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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풍류정신 핵심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국민 대부분은 한민족이 단군의 자손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아직도 이를 입증하는 명확한 연구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우선 고대사 연구가 선결되야 하는 과제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 어떤 학자도 명쾌한 정의를 내린 적도 없고,연구자들 간에 의견만 분분하다. 그리스의 경우 그리스 신화를 통해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단서`를, 이스라엘과 서아시아의 역사는 `성서`로 복원되고 있다.중국도 중화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위해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 이어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진행하면서 뿌리를 찾고 있다.이런 가운데 풍류정신(風流精神)을 통해 우리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연구하면서 대한민국 최고 사상가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을 좇는 이가 있다. 그가 현우(玄牛) 정형진(56) 선생이다.범부도 풍류정신 연원·내용 등 자세하게 안밝혀한민족 초기 고대사 연구가 풍류도 이해에 핵심단군왕검~삼한형성과정 연구 10여년 걸쳐 완성풍류정신, 통일한국 넘어 세계정신으로 손색없어-경주는 어떤 곳인가.30살 되던 해에 경주에 내려 왔으니까 거의 27년 되었으며, 하고자 하는 공부를 할 공간으로 적합한 곳이 경주라 생각했다. 이곳 경주는 한국정신문화의 진정한 중심이다.경주에서 풍류정신이 태동하였고, 그것이 화랑도가 되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원효스님이 무애행을 하면서 풍류정신의 핵심인 접화군생(接化群生)을 실천했다.신라인 최치원이 동방의 정신에 주목했고, 조선조 말에는 최수운 선생에 의해서 다시금 풍류정신이 꽃피웠다. 그 풍류정신을 신생 대한민국의 정신으로 되살리고자 한 분이 경주가 낳은 천재 범부선생이다.-학업 수행의 방향은.우리 고유의 사상인 풍류도에 대한 좀 더 확실한 답을 얻고 싶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거창하게는 한민족 고유의 사상과 그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의 맥(흐름)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사실 풍류도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조금만 들어가 보면 앞이 절벽이다. 연구논문을 살펴보면 그 절벽 앞에서 모두 멈추고 있다.범부선생은 화랑정신에는 세 가지 요소, 그러니까 종교적 요소, 예술적 요소, 군사적 요소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연구를 통해서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군사적 요소와 예술적 요소다. 가장 문제가 되고 중요한 `종교적 요소`는 밝히기 어려워 아무도 해내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풍류정신 연구에 애로사항은.문제는 바로 고유한 풍류도가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사상의 연원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범부도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데에는 위대한 `풍류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범부 연구자인 정다운이 지적했듯이 (범부선생은)풍류정신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라고 그 어디에도 충분히 자세하게 밝히지 않았다. 범부는 자신의 글에서 그 답을 찾을 길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이유 중 하나는 문헌자료의 부족이고, 둘은 풍류정신을 살려온 조상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끌었는가를 몰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초기 한민족을 구성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저는 풍류도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민족 초기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풍류도를 이해하기 위한 전초 작업으로 한민족 초기 형성사를 연구했다는 것인가.어쩔 수 없었다. 그 작업이 이미 선행되어 있었다면 저도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민족 초기 형성사를 연구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또한 문헌자료가 부족하다.조상들이 남긴 종교유적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멀리는 만주와 중원 지역도 여러 번 답사를 했다. 