 끓인 것까지 요리방식은 수십 가지다.아랍에서 건너온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는 이슬람 고기 요리는 한국에선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맛과 향을 여행자에게 선물한다.화덕에 구워 기름기가 없고 담백한 빵을 곁들이면 푸짐한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다만 향신료 냄새에 민감한 사람은 먹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이슬람 요리는 `무슬림 구역`에서사라예보는 지금도 무슬림 구역과 가톨릭 구역으로 양분돼 있다.터키 요리와도 비슷하고, 중동 음식과도 유사한 보스니아의 이슬람 요리는 당연지사 무슬림 구역의 식당에서 판매된다. 많은 미식가들로부터 “최고의 향신료”로 칭송받는 샤프란(Saffron)을 섞어 만든 향기로운 밥이나, 구운 가지와 토마토를 곁들인 양고기 스테이크를 맛보려면 무슬림 구역으로 가야한다.가톨릭 구역에선 이슬람 요리를 맛보기 어렵다. 무슬림식당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친절한 보스니아 사람들이 웃으며 길을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라마단 기간엔 식당이 문을 닫으니 주의이슬람교도들이 `신성한 달(月)`로 여기는 라마단(Ramadan) 기간에는 모든 무슬림이 해가 떠서부터 질 때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식당이 일몰 때까지 문을 열지 않는다.사라예보의 무슬림식당도 마찬가지다. 독실한 무슬림의 경우에는 이 기간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 담배도 피우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이슬람교도가 많은 지역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라마단 기간을 반드시 고려해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자칫하면 종일 굶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애주가에게 정보 하나 더. 무슬림식당에선 술을 팔지 않는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2-17

그 도시는 여전히 `죽음`과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반면교사 해야 할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죄 없는 수백만 명의 사람을 죽인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1889~1945), 캄보디아의 폴 포트(1928~1998)와 함께 아래 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이들은 자신이 도대체 무슨 악행을 저지른 것인지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슬로보단 밀로셰비치(1941~2006)라도반 카라지치(1945~)라트코 믈라디치(1942~)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새벽 거리는 괴괴하리만큼 조용했다. 크로아티아의 해변도시 스플리트에서 밤늦게 출발하는 국제버스를 타고 10시간을 달려 도착한 도시.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며, 폐병을 앓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1895~1918)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라틴 다리(橋)`가 있는 도시. 거기에 크지 않은 공간에 세르비아정교회 성당과 이슬람교 성당인 모스크, 가톨릭 교회까지가 각기 다른 신을 향해 첨탑을 올린 풍경들.외국인 여행자가 거의 없는 국제버스터미널에서 기자를 시내로 데려다줄 트램(노면전차)의 승차장을 찾아 걸었다. 트램은 보스니아만이 아닌 동유럽 여러 나라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생소한 공간이니만치 길 찾기가 쉽지 않았고, 그 덕에 제법 걷고 나서야 트램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내전이 끝난 지 20년이 가까워오는데, 도심 건물들은 아직도 흉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지저분했다. 사라예보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홀리데이 인 호텔`까지도 그랬다.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 건물들이 쥐 파먹은 모양으로 흉측스러웠던 건 `비극적 역사`가 벌어질 당시의 총탄 자국 때문이란 걸.보스니아 사람들의 가슴에 상흔(傷痕)이 지워지지 않은 것처럼, 탄흔(彈痕) 역시 여전했다. 한두 건물이 아니라, 그 도시 대부분의 건물이 그랬다. 때론 세월이 상처의 흔적을 숨겨줄 수도 있지만, 영혼에 입은 상처는 시간만으론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다.▲ 술을 팔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독특한 구역` 시내 한복판으로 짐작되는 곳에 내려 숙소를 찾았다. 이른 아침인지라 구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일단 밥부터 먹기로 했다.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아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양고기와 노란색 향신료를 사용한 볶음밥. 메뉴에 돼지고기가 없다. 그렇다면 이건 무슬림 식당이다.알다시피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은 돼지고와 술을 먹지 않는다. 이슬람국가를 여행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게 되는 사실이다. `신성 무슬림 국가`를 지향하는 이란의 이스파한(Isfahan)을 여행할 때 만난 그곳 청년들은 기자가 “한국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좋아하고 곧잘 먹는다”고 하자,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표정을 만들어내며 몸서리를 쳤다. 종교와 지역이 다르면 음식문화도 판이한 것이다.식사를 마친 후 다행히 저렴한 가격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을 수 있었다. 밤새 버스에서 시달린 여독을 풀고 편하게 한숨 자려고 맥주 한 병을 청했다. 꼭 술집을 겸하지 않더라도 유럽 대부분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맥주와 간단한 음료 정도는 판매한다. 그런데 맥주가 없단다. “가톨릭 구역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보스니아에서 생산되는 맥주 `사라예보스코`. 쓴맛과 단맛이 적절히 조화돼 풍미가 좋은 술이다. 그러나, 사라예보의 무슬림(Muslim·이슬람교도) 구역에선 맛보기가 어렵다.한참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사라예보에는 지금도 무슬림 구역과 가톨릭 구역이 존재한다. 무슬림 구역의 식당과 숙소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 심지어 슈퍼마켓에서도 그렇다. 술이 없는 슈퍼마켓이라니….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술을 구할 수 있는 한국인의 상식에선 이해가 어려운 대목이다.반면, 몇 블록을 건너가면 곳곳이 노천카페이고, 길가에 앉아 `사라예보스코`를 마시며 더위를 식히는 청년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슈퍼마켓엔 맥주는 물론, 보드카와 위스키, 그리스 전통주인 우조(ouzo)까지 없는 술이 없다. 이건 가톨릭 구역 이야기다. 2개의 구역으로 나뉜 하나의 도시. 기자가 보기에 사라예보는 참으로 기묘한 도시였다.▲ 생각보다 작고 초라한 `라틴 다리`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지형의 사라예보. 그 산마다 온통 하얀 색 비석이 가득하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크로아티아를 여행할 때 대충 듣기는 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중반에 이르는 시기까지 보스니아 전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대량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게 실감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전쟁과 혁명을 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한국의 1970년대 생. 기자 역시 그 중 한 명이다. 책이나 영화로 대리체험을 했을 뿐이지 총살과 고문, 일방적인 구타와 저항할 수 없는 모욕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래서 기자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런 결론에 가 닿은 이유는 다음 회 여행기에서 설명하려 한다. 달콤한 잠으로 여독을 푼 후 숙소를 나와 `라틴 다리`부터 찾았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황태자에게 총을 쏜 장소가 궁금했다. 민족과 조국이란 단어는 청춘들의 피를 뜨겁게 한다. 그렇기에 과도한 민족주의에 경도됐을망정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의 이야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언제나 흥미롭게 다가온다.청년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문장에 매혹되기 쉽다. 자신과 부모, 이웃을 괴롭히는 자들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그 열망 속에서 제 나라를 핍박하던 이국(異國)의 통치자를 죽이고, 스스로도 죽었다. 그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역사책을 찾아보면 된다.그런데, 기자의 생각과는 달리 `역사의 현장`인 라틴 다리는 너무나도 작았다. 한국 시골 마을 도랑에 만들어진 교량 수준의 크기였다. “여기로 거대 제국의 황태자가 탄 차량과 뒤를 따른 보좌행렬이 지나갈 수 있었을까”라는 혼잣말이 나올 정도. 그 다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점화됐다는 사실은 입구에 있는 낡은 표지판만이 증언하고 있을 뿐이었다.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한때 “유럽의 화약고”로 불렸던 발칸반도에 위치한 나라다.공식 명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이고 수도는 사라예보(Sarajevo). 북부 보스니아와 남부 헤르체고비나로 나눠져 있다. 보스니아는 보스나 강(江)에 인접했다는 것에서, 헤르체고비나는 옛날 이 지역 통치자의 별칭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언어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공용어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한다. 면적은 5만1천197㎢, GDP는 2016년 기준 165억 달러로 세계 112위 수준이다. 사용되는 화폐의 단위는 마르카(marka). 평균수명은 약 78세다.무슬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등이 함께 살고 있다. 국민의 45%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다. 유럽 국가 중 알바니아와 함께 무슬림의 비율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세르비아인은 인구의 약 33%, 크로아티아인은 19% 정도다.이슬람교도가 많은 만큼 관련 문화유적도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다. 17세기에 축조된 역사적 사원인 카레바(Careva)와 알리파사(Alipasa)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다. 사라예보는 물론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도 아름다운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모스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인구는 약 390만 명. 인접국은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이다.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병합됐다가 1946년 공화국이 됐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될 무렵 독립을 선언했으나 이슬람교와 가톨릭, 세르비아정교 등 종교간의 대립으로 무참한 집단학살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북부 일부 지역을 제외한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다. 때문에 철광석과 아연, 은과 대리석 등의 광물이 풍부하다. 또한, 삼림과 수자원을 이용한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기후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보스니아 지역은 온화한 편이나 겨울 추위는 매섭다. 반면 헤르체고비나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기온이 높고 건조하며, 한겨울에도 온난하다.한 나라의 수도치고는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사라예보에서 터키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 요리를 즐기고, 강변을 여유롭게 산책하는 건 보스니아를 찾는 여행자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포도 등의 과일이 맛있고, 중세의 성(城)과 1556년 만들어진 아름다운 다리로 유명한 모스타르(Mostar)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2-10

연인을 위해 몇 나라의 국경을 건너온 여자는…

베오그라드 중앙역에서 금발의 호객꾼을 따라 도착한 숙소는 오래되고 깨끗하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온 대학생 10여 명이 단체로 묵고 있었고, 스물넷이라는 호스텔 주인의 친구들도 왁자지껄 모여 탄산음료에 독한 보드카를 섞어 마시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1분 간격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스페인과 포르투갈 청년 절반에 세르비아 청년 절반, 거기에 얼굴색이 다른 중년의 동양 사내 하나가 낀 풍경이었다.나이로 보자면 그들은 기자의 조카뻘이지만, 서로가 초면인 여행자들에게 나이 차이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와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은 스페인 여배우 페넬로페 크루즈(Penelope Cruz), 세르비아 출신의 테니스 스타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와 한국 걸그룹 `소녀시대`의 이야기가 앞뒤 없이 오가는 가운데 모두가 잠을 잊었고 흥겨운 술판을 이어졌다.그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기자를 숙소까지 데려온 여자가 호스텔 주인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거칠고 우락부락한 인상을 가진 세르비아 남자친구를 대신해 상냥한 말투와 호감 가는 인상으로 호스텔 손님을 끌어 모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세르비아인이 아닌 에스토니아 사람이라고 했다. 물설고 낯선 외국까지 와서 연인을 위해 쉽지 않은 호객 일을 자처한 여자. 역시, 사랑의 힘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강했다.배낭여행을 하다보면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커플을 가끔 만나게 된다. 남부유럽 마케도니아에서는 이탈리아 여자와 벨기에 남자 커플을 봤고, 불가리아에선 체코 여대생과 핀란드 사내의 다정다감한 연애를 지켜보며 부러워했다. 뿐인가, 알바니아에선 기독교도인 독일 남자와 이슬람교도인 알바니아 여자 커플과 커피를 함께 마시기도 했다. 사랑은 인종과 국적은 물론, 종교까지도 뛰어넘는 위대한 것이란 걸 그들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됐다. ▲ 사랑하는데, 국적 따위가 무슨 제약이 될까기자가 만난 커플에 한정시켜 말하자면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 상대의 국적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 아니, 그 이전에 서로 다른 국적은 연애를 시작하는데 방해요소가 될 수 없는 듯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자기 목숨도 상대방을 위해 내줄 수 있는 게 사랑인데.등산과 수영 등 활동적인 레포츠를 즐기는 이탈리아-벨기에 커플은 가끔은 이탈리아어로, 때로는 프랑스어로 다음날 일정을 의논하며 옆에서 누가 보건 말건 10초당 한 번씩 키스를 하곤 했다. 체코-핀란드 연인은 남자가 두 살 아래인 `연상연하 커플`인데 누나(?)를 에스코트하는 남자의 모습이 의젓했다. `서로 다른 종교`라는 높고도 단단한 벽을 뛰어넘어 사랑을 나누고 있는 알바니아-독일 커플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한국과 달리 국경이 국경처럼 인식되지 않는 유럽. 그런 외부적 환경은 사람의 심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태어난 나라가 다를 뿐, 동시대의 공기를 호흡하며 유사한 고민과 희망 속에서 사는 젊은이들에게 “너는 인종과 종교, 국적이 같은 사람하고만 연애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건 규제나 폭력일 수도 있는 것이다.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거의 유일한 존재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 역시 어떤 제약이나 도그마에 휘둘릴 필요가 없지 않을까.조금은 방향이 다른 문제제기일 수도 있지만, 최근 한국에서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한국인 남성-외국인 여성`, `외국인 남성-한국인 여성` 커플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가진다면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볼 이유가 없다. 전제나 조건이 붙어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란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 `빛나는 시절`을 사는 베오그라드의 청춘들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연인을 따라 에스토니아에서 베오그라드로 왔다는 금발의 호객꾼 여자와 괄괄한 성격의 세르비아 남자를 다시 만난 건 칼레메그단(Kalemegdan)이란 거대한 성(城)이 지척인 베오그라드 언덕 위에서였다.도나우강과 사바강 물결이 쿨렁이며 합쳐지는 광경이 장관을 이루는 낭만적인 장소에 둘은 서있었다.새벽까지 이어진 호스텔 호객에 지쳤을 에스토니아 여자의 어깨를 나긋나긋한 손길로 마사지 해주는 세르비아 사내의 모습이 190cm에 육박하는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한없이 귀여웠다. 간지러운 것인지 연인의 손을 가볍게 쳐내면서도 연신 행복한 웃음을 짓는 에스토니아 여자의 얼굴도 보기 좋았다.그렇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20대 청춘의 빛나는 시절이라면 둘이 있는 곳이 곧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 그게 세르비아든 에스토니아든 한국이든. 그 빛나는 청춘을 허망하게 지나온 기자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청춘을 돌려주는 상점은 세상에 없으니까.밀어(蜜語)를 속삭이는 둘에게 다가가 “늦은 점심이라도 함께 먹자”고 청하려다가 생각을 바꿔 발길을 멈췄다. 지금 저들의 배를 불리는 건 감자튀김이나 햄버거 따위가 아닌 둘만의 속삭임일 것이기에. 그 순간 그네들 사이에 끼어드는 건 주제넘은 일인 동시에, 눈치 없는 행동일 것이 분명했을 터다.젊고 아름다운 에스토니아-세르비아 커플을 뒤로 하고 시내로 향했다. 세르비아는 한국과 비슷하게 외국의 침략을 여러 차례 겪었고, 내전의 상처 또한 안고 있는 나라다.파괴와 재건을 거듭한 베오그라드의 역사 역시 한국의 수도 서울과 흡사하다. 인종과 종교가 야기한 야만의 과거를 추상적으로나마 떠올리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저건 대체 뭐지?도심 거리 곳곳을 소가 점령(?)하고 있었다. 소를 형상화한 조형물의 색깔과 질감·형태가 모두 조금씩 달랐다. 대체 저렇듯 많은 소를 조각해놓은 이유가 뭘까? 궁금증이 몰려왔다.누구에게 물어봐야 명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여행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지, 해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며칠 더 베오그라드에 머물게 된다면 자연스레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 낯선 도시에서 낯선 바람이 불어왔다. 느려서 더 낭만적인 동유럽 기차여행느긋하게 창밖 풍경을 보며, 유유자적 식사와 음료까지 즐길 수 있는 기차여행은 매력적이다. 한국이나 일본,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 기차는 평균시속이 채 50km에도 미치지 못한다. 느리다는 이야기다.그러나, 그 `느림` 속에는 많은 `낭만`이 숨겨져 있다. 만약 당신이 동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아래 코스에서 기차를 타보길 권한다.비행기를 이용한 여행이나, 버스여행과는 전혀 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터키 이스탄불 ↔ 불가리아 소피아터키에서 수많은 이슬람사원을 둘러보고, 오스만투르크 문화의 향기를 느낀 여행자들이 유럽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용하는 열차여행 코스다.보통은 밤늦게 이스탄불역을 출발해 다음날 오전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도착한다. 기차 안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드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자정을 넘긴 시간에 터키-불가리아 입·출국사무소에서 긴 줄을 서보는 것도 평소에는 해보기 힘든 흥미로운 체험이다.보스니아 사라예보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비극적 현대사의 생채기가 도시 곳곳의 총탄 자국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이 도시에선 많은 관광객들이 인간과 역사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보스니아에서 운행하는 열차는 낡았다. 그 열차에 몸에 싣고 베오그라드까지 달리는 8~9시간 동안 뭘 해야 할까?기자의 경우엔 먹먹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위스키를 마셨다. 창밖으론 `상처투성이 발칸반도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 헝가리 부다페스트끊임없이 이어지는 진초록의 감자밭, 넓은 목초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떼, 빨간 기와지붕 아래를 오가는 부지런한 농부들…. 세르비아에서 헝가리로 가는 기차의 창밖 풍경은 한국의 1970년대와 닮았다.아름다운 전원풍경이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한 세르비아 꼬마들과 과자를 나눠먹으며 장난을 치는 것도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한 방법이다.이 기차여행의 끝에서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만날 수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2-03

