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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의사’의 상처와 무늬

등록일 2022-11-28 18:01 게재일 2022-11-29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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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포항 &lt;20&gt;<br/>김종원과 동빈동
어린 아이를 진료하는 김종원 원장.
어린 아이를 진료하는 김종원 원장.

포항 동빈동에 흰색의 아담한 목조건물 하나가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따듯한 정감을 느끼게 한 그 건물은 선린의원이었다. 선린의원은 단순히 하나의 의원(醫院)이 아니라 파란만장한 현대사와 개인사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는 곳이었다. 6·25전쟁으로 초토화되어 수많은 전쟁고아가 길거리를 헤매고, 홀로 된 산모들이 흐느끼고 있는 포항에서 그들을 치료하고 섬기는 사명이 선린의원의 뿌리였고, 그 의원을 헌신적으로 이끌어 간 사람이 김종원(金鐘元, 1914∼2007)이었다.

김종원은 이산가족이다. 전쟁 때 세 아들을 북에 남겨두고 남으로 왔고, 그 후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뼈저린 아픔이 그의 삶을 규정짓는다.

평안북도 초산(楚山)군 출신인 김종원은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1929년 김종원이 신의주고보 3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불길은 멀리 신의주까지 옮겨붙었다. 김종원은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뛰어나가 조선 독립을 외쳤고, 즉결심판에 넘겨져 한 달 가까이 구류를 살았다.

평양의학전문학교(평양의대의 전신)를 졸업한 김종원은 초산 도립병원 소아과 의사를 거쳐 1940년 1월 평북 위원(渭原)에서 개인병원을 개원해 1945년 8월까지 운영했다. 이 무렵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의 책을 접하고 평생 그의 책을 탐독했다. 신의주고보 때 학생 운동을 한 경험과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은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를 잡았다.

 

6·25전쟁 때 평양 탈출, 대구에 도착

환자돌봄 어려움 겪던 동산기독병원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 소아과 진료 시작

피난 온 고모가족 만나러 들른 포항에서

웅덩이 속에 쪼그려 있던 아이들 본 후에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 초대소장 맡아

1956년 미군 철수 계기로 선린의원 개원

넷째 아들 목숨 위태롭단 소식에도 진료

전쟁고아·산모·소외이웃 위해 혼신의 힘

신문지로 코피 막고 진료하는 김 원장에

서영욱 동산의료원장 ‘인술의 큰산’ 불러

수많은 시민 가슴에 이름 석 자 깊이 새겨

 

평양을 탈출해 대구 동산기독병원에서 근무

김종원은 1946년 4월부터 평양의대 소아과에서 근무했는데 1950년에 터진 전쟁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김종원이 한국민사지원단(UNCACK) 병원에 근무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치료해준 게 화근이 되었다. 1·4후퇴를 앞두고 북한군이 평양에 진입할 태세였고, 북한군에게 체포되는 순간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했다. 3년 전인 1947년에 월남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혐의로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된 경험도 있었다. 걸을 수 있는 세 아들은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고 아내와 맏딸, 젖먹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황급히 내려왔다. 세 아들에게 곧 데리러 온다는 말을 남겼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훗날 그와 아내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자랐던 세 아들이 날마다 기차역에서 해가 지도록 엄마를 기다리다 울면서 돌아왔다는 말이었다(손진은, ‘우리 이웃, 김종원’, 보이스사, 2014, 254쪽 참조.).

평양을 탈출한 지 2주 만에 대구에 도착한 김종원은 육군제일병원(경북대학교 병원)을 찾아가 문관(文官)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2개월쯤 지나 길을 가다가 북한에 있을 때 함께 근무한 간호사를 우연히 만났다. 간호사는 자신이 근무하는 동산기독병원으로 김종원을 데리고 가 황용운 원장 서리를 만나게 해주었다.

평양 광성고보를 나온 황 원장 서리는 미국에서 10년간 유학한 의료계의 거목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안 그래도 이 큰 도시에 병원이 하나밖에 없어 밀리는 환자들을 제대로 진료조차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면서 아주 기뻐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동산기독병원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했다(‘선린병원 45년사’, 선린병원, 1999, 106쪽 참조). 김종원은 그렇게 해서 동산기독병원 소아과에서 아이들을 진료하게 되었다.

