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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이차돈이 꿈 꾼 `화엄의 길`은 언제 열릴까?

1961년 출간된 미당 서정주(1915~2000)의 네 번째 시집 `신라초(新羅抄)`를 펼친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서정주 시인은 `신라초`와 이어진 다섯 번째 시집 `동천(冬天)`에서 `불교`와 `신라`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드러낸다.그렇기에 몇몇 문학평론가들은 1960년대 초·중반 서정주의 시 세계를 “불교의 인연사상과 신라 설화에 대한 고찰”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바로 이 `신라초`에 수록된 작품 중 하나인 `꽃밭의 독백`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이 시에서 `순교자 이차돈`을 떠올리는 사람이 비단 기자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불교와 토착의 믿음 체계(원시 종교), 그리고 풍류도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6세기 초반 신라. 이차돈과 법흥왕이 느끼기엔 그 상황이 `닫힌 문`처럼 갑갑했을 것이다.이차돈은 바로 그 문을 자신의 죽음으로 열고자 했다. `벼락`같은 고통 속에서 죽음의 순간이 `해일`처럼 밀려왔다.그것이 스스로의 종교적 결단이었든, 법흥왕과의 밀약에 의한 예고된 처형이었든, 신라가 당면한 최우선 과제인 `왕권강화 프로젝트`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다.겨우 스물한 살의 젊은 청년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닫힌 문`을 열려 했다는 사실은 `숭고함` 외의 키워드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그렇다면 이차돈이 순교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열어젖힌 문 뒤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차돈과 법흥왕이 꿈꾼 궁극(窮極)은 무엇이었을까? ▲ 고대국가의 틀을 이룬 `상부구조`인 신라 불교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6세기 서라벌에서 불교가 가졌던 성격과 위상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경상북도가 출간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3권 `신라의 불교 수용과 확산`은 비교적 구체적이고 알기 쉽게 이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신라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적 제도는 골품제이고, 당시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상은 불교의 교리다. 신라 중고기(中古期)는 정치·사회적으로는 골품제적 권력구조와 계층사회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었고, 문화·사상적으로는 불교의 수용과 토착화가 이루어지던 시기다. 곧 신라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과 불교의 전래·수용이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이다.”위와 같은 서술은 신라사회 변화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 불교의 유입과 공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모든 것은 개인의 팔자소관”이라는 불명확하고, 두루뭉술한 원시 종교의 교리에서 벗어나 `인간 행위에서 의지가 지니는 중요성`을 설파한 불법(佛法)은 당대 신라의 백성들을 매료시켰다. 비단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왕으로 대표되는 군주제국가의 최고 통치권자 역시 불교의 공인이 절실했다. 왜였을까? `신라의 불교 수용과 확산`은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중앙집권국가가 확립되던 시기에 수용된 신라 불교는 이전 사회 단계의 부족신화와 신앙을 포용하면서 한 단계 진전된 종교와 철학체계로서의 의의를 지녔다. 불교는 국가 발전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이나 모순을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깨닫게 함으로써 초부족적 국가 정신과 새로운 윤리관의 확립에 기여함으로써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법흥왕과 이차돈은 귀족과 나눠 가진 권력을 왕에게로 일원화해 신라의 통치체제를 획기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를 뛰어넘어 정치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역할도 할 수 있는 새로운 `상부구조`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불교였다. 이에 관한 부연 설명을 다시 읽어보자.“신라 불교는 사찰 건립과 불상 조성 등 불사와 함께 수용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국가권력의 보호와 지원을 필요로 하였다. 이런 상황과 맞물려 신라 불교는 국가 불교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게 되었다.”이차돈과 6세기 신라 불교에 관한 연구를 오랜 기간 지속해온 동국대 강석근 교수 역시 이와 유사한 견해를 내놓았다. 강 교수는 6세기 중반 이후 서라벌에서 불교가 지닌 위상과 법흥왕 이후 신라사회의 변화를 핵심적으로 요약했다.“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는 특정 종교를 넘어서서 신라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는 종교적·사상적·문화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 이차돈 연구에서 남겨진 몇 가지 문제들이제 앞서 제기한 “이차돈이 순교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열어젖힌 문 뒤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내놓을 때가 됐다.이차돈과 법흥왕은 불교를 국민통합의 수단으로 삼아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정치적 관점에서의 해석이다.그렇다면, 제기된 두 번째 질문 “이차돈이 꿈꾼 궁극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는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까.`만다라`의 작가 김성동과 함께 다수의 역사학자가 `화엄(華嚴)`을 이야기한다.화엄이란 “스스로 덕을 닦아 장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이것이야말로 이차돈과 법흥왕, 불교왕국 신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열쇳말이다.명민하고 심지 곧았던 신라 청년 이차돈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이르고자 몸부림쳤던 `화엄의 길`. 보통의 사람에 불과한 기자는 상상하기에도 아득한 경지다. 마지막으로 `이차돈의 순교`로부터 1천500년 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언급하는 것으로 기획 연재기사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이차돈 순교비의 마멸(磨滅)된 글씨를 복원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한다.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이차돈 순교비는 새겨진 글씨의 50% 이상이 닳아 없어져 온전한 해독이 불가능하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짐작으로만 해석하던 이 순교비의 글씨를 현대 과학기술로 복원할 수 있다면 6세기 신라 사회와 불교 공인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또 하나. 지역의 사학자들과 관광업계에선 “이차돈이 지닌 역사적·종교적 의미를 후세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이차돈과 관련된 흥륜사와 백률사, 천경림과 경주박물관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이차돈 루트(Route)`의 개발은 경주의 관광 인프라를 풍요롭게 해주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이러한 후대의 노력은 이차돈이 꿈꾸었던 `화엄의 길`의 길을 밝히는 연등(燃燈)이 되지 않을까.끝/홍성식기자

