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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삼국의 치열한 전쟁엔 강인한 정신력·무예 갖춘 화랑들이 있었다

신라와 신라의 역사를 ‘천일야화(千一夜話)’ 속 이야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또는 육중한 스위스 비밀 금고에 비유하자면 ‘풍류도’와 ‘화랑’은 비밀의 동굴을 여는 주문이나 정교하게 제작된 열쇠라고 할 수 있다.풍류도와 화랑이라는 2가지 핵심어는 역사학자와 철학자, 예술가와 종교학자가 1천500년 전 서라벌의 사회 구조와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을 추정해볼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돼 왔다.그렇기에 화랑과 풍류도에 관한 연구는 21세기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여러 가설과 학설들이 충돌하고 있고, 새롭게 등장하는 학문적 성과에 대한 갑론을박 역시 여전히 뜨겁다.풍류도의 정의와 성격, 화랑의 등장 배경과 역할 등이 모두 마찬가지.이런 가운데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제16권 ‘신라의 언어와 문학’은 비교적 현대적 문장으로 쉽게 ‘풍류도’에 대해 풀어 쓰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아래와 같은 대목이다.◆ 풍류도는 무엇이고, 그 핵심 사상 어디서 왔을까“신라는 공통의 문어인 한자와 공통의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였다. 동시에 유교와 도교도 수용했다. 최치원 같은 이는 당나라 유학생으로 유·불·선 삼교를 아우른 대사상가가 됐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유·불·선 삼교를 담고, 나아가 더 높은 뜻을 지닌 현묘지도(玄妙之道) 풍월도의 전통이 내려온다’고 했다.”풍류도의 개념적 정의를 내린 이 책은 이어 풍류도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추측해 알려준다. 계속해서 읽어보자.“풍류도의 실천은 철학가, 종교가, 예술가, 여행가의 삶을 원융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적·인격적 수행과 음악의 절제된 조화와 몸을 움직여 떠나는 원족을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이 이법(理法)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풍류도의 요체라고 하겠다.”위에 언급한 것들의 연장선에서 사학자 김태준의 논문 ‘화랑도와 풍류정신’도 눈여겨 살펴볼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다음에 인용하는 서술은 보다 구체적으로 풍류도의 목적과 지향점에 접근하고 있다. 동시에 화랑과 풍류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기에 다소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풍류정신(풍류도)은 복잡한 성격을 가진 개념이다. 그것은 원만하고 초탈한 인격을 향한 도의에 제일 목표가 있으면서, 가무로 서로 즐기고 산천을 노니는 예술과 순례의 훈련 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종합적으로 유·불·선의 삼교를 모두 갖추어 가진 정신 개념이었다.풍류를 살린다는 화랑도의 제일 목표는 나라를 세울 도의를 가진 사람을 훈련하는데 있었고, 그 도달점은 삼교를 포함하는 민족 전통의 정신을 재건하는데 있었다. 사람은 물론 자연까지도 감동시킬 인격의 수양, 신(神)과 사람을 화합시키는 가무의 즐거움, 그리고 산천을 노닐며 먼 곳까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던 국토순례의 종교적 경지를 재건하고자 하였다.”풍류의 도(道)를 세워 전통적 민족정신을 재건하고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닦아 6~7세기 신라의 중추가 된 화랑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책 ‘신라사 총론’에는 화랑 탄생의 전후 과정이 실려 있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서술이다.◆ 화랑은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맡았던 것일까“국가 운영에서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능력 있는 인재를 발굴해 양성하고, 이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인재 양성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라가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제도화한 것은 7세기에 들어서였다.그러나 국학 설립 이전에도 인재의 양성 작업은 이루어졌다. 그 기능을 담당한 것이 바로 화랑도(花郞徒)였다. 화랑도 창립의 목적은 지인(知人)에 있었다. 즉 능력이 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이를 관료로 등용하는 것이었다.신라는 4세기 중엽 이후 중앙 집권력을 강화해 나갔고, 6세기에 우경(牛耕·소를 이용한 농사)의 장려 등으로 생산력을 높였으며,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점차 해체돼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만들었던 것이다.”인간이건 사물에 관해서건 ‘수단’은 ‘필요’에 의해 탄생된다. 화랑이라는 수단은 당대 신라의 정치·사회적 권력을 가진 왕과 귀족들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정황 분석만으로 화랑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터. 신라사와 화랑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 이와 관련된 견해와 주장은 모두 다르다.역사학자 최광식의 경우는 논문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에서 홍순창(신라 화랑도의 연구), 이종욱(신라 화랑도의 편성과 조직·변천), 이선근(화랑도 연구) 등을 인용해 ‘화랑의 역할 변화 과정’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 설명한다.“…(전략) 신라의 화랑도는 통일전쟁(7세기) 당시의 상황에선 군사력 강화가 요청된 결과 화랑집단의 군사적 기능이 중시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화랑이 개인적으로 종군한 경우는 있으나, 화랑도가 전사단으로서 조직적으로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그 이후 통일전쟁이 종식되고 인재 양성을 위한 수련 활동에 참여해 골품체제를 익히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보기도 했다.신라 하대에는 사회가 불안정하여 화랑제도가 해이해지기 시작해 ‘세속오계’의 이념이 망각되고,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음풍영월(吟風詠月·바람과 달을 노래하며 흥겹게 즐김)에 도취하는 유흥과 향락으로 흘러버리게 되었다고도 보았다. (이런 학설들은) 대부분 특정 시기의 특정한 측면만을 부각시켜 보았다고 할 수 있다.”아직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기에 “사상, 혹은 이념 체계다” “종교의 한 형태다” “화랑도와 동일, 또는 유사한 개념의 단어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각종 주장들이 맞서고 있는 풍류도는 물론이거니와 화랑의 개념과 역할, 활동 영역에 관해서도 학설은 분분하다. 솔직히 말해 갈피를 잡기 어렵다.현재는 신라의 역사, 화랑, 풍류도에 궁금증을 가진 대중들을 위해 적지 않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이 명료한 해석을 내놓으려 노력하고 있는 단계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신라사 총론’ 집필에 참여한 학자들 역시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제 그들이 연구·해석한 ‘화랑의 역할’ 3가지를 살펴보자.◆ 지속돼야 할 ‘풍류도’와 ‘화랑’에 대한 연구첫 번째는 화랑도가 신라의 신분 제도였던 ‘골품제’의 경직성을 완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대목이다.“화랑도는 혈연주의를 벗어나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성된 일종의 결사체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화랑도의 중심은 진골 출신의 화랑이었지만 낭도들은 두품 출신은 물론 평민 출신 청소년도 될 수 있었다. 이 청소년들은 신분의 제약에도 공동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동고동락 하였다. 그래서 화랑도가 해산된 이후에도 이들의 유대관계는 지속되었다. 그 결과 화랑도는 신분제 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데 기여하였다.”‘신라사 총론’이 지목하는 화랑의 두 번째 역할은 풍류도와 관련된 것이다. 서술은 이렇게 이어진다.“화랑도는 풍류도를 추구하였다. 풍류도의 내용은 최치원이 ‘난랑비서(鸞郎碑序)’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교·불교·선교 삼교를 포함하였으며,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었다. 이 풍류도의 시작은 늦어도 진흥왕 시기에 이루어졌다. 진흥왕은 불교를 깊이 신앙했고, 신선을 좋아했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국가를 다스리는 요체로 삼았다. 진흥왕의 사상에 유·불·선 삼교의 내용이 모두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는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와 동일하다. 화랑들은 신라 고유의 이 풍류도를 배우고 이의 실현을 통해 국가사회에 크게 이바지했다.”이 책이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것은 문무(文武)에 예술적 심미안까지 고루 갖춘 청년의 탄생 과정이다. 신라·백제·고구려 삼국 사이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엔 강인한 정신력과 무예를 갖춘 젊은이가 필요했다. 그 시기 화랑도가 추구한 제1의 목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부연이 붙는다.“화랑들의 강인한 정신력은 유·불·선에 대한 교육, 즉 도의 연마를 통해 배양됐고, 무예와 체력 단련은 유오산수(遊娛山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가악(歌樂)을 통해 화랑과 낭도, 낭도와 낭도 사이의 결합과 단결을 도모하였다.”재차 말하는 것이지만 풍류도와 화랑에 관한 학문적 주장은 다양하고도 복잡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탐구’라는 후대에 맡겨진 과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앞으로도 보다 많은 관련 분야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와 신라사에 관심을 가진 선후배 기자들의 열정적 취재를 진심으로 기대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19-09-05

