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5> 장기
장기(長鬐)는 포항 해변에서 가장 남쪽에 있다. 위로는 구룡포가 있고 아래로는 경주 감포가 있다. 호미곶, 구룡포, 장기는 국토에서 호랑이 꼬리의 바깥쪽을 이루어 호미반도라 부르며, 과거에는 이를 통틀어 장기라 했다. 조선시대 후기의 지도를 보면 포항은 장기를 비롯해 흥해, 청하, 연일 4개 군으로 되어 있다. 장기는 그만큼 유서 깊은 지역이다. 파도를 타고 밀려오는 외적의 침입이 잦아 성(城)을 쌓아야 했고, 한양과는 너무 멀어 유배지가 되었다. 성(城)과 유배는 장기를 이해하는 열쇠 말이다.
장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장기읍성이다. 이곳에 서면 넓은 들판과 쪽빛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성은 역사가 길고도 깊다. 1011년(고려 현종2)에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 토성으로 쌓았다가 1439년(조선 세종21)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았다. 장기의 진산인 해발 252m의 동악산에서 해안 쪽으로 뻗은 지맥 정상(해발 100m)의 평탄면에 위치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등의 문헌에 따르면 둘레가 2980척(약 903m), 높이는 10척(약 3m), 우물이 네 곳, 못이 두 곳 있었다.
국토의 호랑이 꼬리 바깥 호미곶·구룡포·장기
호미반도라 부르며, 과거엔 통틀어 장기라 했다
장기읍성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가히 절색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 10경 중 하나로 꼽았으며
유배됐던 다산 정약용도 벅찬 감회 시로 남겨
한양에서 860리 떨어진 척박한 ‘유배의 땅’
조선조 500년 동안 220여 명이 유배를 왔다
이들은 지역에 높은 수준의 학문을 전했고,
그 후손이 자리를 잡으며 인재의 고장됐다
유배객 중 가장 이름이 높은 사람은 우암·다산
우암 ‘주자대전차의’ 완성 등 학문에 힘썼으며
다산은 백성의 삶 살피며 150여 편의 시를 남겨
조선 최고의 장기 일출
장기읍성은 동, 서, 북쪽 방향의 성문 세 개와 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甕城)이 있다. 동문에는 조해루(朝海樓)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성곽 위에 배일대(拜日臺)라는 작은 바위만 남아 있다. 장기읍성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가히 절색이다. 육당(六堂) 최남선이 장기 일출을 조선 10경 중 하나로 꼽았고, 장기에 유배되었던 다산(茶山) 정약용도 벅찬 감회를 시로 남겼다.
포항의 흥해, 청하, 연일, 기계 등 곳곳에는 옛 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성의 성격과 구조는 각각 다른데, 장기읍성처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기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구룡포 병포3리에 있는 구룡성도 장기읍성과 같은 목적으로 쌓았다. 구룡성은 고려시대에 왜적을 막기 위해 수군 기지로 사용하다가 고려 말에 폐지되었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포항과 경주의 경계에 있는 북형산성(北兄山城)은 673년(신라 문무왕13)에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대규모 성으로, 경주가 지척에 있기에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했다. 장기읍성과 구룡성, 북형산성은 포항이 과거부터 군사 요충지였음을 입증한다.
군사용으로 조성된 장기숲
장기를 얘기할 때 숲을 빼놓을 수 없다. 장기숲은 기계숲, 덕동숲과 더불어 포항에서 가장 유명한 숲이었다. 1833년에 발간된 ‘경상도읍지’에 장기숲의 길이는 7리(약 2.8㎞), 너비는 1리(약 393m), 면적은 19㏊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왜 이렇게 큰 규모의 숲이 있었던 것일까?
느릅나무, 느티나무는 물론 탱자나무, 가시나무 등을 빽빽이 심어서 울타리를 삼았다는 ‘경상도읍지’의 기록을 볼 때 이 숲은 장기읍성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용이었을 것이다. 숲에 들어가면 하늘이 안 보이고 길을 잃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했다는 얘기가 지금도 전한다. 하지만 숲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중학교가 들어서고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경작지로 개간된 것이다. 장기중학교 교정의 몇 그루 고목이 숲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제2차 예송의 여파로 유배객이 된 우암
구룡포에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장기에 가서 인재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구룡포는 한때 바다에서 버는 돈으로 흥청거렸으니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이해되지만, 장기에서 인재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한양에서 860리(약 338㎞) 떨어진 장기는 유배의 땅이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에 따르면 조선조 500년 동안 장기에 220여 명이 유배를 왔다. 유배 온 이들이 높은 수준의 학문을 전했고, 그들의 후손이 장기에 자리를 잡으면서 장기는 인재의 고장이 되었다. 실제로 장기는 마을 규모에 비해 학자와 고위 관료 출신이 많은 편이다. 사람이 살기에 척박한 유배지가 인재의 고장이 된 역설이 일어난 것이다.
