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br/>< 호미곶 >
여기에 가보지 않고서야 포항에 가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일곱 번 답사해 한반도의 최동단임을 확인했다고 하는 곳,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고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곳, 한반도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 바로 호미곶이다.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에서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기에 포항에 오는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라도 호미곶에 들르며, 그 숫자가 매년 200만 명을 넘는다.
포항 시내에서 호미곶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동해면을 지나 임곡 방향으로 가는 옛 도로가 있고, 동해면에서 직진해 구룡포를 통과하는 도로(929번 지방도로)가 있다. 임곡 방향의 도로는 구불구불한 곡선이고, 구룡포를 통과하는 도로는 반듯한 직선이다. 호미곶의 진면목을 느끼고 싶다면 임곡 방향으로 가는 게 좋다. 바닷가를 따라 유려한 곡선의 도로를 느린 속도로 따라가다 보면 대동배리, 구만리 같은 정겨운 이름의 마을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바닷가 따라 구불구불한 도로 달리면
대동배리·구만리 정겨운 이름 마을들
‘바람의 마을’에서는 쌀농사가 힘들어
사방이 보리밭, 청초한 색으로 물결쳐
역사 소용돌이 속 탄생한 호미곶등대
세월 지나 보아도 빼어난 곡선미 자랑
원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호미곶은 광활한 자연의 캔버스에 하늘과 바다와 땅의 원색이 펼쳐진다. 3월 중순 유채꽃이 피면 원색의 향연은 절정을 치닫는다.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눈을 찌를 듯 샛노란 유채꽃이 피어나면 하늘과 바다의 색상도 더 짙어진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유채꽃밭으로 뛰어들어 한 송이 꽃이 되고, 꽃밭 옆 포장마차에서는 대낮부터 소주 한잔 기울이며 술에 취하고 꽃에 취한다.
호미곶 구만리에 보리가 피어나면 연초록의 물결이 온 누리를 뒤덮는다. 차가운 땅 밑에서 억세게 키워 온 생명의 기운은 사람들의 마음밭도 초록으로 물들인다. 땅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의 파도가, 바다에는 흰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드는 파도가 어우러지는 곳이 봄날의 호미곶이다.
호미곶은 바람이 거세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의 마을에서는 쌀농사가 힘들다. 과거에는 온 사방이 보리밭이었고, 먹고살기가 팍팍했다. 대보(호미곶의 옛 지명)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는다는 말이 전한다. 보리밭이 많이 줄었지만 옛 모습은 웬만큼 남아 있다. 해 질 무렵 구만리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면 수평선 너머에서 전하는 바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등대가 세워진 사연
바람이 거센 호미곶은 역사의 바람도 거셌다.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한 까닭에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었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압승으로 끝난 후인 1907년에는 일본 해군이 호미곶 인근 야산에 망루를 설치해 운영했다.
1907년 9월 9일 호미곶 앞바다에서 조난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 도쿄수산강습소(도쿄수산대 전신)의 실습선 가이요마루(快鷹丸)가 호미곶 앞바다의 암초에 부딪혀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사망했다. 가이요마루는 일본이 우리 바다를 수탈하기 위해 시험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운행한 실습선이었다. 일본은 이 사건의 사망자를 기리기 위해 구만리에 조난기념비를 세웠지만 광복 후 훼손되고 뽑히는 수난을 겪다가 한일 관계 개선 후에 제 모습을 찾았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이 사건의 책임을 물었다. 우리의 항만 시설이 부실해 사고가 났다는 억지 주장을 하며 대한제국의 비용으로 등대를 건설하라고 요구했다. 무기력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추진된 것이 호미곶등대 건설이다. 등대는 1908년 4월 13일 착공하여 그해 11월 19일 준공했으며, 12월 20일 점등했다. 일본이 강요한 이 등대는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이 시공을 맡았다. 등대 앞 해안가에 선착장을 만들어 공사용 자재를 하역하고 주민들을 동원해 등대 건설 부지까지 운반했다.
벽돌로 26.4미터를 쌓아올린 백색의 팔각형 등대는 일몰에 불빛을 켜고 일출에 불빛을 끈다. 12초에 한 번씩 먼바다를 향해 빛을 뿌리는데, 빛의 도달 거리가 16해리(약 40킬로미터)에 이른다. 거센 바람을 견디며 순백의 등대가 빛을 뿌리기에 호미곶 밤바다는 마냥 쓸쓸하지 않다. 외로운 밤바다에 더 외롭게 떠 있는 어선, 그리고 그 어선을 향해 빛을 뿌리는 등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삶이 외롭지만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등대는 언제 보아도 단아하다. 위에서 아래로 살포시 흘러내리는 곡선은 빼어난 건축 미학을 드러낸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그 이상이다.
