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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장일환 산림조합중앙회장

한국 근대화의 근간에는 산림녹화사업이 있었다. 산림의 황폐화는 헐벗은 우리 근대사의 가난과 맥을 같이했다. 1962년 창립한 산림조합은 산주와 조합원의 권익향상과 지속가능한 산림경영 촉진을 통한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다.142개 회원조합을 중심으로 200만 산주들의 노력과 국민들의 참여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극도로 황폐화되었던 산림의 조림 성공이란 위업을 달성하게 했다. 장일환 산림조합중앙회장을 만나 산림의 가치와 미래가치창출의 사업 등을 들었다.(편집자 주)-산주 또는 임업 종사자들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이나 지원제도는 어떤 것이 있나.▲산림을 경영하기 어려운 산주의 산을 대신 경영해 주는 대리경영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산림경영계획서 작성에서부터 정부 지원 보조금의 신청과 수령까지 전업무를 대신해 주고 있다.또한 전국 142개 산림조합에 840명의 산림경영지도원을 배치해 산주와 임업인이 필요로 하는 산림경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표고, 밤, 산채 등 8개 단기소득임산물에 대해 40명의 특화품목지도원이 전문재배기술을 지도하고 있으며, 임업기계장비를 저렴하게 대여해주기 위해 7개의 임업기계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기후변화에 의한 집중호우 피해로 산사태 등 산림재해의 예방과 복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산림조합에서는 사방댐 등 사방사업에 대한 설계 및 시공에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동안의 성과와 향후 추진계획은?▲사방댐의 경우 1곳에 2억5천만원의 예산으로 상류지역의 계곡과 지류에서 수십배에 달하는 하류 재해를 원천 차단하는 효과를 가진 시설물로 정부에서도 매년 사업량을 늘려가고 있다. 최근에는 사방댐 시설의 설계를 선진화하기 위해 통합산림설계시스템(TFDS)의 개발을 완료했고, 현지여건에 맞는 사방댐시설을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설계분야에도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산사태 위험이 높은 산지에 대한 숲가꾸기 사업의 확대 등을 통해 산지보존 및 인명과 재산피해를 막는데 앞장서 나갈 것이다.-임산물 유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목재와 먹을거리 등 임산물유통 활성화를 위한 사업을 소개한다면.▲시장개방에 따른 수입임산물의 증가, 전자상거래 등 소비패턴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임산물유통사업의 체제개편과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해 목재유통센터, 목재집하장, 임산물직매장, 임산물가공공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국산재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목재유통센터에서는 건축 내외장재, 통나무집, 목구조시설 등 국산목재의 부가가치를 높여 나가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수도권, 영동권에 이어 남부권에 1곳을 추가 설치할 계획이다.먹을거리 임산물은 생산자나 조합원으로부터 직접 수집해 일련의 가공절차를 거쳐 대형마트나 급식업체로 판매, 공급하고 있다. 국내산 청정임산물의 안정적 보급을 위해 유통체계를 개선하고 가공·포장기술개발을 통해 소비자들이 믿고 먹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산림조합이 인도네시아, 베트남의 조림사업 등을 꾸준히 확대해 오고 있다. 성과와 앞으로의 추진계획은?▲우리나라는 목재수요의 86% 정도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국제 원자재 시황변동과 자원무기화에 취약하다. 또한 온실가스 의무감축에 대한 국제사회 요구도 강하다. 이에따라 94년부터 베트남 동남부를 중심으로 해외조림을 추진해오고 있다. 베트남에는 여의도면적의 53배에 달하는 1만6천㏊를 조림했으며, 조림목은 벌채 후 제지·펄프용 우드칩으로 가공해 국내 업계에 80만7천㎥을 공급함으로써 443억원의 수입대체효과를 거뒀다.2006년부터 인도네시아 해외조림을 준비, 2009년 3월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녹색외교 순방을 계기로 사업에 착수하고 총 10만㏊의 조림지 조성을 목표로 추진 중에 있다. 해외조림에 대한 국제적인 움직임이 목재자원뿐만 아니라 탄소배출권 확보를 위한 조림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어 여건이 조성된다면 북한의 황폐화된 지역 조림에도 적극 참여할 계획이며, 해외에서의 원목관련사업 및 바이오매스 활용사업에 대한 투자도 진행할 것이다.