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9> 동빈내항
형산강이 영일만으로 흘러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동해로 빠져나가고 그 주변에 여기저기서 모인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니 포항을 물의 도시라고 부를 만하다. 예부터 포항을 삼호오도(三湖五島)라 했는데, 세 개의 큰 호수인 아호(阿湖), 두호(斗湖), 환호(環湖)가 있어 삼호(三湖)라 했고, 형산강과 그 지류가 흐르며 다섯 개의 큰 삼각주가 만들어져 오도(五島)라 했다. 강과 바다에는 선박이 편히 드나들고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해 포항항(구항)과 포항제철소 안의 신항, 국제컨테이너 터미널인 영일만항이 차례차례 만들어졌다.
1962년 6월 개항장으로 지정·공포된 포항항은 청룡호, 동해호 같은 포항~울릉도를 오가는 선박은 물론 외국 선박도 드나드는 경북의 관문항이었다. 그 후 포항제철이 건립되면서 항만의 명칭과 역할이 바뀌었다. 즉 1968년 포항제철을 지원하는 항만이 건설되면서 이를 신항이라 불렀고, 기존의 포항항을 구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포항에서는 구항보다 동빈내항(東濱內港)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가로명(街路名)을 지으면서 동빈(東濱), 남빈(南濱)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포항 도심과 송도 사이에 있는 동빈내항은 아늑하고 안전한 항구다. 한 번이라도 동빈내항을 보게 되면 천혜의 항구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포항의 근대적 인프라는 일제 때 일부 조성
항구(현 동빈내항)도 그때 골격이 만들어져
울릉도 선박의 정박으로 여관과 식당 등 성황
울릉도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장소로 거듭나
1945년 설립 향도조선 모체로 동성조선 탄생
인근에는 철공소·공장·얼음공장 등 생겨나
도시화에 형산강 물길 매립… 주거지로 조성
물길이 막히며 수질 나빠지는 등 악순환으로
2012년부터 복원 시작해 현재의 포항운하로
1923년 폭풍우 직후 본격적인 포항항 건설 추진
포항의 근대적 인프라는 일제강점기 때 일부 조성되었는데, 항구(현 동빈내항)도 그때 골격이 만들어졌다. 당시 포항에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곳은 남빈과 동빈 일대의 형산강 하구였으나 형산강이 범람하면 토사가 가득 쌓여 배가 드나들 수 없었다. 경북도와 총독부에 포항의 고충을 호소해 1914년부터 1923년까지 항만 공사가 이루어졌으나 응급조치에 불과했고 근본적인 문제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1923년 4월 12일 기록적인 폭퐁우가 몰아친 것이 포항항을 항만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에 포항의 사상자가 2천 명에 달한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폭퐁우의 피해는 심각했다. ‘전무후무한 대참사’를 겪고 난 후에야 경북도와 총독부는 포항의 항만을 동해안의 항구로 완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물의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 돌리고, 물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포항항 도수제(導水堤) 축조 공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독립적인 형산강 치수 사무소가 개설되어 대형 개수(改修) 공사가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26년 9월 다이쇼(大正) 일왕의 3남인 노부히토(宣仁) 친왕(親王)을 태운 일본 제2함대가 30여 척의 호위를 받으며 포항항에 상륙하기도 했다(김진홍 엮음,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 글항아리, 99∼103쪽, 115∼117쪽 참조).
당시 일본 당국은 포항항 건설을 대단한 치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항만 공사를 하면서 흥해읍성을 허물어 매립용 돌을 확보하는 몰염치한 행동을 저질렀다. 항만 공사도 결국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면서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다.
울릉도 사람들의 사연이 많은 곳
항구는 사연이 많은 곳이다. 동빈내항에도 수많은 사람의 사연이 무늬져 있다. 배를 타고 떠나는 사람,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이야기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항구가 번성하고 쇠락하는 과정에서의 갖가지 이야기도 항구에 아로새겨져 있다.
