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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전국의 청년들이 경북서 꿈과 희망을 찾길 기대합니다”

경북매일신문에서는 지난 5월부터 경상북도의 시·군에 정착한 도시 청년들의 이야기를 연재했다. 멜빵총각이라는 이름으로 토마토를 재배하는 청년도 있었고, 독일에서 귀국한 바이올리니스트도 있었다. 이들의 정착 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흐뭇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도시 청년들의 시골 정착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주 - 경북에 정착한 도시 청년들은 도시청년시골파견제의 도움이 컸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사님은 도시청년시골파견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신가요?△ 경상북도를 청년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인식하게 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재능있는 청년들이 경북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단순 정착에서 벗어나 지역 사회에 문화예술, 지역자원을 활용한 콘텐츠 개발과 사회서비스 제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이 사업을 통해 지역에 연고가 없는 청년들이 새로운 마을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그들과 상생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도시청년시골파견제와 비슷한 사업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업이 성과와 평가를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균형발전을 위한 지사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1949년 경북인구는 321만 명으로 전국 1위였습니다. 당시 서울인구는 144만 명이었는데, 1970년 서울에 역전되어 2위가 됐습니다. 대구와 경북 분리 이후 더욱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분리 직전인 1980년 대구·경북 인구는 495만 명이었는데, 2020년 505만 명으로 40년 동안 겨우 10만 명 증가하는데 그쳤습니다. 같은 기간 수도권 인구는 무려 1천262만 명 증가했습니다.대한민국은 수도권 공화국입니다. 인구의 절반, 전국 상위 20위 대학 중 12개, 100대 기업 중 84개, 좋은 일자리의 80% 등이 수도권에 몰려 있습니다. 청년들은 공부시켜 놓으면 취직하러 서울로 가버립니다. 지방소멸은 국가적 문제가 되었지만 수도권 중심 사고는 요지부동이며, 중앙정부의 모든 정책이 수도권만 살찌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역대 정부마다 균형발전을 외쳤고 현 정부 역시 연방제에 준하는 지방분권 정책을 내세웠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지방자치단체의 권한과 행정체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확실한 지방분권이 되어야 합니다. 대구·경북 행정통합도 규모를 키우고 지방분권을 강화하여 균형발전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시도한 것입니다. 장기과제로 넘기게 되었지만 판을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날로 거대해지고 있는 수도권과 맞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한 대다수의 청년들은 로컬 정착을 위해 인프라 확장과 지역 네트워크 확대를 꼽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도에서는 청년을 위한 단순한 지원 정책을 넘어 청년들의 무한한 잠재력이 발현되어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상호 네트워킹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 청년들의 생각을 소통하고 삶을 공유하기 위한 청년 네트워크 구축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청년공동체 활성화 사업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청년공동체를 발굴하여 지역사회와 적극적인 소통을 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청년연합회, 청년회의소, 4H연합회 등 청년단체들과 유기적인 체계를 구축하여 현장의 목소리를 도정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향후 청년정책에 대한 통합적인 정보 제공과 소통 창구의 역할을 수행할 청년정책 플랫폼을 구축하여 청년이 원하는 정보를 원스톱으로 지원하고 청년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안타깝게도 경북의 다수 지역이 인구절벽과 소멸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청년인구 유출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와 도시 청년들의 관심도 많았으면 하는데요?△ 경기도와 세종시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청년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경북은 청년인구 유출이 타지역에 비해 많은 편입니다.청년인구 유출 원인은 일자리, 주거, 문화, 교육, 복지 등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입니다. 우선은 일자리 문제가 청년들을 외부로 나가게 하는 주 요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2020년 전출 사유를 조사해보니, 32.7%가 직업을 이유를 꼽았습니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청년 유출을 막는 첫 단추인 셈입니다.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도시 청년들의 지역에 대한 관심이 중요합니다. 우리 도는 ‘도시청년 지역상생 고용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청년창업 지역정착사업’과 ‘자립마을 활성화 지원사업’을 구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아울러 청년정착 지원정책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일자리뿐만 아니라 주거, 문화, 교육, 복지 등 종합적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중소기업 근로 청년들에게 교통비와 연 100만원의 복지카드를 지원해서 청년들의 문화복지 지원도 늘려갈 계획입니다. 이외에도 ‘청년발전소’를 통한 청년활동가 양성과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도 진행 중입니다.- 향후 경북을 찾으리라 예상되는 청년들을 위해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추진된 수도권 중심 발전 전략으로 인해 기업, 교통, 문화·예술, 생활 SOC 등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왔습니다. 이에 청년들은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일자리도 구하기 어렵고, 일상적인 문화생활도 누리기 어려운 곳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과밀해진 수도권에 비해 지방은 새로운 성공의 기회들이 창출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신생활방식으로 정립되고 있는 ‘메타버스’와 비대면 일상은 세계 어디서든 일하고, 배우고, 즐길 수 있도록 물리적 제약을 풀어헤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주거 문제로 받는 고통도 줄여주기 위해 우리 경북은 월세 지원 등 많은 정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경북에서 전국 최초로 만든 ‘이웃사촌 시범마을’처럼 청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가장 멋지고, 빠르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전국의 청년들이 경북에서 꿈과 희망을 찾기를 기대합니다. “청년의 성장,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기다림이 중요” 이미나 경북행복경제지원단 과장. 파종과 추수 사이에는 ‘정성’과 ‘기다림’이 필요하듯, 청년을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주체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정성’뿐만 아니라 ‘기다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상북도는 2018년부터 시행한 도시청년시골파견제를 통해 전국 최초의 청년유입정책 1.0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시작은 2017년 ‘청년U턴 일자리 지원사업’이라는 시범사업을 통해 문경에서 10명의 도시 청년들이 보여준 희망과 가능성이었다. 10명의 청년들은 6개월 이상 경제 활동을 포기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화했다. 또 지역 공동체 일원으로 성장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행정과 청년의 콜라보로 탄생한 노력의 결과물은 대단했다. 청년들은 인구소멸 문제로 골치를 앓던 시골 마을을 월평균 8천 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탈바꿈시키며, 지역의 인적자원으로 자리매김했다.지방소멸 위기에 처해있는 시골 마을에서 청년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청년공동체를 복원시키는 이상적인 그림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보이지 않는 정성과 기다림, 간절함과 진정성이었다. 현재 수도권, 비수도권 할 것 없이 전국의 지자체들은 인구감소에 따른 위기의식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청년유입 및 정착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주요 내용은 해당 지자체로 이주해온 청년에게 경제활동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허점이 있다. 우선 국가 전체 인구는 그대로인데 지자체에서 예산을 투입하여 제로섬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제로섬 게임에서 뛰게 되는 선수가 실패 경험이 많지 않은 청년이라는 점이다. 첫 번째 문제도 문제지만 두 번째 문제가 더 심각하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를 문제의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이라는 시간 속에서 제한 시간 내에 청년을 선발하고 약정된 지원금을 지급하고 사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절차상 과정 속에서 그 누구도 청년의 삶을 면밀히 관찰할 여유도, 그들이 요구하는 내용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성공모델이 되기를 꿈꾸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세상에 공짜는 없다.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주와 정착을 하게 되는 청년들은 행정에서 요구하는 시간 내에 그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미션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런데 미션 난이도에 대해서는 누구도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지역에 이주해온 청년들이 낙오되지 않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 예산을 받은 청년들은 게임판의 경주마가 된 것처럼 빠른 시간 내에 성공모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경주마가 된 청년 개개인의 삶 자체에 대한 책임감은 행정영역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단지 청년 개인의 능력부족으로 치부되고, 행정 낭비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중간지원 조직에서 청년들과 소통한 담당자 또는 지자체 담당 공무원이 떠안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 보니 청년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어야 할 주체들은 관심과 사랑이라는 정성을 쏟기보다는 결과물에 대한 책임소재를 걱정할 수 밖에 없다. 또 청년이 지역사회 안에서 스스로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기다려주기보다는 성과물에 대한 관리감독자로서의 역할에 치중하게 된다. 대도시와 같은 인적·물적 인프라가 충분치 못한 지방도시에서는 청년을 바라보는 여유가 미덕으로 작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조급함은 청년들에게 그대로 전가되는 것이 현실이다.도시청년시골파견제의 시작은 간절함과 진정성이었다. 청년을 맞이하는 지역의 자세도, 새로운 꿈을 찾기 위한 청년도,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유연한 행정도 모두 한 마음 한 뜻이었다. 그래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청년이 스스로 성장하여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지역의 경제를 이끄는 주역으로서 버텨낼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야말로 지역사회가 청년을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가 아닐까.이미나 (경북행복경제지원단 과장 / 교육학박사)/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10-05

참외를 아이스크림에 쏙~로컬서 즐기는 ‘건강한 맛’

