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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만이 붉은 강물을 기억하리라

등록일 2022-11-02 18:58 게재일 2022-11-0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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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포항 &lt;14&gt;<br/>탑산과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탑산에 있는 전몰학도 충혼탑.
탑산에 있는 전몰학도 충혼탑.

한국전쟁 때 포항은 격전지였다. 물밀듯이 남하하던 북한군이 포항 시내를 통과해 형산강을 넘어가면 울산, 부산이 지척이었다. 형산강은 아군의 생명선이었기에 사력을 다해 지켜야 했다. 하늘에서는 미 전투기가 폭격을 가했고, 영일만에서는 군함이 함포 사격을 퍼부었으며, 육상에서는 군번도 계급도 없는 학도의용군까지 투입되었다. 북한군이 잠시 점령한 포항 시내는 폐허가 되었고, 형산강은 피로 물들어 ‘혈(血)산강’이라 불렸다.

한국전쟁사에서 포항 전투는 한 페이지를 선명하게 차지하고 있다.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이 치열하던 1950년 8∼9월에 포항지구에서 국군 제3사단과 경찰부대, 학도병, 민부대(민기식 부대), 미군 특수부대 등이 북한군 제5, 12사단과 766유격부대의 거센 공격을 저지한 것이 포항 전투의 개요다. 당시 포항의 중요성은 다음의 글이 잘 설명한다.

6·25전쟁 당시 경북 포항은 항만과 철도, 육로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일 뿐만 아니라, 포항 남쪽 6킬로미터 지점의 영일비행장은 미 제40전투비행대대가 주둔하면서 전쟁 기간 중 매일 평균 30∼40회 출격하여 공중폭격 등으로 지상부대 작전을 근접 항공 지원하였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 김정호 외, ‘포항 6·25’, 나루, 2020, 74쪽.

아군은 어떻게든 지켜야 했고, 적군은 어떻게든 빼앗아야 하는 전략적 거점이 포항이었다. 만약 포항이 적군에 넘어가면 낙동강 전선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전쟁의 판도가 기울어질 수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아군은 가용 전투력을 총동원해 포항을 지켜야 했다.

특히 영일비행장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을 양성하기 위해 1943년 9월에 설치한 것으로, 미 제40전투비행대대 P-51 전투기 20대가 1950년 7월 16일부터 임무를 수행했으며(《국방논집》 제8호, 1989년 8월, 139쪽, 김정호 외, 위의 책, 74쪽 참조), 월턴 워커 장군이 여기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북한군은 자신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미 공군력을 무력화하려고 영일비행장을 공략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한국전쟁 격전지였던 ‘포항’… 항만·철도·육로 교통수단 접근 쉬워 ‘포항지키기’에 전투력 총동원

곳곳서 치열한 전투로 학도의용군 등 많은 희생, 형산강은 피로 물들어 ‘혈(血)산강’이라 불리기도

탑산·수도산 덕수공원 등 희생자 추모 시설·조형물 다수 조성… 아픔으로 남은 희생자의 넋 기려

포항여중 등 포항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 벌어져

전선의 위중함은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까지 불러들였다. 1950년 8월 11일 새벽 4시 포항 시내로 진입하려는 북한군 제5사단과 766유격부대를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저지한 것이다.

북한군에 포위된 어린 학생들은 국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열한 시간 반을 버텼다. 학도의용군의 항전 덕분에 북한군의 포항 시내 진출이 지연되었고, 육군 제3사단과 지원부대, 포항 시민이 형산강 이남의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학도의용군 71명 중 김춘식 등 48명이 전사했고, 23명은 부상을 입거나 실종되었다.

포항여중뿐만 아니라 포항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포항 기계와 경주 안강 일대에서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하는 전투가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벌어졌다.

비학산에서 운제산까지 이어진 이 전투로 북한군 제12사단의 낙동강 전선 동부 지역 돌파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송라면 독석리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육군 제3사단을 구룡포로 철수하는 작전이 8월 10일에서 8월 17일까지 펼쳐졌고, 흥해 천마산에서는 육군 제3사단과 북한군 제5사단이 여섯 번이나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투가 8월 21일부터 8월 27일까지 전개되었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이 전투력을 총동원한 전투가 9월 5일부터 9월 18일까지 벌어졌다.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9월 14일 포항 북쪽의 영덕 장사리에서 전개된 상륙작전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것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포항여고 앞에 있는 포항여중 전투 학도의용군명비.
포항여고 앞에 있는 포항여중 전투 학도의용군명비.

