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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여강고성과 인상여강 5 <끝>

여강에 도착했을 때 가이드는 여강에서 놓쳐서는 안 될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가 옥룡설산, 둘째 여강고성, 셋째가 인상여강이란다. 우리 일행은 고성의 동북쪽 상산(象山) 밑 `흑룡담`을 여강고성 관광의 출발지로 삼았다. 그곳에서 물이 흘러가는 고성 방향으로 돌길을 밟으며 느긋하게 걸었다. 길 곁 수로를 따라 풍부한 수량의 물이 끊임없이 흐른다. `세계문화유산 여강고성 강택민`이란 글씨가 있는 물레방아 앞에 멈췄다. 여강고성의 역사적 배경은 송나라 말기, 원나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적한 산골 마을이나 진배없는 여강고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96년 대지진 때였다. 목조 건축물이 많은 고성의 특성상 큰 피해를 보았음에도 파손된 부분을 재건축하였다. 장쩌민(姜澤民)이 격려차 방문하여 `관광지로 개발하라`는 말 이후 여강고성은 1997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고, 세계 100대 관광지 중의 한 곳으로 알려졌다. 사실 여강고성의 가치는 고건축뿐만 아니라 명, 청시기에 운남의 서상반납에서 생산된 보이차를 티벳까지 나르는 상업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여강 고성의 사방가는 당시 상인들이 모여서 거래하던 장소다.3.8평방킬로미터에 해당하는 여강 고성을 짧은 일정으로 다 둘러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행들과 물줄기를 따라 남쪽 사방가까지 걸으며 수로 옆의 카페를 기웃거려본다. 대낮이라 홍등에 불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종업원들의 손발이 바쁘다.사방가에서 고성의 지붕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만고루(萬高樓)` 전망대에 올랐다. 네모반듯한 직사각형 지붕들이 마치 수평을 이루고 있는 풍경이다. 전봇대도 눈에 띄지 않는다. 폴짝폴짝 까치발로 지붕을 밟고 건너뛰면 순간적으로 저쪽까지 갈 것 같은 기분이다.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올 때 특이한 주사위가 눈에 띄었다. 6면체의 표면에 중국어와 동파문자로 재미있게 써 놓은 주사위다. 경주의 안압지관에 전시된 `주령구`처럼 주사위 표면의 글자에 따라 행동을 하게 되어 있는 주사위다. 어떤 것을 부부지간에, 어떤 것은 노래방에서, 어떤 것은 술집에서 쓸 수 있도록 그 내용도 다양했다. 예를 든다면 창일수(唱一首, 노래 한곡 부르기), 세의(洗衣, 옷 세탁하기), 완세(碗洗, 접시 닦기) 등의 내용에서 뽀뽀하기, 엉덩이 한번 만지기 등의 음란 시리즈까지 있다.나는 오래 전 언론을 통해 들은 구족서예가 `화지강(和志剛)`씨의 가게를 들러보기로 하였다. 화지강 씨는 손발 없는 나시족 장애인인데 입으로 글씨를 썩 잘 쓰기에 인간승리의 대명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글씨를 받고 있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가 작업하는 장면 사진 몇 컷으로 대신해야 했다.사방가에서 천천히 원형으로 걸어본다. 그러면서 바닥을 본다. 오랜 세월 이곳을 디딘 마방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순간 나의 머리 저쪽에서 별똥처럼 떨어진다. 말들의 걸음 저 앞으로 무한 감동이며 슬픔인 설산이 성큼성큼 걷는 말들 앞에 펼쳐진다.장예모 감독의 `인상여강`이다. 인상여강은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매머드 급 공연이다.나시족 600여 명이 등장한다. 하루 2회 공연하는데 성수기에는 공연 횟수를 늘려 4회까지 공연한다. 무대에 출연하는 배우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연극 수업을 받은 일도 없다. 그저 공연장 주변에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다. 파격적인 무대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무대다.공연장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강렬한 태양이 빛난다. 지정된 좌석은 없다. 그냥 빈 자리에 앉으면 된다. 붉은 수수 빛깔의 무대가 옥룡설산 앞으로 펼쳐진다. 산을 오르는 지그재그의 비탈길이 무대고, 그 비탈길 앞에 있는 넓은 공터가 무대다. 드디어 공연은 시작됐다.무대 오른쪽 대형 모니터에서 공연에 따른 안내가 진행된다. 자외선 강한 햇살이 등 뒤에서 목살을 꼭꼭 찌른다. 변화무쌍한 날씨다. 하얗게 속살을 보이던 옥룡설산에 구름이 낀다. 햇살 뒤로 눈발이 날린다. 예측하기 어려운 변덕 날씨다. 해발고도가 높기 때문이다.제1부 마방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차마고도로 떠나야 하는 사내들의 역동적인 춤이 앞무대에서 진행된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치며 자신들의 운명을 알린다. 