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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칼랑구트 해변에서 ‘사람’에 취하다

어슬렁어슬렁 나선 해변 산책. 인도 고아주(州)의 칼랑구트 해변은 노천카페와 몰려든 인도인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태양은 눈부시고… 맥주 한잔이 간절했다. 원로정치인 김종필은 낮술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태양이 작렬하는 대낮의 해변 노천카페서의 맥주 한 잔은오래오래 기억될 추억으로…태양과 바다의 합작품 저녁놀감상하다보면 `여기가 천국` “이봐, 낮에 마시는 한 잔의 맥주는 실로 감로수와 같은 것이야.”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온 기자는 낮술 마시기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이번 여행을 위해 구입한 초록색 운동화 속으로 하얀 모래가 들어와 버석거렸다.운동화 색깔이 예쁘다며 자기가 일하는 노천카페로 기자를 이끈 게 홍차가 유명하다는 다즐링 출신의 스물다섯 살 사내 아밋(Amit)이었다. 날은 덥고 피곤한데 여러 군데 찾아다닐 것도 없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해변 모래밭에 깔아놓은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인도맥주 킹 피셔와 주먹보다 큰 새우 4~5마리를 구워 시작한 낮술은 그날 석양 무렵까지 이어졌다.생면부지의 땅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친절하게 말을 걸어준 아밋과는 당연지사 친구가 됐다. 그는 칼랑구트 해변에 산재한 수십 군데의 노천카페 중 한곳에서 일하는 종업원.아밋이 다른 종업원까지 모조리 데려와 소개를 시켜준다. 제 출신지와 이름을 말하는 그들. 나또한 짧은 영어로 맞장구를 쳤다. 반갑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 맥주 한잔 할래, 저기 있는 친구도 불러와라...급하게 들이켠 낮술의 취기가 도도해졌고, 한국에서처럼 인도에서도 술 마신 사람 특유의 느긋함과 낙관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대략 6~7시간쯤을 노천카페에 앉아 술 마시고, 밥 먹고, 놀았는데 함께 사진 찍은 사람이 30명은 됐던 것 같다. 국적과 이름과 직업과 월급의 액수를 묻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것의 2배쯤 더 많았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인도를 여행하다가 우리 동네에 오면 꼭 한 번 놀러오라”는 초대도 여러 차례 받았다. 오후가 되니 해변을 오가며 조잡한 액세서리와 튀김, 과일 따위를 팔러 다니는 노인과 아이들도 많았는데, 그들도 옆자리에 앉히고 감자칩과 콜라 따위를 대접하며 잠시 쉬어가게 했다. 물론, 그들 손에 들린 액세서리와 파파야, 말린 망고도 사줬다.그런 취기도도함 속에서 아라비아해를 달구었던 태양이 바다 속으로 스며드는 시간이 왔다. 아… 해질녘의 칼랑구트 해변이란. 감탄사를 남발하는 문장이 유치하단 걸 알지만, 어찌 그 풍광을 감탄사 없이 기억의 회로 속에서 불러낼 수 있을까. 근사했다. 필설로 형용이 어려울 만치.해가 지고 노천카페 천막 안에 형광등이 켜질 때쯤 운동화를 아밋에게 선물했다. 그는 그걸 신지도 않고 자신의 사물함으로 보물인양 고이 모셔갔다. 데이트 할 때 신으려고 그랬던 걸까? 기자의 맨발엔 가게 안을 굴러다니던 낡은 슬리퍼가 신겨졌고, 그걸 신은 채 낯선 인도음악에 맞춰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손목에 있던 시계는 또 다른 종업원에게 선물했다. 그는 흔한 손목시계 하나에 너무나 기뻐했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오가며 자랑했다. 낡은 시계 하나로 누군가를 그토록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니, 기자 역시 기꺼웠다. 역시 얻어먹는 술보단 사는 술이 맛있고, 무언가 도움을 받는 것보단 베푸는 게 더 행복한 법이다.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니 돌아갈 시간이 됐다. 더 마시다간 만취해서 실수라도 할 판이었다. 계산서를 보니 거의 공책 한 페이지에 빽빽하게 그날 기자가 먹고 마신 품목들이 기록돼 있다.킹 피셔 맥주 12병, 인도 전통주 `캐슈 페니`가 4잔, 스프라이트와 콜라가 20병, 돼지고기와 식초, 토마토로 만든 `빈달루`, 새우구이, 감자칩 5접시. 이걸 모두 다 먹고 마셨는데 한국 돈으로 4만원이 조금 넘는다. “인도는 인심 쓰기에도 좋은 나라구나”라고 생각하며 흔쾌히 계산을 했다.돌아오는 길에선 작가 루이제 린저(1911~2002)의 소설 속 문장을 여러 차례 반복해 혼잣말로 흥얼댔다.“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끝이 난다. 고통 또한 그렇다.”지난 번 여행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인도로 출발할 당시 이런 마음을 가졌었다.“한 달 만에 거대한 나라 인도의 모든 걸 다 보려고 하는 건 욕심이다. 마음을 비우고 근사한 곳이 있다면 거기서 여행 내내 머문다 해도 뭐가 문제겠는가. 어차피 과거의 풍경 속에서 쉬러 가는 것인데.” 칼랑구트 해변에서 수십 명의 인도 사람들과 술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잘 구운 차파티와 감자튀김을 먹으며 행복했던 날을 보내고 나니 이런 생각은 보다 구체화되어 가슴을 채웠다. 해서, 4일쯤을 칼랑구트에 머물렀다. 인도여행이 27일이었던 걸 감안하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기간 내내 아밋이 일하는 노천카페에 앉아 시원한 킹 피셔 맥주를 느긋하게 마시며, 출렁이는 파도와 오가는 인도 관광객들을 구경했다. 물론, 그들과 함께 사진 찍고, 국적과 직업, 이름과 월수입을 하루에 100번쯤 말해줘야 하는 즐거운(?) 고역도 계속됐다.낮술의 취기가 적당히 오르면 20대 시절 읽었던 이외수(1946~)의 `영주 풍경`을 조용히 읊조리기도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됐기에 더없이 즐거웠던 칼랑구트 해변의 나날이었다.누가 어진 마음으로 살라하여 그리 되더냐가만히 두어도 어진 산비탈오늘은 사과꽃 눈부시게 만발 하였으니이런 날 도(道) 따위 닦아 무엇에 쓰리영주 땅 가득히 엎질러진 햇살부처님 진신사리도 녹아드는데.돌아가고 싶은 인도의 바다… 그 곳에서 `유유자적` 선량하게 늙어가고 싶다누구나 가끔은 이런 혼잣말을 한다. “내가 발 딛고 선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너무나 길고 지루하구나.”`지금 이곳`이 아닌 `다가올 날, 또 다른 곳`을 꿈꾸는 건 어쩌면 인간만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딘가로 훌쩍 떠나 또 다른 삶을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기자 역시 `오늘`과 `여기`가 아닌 `내일`과 `다른 공간`을 꿈꾸며 살아왔다.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큰 그림은 이미 머릿속에 그려져 있다. 한국이 아닌 인도의 남부, 서울이나 포항이 아닌 깨를라주(州) 바르칼라에서 나머지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것.돈 몇 푼에 얼굴 붉히고 드잡이하는 게 아니라 유유자적을 지향하며, 빛깔 잃어가는 수채화처럼 선량하게 늙어가고 싶다.10년 전쯤이다. 무시무시한 태풍이 다가온다는 인도방송의 뉴스를 들은 날. 바르칼라 해변으로 갔다. 풍문대로 인도 몬순(monsoon)은 거칠었다. 절벽 위에 늘어선 야자수 아래 시퍼런 바다가 천지창조의 그날처럼 미친듯 들끓었다. 거대한 태풍이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인간이란 `찰나 생(生) 찰나 멸(滅)` 하는 보잘것없는 존재. 어떤 이에겐 `적멸`이 아름답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까.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새벽. 혼자서 바르칼라 해변을 거닐었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수십 마리의 개들과 사이좋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생전 하지 않던 조깅을 했을 뿐. 그리고, 비에 젖은 담요인양 무겁게 내려앉은 남부 인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결심했다.“언젠가는 여기로 돌아와 생의 나머지를 살아가리라.”가슴 안에서 지워낼 수 없는 단 한 사람, 자신의 전 생애를 걸어 이루고 싶은 목표가 하나라도 있는 인간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 끝끝내 돌아가고 싶은 생의 `어느 한 때`와 `특정 공간`을 품고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행복할 것이다.비단 바르칼라 해변만이 아니다. 그해 기자가 떠돌았던 칼랑구트, 베나울림, 팔로렘, 코발람 해변의 짙푸른 파도와 눈앞에서 숭어떼처럼 튀어 오르던 소금기 묻은 햇살을 떠올리면 `여기 이곳`에서 아등바등 살아간다는 사실이 참으로 춥고 서글프다. 곧 겨울이 온다.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0-28

인도인의 도저한 낙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차에 오른 대부분 승객들이 짐이 엄청나게 많다. 평균 4~5개씩은 돼 보였다. 아, 그렇구나. 한국에서야 기차로 여행할 수 있는 가장 긴 구간이 서울-부산이고, KTX를 탄다면 이동에 3시간이 채 안 걸린다. 하지만, 인도는 2~3일을 기차 안에 머물 수도 있으니 `살림을 통째 옮겨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았다. “아, 인도는 크구나. 크고도 넓구나.” 새삼스런 깨달음이 허탈한 웃음을 불렀다.뭄바이를 출발한 기차는 해가 저물 때까진 별문제 없이 달렸다. 브라만 아줌마와 함께 기차 안을 오가는 차이 장수를 불러 차(茶)도 마시고, 먼지와 쓰레기를 치우며 기자의 발밑을 수시로 걸레질하는 아이에게 “고맙다”며 작지만 팁도 줬다. 그 소문이 어디서 어떻게 퍼졌는지 자리로 찾아오는 아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고, 대략 4~5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돈을 줬던 것 같다. 누웠다가, 앉았다가,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다가, 승강장 난간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다가를 반복하며 10시간쯤 달렸을까? 멈춰선 기차가 1시간이 넘도록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이거 큰일이네. 티빔역(驛)에서 호텔로 나를 데려다줄 사람이 이제나 저제나 목을 빼며 기다리고 있을 텐데”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켜둔 조명이라곤 깜빡거리는 낡은 형광등 서너 개가 전부인 조그만 간이역에서 멈춘 기차의 연착 시간이 1시간을 훌쩍 넘어 2시간에 가까워지니 심사가 조급해졌다. 그런데 이것 봐라. 안절부절 못하며 밖을 내다보며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사람은 기자 하나뿐이다. 승객 대부분이 멈춰버린 기차에는 관심이 없는 듯 콧노래나 부르고 있었다.이 `괴이한 낙관`을 한참동안 지켜보자니 놀랍게도 기자의 마음까지 느긋해졌다. 기차 난간을 내려가 웃는 얼굴로 모여 웅성대는 사람들 틈에 끼어 기차가 멈춰선 이유를 귀동냥했다. 10여 명의 인도인이 기자를 둘러싸고 그 연유를 설명해줬다. 기차의 엔진이 고장 났고, 그걸 고치다가 여기에선 수리가 불가능하단 걸 알고는 고장난 엔진을 실은 기차 한 량을 새로운 엔진이 있는 도시로 보냈다는 것. 이곳에서 그 도시까지는 편도 2시간 거리. 기차가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을 합하면 4시간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2시간은 더 기다려야 기차가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발을 동동 굴러봐야 소용이 없을 터였다. 에라, 모르겠다. 낮게 코를 골며 잠든 브라만 아주머니처럼 기자도 기차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새벽은 어두운 밤을 인내하며 기도한 사람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 내처 엎드려 잔 사람에게도 공평하게 왔다. 갑자기 이성부(1942~2012)의 시 `봄`이 떠올랐다. 시인은 봄을 기다렸고, 기자는 `새로운 엔진`을 기다렸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그렇게 뒤척이다 얼핏 잠이 들었는가싶었는데 눈을 떠보니 수리를 끝낸 철마(鐵馬)가 언제 멈춰있었냐는 듯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승무원에게 “여기가 어디냐? 티빔역은 아직 멀었느냐”고 물었다. 바로 다음이 목적지인 티빔이란다.늦어진 열차 도착시간 때문에 마중 나온 사람이 가고 없을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었다. 100여 명의 노숙자가 몸을 포개가며 누워 있는 새벽의 티빔역 대합실. 기자의 영문 이름을 쓴 피켓을 든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늦었는데 왜 안 가고 있었느냐”는 물음에 “당신을 기다려 목적지로 데려가는 게 내 책무”라고 답한다. 인도 사람들이 책임감 없고, 약속을 안 지킨다는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이 사람만을 놓고 보자면 말이다. 청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해변 근처 호텔로 갔다. 곤히 자던 종업원이 눈을 부비며 여권을 받아들고 숙박부를 가져온다. 호텔은 썩 괜찮았다. 침대 시트와 커튼이 깨끗했고, 욕조까지 있었다. 미지근한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곤 인도산 `킹피셔 맥주`를 한 병 급하게 들이켰다. 라벨에 새겨진 물총새가 귀여웠다.인도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이틀간 수천km의 거리를 비행기로 날아오고, 기차로 달려왔다. 그 고단함은 `지상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답다`는 아라비아해가 보상해 줄 것이다.샤워를 하고, 어슬렁어슬렁 해변 산책을 나선 게 오전 10시쯤이었다. 해변은 노천카페로 몰려든 인도인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다. 태국의 푸켓이나, 필리핀의 보라카이와 별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이제 겨우 날이 밝았건만 벌써부터 해질녘이 기다려졌다. 독특한 인도 음식들저마다의 특성을 지닌 음식을 맛본다는 건 한 나라의 문화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인도 역시 음식을 통해 기후와 관습, 종교적 특성과 금기까지를 짐작할 수 있다. 힌두교도들은 쇠고기를 먹지 않고, 무슬림은 일생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종교적 금기이기 때문이다. 덥고 습한 날씨는 다양한 향신료를 즐기는 인도의 음식문화를 만들어냈다. 많게는 하루에 10잔 이상 차(茶)를 마시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게 인도다.■ 카레 (Curry)사전적 의미로는 `강황과 생강, 후추와 마늘 등의 향신료를 섞어 만든 매콤한 음식물`을 뜻한다.인도 사람들은 `커리`라고 발음한다. 카레의 재료가 되는 향신료는 앞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수천 종에 이른다.인도인들은 갖가지 채소와 각종 고기류, 여기에 수십 종의 향신료를 섞어 카레를 만든다.이렇게 요리된 것을 밥이나 빵에 곁들여 먹는 게 인도인들의 주식이다. 한국에서는 다소 걸쭉하게 만들지만, 인도의 카레는 묽고 향이 강한 게 특징이다. 인도를 처음 방문한 여행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향기 탓에 질색하는 경우도 있다. ■ 차파티 (Chapati)품질 좋은 인도의 밀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둥글게 반죽해 화덕에 구운 빵이다.인도 북부사람들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차파티를 먹는다. 여행자들 역시 이 지역을 방문하게 되면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다.재래시장 허름한 점포에서 차파티를 굽는 상인들은 거의 `서커스`에 가까운 기술로 반죽을 하고, 뜨거운 화덕에 적당한 크기로 자른 빵반죽을 척척 붙여낸다.관광객들에겐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효모나 팽창제를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와 물, 소금만을 이용해 만들기 때문에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차이 (Chai)인도만이 아니라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남부아시아 전역에서 사랑받는 음료다. 뜨겁게 끓인 홍차에 소나 양의 젖을 섞은 것으로, 지역에 따라선 생강과 계피 등 각종 향신료를 첨가해 만들기도 한다. 인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최소 하루에 수십 번은 차이를 마시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자신의 카스트에 자부심을 가진 브라만(Brahman)에서부터 세탁업이나 청소업에 종사하는 가장 낮은 카스트 계급의 사람들까지 차이를 즐기는 것은 똑같다. 가격도 마시는 곳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호사스런 호텔에서는 1만원을 받기도 하지만, 조그만 토기에 담아 거리에서 판매하는 차이는 한 잔에 100~200원이면 맛볼 수 있다.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0-21