조상들이 땅에 남기 글(地文)은 조상들의 종교와 문화를 추적하는 귀중한 단서가 되었다. 15년 정도 독서와 사색, 호흡수련을 하거나 유적지를 찾아다니고 나니 한민족 초기 공동체에 대한 실마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2003년, `부여족의 기원과 이동, 고깔모자를 쓴 단군`(백산자료원)을 발표하기 시작해서 올해(2014) 5월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까지 5권을 발표했다.이로써 제가 목표한 한민족 초기 공동체의 역사를 완성했다. 단군왕검시대부터 삼한이 형성되는 과정까지를 정리했다.-연구결과 풍류도에 대한 답을 제시할 단서를 찾았나.원하는 답은 어느 정도 찾았다고 확신한다. 한민족 초기 공동체를 구성했던 사람들이 유라시아 신석기 문명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고, 그들이 이동하면서 가지고 온 정신문화가 바로 풍류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제가 최근에 발표한 책 제목이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인데, 책 제목을 그렇게 부친 이유는 기원전 24세기경 요서지역에서 출발한 단군왕검사회인들이 1차적으로 요동과 서북한 지역으로 이동했으며(기원전 13세기 말), 이들이 역사에서 진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이며, 그 흐름의 마지막 종착지가 진한 사로국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 진한 사로국의 초대 왕으로 추대된 분이 바로 박혁거세다. 그가 단군왕검의 제정일치적 종교문화를 계승하고 있고, 그의 아들 남해왕을 차차웅이라고 불렀으며, 통일신라 초기의 대학자 김대문은 차차웅은 무당이라고 해석한 것이 그 증거다. 풍류도는 바로 박혁거세 집단이 계승해온 정신이었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남해 유리왕이 시조묘를 세우고 누이 아노(阿)가 제사를 맡은 것이 화랑의 기원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절반은 맞는 셈이다. 특히, 범부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풍류정신의 연원을 고조선 시대의 신도(神道)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 신도가 정확히 동북아시아 종교사에서 어떤 것인지 규명할 수 없었다. 단지 무(巫)와 관련 있을 것이라고만 추측했고,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군왕검사회의 주(主) 종교가 어떤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단군왕검사회부터 계승되어 온 종교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그 사회를 주도한 세력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몰랐던 것이다.-풍류정신의 핵심은 무엇인가.풍류정신의 핵심은 `홍익인간`이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최치원이 쓴 난랑비의 서문에서 `(풍류도인은)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接化群生).`고 한 것은 바로 `홍익인간`의 다른 표현이다. 지금도 `보편적 복지`니 `선별적 복지`니 하는 논쟁도 국민을 두루 살펴 널리 잘 살게 하는 것이 바로 홍익인간하는 것이고, 접화군생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멋진 큰 삶`을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풍류정신이 앞으로 `통일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나.풍류정신은 통일한국 뿐만 아니라 21세기 세계정신으로 내 놓아도 손색이 없다. 풍류정신은 이성적 판단에 따른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실상에 대한 지극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실천할 수 있는 정신이고, 수운 최제우가 그랬다. 범부는 `화랑외사` 서에서 “`얼`의 앉을 자리만 닦아지면 아무 것이나 다 이룰 수 있는 `법`”이라고 했다.풍류정신의 핵심은 생명[=바람=숨=목숨]의 흐름, 즉 풍류(風流)를 올바로 이해하고 함께 대동사회를 이루어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21세기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영원히 진리일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 가장 부족한 `공적정신`의 회복도 풍류정신의 회복으로 가능하다. 물론 풍류정신이 통일시대의 정신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풍류정신에 대한 연구와 그 결과물을 대중들과 함께 나누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풍류정신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주체사상에 물들어 있는 북한 주민들도 한민족의 진정한 주체사상인 풍류정신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도 화랑도와 맥을 같이 하던 조의선인제도가 있다.