2017-07-14

천경림, 비밀과 혼란으로 술렁였던 숲

`경주의 상징`이라고도 불리는 소나무와 삼단 같은 머리채를 드리운 미인 형상의 버드나무가 초여름 빛나는 햇살 아래 푸름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 곁으로 폭이 좁은 강이 무심하게 흘렀다. 2017년 오늘이나 법흥왕과 이차돈이 살았던 6세기 초반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을 풍경.지금으로부터 1천500여 년 전. 서라벌을 가로지르는 남천(南川)의 북쪽 방향 언덕엔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숲이 있었다. 이름하여 천경림(天鏡林).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진 그 숲엔 고고학자와 역사학자의 오랜 조사와 연구로도 아직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여러 비밀이 존재한다.샤머니즘(Shamanism·원시 종교의 한 형태로 주술사가 초자연적 존재와의 교류를 통해 예언 따위를 함)과 애니미즘(Animism·세상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었다고 믿는 원시 신앙)을 신봉하는 이들, 풍류도(風流道·신라 귀족층 젊은이들이 몸과 마음을 수련하던 조직)의 청년들, 여기에 이심전심으로 불심(佛心)을 추종하던 이차돈과 법흥왕.천경림은 이처럼 다양한 정치·종교적 프리즘을 가진 각각의 세력이 충돌하던 `혼란의 숲`이기도 했다. 그 충돌과 혼란이 내부에서 외부로 돌출돼 `역사적 사건`으로 드러난 게 바로 527년 이차돈의 순교다. 죽음의 순간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이 용출하고, 칼에 잘려 날아간 머리가 백률사 대숲에 떨어졌다는.▲ 법흥왕과 이차돈, 천경림에 사찰을 세우려 하다`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 등의 고대 문헌과 현대의 신라역사·불교에 관한 연구논문들은 공통적으로 이야기한다.`이차돈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공간인 천경림에 흥륜사(興輪寺)라는 절을 지으려 했기 때문이라고.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는 그의 논문 `이차돈 유산 가치와 현대적 계승`에서 천경림의 당대 위상과 흥륜사의 축조,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가 신라사회에 미친 영향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이차돈이 천경림에 짓던 사찰은 흥륜사인데, 진흥왕 5년(544년)에 이르러 완공된다. 흥륜사가 들어선 천경림은 신림(神林·신성불가침 지역)의 장소인데 신라인들이 경애하던 숲이자, 칠처가람(七處伽) 터의 한 곳이다. 이차돈은 신라에 불교를 뿌리내리고자 자신의 한 몸을 미련 없이 버렸다.`화엄경(華嚴經)`의 `꽃과 강을 버릴 때 열매와 바다를 본다`는 진리를 몸소 증거한 경우다. 이차돈의 희생적 이타행(利他行)은 통일신라를 거치며 화려한 불교문화로 승화되었고, 부처의 가르침은 신라정신, 민족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흥륜사 역시 기념비, 추모제 불사(佛事)에서 벗어나 상생불교의 대표 산실로 부각됐다.”이창식 교수의 결과론적 진술에 앞서 말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천경림에 절을 지은 것이 이차돈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가 됐다`는 앞서의 언급은 학자들 간에 이견이 별로 없다. 그러나, 절을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에 관해서는 3가지의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그 견해 중 첫 번째는 `법흥왕의 명령으로 이차돈이 흥륜사 축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이는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했던 이차돈이 `왕권강화를 통한 신라사회의 변혁`을 꿈꿨던 법흥왕에게 이용당했다는 가설에 가 닿는다. 이는 장편 구도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견해이기도 하다.두 번째 학설은 `이차돈이 독자적으로 천경림 안에 사찰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역사학자들은 이차돈을 “명민함과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목숨과 신라의 불교 공인을 맞바꿀 만한 배짱을 지녔었다”고 평가한다.마지막으로 세간을 떠도는 학설 중 하나는 `천경림에서 공존하던 샤머니즘과 애니미즘, 풍류도를 제압하기 위해 흥륜사를 지으려고 했던 것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밀약(密約)이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설득력이 얻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 ▲ 비밀의 숲 천경림에서 떠올린 시인 `이지도르 뒤카스`한양대학교 이도흠 교수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기 전 천경림의 `주인 중 하나`였던 풍류도에 관해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다.이 교수는 6세기 초반 천경림에 흥륜사를 지으려했던 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발행한 논문 `이차돈의 가계와 신라의 불교 수용`을 통해서다.“법흥왕은 어느 정도 왕권이 강화되었다고 판단되는 재위 14년(527년)에 풍류도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이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성소(聖所)인 천경림에 절을 짓고자 했다.이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조계사 안에 교회를 짓는 것처럼 충격적인 일이다. 풍류도의 반대는 당연했다. 하지만, 누구건 왕권에 맞서기는 어려운 일. 변수는 명분과 백성들의 여론이었다.”이도흠 교수의 이러한 진술은 논란이 계속돼온 이차돈의 죽음이 `순교`였는지 `밀약에 의한 처형`이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근거의 하나가 된다.법흥왕 절체절명의 프로젝트인 `왕권강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풍류도의 주류세력과 원시적 믿음 체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제압할 것인지는 법흥왕이 안고 있던 가장 어렵고 힘든 숙제였다.이도흠 교수 역시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당시 법흥왕의 딜레마(dilemma)를 이렇게 표현한다.“흥륜사 창건을 없던 일로 하게 되면 왕의 권위를 상실함은 물론 불교 공인은 먼 훗날로 미뤄지게 된다. 반대로 흥륜사 창건을 강행해 반대세력을 처단하게 되면 짐승의 생명도 죽이지 않으려던 스스로의 불심을 버려야 했다.”이 위기의 상황에서 법흥왕은 `나이 어린 도반(道伴)` 이차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흥왕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이차돈을 죽인 것일까? 그게 아니면, 이차돈 스스로 법흥왕에게 불교 공인을 위한 죽음을 청했던 것일까?인간은 답을 알지 못하지만, 천경림의 소나무와 버드나무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들은 말이 없었다.지키기로 약속한 비밀에 영원히 입을 닫을 줄 아는 대장부처럼.고뇌와 번민을 안고 이차돈과 법흥왕이 서성였을 천경림을 1천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기자 역시 오래 서성였다. 그때였다.요절한 우루과이 출신 시인 이지도르 뒤카스(Isidore Ducasse·1846~1870)의 짧은 시 `나무`가 떠오른 것은.`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 송화산 `반가사유상`의 머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반달리즘(Vandalism)이란 정치·경제·종교적 이유 등으로 문화예술과 관련된 유물을 파괴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단어다.“역사상 최악의 반달리즘”이라 비판받았던 건 `탈레반`으로 불리는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바미안 석불(石佛) 폭파`였다.아프가니스탄 중부에 위치한 바미안 석굴사원. 높이가 자그마치 53m에 이르는 불상이 우뚝 서 있던 이곳은 인도와 페르시아의 예술양식이 접목된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그러나, 탈레반은 이 석굴사원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십 년에 걸쳐 총과 폭탄을 이용해 불상을 포함한 유물의 대부분을 부숴버렸다.이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물의 파괴가 아닌, 인류의 정신사에 대한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지난봄.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장에서 김유신 장군 묘 인근 경주 송화산 금산재(金山齋)에서 발견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양 다리를 수평으로 얹고 앉아 손을 얼굴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부처상)과 만났다.부드러운 곡선과 유려한 조형 양식이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운 조각품이었다.그런데, 이 반가사유상에는 머리와 팔이 없었다. 그때 기자의 눈앞으로 `반달리즘`이란 단어가 스치듯 흘러갔다.여러 개가 아닌 하나의 돌을 이용해 만들어진 금산재 반가사유상은 연꽃 위에 사뿐히 올린 발가락과 목에 건 목걸이까지 섬세하게 표현해낸 것으로 보아 빼어난 신라 석공(石工)의 작품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조각의 재료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어렵다고 알려진 화강암을 이처럼 예술적으로 매끄럽게 깎아내 부처상을 만든 시기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반이라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신라에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과 순교자 이차돈이 막을 연 `불교왕국의 태동`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금산재 석조 반가사유상`은 생명이 없는 바위에서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연꽃이 피어나 깨달음을 얻고자 고뇌하는 부처의 모습을 감싸듯 받치고 있는 걸 형상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는 신념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던 스물한 살 청년 이차돈의 고뇌와도 맥이 닿아 있다.앞서도 의문을 제기했지만 “금산재 반가사유상의 머리는 언제 어떻게 사라졌을까?”관련 학문을 연구해온 역사학자에 따라 주장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비등하고 있다.“불교가 주류였던 고려시대 이후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함) 정책이 만든 비극”이란 학설이 있고,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들의 용기를 꺾으려고 일본 병사들이 잘랐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몽골 군대가 불상을 파괴하고 다녔다는 문헌 기록 또한 일부 남아 있다.그러나, 현재까지도 어떤 게 정확한 답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처럼 역사란 수많은 의문과 질문을 부르는 흥미롭고도 크나큰 수수께끼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7-07

“나는 무엇이고, 어떤 걸 위해 살 것인가”

