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17> <br/>포항 제일교회와 푸른마을교회
지역마다 도심에는 지역민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있기 마련이다. 교회나 사찰, 성당이 그런 역할을 맡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모든 종교 건축이 그럴 수는 없고 그중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깊은 신뢰를 받는 곳이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런 공간은 특정 종교의 울타리를 너머 지역 공동체와 허물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포항 도심에도 그런 공간이 있을까?
포항제일교회
1908년 중앙동에 초가삼간 구해 예배당으로 사용
1911년 영흥학교 설립해 예배당을 학교로 활용
포항제일교회·영흥학교, 지역 3·1운동 주도
많은 교인 체포되는 등 고난 겪었지만 교세는 확장
1928년 ‘벽돌 한 장모으기 운동’으로 시작돼
1933년 190평 포항 최초 붉은 벽돌 예배당 세워져
포항여자야학교·기독공민학교 설립 등 교육 힘써
기독공민학교, 훗날 애린공민학교 교명으로 운영
6·25 때 초토화된 도심 속에서 제일교회만 멀쩡
역사 파도 넘으며 母교회로·신뢰받는 교회로 자리
포항 북구 중앙동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옛 제일교회는 한눈에 봐도 고풍스럽다. 오래된 붉은벽돌과 빛바랜 첨탑에서 고색창연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길을 걷다가 교회 앞에 이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때로는 숙연해지기도 한다. 교회 마당에 참새나 비둘기가 내려앉아 모이를 쪼고 있을 때면 교회는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 없다.
포항 제일교회는 1905년 5월 12일 창립되었다. 이날은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 1867∼1929) 선교사 일행이 포항을 처음 방문해 복음을 전한 날이다.
안의와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1897년 대구에 부임해 대구·경북의 모교회(母敎會)인 대구 제일교회를 설립한 후로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계성(啓聖)학교를 설립했으며, 제중원(濟衆院, 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개원에도 참여했다. 동산의료원 초대 원장인 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 1869∼1951)과 더불어 대구에 사과나무를 처음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겨레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영흥학교 설립
포항 제일교회는 1908년 중앙동에 초가삼간을 구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이때 교회 설립의 기초를 닦은 인물은 초대 당회장(堂會長)을 맡은 미국 선교사 맹의와(孟義窩, Edwin Frost McFarland, 1878∼?)다. 맹의와는 1904년 대구에 부임해 대구 제일교회를 근거지로 영일, 경주, 고령, 달성 등에 20여 개의 교회를 설립한 선교사다.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볼 때 19세기 후반 대구에 정착한 미국 선교사들이 대구 제일교회를 거점으로 대구·경북에서 여러 교회를 개척한 것이 대구·경북 교회의 초기 역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포항 제일교회를 비롯해 흥해교회(현 흥해중앙교회), 대도교회 등 영일군과 포항의 주요 교회는 20세기 초반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었다.
포항 제일교회는 신도가 증가하면서 1910년에 초가 다섯 간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당시 포항에 일본인 거주자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심상(尋常)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포항 지역에 우리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포항 제일교회 신도들은 이 겨레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간절히 기도했고, 그 응답으로 1911년 11월 1일 영흥(永興)학교를 설립했다. 평일에는 예배당을 학교로 활용하고 주말에는 예배를 보는 방식의 지혜를 짜낸 것이다.
후일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한 평양 숭실학교 등이 자진 폐교하는 등 기독교계 학교가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 영흥학교도 폐교 위기에 몰렸다. 다행스럽게 1933년에 지역의 젊은 유지인 해촌(海村) 김용주(金龍周, 1905∼1985)가 학교를 인수하면서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을 주도한 교인들
1919년 3·1운동은 포항 제일교회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포항 제일교회 교인과 영흥학교 교사들이 포항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교인이 체포되고 실형을 선고받는 등 포항 제일교회는 고난을 겪었지만 위축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인이 증가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다. 겨레의 고난과 함께한 것이 교회 부흥의 계기가 된 것이다.
교인이 증가하면서 예배 장소가 협소해지자 벽돌로 된 예배당을 짓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1926년 김영옥 목사가 2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면서 새 예배당 건립에 힘이 실렸다. 1928년 9월 연와제예배당건축기성회(煉瓦製禮拜堂建築期成會)가 조직되었고, 벽돌 한 장 모으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1933년 6월 15일 총공사비 8천 원의 예산으로 연와제 2층 연면적 190평의 예배당을 기공해 그해 11월 19일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포항 최초의 붉은벽돌 예배당은 그렇게 세워졌다.
