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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과 제산 사이로 새떼가 날아갈 무렵 가장 아름다운 산

등록일 2022-10-24 19:31 게재일 2022-10-25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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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

“어머니 같은 강”이라는 말이 있다. 한 지역에 강이 흐르면 대개 이런 표현을 붙인다. 포항에는 형산강이라는 큰 강이 흐른다. 형산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어머니 같은 강”이라는 표현이 무심결에 떠오른다. 망망한 동해가 아버지 같은 인상이라면 유장하게 흐르는 형산강은 어머니 같은 느낌이다.

포항과 경주가 만나는 곳에 형산과 제산이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강이 형산강이다. 형산강은 울산 울주군 두서면에서 발원해 경주의 대천, 남천, 건천 등을 지나 안강의 동쪽 경계를 흐르다가 북동 방향으로 크게 꺾어 포항을 관류해 영일만으로 흐른다. 울산과 경주, 포항 일대의 여러 산에서 발원한 지류들과 합류하여 영일만으로 흐르는 강이 형산강이다. 강의 길이는 63.3㎞로 국내에서 열 번째로 길며, 동해로 흐르는 강 중에 가장 크고 유역에 형성된 충적평야도 가장 넓다.

 

강의 길이는 63.3㎞로 국내에서 열 번째로 길며

동해로 흐르는 강 중 최대 충적평야도 가장 넓어

강의 아름다움에 소동파의 ‘적벽부’를 떠올리며

전국의 사진작가들 발길 이끄는 물새들의 낙원

강 하류에는 조선 대표 시장인 ‘부조장’이 형성

조선 3대 시장 강계장·원산장·마산장과 나란히

암각화 유적 등 선사시대 광범위한 문화권 형성

신라 천 년의 전설과 역사… 유교·동학 등 무대로

 

전설과 설화가 흐르는 강

형산강 옆으로 안강평야가 펼쳐져 있고,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온다. 신라 때 남천, 북천, 기계천의 물이 안강 일대에 모여 호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호수가 자주 범람해 주변의 피해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이 고충을 해결하려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인 태자 김충이 용이 되어서는 꼬리로 형제산을 내리쳐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그 사이로 안강 호수의 물이 강을 이뤄 영일만으로 흘러 들어가 형산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천여 년 전의 신라 때에도 치수가 얼마나 중요한 국정 과제였는지를 실감케 한다.

물이 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으니 강은 문화와 문명의 모태이자 서사의 보고(寶庫)가 된다. 그리하여 강은 사람들의 다사다난한 이야기를 품으며 예술과 사상을 아우르기 마련이다. 신라 천 년의 역사는 물론이고 경주 유교 문화의 본거지인 양동 마을의 형성, 동학의 태동, 포항의 성장도 형산강을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선사시대에도 형산강 주변에 광범위한 문화권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암각화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95년 2월 경주 내남면 상신리 마을 앞 큰 돌에서 암각화가 처음 발견되었고, 그해 3월에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앞 금장대에서도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신라의 건국 설화에도 형산강이 등장한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알에서 갓 태어났을 때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고 전하는 곳이 형산강의 지류인 알천이다.

 

동방의 적벽, 그리고 물새들의 낙원

포항의 진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진으로 형산의 정상에서 형산강과 제철소, 영일만 그리고 호미곶을 담아낸 장면을 빠트릴 수 없다. 포항의 맥이 흐르는 이 장면을 렌즈에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애써 형산에 오른다.

붉은 저녁노을이 번지는 형산과 제산 사이로 새떼가 날아갈 무렵, 햇살을 받아 윤슬이 반짝이는 강물 위로 물새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을 무렵의 형산강 하류는 참 아름답다. 500여 년 전 본관이 영일(迎日)이고 흥해 출신인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는 초가을 달밤 형산강에서 경주 부윤인 죽계(竹溪) 김존경(金存敬·1569~1631)과 배를 타고 가다 시상(詩想)에 잠겼다.

 

임술년 초가을 열엿샛날에

공(김존경)께서 형산강에 나들이 오셨네

형산강 드넓어 물결이 바다와 맞닿고

깊은 밤하늘은 맑아 달빛 배에 환하네

한줄기 구름 멀리 포구까지 뻗었고

몇 줄기 긴 피리 소리 아름다운 물가에 가득하네

동방의 적벽이 바로 여기니

소동파의 이름만 홀로 남을 필요 없으리

- 정극후 ‘형산강에 배를 띄우고 상공 김존경 좌하께 올리다(兄江泛舟奉呈金相公座下)’, 신상구 역

 

정극후는 소동파의 ‘적벽부’를 떠올리며 형산강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기나긴 세월이 흘러 세상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변했지만, 달빛이 환히 비치고 한줄기 구름이 멀리 포구까지 뻗어 있는 형산강은 변함이 없다.