남한과 북한을 헷갈려하던 호스텔 주인아저씨

아름답고 고풍스런 건물이 줄줄이 늘어선 세르비아의 전원도시 노비사드. 운 좋게도 머물던 시기에 영화 촬영이 진행되고 있어 그 현장에도 가볼 수 있었다. 아마도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작품인 듯 멋지게 장식한 마차와 클래식한 디자인의 자동차가 함께 등장했다.팔과 다리가 늘씬한 남녀 배우들이 대기하는 카페에선 그들과 눈인사도 나눴다.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영화배우들은 미남이고 미녀였다. 여배우의 푸른 눈동자가 빛나는 햇살 아래 사파이어처럼 반짝였다.오랜 시간의 산책과 영화촬영 현장 구경이 지겨워진 기자는 잠시 쉬려고 묵고 있던 `소바 호스텔`로 돌아왔다.유럽과 할리우드의 영화포스터가 벽면 가득 걸린 깔끔한 숙소.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숙소 주인은 동양문화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노비사드에 도착한 첫날 저녁. 벨기에에서 온 70대 할아버지와 독일 여대생들, 숙소 주인아저씨와 기자가 공용거실에서 함께 맥주를 마셨다.동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아직 한국에 관해 세세한 사항까지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독일 여학생 하나가 “한국은 중국과 같은 문자를 쓰느냐?”고 물었다. 또 변변찮은 영어 실력으로 그렇지 않다는 걸 설명해야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숙소 주인이 먼저 나섰다. ▲ 한국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한국은 중국과는 별개의 나라이고, 언어와 문자도 다르다. 중국 문자는 사물의 형상을 본뜬 것인데, 한국의 경우엔 아니다.수백 년 전에 어떤 왕이 한국만의 문자를 만들었다. 일본 문자는 중국, 한국과는 또 다르다”는 요지의 설명을 거침없이 펼치는 숙소 주인.기자는 `어떤 왕`이 `킹 세종(세종대왕)`이라는 것만 부연하면 됐다. 수고를 덜어준 고마운 주인아저씨.그가 한국에 관해 알고 있는 건 그 외에도 많았다. 삼성 핸드폰이 노키아 제품보다 더 많이 팔리고, 현대가 한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 생산업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거기에 더해 홍상수와 김기덕 감독의 영화 DVD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작품들이 “동양적인 매력과 독특함을 보여 준다”는 감상평까지 내놓았다.한국영화에 관한 그의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 “저 정도면 세르비아 노비사드에선 한국에 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군”이란 혼잣말이 나왔다. 그런데….낮잠을 자기 위해 숙소로 돌아온 기자가 가벼운 인사를 전하자, 소파에 기대 앉아 책을 읽던 그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어제부터 봤는데 너 말이야, 너희 나라 대통령인 `미스터 킴`과 너무 닮았어. 왜 김정일이라고 있잖아.” 기자가 세르비아를 여행했을 때는 김정일이 죽기 전이었다.갑작스런 말에 황당해하는 표정을 보며 그가 한마디를 더 던졌다.“프레지던트 킴은 세르비아에서도 유명해. 미국이 무서워하는 핵을 가졌잖아.”아…, 그는 기자를 북한에서 온 여행객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반기문 UN 사무총장에 이어 김정일과 닮았다니.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그는 김기덕과 홍상수도 북한의 영화감독인 줄 알았던 걸까?노비사드. 한국 사람들은 남·북한을 불문하고 모두 닮았다고 말하는 이들과의 만남 때문에 당황하기도 했고,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이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겪은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 베오그라드, 미녀 호객꾼을 만나다늦은 밤 홀로 낯선 도시에 도착한다는 건 설레는 동시에 조금은 두려운 일이다.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중앙역. 기차에서 내린 건 자정이 훨씬 지난 오전 2시 무렵.그럴 땐 장 그르니에(Jean Grenier·1898~1971)의 산문집 `섬`의 한 구절을 조용히 되새겨 보면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다.새벽녘, 안개 낀 낯선 항구에 도착하고 싶었다거기서 가난하고 겸허하게 사는 꿈비밀이 없는 삶이란 서랍 없는 책상과 같은 것…베트남의 고풍스러운 도시 훼(Hue)와 아라비아해의 파도가 일렁이는 인도의 마르가오(Margao)역에 도착했을 때도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다.낯선 공간과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 혼자 남겨진 느낌. 누구나 막막함과 당혹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지나치게 겁먹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혼자 떠난 여행이라면 그 정도 곤경은 이미 예상했을 게 아닌가.크든 작든 여행지에서의 문제란 어떻게든 해결되기 마련이다.기자의 경우도 그랬다. 훼에선 고교 동창끼리 여행 온 이들의 도움을 받아 근처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고, 인도 마르가오에선 역 바닥에서 반쯤 잠들어 있던 택시기사를 깨워 해변 인근 호텔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렸다.가끔은 일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게 최상의 해결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베오그라드에서도 그랬다. 대부분이 잠든 늦은 밤임에도 국경을 넘어 그 시간에 도착한 여행자들을 위해 역 주변 숙소에서 적지 않은 호객꾼들이 나와 있었다.저마다 준비한 팸플릿 형태의 숙소 홍보 전단을 보여주며 자신의 호스텔 혹은 게스트하우스로 가자고 채근했다. 숙소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했다. 도미토리의 경우 간단한 아침식사를 포함한 1박 가격이 10유로(약 1만3천원) 정도.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젊은 여성이 기자에게 다가와 물었다. “우리 호스텔로 갈래요?” 내미는 전단을 보니 예상했던 가격이다. 비슷한 비용에 유사한 조건이라면 미인을 따라가서 나쁠 게 뭐 있겠는가.“그럽시다. 여기서 가깝죠?”배낭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숙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류다. 국적과 종교·인종은 다르지만 찾아보면 공통의 관심사가 적지 않다.역 앞을 벗어나니 인적이 눈에 띄게 드물어졌다. 앞장서 걷는 여자를 따라 기자 역시 발걸음을 빨리했다. 10분 정도 갔을까. 전단지에 찍힌 숙소 사진과는 전혀 다른 낡고 허름한 건물이 나타났다. 내부는 더 지저분했다. 자주 세탁하지 않은 게 분명한 침대 시트가 때에 절어 반질반질했다.약간 실망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처 살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묵고 떠날 건데 뭐 어때`라는 낙관으로 마음을 돌렸다. 한국의 시골 여인숙도 1만3천원에는 못 구한다. 그 가격에 뭐 대단한 시설과 서비스를 바라겠는가. 생각을 바꾸니 마음도 편해졌다. 기자가 숙박부에 이름과 여권번호를 적는 것까지 본 그 `호객꾼 처녀`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밖으로 나갔다. 새해, 나 홀로 배낭여행자가 돼보는 건 어떨까?세계 어느 곳에서도 한국 여행자를 볼 수 있는 시대다.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온 서유럽과 동남아시아, 미국 등은 물론이고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여행지인 중동과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도 한국인을 만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2017년 오늘.혼자서 계획과 일정을 짜고 낯선 공간을 헤매 다니는 `나 홀로 배낭여행자`도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남녀를 불문하고 혼자서 장기간의 여행을 떠난다는 건 용기와 단단한 마음가짐 없이는 힘들다.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3일간 머물렀던 때. 기자는 바로 이 `용감한 나 홀로 배낭여행자` 한 명을 만났다. 오르막길이 많은 베오그라드 시내. 돌아다니다 지치고 힘들면 카페에 들러 커피나 맥주를 마시곤 했다.그날도 그랬다. 맥도날드가 보이길래 가벼운 점심식사나 할 겸 들어섰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는데 바로 옆 식탁에 얼굴이 뽀얀 20대 여성 하나가 볼펜 색깔을 바꿔가며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얼핏 봐도 한국어는 중국어·일본어와 구별이 된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물었다.“한국에서 왔어요?”▲ 베오그라드를 출발해 노비사드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귀여운 꼬마숙녀.그 여학생 역시 기자처럼 혼자서 동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 나이는 겨우 스물하나. 자신이 다니는 한국의 Y대학 교환학생으로 온 세르비아 학생과 친해졌고, 학업을 마친 후 제 나라로 돌아간 그를 만나러 방학을 이용해 베오그라드에 왔다고 했다. 그늘 한 점 없는 선량한 눈빛에 친절하고 예의 바른 말투. 기자가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떠나는 기차를 예약한 탓에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홀로 세상을 떠도는 용기에 힘을 보태주기 위해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었는데….베오그라드 칼레메그단 요새 근처 맥도날드에서 만났던 그 여학생은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주위를 둘러보면 세상사 어려움에 기죽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낯선 공간과 시간이 야기하는 두려움을 너끈히 이겨낸 `나 홀로 배낭여행자들`. 그런 용기와 모험심이라면 앞으로 살아가며 겪을 어려움 앞에서도 쉽게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올해 당신이 이뤄야 할 꿈의 목록에 `나 홀로 배낭여행자 돼보기`를 포함시키는 건 어떨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1-26

“내가 반기문 UN 총장과 닮았다고요?”