-마지막으로 경북 청송에 건립을 추진중인 임업인종합연수원의 목적 및 향후 운영방안 등을 소개한다면.▲임업인종합연수원 건립은 임업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여러 지역을 검토하던 중 마침 청송군에서 기반시설을 지원하고 군유림을 실습림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등 많은 지원조건을 제시함에 따라 청송으로 결정했다.임업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등 종합적인 교육환경을 만들 계획이다. 이를 통해 산림의 기술혁신과 녹색기술선진화를 위한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고, 기후변화 등 글로벌 이슈에 대응하는 기초연구 및 교육기반을 구축할 것이다. 또한 산림관련학과 학생 등 차세대 리더를 육성하고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산림문화휴양분야의 숲길체험지도사, 유아숲지도사 등 전문지도인력을 양성하며 산촌정착자 등을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이외에 국가공인 교육기관 및 산림관련학과 수강·학점 인정 기관 지정 등을 추진, 단순한 교육공간이 아닌 산주와 임업인에게 고부가가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임업분야 인적자원개발의 메카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이창형기자chlee@kbmaeil.com

2011-09-16

곽인섭 해양환경관리공단 이사장

해양환경관리공단(KOEM)이 곽인섭 이사장 체제 이후 재도약에 나섰다.곽 이사장은 최근`한마음경영, 청렴윤리경영, 현장중심경영, 가치창출경영`의 새로운 4대 경영방침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는 국민이 신뢰하는 최고의 해양 전문기관으로 성장하기 위한 제2의 도약을 위해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곽인섭 이사장을 만났다.편집자주-해양환경관리공단 이사장 취임을 늦었지만 축하드린다. 공단 현황에 대해 소개한다면.◆21세기는 무한한 자원과 가능성을 품고 있는 바다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국격이 달라지는 신 해양시대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인 천혜의 해양국가로 바다의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국내 유일의 해양환경관리 전문기관인 해양환경관리공단의 수장을 맡게 돼 어깨가 무겁다.우리 공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기란 어렵지만,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다를 깨끗하게 하는 모든 일을 하는 곳`이라 말할 수 있다.우리 공단은 해양환경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다양한 해양환경 분야의 know-how와 전국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한국해양오염방제조합을 확대·개편하는 해양환경관리법의 제정으로 국내 유일의 해양환경전문기관으로서 2008년 1월에 재출범했다.지난 3년간은 공단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제는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 최고의 해양환경관리기관으로 발전하고자 500여 임직원이 한마음으로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최근 4대 경영방침을 선포하셨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지난 13일, `4S 인재육성`을 기반으로 한 `한마음경영, 청렴윤리경영, 현장중심경영, 가치창출경영`의 4대 신 경영방침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4대 경영 방침을 통해 4S의 인재를 육성함으로써 선진 해양전문기관으로 발돋움 하겠다는 의미다.4S를 풀어 설명하면, 한마음 경영을 의미하는 Synergy-generating(동반성장을 만들어내는)은 임직원간의 화합과 열린 문화를 지향하는 인재상을, 청념 윤리경영을 의미하는 Socially responsible(사회적 책임을 다하는)은 윤리정신이 투철한 인재상을 의미한다.현장중심 경영을 의미하는 Speedily supporting(신속히 지원하는)은 현장접점에서의 고객관리에 만전을 기해 고객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뜻이며, 가치창출 경영을 의미하는 Steadily innovating(지속적으로 혁신하는)은 창의와 혁신으로 무장해 공단을 최고의 해양환경전문기관으로 성장시키는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는 해양환경관리공단이 국민이 신뢰하는 최고의 해양환경전문기관으로,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 최고의 해양환경기관이 되기 위한 초석으로 지식과 일체성, 열정, 도덕성을 갖춘 인재경영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미다.