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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전쟁 후의 폐허에 ‘애린’과 ‘선린’의 꽃을 피운 사람

6·25전쟁 때 부모 잃은 고아들을 보살핀 선린애육원과 학업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 문해(文解) 교육을 실시한 애린공민학교의 설립, 나환자들이 자립할 수 있는 정착촌인 애도원(愛道園) 조성, 포항시립도서관 건립, 포항문화원 설립, 포항 최초의 문화제인 개항제(開港際) 개최, 포항문화원 부설 독서회 발족, 포항시민헌장 기초, 옛 포항시민의 노래와 포철공고, 오천중 교가 작사 등.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이 주도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전쟁 후 초토가 된 포항에서 문화와 복지의 씨를 뿌리고 가꾼 이명석(李明錫, 1904∼1979). 그의 삶을 알아야 포항의 정신과 문화, 복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1965년 7월 포항 중앙동의 애린예식장에서 포항 최초의 극단인 은하(銀河)가 창단 기념으로 최동주의 창작극 ‘비와 대화’를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관객은 겨우 네 명에 불과해 150석 규모의 예식장은 텅텅 비었다. 당황한 연극단원들은 공연 준비를 도와준 이명석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격려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간 이명석은 열변을 토했다. “다른 사람들을 더 데리고 와야지, 왜 여러분만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그리고는 이명석도 울었고 단원들도 울었다. 극단 은하의 첫 번째 공연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은하는 마땅한 연습 장소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극단을 꾸렸다. 하루는 상원동 골목길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여기서 와 이라노”하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선뜻 연습 장소를 구해주는 등 갖가지 도움을 주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은하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극단으로 발돋움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청년 연극인들을 도와준 그 사람이 이명석이다. 교남학교 거쳐 간사이미술원 입학이명석은 포항과 인접한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에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고 이명석의 집안도 다를 바 없었다. 부친이 기독교인이 되면서 가족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1년 삼사리에 교회가 설립될 때 온 집안이 앞장섰다. 영덕 장사학교에서 한글을 익힌 그는 열두 살 때 꼬박 열흘을 걸어서 대구에 도착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장사학교 교사가 알려준 사립학교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이명석은 절망하지 않았다. 서문시장 등에서 일하며 4년여를 버티다가 1921년 애국지사 홍주일 등이 세운 사설 강습소인 교남(嶠南)학교(현 대륜고)에 들어갔다.4년 만에 교남학교를 졸업한 이명석은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더 큰 곳에 가서 꿈을 펼쳐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명석은 장사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그 재능을 살리기 위해 아사이 츄(淺井忠, 1856∼1907)가 설립한 간사이(關西)미술원에 입학했다. 고학을 하며 힘겹게 2년을 보냈지만 3년차 가을에 각혈을 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무리하게 일하며 공부한 탓이었다. 폐결핵 진단이 나왔고 학교에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문화예술로 계몽운동을 펼치겠다는 뜻 품어귀국한 이명석은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일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영해 원황교회 도달석 집사의 장녀 도우술과 결혼했다. 그리고 포항으로 이사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일본으로 가서 자리를 잡은 다음 식구들을 불러들이기로 하고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다시 일본 땅을 밟았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제대로 먹지 못했고 유리공장에서 안전 장구도 없이 위험천만한 일을 했다. 여름 태풍 때 공장 굴뚝이 무너지면서 공장을 덮치는 대형 사고가 터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명석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병원에서 또다시 결핵 판정을 받은 이명석은 더이상 일본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이명석은 포항교회(현 포항 제일교회)에 등록하고 페인트 작업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처음에는 일본인 주택의 벽면이나 창틀 페인트 작업을 하다가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선박 도색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38년에 대구일보 기자인 박영달, 포항읍사무소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김대정을 만나 호형호제하며 지내게 되었다. 박영달은 뒷날 사진작가로 역량을 인정받았고, 김대정은 이육사와 친교할 정도로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이명석은 이때부터 문화예술로 계몽운동을 펼쳐보겠다는 뜻을 품었다. 포항교회 청년들로 관악대를 조직해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답답한 주민들의 가슴에 신바람을 불어넣기도 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정신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포항의 거리에는 고아들이 떠돌아다녔다. 미 해병과 선교사, 포항의 교회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아들을 보듬을 수 있는 시설을 건립하려 했다. 실무를 맡은 이명석은 숱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딱한 고아들의 눈망울을 떠올리며 하나둘 해결해 나갔다. 드디어 고아원을 개원하게 되었고 명칭을 지어야 했다. 이명석은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운 아이들의 이웃이 되자는 뜻에서 ‘선린애육원’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관계자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가 의원(醫院)으로 바뀔 때 ‘선린의원’이라는 명칭을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는 동안 교육의 기회를 놓쳐 우리글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포항 제일교회에서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공민학교를 설립했는데 학생 수가 계속 늘어나 수용이 힘들었다. 그 대안도 이명석이 감당했다. 그의 집터에 학교를 세워 운영한 것이다. 학교의 명칭은 애린공민학교라 했다. 이 학교를 거쳐 간 학생은 수천 명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라, 이명석은 주변의 괄시를 견디다 못해 도움을 요청한 흥해 성곡리 음성 나환자들의 후견인이 되어 애도원이라는 농장을 조성하고 애도교회 설립도 이끌어주었다. 전쟁 후의 폐허에 ‘애린’과 ‘선린’이라는 아름다운 꽃은 이렇게 피어났다.지역 문화예술의 주춧돌 놓아이명석은 문화예술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박영달, 김대정에 이어 한흑구를 만나게 된 것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들은 박영달이 중앙동에 개업한 ‘청포도다방’에서 수시로 만나 척박한 지역 문화를 살려 나갈 길을 모색했다.이명석은 몸을 던져 길을 내는 사람이었다. 포항문화원을 설립했고, 포항 최초의 문화제인 ‘개항제’를 주도했으며, 포항예총과 포항문인협회의 기반을 닦았다. 시립도서관 건립 운동을 펼쳤으며, 포항문화원 부설 독서회도 발족했다. 특히 독서회 발기 취지문은 직접 작성할 정도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그는 1966년 결핵이 완치되었을 때 호를 재생(再生)이라고 지었다. 새로운 몸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고, 포항 문화의 르네상스를 실천하리라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가 얼마나 포항을 생각했는지는 그가 작사하고 장남 이진우가 작곡한 ‘옛 포항시민의 노래’에서 느낄 수 있다.“대한의 새벽 날이 밝아 새는 내 고장 / 형산강 흐름 끝에 송도 명사(明沙) 고와서 / 동해의 고기떼가 모여드는 영일만 / 갈매기 흥겨워서 파도 곁에 춤춘다 / 여기는 경북 관문 아늑한 복지 / 정답게 뭉치자 우리 시민들 / 대포항(大浦項) 건설의 노래를 부르자”이명석은 1979년 4월 차남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머물다가 그해 9월 28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지상에서 남긴 마지막 기도문은 풍진세상을 살아가는 후세들이 거듭 읽어야 할 감동적인 글이다.“하나님, 저에게 적당한 재산, 적당한 건강, 적당한 수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을 짐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짐이 있었기에 나태와 탐욕을 경계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게 주님의 큰 뜻과 계획이셨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제가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적당한 일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하게 불러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이명석의 뜻을 기리고자 1998년 2월 28일 포항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그가 생전 자주 거닐었던 수도산 덕수공원에 문화공덕비를 세웠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제공 : (재)애린복지재단, 참고문헌 : 박이득·김삼일·이남오·김일광 엮음 ‘재생 이명석’(새암, 2018)끝

2022-11-30

‘할아버지 의사’의 상처와 무늬

포항 동빈동에 흰색의 아담한 목조건물 하나가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따듯한 정감을 느끼게 한 그 건물은 선린의원이었다. 선린의원은 단순히 하나의 의원(醫院)이 아니라 파란만장한 현대사와 개인사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는 곳이었다. 6·25전쟁으로 초토화되어 수많은 전쟁고아가 길거리를 헤매고, 홀로 된 산모들이 흐느끼고 있는 포항에서 그들을 치료하고 섬기는 사명이 선린의원의 뿌리였고, 그 의원을 헌신적으로 이끌어 간 사람이 김종원(金鐘元, 1914∼2007)이었다.김종원은 이산가족이다. 전쟁 때 세 아들을 북에 남겨두고 남으로 왔고, 그 후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뼈저린 아픔이 그의 삶을 규정짓는다.평안북도 초산(楚山)군 출신인 김종원은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1929년 김종원이 신의주고보 3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불길은 멀리 신의주까지 옮겨붙었다. 김종원은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뛰어나가 조선 독립을 외쳤고, 즉결심판에 넘겨져 한 달 가까이 구류를 살았다.평양의학전문학교(평양의대의 전신)를 졸업한 김종원은 초산 도립병원 소아과 의사를 거쳐 1940년 1월 평북 위원(渭原)에서 개인병원을 개원해 1945년 8월까지 운영했다. 이 무렵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의 책을 접하고 평생 그의 책을 탐독했다. 신의주고보 때 학생 운동을 한 경험과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은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를 잡았다. 평양을 탈출해 대구 동산기독병원에서 근무김종원은 1946년 4월부터 평양의대 소아과에서 근무했는데 1950년에 터진 전쟁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김종원이 한국민사지원단(UNCACK) 병원에 근무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치료해준 게 화근이 되었다. 1·4후퇴를 앞두고 북한군이 평양에 진입할 태세였고, 북한군에게 체포되는 순간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했다. 3년 전인 1947년에 월남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혐의로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된 경험도 있었다. 걸을 수 있는 세 아들은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고 아내와 맏딸, 젖먹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황급히 내려왔다. 세 아들에게 곧 데리러 온다는 말을 남겼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훗날 그와 아내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자랐던 세 아들이 날마다 기차역에서 해가 지도록 엄마를 기다리다 울면서 돌아왔다는 말이었다(손진은, ‘우리 이웃, 김종원’, 보이스사, 2014, 254쪽 참조.).평양을 탈출한 지 2주 만에 대구에 도착한 김종원은 육군제일병원(경북대학교 병원)을 찾아가 문관(文官)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2개월쯤 지나 길을 가다가 북한에 있을 때 함께 근무한 간호사를 우연히 만났다. 간호사는 자신이 근무하는 동산기독병원으로 김종원을 데리고 가 황용운 원장 서리를 만나게 해주었다.평양 광성고보를 나온 황 원장 서리는 미국에서 10년간 유학한 의료계의 거목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안 그래도 이 큰 도시에 병원이 하나밖에 없어 밀리는 환자들을 제대로 진료조차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면서 아주 기뻐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동산기독병원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했다(‘선린병원 45년사’, 선린병원, 1999, 106쪽 참조). 김종원은 그렇게 해서 동산기독병원 소아과에서 아이들을 진료하게 되었다. 포항 선린의원(1960년).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 초대 소장 맡아6·25전쟁 때 폐허가 된 포항의 거리에는 전쟁고아와 홀로 된 산모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시설은 전무했다. 미 해병 비행단 33연대 군목실에서 근무하던 김성호 목사는 미 해병 군목에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지역을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던 중에 대구 동산병원 황용운 원장과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사로서 경동노회를 맡고 있던 라이언, 김종원 의사, 포항 북부교회 오근목 목사, 경주 제일교회 박내승 목사 등이 미 해병 군목실을 방문해 전쟁고아들을 무료로 진료할 병원 설립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전쟁고아와 산모들을 위한 병원을 포항에 우선적으로 건립하는 데 뜻을 같이하고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손진은, 위의 책, 121쪽 참조.).이 무렵 김종원은 함께 피난 온 고모 가족을 만나러 포항에 왔다가 시내 우체국 뒤쪽에서 한 무리의 아이를 보게 되었다.웅덩이 속에 쪼그려 있던 아이들을 보는 순간에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중략) 내 애가 저들이겠구나 생각하니 뭐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지요. 한참을 서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결심했지요. 이곳에 와서 저들을 고치고 도와줘야겠다고. 그런 결심을 하고 나니까 내가 소아과 전문의가 된 게 또 감사가 돼요. 그러니 결코 내가 신앙이 좋아서 자선을 하겠다거나 그런 뜻에서 결심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선린병원 45년사’, 선린병원, 1999, 108쪽.그 길로 김종원은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의 초대 소장을 맡았고, 1953년 6월 5일 동빈동의 적산가옥 방 한 칸을 고쳐서 진료를 시작했다. 진료소가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박일천 포항시장, 미 해병대에 근무하고 있던 한흑구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종원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전쟁고아와 산모들을 돌보았고, 진료소는 문전성시를 이루다시피 했다. 한국 최초의 모자(母子) 보건 활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포항의 ‘할아버지’ 의사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의 운영은 포항에 주둔한 미 해병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1956년 미 해병이 철수하자 진료소는 방향 전환을 시도해야 했다. 일반 환자도 받으면서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선린의원을 개원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60년 6월 10일이었다.선린의원으로 바뀐 후에도 김종원의 초심은 변함이 없었다. 전쟁고아와 산모, 그리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낮은 자세로 봉사한다는 신념으로 선린의원을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1962년 8월 선린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병원을 재단법인 소유로 못박았다. 병원의 사유화를 원천 차단한 것이다.선린병원 소아과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서울에서도 선린병원 소아과를 찾을 정도로 김종원의 실력은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새벽 기도회에 갔다가 곧바로 출근했다. 아침 일찍 진료를 시작해 늦은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아이들을 마주했다. 하루에 무려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할 때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휴일이면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선린애육원을 비롯해 흥해애육원과 가톨릭애육원(성모자애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보살폈다. 그의 진료를 받은 수많은 고아와 아이는 물론 그의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이 김종원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포항의 할아버지 의사가 되었다.진료실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어 일사병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많은 고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주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것이다.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모두 거부했고, 30년 된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사용하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집안 살림이든 병원 경영이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그 뜻에 따라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선린병원 협동원장 시절의 김종원. 영결식 때 많은 고아가 눈물 흘려김종원의 호는 인산(仁山)이다. 1960년대 말에 서영욱 동산의료원 원장이 선린병원에 들렀다가 신문지로 코피를 막고 진료하던 김종원을 보고는 ‘인술(仁術)의 큰산’이라 하여 지어준 것이다.김종원의 삶에는 또 다른 상처가 있다. 피난 올 때 갓난아기였던 넷째 아들이 서울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하숙집에 머물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다. 아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그는 묵묵히 환자들을 보살폈다. 결국 아들이 숨을 거둔 후 장례식을 치르고 병원으로 돌아온 그의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2007년 3월 김종원이 영면하자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하관식 때 그의 품에서 자란 많은 고아가 눈물을 흘렸다. 포탄의 웅덩이에서 놀던 고아들은 “예수님의 다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선린병원 원장 이임사에서 고백한 그였다.김종원이 1953년 6월부터 출석한 포항 북부교회(현 기쁨의교회),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설립한 선린대학교, 이사장을 맡은 선린애육원, 그리고 선린병원은 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포항 곳곳에 그의 영혼이 숨 쉬고 있고, 수많은 포항 사람의 가슴에 그의 이름 석 자가 남아 있다. 역사에서 받은 깊은 상처가 아름다운 무늬가 되는 것을 김종원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포항은 그 상처와 무늬를 잊을 수 없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제공 : 콘텐츠연구소 상상

2022-11-28

포항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했던 영성의 담지자

1945년 9월 초하루 한흑구는 38선을 넘었다. ‘조선의 간디’ 조만식 선생을 모시고 월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만식은 죽어도 북의 동포들과 함께 죽겠다고 굳게 결심한 터였다. 조만식은 산정현교회의 장로였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해서 한승곤, 한흑구 부자(父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한흑구는 조만식 선생이 주선한 트럭을 타고 남쪽으로 향하는데, 그와 함께 월남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한흑구는 미군정에서 일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1947년 3월부터 1년간 『문화일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현대미국시선』(선문사)을 발간했는데, 다음의 글에서 당시 그의 작품 활동이 우리 문학계에 미친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그의 작품 활동은 그 시대의 신문이나 잡지에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매우 활발했으며, 그것도 문학 전반에 걸쳐진 것으로 보이나, 특히 1930년대에서 비롯되는 미국 시 및 그 밖의 역시(譯詩) 활동은 8·15해방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휘트먼과 흑인 시의 번역 소개는 물론, 미국 문학 및 작가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져 있음은 당시의 다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김학동,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일조각, 1981, 206∼207쪽.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었던 사람한흑구는 서울을 떠나려 했다. 동해안과 서해안, 남해안을 다니며 거처를 물색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걸 치료하려면 바닷가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신선한 해산물을 먹으면 좋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다. 또 하나는 머지않아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마침 동료 문인들과 경주에 고적지 순례차 왔다가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는 포항에 잠깐 들렀다. 그 직후 식구를 데리고 포항으로 향했다. 1948년 가을이었다. 그는 가족에게 포항 송도 모래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보다 좋다고 했을 정도로 포항 바다에 매료되었다. 한흑구는 거의 매일 포항 바닷가를 걸었는데 그때 심정은 그의 첫 수필집에 실려 있다.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동해변으로 온 지가 꼭 20년이 되었다.거의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어 보았다. 인생 자체를 항해에 비하지만, 나는 바닷가에 혼자 서서, 나의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흑구, 「책머리에」, 『동해산문』, 일지사, 1971, 8쪽.어떤 이유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흑구는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포항은 어떻게 다가왔을까?그때 포항 인구 5만. 토착민은 2천 명 정도 될까, 라고 했다. 일본·만주 등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섞여 살기가 힘들지 않은 것 같았다. 한국 속의 ‘뉴욕’과 같았다고 당시 포항 분위기를 살폈다. (중략) 서울 생활은 신의도 없고 거짓 생활이 많아서 마음에 들지 않다가 편안한 보금자리를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작년 경북문화상 받은 한흑구 씨, 『영남일보』, 1973. 1월.그의 예견대로 전쟁이 터지자 온 식구가 7일간 걸어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다행히 포항 집이 무사해 1950년 가을에 포항으로 돌아왔다.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포항 도심은 초토화되었는데 한흑구의 집은 장독 하나 깨지지 않았다. 만약 집이 파손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흑구와 포항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 후로 그는 화려한 학력과 경력, 인맥을 거의 접다시피 하고 1979년 11월 7일 숨을 거둘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았다. 신사였고 베풀 줄 아는 사람한흑구는 포항에서 수필을 주로 썼고 소설도 발표했으나 과거에 비하면 과작(寡作)이었다. 수필 「나무」, 「보리」, 「닭울음」은 국어 교과서에 실리며 수필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시를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늘 모래밭에, 또는 바다 물결 위에 시를 써 보았다”는 수필(「동해산문」)의 한 구절처럼 시심(詩心)으로 살았다. 책을 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문인으로서 책은 꼭 발간해야 한다는 아동문학가 손춘익(孫春翼, 1940~2000)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환갑이 지나 『동해산문』과 『인생산문』(1974)을 냈다.한흑구를 기억하는 포항의 원로들은 그가 신사였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서울 시절과 부산 피난 시절 동료 문인들을 만나면 밥값과 술값을 도맡아 냈고 용돈도 나누어주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필라델피아로 찾아온 친구 안익태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포항 오천 미군부대에 근무할 때는 지역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전쟁 때 길거리에 고아와 미혼모가 넘쳐나자 그들을 품어주기 위한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가 포항 시내에 설치되었는데 그때도 한흑구의 손길이 닿았다. 전쟁 때 불타버린 포항여고 교사(校舍)를 복구할 때도 그는 어김없이 달려가 힘을 보탰다. ‘흐름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포항 문화예술에 향기를 불어넣었고, 1979년 포항문인협회 창립도 한흑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아내 방정분 여사의 헌신적인 내조그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자식뻘 후배들과 스스럼없이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심야에 담배가 떨어지면 아들의 담배를 얻어 필 정도로 부자간에 격의가 없었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성실한 생활인이었고 가족에게 자애로웠다. 낡은 집에 살았지만 1950년대에 아내를 위해 싱크대를 직접 만들어주었고, 어린 자식들과 나룻배를 타고 영일만에서 낚시를 즐겼다. 1968년 포항 청림초등학교가 개교할 때 “동해같이 배우고 태양같이 빛내자”는 노랫말을 써주며 어린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었다.포구숲 둘러싸인 청림초등학교앞에는 푸른 동해 태양이 솟는다우리도 동해같이 끝없이 배우고우리도 태양같이 배워서 빛내자자유와 인권의 정신 드높여지덕체 함양해 나라를 빛내자- 한흑구 작사, 포항 청림초등학교 교가 1절.한흑구를 얘기하면서 그의 아내 방정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황해도 안악군(安岳郡)의 부잣집 딸이었던 방정분은 이화여전 음악과 재학 시절 동기였던 한흑구 여동생의 소개로 한흑구와 결혼했다. 홍난파(洪蘭坡, 1898∼1941)한테 배우고 음악 활동도 함께했다고 한다. 방정분은 결혼 직후부터 역사의 거센 바람을 남편과 함께 견뎌낸 반려자였다. 포항에 정착한 후 셋째 아들의 죽음을 겪은 슬픔을 삼키며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한흑구의 장남 한동웅은 “어머니는 아버지를 존중했고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어머니 없는 아버지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흐름회’ 회원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흑구 선생. 박영달 사진점은 현재 중앙상가 뱅뱅어패럴 자리에 있었다. 맑고 깊은 영성의 담지자한흑구는 무엇보다 맑고 깊은 영성의 담지자였다. 배금주의를 배격했고 거짓말하는 것을 혐오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종교의 핵인 영성을 깊이 체현했다. 시의 운율이 흐르는 수필 한 편 한 편은 영성의 결정체이자 기도문에 가깝다.나는 나무를 사랑한다.아침에는 떠오르는 해를 온 얼굴에 맞으며, 동산 위에 홀로 서서, 성자인 양 조용히 머리를 수그리고 기도하는 나무.낮에는 노래하는 새들을 품안에 품고, 잎마다 잎마다 햇볕과 속삭이는 성장(盛裝)한 여인과 같은 나무.저녁에는 엷어가는 놀이 머리끝에 머물러 날아드는 새들과 돌아오는 목동들을 부르고 서 있는 사랑스런 젊은 어머니와 같은 나무.밤에는 잎마다 맑은 이슬을 머금고, 흘러가는 달빛과 별 밝은 밤을 이야기하고, 떨어지는 별똥들을 헤아리면서 한두 마디 역사의 기록을 암송하는 시인과 같은 나무.- 한흑구, 「나무」, 『동해산문』, 일지사, 1974, 9∼10쪽.미국에 망명 중이던 한승곤은 중학생인 외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너는 십일홍(十日紅)의 들꽃이 되지 말고, 송림(松林)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라의 큰 재목(材木)이 되어라”고 썼다. 공교롭게도 한흑구는 송림이 울창한 포항 바닷가에 와서 반평생을 살았지만 스스로 재목이 되기를 포기하고 바닷가에 혼자 서서 존재의 미미함을 느낄 뿐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한흑구의 작품을 읽고 그의 삶을 숙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한동웅 제공