설산을 넘어야 하는 말들의 말발굽 소리. 다닥다닥! 히히히 이랴! 붉은 비탈길을 말들이 달리며 올라간다. 앞쪽에서만 펼쳐지는 공연이 아니다. 어느 순간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뒤쪽에서 배우는 등장하고 관객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검은 티에 흰 바지, 야크의 흰 털옷을 걸진 사내들의 춤사위가 붉은 황토와 대비되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공연에 빨려 들어간다.제2부에서 펼쳐지는 술판. 도박. 사내들은 옥룡설산을 넘어 먼, 먼 곳까지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떠날 때 `인생이 무엇인가?` 한없는 회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덧없음, 자포자기, 그러다가 다시 생존의 본능을 깨닫게 되는 술판!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몽롱함을 가져다주는 술. 그 힘을 술에서 그들은 찾지 않았을까? 마신 술에 취해 길바닥에 갈지(之) 자로 누워버린 사내들. 술에 취한 지아비를 찾는 여자들. 여자들이 붉은 황토의 비탈길을 오른다.제3부 미련과 믿음, 인간의 한계는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이루지 못하는 현실을 훌쩍 뛰어넘어 완전한 사랑을 이루게 하는 곳, 그곳은 그들에게 옥룡설산 속의 신비한 유토피아가 아닐까. 그들이 생각한 그곳은 `옥룡삼국`이란 천당이다. 그곳 사람들이 이상향으로 여기는 옥룡삼국.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연인, 그들을 배웅하는 사람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옥룡삼국이 제 3부에서 슬프게 펼쳐진다.제4부는 소수민족의 노래가 이어진다. 10개 소수민족들이 자신의 의상의 입고 무반주로 `타도`란 민요를 부른다. 제일 뒤쪽 옥룡설산 앞 무대에 우뚝 선 사내들의 의젓함도 노래의 배경이 된다.제5부는 북춤으로 펼치는 제사다. 사방에서 북을 들고 등장하는 배우들, 어느 순간 내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북춤은 펼쳐진다. 북춤 사이 축문을 낭송한다. “우리들의 능력은 우리 마을을 관통하는 장강의 물을 다 마실 수 있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옥룡설산이 지켜줄 것이며…” 정신을 쏙 빼 놓은 주변의 북춤이 북소리와 어울려 절정을 이룬다.제6부는 옥룡설산을 향해 올리는 기도다. 특히 이 장면은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도 배우들과 함께 일어나 기도를 드리게 되는데 무병장수와 행복을 옥룡설산을 통해 기원하는 내용으로 대미를 장식한다.전통에 따르며 촌스럽게(?) 살던 나시족들의 생활 모습이 `인상여강`으로 새롭게 변모되었다고 한다. `인상여강` 자체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게 되었으며, 배우들은 한 달에 우리 돈으로 60여만 원의 출연료를 받는다고 한다. `인상여강` 공연은 이곳 문화의 새로운 패턴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 여러 곳의 많은 사람들이 장예모 감독의 `인상여강` 쇼를 보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고 하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내 자신이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으니 그것은 확실하다.백문이 불여일견!

2011-06-17

상그릴라를 찾아서 4

우리가 찾은 장족 민가는 그들의 전통가옥을 제대로 보여주는 집이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나무와 흙으로 지은 3층 집이 보인다. 1층은 소, 돼지, 닭 등의 동물들이 사는 우리다. 2층이 살림하는 주거 공간이다. 집 짓는데 꽤나 정성을 들인 것 같다. 1층 동물 우리를 들여다보니 아무 것도 없다. 분명 짐승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천장에 굵은 나무들이 2층을 받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길 주변에서 만난 돼지와 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 뜨면 밖에 나가 풀을 뜯고, 제 스스로 활동하다 밤이 되면 우리로 기어들어오는 것이 이곳의 동물이다. 동물과 인간이 남이 아니라 서로 같은 공간에서 삶을 공유하는 방식이다.나무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서니 마루와 안채가 구별된다. 처마 밑 나무엔 단청도 되어 있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도 보인다. 2층 안채로 들어갔다. 내실 역시 바닥은 마루고 벽면은 나무로 되어 있다.모든 장식이 수공예다. 넓은 홀 남서쪽 모서리엔 부처님을 모셔놓고 정갈한 정화수를 올리고 있다. 