귀족에서 평민까지… 풍류도의 힘으로 신라 발전·통일 기여한 화랑들

‘풍류도’를 중심 이데올로기(또는 복합적 신앙체계)로 학습해 활동한 화랑들은 6~7세기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그렇다면 풍류도가 가진 어떤 힘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삼국사기’와 ‘화랑세기’ 등 고문헌은 “화랑 가운데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도 여기서 생겼다. 무열왕(武烈王·김춘추)과 경문왕(景文王)도 화랑 출신이었다. 신라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는 화랑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사다함과 김유신처럼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제사를 받들거나, 향가(鄕歌)를 짓는 등 예술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뤄냈다”고 기록하고 있다.한국민족사상학회가 발행한 정경환과 이정화의 논문 ‘풍류도의 내용과 의미에 관한 연구’는 풍류도가 “우리 민족의 뿌리 사상”이며, “단군사상을 기원으로 하여 이를 보다 체계화하고 현실화한 우리의 고유한 사상”이라고 주장한다.이에 덧붙여 풍류도의 성격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성 △조상에 대한 신성사상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원대한 생명주의와 평화적 원융사상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무애(自由無碍)의 길 추구 등 4가지로 규정하고 있다.이 논문에선 풍류도가 신라사회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나아가 한민족의 핵심적 전통사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까지 드러난다. 아래 간략하게 요약한다.“풍류도는 우리의 시조 사상인 홍익인간을 기초로 당시 어떤 사상보다 인간을 본위로 하는 심오한 사상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대자연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인간을 넘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원융하고 자연스러운 사상의 발로다. 상생과 조화론에 근거한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도 풍류도의 특징이다. 풍류도의 근저에는 적극적 평화에의 염원이 스며있다. 덧붙여 풍류도 사상은 조화주의를 지향한다. 갈등과 긴장을 거부하고, 화해와 융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풍류도와 벗하여 탄생한 화랑들은…‘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제3권 ‘신라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은 “인간을 본위로 하는 심오한 사상성”을 가진 풍류도를 교육 시스템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인 화랑의 탄생과 구성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독특한 청소년 조직으로서 국가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화랑도의 기원은 삼한사회의 연령집단에서 찾을 수 있는데, 화랑도의 군사 훈련과 산천 순례 활동 등이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판단된다. 화랑도 창설의 목적은 당시의 시대적 과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군사 인력을 비롯한 다양한 인재의 양성과 확보에 있었다…(중략)화랑도의 구성원은 대부분 15~18세까지의 청소년들인데, 화랑과 낭도의 신분이 서로 일치하지는 않았다. 화랑집단의 중심인물인 화랑(국선·풍월주)은 낭도의 추대를 받아 선출되었으며, 진골 귀족 출신이었다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중략)화랑도는 진골 귀족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왕경 안의 여러 신분·계층을 포괄한 조직체로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갈등과 알력을 어느 정도 완화·조절해 사회통합에도 이바지했다고 판단된다.”신라의 화랑들은 ‘유교·불교·도교를 망라한 넓은 차원의 이념 체계’라 할 수 있는 풍류도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다고 다수의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논문 ‘풍류도의 내용과 의미에 관한 연구’ 역시 “원융하고 자연스러운 사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풍류도의 사상적 해석 범위가 좁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이 추정과 논지가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느껴진다면 화랑을 포함한 당대 청년들이 지향할 바를 구체화시킨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세속오계’는 화랑들이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기여하는 방법을 명문화한 행동지침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화랑도 교육에서는 물론이고 그것이 퍼져나가 사회생활 일반에서 요구된 기본 정신 전반은 대체로 ‘세속오계’로 말끔히 정리되었다.‘세속오계’는 진평왕대의 승려 원광(圓光)이 중국 유학을 끝낸 후 돌아와 청도의 한 사찰에 머물 때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몸 닦기를 희망하는 귀산(貴山)과 추항(7B92項)이라는 두 젊은이가 찾아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도리를 요구하자 이에 응답해서 주었던 내용이다.”◆ 신라사회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된 ‘세속오계’대부분의 독자가 알고 있겠지만, ‘세속오계’의 주요 내용은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다. 여기엔 당시 신라의 지배층이 젊은이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요약돼 담겼다. 이 책에 따르면 ‘세속오계’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물론, 신라사회 일반에서 지켜야 할 덕목으로 빠르게 확산됐다고 한다.많은 사람들이 ‘세속오계’를 화랑도 구성원들만의 실천 덕목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에 의하면 “화랑도 조직을 거친 성원들의 철저한 실천적 행위를 통해 (세속오계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진 탓으로 그렇게 인식되었을 따름”이라는 것.사실 화랑이 지켜야 할 덕목이 ‘세속오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 중 기본’으로 ‘세속오계’를 받들어야 했고, 동시에 당대의 신라가 요구하는 다른 여러 덕목도 체화(體化)했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측한다. 그처럼 기억하고 준수해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 화랑과 낭도들의 삶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을 듯하다.‘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화랑 집단의 융성기는 진흥왕(재위 540~576)에서 문무왕(재위 661~681)에 이르는 1세기 사이였다. 화랑 제도는 신라 말기까지 이어졌고, 그 기간 화랑의 숫자도 200여 명에 이른다.김태준의 논문 ‘화랑도와 풍류정신’은 “화랑은 선택받은 젊은이의 집단이었고, 나라에 크게 쓰이도록 훈련받은 청년들의 무리(낭도)였다”며 화랑과 낭도가 중점적으로 교육 받은 게 어떤 것일지 추정하고 있다. “화랑과 그 무리는 영예에 걸맞은 교과로 훈련받았다”는 전제를 달고서다.이 논문은 3가지를 지목한다. △도의(道義)로 서로 연마한다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긴다 △산천을 찾아 노닌다는 게 바로 그것. 이는 ‘삼국사기’가 풍류의 도(道)를 설명하는 방식과도 맥이 닿아 있다. 보다 상세하게 알아보자.◆ ‘풍류도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김태준은 화랑도와 풍류의 제1정신을 이렇게 설명한다.“결국 화랑의 도의, 곧 풍류의 핵심은 공자가 가르친 충효의 정신과 노자가 가르친 무위와 말없음의 정신, 아울러 석가가 가르친 선을 받들어 행하는 정신을 두루 갖추어 가진 것”이라고. 이어서 이런 부연을 내놓는다.“‘도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연마하는 것이며, 이야말로 화랑도·풍류도의 첫 번째 덕목이요, 가르침을 베푼 목표였다.”‘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김’을 ‘도의’와 쌍벽을 이루는 화랑의 정신 교과였다고 쓰고 있는 ‘화랑도와 풍류정신’. 여기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이어진다. 화랑들이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노래와 춤만을 즐겼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화랑의 풍류에서는 노래와 춤을 서로 즐겼다고 했지만, 상고로부터 제천의식과 국중대회(나라가 주관하는 대규모 제천행사)에서 연일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는 것은 즐기기보다 먼저 하늘에 제사하고 신과 일체를 이루는 신내림의 체험을 중시한 것이다. 그 풍속은 무속에서 보이듯이 노래와 춤으로 신에게 제사 드리고, 이를 통해 신과 인간이 하나로 일체를 이루는 체험이었을 것이다.”신라 당대의 화랑과 낭도들은 노래와 춤이라는 형식을 통해 ‘신내림’을 체험하면서 스스로가 풍류의 주체가 되는 경험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춤과 노래란 일반적인 유흥이 아니라, 신령한 것들과 교감하는 방식이었던 게 아닐까?화랑의 마지막 교과로 김태준이 제시하는 건 ‘산천을 찾아 노닒’이다. 이 역시 단순히 좋은 경치를 즐기며 희희낙락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랑들에게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일종의 수련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화랑도와 풍류정신’도 이를 감안한 듯 아래와 같이 덧붙이고 있다.“국토 순례는 화랑과 풍류도의 실천교과였다. 명산대천의 산신을 숭상하는 신앙적 순례이며, 자연사상과 국토사상의 수련이며, 말할 것도 없이 신체 수련의 노닒이기도 했다. 자연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신비감을 동시에 가져다줌으로써 원시적인 토속신앙이 발생·발전하는 곳이다.”신라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로 바뀌는 과정에서 화랑들은 작지 않은 몫을 해냈다. 이들 화랑의 실천·지도 이념이었던 풍류도를 연구하는 것은 신라의 권력 이동과 사회 변화 과정을 탐색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임이 분명해 보인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29

사랑·변심·그리움·충성… 이야깃거리 많았던 김유신은 행복했을까?