◇현우 정형진은1958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1985년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부터 현재까지 경주에 머물면서 한국 고대사와 고대 종교문화를 연구. 장기간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주도한 지배 종족에 관한 연구서를 출간했다. 저서로 한민족의 주요 구성 종족인 부여족의 기원과 이동에 관한 연구서인`고깔모자를 쓴 단군`(백산자료원, 2003년), 신라 김씨 왕족의 뿌리를 밝힌`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일빛, 2005년),한민족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환웅족의 유라시아 이동사인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일빛, 2006년) 등이다. 논문으로는`시경 한혁편의 한후와 한씨조선에 관한 새로운 견해`(단군학연구 13호)가 있다./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2014-11-26

다솔사, 대한민국 근대사 사상적 발원지 꼽아도 무리없어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산 86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 말사 다솔사(多率寺). 이 다솔사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일제 강점기 때 범부(凡父) 김정설(鼎卨.이하 범부)을 비롯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등이 이곳을 대한민국의 독립(獨立)을 위한 항일투쟁 거점지(據點地)로 활용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특히, 이 사찰이 대한민국 근대사의 문화사적,사상적 발원지라 해도 무리가 없으며, 학계에서도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다솔사와 인연 깊은 4人김정설 항일투쟁 거점 삼으며 사상 연구 `일취월장`최범술 독립지하조직 본산된 비밀결사 `만당` 창당한용운 1917년~1918년 독립선언서 등 초안 작성김동리범부사상 계승… 문학의 거작 `등신불` 완성다솔사는 최초 503년(신라 지증왕 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개창하면서 영악사(靈岳寺)라 했다. 636년(선덕여왕 5) 자장(慈藏)이 사우 2동을 짓고 다솔사(陀率寺)로, 다시 의상(義湘)이 676년(문무왕 16)에 영봉사(靈鳳寺)로 고친 것을 신라 말기 도선(道詵)이 불당 4동을 증축하면서 `다솔사`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중건하고, 조선에 들어와 사세를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숙종 때에 큰 중건불사가 행해졌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1748)를 비롯해 적멸보궁(寂滅寶宮)·응진전·명부전·선실·요사채가 있는 중요 사찰이다.범부는 16세 때 고향인 경주에서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군중집회를 시도한 적이 있다. 그는 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경주 남문에 격문을 붙이고 청년들을 규합해 경주와 울산에 위치한 외동면 치술령으로 들어가 바위굴에서 생활하며 소규모 유격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어 산사에 들어가 초막(草幕)에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읽거나, 다양한 병서를 탐독했다.그의 항일의지는 광복 때까지 지속되면서 이 과정에 일경(日警)으로부터 불온사상가(不穩思想家)로 찍히는 등 요시찰대상(要視察對象)이 된다. 따라서 범부의 일제 강점기 행적에서 가장 두드러진 곳이 이 `다솔사`고,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그가 더욱 일취월장한 곳도 여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 성하다.그가 이곳으로 온 배경은 다솔사 주지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1979)과의 만남이다. 1934년 나이 38세에 다솔사에 들어간 범부는 이곳에서 일본 천태종 비예산문(比睿山門) 이하 대승직자(大僧職者)들과 대학교수단 40여 명을 대상으로 청담파(淸談派)의 현이사상강의(玄理思想講義)를 1주일간 진행했다.여기서 식민지 국민이 어떻게 침략국의 지식인들에게 `사상`을 강의할 수 있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살아있는 한국의 양심이자 지성인 김지하(芝河)가 범부를 두고 `하늘 아래 최고 천재`라 언급했듯이, 범부는 19세에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 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제대(東京帝大)와 경도제대(京都帝大) 등 굴지의 대학에서 청강하고 일본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특히 그는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해인사(海印寺) 사건에 연루되어 1941년과 1942년에 경기도 경찰국와 경남도 경찰국에 끌려가 장기간 감옥생활을 했다.