경상북도 성주의 한 외딴 지방도. 이곳에는 수제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다. 가게 이름은 ‘능행’이다. ‘임금이 능에 행차한다(陵幸)’라는 왠지 거창한 이름은 아니다. ‘能(능할 능)’과 ‘行(행할 행)’의 ‘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어쩌면 청년이기에 지을 수 있는 가게의 이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능행(能行)’의 주인장은 두 사람이다. 동생인 권은아(37) 대표가 언니인 권세라(41) 대표와 함께 하고 있다.이들은 ‘시골에 사는 아이스크림’이라는 프로젝트명으로 성주에서 참외를 활용해 아이스크림을 만들며 6차 산업을 향하는 길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가공식품인 아이스크림이 ‘시골’에서 만들어져 더 천연에 가깝고, 자연 친화적인 느낌을 주어 건강한 아이스크림 컨셉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여기에 아이스크림을 의인화해 시골에서 살고 있다고 표현을 했고 친근함을 담았어요. 사업명을 저희 컨셉으로 설정하고 상호명은 모든 뜻을 함축한 ‘능행(能行)’이라고 짓게 됐죠. 진정한 행함을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모든 것을 감내하고 나아가려는 저희의 진정성을 담고 싶었어요.”그래서 ‘능행(能行)’ 아이스크림의 주된 재료는 참외다. 그동안 참외를 이용한 아이스크림은 수제 젤라또 가게에서 참외 샤베트를 만드는 정도로 밖에 접할 수 없었다. 참외가 수분이 많고 향이 약한편이라 샤베트 형태로 만들 수 밖에는 없었다. 참외를 이용한 아이스크림은 지난한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성주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참외향이 풍부한 참외동결건조분말을 개발했다. 이를 우유와 접목하니, 3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이 탄생했다. 아이스크림에 대한 평가도 좋다 보니, 사업도 확장됐다.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가게의 형태에서 공장이라는 제조업으로 발을 넓힌 것이다.“처음부터 제조업을 계획하고 창업을 시작했어요. 아이스크림은 특히, HACCP 인증이 필수죠. 단순히 잘 팔리는 제품을 만들어서 많이 팔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품을 위생적이고 안전하게 만들어서 많이 팔아야 하는 거죠. 이 부분을 한결같이 유지 및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인 것 같아요.”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능행(能行)’의 행보에 제동을 걸고 있다.“코로나19는 정말 타격이 커요. 올해 초에는 과감하게 가게 문을 닫기도 했어요. 직원 보호도 있지만, 저희 가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고객 간의 교차 전염을 막는 목적이었죠. 하지만 당장의 고정비들이 나가는 저와 같은 자영업은 힘들죠. 정말 월급 받는 분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매출이 약간의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던 시점에서 판매가 거의 차단되어 버리니, 그동안의 홍보에 든 비용과 노력 또한 ‘0’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참 마음이 쓰렸죠.” □ 대구 토박이 자매… “시골이 편해요”본래 권세라·권은아 자매가 창업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권은아 대표는 1년 정도 스낵 및 식품 제조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창업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회사에 충성하고 팀원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퇴사를 결심했지만, 어학연수를 떠날 계획을 세웠을 뿐이었다.“학교에서 석사까지 마친 후 대기업 제과회사에 입사했어요. 당과와 스낵류 연구개발이 주된 업무였죠. 이후에는 사촌 오빠가 대구에서 비정제 사탕수수당 회사를 시작했고, 저는 품질연구 업무의 책임자로 스카웃되어 5년간 일했어요. 가족이 하는 회사다 보니, 맡고 있는 업무 외의 전반적인 경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됐어요. 아마 창업에 대한 실전 경험이 저도 모르게 쌓인 것 같아요. 그래서 퇴사 후 다양한 갈림길 앞에서 3년 전부터 저에게 요청을 하셨던 거래처가 있으셨는데, 판로가 어느 정도 확보된 아이스크림 제조업을 하고자 하게 됐죠.”언니인 권세라 대표도 영어에 능통하면서 식품 업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함께 창업을 할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가 됐다. 그렇게 해서 처음 제품화한 것이 ‘능행 젤라또’였다. 12가지 맛을 볼 수 있는 이 제품은 온라인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그렇다면 왜 하필 경상북도 성주였을까. 사실 이들 자매는 성주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사투리를 진하게 사용하는 ‘대구 토박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와 대학원도 대구에서 마쳤다.“식품의 근간은 땅이잖아요. 땅은 도시보다 시골에 있지요.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해나갈 식품업이라면 땅과 가까운 것이 당연한 것 같아요.”물론 더욱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전체 아이스크림 시장은 축소되고 있지만, 카페 등 외식산업이 성장하면서 ‘젤라또’와 같은 고급 아이스크림 시장은 점점 늘고 있는 추세였어요. 그러나 ‘고급 아이스크림’의 공급 업체는 국내에서 손에 꼽히며, 특히, 남부지방 쪽에서는 생산업체가 전무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러한 공급업체로 성장하고 싶었죠. 하지만 당장 큰 공장을 차려서 운영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부담이 컸어요. 제가 생각한 방향은 수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부터 시작해 제조업으로 점점 키워나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높은 유지비의 도시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죠. 성주는 접근성이 뛰어나요. 외부 지역민의 유입도 많구요. 특히, 성주에 참외 생산 및 GAP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외사촌이 있어서 성주의 제1특산품인 ‘참외’를 아이템으로 정했어요.”이렇게 고향인 대구를 떠나 성주의 삶을 이어간 자매. 이들은 시골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도시 사람이 시골로 가면, 소위 말하는 텃세가 있다고 하잖아요. 저희는 젊은 사람이 와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 텃세가 없어요. 오히려 저희 집주인 어르신부터 이장님까지 모두가 너무 잘해주셔요. 하나라도 팔아주시려고 하고, 소문도 내주시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죠. 물론 도시와 시골의 패턴은 너무나 다르죠. 다만, 이곳에서는 몇날 며칠을 일에 몰두할 수 있고, 쉬고 싶을 때는 여유롭게 시간을 안배할 수 있어요. 제 일에 대한 책임감이 훨씬 막중하지만, 제가 적극 개입하는 생활 패턴 오히려 더 마음의 여유를 주는 것 같아요.” □ 가치를 지키고 고민하고 실행할 수 있는 시간권세라 대표와 권은아 대표는 청년들의 시골 정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조금은 철학적일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도시의 삶과 로컬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말이다.“(로컬은)조금 더 여유롭고 깊으며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어요. 도시에서의 생활은 당장의 생활에 쫓기듯 살아가야 하죠. 눈앞의 생활비와 유지비 등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크죠. 하지만 로컬에서의 삶은 달라요. 제가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실행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있죠. 팔리기 위한 제품이 아니라 의미와 추구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고민할 수 있어요.”문제는 비전이었다. 청년들이 로컬에 들어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가치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분명 개인의 성향과 관계가 많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같이 여유롭고 조용한 생활을 원한다면 추천을 하죠. 하지만 빠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사람들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아직 고민 중에 있는 분들에게 말씀을 드리자면, 도시에서 하는 창업보다 시골 지역에서의 창업은 또 다른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시골 지역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지역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고, 그 네트워크가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업에 참여를 하게 된다면, 오픈 마인드로 타 사업팀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해서 탄탄한 네트워크를 쌓으면 좋을 것 같아요.”말 그대로였다. ‘능행(能行)’의 두 자매는 여러 가지 지역 사업에 참가하고 있었다. 클래스 1010 신사임당 강의에 나가기도 하고, 성주와 대구 및 김천의 플리마켓에 참가했다. 또 지역민들과 함께 ‘능행(能行)’의 동행 프로젝트를 진행했다.“앞으로의 계획이요? ‘능행(能行)’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고객의 무한신뢰를 확보하는 거죠. 이를 위해, 저희의 진실된 이야기를 알리고 인지시키고 싶어요. 또 저희의 방식을 오픈해서 많은 청년들과 공유하고 싶기도 하구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기에, 미래에 소신과 철학을 잃지 않는 행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9-14

한복과 비단의 결합… 전통의 아름다움을 말하다

여기 어려움을 이겨내고 시골에서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경북 고령에서 한복을 활용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비단’ 박윤주(32) 대표가 주인공이다.“대구가 고향이에요. 원래 대구에서 요식업 사업을 했었죠. 사고로 인해 발목 골절 수술을 받고 건강상의 이유로 요식업 사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어요. 수술 후 재활을 받으며 꿈을 잃었다는 생각에 낙심도 했구요.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한국의 미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한복에 매료됐죠. 한복을 짓고 남은 자투리 원단을 버리기 아까웠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생활 소품을 만들면서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게 됐죠.”큰 교통사고로 1년 동안이나 입원했었다는 박윤주 대표.요리를 좋아했던 그녀는 2개의 분식점을 운영했었다.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했던 그녀는 큰 수술을 받고, 쪼그려 앉지도,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든 신세가 되었다고. 그것도 20대의 젊은 나이에 말이다. 1년이라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그녀의 머리를 스친 것이 바로 한복이었다고 한다.“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대구에서 한복을 가르치는 아카데미가 딱 한 곳 있었어요. 그때 너무 간절해서 선생님께 말했어요. ‘저는 정말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요. 혹시라도 제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아무 일을 못하더라도 제가 먹여 살릴 수 있는 그런 기술을 배우려고 해요’라고 말이죠.”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의 ‘한국의 비단’이다. 현재 한복 원단으로 패션잡화와 액세서리 등 다양한 생활 소품을 디자인하고 제작한다. 이는 온라인으로 판매하며 출강과 공방을 함께 운영 중이다. 특히, 오프라인 출강은 한복 원단을 활용한 원데이 클래스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관심이 아주 많다고 한다. 매출도 상당했다. 지난해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제품의 판매량이 많아지면서 최고 매출을 찍었다. □에너지를 주는 로컬의 삶대구를 기반으로 살고 있던 박윤주 대표가 로컬인 고령으로 내려온 까닭은 무엇일까. 어차피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한복 원단 제품이라면 시골보다는 도시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녀 역시도 “고령은 사업 아이템 원재료 부자재 시장이 멀다. 인터넷으로 자재를 배송시키지만, 값을 더 치러야 한다. 배송까지 2~3일이 소요되어, 불편하더라도 자재는 시장에 구매하는 편”이라면서 “시장 가는 날은 하루를 완전히 비워야 다녀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실제로 박윤주 대표는 귀농과 귀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시골살이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없었지만, ‘한복의 비단’은 대구에서 시작을 고려하고 있었다.“남편의 직장이 이곳에 있었어요.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의논하던 중에, 출근 지옥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남편의 바람으로 이곳에 정착했어요. 개인적으로 이곳에 와서 도시에서 느껴보지 못한 신선한 바람과 여유로움, 조용함, 아늑함이 저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도시에서는 누군가 쫓지 않아도 쫓기는 느낌이 들었죠. 그런데 고령에서의 삶은 일상이 여유로워 정신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껴요. 장날 시장에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대형마트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고, 가끔 콩나물 서비스도 주시는 장날이 더 좋아요. 거짓말이 아니라 도시에서 1년에 2~3번은 걸리던 감기가 고령에서는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어요.” 그렇게 그녀는 고령에 사업장을 마련하고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어 SNS에 올리고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대표적인 핸드폰 액세서리 중 하나로 관련 인기 상품 목록 10위권에 드는 제품도 수두룩하다. 소비자의 의견도 반영했다. 제품 자체가 화려해서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의견을 반영해 버전도 달리했다.“사실 한복이 요즘 뜨는 원단도 아니고, 시장 가치가 과연 있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죠. 오로라와 같은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유행에 동요하지 않는 청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한복 원단으로 기성품과 거의 차이가 없는 제품을 만드는 사람은 아마도 저밖에 없지 않을까요?”그래서 궁금했다. 그녀는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즘 새로운 제품 제작 때문에 조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지금 생활과 이곳에서의 삶은 100%와 1천%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도시에서 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삶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어요. 먹는 음식부터 공기와 분위기, 정신적인 여유로움, 조용함 등이요.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로 인해 행복해지면서, 정신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을 건강하게 해서 몸도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청년들이 ‘나도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면…이러한 그녀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 청년들이 자신의 스토리를 보고 ‘나도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사실 그녀는 정부의 지원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막막했다. 경북경제진흥원에서 진행하는 사업계획서 발표에도 달랑 A4지 한 장만 들고 갔다고 한다.“혼자 쭈뼛쭈뼛 발표할 내용을 적은 A4지 달랑 들고, 너무 부끄럽고 주눅이 들었죠. 다른 팀에서는 노트북을 활용한 PPT도 준비하시고 레이저도 들고 멋지게 하시더라구요. 이렇게 멋지고 프로페셔널하게 준비를 하시는 분들에게 죄송할 정도였죠. 얼마 후 문자로 온라인에서 합격 여부를 확인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1%의 기적을 생각하며 확인했죠. 그런데 제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더라구요.”이렇게 고령에 정착한 그녀는 과거 교통사고의 후유증에서 거의 벗어났다. 그간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기 힘들어 운동량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이제는 몸과 마음에 활력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향후 그녀는 주얼리와 한복 원단을 결합하는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귀걸이와 반지, 팔찌 등에 한복의 아름다움이 결합하면 제품군도 늘릴 수 있고, 수요층도 더 넓어질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주얼리 공방에 다니면서 주얼리의 제품 특징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라 출시가 더디지만, 전통을 일상으로 녹아드는 제품을 제작하는 것이 저의 사업 목표죠. 그에 걸맛는 대중적인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또, 고령군 내 공예가 선생님들과 ‘수재들’이라는 작은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요. 손으로 직접 만든 ‘수제’와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가져온 팀명이죠. ‘수재들’팀과의 협업도 계획 중에 있어요.”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청년들이 로컬에 오기 힘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또 청년들이 로컬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이다.“통상적으로 청년들은 꿈을 쫓아 도시로 가는 것 같아요. 저의 경우처럼 청년이 꿈을 로컬에서 키울 수 있는 지원사업이 꾸준하게 활성화되면, 많은 청년들이 꿈을 쫓아 로컬에 정착하지 않을까요? 물론, 저는 우연한 기회에 고령에 정착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시에서의 삶보다 이곳에서의 삶이 더 나은 삶이라는 확신이 정착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피치 못할 사정이 없다면, 저는 도시로 다시 가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저는 로컬에 비전이 충분하게 있다고 생각해요. 문화 활동이나 여가시설, 편리한 소셜 서비스 등에는 제한이 있죠.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불편함보다 좋은 점들이 더욱 많아서 한 번도 도시가 그리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우리의 전통을 지켜가야 한다’는 당위적인 말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꾸준하게 염두에 두고 현실을 지켜나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기반시설이 거의 전무한 시골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도전이 더욱 빛이 나는 것이 아닐까./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9-07

“고향·풍경·자연… 영천을 담은 디자인 만들어요”