기원전에 형성돼 10세기 중반까지 길고 긴 세월 동안 존재했던 고대 국가 신라. 시간은 숱한 ‘전설’과 ‘사연’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1천 년 가까이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나라이니 넘쳐나는 이야깃거리가 있음은 당연한 이치.예술가들이 그걸 가만히 놓아뒀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다. 신라를 해석하는 주요 키워드인 ‘풍류도’와 ‘화랑’은 수많은 소설과 시의 소재가 됐고, 영상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는 영화와 TV 드라마를 통해 여러 차례 사람들과 만나게 됐다. 이는 ‘역사의 대중화’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영남대학교 조형연구소장을 지낸 민주식의 논문 ‘풍류(風流) 사상의 미학적 의의’는 풍류도가 예술과 불화 없이 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자유분방한 정신은 정치나 사회 속에서도 발휘되며, 또 문예나 취미에서도, 이성과의 교제나 호색의 면에서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요컨대 환경의 자유로움과 풍격의 고상함을 지닌 자유인의 생활이 풍류이다. 이를테면 은자(隱者)의 생활을 즐기는 일이나 청담(淸談·고상하며 맑은 이야기)에 뛰어난 것이 풍류다…(중략) 풍류는 일상성을 벗어나 개성으로써 새로운 내용을 추구할 때, 일상을 초탈적인 예술의 세계, 혹은 미적 경지로 드높이려 한다.”◆ ‘풍류’에만 머물 수 없었던 김유신과 천관의 일화문학, 영화, 드라마 속에서 ‘미적으로 형상화’된 서라벌의 인물들은 적지 않다.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던 화랑 관창과 반굴, 진위 논란이 뜨거웠던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비한 매력의 소유자 미실(美室), 영민했던 승려 원효,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 등.이처럼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인물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주연 배우’는 김유신(金庾信·595~673)이 아니었을까?통일신라 건설의 일등 공신이었던 그는 ‘비극적인 고대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기생 천관(天官)과의 짧아서 더 뜨거웠던 연애. 그 전말은 아래와 같다.“젊고 풍채 또한 좋았던 신라 귀족 김유신은 예쁘고 노래 잘하는 기녀(妓女) 천관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청춘남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 김유신의 모친은 ‘집안을 일으키고 세상에 나아가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 매일 기생집이나 출입하고 있으니 내가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며 울먹였다. 어머니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김유신. 천관을 향하던 발걸음을 단호하게 끊는다.그러던 어느 날. 김유신은 동료 화랑들과의 만남에서 대취한다. 그가 탄 말(馬)이 사람의 바뀐 마음까지는 알 리가 없었을 터. 평소처럼 천관이 기거하는 유곽으로 향했던 말. 졸음에서 깨어난 김유신은 망설임 없이 말의 목을 잘라버린다. 천관 앞에서 자기의 뜻이 굳건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김유신이 떠난 자리에서 한참을 목 놓아 울던 천관은 한 편의 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김유신이 천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천관사(天官寺)를 짓도록 명령한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였다.”이 에피소드에선 좋아하는 이성과의 교제라는 ‘개인적 풍류’와 나라를 보위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대의명분’ 사이에서 갈등했던 청년 김유신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김유신은 화랑이었다. 민주식의 논문에 따르면 화랑의 교육 이념으로 정착됐던 풍류도의 주된 내용은 “도의와 미풍을 배우고, 생활에 예술을 끌어들이며, 아름다움을 완상(玩賞·가까이서 즐겨 지켜봄)하는 것”.그러나, 천관은 ‘가까이서 지켜봐도 좋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었다. 신라 당대의 사랑은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대의명분’을 지향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다김유신과 관련된 ‘슬픈 죽음’은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역사에 등장한다. 이때의 갈등은 천관을 둘러싼 사랑과 욕망의 절제 사이에서가 아닌, 연민과 전투의 승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의 삼국 통일’엔 두 명의 소년을 창칼과 화살이 뒤엉키는 사지(死地)로 등 떠밀 수밖에 없었던 김유신의 가슴 아픈 결단이 등장한다. 좋게 말하면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이지만, 거칠게 표현하면 ‘어른들의 이익 다툼 속에서 아이들을 죽인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황산벌전투. 전날 벌어진 결전에서 백제군의 사기에 눌린 신라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네 번을 싸워 네 번을 모두 패배했다. 김유신은 신라군이 연패를 당하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김흠순(김유신의 동생)의 아들인 반굴과 김품일의 아들인 열여섯 살의 앳된 화랑 관창을 백제군 진영으로 홀로 보내어 싸우게 했다. 반굴과 관창은 저돌적으로 나아가 싸우다 죽었다. 신라군은 반굴과 관창의 희생을 바탕으로 사기가 진작돼 죽을 각오로 싸웠다.결국 치열한 접전 끝에 백제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신라군은 계백과 5천 결사대 대부분의 목을 베고,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의 장군을 포로로 잡았다.”이처럼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들 속엔 사랑, 변심, 애틋한 그리움, 회한, 충성, 국가를 위한 희생, 드라마틱한 반전 등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는 키워드가 수도 없이 나타나고 있다.그렇기에 김유신은 문학과 영화, TV 역사극의 ‘최다 출연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만큼 다양한 ‘예술적 변용’이 가능한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이야기.물론 김유신의 사회·정치적 지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당시 신라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때론 비판적으로 그려지기도 했다.◆예술의 소재가 된 신라 최고 ‘풍류 화랑’국문학자 홍성암의 논문 ‘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은 ‘풍류의 정신’이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술 작품에 삼투하는 것인지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아래 인용한다.“풍류도가 우리 고유의 이념체계로서 신앙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면, 풍류정신은 풍류도에서 파생된 것으로 문학정신의 한 양상에 가깝다. 따라서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은 대체로 풍류의 멋을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우리의 문학 작품에 스며있는 풍류정신은 다분히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강하다. 산천의 아름다움을 즐긴다든지, 노래와 춤을 즐긴다든지, 무병장수와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인생의 현세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들은 멋을 아는 한국인들의 공통적인 의식체계에 속한다고 하겠다.”위와 같은 학술 논문의 정의에 기대지 않더라도 ‘풍류 화랑’ 김유신의 삶과 죽음은 소설, 또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극적이고 굴곡이 많았다.‘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제22권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따르면 김유신의 생애는 ‘평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누구도 쉽게 경험하지 못한 숱한 고난과 난관을 거치며 성장했고, 청년기와 중년기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터지는 살점과 흐르는 피를 보며 보내야 했다.김유신이 활동했던 7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이 서로의 명운을 걸고 치열하게 항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어느 누구도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웠다.그런 상황에서 김유신은 태생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눈부신 활약을 보임으로써 새로운 모습의 신라를 만들어간 인물이었던 것. 그랬기에 설원랑, 사다함 등과 함께 ‘미륵의 현신(現身)’으로 숭배 받았을 법도 하다. 다시 앞서 언급한 홍성암의 논문을 살펴보자. 이런 대목이다.“화랑인 김유신을 따르는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 했다. 여기서 용화란 미륵보살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득도하여 설법을 한다는 불교적 설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미륵보살 신앙은 미래의 밝은 세상을 기약하는 신앙이다. 화랑은 국가의 수호와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집단이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악을 미워하고 선을 권장했다. 이는 곧 불교적 덕목이 풍류도 속에 용해된 양상이다.”◆그래서, 김유신은 행복했을까김유신은 신라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 속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살아서는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미륵’으로 불렸고, 죽어서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追尊·죽은 사람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됐다. 어느 왕 부럽지 않은 대접이었다.일흔여덟까지 살았으니 장생의 복까지 누렸다. 병에 걸렸을 땐 문무왕이 직접 찾아와 위로했고, 사망 후에는 국가 차원에서 천문학적인 부의(賻儀)를 제공했다고 한다.죽은 뒤 수백 년이 흐른 고려시대에도 거리의 아이들까지 김유신이란 이름을 입에 올렸다니 요즘 표현으로 ‘불멸하는 스타’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지난 주말이었다. 경주시 충효동에 자리한 김유신의 묘를 둘러보고, 천관사 터가 있는 교동을 향했다.젊은 화랑 김유신과 예기(藝妓) 천관이 나눈 애처로운 로맨스의 흔적은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사라지고 없었다.인간이 살고 죽는다는 것의 덧없음을 떠올리며 한참을 그곳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마음속으로 떠오른 뜬금없는 궁금증 하나.“사랑하는 여성을 버리고, 어린 조카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대의와 명분을 선택한 김유신은 정말로 행복했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22

신라 발전·통일 기여한 ‘화랑 트로이카’를 만나다

보통의 사람들은 주요한 몇몇 인물들을 규정짓거나, 한 묶음으로 배열하는 걸 즐긴다. 이는 인간의 특성 중 하나다. ‘트로이카(Troika)’는 3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지칭하는 단어.삼두마차(三頭馬車)로도 번역되는 트로이카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세 사람, 혹은 어떠한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3명’을 의미한다.1950년대 후반 쿠바에서의 전투가 세상을 뜨겁게 달궜을 때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턱밑에서 젊은 트로이카가 질주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카밀로 시엔푸에고스(1932~1959)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트로이카’였다.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가보자. 한국의 50~60대 중년들은 영화배우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를 한 세트로 엮어 기억한다. 이른바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였다.중앙일보 기자이자 ‘걸그룹 경제학’의 저자인 유성운(40)은 “2019년 현재 한국 걸그룹의 트로이카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트와이스(TWICE), 블랙핑크(BLACKPINK), 아이즈원(IZ*ONE)”을 지목했다.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론으로 진입하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풍류도를 중심 이데올로기로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기여한 화랑 중 트로이카는 어떤 인물들일까?”개인의 취향과 선호는 각양각색이다. 앞서 언급한 혁명가와 연예인에 대한 평가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天壤之差)이듯, 명멸했던 수많은 화랑에 관한 사람들의 호오(好惡)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학자와 예술가 몇 명에게 자문을 얻어 1천500년 전 신라의 ‘화랑 트로이카’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다.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걸 증명한 문노(文努)풍월주(風月主)는 ‘화랑 중의 화랑’ ‘으뜸 화랑’을 일컫는다.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엔 1대 위화랑부터 32대 신공까지 32명의 풍월주가 기록돼 있다. 초등학생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 김유신도 등장하고,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춘추도 이름을 올렸다. 이중에서 ‘트로이카’를 고르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하지만, 역사 속 어떤 인물이 완벽하게 객관에만 근거해 평가를 받고 있나? 주관의 개입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랑은 제8대 풍월주 문노(537∼606 추정)다.문노의 출생은 비극적으로 드라마틱하다.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나 어머니가 가야에서 온 공녀였다. 순수한 신라 혈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내 피의 절반은 가야 사람의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가야 출신들을 규합해 화랑 내부에 또 다른 파벌을 만든 건 출생의 한계에서 오는 열등감 극복의 방편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이런저런 평가가 있지만 문노가 ‘전투 실력’에서만큼은 화랑 중 최고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드물다. 겨우 열일곱 살에 백제와의 싸움에 참전해 공을 세웠고, 열여덟엔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 고구려 장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왕의 명령이라면 모친의 고향인 가야로의 진군에도 거침이 없었다. 화랑의 군사적 편제 개편에도 적극적이었던 문노는 또 한 명의 ‘빼어난 화랑’이었던 사다함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일흔 살 가까이 장수한 문노는 ‘신라 역사상 최고의 맹장(猛將)’으로 추앙받는다.문노를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후배 화랑’이 있는데 바로 김흠운(金歆運)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를 빛낸 인물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문노가 이끄는 화랑부대에 속했던 김흠운이 세속오계(世俗五戒) 중 ‘임전무퇴’를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서술한 것이다. 그렇다. 옛말처럼 용맹한 장수 밑에 비겁한 부하가 있을 수 없다.“김흠운은 유복한 생활이 보장된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순국자의 무용담에 매료돼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백제의 조천성을 공략하는데 참전한 김흠운은 적군이 새벽에 신라 군영을 습격해 혼란이 일어나자, 퍼붓는 화살 속을 뚫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한다. 주위에선 ‘어둠 속에서 싸우다 죽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나서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대장부가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다짐한 이상 어찌 이름 알리기만을 원할 것인가’라는 김흠운의 뜻을 꺾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김흠운은 전사한다.”◆ ‘살아있는 미륵’으로 숭배 받은 설원랑(薛原郎)소설가 김별아(50)에 의하면 설원랑(생몰연대 미상)은 “해사한 얼굴에 시와 그림에 능했던 예술적인 화랑”이었다. 또한 진흥왕 시절 신라 최초의 국선(國仙·화랑의 리더)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진흥왕이 애초에 두 여성을 원화(原花)로 삼아 무리 300~400명을 이끌게 했는데, 둘 사이에 시기와 질투가 심해 문제가 생기자 원화 제도를 폐지하였다. 몇 해 뒤 다시 풍월도(風月道·풍류도와 같은 의미)를 일으키고자 좋은 가문 출신의 남성으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화랑’이라고 불렀다. 설원랑은 바로 이때 처음으로 국선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앞서의 기록보다 좀 더 흥미로운 방식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백성의 존경을 받던 신라의 한 승려가 “미륵(彌勒·미래에 출현하게 될 부처)의 형상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화랑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내놓는다. 그 승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 나타난 미륵과 꼭 닮은 청년을 영묘사(靈妙寺) 앞에서 만난다.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국선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미륵과 빼닮은 청년’이 바로 설원랑이다.‘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따르면 화랑도가 창설되던 시기 신라사회에서 화랑은 ‘미륵불(彌勒佛)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장차 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할 유사 메시아(Messiah)로 본 것이다.설원랑은 ‘살아 움직이는 미륵’으로 서라벌 주민들의 숭배를 받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잘생긴 얼굴에 설득력 있는 목소리. 여기에 인간과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아름다운 풍경까지 화폭에 담아내는 탁월한 예술적 능력.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이돌’ 수준의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설원랑의 인기는 당시 왕의 인기와도 직결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의 신라사회는 “미륵은 전륜성왕(轉輪聖王·불법을 수호하는 이상적 군주)과 함께 나타나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린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흥왕=전륜성왕’ ‘설원랑=미륵’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을 것이다.종교사학자 유병덕의 논문 ‘풍류도(風流道)와 미륵사상(彌勒思想)’은 미륵과 화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병덕의 주장처럼 설원랑은 ‘화랑인 동시에 미륵’이었다.“한국 종교의 시원은 풍류도에 있다. 그것은 무(巫)적 전통이 아닌 선(仙)적 전통이 강한 가운데 출현했다. 한국에서 미륵신앙이 대두해 국력을 흥하게 만든 역사는 통일신라의 경우가 처음이다. 삼국통일의 기세를 잡은 화랑도는 전래의 풍류도를 주체로 하여 그 당시 불교와 잘 조화된 가운데 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륵신앙도 화랑의 실천적 이념 역할을 했다.이런 사조를 통해 완성된 인물을 불교 입장에서는 ‘미륵’이라 칭하고, 풍류도의 입장에선 ‘화랑’이라 칭하는 것이다.”◆ 전설로 남은 ‘요절 화랑’ 사다함(斯多含)요절(夭折)은 전설을 만든다. 록 뮤지션 짐 모리슨(28세 사망)이 그랬고, 영화배우 리버 피닉스(23세 사망)가 그랬으며, 소설가 김유정(29세 사망) 또한 그렇다. 이들의 삶은 짧지만 뜨거웠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그들은 일찍 죽어 영원히 살고 있다”고. 이 범주에 고민 없이 포함시킬 수 있는 화랑이 있으니 바로 사다함(생몰연대 미상)이다.세상을 떠도는 ‘영웅 전설’의 형태로 남은 사다함의 일대기는 간명해서 눈물겹다. “세상에 이런 10대 소년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부른다. ‘삼국사기’에 실린 사다함의 소설 같은 생애를 요약해 아래 옮겨본다.“신라의 진골이자 화랑인 사다함은 내밀왕의 7세손.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 풍채가 좋고 뜻과 기백이 높았다. 사람들의 청에 못 이겨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 족히 1천 명은 넘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그들 모두는 사다함을 흠모했다.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대가야와의 전쟁에 나가기를 왕에게 간청하니 왕은 ‘싸움터로 보내기엔 아직 어리다’며 말렸다. 하지만 사다함의 확고한 의지는 왕조차도 제지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진실했다. 결국 참전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기에 왕이 노비로 쓸 수 있는 포로 300명과 적지 않은 땅을 주었는데, 노비는 자유롭게 풀어주고 땅은 극구 사양했다. 죽마고우 무관랑(武官郞)이 병사(病死)하자 ‘그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했으니, 나 혼자 살 수는 없다’며 일주일을 통곡하다 죽었다. 그때 사다함의 나이 불과 17세였다.”역사학자 최광식은 그의 논문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에서 이렇게 주장한다.“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풍류도를 중심 이념으로 익히고 닦은 화랑과 국선들은 신라의 주도세력이 되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통일전쟁 이후에는 향가(鄕歌)를 짓는 등 격조 높은 모습도 보였다.”사실 고문헌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무용담과 미담을 100퍼센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 에피소드들엔 ‘포상과 명성을 바라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청년을 길러낼 시대적 필요성’이 개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층이 기록한 역사는 그렇게 서술·묘사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문노, 설원랑, 사다함 등 ‘화랑 트로이카’의 모습에선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여러 긍정적 가치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08