형산강은 물새가 날아오는 곳이어서 더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친다. 아득한 옛적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물새가 날아왔을지 모른다. 지금도 형산강에 물새들이 날아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간혹 멸종 위기에 처한 물수리나 흰꼬리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가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다. 형산강에 날아오는 물새들의 이름은 일일이 거론하기도 벅차다. 댕기물떼새를 비롯해 흰뺨오리, 흰비오리, 홍머리오리, 쇠오리, 청둥오리 등등이 있다. 백로와 왜가리 같은 텃새들도 형산강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황어, 숭어, 은어 같은 물고기들이 형산강에 서식하고 있으며, 1970년대까지 섬진강 재첩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재첩이 하류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물수리의 물고기 사냥.
물수리의 물고기 사냥.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 그리고 사상의 무대

형산강 하류에는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인 부조장(扶助場)이 있었다. 부조장은 175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조선의 3대 시장인 강계장, 원산장, 마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큰 장터였다. 도로, 철도 같은 근대의 교통 인프라가 등장하기 전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중요한 교통로였고, 특히 형산강 하류는 영일만과 만나는 곳이라 큰 장터가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상인과 상선, 조랑말로 붐비던 부조장은 사라졌지만 과거의 번성을 입증해주는 유적은 남아 있다. ‘현감 조동훈 복시 선정비(縣監趙東勳復市善政碑)’와 ‘현감 남순원 선정비(縣監南順元善政碑)’가 그것이다. 강물은 유유히 흐르건만 세상은 과거의 흔적을 지우며 계속 변한다. 북새통을 이루던 부조장은 아련한 물그림자로만 남아 있다.

시인 신동엽은 ‘금강’을 노래하며 “예부터 이곳에 모여/썩는 곳,/망하고, 대신/정신을 남기는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 강은 “정신을 남기는 곳”이자 새로운 사상이 움트는 곳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형산강을 무대로 신라의 불교와 양동 마을의 유교 그리고 동학이 꽃을 피웠다. 신라 천 년의 문화 가운데 우리 사상의 첫새벽이라 할 수 있는 원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효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처절한 전쟁이 신라의 통일로 귀결된 7세기에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무애(無涯)를 설파했다. 그는 삼국 간의 처참한 전쟁을 지켜보면서 본디 서로가 하나임을 깨우치고 넉넉한 마음으로 화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해 일심을 내세웠고,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 방식이 화쟁과 무애인 것이다. 원효의 사상은 당대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에서 길어 올린 것이며, 지금 우리가 되새겨야 할 화두이기도 하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500여 년 동안 공존한 양동 마을은 회재 이언적의 사상이 무르익은 곳이다. 퇴계 이황의 스승이었던 회재는 조선 성리학의 기본 성격과 방향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에 이름을 올렸다. 회재는 사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시기에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했지만 결국 사화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동학의 배경이 된 형산강

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녹두빛 강물은 동학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은 그의 살림터인 포항 신광에서 수운 최제우가 머물던 경주 용담까지 걸어 다니며 동학을 배우고 익혔다. 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을 걸으며 동학의 뜻을 깊이 새긴 것이다. 1864년 1월 수운이 관군에 체포되는 순간에도 형산강에서 찬 바람이 몰아쳤다.

 

“수운은 경주 형산강변의 어떤 나무 밑에 얽매어 놓아두었는데 얼굴에는 전면이 피가 되어서 그 모양을 알 수 없으며…. 체포된 신사(수운 선생)는 사다리의 한복판에 얽어매어 두 다리는 사다리 양편 대목에 갈라서 나누어 얽고, 두 팔은 뒷짐을 지웠고, 상투는 뒤로 풀어 사다리 간목(間木)에 칭칭 감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게 했다고 하였다. (중략) 수운은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뼈를 에는 형산강의 찬 바람을 맞으며 묶여 있었다. 12월 10일(양 1864년 1월 18일)은 소한(小寒)의 절기여서 몹시 추웠다.”- 표영삼 ‘동학1-수운의 삶과 생각’, 통나무, 2004, 300쪽.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동학의 가르침은 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그 바람을 견디며 잉태했다. 그 가르침은 조선 후기 고난에 처한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닿아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불빛이 되었고, 지금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해 저무는 형산강 강가에 서서 붉은 노을이 번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로운 사상은 찬 바람 속을 걸어가며 그 바람의 뜻을 새기는 고독한 자의 가슴에 움트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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