21년. 이차돈의 삶은 짧았지만 역사적 의미가 크고 극적인 요소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에 관한 연구서나 문학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신라의 불교 공인`이라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이 `젊은 순교자`에 관한 이야기를 누가 깊이 있게 들려줄 수 있을까? 그때 떠오른 것이 소설가 김성동(70)이다. 문학평론가들에게 “생존한 한국 작가 중 가장 미려하고 유장한 문장을 쓴다”고 평가받는 김성동은 불교적 세계관을 토대로 인간의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작품에 담아내온 작가다. 또한, 그는 19세부터 29세까지 청춘의 한 시절을 지효대선사(智曉大禪師) 문하에서 승려로 살기도 했다.`만다라`, `집`, `길` 등의 소설을 통해 불교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해온 김성동을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던 지난 주말 경기도 양평 자택에서 만났다. 검은 머리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백발의 원로작가는 기자와 사진작가를 스님처럼 합장배례(合掌拜禮)하며 맞았다.아래는 6세기 신라사회의 종교인 동시에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불교와 이차돈, 그리고 법흥왕에 관해 김성동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이번 인터뷰에서 김 작가는 “향후 이차돈을 소재로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무소불위` 신왕 꿈꾸던 법흥왕자신의 지배이념 다지기 위해`정치적 희생양` 필요했을 듯이차돈 순교 후 불교 공인은절대 통치권 구축과정으로 봐야이차돈 소재 소설 쓸 수도 있어신라 역사·정치·불교에 대한깊은 차원의 취재과정 필요불교를 통한 사회발전 위해존재론적 고민 함께 해야- 법흥왕이 통치하던 527년 이차돈이 순교했다. 그 후 귀족들과의 논쟁과 논란을 거쳐 신라사회는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제반의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는가?△통상은 고구려를 통해서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불교의 근본 원리는 아래로부터 위까지를 포괄하는 평등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평등이다. `모든 것들은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하지만 당시 신라는 계급사회였다. 신라에 불교가 유입되기 전에도 천경림(天鏡林·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던 숲)이 있었고, 종교와 유사한 `믿음 체계`는 존재했다. 신라 사람들이 봤을 때 불교는 낯선 외래 종교였다.어느 사회건 지배계급은 사회적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특성이 있다. 신라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법흥왕은 그런 귀족을 제압하고 자신 앞으로 권력을 집중시킬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지배 체제의 혁신적 변화 필요성`이다. 나는 법흥왕이 주도한 혁신 프로젝트의 희생양이 이차돈이라고 본다. `목을 베었을 때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이 솟았다`는 것은 당시 신라인들에게 “이처럼 기적까지 일으키는 종교가 바로 불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 조작`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법흥왕은 신라가 `중앙집권적 왕조국가`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평가받는다. 그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라는 사건이 있었다. 중앙집권적 왕조국가의 건설과 불교의 공인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가?△자신의 통치시스템을 공고히 할 지배이념으로서 불교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기존에 존재하는 토착적 믿음 체계가 아닌 왕조국가에 적합한 국민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단합시킬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절실했을 것이다. 법흥왕이 지배하던 6세기 신라에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가 유입되고 있었고, 기존의 지배 체제로는 자신의 큰 계획을 진행해 나갈 수가 없었다. 이게 법흥왕이 불교의 공인을 간구했던 이유일 것이다.- 이차돈은 순교 당시 나이가 21세에 불과했다. 불교의 교리를 이 나이에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그렇게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차돈은 법흥왕이 꿈꾼 `정치 프로그램`의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법흥왕에겐 그 희생양이 이차돈이어도 되고, 다른 사람이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란 개인의 종교적 각성에 의한 죽음이 아닌 당대의 통치시스템 구축 과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던 시대의 신라 귀족 대부분이 토착의 믿음 체계를 신뢰했다. 불교와 이 `믿음 체계`의 차이점은 뭔가?△`화백제도`란 게 있다. 지배계급이 모인 일종의 최고 회의기구다. 여기서는 만장일치를 통해 나랏일을 결정했다. 비단 신라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은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해 활용했다. `화백`이란 단어는 “고루 평등한 삶을 지향한다”는 뜻의 `고루살이`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 화백제도로는 왕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시스템 축조가 불가능했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바로 이 화백제도와 새로운 정치구조의 필요성이 충돌한 결과라도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 싸움에선 법흥왕과 이차돈이 승리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이차돈의 삶은 극적이다.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차돈을 다룬 문학작품은 거의 없다. 겨우 떠오르는 건 춘원 이광수의 `이차돈의 사(死)` 정도다. 어째서 그럴까?△(웃음) 작가들을 질책하는 말로 들린다. 물론, 이차돈의 생은 드라마틱(Dramatic) 그 자체다. 하지만 너무 빤한 소재다. 당대 신라의 정치·사회적 흐름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나 시는 역사책과는 또 다르다. 뭔가 독자들을 매혹할 `새롭고 독특한 것`을 끌어내야 한다. 그러기엔 이차돈이 가진 문학적 소재로서의 힘은 그렇게 크지 않다.- 혹시 이차돈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쓸 생각은 없는가? 만약 집필하게 된다면 어떤 부분에 방점을 찍어 쓰고 싶은지.△어려운 숙제를 요구받는 느낌이다.(웃음) 소설가는 어떤 소재로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나 역시 이차돈을 소재로 소설을 쓸 수 있다. 만약 쓰게 된다면 지금보다 깊은 차원의 학습과 취재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광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면 어떨까 싶다. 이차돈의 개인적 고통과 구구절절한 사연을 서술하고, 개인적 희생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방식은 아닌 듯하다. 6세기 신라의 역사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불교, 지배계급의 대립을 불러온 사회적 변화 과정 등을 담아내야 제대로 된 소설이 되지 않을까. 건강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불교가 종교인 동시에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사회다. 법흥왕에겐 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불교가 필요했던 것일까?△고대 인도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존재 중 하나가 전륜성왕(轉輪聖王)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전륜성왕은 `이상적 통치자`의 전형이라 불린다. 이때까지 존재해온 모든 왕, 즉 지배자들은 전륜성왕을 벤치마킹하고자 했다. 왜냐? 자신이 신(神)과 동격이 돼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하고 싶었으니까.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려 했던 것도 결국은 이 때문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법흥왕에겐 당대 신라사회를 한 손에 쥐고 흔들 무소불위의 `신왕(神王)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토착의 믿음 체계를 넘어서는.- 불교는 대중에게 쉽게 전파되고, 그들을 결속할 힘이 있는 종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정토(淨土·부처가 사는 깨끗한 세계)란 게 있고, 정토사상이란 게 있다. 이걸 간단히 설명하면 현실세계는 추악하고 불합리하지만 자신이 노력만 하면 인간은 세상 어떤 것도 될 수 있고, 궁극에는 정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괴로움은 네가 전생에 저지른 업 탓이니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불교를 믿음으로써 그 업을 씻고 전혀 다른 존재로 태어나라. 그러면 너희도 정토로 갈 수 있다”는 말은 6세기 신라 사람들에게 분명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세상 모든 문제를 사회적 조건을 바꾸는 것이 아닌, 개인의 능력만으로 해결하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이건 책임 전가에 가깝다. 신라의 지배계급만이 아니라 현재 한국의 정치인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항상 경계해야 한다.- 젊은 시절 한때 승려 생활을 했다. 이차돈에게 동질감을 느낄 것도 같다. 당신이 보기에 이차돈은 어떤 인물인가? 그의 매력은 무엇이고, 또 한계는 무엇인가?△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당대 신라사회에 적지 않은 긍정적 영향력을 끼쳤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기희생을 통해 숭배에 이르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물론, 그로서는 법흥왕의 `순교 제의`를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차돈은 법흥왕이 주도한 `불교 공인 프로젝트`의 조력자 역할을 했을 뿐이란 게 내 생각이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영화로 비유하자면 이차돈의 배역은 `작은 나사못 하나`가 아니었을까.- 현재의 불교가 혁신적 자기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선 어떤 게 선결돼야 할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어떤 종교나 마찬가지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종교가 지닌 오늘의 의미와 현재성에 눈을 돌려야 한다. 사실 이차돈이 순교했던 1천500년 전과 지금의 불교는 별로 바뀐 게 없다. 종교가 단순히 개인의 복을 비는 차원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에 대해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불교의 혁신과 불교를 통한 사회발전은 요원하다. 비단 불교계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나는 무엇이고, 어떤 걸 위해 살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고민을 해야 한다. 개인의 삶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 삶이 사회적 삶으로 진화하고, 사회적 삶이 역사적 삶으로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그걸 깨닫고 나서 불교와 부처, 이차돈과 법흥왕을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17-06-30

신라왕조의 기틀을 닦은 법흥·진흥·진지왕

때로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유사한 인간형을 탄생시킨다. `대의를 위한 희생` 또는, `목숨을 건 결단`이라는 키워드를 놓고 보면 `불교 공인`의 문을 연 신라 최초의 순교자 이차돈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1918~2013)는 여러 부분이 닮았다.이차돈이 “흩어진 신라의 국력을 하나로 모아 나라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불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생명을 잃었다면,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극악한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하며 흑인과 백인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다.이차돈은 자신의 죽음으로 신라가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삼국을 통일시킬 기틀을 만들었고, 27년에 걸친 만델라의 수난과 고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인권운동의 획기적 계기를 마련한 국가`로 인정받게 했다.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자기희생. 세상은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으로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드러낸다.이미 몇 년 전 만델라는 사망했지만, 아직도 남아공의 흑인들은 그를 떠올릴 때면 눈물부터 보인다고 한다. 또한, 그가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을 맡은 이후 그 나라의 인권 상황과 약자에 대한 복지는 느린 속도지만 분명 개선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관된 평가다. 만델라가 활동한 시기보다 1500여 년 앞서 일어난 `이차돈의 순교` 또한 신라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적지 않게 끼쳤다.이차돈이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법흥왕(재위 514~540)과 법흥왕의 조카인 진흥왕(재위 540~576), 진흥왕의 차남인 진지왕(재위 576~579)으로 이어지는 65년의 세월은 영광과 시련 속에서 신라가 제대로 된 왕조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발전의 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하던 시기였다. ▲ 법흥왕,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출발을 알리다목숨을 담보로 한 법흥왕과 이차돈의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로 인해 527년(이차돈이 순교한 해) 이후 신라사회는 획기적인 변화를 겪는다. 보각국사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그 변화를 아래와 같은 시적(詩的)인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은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섰다.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매달았다. 용상 같은 승려의 무리가 세상의 복전이 되었고, 대소승의 불법이 신라의 자비로운 구름이 되었다. 타방의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고 서역의 명승들이 이 땅에 강림하니 이로 인해 삼한을 병합해 한 나라가 됐다.”위와 같은 서술은 법흥왕과 이차돈이 도래시킨 `불교융성시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동국대 강석근 교수의 논문 `백률사 설화와 제영에 대한 연구`는 후대 숭배자들에 의해 이차돈이 `부활`의 형태를 드러냄으로써 신격화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이차돈의 재생을 바라는 후대인들의 염원과 조선 후기에 생성된 백률송순(柏栗松筍·이차돈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찰 백률사 인근의 소나무는 가지를 잘라도 다시 생겨난다는 뜻) 개념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불교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통해 중앙집권적 왕조의 초석을 깔았던 법흥왕. 거리와 산마다 사찰이 생겨나고, 승려들이 거리낌 없이 포교 활동을 하며, 아침과 저녁마다 범종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라로 변모한 신라.법흥왕이 죽음을 앞두고 아내와 함께 승려가 돼 궁궐이 아닌 절을 향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듯하다. 이 같은 불교문화의 빠른 확산, 그 배후에는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다.▲ 진흥왕, 영토를 넓히고 정치체제를 정비하다법흥왕에 이어 신라의 24대 왕이 되는 진흥왕은 불과 일곱 살에 왕위에 오른다. 이후 12년간의 섭정(攝政) 기간을 거쳐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한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한강 일대와 함경도 지역까지 넓혔다.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중·고교시절 수업 시간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와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이 비석들은 진흥왕 통치 당시 신라의 국토 확장 의지와 관직제도를 짐작하게 해주는 소중한 사료(史料)다.이차돈과 법흥왕이 그 토대를 닦아놓은 `왕권 강화 국가` 신라에서 진흥왕은 차지한 영토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땅에 관한 지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지방의 행정조직을 개편하기도 한 것. 다수의 역사서는 진흥왕 16년인 555년 경남 창녕 지역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됐고, 이듬해인 556년에는 비열홀주(比列忽州·함경남도 안변)가 설치됐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이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이 정복한 지역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 명명한 후, 효율적인 사회통치 시스템을 마련하고 자신을 대행할 정치권력을 세웠던 형태와 유사하다. 이처럼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 ▲ 진지왕, 사학계의 평가는 엇갈리지만…법흥왕과 진흥왕에 비해 재위 기간이 3년으로 매우 짧았던 진지왕(신라 25대 왕)은 역사학계의 평가가 엇갈리는 군주다. 경상북도가 발간한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서 진지왕은 후한 평가를 얻고 있지 못하다.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사회 혼란을 초래했다”거나, “국민들의 결의에 따라 폐위됐다”는 등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하지만,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반대의 견해를 내놓는 목소리도 함께 들어야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진지왕이 “신라 국경을 침탈한 백제군을 일선군(一善郡·경북 구미 일원)에서 물리쳤고, 성을 축조해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다”고 말한다. 또한, “진(陳)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에도 힘썼다”는 옹호론을 펼치기도 한다.어쨌건 법흥왕에서 진흥왕, 진지왕으로 이어지는 6세기는 종교인 동시에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불교를 통해 신라가 중앙집권국가의 형태를 갖춰나간 시대였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하다. 이차돈이 살던 신라에 원숭이가 있었을까?2006년 여름. 인도를 여행했을 때다.마을까지 내려와 자연스레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원숭이를 보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인도 사람들은 원숭이와 어울리는 걸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심지어 원숭이 형상을 한 힌두교의 신(神) 중 하나인 하누만(Hanuman)은 전해오는 이야기 속 용맹함으로 숭배까지 받고 있었다.비단 인도만이 아니다.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원숭이는 `신성(神性)` 유사한 걸 부여받아 보호되고 있다. 이는 원숭이가 인간의 모습과 가장 닮았기 때문일까?삼장 법사를 모시고 천축으로 불전(佛典)을 가지러 가는 손오공은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원숭이인 동시에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태국의 치앙라이와 푸껫 등엔 수천 마리의 원숭이가 주인 노릇을 하는 사원도 있다.그렇다면,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았던 6세기 신라에도 원숭이가 있었을까? 자그마치 1500여 년 전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니 명확한 답변이 나올 수는 없다. 그러나, 추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일연의 `삼국유사`는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행적 등 신라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여기에 짤막하게나마 원숭이와 관련된 기록이 등장한다. 이런 대목이다.“이차돈의 떨어진 목에서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이 솟았다. 이때 주위 산의 큰 소나무가 저절로 부러지고, 원숭이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울었다.”일연의 기록만으로 보자면 이차돈의 순교가 있던 527년 신라엔 원숭이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 외의 다른 고문헌(古文獻)에도 “법흥왕은 사신을 보내는 등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 남부의 원숭이들을 누군가가 신라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하지만, 신라 역사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한국에는 원숭이가 살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은 전해 듣거나 그림에서 본 원숭이를 상상했을 뿐”이라는 것.이는 타임머신이 만들어져야 명확한 사실관계가 파악될 수 있는 성질의 논쟁이기에 어느 의견이 옳은 것인지 지금으로선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그럼에도 신라인들이 원숭이를 신성시하고,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물이 증명하고 있다. 원숭이가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신라시대 유물은 왕과 귀족의 고분을 장식한 호석(護石·무덤 둘레에 돌려 쌓은 돌)이다. 십이지신(十二支神) 중 하나인 원숭이는 다른 동물들과 함께 성덕왕릉, 원성왕릉, 흥덕왕릉, 진덕여왕릉 등을 호위하고 있다. 늠름한 장군의 모습으로 의인화 되어.고귀한 신분의 왕이 묻힌 묘지를 지키는 모습으로 형상화된 신라의 원숭이. 그 호석들을 보고 있으면 의문은 더 커진다. “이차돈이 살던 시대에 원숭이는 실재했을까? 아니면, 석공들의 상상력 속에 존재한 것일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6-23