미당 서정주와 풍류도… 세속의 무한한 자유를 꿈꾸다

시인 서정주(1915~2000)는 자유로움과 조화,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풍류도’의 핵심을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가다. 숭실대학교 국문과 이경재 교수가 미당 작품에 스며있는 풍류도의 향기를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독자들을 위해 이를 게재한다.풍류(風流)라는 단어는 우리 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 즉 예술성이나 심미성을 지향하며 노는 것을 말한다. 품격의 고상함을 지닌 자유인의 생활이 풍류인 것. 그러나 도(道)라는 말이 붙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풍류에는 단순하게 정의될 수 없는 심오한 형이상학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풍류라는 말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를 보면 풍류란 한민족의 가장 종지가 되는 사상체계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조(眞興王條)에 등장하는 ‘난랑비서’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을 옮긴다.“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가르침을 베푸는 바탕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그 실제 내용은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종합하여 온갖 생명을 교화한다는 것이다.”화랑도(花郞徒)의 지도이념이기도 했던 풍류도는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만이 아니라 고유 신앙을 기반으로 하면서 외래 종교인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종지를 포함하는 거대한 사상으로서 모든 생명을 교화하였다. 이후에도 풍류에 대한 개념 규정은 최남선, 김범부, 안호상, 양주동 등의 석학들에 의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이들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풍류(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는 ‘걸림 없는 자유로움’,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대조화(大調和)의 세계’, ‘유연하고 여유로운 삶의 자세와 이를 통한 미의 추구’라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풍류도를 가장 깊이 있게 형상화한 현대 문인으로는 미당 서정주를 손꼽을 수 있다. 서정주는 여러 산문을 통해 풍류의 의미와 가치를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를 언급하며 직접적으로 풍류를 논한 글만 정리해보아도 ‘한국 시정신의 전통’, ‘한국적 전통성의 근원’, ‘신라문화의 근본정신’, ‘신라의 영원인’, ‘풍류’, ‘전라도 풍류’ 등을 들 수 있다. ‘한국 시정신의 전통’에서는 풍류가 “우주적 무한과 시간적 영원”을 근거로 하며, “인간주의가 아니라, 우주주의적 정신의 표현이요, 현재적 현실주의가 아니라 사람을 영생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 데서 온 영원주의 정신의 나타남”이라고 규정한다. ‘한국적 전통성의 근원’에서는 풍류도를 “영통주의(靈通主義) 정신”이라고 설명한다.‘신라문화의 근본정신’에서는 풍류도의 근본정신으로 “천지전체를 불치의 등급 따로 없는 한 유기적 연관체의 현실로서 자각해 살던 우주관”과 “등급 없는 영원을 그 역사의 시간으로 삼는 것”을 들고 있으며, 전자와 후자는 각각 “우주인, 영원인으로서의 인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신라의 영원인’에서는 “사람의 생명이란 것을 현생에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또 아울러서 사람의 가치를 현실적 인간사회적 존재로서만 치중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존재로서 많이 치중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풍류’에서는 “현실을 바닥과 구석에 닿게 가장 질기게 살 뿐만이 아니라 자손만대의 영원을 현실과 한 통속으로 하여 어떤 경우에도 이어서 안 죽고 살아가려는 정신의 요구를 따르는 길”이라고 주장한다.미당은 영원주의와 우주주의로 정리되는 풍류도가 매우 의미 있는 정신으로 오늘날에 새롭게 부활해야 한다는 입장. 그것은 ‘신라문화의 근본정신’에서 민족의 일을 경영하고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풍류도는 아직도 크게 필요한 힘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인 ‘질마재 神話’(一志社, 1975)는 미당이 그토록 강조한 풍류도가 직접적으로 형상화 된 실례다.질마재의 정식 명칭은 전북 고창군 선운리(仙雲里)이고, 이곳은 약 150호 정도의 집이 있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서정주는 열 살 무렵 줄포로 이사할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시집 ‘질마재 신화’는 이곳 사람들과 풍물들을 바탕으로 해서 창작되었다. 그것은 약간의 변형을 가해져 시로 수용되기도 했지만, 있는 그대로 시로 수용되기도 했다. 간통사건과 연날리기 이야기, 외할머니집에 해일이 들던 일, 도깨비집 할머니 이야기, 석녀 함물댁 이야기, 小者 이생원네 마누라 이야기 등은 시인이 어려서 실제로 보고 겪은 이야기들이다. (‘질마재’, ‘서정주 문학 전집’ 3, 일지사, 1972) 이러한 이야기들은 ‘姦通事件과 우물’, ‘紙鳶勝負’, ‘海溢’, ‘말피’, ‘石女 한물宅의 한숨’, ‘小者 李 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 등의 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질마재 신화’에서는 인간과 인간, 나아가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계를 설정할 수 없는 대조화(大調和)의 세계가 자주 펼쳐진다. ‘海溢’에서는 수십 년 전 바다에서 죽은 외할아버지가, 때가 되면 바닷물이 되어 외할머니를 방문한다. ‘李三晩이라는 神’에서는 이삼만의 붓 기운이 시공을 뛰어넘어 뱀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습이 그려진다.‘石女 한물宅의 한숨’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해 자진해서 남편에게 소실을 얻어 주고, 언덕 위 솔밭 옆에 홀로 살던 한물宅이 자연과 감응하며 사는 모습이 잔잔하게 형상화되어 있다.인간과 자연이 우주적 차원에서 한데 어우러지기에, 인간의 생명력은 자연의 생명력으로 전환되고는 한다. ‘小者 李 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에서 이 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은 질마재 마을에서도 제일로 무성하고 밑둥거리가 굵다고 소문이 난 무밭을 만들어 내는 생명력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시인은 오줌 기운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시대 지도로대왕비(智度路大王妃)의 ‘長鼓만한 똥’과 이 생원네 마누라님의 무를 비교하고 있다. 똥을 수식하는 말로 장고가 등장한 이유는 장고가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신바람을 나게 하는 악기라는 사실이 고려되었을 것이다.‘알묏집 개피떡’에 등장하는 알묏댁도 자연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자기 안에 담고 있는 존재다. 그녀는 보름달이 뜰 무렵의 보름 동안은 서방질을 하고, 달이 없는 그믐께부터는 마을에 떡을 판다. 그런데, 그녀의 떡은 맵시며 맛이 너무나 뛰어나 “손가락을 식칼로 잘라 흐르는 피로 죽어가는 남편의 목을 추기었다는 이 마을 제일의 烈女 할머니”까지 알묏댁을 칭송하게 된다. 생명력을 바탕으로 미적 경지로 승화된 떡 앞에서, 열녀로 표상 되는 도덕조차 꼼짝하지 못 하고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소 X 한 놈’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수간(獸姦)이라는 어이없는 행동을 저지른 총각 놈을 묘사하는 시인의 태도다. 그는 “品行方正키로 으뜸가는 총각놈이었는데, 머리숱도 제일 짙고, 두 개 앞이빨도 사람 좋게 큼직하고, 씨름도 할라면이사 언제나 상씨름밖에는 못하던 아주 썩 좋은 놈이었는데, 거짓말도 에누리도 영 할 줄 모르는 숫하디 숫한 놈”으로 묘사되고 있다. 수간 사실이 들통나 사라진 그를 보며, 화자는 “그 발자취에서도 소똥 향내쯤 살풋이 나는 틀림없는 틀림없는 聖人 녀석이었을거야”라고 말한다.‘틀림없는’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강조하는 화자의 태도에 비꼼과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는다.나아가 질마재의 사람들은 유연하고 여유로운 삶의 자세를 바탕으로 심미성을 지향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이러한 모습은 ‘소망(똥깐)’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시에서는 배설 행위조차 나름대로 운치 있는 미적 행위로 전환된다. “이것에다가는 지붕도 休紙도 두지 않는 것이 좋네, 여름 暴注하는 햇빛에 日射病이 몇 千 개 들어 있거나 말거나, 내리는 쏘내기에 벼락이 몇 萬 개 들어 있거나 말거나, 비 오면 머리에 삿갓 하나로 응뎅이 드러내고 앉아 하는, 休紙 대신으로 손에 닿는 곳의 興夫 박잎사귀로나 밑 닦아 간추리는-이 韓國 ‘소망’의 이 마지막 用便 달갑지 않나?”라는 대목에서, 용변을 보는 화장실과 그 행위는 멋진 작업실에서 이루어지는 창작 행위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예술적 아우라를 풍긴다. ‘上歌手의 소리’의 주인공도 똥오줌 항아리를 명경(明鏡)으로 몸단장을 하는 처지이지만, 그 노랫소리는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할 만큼 빼어나다. 주목할 것은 그러한 빼어남이 다름 아닌 “明鏡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현실의 불우를 참된 예술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극적 아이러니와 역설의 미학이 번뜩인다. 기존의 사회 규범이나 질서를 부정하며 내적인 가치의 완성에 골몰하는 그들이기에, 자잘한 세속의 명리나 승부 따위는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못 한다. 그것은 지상으로부터의 마지막 속박이라 할 수 있는 실마저 끊어져 아무런 걸림 없이 날아가는 연의 이미지에 응축되어 있다. ‘지연승부(紙鳶勝負)’라는 시가 바로 그것.그렇지만 選手들의 鳶 자새의 그 긴 鳶실들 끝에 매달은 鳶들을 마을에서 제일 높은 山 봉우리 우에 날리고, 막상 勝負를 겨루어 서로 걸고 재주를 다하다가, 한 쪽 鳶이 그 鳶실이 끊겨 나간다 하드래도, 敗者는 ‘졌다’는 歎息 속에 놓이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解放된 自由의 끝없는 航行 속에 비로소 들어섭니다. 山봉우리 우에서 버둥거리던 鳶이 그 끊긴 鳶실 끝을 단 채 하늘 멀리 까물거리며 사라져 가는데, 그 마음을 실어 보내면서 어디까지라도 한번 가 보자던 전 新羅 때부터의 한결 같은 悠遠感에 젖는 것입니다.그래서 그들은 마을의 生活에 실패해 한정없는 나그네 길을 떠나는 마당에도 보따리의 먼지 탈탈 털고 일어서서는 끊겨 풀려 나가는 鳶같이 가뜬히 가며, 보내는 사람들의 인사말도 ‘팔자야 네놈 팔자가 상팔자구나’ 이쯤 되는 겁니다.이 시에서 그려진 연의 모습은 질마재 사람들들이 가 닿은 마지막 세계의 모습이다. 그것은 ‘질마재’라는 수필의 마지막이 바로 이 연날리기로 끝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패배하지만 그것을 통해 사실은 더 깊은 자유와 여유를 얻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실이라는 물질적 질곡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아무 것에도 걸림 없는 무한한 자유를 얻고 있는 것이다. 실이 끊긴 채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은, 마지막 연에서 생활에 실패해 한정 없는 나그네길을 떠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된다.이 나그네를 향해 던지는 사람들의 인사말 “팔자가 네놈 팔자가 상팔자구나”라는 말은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것은 세속의 승부나 성공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무한한 자유, 바로 풍류도인 것이다.연실이 끊어지는 것은 현실적 패배인 동시에 현실의 여러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연실이 끊겼다는 패배의 고통 속에서 “어디까지라도 한번 가 보자던 전 新羅 때부터의 한결 같은 悠遠感”에 젖는 모습은, 현실의 고통을 유유자적함으로 승화시킨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의 자유로운 이미지 속에 응축된 풍류도의 모습은 ‘질마재 신화’ 이후 ‘떠돌이의 시’(1976),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 ‘노래’(1984), ‘산시’(1991) 등을 통해 표출되는 열린 세계를 소요하는 떠돌이 미당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나타난다.이경재 문학평론가1976년 인천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문예지 ‘문학수첩’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단독성의 박물관’ ‘끝에서 바라본 문학의 미래’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촛불과 등대 사이에서 쓰다’ ‘한국 현대 문학의 개인과 공동체’ 등의 책을 썼으며, 제29회 김환태평론문학상 수상자다.

