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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만에 울려 퍼진 대서사시

등록일 2022-11-09 19:39 게재일 2022-11-1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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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포항 <16> 포스코

한 도시에도 운명이란 게 있으리라. 20세기 접어들어 한반도가 겪은 거센 풍파는 포항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 전체가 겪은 충격이지만 포항은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전쟁 후 한적한 소도시였던 포항은 1967년 6월 30일 큰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다. 정부의 역점 사업인 종합제철이 들어설 입지로 선정된 것이다. 당시 포항 인구는 6만8천여 명이었고,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농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포항이 종합제철 입지로 결정된 후 항만과 철도, 댐 공사가 시작되었다. 많은 건설 인력과 장비가 몰려들면서 포항에 때아닌 활기가 넘쳤다. 1968년 4월 1일에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 기념식이 열렸으며, 박태준 초대 사장이 취임했다.

종합제철 건설의 성공 여부는 무엇보다 막대한 자금 확보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아갈 즈음에 정부와 포항제철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대했던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을 통한 외자 조달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부지 조성 공사를 한창 진행하던 1968년 1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 현장을 처음 방문해 “이거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걱정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포항에 1968년 4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 항만·철도공사 등 지역경제 활기 불어넣어

박태준 초대 사장의 ‘우향우 정신’으로 밤낮없이 건설현장 불 밝히며 영일만을 종합제철단지로

세계 최강 철강사로 성장… 포항과 공동운명체로 형형색색 야간조명 불빛 영일만의 밤 수놓아

 

‘우향우 정신’, 포항제철을 이끈 원동력

대일청구권자금의 일부를 전용(轉用)해 종합제철 건설에 투입하자는 구상은 이런 난기류 속에서 나왔다. 이 구상을 실현하려면 일본 정부의 동의와 일본 철강업계,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등 국제금융기구가 포항제철 건설의 타당성을 인정해야 하는 선결 과제가 있었다. 정부와 박태준 사장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마침내 1969년 12월 3일 대일청구권자금의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에 전용하기로 최종 합의하는 한일 간의 기본 협약을 체결했다.

1970년 4월 1일 포항 대송면 건설 현장에서 포항 1기 종합 착공식이 열렸다. ‘산업의 쌀’을 생산하는 종합제철 건설은 단순히 한 기업의 성패를 넘어 국가 경제의 근간을 좌우하는 대역사(大役事)였다. 박태준 사장은 밤낮없이 건설 현장에서 직원들을 독려하며 그 유명한 ‘우향우 정신’을 강조했다.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우향우’라는 단어는 포항제철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세 배가 들어간 포항 1기 건설

포항제철은 1972년 12월 31일 본사를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전했다. 포항 1기 건설 총력 지원 체계를 갖추고 현장 제일주의 원칙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모래바람 부는 허허벌판의 영일만은 점차 종합제철 단지로 변모해갔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1고로 출선구(出銑口)에서 첫 쇳물이 쏟아졌고, 임직원들은 감격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

1973년 7월 3일 포항 1기 종합 준공식이 있었다. 제선, 제강, 압연, 지원설비 등 총 22개의 공장과 설비를 일관화한 사업으로 건설 인원은 연인원 315만 4천884명, 건설비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세 배에 해당하는 1천204억 원이었다. 이 준공식은 대한민국이 중화학공업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3년 포항 인구는 10만9천여 명으로, 포항이 종합제철 건설의 입지로 선정된 1967년의 6만8천여 명에 비해 4만1천여 명이나 증가했다. 포항제철의 건설과 함께 포항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모해가는지를 보여주는 통계라 하겠다. 이 무렵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형산교를 건너 출근하는 포항제철 직원들의 기나긴 자전거 행렬은 포항의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극장 상영용 뉴스인 ‘대한뉴스’에도 등장하던 그 풍경은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포항 시내 오거리에 있던 ‘부산자전거’는 전국에서 자전거가 가장 많이 팔리는 점포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포항은 포항제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

포항제철은 수출과 내수 판매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했다. 수출을 개시한 지 2년 만에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국내에는 외국 오퍼 가격보다 21∼42퍼센트까지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 국내 기업의 국제 경쟁력 확보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후 포항제철은 1976년 5월 31일 포항 2기를 종합 준공하고 조강 연산 260만 톤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국내 철강 수요의 55퍼센트를 담당할 정도로 고속 성장했다.