2022-11-21

송도 바다 위에 시를 쓴 검은 갈매기

서울 시절의 한흑구. 해방공간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1948년 가을, 서울 필동에 살던 한 가족이 짐을 꾸려 서울역으로 갔다. 열두 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동해변의 포항이었다. 서울 필동의 이층집은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살던 적산가옥으로 방이 여덟 개나 있었고 마당도 넓었다. 사고무친(四顧無親)한 그들에게 포항에는 마땅한 살림집조차 없었다. 임시변통으로 남의 집 아래채에서 살다가 집을 구하면 이사할 요량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지방에서 서울로 가게 마련인데, 이 가족은 왜 서울을 떠나 동해안의 변방으로 왔을까?식솔을 데리고 포항으로 온 가장은 수필 「보리」로 유명한 한흑구(본명 한세광(韓世光), 1909∼1979)다. 포항의 정신과 문화예술을 얘기할 때 한흑구를 빠트릴 수 없다. 그는 20세기 한반도에서 살다 간 지성 중에 비슷한 유형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인물이다.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929년 20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5년 동안 머물며 영문학과 신문학을 공부했다. 그 후 평양으로 돌아와 광복 직후 월남했으며 미군정청에 있다가 포항에 와서 인생의 닻을 내렸다. 은자(隱者)로 살아간 한흑구한흑구는 수필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한 전방위 문인이다. 시와 수필, 소설, 평론, 영미 번역시를 발표했고, 특히 《동광(東光)》(1932년 2월호)에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를 발표하는 등 흑인문학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평양에 있을 때는 잡지 《대평양(大平壤)》과 《백광(白光)》의 창간에 참여하며 여러 편의 글을 실었다.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에서 활동했고 월남해서는 미군정의 통역관을 했으나 밀려드는 청탁을 피해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의 작품 등 미국 현대 시를 번역했다. 그는 이효석(李孝石, 1907∼1942), 유치환(柳致環, 1908∼1967), 김광주(金光洲, 1910∼1973, 소설가 김훈의 부친), 황순원(黃順元, 1915∼2000),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조지훈(趙芝薰, 1920∼1968)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한흑구는 파란만장한 역경을 거치고 포항에 왔지만 그의 삶과 문학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게 많다. 포항에 정착한 그가 바다와 술을 벗하며 은자(隱者)로 살아간 까닭이다.겨레의 선각자였던 아버지 한승곤 목사한흑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아버지 한승곤(韓承坤, 1881∼1947)을 알아야 한다. 선각자인 그는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한승곤은 평남 강서의 지주로 원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부흥회 때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평양신학교를 나와 고향의 많은 땅을 처분하고 평양에다 산정현(山亭峴)교회를 세워 초대 목사가 되었던 유명한 목회자였다(김용성, 『한국현대문학사 탐방』, 현암사, 1991, 282·283쪽).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1908년에는 한글맞춤법 교과서인 『국어철자첩경(國語綴字捷徑)』을 간행할 정도로 우리말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셩신츙만』이라는 성령론을 집필했다.한승곤은 1916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외아들 한흑구가 일곱 살 때였다. 한흑구의 수필 「파인(巴人)과 최정희」에 “105인 사건 때 상해로 망명하셨던 아버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서”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볼 때, ‘105인 사건’의 여파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일제가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일이다. 평양의 기독교계 항일세력이 다수 검거된 이 사건은 한승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한승곤은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의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했으며, 1919년에는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의 의사장(議事長)을 맡으며 흥사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흥사단 동지들과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3년간 옥살이를 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가 1937년 5월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운운’이라는 인쇄물을 산하 35개 지부에 발송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그해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관계자 181명이 체포된 사건이다. 한승곤은 1947년 작고했으며,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망명한 아버지를 따라 스무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아버지의 영향을 깊게 받은 한흑구는 문학 소년으로 성장했다. 1925년에 고향의 문학 소년들과 ‘혜성(彗星)’ 문학 동인 활동을 했고, 1926년에는 《진생(眞生)》에 시를 발표했다. 또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시절이던 1928년에는 『동아일보』에 수필을 발표하는 등 문학 창작 활동을 했다(한명수, 「한흑구는 민족시인이다」, 《포항문학》 46호, 12∼13쪽). 중학생 시절에는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의 수필에서 “High thinking, plain living(고상한 이상, 평범한 생활)”이라는 구절을 접하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한흑구는 1929년 3월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검은 갈매기, 흑구(黑鷗)라는 필명은 일본 요코하마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 갑판에서 떠올린 것이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갑판에 올라, 갈매기가 다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배꼬리 쪽을 살펴보았더니, 웬일인지 검은색 갈매기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긴 나래를 펴고 쫓아오고 있었다. 그 검은 갈매기 한 마리는 하와이에 올 때까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그냥 한 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옛것을 버리고 새 대륙을 찾아서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이런 구절을 일기에 쓰다가, 문득 나의 필명(筆名)으로 사용하기로 생각했다.(중략)나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여야 하는 갈매기와도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한흑구, 「나의 필명의 유래」, 『인생산문』, 일지사, 1974, 125쪽.1929년 2월 시카고에 도착한 한흑구는 영어를 익히기 위해 노스파크대학교(North Park Univ.) 부속고등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 후 1년 가까이 미국 전역과 캐나다를 여행했다. 그 후 노스파크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가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Temple Univ.)로 옮겨 신문학과를 수료했다. 흥사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1929년 5월 2일 교민단체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신한민보」와 흥사단 계열의 잡지 《동광》, 미국 유학생들의 잡지 《우라키(The Rocky)》에 시와 영미 번역시, 평론, 소설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다. 대부분의 작품 행간에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독립을 갈망하는 심정이 배어 있다.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문인결핵성 후두염을 앓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1935년 귀국한 그는 소설가 전영택과 잡지 《대평양》과 《백광》의 창간에 참여하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여동생(덕희)의 소개로 1937년 4월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 전신) 음악과 출신의 방정분(邦貞分, 1913∼1989)과 결혼했으나 그해 6월 수양동우회 사건이 터지면서 아버지와 함께 구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한승곤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고, 한흑구는 기소 중지 처분을 받았다.수양동우회 사건은 독립운동과 조선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의 핵심 인물인 안창호는 구속 후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지만 고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1938년 3월에 숨을 거두었다. 지도자를 잃은 흥사단은 심대한 타격을 입고 국내 활동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수양동우회의 핵심 인물로 조선 문단을 이끌었던 이광수는 일본에 전향하면서 ‘친일 문인’으로 낙인찍혔다.수개월간 고초를 겪은 한흑구는 가산을 정리해 조상 삼대가 살던 평남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안말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서 과수원을 일구고 이따금 낚시를 하며 작품을 썼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고 예술가들이 친일 대열에 합류할 때였다. 당연히 한흑구에게도 일본에 협력하라는 압박과 회유가 이어졌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뒷날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한흑구를 일컬어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는 헌사를 바쳤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한동웅 제공

2022-11-16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예배당

지역마다 도심에는 지역민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있기 마련이다. 교회나 사찰, 성당이 그런 역할을 맡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모든 종교 건축이 그럴 수는 없고 그중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깊은 신뢰를 받는 곳이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런 공간은 특정 종교의 울타리를 너머 지역 공동체와 허물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포항 도심에도 그런 공간이 있을까? 포항 북구 중앙동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옛 제일교회는 한눈에 봐도 고풍스럽다. 오래된 붉은벽돌과 빛바랜 첨탑에서 고색창연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길을 걷다가 교회 앞에 이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때로는 숙연해지기도 한다. 교회 마당에 참새나 비둘기가 내려앉아 모이를 쪼고 있을 때면 교회는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 없다.포항 제일교회는 1905년 5월 12일 창립되었다. 이날은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 1867∼1929) 선교사 일행이 포항을 처음 방문해 복음을 전한 날이다.안의와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1897년 대구에 부임해 대구·경북의 모교회(母敎會)인 대구 제일교회를 설립한 후로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계성(啓聖)학교를 설립했으며, 제중원(濟衆院, 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개원에도 참여했다. 동산의료원 초대 원장인 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 1869∼1951)과 더불어 대구에 사과나무를 처음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겨레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영흥학교 설립포항 제일교회는 1908년 중앙동에 초가삼간을 구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이때 교회 설립의 기초를 닦은 인물은 초대 당회장(堂會長)을 맡은 미국 선교사 맹의와(孟義窩, Edwin Frost McFarland, 1878∼?)다. 맹의와는 1904년 대구에 부임해 대구 제일교회를 근거지로 영일, 경주, 고령, 달성 등에 20여 개의 교회를 설립한 선교사다.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볼 때 19세기 후반 대구에 정착한 미국 선교사들이 대구 제일교회를 거점으로 대구·경북에서 여러 교회를 개척한 것이 대구·경북 교회의 초기 역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포항 제일교회를 비롯해 흥해교회(현 흥해중앙교회), 대도교회 등 영일군과 포항의 주요 교회는 20세기 초반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었다.포항 제일교회는 신도가 증가하면서 1910년에 초가 다섯 간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당시 포항에 일본인 거주자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심상(尋常)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포항 지역에 우리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포항 제일교회 신도들은 이 겨레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간절히 기도했고, 그 응답으로 1911년 11월 1일 영흥(永興)학교를 설립했다. 평일에는 예배당을 학교로 활용하고 주말에는 예배를 보는 방식의 지혜를 짜낸 것이다.후일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한 평양 숭실학교 등이 자진 폐교하는 등 기독교계 학교가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 영흥학교도 폐교 위기에 몰렸다. 다행스럽게 1933년에 지역의 젊은 유지인 해촌(海村) 김용주(金龍周, 1905∼1985)가 학교를 인수하면서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을 주도한 교인들1919년 3·1운동은 포항 제일교회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포항 제일교회 교인과 영흥학교 교사들이 포항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교인이 체포되고 실형을 선고받는 등 포항 제일교회는 고난을 겪었지만 위축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인이 증가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다. 겨레의 고난과 함께한 것이 교회 부흥의 계기가 된 것이다.교인이 증가하면서 예배 장소가 협소해지자 벽돌로 된 예배당을 짓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1926년 김영옥 목사가 2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면서 새 예배당 건립에 힘이 실렸다. 1928년 9월 연와제예배당건축기성회(煉瓦製禮拜堂建築期成會)가 조직되었고, 벽돌 한 장 모으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1933년 6월 15일 총공사비 8천 원의 예산으로 연와제 2층 연면적 190평의 예배당을 기공해 그해 11월 19일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포항 최초의 붉은벽돌 예배당은 그렇게 세워졌다.좌우 합작 단체인 신간회(新幹會) 활동을 했던 김영옥 목사는 청년회를 만들어 청년들의 활동을 살려 나가는 한편, 포항여자야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에도 힘쓰는 등 포항 제일교회가 지역에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포항 제일교회는 지역민들의 교육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광복되던 해 12월 일본에서 귀국한 김영상이 제일교회에 등록해 일본에서 주일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듬해 교회당에 기독공민학교를 설립했다. 학생 수가 400여 명에 이르자 교회는 도저히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포항에 주둔해 있던 미 해병대로부터 자재를 지원받아 현 육거리 대로변의 이명석 장로 사저에 교사(校舍)를 신축해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기독공민학교는 훗날 이명석 장로가 승계받아서 애린공민학교라는 교명으로 운영되었다.포항 전투 때 도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회당한국전쟁 때 포항 전투의 참상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도심에 딱 하나의 건물만 남고 초토화된 사진이다. 그 건물이 제일교회다.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축인 포항이 뚫리면 전세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포항에 북한군이 진입하자 미 공군과 해군은 엄청난 폭격과 포격을 가했고 그 바람에 도심은 불바다가 되었다.미군이 제일교회는 피해서 폭격과 포격을 했다는 얘기가 전하지만 불바다에서 살아남은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예배당 붉은벽돌 곳곳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포항 제일교회는 이러한 역사의 파도를 넘으며 자연스럽게 포항의 모교회(母敎會)로 자리잡은 것은 물론 지역민의 신뢰를 받는 교회이자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교회가 발전하면서 중앙동 골목길의 예배당으로는 교인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1993년 11월에 교회이전건축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2003년 10월 26일 용흥동의 새 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로써 포항 제일교회의 100년 가까운 중앙동 시대는 막을 내렸고, 기존 붉은벽돌 예배당은 소망교회에서 인수했다. 생태적 삶과 영성 공동체를 지향하는 푸른마을교회포항 제일교회는 국내에 19개 교회, 해외에 29개 교회를 개척했는데, 포항 흥해읍 성곡리에 있는 푸른마을교회는 그중 하나다. 이 교회 이상은, 김이화 목사는 1997년 포항 학산동의 2층 상가를 얻어 처음 예배를 드렸다. 그 후 생태적 삶과 영성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교회 부지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3년 성곡리 숲속과 인연이 되었다.교회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조금 애를 먹기도 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노래가 말해준다.빠른 길 큰길도 아닌 / 사과밭 돌아서 작은 길로 / 울퉁불퉁 낡은 길 지나 /나무 계단 오르면 / 새 소리 바람 소리 / 주님 목소리 들려요- 김이화 작사, ‘푸른마을 가는 길’ 부분교회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놓여 있다. 주변 환경을 위압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있다. 어느 누구든 교회 앞에 이르면 잠시 숨을 고르고 노출 콘크리트로 된 교회 건물과 고즈넉한 주변 풍경을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교회를 설계한 이은석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을 부지로 받아들고 자연에 가장 잘 순응하는 수평의 길고 나지막한 겸손의 상자를 조심스럽게 놓았다”고 했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채택한 것은 “꾸미지도 장식하지도 않은 재료이고 건설의 흔적을 그대로 지닌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처럼 순수하고 질박하면서도 자연스럽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이상은, 김이화 목사의 생각과 이은석 교수의 아이디어가 한몸으로 섞이면서 “수평의 길고 나지막한 겸손의 상자”라는 독특한 교회 건축이 포항의 외딴곳에서 탄생한 것이다.예배당 내부의 십자가가 서 있는 자리는 자연 채광이 들어와 이상은 목사가 직접 만든 나무 십자가에는 햇볕이 은은하게 비친다. 이렇듯 푸른마을교회는 진정한 영성을 느낄 수 있도록 교회 곳곳을 세심하게 배려했다.교인들이 텃밭에서 함께 경작하는 모습이라든지 교회가 꾸준히 개최해온 ‘푸른마을 자연학교’에서 이 교회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붉은벽돌로 된 옛 포항 제일교회와 푸른마을교회는 몇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도심에 있는 제일교회는 지은 지 100년 가까이 되고 비교적 큰 교회다. 외곽에 있는 푸른마을교회는 건축한 지 20년도 되지 않은 작은 교회다. 하지만 두 교회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교인이든 아니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내면의 빛을 밝혀준다는 것이다. 이 교회를 찾아가 예배당 안팎을 느릿느릿 걸어 다니다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1-14