2019-08-01

‘유상곡수연’의 포석정… “화랑들을 위한 인재 발굴의 장”

국어사전을 펼쳐 ‘풍류도’라는 단어에서 ‘도’를 떼고 ‘풍류(風流)’만을 찾아보면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명사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 그렇다면 ‘도(道)’는 어떤 의미일까? 다시 사전을 뒤적여본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명사 종교적으로 깊이 깨친 이치. 또는 그런 경지”.결론적으로 ‘풍류’와 ‘도’라는 두 명사가 합쳐진 ‘풍류도’란 “노는 일의 멋스러움이 세속적 경지를 벗어나 어떤 도저한 깊이에 다다른 경지”가 아닌가.연재 기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말한다. 풍류도는 신라의 엘리트 청년들이었던 화랑의 지도 이념인 동시에 지향점. 그렇기에 이런 추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1천300년 전 화랑들은 수려한 용모와 전장(戰場)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맹을 두루 갖췄으며, 노는 것 또한 화끈했다’.국문학자이자 소설가인 홍성암은 “한국인은 예부터 풍류도를 숭상해왔다”고 말한다. 논문 ‘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을 통해서다. 논문을 좀 더 읽어보자.“그러나, 풍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리는 쉽지 않다. 우선 용어에 있어서 풍류도는 화랑도와도 혼용되고 있고, 또 풍월도란 말로도 쓰이는가 하면 문학인의 흥취를 위주로 한 풍류정신과도 혼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풍류를 ‘멋’과 통한다고도 하고 ‘신바람’이라고도 하고 ‘신선(神仙)’이 되는 길이라고도 한다.”풍류도가 고대에는 ‘신앙 체계’였다가, 현재는 문학작품에서의 ‘풍류정신’ 정도로 변용됐다고 진단한 홍성암은 ‘학문적 시스템과는 무관하게 풍류에 대한 관습적 인식은 널리 알려져 있다’고 쓰고 있다. 여기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와 같은 부연을 들려주고 있다.“우리가 어떤 사람을 가리켜 ‘풍류를 안다’라고 말하게 되면 대체로 ‘멋’을 안다는 말이 되고, 멋쟁이를 풍류객이라 한다. 멋이란 흔히 ‘하늘과 통한다’는 말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이는 곧 ‘자연스럽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라의 화랑들은 어디서 어떻게 ‘놀았을까?’그렇다면 풍류도, 혹은 풍류정신이란 사상 체계 아래서 몸과 마음을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하늘과 통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놀았을까? 이를 추측할 수 있는 고문헌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의미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현대식 문장으로 바꿔본다. 이렇다.“신라 제23대 법흥왕 원년에 어린 사내들 중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화랑을 달리 이르는 말)라 부르고, 착한 선비들을 구하여 따르는 무리를 만들었다. 이들은 효(孝)와 공손함, 충성과 믿음으로 조직됐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이들 중 진짜 인재를 알 수 없음을 걱정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풍월주를 무리 지어 놀게 하는 가운데, 그들의 행동과 예의범절을 유심히 살펴 등용(登用)하고는 했다.”자,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풍류도는 신라사회의 최상급 이데올로기였고, 화랑의 절대다수는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풍류를 제대로 이해하고 익힌 화랑을 찾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을 터.지켜본 사람들(왕과 대신)과 놀았던 청년들의 신분을 감안할 때 이들이 매운바람 몰아치는 서라벌 공터에서 가악(歌樂)을 즐기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또한 ‘노는 자리’에 ‘술’이 없었을 리가 없다. 취중(醉中)의 행실은 인간의 됨됨이를 살펴볼 수 있는 긴요한 기회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여기에 부합하는 공간으로 ‘포석정(鮑石亭)’을 지목하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추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알다시피 포석정은 경주시 배동에 자리한 정원의 시설물 중 하나다. 돌을 이용해 휘어진 도랑을 타원형으로 만들어 물이 흐르게 했다.◆ 포석정 ‘유상곡수연’의 풍류 속에서 진짜 인재를 찾다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8권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는 포석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다.“서거정이 쓴 ‘동국통감(東國通鑑)’에 포석정지 근처에 성남이궁(城南離宮·왕의 별궁)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포석정은 이궁에 딸린 시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설치된 정자와 수로를 모두 포함한 이름으로 생각된다. 현재 정자는 없고 수로만 존재한다. 포석정은 다듬은 돌로 축조된 전복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수로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울창한 느티나무 숲 속에 있는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수로에 술잔을 띄워 흐르게 하고 그 잔이 자기 앞을 지날 때 시를 한 수 지어 읊는 유흥)을 즐겼던 곳이다.”어렵지 않게 그때의 풍경이 그려진다. 왕이 주관하고 다수의 고관(高官)들이 함께 하는 주석(酒席). 높은 벼슬아치의 아들인 화랑 여러 명이 성남이궁 포석정에 모였다. 짙푸른 숲 속에서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는 청아하고, 푸른 하늘엔 솜털처럼 부드러운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은 화랑들은 왕이 호명하며 내리는 제 몫의 술잔이 앞에 도착하기 전에 ‘멋진 시 한 편’을 생각해둬야 한다. 화랑들은 마음속으로 똑같은 혼잣말을 했을 것이다. “이번에 왕과 대신들의 눈에 든다면 궁궐로 불려가 높은 벼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술을 마시더라도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주사(酒邪)를 부려서는 안 된다. 나는 풍류도를 배워온 신라의 지식인이 아닌가.”신라시대 포석정에서의 연회(宴會)는 단순히 ‘놀고먹고 마시는 잔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직 임명의 권한을 가진 이들이 어떤 화랑이 ‘노는 일의 멋스러움이 세속적 경지를 벗어나 도저한 깊이에 올라있는 것인지’를 선별해 내는 일종의 테스트가 아니었을까?앞에서 언급한 책에 따르면 포석정은 안쪽 12개, 바깥쪽 24개의 다듬은 돌로 조립됐고,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의 양쪽은 돌 6개, 출수구 꼬리 부분은 4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수로의 너비는 31cm, 깊이는 21~23cm, 길이는 대략 22m쯤 된다.1991년엔 술잔이 수로를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도 측정했다. 결과는 약 10분 30초. 그 짧은 시간에 왕과 대신들의 마음을 뒤흔들 시를 떠올려 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 상태가 아닌가…. ‘품성과 재능을 인정받는 화랑’이 된다는 건 이처럼 몹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이런 과정을 통해 ‘풍류도’를 제대로 체화(體化)한 화랑이 가려졌다면 자긍심이 높았을 수밖에 없었을 터. ‘화랑세기(花90CE世記)’는 화랑들이 가졌던 프라이드(Pride)를 이렇게 쓰고 있다.“이전에 선도(仙徒)들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권면하였음으로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좁은 공간을 벗어나 드넓은 명산대천으로의 유람도…‘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에서 홍성암은 “공동체적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실천적 이념”이 풍류도라 규정하며, 그 성격을 다음과 추정하고 있다. 이는 화랑도가 지향하는 목표와도 맥이 닿는다.-개인적인 것보다 집단적인 행위를 통해 수련을 쌓는다-사회적 규범으로서 덕성을 함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연마한다-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긴다-수련 과정에서 능력이 인정되면 나라의 인재로 등용된다홍성암이 요약한 4번째 항목이 ‘젊은 리더를 가려내는 포석정의 연회’를 지칭하고 있다면, 3번째 항목 ‘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연마한다’는 21세기식 문법으론 ‘여행을 통한 자아의 성장’이라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2019년 여름. 수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배낭을 메고 먼 곳, 혹은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 1천300~1천500년 전 신라의 화랑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한 서술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등장한다. 아래와 같다.“실제로 풍류, 즉 화랑도의 유래는 ‘선(仙)’에서 나왔다. ‘선’은 불교 수용 이전부터 신라에서 숭배했던 신격들을 통칭하는 말로 여겨지는데, 삼산오악(三山五岳)을 비롯한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신들이 바로 그 ‘선’에 해당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화랑도는 그 시초부터 명산대천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던 것이며, 그들의 수련 장소로 전국의 주요 산과 강이 선택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실제로 신라시대 화랑들은 동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금강산의 풍경과 마주하기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지만, 당시의 교통 환경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과 감통편(感通篇)엔 요원랑, 예흔랑, 계원, 숙종랑 등이 강원도 통천 일대를 유람한 기록과 진평왕(재위 579∼632) 시대 화랑인 거열랑, 실처랑, 보동랑이 풍악(금강산) 여행을 계획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여기서 우스개 같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단상(斷想) 하나. ‘풍류도’에 기반해 성장한 신라의 청년 화랑들은 문재(文才)와 바른 주도(酒道), 여행을 통한 내적 성장까지 골고루 요구받았다.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청춘이 왜 이리 버겁고 힘겨운 것이냐”라는 푸념은 당시도 있지 않았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25