손바닥과 눈동자만 하얀 인도인들, 미소는 순도 100% 순백색

뭄바이를 향하는 비행기 안. 수천 미터 상공에서 마신 포도주 2병의 취기는 헛된 상념을 불렀다. 그 잡스런 생각을 깨뜨린 건 “곧 뭄바이 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었다. “아, 드디어 인도구나.” 인천공항에서부터 4시간을 늦게 이륙한 에어인디아 항공기는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새벽녘에 인도에 내려앉았다. 뭄바이공항은 1970년대 후반 한국의 조그만 도시 버스터미널인양 괴괴했다. 게다가 내리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다.한국인 한명도 없는 낯선 인도 뭄바이공항 도착호텔로 가는 길, 수백명 노숙자들 모습에 충격과 공포인도여행 포기하고 파리·시드니로 도망가고픈 충동도다음날 아침 한국과 같은 일상 모습에 다시 인도 품으로 스스로 외로움을 느끼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라고 믿어왔는데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외로웠다. 한국 땅에서 발 뗀지 겨우 10시간 남짓임에도. 그러나, 시인 정호승(1950~)이 그랬던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그래 나도 사람이구나`라는 혼잣말로 가슴 속에서 슬금슬금 고개를 내미는 고독을 토닥였다.찾아야할 큰 짐이 없어 바로 입국수속대에 섰고, 세관 검사까지 통과하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입국심사대에 선 공무원은 할리우드 배우 덴젤 워싱턴과 사무엘 잭슨을 섞어놓은 듯한 얼굴의 미남이었다. 그가 입국 도장을 “쾅” 소리 나게 찍어주며 웃음 섞어 “웰컴 투 인디아”라고 말해주는 게 고마웠다.공항 픽업을 위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도인이 기자를 마중 나왔다. 그가 묻는다. “짐이 이게 전부인가요?” 다른 여행객에 비해 터무니없이 조그만 가방을 보며 하는 소리다. “네. 심플하죠?” 어깨를 들썩이며 그가 씨익 웃는다.어떤 이물질도 섞이지 않는 순도 100%의 웃음. 그 웃음이 그만의 전매특허인 줄 알았는데, 지내고보니 인도 사람 대부분이 그처럼 순한 소처럼 웃었다. 여행 내내 그게 그렇게 보기 좋을 수 없었다. 웃음은 때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주는 삶의 에너지로 역할한다.그를 따라 승합차에 타고 뭄바이 시내를 달렸다. 숙소인 헤리티지호텔로 가야했다. 한 10여분을 달렸을까. 이게 뭔가? 손바닥과 눈동자만 하얀 색으로 구분할 수 있는 시커먼 사람들 수백 명이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이불도 없이 누워있다. 그랬다. 한국에서 이미 책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뭄바이엔 동양에서 가장 거대한 슬럼이 똬리를 틀고 있다. 허나, 책을 통해 알게 된 간접지식은 그 실체를 목격하는데서 오는 놀라움을 완화시켜주지 못했다.2차 이라크전 당시 조지 부시와 도널드 럼스펠드 등 미국 국방지휘부가 바그다드에 수십 만 톤의 폭탄을 쏟아 부은 작전명이 절로 떠올랐다. 그 작전의 이름은 `충격과 공포`. 기자의 머릿속에서 스커드 미사일과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굉음을 뿜으며 충돌하고 있었다. 인도 첫날의 체험이 안겨준 `충격`과 `공포`였다.그 충돌의 굉음은 헤리티지호텔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귀를 먹먹하게 했다. 산다는 것 혹은, 견딘다는 것은 무엇이고 인간의 존엄과 최소한의 사람다운 생활이란 또 뭐란 말인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편치 않은 건 마음만이 아니었다. 도로를 달려올 때부터 코끝에 묻어온 생선 비린내와 무언가가 썩는 냄새가 아침까지 떠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적지 않은 여행경비가 가방 안에 그대로 있으니 인도여행을 포기하고, 내일 당장 파리 또는, 시드니행 항공권을 알아봐야하는 게 아닌가라고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민 속에 아침은 밝았다. 환해져서 사물과 사람을 제대로 분간하게 되니 캄캄절벽 같았던 밤보단 마음이 훨씬 나아졌다. 오전 9시 정도면 새벽에 공항에서 만난 픽업맨이 뭄바이역으로 기자를 안내해주러 올 것이다. 한시바삐 아라비아해의 석양과 만나고 싶어 뭄바이-티빔(해변이 있는 인도의 도시)간 기차표도 한국에서 예약을 해둔 터였다. 커피 한잔 마시는 것으로 조잡한 호텔 조식을 포기하고 환해진 바깥을 1시간쯤 산책했다. 그런데, 이것 봐라. 사람 사는 모습이 한국이나 인도나 별 다를 바 없다. 분주한 출근길을 서두르는 양복 차림의 사람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인도 전통복장의 여성들, 신문과 담배를 파는 가판대 역시 활기가 넘친다.피부색과 옷차림만 달랐지, 서울이나 포항의 아침과 다름없는 풍경이다. 갑자기 몇 시간 전의 고민이 우스워졌다. `그래, 파리나 시드니는 무슨 얼어 죽을…`. 바깥으로 전화기를 꺼내놓은 구멍가게에서 엄마에게 인도 도착을 알렸다. 국제전화 치곤 무척 싸다. 음료수와 담배도 샀는데 그렇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바가지도 없다.약속시간에 30분이나 늦은 픽업맨은 “기차 시간에 늦지 않겠냐”는 우려를 딱 한마디로 일축했다. “노 프라블럼!” 그의 말처럼 기차 시간엔 늦지 않았다. 생수와 비스킷을 사서 열차에 올랐다. 픽업맨이 좌석까지 따라와 “즐겁게 여행하라”고 인사를 한다. 대략 12시간이 걸린다는 고아주(州) 티빔까지의 여정. 2-2 좌석 시스템인 한국과 달리 영국풍으로 설계된 인도의 철로는 폭이 넓은 광궤(廣軌)라 3-3의 형태를 가진 기차가 많다. 기자가 예약한 좌석 타입은 2A(한 칸에 2개의 침대가 있는 형태). 인도에서의 첫 번째 열차여행이고, 처음부터 체력을 고갈시키지 말자는 생각에 편한 걸 선택했다. 위쪽 침대칸에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브라만(Brahman·인도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 아주머니가 탔다. 그녀는 자식이 둘인데 아들은 대학 졸업 후 뭄바이에서 IT 계통의 일을 하고, 딸은 대학생이란다.인도에선 카스트가 없는 외국인을 무시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괜히 기죽기 싫어서 “내 할아버지는 철학자”라고 말했다. 약간의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조부가 읽었던 중국의 철학서 `논어`와 `시경`이 아직 집에 있으니.그런데, 깨를라(뭄바이에서 기차로 약 40시간이 걸리는 인도 남부지역) 간다는 이 아줌마가 챙겨온 짐을 보곤 기절할 뻔했다. 커다란 보온병에 짜파티(인도인들이 즐겨 먹는 밀가루 부침개) 20여 장, 짜파티에 싸먹는 각종 소스가 7~8가지, 거기에 속에 든 것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짐 보따리 3~4개까지. 그 양이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로 이민 가는 사람의 짐을 방불케 했다. 아예 살림을 다 떠메고 온 듯 보였다. “이게 인도 사람들의 기차여행 스타일인가”라는 혼잣말을 했다.매력적인 인도의 해변통상 인도라고 하면 고대의 힌두 유적과 이슬람 유적,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의 독특한 생활풍습을 가장 큰 관광 메리트로 꼽는다.하지만, 인도에는 푸른 파도 출렁이는 아름다운 해변도 많다.특히나 아라비아해의 석양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아래 소개하는 해변들을 찾아본다면 인도여행이 보다 즐거워질 것이다.◆ 안주나 해변`고아(Goa·바다에 인접한 인도 서부지역)의 보석`으로 불리는 곳이다. 196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의 히피들이 찾기 시작해 유명세를 탔다. 일 년 내내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으로 매주 열리는 `벼룩시장`이 유명하다.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인도에 머무는 장기여행자들이 자신에게는 쓸모없어진 다양한 물건들을 거래한다. 비단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만이 아니라, 여행정보를 주고받고 젊은이들의 불꽃 튀는 연애(?)가 이뤄지는 곳으로도 이름이 높다.◆ 팔로렘 해변고아의 해변들 중 가장 늦게 개발돼 비교적 `문명의 때`가 덜 묻은 곳이다. 하늘을 향해 팔을 뻗어 올린 늘씬한 야자수.그 나무그늘 아래서 맛보는 파인애플 주스 한 잔은 더운 날씨에 지친 여행자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해 뜰 무렵 넓은 모래밭을 달리다보면 인근 동네에서 수영하러 온 인도 아이들의 환한 미소와 만날 수 있다.야외 테이블을 갖춘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어보는 것도 즐거운 체험이다.◆ 바르칼라 해변인도 남서부에 위치한 해변.깎아지른 듯한 모래언덕 아래로 펼쳐진 거대한 원시의 바다가 인상적이다.대부분의 숙소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최고의 전망을 자랑한다.이 해변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역설적이게도 태풍이 몰려오는 5~6월. 거친 몬순(monsoon·계절풍)이 불어오는 바르칼라의 바다를 마주하고 있으면 수백 만 년 전 석기시대로 돌아간 기분을 느낄 수 있다.사진제공/송선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0-14

`인식의 색맹`을 치유하러 가는 길

마침내 인도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 왔다. 그날 아침도 사람들은 출근버스 혹은, 전철을 기다리며 어젯밤의 숙취와 피곤이 덜 풀린 얼굴로 정류장과 플랫폼을 서성이고 있었다. `사는 게 별 게 아닌데 다들 저렇게 도살장 끌려가는 소같은 표정으로 겨우겨우 삶을 견디고 있구나`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자 괜히 쓸쓸해졌다. 동시에 이성복(1952~) 시 `그날`의 몇 구절이 떠올랐다.나는 보았다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삶까지 솎아내는 것을집 허무는 사내들이자기 하늘까지무너뜨리는 것을...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몇 사람이 죽었고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여전히 붐볐지만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모두가 병들었는데 병들어 아프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상. 시인의 예민한 촉수는 현대사회의 병들어 곪은 환부를 이처럼 담담하게 더듬어 노래하고 있었다.동시에 밀려오는 자괴감. `나는 내가 병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인가?` 답하기 쉽지 않았다. 인도여행은 그 답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인도여행 준비물에 문고판 이성복 시집도 포함시켰다.가방을 열어 빠진 여행용품이 없나 체크하고, TV와 DVD 플레이어 전원을 뽑고, 도시가스 밸브를 확인하고 문을 나섰다. 드디어 `유사 타임머신`인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 번 시간을 넘는다.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한 걸음 떨어져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인도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시인 김수영의 진술처럼 “멀리서 먼 곳을 볼 수 있는” 시간. “무지보다 경계해야 할 건 인식의 색맹이다.” 근사한 문장이다. 지금은 고등학생 딸을 키우며 단조로운 일상을 살고 있는 친구 L. 30여 년 전 그는 정열과 광기를 가진 문학청년이었다. 열여덟 살 때던가? 늦은 밤 L이 보여준 습작소설 속에서 저 문장을 발견했고, 이후 수십 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문장이 주는 현재성은 기자에게 여전하다. 인도를 향하던 기자는 이 글귀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새삼 다짐했다. `자신이 아는 것만을 전부로 생각하는 바보가 되지 말자`고. 인식의 색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다양성의 통로를 열어놓고, 존재하는 사물 자체의 이면까지를 들여다보려는 노력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비록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의 전언처럼 “우연히, 무상히 이 땅에 털어진 피투성의 존재”일지라도. 이제껏 책과 풍문을 통해 체득한 인도에 대한 사전 정보 모두는 여기, 이 땅에 두고 마음을 비운 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인도를 먼저 여행한 몇몇 사람들이 글과 말을 통해 유포하는 편견과 선입견은 인식의 색맹을 부르는 무서운 부젓가락이다. 제 눈을 찌르기에 딱 좋은. 한국어판 인도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과 이성복 시집, 반바지 하나에 반팔 티셔츠 2개, 조그만 디지털카메라, 여권과 환전한 달러가 인도여행 한 달을 위한 준비물의 전부였다. 수천km 떨어진 외국이 아닌 뒷동네로 산책 가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탑승 안내방송이 귀에 들려왔다. 에어인디아 승무원은 한국 스튜어디스와는 전혀 다른 편안한 복장과 푸근한 몸피로 기자를 맞아주었다. 인도의 향기(?)로 가득한 기내식도 먹었다. 첫 번째 경우지인 홍콩까지는 대략 2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그제서야 주위를 꼼꼼히 둘러봤다. 인도로 가는 한국 여행객이 적지 않다. 대부분은 기자보다 10살 이상이 어린 친구들로 보였다. 놀라웠던 건 남자보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는 것.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밝고 맑아서 참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왜 고민과 방황이 없겠는가. 사람이란 다들 평생을 살아도 해결할 수 없는 내밀한 비밀과 수수께끼 하나쯤은 지니고 사는데. 다만, 그 비밀과 수수께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 그들 또한 청년실업과 20:80사회, 88만원 세대와 비정규직 등의 단어가 주는 중압감에 매일같이 시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홍콩을 출발해 두 번째 경우지인 델리에 도착한 비행기는 다시 한 시간 남짓 급유와 안전 점검을 마친 후 최종 기착지 뭄바이를 향해 엔진소리를 높였다. 많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델리에서 내렸다. 그들은 거기에서부터 인도여행을 시작할 터였다. 젊기에 더 큰 가능성이 열려있는 20대 청년들에게 소설가 황석영(1943~)을 흉내내 이런 응원을 마음속으로나마 전했다.“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치운다고 너를 욕하는 어른들의 손가락질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네가 무얼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네가 하고 싶은 일만 하기에도 생은 턱없이 짧다. 지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네 영혼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라가라. 결국 낙원이란 네 바깥이 아닌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인도의 독특한 교통수단 `릭샤`를 타보셨나요오로지사람의 힘으로 끄는자전거 개조한 인력거도움 주고싶지만힘겨워하는 모습에맘 편히 타지는 못해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교통수단이 있으니 바로 릭샤(Rickshaw)다.통상 `인력거`라고 번역되지만, 방글라데시와 태국,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지에서는 사람이 끄는 힘으로 달리는 것이 아닌 오토바이를 개조한 형태의 릭샤들이 주를 이룬다. 택시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에 익숙한 한국이나 일본 관광객들에게는 `릭샤`로 이동하는 자체가 여행의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방콕, 프놈펜, 비엔티안, 시엠립, 다카 등의 도시엔 오늘도 수천 대의 `오토 릭샤`(auto-rickshaw·오토바이를 개조한 교통수단)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사람이 끄는 인력거 형태의 릭샤와 자전거를 개조한 `싸이클 릭샤`(Cycle-rickshaw)는 이제 인도가 아니면 보기 힘들어졌다.처음 인도에 도착한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얼씨구나 릭샤에 오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는 이들이 많다. 조그만 체구에 야윈 다리로 릭샤를 끄는 릭샤왈라(인력거꾼)의 등이 온통 땀으로 젖어드는 것을 보는 순간부터다.기자의 경우도 인도 남부의 한 도시에서 싸이클 릭샤에 올라 1km쯤을 간 적이 있다. 평지에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릭샤왈라가 오르막길이 나타나자 숨을 몰아쉬며 종아리 근육이 불거지도록 페달을 밟는 걸 보며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던 경험이 있다. 낡은 자전거와 낡은 슬리퍼, 늙은 릭샤왈라가 지나온 만만치 않았을 세월이 자연스레 상상됐기 때문이었다. 사실 인도에서 인력거나 싸이클 릭샤를 타느냐, 마느냐는 복잡한 문제다. 릭샤왈라의 육체적 힘겨움을 생각하면 타지 않는 게 옳지만, 그들은 릭샤를 타는 손님이 지불하는 푼돈으로 그날 가족들이 먹을 밥과 반찬거리를 구한다. 릭샤에 오르자니 마음이 아프고, 외면하자니 릭샤왈라의 애절한 손짓을 외면하기가 힘들다. 이런 게 바로 인도여행의 딜레마(dilemma) 중 하나다. 다행히 최근엔 인도 정부에서도 릭샤를 비인간적인 교통수단이라 판단해 이를 차츰 없애고 오토 릭샤 등으로 교체하고 있다고 한다.그런 이유로 앞으로는 인도의 인력거꾼인 릭샤왈라들을 보기가 힘들어질 듯하다. 현재 남아있는 릭샤왈라들은 그 희귀성 탓에 해외 여행지의 독특한 문물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10-07

과거의 풍경을 찾아 `유사 타임머신`에 오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엄마를 따라 놀러간 경상남도 삼랑진 작은 마을에서 외갓집 구들장을 해체하는 작업을 우연찮게 지켜봤다. 1983년 혹은, 1984년 무렵이다. 황토와 볏짚으로 잘 반죽한 단단한 흙덩이들이 몇 번의 곡괭이질과 삽질에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무너지는 흙바닥. 묵은 먼지가 공중으로 비산했다. 콩나물해장국의 감칠맛을 위해 할머니의 손바닥에서 “바스락” 부서지던 새빨간 마른고추 분말처럼.시간을 뛰어넘는 타임머신 타 듯`옛날식 정취` 찾아 떠난 인도큰 땅덩어리·낙후된 교통수단마음·욕심 다 비우고거대한 인도여행을 시작하다외가는 엄마가 멀고 먼 바닷가 도시로 시집가기 전 23년 하고도 몇 개월을 더 머문 곳이다. 그 구들장 위에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유년을 보낸 엄마와 30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홀로 5남매를 키웠던 외조모의 가파른 생을 떠올리니 백석(1912~1996)의 시 한 구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여승(女僧)`이다. 섶벌같이 집 나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고향마을에서 자신이 살았던 집의 따스한 아랫목이 허물어지는 걸 지켜보며 엄마는 말이 없었다. 눈망울이 허했다.하지만,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과거는 과거일 뿐, 그리움만으론 추억이 실체로 복원되지 않는다. 풀 뜯어 염소 먹이고, 차가운 개울에서 기저귀 빨며, 일 나간 외할머니 대신 갓 돌 지난 막내를 업어 키우던 엄마의 추억이 먼지처럼 혹은, 마른고추 분말처럼 흩날리는 그곳에서 기자는 그녀에게 과거를 돌려주고 싶어졌다. 가난과 슬픔의 힘으로도 결코 지워낼 수 없는 명백한 기억.사람은 인정하건 부정하건 기억 속을 산다. 엄마는 일찌감치 그걸 알아차린 사람이다. 하여, 그녀의 아들인 기자는 현재나 미래보단 과거를 흠모하는 사람이 됐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한숨짓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해!”라고 일갈한 고은(1933~) 시인이 보자면 혀를 찰 일이지만, 어쩔 것인가.엄마를 닮은 `과거를 흠모하는 소년`은 자랐다.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에서도 겁 없이 뿌리를 내리는 맹그로브처럼. 서른이 넘기 시작하자 소년은 자신이 사랑하는 `과거`의 풍광을 지닌 곳으로 떠나기 위해 해마다 한두 번 혹은, 1~2년에 한번쯤 여행 가방을 꾸렸다. 여타의 여행자들처럼 대형배낭도 아니었다. 중고등학생들이 책가방으로 이용하는 가로 30cm 세로 50cm가 넘지 않는 그야말로 `조그만 보따리`.그것 하나 달랑 메고 `과거의 아름다움`을 아는 엄마가 가지 못한 길을 홀로 짚어가며 `과거의 풍광`을 찾아다녔다. 그곳이 바다이건, 강이건, 호수이건. 모자(母子)는 `물`을 좋아하는 것까지 닮아있었다. 그렇게 다녀온 곳이 태국과 라오스, 베트남과 캄보디아, 일본과 이란, 필리핀과 몽골, 터키와 불가리아 등이었다.거기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이 좋았다. 온종일 해먹에 누워 원시의 풍광을 지닌 바다와 강을 바라보며 자신이 처한 팍팍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선량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즐거웠다. 그 즐거움이 여행 취향을 고착시켰다. 그 `고착`이 싫지 않았다.인도여행을 결정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두 군데 직장을 거쳐, 인터넷신문에서의 기자생활이 6년에 이르던 시점. 1개월간의 휴가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감성 가득하고, 관용 넘치는 사람들이 산다는 프랑스 파리에서 문학청년 시절 그토록 닮고 싶어 했던 아르튀르 랭보(1854~1891)처럼 한 달만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과거 흠모`의 지향을 이기지 못했다. 기자가 여행한 어떤 나라, 어느 도시보다 `옛날식 정취와 인정`을 볼 수 있는 곳이 인도라고 생각했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의 현재는 인도의 과거보다 아름답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 관해선 설명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살아오는 내내 기자는 1983년 혹은, 1984년 외갓집 구들장이 무너지는 장면을 엄마와 함께 바라본 바로 그 시간, 우울하고 먹먹했지만 또한 한없이 따스했던 기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못 말리는 과거지향”이라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국경을 오가는 비행기란 `시간을 뛰어넘는 유사 타임머신`이다. 여기에 몸을 싣고 짧게는 3~4시간, 길게는 10시간쯤의 지겨움을 견뎌준다면 그 `유사 타임머신`은 기자가 살아보지 못했던 1960년대 혹은, 더 이전의 시간들 속으로 나를 데려가준다. 비행기란 분명 매력적인 `문명의 선물`이다.우여곡절 끝에 인도여행을 결정했지만, 문제는 거기부터 시작이었다.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수십 배가 더 큰 땅덩어리, 게다가 교통수단도 낙후된 탓에 도시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정보. 여기에 “인도에서의 한 달 여행은 한국의 2박3일 벼락치기 관광보다 짧게 느껴진다”는 풍문을 어렵잖게 얻어들을 수 있었다.심플해지기로 했다. 평생을 투자해도 모두 다 눈에 담을 수 없는 거대한 나라의 풍광 전체를 한 달 만에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인도여행은 시작됐다. 인도는…01세기 동안 영국의 식민지, 1947년 독립힌두어·영어 공용화폐 단위는 루피… 우리 돈 1천원은 약 60루피남부 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로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됐다. 한 세기에 가까운 기간을 영국의 정치·경제적 지배를 받다가 1947년에야 독립했다. 이런 이유로 아직까지 영국식민지 시절의 모습이 사회 각 분야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정식 명칭은 인도공화국(Republic of India). 힌디어로는 바라트(Bharat)라고 표기한다. 서쪽엔 파키스탄, 북동쪽엔 중국과 네팔, 동쪽엔 방글라데시와 미얀마가 자리하고 있다. 인접국인 중국과 심각한 국경분쟁을 겪었고, 1962년엔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종교가 다른 파키스탄과도 카슈미르 지역 영토분쟁을 포함한 갈등을 겪고 있다.불교가 태동한 지역이며, 예전엔 천축(天竺)이라 불리기도 한 나라다. 국토 면적(328만7천263㎢)이 세계에서 7번째로 넓고, 인구(12억 명)도 중국에 이어 세계 2위. 행정구역은 28개 주(state)와 7개 연합주(union territory)로 구성됐다.수도는 델리. 또 다른 대도시인 뭄바이는 `인도의 경제수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도 아리아족이 인구의 72% 이상을 차지하고, 숫자에 있어서는 드라비다족과 몽고족이 뒤를 잇는다. 힌두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80%가 넘는 사람들이 힌두교도며, 이슬람교(13.4%)와 기독교(2.3%)를 믿는 이들도 있다. 화폐단위는 루피(Rupee)로 한국 돈 1천원은 약 60루피. 외교적으로는 한국과 북한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으나, 최근엔 국력과 경제적 측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한국과의 관계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공식적인 한국-인도간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은 1973년. 한국에서 철강과 시멘트 등의 중간재를 수입하고, 철광석과 원면, 피혁제품 등을 수출한다.나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힌두사원과 이슬람교당, 석굴사원과 고대 문명의 흔적은 인도를 `신비롭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여행자들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드넓은 땅덩어리로 인해 남부와 북부, 동부와 서부간의 문화 차이가 크다. 그것이 관광객들에겐 매력으로 다가온다. 한 나라에서 여러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것.순박하고 세파에 찌들지 않은 대다수의 인도 사람들은 외국인을 호의적으로 맞아준다. 환한 웃음으로 베푸는 친절과 배려는 낯선 환경에 곤혹스러움을 느낄 이방인들을 따스하게 위로한다.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또한 여행하기 편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류태규

