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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정문 스님 보경사 주지한국의 하늘은 유난히 푸르다. 그 푸름의 오묘함은 가을에 더욱 빛을 발한다. `눈이 시리게 푸르른 날`이라고 미당(未堂)은 노래했다. 어찌나 푸르던지 그 바라봄에 그만 눈이 시리다. 넘치는 말이 아님을 우리의 하늘을 본 사람이라면 넉넉히 공감할 구절이다. 근래 가을 하늘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색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표현할 색감(色感)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빛깔을 맞춰도 색이 갖는 감(感)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내는 내도 한국의 가을이 가진 정서에는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탕에 흐름을 바르게 옮기지 못하면 몸은 왔어도 혼백은 없는 허수아비꼴이 되는 것이다. 그 색(色)이 무엇이 길래 어떤 색이기에 그렇게 힘들까. 쪽빛. 그것은 바로 쪽빛이다. 한국인이라면 쪽빛이 어떤 색을 이르는지 대강은 알고 있다. 우리의 가을하늘을 말할 때 코발트빛 푸른 하늘, 보다 좀 더 한국적인 색감으로 `쪽빛`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쪽빛은 어떤 색인가. 어떻게 대답할까. 푸른색, 남색, 좀 더 고급한 표현으로 마린블루, 코발트블루,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답은 쪽빛은 쪽빛이라는 답이다. 미술평론가 손철주씨의 `꽃피는 삶에 홀리다`에 보면 염장(染匠) 한광석씨의 답변이 나온다. 시인 김지하는 꿈결 같은 색이라 말하는데, 그렇다면 평생 쪽물을 들여온 염장(染匠)의 입에서는 쪽빛에 대한 분명한 답이 올듯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더욱 모호한 답이 나온다. 청(靑)도 아닌 것이 벽(碧)도 아닌 것이 아닌 것이? 그렇다면 무슨 색이란 말인가. 염장은 그저 까마득한 색이라 말한다. 까마득한 색이라. 이 대목에 이르면 더 이상 물어볼 말이 없어진다. 청(靑)이니, 벽(碧)이니, 람(藍)이니 하는 푸름도 쪽빛의 그것을 담기에는 부족해서 결국은 시각(視覺)을 접고 생각을 접게 만드는 까마득한 색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색을 흰색이라 하지만 청자와 가을 하늘, 소나무와 대나무의 푸른기상을 사랑했던 조상들을 보면 흰색만큼이나 푸른빛을 좋아했던 것 같다. 민족마다 선호하는 색깔이 다르며 개인도 호불호(好不好)의 그것이 있다. 색의 기호(嗜好)로 성격을 분석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색깔이 있다고 한다.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본성을 이른 말 일 것이다. 색중에는 스스로 드러나 보이는 색이 있고 함께 있음으로 주위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색도 있다. 존재만으로 조화를 만들고 평온함을 주는 색도 있다. 숫타니파타에는 아름다운 싯구가 나온다. `세상 빛에 물들지 않는`다는 귀절이다. 세상속의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상을 향해 길어 올리는 물빛이 더러워도 우리가 피워내는 꽃에는 탁함이 없다. 세상 빛에 물들지 않는 본래의 색이있기 때문이다. 나의 색을 갖되 나만의 색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푸른 가을날이다. 미당(未堂)은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고 했다. 내연산 보경사에도 지친 초록이 단풍으로 올 것이다. 눈 부신 쪽빛과 맞닿는 붉은 단풍, 깊은 가을이 기다려진다.

