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15><br/>기청산식물원
50년 넘게 가꿔온 독특한 빛깔의 민간 식물원이 포항에 있다. 청하면에 자리한 기청산식물원이 바로 그곳이다. 1969년부터 조성된 기청산식물원은 현재 9헥타르(2만7천여 평)에 2천5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을 품고 있다. 자생화원을 비롯해 아열대식물원, 수생식물원, 해변식물원, 약용식물원 등이 펼쳐져 있으며, 섬개야광나무 같은 울릉도 자생식물과 경상도에서 자생하는 멸종위기 식물도 보전하고 있다. 포항종합제철 기공식이 열린 때가 1967년 10월 3일. 우리나라 산업화의 대역사가 영일만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낙동정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조용한 청하면에서는 우리 꽃 우리 나무를 품은 식물원의 꿈이 커가고 있었다.
기청산식물원에 들어서는 순간 여느 식물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알록달록한 원색의 꽃이나 이색적인 모양의 나무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목련과 산수유, 풍향수, 조릿대가 눈에 띄고 그 사이에 오래된 나무 의자와 평상이 놓여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하면서도 닿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과 돌확에 샘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방문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청하면 2만7천여평 규모 2천500여종 서식
아열대·수생식물원 등 멸종 위기종도 보전
포항지역 자생종 메타세쿼이아·낙우송 등
새들 지저귀는 꽃과 나무 사이 거닐며 힐링
‘연아송’의 유래
매표소를 지나면 고사리 같은 양치식물이 나란히 피어 있고, 돌토끼고사리 옆에 활처럼 크게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연아송’이라는 별칭의 이 나무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식물원 수입원 중 하나가 나무를 파는 것인데, 크고 잘생긴 소나무는 인기가 좋았지만 이 나무는 외면당했다. 김연아가 한참 유명세를 탈 무렵, 식물원 원장이 이 나무를 바라보는데 문득 김연아의 포즈가 생각났다. 그 순간 이 나무에 ‘연아송’이란 이름을 붙였고, 그 후로 관람객의 사랑을 받는 나무가 되었다. 나무 안내판에는 “굽은 솔이 선산을 지키고, 눈먼 자식이 효자 노릇한다”고 적혀 있다.
이처럼 기청산식물원에는 다른 식물원에서는 들을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풍성하다. 식물원을 둘러보는 데 한 시간 반가량 걸리는데, 꽃과 나무의 사연을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메타세쿼이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메타세쿼이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외래종일 것 같지만 60만∼100만 년 전부터 포항에서 자란 자생종이다. 그 증거로 포항에서 발견된 메타세쿼이아 화석을 기청산식물원이 보관하고 있고 그 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귀 조경이 최고의 조경
식물원 한가운데 벤치 하나가 놓여 있다. 세 사람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나무 벤치다. 식물원을 걷다 보면 여기에 앉아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싶어진다. 벤치 뒤편에 키 큰 나무들이 나란히 서 있는데, 참느릅나무다. 식물원에는 이 나무가 유난히 많다. 참느릅나무와 그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식물원에서 누릴 수 있는 색다른 재미다.
참느릅나무는 그 자체로 좋은 수종이다. 여름에 노란 꽃이 피면 벌들이 모여들고, 가을에 단풍이 들면 깊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집 서북 방향에 심으면 복이 온다고 하고, 종양을 다스리는 약재의 효능도 있다. 식물원에 이 나무를 많이 심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 더해 꾀꼬리를 불러모아 그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뿌리가 깊은 참느릅나무는 웬만한 태풍에도 끄떡없어 새 둥지가 안전할 뿐만 아니라 꾀꼬리가 좋아하는 곤충이 많다. 이 나무 덕분에 식물원에는 5월부터 9월까지 노란색 철새들의 청아한 합창이 끊이지 않는다.
귀 조경은 기청산식물원 이삼우 원장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눈으로 보는 조경은 얼마 못 가고, 귀로 들은 조경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최고의 조경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자연에 가까운 조경일수록 좋은 조경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기청산식물원에는 시각을 자극하는 식물이나 인공적인 시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 친화적이라기보다 자연 그 자체에 가깝다. 사람은 보여도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는 스스로 말을 자제하게 된다. 식물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영롱한 새 울음소리가 이따금 들릴 뿐이다. 식물원을 걷다 보면 관람자도 어느새 한 송이 꽃이나 한 그루 나무가 된다.