-국토해양부에서 잔뼈가 굵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해양환경공단이 지향해야 할 점이 있다면?◆지난 30년간의 공직 생활 중, 미국 해양대기청(NOAA) 파견 근무시 해양환경 업무를 직접 경험했고, 해양보호구역(MPA) 제도의 국내 도입을 추진했으며, 국토해양부에서 국립해양조사원장과 부산지방해양항만청장, 물류항만실장 등을 거치면서 해양 환경에 관한 업무를 담당해 본 경험이 있어 공단의 업무가 친숙함마저 든다.우리 공단은 국민이 신뢰하는 동북아시아 최고의 해양환경 종합관리 전문기관으로 도약해야 한다.작년 11월 부산 동삼동에 해양환경개발교육원을 준공하고, 금년부터 해양오염방지관리인 법정교육, 전문방제교육, 일반인 및 학생 대상 해양환경교육 등 해양환경 전문 인력 양성을 추진 중에 있다.또한 올해는 해양쓰레기 모니터링, 기후변화대응, 수질자동측정망, 해양환경측정망, 정도관리, 해양보호구역 관리사업, 연안습지 기초조사, 보호대상 해양생물 보전사업 등의 신규사업을 수행 중이다.이처럼 공단은 전통적인 해양오염 방제업무뿐만 아니라 해양생태계와 해양경관, 해수수질 관리 등 해양환경 전반을 종합관리 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인정받는 해양환경 종합관리 전문기관으로 성장해야 한다.-포항 앞바다 침몰 유조선 경신호의 잔존유 회수작업이 본격화되는데 어떤 상황인지?◆6월 말이면 실제적으로 잔존유 회수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네덜란드 스미트사의 7천323t급 작업기지선과 1천500t급 예인·앵커선이 지난달 싱가포르를 출발해 20일 포항에 도착하면 본격적인 잔존유 회수작업에 들어간다.현재 포항 구룡포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해 27명의 전문인력이 작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스미트사가 도착하면 침몰해역에 해상작업 기지를 설치하고 7월 말까지 잔존유 회수작업에 돌입할 예정이다.이를 위해 포화잠수 장비(무인잠수정 포함)를 비롯한 잔존유 계측장비, 해저지질·작업환경 조사장비, 해저준설장비, 각종 펌프와 공구류 등을 동원한다. 작업은 포화잠수 장비를 활용해 침몰 선체에 구멍을 뚫어 펌프를 이용해 잔존유를 회수한다. 공단은 만약의 기름 유출의 대비를 위해 방제선 등 5척의 선박을 대기시킬 예정이다.경신호는 1970년에 건조된 노후선박이며 1988년 수심 98m에 침몰 후 23년이 경과돼 선체 부식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나 수중의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다. 현재 경신호에는 벙커C유 509.9㎘와 경유 2.4㎘ 등 총 512.3㎘(약 2560드럼)의 잔존유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23년 전에 침몰한경신호 잔존유 수거작업은 해양오염방지 사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이창형기자 chlee@kbmaeil.com※곽인섭 이사장 프로필◇부산고등학교·부산대 무역학과 졸업, 오하이오주립대 대학원 졸업(경제학 석사), 행정고시 합격(1981년 제25회), 경제기획원 예산실 행정사무관, 국무총리실 행정쇄신위원회 제도개선과장, 해양수산부 해양정책과장, ·총무과장·감사관, 국립해양조사원장, 해양수산부 재정기획관, 부산지방해양수산청장,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토해양부 물류정책관·물류항만실장

2011-06-20

울진 고향 김찬곤 서울 송파구 부구청장

전자정부 전문가로서 한국인 최초로 스톡홀름 챌린지상(세계유일의 전세계 정보화 프로젝트 시상제도)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경북 울진군 기성면이 고향인 김찬곤 서울 송파구 부구청장이다. 김 부구청장은 영일군 청하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경북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과 미국 조지아주립대 행정학 석사, 그리고 늦깍이 유학생활로 미국 뉴저지 주립대 럿거스 대학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구파다.1980년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한 김 부구청장은 서울시 지하철 운영준비반장, 강남구 건설국장, 서울시장 정책비서관, 감사담당관, 시정개혁단장, 디지털미디어시키 추진단장, 정책기획관, 구로구 부구청장, 서울시 인재개발원장, 한강사업본부장을 역임했다.그를 만나 어린시절과 고향에 관한 얘기, 학창시절, 그리고 공직자로서 보람있었던 일 등을 들어봤다.