좌우 합작 단체인 신간회(新幹會) 활동을 했던 김영옥 목사는 청년회를 만들어 청년들의 활동을 살려 나가는 한편, 포항여자야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에도 힘쓰는 등 포항 제일교회가 지역에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포항 제일교회는 지역민들의 교육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광복되던 해 12월 일본에서 귀국한 김영상이 제일교회에 등록해 일본에서 주일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듬해 교회당에 기독공민학교를 설립했다. 학생 수가 400여 명에 이르자 교회는 도저히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포항에 주둔해 있던 미 해병대로부터 자재를 지원받아 현 육거리 대로변의 이명석 장로 사저에 교사(校舍)를 신축해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기독공민학교는 훗날 이명석 장로가 승계받아서 애린공민학교라는 교명으로 운영되었다.
포항 전투 때 도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회당
한국전쟁 때 포항 전투의 참상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도심에 딱 하나의 건물만 남고 초토화된 사진이다. 그 건물이 제일교회다.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축인 포항이 뚫리면 전세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포항에 북한군이 진입하자 미 공군과 해군은 엄청난 폭격과 포격을 가했고 그 바람에 도심은 불바다가 되었다.
미군이 제일교회는 피해서 폭격과 포격을 했다는 얘기가 전하지만 불바다에서 살아남은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예배당 붉은벽돌 곳곳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포항 제일교회는 이러한 역사의 파도를 넘으며 자연스럽게 포항의 모교회(母敎會)로 자리잡은 것은 물론 지역민의 신뢰를 받는 교회이자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교회가 발전하면서 중앙동 골목길의 예배당으로는 교인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1993년 11월에 교회이전건축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2003년 10월 26일 용흥동의 새 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로써 포항 제일교회의 100년 가까운 중앙동 시대는 막을 내렸고, 기존 붉은벽돌 예배당은 소망교회에서 인수했다.
푸른마을교회
포항 제일교회, 국내 19개·해외 29개 교회 개척
흥해읍 성곡리 ‘푸른마을교회’가 그중 하나
생태적 삶·영성공동체 지향… 성곡 숲속에 인연
야트막한 산 중턱에 수직 아닌 수평으로 놓여 있어
“수평의 길고 나지막한 겸손의 상자” 독특한 건축
생태적 삶과 영성 공동체를 지향하는 푸른마을교회
포항 제일교회는 국내에 19개 교회, 해외에 29개 교회를 개척했는데, 포항 흥해읍 성곡리에 있는 푸른마을교회는 그중 하나다. 이 교회 이상은, 김이화 목사는 1997년 포항 학산동의 2층 상가를 얻어 처음 예배를 드렸다. 그 후 생태적 삶과 영성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교회 부지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3년 성곡리 숲속과 인연이 되었다.
교회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조금 애를 먹기도 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노래가 말해준다.
빠른 길 큰길도 아닌 / 사과밭 돌아서 작은 길로 / 울퉁불퉁 낡은 길 지나 /
나무 계단 오르면 / 새 소리 바람 소리 / 주님 목소리 들려요
- 김이화 작사, ‘푸른마을 가는 길’ 부분
교회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놓여 있다. 주변 환경을 위압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있다. 어느 누구든 교회 앞에 이르면 잠시 숨을 고르고 노출 콘크리트로 된 교회 건물과 고즈넉한 주변 풍경을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
교회를 설계한 이은석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을 부지로 받아들고 자연에 가장 잘 순응하는 수평의 길고 나지막한 겸손의 상자를 조심스럽게 놓았다”고 했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채택한 것은 “꾸미지도 장식하지도 않은 재료이고 건설의 흔적을 그대로 지닌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처럼 순수하고 질박하면서도 자연스럽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상은, 김이화 목사의 생각과 이은석 교수의 아이디어가 한몸으로 섞이면서 “수평의 길고 나지막한 겸손의 상자”라는 독특한 교회 건축이 포항의 외딴곳에서 탄생한 것이다.
예배당 내부의 십자가가 서 있는 자리는 자연 채광이 들어와 이상은 목사가 직접 만든 나무 십자가에는 햇볕이 은은하게 비친다. 이렇듯 푸른마을교회는 진정한 영성을 느낄 수 있도록 교회 곳곳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교인들이 텃밭에서 함께 경작하는 모습이라든지 교회가 꾸준히 개최해온 ‘푸른마을 자연학교’에서 이 교회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붉은벽돌로 된 옛 포항 제일교회와 푸른마을교회는 몇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도심에 있는 제일교회는 지은 지 100년 가까이 되고 비교적 큰 교회다. 외곽에 있는 푸른마을교회는 건축한 지 20년도 되지 않은 작은 교회다. 하지만 두 교회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교인이든 아니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내면의 빛을 밝혀준다는 것이다. 이 교회를 찾아가 예배당 안팎을 느릿느릿 걸어 다니다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