2016-09-30

코토르, 아름다움과 폐허의 공존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나면 가방 몫으로 낸 차비(1유로)가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열 살 꼬마 차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동양의 산수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장엄한 산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그 아래로 투명한 계곡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몬테네그로의 풍광은 여행자를 부드럽게 압도한다.이끼 낀 성벽 품은 절경의 돌산고급 요트와 크루즈선박 풍경 뒤깨진 유리창과 폐건물이 방치오랜 식민지·큰 지진까지낭만과 폐허, 아름다움과 슬픔이공존하는 코토르의 추억코토르와 부드바의 해변 역시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멋들어진 백사장과 짙푸른 물빛을 태양 아래 드러내며 관광객들의 탄성을 불렀다.수평선 근처에 기기묘묘한 모양을 하고 선 기암괴석도 장관이었다. 오랜 여행에 지친 기자는 아드리아해가 준 선물인양 몬테네그로의 풍경을 끌어안았다. 조급한 마음이 푸근하게 가라앉는 듯했다.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몬테네그로 국경을 넘으니 일단 사용하는 화폐가 달라졌다. 이전 여행지 알바니아에선 `리케`라는 단위의 돈을 사용했는데, 몬테네그로는 `유로`를 사용하고 있었다.체감 물가가 3배는 높았다. 알바니아에선 600~700원쯤에 마시던 콜라가 몬테네그로 슈퍼마켓에선 2천원이 넘었다.하지만, 소시지나 햄 등의 육가공품이나 견과류, 향과 맛이 좋은 포도주는 비교적 저렴했다. 그게 긴 여정에 지친 술 좋아하는 여행자를 위한 배려처럼 느껴졌다.어쨌거나 셔츠가 온통 땀으로 젖는 고생 끝에 자정이 가까워서야 아드리아해와 접한 몬테네그로의 바닷가마을 코토르에 도착했다. 이제 몸을 씻고 머리를 누일 방을 구해야한다.다행히 숙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국제버스가 오가는 코토르 터미널 대합실에 키가 훌쩍 큰 모녀가 호텔을 예약하지 않고 그곳을 찾은 여행자들에게 다가서며 제 집에서 묵기를 청하고 있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민박집 호객`이었다.법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착해 보이는 모녀. 엄마와 딸 모두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그랬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조그만 팸플릿과 사진을 통해 하루치 숙박비와 방의 상태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적힌 가격은 1박에 10유로(약 1만2천500원).기자가 별다른 흥정 없이 그 모녀를 따라가 그들의 낡은 아파트 방 한 칸을 3일간의 숙소로 삼은 건 2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딸의 부끄러워하는 미소가 너무 예뻤기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 거대한 고성, 화려한 크루즈선박, 그리고 비극코토르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딸이 끓인 터키식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챙겨 먹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검은 산`이라는 나라 이름을 증명하듯 이끼 낀 거대한 성벽을 제 품에 안고 있는 가파르고 거대한 돌산이 절경이다.해변엔 어디에서 온 것인지 고급 요트 수십 척이 줄지어 정박돼있고, 항구에는 족히 1천명은 싣고 항해가 가능할 것으로 짐작되는 크루즈선박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아드리아의 바다 색깔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재론의 여지없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그런데, 휘황한 관광지를 벗어나 시내 외곽으로 나오니 전혀 다른 풍광이 기자를 맞이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손님이 들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는지 가늠키 힘든 텅 빈 호텔과 관리가 전혀 안 돼 있는 수영장, 깨어진 유리창 뒤로 푸른 하늘이 그대로 올려다 보이는 폐건물, 거기에 무슨 이유에선지 조금은 주눅이 든 표정으로 해변을 서성이는 동네 사람들.몬테네그로의 요약된 역사는 포털사이트 검색기능을 이용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그걸 주절주절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직접 그 도시를 경험한 사람의 느낌이 앞으로 몬테네그로를 여행할 이들에게 더 유용한 정보가 아닐까.최근 독립을 이룰 때까지 너무나 긴 시간을 불가리아와 이탈리아, 오스만제국의 식민지로 지냈던 몬테네그로. 거기에 현재까지 이어지는 경제적 궁핍 때문일까?눈이 부신 바다와 입이 떡 벌어지는 웅장한 석산 아래 그림처럼 펼쳐진 도시임에도 코토르는 어딘지 모르게 `폐허`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그러나, 다시 역설적이게도 코토르에서 만난 석양은 터무니없이 낭만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어차피 낭만이란 단어 속에는 `폐허`와 `퇴폐`의 이미지가 숨겨져 있으므로. # 자연재해가 입힌 상처의 깊이는…폐허의 느낌과 사람들의 우울한 표정에는 이유가 있었다.그 이유를 숙소 주인 모녀의 친척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오래 전 큰 지진이 우리 마을을 덮쳤어요.”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기자가 감지했던 폐허의 냄새에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민족에게 식민지 경험이 유쾌할 수 있겠는가?일본의 식민통치를 겪은 한국인이라면 그 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연재앙까지. 집단적 고통과 공포의 체험이 코토르 사람들의 마음속에 `폐허`를 만든 것이었다.지진은 미소가 예쁜 딸에게서 아버지를 뺏어갔고, 딸은 그때부터 말수가 적어졌다고 한다.아내는 생활을 유지해주던 남편의 월급이 사라진 후 아파트 방 한 칸을 여행자용 숙소로 내놓아야 했다. 역사와 자연재해가 이들 모녀에게 입힌 상처는 그 깊이가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기자는 코토르를 아름다움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가끔 `불행 속을 살아가는 몬테네그로 코토르의 모녀`를 떠올린다. 그럴 때면 너나없이 인간 모두의 가슴 안에 자리한 황량한 `폐허`가 동시에 보이는 듯하다. 꼭 봐야할 몬테네그로의 보석 같은 도시들다녀온 사람이 드문 것은 물론, 나라 이름조차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몬테네그로. 하지만, 거길 여행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몬테네그로는 동유럽의 숨겨진 보석”이라고. 가장 마지막까지 세르비아의 정치·경제적 지배하에 있었던 사연 많은 국가.아래 세 도시는 말 그대로 몬테네그로의 `숨겨진 보석` 같은 곳들이다. 더 늦기 전에 배낭을 메고 둘러봐야 할.▲ 포드고리차(Podgorica)발음되는 이름이 조그맣고 예쁜 `포드고리차`는 몬테네그로의 수도다.로마가 그 위용을 떨치던 시기에는 듀클리아(Doclea)로 불렸고, 중세에는 리브니차(Ribnica)라는 이름을 얻었다.현재의 명칭으로 불리게 된 건 1326년.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있기도 했고, 세계 제2차대전 직후인 1946년엔 유고슬라비아연방국의 하나가 됐다.이처럼 드라마틱한 사연을 겪었기 때문일까?포드고리차엔 로마의 유적과 터키 지배 당시의 건물, 거기에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사회주의의 향기까지 공존한다.그렇기에 다양한 사회문화적 유적과 흔적을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리브니차강(江)과 모라카강을 바라다보며 훈제된 연어를 안주로 맥주 한 잔 마시다보면 “역사란 무엇이고, 그 안에서 살아온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겨울엔 스키를 타기 위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도 흔하다.▲ 부드바(Budva)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몰리는 탓에 떠오르고 있는 몬테네그로의 `핫 플레이스`.연중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가 매력적인 도시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이 `그리스신화`에도 등장한다.15세기부터 300년 이상을 베네치아공화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불과 40여 년 전 `지진`이라는 크나큰 자연재해를 겪었으나, 신속한 복구로 오늘날 아름다운 모습을 갖췄다. 올드타운은 베네치아공화국 시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거기에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해변과 이반(St. Ivan)성당, 세인트 마리(St. Mary)성당의 장엄함이 매력을 더하는 도시다.▲ 코토르(Kotor)사파이어의 색채로 반짝이는 아드리아해와 중세에 축조된 거대한 성벽으로 이름 높은 도시. 로마시대부터 번성하던 곳이었고, 그때 지어진 요새가 아직 존재한다. 불가리아의 통치 아래 있던 시절이 있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도 받았지만, 식민지의 설움과 이민족의 폭정도 이 도시의 빼어난 자연환경까지 파괴하지는 못했다.1979년 해안에서 발행한 대지진으로 시가지의 절반이 파괴되는 아픔도 겪었다.그러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아직은 세파에 찌들지 않은 환한 웃음으로 여행자들을 반긴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9-23

`꼬마 차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을 달리다

아드리아해(海)가 아름답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재론의 여지도 없다. 푸른색 잉크 수 만 병을 흩뿌려놓은 듯한 사파이어빛 바다. 그 바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오래된 도시의 붉은색 지붕들. 이 배경에 빠질 수 없는 양념처럼 등장하는 웅장한 석조 고성(古城)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리트, 이탈리아의 아말피와 포지타노... 남부와 동부 유럽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의 절반은 아드리아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자의 생각에 고개 끄덕여 동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이탈리아 포지타노의 깎아지른 절벽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는 아드리아해의 시끌벅적함도 흥겹고, 크로아티아의 중세도시 혹은, 쪽빛 물결 춤추는 흐바르(Hvar)섬에서 만나는 아드리아해 서쪽은 관광객이 드문 탓에 넉넉한 여유로움이 더해져 보다 멋지다.그러나, 사견임을 전제한다며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움과 가장 낭만적으로 만날 수 있는 도시는 단연 몬테네그로의 코토르다. 사실 `도시`라기보다는 조그만 어촌마을에 가까운 그곳에서 기자는 “때론 폐허가 완벽보다 매혹적”이라는 문장의 참뜻을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 코토르, 그곳에 가기 위해선 체력과 시간이 필요한국의 여름만큼이나 뜨거운 동유럽의 여름. 입을 열어 국명을 말하는 이가 드문 나라이자, 아름다운 풍광에 관한 이야기를 풍문으로밖에 들은 바 없는 몬테네그로를 향했다. 목적지는 바다와 산이 동시에 반기는 코토르.몬테네그로 이전의 여행지는 알바니아의 한적한 시골마을 베라트였다. 거기서 코토르까지는 우리식 표현으로 “천리 먼 길”.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식사도 거른 채 부랴부랴 여행 가방을 꾸렸다. 해가 지기 전에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의 국경을 넘어야했으니 마음이 바쁜 건 불문가지.알바니아의 소읍 베라트를 출발한 낡은 버스가 시커멓고 가쁜 숨을 연신 토해내며 4시간 만에 티라나에 도착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알바니아엔 `버스터미널`이란 게 아예 없다. 행선지에 따라 길거리 또는, 광장에서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알아서 타야 하는데, 알바니아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여행자들에겐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그러나, 어디서나 궁하면 통하는 법. 입은 말을 하라고 뚫려 있는 것이다. “모르면 물어라”. 이건 배낭여행자가 가슴에 담아둬야 할 가장 중요한 슬로건 중 하나다. 열두 번을 묻고 또 물어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국경에서 가까운 도시 수코드라로 가는 버스의 출발지를 찾았다. 당시 남동부 유럽의 기온은 섭씨 35도를 오르락내리락. 그야말로 폭염이었다. 한국처럼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는 드물고,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 대부분인 알바니아. 갈증에 목은 타들어가고, 날리는 흙먼지가 코를 막았다. 게다가 알바니아의 버스는 예정된 도착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 언제 올지 기약 없는 수코드라행 버스를 기다린 지 2시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때서야 저 멀리서 털털거리며 다가오는 버스. 매연을 뿜어대는, 20년은 됐을 법한 구형 차량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좌석은 스프링이 튀어나와 삐걱거리고 셔츠는 땀으로 젖었는데 에어컨도 없다.그런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렸으니, 수코드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속된 말로 진이 빠졌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설 수는 없었다. 몬테네그로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오전과 오후 하루에 딱 2번만 운행하는 울치니(Ulcinj)행 버스를 수소문해야 했다.다행이었다. 40분 후에 출발한다는 `기쁜 소식`을 한 여행자가 들려준다. 이제야 알바니아-몬테네그로 국경을 넘는구나. 어림짐작으로 계산해보니 올리브 몇 알과 손바닥만한 통밀빵 하나를 씹으며 베라트를 출발한지 13시간이 넘어서고 있었다. # 몬테네그로에선 `배낭`도 차비를 내야 한다?덴마크와 독일에서 온 대학생들과 함께 울치니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재미있는 모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몬테네그로 버스에는 한국의 1970년대처럼 차장이 탑승하고 있었다. 승객들의 승·하차와 자리 배정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차장.그런데, 놀랍게도 울치니행 버스의 차장은 열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였다. 덴마크 청년 하나가 “어이 꼬마야”라고 농담을 하니, 정색을 하며 “내 이름은 꼬마가 아니고 스티브”란다. 영어 발음도 또랑또랑하고, 행동도 의젓해서 `소년`이라 불러줘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수코드라를 출발한 버스가 알바니아 국경을 넘어 몬테네그로의 최남단 도시인 울치니에 가까워질 즈음, 그 `꼬마 차장`이 승객들로부터 버스요금을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어디에서 탔는지 기억했다가 승차거리에 따라 요금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모습이 듬직하면서도 귀여웠다. 이윽고 꼬마, 아니 `소년 차장` 스티브가 우리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당 11유로를 내란다. 독일에서 온 대학생이 물었다. “다른 승객들에겐 10유로를 받더니 왜 우리한테는 11유로를 내라고 해?” 똘망똘망한 답변이 돌아왔다. “저분들은 큰 배낭이 없지만, 당신들은 저보다 큰 배낭을 가지고 탔잖아요. 그것들이 버스를 비좁게 만들었고요.” 대화는 한 번 더 이어졌다. “몬테네그로는 배낭한테도 차비를 받아?” 이 질문에 대한 `소년 차장`의 똑 부러지는 대답이 차 안 승객들 모두를 웃겼다. “배낭도 아름다운 바다와 산을 여행하잖아요. 그 비용이 1유로면 싸지 않나요.” 위트 가득한 `꼬마 스티브`의 미소 저편에서 짙푸른 바다와 웅장한 성벽의 도시 코토르가 다가오고 있었다. 몬테네그로는…한때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던 발칸반도의 남서부에 위치한 국가.구(舊) 유고슬라비아연방국의 하나였다가, 불과 10여 년 전인 2006년 독립했다. 정식 국명은 몬테네그로공화국(Republic of Montenegro).북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동쪽으로는 세르비아, 남쪽으로는 알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가 사파이어 빛깔로 아름답게 일렁인다. 몬테네그로는 `검은 산`을 뜻하는 세르비아어.깎아지른 듯 거대한 바위산을 나라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에 지어진 이름이다.수도는 포드고리차(Podgorica), 인구가 66만여 명의 불과한 매우 작은 국가다. 면적은 한반도의 1/7인 1만3천812㎢. 몬테네그로계(43%)와 세르비아계(32%)가 인구의 다수를 이루고 있고, 소수의 보스니아계와 알바니아계 주민도 함께 거주한다.세르비아정교를 믿는 이들이 국민의 70%. 이슬람교도도 20% 정도로 적지 않다. 얼마 되지 않지만 가톨릭신자도 존재한다.화폐는 유로화를 사용하며 1유로는 한화로 약 1천250원(2016년 9월 기준). 1인당 GDP는 7천 달러 정도다. 공식 언어는 몬테네그로어인데, 문서와 서류 등에는 라틴문자와 함께 키릴문자를 동시에 표기한다.몬테네그로는 아름다운 국가다. 서쪽 해안의 길이가 300㎞에 가깝고, 눈에 띄게 매력적인 풍경으로 이뤄져있어 관광성수기인 여름철에는 서유럽과 북유럽 관광객들 다수가 요트나 유람선을 타고 방문한다. 그들은 이름난 휴가지인 코토르(Kotor)나 부드바(Budva) 등에서 낭만과 휴식을 즐긴다.코토르는 중세도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된 곳으로 베네치아공화국시대의 향취가 아직도 거리 곳곳에 남아있다. 1166년에 축조된 `성 트뤼폰(St. Tryphon)성당`과 길이가 5km에 이르는 고대 성벽은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수려한 해변도시 외에도 코모비산(山), 시냐에비나산 등은 웅장하고 장엄한 풍모로 멀리서 온 여행자를 압도한다. 폐수를 배출하는 공업지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강물도 투명할 정도로 깨끗하다. 여기서는 낚시나 래프팅을 즐기는 가족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침식작용에 의해 오랜 시간 자연스럽게 깎여나간 협곡도 몬테네그로가 자랑하는 빼놓을 수 없는 풍광의 하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스러움과 신비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타라(Tara)협곡`이 그 중 백미다. 한국과는 2006년 9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9-09