낙우송을 살려낸 사연
식물원을 대표하는 왕나무(King Tree)가 있다. 낙우송(落羽松)이 그 주인공이다. 높이가 20미터 정도 되는 늠름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왕나무라는 별칭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다. 뿌리가 숨을 쉬기 위해 땅 위로 솟아오른 독특한 모습, 일명 호흡근도 신비감을 더해준다. 이 나무는 50여 년 전 이삼우 원장이 모교인 서울대 농대의 연습림에서 씨앗을 받아 키웠다. 이 원장은 이 나무를 지키기 위해 큰돈을 들였다. 어느 겨울날 아침 이 원장이 무심코 식물원 산책을 나왔는데 식물원 가까이에서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낙우송을 훼손하려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낙우송이 서 있던 자리는 식물원 터가 아니어서 인부들이 낙우송을 훼손하더라도 이 원장은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낙우송을 지키려면 낙우송이 서 있는 땅을 매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땅 주인과 상의 끝에 꽤 큰돈을 치르고 땅을 사들여 낙우송을 살려낸 것이다.
용연지(龍淵池)라는 연못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진흙을 이겨 조성한 생태 연못으로, 참개구리, 잠자리, 도룡뇽 등 수많은 생명이 보금자리를 틀며, 수련, 창포, 붓꽃, 어리연꽃 등도 철 따라 어여쁜 꽃을 피운다. 용연지 관찰 데크는 식물원에서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잠시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고, 명당이 어떤 곳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식물원의 마지막 코스는 오두막에서 따듯한 감태나무잎 차를 음미하는 것이다. 찻집에 주인은 따로 없다. 방문객 스스로 장작에 불을 피우고 무쇠솥에 물을 데워서 차를 마셔야 한다. 조용한 오두막에 앉아 새 울음소리 들으며 그윽한 차를 마시는 운치를 어디서 또 누릴 수 있을까.
참세상을 이루고 싶은 소망
이런 식물원을 가꿔온 사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삼우 원장은 몇 토막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평범한 사람 같지 않다. 1964년 경북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농대 임학과에 입학했고, 학업을 마친 후 곧장 귀향해 농부의 길을 걸었다. 소년 시절부터 농사짓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농사도 잘하면 보람 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산업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을 때 학벌 좋은 청년의 이러한 선택을 누가 선뜻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 원장은 ‘객기가 발동한 것’이라 하지만, 반세기 넘게 한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을 보면 남다른 용기와 항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이 원장은 귀향 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농사를 겸하다가 청하중학교 재단 농장 관리인으로 부임해 과수 농업을 하면서 기청산농원을 설립했다. 그리고는 식물 사대주의에 빠진 조경계에 환멸을 느껴 우리식 조경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데 주력했고, 그 후로 지극히 자연스럽고 한국적이며 사람에게 널리 유익한 식물원으로 방향을 잡았다.
기청산식물원이란 이름에는 이 원장의 꿈이 아로새겨져 있다. 청산 앞에 농기구인 ‘키’를 뜻하는 ‘기(箕)’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식물 세계를 키질해 쭉정이는 버리고 알짜만 모아 청산을 이룬다는 의지와 좋은 식물과 사람이 모여 참세상을 이루고 싶은 소망을 담은 것이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식물원 살림살이
식물원에서는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 포항의 첫 번째 천연기념물이자 세계적인 희귀수인 모감주나무의 가치를 널리 알린 것도 이 원장의 공이다. 포항의 산과 바닷가에 있는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황금빛 잎이 피는 7월에 장관을 이루며 포항을 상징하는 풍경이 되었다. 이처럼 식물원은 우리 고유의 자생식물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것은 물론, 무궁화 축제 같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를 확산하는 데 힘써왔다. 2004년에는 경상도에서 최초이자 민간 식물원으로는 두 번째로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돼 섬개야광나무 등 멸종위기 및 보호 야생식물 10종의 인공 증식과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식물원은 언덕이 없고 평지로 조성돼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다. 새들이 지저귀는 꽃과 나무 사이를 거닐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사람들의 발걸음도 이어진다. 하지만 식물원의 살림살이는 어렵다. 세태는 자연과 멀어지고 유료인 민간 식물원을 찾는 발길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기러기 떼가 비행하는 날, 그 울음소리도 들리는 곳이 기청산식물원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어보고 싶은 날에는 우리 꽃과 나무로 이상향을 이루고자 하는 그 식물원에 가볼 일이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