그 앞으로 불 좋은 난로가 놓여 있다. 난로 주변에 앉아 주인 할머니가 따라주는 수유차 한 잔을 마신다.할머니의 의상도 장족의 전통 복식이다. 빨강색 모자에 두꺼운 곤색 옷은 그들 삶의 방식대로 바느질로 꿰맨 것이다. 뜨거운 수유차 한 모금이 목줄기를 타고 뱃속으로 들어간다. 설당을 넣었는지 달콤하다.난로 위 연기가 빠지는 천장 쪽 선반에 원뿔 모양의 치즈 두 덩이가 익어가고 있다. 햇살이 들지 않는 시원한 쪽 다락에는 다 만든 둥근 치즈가 여러 개 쟁여 있다. 앞으로 먹을 식량이란다.방문객을 위해 치즈와 과자를 내 놓는다. 치즈 몇 조각 맛을 보았다. 괜찮다. 볶은 보리도 있다. `청과`라 하는데 우리의 보리, 밀과 같은 식물이다.굴뚝도 없는 난롯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할머니의 서빙을 받는다. 찻잔이 비면 다시 수유차를 따라준다.난 슬며시 일어나 바깥 마루로 나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아본다. 3층은 그야말로 창고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다락방이다. 지붕의 나무 조각이 그대로 보였다. 2층 난로에서 피운 장작불의 연기가 3층으로 올라와 지붕으로 빠져나간다.이곳 사람들의 삶의 지혜가 그대로 담겨 있는 의식주 문화를 속속들이 보는 것 같았다. 감사 인사를 하고 민가를 빠져나왔다. 그 집 바깥마당에는 아름드리나무 몇 개가 누워있다. 송진을 보니 소나무다. 그 나무는 오후에 가기도 되어 있는 해발 3,500m 이상의 푸타춰 국립공원 원시림 내에서 생산된 나무란다.중국식으로 점심을 먹은 후 푸타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높은 지대인 푸타춰 국립공원까지는 과거 3시간 정도 걸리던 길이었다. 2006년 길이 포장 개통되면서 30분이면 갈 수 있다. 중국의 발전 모습을 그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된다.4,200m. 정확히 어느 곳이 그 높이인지 모르지만 버스로 이동하다 보면 푸타춰 국립공원의 고산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여행 중 고산병에 대비하라고 준`다이아막스``홍경천` 등 각종 약을 먹지 많았다. 고산 증세를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하지만 늘 조심해야 한다. 성하던 사람이 고산병으로 여행 못하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고산에 과신하는 것은 금물이다.푸타춰 국립공원 가는 길 주변은 애목두견목이 지천이다. 4, 5월에는 활짝 핀 두견화로 장관을 이룬단다.3시 18분. 푸타춰 국립공원에서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해발 3,400m다. 산 고개를 오르고 내려 제일 먼저 멈춘 곳은 `소도호`였다. 입구에서 15.6km나 떨어진 곳이다. 나무로 만든 산책로를 따라 걷던 우리 일행은 사진 몇 컷 찍은 후 다시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버스는 비탈진 고개를 오르고 내리면서 고도를 조금씩 높인다. 해발 4,100m. 낮은 산 저쪽으로 설산이 보인다. 다시 버스가 멈춘 곳은 `미리호` 미리호는 건기라 그런지 물이 보이지 않았다.야크와 조랑말이 여유롭게 풀을 뜯는다. 중간에 가옥이 있다. 그 가옥은 동물들이 한파 때 피할 수 있는 곳이다. 방목하다 보니 어느 땐 말들이 새끼를 낳아 더 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집에 돌아온단다. 동물에게 주인 표시를 해 놓았기 때문에 도둑맞을 일은 없단다. 더욱이 이곳 사람들은 심성이 착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단다.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푸타춰 국립공원의 핵심 코스인 `벽탑해`로 가는 길이다. 소도호에서 벽탑해까지는 16.6km. 대리의 이해(耳海)처럼 벽탑해(碧塔海)도 `해(海)`자를 붙였다. 바다 같다는 뜻이다. 육지의 바다.주변은 원시림에 원시림이다.길옆 나무들이 아름드리다. 굉장하다. 그런데 가지마다 식물이 늘어져 있다. 털실같은 기생식물이 나무 가지에 축 처져 있다.산비탈 저 아래로 벽탑해의 물이 보이고 가운데 섬도 나타난다.`옛날 요괴가 나뿐 짓을 하다가 그 섬에 갇혔다는…`섬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다.차는 높은 고개를 넘어 4시 30분 벽탑해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자유롭게 한 시간 산책하기로 했다. 주차장의 해발 높이는 3,700m.일행들보다 빨리 성큼성큼 걷는다. 늪지대다. 늪지대에 강화목으로 길을 만들어 놓았다.왼쪽으로 라마교의 타르쵸와 롱다도 보인다. 그 밑으로 물이 솟는다. 납파해의 수원지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으면서 쉼터 정자를 지나 납파해의 물가로 접어든다.상쾌하다. 강한 햇살이다. 그러다 해는 구름 속에 몸을 숨긴다. 저쪽 산 아래 여러 필의 야크와 말이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다. 길은 벽탑해의 왼쪽으로 이어진다.고요하다. 아름답다.