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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포항 오어사·일월사당

■오어사 신라 진평왕때 창건… `삼국유사`저자 일연도 머물러고려범종·원효대사 삿갓 등 전시… 주변 등산로 `인기`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 운제산의 동남쪽 기슭에 아담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사찰이 있는데, 바로 신라시대 고승인 원효대사와 헤공선사의 일화로 절 이름이 바뀐 오어사(吾魚寺)다. 오어사가 자리한 운제산은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운제산과 오어사(창건 당시의 항사사)에서 수도하면서 구름다리를 타고 넘나들었다고 해서 `운제산(雲梯山)`이라고 했다는 설과 신라의 제2대 남해왕비인 운제(雲帝)부인의 성모단이 있어서 운제산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 확실한지는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후자의 설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579년~632년) 때 창건하여 항사사(恒沙寺)라 불리다가 오어사로 절 이름이 고쳐졌는데, 그에 대한 설화가 `삼국유사`에 간략하게 전해지고 있다. 혜공이 만년에 항사사에서 기거를 하였는데, 원효가 이 시기에 여러 불경의 주석을 달면서 가끔 혜공을 찾아와서 의심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농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한번은 두 분이 시냇가-오어사 앞에 있는 지금의 오어지는 현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옛날에는 작은 개천이 흘렀다-에서 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똥을 누었는데 혜공이 이것을 가리키면서 `여시오어(汝屎吾魚)`라고 농담을 했다는 것이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부분인데, 이 `여시오어`란 말에 대한 깊은 해석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데 직역하면 `네 똥은 내 고기로구나!`라는 뜻이다. 하지만 두 분의 농담이 깊이 있는 선문답이었을 것을 생각해보면 `같은 물고기를 먹고 너는 똥을 누고, 나는 물고기를 누었다`라고 풀어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아무튼 이 설화에서 지금의 절 이름인 오어사(吾魚寺)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오어사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정확히 전해지고 있지는 않지만, 유물과 유적에 의하면 자장, 혜공, 원효, 의상이 오어사와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절의 북쪽에 자장암과 혜공암, 남쪽에 원효암, 서쪽에 의상암의 수행처가 있었던 기록이 있어 이들 고승의 흔적과 연관을 짓고 있다. 그리고 1264년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오어사에 머물렀음이 확인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나한전, 설선당, 칠성각, 산령각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대웅전(조선 영조 17년에 개축)을 제외한 건물들은 모두 근대에 건립된 것이다. 오어사에는 유물관이 건립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1995년 오어지 준설 작업 도중 발견된 고려 고종 3년(1216년)에 제작된 고려 범종과 원효대사의 삿갓이라고 전해지는 낡은 삿갓이 전시되어 있다.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범종은 명문에 의하면 팔공산 동화사에서 제작된 후 오어사로 옮겨진 것으로 되어있다. 출토된 후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보물 제128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7월부터 오어사에서 전시되고 있다. 원효대사의 삿갓이라고 전해지는 삿갓은 마치 실오라기 같은 풀뿌리를 소재로 하여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뒷부분은 거의 삭아버렸지만 겹겹이 붙인 한지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앞서 밝힌 암자 가운데 현재에는 자장암과 원효암만 남아 있으며 자장암으로 오르는 길에는 조선시대 부도가 남아있다. 그리고 절 앞의 오어지와 어우러지는 운제산의 풍경이 일품이어서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일월사당`연오랑 세오녀` 설화 등장 `도기야` 추정 자리에 건립매년 포항시서 선발한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제 올려 포항시 남구 동해면 사무소 뒤편의 낮은 언덕에 소나무 숲이 있고, 그 숲에 작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에 나오는 도기야(都祈野)로 추정되는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는 포항시에서 시민들 가운데 선발된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매년 제를 올리기도 한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지면의 한계로 다 소개하기는 어렵고,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의 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지 4년 정유년(157년)에 동해해변에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서 해초를 따는 연오랑을 바위(혹은 큰 고기라고도 한다.)가 일본으로 데려가고, 이를 신기하게 여긴 그곳 사람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다. 이후 남편을 찾으러 갔던 세오녀도 연오랑처럼 일본으로 가게 되고,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된다. 그 후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없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그 이유는 해와 달의 정기를 지닌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가서 생긴 것으로 알려진다. 신라왕이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았으나,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어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하면서 세오녀가 직접 짠 생초비단을 내어 주면서 제사를 지내라고 알려준다. 신라로 돌아와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이전과 같아졌다고 한다. 이때 받아온 생초비단을 임금의 어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아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도 하였다.` 이 설화의 무대가 바로 `해와 달의 고장`이라는 뜻으로 `일월향(日月鄕)`으로 불려온 영일군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곳이 동해면에 있는 일월지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일월신을 모신 사당이 있어 천제당 또는 일월사당이라 불렀고, 신라시대에는 왕실에서, 고려. 조선시대에는 영일현감이 제사를 지냈고, 그 뒤로는 이 못의 물로써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이 일월지가 해병사단 내에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찾아가는 길 ■오어사=포항시내에서 형산교를 건넌 후 포스코에서 구룡포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포스코 3문을 지나면 오천읍 방향 이정표가 나온다. 오천읍으로 우회전 후 오어사 이정표를 보고 찾아가면 된다. ■일월사당=포항시내에서 구룡포 방향으로 진행하면 포항공항 이정표가 보인다. 공항삼거리에서 직진하면 구룡포방향이고 우회전해서 동해면방향으로 진행 후 500여m 정도 들어가면 우측에 동해면사무소가 보이고 뒤 편이 일월사당이다.