풍류정신의 ‘멋·한·삶’·각각의 개성 융합한 ‘한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다

‘풍류도’라는 철학·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육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들. 우리에겐 그들을 바라보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문학작품과 영화에서 묘사되는 화랑은 그 유형이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신라가 멈춤 없이 발전하고 인근 국가들과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년 리더인 화랑이 존재한다. 그들은 왕을 충성으로 섬기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의 정신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않았고, 전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기개로 무장한 강위력한 조직의 구성원들이었다.”지난 시절. 정통성과 합법성이 부족했던 독재 정권은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효과적으로 고취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황산벌 전투(660년)의 불리한 여건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전세(戰勢)를 뒤집은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 등을 ‘10대 애국 소년’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자면 20세기 중후반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화랑의 모습도 이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이쯤에서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신라의 청년 지도자들은 모두 ‘전투하는 기계(?)’에 불과했을까? 화랑이 ‘용맹’과 ‘애국심’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화랑을 지도했던 이념인 풍류도의 소프트웨어는 대체 뭘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2016년 발행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런 의문에 답한다. 책은 이렇게 쓰고 있다.◆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해야 진정한 화랑‘화랑도의 교육 방법, 수련 방법은 철저하게 조화적·중용적 인간상에 맞추어졌다. 삼국 정립기에 창설되고 조직화했던 만큼 화랑도가 무(武)의 수련에 치중하였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무에 못지않게 문(文)을 중시하여 문무겸전한 인재를 길러냈다. 또 인간의 정신과 육신을 함께 건전하고, 조화 있고, 균형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된다는 정신을 이 땅에 뿌리 내렸다.’이 설명처럼 화랑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용맹한 애국심’ 하나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신적 성숙과 학문에 매진하는 태도 역시 화랑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이었다. 화랑의 생활양식과 교육 방법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기도 하고, 가악(歌樂)으로써 서로 즐기기도 하며,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아주 멀어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를 보고 그들의 사정(邪正·그릇된 것과 올바른 것)을 알아서 그 가운데 좋은 사람을 조정에 천거하였다.”김부식의 진술처럼 화랑의 이념적 근간이었던 풍류도는 육체와 정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인간을 지향하고 있었다. ‘도의로써 연마한다’는 것이 이성적 영역의 학습이라면, ‘가악으로써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감성적 범주에 해당된다. 이 둘의 조화와 균형이 신라의 화랑들을 ‘점잖고 조숙하며 피 뜨거운 청년’으로 만들었던 게 아닐까? 앞서 말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런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해서다.“화랑들은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리면서도, 인간 본래의 정감과 순수성을 잘 갈고 닦았기 때문에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화랑들은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가악으로써 정감을 발휘했던 것이다. 국토를 순례하면서 애국심을 높이고 개인의 정감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풍류도는 오늘날 ‘한류(韓流)’의 뿌리?풍류도, 풍월도, 화랑도를 주제로 한 논문 여러 편을 검토하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풍류도를 지도 이념으로 성장했던 화랑을 ‘흥이 넘치고 멋을 알았던 신라 청년들’로 묘사하고 있었다.이는 ‘풍류’라는 단어를 ‘신명’ 혹은, ‘신바람’이라 바꿔 사용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학계의 일부 주장과도 맞물려 있다. 이처럼 신라의 화랑도는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탁월한 줄타기’를 보여준 선진적인 조직체였다.풍류도와 화랑도의 운영 체계를 살피다가 매우 흥미로운 논문 하나를 찾아냈다. 철학자 권상우가 2007년 ‘동서철학연구’에 발표한 ‘한류의 정체성과 풍류정신’이다. 권상우는 풍류사상의 특징을 멋, 한, 삶으로 파악했고 이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부연한다.“풍류의 ‘멋’에는 외형적인 멋과 내면적인 멋이 있다. 외형적인 멋은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현상이며, 내면적인 멋은 창의적이고 역동적이면서 개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은 여러 개성들을 어우르는 특징이 있음을 설명한다.또, 풍류에서의 ‘삶’이란 내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관이기보다는 현실의 생활세계를 강조하고 있다.”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권상우는 1990년대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돼 현재는 미국과 유럽까지 전파된 한국 대중문화의 유행 현상, 즉 ‘한류’의 뿌리를 ‘풍류정신(풍류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논문 ‘한류의 정체성과 풍류정신’은 한류가 발생할 수 있었던 요인을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기법, 열정, 활력, 다양성, 개성 등에서 찾고 있으며, 이런 특징을 한국인의 문화적 기질로 파악하고 있다.“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연출자, 배우, 관객이 하나로 어우러져 제작되는 경우가 많고, 내용에 있어서도 독자성과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어우러짐’이 한과 삶을 강조하는 풍류문화의 특징과 연결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화랑은 우리 민족의 얼”풍류도와 화랑이 가졌던 위상을 높이 평가한 사학자는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단재 신채호(1880~1936)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신채호는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까지를 담아낸 저서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화랑을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적 문장으로 풀어서 인용한다.“화랑은 신라 발흥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후세에 한(漢)문화가 발호해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과 풍속, 학술계를 지배할 때 가까스로 ‘조선을 조선되게’ 한 정신이다. 어느 시기 이후 화랑의 말과 글이 연기처럼 사라져 비록 직접적으로 감화를 받은 사람은 드물지만, 그 유풍(遺風·후세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간접적으로라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朝鮮史)를 말하는 것은 골을 빼고 사람의 정신을 찾는 것처럼 우매한 일이다.”권상우는 단재의 문장에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신채호 선생은 조선을 조선되게 하는 민족의 얼을 화랑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랑은 인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정체성으로서의 ‘화랑도’ 또는 ‘풍류도’를 말한다.” 이에 더불어 권상우는 풍류정신을 한국 문화의 원형이라 추정한다.앞서 말했듯 풍류정신의 특징은 멋, 한,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름다운 외모에 창의적인 개성을 갖추고, 각각의 개성을 융합시켜 동시대가 처한 현실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려 했던 한류. 그 거센 바람이 처음으로 불기 시작한 때인 1990년대 중반. 일본과 중국, 베트남의 대중들은 한국 문화콘텐츠의 힘을 ‘명확한 테마’ ‘넘치는 활력’ ‘격렬한 율동’ ‘뜨거운 열정’ ‘개성의 강조’ 등에서 찾는다고 입을 모았다.당시 동남아의 젊은이들은 “미소년, 미소녀로 구성된 그룹이 빠른 음악에 맞춰 역동적인 춤을 추며 폭발적인 에너지와 힘을 드러내는 건 다른 어떤 나라의 가수나 그룹도 흉내 내기 어렵다”며 열광했다. 이는 고대의 풍류도가 가졌던 ‘감성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현대 사회에서 발휘된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조금은 자의적 해석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채호가 말한 바 ‘조선을 조선되게 하는 우리의 얼’인 풍류도(화랑도)가 세계 속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건 ‘한국인의 정신’이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가정(假定)이 근거 빈약한 자만이거나, 쇼비니즘(Chauvinism)이 돼서는 곤란하겠지만.◆ 풍류도 정신에선 ‘페미니즘’의 향기도….한류의 진화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보이 밴드(Boy band)’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걸 그룹(Girl group)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여성 아이돌(Idol)들은 이 분야에서만큼은 일찌감치 양성평등을 이뤄냈다.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적지 않은 한국 여성 가수와 배우들이 아시아 전역 소녀들의 ‘롤 모델’이 된 형국인 것.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풍류도가 ‘여성 존중 의식까지 담고 있었다’는 학설은 독자들에게 좋은 차원에서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이와 관련해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6권 ‘신라의 언어와 문학’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신라 사회의 여성 존중 의식은 (유·불·선이 융합된) 고유의 신앙 풍류도 정신과 짝하고 있다. 풍류도를 실현한 구체적 표상인 화랑제도에서도 구성원의 시작은 소녀들인 ‘원화(源花)’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이후 소년 화랑들로 조직이 변화되었을 때도 그들에게 화장을 시켜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게 한 것은 풍류도의 정신이 여성적 세계를 지향하는 심미적 영성(靈性)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을 환기하는데 부족함이 없다.”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풍류도’는 파고들수록 그 오묘한 내적 시스템에 대한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신라의 통치 이념과 종교적 기반을 닦은 이들은 이미 1천500년 전 21세기의 ‘한류 열풍’과 바뀐 시대의 주류로 자리한 ‘페미니즘’을 예언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풍류도는 ‘미래학’의 범주에도 포함될 수 있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18

