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전쟁 후의 폐허에 ‘애린’과 ‘선린’의 꽃을 피운 사람

등록일 2022-11-30 18:07 게재일 2022-12-01 12면
스크랩버튼
다시 읽는 포항 &lt;21&gt;<br/>이명석과 수도산
미 해병 장병들, 선린애육원 아이들, 이명석 원장과 직원들(왼쪽에서 두 번째 이명석, 1970년대).

6·25전쟁 때 부모 잃은 고아들을 보살핀 선린애육원과 학업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 문해(文解) 교육을 실시한 애린공민학교의 설립, 나환자들이 자립할 수 있는 정착촌인 애도원(愛道園) 조성, 포항시립도서관 건립, 포항문화원 설립, 포항 최초의 문화제인 개항제(開港際) 개최, 포항문화원 부설 독서회 발족, 포항시민헌장 기초, 옛 포항시민의 노래와 포철공고, 오천중 교가 작사 등.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이 주도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전쟁 후 초토가 된 포항에서 문화와 복지의 씨를 뿌리고 가꾼 이명석(李明錫, 1904∼1979). 그의 삶을 알아야 포항의 정신과 문화, 복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1965년 7월 포항 중앙동의 애린예식장에서 포항 최초의 극단인 은하(銀河)가 창단 기념으로 최동주의 창작극 ‘비와 대화’를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관객은 겨우 네 명에 불과해 150석 규모의 예식장은 텅텅 비었다. 당황한 연극단원들은 공연 준비를 도와준 이명석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격려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간 이명석은 열변을 토했다. “다른 사람들을 더 데리고 와야지, 왜 여러분만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그리고는 이명석도 울었고 단원들도 울었다. 극단 은하의 첫 번째 공연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은하는 마땅한 연습 장소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극단을 꾸렸다. 하루는 상원동 골목길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여기서 와 이라노”하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선뜻 연습 장소를 구해주는 등 갖가지 도움을 주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은하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극단으로 발돋움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청년 연극인들을 도와준 그 사람이 이명석이다.

 

꼬박 열흘 걸어 찾아간 학교 다닐 수 없자, 일하며 4년 기다려 강습소 입학하는 등 배움 열정

예술분야 깊은 식견 가진 이들과 친분 쌓으며 문화예술로 계몽운동 펼치겠다는 큰 뜻 품어

포항문화원 설립, 지역 첫 문화제인 ‘개항제’ 주도, 예총 기반 닦는 등 문화 르네상스 이끌어

6·25전쟁으로 폐허 된 거리 고아들 보듬고, 글 모르는 사람들 위해 학교 설립 위대한 업적

“저에게 적당한 재산, 적당한 건강, 적당한 수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기도문 귀감

 

교남학교 거쳐 간사이미술원 입학

이명석은 포항과 인접한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에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고 이명석의 집안도 다를 바 없었다. 부친이 기독교인이 되면서 가족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1년 삼사리에 교회가 설립될 때 온 집안이 앞장섰다. 영덕 장사학교에서 한글을 익힌 그는 열두 살 때 꼬박 열흘을 걸어서 대구에 도착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장사학교 교사가 알려준 사립학교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이명석은 절망하지 않았다. 서문시장 등에서 일하며 4년여를 버티다가 1921년 애국지사 홍주일 등이 세운 사설 강습소인 교남(嶠南)학교(현 대륜고)에 들어갔다.

4년 만에 교남학교를 졸업한 이명석은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더 큰 곳에 가서 꿈을 펼쳐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명석은 장사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그 재능을 살리기 위해 아사이 츄(淺井忠, 1856∼1907)가 설립한 간사이(關西)미술원에 입학했다. 고학을 하며 힘겹게 2년을 보냈지만 3년차 가을에 각혈을 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무리하게 일하며 공부한 탓이었다. 폐결핵 진단이 나왔고 학교에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문화예술로 계몽운동을 펼치겠다는 뜻 품어

귀국한 이명석은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일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영해 원황교회 도달석 집사의 장녀 도우술과 결혼했다. 그리고 포항으로 이사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일본으로 가서 자리를 잡은 다음 식구들을 불러들이기로 하고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다시 일본 땅을 밟았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제대로 먹지 못했고 유리공장에서 안전 장구도 없이 위험천만한 일을 했다. 여름 태풍 때 공장 굴뚝이 무너지면서 공장을 덮치는 대형 사고가 터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명석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병원에서 또다시 결핵 판정을 받은 이명석은 더이상 일본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이명석은 포항교회(현 포항 제일교회)에 등록하고 페인트 작업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처음에는 일본인 주택의 벽면이나 창틀 페인트 작업을 하다가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선박 도색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38년에 대구일보 기자인 박영달, 포항읍사무소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김대정을 만나 호형호제하며 지내게 되었다. 박영달은 뒷날 사진작가로 역량을 인정받았고, 김대정은 이육사와 친교할 정도로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이명석은 이때부터 문화예술로 계몽운동을 펼쳐보겠다는 뜻을 품었다. 포항교회 청년들로 관악대를 조직해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답답한 주민들의 가슴에 신바람을 불어넣기도 했다.