범부 외손자 김정근 전 부산대 교수가 “범부는 다솔사에 머무는 동안 수시로 일제 형사들의 방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형사들은 마루에 올라 일단 큰절을 하고 안부를 물었다”는 증언에서 보듯 요시찰대상자이지만 일경은 그에게 예(禮)를 갖추었다.범부의 막내 동생 김동리도 생전에 백씨와 관련된 기록을 `망나니들과 어울리다`는 작품에 남겼다. “어느 날 아침 형이 경기도 경찰부로 붙들여갔다. 이유는 독립운동 운운(云云)이었다.형님이 경기도 경찰국으로 잡혀간 뒤부터 나는 가슴에 담이 붙고 소화불량증이 생겼다.(중략) 나의 병세는 형님의 구속과 석방에 따라 묘한 반응을 보여주었다.형님이 경기도 경찰국에 구속되어 있는 동안 갈비뼈 밑이 찌릿하게 아프고, 목구멍에서 무엇이 넘어오던 병세는 그해 가을 형님의 석방과 함께 씻은 듯이 나았다가 이듬해 봄 형님이 경남 경찰국으로 잡혀가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다시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동리는 1934년 나이 22세 때 범부(당시 38세)와 같이 다솔사에 들어왔다. 동리에게는 범부가 `형`이 아닌 `스승`의 위치에 있었다.김정근 교수는 “동리에게는 범부는 너무도 소중한,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것 같다.범부의 아픔은 곧 동리의 아픔이었다”고 말한다. 동리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백씨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그가 후일 임화계통의 경향파 문인들과 대립하며 논쟁을 벌일 때 `제3휴머니즘` 또는 `본격문학`이라고 하는 간판을 전면에 내 건 적이 있었다. 이 입장은 바로 백씨와의 교감 속에서 직조된 것이다. 동리도 이 절에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등신불`을 완성했다.다솔사를 깊이 들어가면 항일투쟁 본거지임이 확인된다. 당시 1930년대 다솔사 주지는 효당이다. 효당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 일본 대정대학 불교과를 졸업한 신지식인이다. 그가 주지를 맡게 되면서 이 절은 독립지하조직인 만당(卍堂)의 본산이 되는 등 항일운동 은신처가 됐다. 한일합방 후 불교청년운동이나 유신회운동 등 공개적인 불교운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이에 공개적인 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백성욱·김법린·김상호·이용조 등이 1930년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합의해 여러 동지를 규합한 다음 비밀리에 창당선서를 하고 `당명`을 `만당`이라고 했다. 강령을 정교분립(政敎分立)·교정확립(敎正確立)·불교대중화 등을 채택했다. 이들은 입당 시 `비밀한사엄수 당의절대복종`(秘密限死嚴守 黨議絶對服從)의 서약을 했으며,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선언과 강령 모두 구송(口誦)했다. 당수로는 만해 한용운을 추대했으나, 만일의 경우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당사자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만해는 1917년~1918년 이 사찰에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초안을 작성했고 환갑 기념으로 효당과 범부와 함께 황금편백을 식수하는 등 3인의 관계는 특별했다.이처럼 다솔사는 일제 강점기 때 항일운동의 핵심세력들이 활동한 역사적 위치와 범부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광복 이후 대한민국 호의 국민윤리, 건국철학 등을 제시하는 사상적 위치를 안고 있다.또한, 김동리라는 한국의 대문호 작품 배경에 이곳의 흔적이 담겨져 있다.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은 “사천 다솔사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이 사찰에서 일제 강점기 동안 이뤄졌던 사실을 심층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2014-11-12

정종섭 안행부장관이 보는 풍류정신과 범부(凡父) 김정설

대한민국 정신문화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사건을 비롯 급성장하는 경제 속에 국민정서가 정체성을 잃으면서 갈등문화만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해소하고 국민 대통합을 이끌어 내기위한 새로운 `국민정신운동` 창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본지는 대한민국 정부 출범 당시 국가 정신적 틀인 `국민윤리`와 국가 방향타를 제시한 위대한 사상가 범부(凡父) 김정설(鼎卨·이하 범부) 선생의 풍류정신(風流精神)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재조명본지 10월22일자 10면 보도한 바 있다. 범부의 풍류정신 속에는 통일(統一), 국민운동(國民運動) 등이 포괄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현 정부를 비롯 미래정부도 통일이란 큰 틀을 일궈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와 관련, 본지는 평소 정신문화운동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져 온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을 만나 `풍류정신`에 대해 들어봤다.