1천300년 전, 돌에 목표·언약을 담아낸 청년 둘은 화랑이었을까?

경주시 석장동에 자리한 화랑마을을 찾아가던 날. 도시의 아스팔트와 지붕을 적시던 세찬 소나기가 그치고 올여름 첫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한 세련된 기와가 인상적인 화랑마을. 그곳 전시장에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보물 제1411호)’을 만났다. 30㎝ 길이의 돌에 화랑의 결의가 새겨진 비석. 거기 쓰인 일흔네 자의 글씨를 오늘날의 문장으로 쉽게 풀어 쓰면 아래와 같다.“임신년 6월 16일 우리 둘은 더불어 맹세하며 여기에 기록한다. 앞으로 3년 이후에도 충성스런 도리를 가슴에 새겨 이를 지키며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만약 우리 가운데 하나가 이 다짐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크게 불안해진다고 해도 이 맹세는 지켜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지난날 약속했듯 다양한 책을 읽어 학업에도 정진할 것임을 다짐한다.”신라시대 청년들의 유교적 도덕성과 그 실천의지를 담아낸 ‘임신서기석’은 서두에 적힌 ‘임신(壬申)’이란 글자로 미루어 볼 때 임신년에 세워진 것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렇기에 신라 진흥왕 시절인 552년, 또는 진평왕 때인 612년, 혹은 성덕왕 재위 기간인 732년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역사학자들의 견해다.다른 어떤 물질보다도 내구성이 강한 돌은 변치 않을 의지와 숭배의 마음을 담기에 좋은 재료였다. 세계관의 중심이 신(神)에서 인간으로 넘어오기 전인 르네상스(Renaissance) 이전 시대. 이탈리아 사람들은 돌을 깎아 성당을 만들었다. 불멸한다고 믿는 신의 존재를 현실에서 보여주기에 그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1천 년 전 캄보디아에선 크메르(Khmer) 왕조의 사원과 궁전을 미려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건축물들의 재료 또한 돌이었다. 수백km 거리에서 코끼리 수천 마리를 동원해 실어온 돌로 만든 석조건물은 자야바르만, 수리야바르만 등으로 불렸던 왕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경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石丈寺)터 인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청년 지도자였던 화랑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비전을 가지고 생활한 것인지를 추측하게 해주는 귀한 사료(史料)”라고.◆ ‘풍류도’와 ‘임신서기석’은 어떤 관계가?다수의 연구자들이 내놓은 그간의 성과물들을 종합하면 화랑은 20세 이전의 신라 청년들이었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겨우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좀 더 범주를 넓힌다고 해도 대학교 1학년이나 사회 초년생에 불과한 또래다. 소년에 가까운 이들이 어떤 이념과 규범에 의해 교육받았기에 ‘임신서기석’에 쓰인 문구를 쓸 만큼 조숙할 수 있었을까? 의문과 다소간의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역사학자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 이념은 풍류도”라고 주장했다. 절친한 두 명의 화랑이 자신들의 맹세와 다짐을 뜨거운 불과 세월의 풍화작용으로도 온전히 없앨 수 없는 돌에 명명백백(明明白白) 새겨 스스로를 다잡고자 만든 ‘임신서기석’.여기에는 둘을 매료시켰던 ‘풍류도’의 향기와 흔적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풍류도’가 역사상 최초로 언급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857~?)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다.난랑(鸞郞)이란 이름을 가진 화랑을 기려 만든 비석을 해석한 ‘난랑비서’에서 유(儒)·불(佛)·선(仙) 통합주의자 최치원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다소 길지만 그 중요성을 감안해 현대적으로 해석된 문장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인용한다.“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삼교(三敎)를 본디부터 포함한 것으로서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主旨)와 같고, 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宗旨)와 같으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교, 도교, 불교를 효과적으로 융합하고 충돌 없이 조화시킨 ‘풍류도’가 바로 신라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화랑들의 정신적 지향점이 된 ‘현묘한 도(玄妙之道)’라는 것.‘임신서기석’에 자신들의 향후 목표와 언약을 담아낸 청년들은 화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풍류도(풍류정신), 혹은 풍월도의 가르침에 근거해 비문(碑文)을 새기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풍류도’란 단어가 생겨난 근원은…이처럼 신라사회와 그 사회를 주도했던 청년들의 조직 화랑도(花郞徒)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풍류도(풍월도)의 어원(語源을 찾아보는 작업은 의미가 작지 않을 터.철학자 한흥섭의 논문 ‘풍류도의 어원’은 주요 학자들의 견해를 치우침 없이 두루 소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한흥섭은 풍류도를 “고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 사상 가운데 하나”라고 정의하며, “한국 철학사에서 풍류도의 위상은 중국에서 유입된 유교, 불교, 도교와 비교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는 자료의 숫자가 적고, 신빙성 여부의 판단이 어려우며, 논리 전개에서의 객관적인 설득력 결여가 풍류도를 하나의 체계를 갖춘 학문적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풍류도의 어원’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풍류도의 본질과 뿌리를 찾아보자는 한흥섭이란 학자의 열정에서 출발된 것이 아닌가라고 짐작해본다. 그는 위에 언급된 논문에서 최남선(1890~1957), 안호상(1902~1999), 양주동(1903~1977)이 각기 주장한 풍류도의 어원과 그 의미에 관한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최남선 “풍류와 풍월의 어원은 부루”육당 최남선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다. 한흥섭에 따르면 최남선은 풍류도의 어원을 ‘부루’에서 찾고 있다.‘부루’란 예부터 존재한 고유 신앙이며, 그 신앙의 요지는 ‘하늘의 도(天道)’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최남선의 주장. 더불어 최남선은 이 신앙이 유교와 불교에 앞서 있고, 유교·불교가 유입된 후에도 함께 존립했다고 봤다. 그렇다면 육당이 풍류도의 어원이라 칭한 ‘부루’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단어일까? 최남선의 저서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부루는 ‘밝의 뉘’가 이리저리 변하여 달라진 말이다. 대개 ‘밝’은 광명과 신(神)이요, ‘뉘’는 세계이니 ‘밝의 뉘’라 함은 광명세계, 곧 신의 뜻대로 하는 세상이란 의미다. 훗날 ‘밝의 뉘’란 말이 여러 가지로 변하고 또 이것을 한문으로 이리저리 쓰는 가운데 그 종교적 진면목이 일정 부분 가려지게 되었지만, 그 고갱이(핵심)는 꾸준하게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위의 인용을 볼 때 최남선은 ‘풍류도’를 한국의 고대 신앙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종교적 지향점이 ‘하늘의 도가 실현되는 밝은 세상’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한흥섭은 이 논지(論旨)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해 육당이 말한 바 ‘부루’ 즉 풍류도의 골자는 ‘홍익인간’이고, 주장의 연원은 ‘단군사화’라고 추정했다.◆ 안호상 “배달길의 이두문(吏讀文)이 풍류도”양주동 “풍류와 풍월은 순수 우리말인 ㅂ에서 유래”한흥섭에 의하면 사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은 “기본적으로 배달교(단군교)에 근거한 주체적 민족주의자”다. 그렇기에 단군의 가르침을 우리 민족 고유의 정통적 철학과 사상으로 믿었고, 그것을 배달길(風流道 또는, 화랑도)로 표현했다. 안호상이 정의하는 풍류도(풍월도)는 ‘배달길’의 이두문(吏讀文·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것)이다. 아래 인용을 보자.“배달길을 풍월도라, 또 배달교를 풍류교(風流敎)라 번역한 것은 순전히 우리말의 음을 따라 이두문으로 적은 것이다. 풍월도의 풍(風)이 옛날엔 발함 풍자요, 또 바람을 배람이라고도 했다.또 풍월도의 월(月)은 달 월자다. 이들 ‘발’과 ‘배’와 ‘달’을 합쳐보면 풍월도는 ‘배달길’이란 말이다. 또한 풍류도의 류(流)는 흐를 류자인 동시에 달아날 류자임으로 풍류도 역시 ‘발달길’이 된다.”안호상은 신에 대한 숭배, 조상 공경, 인간 사랑이라는 배달교의 3가지 덕목이 풍류사상의 핵심 내용과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논문 ‘풍류도의 어원’에서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것은 ‘전설적 국문학자’ 양주동의 풍류도 관련 주장이다. 양주동은 사뇌가(詞腦歌·향가)의 해석 과정에서 풍류도와 풍월도가 우리나라 고대(古代) 종교사상인 ‘ㅂ道’를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 빌려온 글자라고 말한다. 즉, 풍류와 풍월은 순수 우리말인 ‘ㅂ’에서 유래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ㅂ’과 ‘ㅂ道’는 뭘 의미하는 걸까? 이에 관해 한흥섭은 이런 해석을 내놓고 있다.“양주동의 글자 풀이에 의하면 ‘ㅂ’은 광명(光明)이나 국토(國土)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ㅂ道’ 즉 풍류도는 ‘광명도’나 ‘국토도’가 되고, 이는 곧 태양 숭배나 자연 숭배 사상임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은 최남선이 말한 광명계의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적 종교사상과도 일치한다.”광명세계로 가고자 하는 의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 자연을 대하는 겸양한 태도…. 기자가 판단하기에 풍류도는 이런 이데올로기의 집합체로 보인다. ‘임신서기석’을 뒤로 하고 화랑마을을 내려오는 길. ‘풍류도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자신과 나라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홍안(紅顔)의 청년들이 떠올랐고, 문득 1천300년 전 두 화랑의 얼굴이 궁금해졌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11