 

1966년 제1회 포항 개항제에서 대회사를 하는 이명석 포항문화원장.
1966년 제1회 포항 개항제에서 대회사를 하는 이명석 포항문화원장.

‘착한 사마리아인’의 정신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포항의 거리에는 고아들이 떠돌아다녔다. 미 해병과 선교사, 포항의 교회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아들을 보듬을 수 있는 시설을 건립하려 했다. 실무를 맡은 이명석은 숱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딱한 고아들의 눈망울을 떠올리며 하나둘 해결해 나갔다. 드디어 고아원을 개원하게 되었고 명칭을 지어야 했다. 이명석은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운 아이들의 이웃이 되자는 뜻에서 ‘선린애육원’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관계자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가 의원(醫院)으로 바뀔 때 ‘선린의원’이라는 명칭을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는 동안 교육의 기회를 놓쳐 우리글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포항 제일교회에서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공민학교를 설립했는데 학생 수가 계속 늘어나 수용이 힘들었다. 그 대안도 이명석이 감당했다. 그의 집터에 학교를 세워 운영한 것이다. 학교의 명칭은 애린공민학교라 했다. 이 학교를 거쳐 간 학생은 수천 명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라, 이명석은 주변의 괄시를 견디다 못해 도움을 요청한 흥해 성곡리 음성 나환자들의 후견인이 되어 애도원이라는 농장을 조성하고 애도교회 설립도 이끌어주었다. 전쟁 후의 폐허에 ‘애린’과 ‘선린’이라는 아름다운 꽃은 이렇게 피어났다.

 

 

지역 문화예술의 주춧돌 놓아

이명석은 문화예술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박영달, 김대정에 이어 한흑구를 만나게 된 것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들은 박영달이 중앙동에 개업한 ‘청포도다방’에서 수시로 만나 척박한 지역 문화를 살려 나갈 길을 모색했다.

이명석은 몸을 던져 길을 내는 사람이었다. 포항문화원을 설립했고, 포항 최초의 문화제인 ‘개항제’를 주도했으며, 포항예총과 포항문인협회의 기반을 닦았다. 시립도서관 건립 운동을 펼쳤으며, 포항문화원 부설 독서회도 발족했다. 특히 독서회 발기 취지문은 직접 작성할 정도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1966년 결핵이 완치되었을 때 호를 재생(再生)이라고 지었다. 새로운 몸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고, 포항 문화의 르네상스를 실천하리라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가 얼마나 포항을 생각했는지는 그가 작사하고 장남 이진우가 작곡한 ‘옛 포항시민의 노래’에서 느낄 수 있다.

“대한의 새벽 날이 밝아 새는 내 고장 / 형산강 흐름 끝에 송도 명사(明沙) 고와서 / 동해의 고기떼가 모여드는 영일만 / 갈매기 흥겨워서 파도 곁에 춤춘다 / 여기는 경북 관문 아늑한 복지 / 정답게 뭉치자 우리 시민들 / 대포항(大浦項) 건설의 노래를 부르자”

이명석은 1979년 4월 차남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머물다가 그해 9월 28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지상에서 남긴 마지막 기도문은 풍진세상을 살아가는 후세들이 거듭 읽어야 할 감동적인 글이다.

“하나님, 저에게 적당한 재산, 적당한 건강, 적당한 수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을 짐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짐이 있었기에 나태와 탐욕을 경계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게 주님의 큰 뜻과 계획이셨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제가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적당한 일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하게 불러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명석의 뜻을 기리고자 1998년 2월 28일 포항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그가 생전 자주 거닐었던 수도산 덕수공원에 문화공덕비를 세웠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제공 : (재)애린복지재단, 참고문헌 : 박이득·김삼일·이남오·김일광 엮음 ‘재생 이명석’(새암, 2018)

<끝>

다시 읽는 포항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