영일만에 울려 퍼진 대서사시

한 도시에도 운명이란 게 있으리라. 20세기 접어들어 한반도가 겪은 거센 풍파는 포항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 전체가 겪은 충격이지만 포항은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전쟁 후 한적한 소도시였던 포항은 1967년 6월 30일 큰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다. 정부의 역점 사업인 종합제철이 들어설 입지로 선정된 것이다. 당시 포항 인구는 6만8천여 명이었고,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농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포항이 종합제철 입지로 결정된 후 항만과 철도, 댐 공사가 시작되었다. 많은 건설 인력과 장비가 몰려들면서 포항에 때아닌 활기가 넘쳤다. 1968년 4월 1일에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 기념식이 열렸으며, 박태준 초대 사장이 취임했다.종합제철 건설의 성공 여부는 무엇보다 막대한 자금 확보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아갈 즈음에 정부와 포항제철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대했던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을 통한 외자 조달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부지 조성 공사를 한창 진행하던 1968년 1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 현장을 처음 방문해 “이거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걱정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우향우 정신’, 포항제철을 이끈 원동력대일청구권자금의 일부를 전용(轉用)해 종합제철 건설에 투입하자는 구상은 이런 난기류 속에서 나왔다. 이 구상을 실현하려면 일본 정부의 동의와 일본 철강업계,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등 국제금융기구가 포항제철 건설의 타당성을 인정해야 하는 선결 과제가 있었다. 정부와 박태준 사장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마침내 1969년 12월 3일 대일청구권자금의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에 전용하기로 최종 합의하는 한일 간의 기본 협약을 체결했다.1970년 4월 1일 포항 대송면 건설 현장에서 포항 1기 종합 착공식이 열렸다. ‘산업의 쌀’을 생산하는 종합제철 건설은 단순히 한 기업의 성패를 넘어 국가 경제의 근간을 좌우하는 대역사(大役事)였다. 박태준 사장은 밤낮없이 건설 현장에서 직원들을 독려하며 그 유명한 ‘우향우 정신’을 강조했다.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우향우’라는 단어는 포항제철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세 배가 들어간 포항 1기 건설포항제철은 1972년 12월 31일 본사를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전했다. 포항 1기 건설 총력 지원 체계를 갖추고 현장 제일주의 원칙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모래바람 부는 허허벌판의 영일만은 점차 종합제철 단지로 변모해갔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1고로 출선구(出銑口)에서 첫 쇳물이 쏟아졌고, 임직원들은 감격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1973년 7월 3일 포항 1기 종합 준공식이 있었다. 제선, 제강, 압연, 지원설비 등 총 22개의 공장과 설비를 일관화한 사업으로 건설 인원은 연인원 315만 4천884명, 건설비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세 배에 해당하는 1천204억 원이었다. 이 준공식은 대한민국이 중화학공업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1973년 포항 인구는 10만9천여 명으로, 포항이 종합제철 건설의 입지로 선정된 1967년의 6만8천여 명에 비해 4만1천여 명이나 증가했다. 포항제철의 건설과 함께 포항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모해가는지를 보여주는 통계라 하겠다. 이 무렵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형산교를 건너 출근하는 포항제철 직원들의 기나긴 자전거 행렬은 포항의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극장 상영용 뉴스인 ‘대한뉴스’에도 등장하던 그 풍경은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포항 시내 오거리에 있던 ‘부산자전거’는 전국에서 자전거가 가장 많이 팔리는 점포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포항은 포항제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포항제철은 수출과 내수 판매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했다. 수출을 개시한 지 2년 만에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국내에는 외국 오퍼 가격보다 21∼42퍼센트까지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 국내 기업의 국제 경쟁력 확보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후 포항제철은 1976년 5월 31일 포항 2기를 종합 준공하고 조강 연산 260만 톤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국내 철강 수요의 55퍼센트를 담당할 정도로 고속 성장했다.포항제철 건설과 조업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특히 1977년 4월 24일 1제강공장에서 일어난 대형 사고는 파장이 컸다. 쇳물 44톤이 전로(轉爐) 밖으로 쏟아져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일본에서 급파한 전문가들은 사고 현장을 조사한 후 완전 복구에 3∼4개월은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이때 포항제철 특유의 돌관 정신이 빛을 발했다. 정상조업 단계에 들어가는 데 불과 34일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포항 3기 설비 공사는 건국 이후의 최대 공사여서 공기 준수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78년 6월 13일 ‘건설 비상’을 선포하고 전사 총력 건설 체제에 돌입했다. 1978년 12월 8일 3기를 종합 준공함으로써 조강 연산 550만 톤 체제를 구축했다. 3년 후인 1981년 2월 18일에는 포항 4기를 종합 준공해 조강 연산 850만 톤 체제를 구축했으며, 1983년 5월 25일 4기 2차 사업을 종합 준공함으로써 조강 연산 910만 톤 체제를 완성했다.포항제철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돌관’, ‘비상’, ‘총력’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방법으로 대응해야 하는바, 포항제철의 건설 과정이 그러했다.1983년 포항 인구는 21만 3천여 명으로, 포항 1기 종합 준공식이 열린 1973년의 10만 9천여 명에 비해 배 가까이 증가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변화였다. 이제 포항은 포항제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광양 4기 종합 준공으로 사반세기 제철소 건설 대역사 완성1970년대 우리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철강 수요 또한 계속 증가했다. 이때 제2의 종합제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지만 석유파동으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국내외 여건이 나아지던 1977년 제2제철 건설이 다시 이슈로 떠올랐고, 민간기업들도 실수요자 선정 경쟁에 뛰어들었다.현대그룹이 제2제철 실수요자 선정에 적극적이라서 포항제철은 현대그룹과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포항제철은 국가기간산업인 제철 사업을 민간에 맡기면 부의 편재가 극심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경제로 이어지는 폐단이 발생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결국 1978년 10월 포항제철이 제2제철 실수요자로 선정되었다.제2제철의 입지는 1981년 11월 광양만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당시 정부는 아산만을 제2공장 입지로 내정했지만, 포항제철은 경제적인 측면과 균형발전 측면을 고려할 때 광양만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부가 포항제철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광양만에 제2제철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1985년 3월 광양 1기 공사를 시작해 1992년 10월 광양 4기 공사가 종합 준공되었다. 이로써 포항제철은 1968년 창립 이후 사반세기에 걸친 제철소 건설 대역사를 완성해 조강(粗鋼) 연산 2천100만 톤 체제를 구축, 세계 3위 철강기업의 위상을 확립했다. 사반세기 건설 대역사를 완성한 다음 날인 1992년 10월 3일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해 대역사의 성공적 완수를 보고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0월 5일 이사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세계적인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한 포항공대포항제철은 국가 과학기술의 백년지대계를 고뇌했다. 그 산물이 1986년 포항공과대학 설립이다. 1980년부터 포항에 4년제 대학 설립을 구상한 포항제철은 1986년 12월 3일 국내 최초로 세계적인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하는 포항공과대학(POSTECH)을 개교했다.2002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포스코(POSCO)로 사명(社名)을 변경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이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사명감으로 세계적인 철강기업으로 우뚝 선 포스코의 특별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영일만이 어두워지면 포항제철소의 조명이 켜진다. 거대한 설치미술 같은 제철소의 야간 조명은 영일만의 밤을 형형색색 밝힌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포항 구석구석에 포스코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 포스코의 위용만큼이나 포스코가 포항에 미친 영향은 크고도 깊다. 그리고 그 영향은 과거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고 미래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포항과 포스코는 한배를 탄 공동의 운명체가 아닐 수 없다. 포항에서 이룬 포스코의 대서사시가 더 웅장하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포항과 포스코는 더 굳게 손을 맞잡아야 할 것이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1-09

우리 꽃과 나무로 이상향을 이루고자 한 곳

50년 넘게 가꿔온 독특한 빛깔의 민간 식물원이 포항에 있다. 청하면에 자리한 기청산식물원이 바로 그곳이다. 1969년부터 조성된 기청산식물원은 현재 9헥타르(2만7천여 평)에 2천5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을 품고 있다. 자생화원을 비롯해 아열대식물원, 수생식물원, 해변식물원, 약용식물원 등이 펼쳐져 있으며, 섬개야광나무 같은 울릉도 자생식물과 경상도에서 자생하는 멸종위기 식물도 보전하고 있다. 포항종합제철 기공식이 열린 때가 1967년 10월 3일. 우리나라 산업화의 대역사가 영일만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낙동정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조용한 청하면에서는 우리 꽃 우리 나무를 품은 식물원의 꿈이 커가고 있었다.기청산식물원에 들어서는 순간 여느 식물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알록달록한 원색의 꽃이나 이색적인 모양의 나무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목련과 산수유, 풍향수, 조릿대가 눈에 띄고 그 사이에 오래된 나무 의자와 평상이 놓여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하면서도 닿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과 돌확에 샘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방문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연아송’의 유래매표소를 지나면 고사리 같은 양치식물이 나란히 피어 있고, 돌토끼고사리 옆에 활처럼 크게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연아송’이라는 별칭의 이 나무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식물원 수입원 중 하나가 나무를 파는 것인데, 크고 잘생긴 소나무는 인기가 좋았지만 이 나무는 외면당했다. 김연아가 한참 유명세를 탈 무렵, 식물원 원장이 이 나무를 바라보는데 문득 김연아의 포즈가 생각났다. 그 순간 이 나무에 ‘연아송’이란 이름을 붙였고, 그 후로 관람객의 사랑을 받는 나무가 되었다. 나무 안내판에는 “굽은 솔이 선산을 지키고, 눈먼 자식이 효자 노릇한다”고 적혀 있다.이처럼 기청산식물원에는 다른 식물원에서는 들을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풍성하다. 식물원을 둘러보는 데 한 시간 반가량 걸리는데, 꽃과 나무의 사연을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메타세쿼이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메타세쿼이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외래종일 것 같지만 60만∼100만 년 전부터 포항에서 자란 자생종이다. 그 증거로 포항에서 발견된 메타세쿼이아 화석을 기청산식물원이 보관하고 있고 그 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귀 조경이 최고의 조경식물원 한가운데 벤치 하나가 놓여 있다. 세 사람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나무 벤치다. 식물원을 걷다 보면 여기에 앉아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싶어진다. 벤치 뒤편에 키 큰 나무들이 나란히 서 있는데, 참느릅나무다. 식물원에는 이 나무가 유난히 많다. 참느릅나무와 그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식물원에서 누릴 수 있는 색다른 재미다.참느릅나무는 그 자체로 좋은 수종이다. 여름에 노란 꽃이 피면 벌들이 모여들고, 가을에 단풍이 들면 깊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집 서북 방향에 심으면 복이 온다고 하고, 종양을 다스리는 약재의 효능도 있다. 식물원에 이 나무를 많이 심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 더해 꾀꼬리를 불러모아 그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뿌리가 깊은 참느릅나무는 웬만한 태풍에도 끄떡없어 새 둥지가 안전할 뿐만 아니라 꾀꼬리가 좋아하는 곤충이 많다. 이 나무 덕분에 식물원에는 5월부터 9월까지 노란색 철새들의 청아한 합창이 끊이지 않는다.귀 조경은 기청산식물원 이삼우 원장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눈으로 보는 조경은 얼마 못 가고, 귀로 들은 조경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최고의 조경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자연에 가까운 조경일수록 좋은 조경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기청산식물원에는 시각을 자극하는 식물이나 인공적인 시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 친화적이라기보다 자연 그 자체에 가깝다. 사람은 보여도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는 스스로 말을 자제하게 된다. 식물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영롱한 새 울음소리가 이따금 들릴 뿐이다. 식물원을 걷다 보면 관람자도 어느새 한 송이 꽃이나 한 그루 나무가 된다.낙우송을 살려낸 사연식물원을 대표하는 왕나무(King Tree)가 있다. 낙우송(落羽松)이 그 주인공이다. 높이가 20미터 정도 되는 늠름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왕나무라는 별칭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다. 뿌리가 숨을 쉬기 위해 땅 위로 솟아오른 독특한 모습, 일명 호흡근도 신비감을 더해준다. 이 나무는 50여 년 전 이삼우 원장이 모교인 서울대 농대의 연습림에서 씨앗을 받아 키웠다. 이 원장은 이 나무를 지키기 위해 큰돈을 들였다. 어느 겨울날 아침 이 원장이 무심코 식물원 산책을 나왔는데 식물원 가까이에서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낙우송을 훼손하려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낙우송이 서 있던 자리는 식물원 터가 아니어서 인부들이 낙우송을 훼손하더라도 이 원장은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낙우송을 지키려면 낙우송이 서 있는 땅을 매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땅 주인과 상의 끝에 꽤 큰돈을 치르고 땅을 사들여 낙우송을 살려낸 것이다.용연지(龍淵池)라는 연못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진흙을 이겨 조성한 생태 연못으로, 참개구리, 잠자리, 도룡뇽 등 수많은 생명이 보금자리를 틀며, 수련, 창포, 붓꽃, 어리연꽃 등도 철 따라 어여쁜 꽃을 피운다. 용연지 관찰 데크는 식물원에서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잠시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고, 명당이 어떤 곳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식물원의 마지막 코스는 오두막에서 따듯한 감태나무잎 차를 음미하는 것이다. 찻집에 주인은 따로 없다. 방문객 스스로 장작에 불을 피우고 무쇠솥에 물을 데워서 차를 마셔야 한다. 조용한 오두막에 앉아 새 울음소리 들으며 그윽한 차를 마시는 운치를 어디서 또 누릴 수 있을까. 참세상을 이루고 싶은 소망이런 식물원을 가꿔온 사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삼우 원장은 몇 토막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평범한 사람 같지 않다. 1964년 경북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농대 임학과에 입학했고, 학업을 마친 후 곧장 귀향해 농부의 길을 걸었다. 소년 시절부터 농사짓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농사도 잘하면 보람 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산업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을 때 학벌 좋은 청년의 이러한 선택을 누가 선뜻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 원장은 ‘객기가 발동한 것’이라 하지만, 반세기 넘게 한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을 보면 남다른 용기와 항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이 원장은 귀향 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농사를 겸하다가 청하중학교 재단 농장 관리인으로 부임해 과수 농업을 하면서 기청산농원을 설립했다. 그리고는 식물 사대주의에 빠진 조경계에 환멸을 느껴 우리식 조경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데 주력했고, 그 후로 지극히 자연스럽고 한국적이며 사람에게 널리 유익한 식물원으로 방향을 잡았다.기청산식물원이란 이름에는 이 원장의 꿈이 아로새겨져 있다. 청산 앞에 농기구인 ‘키’를 뜻하는 ‘기(箕)’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식물 세계를 키질해 쭉정이는 버리고 알짜만 모아 청산을 이룬다는 의지와 좋은 식물과 사람이 모여 참세상을 이루고 싶은 소망을 담은 것이다.갈수록 어려워지는 식물원 살림살이식물원에서는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 포항의 첫 번째 천연기념물이자 세계적인 희귀수인 모감주나무의 가치를 널리 알린 것도 이 원장의 공이다. 포항의 산과 바닷가에 있는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황금빛 잎이 피는 7월에 장관을 이루며 포항을 상징하는 풍경이 되었다. 이처럼 식물원은 우리 고유의 자생식물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것은 물론, 무궁화 축제 같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를 확산하는 데 힘써왔다. 2004년에는 경상도에서 최초이자 민간 식물원으로는 두 번째로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돼 섬개야광나무 등 멸종위기 및 보호 야생식물 10종의 인공 증식과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식물원은 언덕이 없고 평지로 조성돼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다. 새들이 지저귀는 꽃과 나무 사이를 거닐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사람들의 발걸음도 이어진다. 하지만 식물원의 살림살이는 어렵다. 세태는 자연과 멀어지고 유료인 민간 식물원을 찾는 발길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기러기 떼가 비행하는 날, 그 울음소리도 들리는 곳이 기청산식물원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어보고 싶은 날에는 우리 꽃과 나무로 이상향을 이루고자 하는 그 식물원에 가볼 일이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1-07

형산강만이 붉은 강물을 기억하리라

한국전쟁 때 포항은 격전지였다. 물밀듯이 남하하던 북한군이 포항 시내를 통과해 형산강을 넘어가면 울산, 부산이 지척이었다. 형산강은 아군의 생명선이었기에 사력을 다해 지켜야 했다. 하늘에서는 미 전투기가 폭격을 가했고, 영일만에서는 군함이 함포 사격을 퍼부었으며, 육상에서는 군번도 계급도 없는 학도의용군까지 투입되었다. 북한군이 잠시 점령한 포항 시내는 폐허가 되었고, 형산강은 피로 물들어 ‘혈(血)산강’이라 불렸다.한국전쟁사에서 포항 전투는 한 페이지를 선명하게 차지하고 있다.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이 치열하던 1950년 8∼9월에 포항지구에서 국군 제3사단과 경찰부대, 학도병, 민부대(민기식 부대), 미군 특수부대 등이 북한군 제5, 12사단과 766유격부대의 거센 공격을 저지한 것이 포항 전투의 개요다. 당시 포항의 중요성은 다음의 글이 잘 설명한다.6·25전쟁 당시 경북 포항은 항만과 철도, 육로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일 뿐만 아니라, 포항 남쪽 6킬로미터 지점의 영일비행장은 미 제40전투비행대대가 주둔하면서 전쟁 기간 중 매일 평균 30∼40회 출격하여 공중폭격 등으로 지상부대 작전을 근접 항공 지원하였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김정호 외, ‘포항 6·25’, 나루, 2020, 74쪽.아군은 어떻게든 지켜야 했고, 적군은 어떻게든 빼앗아야 하는 전략적 거점이 포항이었다. 만약 포항이 적군에 넘어가면 낙동강 전선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전쟁의 판도가 기울어질 수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아군은 가용 전투력을 총동원해 포항을 지켜야 했다.특히 영일비행장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을 양성하기 위해 1943년 9월에 설치한 것으로, 미 제40전투비행대대 P-51 전투기 20대가 1950년 7월 16일부터 임무를 수행했으며(《국방논집》 제8호, 1989년 8월, 139쪽, 김정호 외, 위의 책, 74쪽 참조), 월턴 워커 장군이 여기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북한군은 자신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미 공군력을 무력화하려고 영일비행장을 공략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포항여중 등 포항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 벌어져전선의 위중함은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까지 불러들였다. 1950년 8월 11일 새벽 4시 포항 시내로 진입하려는 북한군 제5사단과 766유격부대를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저지한 것이다.북한군에 포위된 어린 학생들은 국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열한 시간 반을 버텼다. 학도의용군의 항전 덕분에 북한군의 포항 시내 진출이 지연되었고, 육군 제3사단과 지원부대, 포항 시민이 형산강 이남의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이 전투에서 학도의용군 71명 중 김춘식 등 48명이 전사했고, 23명은 부상을 입거나 실종되었다.포항여중뿐만 아니라 포항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포항 기계와 경주 안강 일대에서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하는 전투가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벌어졌다.비학산에서 운제산까지 이어진 이 전투로 북한군 제12사단의 낙동강 전선 동부 지역 돌파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송라면 독석리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육군 제3사단을 구룡포로 철수하는 작전이 8월 10일에서 8월 17일까지 펼쳐졌고, 흥해 천마산에서는 육군 제3사단과 북한군 제5사단이 여섯 번이나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투가 8월 21일부터 8월 27일까지 전개되었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이 전투력을 총동원한 전투가 9월 5일부터 9월 18일까지 벌어졌다.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9월 14일 포항 북쪽의 영덕 장사리에서 전개된 상륙작전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것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탑산에 있는 두 개의 탑포항 전투는 양측이 사활을 걸고 총력전을 펼쳤기에 피해도 컸고 희생자도 많았다. 포항 곳곳에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설과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포항 용흥동에 있는 탑산의 명칭도 한국전쟁 후에 세워진 탑에서 연유한다.탑산의 원래 명칭은 죽림산(竹林山)이며, 산 아래에는 죽림사라는 고찰이 있다.탑산 입구에 위치한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뒤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포항지구 6·25전적비’가 나타난다. 1980년 2월 21일 제막된 이 전적비의 전면에는 국군이 학도병의 어깨를 감싸는 청동상이 서 있고, 포항지구 방어의 주력부대인 국군 제3사단을 기념하는 금속 조형물이 있다.‘포항지구 6·25전적비’의 서쪽을 바라보면 ‘전몰학도 충혼탑’이 있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산화한 학도의용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57년 8월 11일 제막되었다. 탑의 전면에는 청동으로 된 천마상 부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 부조물은 어린 영(靈)들이 이승에서 피워보지 못한 꿈을 천마를 타고 저승에서 마음껏 펼쳐 보라는 뜻에서 새겨 놓은 것이다.‘포항지구 6·25전적비’와 ‘전몰학도 충혼탑’은 누가 보더라도 성격이 비슷하다.그런데 불과 50미터 정도의 거리에 두 개의 조형물이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몰학도 충혼탑’은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냈으며 추상 조각의 선구자인 김종영(1915∼1982)의 작품이고, ‘포항지구 6·25전적비’는 김종영의 서울대 제자이자 구상 조각가로 명성을 떨친 백문기(1927∼2018)의 작품이다.지역 미술가인 박경숙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 군에서 ‘전몰학도 충혼탑’이 추상적이어서 포항 전투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탑을 없애고 새로운 작품을 건립하자는 의견이 나왔다.그때 구상 조각가인 백문기에게 작품을 의뢰하게 되었다. 백문기는 작품 제작을 수락했으나 은사의 작품을 허물 수는 없었기에 군 당국과 상의 끝에 새로운 부지에 ‘포항지구 6·25전적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어느 학도의용군의 가슴 뭉클한 편지탑산 입구에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이 있다. 포항 출신으로 생존한 학도의용군들이 1979년 8월 탑산에 터를 잡고 학도의용군의 전적물 보존과 추념 행사 등을 해오다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마침 국방부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념관 건립비의 일부를 지원한 데 힘입어 2020년 9월 16일 개관하게 되었다.기념관 전시실에는 학도의용군이 사용한 무기를 비롯해 사진, 노트, 연필, 안경, 교복 단추, 모표(帽標) 등 유물 200여 점이 전시되어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전시물 중 포항여중을 지키던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편지는 관람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상략)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략)편지의 주인공은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천주님도 이 가여운 생명을 구하지 못한 것이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48명 중 10명만 신원이 확인되어 포항여중 앞에 가매장되었다가 1964년 4월 13일 국립현충원으로 봉송되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뒤의 화강암 속에 합동으로 안치되었다.탑산 외에도 수도산 덕수공원에 포항 출신 군경들의 넋을 추모하는 충혼탑이 있다.그리고 혈전이 벌어졌던 포항여고 정문 앞에도 ‘학도의용군 6·25전적비’와 ‘포항여중 전투 학도의용군명비’가 세워져 있다.민간인 희생자도 다수 발생해전투가 치열했던 흥해 도음산의 산림문화수련장에도 탑 하나가 세워져 있다. 탑의 명칭은 ‘한국전쟁 미군폭격사건 민간인희생자 위령탑’이다.전쟁 중에 미군의 오폭으로 다수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2015년 8월 20일 제막된 탑이다.포항 지역 미군폭격사건 유족회에 따르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미군 폭격과 함포 사격으로 포항 13개 마을에서 55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이제 ‘혈산강’을 기억하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은 무상할 뿐이다. 말없이 흐르는 형산강만이 그 붉은 강물을 기억하리라.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1-02