세르비아. 구(舊)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주도국이었던 이 나라에 관해 기자가 아는 것이라곤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1954~)가 활동한 곳이라는 정도였다. 영화 관람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 옛 유고 연방과 세르비아에 관해 아는 것의 전부였다는 이야기.냉철한 유럽풍의 사실주의에 남아메리카 예술의 특징인 마술적 요소를 결합한 `환상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쿠스트리차의 영화. 그중에서도 `집시의 시간`과 `언더그라운드`는 슬라브족 특유의 쾌활함과 에너지, 위트를 극대화해 보여줌으로써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다.1990년대 초반부터 말까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 연방국들의 독립선언과 이어진 내전으로 유고슬라비아는 큰 비극을 겪었다.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참혹한 시간이 오랜 기간 지속됐다.그 당시 언론은 이 지역의 또 다른 명칭인 발칸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 불렀다. 내전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학살되거나 다쳤다. 옛 유고 연방에 전쟁의 포연이 온전히 걷힌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인종과 종교간 비극의 불씨는 아직도 도처에 남아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운 시기가 시작된 지 겨우 10여년을 넘어서고 있는 것. 기자는 그 지역 나라 중 마케도니아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를 여행했다.감자밭과 해바라기밭이 이어지는 광활한 평원무더위가 한창이던 몇 해 전 8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10시간 가까이를 달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중앙역에 도착했다.동유럽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그 구간의 풍경은 한국과는 딴판이었다.온통 감자밭과 해바라기밭 천지였다. 높은 산도 없었다. 덕분에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벌판을 시원스레 달렸다.쌀이 주식인 우리와 달리 유럽인들은 거의 매일 감자를 먹는다. 그걸 증명하듯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1~2시간 내내 감자밭인 경우도 있었다. 감자밭을 지나면 해바라기밭, 해바라기밭을 지나면 다시 광대한 감자밭이 반복되는 풍경. 녹음 짙은 그 풍경에 도시의 매연에 찌들었던 눈이 편안해졌다.오래된 열차와 낡은 철로 탓일까? 동유럽 기차는 버스보다 훨씬 느리다.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까지 버스로는 5시간이면 간다는데 기차는 그 2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신 가격은 절반으로 저렴했다. 시간은 많은데 돈이 넉넉하지 않은 배낭여행자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6명이 앉을 수 있게 만들어진 2등칸에 3~4명이 널찍하게 앉아 느긋하게 바깥 경치를 즐기며 베오그라드를 향했다.기차에 오르기 전 준비한 간식과 맥주 따위를 동석한 사람들과 나눠 먹고 마셨다.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대학생 커플과 점잖은 네덜란드 영감님이 같은 칸에 앉았다.그런데, 전직 역사교사였다는 네덜란드 할아버지가 기자가 국적을 말하기도 전에 “너 한국사람 아니냐?”고 먼저 묻는다.“맞는데, 어떻게 아셨어요?”“딱 봐도 유엔 사무총장인 미스터 반(기문)과 똑같이 생겼잖아.”“네? 뭐라고요?”맞은편에 앉은 오스트리아 커플까지 네덜란드 영감님의 견해에 수긍의 고개 끄덕임을 보였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은 1944년생으로 일흔이 넘은 노인이다. 당시 기자는 40대 초반. 아버지뻘인 반기문과 똑같이 생겼다니... 세계적인 유명인과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쁜 뜻에서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의 입장에선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표정관리가 힘들었다.우리가 서양인 얼굴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인식하는 게 어려울 때가 있는 것처럼, 서양인 역시 동양인의 안면 특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을까?이건 그래도 약과다. 세르비아 북부도시 노비사드(Novi Sad)에선 생김새와 관련해 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도나우강 따라 `예쁜 도시` 노비사드를 산책하다 독특한 시가지 형태와 거리에 즐비한 소(牛) 조형물이 인상적인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선 사흘을 묵었다.그곳에서의 추억담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던 노비사드 여행담부터 시작하려 한다.노비사드는 베오그라드에서 북쪽으로 30km 가량 떨어진 도시. 깨끗하게 정돈된 시가지와 도심 외곽을 흐르는 도나우강(江)이 인상적이었다.도착하자마자 기자를 반긴 건 노비사드 전역에 울울창창하게 들어선 매력적인 녹지. 강변은 물론 주택가까지 그 수령(樹齡)을 짐작키 힘든 커다란 나무가 가득했다. 산책하기 좋은 도시였다.1990년대 후반. 경기도 과천시에서 잠시 살아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녹지비율이 높아 쾌적하다는 지역.하지만, 노비사드는 과천 정도가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짙푸른 녹색의 허파처럼 느껴졌다. 평소에는 걸어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사흘 내내 나무 아래와 도나우 강변을 느리게 서성댔다.베오그라드를 제외하면 세르비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라는 노비사드. 하지만, 느낌상으론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한국의 시골마을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교통량이 적고, 대기오염이 덜해서였을 것이다.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였지만, 무지막지하게 큰 나무그늘에 앉아 물놀이 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노라면 더위가 저만치 물러갔다.강변을 따라 설치된 조각 작품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한강유원지에 지어진 것처럼 유람선 형태로 꾸민 강변 레스토랑에선 맥주도 한잔 마시고.숙소인 `소바 호스텔` 주인아저씨의 친절과 박학다식함은 여행자를 편안하고 재밌게 해줬다.그런데, 이 아저씨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세르비아는…동남부유럽 발칸반도 중앙에 위치한 국가다.20세기 초반 남부슬라브계 다민족국가인 베오그라드왕국의 일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의 한 지역이 된다.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된 후에는 세르비아 공화국(Republic of Serbia)이 됐다.동쪽으로는 루마니아, 북쪽으로는 헝가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크로아티아와 몬테네그로는 서쪽에 위치한다.남쪽 국경은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에 접해있다.공용어는 세르비아어. 면적은 7만7천474㎢다.인구는 약 720만 명. 북부는 대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중부는 대륙성기후와 지중해성기후가 동시에 나타난다. 내륙국이라 인접한 바다는 없다.세르비아 정교(84%)를 믿는 이들이 다수고, 소수의 가톨릭신자(5%)와 무슬림(3%)도 존재한다.바로 이 `종교적 다름` 때문에 불과 20여 년 전 참혹한 학살과 끔찍한 내전이 발생하기도 했다.이용되는 화폐는 디나르(Dinar). 1디나르는 한국 돈 약 10원이다. 간단한 생활용품과 식사비용은 한국에 비하면 저렴한 편.샌드위치와 주스를 점심으로 먹는다면 4~5천 원 정도로 해결이 가능하다. 포도주 한잔을 곁들인 저녁식사도 2만 원이면 즐길 수 있다.수도는 베오그라드(Beograd). 세르비아인(82.9%)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적은 수의 헝가리인(3.8%)과 보스니아인(1.8%)이 함께 생활한다.다른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거리에선 집시(Gipsy)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세르비아인의 평균수명은 73세.앞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1998년 코소보 자치주에서 세르비아 정부군이 무슬림인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코소보 사태`가 일어나 국제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다.이 사태를 계기로 미국과 몇몇 강대국들이 알바니아계의 독립을 지지했고, 코소보는 2008년 2월 분리·독립선언을 했다.학살과 내전을 겪었다는 어두운 과거 때문에 베오그라드와 노비사드 등 세르비아 도시를 돌아다닐 때 지레 겁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하지만, 굳이 어깨 움츠리고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다.기자가 만난 대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은 쾌활하고 `쿨`했다. 도움을 청하는 관광객이나 여행자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해를 끼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17-01-20

1개월의 여름휴가, 우리에겐 꿈일 뿐인가?

비엔나와 잘츠부르크를 포함해 오스트리아의 몇몇 관광지를 여행했을 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사람들의 여유와 느긋함이었다. 빡빡한 일상을 사는 도시인들이나 상대적으로 느슨한 생활을 하는 시골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는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오스트리아인들의 얼굴에는 느긋한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그런 편안한 웃음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당연한 이야기지만 오스트리아의 노동자와 자영업자, 공무원과 관광업 종사자는 여느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한다. 비엔나를 오가는 트램(tram·노면전차)을 아침 일찍 타보면 양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사무직 노동자부터 편안해 보이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까지를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웃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은 자신과 식구의 생계를 위해 혹은, 사회적 자아실현을 위해 직장에 출근해 퇴근 때까지 부지런히 일한다. 통상 아침 8~9시쯤 일을 시작해 저녁 5~6시면 퇴근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일상은 한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그러나, 한 가지는 많이 다르다. 그들은 야근이나 잔업, 특근이나 철야근무라는 단어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런 형태의 작업을 수행하는 오스트리아 노동자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들은 퇴근시간이 되면 직장 상사나 동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집으로 향한다. 평일 저녁과 휴일 대부분의 시간을 식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 정승(政丞)처럼 일하고 정승처럼 쉬는 사람들출근 때와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퇴근한 오스트리아인들은 노동 후에 주어지는 평화로운 여유 속에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극장을 찾거나, 느긋하게 거실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을 감상한다.절대다수의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은 저녁 6시 이후엔 일하지 않는다. 그건 조그만 상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처럼 24시간 문을 닫지 않는 편의점과 새벽 2~3까지 영업하는 식당은 비엔나에 없다.담배 없이는 살 수 없는 흡연자라면 해가 지기 전에 여분의 담배를 넉넉하게 사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밤늦도록 이곳저곳으로 담배를 찾아다녀야 하는 낭패를 맛볼 수도 있다. 왜냐? 비엔나 어느 거리에도 저녁 6시 이후 문을 열어두는 담배 가게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농담이나 거짓말 같겠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기자가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하고.일과 동시에 휴식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 그런 풍토를 오랜 역사 속에서 `사회적 약속`처럼 확고하게 만들어놓은 그들이 부러웠다.비엔나의 자영업자들은 더위가 닥쳐 일하기 힘든 여름이 오면 “고객 여러분, 가족과 휴가를 떠납니다. 한 달 후에 뵙겠습니다”라는 간단한 메시지를 가게 문에 내걸고 1개월을 쉰다. 한국인의 입장과 상황에서 보자면 터무니없이 과도한 여름휴가지만, 이를 당연시하는 사회적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오스트리아에선 누구도 긴 여름휴가를 문제 삼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즐거운 정승`처럼 일하고 `행복한 정승`처럼 쉴 줄 안다. 사회적 약속으로 굳어진 “일보다 가치우위에 있는 인간적인 삶”이란 명제가 자연스레 작동하는 사회. 비엔나와 잘츠부르크 곳곳에 산재한 예술품과 아름다운 정원, 미려한 건축물보다 바로 이런 사실이 더 감동적이었다.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이 글은 “한국은 오스트리아보다, 한국의 도시는 비엔나와 잘츠부르크보다 못하다”는 걸 알려주려고 쓰는 게 아니다.한국 도시에 옛날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지 못한 건 석조건물이 대다수인 비엔나와 달리 나무와 종이가 집을 만드는 주재료였던 탓일 것이다. 그것들은 불에 약한 소재고, 한국은 수백 년에 걸쳐 전쟁의 화마(火魔)를 수십, 수백 차례 겪었던 나라다. 그렇지만, 타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조건물은 비엔나의 어떤 건물 못지않게 근사하다. ▲`긴 휴가`가 자연스러운 사회적 분위기 형성돼야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즐기는 `1개월의 여름휴가`도 그렇다. 한국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집중된 정책으로 압축 성장을 이룬 케이스의 국가다.우리들 의식 속엔 여전히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 안락한 노후를 준비하자”는 성장시대의 슬로건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게다가 국가가 국민의 노년을 보장해주는 시스템도 아직은 미약한 수준이다. 젊음이 사라진 후 다가올 노년을 생각해서라도 휴식보다는 일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살아온 것이다. 한국이 지나온 역사와 현재의 상황은 오스트리아 역사·현실과는 분명히 다른 것.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부러움까지 감출 필요는 없을 듯하다.새파란 하늘에서 금빛 햇살이 쏟아지는 깨끗한 도시 비엔나. 근사하게 축조된 국회의사당 분수 앞에서 연인과 밀어(蜜語)를 속삭이던 금발머리 여대생과 며칠 연속해서 담배를 사러가며 친해진 구멍가게 아저씨의 노래하는 듯한 독일어 발음 “당케 쉔~”이 아직도 가끔 떠오른다.얼굴 어디에서도 그늘을 찾아볼 수 없는 비엔나 사람들의 환한 미소. 그 청량한 웃음을 떠올릴 때면 인간의 삶 속에서 일과 휴식의 적절한 배분을 효과적으로 이뤄낸 그들의 여유와 느긋함이 내심 부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그런데 여기서 이어지는 뜬금없는 궁금증 하나.오늘날 우리가 오스트리아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일하면서도 턱없이 짧은 휴가밖에 누리지 못하는 건 고려 왕조나 조선 왕조가 합스부르크 왕가보다 무능했기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비엔나를 즐기는 색다른 방법재론의 여지없다. 비엔나는 `미술관`과 `궁전`의 도시다. 서유럽과 동유럽을 잇는 위치적 특성상 한국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찾는다. 거기서 독일이나 이탈리아 혹은, 헝가리나 체코로 가는 기차에 올라 유럽일주를 즐기는 것.다음 여행지로 떠나기 위해 비엔나에 1~2일쯤 머무르는 관광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활짝 핀 장미와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반기는 벨베데레 궁전을 찾거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과서에서 봐온 그림을 눈앞에서 직접 만나기 위해 미술관에 간다.하지만, 이것들은 너무나 틀에 박힌 관광코스가 아닐까. 여행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낯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것.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래 방식으로 여행하며 비엔나를 즐겨보길 권한다.◆트램을 타고 종점까지 가보기비엔나는 시내 중심가는 물론 가까운 교외까지 트램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한국의 대도시와 달리 오스트리아의 트램은 땅 밑이 아닌 `땅 위`를 달린다. 굳이 비싼 투어버스나 택시에 타지 않고도 비엔나의 풍경을 고스란히 눈에 담을 수 있다.비엔나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트램을 타고 1시간쯤 무작정 달려보자. 종점에서 만나게 되는 시원스런 강변 풍경이 당신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새하얀 구름이 머리 위에 떠있는 전원 속을 산책하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다양한 동서양 요리 맛보기지구 구석구석까지 진출해있는 중국음식, 어느 나라에서나 고급 요리로 인정받는 일본음식, 고기와 생선은 물론 채소까지 불에 구워먹는 터키음식, 까다로운 절차에 따라 격식을 갖춰 먹는 프랑스음식, 동양인들에겐 생소한 아랍음식, 여기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갈비탕과 김치찌개까지 두루 맛볼 수 있는 곳이 비엔나다.시간 여유가 있는 여행자라면 골목마다 한두 군데는 있는 `비엔나 맛집`을 찾아다녀보는 것도 유쾌한 경험이 될 것이다.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눈과 입을 동시에 즐겁게 하는 요리와 만나는 즐거운 `보물찾기`를 해보자.사진제공/안찬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1-06