편집자주-어린 시절 고향에서 지낸 추억이 있다면.◆어릴 때 소 먹이는 일을 하기 싫어 꾀부리고 있으면 어머님이 `돈 5원 줄게. 소먹이러 가라`고 했다는 얘기가 일기에 쓰여 있다. 지금과는 화폐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졌구나 실감이 났다. 또 어릴 때 책을 좋아해서 소를 먹일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열심히 읽었다. 주로 동화책이나 위인전을 즐겨읽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김 부구청장은 이런 추억들을 얘기하면서 초등학교 4학년때인 1967년 3월부터 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썼던 일기장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는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이 일기장으로 초등학교에서 상을 받았고, 아이들도 이 일기를 읽어보고는 아빠의 어린시절을 들여다볼 수 있어 매우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일기를 손자까지 가보로 물려 줄 생각이라고 했다.-어릴때 꿈은 무엇이었나.◆초등학교때 문예부에서 글짓기를 즐겨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시인이 꿈이었다. 그러나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눈 끝에 공직자를 꿈꾸게 됐다. 서울대 상대 2학년때부터 행정고시를 준비해서 대학 4학년 때 합격, 공직자의 꿈을 이뤘다.-학창시절은 어떻게 지냈나.◆중학교때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가정형편때문에 어렵게 공부했다. 실제로 경북고등학교에 원서를 내려고 했더니 부모님이 `대구서 하숙시킬 형편이 안된다`고 하시면서 포항에 있는 학교로 진학을 권유했다. 교감선생님께 이 얘기를 했더니 “명문인 경북고등학교에 한명이라도 보내는 게 선생님들의 꿈인 데, 그렇게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책임지고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헤 줄테니 원서를 내라”고 했다. 결국 선생님들의 주선으로 3년 내내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들을 소개한다면.◆고교 동기 가운데 유영학 전 보건복지부 차관, 금감원 권혁세 원장, 청와대에는 김두우 실장, 국회에는 경기도 화성·동탄지역 박보환 의원, 민주당 김부겸의원 등이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들이다.-서울대를 다닐 때는 어떻게 했나.◆서울대학교 입학때도 원서를 낼때 부모님들은 대학등록금을 못내니까 경북대학교에 진학하라고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서울 가면 어떻게든 학교에 다닐 수 있다며 서울대 응시를 권했다. 결국 첫학기 등록금은 부모님이 내주셨고, 1학년 2학기부터는 청하면 고현리 고향분이 독지가로 나서 등록금과 학비를 다 대준 덕분에 학비 걱정을 않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그분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공직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나.◆고시합격후 첫 보직이 서울시청 상정과 산업경제국에서 일했다. 첫 업무가 가락동 농수산물공사를 설립하기 위해 계획하고 토지보상을 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땅 주인들의 문을 두드려 사인을 받는 등 집집다마 다니면서 어렵게 일했던 기억이 난다.-서울시 근무때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1999년 서울시에 우리나라 최초로 각 부서별, 구청별 공무원의 청렴도를 측정하는 지수를 개발한 일이다. 뒤에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이 제도를 채택, 더 큰 보람을 느꼈다. 또 하나는 감사담당관으로 일할 때 세계 최초로 민원 온라인 공개 시스템 개발을 주도한 일이다. 시민이 신청한 인허가 민원처리과정을 실시간으로 어느 공무원이 어떻게 처리하는 지 투명하게 알 수 있게 1999년 서울시홈페이지에 공개해 호평을 받았고, 이후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 제도는 그해 중앙일보 10대 히트 행정에 선정되고, 2000년 정부 공공부분 혁신대회 우수상을 받았다. OECD, UN, 월드 뱅크의 국제세미나에서도 좋은 거버넌스의 우수사례로 소개됐다.-공무원생활을 하다가 46세의 나이로 유학길에 올라 화제가 됐던데.◆공무원 생활을 하는 중 뉴저지에서 열린 미국 행정학회에서 서울시 혁신사례를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뉴저지대 행정학과장을 만나 입학허가와 장학금을 간곡하게 부탁한 끝에 허락을 받아서 미국유학에 오를 수 있었다.