여시오어, 농담 같은 화두가 있는 천년 고찰

형산강 이남의 진산(鎭山)인 운제산(雲梯山)에 오어사(吾魚寺)라는 절이 있다. ‘나의 고기’라는 뜻이니 절 이름치고는 좀 생뚱맞다.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오어사는 보경사와 함께 포항을 대표하는 절이다.이 절의 원래 명칭은 항사사(恒沙寺)인데, 불경에 나오는 항하사(恒河沙)의 준말이다. 항하(恒河)는 인도 갠지스강을 가리킨다.즉 항하사는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무수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절에서 많은 수행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렇다면 항하사는 어떻게 오어사가 되었을까?운제산과 오어사를 이해하려면 ‘삼국유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운제산과 오어사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오어사에서 수행한 고승들이 ‘삼국유사’의 여러 대목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어사의 명칭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그(혜공)는 늘그막에 항사사로 옮겨 살았다. 이때 원효는 여러 불경의 소(疎)를 지으면서 항상 혜공을 찾아가 의심나는 것을 물었는데, 가끔씩 서로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원효와 혜공이 시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물 위에 대변을 보았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가 눈 똥은 내 물고기다.” 그래서 오어사라고 이름 지었다.-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08, 443∼444쪽.“자네가 눈 똥은 내 물고기다”의 원문은 “여시오어(汝屎吾魚)”다. 그래서 “너(원효)는 똥을 누었고 나(혜공)는 고기를 누었다”라고도 풀이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 풀이하든 “너 원효는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항사’가 불가(佛家)의 전형적인 표현이라면 ‘오어’는 파격적인, 유쾌한 농담조다. 오어사의 명칭을 두고 다른 이야기도 전하지만 결국은 ‘여시어오’로 귀결된다. 가벼운 농담에 깊은 가르침, 곧 화두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시가 있는 신라 4대 조사(祖師)의 수행처오어사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절 이름 가운데 몇 안 되는 현존하는 절이며, 신라의 4대 조사(祖師)인 원효(元曉, 617∼686)와 자장(慈藏, 590∼658), 혜공(惠空), 의상(義湘, 625∼702)이 수행처로 삼았을 정도로 유서 깊은 절이다.오어사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어사에 가려면 포항에서 한참 놀아야 한다고 권하는 시인이 있다.오어사에 가려면포항에서 한참 놀아야 한다.원효가 친구들과 천렵하며 즐기던 절에 곧장 가다니?바보같이 녹슨 바다도 보고화물선들이 자신의 내장을 꺼내는 동안해물잡탕도 먹어야 한다.- 황동규 ‘오어사에 가서 원효를 만나다’ 부분그렇게 포항 분위기를 느끼며 시내를 헤매며 놀다가 “포항서 육십 리 길, 말끔히 포장되어” 있는 길을 달려가면 “오른편에 운제산이 나타나고 / 오어지를 끼고 돌아 / 오어사로 다가간다.” 그렇게 “원효 없는 원효 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가만!호수 가득거꾸로 박혀 있는 운제산 큰 뻥대정신 놓고 바라본다아, 이런 절이!누가 귓가에 속삭인다.모든 걸 한번은 거꾸로 놓고 보아라.뒤집어놓고 보아라.오어사면 어떻고 어오사면 어떤가?혹 절이 아니면?머리 쳐들면 또 깊은 뻥대- 황동규 앞의 시 부분시에서 ‘뻥대’는 ‘절벽’을 뜻하는 사투리다. 시인은 1400여 년 전에 지은 오어사에서 “모든 걸 한번은 거꾸로 놓고 보아라. / 뒤집어놓고 보아라”는 청(請)을 듣는다. 이 청은 시의 존재 이유이자 불가의 가르침이다.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놓고 보는 것이 시의 본질이고, 불가의 가르침인 것이다. 시(詩) 자체가 언어(言)의 사원(寺)이므로 시와 불가의 깨달음이 하나의 맥락임을 시인은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런 까닭에 “오어사면 어떻고 어오사면 어떤가?”라는 구절도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사뭇 다른 분위기의 자장암과 원효암오어사 대웅전은 영조 17년(1741)에 중건되었고, 그 외 당우(堂宇)들은 대부분 근래에 들어섰다. 오어사의 대표 유물로는 대웅전에 있는 원효대사 삿갓이 있다.오어사 경내에는 자장과 원효가 수행하던 암자가 있다. 자장이 머물렀던 암자의 근처에는 혜공의 수행처가 있었으며, 서쪽 봉우리에는 의상의 수행처가 있었다고 전한다.자장암은 ‘삼국유사’에 “낭떠러지로 가서 바위에 기대어 집을 만들었다”라고 했듯이 해발 600미터 기암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오어사의 정취를 한껏 느끼려면 자장암 앞에 서봐야 한다. 오어사 경내는 물론 운제산의 아득한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이나 인적이 드문 시간에 자장암 앞에 서보면 자장이 왜 이 가파른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을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대웅전에서 서쪽으로 오어지(吾魚池)를 건너 야트막한 산길을 500미터 정도 걸어가면 원효암이 나온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길을 올라가야 하는 자장암에 비하면 한결 수월한 길이다.원효암은 운제산의 부드러운 능선에 둘러싸여 찾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원효암 툇마루에 앉아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를 바라보며 원효는 여기서 무슨 화두를 들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운제산과 대왕암 명칭의 유래오어사를 감싸고 있는 운제산은 정상이 해발 482m로 형산강 너머 포항 남쪽의 산 중 가장 높다. 산의 능선은 구룡포 방향과 경주 무장산(鍪藏山) 방향으로 이어진다. 혜공 등 신라의 4대 조사는 억새 군락으로 유명한 무장산 쪽에서 운제산으로 오고 갔을 것이다.운제산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원효와 혜공이 또다시 등장한다. 원효와 혜공이 머물던 암자 사이에 기암절벽이 있어 구름(雲)으로 사다리(梯)를 놓고 서로 오고 갔다고 해서 운제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신라 남해왕(南解王)의 비(妃)인 운제부인의 성모단(聖母壇)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온다.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일컫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위의 책, 62쪽.오어사는 그리 크지 않은 절이지만 구석구석에 이야기의 그물망이 펼쳐져 있어 신라판 판타지를 보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다. 그럴듯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 이야기를 누가 지어낸 것일까. 오어사 경내를 걷다 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사적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운제산 정상에 있는 대왕암이라는 큰 바위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가뭄이 들면 운제산 인근 주민들이 대왕암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박혁거세의 비(妃)인 알령부인(閼英夫人)의 수호신이라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영일만이 만들어진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옛날 왜국의 한 역사(力士)가 왜국의 모든 장사를 굴복시킨 후 한반도로 건너와 힘센 자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달려가 모두 물리쳤다. 그러다가 운제산 대왕암에서 창해역사(滄海力士)를 만나 운제산이 뿌리째 흔들릴 정도의 격투가 벌어졌다. 결국 왜국의 역사가 뒤로 넘어지면서 손을 짚었는데, 그곳이 움푹 꺼지면서 바닷물이 밀려와 영일만이 되었다고 한다. ‘포항시사(하), 1999, 772쪽 참조’오어지라는 저수지를 지나칠 수 없다. 39만6694제곱미터(약 12만 평)에 이르는 오어지는 1961년 정부에서 오어사 아래쪽 계곡을 막아 조성한 농업용 저수지다. 오어지 주변에는 7킬로미터에 이르는 둘레길이 이어지는데, 잔잔한 저수지에 산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바라보며 쉬엄쉬엄 걸을 수 있는 이색적인 길이다.오어사는 오어지, 운제산과 어우러져 비경을 빚어내고 왠지 모를 신비감을 일으킨다. 여시오어, 농담 같은 화두가 성성(惺惺)한 오어사에서 인생의 화두 하나쯤 품어보는 것은 어떨까.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31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굽이굽이 십이폭포

쪽빛 바다의 도시 포항은 초록 산세(山勢)도 빼어나다. 내연산, 동대산, 도음산, 비학산, 운제산 등이 은은하게 이어지며 포항을 감싸고 있다. 그 산을 타고 내려오면 강과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그 끝자락에 동해 물결이 넘실거린다. 산과 강, 들판, 바다가 저마다의 빛깔을 발산하며 어우러지는 곳이 포항이다.포항의 여러 산 중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닿는 곳은 내연산이다. 태백 구봉산에서 솟구친 낙동정맥이 청송 주왕산을 거쳐 남하하다가 동해안 쪽으로 뻗어가 솟은 산이 내연산이다. 내연산은 한마디로 속이 깊은 산이다. 비학산이 큰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학의 형상을 사방에 드러내고 있다면, 내연산은 바깥에서는 그 모습을 알 길이 없다. 산속으로 한 발 두 발 계속 들어가야 비로소 그 경치가 보인다.골이 깊고 경치가 아름다운 내연산은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린다. 보경사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자박자박 올라가면 양옆으로 억겁의 세월이 느껴지는 수직의 단애(斷崖)가 나타나고 그 사이로 폭포와 소(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내연산에서는 풍경을 음미하며 쉬엄쉬엄 걸어야 한다. 다행히 내연산에서 가장 큰 폭포인 연산폭포까지는 경사가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내연산은 사계절마다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봄에는 곱디고운 벚꽃길, 여름에는 계곡과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 겨울에는 산길의 호젓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낸다. 조선 사대부들의 창작 공간예부터 많은 사람이 내연산을 찾았는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발길이 이어진 기록도 남아 있다. 사대부들은 계곡의 바위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들 중에 처음으로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작품 소재로 삼은 이는 청하 현감이자 당대의 문사인 옹몽진(邕夢辰, 1518~1584)이다. 그가 귀향하며 경주 부윤인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렸고, 이정이 1562년 내연산을 찾은 후로 사대부 사회에서 명산으로 부각되며 많은 시문의 창작 공간이 되었다(김희준, 박창원,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과 보경사’, 포항문화원, 2014, 21쪽 참조). 이정은 내연산을 이렇게 읊었다.오늘 아침 구름안개 활짝 개어종일토록 냇물의 근원을 찾아 푸른 이끼를 밟았네꽃과 버들 산에 가득한데 누가 있어 그 뜻을 헤아릴까한 줄기 계곡물, 바람과 달만이 홀로 서성이는 것을- 이정 ‘내영산에 노닐며(遊內迎山)’, 김희준, 박창원, 위의 책, 21쪽.조선 숙종도 어느 봄날 내연산에 와서 계곡과 폭포 그리고 새소리, 비바람 소리와 분분히 지는 봄꽃에 취해 붓을 들었다. 숙종이 쓴 시는 당나라 때 산수전원시파를 대표하는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봄날 아침(春曉)’이다. 보경사 성보박물관에 판각(板刻)된 숙종의 글이 있다.봄잠에 날 밝는 줄 알지 못하다곳곳에 새 우는 소리 듣게 되었네밤새 비바람 소리 들려왔으니꽃들은 얼마나 지고 말았나- 맹호연 지음, 이성호 옮김, ‘맹호연 전집’, 문자향, 2006. 겸재의 걸작 ‘내연산 삼용추’가 탄생한 곳내연산에는 하류의 상생폭포부터 보현, 삼보, 잠룡, 무풍, 관음, 연산, 은폭, 복호1, 복호2, 실폭, 시명 등 높이 7∼30m의 폭포 열두 개가 연이어 펼쳐져 이를 십이폭포라 한다. 그중 상생, 관음, 연산폭포가 특히 빼어나 삼폭포라 부른다. 쌍폭인 상생폭포는 단아하고, 역시 쌍폭인 관음폭포는 선일대, 비하대, 관음대 등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둘러싸여 신비감을 자아낸다. 십이폭포 중 가장 큰 연산폭포는 웅장한 폭포 소리를 일으키며 폭포의 진경을 보여준다. 비 내린 다음 날 연산폭포 앞에 서면 땅을 울리는 폭포 소리와 하얗게 일어나는 물보라에 세속을 까마득히 잊게 된다.겸재 정선의 걸작 ‘내연산 삼용추(三龍湫)’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겸재는 1733년 58세에 청하 현감으로 부임해 2년 남짓 머물면서 청하와 내연산을 화폭에 담았다. 삼용추는 잠룡과 관음, 연산폭포를 일컫는다. 겸재가 머문 청하 시절의 의미를 유홍준은 이렇게 정리했다.겸재는 청하 현감 시절에 ‘내연산 삼용추’, ‘금강전도’같은 명작을 그리며 사실상 겸재의 진경산수 화풍을 완성하였다. 더욱이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 회화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니 가히 본격적인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하는 겸재의 화력에서 기념비적 이정표가 되는 곳이다.- 유홍준 ‘화인열전1’ 역사비평사, 2001, 255쪽.겸재는 청하 현감 시절에 ‘청하성읍도’, ‘청하 내연산 폭포도’ 같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우리 미술사는 물론 지역사에도 귀한 가치가 있다. 내연산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시심과 화풍(畫風)을 일으켜온 산이었다.내연산의 폭포는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종종 등장했다. 영화 ‘남부군’에서 남부군 대원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잠룡폭포 주변에서 찍었고, KBS 역사 드라마 ‘대왕의 꿈’ 일부 장면도 연산폭포에서 촬영했다.내연산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산폭포를 보고 발길을 돌린다. 연산폭포에서 가파른 계단을 걸어 폭포 뒤로 넘어가면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등산객이 드물어 스산한 느낌마저 드는 이 산길에도 계곡과 폭포는 계속 이어져 제8폭포인 은폭부터 제1폭포인 시명까지 여덟 개의 폭포를 만나게 된다. 산길 중간중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도 남아 있다. 화전민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여기서 어떤 연유로 어떻게 살아갔을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삼지봉과 향로봉 등 큰 봉우리 여섯 개가 이어져내연산의 원래 명칭은 종남산(終南山)이다. 중국 당나라의 명산 중의 명산으로 일컬어졌던 종남산과 산세가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다가 신라 진성여왕이 여기에서 견훤의 난을 피한 후에 내연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내연산은 주봉(主峯)인 삼지봉(710m)을 비롯해 최고봉인 향로봉(930m), 문수봉(622m), 매봉(816m), 삿갓봉(716m), 우척봉(천령산, 736m) 등 여섯 개의 큰 봉우리가 이어지며 그 사이로 크고 작은 봉우리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잇는 능선 종주를 즐긴다.향로봉은 내연산에서 서쪽에 있는데 북으로 청송군 동면, 동으로 영덕군 달산면, 남으로 포항시 송라면으로 이어진다. 맑은 날에는 향로봉에서 팔공산과 주왕산은 물론 저 멀리 동해의 푸른 물결까지 바라볼 수 있다. 향로봉은 한국전쟁 때 격전지로 전사(戰史)에 남아 있다. 이토록 빼어난 풍경도 전쟁의 참화를 비켜갈 수는 없었으니 전쟁의 비정함을 실감하게 된다. 팔면보경을 묻었다는 보경사내연산 들머리의 솔숲을 지나면 보경사가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2)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명(智明) 법사가 창건했다. 지명은 왕에게 진나라의 한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주변 국가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지명과 함께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다가 내연산 아래 큰 못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金堂)을 조성한 후 보경사라 했다.천왕문과 적광전 사이에는 ‘금당탑’이라 부르는 오층석탑이 있다. ‘보경사 금당탑기(寶鏡寺 金堂搭記)’에 각인(覺仁) 스님이 문원(文遠) 스님과 의논해 “절이 있으니 탑이 없을 수 없다”하여 장인을 부르고 재물을 모아 오층탑을 만들어 대전(大殿) 앞에 세웠다고 전한다. 탑을 건립한 시기는 신라 성덕왕 22년(723)이라는 설과 고려 현종 14년(1023)이라는 설이 있는데,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어느 쪽으로도 확정할 수 없다. 경내에는 고려 때 이송로(李松老)가 세운 원진국사비(보물 제252호)와 사리탑(보물 제430호) 등이 있다.보경사 경내에 서면 내연산의 능선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계곡의 물소리며 폭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연산에 둘러싸인 보경사는 내연산의 기운을 품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절이 산이고 산이 곧 절임을 보경사 뜨락에서 내연산 능선을 바라보며 깨닫게 된다.산을 왜 오르는 것일까?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산의 깊이, 자신의 내면을 만나기 위해 산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속이 깊은 산, 내연산은 그런 화두를 넌지시 던진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26