도시 자체가 `예술품`… 비엔나를 만나다

`놀라움`이라는 감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만났을 때 온다. 그것이 예술작품일 경우 이 놀라움은 경악 혹은, 정신적 공황상태로까지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걸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스탕달 신드롬이 반 고흐(1853~1890)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그림이 아닌 겨우 `도시의 건축물`을 보고도 느껴질 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몇 해 전이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머물던 일주일은 행복했다. 그해 5월 터키여행 중 만난 친절한 선배는 고맙게도 자신이 살고 있는 비엔나의 조그마한 아파트를 아무런 대가 없이 통째로 빌려주었다.동유럽을 여행 중이던 카이스트 여학생 3명과 기자는 그곳에서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요리해 먹고, 편안한 잠을 잤다. 한국어로 실컷 수다를 떨며 여행자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오스트리아와 비엔나는 클래식 음악의 거장 모차르트와 하이든, 슈베르트가 태어난 나라이며, 수백 년 동안 사랑받아온 그림인 `키스`의 구스타프 클림트, `추기경과 수녀`의 에곤 실레가 활동했던 도시다.세계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음악가과 미술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거리에 침을 뱉거나 전철에서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도시.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매너는 기자가 여행해본 유럽 국가 중 최고였다.비엔나에서의 일주일. 느지막이 아침을 챙겨 먹은 후 교외선 전철을 타고 나가 시 외곽 강변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거나, 시내 중심가 노천카페에서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길거리 연주회와 다채로운 공연에 무심한 눈길을 던지며 유유자적했다.사실 사람의 나이가 40세쯤 되면 어지간한 것에는 감동하기가 힘든 법이다. `미술관의 도시`라 불리는 비엔나이니 왜 그림을 보러 가지 않았겠는가.그러나, 미술에 관해선 문외한인 탓일까? 루벤스나 클림트의 그림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춘 공간은 미술관인 아닌 비엔나의 `거리`였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도시 풍경“한국의 도시는 콘크리트와 통유리로 축조된 살벌한 공간”이라고 말한다면 누군가 펄쩍 뛰며 이를 반박할까?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가의 주상복합아파트와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수십 층 마천루(摩天樓)를 보자. 세칭 `잘 먹고 잘 사는` 몇몇 부촌을 벗어나면 콘크리트와 통유리는 가난한 자들의 눈물로 대체된다.한국에는 판자로 이어붙인 철거 직전의 빈민촌들이 불과 얼마 전까지 존재했다.바로 그런 도시인 서울에서 20년 가까이 살아본 기자는 부러웠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예술적인` 건축물이.피 뜨거운 열아홉 살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1895~1918)가 망하게 만든 합스부르크 왕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거기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계 제1차대전`을 불렀고, 패배한 합스부르크가는 대(代)가 끊겼다. 이건 역사책을 읽으면 다 나오는 이야기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고.오스트리아를 여행한 그해 여름. 바로 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숨결이 곳곳에 묻어있는 거리와 궁전을 부지런히 쏘다녔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는 열패감과 부러움에 시달렸다. 모두가 알고 있고 그렇기에 비엔나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문하게 되는 슈테판성당과 국립 오페라하우스, 쇤부른 궁전과 벨베데레 궁전만이 아니었다.비엔나 도심에 있는 시청 건물은 물론 국회의사당까지 멋들어지기 짝이 없었다. 의사당 분수에 석회암을 깎아 만든 조각상은 그 표정 하나하나가 진짜 사람처럼 섬세했고, 지붕 위의 조각된 마차는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했다.앞서 언급한 `스탕당 신드롬`과 유사한 감정이 기자를 흔들었다. 시청사의 첨탑 역시 고딕미술의 절정을 과시하고, 심지어 쓰레기소각장까지 모던한 예술품 같았다.▲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는 비엔나 사람들살풍경한 콘크리트 더미에서 살아온 `한국 촌놈`은 맥이 탁 풀렸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유명한 두 여자,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쇤브른 궁전의 정원에 이르러선 부러움을 넘어 감동까지 먹었다.사실 기자는 오래 전 지어진 성당이나 궁전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그걸 짓기 위해 흘려야했던 핍박받는 이들의 땀과 눈물을 먼저 떠올리는 `멋없는 인간`이다. 천성이 낭만주의자보다는 설익은 민중주의자에 가깝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심지어 프랑스 왕과 결혼해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온 매춘부”라 조롱받았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불쌍하다고 느꼈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대체 무슨 감정의 뜬금없는 기복이었을까싶다.비엔나에 머물던 그때. 주말 밤엔 시청사 벽면에 거대한 스크린을 걸고 상영하는 야외 오페라를 관람했다. 왜 오스트리아에서 우리가 `클래식`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음악이 탄생했는지 짐작이 갔다.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자신의 사연을 떠드는 이 하나 없이 모두가 숨죽인 채 벽면에 투사되는 오페라에 집중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관이었다.비단 비엔나의 외양만은 아니었다. 도시 속에 담긴 내용은 더 근사했다. 필요 없는 쓰레기를 태우는 공간조차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만든 비엔나 사람들은 오후 6시만 되면 슈퍼마켓과 담배 가게, 채소 가게, 공장과 사무실을 모조리 닫고 가족들과의 시간을 즐긴다.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다.오스트리아는…유럽 대륙 중심에 위치한 내륙국이다.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public of Austria). 13세기 말부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기 시작했다.1815년 독일연방,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1918년 공화국을 거쳐 1938년에는 독일에 합방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5년 구 소련의 점령을 거쳐 1955년에 주권을 회복한 나라다.북측으로는 독일·체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 헝가리·슬로바키아와 접경이다. 남쪽엔 슬로베니아·이탈리아, 서쪽에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이 위치하고 있다.`영세중립국`이며 헌법에 영속적 중립성을 명시하고 있다. 면적은 8만3천871㎢이고, 내륙국의 특성상 어느 곳을 가도 바다는 볼 수 없다. 수도는 비엔나. 인구는 850만 명으로 180만 명 가량이 비엔나에서 생활한다. 오스트리아인(91.1%)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유고슬라비아인(4%)과 소수의 터키인(1.6%), 동양인 등이 함께 거주한다.평균수명은 79세. 공용어로는 독일어를 사용하며 70% 이상의 국민이 가톨릭교도다. 소수의 무슬림과 개신교도도 존재한다.사용하는 화폐는 유로(Euro). 1유로는 한국 돈 약 1천260원(2106년 12월 기준)이다.다수의 유럽 사람들이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인들의 준법정신과 공동체의식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높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른은 물론, 아이들도 보기 힘들다.한국과는 1963년 외교관계를 맺었다. 1970년 사증면제 협정이 체결됐고, 1971년에는 무역 협정이, 1979년에는 항공 협정이 체결됐다.한국의 대 오스트리아 수출액은 8억8천200만 달러(2015년 기준). 한국은 오스트리아에 반도체와 휴대전화 등을 수출하고, 자동차부품과 재생섬유 등을 오스트리아로부터 수입한다.오스트리아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깨끗하게 잘 관리된 도시환경을 갖춰 많은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나라다.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서구식 매너가 몸에 배인 국민들이 있기에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큰 어려움 없이 도시와 시골 곳곳을 돌아볼 수 있다.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거나, 맛있는 현지 음식이 궁금하다면 고민하지 말고 오스트리아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환한 웃음으로 여행자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려 노력할 것이다.사진제공/안찬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2-30

다시, 인도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직장생활이 7년을 넘어서던 시기. 달디 단 오아시스를 만났다. 1개월의 휴가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황금보다 소중한 그 한 달을 어디서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다. 그 고심의 시간 끝에 인도가 기자에게로 왔다.새카만 그들의 순박한 미소그리고 무조건적인 친절첫 대면때의 충격·공포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델리로 들어가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타지마할을 보고, 인간 존재의 무상함과 삶의 덧없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는 바라나시에 갈 수도 있었지만, 태생적으로 `물`을 좋아하는 기자는 인도 북부의 역사와 실존자각 대신 남인도의 바다를 택했다. 인도의 `경제수도`로 불리는 뭄바이로 들어가 역삼각형 대륙의 아래쪽 꼭짓점인 트리밴드럼까지 서남해안 바다를 따라 1천600km를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혼자서 떠나는 먼 여행. 설레는 마음에 2~3주 전부터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배낭여행자의 바이블`로 이야기되는 `론리 플래닛`을 포함, 관련 책을 여러 권 구입해 인도의 역사와 풍습, 지리와 사람들에 관해 진지하게 공부하기도 했다. 무엇 하나에 그토록 집착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이후 처음이었다.마침내 AI(인도항공) 여객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하던 날. 기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비록 생면부지의 땅이지만 나름 철저한 사전 조사와 학습을 통해 `인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홍콩과 델리를 경유한 비행기가 뭄바이국제공항에 착륙하자마자 무참하게 깨어졌다. 기자의 믿음은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공항에서 숙소를 향하는 에어컨 없는 고물 택시. 그 안에서 내다본 뭄바이의 새벽 풍경은 살벌했다. 수를 헤아리기 힘든 사람들이 이불도 없이 아스팔트 위에 시체처럼 누워 자고 있었다.동양에서 가장 거대한 슬럼(slum)이 뭄바이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책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실상 앞에서 느낀 놀라움과 충격은 독서를 통한 이성적 자각과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어디선가 끊임없이 풍겨오는 생선 썩는 냄새와 인도 특유의 자극적인 향신료가 비위 약한 기자를 괴롭혔다. 1~2km 이상 이어진 슬럼의 풍경들. 차 소리에 잠이 깬 여자 하나가 새까만 얼굴에 유난히 큰 눈을 빛내며 달리는 택시를 말없이 바라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충격과 공포`였다.평소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고 믿었는데, 이건 상상 밖이었고 예상을 뛰어넘었다. 몇몇 여성 여행자들이 뭄바이 혹은, 델리의 풍경에 기가 질려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다음날로 귀국 비행기를 탔다는 풍문이 과장된 것이 아니란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충격과 공포는 오래 가지 않았다. 가난한 그들의 순박한 미소와 무조건적인 친절은 인도 첫날의 놀라움과 두려움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그 미소와 친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그리고, 구체적으로 발현되고 있었다.미리 말하자면, 기자가 인도에 머문 27일의 시간 동안 한 번도 사소할망정 위험에 처한 적이 없었고, 인도 사람들에게 상처받거나 실망한 때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라서는 `가난한 사람도 아름다울 수 있는` 인도에 더 머물고 싶어 이런 메모를 끼적였다. “나, 언젠가는 다시 여기로 돌아와 바르칼라 해변의 야자수 아래서 수채화처럼 늙어 가리라.”잠시잠깐 머문 공간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까지 품게 한 인도. 어떤 감동이 기자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답은 쉽게 나왔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 때문이었다.가끔 서울역엘 간다. 거기서 만나는 걸인들. 담배 한 개비와 푼돈을 요구하는 그들의 얼굴은 열이면 열 모두 일그러져 있다. 백 번 이해한다.그 상황에서 누가 웃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에서 찡그리고 사는 이들은 걸인만이 아니다.아침 출근길. 버스정류소에서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회사원과 공무원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그럴 것이다. 이 찡그린 표정은 기사가 운전하는 자가용 뒷좌석에 몸을 기댄 고위관료나 기업 대표도 비슷하다. 이러니 “한국엔 행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극단적인 농담까지 나오는 게 아닐까. 인도를 여행하며 적지 않은 돈을 `박시시`(적선) 했다. 손발이 잘려나간 불구의 중년사내에서부터 젖먹이를 안고 때 묻은 손을 내밀던 10대 미혼모, 거기에 도저히 나이를 예측할 수 없는 주름진 얼굴의 노인에게까지.그런데 놀라웠다. 그들 모두가 구걸을 하면서도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한 시인의 레토릭(수사)을 빌리자면 `얼굴 가득한 높고도 커다란 미소`였다. 인구의 70%가 하루에 1천원 이하의 돈으로 겨우 연명한다는 가난한 나라에서 만난 환한 웃음.특히 아이들이 그랬다. 주행 중인 택시나 오토릭샤를 따라 한참을 달려와 헐떡이면서도 기자가 내미는 5루피 동전 혹은, 20루피 지폐를 받으며 천사처럼 웃었다. 그 웃음은 잔돈이 없어 적선 요구에 응하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였다.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한번 구걸을 시작한 아이는 죽을 때까지 걸인으로 살게 된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잔돈푼으로 자신의 휴머니즘을 과시하는 여행객들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고.그러나 생각해 보라. `가난한 어린 천사`가 세상사 때 묻은 우리에게 한 끼의 밥을 원하며 웃고 있는데, 그걸 그냥 내치는 게 옳은 일인가? 눈앞에서 일어나는 비극은 못 본 체 하면서, 세계평화와 인간존엄만을 강변하는 사람들을 기자는 믿지 않는다.분명 기자는 다시 인도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하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금액을 `박시시` 할 것이다. 왜냐, 인도 아이들이 가르쳐준 `웃음의 힘`에 비하면, 돈이란 건 정말이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니까.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한국 사람들, 돈이라면 벌벌 떤다. 아까워서 남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아까운 돈`은 그냥 두고, 돈 쓰지 않아도 만들 수 있는 웃음만이라도 나누고 살면 어떨까. 마음을 비우면 더욱 즐거워지는 인도여행한국인들에게 인도는 익숙하고 편한 여행지가 아니다.중국의 북경이나 상해 혹은, 일본의 동경처럼 3박4일 정도의 짧은 일정으로 훌쩍 다녀올 만큼 가깝지도 않고,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해변의 휴양지처럼 관광객을 위한 인프라가 좋은 것도 아닌 곳이 인도다.하지만, 인도는 시간을 들이고 불편을 감수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여행지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불교 유적들을 한 나라 안에서 모두 볼 수 있고, 무엇보다 이방인을 향한 따스한 미소를 확인할 수 있는 인도.게다가 저렴한 물가는 여행자들에게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드넓은 국토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계절마다 펼쳐지는 화려하고 이색적인 축제. 이처럼 매력 가득한 나라 인도를 `행복하게` 여행하기 위해서는 아래 2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신비주의의 안경`을 벗어야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한없이 신성한 나라` 또는, `해탈한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한 곳`이라고 착각하고 있다.이런 선입견은 영화나 소설, 여행에세이 등에서 보거나 읽은 것 모두를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생긴다.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도에도 비양심적인 도둑과 사기꾼이 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도 지천이다.`성자(聖者)의 나라 인도`라는 환상을 깨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인도여행은 시작된다. 편견과 선입견을 가진다면 그 나라의 깊숙한 저변과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짜증이 나더라도 웃음을무더위와 비위생적인 환경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인도 일부 지역의 한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린다. 한국에선 경험하기 힘든 더위다.거기에 허름한 식당의 접시와 컵 위로는 파리가 몰려다니기도 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라붙어 지긋지긋한 호객 행위를 하는 장사치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여행을 하다보면 짜증나는 상황과 마주칠 수도 있다.이럴 경우엔 편안한 마음으로 웃어버리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여행이란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이고, 집 밖이 집처럼 편안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2-23