-구로구 부구청장으로 근무할 때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국내 최초로 유헬스 케어(U-Healthcare) 시스템을 도입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제도는 동사무소에 간호사를 배치해 첨단장비를 이용해 저소득 주민의 협압, 혈당, 비만, 호흡기 등을 진단하고, 이 정보를 온라인망으로 보건소 의사에게 전달, 건강상태를 분석해 처방을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전송하는 제도다.-30여년의 공직생활 가운데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서울시에서 한강사업본부장을 맡아 토·일요일에도 한강을 둘러보며 열심히 일했는 데, 1년 남짓밖에 근무하지 못해 좀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지금 완공단계에 있는 한강의 인공섬프로젝트도 그 당시 홍수때 사고위험을 우려한 국토해양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으려 하는 것을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수차례의 자문회의와 설계변경 등을 통해 결국 허가를 받아냈던 기억이 난다. 오는 9월에 인공섬이 오픈된다니 공사현장을 지날 때 마다 보람을 느낀다.-공직생활을 하면서 신조가 있다면.◆나는 공무원으로서 국민을 위해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흔히 말하는 `공무원 철밥통`이란 말을 무척 싫어한다. 단단한 각오와 배짱으로 일을 추진하되,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완벽하게 업무를 처리한다는 각오로 일을 해왔다. 평소에 나는 자다가도 업무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메모를 하고 업무에 반영한다. 나는 꿈속에서도 고민할 정도로 업무에 매진하면 해결책이 다 나온다고 믿는다.-송파구청 부구청장으로서 어떻게 일하고 있나.◆내가 발령받아 가는 곳마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왔다고 긴장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요즘은 즐겁고 재미있는 직장을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예를 들어 한달에 한번, `출근하고 싶은 날`을 만든 뒤 내가 여장을 하고 나타나 맵시를 뽐낸 적이 있었다. 직원들이 못알아보고 재미있었다며 즐거워했다. 볼만한 영화가 있으면 직원들에게 영화티켓을 선물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1천400명에 이르는 송파구청 직원들간 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해 `국간 벽 허물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 개국 팀별로 미팅을 주선하고, 식사와 간담회를 열고있다.-송파구청에서 가장 중점추진하고 있는 현안은.◆4년뒤면 아시아에서 최고 높은 빌딩인 잠실롯데 123층 555m짜리 건물이 들어서게 되는 데, 이 건물의 건축허가를 지난해 내가 내줬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에 따라 중국의 관광객이 많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송파구를 서울의 관광특구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해놓고 있다. 이밖에 문정동에 광진구의 동부지청, 지검을 이전해서 법조단지를 만들고, IT·BT단지도 만드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공직자로서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앞으로 스마트한 사회, 정부가 돼야 한다. 나는 행정기관을 전혀 방문하지 않고도 직장과 가정에서 모든 민원처리를 할 수 있도록 편리한 사회를 만드는 것을 꿈꾼다./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11-05-23

爐火純靑, 이 말을 늘 가슴에 새기죠

사회간접자본 첫 외국선사 개방업무 `보람`“고향 의성 생각하며 지원 노력 다 하겠다” 경북 의성출신의 김희국 국토해양부 제2차관은 의성군 금성면 청로동에서 출생했다. 청로초등학교와 의성중학교를 거쳐 경북고교와 경북대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1981년 행정고시 24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부산지방해양항만청 항만물류과장, 건교부 고속철도과장, 공공기관지방이전추진단 기획국장,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 4대강살리기 기획단장, 4대강 살리기추진본부 부본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토해양부 제2차관으로 일하고 있다. 