나무 사이로 이어진 길을 밟으며 생각한다. 낯선 곳이 진정 아름답기 위해서는 사람의 발길 덜 닿은 곳이어야 한다고…. 그렇기에 여행 마니아들은 더 오지로 향하는지 모른다. 도시의 문명에 찌든 그 흔적을 하나하나 털어낼 수 있는 곳, 그곳은 아무래도 자연의 품이다.이상향의 도시 상그릴라도 그런 곳 중의 하나로 인식될 것이다. 바람처럼 발자국만 남기고 가자. 수면 저쪽을 바라본다. 서편으로 향한 해님의 햇살이 짤랑짤랑 소리를 내듯 미끄러진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걷는다. 풍광이 더 뛰어나다. 호젓한 산책로다. 뚫린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평화롭다.평화가 머문 곳, 상그릴라.혼자 있기 때문에 나만의 특별한 여유를 만끽한다. 긴 시간이 아니어도 좋다. 잠시 전망대에 멈추어 수면을 본다. 고산에서 사는 물고기들의 움직임이 있다.모든 생물들이 제 처한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자연이 흐름이다. 역기능을 스스로 제거하고 자연의 조화에 순기능하려 노력하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모든 것을 스스로 치유한다. 티벳 민족에게 있어, 장족에게 있어 이런 곳은 하나의 성지다. 이런 자연 풍경 하나 우리나라에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다 부질없는 욕심인 줄 알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4, 5월 두견화 활짝 폈을 때를 상상한다. 지천으로 널린 연분홍 꽃, 꽃향.상상만 해도 참 아름답다. 왔던 길을 되밟는다. 역광으로 저 앞에 있는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오늘의 해도 서편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다 내일 새벽 이곳, 상그릴라를 떠나 다시 곤명으로 간다.어딘지 모를 상그릴라의 아름다움을 마음 한 곳에 더 채울 수 있는 곳이 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 있는데 말이다. 그 아쉬움이 새로운 상그릴라 아닐까?계속

2011-06-10

상그릴라를 찾아서 3

상그릴라에 있는 라마교 사원 송찬림사로 향했다. 송찬림사는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을 닮아 작은 포탈라궁이라 부른다. 상그릴라 도시 북쪽의 낮은 산 하나를 넘으면 송찬림사를 볼 수 있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우린 잠시 기다렸다. 주차장 북동쪽 산비탈에 상그릴라란 글씨가 눈에 띈다. 꽤 멀리 있는데 눈에 띌 정도니 엄청 크게 써 놓은 글씨다. 입장권을 끊은 다음 사찰 주차장까지 이동하는 전용 전동 버스로 옮겨탔다. 버스는 돌로 포장된 도로를 더덜더덜 달린다. 고개에 올라서자 정면으로 금동기와의 송찬림사 세 동 건물이 웅장한 성처럼 차창을 가득 채운다. 햇살이 잘 들게 된 건축이다. 송찬림사 주차장에 내렸을 때 커다란 돼지 한 마리가 먹을 것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이곳은 대부분의 동물들을 방목한다.오체투지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체투지는 온몸으로 땅에 엎드려 땅과 가장 밀접한 자세를 취하는 몸기도다. 온몸으로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마치 내가 저지른 부정한 짓에 용서를 청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종파는 달리해도 그들의 기도에 내 마음을 살며시 올려본다. 감사하자. 그러면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배에는 앞치마, 무릎에는 두꺼운 천을 덧붙였다. 그리고 손에는 목장갑을 꼈다. 엎드렸다가 일어나 다시 몸의 길이만큼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모았다가 쭉 편다.경건한 자세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송찬림사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다. 꽤나 가파른 계단이다. 해발 3,500m 되는 곳이라 천천히 걷는다. 계단 옆으로 작은 법당이 있다. 그 법당은 지역별로 돈을 내서 지은 법당이다.송찬림사는 300여 년 된 티벳 사원으로 1679년 달라이 라마 5세 때 창건하였다. 티벳어로 송은 셋의 의미하며, 찬은 부처, 림은 낙원을 의미한다. 운남성에서 가장 큰 라마교 사원으로 티벳 건축 양식에 따라 산의 지형을 잘 이용한 기도처다. 문화혁명기에 부분적으로 파괴된 것을 후에 복구하였다.“이곳 상그릴라에서는 스님이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자식을 낳으면 스님이 되길 바라고, 이 사원에 보내는 것이 가문의 영광입니다.”어찌 안 그렇겠는가. 믿음은 그 믿음의 핵심을 알아야 한다. 핵심이란 것은 결국 종교의 가르침대로 따라야 한다. 종교와 정치, 종교와 생활,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하는 이곳 장족들에게 송찬림사는 믿음의 중심이 되는 자리다.