형산과 제산 사이로 새떼가 날아갈 무렵 가장 아름다운 산

“어머니 같은 강”이라는 말이 있다. 한 지역에 강이 흐르면 대개 이런 표현을 붙인다. 포항에는 형산강이라는 큰 강이 흐른다. 형산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어머니 같은 강”이라는 표현이 무심결에 떠오른다. 망망한 동해가 아버지 같은 인상이라면 유장하게 흐르는 형산강은 어머니 같은 느낌이다.포항과 경주가 만나는 곳에 형산과 제산이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강이 형산강이다. 형산강은 울산 울주군 두서면에서 발원해 경주의 대천, 남천, 건천 등을 지나 안강의 동쪽 경계를 흐르다가 북동 방향으로 크게 꺾어 포항을 관류해 영일만으로 흐른다. 울산과 경주, 포항 일대의 여러 산에서 발원한 지류들과 합류하여 영일만으로 흐르는 강이 형산강이다. 강의 길이는 63.3㎞로 국내에서 열 번째로 길며, 동해로 흐르는 강 중에 가장 크고 유역에 형성된 충적평야도 가장 넓다. 전설과 설화가 흐르는 강형산강 옆으로 안강평야가 펼쳐져 있고,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온다. 신라 때 남천, 북천, 기계천의 물이 안강 일대에 모여 호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호수가 자주 범람해 주변의 피해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이 고충을 해결하려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인 태자 김충이 용이 되어서는 꼬리로 형제산을 내리쳐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그 사이로 안강 호수의 물이 강을 이뤄 영일만으로 흘러 들어가 형산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천여 년 전의 신라 때에도 치수가 얼마나 중요한 국정 과제였는지를 실감케 한다.물이 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으니 강은 문화와 문명의 모태이자 서사의 보고(寶庫)가 된다. 그리하여 강은 사람들의 다사다난한 이야기를 품으며 예술과 사상을 아우르기 마련이다. 신라 천 년의 역사는 물론이고 경주 유교 문화의 본거지인 양동 마을의 형성, 동학의 태동, 포항의 성장도 형산강을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선사시대에도 형산강 주변에 광범위한 문화권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암각화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95년 2월 경주 내남면 상신리 마을 앞 큰 돌에서 암각화가 처음 발견되었고, 그해 3월에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앞 금장대에서도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신라의 건국 설화에도 형산강이 등장한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알에서 갓 태어났을 때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고 전하는 곳이 형산강의 지류인 알천이다.동방의 적벽, 그리고 물새들의 낙원포항의 진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진으로 형산의 정상에서 형산강과 제철소, 영일만 그리고 호미곶을 담아낸 장면을 빠트릴 수 없다. 포항의 맥이 흐르는 이 장면을 렌즈에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애써 형산에 오른다.붉은 저녁노을이 번지는 형산과 제산 사이로 새떼가 날아갈 무렵, 햇살을 받아 윤슬이 반짝이는 강물 위로 물새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을 무렵의 형산강 하류는 참 아름답다. 500여 년 전 본관이 영일(迎日)이고 흥해 출신인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는 초가을 달밤 형산강에서 경주 부윤인 죽계(竹溪) 김존경(金存敬·1569~1631)과 배를 타고 가다 시상(詩想)에 잠겼다.임술년 초가을 열엿샛날에공(김존경)께서 형산강에 나들이 오셨네형산강 드넓어 물결이 바다와 맞닿고깊은 밤하늘은 맑아 달빛 배에 환하네한줄기 구름 멀리 포구까지 뻗었고몇 줄기 긴 피리 소리 아름다운 물가에 가득하네동방의 적벽이 바로 여기니소동파의 이름만 홀로 남을 필요 없으리- 정극후 ‘형산강에 배를 띄우고 상공 김존경 좌하께 올리다(兄江泛舟奉呈金相公座下)’, 신상구 역정극후는 소동파의 ‘적벽부’를 떠올리며 형산강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기나긴 세월이 흘러 세상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변했지만, 달빛이 환히 비치고 한줄기 구름이 멀리 포구까지 뻗어 있는 형산강은 변함이 없다.형산강은 물새가 날아오는 곳이어서 더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친다. 아득한 옛적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물새가 날아왔을지 모른다. 지금도 형산강에 물새들이 날아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간혹 멸종 위기에 처한 물수리나 흰꼬리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가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다. 형산강에 날아오는 물새들의 이름은 일일이 거론하기도 벅차다. 댕기물떼새를 비롯해 흰뺨오리, 흰비오리, 홍머리오리, 쇠오리, 청둥오리 등등이 있다. 백로와 왜가리 같은 텃새들도 형산강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황어, 숭어, 은어 같은 물고기들이 형산강에 서식하고 있으며, 1970년대까지 섬진강 재첩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재첩이 하류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 그리고 사상의 무대형산강 하류에는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인 부조장(扶助場)이 있었다. 부조장은 175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조선의 3대 시장인 강계장, 원산장, 마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큰 장터였다. 도로, 철도 같은 근대의 교통 인프라가 등장하기 전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중요한 교통로였고, 특히 형산강 하류는 영일만과 만나는 곳이라 큰 장터가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상인과 상선, 조랑말로 붐비던 부조장은 사라졌지만 과거의 번성을 입증해주는 유적은 남아 있다. ‘현감 조동훈 복시 선정비(縣監趙東勳復市善政碑)’와 ‘현감 남순원 선정비(縣監南順元善政碑)’가 그것이다. 강물은 유유히 흐르건만 세상은 과거의 흔적을 지우며 계속 변한다. 북새통을 이루던 부조장은 아련한 물그림자로만 남아 있다.시인 신동엽은 ‘금강’을 노래하며 “예부터 이곳에 모여/썩는 곳,/망하고, 대신/정신을 남기는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 강은 “정신을 남기는 곳”이자 새로운 사상이 움트는 곳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형산강을 무대로 신라의 불교와 양동 마을의 유교 그리고 동학이 꽃을 피웠다. 신라 천 년의 문화 가운데 우리 사상의 첫새벽이라 할 수 있는 원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효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처절한 전쟁이 신라의 통일로 귀결된 7세기에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무애(無涯)를 설파했다. 그는 삼국 간의 처참한 전쟁을 지켜보면서 본디 서로가 하나임을 깨우치고 넉넉한 마음으로 화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해 일심을 내세웠고,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 방식이 화쟁과 무애인 것이다. 원효의 사상은 당대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에서 길어 올린 것이며, 지금 우리가 되새겨야 할 화두이기도 하다.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500여 년 동안 공존한 양동 마을은 회재 이언적의 사상이 무르익은 곳이다. 퇴계 이황의 스승이었던 회재는 조선 성리학의 기본 성격과 방향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에 이름을 올렸다. 회재는 사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시기에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했지만 결국 사화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동학의 배경이 된 형산강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녹두빛 강물은 동학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은 그의 살림터인 포항 신광에서 수운 최제우가 머물던 경주 용담까지 걸어 다니며 동학을 배우고 익혔다. 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을 걸으며 동학의 뜻을 깊이 새긴 것이다. 1864년 1월 수운이 관군에 체포되는 순간에도 형산강에서 찬 바람이 몰아쳤다.“수운은 경주 형산강변의 어떤 나무 밑에 얽매어 놓아두었는데 얼굴에는 전면이 피가 되어서 그 모양을 알 수 없으며…. 체포된 신사(수운 선생)는 사다리의 한복판에 얽어매어 두 다리는 사다리 양편 대목에 갈라서 나누어 얽고, 두 팔은 뒷짐을 지웠고, 상투는 뒤로 풀어 사다리 간목(間木)에 칭칭 감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게 했다고 하였다. (중략) 수운은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뼈를 에는 형산강의 찬 바람을 맞으며 묶여 있었다. 12월 10일(양 1864년 1월 18일)은 소한(小寒)의 절기여서 몹시 추웠다.”- 표영삼 ‘동학1-수운의 삶과 생각’, 통나무, 2004, 300쪽.“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동학의 가르침은 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그 바람을 견디며 잉태했다. 그 가르침은 조선 후기 고난에 처한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닿아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불빛이 되었고, 지금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해 저무는 형산강 강가에 서서 붉은 노을이 번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로운 사상은 찬 바람 속을 걸어가며 그 바람의 뜻을 새기는 고독한 자의 가슴에 움트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24

없는 게 없는, 동해안에서 가장 너른 장터

동해안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은 포항에 있는 죽도시장이다. 시장 면적이 14만8천760㎢에 이르고 점포 수는 2천500개 정도 된다.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성한, 없는 게 없는 너른 장터다. 모두 25개 구역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수산물, 농산물, 청과물, 죽세공품, 한복, 수예, 이불, 주전부리 등 이 세상에 존재할 만한 거의 모든 품목이 진열되어 있다. 포항 사람치고 죽도시장에 한 번이라도 안 가본 사람이 없고, 외지인들도 포항에 오면 호기심에라도 한 번은 들르게 된다. 시장은 지역의 역사와 궤적을 함께하며 죽도시장 또한 그렇다. 일제강점기부터 포항의 원도심인 여천동에 시장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시가지가 초토화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는 별개로 1930년대부터 죽도 갈대밭에 좌판이 옹기종기 모인 장터가 형성되어 점점 덩치를 키우다가 한국전쟁 직전에는 지금 죽도시장의 3분의 1 규모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시장은 거의 불타버렸고 전쟁 후에 복구를 거쳐 1960년대에 구획정리사업이 전개되었다. 그 후 규모가 커지면서 1971년 11월 시장 허가를 받은 것이 죽도시장이다. 이런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죽도시장의 역사는 100년 가까이 된다.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3대 시장인 부조장(扶助場)이 형산강 하류에 있었다. 부조장은 ‘윗부조장’(경주 강동면 국당리 강변)과 ‘아랫부조장’(포항 연일읍 중명리 강변)으로 형성되었다. 부조장은 서해 강경장, 남해 마산장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장터로, 포항 연안의 청어와 소금을 내륙으로 가져다 팔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산물을 거래하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당시 형산강 유역에는 수많은 황포돛배가 떠 있었고 전국의 보부상들이 모여들었다. 부조장은 20세기 들어 포항과 부산을 연결하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부설되는 등 교통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역사의 흐름 속으로 보면 죽도시장은 부조장의 전통을 잇는 큰 장터인 셈이다.싱싱한 해산물의 백화점, 죽도어시장전통시장은 어딜 가나 붐비지만 죽도시장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곳은 어시장이다. 상인도 많고 손님은 더 많아 늘 북새통을 이룬다. 전통시장이 예전에 비해 많이 힘들어졌고 죽도시장의 사정도 다를 바 없지만 어시장은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포항 연근해는 물론 전국 각지의 해산물이 모여 있는 죽도어시장은 싱싱한 해산물의 백화점이라 할 만하다. 다양하고 신선하고 저렴한 해산물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 대형마트보다 값싸고 물 좋은 생선을 살 수 있다. 대게, 홍게, 꽃게는 물론, 독도새우, 꽃새우, 닭새우가 있고 참소라, 뿔소라, 나팔소라가 있다. 고등어, 갈치, 오징어, 문어, 낙지, 전복이 있고 가자미, 조기, 도루묵, 소라, 고동, 멍게, 해삼, 가리비, 바지락이 있다. 그 밖에도 바다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해산물이 죽도어시장에서 거래된다고 보면 된다.죽도어시장에서 가장 북적거리는 수협 위판장은 포항의 새벽을 깨우는 곳이다. 새벽 별이 반짝이는 4시 30분쯤 위판장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켜고 있다. 트럭에 실려 위판장에 들어온 생선을 상인들이 바닥에 가지런히 정렬하면 빨간 모자를 쓴 경매사를 필두로 중매인들이 우르르 모여 경매가 시작된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 경매사가 구성진 목소리로 이끌어가는 새벽 경매는 죽도어시장의 진풍경이다. 위판장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생선들이 하나둘 낙찰자를 만나 팔려나가고 장사 준비를 위해 상인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에 동이 튼다.과메기, 대게, 고래고기를 맛볼 수 있어해산물은 아무래도 찬 바람이 불어야 제맛이다. 12월에 접어들면 죽도어시장은 과메기가 뒤덮다시피 한다. 어시장의 모든 점포에서 과메기를 내놓는데 꽁치 과메기가 대부분이지만 과메기의 원조인 청어 과메기도 더러 볼 수 있다. 속이 꽉 찬 대게도 겨울 어시장의 인기 품목이다. 어시장에 들어서면 수조에 대게가 꽉 차 있고, 대게 찌는 수증기가 풀풀 날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고소하고 담백한 대게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시장을 계속 찾아온다. 대게의 주산지는 구룡포이며, 죽도어시장의 대게도 대부분 구룡포에서 온다. 사계절 내내 대게를 팔지만 대게의 제철인 겨울에 제맛을 맛볼 수 있다.죽도어시장에는 고래고기를 전문으로 파는 점포가 있다. 한자리에서 수십 년간 고래 수육과 육회를 팔아온 곳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고래고기 맛을 아는 사람은 따로 있다. 흔히 고래고기는 열두 가지 맛이 난다고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고래고기를 팔아온 분은 오십 가지 맛이 난다고 말한다. 고래고기는 부위별로 독특한 맛이 있는데 껍질이 두꺼워야 살코기에 기름기가 있어 맛이 좋다. 고래고기를 삶을 때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 이 점포 앞을 지나가다 보면 대낮부터 고래고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십중팔구 고래고기의 깊은 맛을 아는 단골들이다.오징어가 ‘금징어’가 된 지 꽤 되었다. 싱싱한 오징어 한 마리에 4천∼5천 원이니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포항과 울릉도 쪽의 해양생태계가 바뀐 데다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겹쳐 오징어가 잘 잡히지 않는다. 근래에는 꽁치 어획량도 신통치 않아 꽁치 과메기로 겨울을 나야 하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어족 자원 감소는 어민과 어시장 상인들의 큰 걱정거리다.1970년대 초만 해도 죽도어시장의 사업가들이 일본 시모노세키(下関)에 생선을 수출했다. 포항항에서 삼치, 방어, 복어 등을 선박에 실어 시모노세키로 보냈는데, 이런 수출은 15년가량 이어지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어획량이 줄어들어 손써 볼 방법이 없었다. 우리 연안에서 어획량 감소는 소리 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현대적인 시설로 탈바꿈한 죽도시장전통시장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오래되었다. 죽도시장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2000년대 들어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시장 현대화에 많은 공을 들여 이제는 전국 어느 전통시장과 비교하더라도 뒤지지 않는 환경이 되었다. 죽도어시장에서도 깨끗하고 위생적인 수산물을 제공하기 위해 2015년 7월부터 청정 해수 공급 시설을 가동하고 있다. 송도 연안 수심 6미터 지하의 해수를 취수해 여과기로 모래를 씻어낸 다음 2킬로미터의 해수관로를 통해 어시장에 청정 해수를 공급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해수 운반 차량으로 바닷물을 공급했는데, 해수관로가 설치되면서 수도꼭지만 틀면 청정 해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죽도어시장은 도심 한복판에 있다. 동빈내항, 포항운하, 송도해수욕장, 중앙상가 등 포항의 명소와도 가깝다. 그래서 포항의 명소를 둘러본 관광객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어시장 횟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근래에는 포항운하에서 유람선을 타고 영일만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어시장 횟집에서 시원한 물회나 대게를 먹는 관광객이 많다. 주말에는 포항의 명산인 내연산과 운제산을 등반한 후 어시장에서 회를 즐기는 산악회 회원들을 자주 볼 수 있다.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커피숍과 게스트하우스죽도시장을 걷다 보면 구석구석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징후를 느낄 수 있다. 그 많던 다방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하나둘씩 둥지를 틀고 있다. 시장의 분위기가 한결 젊어지고 있는 것이다. 건어물을 파는 ‘경동시장’은 ‘DOHSH’라는 산뜻한 브랜드를 개발해 다양한 마케팅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주단(綢緞)거리에 있는 커피숍 ‘죽도소년’은 젊은 여행객이 주 고객이다. 전통시장에 외지의 젊은이들이 찾는 커피숍이 있다는 게 생뚱맞게 들리기도 하지만 커피숍에 가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원래 이 자리는 ‘삼일라사’라는 양복점이었고, 뒤이어 ‘삼일주단’이라는 한복점이었는데, 2018년에 책과 그림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커피숍으로 바뀌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여기에서 만나 결혼한 커플이 있는데, 신부가 입은 웨딩드레스를 진열해놓기도 했다.낡고 오래된 여인숙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 ‘오다가다’도 빼놓을 수 없다. 사양길에 접어든 여인숙을 감성적으로 개조해 이색적인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여행객들끼리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여행 체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사람들이 외면하던 여인숙이 하룻밤 묵고 싶은 낭만적인 숙소로 변신한 모습을 ‘오다가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과거 죽도시장은 아침이면 유료 변소 앞에 긴 줄을 서야 했고, 수시로 악다구니판이 벌어졌다. 돌이켜보면 그 살벌한 싸움은 시끌벅적한 장터에서 자기 영역을 지켜내며 식구들을 건사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지. 과거의 살풍경은 사라졌지만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쉴 새 없이 “어서 오이소”를 외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눈물겹다.