불교, 신라 토착종교와 갈등을 겪다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입각해 세계와 인간을 해석한 학자들은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지식인)를 “진짜 적이 아닌 논쟁의 적만을 혐오하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그런 인식은 “피상적으로 세상을 보는 인텔리겐치아가 아닌 삶의 구체성과 실물성(實物性)을 획득하고 있는 노동자가 세계 변혁의 주체”라는 이데올로기를 낳았다.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와 플라톤(BC 427~BC 347)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소피스트(Sophist)`를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철학적 관점을 배제한 채 `말장난`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일삼는 대중의 적”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요즘에도 사용하는 단어 `궤변론자`는 그때 나온 것이다.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언가`가 변화할 때는 언제나 논쟁과 논란이 있었다. 신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믿어온 `토속신앙`과 신흥종교인 `불교`가 상호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던 6세기 초반 역시 그랬다.마르크스주의 학자들과 인텔리겐치아의 갈등, 플라톤과 소피스트의 언쟁 유사한 싸움이 거의 매일 법흥왕이 통치하던 신라왕실에서 벌어졌다.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던 527년 즈음이다.“흩어진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미래를 바라보자”는 법흥왕과 이차돈, “전례(前例)와 이제껏 이어져온 전통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는 귀족들 사이의 입장 차이는 컸다.왜냐? 거기엔 “왕에게 내가 가진 권력을 허망하게 내줄 수 없다”는 귀족계급의 절치부심(切齒腐心)과 “귀족의 권한을 왕에게로 일원화해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법흥왕의 욕망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 기존 이데올로기 대체할 `새 이데올로기` 필요성2016년 12월 경상북도가 발간한 자료집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4권은 `법흥왕-이차돈 vs 신라 귀족계급`의 논쟁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불교의 공인과 융성`이란 챕터를 통해서다.“동일한 고대국가라도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진화·발전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지배체제를 새롭게 재구성해가면서 그에 걸맞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거나 만들어내 포장하려는 데에 계속해서 힘을 쏟는다.신라도 4세기에 출범한 이후 기존의 체제와 지배질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한동안 최고 지배자를 하늘과 직접 연결시켜온 전통적 방식의 신앙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활용하였다.”위의 서술은 법흥왕 이전의 신라의 종교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왕은 그 사회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말해준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해 간명하게 설명해준 이는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이다.“불교가 공인되기 이전 신라인들은 강림한 조상신을 믿거나 시조 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삼산오악(三山五岳)과 같은 명산대천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섬기는 토속신앙에 경도돼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불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체제`의 대표 귀족과 불교 공인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원하던 법흥왕과 이차돈.6세기 신라의 왕궁에서 진행된 `종교 논쟁`은 현대사회 한국의 여야 정당 사이에서 오가는 논쟁이나 설전보다 그 뜨거움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랬기에 사람의 목숨까지 오갔다. 바로 “목이 잘리자 몸통에서 흰 젖이 솟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차돈의 순교다.앞서 언급한 자료집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는 1천500여 년 전 벌어진 그 `논쟁과 설전`이 마무리되는 과정까지를 약술(略述)하고 있다.“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가 자리를 잡게 되자 국정 안팎을 단장할 필요성도 생겨났다.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갖는 효용성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체될 만한 고급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으니, 그게 바로 불교다.”위에서 말하는 `기존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박 원장이 지목한 강림 조상신이나 천지신명을 섬기는 신라의 토속신앙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6세기 신라에서의 불교란 역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가진 국민화합의 사상이나 왕조의 통치이념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불교 공인신라 역사 연구자들의 보편적 견해에 힘을 보태는 또 하나의 논문이 있다. 바로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의 `이차돈 유산의 가치와 현대적 계승`이다.이창식 교수는 신라의 불교 공인이 어려웠던 이유로 “귀족들의 폐쇄성과 재래적 토속신앙의 강고함”을 지적하며,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의 변화를 “정치체제에서 왕권의 강화 과정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이차돈과 법흥왕을 단순한 주종(主從)관계가 아닌, `불국토(佛國土) 신라를 만들기 위한 비밀스러운 프로젝트`의 상호협력자로 보는 학자와 역사소설가가 적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한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변화 과정에선 새로운 이념을 위한 `희생양`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걸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이차돈은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를 법흥왕에게 읍소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죽음을 자청하다니…. 일반의 상식으론 쉽사리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여기서 궁금증은 다시 증폭된다. 정말이지 스물한 살 청년 이차돈은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분화되고 복잡해진 사회를 일원적으로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 이념인 불교”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던졌던 것일까? 경주시 탑동 남산 `남간사터`화려하게 꽃피었던 불교의 역사황량한 벌판 당간지주는 기억할까지난날의 기억이나 과거의 흔적을 찾아가는 행위는 흥미롭지만 쓸쓸한 일이다. 백 년을 계속해 화려한 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없고, 제아무리 빛나는 왕국도 언젠가는 시간의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치세(治世)를 통해 꽃핀 불교문화 속에서 수백 년 이상을 번성한 신라왕조. 하지만 떠오름의 날이 있다면 가라앉음의 시간 또한 언젠가는 다가온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신라의 `공식적 역사`는 끝이 난다. 영토 곳곳에 부침(浮沈)의 흔적만을 남긴 채.경주시 탑동 남산 서쪽 언저리에 위치한 `남간사(南澗寺) 터` 역시 바로 이 부침의 신라 역사 한가운데 서 있다.오릉(五陵)을 지나 35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좌측에 좁은 시멘트길이 보인다. 농로로 사용되는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남간사 터가 있다. 지금은 논으로 변했지만, 신라시대엔 거대한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그곳에 우뚝 선 3.6m의 구멍 뚫린 거대한 두 개의 돌기둥은 보는 사람을 현재에서 과거로, 현실에서 초현실로 순식간에 이동시킨다. 바로 보물 제909호인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慶州 南澗寺址 幢竿支柱)`다.학연문화사가 출간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등에 따르면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동서로 70cm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두 지주 사이 당간(법회 등의 행사가 열릴 때 사찰의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은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이 당간지주가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역사학계에선 8세기를 전후해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른 당간지주와 달리 십(十)자형의 구멍이 기둥 위쪽에 뚫려 있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당간지주를 통해 거기에 상당한 규모의 절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남간사 터. `삼국유사`에 의하면 남간사는 문무왕(신라 30대 왕·재위 661~681)이 통치하던 시절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까지 불법(佛法)을 얻고자 했던 당나라 유학승 혜통(惠通)의 집이 있던 곳에 창건된 절이라고 전한다.남간사는 `순교자 이차돈`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헌덕왕(신라 41대 왕·재위 809-826) 때 이 절의 승려였던 일념(一念)이 “염촉(이차돈의 다른 이름)이 자신의 몸을 던져 불교를 받아들이길 청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촉향분례불결사문(燭香墳禮佛結社文)`을 지은 것이다.하지만, 지금 남간사 터에는 일념의 흔적도, 그 옛날 이차돈의 모습을 확인할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황량한 벌판에 기이한 풍경으로 선 당간지주만이 세월의 바람을 무방비로 맞고 있을 뿐.해가 질 무렵. 남간사 터 인근 저수지를 걸었다. 언뜻언뜻 물 위에 비치던 긴 그림자는 혹, 이차돈과 일념의 영혼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6-16