아름다운 라오스… 더 아름다운 사람들

마음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고요한 강변 풍경, 끝없이 이어지는 고적한 황톳길,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양식으로 축조된 불교사원의 지붕, 방치된 듯 버려졌지만 그 안에 수천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대의 유적들… 라오스의 풍광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아름다운 건 라오스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기자가 만난 라오스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행을 하다보면 현지인 친구가 생긴다. 특정 도시에 오래 머물 경우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 1주일을 같은 숙소에서 머문 루앙프라방에서도 몇몇 친구들이 생겼다.그중 한 청년은 한국인이 교수로 와 있는 대학에서 영어를 배운다고 했다. 인터넷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군데 싹싹하고 예의를 지킬줄 알았다. 나이는 스물 하나. 자기 학교를 구경시켜준다며 숙소 앞으로 왔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규모인 조그만 대학에서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다가 돌아오는 길. 그 친구가 “우리 집에 가서 함께 저녁 먹어요”라고 청했다. 그리고, 이어진 충격적인(?) 발언. “내 아내가 요리를 잘 해요”. 스물한 살짜리가 아내가 있다고? 더 놀라운 건 와이프 나이가 열여덟이란다. 충격은 또 이어졌다. “나는 평범해요. 빨리 하는 애들은 열여섯에 결혼합니다.”그 `꼬마 신랑`이 어떤 아내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라도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라오스는 결혼하면 남자가 여자 집으로 들어간다. 당연지사 집엔 그 친구 장인과 장모가 있었다. 장인은 쉰셋인데 자식이 11명이라고 했다. 아들 셋에 딸이 여덟. 기자가 아는 그 청년과 결혼시킨 딸은 9번째 자식이란다. 막내아들은 이제 겨우 11살. 열여덟 살 아내가 요리를 하면 얼마나 잘 하겠나. 한국에서라면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도시락 싸서 학원이나 다닐 나이인데. 그런데, 놀라웠다. 채소와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국과 민트에 칠리소스를 더한 `라오스식 샐러드`가 제법 맛있다. 처음으로 먹어본 라오스 가정식 요리. `꼬마 주부`의 성의가 더없이 고마웠다.“당신은 11명의 아이를 만든 슈퍼맨”이라는 기자의 농담을 사위가 통역해주자, 쉰셋 사내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가족들만을 불러 모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 그토록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라니.기자는 형제가 많은 이들이 부럽다. 어려울 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조건적으로 기댈 곳이란 결국 가족이 아닌가. 적은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도 크게 웃을 수 있는 그 옛날 한국의 대가족 풍경. 그와 닮은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 스물한 살 신랑과 열여덟 살 신부가 고마웠다. 물론, `슈퍼맨` 장인어른도. 라오스 여행에서 만난 이들 중 기자의 가슴을 조용하게 흔든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라오스에선 스님들의 탁발(托鉢)을 매일 볼 수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허겁지겁 고양이세수만 하고 거리로 나서면 저 멀리서 맨발의 탁발승들이 다가온다. 그중 특히 눈에 띄는 건 어린 승려들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동승(童僧)이 되어 절에서 먹고 자고 글도 배우며 몇 년씩 지내는 게 라오스의 일상적인 풍습. 비엔티안에서 만난 열여섯 동승도 아주 어릴 때 집을 떠나 절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형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면 그걸로 대학을 가고 싶다”고 하는 소년의 얼굴이 쓸쓸해보였다. “대학을 마치면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의젓했다. “은행원이 돼서 부모님과 형제들을 보살피고 싶어요.”그날 기자는 어서 빨리 그 동승의 아버지가 대학 입학금을 모으기를, 그 열여섯 소년이 대학을 마치고 월급을 300달러(이 돈은 라오스 노동자의 평균임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다) 받는다는 은행원이 되기를 빌었는데, 지금쯤 그 동승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루앙프라방에선 사전에 전해들은 정보를 통해 어린 스님들은 찰밥보다는 사탕, 초콜릿, 과자를 더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새벽에 시주를 받아 절에서 그걸 나눠 먹을 때가 되면 밥보단 과자에 손이 먼저 간단다. 왜 그렇지 않겠나. 승복만 벗으면 이제 겨우 열 살, 열한 살 꼬마들인데.거리로 나가 과자를 파는 상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많은 동승들이 이 길로 지나가나요?”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답했다. “아마 120~130명쯤 될 거예요.” 50개 들이 중국산 과자가 2달러(약 2300원)다. 3박스를 샀다. 그러면 150개. 하나씩 다 나눠줄 수 있는 숫자다.희부옇게 밝아오는 여명. 저 멀리 조용한 루앙프라방 새벽 거리로 탁발승들이 나타났다. 각각의 사찰에서 늙은 스님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서열 혹은, 나이에 따라 줄지어 행렬을 이루는 것으로 추측됐다. 30~40여 분을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동승들의 행렬. 탁발이 다 끝나니 날이 밝았다. 과자가 30개쯤 남았다. 그건 기자 옆에 있던 꼬마소녀의 종이박스에 넣어줬다. 탁발행사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동승에게 나눠주는데 몇몇 아이들은 오히려 빈 종이박스를 든 채 동승들이 건네주는 걸 받고 있었다. “왜 저러는 것이냐”고 물으니, 가난한 집 아이들이란다. 가난한 동승이 더 가난한 또래 친구를 도와주는 눈물겨운 풍경.예닐곱 살로 보이는 소녀가 바나나와 찰밥, 과자 따위가 담긴 종이박스를 옆에 놓고, 식은밥을 손으로 뭉쳐 아주 조금 먹었다. 노점상은 “소녀가 얻어가는 음식은 가족들의 하루치 양식”이라고 했다. 어지간해선 슬퍼할 줄 모르는 기자의 코끝이 찡해왔다. 시인 황지우에 의하면 “세상에 슬픔처럼 쌍스러운 건 없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착한 사람들이 사는 라오스는 기자를 슬픔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함께 밥을 나누는 존재인 식구(食口)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행복한 게 아닐까? 루앙프라방의 새벽은 무겁고도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라오스에서 뭘 먹지?값비싼 재료로 만들어진 고급 요리는 드문 나라가 라오스다. 하지만, 라오스 곳곳엔 오랜 전통을 지닌 특유의 음식이 적지 않다. 비엔티안, 방비엔, 루앙프라방 등 북부는 물론, 팍세와 시판돈 등 남부지역에도 기후와 토양에 맞게 발전해온 특색 있는 요리들이 존재한다. 아래는 맛보지 않으면 서운할 라오스의 3가지 음식이다. 이국의 향 가득한 채소를 곁들인 `쌀국수`내륙국인 라오스는 메콩강과 그 지류가 만들어준 비옥한 토양으로 인해 쌀농사가 잘 된다.당연지사 쌀 생산량도 적지 않다.연중 따스한 기후에 신의 선물처럼 주어진 기름진 땅에서 재배한 쌀로 만든 라오스의 국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트남 쌀국수`와 비교해도 그 풍미가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라오스 쌀국수는 돼지고기, 닭고기, 어묵 등과 함께 싱싱한 초록빛 채소가 듬뿍 담겨 있어 보는 이의 침샘을 자극한다.게다가 가격도 1천~2천 원 정도로 저렴해 라오스 서민들은 물론,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배낭여행자도 즐기는 음식이다. 찹쌀을 쪄 만든 밥 `카오니아우`집집마다 가스레인지가 보급되기 전엔 한국도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었다.모락모락 피어나던 부엌 굴뚝의 연기를 보면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뛰놀던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며 돌아왔다.라오스의 저녁 풍경은 수십 년 전 한국과 놀랍도록 닮았다. 찹쌀을 쪄서 만든 카오니아우는 라오스 사람들의 주식이다. 끈끈한 찰기가 있는 그 밥을 생강, 매운 고추, 라임, 마늘 등을 섞은 양념장에 찍어 먹거나, `탐막홍(tam mak houng)`이라 불리는 푸른색 파파야 샐러드와 생선을 반찬 삼아 먹는다. 설탕을 찍어 먹으면 한국의 인절미와 비슷한 맛이 난다. 강변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라오스 커피`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선 이름도 다양한 커피전문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세태 탓인지 예전에 비해 커피를 즐기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다.라오스 커피는 매력적인 향기와 독특한 맛으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라오스에선 커피를 `팍송(Pakxong)`이라고 부른다. 팍송은 지명이기도 한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아라비카 품종의 커피가 생산되는 곳이다. 방비엔이나 시판돈에서 고요히 흐르는 강을 보며 즐기는 한 잔의 커피는 갑갑한 도심에서 마시는 커피와는 그 맛과 향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9-02

라오스 길 위의 인연들

지난 회에 이어 다시 라오스 `슬로우 보트` 이야기다. 표현이야 근사하게 `슬로우 보트`지만, 사실 루앙프라방에서 출발해 태국 치앙콩 국경을 넘는 배는 낡고 조악한 목조 통통배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식당시설은 물론이거니와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화장실조차 없다. 대형 유람선의 음악 감상과 영화 상영? 꿈같은 소리다. 자칫 심심할 수 있는 이 여행의 말벗이 돼준 이들이 태국 여성 핌(pim)과 팜(pam)이다. 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직장생활을 10년쯤 하다가 가족과 친구가 있는 제 나라로 돌아온 30대 중반 여성 둘. 몇 해 전엔 핌이, 작년엔 팜이 한국을 찾았고 둘과의 해후는 다른 어떤 사람들과의 재회보다 반가웠다. 아래는 그 반가움의 이유다.2박3일간의 `장대한 국경 넘기 항해`가 끝난 마지막 날. 태국 치앙콩에서 핌과 팜 그리고, 기자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현금이 없는 내게 기꺼이 숙박비를 빌려준 둘에 대한 감사인사의 자리였다. ▲ 철없는 사내를 따스하게 감싸는 손길메콩강이 내려다보이는 야외 레스토랑. 알코올 함량이 50%를 넘는 토속주 `라오라오`를 초저녁부터 내처 들이킨 기자는 몽롱하게 취해있었다. 그런데, 식사가 막 시작될 무렵, 차려진 음식 위로 돌풍과 함께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열대성 스콜이었다. 주먹만한 빗방울만으로도 곤혹스러운데 갑작스레 불어 닥친 세찬 바람에 포도주잔까지 날아가는 황당한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졌다.그러나, 그건 전조에 불과했다. 곧이어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고, 설상가상 정전까지 돼버렸다. 비상전력으로 가동되는 가로등 따위가 없는 국경 인근 시골마을. 정전이 된 레스토랑은 그야말로 캄캄절벽이었다. 손님들은 물론 레스토랑을 정리하던 종업원들까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근데, 그 어둠과 폭우, 벼락에도 기자는 손에 든 술잔을 놓지 않았다. 취한 자의 호기였을까? 모두가 굵은 비를 피해 호텔 로비로 가는데 혼자서 출렁이는 메콩강을 바라보며 레스토랑 난간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팜이 로비로 가다말고 뛰어와 기자의 손을 잡았다. “그만 마시라”고, “우리도 빨리 비를 피하자”고 말하는데 그녀 손이 너무 따뜻했다.마흔을 넘긴 사내의 대부분은 천둥이나 번개, 어둠에 잠긴 강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팜은 손과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게 갑자기 불어온 돌풍 탓인지, 검은 하늘을 찢으며 번쩍이는 불빛과 귀를 때리는 벼락 소리 탓이었는지는 모르겠다.왜 그녀는 두려움을 떨치고 빗속을 뛰어왔을까? 아직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여성의 손은 따뜻하다는 것, 그 명명백백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을 뿐. 그리고, 당연한 순서처럼 아래와 같은 문장이 영화 자막인양 눈앞으로 흘러갔다. “맞다. 여성가 없다면 누가 있어 철없는 세상 남성들을 위로하고 안아줄 것인가. 다행이다. 세상에 여자가 있어서.”▲ 옥수수를 나누며 그녀들과 함께 웃다태국인 팜에 얽힌 추억 외에 라오스 사람들과 나눈 따스한 기억 역시 선명하게 떠오른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빼어난 시 100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무사(思無邪)라 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마음 안에 사악함이 없으면 표정에서도 그게 드러나는 게 사람이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만난 소녀들이 그랬다. 두 번째 라오스 여행에서 여장을 푼 첫 도시가 비엔티안이었다. 한 나라의 수도답지 않은 한적함이 좋았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라오스식 마사지`를 받으러 들어간 가게. 거기서 일하는 일곱 명의 아가씨들. 넷은 라오스 중남부 사완나켓, 셋은 그것보다 더 남부에 위치한 마을 팍세에서 왔다고 했다. 스물넷인 최고참 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19세에서 20세 사이.1달러어치 반짝이는 스팽글을 사와 흑백화면 핸드폰을 장식하는 그네들은 한국의 여고생들과 비슷한 취미를 가진 아이들이었다.손님이 없는 한낮의 마사지 가게. 수다를 떨며 옥수수를 먹고 있길래 “나도 하나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뭐가 부끄러운지 쪼르르 달려와 그것만 건네고 제 자리로 재빨리 돌아간다. 그 모습이 귀여워 옥수수를 더 사와서 나눠먹자고 했다. 한국 돈 2000원에 옥수수 10개. 옥수수 알을 뜯으며 영어를 못하는 그 소녀들과 라오스어를 하나도 못하는 기자가 뭐가 그렇게 좋았던지 손짓 발짓을 섞어 한참을 깔깔거렸다. 다음 날도 거길 다시 갔다. 삶은 옥수수 10개를 사들고. `서울 갔다 돌아온 나이 많은 큰오빠`가 비단구두를 사온 양 기뻐하는 아이들. 1시간 내내 처음 보는 사람의 몸을 마사지해주고 겨우 5500원을 받는 소녀들. 그중 절반은 가게 주인이 가져가고, 절반만을 자기가 가지면서도 언제나 웃는 아이들. 그 애들의 하루 수입은 5000원에서 7000원 남짓이라고 했다.일의 힘겨움 탓에 손바닥이 중년여성보다 더 거칠어진 그 아이들을 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서 어린 동생들 돌보며 빨래와 청소, 농사일까지 도맡아 하다가, 결국엔 동생들 스케치북과 연필 사줄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올라온 젊은 시골 여성들. 한국의 1970년대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기자는 그저 이런 혼잣말만을 중얼거렸을 뿐이다. “너희들 모두를 한국으로 초대해 핑크색 핸드폰 고리와 반짝이는 은귀걸이라도 하나씩 사주고 싶구나. 옷가게에 데려가 1만원짜리 티셔츠 한 장씩이라도 선물하고 싶구나. 너희들의 빛나는 젊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주위사방을 환하게 밝히지 않겠니.” 요즘도 가끔 궁금하다. 비엔티안 마사지가게 소녀들의 안부가. 여행자거리 외곽에 위치한, 지금은 상호를 잊어버린 마사지숍 꼬마숙녀들, 모두 건강하지?■ 나라 전체가 고요하고 평화로운 침묵 속에 잠들어있는 라오스. 선량한 미소와 순수함이 여행자를 감동시키는 라오스는 숨겨진 매력이 가득한 곳이다. 몇 해 전 케이블TV 유명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론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여행지가 된 비엔티안과 방비엔, 루앙프라방에서 해볼만 한 것들은 뭐가 있을까. ▲ 비엔티안에서 프랑스식 만찬 즐기기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희귀한 에피타이저와 메인 요리, 디저트 등으로 구성된 프랑스 정식. 한국에선 판매하는 곳도 드물뿐더러 원체 비싼 가격 탓에 맛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라면 큰돈을 가지지 않은 여행자라도 프랑스식 요리를 맛보는 `소박한 사치`를 즐겨볼만 하다. 비엔티안 중심가 곳곳엔 `프랑스 정찬`을 차려낸다는 레스토랑이 흔하다. 가벼운 샐러드와 전채요리, 쇠고기 또는 닭고기를 이용한 스테이크에 향이 풍성한 라오스 커피까지를 세트메뉴로 내놓는 레스토랑의 한 끼 식사비용은 대략 1만5천원에서 2만원. 이정도 가격이면 동행한 여자 친구나 아내에게 “오늘은 프렌치 스타일로 먹어볼까”라고 권할만하지 않을까? ▲ 방비엔에선 웅덩이로 다이빙을…메콩강 지류가 넘실대는 강변마을 방비엔에선 수상 레포츠가 제격이다. 물가를 따라 형성된 대부분의 호스텔과 게스트하우스에선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수상 레포츠 상품`을 판매한다. 1만원 안팎의 비용만 지불하면 트럭에 몸을 실은 채 시원한 라오스 맥주 `비어 라오`를 마시며 강의 상류로 올라가 튜브나 보트를 타고 하류로 내려오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강을 따라 줄줄이 마련된 `놀이광장`에서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화끈한 파티`도 준비돼 있으니 그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줄에 매달려 10m 아래 짙푸른 웅덩이로 다이빙 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졌다면 더욱 더 좋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아이돌 가수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 루앙프라방의 새벽은 동승(童僧)과 함께라오스의 고대왕국이 자리했던 고도(古都) 루앙프라방에선 오렌지 색깔의 승복을 입고 새벽마다 탁발을 다니는 어른 승려들을 만날 수 있다. 노승의 뒤를 따라 경건한 표정으로 줄지어 흙길을 걷는 동승의 하얗고 조그만 맨발을 보는 것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감동을 준다. 12~13세의 어린 라오스 승려들은 대부분은 가난한 형편 때문에 부모와 헤어져 사찰에서 생활한다. 이들에게 과자나 찰밥을 나눠주며 자신의 욕심 많은 삶을 반성해볼 수 있다는 건 라오스 여행의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8-26

메콩강변에서 `착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다

기자가 처음으로 라오스를 찾았던 해는 2007년이다. `지구에서 가장 조용한 수도`로 불리는 비엔티안에서 사흘, `파티`와 `급류 타기` 덕택에 아시아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강변마을 방비엔에서 사흘을 보냈다. 채 일주일에 미치지 못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여행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서였다. 몇 년이 흐른 후 다시 라오스를 찾았다.그때는 이전 여행보다 2배의 기간인 보름을 머물렀다. 조용하고, 선량하며, 부끄러움 많은 사람들이 사는 라오스.두 번째 방문에선 라오스 북부를 여행했다.고풍스럽고 매혹적인 도시 루앙프라방.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어린 스님들에게 과자와 찰밥을 나눠주는 재미에 빠져 6일을 머물다가 무비자 여행기간 만료가 임박해서야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갔다.이때 선택한 월경(越境)의 방법은 `슬로우 보트` 타기.평균시속 30km의 느리고 작은 목선을 타고 루앙프라방을 출발해, 팍뱅과 훼이싸이라는 중간 기착지를 지나 태국 북부 치앙콩으로 들어가는 2박3일의 낭만적인 국경 넘기.그 선택은 탁월했다. 만약 루앙프라방에서 출발해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면 절대로 볼 수 없었을 장면들을 수없이 목격했다.산중턱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는 원시적인 마을 풍광, 대나무에 줄 하나만 매달아 메콩강 지류의 물고기를 잡는 원초적 낚시법을 선보인 소수민족 청년, 이틀간의 동행에서 친구가 돼버린 태국 여성 핌(pim)과 팜(pam).평생 잊기 힘든 추억을 만든 `슬로우 보트 여행`이었다. 그 길고 긴 뱃길은 잊을 수 없는 몇 가지 기억을 기자에게 남겨줬다.♠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해봤던가?루앙프라방을 출발한 `슬로우 보트`가 중간 기착지 팍뱅에 도착한 시간은 해질 무렵. 극장과 서점은 물론, 그럴싸한 놀이문화 하나 없는 시골마을. 라오스 토속주 `라오라오`에 맥주를 섞어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든 터라 이튿날 새벽 일찍 잠이 깼다. TV도 없는 낡은 호텔방이 무료해 강가로 산책을 나갔다.거기서 보았다. 엄마는 다 떨어진 고무 슬리퍼, 아들은 맨발인 모자(母子)가 산에서 해온 것인지 적지 않은 장작을 쌓아놓고 커다란 바구니에 나눠 담고 있었다. 산악지대가 대부분인 라오스 북부의 4월은 한국의 늦가을처럼 춥다. 양말도 신지 않은 두 사람의 발은 분명 시렸을 것이다.그런데 이건 뭔가. 엄마는 자기 바구니에, 아들은 제 바구니에 더 많은 장작을 담으려 하고 있었다. 서로 무거운 걸 들고 가겠다는 소리 없는 싸움. 엄마는 장작을 이고, 아들은 장작을 지고 그들은 또 얼마나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 걸까?엄마는 자꾸만 아들 바구니에서 장작을 꺼내 자기가 이고 가겠다 하고, 이제 겨우 10살 남짓으로 보이는 아들은 그걸 제지하며 엄마의 바구니에서 장작을 다시 꺼내기를 수차례. 그건 보기 드문 아름다운 실랑이였다. 바라보는 기자의 목구멍이 휘발유를 삼킨 듯 뜨거워졌다.그리고, 기억의 회로를 뒤로 돌렸다. 마흔 살이 넘은 기자가 “엄마”라고 부르는 한 여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공자가 말한 바 세상사 미혹에서 자유스러워진다는 불혹(不惑)을 넘겼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도 엄마가 진 세상사 무거운 짐을 나눠 들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왔다.해서, 10살짜리 꼬마만도 못한 기자는 그토록 착한 아들과 선량한 엄마 앞에서 감히 사진기 따위를 들이댈 수 없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라고 물었다면 99%의 라오스 사람들이 그렇듯 그 모자도 하던 일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누가 있어 그 `위대한 엄마와 아들`을 주제넘게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을까?그들은 집으로 가는 길에 얼마나 자주 마주보며 웃었을까? 남은 삶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모자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 같다.♠ 대책없이 착한 사람들라오스는 딱 한마디로 정의가 가능하다. `착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여기엔 부연이 필요 없다. 가보면 알게 된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닳고 닳은 장사꾼도 보통의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순박하고, 친절하며, 선량하다.루앙프라방에 산재한 수많은 호텔. 그중 기자가 묵은 곳 인근 구멍가게를 자주 드나들었다. 아들 내외, 손자, 손녀와 함께 사는 할머니. 새벽 5시면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담배를 사기 위해 그 가게에 갔을 땐 10여 명의 가족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담배를 사서 나오려는데 할머니가 자꾸만 찰밥 한 점(라오스 사람들은 찰밥을 만든 후 일정량을 뭉쳐 국이나 소스에 찍어 먹는다) 먹고 가란다. 그날 아침, 낡은 밥상의 소박한 식사자리에 끼어 앉아 얻어먹은 찰밥의 맛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찍어 먹은 고추 소스의 향까지.이제는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조모의 정을 그 할머니에게서 대신 받았기 때문이리라.팍뱅에선 웃는 모습이 선한 아주머니 한 명을 만났다. 생선, 돼지고기, 소시지, 메추라기 따위를 숯불에 구워 파는 조그만 식당의 주인이었다.“배가 떠나기 전에 뭘 좀 먹어야지”라며 급히 들어간 식당. 하지만, 온통 바비큐뿐이었다. 아침부터 기름기 흐르는 고기를 먹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 나오려는데, “다른 곳에 가서 먹고 싶은 음식을 사와라. 무거울 테니 가방은 내가 지켜줄게. 사와서 여기서 먹어”라고 했다. 서툰 영어와 손짓으로 전한 의사 표현.한국 같으면 자기 식당에 밥 먹으러 들어와 메뉴만 보고 돌아서는 손님에게 “배낭 맡아줄 테니 옆 가게에서 드시고 싶은 걸 사와서 여기 앉아 드세요”라고 말할 식당 주인이 얼마나 있을까?순박함과 선량함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나라. 가난 속에서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 라오스 사람들. 단 두 번의 여행만으로 기자는 남은 생을 라오스에서 보내고 싶어졌다.라오스는…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내륙에 위치한 나라로 공식 국명은 라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이다. 수도는 비엔티엔이며, 국민의 대다수가 라오어를 사용한다. 95% 이상이 소승불교를 믿지만, 적은 수의 가톨릭교인도 존재하며 토착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다.인구는 약 650만 명, 면적은 23만6천800㎢(한반도의 1.1배)로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지대다. 1인당 국민소득이 1천700달러에 채 미치지 못하는 아시아의 빈국 중 하나.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경제적 상황과는 별개로 낙천적이다. 또한 순박하고 환한 미소로 외국인을 반긴다.라오족이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랴오퉁족(22%), 랴오숭족(9%), 베트남계(1%)도 함께 생활한다. 화폐 단위는 킵(Kip). 1달러(1천110원)는 약 8천 킵이다.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석과 목재가 많이 생산되고, 최근에는 커피가 주요 수출품으로 떠올랐다. 향과 맛이 독특한 라오스 커피는 그 품질을 인정받아 얼마 전부터는 한국의 주요 백화점에서도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1353년 란상왕국(Lan Xang)으로부터 시작된 라오스의 역사는 1800년대 후반 프랑스의 침략과 이어진 식민지배, 그로부터의 해방까지 숨 가쁘게 전개된다.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온전히 벗어난 때는 1949년 7월.이후 각각 미국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우파와 좌파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좌파인 `라오스 애국전선`이 1975년 정권을 잡았다. 현재 집권당은 인민혁명당.한국은 물론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국은 자동차, 자동차 부품, 원동기 등을 라오스로 수출하고, 라오스는 칼륨비료와 원목 등을 한국으로 수출한다. 비엔티안과 북부 루앙프라방, 남부 팍세 등의 도시에는 관광업에 종사하는 한국인들도 다수 거주하고 있다.많은 농민이 벼농사를 짓기 때문에 한국인들처럼 밥을 주식으로 먹는다. 서민들은 찹쌀로 지은 밥 `카오니아우(Khao Niew)`를 다진 고추와 생선액젓으로 만든 소스에 찍어 먹는 걸 즐긴다.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비엔티안과 방비엥, 루앙프라방 등엔 서양식 레스토랑과 중국 요리를 파는 음식점도 흔하다. 물론,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도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8-19

영화배우 같은 남자가 가져다주는 해산물 요리 어때요?