포항제철 건설과 조업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특히 1977년 4월 24일 1제강공장에서 일어난 대형 사고는 파장이 컸다. 쇳물 44톤이 전로(轉爐) 밖으로 쏟아져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일본에서 급파한 전문가들은 사고 현장을 조사한 후 완전 복구에 3∼4개월은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이때 포항제철 특유의 돌관 정신이 빛을 발했다. 정상조업 단계에 들어가는 데 불과 34일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포항 3기 설비 공사는 건국 이후의 최대 공사여서 공기 준수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78년 6월 13일 ‘건설 비상’을 선포하고 전사 총력 건설 체제에 돌입했다. 1978년 12월 8일 3기를 종합 준공함으로써 조강 연산 550만 톤 체제를 구축했다. 3년 후인 1981년 2월 18일에는 포항 4기를 종합 준공해 조강 연산 850만 톤 체제를 구축했으며, 1983년 5월 25일 4기 2차 사업을 종합 준공함으로써 조강 연산 910만 톤 체제를 완성했다.

포항제철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돌관’, ‘비상’, ‘총력’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방법으로 대응해야 하는바, 포항제철의 건설 과정이 그러했다.

1983년 포항 인구는 21만 3천여 명으로, 포항 1기 종합 준공식이 열린 1973년의 10만 9천여 명에 비해 배 가까이 증가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변화였다. 이제 포항은 포항제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거대한 설치미술 같은 포항제철소의 야간 조명은 영일만의 밤을 형형색색 밝힌다.
거대한 설치미술 같은 포항제철소의 야간 조명은 영일만의 밤을 형형색색 밝힌다.

광양 4기 종합 준공으로 사반세기 제철소 건설 대역사 완성

1970년대 우리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철강 수요 또한 계속 증가했다. 이때 제2의 종합제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지만 석유파동으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국내외 여건이 나아지던 1977년 제2제철 건설이 다시 이슈로 떠올랐고, 민간기업들도 실수요자 선정 경쟁에 뛰어들었다.

현대그룹이 제2제철 실수요자 선정에 적극적이라서 포항제철은 현대그룹과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포항제철은 국가기간산업인 제철 사업을 민간에 맡기면 부의 편재가 극심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경제로 이어지는 폐단이 발생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결국 1978년 10월 포항제철이 제2제철 실수요자로 선정되었다.

제2제철의 입지는 1981년 11월 광양만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당시 정부는 아산만을 제2공장 입지로 내정했지만, 포항제철은 경제적인 측면과 균형발전 측면을 고려할 때 광양만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부가 포항제철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광양만에 제2제철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1985년 3월 광양 1기 공사를 시작해 1992년 10월 광양 4기 공사가 종합 준공되었다. 이로써 포항제철은 1968년 창립 이후 사반세기에 걸친 제철소 건설 대역사를 완성해 조강(粗鋼) 연산 2천100만 톤 체제를 구축, 세계 3위 철강기업의 위상을 확립했다. 사반세기 건설 대역사를 완성한 다음 날인 1992년 10월 3일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해 대역사의 성공적 완수를 보고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0월 5일 이사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세계적인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한 포항공대

포항제철은 국가 과학기술의 백년지대계를 고뇌했다. 그 산물이 1986년 포항공과대학 설립이다. 1980년부터 포항에 4년제 대학 설립을 구상한 포항제철은 1986년 12월 3일 국내 최초로 세계적인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하는 포항공과대학(POSTECH)을 개교했다.

2002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포스코(POSCO)로 사명(社名)을 변경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이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사명감으로 세계적인 철강기업으로 우뚝 선 포스코의 특별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영일만이 어두워지면 포항제철소의 조명이 켜진다. 거대한 설치미술 같은 제철소의 야간 조명은 영일만의 밤을 형형색색 밝힌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포항 구석구석에 포스코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 포스코의 위용만큼이나 포스코가 포항에 미친 영향은 크고도 깊다. 그리고 그 영향은 과거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고 미래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포항과 포스코는 한배를 탄 공동의 운명체가 아닐 수 없다. 포항에서 이룬 포스코의 대서사시가 더 웅장하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포항과 포스코는 더 굳게 손을 맞잡아야 할 것이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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