‘격’과 ‘멋’ ‘풍치’를 갖춘 놀음… 1천500년 전 청년들은 대체 어떻게 놀았을까?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1818~1883)에 기대 설명하자면 이것은 ‘토대’인가 ‘상부구조’인가? 아니, 시간을 되돌려 150여 년 전 독일로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땅의 수많은 역사학자와 사상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분분하다.혹자는 “충효와 유희가 결합된 한국 정신의 뿌리”라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미륵신앙과 밀접한 한국 종교사상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젊은 학자들 가운데는 “최근 아시아는 물론, 유럽 전역을 휩쓰는 한류(韓流)의 출발점”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전 세대에선 화랑도(花郞徒)와 동일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바로 ‘풍류도(風流道)’를 놓고 오가는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사전적으론 풍류도가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원불교 대사전’의 경우 “풍류를 닦던 신라의 청소년 심신수련 조직. 화랑도(花郞徒), 낭가, 국선도(國仙徒)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신라 진흥왕대에 왕과 귀족의 자제로 조직된 이후 국가의 문무(文武) 인재를 이에서 취했다. 그 기원은 민족 고유사상으로 불교·유교·도교 등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유습은 고려 이후에도 이어져 문화·예술 및 풍속에 영향을 미쳤다”고 쓰고 있다. 비교적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이다.반면 또 다른 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풍류란 속되지 않고 멋스러우며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풍류도라 함은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도야를 목적으로 하여 멋스럽게 노는 것을 말한다. 즉 노는 것을 ‘도(道)’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것을 이르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해가 어렵진 않지만, 다소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풍류도를 둘러싼 갑론을박(甲論乙駁)과 설왕설래(說往說來)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속돼왔고, ‘역사 관련 논쟁’이라는 특성상 어떤 학자도 선뜻 어느 한쪽의 견해에 손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다.개인적 고백을 덧붙이자면 ‘풍류도’에 관해 쓴 몇 권의 책과 10편이 넘는 학자들의 논문을 꼼꼼히 읽고 검토했음에도 그 맥락과 핵심을 짚어내기가 힘겨웠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기자의 한계 탓이다. 하지만 이 난감함은 풍류도에 관해선 현재까지도 원체 다양한 이론과 견해가 충돌하고 있고, 아직까지 누구나 고개 끄덕일 ‘100%의 수긍’을 이끌어낸 학설이 없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이기도 할 것이다.◆ 사학자 최광식 “풍류도는 화랑도의 지도이념”이처럼 복잡다단한 학계 풍경에서 구구한 부연 없이 ‘풍류도’에 관해 비교적 심플하게 정의하고 있는 역사학자 중 한 명이 고려대학교 최광식 명예교수다. 그는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라는 논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신라시대에 활동했던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의 지도이념이었던 풍류도는 신라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짤막한 문장을 통해 최광식은 풍류도가 토대가 아닌 ‘상부구조’였다고 설파한다.학자에 따라 토착신앙, 불교, 유교, 도교가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는 각각의 견해가 분분한 가운데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이념, 즉 풍류도는 “그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신라 멸망 이후에도 풍류도와 화랑도는 명칭과 사회적 기능 변화의 과정을 거쳐 고려로 계승됐다는 것이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런 발전적 계승은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의 논거(論據)처럼 풍류도가 토착적 고유 신앙을 기반으로 해 외래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에도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임으로써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획득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역사학자 김태준 “풍류정신은 화랑도의 바탕 사상”앞서 말했듯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이념이 풍류도”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다른 하나의 단어가 자연스레 부각된다. 풍류도 혹은 화랑도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풍월도가 바로 그것. 세간에선 ‘화랑도=풍월도’라고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다.사학자 김태준은 이런 시각을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요약·정리하고 있다. 그의 논문 ‘화랑도와 풍류정신’을 통해서다.“화랑에 대한 기록이 영성하여 모두 뚜렷한 뜻을 전달하지 못하는 가운데, 화랑의 사적을 전한 기록들이 반드시 ‘풍류’와 ‘풍류도’를 함께 전하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그런데 이를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풍류라 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풍월도’라 하였다. 같은 개념의 표현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이를 신라 당대의 상황에 맞춰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풍류도와 풍월도는 모두 화랑의 사상이자, 국선(國仙·화랑의 리더)의 정신이며, 동시에 나라를 흥하게 하고자 한 이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준은 여기에 이런 주장을 덧붙이고 있다.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 정신이며, 사람들을 교화해 인간다운 삶을 살게 만든 사상이 바로 풍류도”라는 것.김태준 역시 ‘화랑도와 풍류정신’에서 최광식과 유사한 어투로 화랑과 풍류도(풍류정신)의 관계를 요약하고 있다. 이런 문장이다.“풍류정신은 화랑도의 바탕 사상이면서 화랑도를 일으킨 정신이었고, 지금껏 이어지는 민족정신의 바탕이기도 하다.”◆ ‘풍류도에 관한 연구’는 곧 화랑도에 관한 연구경주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역사와 문학에 관해 연구해온 강석근 박사는 최근 기자와의 만남에서 “풍류도는 그 개념의 정리부터가 어려운 문제”라며 “분분한 학설과 다양한 개별 학자들의 주장을 하나의 의미망 안에 묶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려줬다. 무시무시한(?) 어드바이스였다.하지만 어떤 난제(難題)에도 해답은 존재하는 법. 풍류도에 관한 독서와 논문 읽기, 학자들의 조력(助力)을 받으며 앞으로 이어갈 연재기사의 방향을 대략적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최광식과 김태준의 학설처럼 풍류도(풍류정신)와 화랑도는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그런 차원에서 접근을 때로는 거시화(巨視化), 상황에 따라 미시화(微視化) 해보기로 한 것이다.일단 가장 먼저 풍류도의 기원에 대해 살필 예정이다. 풍류도는 신라 진흥왕 시절 선발된 원화(源花)를 전신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풍류도의 역사가 원화에 앞선다”는 의견도 내놓는다. 이에 각각의 사학자들이 어떤 근거로 자신의 학설을 펼치고 있는지 소개할 계획이다.풍류도가 고대 신라에서 지녔던 위상과 종교와의 관계도 주요한 취재·탐구 대상이다. 신라는 씨족사회로 상호 협동하는 태도가 다른 어떤 고대국가보다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름다운 정신과 육체를 숭배하는 풍토도 강했다고 한다.대표적으로 가야국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풍월주(風月主) 사다함은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인재였다고 알려졌다. 이런 ‘아름다움에 관한 숭배’가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도 밝혀볼 예정이다. ‘풍류도’와 ‘화랑도’란 어원의 뿌리를 찾아보는 것도 과제의 하나다.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인이 변화해 풍월주가 됐다는 학설과 고조선의 고유 신앙인 부루교단이 풍류도의 모태였다는 주장 등이 이와 관련된 취재 대상이다.풍류도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됐는지에 관한 궁금증도 풀어보게 된다. 운영 주체가 민간에서 국가로 변화함으로써 체계적 조직화를 이룬 풍류도는 무리를 이끄는 몇몇 리더 아래 여러 개의 문벌(門閥)을 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품과 함께 덕(德)을 지도자의 으뜸 자질로 본 풍류도의 이념도 더불어 취재하게 된다.‘풍류도’를 지도이념으로 신라사회의 리더로 활동했던 ‘화랑’이 자신들 행동의 금과옥조로 삼았던 ‘세속오계(世俗五戒)’에 관해서도 살피게 된다.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요약되는 세속오계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풍류도, 화랑, 풍월도를 찾아가는 의미 있는 여행특정한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에 경도되지 않고 시대의 다양성을 포용함으로써 신라의 청년리더였던 화랑의 지도이념인 된 풍류도. 사학자 김태준은 ‘화랑도와 풍류정신’을 통해 풍류도와 화랑이 당대에 가졌던 위상과 지향을 이렇게 요약했다.“화랑은 20살이 못되는 젊은 소년들이 수련하는 무리였다. ‘국선’이나 ‘성인’으로 존중된 사례들이 역사 기록을 장식하고 있지만, 한편에서 보자면 단순히 젊은 무리들의 수련단체이기도 했다. (리더였던 준정과 남모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원화’의 실패담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젊은 청소년의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으나, 사람을 감동케 하는 인격의 수련과 오랜 순례여행, 거기서 보고 들은 견문과 젊은이들의 우정이 화랑 풍류의 가장 중요한 성격이었을 것이다”1천500년 전 신라를 해석하는 주요한 키워드인 풍류도, 화랑도, 풍월도의 뿌리와 줄기, 꽃과 열매를 찾아가는 흥미로운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됐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 어린 비판을 기대한다.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19-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