박정희 전 대통령, 범부를 새 국가건설 사상적 스승 삼아민주주의·자본주의 등 우리에 맞게 새롭게 디자인할 때-풍류(風流), 풍류정신(風流精神)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장관의 견해는.△풍류사상은 범부(凡父) 선생이 동서양 학문, 특히 우리 상고사(上古史)를 공부하고, 우리 민족의 원류를 찾아내려고 한 노력의 결과로 제시한 개념이어서 제가 말씀드리기에는 조심스럽습니다.범부 선생의 우주, 인간, 자연에 대한 사상은 천재적인 두뇌와 동서양 학문을 공부한 후 피력하신 것이어서, 그 스케일의 방대함과 치밀함에 학자들도 놀랄 정도입니다. 아직 제 수준으로는 그자체를 이해하는 것마저 어렵습니다. 한국 지성사 또는 지식사에서 내노라 하는 한용운, 김법린, 최범술, 곽상훈, 황산덕, 이항녕 등 여러 분들도 범부 선생의 영향을 받은 분들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평소 풍류정신(風流精神)과 범부 김정설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근현대사에 풍류정신을 주창한 분이 범부 김정설 선생입니다. 구 한말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해방과 건국시기 그리고 60년대를 관통하며 우리 민족의 사상적, 정신적 원형을 찾아 이를 바탕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철학(建國哲學)과 정신적 기반을 수립하고자 치열하게 살다간 천재적 사상가(思想家)이자 학자(學者)이며 경세가(經世家)이기도 하지요.또, 동서양의 철학, 종교, 역사, 정치 등에 관한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지식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과 민족계몽운동(民族啓蒙運動), 건국운동(建國運動)을 실천한 인물이고, 한국 지성사의 중심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동리(東里) 선생의 큰 형님되시는 분이지요.▲ 대한민국 건국 철학과 국민윤리를 제시한 위대한 사상가 범부 김정설.-새마을 운동은 풍류정신이 바탕이 됐고, 국민윤리(國民倫理) 교과서도 `풍류정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데 사실인가.△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이후 새 국가건설의 사상적 스승으로 삼은 분이 범부입니다. 범부 선생은 해방 후 중요한 건국시기에 이승만 자유당 정부와 장면 민주당 정부가 건국철학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권력투쟁(權力鬪爭)을 일삼고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여 건국기의 혼란을 키워왔다고 강하게 비판하였지요. 5·16 이후 `민족개조(民族改造)`니 `인간개조(人間改造)`니 하는 주장들도 지성의 경박(輕薄)과 무지의 소산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상계의 중심인물로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가져 왔던 고유 사상인 풍류도(風流道), 사익을 초월하여 나라와 만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지정(至情)`정신, 뛰어난 능력을 살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정신 원류인 도의(道義)정신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하여 주체적인 국가를 세우자고 역설하였습니다.특히 민주주의는 민본(民本), 민주(民主), 민권(民權), 민복(民福)이라고 하고, 이는 시대적 가치이며 우리 고유 정신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라고 주창했었지요. 서양의 어설픈 사조(思潮)에 우왕좌왕하지 말고 일제식민지를 거치면서 말살되어간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속의 영성과 철학과 도의정신을 되살려 이를 건국원리로 하고, 그 한 방법으로 국민교육과 국민운동을 전개하는데, 국민윤리의 정립도 이에 포함되는 것이었습니다.동양과 서양학문을 천재적 능력으로 섭렵한 범부 선생은 일본의 중역에 의한 지식을 멀리 하고 원서를 읽을 것을 지식인들에게 강력하게 주문하고, 해방 후 60년대까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이론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비판하였습니다.박정희 전 대통령이 50년대와 60년대 초기의 혼란을 바로 잡는일에 공산주의의 척결, 국민윤리의 정립과 교육 그리고 새마을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한 것에서는 범부선생의 `건국사상`과 방략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재 국가가 급성장하면서 정신문화가 상실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장관 입장에서 `국민운동`으로 `풍류정신`을 도입할 의사가 있나.△풍류정신의 도입 이전에 한국은 그 동안 부분적으로 수입한 지식과 사상과 제도가 뒤엉켜 지금까지 온 셈이지요.우리가 독자적으로 만든 것은 별로 없고. 