계단을 오르면 분홍색 계통의 벽이 앞길을 막는다. 곧바로 법당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벽의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 옮기기 전 아래를 내려본다. 제일 낮은 곳 연못에 흰색의 탑이 있는 작은 섬이 보인다. 그 건너 응달엔 눈이 희끗희끗 쌓여 있다.오체투지 하는 사람들이 사원을 돌면서 계속 이동한다. 자외선 강한 햇살 아래 특유의 상그릴라 건축물이 독특하게 빛난다. 집안으로 빗물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수관이 건물 밖으로 길쭉이 빠져나와 있다. 그 또한 물을 잘 활용하기 위한 지혜일 것이다. 지붕은 슬레이트 형태와 나무껍질의 너와지붕이다.숨 가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제일 왼쪽에 있는 법당으로 옮긴다.법당에 들어가기 전 주의할 점 몇 가지를 상기한다. 법당의 문턱을 밟지 말 것, 실내에서 사진 촬영하지 말 것, 모자 벗을 것, 부처님을 가리킬 때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말고 손 전체로 가리킬 것.모자를 벗어 아예 간이용 배낭에 넣었다. 송찬림사는 세 체로 되어 있다. 판첸 라마를 모신 건물, 대웅전, 석가모니불을 모신 건물 이렇게 세 동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대웅전은 수리중이라 입장할 수 없다. 첫 번째 건물에 들어갔다. 입구에선 스님이 소라로 만든 나발을 북소리 사이에 연주한다. 드리운 커튼을 열고 법당 안에 들어서자 커다란 금동 불상과 그 불상 앞에 판첸 라마 사진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달라이 라마가 아니다.중국에서는 인도 다름살라로 피신한 달라이 라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티벳 독립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대를 이어 출현하는데 보통 두 사람을 임명한다. 그 두 사람이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다. 예전에는 달라미 라마와 판첸 라마 두 분의 사진이 놓았는데 오래 전 어느 해부턴가 달라이 라마 사진을 치웠단다.불자들이 법당 안에서 시주를 하고, 스님의 안수를 받는다. 스님이 작은 염주를 선물한다. 불상 앞에는 물 7그릇과 이상한 형태의 꽃 모양이 놓여 있다. 티벳은 쌀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하다. 오래 전, 부처님께 공양할 것이 없어 물을 받쳤는데 그것이 관례가 되었단다. 즉 물로써 마음을 표시한 것이다. 꽃은 치즈와 보리로 만들어 놓았다. 그것 역시 티벳에서만 가능한 불심의 한 예일 것이다. 꽃도 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야크 젖으로 만든 치즈를 둥글둥글하게, 그리고 보릿가루를 물에 이겨 둥글게 만들어 부처님 전에 꽃처럼 장식한 것이다. 티벳 민족의 깊은 불심을 엿보게 하는 공양이다.첫 번째 법당을 나와 공사중인 가운데 건물을 지나 제일 끝 건물에 들어섰다. 마지막에 들른 석가모니불 안의 특징은 기둥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이곳 민족의 토착신앙과 맥을 같이 하는 한 형태다. 사원에는 많은 스님들이 보인다. 이곳 스님의 식탁 음식은 우리나라 사찰음식 형태와 많이 다르다. 고기를 먹어도 되고 술을 조금 마셔도 된다. 고산이다 보니 그런 것을 먹지 않고는 수도하기 힘들단다.광장으로 나오자 서편 멀리 하얀 설산이 송찬림사와 같은 높이로 머물고 있다.송찬림사를 벗어나며 송찬림사 가까이 산 정상에 꽂아둔 깃발을 본다. 혹시 저곳이 티벳 민족이 행한다는 천장(天葬)하는 곳이 아닐까? 기사에게 물어보니 그렇단다.이곳 민족들의 장례 풍습은 보통 네 가지로 행해진다고 한다.첫째가 토장(埋葬)으로 악한 생을 산 사람들에게 행하는 장례법이고, 둘째가 천장(=조장)으로 죽은 사람의 육신을 조각조각 내어 독수리나 까마귀의 먹이로 준다는 장례법이다. 이 장례가 가장 고급 장례로 참관할 수 있는 사람은 라마승, 그리고 사자(死者)와 가장 가까운 인척 한두 명이란다. 셋째가 수장으로 라마교의 승려로 살다가 병으로 죽은 사람에게 행하는 장례법이다. 넷째가 탑장으로 병없이 라마승이 죽으면 탑 안에 시신을 안치하는 장례법이다.이 중 가장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이 천장이다. 사람의 시신을 108조각 내어 그것을 새들의 먹이로 준다는 장례법. 죽어서 새들을 통해 하늘나라로 간다는 믿음은 아무래도 천국은 저 푸른 창공에 있다는 확신이 아니면 행할 수 없는 장례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례법은 경비도 많이 들고, 일반인이 쉽게 참관할 수 없다고 한다.육신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시간 또한 불교 용어로 찰라 아닐까?송찬림사를 벗어나 장족 민가를 찾았다. 나들이 나간 소, 돼지, 닭들의 1층 빈 우리를 보곤 2층 방에 들어가 수유차를 마신다. 장족의 불심을 엿보게 하는 불당이 벽 한쪽에 잘 꾸며져 있다. 그들의 불심 안에 상그릴라는 이상형으로 머문 것 아닐까?계속

2011-06-03

상그릴라를 찾아서 2