외로운 `우티의 밤`, 시인 기형도를 떠올리다

뱅갈로르 시외버스터미널은 복잡하고 컸다. 풍채가 경찰청장급인 잘생긴 제복의 사내에게 `인도의 알프스`로 불리는 우티(Ooty)행 버스티켓을 파는 곳과 출발 장소를 물었다. 대나무 막대기를 든 그가 점잖게 고갯짓으로 기자의 의문에 답해준다. 그 폼 역시 의젓하기가 청장급이다. “곧 승진하길 빌게요”라는 농담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다행히 매표소는 멀지 않았다.우티까지의 소요시간을 물으니 “10시간 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또 그 긴 시간을 낡은 버스에서 시달려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는 넓고도 크다.뱅갈로르를 출발한 버스가 털털거리며 우티를 향했다. 대여섯 시간을 달리니 높다란 산길로 접어든 것인지 눈에 띄는 나무부터가 흔해빠진 인도 야자수가 아닌 끝이 뾰족한 침엽수다. 침엽수는 추운 지방에서 자란다.선득선득한 기운이 느껴지는 풍경.섭씨 40도를 넘는 인도의 불볕더위를 열흘 이상 경험한 터라 갑자기 닥쳐온 추위가 싫지 않았다. 한국에선 정말 싫어한 게 찬바람이었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이처럼 조변석개(朝變夕改)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까? 졸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휴게소에 도착한 것인지 승객들이 우르르 내리고 있다.덩달아 하차해 인도 담배 골드 프레이크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조도가 낮은 형광등 불빛만이 두어 개 덩그러니 켜져 있는 황량한 휴게소. 뭘 먹을 생각도 별로 없어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저만치서 귀엽게 생긴 꼬마 남매가 걸어온다. 오빠는 열 살쯤, 여동생은 예닐곱 살이나 됐을까. 목판에 끈을 묶어 목에 건 오빠가 “담배를 사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목판엔 인도에서 생산되는 몇 종류의 담배와 초콜릿 따위가 담겨 있다. 그걸 왜 사지 않겠는가. “5갑만 다오”라고 말하니, 눈이 동그래진다. 반갑다는 것이겠지. 웃으며 달라는 대로 값을 지불하니, 키가 기자의 배꼽에도 이르지 못하는 여동생이 무거워 보이는 보온병을 들고 와 “짜이(홍차에 설탕과 우유를 섞은 음료)도 드세요”라고 권한다. 그것 또한 왜 마시지 않겠는가. 오빠에게처럼 “5잔만 다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혼자선 그만큼을 마실 수가 없다. 대신 가격을 물어보지 않고 100루피(약 2천원)를 줬다. 그 푼돈을 꼭 쥐고는 저 멀리 뒤편에 선 엄마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 아이. 꼬마숙녀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기자의 마음도 환해졌다. 둘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고는 “여기 사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 기자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남은 생에서 다시 이곳을 찾을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 그러나, 언젠가는 꼭 `여기`로 돌아와 이 아이들이 건강하고, 착하게 커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망만은 감출 수 없었다.기자와 남매가 이야기 나누는 걸 지켜보던 백인 할아버지 하나가 “너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자기는 호주에서 10년 전에 인도로 왔단다. 그리고, 열 몇 살이 적은 인도여자를 만났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했다.“10시간 비행기 타고 저 멀리 한국에서 왔습니다.”“어디로 가냐? 우티냐?”“네. 거기로 갑니다.”“어디 묵을 거냐?”“가서 알아보면 되겠지요. 설마 나 하나 잘 곳 없겠습니까.”“너, 재밌는 청년이다. 연락처 적어줄 테니, 내일 밥 먹자.”은자(隱者)들에게 어울리는 도시. 우티에 도착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야트막한 산 아래 지어진 알록달록한 예쁜 집들, 거기에 차갑고 코끝 매운 공기. 뿐이랴, 사는 곳이 달라 기질도 다른 것인지 더운 지방 사람들처럼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어 호객을 하지도 않는다. 사람을 못 본 채 그냥 내버려두는 것도 가끔은 고마운 일이다. 인도에서라면.기자에게 호의를 보인 호주 영감님이 “가는 길이니 함께 타자”고 오토릭샤를 잡으며 권한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곤 옆자리에 앉았다. 5분 정도 달리니 호텔과 게스트하우스가 밀집한 지역이 나타났다. 영감님이 손가락으로 오른쪽 오르막을 가리키며 “저기가 괜찮은 호텔”이란다.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내일 전화 드린다며 작별을 고했다. 갑자기 내려간 기온에 어깨를 움츠리며 숙소로 향했다. 길게 흥정할 것도 없었다. 더운 물이 나오는 싱글룸 800루피. “지금은 우티의 최고 성수기”라며 할인은 안 된단다. 다른데 가봐야 형편은 비슷할 것이란 부연설명까지 덧붙인다. “그럽시다. 밥을 안 먹었는데, 아직 식당이 영업을 하나요”라고 물으니, 한단다. 잘 됐다.마음 같아서는 뜨끈한 짬뽕국물에 소주 한잔이 간절한데, 여기는 만리타향 인도.그냥 뜨거운 물에 미지근한 볶음밥을 먹으며, 추운 몸도 녹일 겸 위스키를 두어 잔 마셨다.방으로 올라와 창문을 열었다.맵싸한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간다. 그 차갑기가 한국의 11월 날씨 같다.`아, 이래서 영국 사람들이 여기를 여름 별장도시로 만든 거구나`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 호텔이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저 멀리 우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깜빡이는 작은 불빛 몇 개를 제외하면 캄캄절벽 같은 어둠이다.농밀하고 너무나 명백한. 하지만, 그 색채가 검은색이라기보다는 푸르스름한 빛깔에 가깝다.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 은둔자가 된 시인 기형도(1960~1989)가 그랬던가. “밤은 검지 않고 푸르다”고. 그런 밤이었으니 `센티멘털`과는 거리가 먼 둔감한 기자도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상점에 가서 맥주라도 몇 병 더 사올까? 한 두시간 연착은 예사… 검은 매연 내뿜는 낡은 버스… `인도의 교통수단`KTX를 타면 수도 서울에서 항구도시 부산까지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한국. 나라가 좁기도 하지만, 최첨단을 달리는 교통수단으로 인해 한국인들은 `편한 이동`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인도에선 시속 300km에 육박하는 기차나 잘 깔린 아스팔트 위를 고속으로 질주하는 안락한 버스를 보기 어렵다. 하지만, 낡고 느린 기차의 식당칸에서 바깥 풍경을 보며 느긋하게 맥주 한잔 마시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시골길을 덜컹거리며 달려보는 것은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이다.▲시시때때로 연착하는 기차`기다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인도에서의 기차여행이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1~2시간 연착은 예사고, 어떤 경우엔 예정보다 10시간 이상 늦게 도착하는 기차도 있다.재미있는 것은 이런 상황에 익숙해서인지 `연착하는 기차` 때문에 화를 내는 인도사람은 거의 없다. 10분만 늦어도 발을 동동 구르는 성질 급한 한국인들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차는 느리고, 나라는 넓기에 40~50시간 이상을 기차로 여행하는 경우도 흔하다. 때문에 인도 기차의 거의 대부분은 침대칸을 갖추고 있다. ▲ 매연을 뿜어내는 낡은 버스 “저런 버스가 아직 폐차되지 않았다니…” 인도에 처음 도착하는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혼잣말을 하게 된다.낡은 엔진 탓에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것은 물론, 좌석의 고정장치가 망가져 휘청대기 십상인 인도의 시골마을 버스들.어떤 버스는 아예 창문조차 없다.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가끔은 좌석 아래로 닭이나 오리가 돌아다니기도 한다.인도에서 버스를 탈 때는 마음을 비우고 `편안한 승차감`에 대한 기대를 접는 게 좋다. 버스에서 만나는 인도 꼬마들의 환한 웃음이 그나마 여행자를 위로한다.▲ 국내선 비행기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인도의 기차나 버스에 비한다면 비행기는 고가의 교통수단이다.한국의 항공료와 비교해도 결코 싸지 않은 인도의 비행기 요금. 하지만, 일정을 짧게 계획하고 온 관광객이라면 장거리 이동은 비행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델리, 뭄바이, 콜카타 등의 대도시에서는 국제선은 물론, 인도 국내선 비행기도 운항한다. 한국처럼 환한 미소로 반겨주며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은 없지만, 시간을 절약해야 하는 여행자들에겐 반가운 교통수단이다.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2-16

인도 오토릭샤 기사가 데려다준 `클럽`에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떠도는 여행은 `익숙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부른다. 특히 음식이 그렇다. 입에 맞지 않는 걸 먹어야한다는 건 비극이다. 여행자는 이런 비극을 감수하면서까지 `새로운 것들`을 찾아가는 사람이다.인도에서 만나는 한국음식, 포장용 같은 냉면과 `튀김` 삼겹살머나먼 이국서 경험한 익숙한 맛에 소주까지… 최상의 맛 느껴 네댓 명의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코리안 레스토랑`을 찾긴 찾았다.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어중간한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다. 주인이라는 한국 여자는 아주 잠깐 얼굴이 보이더니 어디론가 가버렸고, 인도인 종업원들에게 냉면과 삼겹살 구이를 주문했다. 한국에서 수입된 팩소주도 있단다. 익숙한 그것들이 반가웠다.“자꾸 부르면 귀찮을 테니 소주는 아예 3팩쯤 가져다주세요.”주방과 홀이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이윽고 테이블에 음식이 차려졌다.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냉면은 한국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장제품을 이용해 만든 것 같고, 삼겹살은 철판 위에서 너무 오래 구워 `구이`가 아니라 `튀김` 수준이다. 포항이나 서울에서라면 이런 상차림이 반가울 리 없다. 허나, 그때는 상황이 달랐다. 조금 과장하자면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 그 익숙한 향기에 뱃속이 요동을 쳤다. 게다가 인도인 종업원 서너 명이 먹는 내내 웃으며 기자를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인상을 찡그리겠나. 비록 튜브에 든 겨자지만 듬뿍 치고, 면발에 식초도 뿌려 단번에 삼키듯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시원함,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인도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젓가락을 이용해 소주 안주로 먹는 삼겹살 `튀김`도 그런대로 고소하다. 맞다, 절에 가서 등심구이를 찾는 건 우스운 일이다. 인도에서 이 정도의 한국음식이라면 `A급`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인도인들이 즐겨먹는 탈리(thali·인도식 백반)보다 20배는 비싼 `한국식 점심`을 혼자서 먹었다. 기분 좋게 값을 치르고, 웃음으로 반겨준 종업원들에게 약간의 팁도 나눠준 후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식사 후엔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낮잠을 청했다. 낮술로 마신 소주가 과했던 것인지, 냉면과 삼겹살을 너무 먹은 포만감 탓인지 일어나니 이미 방 안이 캄캄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도시에서의 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어둠이 내린 뱅갈로르는 여타의 한국 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네온사인은 고사하고 환한 형광등조차 흔하지 않은 인도의 시골마을에서 일주일 정도를 머문 탓인지 번쩍이는 밤의 불빛들이 더없이 반가웠다. 달려오는 오토릭샤를 잡아타고 “물 좋은 나이트클럽으로 갑시다”라고 하니, “오케이! 노 프라블럼”이란다. 인도 사람들은 잘 모르거나 불가능한 부탁을 받아도 “몰라요” “안 돼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그런데, 그 릭샤왈라(오토릭샤 운전수)가 내려준 곳이 예상외로 너무 조용하다.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 입구를 드나드는 청춘남녀도 없다. 썰렁~ 그 자체다. 허나, 내친걸음이니 어쩔 것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여기가 나이트클럽 맞냐”고 물었다. 그런데... 거긴 회원제로 운영되는 인도 부자들을 위한 고급 사교클럽이었다. 릭샤왈라는 “클럽”이라는 단어만 알아듣고는 여기로 데려다준 것이다. 대략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기자의 초라한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건장한 경비원 2명이 콧수염을 들썩이며 웃었다. 어쩌랴. 기자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그 고급 사교클럽 앞에서 다시 오토릭샤를 기다렸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일과 스웨덴에서 생산된 고급 승용차들이 건물 옆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맞다. 한국이나 인도나 아니, 세상 어느 곳이나 부자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 가난을 눈앞에서 본다는 건 불편한 일이니까. 가진 자들이 보기에 못가진 자들이란 `게으름뱅이`에 불과할 테고, 그런 이들과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격에 맞지 않다고 믿으며 살 테니까. 고상한 디자인으로 꾸며진 사교클럽 건물 앞에서 복잡한 심사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이트클럽이고, 록카페고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인도까지 와서 그런 걸 찾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워 보이기도 했고. 에라, 모르겠다. 어디 가서 올드 몽크(Old Monk·인도산 럼)에 맥주 섞어 폭탄주나 마시자. 단순한 술집이라면 머물고 있는 제국호텔 근처에도 많았다.왔던 길을 되짚어 눈에 띄는 아무 술집에나 들어갔다. 한국 생맥주집이랑 유사한 분위기다. 미국 가수의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조명은 어둡다. 그러면 어때. 남자 혼자 마시는데 분위기가 무슨 대수인가. 올드 몽크 한 병과 맥주 3병을 주문해 급하게 폭탄(?)을 제조했다.빨라서 좋은 건 비행기밖에 없는 모양이다. 홀로 급히 마신 폭탄주 대여섯 잔에 단숨에 취기가 올랐고,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나른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뒷머리 쪽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술 마시는 스타일이 독특해 보였는지 매니저가 테이블로 와서 “무슨 슬픈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아니. 한국 남자들은 기쁠 때도 이렇게 마셔”라고 응수했다. 술집 매니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았다. 외로워서였을 것이다.사회학자나 평화운동가도 아니면서 카스트제도의 불합리성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비인간성, 종교와 인종이 야기한 내전(內戰) 등등. 다음날 일어나면 기억하지도 못 할 거창한 이야기들을 시원찮은 영어실력으로 쉼 없이 떠들었다. 휘적휘적 손발을 내저으며 술집을 나온 게 몇 시였는지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저 깨어난 아침, 머리가 강철 해머로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는 것만 뚜렷이 떠오른다. 주독(酒毒)이야 시간 외에는 약이 없는 병. 숙취의 고통은 한국에서나 인도에서나 똑같았다.▲ 조용한 웃음과 달관의 태도로 기자를 놀라게 한 인도 노인.`인도 사람`을 읽는 3가지 키워드틀에 맞춰진 한국인의 시각과 관념으로 볼 때 인도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그들의 행위는 때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합리적이지 못하고, 예의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종교·문화적 특성 때문에 쓴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여행이란 `사람`을 만나는 일과 다름없다.아래 인도인들의 3가지 행동특성을 미리 알고 간다면 인도여행에서 겪어야 할 당혹스러움이 조금은 완화될 수도 있을 듯하다.▲ 시시때때로 떠올리는 미소즐거울 때는 물론이거니와 어색할 때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인도 사람들은 웃는다.그 웃음에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다.세상과 자신을 지척에 있는 존재가 아닌 멀고 먼 별개의 존재로 보는 시각. 이는 한국인과 인도인을 구별하는 잣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만원버스에서 발등을 밟혀도, 상대방이 다소간 실례되는 행동을 해도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너그러움이 인도 사람들에겐 있다.웃을 수 있다는 건 여유를 가졌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경제적으론 훨씬 더 부유한 한국인들에겐 왜 이 `여유`가 사라졌을까?▲ 삶에 대한 낙관인도의 조그만 산골마을에서 만난 칠순 노인에게 물었다. 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점상.그럼에도 눈동자에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담고 있었다.“할아버지,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돌아온 간명한 대답이 어지간한 철학자 못지않았다.“왜 힘들지 않겠어. 하지만, 부자라고 고통과 고민이 없겠어? 이게 신(神)이 내게 허락한 삶이라면 싫어도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인도인들은 큰 욕심이나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의도적으로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게 그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아닐지.▲ `카스트제도`에의 순응`인도의 경제수도`라고 불리는 뭄바이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브라만(Brahman·카스트제도의 최상위 계급)은 때 묻은 셔츠나 바지를 제 손으로 빨지 않는다고 했다. 당장 쌀을 살 돈이 없어 굶더라도 세탁물은 수드라(Sudra·카스트제도의 최하위계급)에게 맡긴다는 말도 덧붙였다.세탁소를 운영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도 수드라는 브라만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수천 년 이어져온 카스트제도의 엄혹함은 여전히 인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한국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불합리하더라도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인도의 현실이다.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2-09

인도에서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을까?