경북 영천에는 고향을 디자인하는 아가씨가 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이었던 지난 5월에는 첫 채용 공고도 냈다. 그 한 달 전에 진행한 플리마켓에서는 청년들과 지역민들과의 만남의 장을 만들기도 했다. 그것도 펜션 체험권과 경품을 퍼준다는 주제를 걸고서 말이다. 만복기획의 정유영(35) 대표는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과 굿즈 제작으로 눈을 돌리고 영천에 정착한 청년이다.“처음에는 모션 그래픽 분야의 외주 중소기업에 근무했어요. 모션 그래픽이 뭐냐구요? 요즘 TV에 많이 쓰이죠. 자막에서부터 각종 기호의 움직임, 실제 인물과 그래픽의 합성 등이 대표적이에요. 보통 모션 그래픽이 많이 사용되는 분야는 선거방송이죠. 온갖 화려한 그래픽이 등장해 선거 득표 현황을 중계해요. 그런데 촉박한 시간 안에 정교한 움직임을 구현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어요. 7년을 일하면서 말도 못하게 힘든 시절을 겪었어요.”일이 힘들어 프리랜서로 전향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전망도 밝아 보이지 않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처음 시골이라는 곳에 내려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대가 심했어요. ‘이제 겨우 손발을 맞춰 놨더니 시골로 내려가냐’면서 심하게 타박하기도 했죠. 그런데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틸 힘이 없었어요. 더 이상 제가 소속된 도시의 디자인 시장에서 이룰 것이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함과 도시의 소모품으로 사는 것 같은 생활패턴에 염증을 느끼던 평범한 청년 디자이너였죠.” □지역 콘텐츠, 정착을 위한 사업 아이템으로“처음 서울에서 일할 때는 자존감이 완전히 바닥이었어요. 함께 일하는 PD와 손발도 안 맞고, 제 작업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계속해서 재작업을 요청했죠.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겠는데, 화도 내지 않고 재작업을 시키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사흘 밤을 새는 일도 허다했죠. 그렇게 서서히 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무려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어요. 힘들게 이뤄온 경력인 만큼 그 분야에서 저의 영역을 구축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문제는 서른 살이 넘어서도 감당하기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는 점이었어요.”그나마 경북 영천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보통 고향이 주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푸근함과 안정감, 그리고 휴식이다. 여기에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곳이 고향이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또 반대로 무엇인가를 시작하려고 해도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근자감)이 힘을 주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정유영 대표도 아마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정유영 대표는 고향 영천과 자신의 장점인 디자인·굿즈를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애초 꿈도 굿즈 제작이었기에, 재미도 있었다. 자신이 만든 디자인 제품을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고 사용하는 것이 좋았다.그 결과가 만복기획의 첫 시작이었던 ‘영천문구점’이었다. 왠지 조금은 식상해 보이는 이름. 다만, 영천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굿즈와 문구를 만들고,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하겠다는 의도는 좋았다. 특히, 지역 콘텐츠를 살린다는 점에서는 독특한 접근이었다.“영천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는 스토리와 우리나라 토종 동물 캐릭터를 이용한 ‘영천 프렌즈 캐릭터 상품’, 실생활에 쓰임새가 있는 패브릭 포스터, 추억이 담긴 엽서를 만드는 ‘고향풍경’이라는 브랜드도 생각했어요. 또 도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긴 멜로디 카드,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가 담긴 사투리 머그잔도요. 아마 제 고향이 영천이라 기획할 수 있었겠죠?” 그녀의 이러한 지역 친화적이고 독특한 기획이 통한 것일까. 1년 반 정도가 지나자 그녀의 사업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자체 디자인을 통한 굿즈 제작도 순조로웠지만, 지역 업체 여기저기서 디자인 의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SNS를 보고 서울에서도 연락이 왔으며, 서울에서 살고 있는 그녀의 친구가 시골에 오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성공적이라고 자평한다. 프리랜서를 할 때는 한 달에 많으면 400만원, 적으면 200만원 정도를 벌었다. 그런데 로컬에 내려와 2020년에는 월 평균 600만원 정도고 올해는 매출 1억원을 목표로 했다. 물론 코로나19의 장기화로 목표를 살짝 수정한 것은 ‘안비밀’이다.“사실 처음 고향에 왔을 때만 해도 자체적인 디자인 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저 시골의 스토리를 잘 반영해서 원하는 디자인과 굿즈를 만들면 좋다고 봤죠. 그런데 막상 부딪혀 보니 상상 이상이었죠. 농사짓는 분들조차 예쁜 농산물 박스를 만들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골에서 디자인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또래와 함께 하는 두레반 활동그렇다면 그녀는 고향, 로컬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아직 젊은 아가씨의 문화적 만족도를 떨어트리고 있지는 않을까.“물론 없지는 않아요. 가족끼리도 말이 잘 안 통해서 ‘영천 사람들 원래 그렇다’는 우스개 소리를 할 만큼, 소통이 어려운 지역이라는 것은 알죠. 직접 사회인으로 겪어 보니 더 힘들었어요. 청년 창업가를 바라보시는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1년 정도는 몸을 사리기도 했구요.(웃음) 그리고 지역 내에 청년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행사나 커뮤니티가 없는 상황이었죠. 막상 지역에서 살아보니 청년에 대한 정책과 교육, 활동 등은 거의 없었구요. 결국 소수의 지역 청년들이 먼저 모여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작은 행사들을 만들며 2~3년을 버틴 셈이죠.”그녀의 말대로였다. 지역의 청년들은 ‘영천 청년네트워크 두레반’으로 모였다. 또래 친구들이 없는 것에 갈증을 느끼던 영천 친구들이 만나고 연대하기 위해서 시동을 건 셈이다. 정유영 대표는 두레반 친구들의 “영천에서 친구들이 떠나는 게 싫다. 우리끼리 의미 있는 재미를 만들어 가면서 여기서 오래 살아보자”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현재 ‘문체부 지역문화우리 - 영천 노포 기록 프로젝트’와 ‘경북 청년 공동체 활성화 프로젝트’를 통해 영천에 사는 청년 친구들과 지역을 기록하고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이렇게 의미 있는 일에 힘을 보태고, 그것이 수익창출로 이어지기까지 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도시에 있을 때, 저와 같은 업종에 있는 선후배들과 함께 열정을 불태웠던 시간이 소중했었고, 지금은 제 에너지를 필요한 곳에 쓰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죠. 아무래도 도시에서의 삶은 속도와 경쟁에 휩쓸려 제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모르고 지나가던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어느 하나 잊어버리기 싫은 좋은 순간들을 살고 있어요.“바쁜 걸로만 따지면 서울에서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어요. 그래도 이곳 영천에서는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아요. 미팅을 위해 움직일 때마다 차창 밖으로는 산과 나무를 볼 수 있고, 맑은 공기가 있어 기분이 좋아지죠. 더욱이 시골 생활에서는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느끼고, 음미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제가 ‘인심’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고 있더라구요. 말할 때도 그렇고, 일기에도 그렇구요. 제가 시골에 와서 인심을 많이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아요.”그래서 물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로컬과 청년의 교집합은 무엇일까. 그리고 청년들이 로컬에 오기를 꺼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도시에서 누리던 문화나 기술을 빠르게 접하지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환경이 맞죠. 그래도 너무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지역의 것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로컬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비전이요? 로컬은 유니크해요.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일들이 아니라, 지역에서 지역만의 색깔을 가지고 재창조할 수 있는 것이 지역에서의 비전이 아닐까요? 물론 도시에 대한 향수는 많죠. 그래도 제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에 있건, 정성을 들인다면 문제들은 본인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주변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자세히 보시면, 생각보다 지역의 발달되어 있는 문화가 있더라구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31

“역동적인 ‘내 일’ 하고 싶어서 고향 성주로 내려왔죠”

경상북도 성주에 형제가 운영하는 체험농장이 있다. 전체 부지만 50만㎡가 넘는다. 이름은 ‘우리동네 하늘목장’으로, 농업회사법인 (주)우리동네에서 운영하고 있는 오프라인 농장의 한 곳이다. ‘우리동네 하늘목장’은 경관농업 중심의 지역 내 유휴시설을 활용해 농촌체험관광 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만5천 명이 다녀갔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강타한 올해에도 매월 3천 명이 찾는 인기 장소다.“원래 올해에는 5만 명을 목표로 했는데, 코로나19 이후에는 연 50만 명을 목표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어요. 하늘목장에 오시면 넓은 밀밭과 자작나무 숲이 기본으로 제공되고, 밀과 꽃이 어우러진 경관을 통해 힐링하고 치유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죠. 또 꽃피는 3월부터 낙엽이 떨어지는 11월까지 계절별 다양한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여기서 무엇을 하냐구요? 할 것은 많죠. 밀밭 촌캉스, 숲길 걷기, 캠프닉(캠핑과 피크닉), 텃밭, 지역농산물 먹거리 체험, 농산물직거래 마켓, 카페, 곤충체험 및 농산물 가드닝 체험 등이 있어요.”이곳에서 (주)우리동네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농부 여찬현·여국현 씨를 만났다. 형제인 여찬현·여국현 대표는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다. 도시 유학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직장생활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전형적인 귀농인이다.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형인 여찬현 대표는 갖가지 일을 접했다고 한다.“부모님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에 일찍 도시로 유학을 갔죠. 법조인이 되고자 법대를 갔지만, 전역 후에는 서울에 금융회사에서 일을 했어요. 그러다 창업이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고, 직장을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와 IT분야 플랫폼 사업도 했었죠. 그러다 5년 전인가? 우연한 기회에 선배의 농업회사 일을 도와주다 농업에 관심과 눈을 뜨게 되었어요. 본격적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단순 농업이 아닌 농사업을 하기 위해 다시 고향인 경북 성주로 오게 됐죠.” □ 동생과 함께… 고향에서 새로운 창업을물론 여찬현 대표 혼자 창업한 것은 아니다. 그의 곁에는 동생 여국현 씨도 함께다. 이들이 농업회사법인을 설립한 것은 지난 2019년 2월이다. 경북경제진흥원의 도시청년시골파견제의 도움을 받았다.“형제가 함께 하는 사업은 일단 마음이 편해요.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서 마음적으로 상당히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아요. 또 모든 일에 자기의 일처럼 책임감을 갖고 밤이든 새벽이든 회사일에 있어서 내일처럼 하죠. 서로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죠. 단점요?(웃음)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행동했던 것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고, 형제라서 때로는 편하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다 보니 업무 시스템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어 싸우는 일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변 직원들이 눈치를 보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서로 장단점을 알아가고 있어서 더 나아지겠죠?”그런데 이들 형제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었다. 더욱이 시골 출신의 형제들은 도시에서 적응을 하지 못한 듯했다. 서울과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경험한 여찬현 씨는 좋은 사람들과 재미있게 삶을 이어갔지만, ‘성취감’이 문제였다. 안정적인 직장생활보다는 조금 더 역동적인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창업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이 컸다. 동생인 여국현 씨도 힘든 타지 생활을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마침 부모님 곁에서 농사를 돕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믿을 만한 형이 함께 일하자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나 중심의 변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도시에서 생활을 할 때는 대기업이나 기존에 형성되고 만들어진 것들을 이용하기 위해, 내가 시스템에 맞쳐야 했죠. 그리고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틀에서만 일을 하죠. 하지만 로컬은 나를 중심으로 변화와 새로운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가지 않고, 소멸되는 곳이 때로는 기회고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봐요.”그래서인지 형제의 하루는 바쁘다. 원래 농업이라는 것이 주말이 따로 없다고 하지만, 꽃피는 3월부터 낙엽이 떨어지는 11월까지는 잠시의 쉴 틈도 만들기가 어렵다. 특히, 자연식 농업을 추구하는 형제는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라고 한다.“저희 농장에 오시는 분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죠. 다양한 콘텐츠 개발 및 농장 내 환경, 시설 정화를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바빠야 해요. 또 배움도 있어야 하죠. 그래도 항상 힘들기보다는 즐겁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어요. 방문하는 분들이 ‘와 이쁘다, 여기 너무 좋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뿌듯함도 느끼구요. 남의 일이 아닌 제 일을 하고, 제 머리에서 나오는 것들을 실행하고 현실화하는 것이 더 즐겁고 만족도가 상승하는 것 같아요. 아! 고향이라서 더 그런가요?”성주가 고향인 여찬현·여국현 씨는 여타의 귀농인들이 겪는 텃세도 겪지 않았다. 고향이기 때문이다. 형제에 따르면, 성주에서도 물이 좋고 공기가 좋은 포천계곡으로 유명한 가천면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생활했다. 2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성주는 과거보다 많은 것들이 변했죠. 그동안 가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모든 것들을 지켜봤죠. 외형적으로는 더욱 현대화되고 살기에 더 좋아졌죠. 하지만 사시는 분들은 그대로에요.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 많아서 적응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또 부모님이 계시니까 어른들도 저희를 자식처럼 여기시거든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계세요.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시는 분이고, 뉘집 아들인지 아셔서 다들 잘해주시죠.” □ 귀농·귀촌?… 지역 특색을 고민하라!문제는 귀농과 귀촌을 고민하는 청년들이 모두 이들 형제와 같은 처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도 귀농과 귀촌을 고민하는 청년들이 망설이고 있다. 농촌 활성화는 지금 거의 모든 지역의 절체절명의 과제지만, 오겠다는 청년은 한정되어 있다. 농촌에서 사람이 떠나니 일자리가 사라지고, 일자리가 없으니 도시에 간 청년들이 돌아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는 상태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의 농촌은 가까운 미래에 소멸 지역이 될 운명에 처했다.“시골에서 자란 친구들은 다시 시골에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아요. 도시의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져서 로컬에 오기가 쉽지 않죠. 또 결혼을 한 친구들은 아이를 키우고 교육을 하기에 부족한 것들이 많아서 더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청년들이 로컬에 오기 힘든 것은 기존 생활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거나 뚜렷한 비전 제시가 없고, 자기 주도적이고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활용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죠. 즉, 지역에서 어떻게 자리 잡아가고 정착할 것인지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 제일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청년들이 지역의 특성이나 환경을 잘 분석해야 할 것 같아요.”그렇다면 여찬현·여국현 대표는 로컬에서의 비전을 가지고 있을까. 향후 5년이나 10년 이후에도 로컬의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이것이 궁금해졌다.“이미 로컬과 도시의 경계는 없어지고 있다고 봐요. 교통의 발달과 인프라가 확장되면서 도시와 지역의 경계는 점점 옅어지고 있죠. 그래서 로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구요. 전 코로나19가 해결되더라도 이러한 모습이 장기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봐요. 사람이 없어지는 곳에 좋은 콘텐츠 및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남들이 하지 않고 남들이 꺼려하는 곳이지만, 생각을 바꾸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로컬은 앞으로 비전이 있다고 보죠.”“도시에 대한 향수요? 제가 촌사람이라 그런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아마 혼자서 농사를 지었다면, 도시에 대한 향수가 컸을 수도 있죠. 하지만 매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함께 일하는 청년들이 치열하게 농장을 만들고 새롭게 변화를 하다보니, 도시에 대한 향수는 크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경북 성주는 인근에 대도시와도 가깝고 주변에 인프라도 좋아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죠. 처음 농장을 만들 때 시골의 시골스러움과 도시의 편안함을 함께 불어 넣어보자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을 반영하면서 만들고 있죠.”마지막으로 이들 형제의 꿈을 물었다. 형제들은 대답했다. 지금과 같은 농장을 전국에 10개 이상 만들겠다고 한다.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이야기다./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24