탑산에 있는 두 개의 탑

포항 전투는 양측이 사활을 걸고 총력전을 펼쳤기에 피해도 컸고 희생자도 많았다. 포항 곳곳에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설과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포항 용흥동에 있는 탑산의 명칭도 한국전쟁 후에 세워진 탑에서 연유한다.

탑산의 원래 명칭은 죽림산(竹林山)이며, 산 아래에는 죽림사라는 고찰이 있다.

탑산 입구에 위치한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뒤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포항지구 6·25전적비’가 나타난다. 1980년 2월 21일 제막된 이 전적비의 전면에는 국군이 학도병의 어깨를 감싸는 청동상이 서 있고, 포항지구 방어의 주력부대인 국군 제3사단을 기념하는 금속 조형물이 있다.

‘포항지구 6·25전적비’의 서쪽을 바라보면 ‘전몰학도 충혼탑’이 있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산화한 학도의용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57년 8월 11일 제막되었다. 탑의 전면에는 청동으로 된 천마상 부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 부조물은 어린 영(靈)들이 이승에서 피워보지 못한 꿈을 천마를 타고 저승에서 마음껏 펼쳐 보라는 뜻에서 새겨 놓은 것이다.

‘포항지구 6·25전적비’와 ‘전몰학도 충혼탑’은 누가 보더라도 성격이 비슷하다.

그런데 불과 50미터 정도의 거리에 두 개의 조형물이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몰학도 충혼탑’은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냈으며 추상 조각의 선구자인 김종영(1915∼1982)의 작품이고, ‘포항지구 6·25전적비’는 김종영의 서울대 제자이자 구상 조각가로 명성을 떨친 백문기(1927∼2018)의 작품이다.

지역 미술가인 박경숙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 군에서 ‘전몰학도 충혼탑’이 추상적이어서 포항 전투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탑을 없애고 새로운 작품을 건립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때 구상 조각가인 백문기에게 작품을 의뢰하게 되었다. 백문기는 작품 제작을 수락했으나 은사의 작품을 허물 수는 없었기에 군 당국과 상의 끝에 새로운 부지에 ‘포항지구 6·25전적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포항지구 6·25전적비.
포항지구 6·25전적비.

어느 학도의용군의 가슴 뭉클한 편지

탑산 입구에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이 있다. 포항 출신으로 생존한 학도의용군들이 1979년 8월 탑산에 터를 잡고 학도의용군의 전적물 보존과 추념 행사 등을 해오다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마침 국방부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념관 건립비의 일부를 지원한 데 힘입어 2020년 9월 16일 개관하게 되었다.

기념관 전시실에는 학도의용군이 사용한 무기를 비롯해 사진, 노트, 연필, 안경, 교복 단추, 모표(帽標) 등 유물 200여 점이 전시되어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전시물 중 포항여중을 지키던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편지는 관람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상략)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략)

 

편지의 주인공은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천주님도 이 가여운 생명을 구하지 못한 것이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48명 중 10명만 신원이 확인되어 포항여중 앞에 가매장되었다가 1964년 4월 13일 국립현충원으로 봉송되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뒤의 화강암 속에 합동으로 안치되었다.

탑산 외에도 수도산 덕수공원에 포항 출신 군경들의 넋을 추모하는 충혼탑이 있다.

그리고 혈전이 벌어졌던 포항여고 정문 앞에도 ‘학도의용군 6·25전적비’와 ‘포항여중 전투 학도의용군명비’가 세워져 있다.

 

민간인 희생자도 다수 발생해

전투가 치열했던 흥해 도음산의 산림문화수련장에도 탑 하나가 세워져 있다. 탑의 명칭은 ‘한국전쟁 미군폭격사건 민간인희생자 위령탑’이다.

전쟁 중에 미군의 오폭으로 다수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2015년 8월 20일 제막된 탑이다.

포항 지역 미군폭격사건 유족회에 따르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미군 폭격과 함포 사격으로 포항 13개 마을에서 55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제 ‘혈산강’을 기억하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은 무상할 뿐이다. 말없이 흐르는 형산강만이 그 붉은 강물을 기억하리라.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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