붉은 피 대신 솟은 흰 젖 젊은 순교자, 새 생명을 얻다

동화책을 읽던 어린 시절처럼 상상력을 동원해본다. 아마 이런 장면이었을 것이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8월 초순. 서라벌 소금강산 정상.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스물한 살 청년 순교자 이차돈`의 유택(幽宅) 앞에 모인 수백, 수천 명의 신라 사람들. 그들의 추모 열기는 염천의 하늘보다 높고 뜨거웠다.백률사는 법흥왕 14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던진 이차돈의 순수한 열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삼국유사` 등에는 자추사(刺楸寺)라는 이름으로 적혀 있지만, “오늘의 백률사는 자추사의 바뀐 이름”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안타깝게도 신라시대에 축조된 웅장했을 백률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후 다시 지어진 백률사 대웅전은 맞배지붕에 목조 기와를 얹은 단층의 소박한 건물. 그 옛날 영화는 느껴지지 않지만, 신념을 위해 순교한 청년을 떠올리게 하는 경건함은 여전하다.종교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절대자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에 가깝다. 제사나 제의(祭儀)라고 이름 붙여진 종교양식은 비단 이차돈을 높이 모셨던 불교도들만의 행위는 아니다.이슬람교를 만든 마호메트가 태어난 메카(Mecca)를 향한 무슬림들의 맹목적인 열정, `메시아(Messiah)`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기독교도들의 간절한 마음도 그 형식은 달리하지만 내용적으론 유사한 성질의 것이다.이차돈 순교 직후부터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백률사 인근 이차돈의 무덤에서 이어진 제사를 동국대 강석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신라 중기부터 고려 말까지 이차돈을 추모하는 단체와 사람들의 모임이 1천 년 이상 지속됐다. 이들의 추모 열기와 숭앙심은 절대적이었다.”강 교수는 그의 논문 `백률사 설화와 제영에 대한 연구`에서 이차돈과 백률사가 신라 역사 연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도 설명한다. 강 교수의 학설에 따르면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의 정치사와 종교사에서 획기적 사건”이다. 또한, “경주의 소금강산과 백률사의 주인공은 이차돈”이다. 그렇기에 이차돈에 대한 연구는 백률사에 대한 연구와 다름없고, 뒤집어 말하면 백률사에 대한 연구는 곧 이차돈에 대한 연구가 된다. ▲ 이차돈 흔적을 찾다가 발견한 `범종각` `삼존마애불좌상`초여름 열기를 뿜어내는 흙길을 걸어 백률사에 도착하고서부터 “어디쯤 이차돈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하고 혼잣말을 하며 경내는 물론 주위까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백률사 범종각(梵鐘閣)이다. 절의 규모에 비해 제법 큰 종이 매달려 있었다.가까이 다가가 보니 종의 겉면에 이차돈 순교 당시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머리와 분리된 몸에서는 흰 젖이 치솟고, 떨어진 머리는 연꽃 위에 조용하게 얹혀 있었다. 연꽃의 꽃말은 `순결한 아름다움`이다. 또한, 불교에선 연꽃을 신성시해 부처상이 앉은 좌대(座臺)를 연꽃으로 장식하기도 한다.신라가 불교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이차돈은 백률사 범종의 조각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기억되는 죽음은 슬프지 않다`란 역설적인 문장이 떠올랐다.절의 왼편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5분쯤 걸었을까? 사람 키보다 두어 배 높아 보이는 바위에 가부좌를 튼 3명 부처의 돋을새김이 기자의 발길을 붙들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4호인 동천동 삼존마애불좌상(三尊磨崖佛坐像)이었다.통일신라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은 천년 세월에 닳고 또 닳아 지금은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학계는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바위에 새겨진 세 가지 형상이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음보살(觀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바위의 일부분이 떨어져나가고, 푸르고 거무스레한 이끼가 부처의 모습을 덮고 있어 신라인이 새긴 예술적 불상의 진면목을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마음으로는 넉넉한 인품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는 것인지, 삼존마애불좌상 주위에는 부처상과 동승(童僧)의 모습을 한 조그만 인형들이 즐비했다. 경주 사람들 저마다의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놓은 색다른 풍경으로 느껴졌다. `불교평론 학술상`을 수상한 동국대학교 이봉춘 명예교수는 “이차돈의 설화를 기록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그의 순교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이봉춘 교수에 따르면 이차돈 이전에도 순교자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온 고구려의 승려들이었다. 이와 달리 이차돈의 순교는 “전도 승려들이 살해된 것과 달리 불심 깊은 신라의 일반 신자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것이 이 교수 설명이다.신라시대부터 시작돼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이차돈에 대한 뜨거운 추모의 마음은 바로 이 `자발성`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 불교를 신라 주도 이데올로기로 만든 이차돈 순교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이차돈의 죽음을 기록한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잘린 이차돈의 목에서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이 솟아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흰 젖`은 무엇의 은유일까? 강석근 교수의 논문은 이 물음에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다.“죽음과 절망을 상징하는 붉은 피가 아닌 갓난아기가 먹는 흰 젖이 솟았다는 것은 이차돈의 순교가 생명과 재생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차돈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527년 이후 신라의 불교는 종교로서의 의미를 뛰어넘어 신라사회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화해나갔다고 입을 모은다. 강 교수 역시 “이차돈 순교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이 펼친 불교 진흥정책은 신라를 종교적·사상적으로 결속시켰고, 이는 삼국통일을 견인하는 촉매제가 됐다”고 쓰고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6-09