나만의 사진과 영상으로, 로컬 콘텐츠를 만들다

경상북도 구미시에 카메라를 든 청년이 산다. ‘24프레임즈’, 이름만 들어도 왠지 리드미컬하고 모던한 이미지다. ‘24프레임즈’의 신동율(31) 대표. 그는 ‘진부함을 거부하는 청년 작가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했다.외부에서는 ‘24프레임즈’를 가리켜 청년 특유의 열정과 패기, 투지가 돋보이는 스타트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저희의 중점 사업분야는 ‘행사영상 제작, 홍보영상, 비대면 중계행사’ 등을 전담하는 미디어콘텐츠 사업부와 ‘바디프로필, 제품촬영, 행사사진 촬영’을 전담하는 스튜디오 사업부로 나누어져 있어요. 문화 사업이 다른 시·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경북 구미에서 내실 좋은 팀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24프레임즈’의 신동율 대표에 따르면, 구미 지역 소상공인과 기업을 대상으로 한 홍보영상 제작을 아이템으로 창업해 지역 공기관으로 사업의 외연을 넓혔다. 특히, 바디프로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그런데 신동율 대표의 고향은 구미가 아니다. 그렇다고 경북도 아니다. 그는 감자와 추위로 유명한 강원도 출신이다. 강원도 출신의 청년이 어떻게 구미로 오게 됐을까. “아무래도 뜨거웠던 대학 시절의 열정과 많은 추억들이 깃든 도시가 구미에요. 그래서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늘 젊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경쟁력과 제조업 기반의 산업도시에서 미디어 콘텐츠를 제대로 만드는 회사를 세운다면, 기존 광역시·도의 업체와 작업하던 소비자 입장에서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게 되어 충분히 경쟁력이 있으리라 판단했죠.”10년 전, 20살의 강원도 청년은 구미 금오공과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군대 시절 2년을 제외하고 10년을 구미에서 살아왔다고 한다.“대학을 입학한 이래 구미는 제게 제2의 고향이 되었죠. 저는 학교 수업보다는 동아리 활동이 더 즐거웠어요. 대학 3학년 때는 총동아리연합회장도 맡았죠. 그 과정에서 영상제작과 행사기획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영상제작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행사기획사에 취직도 했었죠. 돌이켜 보면 좋은 시간이었지만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 쉽지 않은 길, 아이디어로 개척강원도 삼척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 어쩌다 구미까지 와서 창업을 하게 된 것일까.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말대로, 신동율 대표는 1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주말도 없이 일했다. 하지만 노력한 대가가 따라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요식업 분야에 취업하고 지점관리 현장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어쩌다보니 회사의 홍보영상을 찍는 업무를 하기도 했다. 결국, 대학 시절 함께 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들과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해 보자는 생각으로 중국에서 유튜브 영상 녹화 제작에 사용하는 마이크를 들여와 팔기 시작했다. 사무실도 없이 각자의 집에서 컴퓨터를 놓고 일했지만 즐거웠다고….이런 신 대표를 확 뜨게 만든 것은 제품 리뷰에 영상을 활용하면서다.“국내 마이크 판매자들 대부분이 마이크에 대한 수치 자료를 제공하지만, 마이크의 핵심인 음질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판매 제품에 대한 리뷰 영상을 만들어서 올렸어요. 당시만 해도 제품 리뷰에 영상을 활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거든요.”“영상을 만드는 제작사는 많죠. 레드오션이죠. 하지만 대도시와 달리 구미 같은 지방 도시에는 영상을 제작하는 회사가 거의 없어요. 대도시보다 기회가 적지만, 그만큼 경쟁자도 적죠.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구미에서 충분히 영상제작으로 부가가치 높은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지금 신 대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회사를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바쁨의 정도는 비슷해요. 하지만 ‘나만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 훨씬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있어요.”이런 신동율 대표에게는 꿈이 있다. 사실 ‘24프레임즈’는 무형의 형태를 제공하는 서비스업이다. 영상이나 사진을 촬영하고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은 큰 제조시설이나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기에, 현재와 같이 지방에 거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서울과 경기도, 대구, 부산 등에서 업무를 진행하는 일이 훨씬 많다.“지방의 업체나 담당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서울의 일을 많이 하는 팀이니까 믿음직하다’는 이야기를 가끔 들을 때가 있어요. 저는 앞으로 거점인 구미나 경상북도의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가는 일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가장 확실한 로컬팀이 되고 싶어요. 지역 문화재와 관광시설, 기업, 경상북도나 구미시의 여러 프로젝트에서 가장 영상 콘텐츠를 잘 만드는 그런 회사요.” □ 청년들이 찾고 싶은 로컬?… 지역 인프라부터 생겨야사실 신동율 대표의 ‘24프레임즈’는 부침도 있었다. 바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면서 공기관에서 주최하는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또 대학축제와 지역 페스티벌 등 ‘24프레임즈’의 주요 일거리였던 행사들이 모두 올스톱되면서 벼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바디프로필 촬영’이다.“카메라는 있는데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이미 사진관이 있어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죠. 구미에 뭐가 없을까 살펴봤더니 바디프로필 사진관이 눈에 띄었어요. 제가 워낙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그쪽에 사업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현재 ‘24프레임즈’는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입소문을 타고 스튜디오를 찾는 고객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매출도 늘었다. 여기에 스타트업의 홍보영상도 제작하고 있다.이러한 신동율 대표에게 청년들의 귀농·귀촌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정주여건과 대중교통, 기타 편의시설 등 사회 인프라적인 측면들에서 한참 모자란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가령 로컬에서 기업을 한다고 하면, 실질적으로 로컬 문화를 활용한 사업을 전개하는 것은 어렵고,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비수요 또한 영향이 커요. 인스타그램이나 기타 플랫폼 광고를 진행하면,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를 모두 합쳐도 경기도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죠. 즉, 내가 판매하고자 하는 물건이 얼마나 해당 지역의 수요와 부합하는가를 면밀하게 조사해야 하죠. 이런 과정에서 청년들에게는 위험부담이 큰 지방보다는 기본 수요를 충족시키는 수도권이 더욱 메리트 있는 선택이 되고 있죠.”“가장 큰 비전은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수도권에 비해서 문화나 인프라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이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영상이나 디자인 등의 콘텐츠는 필수인 시대가 되었죠. 내실을 다지는 향후 1~2년 뒤에는 그 결실이 있을 것이라 봐요.” 그래도 그는 구미에 정착한 것이 마음에 든다. 짧은 창업기간 동안 여러 차례 난관을 뚫은 신 대표는 과거에 느끼지 못했던 책임감과 사명감도 갖게 됐다. 일순간에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벽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한다. 이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직원도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신 대표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다. 바로 지역을 위한 나눔이다. 신 대표는 초등학교 때 집안형편이 어려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기억 때문일까. 신 대표는 경상도 지역 대학생들의 봉사단체인 대학생협의회 회원들과 지역 사회의 소외된 가정을 대상으로 연탄봉사와 청소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아울러 영상과 사진을 통해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법도 찾고 있다.“보다 좋은 영상, 보다 좋은 사진과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청년들이 구미에도 있다는 것을 많은 분들께서 알아주실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창업일로부터 만 2년차가 지난 지금부터의 2년 동안 더욱 성장하겠습니다.”/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17

아버지의 포도클립으로 대박… “꿈이 생겼어요”