유배객 중 가장 이름이 높은 사람은 우암(尤庵)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그를 떠나 조선을 얘기하기란 어렵다. 그런 그가 장기로 유배를 오게 된 것은 1674년의 제2차 예송(禮訟) 때문이다. 효종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별세하면서 효종의 새어머니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충돌한 것이다. 이 논쟁은 학술 논쟁인 동시에 정치 투쟁이었다. 결국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면서 서인은 실각하고 서인을 이끌던 우암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어 1675년(숙종1) 정월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6월 장기로 이배(移配)되었다. 그의 나이 69세 때였다. 우암은 1679년(숙종5) 4월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3년 10개월 동안 장기에 머물렀다.
우암은 장기에서도 학문에 힘써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난해한 구절을 뽑아 주석을 붙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완성했고, 조선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이정전서(二程全書)’의 글을 유형별로 편집해 ‘정서분류(程書分類)’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몽주신도비’ 등 300여 편의 시와 글을 지었다. 연일에 유배 왔던 이유(李瑜, 1691∼1736)가 쓴 ‘우암 선생 장기적거실기(長鬐謫居實記)’(1725)에서 스스로 근신하고자 하는 유배자 우암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28년 후인 1707년(숙종33)에 장기에 있던 그의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죽림서원을 세웠다. 장기에서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죽림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뜯기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백성의 삶을 지극히 보살핀 다산
다산이 장기에 유배 온 것은 1801년(순조1) 3월, 다산을 총애하던 정조가 사망한 이듬해였다. 천주교인 300여 명이 희생된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은 순교했고, 다산과 둘째 형 손암(巽菴) 약전은 유배객의 신세로 전락했다. 영·정조 때의 르네상스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피비린내 나는 옥사가 일어나면서 다산 형제의 운명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다.
다산이 장기에 머무른 기간은 220일, 그렇게 긴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난의 시기에 다산은 백성의 삶을 찬찬히 살펴 그 실상을 150여 편의 시로 남겼다. 왕의 인정을 받던 유능한 학자가 참혹한 국문을 당하고 유배객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는 결코 꺾이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백성의 삶을 살피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걱정했다. 다산은 농사와 고기잡이로 살아가는 장기 사람들의 삶과 노동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관리의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실학의 대가는 문학적 묘사에서도 탁월했다.
兒哥身不着一絲兒 실오라기 몸에 하나 안 걸친 아가가
出沒鹺海如淸池 맑은 연못 들락거리듯 짠 바다를 들락이네
尻高首下驀入水 꽁무니 들고 머리 처박고 곧장 물로 들어가서
花鴨依然戲漣漪 오리처럼 자연스럽게 잔물결을 타고 가네
洄文徐合人不見 소용돌이 무늬도 흔적 없고 사람도 안 보이고
一壺汎汎行水面 박 한 통만 두둥실 수면에 떴더니만
忽擧頭出如水鼠 홀연히 물쥐같이 머리통을 내밀고서
劃然一嘯身隨轉 휘파람 한 번 부니 몸이 따라 솟구치네
- ‘아가 노래(兒哥詞)’부분, 신상구 역
다산은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고단한 삶을 개선하는 데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한 예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간단한 치료법을 정리한 ‘촌병혹치(村病或治)’를 저술했다. 고기가 많이 잡히면 칡넝쿨 그물이 터져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잦았는데, 소나무 껍질을 우린 물에 명주실과 무명실을 담갔다가 말려서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자 문제가 개선되고 어획량이 크게 늘었다. 그는 이렇듯 유배지에서도 백성의 삶을 지극히 살피는 진정한 실학자의 길을 걸었다.
다산은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1801년 10월 20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또다시 국문을 당했다. 다산의 반대파인 홍낙안 등이 다산과 그의 둘째 형 손암을 죽음으로 내몰고자 황사영 백서에 그들을 엮은 것이다. 음모는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목숨을 건진 다산은 강진으로, 손암은 흑산도로 이배되었다. 진정 나라를 걱정한 대학자를 내버린 나라가 온전할 리 있을까. 조선의 국운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가 말해준다.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이 심은 것으로 전하는 은행나무가 있고, 그 곁에는 다산의 사적비가 있다. 한 그루 고목과 비석 하나가 역사 속의 쓰라린 운명을 침묵으로 말해줄 뿐이다. 그 주인공들이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장기의 청옥빛 바다는 오늘도 변함이 없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