2009-09-04

장항리사지

언덕 위 절터에 5층 석탑 두 기·불상대좌만 남아 있어 사자상으로 표현된 `신수상` 신라석조예술 극치 보여줘 경주 불국사에서 시작되는 토함산 순환도로를 따라 석굴암에서 감포방향으로 가다 보면 계곡 건너편 언덕 위에 5층 석탑이 보인다. 지나면서 보면 탑신부만 보이는데 이 탑이 바로 국보 제236호인 월성 장항리 사지 서(西) 오층석탑이다. 도로 옆에 조성한 주차장 아래로 향한 돌계단과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 5층 석탑이 있는 장항리 절터로 올라가는 길을 만들었지만, 낙석이 계속 발생하여 지금은 비탈면 보수공사 중이다. 주차장에서 감포 방향으로 50여 m 정도 더 내려가면 임시주차장이 있는데 이곳에 주차하고 올라가면 된다. 장항리 절터는 토함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두 계곡과 만나는 곳에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대종천을 따라 흘러 감은사지를 지나 대왕암 근처에서 동해와 만나게 된다. 사찰의 이름을 알 수가 없어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 절터라고 부르고 있는데, 원래 장항사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장항리로 불리게 되었는지도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절터는 계곡의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있고, 현재 5층 석탑 두 기와 불상대좌가 남아있다. 석탑에서 약 10m 정도 떨어진 불상대좌의 주변으로 금당터를 확인할 수 있는 초석이 있다. 금당의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이며, 초석으로 미루어보아 정면과 측면이 각각 세 칸으로 된 그다지 크지 않은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당 터 가운데 놓여 있는 불상대좌의 크기는 하대석 높이 0.6m, 최대 폭이 2.4m이며, 상대석은 높이 0.53m, 지름 1.84m의 각기 다른 돌로 만들어졌다. 8각으로 된 하대석의 안상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상을 번갈아 가며 높은 부조로 새겼다. 특히 사자상으로 표현된 신수상은 포효하는 듯한 생동감과 익살스러움이 넘쳐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데 신라 석조예술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둥근 상대석에는 연화문을 새겼으며, 그 가운데에 불상을 안치했던 깊고 큰 홈이 남아 있다. 불상대좌 위에 있던 석조 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어 있었는데, 1932년 서탑을 복원할 때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으며, 연재 북쪽 정원에 전시되어 복원과정을 거치고 있다. 언뜻 보면 좌상처럼 보이나 광배 일부와 무릎 이하가 결실되었다. 머리와 얼굴 모습 그리고 광배에 새겨져 있는 화불 등의 조각 수법을 볼 때 8세기경에 만들어진 여래입상으로 판단되며, 현존 높이 3m이나 실제로는 4m 이상 되는 장육상의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 역시 이 불상의 안치를 위해 중층구조를 가진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인 장항사의 모습은 쌍탑을 배치한 통일신라시대의 가람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나머지 절터가 유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돼 강당이나 회랑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금당터 남쪽 약 15m 거리에 있는 서탑은 1925년 도굴범이 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를 절취하기 위해 폭파하면서 파괴되어 있던 것을 1932년에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복원된 서탑은 높이 약 10m로 노반(盤)까지 남아있다. 하층기단은 비교적 넓고 높으며, 초층 탑신의 4면에 도깨비문양의 문고리가 장식된 두 짝의 문이 모각되어 있다. 그 좌우에는 연화대좌 위에 서있는 고부조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하였다. 인왕상은 금강역사라고도 하는데 문을 지키는 신장(神將)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4면에 새겨진 8개의 인왕상은 얼굴표정과 울룩불룩한 근육, 나풀거리듯 새겨진 옷과 여러 가지 장식이 아주 섬세하게 새겨진 수작으로 무서운 인상을 주기보다는 심술궂은 장난꾸러기와 같이 친근함이 느껴진다. 동탑은 계곡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6년 2월에 인양하여 현재 위치에 놓게 되었는데 남아있는 부재로 보아 서탑과 같은 규모이나 인왕상의 조각기법이 서탑에 비해 조잡해 보이고, 서탑과 달리 인왕상 아래에 연화대좌도 없어 다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립 경주박물관장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정양모 씨는 장항리 절터의 서편 5층 석탑을 본 감흥을 `뭉클한 아름다움과 위대한 소박성`으로 표현했다. 예전과 달리 도로가 잘 조성되어 있는 지금은 언제든지 이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보문단지에서 덕동댐을 지나는 도로를 따라와도 좋고, 앞서 말한 토함산 순환도로를 이용해도 된다. 어느 문화유산이든지 걸작으로 회자하는 곳에는 `가슴 뭉클한 아름다움`이 전해진다. 이번 주말 아이들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아 다이너마이트를 동원한 도굴꾼의 무자비한 파괴에도 살아남은 5층 석탑이 자연과 어우러진 `뭉클한 아름다움`과 석탑의 인왕상과 불상대좌의 사자상이 전하는 익살스러운 `위대한 소박성`을 느껴봄이 어떨까?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09-08-21