불어오는 바람에 백률사 대숲이 울었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을 지나 백률사(栢栗寺)로 오르는 길.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경주 동천동에 자리한 소금강산은 험하고 높은 산이 아니다. 그러나, 기상청의 예보처럼 “한여름 같은 불볕더위”가 5월 하순의 산과 숲을 뒤덮고 있었다. 얼굴과 목덜미로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빼곡히 대나무가 들어찬 숲 아래 그늘로 몸을 숨겼다. 청아한 신록이 지친 마음과 더운 날 산을 오르는 스트레스를 위로해줬다.오가는 사람들이 드문 산길. 잠시 잠깐의 조용한 휴식 속에서 `논어` 자로편(子路篇)의 인상적인 구절이 옛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법흥왕과 이차돈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문장이었다.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옳은 뜻을 가진 자는 애써 명령하지 않아도 따르는 사람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는 명령을 해봐야 그것에 따르는 이가 없다”가 아닌가.6세기 초반.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불교의 공인을 위해 누군가 나서 희생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버리라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기에.스물한 살 청년 이차돈은 법흥왕이 `옳은 뜻`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순교를 자처할 수 있었다. 명령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이다. 바로 이 법흥왕과 이차돈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신라가 불국정토로 가는 길을 열었다.설화에 의하면 백률사는 순교자 이차돈의 베어진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자리에 지어졌다. 백률사 주위에는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차돈의 삶과 죽음, 그것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 현재는 작은 사찰 옛날엔 `불교 성산`으로 불려신라의 불교 공인에 큰 역할을 한 이차돈과 관계있는 사찰이니 백률사의 위상은 그 어느 절보다 높았다. 또한, 경주 사람들은 불력에 의한 영험한 기적이 자주 일어난 곳으로 백률사를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전해오는 옛이야기 또한 많이 간직한 장소가 소금강산과 백률사다.절이 세워진 소금강산 기슭에는 앞서 말한 대로 `석조사면불상`이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다. `삼국유사`는 이 독특한 불상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신라시대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기 위해 소금강산에 이르렀다. 왕의 행렬이 어느 한 지점을 지날 때 땅속에서 불경 소리가 들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경덕왕의 신하들이 땅을 파자 커다란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은 바위의 사면에 불상을 새기라고 명했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절의 이름인 굴불사는 땅에서 불상을 파냈다는 의미다.” 굴불사는 이제 터만 남았다. 하지만, 높이가 3m에 육박하는 바위에는 그때 새겨진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관세음보살입상(觀世音菩薩立像)` 등이 아직도 남아 이곳이 신라불교의 성지 중 한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해 백률사 입구 계단에 도착했다. 1천 년 전 창성했던 사찰의 흔적은 많은 부분 사라졌다. 2017년 초여름에 만난 백률사는 대웅전과 요사채 정도만으로 이뤄진 작고 소박한 사찰이었다. 절을 찾은 사람들에게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졌다는 장소가 대략 어디쯤인지를 물었으나,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려주는 이는 없었다. ▲ 이차돈 흔적 찾을 수 없으나 `정신`은 남아 동국대학교 강석근 교수의 논문 `백률사 설화와 제영(題詠)에 대한 연구`는 백률사가 건립될 당시의 상황과 역사적 위상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다소 길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대로 인용한다.“경주의 소금강산(해발 177m)에 있는 백률사는 신라 불교의 대표 유적지다. 아울러 이 절은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와 함께 이차돈의 순교 현장이다.법흥왕 14년(527년)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 이차돈은 법흥왕과 함께 불교 공인의 주인공으로 병칭돼 왔다. 이차돈은 스스로 불교를 위해 참형을 받았다. 그때 그의 목이 날아가 소금강산에 떨어졌고, 목에서는 흰 젖이 솟아나는 이적(異跡)이 일어났다.이후 신라의 이차돈 추모자들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소금강산에 백률사를 세우고, 산정에 무덤을 조성했다. 이후 해마다 이차돈의 기일인 8월 5일이 되면 추모자들이 무덤가에 모여 제사를 올렸다. 이 같은 이차돈 추모의 전통과 열기는 고려 후기까지 지속됐다. 백률사는 이러한 역사적·설화적 배경을 가진 한국 불교의 성산(聖山)이다.” 요사채 앞 수돗가에서 더위에 달아오른 얼굴을 씻어내고, 백률사 경내와 주위를 찬찬히 돌아봤다. 절의 이름을 알려주는 비석을 발견했고, 일찍 찾아온 여름에 놀란 매미 몇 마리의 청명한 울음소리를 들었다.대웅전 앞뜰엔 무슨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것인지 하얀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대웅전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석벽에 삼층탑이 오목새김(음각) 돼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유심히 살폈으나 몇 세기에 걸친 세월과 세파에 닳아 그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백률사 범종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새겨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차돈 순교비` 또한 백률사에서 발견됐다.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발행한 이도흠의 논문 `이차돈의 가계와 신라의 불교 수용`에선 이차돈의 죽음을 “이중적”이라고 적고 있다. “법흥왕과의 사적 관계를 감안할 때 이차돈의 죽음은 불교 공인을 위한 자발적인 순교인 동시에 형벌이기도 했다”는 것.관련 서적과 논문을 읽고, 그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는 현장을 찾아다닐수록 이차돈에 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백률사 북쪽에 있다는 `삼존마애불좌상`을 찾아 다시 산길을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에선 어리고 착한 짐승이 울고 있었다. 이차돈 모습이 겹치는 `금동약사여래입상`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국립경주박물관. 그 옛날 신라 사람들의 미적 감각에 놀라며 전시관을 돌아보던 외국인 관광객 몇 사람의 발걸음이 양손이 떨어져나간 조각품 앞에서 멈췄다. `이게 뭘까?`라는 궁금증으로 기자의 발길 또한 거기에 머물렀다.국보 제28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銅藥師如來立像·이하 약사불)이었다. 177cm라는 높이가 어지간한 남성의 키보다 커 보였다. 알다시피 백률사는 법흥왕 때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소금강산에 위치한 사찰이다.수많은 설화가 전해오고, 불심을 통한 기적이 수차례 일어났다고 알려진 백률사에 그 모습도 수려하게 서 있던 약사불. 신라의 불교 성지 중 하나인 백률사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불상이다. 약사불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은 1930년.몸에 비해 머리가 크지 않은 약사불은 인간의 신체비례와 거의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원만한 둥근 얼굴에서 풍겨오는 인자함과 기다란 눈썹, 거기에 조그만 입과 오뚝한 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친근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평범한 듯하면서도 우아하다.비단 약사불의 몸만이 아니었다. 옷자락의 표현까지 섬세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납의(衲衣·승려의 옷)의 나붓거리는 사실감이 천년의 세월을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장중한 무게감과 동시에 약동하는 예술성이 느껴졌다.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밀려왔다. “손에 의술을 행할 도구나 약병을 들지 않았는데 왜 이 불상을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이라 칭하는 걸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약사불에 관한 문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설명이다.“일제강점기에 간행된 한국 문화재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에선 약사불의 왼손에 들린 약단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잘려져 어디론가 사라진 양손이 온전할 때 경주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 `약사불`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하게 약사불을 살폈다. 군데군데 푸른색과 녹색, 그리고 붉은색의 상처 비슷한 흔적이 보였다. 불상 겉면의 색채가 다른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이에 관해 고미술품 전문가들은 “부처의 몸에서는 금빛이 난다는 이야기에 따라 처음에는 도금(鍍)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금이 벗겨졌고, 이후 불상에 채색을 한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이차돈의 죽음 이후 백률사에 봉안된 약사불.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줬다는 이 불상은 `타애(他愛)`와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젊은 순교자 이차돈과 닮아 있었다.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6-02

이광수, 이차돈의 삶과 죽음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다

▲ 춘원 이광수가 1935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이차돈의 사`. 젊은 순교자 이차돈의 삶과 죽음, 그 궤적을 좇아가는 작품이다. 신라의 불교 공인을 위해 죽음을 자처한 스물한 살 청년. 잘린 목에서 젖처럼 새하얀 피가 솟았다는 이차돈의 순교는 고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이차돈 순교`는 드라마틱하고 논쟁거리 다분한 문학적 소재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차돈의 죽음에 관해 노래한 시나, 그의 짧고 뜨거웠던 생애를 그려낸 소설은 이상스레 드물다. 이런 상황이니 1935년부터 1936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이차돈의 사(異次頓의 死)`는 발표된 지가 8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이차돈의 삶과 죽음을 읽어낼 긴요한 텍스트로 역할하고 있다.`신라왕조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재주 많았던 한 청년이 안타깝게 희생됐다`는 역사적 사실에 춘원 특유의 장엄한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진 `이차돈의 사`.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신라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이차돈은 아름다운 연인 달님과 결혼을 약속한다.하지만, 둘의 관계를 질투하는 공주와 법흥왕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간신들의 모략에 의해 고구려로 쫓겨난다. 신라보다 더 큰 번영을 누리고 있는 고구려의 모습에 놀란 이차돈은 `내 나라 신라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이차돈의 명민함을 높게 평가한 고구려의 왕족은 이차돈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이차돈은 고구려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 한편, 이차돈이 신라로 돌아오는 것을 걱정하던 간신들은 자객을 보내 이차돈을 죽이려 한다.구사일생으로 위험을 피한 이차돈은 백봉국사(白峰國師)를 만나 불교가 전하는 교리를 배운다. 이후 `불법을 통해 나라를 구원하겠다`는 다짐으로 신라로 돌아온 이차돈은 순정한 뜻을 펼치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차돈의 사`는 법흥왕과 이차돈이 살았던 1500여 년 전 신라의 문화·종교·생활상을 서술한 80년 전 소설이다.“현대적 세련됨이 없어서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광수의 문장은 21세기 소설만큼이나 핍진성과 감수성이 넘친다. 게다가 유장한 서술과 꼼꼼한 묘사는 독자들의 호기심과 지적 욕구까지 자극한다.소설이 신문에 연재되기 사흘 전. 이광수는 `이차돈의 사`를 쓰게 된 이유를 이야기했다.“이차돈의 짧지만 다사하고 빛났던 눈물겨운 일생의 이야기를 통해 참된 사랑을 돌아보고, 그 참된 사랑 속에서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신라의 역사, 나아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의 빛과 그림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5-26