얼마전 공직생활 만 30년을 맞은 김 차관을 만나 고향인 의성 이야기를 비롯, 친구들, 공직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봤다.편집자주사회 발전 시키고 싶어… 공무원 꿈키워시대마다 중요한 SOC사업 맡아 `자부심`-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부모님들은 상고에 진학해 은행원이나 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공무원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부모가 농사지으면서 너무 힘들게 사는 것이 가슴아팠고, 대부분이 그렇게 살지만 우리 사회를 발전시켜야 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때 대구시민회관에서 당시 서울대 한완상 교수의 강연을 들었는 데, 주제가 소외였다. 사회가 발전해나가면서 농민이나 어민, 근로자가 계속 소외된다. 그래서 사회의 통합발전을 위해서는 정치나 행정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강연을 계기로 공무원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는 부모님들은 내무부나 농림부에 가기를 바랬으나, 일본의 메이지유신사를 읽고, 봉건국가에서 산업국가로 갈 때 해운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는 걸 알게됐다. 그래서 해운항만쪽을 택했으며, 그 이후 1998년도 초대 고속철도 과장을 했고, 노무현정부에서는 혁신도시 초대국장을 했고, MB정부 들어와서는 4대강 사업을 진두지휘해왔다. 시대마다 중요한 SOC사업분야를 맡아 일해와 자부심을 느낀다.-고향인 의성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분교를 다녔기 때문에 6년 내내 1개반에 다녔는 데, 중학교에 가니 5개반이 돼 신기하게 생각했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쳐야 했는 데, 고향 마을에는 전기가 안 들어왔다. 그래서 밤에 공부할 때는 초를 하나씩 들고가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또 서울에 가면 집집마다 탑을 세워 텔레비전을 본다는 얘기를 전해듣고는 `집집마다 어떻게 돌로 탑을 세우나`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새벽에 기차타고 서울 청량리역으로 들어서는 데, 온 시가지가 전기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골소년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웃음)-학창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나 선후배가 있다면.▲중학교 동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친구는 씨름선수로 유명한 이준희 감독이다. 현재 도리원으로도 불리는 의성군 봉양면은 씨름선수가 많이 나는 고장이었는 데, 초기 씨름계에서 많은 역할을 했던 김태성씨가 당시 체육선생님이었고, 정해걸 국회의원이 당시 사회선생님이었다. 의성중학교 졸업후 재수해서 경북고에 들어갔다. 700여명을 뽑았는 데, 서울·부산이 평준화되면서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래서 동문들이 사법고시, 행정고시 등으로 많이 진출했다. 현직에 있는 선후배들을 꼽아보면 56회로는 이현동 국세청장, 김명식 청와대 인사비서관, 57회는 류성걸 기획재정부 차관, 58회에 제가 있고, 59회에 농림수산부 김재수 차관 등이 고위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국토해양부 제2차관이 맡은 소관업무는.▲도로, 철도, 해운항만, 공항 등 네개의 사회간접자본분야와 교통정책·물류정책·해양정책 등 7개 분야를 총괄하고 있다. 1차관은 토지, 주택, 수자원, 그리고 일반적 기획관리업무를 맡게 된다.-얼마전 동남권 신공항이 백지화됐는 데 어떻게 생각하나.▲우답이 될지 모르지만 대구·경북지역을 위해서 중요한 요소는 포항·울산의 예를 들고싶다. 대구가 성장이나 발전을 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생산기반시설이 취약하고, 한마디로 돈이 없는 도시다. 그것이 우선돼야 한다. 많은 분들이 그럴듯한 국제공항이 있어야 외국인 투자유치도 되고, 산업화 촉진이 된다고 하는 데, 그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돼야 하는 것이 대구지역 SOC확충이다. 산업공단이나 기지 등 제조업체들이 들어와서 일자리가 생기고 소득이 창출되는 일이 중요하다.-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지적이 있는 게 사실이다.▲공항을 결정하기 어려웠던 이유로 기본적으로 공항 수요, 공사비, 환경적 문제 같은 팩트들이 필요하다. 인천공항의 경우 수요는 걱정할 필요없었다. 환경적 문제도 영종도가 수심 1~5미터 정도밖에 안된다. 