감은사지·감은사지 삼층석탑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93년에 발행한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감은사에 대한 답사기를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이렇게 쓰고 싶다고 하였다. 지금도 찾는 이들이 많지만, 대구-포항 고속도로가 생기기전에는 대구와 인근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바다 중의 한 곳이 문무대왕암이 있는 경주시 감포읍 봉길리 일대였다. 경주시가지에서 보문단지와 덕동 댐을 지나 봄. 여름에는 신록에 취해,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에 취해 산길을 달리다보면 어느새 곧게 뻗은 감포읍의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곧게 뻗은 도로여서 20대에 친구들과 이곳을 찾을 때는 우리끼리 `감포 아우토반`이라고 불렀던 도로이다. 이 도로의 끝자락이자 대종천과 동해가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면 왼쪽 해발 240m의 연대산 남쪽 기슭 언덕위에 우뚝 솟은 3층 석탑 두기가 보인다. 감포의 동해바다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본 곳이고 너무나 유명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감은사지는 경주시내에서 약 35km 거리의 동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번지 일대로서 절터가 위치한 마을은 속칭 탑골 또는 탑 마을로도 불리고 있다. 언덕위의 절터에서 2시 방향의 동해안 어귀를 바라보면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문무대왕 해중릉으로 전해지는 대왕암이 한눈에 보이는데, 이곳에 절터를 잡은 것은 기록에 나타난 호국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삼국사기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기록을 종합해보면 감은사는 문무왕대에 창건되기 시작하였으며, 문무왕 사후인 신문왕 원년(682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처음 문무와이 창건할 당시의 사찰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문무왕릉의 조영과 함께 신문왕이 삼국을 통일한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라고 사찰명을 부여함으로써 원찰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문왕은 감은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일주일은 문무왕의 유해를 대왕암에 올라 산골하는 장례의식과 감은사의 낙성식이 함께 진행되는데 필요한 기간으로 생각된다. 만일 그렇다면 아마도 신라의 여러 사원 가운데 가장 성대한 의식이 감은사에서 장기간 베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터는 1960년과 1979년~1980년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이 수습되었고 절터의 전모가 확인 되었다. 감은사는 일당쌍탑식(一堂雙塔式) 가람으로서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성된 점과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중회랑인 익랑(翼廊)을 둔 점이 특이하다. 절터의 남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문지가 있고, 중문 좌우로 후면의 강당지에 이르기까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감은사지에는 중문의 북쪽이자 금당 앞 좌우에 같은 형태의 삼층석탑 2기가 있다. 이 두 석탑은 682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오랜 세월동안 자연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속적인 크리프(creep)―일정한 하중상태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료의 변형이 증대하는 현상이다.― 현상으로 부재의 열화, 이완, 파손, 풍화현상 등으로 붕괴의 위험과 훼손이 우려되어 시차를 두고 각각 해체보수 하였다. 서탑은 1959년에서 1960년까지 일차 보수를 하고 2007년부터 2008년까지 해체보수를 하였다. 동탑은 1995년부터 1996년까지 해체 보수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탑이 해체 보수과정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1959년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보물 제366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1996년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보물 제1359호로 지정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제112호인 동서삼층석탑은 제일 윗부분인 찰주까지의 높이가 13m로 국내의 현존하는 석탑가운데 가장 큰 탑이다. 신라석탑은 삼국통일과 함께 백제와 고신라의 각각 다른 두양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양식으로 집약, 정돈된 신라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이 바로 감은사지삼층석탑과 고선사지삼층석탑이다. 특히, 감은사지삼층석탑은 신라와 백제의 삼국시대 말기 석탑 양식이 하나로 집약된 새로운 양식으로 신라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시원적인 석탑이다.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고졸한 자태를 간직한 거대한 규모의 석탑으로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의 변화는 있지만, 이러한 형식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신라석탑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석탑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많은 부재로 구성된 방식은 백제석탑과 공통되지만, 백제석탑이 목조 탑파를 충실히 모방하고 있는데 비해서 감은사지삼층석탑은 기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에 의하여 짜인 새로운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지붕모양의 옥개석과 공포를 약화하여 표현한 옥개받침과 기둥을 그대로 표현한 별석(別石)의 우주(隅柱), 다층(多層) 등 목조 탑파를 모방한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지대석을 갑석보다 더 많이 내밀고, 갑석의 이음 위치를 탱주 위에 두고, 낙수면과 옥개받침석의 이음 위치를 서로 엇갈리게 두어 상부 하중을 분산시킨 조탑기법은 초기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부재 결구 기법이다. 동서 두 탑은 전체적인 형식과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각 부재의 치수까지도 같다. 다만 상하층 기단 부재 모양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단부와 탑신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고, 상륜부 노반 위는 결실되어 없어진지 오래이지만 찰주(擦柱)가 남아 있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부처님의 힘을 왜구를 물리치고자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어 승려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겨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이름을 감은사로 고친 것이다. 이러한 유언의 흔적은 금당의 구조에도 반영되어 있다. 금당의 바닥구조는 H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장방형의 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서 마치 돌 마루를 얹어 놓은 것 같이 되어있다. 그 위에 주초를 배열하고 건물을 세웠던 특이한 구조로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의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부합하고 있다. 금당 북쪽의 강당지는 원래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던 것을 , 후대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고쳐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때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용으로 화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헌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09-07-17