흥륜사, 그 옛날 모습은 사라졌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갔으나 어디에도 왕이 거닐었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황사로 뿌연 하늘 아래 미지근하고 쓸쓸한 바람이 불어올 뿐이었다. 경주시 사정동 옛 흥륜사터에 지어진 조그만 절.대웅전과 석등, 범종(梵鐘)과 이차돈 순교비를 모사(模寫)한 비석만이 이곳이 6세기 무렵 `왕의 사찰`로 불렸던 흥륜사(興輪寺)가 있던 자리임을 추측케 했다. 방문객이라곤 기자 하나가 전부였다.이차돈의 순교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에 의해 증축·재건된 흥륜사는 명실공히 신라를 대표하는 대가람(大伽藍·규모가 크고 불력을 인정받은 절)이 된다. 흥륜사가 거대 사찰로 변신을 시작한 시기는 535년(법흥왕 22년)으로 추정된다.사학자 김태형의 논문 `이차돈 순교유적과 유물에 대한 고찰`에 따르면 법흥왕이 첫 삽을 뜬 흥륜사 재건은 조카인 진흥왕 재위 5년(54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자그마치 9년 동안 진행된 대공사였고, `불국정토 신라 건설`이라는 백부 법흥왕의 뜻을 이어받은 진흥왕의 의지가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프로젝트였다. 진흥왕은 법흥왕 이상으로 불심이 깊었던 인물로 여러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진흥왕 또한 큰아버지 법흥왕과 마찬가지로 말년엔 왕의 권위와 권력을 망설임 없이 버리고 승려가 된다. 진흥왕의 법명은 법운(法雲). 흥륜사는 전직 왕인 법운이 주지로 있던 절이었다. 그러했으니, 당대 신라에서 흥륜사가 가지는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스물한 살 젊은이 이차돈의 죽음이 새롭게 탄생시킨 사찰 흥륜사.▲국가와 신라왕실 복을 빌고 재앙 물리친 사찰보각국사 일연의 `삼국유사`와 한국불교연구원이 간행한 `신라의 폐사(廢寺)` 등에 따르면 흥륜사는 불교를 전하러 신라에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한 절이라 전해진다. 세워진 시기에 관해서는 학설이 엇갈리고 있으나, 통상은 눌지왕(재위 417~458년) 때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처음에 지어진 흥륜사는 보잘것없는 규모의 초라한 사찰이었다. 앞서도 언급됐지만 흥륜사가 신라 최고의 가람으로 모습을 바꾼 계기는 이차돈의 순교였다. 법흥왕 14년에 이차돈이 “신라는 불교를 공인해야 한다”며 흰 피를 흘리고 죽자 관료와 백성들은 그 기적에 놀라며 청년의 죽음을 슬퍼한다.법흥왕은 이차돈을 기리기 위해 흥륜사의 증축과 재건을 명령했고, 진흥왕 때 완성된 절을 신라 사람들은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 불렀다. 여기서는 불교와 관련된 각종 집회가 열렸고, 국가와 신라왕실의 복을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흥륜사에는 선덕여왕 때 승상을 지낸 김양도가 봉안한 미륵삼존불상이 있었고, 신라십성(新羅十聖)을 표현한 벽화도 그려졌다고 전해진다. `왕의 사찰`로 이름이 높았을 때는 황룡사(皇龍寺), 사천왕사(四天王寺)와 더불어 신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그러나, 세월이란 언제나 무심한 것. 번창하던 흥륜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화재로 소실됐다. 석조 배례석(拜禮石) 정도만이 남아 그 터에 신라의 대가람이 있었음을 증명해줬다. 1972년과 1977년에는 흥륜사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다.동국대학교 이봉춘 명예교수는 `흥륜사와 이차돈의 순교`라는 논문에서 흥륜사의 역사적 위상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한국 불교사에서 신라시대 불교는 유독 긴장과 탄력의 역동적인 역사과정을 보여준다. 신라불교를 논할 때 대부분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것이 흥륜사와 이차돈 문제다. 신라 최초의 국영 사찰인 흥륜사 창건과 관련하여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신라불교 활동이 전개된다.” ▲ 이차돈과 법흥왕의 기억과 함께 할 흥륜사시간은 세상사 대부분의 것들을 모래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게 한다. 2명의 왕이 머물렀던 대사찰 흥륜사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인의 예술적 감각이 그대로 반영됐을 대웅전과 불탑 등은 1500년이란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다. 시간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과 사물은 극히 드물다.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1884~1962)의 말처럼 `형상`이 사라졌다고 해서 `정신`과 `기억`까지 소멸되는 건 아닐 터.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적지 않은 책과 신라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핏속으로 이어져온 유전적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흥륜사가 또렷하게 남아있다. `정신`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비 내리는 흐린 날 흥륜사 뒤편 소나무 숲길을 산책하는 법흥왕과 이차돈, 진흥왕을 느낄 수도 있다.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는 이차돈의 순교가 가져온 신라불교의 번성과 흥륜사의 미래 모습을 아래와 같은 문학적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이차돈은 신라에 불교를 뿌리 내리고자 자신의 한 몸을 미련 없이 버렸다. `화엄경`에 새겨진 글귀 `꽃과 강을 버릴 때 열매와 바다를 본다`는 진리를 몸소 증거한 것이다.이차돈의 희생적 이타행(利他行)은 통일신라를 거치며 화려한 불교문화로 승화되었고, 부처의 가르침은 호국불교 발상으로 신라정신과 민족정신의 근간이 됐다. 흥륜사는 상생불교의 대표 산실로 부각되어야 한다.”이 교수의 진술을 떠올리며 사정동 흥륜사터에 지어진 새로운 절의 돌계단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1500년 전 신라, 불법, 순교, 왕의 사찰, 시간의 흐름 속에 덧없이 사라진 것들…. 이런 단어가 불규칙한 연상 작용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현실인 듯 꿈인 듯 이차돈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는 법흥왕과 그 모습을 감동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진흥왕의 웃음을 본 것도 같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5-26

사후 1천500년, 법흥왕은 해탈에 이르렀을까

경주시 효현동에 위치한 법흥왕릉을 찾아가는 길. 봄은 끝자락에 와있었고, 어디선가 여름을 재촉하는 라일락 향기가 풍겨왔다. 지금으로부터 1천500여 년 전. 어떤 신라인보다 먼저 불교가 설파하는 자비와 수신(修身)의 메시지를 제 삶 속에 녹여냈던 법흥왕.왕릉에서 300m쯤 떨어진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야트막한 산을 올랐다. 울울창창 소나무가 저마다 훌쩍 큰 키를 자랑하며 법흥왕의 유택으로 가는 길을 호위하듯 서있었다.불심 깊은 사람이 본다면 그 소나무들이 큰스님을 보좌하는 동승(童僧)처럼 느껴질 터였다.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법흥왕 시절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차돈과 법흥왕이 생존했을 당시의 신라 사람들은 주로 하늘에서 강림한 조상신을 믿었어요. 그게 아니면 명산대천의 신선이나 천지신명을 섬겼지요. 불교는 자리를 잡기가 힘들었던 시대였습니다.”`왕즉불(王卽佛·왕이 곧 부처라는 뜻)`의 사상을 통해 왕권을 바로 세우고, 제정일치를 공고히 하려 했던 법흥왕에게 `신라의 불교 공인`이란 일생의 숙제이자 죽기 전에 반드시 이뤄야 할 과업이었다.때마다 자신의 뜻을 거역하며 호시탐탐 왕의 권력을 노리던 귀족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도 불교 중흥과 불교적 내세관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였다. 그는 귀하게 아끼던 스물한 살 청년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야 했다. 형리(刑吏)가 휘두른 서슬 푸른 칼에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날, 법흥왕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순교`와 `순국`이란 단어가 두렵고 낯선 보통사람으로선 감히 짐작조차 쉽지가 않다.법흥왕은 귀족들과 나눠가졌던 권력을 되찾아 왕권강화의 기틀을 만든 사람이다. 이로써 신라는 불교왕국으로서의 출발을 알린다. 백성들에게는 더없이 너그러운 군주였으며, 죽음에 임박해서는 정치권력과 재산을 버리고 스스로 승려가 되었던 법흥왕.일체의 욕심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던 왕이었기 때문일까? 법흥왕릉은 경주 각처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능과 달리 작고 소박하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인근 소나무 숲을 찾아온 새의 청아한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산을 내려오는 길. 문득 의문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최고의 권력을 넝마인양 버릴 수 있었던 법흥왕은 그가 꿈꾸던 불국정토에 지금쯤 이르렀을까?그에게는 1만 근의 황금보다 해탈(解脫)이 더 중요했던 것일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5-19

21세 이차돈의 순교는 법흥왕과의 밀약이었다?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째 되던 527년. 21세의 젊은 청년 하나가 왕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려 죽는다.그의 이름은 이차돈.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국정토(佛國淨土)로 번성하기를 바랐던 이차돈의 죽음 뒤에는 대의와 명분이 있었다.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했듯 법흥왕은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폭군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다. 그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온다.그렇다면, 어째서 이 둘 중 한 사람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요절(夭折)이라는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까? 누구라도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신라사를 연구해온 사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반불교 세력인 귀족들을 제압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법흥왕이 이차돈을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란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 가설이다.반면 불교·구도소설 `만다라`의 작가이자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승려생활을 경험했기에 누구보다 불교와 불교사에 대해 해박한 원로소설가 김성동(70)은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차돈의 순교에는 쉽게 해석될 수 없는 함의(含意)가 담겼다”고 했다.김 작가는 “단순한 역사해석은 오류를 동반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법흥왕과 이차돈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차돈은 나이와 상관없이 영특하고 굳센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법흥왕 또한 세상사와 사물의 겉만이 아닌 내부까지 들여다본 혜안을 지닌 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차돈의 순교`라는 사건은 서로를 신뢰하던 이차돈과 법흥왕의 밀약(密約)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이어진 김성동의 부연이다.현재도 역사학계에선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견해가 대립하며 충돌하고 있다. 이차돈과 법흥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두 견해 중 어떤 것에 더 무게가 실릴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 신념을 위해 자신을 버린 홍안(紅顔)의 청년506년에 지증왕의 생부 습보갈문왕의 후예로 태어난 이차돈은 박염촉(朴厭觸) 또는, 거차돈(居次頓)으로도 불린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신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책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이차돈은 올곧은 성정과 예의 바른 행실의 소년이었다.고대가 아닌 현대에 들어서도 그의 풍모는 책을 통해 묘사된다.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 `이차돈의 사(死)`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이차돈은 통상의 무장(武將)들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부리부리한 눈과 큰 목소리를 가지지 않았다.이차돈은 미목(眉目)이 청수하여 여자같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게다가 그는 무장에게 필요한 억센 생각이 적고 자비심이 많아서 전장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일에 어울리지 않았다.”여러 역사서와 이광수의 소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 이차돈은 외유내강형의 인물이었다.그는 일찍부터 불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는 신라가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하지 않고 있었던 시기.이에 이차돈은 불교에 대한 믿음이 단단했던 법흥왕을 설득해 순교를 먼저 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스물한 살 홍안의 청년이 자신의 나라를 불교왕국으로 자리매김 시키기 위해 세상 무엇보다 귀한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귀족과 토호들의 이권 다툼으로 혼란스럽던 당대의 신라를 걱정한 젊은 이차돈의 우국충정은 오늘날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순교의 아침. 자신을 걱정하는 법흥왕에게 이차돈은 “오늘 내가 죽어 내일 불국토의 아침이 밝아오고, 임금과 백성이 편안해진다면 어찌 내 한 목숨을 아낄 것입니까?”라고 되물었다 한다.이 정도면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결기다.역사적 기록은 물론, 명망 높은 작가가 상상력에 근거해 쓴 문학작품에서도 이차돈은 한결같이 `의지와 신념이 누구보다 굳셌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마치 똑같은 스물한 살 나이에 `몬카타 병영`을 습격함으로써 쿠바혁명의 불길 속으로 두려움 없이 뛰어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1932~1959)처럼. ▲ 불교를 공인하고 화랑의 기틀을 닦다지증왕(신라 22대 왕·재위 500~514)의 장남으로 태어난 법흥왕은 중국식 시호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왕으로도 유명하다.법흥왕 이전 신라의 왕들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렸다.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민간신앙의 전통이 강했고, 귀족들의 권력이 왕의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컸던 법흥왕 당시의 신라. 그랬기에 `왕권 강화`는 법흥왕의 가장 중차대한 당면과제였다.당시 법흥왕이 겪어야했던 고충과 스트레스는 한양대학교 이도흠 교수의 논문 `이차돈의 가계와 신라의 불교 수용` 아래 대목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교시를 내리고, 왕위를 내놓고 스님이 될 정도로 불심이 깊었던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14년 동안이나 불교를 공인하지 못한 것은 주지하듯 귀족의 반대 때문이었다.”`삼국사기`는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해 백성을 크게 사랑했다”고 법흥왕을 평가하고 있다.이는 법흥왕이 누군가의 죽음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했던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어쨌건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신라의 종교로 세울 수 있었던 법흥왕은 자신이 통치하던 시기에 젊은 인재를 양성했던 조직 `화랑(花郞)`의 기틀까지 닦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의 논문 `이차돈 유산 가치와 현대적 계승`에는 법흥왕의 말년이 짤막하게 언급돼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이차돈의 순교 후)불교는 왕실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는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고, 법흥왕과 왕비는 만년에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5-19