지방에서 서울에 정착한 청년들의 꿈은 무엇일까. 어떠한 상황을 바라고 서울로 향하는 것일까. 처음 서울에 올라온 청년들은 부모님에게서 독립했다는 자유로움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뿌듯함을 가진다. 휘황찬란한 서울의 밤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고단한 일을 마치고 작은 자취방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기울이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맞닥뜨리는 것은 ‘생활의 어려움’이다. 한 달마다 찾아오는 서울의 살인적인 월세와 각종 공과금은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한다. 몇푼 벌어보겠다고 새벽부터 지하철과 버스에 몸을 맡기고 출근했지만, 퇴근은 요원한 일이다. 영천에서 ‘포도클립’을 생산하는 이소민(30) 대표도 그랬다. “영천에 내려온 이유요?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요? 서울에서 살기 힘들어서죠. 얼마되지 않는 월급에 일은 힘들죠. 서울에서 일하는 동안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어요. 하루에 2~3시간 이상을 잤던 기억이 거의 없어요. 영천에 와서는 너무 좋아요. 일단 자는 시간이 늘었거든요.(웃음) 월급으로 따지면 들어오는 돈도 늘었구요. 영천에 내려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아요.”이소민 대표는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20대와 30대 청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꿈꿨을 연예인 매니저 출신이다. 10대 청소년들의 장래희망 1위라는 ‘연예인’의 화려함을 책임지는 사람들 말이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연예인이 소속된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근무했던 이소민 대표다. 5년 이상의 매니저 생활로 영천에 내려올 즈음엔 팀장으로 승진도 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예능 방송과 콘서트를 좋아했기에 일하는 것 자체가 무척 행복했다고 한다. 유명 연예인들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함께 대화도 할 수 있으며, 그들을 키운다는 것 자체가 보람이었다.“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힘들었어요. 아까 말했듯이 잠자는 시간도 거의 없었구요. 스케줄이 많다보니 몸이 견디지를 못했죠. 생활비도 문제였어요. 대부분이 아시겠지만, 매니저라는 직업은 급여가 많지를 않아요. 최저임금은 꿈도 못꾸죠.” □ 아버지의 포도클립이 딸의 포도클립으로2019년 영천에 내려온 이소민 대표. 영천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부모님도 계시고 5살 터울의 여동생도 영천에 있었다. 다른 귀농·귀촌의 청년들과는 다른 출발이었다. 하지만 할 것이 마땅하게 없었다. 특히, 자신이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길러왔던 다양한 역량을 발휘할 곳이 전혀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다 ‘포도클립’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소민 대표의 ‘포도클립’은 지난 2016년 아버지가 개발한 것을 개량한 제품이다.‘포도클립’은 포도를 재배할 때 줄기를 굵은 철사에 고정하는 클립이다. 이 대표의 말에 따르면, 줄기가 있는 과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클립이 필수라고 한다. 농업 용어로 말하면 ‘포도순 걸이’다. ‘포도클립’을 사용하면 포도순이 Y자 형태가 되기 때문에 포도가 예쁘게 자라고 수확도 매우 쉽다. 그런데 기존의 ‘포도클립’은 1회용인 경우가 많고, 재활용하면 금방 고장 나서 다시 사야 한다.“사실 도시에 살면 포도클립이 무엇인지 잘 몰라요. 저도 아버지가 포도클립을 개발하셨지만 잘 몰랐어요. 영천에 와서 알았죠. 영천은 포도농업이 매우 발달해 있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샤인머스켓 열풍이 불어서 관련 농사를 짓는 분들도 많아요. 아버지가 개발한 포도클립을 개량시켰죠. 마침 서울 생활이 너무 힘든 상황이어서 아버지와 주변 분들에게 조언을 받으며 조금씩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어요. 만약 아버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겠죠. 지금도 아버지가 설계 같은 것은 대부분 해주시거든요.”이소민 대표와 아버지의 포도클립은 지난 2018년 후반기에 세계여성발명대회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 경북경제진흥원의 공모사업에 당선되면서 경제적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매니저 생활이요? 그때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매니저들은 연예인의 방송 출연을 위해서 많은 영업을 해야 하거든요. 얼굴에 철판은 기본이죠. 포도클립 영업도 마찬가지에요. 더욱이 포도클립을 이용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60대 이상의 고령자세요. 여타의 제품 홍보하는 것과는 다르죠. 그런데 연예인 매니저 홍보보다는 오히려 헐렁한 스케줄이죠. 특이한 것만 빼면요. 도시라면 대부분 영업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달라요. 아침 6시라도 전화가 와서 ‘지금 갈게’하면 그때가 일이 시작되는 시간이고, 밤 8시라도 ‘내일 아침에 클립 끼워야 하는데’하면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보면 ‘막무가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시골 영업의 매력이죠.”그렇다면 포도클립을 파는 이소민 대표의 매출은 어떻게 될까. 사실 포도클립의 단가는 그렇게 높지 않다. 작은 포도클립은 개당 9원 정도고, 큰 포도클립은 개당 15원 정도에 팔린다. 2천 개를 팔아야 3만원 정도의 매출이 발생하는 셈이다. 그래서 궁금증이 일었다. 영천에 내려온 이소민 대표는 먹고 살만한 상황일까.“서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낫죠. 지금 생산한 것의 70% 정도는 농협이나 기관에 나가거든요. 30% 정도는 따로 연락오시는 분들에게 팔리구요. 생각보다 많이 나가요. 영천과 상주 지역은 저희 제품이 많이 나가구요. 이제 경기도 쪽으로 진출하고 있어요. 또 요즘 젊은 농부들은 인터넷 검색이 익숙하기 때문에 온라인 홍보물을 보고 많이 연락도 오구요. 최근에는 샤인머스켓이 큰 인기를 끌면서 우리 제품도 덩달아 인기를 얻고 있어요. 이제 포도클립을 넘어서 복숭아와 사과에도 사용할 수 있는 클립을 개발해 이미 시제품이 나와 있는 상황이에요.” □ 먹고 살 수 있는 길… 로컬도 좋아요인터뷰의 말미. 이소민 대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영천에서의 삶이 만족하고 행복하냐고 말이다.“당연히 만족하고 있어요. 물론 서울처럼 화려한 면은 없어요. 일단 이곳에서는 남는 시간이 없거든요. 다행히 제가 집순이라서 그런지 크게 불편함은 없어요. 결혼도 아직 생각은 없구요. 아마 아버지는 이미 포기하셨을 거에요.(웃음) 집순이라서 문화 생활은 거의 없어요. 단지 조금 외롭다는 것 뿐이죠. 그래도 지금이 더 행복해요. 그리고 이곳이 고향이라 많은 도움이 되는 것도 같아요. 다들 아버지고 삼촌들이거든요.”이소민 대표의 향후 꿈은 포도클립을 자체생산하고 해외에 진출하는 것이다. 지금 이 대표의 포도클립 생산은 사실상 외주 형태다. 설계한 포도클립을 외부 공장에서 생산해 팔고 있는 것이다. 인근에 일본 농가에 가위를 수출하는 회사가 있어 포도클립을 보내봤는 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다만, 일본에서 포도를 키울 때 쓰는 철사가 한국 제품보다는 얇기 때문에 개선이 필요하다. 이런 부분을 개선한다면 일본 포도 농가에 진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포도 뿐만이 아니라, 복숭아와 메론 등의 클립도 생산이 가능하다.“자체생산을 넘어서 여러가지 클립에 도전하고 있어요. 지금 개발하는 것도 있구요. 지금 매출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저희와 경쟁하는 제품이 있거든요. 일단 목표는 경쟁 제품을 이기고 저희 제품을 우리나라 점유율 1위로 만드는 거죠.”이러한 이소민 대표에게 향후 5년과 10년 후의 모습을 물었다. 그리고 로컬에 내려오는 청년들에게 조언도 부탁했다.“크게 변하는 것은 없을 것 같아요. 일단 목표가 있으니까요. 크게 생각은 해보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열심히 해보려구요. 그래야 목표가 이뤄지지 않겠어요? 조금전에 말했듯이, 저희 제품이 우리나라를 석권하는 것이 큰 목표죠. 아마 될 것 같아요. 열심히 한다면 말이죠.”“창업 초기에는 불안함이 적지 않았어요.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사업인데다 농업의 실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 기회에 도전하지 않으면 도저히 서울 생활을 이어나갈 자심이 없었죠. 일단 도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8-10

“소극적 누나와 적극적 동생의 콜라보 사진에 영양을 담아요”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동서상가 3층 ‘단듸랩’. 있어 보이는 이름 만큼이나 아기자기한 또는 이쁘게 꾸며진 스튜디오로 생각했다. 실상은 오래된 건물에 오래된 화장실, 바로 옆에 아이들을 위한 작은 교습소가 있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이곳에 현실남매 허진희(32)·허진수(30) 씨가 꿈을 키워가고 있다.“조금 스튜디오가 그렇죠? 영양에서 스튜디오를 구할 때, 군청 주무관님과 함께 돌아다녔지만 한정된 예산에 넓은 장소로 구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아요.”‘건물 외관과 스튜디오가 다르다’는 기자의 말에 웃으면서 대답한 진희 씨의 말이다. 실제로 ‘단듸랩’의 스튜디오는 외관과 달리 흰색 배경을 바탕으로 넓직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진을 위한 배경 공간과 아기자기한 탁자 등 여느 사진관과 큰 차이는 없다.‘단듸랩’은 ‘단디해라(제대로 해라)’라는 경상도 방언에서 따왔다. ‘단듸랩’은 가족사진과 단체사진, 증명사진 등 인물사진부터 제품사진, 스냅샷, 광고편집 디자인 등 전문 사진촬영·편집을 제공하는 스튜디오다. 현재는 인물사진보다는 제품의 스냅샷 등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고…. “저희가 어려서 그런지 영양분들이 잘봐주시는 것들도 있더라구요. 물론 제품의 스냅샷과 광고편집 디자인 같은 것은 지금까지 영양을 비롯해 경상북도에 흔하지 않은 사업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대부분 의뢰해주시는 분들이 만족해주시더라구요. 저는 감사할 뿐이죠.”‘단듸랩’의 작은 성공에는 동생 진수 씨의 몫도 크다. 누나인 진희 씨의 말로는 ‘인싸(인사이더)’의 교과서라는 진수 씨다. 진수 씨에 따르면, 우선 하루 커피 두 잔은 기본이다. 동네 형님(?)들과 함께 하는 축구 모임은 필수고 골프도 수준급이며, 지난해에는 산나물 축제위원회 추진위원도 맡았다. 처음에는 난생 처음 보는 외지인이 나타났으니 “저 녀석들은 누구야?”라는 텃세 아닌 텃세를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형님이다. 사실은 아버지뻘의 나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농사짓는 형님’, ‘비료 장사하시는 형님’ 등 영양군 곳곳에 형님들이 포진해 있으니 사진과 디자인 관련되는 일만 있으면 무조건 ‘단듸랩’이 추천 대상 1순위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요즈음 고추농사도 시작했어요. 500평 정도 되죠. 아! 물론 아는 형님께서 추천해주신 거죠. 매일 새벽에 나가서 고추를 돌보고 있어요. 벌레가 먹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농작물의 수확이 좋지 않을까 걱정을 하죠. 애착이 가기도 하고, 이미 시작했으니 결과가 좋아야죠.”동생 진수 씨의 고추 농사 이야기에 누나 진희 씨는 “동생은 이미 영양 사람 다 됐어요”라고 했다. 그 말대로, 영양에서 2년을 넘기지 않은 진수 씨의 얼굴은 검게 타 있었다. 손가락 역시 도시 청년의 그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그을려지고 상처가 있는 손가락이었다. □꿈이 현실로… 영양에서 차근차근현실남매인 허진희 씨와 허진수 씨는 서울 인근인 고양시 출신이다. 영양에는 어떠한 연고도 없다. 이들이 시골 중의 시골인 영양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진희 씨는 서울 상수동과 여의도 벤처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했다. 출퇴근을 위해서는 매일 1시간 이상 지하철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특히, 마케터로서의 일 자체는 즐거웠지만, 자신이 부품 취급을 당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그로 인해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던 가운데, 떠오른 곳이 영양이었다.“물이 너무 깨끗하고 공기도 좋잖아요. 분위기도 좋고요. 늘 생각했던 것이 영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거였죠. ‘단듸랩’도 마찬가지에요. 옛날부터 사진을 취미 이상으로 했어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제품 사진 정도는 찍었으니 취미 수준은 아니었죠. 다만, 소극적인 성격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동생이 필요했구요.”소극적인 진희 씨와는 달리 적극적인 진수 씨는 남매의 사업에는 적격이었다. 대학에서 체육과 관광을 전공했고 천성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며, 단체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과일 장사, 유아 체육 강사, 스키강사, 회사 영업사원 등 그동안 해온 거의 모든 일이 활달하고 유쾌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었다. 어찌보면 누나와의 사업 궁합은 좋은 셈이었다. 가족 관계는 모르겠지만 말이다.“매일 싸워요. 늘 사소한 문제로 투닥거리죠. 그래도 일하는 것에는 완벽해요. 서로 조율해야죠. 누나도 마찬가지고 저도 목표가 있거든요.”진수 씨의 말대로 현실남매의 목표는 영양에서 기반을 잡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수입을 안정화하는 것. 그래서 진희 씨와 진수 씨의 사업도 다각화 중이다.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가 통한 것일까. 처음 1년 1천500만원으로 잡았던 매출이 매달 평균 400만원의 매출로 껑충 뛰었다. ‘단듸랩’이 생각하는 사진 콘셉트를 영양분들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는 않는다. 이제 32살과 30살의 청년이 영양에서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말이다.“고추 농사를 시작한 것도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죠. 이제는 영상 쪽으로 발을 넒히고 싶어요. 준비도 하고 있구요. 또 관광과 관련한 일도 생각하고 있어요. 대체적으로 지역의 축제는 농산물 판매에 초첨이 맞춰져 있어요. 물론 저도 그것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축제 자체를 즐길 수 있고, ‘꼭 오고 싶은 영양’을 모토로 지역 관광을 활성화하고 싶어요. 독특한 콘텐츠로 무장하면 분명히 가능할 것 같아요. 영상 디자인이 그 중의 하나일 수도 있구요.” □영양에 청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경북의 오지라고 불렸던 영양에서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는 허진희 씨와 허진수 씨. 이미 두 사람은 스스로를 영양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아직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는 영양에 대해서 잘 몰라요. 저희가 택배를 주문한 적이 있는데, 택배 기사분이 전화가 오더라구요. ‘강원도인데 단듸랩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셨죠. 택배기사분이 경북 영양을 강원도 양양으로 착각하신 거에요. 친구들도 영양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도 같구요. 그런데 저희가 이곳에 내려오고, 영양에 다녀갔던 친구들이 많아요. 그리고 영양의 자연과 주위를 보고 반한 친구들도 많구요.”그래서 진희 씨와 진수 씨에게 물었다. ‘영양으로 온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들의 대답은 단호했다.“만족하고 있어요. 물론 아직 넘어야 하는 산이 많은 것도 사실이죠. 그래서 더욱 노력하고 있는 것이구요. 서울의 남자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후의 일이지만, 주말부부도 생각하고 있구요. 근본적으로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게 되면, 영양에 살고 싶어요.” “저도 여자친구에게 영양에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여자친구의 조건이 연봉 5천만원이더라구요.(웃음)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커요. 농사를 짓고, 앞으로 계획하는 일이 제대로 된다면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마지막으로 진희 씨와 진수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양에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하냐고 말이다. 이들은 말했다.“당연하죠.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아는 사이에 동업은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것도 현실남매라면 오죽하랴. 하지만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줄 수 있다면 ‘동업’도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하나가 되면, 또 다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진희 씨와 진수 씨 남매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도시 생활에 대한 염증으로 시작한 영양 생활. 그저 영양의 자연이 좋고, 행운이 가미되었던 귀농 생활. 하지만 스스로가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까./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27