호도협을 빠져나와 버스에 몸을 싣고 얼마나 잤을까? 잠깐 잔 것 같기도 하고 오랜 시간 잔 것 같기도 하고…. 개운하다. 살며시 눈을 뜨자 버스는 가파른 산길을 지그재그로 힘겹게 오르고 있다. 짧은 거리가 아니다. 유리에 성에가 낀다. 창 밖 날씨가 추운 것 같다. 눈도 내린다. 길 양 옆으로 눈이 쌓였다. 비탈길을 올랐다 싶어 창 밖을 내려보면 아련한 풍경이 눈발 저쪽으로 사라진다. 세속 도시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다. 험난한 산길이다. 길바닥은 눈, 눈, 눈이다. 버스 기사가 긴장을 한다. 얼마쯤 달렸을까. 차는 힘들게 고도를 높이며 오르고 또 오른다. 해발 3천m는 넘었을 것 같다. 거친 고개를 올랐을 때였다. 설원이 펼쳐진다. 긴장을 풀 겸 잠시 쉬자고 했다.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년 발간)의 주인공 콘웨이는 납치된 비행기를 타고 상그릴라에 도착했다. 상그릴라. 그 이름을 살며시 불러본다. 불러 보기만 해도 마음 한쪽에 녹색 새순이 돋아 평화로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을 읽은 때는 대학 1학년 때였다. 주인공 콘웨이가 인간 세상과 동떨어진 이상향의 도시에서 체험하게 되는 사건을 모티프로 그린 소설. 그것을 읽으며 후일 상그릴라를 여행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책을 여행 전 다시 읽었다. 제임스 힐튼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지의 탐험가 조셉 록이 쓴 티벳 여행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아 그 소설을 썼다고 한다.쉬었던 곳에서 상그릴라 도시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 길 오른쪽 아래로 마을의 지붕들이 흰 눈을 마주보고 있다. 하늘같은 동네에서도 눈은 내리고, 하늘같은 동네에도 눈은 쌓이고 있다.분지형 마을 주변은 밭이다. 하얀 눈이 가옥과 밭을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 흐르던 먼 곳은 눈이 내리지 않았는지 맨땅이다. 눈이 쌓였음에도 그냥 따사로운 느낌을 준다. 도로는 아스팔트로 쭉 이어져 있다. 이 길 북쪽으로 상그릴라가 있고, 그곳에서 티벳도 갈 수 있다. 남쪽으로는 곤명을 거쳐 베트남, 라오스까지 이어진다. 생각만 해도 까마득한 길이다.출발한 버스는 수평이나 다름없는 아스팔트길을 시속 80km로 달린다. 그간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는 속도에 대한 복구를 하기라도 하듯 부지런히 달린다.얼마쯤 달렸을까. 드디어 상그릴라다.늦은 하오, 길게 그림자를 만들던 햇살이 펑퍼짐한 길에 쌓이고 쌓인다.`잃어버린 지평선`과 선을 닿고 있는 내 마음속의 상그릴라는 동화적 요소를 갖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화적 요소를 보여주지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움과 티벳 불교의 색색 타르쵸와 롱다가 야릇한 기분을 갖게 한다. 상그릴라에서 처음 찾은 곳은 세계에서 제일 큰 마니차가 있는 고성 내의`대불사`였다.평균 3천400m의 고산이라 그런지 걸음을 빨리 걸으면 힘겹다. 대불사 광장에서 사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원 내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천천히, 그리고 숨을 길게 들이쉬며 대불사로 오른다. 가파른 계단이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가슴 설레는 좋은 기도처 중의 한 곳일 것이다.계단 오른쪽에 세계 최대의 금빛 마니차가 빛난다. 높이가 건물 삼층 높이나 되는 마니차다. 많은 사람들이 사원보다 마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난 더 높은 곳의 사원으로 올라간다. 사원을 한 바퀴 돌며 상그릴라 시내를 내려본다. 전날까지 여행했던 곤명, 대리, 여강보다 넓은 편은 아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다. 우리나라 백두산(2,744m) 보다 한참 높은 곳에 있는 상그릴라다. 내려보이는 도시보다 몇 백 미터 높은 산들이 도시 주변을 감싸고 있다. 상그릴라가 소속된 운남성에는 52개 소수 민족이 있다. 그 중 많은 수를 이루고 있는 곤명의 이족, 대리의 백족, 여강의 나시족, 그리고 이곳 장족의 집 형태가 확연하게 다르다. 삶의 환경에 따른 의식주는 당연히 옷과 먹을 것, 그리고 집의 형태를 바꿔 놓았을 것이다.사원 둘레에는 오색 타르쵸가 바람에 펄럭인다. 백색은 순수와 청순, 황색은 중앙을 가리키며 대지와 지혜, 녹색은 물과 희망, 청색은 푸른 하늘과 용감함, 그리고 적색은 믿음과 불을 상징한다. 사원에서 상그릴라 시내를 둘러보고 불상을 모신 경내로 들어간다.금빛 불상이 나를 내려본다.스님은 경전을 읽고 불자들은 불상 앞에서 합장과 절을 하며 예를 표한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경건한 시간이 내 몸을 감싼다. 불자가 아닌 나로서는 간단히 목례만 하고 잠시 머물렀다가 밖으로 향한다. 