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18><br/>한흑구와 송도 ①
해방공간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1948년 가을, 서울 필동에 살던 한 가족이 짐을 꾸려 서울역으로 갔다. 열두 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동해변의 포항이었다. 서울 필동의 이층집은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살던 적산가옥으로 방이 여덟 개나 있었고 마당도 넓었다. 사고무친(四顧無親)한 그들에게 포항에는 마땅한 살림집조차 없었다. 임시변통으로 남의 집 아래채에서 살다가 집을 구하면 이사할 요량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지방에서 서울로 가게 마련인데, 이 가족은 왜 서울을 떠나 동해안의 변방으로 왔을까?
식솔을 데리고 포항으로 온 가장은 수필 「보리」로 유명한 한흑구(본명 한세광(韓世光), 1909∼1979)다. 포항의 정신과 문화예술을 얘기할 때 한흑구를 빠트릴 수 없다. 그는 20세기 한반도에서 살다 간 지성 중에 비슷한 유형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인물이다.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929년 20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5년 동안 머물며 영문학과 신문학을 공부했다. 그 후 평양으로 돌아와 광복 직후 월남했으며 미군정청에 있다가 포항에 와서 인생의 닻을 내렸다.
1909년 평양에서 출생 1929년 20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영문학·신문학 공부
아버지 한승곤, 105인 사건 연루 등 민족운동·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사 굵직한 발자취
수필가로 알려졌지만 전방위 문인… 시·소설·평론·번역 활동 美 흑인문학 국내 첫 소개
이효석·유치환·황순원 등 당대 대표 문인들과 친분…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아
1948년 가을, 해방공간 소용돌이 속 서울 필동서 12시간 기차 타고 포항으로 이사
은자(隱者)로 살아간 한흑구
한흑구는 수필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한 전방위 문인이다. 시와 수필, 소설, 평론, 영미 번역시를 발표했고, 특히 《동광(東光)》(1932년 2월호)에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를 발표하는 등 흑인문학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평양에 있을 때는 잡지 《대평양(大平壤)》과 《백광(白光)》의 창간에 참여하며 여러 편의 글을 실었다.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에서 활동했고 월남해서는 미군정의 통역관을 했으나 밀려드는 청탁을 피해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의 작품 등 미국 현대 시를 번역했다. 그는 이효석(李孝石, 1907∼1942), 유치환(柳致環, 1908∼1967), 김광주(金光洲, 1910∼1973, 소설가 김훈의 부친), 황순원(黃順元, 1915∼2000),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조지훈(趙芝薰, 1920∼1968)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한흑구는 파란만장한 역경을 거치고 포항에 왔지만 그의 삶과 문학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게 많다. 포항에 정착한 그가 바다와 술을 벗하며 은자(隱者)로 살아간 까닭이다.
겨레의 선각자였던 아버지 한승곤 목사
한흑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아버지 한승곤(韓承坤, 1881∼1947)을 알아야 한다. 선각자인 그는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한승곤은 평남 강서의 지주로 원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부흥회 때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평양신학교를 나와 고향의 많은 땅을 처분하고 평양에다 산정현(山亭峴)교회를 세워 초대 목사가 되었던 유명한 목회자였다(김용성, 『한국현대문학사 탐방』, 현암사, 1991, 282·283쪽).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1908년에는 한글맞춤법 교과서인 『국어철자첩경(國語綴字捷徑)』을 간행할 정도로 우리말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셩신츙만』이라는 성령론을 집필했다.
한승곤은 1916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외아들 한흑구가 일곱 살 때였다. 한흑구의 수필 「파인(巴人)과 최정희」에 “105인 사건 때 상해로 망명하셨던 아버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서”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볼 때, ‘105인 사건’의 여파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일제가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일이다. 평양의 기독교계 항일세력이 다수 검거된 이 사건은 한승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승곤은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의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했으며, 1919년에는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의 의사장(議事長)을 맡으며 흥사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흥사단 동지들과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3년간 옥살이를 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가 1937년 5월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운운’이라는 인쇄물을 산하 35개 지부에 발송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그해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관계자 181명이 체포된 사건이다. 한승곤은 1947년 작고했으며,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망명한 아버지를 따라 스무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의 영향을 깊게 받은 한흑구는 문학 소년으로 성장했다. 1925년에 고향의 문학 소년들과 ‘혜성(彗星)’ 문학 동인 활동을 했고, 1926년에는 《진생(眞生)》에 시를 발표했다. 또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시절이던 1928년에는 『동아일보』에 수필을 발표하는 등 문학 창작 활동을 했다(한명수, 「한흑구는 민족시인이다」, 《포항문학》 46호, 12∼13쪽). 중학생 시절에는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의 수필에서 “High thinking, plain living(고상한 이상, 평범한 생활)”이라는 구절을 접하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한흑구는 1929년 3월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검은 갈매기, 흑구(黑鷗)라는 필명은 일본 요코하마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 갑판에서 떠올린 것이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갑판에 올라, 갈매기가 다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배꼬리 쪽을 살펴보았더니, 웬일인지 검은색 갈매기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긴 나래를 펴고 쫓아오고 있었다. 그 검은 갈매기 한 마리는 하와이에 올 때까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그냥 한 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옛것을 버리고 새 대륙을 찾아서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
이런 구절을 일기에 쓰다가, 문득 나의 필명(筆名)으로 사용하기로 생각했다.
(중략)
나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여야 하는 갈매기와도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 한흑구, 「나의 필명의 유래」, 『인생산문』, 일지사, 1974, 125쪽.
1929년 2월 시카고에 도착한 한흑구는 영어를 익히기 위해 노스파크대학교(North Park Univ.) 부속고등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 후 1년 가까이 미국 전역과 캐나다를 여행했다. 그 후 노스파크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가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Temple Univ.)로 옮겨 신문학과를 수료했다. 흥사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1929년 5월 2일 교민단체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신한민보」와 흥사단 계열의 잡지 《동광》, 미국 유학생들의 잡지 《우라키(The Rocky)》에 시와 영미 번역시, 평론, 소설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다. 대부분의 작품 행간에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독립을 갈망하는 심정이 배어 있다.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문인
결핵성 후두염을 앓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1935년 귀국한 그는 소설가 전영택과 잡지 《대평양》과 《백광》의 창간에 참여하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여동생(덕희)의 소개로 1937년 4월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 전신) 음악과 출신의 방정분(邦貞分, 1913∼1989)과 결혼했으나 그해 6월 수양동우회 사건이 터지면서 아버지와 함께 구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한승곤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고, 한흑구는 기소 중지 처분을 받았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독립운동과 조선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의 핵심 인물인 안창호는 구속 후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지만 고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1938년 3월에 숨을 거두었다. 지도자를 잃은 흥사단은 심대한 타격을 입고 국내 활동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수양동우회의 핵심 인물로 조선 문단을 이끌었던 이광수는 일본에 전향하면서 ‘친일 문인’으로 낙인찍혔다.
수개월간 고초를 겪은 한흑구는 가산을 정리해 조상 삼대가 살던 평남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안말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서 과수원을 일구고 이따금 낚시를 하며 작품을 썼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고 예술가들이 친일 대열에 합류할 때였다. 당연히 한흑구에게도 일본에 협력하라는 압박과 회유가 이어졌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뒷날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한흑구를 일컬어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는 헌사를 바쳤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한동웅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