“사람들에게 파티 문화 알리고, 우리의 꿈도 펼쳐요”

7번 국도를 따라 경상북도의 끝자락으로 향한다.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바다를 구경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경북 울진군의 한자락에 다다른다. 대게와 원자력발전소 등으로 유명한 곳. 한 때는 강원도의 일부이기도 했기에 독특한 지역색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 ‘파티공작소’라는 생소한 이름의 카페(?) 아니 케이터링 업체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박지영(35) 씨와 이미영(34) 씨. 이들은 도시에서 울진으로 정착한 청년들이다. “경력단절 여성들의 재취업 프로젝트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했어요. 저는 영상제작을 전공했고, 미영이는 제과·제빵을 했죠. 그리고 지금은 공부를 위해 쉬고 있지만 막내는 호텔 경영을 전공했어요. 우리가 3명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파티라고 하면 소품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식 만드는 것, 준비하는 것까지 하게 된다면 우리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곧바로 아이템을 파티로 잡고 파티공작소라는 이름으로 창업을 했어요.”말 그대로 두 사람은 모두 경력단절 여성이었다. 울산이 고향인 지영 씨는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영상제작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영화현장 스태프와 보도국 스태프로 일했다. 미영 씨의 고향은 울진이다. 결혼 전까지 개인 제과점과 대형 스파의 고객관리팀장으로 일했었다. 하지만 지영 씨와 미영 씨는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저는 울진에 연고가 없어요. 처음 울진에 왔을 때, 큰 아이가 12개월 되던 무렵이었죠. 귀촌 후 외롭다기보다는 나만의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있을 때, 미영이를 만났어요. 첫째가 동갑이라는 공통점과 경력단절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죠. 나름 미영이 고향이 울진이라 유익한 정보들도 얻을 수 있었구요. ”“저는 울진이 고향이고 부모님과 형제들이 울진에 있어요. 다시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죠. 하지만 저도 지영이 언니처럼 매장을 오픈하기 전까지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어요. 현재는 파티공작소에서 메뉴개발과 매장관리를 맡고 있죠.”□ 나의 꿈과 아이를 위한 선택한참을 바쁘게 살아갈 시기의 이들이 내륙의 외딴섬이라고 불렸었던 울진으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촌사람들에게는 생소한 ‘파티’라는 아이템을 들고 말이다.“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강의를 듣다가 취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친구들을 모으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 구청에 자문을 많이 구했거든요. 그때 담당했던 주무관님이 ‘이 아이템이라면 도시청년시골파견제를 통해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말씀해주셔서 용기를 가지게 됐어요. 아! 울진이요? 사실 도시 생활이 너무 삭막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신랑이랑 귀촌을 해보자하고 마음을 먹고 있었죠. 그리고 ‘아이 낳고 살기 좋은 울진’이라는 슬로건을 보고 정착했어요.”그렇다고 이들에게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파티공작소’를 생소하게 바라보는 울진의 시선을 견뎌야 했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막내를 떠나보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진리일까. 울진의 파티공작소는 어느새 지역의 명물로 자리를 잡았다. 박지영 대표에게 지금의 느낌을 물었다. “시골파견제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어쨋든 저는 지금 너무 만족하고 있어요. 울진이라는 곳이 공기도 너무 좋고 아이들을 키우기에도 너무 좋은 환경이더라구요.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문화생활은 부족하지만, 내 아이들을 위한 너무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어서 만족해요. 우리는 청년이기도 하지만 엄마거든요.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죠. 하지만 늘 노력하고 있어요.”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 대체 울진의 파티공작소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포털의 검색창과 주위의 도움을 구해도 알 길이 없었다.“아직도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러가지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어서인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파티를 바탕으로 한 복합공간이에요. 파티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많잖아요. 음식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기획을 하는 사람과 음악, 소품들이 함께 있어야 파티가 빛이 나죠. 저희는 이러한 파티를 울진의 경단여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싶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조금 더디게 진행하고 있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어요. 일종의 꿈?” 기억에 남는 것은 울진에서 처음 진행했던 초등학생들을 위한 원데이클래스라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디저트 만들기라고 할까. 울진에서는 처음 진행하는 것이라 설렜다는 박지영 씨는 수업을 위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응은 좋았다. 카프레제와 카나페를 퓨전한 메뉴를 만들기도 했고, 크래커 위에 장식을 놓기도 했다. 파티공작소에서 직접 구워간 머핀에 아이들이 생크림 토핑을 하는 모습도 흐뭇했다고….□ 망설이지 말고 도전하라울진이라는 시골은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일까. 도시가 그립지는 않을까.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떠할까하고 말이다. 사실 지영 씨와 미영 씨의 귀촌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남편의 결정에 따랐던 것. 오히려 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친정 어머니는 울진에 이사한 지영 씨를 보고 우시기까지 하셨다고 하니 말이다. “큰 도시는 이미 많아요. 제가 직접 아이를 키우고 살다보니 부족한 것들이 있더라고요. 성장앨범 찍어줄 수 있는 곳도 없고, 애들을 데리고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부족했고, 그래서 제가 직접 한번 해보자. 다른 아이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울진에서 하면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처음 귀촌을 계획했을 때는 이상적인 삶을 꿈꾸기도 했어요. 회사 생활의 스트레스와 안녕하고, 해보고 싶은 일을 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내 아이들을 흙과 물이 넘치는 그런 곳에서 놀 수 있게 하고 싶었죠. 아마 불영계곡을 넘어 내려오던 중 만난 푸른 주변 풍경과 에메랄드 빛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로 펼쳐진 7번 국도가 유혹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어떠할까.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들에게 귀농과 귀촌에 대한 솔직한 느낌을 물었다. “로컬이 고향이 아닌 친구들에게는 낯선 환경, 그리고 귀향하는 청년들에게는 어른들의 시선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청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나의 적성과 직업을 찾아 돌아오는 청년들을 실패자나 낙오자가 아닌 우리 마을을 실리러 오는 구원투수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큰 도시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돌아온 마을의 자랑? 그리고 무엇인가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연륜과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들을 팍팍 전수해주셨으면 하구요.”그랬다. 지영 씨와 미영 씨는 울진에서 새로운 꿈을 마련한 셈이다. 그리고 이들의 5년과 10년 후는 어떠할까.“파티공작소를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하고 있어요. 귀향한 청년들과 전문직 경단여를 필요한 직군에 모집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지역 발전을 위한 재능기부를 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코로나19로 많이 늦춰졌지만 조급해 하지는 않아요. 천천히 한 단계씩 나아가겠죠.”“저희는 울진의 파티플래너 1호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파티플래너라는 이름으로 지역의 학생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갓난아이를 데리고 도시로 나가 성장앨범 촬영을 하는 번거로움을 해소시키고자 셀프스튜디오를 운영하기도 했죠. 아이들과 베이킹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어 원데이클래스도 열었구요. 이렇게 아이템이 늘어나는 이유는 울진이 아닌 주변 도시에서 소비생활을 하는 군민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에요. 망설이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도전을 먼저 했으면 좋겠어요. 그저 저만의 꿈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말이죠. 다른 분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되는 그런 사업이었으면 좋겠어요.”/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20

“우리의 이야기를… 그림 그리고, 책과 영화에 담아요”

“5년과 10년후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처럼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살 것이고, 책을 만들고 영화를 제작하겠죠. 큰 욕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구요. 그래도 의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저희의 책들을 많은 분들이 봐주시고 공감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 않을까요?”경북 의성의 안계. 시장을 끼고 도는 골목길에서 청년부부 황영 대표와 그의 아내 김은영 대표를 만났다. 첫인상을 이야기하자면, 만화 캐릭터를 닮은 바가지 머리와 바캉스를 연상시키는 옷차림이랄까. 동심과 함께 산다는 느낌을 받으며 들어선 그들의 작업실, 아니 전시 공간에는 빼곡한 작업물들이 촘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성의 안계시장길에서 그림책 출판과 전시를 하는 ‘고라니북스’의 황영 대표와 아내 김은영 대표, 이들은 같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며 만난 사이다. 대구 출신인 이들은 자신들의 창작 작업과 생계를 위해 별도의 돈벌이를 하며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일명 ‘돈 안되는 길’“빌어먹고 산다”는 예전 부모님들의 2대장인 ‘시인’과 ‘미술가’, 아이러니하게도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는 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여기에 영화까지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미 출품한 독립영화만 여러편이다.“의성에 와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먹고 살만큼은 벌고 있어요. 여러가지 일을 받고 있거든요. 대구에서 하던 일을 포함해서 의성군에서도 도와주시구요.”이들의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보통의 국문과와 미대 출신들이 선택하는 학원과 학교, 기업의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생계 유지를 위한 아르바이트는 필수였다. 그중에는 아파트 외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아파트 외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상당한 고액 아르바이트다.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한 달만 일을 해도 몇 개월 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일을 아내인 김은영 대표가 했다고 한다.일명 ‘도슨트 알바’도 이들의 일거리였다.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에게 작품과 작가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다. 또 갤러리에 그림을 거는 ‘디스플레이 알바’도 있었다. 주위에 따르면, 황영 대표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무려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군복무 시기를 빼더라도 9년 중 3년 정도는 아르바이트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2년 전부터 정착한 의성은 이들에게 또 다른 기회의 땅이다.“독립출판을 하고 있어요. 독립영화도 만들고 있고요. 독립출판요? 생소하실텐데, 일반적이지 않은 책들을 만들어요. 기성서점에는 들어가지 못하죠. 성인들을 위한 동화도 있구요. 화장실 등에서 간편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책들도 있구요. 물론 출판과 영화가 돈이 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저희가 하고 싶은 영화를 제작하는 거죠.” □고라니북스?… 이제 시작그런데 독립출판도 하고, 독립영화도 제작하는 이들이 기반도, 연고도 없는 경북 의성에 정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경상북도의 ‘도시청년시골파견제’가 도움이 됐다고는 하지만,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는 이유가 부족하지 않을까.“제일 큰 것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경쟁률이 좀 쎄더라구요. 애초에 높은 경쟁을 피하려고 합격률이 높은 의성에 지원한 것도 있죠. 도시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빨리 뛰었어요. 자극을 선택하지 않아도 자극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세계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골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자극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그리고 처음에는 안경 디자인 회사에 다녔어요. 그런데 조금 답답한 마음이 있었죠. 안경 디자인이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 반복적인 일이 많거든요. 틀을 벗어날 수도 없고, 창의적인 일도 아니었어요. 여러가지 갈증도 있었구요.”그러면서 주섬주섬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가져와 보여준다. 모두 독립출판의 결과물이다. 대부분의 책들에는 글자보다 그림이 훨씬 많다. 이들이 미술학도라는 증거다. 물론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도 있는 것이 사실.“대구에 있을 때는 한 권 정도 출판한 것이 전부에요. 그런데 나머지는 의성에 와서 출판한 것들이죠. 지금은 전국에 있는 독립출산물 서점으로 나가고 있어요. 고라니북스의 이름을 달구요.”‘고라니북스’는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의 사업체 이름이다. “도로 위에 있는 고라니를 본 순간, 갈 길 잃은 우리 시대의 청년들을 보는 것 같았다”는 것이 작명의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북 의성을 비롯한 북부지역 곳곳에서는 외곽 도로에서 가끔씩 고라니가 출몰한다. 그리고 이들이 고라니를 처음 본 것도 답사를 위해 의성을 찾았을 때다.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 오히려 의성이 예술활동을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고.“이미 저희는 의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도 찍었구요. 9월에도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할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장편 영화를 제작하는 거에요. 저희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거든요. 지금 시놉시스 정도가 완성된 상태에요. 여기 전시를 해놓은 것들이 영화의 콘티죠.”□도시에서는 숨겨야 했던 우리의 이야기그런데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를 만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출판을 하고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프라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투자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시골인 의성에서 어떻게 가능할까.“사실 크게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도 있거든요. 부족한 것은 저희가 충당하구요. 제작 장비나 배우들은 물론 서울이나 도시로 가야하죠. 그런데 그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갑갑한 면도 있죠. 예술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쯤은 아내와 함께 서울 등의 도시를 찾아요. 공연도 보고 전시회도 감상하구요.” “일도 대구에서보다 더 많아요. 의성에서 막걸리나 수제 맥주를 만드는 분들이 저희에게 라벨을 의뢰하기도 해요. 비용을 많이 받지는 않지만, 제가 만든 캐릭터와 연동해서 라벨을 만들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해요. 또 우리 캐릭터를 활용해서 과일박스를 만들면 그냥 판매하는 것보다 소비자의 구매의욕을 더 높을 수 있고, 지역 브랜드를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애초 의성으로 오는 것이 단지 작업장을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죠. 저희가 생각하는 영화 제작을 더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구요.” 그렇다면 황영 대표와 김은영 대표에게는 의성에 정착한 것이 일종의 꿈을 이루는 과정이었을까. 하지만 ‘꿈’이라는 이야기에 황영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꿈이라기 보다는…. 지금 의성에서 하고 있는 것들은 조금씩 실현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영화 제작에도 한 걸음 나간 상태구요. 아마 대구에 있었다면, 여전히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아마도 과거에 황영 대표가 만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이라는 독립영화가 ‘서서히 알아주는’이라는 이상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현실 세계에서 살고 있는 뱀파이어 여자 노동자는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도 자신의 꿈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한다. 한 때 황영 대표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도시에서 알바를 병행하며 자신만의 삶을 추구했던 개인 창작자의 삶. 하지만 의성에 정착한 이후 뱀파이어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희의 이야기가 담긴 장편 영화를 꼭 완성하고 싶어요. 그것을 위해서 의성에 온 것이구요. 물론 그 한편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에요. 아직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는 많잖아요. 그리고 의성에 보탬이 되는 일도 하고 싶구요.”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13