2009-10-15

위로의 하나님

박진석 포항 기쁨의교회 담임목사최근에 들어서 우리 사회에서 급성장하는 산업이 있는데 바로 `위로 산업`이라고 합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이나,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상대가 없어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줄 애완용 동물이 인기를 끌고, 싱글 여성들은 “남자 친구 팔베개 쿠션”을 애용하기도 한답니다. 또 술을 판다기 보다는 말상대를 해주는 토크 바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또 호주에서 유행하여 전세계로 널리 퍼진 프리 허그(Free Hug) 운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포옹함으로 따뜻한 위로와 정을 나누어주겠다는 운동입니다. 위로 산업이 번창하고, 프리 허그 같은 운동들이 일어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만큼 위로에 굶주려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최근 수년간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숫자가 하루 평균 33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일년에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멀쩡하게 잘 살아가는 것 같지만 곳곳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1장 3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자비의 아버지 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이 말씀은 초대 교회의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 중에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위로의 하나님` 이 때 위로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파라클레시스`입니다. `파라`는 헬라어로 가까이라는 뜻이고 `클레시스`는 부르다 라는 뜻입니다. 위로가 성립되려면 누군가를 가까이 불러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사실 말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그저 나의 고통과 형편을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위로와 도움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깊은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로하지 못할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우리 가까이 불러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자리로 가까이 초청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고통하며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불러 보십시오. 분명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기 원하시는 자비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우리 모두의 영혼에 풍성히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009-10-08

메주 덩어리(일치의 소명)

원유술 주임신부 죽도성당중국 정부는 본토에 있는 약 50개의 소수 민족들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책자로 정리하고,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책자를 참고해서 잘 다스리라고 한다. 그 소수 민족중의 하나인 “조선족”의 장, 단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장점은 `이 세상에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살아남을 민족은 바로 조선족이다.` 그들은 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어떤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억측같이 살아간다. 구 소련에서는 한밤중에 기차로 강제 이주를 시켜 사막에 던져 놓았지만 그들은 사막을 옥토로 만들었다. 중동 지역에서는 한때 살인적인 더위의 뙤약볕 속에서도 밤에 횃불을 밝혀들고, 대수로 공사를 기한 내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열악한 이민생활 속에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요즈음 `24시 편의점` 처럼 열심히 모든 어려운 여건들을 극복하며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다. 한강의 기적! 다른 나라들은 몇 백년 걸리는 경제성장을 몇 십년 만에 이룩한 놀라운 저력을 가진 민족이며, 온 세상이 멸망해도 살아남을 민족임을 장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단점은 `죽어도 일치되지 않는 민족`이다. - 지금도 한 개울가를 두고, 서로 마주 보며 몇 백년 동안 앙숙으로 살아가는 문중들! 세계 유일의 분단국! 지역! 혈연! 학연! 오늘도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에 서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을 `메주 덩어리`에 표현하고 있다. 메주콩을 삼고, 찧고, 뭉치고, 새끼줄로 꽁꽁 동여 메어 놓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갈라지고, 틈새로 곰팡이가 번져 나가는 것처럼 지독히 일치되지 않는 민족이라 표현한다. 참으로 부끄럽고, 슬픈 우리의 모습이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실패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일치`였다. 당신 손수 밤세워 기도하시며 사랑하는 제자들을 선택했지만 그들은 당신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그를 넘겼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훈계하시고, 질책하시고, 명령하셨지만, 이 `일치`만큼은 당신이 눈물을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셨다. `요한 복음 17장` 고별사를 통하여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 바로 `일치의 삶`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이요, 하느님의 삶이다. 그래서 “일치가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구원이 있는 곳에 일치가 있다.” `일치의 삶`은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는 일이며, 아버지의 뜻이 완성되는 삶이다. 일치의 삶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며,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진리의 삶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침으로써까지 `일치`를 이루어 내셨다. 오늘 우리 교회의 소명은 바로 분열이 있는 곳에 참된 일치를 가져오는 사명을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2009-09-24