백지화에 대해서는 아쉽게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고속도로, 산업단지의 원활한 조성, 기타 제조업들이 들어갈 수 있는 대구·경북지역의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대구·경북지역에서 해운항만청의 역할은 어떤 것이 있나.▲경북도와 관련된 해운항만은 포항이 가장 중요하다. 포항항만의 최우선 목적은 포항제철소라는 산업단지를 지원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으로 요즘에는 신항만을 건설해 컨테이너도 처리하고, 러시아 극동항로에 중요한 역할을 하려는 노력,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를 연결하는 베이스기지로 만드는 것이다. 강구항이나 울진항도 어항으로서 지역산업화의 기반시설이 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게 많다. 최근에도 임광원 울진군수가 다녀갔는 데, 산과 바다·온천을 엮어서 관광산업을 촉진하는 게 유일한 울진의 성장전략이라고 강조했다.-해운항만청에 근무하면서 보람있었던 일이 있다면.▲1992년까지 한국의 컨테이너 항만계획을 수립하고, 운영체제 정비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외국 선사에 대해서는 독점적인 전용 터미널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해왔으나 그때 개방했다. 개방화시대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국제기준을 이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국제화 추세를 거역하고는 잘 살 수 없고, 살기가 어렵다. 이같은 자연법칙에 가까운 논리를 더이상 애국심으로 커버하기는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우리나라 사회간접자본중 가장 먼저 외국선사에 대해 개방업무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좌우명이 있다면.▲(사무실에 걸린 액자를 가리키면서)저기에 노화순청(火純靑·지극함이 다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지)이라고 쓰여 있는데, 공무원 생활을 하며 전문성을 확보해서 정책적 실수를 줄여야 한다는 뜻으로 저 말을 늘 가슴에 새긴다. 10년 20년 경험을 축적하면서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시행착오 주체도 불분명하고, 국민세금 낭비가 너무 많았다고 생각했다. 노화순청이란 말은 등소평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중국을 시장자본주의로 전환시키면서 최고의 삶의 지표를 저걸로 삼고 살았다고 해서 유명한 말이다. 국가가 아주 유능한 리더들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알고, 약 한달전 공무원 생활 30주년을 맞아 기념으로 저 액자를 걸었다.-국토해양부의 최근 현안은 무엇인가.▲가장 고심에 싸인 문제는 KTX 사고가 자꾸 나서 원인조사중에 있다. 국민들에게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 송구스러운데, 차량 유지보수문제인 지, 공단조직 문제인 지, 아니면 전기문제인지 조사를 하고 있다. 조사결과가 나오는 대로 조치를 해서 안전한 철도가 되도록 애쓰겠다. 그 다음 현안은 투자배분문제다. 도로분야의 경우 각 지역별로 발달이 안되는 것은 비용편익분석(B/C)이 낮기 때문인 데, 그러면 언제까지나 안 해줄 것이냐가 의문이다. SOC투자를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최선이냐를 고민하고 있다. 각 지역에 비슷비슷하게 균형있게 놔주는 것이 옳은 지, 그렇게 하면 획일적이니까 산업단지는 특정지역에 넣되 결과는 비슷하게 공유하는 다른 시스템으로 가야될 지를 고민하고 있다.-고향 분들에게 인사말을 한다면.▲대구·경북지역이 인구도 줄고,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고, 특히 경북북부지방은 낙후돼 있어 각 의원들이나 지자체 장들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고향을 생각하며 중앙에서 지원을 최대한 열심히 하겠다./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11-05-06

“진정한 지방 도우미로 중앙과 가교역할 하겠다”