“공연·문화·예술 열정 많은 문경에 꿈과 행복 찾아 왔어요”

경북 문경에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단다. 그것도 독일에서 15년 동안이나 아티스트로 활동을 한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말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우아한 유럽식 인테리어 배경과 함께 비싼 악기를 가지고 선율을 뽑아내는 예술가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이다. 특히나 시즌제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에서는 상류층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가.“바이올린이요? 물론 전문적인 것은 수억원 이상하죠. 하지만 연습용이거나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바이올린은 20만원도 안해요. 어쩌면 기타보다도 가격이 싼 게 바이올린이에요.”장마가 오기 전,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문경에서 만난 ‘클래식 한 스푼’ 고경남 대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었다. 포털에서 검색한 바이올린의 가격은 4만원대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레슨용이나 조금 비싼 것이 50만원 안팎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 행복을 찾아 왔죠‘클래식 한 스푼’의 대표이면서 바이올리니스트인 고경남 씨는 지난 2019년 클래식 음악 공연장의 오픈과 함께 문경에 정착했다. 경상북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도시청년시골파견제’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이력이 나쁜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 자브뤼켄 국립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다양한 연주활동과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독일 순회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또 대구의 경북예술고등학교와 대구가톨릭 대학교 평생교육원 초빙교수로도 활동했다. 그런 그녀는 왜 문경에 왔을까.“독일에 살면서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았어요. 행복한 시간이었죠. 그러다 한국에 들어왔어요. 몸이 안좋아진 이유도 있었구요. 서울에서 1년 정도 있었는데,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었어요. 이것이 행복일까 하는 생각이었죠. 다행하게도 남편과 아이들이 이해를 해줬어요. 문경이라는 곳이 마음에 들기도 했구요. 물론, 문경에 연고는 없었어요. 문경이 대도시에 비해 문화적으로 기반이 취약하지만 시민들의 공연이나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는 많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문경이라면 제 꿈과 행복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고경남 대표의 말대로, 그녀는 지금 주말부부다. 남편과 초등학교 5학년·1학년의 아이들은 모두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주말을 이용해 서로 서울과 문경을 오가고 있다’는 고 대표다.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에게 지금의 상황이 힘들지는 않을까.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행복하냐고’ 말이다.“음….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려운 점이 없지는 않아요. 또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생활하면 가질 수 있는 기회도 많겠죠. 하지만 문경이라고 다를 바는 없다고 생각해요. 우선 답답한 것이 없잖아요?”그러고보니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문경에서 많은 일을 했다. ‘쓴 커피에 달콤한 설탕 한 스푼처럼, 음악으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뜻의 ‘클래식 한 스푼’처럼 말이다. 경상북도와 문경시 등에 따르면, 고 대표의 ‘클래식 한 스푼’은 로컬에서 수준 높은 공연과 색다른 기획 공연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다루며 지친 일상에 신선한 즐거움을 나누는 활동을 한다. 또 기획한 소공연을 통해 문경에서 접할 수 없었던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클래식 한 스푼에서 바이올린을 접하고 있는 분들 대다수가 아마추어에요. 이렇게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어우러져 연주도 하고, 다양한 음악 공연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화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어 참 행복하죠.” □ 시골 바이올린? 의외로 많아요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래도 문경을 비롯한 시골 구성원의 연령대는 대도시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그렇지가 않더라구요. 코로나19 이전에 저와 함께 하시는 문경분들이 40명 정도 됐어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20명 정도지만요. 그런데 생각보다 바이올린을 접하신 분들이 엄청 많으시더라구요. 어린 시절에 바이올린을 배웠던 분들도 계시고요. 음…. 어떤 분은 결혼 전에 바이올린을 오래하셨던 분인데, 이곳에 사시면서 바이올린을 접었던 분이에요. 그런데 ‘클래식 한 스푼’이 생기면서 다시 바이올린을 꺼냈다고 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50대 이상인 분들도 많죠. 문경이 서울보다 시설적으로 뒤지지만, 예술에 대한 욕구마저 뒤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방과 후 아이들도 생각보다 예쁘구요.”실제로 고 대표는 문경읍 갈평리에 있는 용흥초등학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방과 후 수업으로 바이올린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녀에 따르면, 문경 생활에서 축복이라고 할 정도로, 학교로 가는 길도 아름답고 아이들도 해맑고 수업에도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학교에 갈 때마다 항상 반겨주고 도시 아이들보다 순수하고 예쁜 모습.“정이라고 하죠? 서울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죠.”하지만 여전한 궁금증이 있었다. 일반인이 바라보는 클래식에 대한 선입견이었다. 고급스럽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식의 선입견 말이다.“일부 음악가들은 MR(Mastering Record, 음악반주)를 사용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가끔 공연에서 쓰거든요. 그만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혼자서 예술적인 부분을 강조한다면, 어디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가서 바이올린만 켜고 있지 않겠어요? 바이올린이 어렵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아요. 연습을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죠. 얼마전에도 연습하신 분들과 함께 공연을 했는데, 엄청 좋았거든요.”그랬다. 고 대표의 계획은 꾸준하게 공연예술 기획을 하며, 바이올린 아카데미도 성장시켜 아마추어 앙상블 단체로 활동하는 것이다. 또 지역 문화에 또 다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과 지역에서 배출된 여러 예술인을 비롯해 문경으로 오고 싶은 예술인들과 모여 예술·문화도시 문경을 만드는 것이다. □ 자립하는 예술인… 생활이 가능하다면 예술인 귀농도?그렇다고 어려움은 없었을까. 그녀에게 물었다.“요즘 저를 원장님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더라구요. 저는 원장이 아닌데 말이에요. 저는 바이올린을 교습하는 학원을 오픈한 것이 아니거든요. 물론 저희 ‘클래식 한 스푼’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분들이 회비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리 예술가라고 하지만 지역에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공연도 마찬가지죠. 저는 외부에서 공연 요청이 오면 대부분 수락을 해요. 특히, 회원들과 함께 하는 공연이라면 더욱 좋죠. 그런 회원들에게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거든요. 적은 수준의 정성이지만, 회원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잖아요.”그랬다. 현재 고경남 대표의 ‘클래식 한 스푼’은 위치가 모호한 상태다.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도 아니면서, 학원과 같은 교습소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앙상블을 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확고한 상태다. 그런 그녀에게 현재 예술가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했다.“일부죠.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음악인들도 어려움이 많아요.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데 가장 어렵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음악을 포기하기도 하구요. 여기 문경에서 다시 시작한 분들이 있듯이 말이에요. 그런데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기회가 많이 없어요. 제가 답답함을 느꼈듯이요. 문경과 같은 로컬에서 음악인, 예술인들이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이들의 귀농·귀촌도 있지 않을까요?”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7-06

“처음에는 진짜 힘들었지만 경험 키워 기업체로 키울겁니다”