나오면서 종교는 인간 구원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구원이 없는 종교는 영원성이 없기 때문이다.마니차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돌리기 힘든 대형 마니차다. 보통 대 여섯 명이 돌려야 돌아간다. 불자들이, 아니 관광객들이 마니차를 돌린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세 바퀴만 돌려야 한다. 네 바퀴를 돌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믿음으로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은 세 바퀴만 돌린다.마니차를 돌리면 `옴 마니 반메 흠`이란 라마교의 기도를 낭송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단다.`옴 마니 반메 흠`은 “우주(옴)에 가득한 지혜(마니)와 자비(반메)가 지상의 모든 존재(흠)에게 그대로 실현되리라”라는 뜻이다.믿음이란 것은 기도와 형식의 과정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경전을 읽을 수 있고, 사고의 유연한 폭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글자도 모르고, 경전도 못 외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기도. 라마교의 깨달음 깊은 고스님이 제안했을 묘안이 마니차를 돌리는 기도 아니었을까? 참 좋은 기도 방법이다.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또 다른 사람들이 마니차를 돌린다. 낮이면 햇살을 받을 테고, 밤이면 달과 별이 빛을 깔아줄 것이다. 조금 있으면 해는 지고 달이 뜰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는 우리나라에서 남쪽으로 보이던 별자리 오리온자리가 머리 위로 머물 것이다.마니차의 내부는 경전이 소장되어 있다. 밖에는 라마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발길을 대불사 아래 상그릴라 고성으로 옮기는 데도 마니차는 계속 돌아간다.막 도착한 사람들이 소원 한 줌 마음에 품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빌며 대형 마니차를 돌리기 때문이다. 계속

2011-05-27

상그릴라를 찾아서 1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의 소재가 된 곳 `상그릴라`. 하재영 시인의 중국 운남 기행문 `상그릴라를 찾아서`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상향의 도시를 찾은 시인의 발길 앞에 진정 평화와 아름다움이 존재하는지.삶의 한 길목에서 낯선 곳을 찾는다는 일은 용기며 축복이다.반복되는 시간의 한 폭을 가로 세로로 길게 찢고 그 구멍으로 떠난 여행.2011년 2월 하순 어느 날 난 넓은 중국 땅 운남성에 있었다. 우리에게 보이차로 널리 알려진 운남. 구름의 남쪽 운남(雲南).난 운남의 중심 도시 곤명(昆明)에서도 한참 북동쪽 상그릴라로 향하고 있었다.해발 3천459m의 도시 상그릴라는 티벳어로 `내 마음속의 해와 달`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 정부는 1998년부터 중띠엔(中甸)을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의 소재가 된 곳이라 해 향격리납(香格里)으로 바꾸고 상그릴라라 쓰기 시작했다.상그릴라에 다가갈수록 무엇이 나를 그곳으로 향하게 했을까?그것에 대한 인식이 깨달음처럼 조금씩 다가온다.“중국의 운남을 통과하는 세 개의 강이 장강, 란창강, 로강입니다. 장강 상류를 진샤(金沙)강, 하류는 양쯔(陽子)강이라 부르는데 무려 6천300km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강입니다. 장강이 직선으로 흘렀다면 베트남으로 흘러 남지나해로 빠졌을텐데, 석고진 `장강제일만`에서 U자로 돌기 때문에 중국 국경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장강을 어머니의 강이라고 하는데 상그릴라로 가기 전 꼭 들러봐야 할 곳이 호도협입니다.”상그릴라로 가는 도중 동행한 조선족 가이드 오 군의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화남과 화중으로 나누는 강이 양쯔강이라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장강의 흐름 중 첫 번째로 꺾이는 곳이라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는 곳이 `장강제일만`이다.그곳에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꾼 장강(金沙江)은 5천m 이상의 하파설산(哈巴雪山:5천396m)과 옥룡설산(玉龍雪山:5천596m) 협곡 사이로 들어가 `호도협(虎跳峽)`이란 절경을 만든다. 아마도 장강이 U자로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중국 5천년 역사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여강을 출발한지 한 시간 반 지나서야 우린 장강제일만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 얽힌 인물들, 제갈공명,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 홍군의 하룡 장군에 대해 들으면서 말이다.