“이탈리아는 미남들이 사는 국가”라는 이야기는 한국을 포함한 동양 전역에 퍼져있는 풍문이다. 기자 역시 귀를 가졌으니, 그 말을 듣지 못했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건 뭐지? 남부 항구 바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숨을 헐떡이며 달린 끝에 나폴리역에 도착했다.그런데, 구걸로 삶을 이어가는 동냥아치도 패션쇼 무대 위에 선 모델처럼 잘 생겼다는 이탈리아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역 근처엔 기념품과 싸구려 바지와 셔츠를 파는 검은 얼굴의 사람들 뿐. 미남은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다.절벽끼고 위태롭게 달리는 낡은 버스, 두려움도 잊게만든 아름다운 풍경톰 크루즈보다 잘생긴 포지타노 식당 웨이터의 `이탈리아식 낭만` 정겨워이탈리아 북부와 남부는 경제발전의 차이가 전혀 다른 별개의 나라로 느껴질 정도라더니, 그 이야기가 과장이 아닌 모양이었다.듣는 사람에 따라선 화를 낼 수도 있는 비교가 될 것 같지만,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는 동남아의 빈한한 국가 라오스나 캄보디아보다 훨씬 더 지저분하고 우중충했다. 물론 기자는 알고 있다. 여행자가 처음 도착한 도시의 속내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전엔 동유럽을 4개월간 여행했다. 일부러 한국 식당이나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새로운 경험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에 보다 큰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음식을 먹은 지도 오래였다. 나폴리에선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자란 이들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된장찌개와 냉면을 즐기고 싶었다. 해서, 인터넷을 뒤져 나폴리역 인근 한국인 숙소를 찾았다.유럽은 도로와 건물이 일정한 방식에 의해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어, 길 찾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그러나, 그건 잘 그려진 지도가 있고, 길눈이 밝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형성됐을 때만이 가능한 일. 기자는 30년지기 친구 집도 갈 때마다 헷갈려 하는 사람이다.메모한 주소만 들고는 숙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다시 혼란에 빠졌다. 바리역에서 기차표 발매기 앞을 서성이던 것처럼 나폴리역 광장을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자서는 숙소를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바로 그때다. 이번에도 흑인 하나가 성큼 다가와 물었다. “도와줄까요?” 아주 짧은 그 물음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바리에서 만난 흑인과 달리 이 사람은 183cm인 기자의 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러나, 덩치와는 관계없이 새까만 얼굴에 떠오른 환한 미소가 더없이 착해 보였다. 입술 사이로 새하얗게 빛나는 가지런한 이가 눈부셨다.주소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걸 훓어본 그가 “따라오라”며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커다란 짐 보따리를 등에 멘 채로. 가고 싶어했던 한국인 운영 숙소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길을 찾아준 흑인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했다. 행상이 분명해 보이는 그에게 물었다. “보따리 안에 든 게 뭐냐?” 착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띤 채 그가 가방을 열었다.조악하고 가벼운 화산암으로 만든 이탈리아 여행 기념품이었다. 1개에 5유로, 3개엔 10유로라고 했다. 10유로를 주고 1개만 집어 들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기어이 5유로짜리 지폐를 거슬러주는 흑인의 친절. 진원지가 불분명한 감정이 밀려왔고, 이상스레 슬퍼졌다.흑인과 백인에 대한 차별이 살벌했던 시대의 미국. 흑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왜 서로 때리고 맞아야 하는 권투를 직업으로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맞으면 아프고, 상대를 때리는 것이 좋을 까닭이 없는 게 보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흑인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이란 한계가 분명합니다. 나 또한 권투선수가 되지 못했다면 거리를 떠도는 강도가 됐을 겁니다.”편견과 선입견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들. 피부색을 이유로 차별받는 흑인도 분명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언제쯤이 돼야 인간이 인간을 편견과 선입견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우리 앞에 도래할까? 이런 생각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그렇다고, 이탈리아 여행이 위와 같은 고뇌와 슬픔만으로 이어졌던 건 아니다. 유쾌함과 즐거움 또한 적지 않았다.이탈리아 남부의 해변도시 아말피와 포지타노. 그리고, 소렌토. 바위 위에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멋들어진 도시.그곳으로 가는 길. 100m가 넘어 보이는 절벽을 끼고 2차선 좁은 도로를 낡은 버스가 위태롭게 달렸다. 그러나, 누구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아름다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엽서 같은 풍경이 두려움을 멀리로 날려버렸다. 절경을 눈앞에 두고 터뜨리는 감탄사는 서양인과 동양인, 흑인과 백인, 아이와 노인이 다르지 않다는 걸 그 길에서 알게 됐다.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포지타노의 절벽 위 레스토랑. 음식과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종업원이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보다 더 잘 생겼다. 내려다보이는 바다의 색채처럼 푸르스름한 수염자국. 거기에 뚜렷한 이목구비. 세련된 헤어스타일에 커다란 키까지.프라이팬에 녹인 버터를 한 숟가락 떠먹은 양 느끼하게 발음되는 그의 이탈리어어가 더없이 정겨웠다. 요리를 주문하는 여자들 모두에게 윙크를 날리는 모습도 귀엽기 짝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며 깔깔댔다. 그가 부르던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아직도 기억될 정도다. 바로 이게 이탈리아식 낭만이 아닐까.다시 여름이 왔다. 푸른 바다가 그리운 계절. 아드리아해를 닮아 세상 누구보다 파란 눈동자를 빛내는 포지타노의 웨이터가 가끔 아니, 자주 그립다. 미식가의 나라 이탈리아에선 뭐 먹지?이탈리아는 미식가의 나라다. 열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이탈리아인들은 너나없이 맛깔스런 음식과 포도주를 앞에 두고 이야기 주고받는 걸 즐긴다.한국인들과 기질적으로 비슷하다. 한 나라를 여행한다는 건 그 나라의 문화를 알아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음식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의 하나. 이탈리아 사람과 여행자들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음식 몇 가지를 소개한다.▲ 담백한 맛이 일품인 피자이탈리아 피자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넓게 편 밀가루 반죽 위에 올리는 재료도 많지 않다. 약간의 치즈와 절인 올리브, 루콜라 등의 싱싱한 녹색 채소와 선명하게 붉은 토마토소스 정도가 전부다. 그렇기에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맛을 낸다. 특히 남부 나폴리 일대의 피자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빼어난 맛을 자랑한다.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일종의 멸치젓갈인 앤초비(Anchovy)를 곁들인 피자를 권한다. 걱정과 달리 전혀 비리지 않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해산물만약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섬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사파이어보다 아름다운 색깔로 빛나는 푸른 바다 근처의 레스토랑은 꼭 방문해야 한다. 은은한 숯의 향기가 배어 있는 싱싱한 생선구이와 남유럽 특유의 향신료를 가미해 만든 가재와 게 요리는 그 맛이 일품이다. 눈부신 햇살 아래 부서지는 하얀 파도를 내려다보며 즐기는 한 끼 식사. 금전적으론 부담이 되겠지만, 사랑하는 연인이나 아내를 위해 한 번쯤은 호기를 부려볼만 하다.▲이민자들이 즐기는 음식은 뭘까 이탈리아 전역엔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동에서 이주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떠나온 자신들의 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먹는 각종 전통음식들을 맛보는 것도 색다른 체험이다. 북아프리카인들이 즐기는 쿠스쿠스(Couscous·밀가루로 만든 좁쌀 모양의 알갱이에 익힌 고기와 채소를 곁들여 먹는 요리)와 터키와 이란 사람들이 좋아하는 케밥(Kebab·양념한 양고기나 닭고기를 구워 채소와 함께 먹는 요리)은 독특한 향기와 식감으로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내주 금요일부터는 특집기사 `포항지역 도서관 선진화를 위한 방안`을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홍성식의 지구촌 방랑기`는 8월 19일 다시 시작됩니다.사진제공/서지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7-08

흑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다

본격적인 이탈리아 여행기에 앞서 먼저 에피소드 하나.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통해 이탈리아에 입국하기로 결심했다. 알바니아에서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미남들의 나라` 이탈리아로 가는 길. 그러려면 먼저 알바니아 항구의 세관과 출입국사무소를 거쳐야 했다.한국선 `노안`으로 통하는 기자를 스무살이나 어리게 본 알바니아 세관영어가 불통인 이탈리아서 만난 흑인의 깨끗한 친절… 영화 속 편견 깨총이나 마약 등의 위험한 물건이 없으니 세관은 당연지사 무사통과. 문제는 출입국사무소에서 일어났다.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여직원이 기자의 여권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묻는다. “이게 정말 당신 여권인가?”답했다. “사진을 보면 알지 않느냐. 내게 맞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놀라웠다. “여기에 1971년 출생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면, 마흔 살이 넘었다는 건데, 당신은 스물다섯처럼 보인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한국에선 `노안`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사람인데… 혼자서는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던지, 옆에 앉은 동료 여직원 둘까지 불러 여권 사진과 기자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젊은 여자 셋이 동시에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황당하고 다소 부끄러운 상황. `서양인은 동양인의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렵다`는 세간의 속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속으로는 “첫사랑에 실패하지 않았으면 너희만한 딸이 있을 사람을 붙잡고 이 무슨 우스운 짓이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희끼리 알바니아어를 주고받으며 호호거리는 예쁘장하고 어린 그녀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코미디 같은 상황이 20분 이상 지속됐다. 아, 나이를 자그마치 스무 살이나 아래로 봐주는 여성이 있는 알바니아로 이민이라도 가야하나. 폐일언.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사건(을 뒤로 하고 천명이 넘는 승객을 태운 거대한 페리가 알바니아의 듀레스(Durres)를 출발, 밤이 내린 암청색 아드리아해를 유유히 헤쳐나가기 시작했다.꼬박 13시간을 항해해 도착한 곳은 이탈리아의 남부의 조그만 항구도시 바리(Bari). 알바니아와 마찬가지로 이탈이라 입국심사대도 시끌벅적했다. 이탈리아어와 영어, 독일어와 알바니아어까지가 뒤섞여 시장판을 방불한다.유럽인들의 휴가가 마무리 절정을 이룬 늦여름. 페리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관광객 때문에 2시간 넘게 땡볕 아래 줄을 서서 입국심사를 기다렸다. 더위는 짜증을 부른다. 동유럽 사람들에 비해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다소 시끄러운 이탈이라 사람들. 그들의 높아진 목소리가 목과 겨드랑이에 땀처럼 들러붙었다. 어찌 보면 이탈리아인들은 한국인과 기질이 비슷하다. 입국사무소 보안요원과 다혈질인 이탈리아 사람들의 말다툼이 시시때때로 벌어졌다. 2시간을 기다렸는데, 입국을 허가하는 도장을 여권에 찍는 데는 5초가 안 걸렸다. 이전에 여행한 동유럽 국가와 달리 “왜 왔느냐?” “여기 온 이유가 뭐냐”라는 등의 간단한 질문 하나 없었다. 이건 최근 여행한 프랑스 파리의 입국심사대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한 출입국심사는 이탈리아를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 출국심사장에서도 출국 도장을 단 1초 만에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 유럽에서 출입국 심사가 가장 간단한 나라가 이탈리아라고 했다. 올 테면 오고, 갈 테면 가라는 말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인 특유의 여유인지.우여곡절 같았던 알바니아 출국과 이탈이라 입국을 거쳐 바리 시내로 나왔다. 기자가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때는 그리스를 필두로 유럽의 경제공황이 가시화되던 시기였다. 버스기사들의 파업으로 시내버스가 운행하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인 나폴리로 가려면 바리역을 찾아야 했다.그런데, 이탈리아 바리 사람들,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 사람들보다 영어를 훨씬 못한다. “스테이션”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내뱉었지만, 그 단어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겨우겨우 기억을 소급해 역(驛)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스타지오네(stazione)`를 떠올렸고, 1시간 넘게 헤맨 끝에 역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문제는 연속해서 터진다. 서유럽과 남유럽에 비해 경제적으로 낙후된 동유럽의 기차역에서는 창구에서 직원이 표를 판매한다. 한국처럼 전산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아서다. 그런데 바리역에는 자동발매기밖에 없었다.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티켓 발매기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친다. 마르고 새까만 얼굴의 흑인 하나가 유창한 영어로 묻는다. “도와줄까요?” 사람의 선입견이나 편견이란 무서운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드라마에서 잔인한 범법자나 불량스런 깡패로 자주 등장하는 흑인들. 기자의 머릿속에도 그 이미지는 뚜렷해서 선뜻 “그래요. 고마워요, 나폴리 가는 기차표를 대신 좀 사주세요”란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와주겠다는 이가 그 흑인 하나뿐이니 다른 방법이 없다. 자동발매기 앞에서 물러서며 50유로(약 6만5천원)짜리 지폐를 그에게 건넸다. 뚝딱뚝딱…. 채 1분 되지 않아 승차권과 잔돈을 전해주며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채 인사도 전하지 못했는데, 이미 역 밖으로 사라진 친절한 흑인.친절한 흑인은 그 사람 하나만이 아니었다. 나폴리에 도착한 것은 해가 저문 늦은 밤. 그런데, 이건 뭔가? 사진으로 보고, 말로 듣던 나폴리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호주의 시드니,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와 함께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4대 항구도시`로 손꼽히는 곳인데… 직접 본 나폴리의 첫인상은 조금 과장하자면 `쓰레기 더미` 같았다. 기차가 나폴리역에 들어설 무렵부터 철로 위에 온갖 잡동사니 오물들이 가득하더니, 역 광장에도 쓰레기 천지다. 여름이었으니 그 냄새는 또 어땠겠나.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숙소를 찾아가야 한다는 게 `어려운 숙제`처럼 다가왔다. 또 한 명의 선량한 흑인을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탈리아는…유럽대륙 남부에 자리했으며, 정식 국명은 이탈리아공화국(Republica Italiana). 수도는 로마, 인구는 약 6천2백만 명. 수도인 로마에 270만 명이 거주한다. 면적은 30만1천㎢로 한국의 1.5배 크기. 농경지(37%)와 산림(29%)이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알프스산맥에 접한 북부는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동쪽은 아드리아해, 서쪽은 티레니아 바다와 맞닿아 있다인구 중 대략 4%가 아프리카인과 중동인, 동양인 등 외국인이다. 평균수명은 81.5세로 높은 편, 북부에는 프랑스계와 오스트리아계 사람들이 주로 생활하며, 남부지방에는 알바니아와 그리스 이민자들이 다수 거주한다. 유로화를 화폐로 사용하며 1유로는 한국 돈 약 1천300원.한국과는 1884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교를 맺었고, 1957년 9월 주한 이탈리아 한국대사관이 개설됐다. 국민의 대부분이 가톨릭교도이며, 소수의 무슬림과 그리스 정교도들도 존재한다. 대륙성기후를 보이는 북쪽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접한 지역에선 독일어와 프랑스어도 드물게 사용된다.파스타와 피자 등 서민적인 요리가 발달해 여행자의 입맛을 자극한다. 사람들의 기질은 열정적이고 유쾌하다. 북부 사람들은 세련된 패션 감각과 늘씬한 키로 유명하다. 반면, 남부는 소박하고 투박하지만 정이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관광지는 셀 수 없이 많다.수도인 로마는 `거리 자체가 고대박물관`이라 불릴만하고, 시칠리아를 필두로 한 남부의 섬들은 새파란 물빛과 맛깔스런 해산물 요리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르네상스시대 대가들의 그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성당과 종교 관련 유적, 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살고 있는 바티칸도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가보고 싶은 곳이다.사진제공/서지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7-01