2022-10-19

포항의 애환과 역사가 흐르는 물길

형산강이 영일만으로 흘러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동해로 빠져나가고 그 주변에 여기저기서 모인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니 포항을 물의 도시라고 부를 만하다. 예부터 포항을 삼호오도(三湖五島)라 했는데, 세 개의 큰 호수인 아호(阿湖), 두호(斗湖), 환호(環湖)가 있어 삼호(三湖)라 했고, 형산강과 그 지류가 흐르며 다섯 개의 큰 삼각주가 만들어져 오도(五島)라 했다. 강과 바다에는 선박이 편히 드나들고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해 포항항(구항)과 포항제철소 안의 신항, 국제컨테이너 터미널인 영일만항이 차례차례 만들어졌다.1962년 6월 개항장으로 지정·공포된 포항항은 청룡호, 동해호 같은 포항~울릉도를 오가는 선박은 물론 외국 선박도 드나드는 경북의 관문항이었다. 그 후 포항제철이 건립되면서 항만의 명칭과 역할이 바뀌었다. 즉 1968년 포항제철을 지원하는 항만이 건설되면서 이를 신항이라 불렀고, 기존의 포항항을 구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포항에서는 구항보다 동빈내항(東濱內港)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가로명(街路名)을 지으면서 동빈(東濱), 남빈(南濱)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포항 도심과 송도 사이에 있는 동빈내항은 아늑하고 안전한 항구다. 한 번이라도 동빈내항을 보게 되면 천혜의 항구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1923년 폭풍우 직후 본격적인 포항항 건설 추진포항의 근대적 인프라는 일제강점기 때 일부 조성되었는데, 항구(현 동빈내항)도 그때 골격이 만들어졌다. 당시 포항에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곳은 남빈과 동빈 일대의 형산강 하구였으나 형산강이 범람하면 토사가 가득 쌓여 배가 드나들 수 없었다. 경북도와 총독부에 포항의 고충을 호소해 1914년부터 1923년까지 항만 공사가 이루어졌으나 응급조치에 불과했고 근본적인 문제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1923년 4월 12일 기록적인 폭퐁우가 몰아친 것이 포항항을 항만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에 포항의 사상자가 2천 명에 달한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폭퐁우의 피해는 심각했다. ‘전무후무한 대참사’를 겪고 난 후에야 경북도와 총독부는 포항의 항만을 동해안의 항구로 완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물의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 돌리고, 물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포항항 도수제(導水堤) 축조 공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독립적인 형산강 치수 사무소가 개설되어 대형 개수(改修) 공사가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26년 9월 다이쇼(大正) 일왕의 3남인 노부히토(宣仁) 친왕(親王)을 태운 일본 제2함대가 30여 척의 호위를 받으며 포항항에 상륙하기도 했다(김진홍 엮음,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 글항아리, 99∼103쪽, 115∼117쪽 참조).당시 일본 당국은 포항항 건설을 대단한 치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항만 공사를 하면서 흥해읍성을 허물어 매립용 돌을 확보하는 몰염치한 행동을 저질렀다. 항만 공사도 결국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면서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다.울릉도 사람들의 사연이 많은 곳항구는 사연이 많은 곳이다. 동빈내항에도 수많은 사람의 사연이 무늬져 있다. 배를 타고 떠나는 사람,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이야기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항구가 번성하고 쇠락하는 과정에서의 갖가지 이야기도 항구에 아로새겨져 있다.동빈내항에는 울릉도 사람들의 애환이 많다. 울릉도를 오가는 선박이 동빈내항에 정박했기에 울릉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여관과 식당, 가게가 많았다. 특히 울릉도 선착장 건너편의 여관들은 울릉도 사람들로 넘쳐났는데, 그중 대궁장모텔은 울릉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파도가 높아 울릉도 가는 배가 안 뜨면 울릉도 사람들은 몇 날 며칠 여기서 죽칠 수밖에 없었다. 동빈큰다리 인근의 울릉수퍼는 50년 세월 한자리를 지키다가 최근에야 다른 업종으로 바뀌었다.1970년대 울릉도 인구는 3만 명이 넘었다. 지금보다 세 배나 많은 사람이 울릉도에서 살았다. 울릉도의 경기가 좋으면 포항의 죽도어시장과 동빈내항의 경기도 좋았다. 울릉도의 전성기는 동빈내항의 전성시대였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동빈내항의 여객선터미널은 오래되고 비좁아 새 터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포항항만청 옆으로 여객선터미널이 이전하면서 동빈내항의 활기는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조선소와 철공소 등 즐비해동빈내항에서 이따금 깡깡깡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동성조선이라는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하거나 수리할 때 나오는 소리다. 이 회사는 1945년에 설립된 향도조선(向島造船)이 모체로 1995년에 동성조선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10∼1915년 사이에 일본 사람이 포항에서 조선소를 시작했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철수하게 되자 그곳에서 목선(木船)을 건조하던 대목장(大木匠) 김춘생이 인수한 것이다.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동성조선은 꽁치·오징어 채낚기선과 연근해 각종 어선을 비롯해 여객선, 화물선, 예인선, 바지선 등을 건조하고 있으며, 중소형 조선소로서는 전국에서 이름이 꽤 높다. 특히 1960년대까지 50톤 미만의 목선이던 동해안의 꽁치·오징어 채낚기선이 1970년대 접어들어 100톤 이상의 강선(鋼船, 철선이라고도 부름)으로 바뀔 때 동성조선이 절반 이상을 건조했다. 주목할 것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목포에서 선박 주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동해는 파도가 높아서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보장하려면 선박을 튼실하게 만들어야 하며 이것은 동성조선의 변함없는 원칙이다. 하지만 목포 연근해는 동해만큼 파도가 거칠지 않기에 목포 쪽 조선소의 선박 건조 과정이 조금 느슨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목포의 한 선주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배를 튼실하게 만드는 조선소를 수소문했고 포항의 동성조선을 알게 되어 주문하게 되었다.선박이 있으면 선박을 수리하고 부품을 조달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동빈내항 인근에는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하는 철공소와 작은 공장이 즐비하고, 선박에 필요한 얼음을 만드는 냉동공장도 있다. 통통 소리를 내며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 출어를 기다리며 어구와 어망을 손보는 어민,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 등이 철공소 등과 어우러지며 동빈내항의 풍경을 빚어낸다. 태풍 소식이 들리면 구룡포의 선박은 물론 멀리 울릉도의 선박도 동빈내항으로 몰려오는데, 선박으로 가득 차 있는 동빈내항은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룬다.최근에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커피숍, 식당 등이 점점이 들어서며 동빈내항의 풍경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다. 1970년대까지 황포 돛단배가 다니던 곳에 요트가 물살을 가르고 있는 것도 동빈내항의 변화된 모습이다. 동빈내항이 변화해온 풍경은 포항 화가들의 그림과 사진작가들의 사진에 남아 있다. 매립된 하천을 복원해 만든 포항운하동빈내항과 형산강 사이에 포항운하가 있다. 원래 형산강의 물길이었으나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매립을 거쳐 주거지가 되었다. 흐름이 끊긴 강을 강이라 할 수 있을까. 형산강에서 동빈내항으로 흐르는 물길이 막히면서 동빈내항의 수질이 나빠지고 동빈내항과 인근 도심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났다.주거지를 철거하고 1.3㎞에 이르는 물길을 복원하는 공사가 2012년 5월에 착공해 2014년 1월에 준공했다. 주택과 건물 480동이 철거되고 2천225명이 이주했다. 운하가 만들어지면서 형산강과 동빈내항 사이의 물길이 되살아났고, 동빈내항의 수질도 개선되었다. 또한 운하 주변으로 다양한 스틸아트 작품들이 배치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다.이제는 되살아난 물길 위로 크고 작은 유람선이 다닌다. 유람선은 포항운하에서 출발해 동빈내항과 송도해수욕장을 돌아온다. 유람선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빈내항과 영일만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포항에서 누릴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이다. 동빈내항에 유람선이 지나갈 때 갈매기들이 떼 지어 따라다니는 장면은 포항의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동빈내항과 포항운하는 과거에 어린아이들이 헤엄치며 놀던 맑은 강이었다. 이 물길이 점차 살아나고 주변이 가꿔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밖에도 포항 도심에는 칠성천, 양학천, 학산천, 두호천 같은 하천이 있었으나 도시화 과정에서 오염된 후 복개되고 말았다. 최근 이 하천들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선 학산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물의 도시 포항은 물길이 살아야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음을 동빈내항과 포항운하를 걸으며 느낄 수 있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17

스카이 워크 위를 걸으며 밤바다의 정취에 취하다

송도에서 동빈내항을 건너면 영일대해수욕장이 나온다. 1975년 개장 때부터 북부해수욕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영일대(迎日臺)’라는 해상 누각을 조성하면서 2012년 6월에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다. 송도해수욕장에 사람이 몰리던 시절에 영일대해수욕장은 한가한 해변이었다. 하지만 송도해수욕장이 백사장 유실로 명성을 잃으면서 영일대해수욕장이 부각되었고, 어느새 포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해수욕장이 되었다. 송도해수욕장처럼 백사장이 유실되지 않고 해수욕장으로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영일대해수욕장에 사람들이 붐비는 이유라 할 수 있다. 포항의 대표적인 축제인 국제불빛축제 주행사를 비롯해 사계절 내내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곳 또한 영일대해수욕장이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는 듯하지만 순간마다 다른 빛깔, 다른 모습이다. 해가 뜨거나, 햇살을 받아 윤슬이 반짝이거나, 저녁노을이 물들거나, 달이 뜰 때면 바다는 전혀 다른 풍경화가 된다. 호수처럼 잔잔하거나 파도가 높거나 태풍이 몰려오면 바다는 또 다른 풍경화를 펼쳐 보인다. 바다는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풍경화를 품고 있다. 바다를 속 깊이 좋아하는 사람은 무심해 보이는 바다의 안부가 궁금해 매일같이 바다를 찾는다.사계절 내내 붐비는 영일대해수욕장영일대해수욕장은 사계절 내내 사람들로 붐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즐길거리와 먹을거리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횟집을 비롯해 커피숍, 식당, 술집, 숙박시설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1970∼1980년대의 한산했던 풍경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해 질 녘에 바다 위로 노을이 물들고, 어두운 바다에 선박들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면 영일대해수욕장도 화려한 불빛으로 갈아입는다. 제철공장의 거대한 조명이 불을 밝히면 영일대해수욕장의 밤은 더욱 화려해진다. 형형색색의 조명과 어우러지는 밤바다의 정취는 영일대해수욕장의 또 다른 매력이다.영일대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설머리 마을이 나온다. 신라 경순왕 때 형산(兄山) 정상에 있는 형산사에서 동해 쪽을 내려다보니 고운 모래밭이 하얀 눈처럼 덮인 곳이 눈에 띄어 설(雪)머리라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만큼 포항 해변의 모래가 고왔다.한적한 어촌이었던 설머리 마을에 고급 횟집이나 카페 같은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다. 포항에서는 유일하게 기존 어항에 요트 등이 정박할 수 있는 피셔리나(fisharina)도 갖추었다. 영일대해수욕장에 사람이 몰리면서 바로 옆에 있는 설머리 마을도 영일대해수욕장처럼 바뀐 것이다. 세월은 번화가를 쇠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적한 곳을 번화한 곳으로 바꾸기도 하는데, 설머리 마을은 후자 쪽이다. 영일만이 한눈에 보이는 환호공원영일대해수욕장에서 설머리 마을을 지나 여남(汝南)으로 이어지는 해안 길은 걷거나 드라이브하기에 좋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 길은 설머리 마을의 아리랑횟집까지만 있었다. 그 위로는 길이 끊어지고 군부대의 해안 초소가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초소를 철거하고 해안을 매립해 길을 이었으니 그 풍광이 오죽할까. 설머리 마을에서 여남 가는 길 중간에 환호공원이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체험형 조형물인 스페이스 워크가 조성된 후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공원에는 테마 소공원과 레저 공간, 전망대, 팔각정, 산책로 등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공원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영일만, 특히 보름달이 뜬 영일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포항을 왜 일월(日月)의 고장이라는 하는지 실감할 수 있다. 캄캄한 밤바다에 은가루를 가득 뿌려놓은 듯한 풍경 앞에서는 말을 잃게 된다.영일만이 내려다보이는 환호공원 언덕 양지바른 곳에 손춘익 문학비가 있다. 손춘익은 한국 아동문학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다. 따뜻한 휴머니즘과 예리한 사회의식을 바탕으로 『작은 어릿광대의 꿈』 등 50여 권의 동화집과 『작은 톱니바퀴의 연가』 등 여러 권의 소설집을 남겼다. 평생 포항을 떠나지 않았으며, 포항의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의 문학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외롭다는 것은 언제나 아쉽게 사라지는 것.하지만 오늘 하루 이 아름답고 황홀한 꽃 한 송이가사람들의 가슴속에 심어준 보석들은 영원히반짝이고 있을 것을 우리는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동화 「꽃피는 얼굴」 부분동해안굿의 상징 김석출이 태어난 여남환호공원을 지나면 여남이 나온다. 자연부락인 여남은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조용한 어촌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대양초등학교도 2001년에 폐교되었다. 설머리 마을에서 여남까지 해안 길이 이어지고 마을 주변에 큰 횟집들이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근래 바다가 잘 보이는 야산에 커피숍이 하나둘 들어서더니 어느새 포항에서 고급스러운 커피숍이 가장 많은 곳으로 변했다. 영일만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의 가치를 여남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이다.여남은 동해안굿의 상징인 김석출 만신(萬神)이 태어난 곳이다. 김석출은 1922년 이곳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부터 굿판에서 징채를 잡을 정도로 솜씨가 뛰어났다. 동해안굿은 그를 떠나서 얘기할 수 없다. 그의 삶과 예술적 궤적을 따라가야 비로소 동해안굿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김석출은 20대 중반에 부산으로 떠났지만 그의 일가는 포항에 남아 무업(巫業)을 이어갔다. 하지만 바닷가 마을마다 열리던 굿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도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바닷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굿은 큰 놀이판이자 치유의 마당이고 종합예술이다. 바다를 무대로 한 뿌리 깊은 문화의 향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여간 쓸쓸한 일이 아니다. 김석출의 조카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20여 년간 동해안별신굿을 전수하던 김정희가 2019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동해안굿이 처한 비극적 현실이다.김석출은 여러 장의 음반을 낸 것은 물론 해외에서 수차례 공연하며 호평을 받은 예인(藝人)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땡큐, 마스터 킴〉은 호주 최고의 재즈 드러머(drummer)인 사이먼 바커(Simon Barker)가 김석출에게 매료되어 그를 만나러 가는 예술적 여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땡큐, 마스터 킴’을 보는 동안 관객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김석출과 그의 음악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 음악의 넓이와 깊이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사이먼 바커의 팬들은 변화된 그의 음악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이전보다 음악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을 팬들이 먼저 알아챘다. 내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재열, 「굿 장단에 푹 빠진 외국인, 우리 가락을 영상에 담다」, ‘시사IN’ 155호, 2010.김석출이 태어난 곳에 그를 기억하는 상징물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언젠가는 그의 이름 석 자를 새긴 아담한 돌 하나라도 세워지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국내에서 가장 긴 해상 보도교, 스카이 워크여남의 바다 위에 특별한 구조물 하나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22년 4월 13일 해상 스카이 워크(Sky Walker)가 개장한 것이다. 스카이 워크는 평균 높이 7미터, 총길이 463m에 이르는 국내에서 가장 긴 해상 보도교다. 바닥이 투명한 특수유리로 제작되어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출입구가 해안 산책로와 연결되어 바다와 육지를 넘나들며 영일만을 조망할 수 있고, 야간에도 개장하기에 밤바다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다.환호공원의 스페이스 워크에서 여남의 스카이 워크까지는 승용차로 7∼8분 거리다. 스페이스 워크에서는 우주를 걷는 듯한 느낌을, 스카이 워크에서는 바다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누릴 수 있다. 영일대해수욕장에서 여남까지는 다른 해변에서 누릴 수 없는 이색 체험을 만끽할 수 있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11

포항 사람들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묻혀 있는 곳

동해안에서 가장 이름 높은 해수욕장으로 북에는 원산, 남에는 포항 송도라 했다. 송도해수욕장의 은빛 고운 모래는 명사십리(明沙十里)라는 말이 딱 어울렸고, 수온과 수심이 적당해 수영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송림은 더위를 피하기에 그저 그만이었다. 그런 까닭에 송도해수욕장은 여름이 되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지금은 설치 작품처럼 외롭게 서 있는 다이빙대에도 까까머리들이 바글거렸다.포항이 면에서 읍으로 승격한 1931년에 개장한 송도해수욕장은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에도 송도해수욕장은 포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양지였다. 여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사계절 내내 포항 사람들은 송도해수욕장과 송림에서 여가를 즐겼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소풍을 간 곳도 송도해수욕장과 송림이다.대구 사람들에게도 송도해수욕장은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였다. 대구에서 송도해수욕장으로 오는 인파를 수송하기 위해 대구-포항 간 임시 열차가 다니기도 했다. 오죽하면 송도해수욕장을 ‘대구의 앞마당’이라고 했을까.1960년대 후반부터 영일만에 철강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그 고운 명사십리가 서서히 유실되고 송도의 명성도 차츰 기울었다. 북새통을 이루던 송도의 횟집이나 가게는 하나둘 문을 닫았다. 송도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송도를 지켜보는 포항 사람들의 마음에도 쓸쓸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1998년에 개봉한 영화 ‘파란대문’에서 주 무대인 송도는 쇠락한 해변으로 비친다. 2007년 송도해수욕장은 공식적으로 폐장되고 만다. 2023년에 재개장할 듯영일만의 너른 품은 송도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푸른 파도와 시원한 샛바람, 하얀 갈매기들이 송도를 서서히 살려내고 있다. 영일만과 호미곶이 잘 보이는 자리에 커피숍과 식당이 속속 들어서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송도 역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다.2012년 10월부터 해수욕장을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유실된 백사장을 복원하기 위해 모래 15만 세제곱미터를 채우는 양빈(養濱) 공사를 하고 있고, 모래가 더 이상 유실되는 것을 막으려고 수중 방파제(潛堤) 3기도 설치했다. 이 사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포항시는 2023년에 송도해수욕장을 다시 개장할 방침이다.송도를 상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평화의 여상(女像)이다. 1955년 7월에 세워진 여상은 원래 해수욕장 입구 쪽에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상 여기저기에 흠집이 나자 2015년에 지금 위치로 옮겨 재건립했다.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정감이 가는 조형물이다. 여상 주변에서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바다와 음악이 좋아서 스스로 즐기는 사람들이다. 멀리 중남미의 쿠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는 풍경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송도는 그렇게 낭만의 선율이 흐르는 곳이다.노루와 꿩이 뛰놀던 송림바닷가 마을은 육지 방향으로 바람이 불면 모래가 마을로 날려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일제강점기 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방풍림을 조성했다. 1911년 일본인 대지주 오우치 지로(大內治郞)가 송도 백사장 불모지 53여 정보(16만여 평)의 국유지를 대여받아 조림 사업을 전개했고, 십수 년이 지나 송림이 울창해져 1929년 어부보안림(魚附保安林)으로 지정되었다(‘포항시사’ 3권, 2009, 279쪽).넓은 방풍림을 조성하는 것이 쉬운 일일 수 없었다. 초기에 묘목을 심으면 뿌리를 못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모래흙에는 뿌리를 내리기 힘든 탓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자란 묘목을 뿌리째 뽑아 일꾼들이 지게에 지고 한 분(盆)씩 옮겨 심었다고 한다. 송림은 그런 난관을 이겨내고 만들어졌다.지금도 대낮에 송림에 들어서면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냉기가 돈다. 과거에는 하늘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울창했다. 포항의 원로 문인 박이득은 송도의 옛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그 모래언덕에 올라서면 바다가 눈앞에 확 다가온다. 갑자기 다가오는 바다의 푸른색, 비릿한 바다 내음, 순백의 모래밭, 무수히 쏟아지는 햇빛, 모두 다 눈이 부시다. 소년이 아니라도 황홀할 수밖에 없다.당시의 송도는 10여만 평이 송림이었고,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너무 크고 빽빽해서 혼자 다니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숲에는 또 다람쥐, 청솔모, 산토끼, 노루, 꿩, 각종 새들이 무리 지어 제각각 송림의 주인이라고 소리쳤다.” - 박이득 ‘영일만, 그 푸른 해변의 노래’, ‘월간문학’ 2017년 2월호, 232쪽지금은 노루와 꿩은커녕 다람쥐나 청솔모조차 보기 어렵다. 세월은 송도해수욕장과 송림, 아니 포항의 모든 것을 너무나 많이 바꿔놓았다. 하지만 송림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2017년에는 포항시에서 송림 테마거리를 조성했다. 조용한 산책길 사이로 물길이 흐르고, 분수와 스틸 작품 등이 조화를 이뤄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쉴 수 있다. 송도해수욕장 ‘평화의 여상’ 한흑구, 이육사와 송도의 인연송도는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여러 예술인이 이곳에서 얻은 감흥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1948년 고적지 답사차 동료 문인들과 경주에 왔던 한흑구는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송도에 잠시 들렀다가 그 직후 서울에서 식솔을 데리고 포항으로 이주했다. 그러고는 1979년 작고할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으며 ‘보리’, ‘나무’ 등 주옥같은 수필을 남겼다. 동해의 사색인이던 그는 매일같이 송도 바닷가를 거닐었다고 술회했다.이육사도 송도와 인연이 깊다. 1936년 7월 이육사는 서울을 떠나 대구에서 귓병을 일주일 정도 치료하고 7월 29일 경주 불국사를 관람한다. 그날 밤에 송도해수욕장 인근 친구 서기원의 집에 머무르고, 다음 날 신석초에게 엽서를 보낸다. 8월에는 동해송도원(東海松濤園)에서 상당 기간 체류하는데, 역사상 최장기 장마와 최강의 태풍이 몰려온다. 육사의 수필 ‘질투의 반군성(叛軍城)’(1937)에서 “태풍이 몹시 불던 날 밤, 온 시가는 창세기의 첫날 밤같이 암흑에 흔들리고 폭우가 화살같이 퍼붓는 들판을 걸어 바닷가로 뛰어나갔습니다. 가시넝쿨에 엎어지락 자빠지락 문학의 길도 그럴는지는 모르지마는 손에 들린 전등도 내 양심과 같이 겨우 내 발끝밖에는 못 비추더군요. 그러나 바닷가를 거의 닿았을 때는 파도 소리는 반군(叛軍)의 성이 무너지는 듯하고, 하얀 포말(泡沫)에 번개가 푸르게 비칠 때만은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 나는 아직도 꿈이 아닌 그날 밤의 바닷가로 태풍의 속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이때를 회고한다(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다시 읽는 이육사’, 창비, 2017, 304∼305쪽 참조).‘질투의 반군성’에서 육사가 송도에서 보낸 여름 한철이 얼마나 강렬한 체험이었는지, 그 후 육사의 문학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육사가 신석초에게 보낸 1936년 7월 30일 소인 엽서는 발신지가 ‘포항 행정(幸町, 지금의 포항시 중앙동)’으로, 대구와 경주를 거쳐 포항에 온 경로와 몸 상태 등이 담겨 있다. 이 엽서는 광복 77주년인 2022년 8월에 국가문화재로 등록 예고되었다.포항 출신의 화가 이창연은 포항의 바다를 즐겨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송도를 그린 작품이 여럿 있다. 밝고 화사한 색채에 묘한 우수가 느껴지는 독특한 화풍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2010년 55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송림 테마거리에 많은 사람 찾아와송도에는 유서 깊은 배움터가 있었다. 포항대학의 전신인 포항수산학숙이 1953년 7월 이곳에서 문을 열었다. 포항의 대표적인 교육자이자 정치인인 하태환이 세운 포항수산학숙은 수산초급대학, 실업전문대학 등으로 교명이 바뀌다가 1989년 2월 죽천으로 옮겼다. 포항대학 출신들은 수산업을 중심으로 포항 산업의 기반을 만든 역군이고 지역사회 곳곳에서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포항대학이 이전한 후에는 동지중·고등학교가 잠시 머물다가 2002년 3월 용흥동으로 옮긴 후 아파트가 들어섰다.송도(松島)는 지명에서 드러나듯 원래 섬이었다가 다리가 연결되면서 사실상 육지가 되었다. 그 후로도 바로 옆에 철강산업단지가 조성되는 등 큰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곳에서 자연에 변형을 가하는 것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고, 송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던 그 곱던 명사십리가 서서히 사라지자 포항 사람들의 마음 한편이 아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송도는 다시 살아나 송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발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포항 사람들에게 송도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묻혀 있는 곳이기에.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10-04