장강제일만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을 이야기하며 잠시 쉬었다가 호도협으로 향했다.옥룡설산쪽 호도협 관광을 위해서는 진장로(곤명에서 상그릴라 가는 길)에서 벗어나 옥룡설산을 바라보며 계홍교를 건너야 한다. 계홍교는 진샤(金沙)강에 놓인 낡은 다리로 차에서 내려 차량은 차량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건너야 한다. 건넌 다음 다시 차를 타고 호도협 주차장까지 가야 했다.호도협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가 옥룡설산 쪽 강변을 걷기 시작한 때는 오후 1시 조금 넘어서였다. 호도협은 그 길이가 20km로 협곡 입구의 해발이 1천800m나 된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의 낙차는 213m나 되고, 좁은 강폭은 30m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험한 협곡 중의 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그릴라 쪽 상호도협에서 중호도협, 하호도협으로 이삼일의 트레킹을 즐기는 곳이다.길 위쪽으로 옛날 마방들이 운남에서 생산된 차(茶)를 싣고 걸었던 차마고도가 보인다. 깎아지른 바위는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다. 갈수록 좌측 강폭이 조금씩 협소해진다.얼마쯤 갔을까? 호거용반(虎踞龍盤(蟠)이란 글이 보인다.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리는 듯한 웅장한 산세를 일컫는 말로 매우 위세 있는 모양을 뜻한다. 강변 위험한 곳은 산 속으로 터널을 뚫어 그곳을 지나도록 해 놓았다. 강 건너 상그릴라쪽 높은 지대로 새롭게 뚫은 길도 보인다. 차량으로 `호도석`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다.호도협의 잔잔한 옥빛 수면이 거칠어진다. 옥빛은 석회암에서 분출된 성질 때문이다. 호구잔도(虎口棧道)란 글자가 앞에 나타난다. 호랑이 입 속 같은, 천장에서 낙석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위험한 길이다. 그렇기에 호랑이 호(虎)자를 썼을 것이다. 여행객들은 걸으면서 `내게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야`란 생각을 하는지 무심하게 걷는다.위험스런 그곳을 걸으면서 생각한다. 여행이란 것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끊임없이 걸으며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며 느끼는 것이란 것을….오리 남짓한 짧은 거리지만 길은 흙 하나 밟을 수 없다. 아름드리나무에 톱질 한번 해 놓고, 톱이 지나간 좁은 공간을 걷은 것 같은 산 속 바윗길이다. 옛 차마고도는 우리가 걷는 위쪽으로 뚫려 있다. 얼마쯤 걸어가자 호도석이 보이고 옥룡설산 쪽으로 한 마리의 호랑이상(像)이 보인다.호랑이가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때 호도석을 디디고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스토리텔링의 대표적인 곳이 호도협이다.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의 소재로 형상물을 만들고,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꾸며놓는 중국인들의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협곡이 좁아진다. 호도석 양옆으로 거친 물살이 흐른다. 흐르는 물에서 포말이 날리며 카메라 렌즈를 적신다. 물은 낮은 자리를 찾아 끊임없이 움직인다. 낮은 자리만 있으면 그곳이 자기 자리라고 움직이는 물. 물의 본성을 그곳의 물들은 잘 보여준다. 하지만 호도협의 거친 물줄기와 물소리는 그런 물의 본성을 보여준다기보다 두려움까지 갖게 한다. 마치 낮은 자리로 향하는 것이 권력의 암투요, 싸움이요, 경쟁을 의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다리 아래로 호도석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울타리를 쳐 놓았다. 그 한쪽에 호도협(虎跳峽)이란 글씨도 있다. 기념촬영 장소다. 10여 분간 그곳에 머물러 호도석을 본 다음 걸었던 길을 다시 밟는다.여행은 걷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다.여행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피곤하다고 차에 머물기도 한다.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 여행은 발로 디뎌야 한다. 그것이 여행의 핵심이면서 발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계속

2011-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