깨진 접시를 맞추자

생활하다 보면 유리잔이나 찻잔을 깰 때가 있는데 깨진 파편들은 아주 날카로워 치울때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크고 작은 조각 모두 날이 서 조금만 부주의 하면 손을 베기 때문에 부스러기까지 모두 줍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줍다보면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깨진 조각들은 하나 같이 날카롭고 삐죽하다. 무디거나 둥근 형태가 없다. 특히 작은 조각들은 더욱 예리하다. 본래 이 조각은 유리잔과 찻잔이었다. 그 때 우리는 담을 수 있는 공간과 부드러운 곡선을 갖춘 지금과 다른 그것을 고맙게 사용했다. 그러나 부서지면서 형태는 망가지고 담을 공간도, 둥글고 부드럽던 곡선도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날카로운 직선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파편들을 하나씩 주워 맞추다 보면 날카로운 각이 궁극에는 둥근 원의 모습, 곡선의 어느 부분을 이루었던 조각임을 보게된다. 둥글게만 보였던 원도 사실은 날카로운 직선들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각각의 조각들이 자기자리를 찾는 순간 그것들이 가졌던 부정의 날카로움은 사라진다. 이제 그곳에는 파편이 아닌 전체가 있다. 그 조각이 있던 곳은 찾을 수 없다. 그것은 그 안에서 변화를 통해 바뀐 것이다. 그것을 어울려 합쳐졌다(화합)고 한다. 사회에는 각양각색의 주장이 있다.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르다는 사람이 있고 긍정적 수용이 있으면 부정적 거부가 있다. 생각들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큰 틀의 관점에서 그들을 대하면 결국 하나의 줄기로 모아지고 우리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또한 보잘것 없는 주장, 부스러기의 생각이라도 그릇의 공간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임을 깨닫게 된다. 다만 지금은 떨어져 나와 있기에 불필요하고 위험하게 보일 뿐이다. 본래자리에서 그것은 전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게 된다. 파편의 날카로움에 손을 베인다며, 생긴 모습이 다르다며 버린다면, 그 그릇은 다시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후에 화합이 시대의 중심 화두로 떠올랐다. 여야 모두 이 주제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화합이 정치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계층이나 기업, 세대 등 어디든 화합의 맞잡음은 필요하다.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사용자와 노동자, 신·구세대의 대립각은 부둥켜 안는 수용의 과정을 통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함께 사는 상생의 이치이다. 대적은 서로를 피폐하게 만든다. 상생은 서로의 삶을 내 삶으로 들어오도록 이끄는 것이다. 여기서 화합의 가능성이 싹튼다. 살펴보면 서로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기쁘게 모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살표보라. 얼마나 많은 인연들로 우리삶이 지탱되고 있는가를. 깨어진 파편의 날카로움만 지적하지 말자. 깨어진 조각이 어떻게 날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로가 필요하다. 화합은 상대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제되기에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이다. 화합은 합리적 변화를 가능케 한다. 그것이 서로 상생하는 지혜의 길이다.

2009-09-17

하나님의 리듬을 따르라!

박진석 포항 기쁨의교회 담임 목사창세기 2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6일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입니다. 이 리듬을 거스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리듬을 따를 때 온전한 삶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리듬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바이오 리듬이 있습니다. 바이오 리듬은 신체리듬, 감성리듬, 지성 리듬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체리듬의 경우는 23일의 주기를 갖고 있고, 감성 리듬은 28일, 지성 리듬은 33일의 주기를 가진다고 합니다. 이 리듬에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사람에게만 리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계절에도 리듬이 있고, 식물과 동물에도 리듬이 있습니다. 음악에도 리듬이 있고, 바람에도 리듬이 있습니다. 이 모든 리듬은 다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을 따라 전개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을 따르지 아니하고 거스릴 때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나듯이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을 거스리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고 나서는 안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쉬지를 못합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더 빨리 더 많이 일하기 바쁘지 쉼이 없습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몇 개월 전에 호주의 이민교회 지도자 모임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 호주 사람들의 삶의 여유를 보면서 참 부러웠습니다. 대개 아침 일찍 7시까지 출근하고 오후 3시까지 일하고는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하고 놀고 정원을 가꾸고 운동하고 저녁식사를 하고는 10시 전에 다 잠자리에 드는 것이 호주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리듬이었습니다. 영국 청교도들의 삶의 흔적이 호주 사람들의 삶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의 삶의 리듬과는 너무도 다른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유익과 행복을 위한 명령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잘 쉬는 것 그것은 새로운 창조(Re-creation)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라고 합니다. 분주하게 많이 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잘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잘 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분주하게 많이 일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안단테, 안단테.”

2009-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