뱅갈로르로 가는 차는 속도를 높이며 밤길을 달렸다. 야간 여행자를 위한 좌석인 `슬리퍼 시트`인지라 목과 등도 편안하다. 에어컨 역시 속된 말로 빵빵하다. 다만, 하나 거슬리는 게 있다면 뒷좌석에 앉은 이탈리아 여자-인도 남자 커플. 잘생긴 외모의 릭샤왈라가 소개한영국 지배 역사가 보이는 城과의 만남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차에 타자마자 시작된 그들의 소곤거리는 밀어(蜜語)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계속됐다. 이탈리아 억양이 섞인 영어발음은 왜 그렇게 딱딱 끊어지며 잠을 청하는 기자의 귀를 괴롭히던지. 그러나, 어쩔 것인가. 사랑에 빠진 이들은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너나없이 누구나 그런 청춘의 시절을 겪고 성장한다.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속삭임 탓에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을 정신없이 버스에서 잤던 걸까. 눈을 뜨니 사위가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뱅갈로르가 멀지 않았는지 저 멀리 직각으로 깎아 세운 현대식 건물이 보이는 듯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10분쯤 달린 버스는 도로변에 멈춰 섰고, 승객들이 저마다의 짐을 챙겨 내리기 시작한다. “여기가 뱅갈로르 맞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렇단다. 오토릭샤 몇 대가 정차한 버스 옆에 대기해있고, 릭샤왈라들은 호객에 여념이 없다. 어젯밤 차 안에서 펼쳐본 여행안내서 `론리 플래닛`에 의하면 `24시간 체크아웃`이 가능한 `제국호텔`(Empire Hotel)이 괜찮단다.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니지만, 어차피 기자가 식민통치를 당연시하는 `왕정복고주의자`도 아니고, 호텔 명칭 따위가 무슨 문제가 될까. 다른 이들과 달리 손님을 모으는데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릭샤왈라 한 사람에게 제국호텔을 아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간명하고 시원스럽다.“안다. 타라.”그런데, 이 릭샤왈라. 너무 잘 생겼다. 키가 족히 190cm는 넘어 보이고, 자연스런 웨이브의 머리칼이 만화책에 등장하는 미소년의 그것처럼 찰랑거린다.지금 당장 매력적인 영국첩보원 `007 제임스` 본드 역할로 캐스팅돼도 전혀 꿀리지 않을 영화배우급 외모다. “당신, 너무 잘 생겼네요”라는 칭찬에 그가 운전하다 말고 기자를 돌아보며 씨익 웃는다. 이것 봐라, 웃음도 백만 달러짜리다. 잠시 달리더니 그 미남 릭샤왈라가 “여기서 사진 한 장 찍는 게 어때요?”라고 권한다. 그가 정차한 곳엔 유럽풍의 근사한 성(城)이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다. 한 가운데 선명하게 펄럭이는 인도 국기가 아니라면, 영국 왕족들이 주말을 보낸다는 `윈저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멋들어진 건축물이다.숙소로 정한 제국호텔에, 윈저궁을 벤치마킹한 듯한 성까지...아, 맞다. 뱅갈로르를 포함해 인도는 오랫동안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식민지풍의 건물과 왕조시대의 향수를 부르는 호텔 이름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제국주의가 제3세계에 끼친 악영향이 어떠한 것인지를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기자의 심사가 복잡해졌다. 십자가와 성병(性病)을 앞세운 유럽인들의 침탈에 학살당하는 아시아와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 벽안(碧眼)의 이방인들에 대항해 제 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피 흘린 지도자들인 호치민과 호세 리잘, 아우구스토 산디노 등의 이름이 연이어 떠올랐다. “왜 나는 세상사를 편하게 보고 해석하지 못 할까”라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허나, 오래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 고민은 한국에 돌아가서 해도 충분하니까. `인도에선 인도의 오늘을 즐기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잠시잠깐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핸섬한 릭샤 기사는 “이제 가자”며 길을 재촉했다.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제국호텔은 비교적 쾌적했다. 뱅갈로르 중심가가 가까웠기에 환전을 하기에도 좋았고, 근처엔 괜찮은 식당도 여럿 눈에 띄었다. 거기다 직원들도 격식을 갖춰 손님을 대한다. 체크인을 하고 잠시 들러 맛본 1층 카페의 우유 섞은 홍차 맛도 일품이다.오늘 밤엔 한적한 시골마을인 함피와는 전혀 다른 이곳에서 네온사인 빛나는 나이트클럽에나 가볼까?하지만, 계획은 금방 변경됐다. 일단 냉면을 판다는 한국식당을 찾아보기로 한 것. 2주 이상 한국음식을 먹지 못한 터라 시원한 냉면이 너무나 간절했다.스스로 미식가라고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기자는 맛없는 음식을 못 견딘다. 인간의 즐거움 속엔 먹는 기쁨이 분명 포함돼 있고, 그 포함의 영역이 꽤 넓다고 믿는 편이다. 해서, 맛있다는 음식점은 거리에 상관하지 않고 찾아다녔고, 맛만 있다면 가격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캐비아(소금에 절인 철갑상어 알), 트뤼프(송로버섯) 따위의 귀하고 비싼 희귀식품에만 열광하는 건 아니다. 그걸 자주 즐길만한 돈도 없을 뿐더러. 그저 적절한 가격에 성의를 다해 차려내는 음식점을 만나면 하루가 즐거웠을 뿐. 어쨌건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은 다르기 마련인데, 기자의 경우엔 된장찌개와 냉면을 가장 맛있어하고 즐긴다. 그런데, 뱅갈로르에 바로 그 `냉면`을 하는 식당이 있단다. 물론, 한국 사람이 주인일 것이다.오뉴월 염천에 차게 식힌 고깃국과 동치미 국물을 적절한 비율로 섞은 육수를 한 모금 마신 후, 고무줄처럼 질긴 함흥냉면이 아닌 슴벅슴벅 씹히는 평양냉면 대여섯 가닥을 입 속으로 밀어 넣는 느낌. 아... 생각만 해도 군침이 고였다.샤워를 한 후 제국호텔을 나서 일단 환전을 하고,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한국식당의 위치를 수소문했다. 인도에서 맛볼 평양냉면을 기대하며.몸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젊은 여성들과 양복을 차려입은 샐러리맨이 보이는 걸 보니, 여긴 분명 `시골`이 아닌 `도시`다. 어제까지 머물던 함피와 오늘 도착한 뱅갈로르는 분명 달랐다.잊을 수 없는 베나울림의 석양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었다. 희곡작가를 꿈꾸던 사촌형의 집에서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1898~1971)의 매혹적인 산문집 `섬`을 발견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가 극찬한 책. 무작정 `바다`를 좋아하던 기자는 바다와 잘 어울리는 단어인 `섬`이란 제목에 매료됐고, 코앞으로 다가온 학력고사와는 관계없이 밤을 새워 그걸 읽었다. 아주 열심히.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에게 `성문종합영어`와 `해법수학`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섬`에서 발견한 그리 길지 않은 문장 서너 대목은 30년의 세월을 넘어 아직도 기자의 심장 깊숙한 곳에 우뚝한 돋을새김으로 남아있다. 르네 데카르트의 진술을 인용한 부분이다.“나는 안개 낀 새벽녘 낯선 항구에 도착하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비밀을 서랍을 지닌 채 가난하고 겸허하게 살고 싶었다.”인도에 도착해 첫 번째로 머물렀던 칼랑구트 해변을 떠나 조그만 소읍 마르가오를 거쳐, 허위허위 베나울림 해변에 도착해 콜라 한 병으로 섭씨 40도의 더위를 식히던 때는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조악한 문장으론 그 아름다움을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아라비아해의 석양. 해넘이가 시작되고 있었다.하루 종일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와 그 파도를 몰고 오는 저 먼 바다는 물론, 세상 전체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사나이라 믿어왔던 오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찔끔` 눈가가 시큰해져왔다.그 감정 과잉의 상태가 고교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이어진 기억의 연상작용은 장 그르니에 산문집 `섬`과 비밀과 겸허함에 관한 데카르트의 문장을 머릿속에서 복원시키고 있었다. 어디선가 낡은 도트 프린터 소리가 들려왔다.“촤르륵 촤르륵...”사위어가는 태양의 잔광은 눈처럼 흰 수염을 기른 노인과 그의 손자, 손을 맞잡은 연인과 그 바다에서 간난신고의 생을 이어가는 어부, 거기에 해변을 어슬렁거리는 소에게까지 공평하게 쏟아지고 있었다.그 장엄한 풍광을 견딜만한 용량이 아닌 기자의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아, 정말이지 여기 잘 왔구나”라는 혼잣말을 하며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 서 있었던 게 기억난다. 손에 든 콜라병이 파도와 함께 왈츠의 박자로 춤추고 있었다. 아직도 그 저녁, 베나울림의 석양을 잊지 못한다.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16-12-02

`풍광이 취기를 부르는` 함피를 떠나던 날…

인생은 짧고, 하루는 더 짧다. 이 `짧음`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생은 위대해질 수도, 비루해질 수도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과 `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우리는 누리고 있는가? 말리기호텔에서 한 번 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한참 어린 독일 여성 프란시와 만나 저녁을 먹을 것이니, 최소한의 격식은 차려야 했다. 그건 인간으로서의 매너이기도 하다.오토릭샤 가이드 프랭키와의 서운하고 안타까운 이별폐허의 장엄함·멋진 풍광에 취한 인도의 시간들프랭키가 오늘도 고생이 많다. 호스펫에서 함피로, 함피에서 호스펫으로, 다시 같은 길을 되짚어 프란시의 숙소까지 기자를 데려다줘야 했으니. 그의 수고를 생각해 은근슬쩍 100루피의 팁을 주머니에 찔러주었다.저녁식사를 위해 어두워진 길을 되짚어 함피로 향했다. 저물녘의 안도감은 그날도 변함이 없었다. 달리는 길 건너편에선 결혼식이 열리는지 울긋불긋 화려한 의상을 챙겨 입은 축하객들이 어둠을 밝히는 환한 얼굴로 신부의 집을 향한다. 프란시가 알려준 게스트하우스 앞에 프랭키의 오토릭샤가 멈췄다. 조그만 숙소의 2층 난간에서 프란시가 고개를 내밀어 인사하며 “어서 올라오라”고 한다. 프랭키에게 “넌 이제 그만 엄마 집으로 돌아가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뭘 안다고 골목길을 나설 때 “굿 나잇!” 하며 눈을 찡긋한다.프란시가 묵고 있는 숙소의 계단을 올랐다. 얼핏 보기에도 허름한 숙소다. 프란시는 화장기 없는 발그레한 얼굴과 물기 묻은 머리칼로 기자를 반겼다. 게르만 여성의 건강함이 보기 좋았다.옆방에 묵고 있다는 이스라엘 청년 하나가 숙소를 나서는 프란시를 향해 “어디 가니?”라고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 프란시가 `쿨`하게 응대했다. “나? 데이트 하러 가.” 어두워진 함피의 골목길을 걸었다. 프란시가 봐놓은 루프탑 레스토랑(옥상에 꾸며진 식당)이 있다고 했다. 굽이굽이 길을 돌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프란시는 마늘빵과 과일샐러드를 먹겠단다. 기자도 같은 걸 주문했다. 그런데, 나온 음식이 너무 싸구려처럼 보이고 볼품이 없다. 접시는 가장자리가 깨져있고. 하기야 120루피(2400원)짜리 저녁밥이 오죽하겠나. 좋은 요리를 사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맥주 여러 병을 주문하는 것으로 상쇄했다.주거니 받거니 마신 7~8병의 맥주가 인종과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른 둘의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줬다. 마침내 취기가 오른 프란시는 푸른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당신, 시 쓴다면서요. 나한테 저 하늘의 별을 노래해주세요”라는 곤혹스러운 부탁까지 했고.창졸간에 맞이한 인도에서의 데이트는 재론의 여지없이 즐거웠다. 음식이 담긴 접시와 술병을 모두 비우고 숙소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바래다준 게 고마웠던지 프란시가 기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게 유럽식 인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함피를 떠나야하는 날이 왔다. 풍광이 취기를 부르는 묘한 경험을 했던 며칠. `몽롱한 상태`가 아님에도 폐허를 통해 확인한 장엄함. 술기운보다 강렬한 `그 무엇`이 기자를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급속도로 팽창하는 자본의 맹렬한 기세도, 세련됐지만 인간본연의 모습에선 멀어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문명의 그물도 여기만은 피해갔으면 하는 바람. 그건 과한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분명 그때 심정은 그랬다. 프랭키와의 이별은 서운하고도 안타까웠다. 엄마와 할머니, 여동생을 먹여 살리며 일찍 철든 열여덟 소년. 그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덜어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왔다. 함피를 출발해 뱅갈로르(Bengaluru)로 가는 버스는 해가 저문 후에 있었기에 그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호텔에서 체크아웃을 끝내고 내려오니 로비에 프랭키가 기다리고 있다. “뭘 먹고 싶으냐”고 물으니 “아무거나 좋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프랭키는 기자와 함께 다닌 사흘 내내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뱅갈로르행(行) 버스표도 프랭키가 예매해준 것이었다. 자기가 차의 정확한 출발시간과 발차 장소를 알고 있으니, 걱정 말고 편하게 밥 먹고 술도 한잔 마시란다. 술 좋아하는 기자의 라이프스타일까지 알아서 챙겨주는 기특함이라니.프랭키의 오토릭샤는 몇 분 만에 인근 호텔 야외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가다가 우연히 만난 프랭키의 친구 한 명도 합석했다. 오늘 헤어지면 이 소년가장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이것저것 맛있는 걸 좀 많이 사주고 싶은데, 프랭키와 친구 둘 모두 겨우 감자튀김과 시원찮은 빵 쪼가리만을 먹겠단다. 맡겨두면 안 되겠다싶어 기자가 메뉴판을 뺏어들고 마구잡이로 3~4개쯤의 요리를 주문했다. 당연지사 맥주와 위스키도 가져오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기자는 인도요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뭘 모를 땐 비싼 걸 시키면 그 값어치만큼 맛있을 것이라는 어림짐작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어림짐작`은 크게 틀리지 않아 한 개의 요리를 제외하고는 다 먹을 만했다. 프랭키와 친구도 자기네들 접시에 덜어주는 음식을 넙죽넙죽 잘 먹는다. 속으로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이렇게 맛있게 먹을 거면서 왜 얌전을 빼고 그래.”기자는 위스키를,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닭고기와 양고기, 이름을 알 수 없는 민물생선으로 만든 요리를 즐겼다. 해가 진 호스펫 거리는 행인들로 북적거렸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번잡함과 소음도 익숙해져서인지 싫지 않았다.이윽고 식사가 끝나고 뱅갈로르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버스터미널까지 따라 나온 프랭키가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었다. 돌아보니 그 표정이 슬퍼보였다. 그와의 작별이 피붙이와의 헤어짐인 듯 기자의 가슴도 저려왔다.▲ 베나울림 해변 식당에서 `더치페이` 문제로 함께 웃었던 인도계 프랑스인 살리나.인도에서 경험한 `더치페이`인도 서남부 베나울림 해변. 바다 위로 떨어지는 석양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흔드는 곳. 오두막 형태로 만든 숙소에는 기자 외에도 이탈리아 할머니, 스물다섯 살 프랑스 여자 카일라,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생의 80% 이상을 유럽에서 보낸 인도계 프랑스인 살리나가 묵고 있었다.모두 제각각 혼자 여행 중인 4명의 이방인들이 외로움을 핑계로 맥주 한잔을 나누며 친해졌다. 국적과 인종에 관계없이 웃는 얼굴로 서로를 대했지만,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생활에서의 에티켓은 판이했다. 특히 `더치페이`(각자 내기) 문제.다음 일정이 모두 다른 넷이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시내로 걸어나갔다. 5월의 남인도는 거리에 내놓은 계란이 익어버릴 정도로 덥다. 그래서 숙소로 돌아올 땐 택시를 탔다. 한국 돈으로 대략 1천500원 정도의 요금이 나왔다.큰돈이 아니기에 동승한 여자들에게 택시비를 나눠 내자고 말하기는 싫었다. 해서 흔쾌히 운전사에게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이건 뭔가. 택시에서 내린 여자 셋이 저마다 지갑을 꺼내더니 5루피(약 100원)짜리 동전까지 꼼꼼히 계산해 내민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함께 탄 택시비 정도는 혼자 내는 게 한국 사내들의 매너고, 숙녀들을 위한 배려”라고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살리나는 한참을 “나눠서 내야하는데, 나도 돈 있는데...”라고 중얼거렸고. 유사한 사건(?)은 또 있었다. 네 사람이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다. 채식주의자인 카일라는 샐러드와 맥주를, 이탈리아 할머니는 통밀빵과 오렌지주스를, 살리나는 닭고기볶음밥을, 기자는 새우구이에 인도산 럼(Rum)을 마셨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할 때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들 몰래 기자가 음식 값을 지불해버린 게 빌미였다. 넷이 먹은 걸 모두 합해도 1만원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받아라” “안 받겠다”는 이야기가 수차례 반복됐다. 결국엔 모두의 웃음으로 마무리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여행에서 돌아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니 “잘했다. 사나이가 옹졸하게 그걸 받으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고, “각자 나눠 내는 게 그들의 문화인데 존중해주지 그랬냐”라며 타박하는 이들도 있었다.혼자 떠나는 여행이 매력적인 건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던 사람들을 만나 이렇듯 판이한 문화를 경험해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건 기자는 인도에서 `더치페이`의 곤혹스러움과 즐거움을 제대로 배웠다.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1-25