파도 소리 들으며 걷는 영혼의 순례길

산과 강, 바다, 들판이 두루 펼쳐진 포항은 걷기에 참 괜찮은 곳이다. 내연산과 운제산을 걸어도 좋고, 형산과 제산 사이 형산강을 따라 강바람을 맞으며 걸어도 좋다. 비학산을 바라보며 흥해 들판을 걸어도 좋고, 동빈내항과 포항 운하, 송도와 영일대해수욕장을 갈매기와 함께 거닐어도 좋다. 산과 강, 들판, 바다, 도심을 따라 호젓한 길과 길이 그물코처럼 정겹게 이어져 있는 것이 포항의 매력이다.포항에 간다면 한 번쯤 바다를 바라보며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포항은 바다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는, 바다가 근본인 도시이기에. 경상북도의 해안선 428㎞ 중 포항의 해안선은 204㎞로 거의 절반에 이르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은 100여 ㎞에 이른다. 가는 곳마다 풍경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중 포항의 색깔이 가장 짙은 길은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다. 일월동에서 시작해 호미곶광장까지 25㎞에 이르는 이 길은 쉬엄쉬엄 걸어가면 예닐곱 시간 걸린다. 홀로 걸어도 좋고 다정한 길벗과 걸어도 괜찮은 길이다.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하늘을 휘젓는 갈매기, 수평선 위의 선박들, 바닷가에서만 볼 수 있는 꽃과 나무와 암석 그리고 어촌의 지붕 낮은 집들과 선한 미소의 사람들을 드문드문 만날 수 있다. 4개 구간으로 된 이 길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영혼의 순례길로 모자람이 없다. 연오랑세오녀길연오랑세오녀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의 무대로 일월동 713번지에서 시작해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의 귀비고까지 6.1㎞에 이른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 때 연오와 세오라는 부부가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가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세오가 짠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빛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다. 국보로 삼은 비단을 모신 창고가 귀비고이고,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 영일현이다.좋은 문학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선사한다. 이 설화 또한 다양한 해석이 열려 있는데, 영일만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과 일본의 이즈모(出雲) 지방 사이를 오고 간 태양신화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연오(延烏)와 세오(細烏)의 ‘까마귀 오(烏)’는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양오(陽烏, 태양) 전설과 연결되고, 영일현(迎日縣)이라는 지명도 태양신화와 이어진다. 포항의 이야기는 이렇듯 포항의 땅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 해와 달을 품고 수평선 너머의 세력과 교류하고 혼융된 것이 포항의 역사이자 문화다.이육사의 대표작인 ‘청포도’도 이 길 위에서 탄생했다. 지금 해병 사단과 그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 200만㎡(60만 평)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포도 농장이 있었다. 1936년 이육사는 요양차 포항에 들렀다가 이 포도농장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청포도’를 구상했고, 1939년 8월호 ‘문장(文章》’지에 발표했다. 이육사의 또 다른 대표작 ‘광야’는 항일 지사의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는 반면에 ‘청포도’는 다양한 상징과 서정성 때문에 ‘광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다음의 글을 읽어 보면 이육사가 ‘청포도’를 얼마나 아꼈는지, 그리고 이 작품에도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향한 염원이 얼마나 강렬하게 깔려 있는지를 알 수 있다.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3년 7월에 경주 남산의 옥룡암으로 요양차 들렀을 때, 먼저 와서 요양하고 있던 이식우(李植雨)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스스로 “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하면서,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이식우에게 말했다고 한다.- 김희곤, ‘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199쪽.이 시에 나오는 청포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연두색 청포도가 아니다. 당시 품종으로서 청포도가 포항의 미츠와(三輪) 포도원에서 양조용(釀造用)으로 재배되기는 했겠지만, 시에서처럼 손님 접대용으로는 거의 재배되지 않았다. 품종으로서 ‘청’포도가 아니라 익기 전의 ‘풋’포도여야 시가 제대로 독해된다(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다시 읽는 이육사’, 창비, 2017, 73∼74쪽 참조).선바우길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백사장과 해안의 몽돌, 자연석을 그대로 둔 채로 길을 냈다. 길이 끊어진 곳에는 데크를 놓아 길을 이었다. 바다 위로도 길이 나 있는 것이다. 데크 위를 걸어가면 발밑으로 파도가 철썩거린다.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선바우길 구간이다. 동해면 입암리에서 시작해 흥환해수욕장을 지나 흥환어항까지 6.5㎞에 이르며, 아름다운 바위와 절벽, 데크로드의 묘미를 한껏 누릴 수 있는 코스다.이 길에서는 태곳적부터 바람과 파도에 깎인 바위들이 기묘한 모습으로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 선바우를 비롯해 폭포바위, 여왕바위, 소원바위 등을 만날 수 있으며, 주상절리와 ‘한디기’라는 이름을 가진 하얀 절벽도 조우할 수 있다. 바위 구석에는 바다의 국화로 불리는 해국(海菊)이 수줍은 듯이 피어 있다. 다른 꽃들은 시나브로 시들어가는 가을에 피어나 겨울까지 빛나는 해국은 잎맥이 선명하기 그지없다. 누워서 자란다고 하여 누운향나무로도 불리는 눈향나무도 볼 수 있다. 붉은 해당화는 5월이 되면 바닷가에 지천으로 피었는데 이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희귀종이 되었다. 구룡소길구룡소길은 흥환리 어항에서 출발해 발산리를 거쳐 대동배까지 6.5㎞에 이르며 정감 어린 어촌 마을과 천연기념물인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 장군처럼 우뚝 서 있는 장군바위를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바닷가에 가더라도 오래된 어촌을 보기가 쉽지 않다. 빛바랜 흑백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어촌이 이 길 위에 있다. 마을 앞 포구에는 작은 어선이 정박해 있고, 길가에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어망과 통발 같은 어구를 손질하는 어민의 손길이 분주하다. 계절에 따라 멸치, 오징어, 과메기 등을 말리는 풍경도 볼 수 있다.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걷다 보면 기암절벽과 움푹 팬 소(沼)를 이따금 만날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구룡소(九龍沼)다. 높이 40∼50m, 둘레 100여 m에 이르는 구룡소는 해안 절벽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 주변의 움푹 팬 흔적은 용이 승천하면서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구룡소를 보고 있으면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실감 나는 풍경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풍어제나 출어제를 지낼 정도로 신성하게 여긴다.발산리에는 6월이 되면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노란꽃이 피는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다. 종자를 염주로 만들기에 염주나무라고도 하는데, 서양에서는 ‘황금비를 뿌리는 나무(Golden rain tree)’라고 한다. 꽈리처럼 생긴 열매는 옅은 녹색이었다가 열매가 익으면서 짙은 황색으로 변한다. 하얀 꽃이 피는 모습이 병아리를 떠올리게 한다고 하여 병아리꽃나무라고 하는 나무도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다. 발산리의 병아리꽃나무와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 제371호에 지정되어 있다.호미길호미곶면 구만리 산39에서 시작해 호미곶 해맞이광장까지 5.3㎞에 이르는 호미길에서는 ‘까꾸리개’라는 독특한 지명이 눈길을 끈다. 과거에 과메기의 원조인 청어가 얼마나 많았던지 뭍으로 밀려 나오는 경우가 허다해 갈퀴(까꾸리)로 끌었다고 한다. ‘까꾸리개’의 ‘개’는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어귀로, 포구(浦口)를 뜻하는 지명에 쓰인다. 즉 ‘까꾸리개’는 청어 떼를 갈퀴로 쓸어 담은 포구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사실에 가깝다. 과거에 영일만과 호미곶 일대에서 청어와 정어리 등의 어획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까꾸리개’는 호미곶 앞바다에 청어를 비롯한 고기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말해주는 지명이다.‘까꾸리개’에서는 독수리 머리처럼 생겨서 독수리바위라고 불리는 암석이 길손들의 시선을 붙들어 맨다. 특히나 바다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곳이어서 해 질 녘에 길손들의 발길이 잦다.이 길을 걷다 보면 바다에서 육지로 향하는 거대한 계단을 볼 수 있다. ‘해안단구(海岸段丘)’라고 하는 이 계단은 바다와 땅이 움직이면서 만들어진 아주 특별한 지형이다. 호미곶 일대는 계단 모양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안단구로 손꼽힌다. 이처럼 이 길에서는 억겁의 세월에 걸쳐 하늘과 바다와 땅과 바람이 어울리며 빚어놓은 기묘한 자연현상을 만끽할 수 있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27

유배객들이 바라보았을 쪽빛 바다는 변함이 없고

장기(長鬐)는 포항 해변에서 가장 남쪽에 있다. 위로는 구룡포가 있고 아래로는 경주 감포가 있다. 호미곶, 구룡포, 장기는 국토에서 호랑이 꼬리의 바깥쪽을 이루어 호미반도라 부르며, 과거에는 이를 통틀어 장기라 했다. 조선시대 후기의 지도를 보면 포항은 장기를 비롯해 흥해, 청하, 연일 4개 군으로 되어 있다. 장기는 그만큼 유서 깊은 지역이다. 파도를 타고 밀려오는 외적의 침입이 잦아 성(城)을 쌓아야 했고, 한양과는 너무 멀어 유배지가 되었다. 성(城)과 유배는 장기를 이해하는 열쇠 말이다.장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장기읍성이다. 이곳에 서면 넓은 들판과 쪽빛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성은 역사가 길고도 깊다. 1011년(고려 현종2)에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 토성으로 쌓았다가 1439년(조선 세종21)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았다. 장기의 진산인 해발 252m의 동악산에서 해안 쪽으로 뻗은 지맥 정상(해발 100m)의 평탄면에 위치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등의 문헌에 따르면 둘레가 2980척(약 903m), 높이는 10척(약 3m), 우물이 네 곳, 못이 두 곳 있었다. 조선 최고의 장기 일출장기읍성은 동, 서, 북쪽 방향의 성문 세 개와 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甕城)이 있다. 동문에는 조해루(朝海樓)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성곽 위에 배일대(拜日臺)라는 작은 바위만 남아 있다. 장기읍성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가히 절색이다. 육당(六堂) 최남선이 장기 일출을 조선 10경 중 하나로 꼽았고, 장기에 유배되었던 다산(茶山) 정약용도 벅찬 감회를 시로 남겼다.포항의 흥해, 청하, 연일, 기계 등 곳곳에는 옛 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성의 성격과 구조는 각각 다른데, 장기읍성처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기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구룡포 병포3리에 있는 구룡성도 장기읍성과 같은 목적으로 쌓았다. 구룡성은 고려시대에 왜적을 막기 위해 수군 기지로 사용하다가 고려 말에 폐지되었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포항과 경주의 경계에 있는 북형산성(北兄山城)은 673년(신라 문무왕13)에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대규모 성으로, 경주가 지척에 있기에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했다. 장기읍성과 구룡성, 북형산성은 포항이 과거부터 군사 요충지였음을 입증한다.군사용으로 조성된 장기숲장기를 얘기할 때 숲을 빼놓을 수 없다. 장기숲은 기계숲, 덕동숲과 더불어 포항에서 가장 유명한 숲이었다. 1833년에 발간된 ‘경상도읍지’에 장기숲의 길이는 7리(약 2.8㎞), 너비는 1리(약 393m), 면적은 19㏊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왜 이렇게 큰 규모의 숲이 있었던 것일까?느릅나무, 느티나무는 물론 탱자나무, 가시나무 등을 빽빽이 심어서 울타리를 삼았다는 ‘경상도읍지’의 기록을 볼 때 이 숲은 장기읍성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용이었을 것이다. 숲에 들어가면 하늘이 안 보이고 길을 잃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했다는 얘기가 지금도 전한다. 하지만 숲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중학교가 들어서고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경작지로 개간된 것이다. 장기중학교 교정의 몇 그루 고목이 숲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제2차 예송의 여파로 유배객이 된 우암구룡포에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장기에 가서 인재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구룡포는 한때 바다에서 버는 돈으로 흥청거렸으니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이해되지만, 장기에서 인재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한양에서 860리(약 338㎞) 떨어진 장기는 유배의 땅이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에 따르면 조선조 500년 동안 장기에 220여 명이 유배를 왔다. 유배 온 이들이 높은 수준의 학문을 전했고, 그들의 후손이 장기에 자리를 잡으면서 장기는 인재의 고장이 되었다. 실제로 장기는 마을 규모에 비해 학자와 고위 관료 출신이 많은 편이다. 사람이 살기에 척박한 유배지가 인재의 고장이 된 역설이 일어난 것이다.유배객 중 가장 이름이 높은 사람은 우암(尤庵)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그를 떠나 조선을 얘기하기란 어렵다. 그런 그가 장기로 유배를 오게 된 것은 1674년의 제2차 예송(禮訟) 때문이다. 효종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별세하면서 효종의 새어머니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충돌한 것이다. 이 논쟁은 학술 논쟁인 동시에 정치 투쟁이었다. 결국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면서 서인은 실각하고 서인을 이끌던 우암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어 1675년(숙종1) 정월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6월 장기로 이배(移配)되었다. 그의 나이 69세 때였다. 우암은 1679년(숙종5) 4월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3년 10개월 동안 장기에 머물렀다.우암은 장기에서도 학문에 힘써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난해한 구절을 뽑아 주석을 붙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완성했고, 조선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이정전서(二程全書)’의 글을 유형별로 편집해 ‘정서분류(程書分類)’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몽주신도비’ 등 300여 편의 시와 글을 지었다. 연일에 유배 왔던 이유(李瑜, 1691∼1736)가 쓴 ‘우암 선생 장기적거실기(長鬐謫居實記)’(1725)에서 스스로 근신하고자 하는 유배자 우암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28년 후인 1707년(숙종33)에 장기에 있던 그의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죽림서원을 세웠다. 장기에서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죽림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뜯기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백성의 삶을 지극히 보살핀 다산다산이 장기에 유배 온 것은 1801년(순조1) 3월, 다산을 총애하던 정조가 사망한 이듬해였다. 천주교인 300여 명이 희생된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은 순교했고, 다산과 둘째 형 손암(巽菴) 약전은 유배객의 신세로 전락했다. 영·정조 때의 르네상스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피비린내 나는 옥사가 일어나면서 다산 형제의 운명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다.다산이 장기에 머무른 기간은 220일, 그렇게 긴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난의 시기에 다산은 백성의 삶을 찬찬히 살펴 그 실상을 150여 편의 시로 남겼다. 왕의 인정을 받던 유능한 학자가 참혹한 국문을 당하고 유배객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는 결코 꺾이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백성의 삶을 살피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걱정했다. 다산은 농사와 고기잡이로 살아가는 장기 사람들의 삶과 노동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관리의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실학의 대가는 문학적 묘사에서도 탁월했다.兒哥身不着一絲兒 실오라기 몸에 하나 안 걸친 아가가出沒鹺海如淸池 맑은 연못 들락거리듯 짠 바다를 들락이네尻高首下驀入水 꽁무니 들고 머리 처박고 곧장 물로 들어가서 花鴨依然戲漣漪 오리처럼 자연스럽게 잔물결을 타고 가네洄文徐合人不見 소용돌이 무늬도 흔적 없고 사람도 안 보이고 一壺汎汎行水面 박 한 통만 두둥실 수면에 떴더니만忽擧頭出如水鼠 홀연히 물쥐같이 머리통을 내밀고서劃然一嘯身隨轉 휘파람 한 번 부니 몸이 따라 솟구치네- ‘아가 노래(兒哥詞)’부분, 신상구 역다산은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고단한 삶을 개선하는 데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한 예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간단한 치료법을 정리한 ‘촌병혹치(村病或治)’를 저술했다. 고기가 많이 잡히면 칡넝쿨 그물이 터져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잦았는데, 소나무 껍질을 우린 물에 명주실과 무명실을 담갔다가 말려서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자 문제가 개선되고 어획량이 크게 늘었다. 그는 이렇듯 유배지에서도 백성의 삶을 지극히 살피는 진정한 실학자의 길을 걸었다.다산은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1801년 10월 20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또다시 국문을 당했다. 다산의 반대파인 홍낙안 등이 다산과 그의 둘째 형 손암을 죽음으로 내몰고자 황사영 백서에 그들을 엮은 것이다. 음모는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목숨을 건진 다산은 강진으로, 손암은 흑산도로 이배되었다. 진정 나라를 걱정한 대학자를 내버린 나라가 온전할 리 있을까. 조선의 국운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가 말해준다.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이 심은 것으로 전하는 은행나무가 있고, 그 곁에는 다산의 사적비가 있다. 한 그루 고목과 비석 하나가 역사 속의 쓰라린 운명을 침묵으로 말해줄 뿐이다. 그 주인공들이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장기의 청옥빛 바다는 오늘도 변함이 없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25