동빈내항에는 울릉도 사람들의 애환이 많다. 울릉도를 오가는 선박이 동빈내항에 정박했기에 울릉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여관과 식당, 가게가 많았다. 특히 울릉도 선착장 건너편의 여관들은 울릉도 사람들로 넘쳐났는데, 그중 대궁장모텔은 울릉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파도가 높아 울릉도 가는 배가 안 뜨면 울릉도 사람들은 몇 날 며칠 여기서 죽칠 수밖에 없었다. 동빈큰다리 인근의 울릉수퍼는 50년 세월 한자리를 지키다가 최근에야 다른 업종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울릉도 인구는 3만 명이 넘었다. 지금보다 세 배나 많은 사람이 울릉도에서 살았다. 울릉도의 경기가 좋으면 포항의 죽도어시장과 동빈내항의 경기도 좋았다. 울릉도의 전성기는 동빈내항의 전성시대였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동빈내항의 여객선터미널은 오래되고 비좁아 새 터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포항항만청 옆으로 여객선터미널이 이전하면서 동빈내항의 활기는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조선소와 철공소 등 즐비해
동빈내항에서 이따금 깡깡깡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동성조선이라는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하거나 수리할 때 나오는 소리다. 이 회사는 1945년에 설립된 향도조선(向島造船)이 모체로 1995년에 동성조선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10∼1915년 사이에 일본 사람이 포항에서 조선소를 시작했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철수하게 되자 그곳에서 목선(木船)을 건조하던 대목장(大木匠) 김춘생이 인수한 것이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동성조선은 꽁치·오징어 채낚기선과 연근해 각종 어선을 비롯해 여객선, 화물선, 예인선, 바지선 등을 건조하고 있으며, 중소형 조선소로서는 전국에서 이름이 꽤 높다. 특히 1960년대까지 50톤 미만의 목선이던 동해안의 꽁치·오징어 채낚기선이 1970년대 접어들어 100톤 이상의 강선(鋼船, 철선이라고도 부름)으로 바뀔 때 동성조선이 절반 이상을 건조했다. 주목할 것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목포에서 선박 주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동해는 파도가 높아서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보장하려면 선박을 튼실하게 만들어야 하며 이것은 동성조선의 변함없는 원칙이다. 하지만 목포 연근해는 동해만큼 파도가 거칠지 않기에 목포 쪽 조선소의 선박 건조 과정이 조금 느슨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목포의 한 선주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배를 튼실하게 만드는 조선소를 수소문했고 포항의 동성조선을 알게 되어 주문하게 되었다.
선박이 있으면 선박을 수리하고 부품을 조달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동빈내항 인근에는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하는 철공소와 작은 공장이 즐비하고, 선박에 필요한 얼음을 만드는 냉동공장도 있다. 통통 소리를 내며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 출어를 기다리며 어구와 어망을 손보는 어민,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 등이 철공소 등과 어우러지며 동빈내항의 풍경을 빚어낸다. 태풍 소식이 들리면 구룡포의 선박은 물론 멀리 울릉도의 선박도 동빈내항으로 몰려오는데, 선박으로 가득 차 있는 동빈내항은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룬다.
최근에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커피숍, 식당 등이 점점이 들어서며 동빈내항의 풍경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다. 1970년대까지 황포 돛단배가 다니던 곳에 요트가 물살을 가르고 있는 것도 동빈내항의 변화된 모습이다. 동빈내항이 변화해온 풍경은 포항 화가들의 그림과 사진작가들의 사진에 남아 있다.
매립된 하천을 복원해 만든 포항운하
동빈내항과 형산강 사이에 포항운하가 있다. 원래 형산강의 물길이었으나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매립을 거쳐 주거지가 되었다. 흐름이 끊긴 강을 강이라 할 수 있을까. 형산강에서 동빈내항으로 흐르는 물길이 막히면서 동빈내항의 수질이 나빠지고 동빈내항과 인근 도심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주거지를 철거하고 1.3㎞에 이르는 물길을 복원하는 공사가 2012년 5월에 착공해 2014년 1월에 준공했다. 주택과 건물 480동이 철거되고 2천225명이 이주했다. 운하가 만들어지면서 형산강과 동빈내항 사이의 물길이 되살아났고, 동빈내항의 수질도 개선되었다. 또한 운하 주변으로 다양한 스틸아트 작품들이 배치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되살아난 물길 위로 크고 작은 유람선이 다닌다. 유람선은 포항운하에서 출발해 동빈내항과 송도해수욕장을 돌아온다. 유람선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빈내항과 영일만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포항에서 누릴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이다. 동빈내항에 유람선이 지나갈 때 갈매기들이 떼 지어 따라다니는 장면은 포항의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동빈내항과 포항운하는 과거에 어린아이들이 헤엄치며 놀던 맑은 강이었다. 이 물길이 점차 살아나고 주변이 가꿔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밖에도 포항 도심에는 칠성천, 양학천, 학산천, 두호천 같은 하천이 있었으나 도시화 과정에서 오염된 후 복개되고 말았다. 최근 이 하천들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선 학산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물의 도시 포항은 물길이 살아야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음을 동빈내항과 포항운하를 걸으며 느낄 수 있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