50개 나라를 홀로 여행한 열아홉 청년을 만나다

함피에서 눈 뜬 세 번째 날. 어디선가 스멀스멀 익숙한 향기가 몰려온다. 이건 뭔가? 맞다. 밥 짓는 냄새다. 그랬다. 기억의 회로 저편 멀리에도 엄마가 “탕탕” 도마 두드리고, 조개에 구수한 된장 풀어 아침을 준비하던 향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건 애틋한 그리움의 영역이다.집 떠난지 1년…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캐나다 청년과의 추억아침을 제공하는 말리기호텔 레스토랑은 1층에 있는데, 4층 기자의 방까지 휘몰아쳐오는 쌀 익어가는 향기. 그것 때문에 잠을 깼다.아직은 선선한 이국의 아침 바람을 맞으며 프랭키가 운전하는 오토릭샤에 올랐다. 겨우 통닭 한 마리 사준 걸 두고 “엄마가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라고 했다”며 웃는 프랭키. 덩달아 웃게 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비탈라사원(Vitthala Temple). 오늘 함피여행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모양이다. 입구엔 아주 당당하게 `인도인 10루피(200원), 외국인 250루피(5천원)`란 푯말이 우뚝 서있다. 그래, 이게 정당한 거다. 재벌의 100만원과 노동자의 100만원은 절대적 가치에 있어선 동일하나, 상대적 가치는 판이한 법. 가끔은 `바가지`를 쓰고도 웃어야할 때가 있는 법이다.입장료를 지불하고 사원에 들어섰다. 찌는 듯한 날씨 탓에 기자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혼자 두리번거리며 왕이 탔다는 거대한 석조마차와 두드리면 실로폰 소리가 난다는 신전(神殿)의 기둥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저 멀리 백인 여자 하나가 가쁜 숨을 내쉬며 나타난다.“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래요?”“저도 혼자인데 잘 됐네요. 제 셔터도 한번 눌러주세요.”이렇게 시작된 스물두 살 독일 소녀 프란시와의 대화는 그늘로 자리를 옮겨 제법 오래 계속됐다.기자의 한국어판 `론리 플래닛`(가이드북)과 그녀의 독일어판 `론리 플래닛`을 펴놓고, “이거 똑 같네”라며 낄낄대다가, “너 어디 사냐?”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냐?”로 이어지던 대화 끝에 그녀가 치과대학에 다닌다는 걸 알게 됐고, 여행을 좋아하던 오빠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제 오빠가 살아있을 때 이집트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당신이랑 닮았다”고 한다. 우뚝한 코에 짙은 눈썹, 거기에 꿈꾸는 녹색 눈동자까지 프란시의 오빠는 전형적인 게르만 사내였다. 대체 백인과 황인이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그러나, 그 말이 싫지 않았다.두 달 전 독일을 출발해 인도를 거쳐, 태국과 베트남까지 6개월쯤 여행할 것이라는 프란시에게 차가운 생수 하나를 사주며 “저녁을 함께 먹자”고 제의하니, 망설임 없이 좋단다. 저녁에 숙소 앞으로 데리러간다는 약속을 했다.그녀를 보내고 프랭키가 안내하는 유적과 박물관, 호수 등을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점심 먹을 때가 됐다. 프랭키와 그의 친구 서너 명을 불러 함께 밥을 먹었다. 역시 혼자 하는 식사보단 `어울리는 밥상`이 좋고, 얻어먹는 밥보단 사는 밥이 훨씬 맛있다. 점심을 먹은 후 프랭키는 집에 가서 쉬라고 돌려보낸 후 함피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망고트리`에 갔다. 바나나나무가 가득한 숲 한가운데 위치한 카페였다. 망고트리는 시원하고 쾌적했다. 차가운 음료수를 주문하고 그물침대에 누워 한국에서 가지고간 이성복 시집을 뒤적거렸다. 이렇듯 `즐거운 독서`가 얼마만인가. 명민했던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이 죽기 전 몇 년 동안 쓴 일기를 묶은 책 제목은 `행복한 책읽기`였다.`행복한 책읽기`를 하다 뒤를 돌아보니 눈동자가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어린 친구 하나가 혼자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중이다. 시선이 마주쳐 미소를 보냈더니, 저도 “하이!”라며 씩 웃는다.앞에 놓인 테이블에 아무 것도 없기에 “날 더운데 뭘 좀 마셔”라고 권하며 콜라와 싸구려 샌드위치를 사줬다.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는 캐나다에서 온 열아홉 청년이었다. 집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넘었고, 언제 돌아갈지는 자기도 모른단다. 게다가, 이런 정처 없는 장기여행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한국이라면 고등학교 3학년쯤 되는 나이. 이처럼 스케일 큰 여행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어떤 한국 부모가 입시를 앞둔 자녀에게 무한정의 자유를 허락하겠는가. 그래서, 물었다. “너희 부모는 네가 사는 방식에 관해 아무 말 안 하니?”“아버지와 엄마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건 내 삶이잖아요”라는 똑 부러지는 대답이 돌아왔다.이제껏 그 열아홉 청년이 여행한 곳은 대략 50여 개 나라. 지구 위에 존재하는 국가의 25%에 육박하는 숫자다.믿기지 않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겨우 열아홉임에도 삶에 대해 한없이 `열려있는 태도`를 가진 아이였다.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열아홉 청춘들의 삶이 불쌍해졌다.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의 암기에만 목을 매달아야 하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자유의지로 다스려가는 이 캐나다 청년이 얼마나 부러울까.세상의 모든 곳을 돌아본다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확률은 훨씬 높다. 많지 않은 나이에 제 삶의 방식과 지향을 스스로 선택해 의연히 그 길을 걸어가는 모습. 참으로 근사했다.그 옛날, 타히티를 찾아낸 영국의 항해가 제임스 쿡 제독이 그랬던 것처럼 해도(海圖) 없는 바다를 향해 용감하게 닻을 올린 열아홉 캐나다 청년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앞으로도 네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라”고 격려해주고 싶었다.시원찮은 영어로 손짓과 발짓을 섞어 그와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프란시와 약속한 저녁 데이트에 가야할 시간이었다. 인도 아기들의 커다란 눈을 보면…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결핍되거나 결락돼 있는 것을 부러워한다. 그건 인지상정이다.조금은 천박한 표현일 수 있지만, 돈을 가지지 못한 자는 부자를 부러워하고, 여행을 하고 싶지만 여러 여건 때문에 다녀보지 못한 이는 여행자를 동경한다. 또,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서로가 궁금해 하고 다른 성(性)으로 살아보고 싶어 한다.기자의 경우엔 뭐가 결핍돼 있을까? 어떤 결락이 빈 가슴을 더욱 춥고 쓸쓸하게 하는가.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 일찌감치 폐기처분한 순수와 무구함.살아갈수록 세상사 때가 더 진하게 묻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시간들. 그걸 생각하면 아득해지고 그럴 때면 아이들이 순정한 눈동자를 보며 위로를 얻는다.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눈빛은 텅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기들의 눈 속엔 티끌 한 점으로 시작된 인류의 시원(始原)이 보인다. 윤대녕의 소설 한 대목을 빌리자면 “존재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몸짓”이 읽힌다. 해서 기자는 아이들이 부럽다. 1개월의 인도여행에서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뭄바이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소녀와 바지를 사러 들어간 함피 옷가게 주인의 두 딸, 제 아버지와 기자가 이야기하는 잠시잠깐을 참지 못해 칭얼대던 귀여운 남매까지.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내내 부끄러웠다. 시인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며 지나온 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기자는 그렇지 못했다. 자꾸만 잘못 살아온 것 같아 편치 않은 마음이 울렁거렸다.모두가 조카들처럼 예쁜 그 아기들을 부둥켜 안아주고 싶었다. 그처럼 순정한 포옹 속에서 기자의 오만과 선입견, 자만과 탁한 욕망을 털어내고 싶었다. 세상 어느 `어른`도 가지지 못한 순진과 무구 그리고, 순수함을 지니고도 결코 거들먹거리지 않는 아기들의 겸양. 비록 그게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아기들의 눈망울은 세상 무엇보다 아름답다. 다시 한 번 인도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꺼내 아이들의 눈동자와 만난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다짐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기 힘들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송선호