스물한 살 청년의 죽음에 얽힌 의문들

`불교`를 말하지 않고서는 신라를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공감하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불교를 말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이차돈과 법흥왕이 아닐까? 죽음을 통해 신라가 불국토로 가는 길을 연 이차돈과 최고의 권력자에서 승려로 존재를 바꾸는 법흥왕.527년 발생한 것으로 전해오는 `이차돈의 순교(殉敎)`는 불교 공인이라는 가시적인 변화 외에도 신라사회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다.본지는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았던 6세기로 돌아가 불교의 신라 유입과정과 변화양상, 신라의 당대 사회상과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죽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청년 이차돈`그의 목을 베자 땅위로 꽃비가 내려`신라사 가장 아름답게 죽은 영웅 `칭송`왕궁엔 팽팽한 긴장감과 공포감이 떠돌았다.왕은 수많은 벼슬아치와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묶여 있는 해사한 20대 청년에게 물었다.“네가 죽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 말을 믿어도 좋으냐?”청년이 답했다.“세상에서 가장 귀한 게 인간의 목숨이라지만, 큰 뜻과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해서야 어찌 장부라고 하겠습니까. 제 죽음으로 이 땅에 불법(佛法)이 바로 선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잠시잠깐 망설이던 왕은 청년의 목을 베라고 명한다.위의 장면은 신라의 23대 왕인 법흥왕과 순교자 이차돈(異次頓·506~527)의 마지막 대화를 상상력을 바탕으로 풀어 쓴 것이다.514년부터 36년간 신라를 통치한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왕권국가의 기초시스템을 구축한 현명한 군주였다. 또한, 그는 신실한 불교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하지만, 법흥왕은 함부로 불교의 교리를 설파하고 승려들을 친절하게 대할 수 없었다.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지닌 귀족들 상당수가 불교의 유입을 막고, 공인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차돈은 불교를 받아들일 수도, 내칠 수도 없는 법흥왕의 딜레마(dilemma)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랬기에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고 “만약 불교가 자비롭고 옳은 종교라면 내 죽음에서 이적(異跡·신의 힘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남)이 나타날 것”이라며 스스로 처형을 요구했다. 그래서 정말 `이적(기적)`이 일어났을까? 전해오는 역사서들은 스물한 살 신라청년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먼저 `삼국유사`다.“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고, 잘린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 산정에 떨어졌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진동하는 땅 위로 꽃비가 떨어졌다.”일연(一然·`삼국유사`의 저자)의 드라마틱한 서사방식과는 달리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유학자다운 간명한 어법으로 이차돈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서술은 아래와 같다.“청년의 목을 베자 피가 솟아났다. 붉은색이 아닌 흰색의 젖과 같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에 놀라 다시는 불교를 비방하지 못했다.”삼국시대 불교의 유입과 전파에 큰 영향을 끼친 승려들의 이야기를 담은 `해동고승전`에도 동일한 사건이 다른 방식으로 쓰여 있다.고려 고종 2년(1215년) 각훈(覺訓)이 묘사한 이차돈의 죽음은 이러했다.“그의 머리를 베자 금강산정에 날아가 떨어졌다. 벤 곳에서 흰 젓이 솟아나 높이가 수십 길이 되었다. 태양이 빛을 잃고 공중에선 꽃비가 내렸다.”신념을 위해 자신을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것도 아직 세계관과 철학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제 몸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이 품었던 뜻을 펼치고자 했던 청년 이차돈.각종 문헌과 구전되는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는 그의 단단한 신념은 자연스레 작가 H. 잭슨 브라운 주니어(H. Jackson Brown Jr)가 쓴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브라운은 “누구에게서도 희망만은 빼앗지 말라. 그것은 그가 가진 전부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불교의 공인과 신뢰했던 법흥왕의 입지 강화라는 `희망`을 위해 생명을 던진 순교자 이차돈.여전히 `친일논란`에 휩싸여 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의 최고 지식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소설가 이광수(1892~1950). 그는 이미 1세기 전에 이 `젊은 순교자`에게 매료됐다.이차돈의 생애에 문학·예술적 이미지를 입혀 쓴 장편 역사소설 `이차돈의 사(死)`는 이광수 소설의 변곡점이 된 작품 중 하나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캔버스 위에 사랑과 고통, 죽음과 정신적 부활이라는 세밀한 작가적 관찰을 덧붙인 `이차돈의 사`는 1935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여기서 이광수는 이차돈을 이렇게 평가한다.“신라사(新羅史)만이 아니라 전 조선의 반만 년 역사를 통하여 가장 아름답게 살고 가장 아름답게 죽은 영웅이다. 16세에 벌써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고, 21세에 장차 공주와 왕위까지 얻을 수 있는 부귀를 버리고 신라 귀족 전체의 적이 되어 아름다운 순교자의 죽음을 맞았다. 나는 순교자를 사모한다. 내가 순교자가 될 만한 인물이 못되니까 그런가보다.”`친일`이라는 그림자와 `조선 신문학의 개척`이라는 빛을 동시에 지닌 이광수. 언필칭 `20세기 초반 한국의 거물예술가`로부터 이 정도의 상찬을 얻어낸 다른 역사적 인물이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봐도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다.이광수는 이차돈에 대한 흠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도 제기한다. 역시 소설 `이차돈의 사` 서문(序文)을 통해서다.“어찌하여 스물한 살 이차돈은 천하에 으뜸가는 영화와 연인까지도 버렸나? 어찌하다가 푸른 청춘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이 된 것일까? 어째서 법흥왕은 귀애하던 이차돈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까?”비단 이광수만이 가진 궁금증이 아니다. 신라와 신라의 역사, 불교의 신라 유입과 이후 신라가 불교국가로 성장했던 과정에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는 크나큰 수수께끼다. 이차돈과 법흥왕을 알아가는 과정은 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여정에 다름없을 것이다. 신라의 불교수용이 늦었던 이유는 뭘까?고구려보다 155년 늦게 받아들여토속신앙 믿는 귀족들 반대가 주요원인신라, 고구려, 백제가 자웅을 겨루며 대립하고 정치·군사적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삼국시대. 세 나라는 인접한 국가인 만큼 외국에서 들어온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유사했고, 전래 시기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그럼에도 왜 불교의 전래와 수용에서는 시기상으로 큰 차이가 나는 걸까?고구려는 소수림왕이 통치하던 372년에 승려 순도(順道)가 가지고 들어온 불경과 불상에 경의를 표하며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2년 후인 374년에는 동진에서 아도(阿道)가 고구려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부처의 교리를 민간에 설파하기 시작한다. 384년 집권한 고국양왕은 왕명(王命)으로 불교를 신성시하라고 했고, 불법을 어긴 자는 엄히 다스렸다고 한다. 드넓은 땅 위에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광개토대왕 역시 불교 숭상정책을 폈다.그가 재임하던 392년에는 평양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9개의 절을 짓기도 했다. 고구려 불교의 주류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인 `삼론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역시 침류왕이 왕좌에 있던 384년 불교를 받아들인다.수만 리 먼 땅에서 경전을 전하러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를 침류왕은 귀빈으로 대접한다.궁전에 처소를 마련해주는 것은 물론, 예의를 다해 이 외국 수행자를 높여줬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백제에는 불교와 승려를 존중하는 문화가 이미 정착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의 불교는 성왕 때인 538년 일본으로 전해진다. “어렵지만 크나큰 복을 전해줄 교리가 불교에 담겼다”는 왕의 친서(親書)와 함께.이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경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 교리를 왕권강화와 국민통합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반면 신라가 `공식적으로` 불교를 승인한 것은 이차돈이 순교한 527년(법흥왕 14년)으로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고구려보다 무려 155년이 늦은 것이다.삼국 중 유독 신라의 불교 공인이 늦은 이유를 이봉춘 동국대 명예교수는 “지리적 고립성과 불교신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신라의 종교·문화적 특성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의 논문 `흥륜사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서다.여기에 보충해 “왜 신라는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까”라는 독자들의 궁금증에 답해준 사람은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이다.박 원장은 “불교는 중국을 통해 도입된 것으로 신라의 지정학정 위치상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뒤 “토속신앙을 믿었기에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귀족들의 반대도 신라로의 불교 유입이 늦어진 주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이런 까닭으로 큰 수난이나 박해 없이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미래가 기대되던 총명한 20대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은 후에야 뒤늦게 불교를 공인하게 된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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