붉은 태양과 푸른 바다는 구룡포의 영원한 생명력

1945년 8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이 떠난 후에도 구룡포의 활기는 여전했다. 풍부한 어자원과 잘 정비된 항구는 구룡포를 동해안의 대표적인 항구로 유지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현재 구룡포의 인구는 1만 명이 채 안 되지만 1970년대에는 3만 5천여 명이나 되었다. 한때 구룡포에 가면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구룡포는 번성했다. 포항이 부럽지 않았고, 구룡포의 항구는 포항의 항구보다 활기가 넘쳤다. 구룡포항에서는 다양한 생선이 들어오고 위판된다. 한 예로 대게 하면 영덕 대게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대게가 들어와 위판되는 곳이 구룡포항이다. 구룡포의 목 좋은 횟집은 대부분 대게를 주메뉴로 팔고 있다. 왁자지껄한 구룡포시장에 가면 웬만한 생선은 다 있고, 싼 가격에 살 수 있다.구룡포 뒷골목에 있는 고래 고깃집에도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룡포는 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포경업이 꽤 성행한 곳이다.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제1동건호라는 포경선이 구룡포가 과거에 포경기지였음을 말해준다. 선체 앞에 부착된 70미리 포는 고래를 향해 작살을 날리던 실물이다. 포경선을 탔던 선원들은 대부분 작고했고, 지금은 대여섯 명만 생존해 있다.구룡포의 해녀도 명성이 높다. 호미곶과 더불어 경북에서 가장 많은 해녀가 있는 곳이 구룡포다. 이제 해녀는 모두 60대 이상의 고령이다. 수입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바닷속을 누비며 성게, 미역,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하는 험한 일을 젊은 여성들이 선호할 리 만무하다. 고령의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진다.구룡포는 뭐니 뭐니 해도 과메기의 고장이다. 과메기를 빼놓고 구룡포를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겨울 한철 과메기를 팔아서 1년 내내 먹고사는 사람들이 꽤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7년에는 과메기 매출액이 약 560억 원이었다. 과거에는 바닷가 덕장에서 과메기를 건조하는 모습이 구룡포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사라진 옛 풍경이 되었다. 지금은 과메기 공장에서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건조한다. 세월은 과메기를 만드는 방식도 바꿔놓은 것이다.원래 과메기는 청어로 만들었지만 청어가 잡히지 않자 꽁치로 대체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구룡포 연근해에 그렇게 많던 꽁치의 어획량도 줄어들자 원양에서 들어오는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청어 과메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청어 과메기 맛을 잊지 못해 찾는 이들이 있어 적은 양이나마 유통되고 있다. 지역 내에서만 유통되던 겨울철 별미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과메기는 겨울이 되면 홈쇼핑, 포털사이트, 택배 등 다양한 경로로 전국에 팔려나간다. 앞으로 과메기가 어떻게 변신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어자원 감소는 구룡포의 골칫거리다. 최근에는 예전처럼 많은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어자원의 남획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기후변화로 수온 등 바다 생태계가 바뀐 게 주원인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어만리 호천리(漁萬里 虎千里)’라는 말이 있다. 하룻밤 사이에 바닷고기는 만 리를 가고 호랑이는 천 리를 간다는 뜻이다. 고기는 수온에 그만큼 민감하다. 바다 생태계가 바뀌면서 수온도 바뀌고 수온을 따라 고기도 움직이는 것이다. 어자원 감소는 구룡포뿐만 아니라 국내 모든 바닷가 마을의 공통 숙제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기 마련이다. 구룡포에 닥친 이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볼 일이다.고인돌과 주상절리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구룡포에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곳곳에 남아 있다. 구룡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강사리에 있는 고인돌이다. 90톤이 넘는 이 고인돌을 통해 청동기시대 구룡포에 꽤 큰 규모의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강사리 바로 옆에는 고래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 다무포 마을이 있다. 강사리의 고인돌과 다무포의 고래를 연결하면 이 마을에 고래 사냥을 하던 선사인들이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된다.구룡포 삼정리 구룡포해수욕장 근처에 가면 특이한 지질 현상인 주상절리(柱狀節理)를 볼 수 있다. 주상절리는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식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규칙적인 균열이 생겨 형성된 것이다. “우주는 지구를 저질러놓고/용암 같은 점액질의 시간을 흘려보냈다”(김주대, ‘시간의 사건’ 일부)는 시구절이 떠오르는 곳이다. 구룡포의 주상절리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분출되다가 갑자기 멈춘 듯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석병리, 동해안의 땅끝마을바람이 거센 바닷가 근처는 날렵하고 튼튼한 말을 키우기 좋은 적격지다. 거센 바람 속을 달려본 말들은 바람보다 빠르게 더 멀리 달릴 수 있을 터이다. 바로 조선 최고의 군마를 키우던 국영 목장이 구룡포에 있었다. 지금은 말을 방목해 키우던 석성(石城)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석성은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동해면 발산리까지 호미반도를 가로지르는 7.8㎞ 구간에 높이 2∼3m로 쌓았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보면 석성은 약 1400년 전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폐쇄되었다.이 구간의 약 4㎞는 말목장성 탐방로로 조성되어 있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국영 목장에서 성장하며 훈련받은 군마들은 한반도 곳곳을 달리며 용맹을 떨쳤을 것이다. 해발 205미터의 석성 정상에 오르면 봉수대 터를 만날 수 있고, 봉수대 터 옆에 있는 전망대에서 구룡포와 호미반도 능선, 영일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전남 해남에 땅끝마을이 있듯이 경북 구룡포에도 땅끝마을이 있다. 한반도의 동쪽 끝은 구룡포읍 석병리다. 포항 출신의 시인 박남철은 석병리를 ‘태양이 사는 곳’이라 했다.“태양이 사는 곳, 땅끝마을 석병리이곳은 이제 그대로.갯목 시,해맞이 군,일어서는 바다 읍!”- 박남철 ‘위대한 고향 포항시’ 부분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지명은 아무 곳에나 붙일 수 없다. 아홉 마리 용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을 감당할 수 있어야 비로소 ‘구룡’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구룡포에 가면 지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 넉넉히 느껴진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남아 있지만 구룡포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 기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구룡포의 오랜 역사와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의지는 그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구룡포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무엇보다 구룡포는 태양이 사는 곳이자 늘 푸른 바다와 동의어가 아닌가. 결코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력이 구룡포를 늘 새롭게 만들어갈 것이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20

‘슬픈 근대’의 역사가 남아 있는 동해안의 대표 항구

꾸덕꾸덕 익어가는 생선이 있다. 과메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과메기는 겨울 해풍을 맞으며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쫀득쫀득한 맛을 내는 포항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다. 과메기의 주산지(主産地)는 동해안의 대표적인 어업 전진기지 구룡포다. 찬바람이 불면 구룡포는 과메기의 나라가 된다. 구룡포는 과메기뿐만 아니라 숱한 이야기가 익어가는 곳이다. 구룡포는 분주한 항구다. 크고 작은 어선이 수시로 물길을 가르며 포구로 드나든다. 어판장에는 오전 5시 30분 무렵이면 선어(鮮魚)를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오고, 빨간 모자를 쓴 경매사와 경매인들로 북적거린다. 6시가 되면 경매사가 종을 울리며 경매가 시작된다. 딸랑딸랑 울리는 종소리는 구룡포의 아침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다.구룡포는 근래 텔레비전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주말이나 피서철에 구룡포의 도로는 전국에서 몰려온 차량으로 붐빈다. 구룡포는 왜 이렇게 주목을 받으며 찾아오는 사람이 많을까?구룡포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구룡포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구룡포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있고, 1400년 전에 군마(軍馬)를 키우던 국영 목장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에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 있었다. 이런 기록을 볼 때 구룡포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군사적인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로는 눈에 띄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웃한 장기(長9B10)가 조선의 대표적인 유배지임을 감안한다면 바람 센 동해안 마을에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19세기 말까지 구룡포는 한적한 어촌이었을 뿐이다.하지만 한반도를 향한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면서 구룡포의 운명은 바뀐다. 구룡포 주변의 풍부한 어자원과 포구로서의 좋은 입지 조건이 문제였다. 세상 어디나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이 좋은 곳은 침탈의 대상이 되기 쉬운데 구룡포도 그러했다. 일본은 1889년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을 체결해 경상·전라·강원·함경의 4도 해역에서 어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사전 조사를 통해 구룡포 근해에 굉장한 어자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룡포에 조성된 일본인 이주어촌요시다 게이치(吉田敬市)라는 일본 학자가 조선총독부 수산과의 의뢰를 받아 1954년에 ‘조선수산개발사’라는 책을 냈다. 원래 1942년에 의뢰받았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조사, 연구가 힘들어져 1954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수산 분야를 어떻게 ‘개발’했는지 서술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개발’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명백히 ‘수탈’이었다. 2019년에 번역해 출간된 이 책을 펼쳐보면 포항과 구룡포에 일본인들이 언제 어떻게 들어와서 무엇을 했는지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구룡포 앞바다에 일본 어선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02년이다. 야마구치현(山口縣) 도요라군(豊浦郡)의 어선 50여 척이 도미를 잡으려고 온 것이다. 4년 후 1906년에는 가가와현(香川縣)의 어선 80척이 고등어를 잡기 위해 출현했고, 고등어 성어기가 되자 어선과 운반선 2천여 척이 몰려왔다. 구룡포 앞바다를 일본 어선이 뒤덮은 것이다. 이에 편승하여 슬금슬금 구룡포에 자리잡은 일본인 이주자는 1933년에 220호가 되었다. 이후 정어리 어업이 성행하면서 구룡포는 그 중심지가 되었다(요시다 게이치 저, 박호원·김수희 역, ‘조선수산개발사’, 민속원, 2019, 621쪽 참조).일본은 조선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고 조선 어민을 동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포항과 구룡포 등 한반도 연안 곳곳에 이주어촌을 조성했다. 구룡포에는 세토(瀨戶) 내해에 인접한 가가와현 사람들이 다수 이주했다. 그 이유는 해양생태 조건이 세토 내해와 비슷해 같은 어구와 어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 고려 때부터 약탈을 일삼았던 지역이라 낯익은 바다라는 점,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를 지나 자신들의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점 때문이다(김준, ‘김준의 어촌정담- 구룡포가 꿈틀댄다’, ‘현대해양’, 2021. 3. 15. 참조).일본인들이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은 구룡포에 큰 충격을 던졌다. 항구를 만들자 더 많은 어선이 몰려왔고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상가와 주거지, 공원이 조성되었다. 20세기 초엽은 구룡포 역사에서 충격이자 분기점인 셈이다. 방파제 완공되면서 일본인들의 ‘엘도라도’ 돼구룡포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은 구룡포공원이다. 계단을 따라 공원에 올라가면 구룡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큰 비석 하나가 서 있지만 비문을 읽을 수는 없다. 누군가 비문에 시멘트를 덧칠한 것이다. 이 미묘한 비석에 구룡포의 ‘슬픈 근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비석의 주인공은 도가와 야사브로(十河 彌三郞)라는 인물이다. 1908년 구룡포로 온 도가와는 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 항구 건설을 주도했고 구룡포어업조합을 창립했다. 한마디로 구룡포 개발을 주도한 인물이다. 구룡포항의 핵심 시설인 방파제는 1926년에 180미터가 완공되었지만 태풍으로 파손되어 1935년에 복구되었다. 현재 방파제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1935년 3월에 세워진 ‘구룡포항 확축(擴築) 공사 준공비’가 있다.도가와는 해산물 운송로를 확보하려고 구룡포에서 포항으로 가는 도로를 닦았다. 항만과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구룡포는 일본인들에게 ‘엘도라도’가 되었다. 구룡포의 이주 일본인들은 도가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硅化木)을 가져와 1944년에 송덕비를 세웠다. 자신들의 나라가 곧 패망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처사였다. 결국 이 비석은 우리에게 수탈과 치욕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해방된 나라에 이 비석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대한청년단원들이 비문에 시멘트를 쏟아부었다.관광객으로 붐비는 구룡포공원과 근대문화역사거리(일본인 가옥거리)는 구룡포가 일본인들의 이주어촌이 되면서 조성된 공간이다. 구룡포공원은 원래 일본인들의 신사(神社)가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종로거리’ 혹은 ‘선창가’라 불린 근대문화역사거리에는 상점, 요리점, 여관, 병원 등이 즐비했다. 포항 원도심에도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있었지만 전쟁과 도시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반면에 구룡포는 전쟁의 참화를 비켜가고 개발 과정에서도 소외되면서 일본인 거주지의 형태가 웬만큼 남게 되었다. 그리고 포항시가 이를 보수하고 정비해 역사체험공간으로 조성하면서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이 거리에 있는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 역사관은 가가와현 출신으로 구룡포에서 큰 부를 일군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의 이층 목조 살림집이다. 하시모토는 1909년 구룡포로 이주해 다섯 척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선어 운반업, 대부업, 유비(油肥) 공장, 담배점, 철공소 등을 문어발식으로 경영해 큰돈을 벌었다. 이 집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갖고 왔을 정도다. 남의 나라에 와서 어자원을 수탈해 유세를 떨쳤던 일본 부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 집을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구룡포와 포항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을 일본이 구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구룡포와 포항의 거리는 약 20킬로미터다. 당시 일본의 기세를 고려한다면 개연성이 충분하다.일본은 부산에서 포항까지 연결하는 동해남부선을 1935년에 완공했고, 동해중부선을 건설하기 위해 교각을 설치하고 굴을 뚫는 등 상당한 준비를 하는 도중에 패망했다. 물론 그 구상이 물거품이 되고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물러난 것은 핍박받던 구룡포 사람들에게 큰 다행이라 하겠다.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18

거센 바람을 견디며 순백의 등대가 빛을 뿌리는 곳

여기에 가보지 않고서야 포항에 가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일곱 번 답사해 한반도의 최동단임을 확인했다고 하는 곳,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고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곳, 한반도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 바로 호미곶이다.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에서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기에 포항에 오는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라도 호미곶에 들르며, 그 숫자가 매년 200만 명을 넘는다.포항 시내에서 호미곶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동해면을 지나 임곡 방향으로 가는 옛 도로가 있고, 동해면에서 직진해 구룡포를 통과하는 도로(929번 지방도로)가 있다. 임곡 방향의 도로는 구불구불한 곡선이고, 구룡포를 통과하는 도로는 반듯한 직선이다. 호미곶의 진면목을 느끼고 싶다면 임곡 방향으로 가는 게 좋다. 바닷가를 따라 유려한 곡선의 도로를 느린 속도로 따라가다 보면 대동배리, 구만리 같은 정겨운 이름의 마을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원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호미곶은 광활한 자연의 캔버스에 하늘과 바다와 땅의 원색이 펼쳐진다. 3월 중순 유채꽃이 피면 원색의 향연은 절정을 치닫는다.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눈을 찌를 듯 샛노란 유채꽃이 피어나면 하늘과 바다의 색상도 더 짙어진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유채꽃밭으로 뛰어들어 한 송이 꽃이 되고, 꽃밭 옆 포장마차에서는 대낮부터 소주 한잔 기울이며 술에 취하고 꽃에 취한다.호미곶 구만리에 보리가 피어나면 연초록의 물결이 온 누리를 뒤덮는다. 차가운 땅 밑에서 억세게 키워 온 생명의 기운은 사람들의 마음밭도 초록으로 물들인다. 땅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의 파도가, 바다에는 흰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드는 파도가 어우러지는 곳이 봄날의 호미곶이다.호미곶은 바람이 거세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의 마을에서는 쌀농사가 힘들다. 과거에는 온 사방이 보리밭이었고, 먹고살기가 팍팍했다. 대보(호미곶의 옛 지명)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는다는 말이 전한다. 보리밭이 많이 줄었지만 옛 모습은 웬만큼 남아 있다. 해 질 무렵 구만리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면 수평선 너머에서 전하는 바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등대가 세워진 사연바람이 거센 호미곶은 역사의 바람도 거셌다.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한 까닭에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었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압승으로 끝난 후인 1907년에는 일본 해군이 호미곶 인근 야산에 망루를 설치해 운영했다.1907년 9월 9일 호미곶 앞바다에서 조난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 도쿄수산강습소(도쿄수산대 전신)의 실습선 가이요마루(快鷹丸)가 호미곶 앞바다의 암초에 부딪혀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사망했다. 가이요마루는 일본이 우리 바다를 수탈하기 위해 시험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운행한 실습선이었다. 일본은 이 사건의 사망자를 기리기 위해 구만리에 조난기념비를 세웠지만 광복 후 훼손되고 뽑히는 수난을 겪다가 한일 관계 개선 후에 제 모습을 찾았다.일본은 대한제국에 이 사건의 책임을 물었다. 우리의 항만 시설이 부실해 사고가 났다는 억지 주장을 하며 대한제국의 비용으로 등대를 건설하라고 요구했다. 무기력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추진된 것이 호미곶등대 건설이다. 등대는 1908년 4월 13일 착공하여 그해 11월 19일 준공했으며, 12월 20일 점등했다. 일본이 강요한 이 등대는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이 시공을 맡았다. 등대 앞 해안가에 선착장을 만들어 공사용 자재를 하역하고 주민들을 동원해 등대 건설 부지까지 운반했다.벽돌로 26.4미터를 쌓아올린 백색의 팔각형 등대는 일몰에 불빛을 켜고 일출에 불빛을 끈다. 12초에 한 번씩 먼바다를 향해 빛을 뿌리는데, 빛의 도달 거리가 16해리(약 40킬로미터)에 이른다. 거센 바람을 견디며 순백의 등대가 빛을 뿌리기에 호미곶 밤바다는 마냥 쓸쓸하지 않다. 외로운 밤바다에 더 외롭게 떠 있는 어선, 그리고 그 어선을 향해 빛을 뿌리는 등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삶이 외롭지만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등대는 언제 보아도 단아하다. 위에서 아래로 살포시 흘러내리는 곡선은 빼어난 건축 미학을 드러낸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그 이상이다. 해녀와 고래호미곶에서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봄바람이 부는 바다에서 돌미역을 채취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복, 소라, 성게, 멍게, 천초(우뭇가사리), 문어 등을 건져 올린다. 북쪽으로는 오호츠크해, 동쪽으로는 독도까지 간 제주 해녀들이 이곳에도 온 것이다.2017년 기준으로 포항은 제주와 울산 다음으로 해녀가 많다. 2020년 5월 현재 포항시 어촌계에 등록된 해녀는 879명이고, 이 중 호미곶면은 249명이다. 수입은 쏠쏠하지만 육체적으로 고된 작업이 안정적으로 이어질 리 없다. 지금 해녀의 나이는 대부분 60대 이상이다. 해녀의 수도 줄어들어 해녀가 사라진 어촌계가 늘어나고 있다.호미곶 앞바다에는 아득한 옛적부터 고래가 지나다녔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인간의 시간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과거에 동해를 고래의 바다, 경해(鯨海)라 불렀고, 포항의 해안가 곳곳에 고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하고 있다. 2005년에는 포항에서 1300만 년 전 돌고래 화석이 국내 최초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1930년대까지 호미곶 주변은 밍크고래의 평화로운 집단 서식지였다.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은 울산, 제주도, 대흑산도, 대청도 등을 근거지로 참고래, 대왕고래, 향고래, 귀신고래 같은 중대형 고래를 주로 포획했고 밍크고래 같은 작은 고래는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상황은 급변해 호미곶 주변은 밍크고래의 무덤이 되었다. 전쟁 물자 동원을 위해 한반도의 자원을 철저하게 착취한 일본은 밍크고래도 포획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후 고래는 명맥을 유지했지만 영일만에 제철공장이 들어서고 바다 생태계가 바뀌면서 그 수가 더욱 줄었다. 지금도 이따금 크고 작은 고래가 발견되고, 혼획된 고래가 경매에 부쳐진다. 불법으로 고래를 포획한 어선이 해경에 덜미를 잡히는 경우도 있다. 고래고기가 비싸게 거래되는 까닭이다.고래를 둘러싼 현실은 살벌하지만 고래의 옛이야기는 평화롭다. 호미곶면 다무포 마을에는 출산한 어미 고래가 미역을 먹으러 얕은 바다까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고래가 산후에 미역을 먹는 것을 알게 되자 여인들이 산후조리로 미역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왠지 모르게 고래에게 친숙감을 느끼는 정서는 이런 이야기에 담겨 있다. 고래를 영혼의 조상으로 섬기는 호주 원주민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처럼.김옥균의 왼팔과 상생의 손호미곶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등장한다. 그는 1894년 3월 27일 오후 상해에서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가 쏜 탄환 세 발을 맞고 즉사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의 시신은 중국 군함에 실려 인천으로 왔고, 왕명에 따라 마포 양화진 보리밭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조각난 시신 중 머리는 일본인이 수습해 도쿄의 한 절에 묻었다고 전한다. 나머지는 전국 곳곳에 버려졌는데, 왼팔이 호미곶 앞바다에 던져졌다는 설이 있다. 정확한 출처는 찾을 길이 없으나 여러 신문기사와 단행본에 그 이야기가 전하며, 다음의 글이 구체적이다.“암살당한 개화파의 우두머리 김옥균이 여섯 토막으로 잘려 왼팔이 장기곶(현 호미곶) 앞바다에 던져진 것은 1894년 5월의 일이었다. 굳이 그의 시체의 한 토막을 이곳에다 버린 것은 동해로 튀어나온 장기곶의 지세가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의 발견-경상북도’, 뿌리깊은나무, 1992, 199쪽.새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 호미곶에 커다란 손이 솟아올랐다. 상생(相生)의 손 청동 조각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른손(8.5미터)은 바닷속에, 왼손(5.5미터)은 호미곶 해맞이광장에 세워졌다.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로 호미곶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비운의 주인공인 김옥균의 왼팔이 던져졌다고 하는 호미곶 앞바다에 상생의 손이 세워졌으니 이 우연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