해녀와 고래
호미곶에서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봄바람이 부는 바다에서 돌미역을 채취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복, 소라, 성게, 멍게, 천초(우뭇가사리), 문어 등을 건져 올린다. 북쪽으로는 오호츠크해, 동쪽으로는 독도까지 간 제주 해녀들이 이곳에도 온 것이다.
2017년 기준으로 포항은 제주와 울산 다음으로 해녀가 많다. 2020년 5월 현재 포항시 어촌계에 등록된 해녀는 879명이고, 이 중 호미곶면은 249명이다. 수입은 쏠쏠하지만 육체적으로 고된 작업이 안정적으로 이어질 리 없다. 지금 해녀의 나이는 대부분 60대 이상이다. 해녀의 수도 줄어들어 해녀가 사라진 어촌계가 늘어나고 있다.
호미곶 앞바다에는 아득한 옛적부터 고래가 지나다녔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인간의 시간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과거에 동해를 고래의 바다, 경해(鯨海)라 불렀고, 포항의 해안가 곳곳에 고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하고 있다. 2005년에는 포항에서 1300만 년 전 돌고래 화석이 국내 최초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1930년대까지 호미곶 주변은 밍크고래의 평화로운 집단 서식지였다.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은 울산, 제주도, 대흑산도, 대청도 등을 근거지로 참고래, 대왕고래, 향고래, 귀신고래 같은 중대형 고래를 주로 포획했고 밍크고래 같은 작은 고래는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상황은 급변해 호미곶 주변은 밍크고래의 무덤이 되었다. 전쟁 물자 동원을 위해 한반도의 자원을 철저하게 착취한 일본은 밍크고래도 포획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후 고래는 명맥을 유지했지만 영일만에 제철공장이 들어서고 바다 생태계가 바뀌면서 그 수가 더욱 줄었다. 지금도 이따금 크고 작은 고래가 발견되고, 혼획된 고래가 경매에 부쳐진다. 불법으로 고래를 포획한 어선이 해경에 덜미를 잡히는 경우도 있다. 고래고기가 비싸게 거래되는 까닭이다.
고래를 둘러싼 현실은 살벌하지만 고래의 옛이야기는 평화롭다. 호미곶면 다무포 마을에는 출산한 어미 고래가 미역을 먹으러 얕은 바다까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고래가 산후에 미역을 먹는 것을 알게 되자 여인들이 산후조리로 미역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왠지 모르게 고래에게 친숙감을 느끼는 정서는 이런 이야기에 담겨 있다. 고래를 영혼의 조상으로 섬기는 호주 원주민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처럼.
김옥균의 왼팔과 상생의 손
호미곶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등장한다. 그는 1894년 3월 27일 오후 상해에서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가 쏜 탄환 세 발을 맞고 즉사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의 시신은 중국 군함에 실려 인천으로 왔고, 왕명에 따라 마포 양화진 보리밭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조각난 시신 중 머리는 일본인이 수습해 도쿄의 한 절에 묻었다고 전한다. 나머지는 전국 곳곳에 버려졌는데, 왼팔이 호미곶 앞바다에 던져졌다는 설이 있다. 정확한 출처는 찾을 길이 없으나 여러 신문기사와 단행본에 그 이야기가 전하며, 다음의 글이 구체적이다.
“암살당한 개화파의 우두머리 김옥균이 여섯 토막으로 잘려 왼팔이 장기곶(현 호미곶) 앞바다에 던져진 것은 1894년 5월의 일이었다. 굳이 그의 시체의 한 토막을 이곳에다 버린 것은 동해로 튀어나온 장기곶의 지세가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한국의 발견-경상북도’, 뿌리깊은나무, 1992, 199쪽.
새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 호미곶에 커다란 손이 솟아올랐다. 상생(相生)의 손 청동 조각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른손(8.5미터)은 바닷속에, 왼손(5.5미터)은 호미곶 해맞이광장에 세워졌다.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로 호미곶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비운의 주인공인 김옥균의 왼팔이 던져졌다고 하는 호미곶 앞바다에 상생의 손이 세워졌으니 이 우연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