충남 예천 남연군의 묘

` 2대에 걸쳐 천자 배출` 천하의 명당 흥선대원군이 가야사에 불지른 후 석탑 부숴 묏자리 만들어묘 옮긴후 7년뒤 `고종` 탄생… 완벽한 `배산임수` 최고 명당 명당(明堂)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에 썩 좋은 자리`, `풍수지리에서 후손에게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묏자리나 집터`로 나와 있다. 이번 충남 지역 답사의 마지막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찾았다. 흥선대원군은 잘 알려진 대로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와 멸시가 심해지자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기에 이른다. 흥선대원군은 풍수지리의 대가인 정만인을 불러 경기도 연천에 있는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자 명당을 추천 받는데, 이때 정만인이 두 곳의 명당을 천거하게 된다. 한 곳은 자손이 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명당이고, 다른 한 곳은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명당이라고 천거하는데 흥선대원군은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온다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의 명당자리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가야사라는 사찰과 석탑이 있어서 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원군은 가문의 가보인 `단계 벼루`를 가야산 주지승에게 선물로 건네고, 그 당시에 충청감사로 있던 자를 회유해 가야사의 스님들을 다른 사찰로 보내기에 이른다. 1844년 어느 날 가야사에 불을 지른 흥선대원군은 직접 석탑을 부수고 묏자리를 만들어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게 된다. 묘를 옮긴 지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명복의 나이 12세에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가야사를 없앤 대원군은 인근 골짜기에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짓고, 개운사 주지인 도문을 초대 주지로 삼은 후에 남연군묘 수호일품대승이라는 직책을 내려 묘를 돌보게 하였다. 1868년에는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고 나서 대원군과 통상 문제를 흥정하고자 남연군묘의 시체와 부장품을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쳐 대원군이 쇄국정책강화와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인 남연군의 묘는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주차장에서 마을 길을 따라 5분여 정도 걷다 보면 남연군의 묘가 보인다. 마을 길을 따라 걸을 때만 해도 그냥 조용한 시골마을 정도로만 여겨졌는데, 묘가 있는 언덕에 올라서니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천하의 명당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짧은 순간이지만 바람도 멈춘 듯 주위가 고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딱 잘라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포근함`이었다. 이곳을 찾기 전에 답사지도위원께서 “남연군묘에 가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그곳이 명당인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말 그대로였다. 풍수에 대해서는 `배산임수`를 들어 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알 수 없는 포근함이 이곳이 명당임을 느끼게 하였다. 시야가 확 트인 묘의 전면에는 좌·우에서 내려온 산의 줄기가 맞다은 듯 이어지고, 후방과 좌·우에는 높고 낮은 산이 인근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남연군묘의 이장과 고종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지면서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한바탕 명당 찾기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지금도 유적 답사를 다니다 보면 명산의 사찰 주변에 무덤이 많고 특히 탑이 있었던 자리에 무덤이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때부터 유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묘를 이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이인제 의원 등 수많은 대권 도전자와 대권에 뜻을 둔 정치인들이 조상의 묘를 소위 명당으로 이장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09-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