2016-11-18

일찍 철든 소년의 넓은 등을 보던 날

아침 일찍부터 소년 오토릭샤 운전수 프랭키와 성스러운 고대도시 함피의 유적들을 둘러봤다. 이슬람과 힌두세력이 각축을 벌이며 서로 대립한 탓에 상당수 유물과 유적이 손상된 상태로 남아있었지만, 함피는 파괴된 폐허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무너진 바위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의 흔적들이 여행자를 매료시켰다.무너진 바위에 새겨진 함피의 역사…폐허 속에서도 아름다움 빛나오토릭샤 가이드 소년 프랭키의 초대로 인도가족들과 만나할머니와 엄마·여동생과 조그만 방 한칸서 생활하는 소년가장가난으로 일찍 철든 소년 프랭키의 미소에 기자의 삶 되돌아 봐인도사람들처럼 걸쭉한 카레와 밀가루빵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니 `살인적인 더위`가 함피의 폐허를 뒤덮었다. 길거리에 줄지어 드러누운 개들의 혀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날씨 탓인지 잠이 쏟아졌다. 프랭키에게 “호스펫의 호텔로 돌아가자”고 부탁했다. “나머지 유적과 좋은 경치는 내일 안내해다오. 대신 오늘 약속한 가이드 비용 500루피는 지금 주겠다”고 하니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다. 기자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오후엔 다른 손님을 태워 영업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건네는 지폐를 “마지막 날 받아도 된다”며 사양하는 프랭키를 호텔 앞에서 돌려보내고 객실로 올라와 달콤한 낮잠에 들었다. 꿈도 없는 평화로운 잠이었다.해질 무렵 일어나 로비로 나가니 프랭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집으로 놀러가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인도 사람 집에 초대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프랭키가 운전하는 오토릭샤 뒤에 타고 땅거미가 어둑하게 내리는 호스펫 시내를 지나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렸다.프랭키의 집은 북적거리는 시장 어귀에 자리 잡고 있었다. LG전자에서 생산한 낡은 텔레비전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인 스테인리스 그릇이 차곡차곡 포개져있는 조그만 방 한 칸과 손바닥만한 마당이 집의 전부였다. 프랭키는 거기서 할머니, 엄마,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인도에선 여자들이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아 자기가 오토릭샤를 끌고 다니며 버는 돈으로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프랭키의 설명이 이어졌다. 릭샤도 자기 것이 아니라 임대한 것이기에 수입의 절반 이상은 릭샤 주인에게 줘야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약 기자가 프랭키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까? 웃으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를 마흔여섯이나 먹었음에도 기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구를 책임지거나, 먹여 살려본 적이 없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부양할 아내와 아이들이 없고, 부모 또한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남의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그럼에도 기자는 매일같이 벌어지는 선후배,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드러내놓고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왜 나는 독일산 고급승용차와 100평짜리 주상복합아파트를 가진 부자로 태어나지 못한 거냐?”가난은 소년을 일찍 철들게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남기고 간 3명의 여자를 최소한 불행하지 않게는 해줘야한다”는 열여덟 소년 프랭키의 말에 기자는 부끄러워졌다. 어린 나이에 짊어지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삶의 무게 혹은, 가혹한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고 사는 소년. 그런 상황에서도 착한 웃음을 지을 줄 아는 프랭키는 지금 생각해보면 기자의 스승이기도 했다.프랭키의 엄마가 들어간 설탕의 양을 가늠할 수조차 없이 달디 단 홍차와 인도 과자를 내왔다. 일종의 손님 접대였을 것이다. 기자는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사양할 수는 없는 일. 그건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행위일 수도 있다. 겨우겨우 설탕물 같은 홍차 한 잔을 어렵게 비워내니, 프랭키의 엄마가 묻는다. “맛있나? 한 잔 더 가져올 테니 마셔라.”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또 마실 수밖에 없었다. 사발 크기에 가까운 커다란 잔으로 홍차를 연거푸 마시고나니 평소 1년 먹을 설탕을 30분 만에 해치운 느낌이었다. 아랫배가 살살 아플 정도였다.프랭키의 할머니는 뭐가 그리 수줍은지 기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다. 손자의 웃음과 닮은 오밀조밀한 예쁜 미소다.남의 집에 초대받아 가면서 아무 것도 들고 가지 않은 게 영 어색해 “딸에게 통닭이나 한 마리 튀겨주세요”라며 500루피(약 1만원)를 내미는데, 프랭키 엄마는 이를 몇 차례나 마다했다. 억지로 손에 쥐어주며 “착한 아드님과 건강하게 사세요”란 작별인사를 전했다. 프랭키의 할머니와 엄마, 여동생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기자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프랭키의 친구가 한다는 이발소에 들렀다. 한국을 떠나올 때 이미 덥수룩하게 자라있던 머리칼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이발사가 손에 든 가위가 한국 초등학생들이 색종이나 마분지를 자를 때 쓰던 것과 꼭 같다. 이건 또 무슨 코미디 같은 상황인가. 하지만, 걱정도 잠시뿐. 그 조악한 가위를 사용해 쓱싹쓱싹 잘도 머리칼을 헤집어가며 잘라낸다. 솜씨가 놀랍다. 이래서 `인크레더블 인디아(Incredible India)`인가?거기다 이발이 끝난 후 서비스로 해주는 안마가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우두둑” 뼈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해졌다. 게다가 이발 비용도 저렴하다. 겨우 1천원.상쾌한 기분으로 호텔로 돌아와 프랭키를 돌려보냈다. 종일 이것저것 귀찮게 요구하는 기자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음에도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편히 쉬어요”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 그가 더 좋아졌다.160cm가 채 되지 않는 조그만 키에 어깨가 여자애처럼 좁은 프랭키가 타박타박 기자를 등지고 걸어갔다.그의 등이 183cm에 90kg인 기자의 등보다 더 넓어 보였다. 환시(幻視)였다. 그날, 프랭키가 선물한 환시는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힘겨운 발버둥을 치고 있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열아홉 인도 신부사는 내내 가끔은 기억 속에서 꺼내 볼 아름다운 추억이 된 인도여행.내륙에 위치한 도시 함피가 너무 더웠기에 지친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식히려 영국인들이 만든 휴양도시 우티로 급하게 몸을 숨겼다.위도는 비슷함에도 온도 차이는 무려 30도가 났다. 함피가 섭씨 40도라면 우티의 새벽은 영상 10도. 한기가 느껴져 벽난로를 피워야 할 정도였다.우티가 선물한 시원함과 쾌적함에 다시 힘을 얻어 산세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인근마을 쿤누르(coonoor)로 소풍을 갔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가, 오토 릭샤를 대절해 일대를 돌아보고, 해질 무렵 장난감 같은 협궤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당일치기 투어였다. 현지에서 친해진 릭샤왈라들과 의기투합해 10병이 넘는 맥주를 마시고 우티로 돌아오는 길. “칙칙폭폭” 절경 속을 달리는 협궤열차에서 신혼여행을 왔다는 인도인 부부를 만났다. 남편은 26살, 아내는 19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착하게 웃는 둘의 얼굴이 더없이 행복해보였다. 말 그대로 파안대소(破顔大笑).기자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남편은 낡은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내 사진은 한 장도 안 찍어주고, 내내 바깥 풍경만 찍어대기에 점잖게 한마디 충고했다.“어이, 와이프 사진도 좀 찍어주고 그래야지.”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다.“이게 24장밖에 안 찍히거든요. 그래서 저 사람 찍어줄 여분이 없어요.”한국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친구와 후배의 경우라면 아내에게 맞아 죽기 딱 좋을 소리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도 열아홉 어린 아내는 수줍게 웃기만 했다. 부러웠다. 저렇듯 착한 와이프를 얻었으니.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달리다보니 숨어 있던 장난기가 발동했다. 기자의 디지털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는 남편에게 전격적으로 제의했다.“이봐 새 신랑, 아내 볼에 키스해 봐. 그러면 이 카메라 선물로 줄게.”절대로 할 수 없단다. “인도인은 한국인과 달라요”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럼 손등에라도 해봐.”가만히 웃고만 있던 신부도 손사래를 치며 부끄러워한다.“남편이 원한다고 해도 난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해봐라”와 “안 된다”를 거듭하며 우리는 오래 알아온 친구들처럼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 사이 기차는 어느덧 우티역(驛)에 도착했다.“앞으로도 건강하고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진심 어린 축복의 말을 전하며 그 신혼부부와 헤어졌다.물질적 풍요 없이도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마냥 행복해하던 신랑과 신부.그들은 오늘도 선량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겠지?꼭 그럴 것이라 믿고 싶다.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1-11

`성스러운 도시`에서 만난 세속의 사람들

고아의 해변을 출발해 함피를 향하는 여정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인도 내륙에 위치했고, `성스러운 도시`로 불리는 함피로 가는 관문인 호스펫에 도착했다.시내는 늦은 시간임에도 몹시 북적거렸다. 인근 마을을 다녀오는 인도 사람들부터 멀리서 이곳을 찾은 이방의 여행자들, 거기에 장사치들까지 시끌벅적 제 할 일과 제 갈 길을 찾고 있었다.오토릭샤 가이드인 소년가장과 사흘동안 `함피` 여행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허물없이 술잔 나눈 추억들성스러운 도시의 유적군·바위풍경에 넋을 잃기도수천 리 먼 길을 오느라 힘겨웠으니 숙소는 좋은 걸 잡아 편히 쉬며 여독을 풀려고 마음먹었다. 호스펫 버스터미널 인근 `말리기호텔`이 괜찮다는 정보를 얻어들었다. 하루 1000루피(약 2만원)면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잠들고, 다음 날 수영장도 이용할 수 있다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버스에서 내려 호텔을 찾아가는 길. 어리게 보이는 `오토 릭샤`(오토바이를 개조한 인도의 교통수단) 기사 하나가 끈질기게 따라오며 “당신이 여기에 머무는 동안 함피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돼주겠다”고 제의했다. 영어도 썩 잘한다. 사람을 예의 바르게 대하고, 눈빛이 살갑기도 해서 정이 갔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으니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 난 사흘쯤 있을 텐데 얼마를 주면 될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주면 됩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어 “하루에 500루피면 어떠냐”고 물으니, “오토 릭샤로 당신이 원하는 곳을 다 가주고, 내가 아는 멋진 곳도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계약은 어렵지 않게 성사됐다.그 소년 운전기사와 사흘 내내 붙어 다니며 친해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소년가장이었다. 이름이 `프랭키`라고 했다. 인도 관광안내인들은 본명이 아닌 영어 닉네임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만약 `여행`이 `일상`보다 가치우위의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뭘까? 뭐니 뭐니 잡다한 이유를 붙일 수 있겠지만, 기자의 생각엔 새로운 바람의 냄새, 이제껏 보지 못한 바다의 빛깔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하자면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친구로 만들어주는 힘을 가졌다는 게 아닐지. 그런 이유로 여행은 일상보다 위대하다. 고아의 바다에서부터 멀고 먼 길을 달려 도착한 함피. 힌두와 이슬람 유적이 곳곳에 산재한 이 고도(古都)는 일상을 벗어난 기자에게 여행이 줄 수 있는 최고치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함피가 전해준 냄새와 빛깔 모두는 한국과 판이했고, 거기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허물없이 친구가 되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다.열여덟 운전사 프랭키, 치과의사가 될 스물두 살 독일 소녀 프란시, 50개국을 혼자서 떠돌았다는 열아홉 살 캐나다 청년,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지저분한 주점에서 낮부터 취해있던 술꾼들. 기자는 그들 모두와 새로운 냄새 그리고, 빛깔을 기꺼이 나누어가졌다. 술 혹는, 정(情)에 취해.함피에서 오토 릭샤로 15분 거리에 있는 호스펫 말리기호텔에서 맞은 첫날 아침. 늦잠을 잤다. 흙먼지 가득한 울퉁불퉁한 길을 낡은 버스로 10시간 넘게 달려온 데다 밤에 도착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이다.프랭키가 바래다준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생애 가장 시원한 샤워를 했다. 콧속은 황토로 막혀있고, 목덜미 역시 붉은 색깔의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새까만 발가락과 손톱 밑에 낀 때는 또 어땠던가. 이것들을 말끔히 씻어내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샤워 후에 시원한 맥주 한잔이 없을 수 있나. 때에 절은 옷은 세탁서비스를 맡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호텔에 딸린 레스토랑 `웨이브`로 가서 닭 가슴살로 만든 스테이크와 인도산 맥주, 여기에 위스키까지 한잔 주문했다.통후추를 듬뿍 뿌린 닭고기 스테이크가 입에 맞았다. 술을 곁들여 천천히 음미했다. 어두워진 호스펫 시내 풍경을 구경하다가 열다섯 살이 안 돼 보이는 레스토랑 막내 웨이터와 친구가 됐다. 그가 한 잔, 한 잔 서빙해주는 양주를 대략 한 병 쯤 마셨다.외로운 여행자의 친구가 되어준 어린 웨이터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한국에서 가져간 소형 플래시를 선물해주고, 취한 채 방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눈알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러했으니, 늦잠의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깨어난 아침. 잠시 당황했다. 어젯밤 프랭키와의 약속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해가 뜬 후에는 엄청난 속도로 더워지니 일찌감치 아침 8시에 호텔 입구에서 만나 함피를 돌아보자는 프랭키의 제의에 “오케이”라 말했었는데, 벌써 9시 30분이 넘어있었던 것. 세수도 하지 않고 4층 방에서 로비까지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아, 미안하게도 기자를 보며 환하게 웃는 프랭키. 그는 약속에 늦은 손님을 기다려준 것이다. “미안하다. 어제 너무 마셔서 늦게 일어났다”고 하니, “괜찮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응수한다. 7시 30분에 와서 2시간 넘게 기다렸단다. 더 미안해졌다.다시 방으로 올라와 대충 얼굴만 씻고 프랭키가 기다리는 호텔 입구로 부리나케 나갔다. 사과하는 뜻에서 호텔에서 아침을 사주겠다고 하니 한사코 사양했다. 호텔 레스토랑의 비싼 음식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그럼 일단 함피로 가자. 점심을 사겠다”란 말에 프랭키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오토 릭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얼마나 달렸을까. “아…” 감탄사 없이는 형용조차 할 수 없는 함피의 거대한 유적군(群)과 현실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기묘한 바위 무더기가 눈앞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자면 그 풍광에 `기절할 뻔` 했다.보통 사람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삶을 마친 요절한 젊은 시인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아래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우울하고 어둡고, 습한 목소리였다.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모두 폐허다부정하려해도 그 폐허가 나를 키웠음에 분명하다내 폐허 위론 또 어떤 꽃이 피어날까. 노점상 할아버지, 건강하시죠?불행인지 다행인지 기자는 할아버지의 얼굴도, 외할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두 분 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요절했기 때문이다. 그 이른 죽음의 이유를 기자는 잘 알지 못한다.청년기를 보낸 일본에서 학교보다 기생집을 더 자주 출입했던 조부는 1944년 가을 아내와 다섯 자식을 거느리고 귀국해 몇 년을 못 살고 사망했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폭음을 했고 아침나절 피를 토하며 갔다고 한다.외조부 역시 두주불사(斗酒不辭)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역시 40대 중반에 돌아가셨단다. 외조부의 성함은 김만두(金萬斗). 쌀이건 콩이건 1만 석을 수확하는 부농(富農)이 되라고 지은 이름 같은데 결국은 이름처럼 살아보지 못했다.그들을 보지 못한 `조부 부재`의 결핍감 때문일까? 기자는 멋있게 나이 든 사내를 좋아한다. 낡은 흑백사진에서 본 할아버지 같기 때문이다.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기고 코트를 챙겨 입거나, 흰색 두루마기를 폼나게 차려 입고 유유자적한 걸음을 걷는 노인들이 근사해보였다.인도를 여행할 때다. 근사하게 늙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맘에 꼭 드는 할아버지 한 명을 만났다. 해발 2500m에 건설된 고산도시 우티(Ooty)에서였다. 그는 노점상이었다. 하루 종일 있어봐야 담배 두어 갑과 말린 약초 한 주먹이나 팔까싶은 조그만 길거리 가게. 그 도시에서 머문 3박4일 내내 거기서만 담배를 구입했다. 돌아가신 조부와 외조부가 떠올라서였다. 우티를 떠나던 날. 가게에 들러 담배 20갑을 한꺼번에 샀다. 손을 잡고 “앞으로도 건강하시라”고 인사를 했다. 순간 그 노인의 눈가에 맺히던 물기. 기자 역시 이상스럽게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자의 할아버지 같았다. 해괴한 감정 전이였다. 만약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생존해있다면 그들에게 효도했을까? 내 삶의 방식을 다른 시대를 살아온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기억 밖에 존재하는 두 노인이 보고 싶다. 아니, 지금도 인도 땅 서남쪽 산간마을에서 담배와 약초를 팔고 있을 그 노인까지 합해 세 노인이 보고 싶다.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 늙는다는 것, 병들어 죽는다는 것의 비밀스러움을 기자는 아직 알지 못한다.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제삿날 조부와 외조부에게 한 것처럼 인도의 노인에게도 들리지 않는 인사만을 겨우 전할 뿐.“어르신, 아픈 데는 없으시죠?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합니다.”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