동화같은 `용의 도시` 류블랴나

한국은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가 5천1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밀집형 국가다. 반면 슬로베니아는 인구가 한국의 1/25 수준인 200만 명에 불과한 나라. 1990년대 초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독립한 이 나라의 생소한 이름이 우리들에게 익숙해진 건 지극히 `문화예술적`이다. 2000년대 초반. `이상 현상`으로까지 불리던 파울로 코엘료 열풍. `연금술사` 이후 이어진 이 브라질 소설가에 관한 한국 독자들의 사랑은 작품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동반했다.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무대로 유명세자동차도, 네온사인도 없이 조용하고 평온한 도시거리 곳곳 용의 조형물과 분수대… 동화 속 같아바로 그즈음 제목부터가 흥미를 끄는 코엘료의 소설이 번역·출간된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공간이 바로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아래와 같다.직장과 가족이 있고, 애인과 친구도 있는 평범한 여성 베로니카. 그러나 그녀는 생이 한없이 권태롭다. 어느 날 “슬로베니아의 위치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는 온당치 못한 국제적인 무관심 아닌가”라는 황당한 이유의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자살에 실패한 베로니카. 정신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정상과 비정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에 정신병자로 낙인찍힌 한 남자와 예상치 못한 사랑에 빠지는데….이 소설은 슬로베니아와 류블랴나라는 명칭을 한국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에는 이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란 동명의 영화가 에밀리 영 감독의 연출로 제작되기도 했다.슬로베니아를 여행했던 계절은 여름이었다. 거기에 도착하기 전 일주일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머물렀다. 도시 한가운데 거대하게 서있는 슈테판성당과 오페라극장, 미적 완성도가 예술품에 가까운 국회의사당과 시청 건물, 그 옛날 황제와 여제(女帝)가 생활했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들. 비엔나의 건축물은 크기에서부터 보는 사람을 기죽인다.규모와 인구면에서 보자면 세계 어디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서울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일까? 가져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열망 탓일까? 기자는 조그맣고, 조용한 도시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술 취한 관광객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태국의 수도 방콕보다는 이웃나라 라오스의 한적한 수도 비엔티안이 좋았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으려 30분씩 줄을 서는 이탈리아 로마보단 적요하기까지 한 알바니아의 티라나가 좋았다.비엔나에서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까지는 기차로 3시간 남짓. 멀지 않은 거리다. 그러나,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다른 대륙으로 건너온 것처럼 달라졌다. 비엔나가 광역화된 거대 도시라면, 류블랴나는 시내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도 커다란 나무 아래 꼬마숙녀가 그네를 타는 시골 풍경이다.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면 떠오르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끌벅적함과 고층빌딩으로 높아가는 스카이라인, 탁한 공기와 수만 대의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교통체증 등.그런데, 류블랴나는 인간의 인식 속에 자리한 수도의 이미지를 보기 좋게 뒤집는다. 빵빵거리는 자동차도, 스피커에서 중구난방 울려나오는 소음도, 붉고 푸른 휘황한 네온사인도 없다. 도시의 중심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거리 곳곳엔 용(龍)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들어서 있고, 더위를 식혀줄 예쁘고 아기자기한 분수들이 즐비해 어떻게 보면 동화 속 공간 같다. 당장이라도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와 용으로부터 공주를 구해낼 왕자가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다.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류블랴나역 광장에서 여행자안내소를 찾았다. 푸른 눈동자의 아가씨 둘이 차가운 커피를 앞에 두고 오후의 심심함을 견디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관광객이 반가웠던 것일까? 무료지도에 가격이 저렴하고 깨끗한 숙소를 동그라미 쳐 표시해주고는 가는 길까지 친절하게 일러준다. 둘 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뚫어져라 지도를 보지 않아도 너끈히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맣고 잘 정돈된 도시. 그녀들이 손짓으로 일러준 길을 걸어 유스호스텔로 향했다.헌데, 이것 봐라.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떠돌이 개나 길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 온통 정적에 빠진 류블랴나. 그 조용함이 여행자의 지친 발걸음을 편안하게 위로해줬다.숙소에 도착할 무렵. 사람을 대신해 나를 반겨준 건 청동으로 조각했음직한 용이었다. 조그만 교량 입구에 버티고 선 그 녀석은 긴장감이나 공포감을 주기는커녕 반가움을 불렀다. 용의 등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다리를 건넜다.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조차도 숨을 죽인 듯 고요한 도시 류블랴나.숙소로 정한 유스호스텔에도 손님이 많지 않았다. 정원에선 한국과 꼭 같이 고목에서 매미가 울어댔다. 정겨운 여름풍경이었다. 농밀한 어둠이 류블랴나를 온전히 뒤덮고 나서야 다시 거리로 나섰다. 불어오는 밤바람이 낮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주황빛 등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리는 레스토랑과 카페들. 중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도시인지라 이끼 낀 건물 하나하나가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광장에선 아코디언 연주와 민속춤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비치지 않는 어둑한 강변에선 연인들이 입을 맞추고.적요과 정적이 지배하는 낮의 거리와 달리, 밤의 류블랴나는 `유럽풍 낭만`으로 가득했다. 열정에 들떠 키스를 하는 청춘들을 보고 있자니, “여기에서라면 나도 사랑에 빠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엔 늦어버린 마흔다섯 사내의 심장이 로맨틱하게 울렁였다.선명하게 대비되는 낮과 밤. 드물게 찾아온 기자의 가슴 두근거림과 함께 류블랴나의 어둠이 짙어가고 있었다. 슬로베니아는…공식 명칭은 슬로베니아공화국(Republic of Slovenia). 유럽 발칸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나라로 물빛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드리아해 연안에 자리했다. 면적이 2만273㎢인 작은 나라로 한국의 1/11 크기다. 인구는 약 200만 명. 수도는 류블랴나(Ljubljana)다.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헝가리,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남쪽으로는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슬로베니아인이 83.%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소수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언어는 슬로베니아어. 가톨릭신자가 58%, 그 숫자는 적지만 이슬람교도(2.5%)와 정교도(2.3%)도 존재한다.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며, 동유럽 국가 중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에 속한다.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만3천 달러. 화폐는 유로화를 사용한다. 1유로는 현재 한국 돈으로 약 1천320원.1918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왕국을 구성했다. 이후 1945년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됐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동유럽에 민주화의 물결이 일면서,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거쳐 1991년 6월 주권국으로 독립했다.한국과는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이어 과학기술협력 협정, 문화협력 협정,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 원자력안전협력 협정 등을 맺었다. 한국은 슬로베니아로 타이어와 자동차 등을 수출하고, 슬로베니아로부터 의약품과 발전기 등을 수입한다.작지만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가 강한 나라로 사람들은 유쾌하고 친절하다. 수도 류블랴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다. 특이한 건 용의 동상이 곳곳에 설치돼 있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는 것. 아름다운 호수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는 블레드( Bled)와 해변도시 코퍼(Koper)도 여행자가 매력을 느낄만한 곳이다.사진제공/서지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6-24

하롱베이 바다에서 상상력의 날개를 펴다

남부 사이공에서 출발한 베트남 기차여행. 종단열차의 북부 종착역인 하노이에 내렸을 때는 새벽이었다.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쓰나미와 일본을 뒤흔든 지진으로 세계가 시끄러웠던 시기. 기상이변이 이어졌다. 하노이 날씨가 한국의 초겨울처럼 추웠다. “이런 날씨를 겪기는 처음”이라며 고개를 흔드는 현지인들.그때 기자가 가진 옷이라곤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가 전부. 시장으로 가서 실로 뜬 점퍼를 15달러에 샀다. 그걸 껴입고, 긴 바지를 사 입었는데도 춥다. 하노이에 도착하기 전 여행했던 나라는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영상 30도 이상의 지역에 있다가, 궂은비 추적대는 날씨를 버티려니 죽을 맛이었다.현지에서 먹는 베트남 쌀국수, 가격 싸고 맛도 일품하롱베이 근사한 기암괴석 사이를 오가는 배에서호주·헝가리·인도·스위스 등서 온 관광객들과 유유자적목욕탕에 비치된 것과 비슷한 플라스틱 의자가 줄줄이 놓인 노천식당에서 500원짜리 쌀국수 한 그릇을 주문해 국물을 마셨다. 떨어진 체온이 돌아오는 느낌. 내처 한 그릇을 더 시켰다. 속이 든든해지니 마음에도 훈풍이 불었다.숙소를 잡아두고 산책에 나섰다. 나라가 멸망 위기에 처했을 때 칼이 솟았다는, 국권을 회복한 후에는 거북이가 나타나 칼을 돌려받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떠도는 호안끼엠 호수. 호안끼엠의 한자 표기는 `還劒(환검)`이다. 칼을 돌려준다는 뜻. 많은 사람들이 호수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카페에서 베트남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개인의 취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베트남 음식은 인근 국가인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음식에 비해 조금 더 맛있다.바게트의 가운데를 갈라 채소와 소시지 등을 넣어 매콤한 소스를 곁들여 먹는 베트남 샌드위치는 가격 대비 풍미가 그만이다. 한국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베트남 쌀국수도 면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일품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가격도 싸다. 샌드위치는 500~1000원. 쌀국수 역시 깔끔하고 인테리어가 잘 된 식당에서도 3000원 이상을 받지 않았다.아마 사이공에서였을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베트남식 요리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거리를 걷다 숯불에 굽는 양념한 돼지고기 냄새에 멈춰 섰다.그 냄새를 따라 가니 대나무로 울타리를 친 식당이 나타났다. 주인도 종업원도 영어를 못한다.그러나, 그게 무슨 걱정이랴. 손가락으로 익어가는 고기를 가리키며 “저것 먹고 싶어(I Want that)”라고 했다. 구운 돼지고기와 다양한 허브, 몇 가지 양념 종지. 거기에 라이스페이퍼(쌀종이)까지가 상 위에 등장했다.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지? 의문을 해결해줄 사람이 나타났다. 2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여성 종업원. 라이스페이퍼를 펼치고, 그 위에 고기와 허브를 놓은 후 몇 종류의 양념을 뿌린다. 그리고, 재빠르게 도르르 말아 접시 위에 놓아준다. 보기엔 어렵지 않은데 직접 해보니 잘 안 된다. 고기나 채소를 너무 많이 넣어 예쁘게 말리지가 않았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깔깔거리던 종업원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라이스페이퍼를 말아줬다. 맛있는(?) 추억이다.하노이에 갔으니, 하롱베이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던 용이 추락하며 만들어졌다는 기암과 괴석. 근사한 동양화처럼 펼쳐진 드라마틱하고 멋들어진 바다 풍광.용을 본떠 만들었다는 `드래곤 보트`를 타고, 1박2일을 바다 위에서 먹고 자는 여행객 대상 관광상품이 많았다. 그중 하나를 예약했다. 식사와 음료수 제공, 배 안에 마련된 싱글룸에서 숙박, 숙소에서 하롱베이까지 픽업을 포함 60달러. 출발 당일. `하롱베이 드래곤 보트 투어` 동행자들과 만났다. 호주에서 온 가족, 미국에 산다는 인도인 부부, 나이 지긋한 헝가리 노부부, 스위스에서 온 커플, 그리고 갓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는 폴란드 아가씨가 4명. 동행이 없는 기자에겐 더없이 멋진 여행 친구들이었다.세상 모든 형상을 빚어놓은 듯한 기묘한 바위섬 사이를 가르며, 큰바다로 나가는 배 위에 올라 유유자적하는 하루.폴란드 아가씨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백포도주를 마셨다. 목구멍을 뜨겁게 만드는 알코올 함량 40%의 `하노이 보드카`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물론, 폴란드 아가씨들에게도 권했다. 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꽤 많은 술을 마신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됐다. 러시아와 몽골 사람들이 그랬고, 폴란드인들도 그랬다. 러시아와 몽골의 추운 날씨는 이미 유명하고, 폴란드 역시 겨울 평균기온이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의 국가다. 저녁을 먹고, 2층 갑판에 각국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호주에 사는 아저씨는 집에 수영장과 테니스장이 있단다. 스위스에서 온 서른한 살 사내는 6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했다.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거기에 제 나라 말까지. 인도인 부부는 채식주의자라 배에서 제공되는 음식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다고 했다.그 부부는 해산물과 육류 위주로 구성된 요리가 차려진 저녁 식탁에서 내내 감자튀김만 먹었다. 그것도 “식물성 기름으로 튀긴 것이냐?”를 수차례 물어보며. 세계의 채식주의자 중 절반이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산다는 퇴직한 수학 교사는 “한국 시인 중에 김춘수라는 사람이 있고, 그가 쓴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흥미를 보이며 묻는다. “어떤 내용인가요? 슬픈 겁니까?” 놀란 표정의 퇴직교사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나이든 그의 아내가 조용히 웃었다.이윽고 밤은 깊어 자정이 가까워왔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잠을 청하며 침대에 누운 시간. 배 안에 마련된 조그만 방을 나와 난간에 기대 어둠에 물든 바다를 바라봤다.주위는 고요했고 일렁이는 물결 소리만이 귓전을 간질였다.기자는 호치민과 보 티 사우, 이념과 전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차별과 평등, 사이공의 빌딩숲과 하롱베이 바다 밑을 헤엄치는 거대한 물고기를 떠올렸다. 그 복잡한 단어와 문장들이 불면의 밤을 예고하고 있었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6-17

베트남, 자존심과 바가지 상혼의 불안한 동거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을 중국의 고전 삼국지. 거기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칠금맹획(七擒孟獲)의 고사(故事)다. 이는 `맹획이란 장수를 일곱 번 사로잡다`쯤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그 에피소드를 요약하면 이렇다. 촉나라 승상 제갈공명이 `남쪽 오랑캐`(남만·南蠻)`를 정벌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베트남 일대를 침략한다. 당시 남만의 지배자는 맹획. 무시무시한 완력과 배짱으로 이름 높았던 장수다. 제갈공명의 군대에게 일곱 번 사로잡혀 일곱 번의 고초를 겪었음에도 맹획은 “항복하겠다”란 말을 하지 않았다.이 이야기를 통해 중국은 제갈공명의 아량과 상대를 압도하는 전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불리한 전쟁에서 생포된 장수가 일곱 번을 다시 목숨 걸어 싸우고, 또 싸우는 게 쉬운 일인가?맹획은 굴복을 모르는 자존심덩어리였다. 바로 그런 베트남의 기질이 초강대국 미국과 프랑스의 군대를 자기 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었을 것이다.현지 젊은이들 배려로 찾은작고 소박한 게스트하우스친절하고 저렴해 감동이름난 관광지에선10배 넘는 바가지 상혼독립의 자존심과 상반 `씁쓸`나트랑을 출발한 베트남 종단열차는 힘겹게 달렸다. 지친 철마가 숨을 고르며 멈춘 곳은 후에(Hue). 불과 7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새벽 2시. 도시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 사위가 캄캄절벽이었다. 가로등도 없고, 달빛도 졸고 있다. 왕조의 화려한 중심지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숙소부터 구해야했다. 기자가 알고 있던 후에의 숙소 이름은 딱 하나였다. `민꽝 게스트하우스`. 하지만, 늦은 밤에 처음으로 도착한 도시인지라 도무지 찾을 자신이 없었다. 그때, 기차에 동승했던 청년 서너 명이 다가와 묻는다. “도와줄까요?”그들은 20대 초반의 베트남 젊은이들. 고교 동창 야유회를 떠났다가 기자와 같은 기차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숙소를 쉽게 찾았다. 고마움에 맥주라도 한 병씩 마시라며 5달러짜리 지폐를 내밀었지만 결국엔 받지 않았다. 여행자에게 베푼 친절을 몇 푼의 돈으로 계산 받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었을 것이다.민꽝 게스트하우스는 가족이 운영하는 작고 소박한 숙소. 꽃나무 흐드러진 정원에 앉아 마시는 달콤한 커피가 좋았다. 베트남 커피에선 초콜릿 향기가 났다.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와 10대 후반의 아들은 커피는 물론, 바나나와 파인애플 등을 무시로 가져다줬다. 로비에 앉기만 하면 그것들을 내왔다. 과일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니지만 성의가 고마웠다.후에를 떠나던 날. 예상한 금액보다 적은 숙박료를 받겠다고 해서 한 번 더 놀랐다. “사흘을 묵었는데, 왜 이틀치만 계산한 건가요”라고 물었다. 아주머니를 대신해 아들이 답했다. “첫날은 새벽에 왔잖아요, 그건 계산에 포함 안 시켰어요.”대신 커피와 과일값을 지불하겠다는 기자와 “그건 모든 손님에게 무료로 드리는 것이니 따로 돈을 받을 수 없다”는 주인 모자와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제갈공명과 맹획의 피 튀기는 싸움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유쾌한 다툼이었다.위의 두 가지 추억은 후에를 즐거운 기억으로 남게 했다. 그러나, 스트레스와 짜증을 불렀던 사건도 없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이니까.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는 후에의 왕궁을 구경 갔던 날이다. 왕이 머물던 시절에는 왕과 처첩, 측근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는 내밀한 구역이 이채로웠다. 사라진 왕조의 궁전은 쓸쓸한 감상을 불렀다. 흥망과 성쇠, 그리고 부침.여행자에겐 좋을 게 없는 우울한 잡념을 떨치려 궁전 안에서 코끼리를 탔다. 차광막 드리운 거대한 짐승의 등에 올라 왕이 살았던 공간을 여유롭게 어슬렁거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문제는 코끼리에서 내려 마른 목을 축이려 들렀던 노천카페에서 일어났다.후에의 특산품 중 하나인 `후다 맥주(Fuda beer)`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술 중 하나다. 구멍가게에선 30센트(360원)에 구입할 수 있다. 그런데 3달러(3600원)를 내란다. 어쩔 수 있나. 낼 수밖에. 유명 관광지에서 흔히 접하는 바가지 상혼이라 생각키로 했다.그런데, 옆 테이블에 앉은 유럽 여성에게는 똑같은 맥주를 7천200원 받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기가 뭣해서 조용히 주인을 불러 물었다. “맥주 한 병에 7200원이라니 너무 비싼 것 아닌가?” 돌아온 대답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너희들은 부자 나라에서 왔잖아. 그리고 저 여자에게 얼마를 받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데.” 짜증이 솟았다. 그 가게를 나와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데, 이건 또 뭔가? 커피를 가져다주며 3달러를 선불하란다. 베트남 커피 한 잔의 평균 가격은 30센트에 불과하다. 그곳에선 맥주도 커피도 10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 불볕더위에 화까지 내면 불쾌지수만 높아질 터였다.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자리를 떴다. 갑작스레 피곤이 몰려왔고,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궁전 밖으로 나오니 베트남 전통 교통수단인 시클로(자전거 택시)가 줄을 지어 서있다.무더위에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의자에 앉으며 요금을 물었다. 그런데…. 30달러란다. 왕궁에서 민꽝 게스트하우스까지는 1km가 채 안 된다. 그럼에도 3만6천원을 달라고 하는 거다. 연이은 바가지였다. 시클로 타기를 포기하고 터벅터벅 걸어 숙소를 향하는 길. 생각이 복잡해졌다.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폭탄요금 바가지를 씌운다는 일부 택시기사에 관한 언론보도가 떠올랐고, 일본인에겐 한국인보다 높은 가격을 받는다고 당당히 말하는 서울 명동의 노점상 인터뷰도 기억났다. 남을 통해 우리의 맨얼굴을 돌아보는 마음은 참담했다.베트남은 자존심으로 독립에 이른 나라다. 일곱 번 사로잡히면서도 항복을 입에 담지 않았던 맹획의 자존심, 해방의 원했던 국민들의 힘을 모아낸 호치민의 자존심, 마주선 총구 앞에서도 당당했던 열일곱 소녀 `보 티 사우`의 자존심이 세운 나라가 베트남인데….돈 앞에 자존심을 버리고, 여행자를 상처 입히는 일부 베트남 장사꾼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걸까? `민족적 자존심`과 `바가지 상혼`의 불안한 동거. 어울리는 않는 이 두 단어는 그 나라를 떠나는 날까지 기자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베트남 기차여행을 위한 TIP사이공에서 하노이까지 해안선을 따라 철로가 이어지는 베트남은 기차로 여행하기 좋은 환경을 갖췄다.한국의 기차보다 속도가 느리고, 정시 출발과 도착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낭만`을 찾는 배낭여행자들에겐 인기다.보다 즐거운 베트남 기차여행을 위해 아래 사항을 미리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기차표는 직접 구입하자주요 관광지마다 수없이 많은 여행사 간판이 걸려있는 베트남. 여행사는 비행기 티켓은 물론, 버스표와 기차표 구입을 대행해준다.하지만, 달랑 기차표 한 장 대신 사주고 터무니없는 커미션을 요구하는 곳도 없지 않다.티켓 가격 절반의 수수료를 요구하는 업체를 본 적도 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기차표는 직접 역에 가서 예매하는 것이 좋다.베트남 역무원 대부분은 영어를 할 줄 안다. 기본적인 회화만 가능하다면 기차표 사는 걸 굳이 남에게 맡길 이유가 없다. ▲ 식당칸을 적극 이용하자베트남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의 상당수는 기차의 침대칸을 이용한다.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의 이동거리가 길어 하룻밤을 기차 안에서 보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하지만, 낮에는 침대칸에 멍하니 누워있을 필요가 없다. 식당칸으로 옮겨 창밖으로 펼쳐지는 동양화 같은 풍경을 감상하며, 시원한 음료수나 맥주를 마시는 건 기차여행이 주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독특한 향신료가 들어간 베트남식 볶음밥에 따끈한 국물을 곁들여 점심을 해결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현지인·여행자와 말동무가 돼보자짧게는 6~7시간, 길게는 30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말벗이 간절해진다.그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함께 탑승한 현지인이나 관광객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자. 거기서 의외의 친구를 얻을 수도 있다.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 화를 낼 사람은 없다. 과자나 과일 등 군것질거리를 슬쩍 나눠주는 것도 짧은 시간에 친해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영어와 베트남어를 잘 하지 못하면 또 어떤가.미소와 보디랭귀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는 게 여행자들이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6-10