그나마 한국인의 우수성으로 이런 난맥상을 헤쳐온 것으로 봅니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등도 이제는 제대로 인식하고 우리에게 맞게 `디자인`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물론 모든 지식과 정보가 실시간 공유하는 시대에 우리 것만 찾고 이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인간성의 회복, 공동체 정신의 회복, 공존 상생, 천인묘합의 삶을 위한 `정신운동`은 필요하다고 봅니다.아(我)와 비아(非我)의 논의에서 인간과 자연은 `아`와 `비아`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곧 아(我)라고 한 범부선생의 통찰력은 환경보호, 생태주의 등의 서구적 생각을 포함하는 더 큰 자연관이지요. 이에 따르면 우리의 삶의 방식도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요.그리고 국민 대통합과 통일, 새로운 정신문화 창조를 위해서 풍류정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대담·정리/윤종현기자yjh0931@kbmaeil.com

2014-11-05

경주가 낳은 신동, 12세때 사서삼경 떼 김지하 “현대 한국 최고의 천재라 생각”

살아있는 한국 최고의 지성이자 빛나는 양심 김지하(芝河)는 한 인물을 이렇게 평가했다. “현대 한국 최고의 천재(天才)라고 생각한다.이 사람은 때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참 천재였다.” 김지하 시인을 움직일 수 있을만큼 영향을 준 이는 바로 凡父(범부) 김정설(鼎卨·이하 범부)선생이다. 그의 존재가치는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 그리고 5·16 군사정부까지 정신문화를 비롯, 국민윤리 등 대한민국 국민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다만, 그를 아는 이는 학계 등 일부 지식층 속에서 회자될 뿐 잊혀진 천재로 기억되고 있다.김종직 15대손이자 문학계 거두 김동리의 맏형日서 철학공부…칸트·노자사상 관련 저술 펴내일제땐 `주요 사상범`… 박정희 멘토로도 역할범부는 1897년 2월18일 당시 경주군 북부리에서 태어났다. 선산 김씨 점필재 김종직의 15대손이다. 특히, 범부는 우리나라 문학계 거목 김동리의 맏형이기도 하다. 그는 4세 때부터 13세까지 김계사(桂史) 문하에서 한문칠서(사서삼경) 등을 익힌 신동이었다.한일합병 다음해인 1911년 경주 김씨 옥분과 결혼한 그는 병약한 몸이지만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창의(倡義:의병을 일으킴) 를 시도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그렇지만 그는 김종직의 후손이라는 내력을 드러낸다.반일사상이 가동된 그는 경주 남문에 격문을 붙이고 산사에 들어가 초막에서 월남망국사를 읽고 여러 가지 병서를 탐독했다.19살이 되던 해(1914년) 그는 안희제가 설립한 민족기업 백산상회의 장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 갔다. 거기서 경도제대(京都帝大), 동경제대(東京帝大) 등에서 청강하고 일본 학자들과 폭넓은 교류를 했다. 25살에 귀국한 그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서 강의했다.그 후 병을 얻어 부산에서 칩거하며 경사자집(經史子集)과 성리학(性理學) 계통을 공부했다. 이 결과 1924 자신의 이름으로 `노자(子)의 사상과 그 조류의 개관`을 발표했다. 이어 `칸트의 직관형식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그리고 칸트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서울 YMCA 강당에서 칸트의 철학을 강의했다.38살 되던 해 그는 다솔사(多率寺) 주지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1979)의 주선으로 이 절에 머물면서 일본 천태종 비예산문이하(比叡山文以下) 대승직자(大僧職者)들과 대학교수단 40여명을 대상으로 청염파(淸談波)의 현이사상강의(玄理想思講義)를 1주간 진행했다.그런데 그는 45세에 다솔사에서 해인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물고문,고춧가루 고문 등 고초와 수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주요 `사상범`으로 낙인 찍혔다. 당시 반일체제인사들의 주무대는 사찰을 근거지로 했다.범부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당시 그는 일경(日警)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그는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자 아예 집을 부산 동래경찰서 옆으로 이사했다.지성들이 인정한 천재이자 사상가인 범부도 자신보다 더 훌륭하다고 평가한 이가 효당이다. 그는 일제 암흑기에 동국대 이사장 및 문교부장관을 지낸 김법린, 박영희 등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당수로 한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광복 후 승려 출신으로 첫 제헌국회의원이 됐다. 만해는 1917~1918년 이 사찰에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초안을 작성했고, 환갑 기념으로 효당, 범부와 함께 황금편백을 식수하는 등 3인의 관계는 특별했다.특히, 한국 문단의 거두 김동리는 지난 1960~1961년 이 절에서 그의 후반기 대표작인 `등신불`을 집필하는 등 다솔사는 항일운동과 문학의 태실이기도 하다.