 

포항 선린의원(1960년).
포항 선린의원(1960년).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 초대 소장 맡아

6·25전쟁 때 폐허가 된 포항의 거리에는 전쟁고아와 홀로 된 산모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시설은 전무했다. 미 해병 비행단 33연대 군목실에서 근무하던 김성호 목사는 미 해병 군목에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지역을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던 중에 대구 동산병원 황용운 원장과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사로서 경동노회를 맡고 있던 라이언, 김종원 의사, 포항 북부교회 오근목 목사, 경주 제일교회 박내승 목사 등이 미 해병 군목실을 방문해 전쟁고아들을 무료로 진료할 병원 설립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전쟁고아와 산모들을 위한 병원을 포항에 우선적으로 건립하는 데 뜻을 같이하고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손진은, 위의 책, 121쪽 참조.).

이 무렵 김종원은 함께 피난 온 고모 가족을 만나러 포항에 왔다가 시내 우체국 뒤쪽에서 한 무리의 아이를 보게 되었다.

웅덩이 속에 쪼그려 있던 아이들을 보는 순간에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중략) 내 애가 저들이겠구나 생각하니 뭐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지요. 한참을 서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결심했지요. 이곳에 와서 저들을 고치고 도와줘야겠다고. 그런 결심을 하고 나니까 내가 소아과 전문의가 된 게 또 감사가 돼요. 그러니 결코 내가 신앙이 좋아서 자선을 하겠다거나 그런 뜻에서 결심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 ‘선린병원 45년사’, 선린병원, 1999, 108쪽.

그 길로 김종원은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의 초대 소장을 맡았고, 1953년 6월 5일 동빈동의 적산가옥 방 한 칸을 고쳐서 진료를 시작했다. 진료소가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박일천 포항시장, 미 해병대에 근무하고 있던 한흑구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종원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전쟁고아와 산모들을 돌보았고, 진료소는 문전성시를 이루다시피 했다. 한국 최초의 모자(母子) 보건 활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포항의 ‘할아버지’ 의사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의 운영은 포항에 주둔한 미 해병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1956년 미 해병이 철수하자 진료소는 방향 전환을 시도해야 했다. 일반 환자도 받으면서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선린의원을 개원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60년 6월 10일이었다.

선린의원으로 바뀐 후에도 김종원의 초심은 변함이 없었다. 전쟁고아와 산모, 그리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낮은 자세로 봉사한다는 신념으로 선린의원을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1962년 8월 선린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병원을 재단법인 소유로 못박았다. 병원의 사유화를 원천 차단한 것이다.

선린병원 소아과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서울에서도 선린병원 소아과를 찾을 정도로 김종원의 실력은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새벽 기도회에 갔다가 곧바로 출근했다. 아침 일찍 진료를 시작해 늦은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아이들을 마주했다. 하루에 무려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진료할 때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휴일이면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선린애육원을 비롯해 흥해애육원과 가톨릭애육원(성모자애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보살폈다. 그의 진료를 받은 수많은 고아와 아이는 물론 그의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이 김종원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포항의 할아버지 의사가 되었다.

진료실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어 일사병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많은 고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주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것이다.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모두 거부했고, 30년 된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사용하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집안 살림이든 병원 경영이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그 뜻에 따라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선린병원 협동원장 시절의 김종원.
선린병원 협동원장 시절의 김종원.

영결식 때 많은 고아가 눈물 흘려

김종원의 호는 인산(仁山)이다. 1960년대 말에 서영욱 동산의료원 원장이 선린병원에 들렀다가 신문지로 코피를 막고 진료하던 김종원을 보고는 ‘인술(仁術)의 큰산’이라 하여 지어준 것이다.

김종원의 삶에는 또 다른 상처가 있다. 피난 올 때 갓난아기였던 넷째 아들이 서울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하숙집에 머물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다. 아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그는 묵묵히 환자들을 보살폈다. 결국 아들이 숨을 거둔 후 장례식을 치르고 병원으로 돌아온 그의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

2007년 3월 김종원이 영면하자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하관식 때 그의 품에서 자란 많은 고아가 눈물을 흘렸다. 포탄의 웅덩이에서 놀던 고아들은 “예수님의 다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선린병원 원장 이임사에서 고백한 그였다.

김종원이 1953년 6월부터 출석한 포항 북부교회(현 기쁨의교회), 포항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설립한 선린대학교, 이사장을 맡은 선린애육원, 그리고 선린병원은 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포항 곳곳에 그의 영혼이 숨 쉬고 있고, 수많은 포항 사람의 가슴에 그의 이름 석 자가 남아 있다. 역사에서 받은 깊은 상처가 아름다운 무늬가 되는 것을 김종원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포항은 그 상처와 무늬를 잊을 수 없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제공 : 콘텐츠연구소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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