총살당한 17세 소녀 `베트남의 아픈 역사`

인도차이나반도를 떠도는 배낭여행자에게 호치민과 메콩강의 나라 베트남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비행기를 타고 태국 방콕에 도착해 구절양장 비포장길을 달려 캄보디아 프놈펜을 거쳐 통통거리는 쪽배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마침내 도착한 베트남의 한적한 시골 마을 쩌우독. 햇살이 눈부신 봄날이었다. 거기서 다시 버스와 배를 타고 베트남의 경제중심지 사이공까지 가는 데는 한나절이 더 걸렸다.취향의 문제겠지만, 기자는 버스보다는 배, 배보다는 기차를 통한 여행을 선호해왔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만큼이나 유명한 베트남 종단열차를 타고 남부 사이공에서 북부 종착지 하노이까지 달려보고 싶었다.야간·전세버스 관광 인프라 편리호텔·게스트하우스 가격도 저렴남중국해 푸른 파도 바라보며맥주 마시는 기차여행 `낭만`총연장 1726km, 평균 시속 50km, 사이공에서 하노이까지 소요 예정시간 33시간 30분. 비교적 여유로운 일정이었기에 그 코스를 3번에 나누어 베트남 땅을 거슬러 오르기로 했다. 사이공-나트랑, 나트랑-후에, 후에-하노이의 스케줄이었다.여행자를 위한 베트남의 관광인프라는 처음 그곳을 찾았던 2003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야간버스와 전세버스가 거미줄처럼 촘촘한 망을 이뤄 유명 관광지를 이어놓았고, 가격 또한 저렴했다.그 버스가 여행사와 제휴된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앞에 내려주니 숙소를 구한다고 무거운 가방을 든 채 헤맬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동일한 구간을 이동할 경우 기차티켓 가격이 20달러라면 버스비는 10달러에 불과했다. 10달러라면 우리 돈으로 대략 1만2천 원. 형편이 넉넉지 않은 여행자에겐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바깥 풍경 한 번 보지 못하고 밤을 새워 달리는 야간버스보다 넘실대는 남중국해의 푸른 파도를 끼고 달리는 기차가 훨씬 낭만적”이라는 취향을 바꾸지 못했다. 기자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한국의 대도시처럼 시끌벅적하고 매연이 코를 찌르는 사이공은 매력이 크지 않은 도시. 밤거리 풍경도 서울이나 대구의 번화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틀을 그곳에서 지낸 뒤 멋진 해변과 맛있는 해산물이 유혹하는 나트랑을 향해 기차에 올랐다.사이공에서 나트랑까지는 8~10시간쯤 기차를 타야한다. 도착시간이 들쭉날쭉이다. 왜 그러냐고?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의 KTX와 새마을호 기차가 얼마나 깨끗하게 정비·관리되고, 시간을 지켜 정확하게 운행되는지 알게 된다.기자는 인도와 태국, 베트남과 터키, 이란과 알바니아, 슬로베니아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세르비아, 헝가리와 보스니아 등에서 기차를 타봤다. 그중 어떤 기차도 한국의 기차만큼 깨끗하지 않았다.`연착`과 출발지연에 관해선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인도의 기차는 목적지에 멈추는 시간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3~4시간 연착은 기본이니, 승객들 중 누구도 30~40분 늦는 것에는 화를 내지 않는다. 이건 본론이 아니니 세계 각국 기차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베트남 종단철도의 사이공-나트랑 구간은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식당칸에 앉아 쌀을 주정으로 빚은 독특한 풍미의 맥주 `333`을 마셨다. 나트랑-후에 구간은 사파이어처럼 푸르게 반짝이는 남중국해를 기차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사이공을 출발해 나트랑까지 가는 기차에서도 그것 이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 창밖으로 펼쳐지는 베트남의 진짜 시골풍경을 눈에 담는 호사가 바로 그것. 맥주 안주가 따로 필요 없다. 풍광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윽고 느린 기차가 여유를 부리며 도착한 나트랑. 거기서 나흘을 머물렀다. 길이가 4km에 달하는 해변에 사람이 열 명도 보이지 않는 폭우 직후의 한적함이 더없이 좋았다. 커피나 홍차를 마시며 하루종일 바다와 파도, 갈매기만을 바라보던 날도 있었다. 모처럼 맞은 휴식의 시간이 달콤했다. 날이 개여 태양이 뜨거웠던 날엔 8천 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나트랑 보트 여행`을 다녀왔다. 조그만 목선에 몸을 싣고, 국적과 인종이 다른 젊은이들과 점심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 적당히 술기운이 오른 이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푸른 바다를 떠다녔다.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세상과 삶은 낭만만으로 이뤄져있지 않았다.보트 여행 다음 날. 칼국수를 먹으러간 현지 한국식당에서 쉽게 잊을 수 없는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 교민을 상대로 발행되는 신문에서였다. 17세에 총살당한 베트남 소녀 `보 티 사우(Vo Thi Sau)`.그녀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던 시절 태어났다.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친프랑스 정책으로 일관하던 고위관료에게 폭탄을 던진 소녀 보 티 사우. 그 사건으로 20여 명의 프랑스 군인들도 크게 다쳤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녀는 이봉창이나 안중근과도 비교될 수 있는 인물.하지만, 당시 베트남을 식민통치하던 프랑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이 보기에 보 티 사우는 테러리스트였다. 프랑스인들이 주도한 법정은 겨우 열일곱 소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프랑스식 관용`이 그녀에겐 적용되지 못했다. 그런데, 죽음 앞에 선 이 소녀의 태도가 베트남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전설 하나를 만들었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수천 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은 천에 눈이 가려진 보 티 사우가 끌려나왔다. 열일곱, 아직은 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소녀에게 사형집행인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이 질문에 보 티 사우는 두려움 하나 없는 의연한 말투로 이렇게 답했다. “눈가리개를 풀어라. 조국의 산천을 보며 당당하게 죽겠다.”사실 베트남은 보 티 사우 같은 사람들의 힘으로 건설된 나라다.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부터, 미국과의 전쟁 시기까지 베트남 여성들은 남성들 못지않은 용기와 열정으로 국가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다.모두가 알다시피 이제 베트남은 프랑스와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당당한 주권국으로 일어섰다. 폐허의 도시에 새롭게 건물을 세우고, `이념`이 아닌 `경제`로 눈길을 돌린 21세기 베트남. 오랜 수난 끝에 얻은 오늘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베트남은…공식명칭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인도차이나반도 동부에 위치해 있다.지정학적 요충지라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오랜 기간 겪어야했다. 1884년 이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960~70년대엔 미국의 침략을 겪었다.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동쪽 해안은 통킹만, 남중국해, 보르네오해, 시암만과 인접해있고, 남북의 해안선이 3천444Km로 매우 길다. 면적은 한반도의 1.5배 크기인 33만958㎢. 북부는 아열대기후, 남부는 열대몬순기후를 나타낸다.행정구역은 하노이, 사이공, 다낭, 하이퐁, 껀터의 5개 직할시와 59개의 성(省)으로 이뤄져있다.인구는 약 8천800만 명으로 70%에 가까운 사람들은 농촌에 거주한다. 비엣족이 85.7%로 거주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타이족과 화교, 크메르족 등 50여 개의 소수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공용어는 베트남어.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다. 종교는 불교(43%)와 가톨릭(36%)이 주류를 이루고 일부에선 까오다이교를 믿기도 한다.화폐단위는 베트남 동(VND). 1만 VND은 약 530원이다. 1954년 북베트남 정권이 프랑스 지배세력을 몰아낸 뒤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됐던 슬픔의 역사도 가졌다. 이후 남북의 정권은 20여 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다. 이 전쟁에서 미국과 한국, 필리핀과 호주 등이 남베트남을 지원했고, 소련연방과 중국은 북베트남을 지지했다. 사이공이 북베트남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전쟁이 끝난 것은 1975년. 종전 이후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던 한국과 베트남 정부는 1992년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텄다. 현재는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여행과 사업을 위해 베트남을 찾고 있고, 베트남 젊은이들 사이에선 `한류열풍`이 불고 있기도 하다.주요관광지는 `경제수도`라 불리는 사이공과 나트랑 해변, 고풍스런 멋이 있는 도시 후에와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감탄을 자아내는 하롱베이 등이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6-03

캄보디아에서 체 게바라를 떠올리다

한국이라면 아직 쌀쌀함이 남아있을 3월 초순. 캄보디아의 한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린다.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숨이 턱턱 막혀오는 날씨.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많지 않은 나라지만, 흙길 역시 햇볕에 달궈져 프라이팬처럼 뜨겁다. 포장된 대낮의 아스팔트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맨살이 닿으면 화상을 입는다.크메르어로 웅얼거리는 주문같은 축원“신의 은혜로 행복 누리길”… 경건함 느껴그 길 위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맨발로 걷는 캄보디아의 어린 스님들. 소승불교 전통의 캄보디아에선 시주를 청하러 다니는 수도승들이 많다. 인접국이며 비슷한 종교양식을 지닌 라오스의 `새벽 탁발`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외국인이 시주에 참여하기도 한다. 라오스 서북부에 자리한 조용한 마을 루앙프라방의 탁발은 이젠 일종의 관광상품이다.1개월 가량 캄보디아를 여행했던 몇 해 전. 수도인 프놈펜과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시엠립, 원시의 해변풍경이 펼쳐지는 시아누크빌 등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지치면 뜨겁게 이글대는 태양을 피해 카페나 식당의 차광막 아래서 과일주스를 마시곤 했다. 눈앞에서 거리를 오가는 적지 않은 숫자의 동승들.오렌지빛 선명한 승복을 입고,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총총히 길을 재촉하는 어린 스님들.누군가가 자신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시주를 건네면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축복의 말을 전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확하게 표현하긴 힘들지만 발원지를 알 수 없는 경견함이 전해져왔다.무릎 꿇는 걸 비굴한 행위라 생각해왔던 기자가 그들 앞에 꿇어 앉아 머리를 숙인 게 언제가 처음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단순했다. 많아야 열서너 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동승들의 피곤한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고, 음료수나 과일 혹은, 빵을 그네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스님의 고단한 발길을 멈추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랬다. 시작은 캄보디아 동승을 향한 연민이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무릎 꿇는 게 거듭될수록 기이한 마음상태에 이르게 됐다. 주스 병이나 바나나를 가방에 넣어주면, 동승의 축원이 머리 숙인 기자 앞에서 진행됐다.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크메르어. 그 주문 같은 웅얼거림에 마음이 한없이 편해졌다.그 편안함을 얻으려고 어떤 날은 각기 다른 수도승 앞에서 10번 넘게 고개 숙여 무릎을 꺾었다.그들이 읊조리는 말의 내용이 “신의 은혜가 당신에게 전해져 건강과 행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라는 건 한참이 지난 후 영어를 할 줄 아는 캄보디아인을 통해 들었다.펄펄 끓는 아스팔트나 지저분한 흙길에 꿇어앉아 목덜미로 굵은 땀을 흘리면서도 마음으로 와닿는 그 평화로운 느낌이 좋았다.지금 짐작해보면 그 편안함의 이유는 아마도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下心)을 어렴풋이나마 체험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떠받드는 행위.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단순한 행동이 사람의 마음상태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날 평화로웠던 마음의 상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잠시 캄보디아와는 천리만리 떨어진 먼 공간 남아메리카 이야기를 해보자. 1967년.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체포된다. `20세기 최고의 혁명가`를 산 채로 붙잡았지만, 볼리비아 정부군은 쇠사슬에 묶인 게바라를 앞에 두고 벌벌 떨었다.20대에 쿠바 혁명을 주도하고, 30대 초반 나이에 미국의 백악관과 소련의 크렘린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었던 불요불굴의 사나이 체 게바라. 그의 당당함과 유명세에 기가 질린 탓이었다.모두가 `혁명의 사령관`을 심문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미국 CIA로부터 특수훈련을 받은 볼리비아 장교 하나가 겨우 나서 몇 가지를 묻고 답을 들었다. 그 장교는 개인적 호기심을 더해 이런 질문을 덧붙였다고 한다. “당신도 신을 믿는가?”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명료하게 게바라가 답했다.“아니. 나는 인간을 믿는다.”기자가 신의 존재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다소간의 드라마틱한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는 이 일화의 영향이 컸다. 소설가 김용만은 일흔을 넘긴 나이임에도 종교와 신의 곁에 가기 거부했던 이유를 “내게는 문학이라는 또 다른 종교(신)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자는?신이라는 절대자, 절대자를 신뢰하는 종교에 기대려면 `인간은 약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먼저 와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 수 있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과대평가 또는, 과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하지만, 아직은 그 착각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종교를 가질 생각이 현재까지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신을 믿는 사람을 마음속으로부터 경원하던 태도는 달라졌다. 이는 캄보디아 어린 스님들에게서 받은 감흥과 감동 때문이다. 무작정 떠난 배낭여행에서 마흔여섯 `무신론자`가 세상을 달리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캄보디아 여행에서 돌아온 지 수 년이 흘렀다. `집이 아닌 길 위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를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신과 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절대자와 종교에 관해 열린 시각을 가지려 하는 태도변화. 이건 여행을 통해 얻어낸 작지 않은 선물이다. 외롭고, 자신의 힘만으론 이겨내기 힘든 고통에 직면했을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것.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않을까.신을 믿는다는 게 아직까진 기자와 무관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성적 결심과는 별개로 캄보디아 동승 앞에서 잠시잠깐 맛봤던 `설명하기 힘든` 평화로움이 자꾸 그리워진다. 이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한계일까. 앙코르와트, 보석보다 빛나는 돌의 나라아이들은 일 년 내내맨발로 크메르의 역사를 밟고 다닌다자야바르만과 수르야바르만을발음하지 않더라도 빛나는 땅강위력한 왕조는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신왕(神王)을 만들고백만 마리 코끼리와 천만 신민의 믿음돌을 쪼아 보석으로 빛나게 했다앙코르와트, 지구 위 가장 아름다운 석조물누가 있다면 나서봐라, 이 말을 부정할 자밥을 굶는 가난과이백만 명을 학살한 이데올로기로도궤멸시키지 못한 지난 세기의 광영해자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은지상에서 천상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비추고압사라 여신의 도드라진 가슴천 년 세월에 깎이고도 고혹 잃지 않았다프놈 바켕과 앙코르 톰 그늘마다 들어찬 목소리슬픔과 환희, 눈물과 웃음은 대극이 아님을깨달은 자는 사원에서 진실을 읽고 간다갈라진 돌 틈마다 들어찬 간절한 사연들누구는 세상 무너지는 통곡을다른 누구는 가장 빛나는 고백을왕과 신의 거처에 남기고 돌아갔다인종과 나이를 뛰어넘은 장엄이서쪽 하늘 아래 석양으로 붉게 타오를 때캄보디아가, 아니 아시아가, 아니 전 세계가동시에 고개를 조아리는 숨가쁜 풍경크메르의 역사는 이미 몰락을 넘어섰다고통과 피 흘림 속에서 마침내 완성된 신성바닥을 구르는 자갈 하나까지 해탈에 이른 땅눈부신 일출이 사원 꼭대기에 걸릴 때현재와 미래가 어쩌지 못할 과거는 존재를 드러내고이끼마저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월신성한 호수에 몸을 씻는 코끼리의 울음소리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건 행일까, 불행일까영과 욕, 부침을 말없이 지켜봤을 거대한 나무들만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건기의 하늘을 지키고 섰다끝나지 않을 부연으로도 해명되지 못할 비밀과 감탄캄보디아 시엠립 정글 속 크메르의 사원들앙코르와트,인류가 끝끝내 가닿지 못할 멀고 먼 피안의 나라.* 위 시는 캄보디아 시엠립의 앙코르와트가 선사한 감동을 운문 형식으로 표현해본 것이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16-05-27

그늘진 폐허의 유적에서 희망과 만나다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빛깔의 돌 수백만 개가 이뤄놓은 웅장한 과거의 흔적. 비단 앙코르와트가 아니어도 좋다. 인근 앙코르톰이나 바이욘사원에서 여행자들 틈에 끼어 세상사 고민을 잠시 잊고 일출을 기다리는 건 가슴 설레는 경험이다. 동쪽에서 시작된 태양의 꿈틀거림이 사원의 성벽을 발갛게 물들일 때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앙코르 유적은 1000년 전 크메르인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찾을 미래의 불특정다수를 위해 축조한 장엄한 선물이라는 사실을.1천년 전 크메르인의 장엄한 유적일상의 감각·시간도 잠시 잊어맨발의 어린 동승 축원 들으면해탈은 법당이 아닌 길 위인 듯일몰 또한 일출의 감동과 다를 바 없다. 높은 기온과 눅눅한 습기에 셔츠가 젖도록 땀을 흘리며 시엠립 곳곳에 자리한 크메르 사원을 돌아본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옅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앙코르 유적지의 벽에 기대 태양이 제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린다.세상의 존재하는 붉은색 모두를 모아 흩뿌려놓은 듯한 진홍(眞紅)의 일몰. 사원의 나무그늘에서 만난 노르웨이, 네덜란드, 프랑스의 청년들은 바로 이 일출과 일몰 무렵의 앙코르와트를 만나기 위해 10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경이 주는 감동만큼 울림이 큰 게 사람이 주는 감동이다. 예술적으로 깎아 쌓은 돌 틈에 살아온 날들의 비밀을 고백하게 싶게 만드는 시엠립의 유적지. 그 이상으로 기자를 설레게 한 것이 캄보디아 사람들이다. 앙코르 유적은 사방 수십 km에 이름 없이 허물어져가는 작은 사원과 성곽 또한 흩뿌려놓고 있는 곳. 1~2달러를 주고 빌린 자전거에 올라 그곳들을 찾아다니다 만난 동승(童僧)들.국민 대다수가 소승불교 신자인 캄보디아에선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어린 승려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제 갓 열두어 살이나 됐을까.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오렌지색 승복을 입고 햇살에 달아오른 길을 맨발로 걷는 그 아이들의 눈빛에선 나이와 상관없는 외경이 읽힌다. 생수 한 병 혹은, 빵 한두 개를 그네들의 가방에 넣어주며 앞에 엎드리면 동승은 사람들의 귓가에 축원의 말을 조용히 읊조려준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해탈이나 종교적 깨달음의 공간은 법당이나 성당이 아닌 `길 위`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한낮의 더위가 사라지고 해가 저물면 시엠립 여행자의 대부분은 `나이트 마켓`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줄지어 늘어선 노천카페 중 한 곳을 골라 안락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댄다. 푸릇푸릇한 민트가 듬뿍 들어간 칵테일 `모히토`를 마시며 거리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한 일상을 떠나 새로운 공간에 와 있다는 즐거움에 미소가 그려진다. 프놈펜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유쾌한 20대 청년은 기자의 서툰 강의(?)를 듣고는 한글 자음과 모음의 운용방식을 알아낸다. 영민한 청년이다. 그런 청년들이 이끌어갈 캄보디아의 미래가 어두울 까닭이 없을 것이란 믿음에 기분이 좋아졌다허름한 식당에서 만난 10대 후반 소녀도 잊을 수 없다. 다음 달이면 경기도 수원의 공장으로 일을 하러가게 됐다며 좋아하던 모습. 월급 액수와 체류 기간이 적힌 근로계약서를 보여주며 잇몸을 드러내고 웃던 그 소녀가 한국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며 앞날을 꿈꿀 수 있었으면. 앙코르와트의 도시 시엠립은 신을 믿지 않는 기자가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줬다.앙코르 유적에 새겨진 압사라 여신의 유혹하는 춤사위, 천 년 세월을 견뎌온 석조건물 사이에 낀 푸릇한 이끼, 눈부신 아름다움의 일출과 일몰, 흙먼지 날리는 동네 골목길에서 크메르 아이들의 천진한 몸짓에 취하게 되는 시엠립. 그곳에서 지내다보면 일상에서의 감각과 시간을 잠시 잊게 된다. 하지만, 여행은 떠날 때부터 돌아옴을 전제로 하는 것. 아쉬움은 추억이 가진 힘으로 견딜 수밖에 없다. 시엠립에서의 마지막 날. 오토바이를 개조한 택시 `툭툭`을 타고 톤레샵엘 갔다. 제주도보다 큰 면적의 바다 같은 호수. 포이펫에서 국경을 넘을 때 본 지평선 이상으로 아름다운 수평선이 쓸쓸함과 충만을 동시에 선사하며 여행자를 매료시켰다. 수백 종의 민물고기를 제 안에 기르며 호수에 삶을 기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톤레샵. 그곳에서 만난 석양 역시 숨 막히게 붉었고 또한, 아름다웠다. 밀려드는 호숫가의 어둠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툭툭 기사가 “우리 삼촌 집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보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마을.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 2층의 희미한 남폿불 아래 태어난 지 한 달이 되지 않은 툭툭 기사의 조카가 누워 있었다. 방글거리며 기자를 올려다보는 그 아기의 얼굴과 가난에도 주눅 들지 않은 아기 엄마의 미소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지는 것이구나. 천 년 세월 저편 번성했던 크메르왕국 왕자의 탄생만이 축복받을 일은 아니구나. 비록 희미한 빛 아래 누웠지만 누가 감히 이 조그만 아기의 내일이 어둡고 습할 것이라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우리 주위엔 세상의 번듯함보다는 폐허, 미래보다는 과거, 빛보다는 그림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자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다소 퇴행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그들의 천성이 못나거나 구차스러워 그런 것이 아니다. 그건 인간 개개인의 취향과 지향의 다름에서 오는 것일 뿐.현재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지난날의 흔적 시엠립 앙코르 유적의 그늘진 폐허에서 낙관과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기자의 취향. 그 취향과 지향을 앞으로도 바꿀 생각이 없다. 앙코르와트는 과거인 동시에 진행 중인 현재이며, 내일을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설레는 미래다. 캄보디아를 즐기는 3가지 색다른 방법여행지에서라면 평소 해보지 못한 것들을 시도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캄보디아는 4~5시간 안팎의 짧은 비행으로 가닿을 수 있는 곳이다. 거기서 한국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며칠이나마 즐겨보자. 틀에 갇히지 않는 여행자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자전거로 유적지 돌아보기시엠립에서 앙코르와트를 포함한 각종 유적지를 둘러보는 가장 흔한 방법은 개조한 오토바이택시를 타는 것이다.그러나, 젊고 더위와 싸울 수 있는 체력을 가진 여행자라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도시 외곽으로 나가 밀림 속에 숨겨진 조그만 유적들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휘파람 불며 달리다가 우거진 수풀 속에서 천년 이상의 세월을 조용히 숨죽여온 사원을 발견한다면 `나도 모험가가 됐다`는 기쁨에 절로 큰 웃음이 나올 것이다.자전거 대여료는 하루 1~2달러로 매우 저렴하다.▲ 현지인들과 친구 되어보기일반적인 패키지여행에선 현지인 가이드와 운전기사를 제외한 캄보디아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하지만, 배낭을 멘 자유로운 여행자라면 얼마든지 현지인과 친구가 될 수 있다.외국인에 대해 호의적이고 친절한 캄보디아 사람들은 조금만 친해지면 곧잘 “우리 가족들을 소개시켜주겠다”며 집으로 놀러오길 청한다.달콤한 사탕이나 한국에서 가져간 기념품 등 조그만 선물을 들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면, 크메르의 내밀한 풍경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운이 좋다면 캄보디아 가정식으로 차린 저녁 식사도 대접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캄보디아 전통음식 맛보기수도인 프놈펜과 유명 관광지인 시엠립에는 서양식 고급 레스토랑이 흔하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도 여럿 있다.하지만,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듯, 캄보디아에선 캄보디아 전통요리를 즐겨보자.태국과 베트남 요리에 영향을 받은 캄보디아 음식들.서민들은 쌀을 재료로 만든 면발에 각종 채소를 데쳐 얹은 국수를 즐겨 먹는다.시장 좌판에 앉아 먹는 한 그릇 500원짜리 쌀국수도 제법 맛있다. 좀 더 고급스런 전통음식을 찾는다면 생선과 쇠고기 등에 코코넛밀크와 향신료를 더해 걸쭉하게 끓인 아목(Amok)을 권한다. 곁들여 먹는 밥이 커다란 바나나 잎에 올려져 있어 재밌는 볼거리까지 제공한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5-20