범부는 광복을 경남 일광의 장남이 운영하던 기와공장에서 맞았다. 광복 이후 그의 진가가 발휘된다.부산에서 곽상훈, 김법린, 박희창 등과 더불어 일오구락부(一五俱部)를 조직해 `건국방책`에 대해 연속 강좌를 개최했다.1948년 서울에서 경세학회를 조직하고 건국이념을 연구하는 한편 일련의 강좌를 열었다. 그해 겨울 그의 첫 저술인 화랑외사(花郞外史)를 구술했다. 화랑외사는 그의 제자인 조진흠이 파괴된 명동의 한 구석에서 추위에 손을 불면서 구술을 받아 적어 원고를 만들었다. 이 원고는 출판되지 못한 채 보관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1958년 당시 해군정훈감으로 있던 대령 김건이 주선해 해군정훈감 간행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이 책은 한국전쟁 이후 국군장병의 사상 무장을 위한 교재로 활용됐다.1950년 54세 그는 동래군에서 제2대 민의원(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어 4년간 의정활동을 했다.62세에 경주 계림대학장에 취임한 후 건국대에서 정치철학 강좌를 담당하면서 이 대학 부설 동방사상연구소 소장으로 겸임했다. 이 때 강의를 들은 이는 오종식, 이대휘,이종익, 황산덕, 이종후 등 현재 학계 재직 중이거나 고위 관료를 지내는 등 쟁쟁한 인사들이다. 63세 때 범부는 `경전(經典)의 현대적 의의:병든 현대는 동방(東方)의 빛을 구하라`는 제하의 짧은 글을 서울대 대학신문(1959년 10월26일)에 기고했다. 또 한국일보에 겨울여행기와 운수천리(雲水千里) 10회분을 발표했다. 특히 범부는 `풍류정신과 신라문화`를 한국사상 강좌에 발표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5·16 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펴내는 최고회의보에 `방인(邦人)의 국가관과 화랑정신`의 제목으로 기고했다.이후 부산으로 다시 내려온 범부는 부산대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하면서 이때에 `건국정치의 이념`이란 제호하에 정치철학적인 논저를 저술했다.그의 입지가 크게 변한다. 범부는 67세 때 5·16 군사혁명 세력의 외곽 단체인 오월동지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이 단체의 의장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었다. 박 의장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정치 자문을 위해 자주 청와대를 출입하기도 하는 등 멘토 위치에 있었다.범부는 69세 때 정경연구(政經硏究)에 `우리는 경세가(經世家)를 기대한다`를 마지막으로 집필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다.7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위대한 사상가 범부의 영결식에는 제자였던 시인 미당 서정주가 조사(弔詞)로 `신라(新羅)의 제주(祭主) 가시나니:곡범부(哭凡父) 김정설(鼎卨) 선생(先生)`을 지어와 울면서 읽었다. 장지는 수유리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다. 범부는 사후에도 빛난다.1967년 범부선생유고간행회에서 한동안 절판된 화랑 외사를 1천 부 한정판으로 나왔고,서문은 유고간행회장인 김상기 서울대 사학과 교수가 집필했다. 또 범부의 제자인 이종익 동국대 교수의 박사학위 기념논문집인 동방사상논총(東方思想論叢)이 나왔다. 이 교수는 “이 논총은 범부의 동방사상강좌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범부와 동리와는 형제간이다. 동리는 맏형인 범부보다 16살이나 아래다. 동리는 생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백씨는 동기로서는 물론 스승으로서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은의를 나에게 끼쳐 주신 분이다” “큰 형은 열두 살 때 사서삼경을 떼고 경주같이 넓은 고을에서도 가르칠 사람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신동이었다. 장성하여 서울로,일본으로 철학공부를 하러 다닐 무렵엔 천재, 혹은 이인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했다.엄격히 따지면 범부는 서당(書堂) 출신으로 무학이다. 그럼에도 동경제대 등 일본 굴지의 대학에서 청강할 능력과, 노자 사상과 독일 대 철학자 칸트를 평가할 정도로 출중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철학과 국민윤리를 제시한 위대한 사상가 범부 김정설.그래서 김지하 외에도 미당 서정주가 범부 영결식 조사에서 “하늘 밑에서 제일 밝았던 머리”라며 울먹였던 것이다.한민족의 정체성을 연구하고 범국가적 국민운동을 제창한 범부의 과제는 언제나 한국인은 어떻게 살 때 가장 사람다운가 하는 것이었다.`문제적 인물` 범부에 대해 2천년대에 들면서 범부연구회(회장 최재목)가 집중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영남대 최재목 교수는 “범부는 박정희 정권이 사라지면서 함께 잊혀진 사상가다. 그는 박 정권의 건국철학을 구상했고, 새마을 운동의 기초단계를 초안했으며, 남한 정권의 골격인 신라-화랑정신-경주를 제안한 인물이다”고 말했다./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2014-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