참외로 유명한 성주군. 초여름 더위를 자랑이라도 하듯 곳곳에서 노오란 참외가 반겨주는 곳이다. 느릿느릿 다니는 아이보리색 마을버스도 참외밭을 지나고, 좁은 시골길의 참외 비닐하우스 주변으로는 농군들이 땀을 흘린다. 휴대폰 와이파이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물소리 큰 개천 주변에서 청년 농부 최영준 씨와 최민규 씨를 만났다.  24살 때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최영준 씨는 올해 12년차 농부다. 성주가 고향인 영준 씨는 특산품인 참외를 비롯해 다양한 작물을 재배한다. 12년차 농부답게 트랙터 등 농기계에 익숙한 것은 덤이다. 올해 26살인 최민규 씨는 시골에서 보기 힘든 20대 농부다. 민규 씨는 3년 전 한국농수산대학을 졸업하고 성주에 정착했다. 대구 수성구에 본가가 있지만, 성주에 연고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도와주는 일종의 품앗이, 작목반 소속이다. 그런데 성주 출신인 35살 청년 농부와 갓 대학을 졸업한 26살 사회 새내기를 이어준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시골 술자리에서 처음 만났다는 둘 사이에 말이다. “사실 촌에서 정착한다는 것이 보기는 쉬워보여요. 매스컴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지원도 많이 하죠. 생각해보세요. 귀농해서 농사만 짓는다고 하면 정부에서 1억씩, 2억씩 빌려주고 한 달에 100만원씩 지원금도 주거든요. 그런데 처음에는 진짜 힘들어요. 또 객지에서 온 사람들한테 경계심도 많아요. 그런게 많거든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끼리 무엇인가를 해보자.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죠. 내가 힘들어도 다른 사람이 일을 하니까 더 힘을 내고, 같이 하는 것.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니까 오히려 교우관계도 좋아지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게 됐죠.”이렇게 해서 모인 이들이 모두 7명이다. 이들은 서로와 서로를 멘토와 멘티 관계로 묶고 있으며, 개인마다 다른 품종을 재배하면서 품앗이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3년차 농부 민규 씨에서 12년차 농부 영준 씨는 일종의 스승이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수확이 한창인 하우스 안에서도 영준 씨는 끊임없이 민규 씨에서 조언을 한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해요. 공부도 필요하죠. 또 자기 고집만 있어서도 안되요. 공부도 없고 고집만 있는 사람이 촌에서 살아남는 것은 못봤거든요.” □ 시대가 변한 농촌… “농사도 이제 창업이죠.” 얼핏 궁금증이 일었다. 35살과 26살에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이들은 왜 이른 나이부터 농사라는 꿈을 찾고 있는 것일까. 사실 26살 민규 씨는 처음부터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도 연고도 없는 성주에 말이다. “한농대는 학년이 올라가면 실습을 해요. 제가 실습을 한 곳이 성주였어요. 그리고 자유롭고 비전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던 중에 군대 문제가 겹쳐 영농후계자로 군대를 다녀와 2018년부터 농사를 시작했죠. 원래는 참외로 농사지으려고 했지만 농사지을 마땅한 땅이 없었고, 그 당시 나와 있던 대형하우스를 사게 됐어요. 첫 회에 이것저것 많이 하려다보니 잘 되지 않아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높은 방울토마토를 선택하게 됐구요.” 민규 씨의 이야기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영준 씨도 말을 보탰다.“저도 그랬어요. 우선 농사라는 것이 자유롭거든요. 내 사업체니까요. 저도 한농대 졸업하고 공장도 다녀보고 장사도 해봤죠. 하지만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농업에 비전이 있다고 생각했죠. 한편으로는 다른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는 좀 자유롭지 않을까도 생각했구요. 해보니까 정말 자유롭더라구요. 그리고 농사라는 것이, 땅이라는 것이 일종의 제 사업체다보니까 내가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그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거잖아요. 저는 생각을 해요. 이 부분을 빨리 깨우친 사람은 시골에 들어온다구요.” 영준 씨와 민규 씨의 말대로일까. 12년차 농부와 3년차 농부는 이미 성과를 내고 있었다.  3년차 농부인 민규 씨는 스스로 ‘멜빵청년’이라는 브랜드를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갔던 유럽 연수에서 보았던 네덜란드 젊은 청년들의 멜빵바지를 본 이후다. 민규 씨는 멜빵바지를 보고 토마토를 따는 네덜란드 청년들을 보고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젊다는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은 자신이 수확하는 방울토마토의 박스와 스티커, 명함을 패키지로 구성했다. 보통 아버지가 하시는 과일가게와 성주 로컬푸드, 개인적 거래도 물량을 소화하고 있고 수익도 나고 있다. 12년차인 영준 씨는 세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세 아이 모두 성주에서 태어났다. 민규 씨가 귀띔한 것에 의하면, 영준 씨는 참외와 콩, 논농사까지 2만평 가까이 하고 있다. 각종 기계에 대한 자격증도 있으며 연수익은 1억원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어려움이 없었을까.  “올해 12년째 농사를 짓고 있지만, 어린 나이에 정말 힘들었죠. 처음 3년 동안은 아무 생각이 없을 정도였어요. 사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농자금이 대부분 빚이에요. 농업인들은 수확을 한 이후에 이를 갚아야 하죠. 그런데 경험이 없다 보니까 나중에는 생활비도 힘들더라구요.”“저도 첫 해 농사를 끝내고 1천만원 적자를 봤어요. 기반을 마련한 것도 아니고 트랙터를 팔고 대출도 쓰고 정말 힘들었죠. 수확량도 너무 적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원래 첫 수확은 적게 나오는 것이더라구요. 1화방이 익고 2화방이 익은 후 3화방이 나와야 수확이 많이 나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거죠. 그래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거죠.” □ 젊은 농촌… 뭉쳐서 사는 곳 이야기를 하면서 영준 씨와 민규 씨를 살폈다. 10년 이상을 농촌에서 살아온 영준 씨는 특유의 검게 탄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3년 차인 민규 씨는 아직 앳된 모습이었다. 앳된 모습의 민규 씨에서 여자친구와 이후의 이야기를 물었다. 아울러 영준 씨에게는 세 아이의 아빠로서 시골은 어떤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여자친구가 다른 곳에서 양봉업을 하고 있어요. 아마 결혼을 하면 성주에서 살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둘다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부모님도 마찬가지구요. 요즘은 아버지가 많이 격려도 해주세요.” “시골이 아이들 교육에 어렵다는 이야기도 알고, 문화적으로도 대도시에 비하면 누릴 것이 없는 것은 맞죠. 하지만 이제 농촌도 변하잖아요. 성주에서 조금만 나가면 대구에요. 차로 이동하면 얼마 걸리지 않아요. 그리고 앞으로 농업은 고소득 직종이에요. 충분히 저희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의 마무리가 다가오는 시간, 영준 씨와 민규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10년과 20년 후의 모습은 어떠할까하고 말이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지금은 7명이 뭉친 작목반이죠. 그런데 언제까지 저희가 작목반일까요. 지금 저도 그렇고 민규도 마찬가지고, 다른 청년 농부들은 모두 재배하는 품목이 달라요. 어쩌면 일종의 경험을 쌓고 있는 것이죠. 10년, 그리고 20년 후면 농업 인구가 많이 줄어들거에요. 농사는 지어야 하는 데, 농업인구는 적다면? 아마 농업도 일종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희가 다르게 재배하고 있는 품목이 하나하나의 계열사가 되는 거죠.” 그리고 이들은 ‘귀농’에 대해서도 꾹 참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귀농과 귀촌도 철저하게 준비가 필요해요. 어느 지역의 땅값이 얼만지, 어느 지역에 어떠한 품종이 잘 자라는지 등등 많은 공부가 필요하죠. 지금 보면 대부분의 귀농이 개인주의적이에요.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농사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더라구요. 경험도 필요하고 뭉쳐야 더 잘되더라구요. 뭉치면 시너지 효과거 엄청나죠.(웃음)”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6-29

촌에 사는 서울내기 30대… “아직은 애기농부입니다”

“귀 밑 머리에 흙이 붙어 있으면, 성공한 농부야. 손에 있는 흙을 털어내는 것은 하수야. 빗소리가 처마를 쿵쿵 치는데도 집안에만 있으면, 농부라고 할 수 있나”작고한 아무개 선생님이 막걸리 한 잔을 들이키며 하던 소리다. 스스로 평생을 ‘촌구석’이라고 부르던 곳에서 은거하던 그는 농사 예찬론자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도 촌에 와서 살아라”였다.경상북도 영양군은 아직도 ‘오지’라고 불린다. 상주와 영덕을 잇는 고속도로가 생겼지만, 고속도로를 나가면 굽이굽이 1차선 도로를 1시간 이상 통과해야만 도착할 수 있다. 마을 주민들도 낯선 차량의 등장에 한참을 쳐다보는 그런 곳이고, 자동차 길 안내도 오류를 일으키는 곳. 그곳에 청년 농부 이강우 대표가 산다. 아직 어린 멜론의 모습. 이강우 대표는 지난해부터 멜론 재배를 시작했으며 올해가 2번째다. 영양군에 정착한 이강우 대표는 ‘촌에 와서 사는 사람’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안산에서 쭉 자랐던 89년생 이강우가 ‘촌’에 와서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제가 농사를 짓게 될지는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창업에 대한 꿈은 항상 가지고 있었죠. 다만, 경제적인 부분이 창업을 막았고, 취업을 했어요. 영양이라는 곳은 잘 몰랐는데, 지역에 있는 연구소로 1년 정도 발령을 받아 일을 했죠. 그런데 제가 도시생활을 했다 보니까 농촌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어요. 1년 정도 살다 보니까 너무 좋은거에요. 사람이 너무 많은 환경에서 살다가, 시골이라는 환경이 너무 좋았죠. 다행하게도 회사에서 와이프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죠. 또 ‘내가 원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과정에, 경상북도의 청년 창업 촉진 공고를 보면서 창업을 하게 됐어요.”이야기를 나누며 얼핏 그의 얼굴을 살폈다. ‘서울내기’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 농부의 상징인 밀짚모자가 어울리는 모습이다. 옷에도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는 작업복 스타일. 그럼에도 경상도 사투리가 아닌 서울말을 쓰는 그는 ‘서울내기’였다. 그래서 조심스레 ‘텃세’에 대해 물었다. ‘텃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제가 느끼지 못한 것일까요?”였다.“사실 저는 주위분들이 농민이다 보니까 텃세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요. 귀농·귀촌을 하고 한 곳의 마을에 정착하기까지 일종의 관계가 있잖아요. 도시에서는 아파트 옆동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사람과 사람의 인프라가 발전한 농촌에서 살기 위해서는 일종의 적응기간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저는 이러한 텃세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어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을 해봤는데, 영양에 사는 분들의 저를 보는 인식이 ‘서울 토박이’, ‘서울내기’라는 식의 첫인상을 들지 않게 했던 것 같아요. 주위의 어르신분들께도 저는 한 번도 제 주장을 나타낸적이 없어요. 저는 항상 배우려는 입장에서 그분들을 응대했고, 존중했어요.”정말 ‘텃세’가 없었던 것일까. 귀농·귀촌을 꺼리는 이유의 가장 상단에 위치한 것이 ‘텃세’인데, 이강우 대표에게 자세하기 물었다.“처음 이야기하는 것인데, 사실 제 주거지가 영양 읍내에요. 영양에서는 가장 번화가죠. 마을단위에서 살면 텃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겪지를 못했어요.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영양에 와서 (사람 문제로)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초보 농부? 멜론으로 승부수를인터넷에서 이강우 대표의 사업체 이름인 ‘신아푸드’를 검색하면, 곳곳에서 그의 소식을 알 수 있다. 이강우 대표의 아내인 황사원 씨가 직접 ‘멜론농사이야기’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멜론이 자라는 과정과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덤이다. 그런데 영양에서 멜론이라니….“아직 애기농부죠. 제가 원래는 ‘새싹땅콩’이라는 농산물로 처음 창업을 했어요. ‘새싹땅콩’은 수경재배기라는 기계를 통해 재배를 하는 것이니, 정식 농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어요. 특히, (직업상)농부로 인정을 받으려면 농업경영체 등록을 해야 정식 농업인이 되는 과정이 있거든요. 그런데 ‘새싹땅콩’으로는 농업인으로 등록이 되지 않는 과정이 있었어요. 사실 실질적인 농사라고 하는 활동은 작년 여름부터에요.”그의 말대로 스마트팜 한켠으로는 덜자란 멜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러고보니 인터뷰를 하는 사무실 책상에도 반으로 잘린 ‘아기 멜론’이 있다.“작년부터 멜론을 키우고 있어요. 진짜 후회하고 있기도 하고요(웃음). 멜론이라는 작물이 진짜 어려워요. 손도 무지하게 많이 가고요. 멜론은 진짜 어려운 작물인 것 같아요. 경험치가 쌓이고 있지만, 멜론은 2번 째 작기에요. 너무 애기죠? 농업인으로 치면 너무 애긴데, 배워가는 과정이고 제 노하우를 만들고 있는 과정이더라구요, 제가 직접 해보고 실패하더라도 해보고 망하는 것이 누군가 원망을 하지 않게 되잖아요. 논문만 보고, 그런걸 해서 유도리있게 변화시켜가면서 해보고 있는 중이에요.”이강우 대표의 이야기대로, 그는 여전히 공부 중이다. 농업에 대한 지식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이 대표는 근처의 안동대 원예육종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0.1%도 안되는 30대 농부, 많아졌으면 해요”한동안 계속되는 이강우 대표의 ‘멜론 예찬론’에 제동(?)을 걸기 위해, 그의 농장을 둘러보았다. 마침 나타난 손님들. 근처에서 멜론을 재배하는 분들이라고 한다. 얼핏보기에도 나이가 지긋한 손님들은 온실에서 재배되는 멜론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갖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손님들과 이야기를 마친 이강우 대표는 “농사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시스템이죠. 저에게 스마트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연결되면서 길을 개척하고 있다는 것. 힘든 시기가 찾아오니까 기회도 찾아온거죠. 물론 멜론을 한다고 해서 바로 상품성 있는 멜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재배기술을 익히는 것에만 몇 년 걸린다고 하니까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지금 오신 분들은 근처 밭에서 멜론을 재배하시는 분들인데, 온실에서 재배하는 멜론에 대해서 공부하러 오신거에요. 미진한 기술이지만 이렇게 서로 공유를 하는 거죠.”그러면서 그는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5% 남짓 인구의 농촌. 그나마도 대다수가 고령 인구인 농촌에 대해서 말이다.“제가 농업대에서 학문을 배우고 재배를 하다보니 현실이 보이더라구요. 저희 농업 인구가 전 국민의 5% 이내죠. 고령화된 농부들이 많으니 향후 10년 이내에 은퇴를 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에요. 어느 한 논문에서 미래에 농업인들의 수가 2%대로 떨어진다는 통계도 본적이 있어요. 30대 농부는 0.1%도 안될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농업의 길을 택했어요. 하루하루가 힐링이 되는 느낌을 아시나요? 힘은 들죠. 하지만 뭔가 재미있어요. 제가 재미있는 것을 하는 것이 잘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또 적성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것이 재미있어요. 한 분야에 대해서 내가 랭커가 되듯이 기술자가 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아도 육성의 재미를 느끼고 작물의 생육 시스템이라든지, 환경 자체를 컨트롤하고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는 부분이요.”이강우 대표와의 이야기 말미, 그의 미래에 대해서 물었다.“아직 아이들은 없어요. 그렇다고 나중에 아이가 생겨도 도시로 내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제가 제 아이의 길을 정해주고 싶지는 않아요.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주고 싶지만, 생각해보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자녀가 생기면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은 그래요.”“10년 후요? 저와 같은 청년들을 돕고 싶어요. 체험도 시켜주고, 실습도 시켜주고요. 앞장서서 영양군에 청년을 늘려주는 방법도 찾을 것 같고, 멜론을 영양군의 대표 특산품으로 만들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노하우를 전파하고 있지 않을까 해요. 지역에 또 하나의 길을 만드는 것이 제 꿈이죠.”/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1-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