앙코르와트 붉은 석양을 만나러 가는 길

온종일 붉은색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 인간의 심장을 설렘으로 뛰게 만드는 붉은색 일출과 일몰, 그 나라의 흙빛 또는, 석양빛처럼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사람들의 얼굴…. 프놈펜에서 시엠립까지 버스길은한국의 70년대 농촌풍경 연상케대평원과 야자수, 스콜까지 더하면바쁜 일상을 벗어난 `낭만의 절정`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의 도시 캄보디아 시엠립을 추억할 때면 잇따라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2011년 봄. 수도 프놈펜에서 시엠립으로 향하는 낡은 버스.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태양이 무인지경의 막막한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모습을 봤다. 그날 이후 기자에게 캄보디아와 앙코르와트는 `거대한 붉은색 낙인`으로 새겨졌다. 불과 40여 년 전 기억의 저편. 이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농촌공동체적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잔인한 크메르루주(Khmer Rouge) 청년들 탓에 국민의 5분의 1이 허망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야 했고, 당시 무너져 아직도 재건되지 못한 사회적 인프라로 인해 국민의 절대다수가 빈곤의 한가운데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나라.어둡고 습한 역사의 그늘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채, 크메르루주 집권 당시 마구잡이로 뿌려진 지뢰에 손발이 떨어져나간 사람들의 슬픈 표정을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시로 마주해야 하는 그곳. 낭만적인 관광지라기보다는 상처 입은 짐승들의 공동체에 가까운 공간임에도 어째서 기자는 2003년 이후 무려 4번이나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찾았던 것일까? 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 여행기는 그 답을 에둘러 찾아가는 과정이 될 듯하다. 실용적 차원이 아닌 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지구 위 가장 아름다운 석조건축물`이라 불러도 좋을 앙코르와트. 그리고, 동양 최대의 담수호 톤레샵 호수를 만날 수 있는 캄보디아 시엠립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다. 정치적으로 안정기에 들어선 2000년대 이후엔 관광객이 대폭 늘어나면서 한국에서 시엠립으로 가는 직항 전세노선이 생겼다. 대부분 3~4일의 짧은 휴가를 이용해 패키지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주로 전세기를 이용한다.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것보다 저렴한 비용에 목적지로 직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시엠립 현지의 일정을 관리하는 가이드를 따라 상황버섯 등의 건강식품이나 라텍스로 만든 침구를 판매하는 가게에 수차례 들러 `울며 겨자 먹기`로 쇼핑을 해야 한다는 것이 기분을 상하게도 한다.이웃나라 베트남이나 태국에서 비행기를 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엔 거의 `독점노선`인 탓에 항공권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런 이유로 주머니가 가벼운 배낭족들은 프놈펜에서 버스를 타고 시엠립을 향한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수입한 털털거리는 중고버스를 타고 이젠 보기 어려워진 1970년대 농촌 풍경 속을 달리는 색다른 맛이 있는 코스다. 모두 나름 장단점이 있는 방식이지만, 기자가 추천하고 싶은 건 태국 방콕에서 아란야프라텟과 캄보디아 국경마을인 포이펫을 거쳐 시엠립으로 가는 방법이다. 새벽에 방콕을 출발하면 점심 먹기 전 포이펫에 도착할 수 있다. 포이펫은 시엠립으로 가는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국경도시. 여기서 3~4명이 모여 택시를 대절해 3시간 정도 달리면 시엠립 시내에 도착할 수 있다. 비용은 30~40달러 내외. 1인당 10달러 정도다. 이 코스가 매력적인 이유는 포이펫 시내를 벗어나면 만나게 되는 평원 때문이다. 야자수와 잡초,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막막한 풍경. 네온사인 빛나는 도시, 숨 가쁜 직장인으로 살면서는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원시(原始)가 선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평원을 수십km 달리다가 운 좋게 스콜이라도 만나게 되면,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방랑자의 낭만은 절정에 이른다. 일상에선 결코 볼 수 없는 풍경과 만난다는 건 여행하는 사람만이 누리게 되는 특권이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포이펫-시엠립` 코스를 택했을 때마다 그 평원 한가운데 잠시 택시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도로를 지나는 차와 사람은 물론, 풀숲 들쥐조차 몸을 숨긴 적요한 풍경 속에서 마시는 `앙코르맥주` 한 모금이 얼마나 달콤한지 말로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시엠립에 도착하면 각자 형편과 취향에 따라 숙소를 찾으면 된다. 공항에서 시내로 나오는 큰 길가에는 수영장과 깨끗한 로비를 갖춘 대형호텔이 흔하고, 시엠립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스타마트`와 `펍 스트리트(Pub Street)` 사이에는 10달러 내외의 대중적인 숙소가 지천이다. 저렴한 호텔도 에어컨과 욕실을 갖췄으니 크게 불편할 게 없다. 2003년 겨울. 처음 시엠립을 찾았을 땐 구걸하는 아이들 탓에 거리를 걸어 다니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은 갈 때마다 줄어들었고, 이제는 왁자지껄 시끄러운 주요관광 포인트가 아닌 곳에선 싸구려 기념품을 팔거나, “1달러만 주세요”라며 손을 내미는 아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날 `크메르`라는 이름으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호령했으나, 현재는 아시아의 최빈국 중 하나로 간난신고의 삶을 이어가는 캄보디아 국민들. 그래서일까? 시엠립 시내는 한때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살던 늙은 마술사의 낡은 외투를 보는 것처럼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가난이 사람의 모든 것을 완벽히 파괴하지는 못하는 법. 캄보디아 사람들은 그들의 처지와는 관계없이 낙천적으로 보이고, 웃음에도 인색하지 않다. 아마도 `미소의 힘`으로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 집단학살의 역사를 애써 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과 역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떠올리며 뜨거워진 머릿속을 식히는 방법은 단순해지는 것이다. 해 뜰 무렵. 들러붙는 잠을 떨쳐내며 세수를 하고, 거리에 즐비한 오토바이택시 중 하나를 골라 탄다. 이제 앙코르와트와 만날 시간이다. 캄보디아는…공식적인 명칭은 `캄보디아 왕국(King dom of Cam bodia)`. 인도차이나 서남부에 위치한 나라로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수도는 프놈펜. 면적은 18만1천35㎢로 한국보다 약 2배가 크다. 남북의 길이가 450㎞, 동서가 580㎞로 사각형과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인구는 약 1천5백만 명. 1970년대 겪은 혹독한 학살로 인해 여성 인구가 좀 더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인구의 90%는 크메르족. 소수의 베트남인과 중국인 등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메르어를 사용하지만, 나이 지긋한 지식인들은 식민지 체험을 겪어서인지 프랑스어와 영어에도 능하다. 국민들의 절대다수(약 95%)는 불교신자. 소수의 무슬림(2%)도 존재한다. 오렌지 빛깔 가사(袈裟)를 걸친 어린 스님들을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외형상으로는 `왕정국가`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정부 수반인 총리가 행사한다. 31년째 캄보디아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내외부에 알려진 사람은 캄보디아인민당(CPP)의 훈센(Hun Sen). 화폐단위는 리엘(Riel)로 1달러(한화 약 1천150원)는 약 4천 리엘. 대부분의 대도시에서는 자국 화폐와 달러가 함께 사용되고,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관광지인 시엠립에서는 원화가 통용되기도 한다.1975년부터 1979년 사이에 폴 포트와 카잉 구엑 에아브 등이 주도해 벌인 대학살은 `킬링필드(Killing Fields)`로 불리며, 영화로도 제작돼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캄보디아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들로 세계사에 기록됐다.기온은 고온 다습한 열대몬순기후를 나타내고, 1년 내내 영상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은 드물다. 가장 더운 시기는 3월과 4월. 건기인 12월과 1월이 비교적 서늘하고 이때가 여행하기에 좋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많은 비가 내리는 우기다. 천연고무와 농수산물, 목재 등이 주요 수출품이고, 자동차 및 관련 부품, 전자기기와 철강 등은 수입에 의존한다. 프놈펜과 시엠립, 시아누크빌 등에는 무역업과 관광업에 종사하는 한국인들도 다수 거주한다. 어두운 현대사를 극복하고, 찬란했던 고대 크메르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노력은 프놈펜의 청년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예의 바르고, 동시에 당당한 모습으로 외국인들을 맞이한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6-05-13

맑은 눈망울의 이란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을…

결혼을 하지 못한 기자는 아이가 없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아이가 귀엽고 예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기혼자와 다르지 않다. 한국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유럽과 동남아시아, 중동의 아이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히잡이 번거롭고 귀찮아요” 대담한 이란 소녀들수줍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이별을 슬퍼하는 아이들`위험한 나라 속 아이들` 천진한 눈망울 잊지못해맑은 빛으로 반짝이는 그네들의 눈동자 속에는 세상사 때 묻은 탁함이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그 눈망울이 혼탁한 세계에서 지리멸렬하게 살아가는 기자를 가르친다. 선인들의 말처럼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자리한 카스피해는 지구 위에서 가장 큰 호수다.규모로 보자면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에 가깝다. 바로 그 카스피해가 지척인 해변도시 반다르 안잘리에서 명랑한 열여섯 이란 소녀 둘을 만났다. 가족들과 소풍을 왔다고 했다. 사촌지간이라는 두 소녀는 이슬람국가에 사는 아이들답지 않게 대담하게도 “우리는 히잡 쓰는 게 번거롭고 귀찮아요”라며 검은 스카프 밑 머리카락을 불어오는 바람 앞에 잠시잠깐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 장면을 본 소녀의 엄마는 눈앞에서 폭탄테러처럼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듯 놀라며 둘을 야단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시선을 피해 까불대며 히잡 벗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달라는 맹랑한 부탁까지 했다.대중이 이용하는 장소에서 히잡을 벗는 행위와 그걸 사진으로 찍는 건 `무슬림 근본주의 국가`에선 분명한 범죄임에도 소녀들은 거침이 없었다. 이란 바깥의 세상이 궁금해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네들은 오랜 시간 이란을 `테러를 지원하는 불량국가`라고 단정하며, 각종 정치·경제제재를 가해온 미국에서 활동하는 여자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레이디 가가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열대여섯 살 아이라면 부모와 교사들 몰래 숨어서 본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예쁜 여가수의 춤과 화장법을 따라하고 싶은 일탈욕구가 왜 없겠는가.아름답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의 욕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종교적 도그마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키도록 강요된 수천수만 가지의 이슬람식 규범 안에서도 이란 소녀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갑갑한 현실에서의 일탈을 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녀와 노소를 구분하지 않는 이란 사람들의 현실 탈출 욕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외엔 뾰족한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기자는 그저 이란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확장된 자유와 개성존중의 풍토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을 뿐이었다.적지 않은 사람들의 걱정 속에서 이런저런 문화충격을 받으며 시작한 이란 여행. 하지만, 그 우려를 불식하고 이란 사람들의 선량함과 매력적인 풍경에 익숙해져 즐거움을 느끼기까지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지금도 기억이란 소프트웨어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이란의 풍광들.황량한 바위산 아래 무더기로 피어 방랑자의 심란함을 위로해준 붉디붉은 양귀비꽃, 끝없이 펼쳐지던 광대한 사막, 해질녘 푸르스름한 빛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빛나던 모스크의 벽과 지붕, 페르시아 왕조 부침(浮沈)의 역사를 긴 설명 없이 한눈에 보여주는 거대한 무덤 낙쉐 로스탐,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던 흰 수염 근사한 할아버지, 사막도시 야즈드를 뒤덮은 수백 채에 이르는 진흙집들,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의 숙소 `카라반 사라이(caravan sarai)` 옥상에 누워 바라보던 커다란 별들, 매혹적인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우르미예의 소금호수….이란에서 기자가 만났던 갖가지 세상 풍경은 “쓸쓸하고 외로운 것들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삶의 진실을 다시 한 번 고개 끄덕여 깨닫게 했다. 아름다운 풍광에 더해 이란에서 만난 아이들의 천진한 눈망울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소풍 나온 공원에서 자기 몫의 음료수와 샌드위치를 처음 보는 한국 아저씨(?)에게 나눠주던 여섯 살 알리, “함께 사진 한 장 찍어도 괜찮겠느냐”고 청하니 부끄러워하면서도 포즈를 취해주던 어린 남매, 같이 보낸 30분 남짓한 시간에 정이 들어 기자의 품에서 떨어지려하지 않던 모하메드, 장애를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났음에도 표정에서 그늘이 느껴지지 않아 더욱 슬프게 보였던 또 다른 남매까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계는 시시때때로 “이란의 주요 군사시설을 폭격하겠다”는 엄포를 놓곤 했다. “테러리스트를 감싸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려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관한 정치적 논평이나 견해를 내놓는 건 기자의 몫이 아닐 듯하다. 그러나,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지구 위 어느 민족보다 착하고 순진한 이란 사람들, 어떠한 죄도 읽어낼 수 없는 선량한 눈빛의 이란 아이들. 그들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웃으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이건 신을 믿지 않는 기자가 해본 거의 유일한 진심어린 기도다. 다시 세월이 지나 이란을 찾았을 때도 알리, 후세인, 모하메드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과 청년들, 아저씨, 할아버지와 어깨를 걸고 애틋한 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적 독단과 정치적 음모도 이란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과 단란한 가정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 이란을 여행하며 기자가 만난 100여 명의 후세인과 알리 그리고, 모하메드 역시 이를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그 명백한 진리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는 건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건, 때로는 그렇지 않건 세상과 관계를 맺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살아간다는 것이 갑갑하고 서글퍼지는 날들이 있다. 복잡하게 짜인 사회관계망 속에서 환멸을 느낄 때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감정들.그럴 때면 기자는 이란 사람들의 순수한 미소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언젠가 우리도 그들처럼 `살아있음`을 축복으로 여기며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오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추억 선물한 쿠르드족터키 동부와 이란,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사는 쿠르드족은 3천만 명에 가까운 인구와 자기들만의 언어를 지녔음에도 국가를 가지지 못한 슬픈 운명의 사람들이다.중세부터 시작된 쿠르드족 불행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불과 몇 십 년 전엔 이라크에서 벌어진 화학무기에 의한 대량학살의 피해자였고, 이란에서의 독립국가 건설운동도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터키를 상대로 진행 중인 무장저항운동은 아직도 현재진행형.터키 동북부와 이란을 여행했을 때 이들 쿠르드족과 자주 만났다. “수니파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는 호전적인 민족”이란 평가를 듣고 있는 쿠르드족. 그러나, 기자가 만난 그들은 `호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너무 순박하고 선량해서 동정심을 자극할 정도였다. 성경 속 `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는 아라라트 산이 위치한 도우베야짓, 광대한 소금호수가 절경인 도시 반(Van), 이란과 아르메니아의 접경인 우르미예에서 만난 쿠르드족 노인과 청년, 그리고 아이들.터키 군대의 폭격에 12명의 쿠르드족이 목숨을 잃은 날. 도우베야짓에서 벌어진 항의시위 현장을 지켜봤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들과 자신들이 처한 불합리한 상황에 분노하던 젊은이들. 인종문제가 불러온 불행의 상처는 깊었다. 하지만, 그 상처가 쿠르드족의 성품까지 파괴하지는 못한 듯했다.그날, 여행자인 기자의 안전을 걱정해 택시를 태워 시내 외곽으로 데려다준 것은 터키 군인이 아닌 쿠르드족 청년들이었다. 반 호숫가에서 만난 쿠르드족 학생들 또한 그들의 소풍에 기꺼이 낯선 사람을 초대해 닭 가슴살 바비큐를 듬뿍 내놓으며 웃었다.우르미예의 한적한 공원에서 기자가 마신 홍차 값을 대신 치른 것도 쿠르드족 할아버지였다. 그는 먼 나라에서 온 동양인 사내가 자신의 시야에서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치 외지로 떠나는 친아들을 송별하듯. 독립된 자기들의 나라에서 싸움을 모르는 순한 양처럼 살아야 할 사람들이 겪는 슬픔.이란 여행을 끝낸 지 벌써 몇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쿠르드족을 떠올릴 때면 마음 한구석이 아프게 서늘해진다. 아직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쿠르드족의 현실. 그들이 미래를 꿈꿀 희망만은 강탈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2016-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