포항 출신 홍철 지역발전위원장 인 터 뷰 경북 포항 출신의 홍철(66·사진) 대구·경북연구원장이 5개월째 공석이던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장으로 지난 5일 취임했다.홍철 신임 지역발전위원장은 서울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과 대통령 경제비서관, 국토개발연구원장, 건설교통부 차관, 인천대 총장 등을 거쳐 2004년부터 7년간 대구·경북연구원장을 역임했다.지역공약 관련 갈등으로 정국이 혼미한 이때 지역균형발전정책을 기획·입안하고, 추진해 나갈 지역발전위원회의 역할이 크게 부각될 수 있는 만큼 홍철 지역발전위원장의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포부와 최근 국책사업 갈등양상 등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편집자 주혁신도시 제대로 만들려면 시간 걸려지역간의 협의 통해 상생시대 열어야현실적 특성살린 차별적인 전략 필지난 7일 오전10시 지역발전위원회에서 열린 홍철 지역발전위원장의 인터뷰에서 홍 위원장은 “지역특화 발전 문제에 대해서 대통령을 위시해 정책결정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 일을 하려고 여기(지역발전위원장)에 왔다”고 못박고 “지방의 어려움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지역 나름대로의 발전방안을 지역과 상의해 전달하고 지방이 활력을 얻도록 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강조했다.또 홍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신공항 백지화 이후 지역발전 정책을 강조하고 있지만 여전히 지역발전정책은 뒷전인 상태인 것 같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민국이 수도권 만 있는 게 아니다. 수도권 만 집중해서는 국가발전이 될 수 없다. 지방도 잘 살아야 한다”면서 “최근에 이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지방발전에 대한 신념을 밝혔다다음은 홍 위원장과의 일문일답이다.- 2기 지역발전위원회를 맡게 된 소감은.△형식과 겉치레보다는 내용과 내실을 챙기겠다. 실질적으로 지방에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겠다. 진정한 `지방도우미`로서 중앙과 지방의 가교역할을 하겠다.- 지역위원회의 현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지방의 제반실정이 열악하다. 그런데 중앙에 있다보면 지방이 안 보인다. 지방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일시적으로 만 관심을 갖는다. 지방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공동대응을 하지 않고서는 지방문제를 풀기 어렵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위원회 구성은 언제쯤 마무리되나.△민간위원은 위원장을 포함해 19명이다. 청와대에서 인사검증 막바지 단계인 것으로 알고 있다. 늦어도 다음주 초에는 인선이 마무리 될 것이다. 지역안배 차원에서 민간위원은 권역별로 동일한 숫자로 구성될 예정이다.- 신공항 백지화와 관련해 개인적인 견해는 무엇인가.△정부가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정부 조직에 있는 사람이 개인 의견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후유증을 가급적 빨리 정리하고, 지역과 국가발전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LH본사 이전문제는 상반기 중에 매듭지을 예정인가.△정부 내에서도 이 문제는 질질 끌지 말자는 게 공통된 분위기다. 총리가 대정부 질문에서 밝혔듯이 신공항 보상차원에서 LH본사 이전문제가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신공항 백지화와 LH본사 이전은 별개의 문제다. 현재 국토해양부가 LH본사 이전과 관련한 시안을 만들고 있다. 시안이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LH본사 이전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지역발전위원회는 그 시안을 심의하는 기구다.- 시안 작성 과정에서 국토해양부와 협의를 한 적이 있나.△아직까지 국토해양부와 협의한 바는 없다. 국토부에서 협의요구가 올 지 모르겠지만 빠른 정책결정을 위해서는 옆에서 훈수두는 게 좋은 것 같지는 않다.- 혁신도시의 경우 2012년까지 공공기관 이전이 완료돼야 하는데 진척 상황이 지지부진하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이 문제가 불거질 수 있는데 국토부와 협의해 속도를 내야 하지 않나.△혁신도시는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해서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역발전을 이끌겠다는 것이다. 전국의 10개 혁신도시는 허허벌판에 신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서울에 인접한 분당을 건설하는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아파트만 있는 도시를 건설할 수는 없지 않나. 이전 기관 직원들이 정주할 수 있는 도시다운 도시를 만들어야 하는데 최소한 20~30년 걸린다고 본다. 빨리 이전하겠다고 밀어붙였다가는 인근도시의 공동화를 초래할 수 있다. 현 정부에서 혁신도시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만큼 국토부와 협의해 실천가능한 방안을 마련하겠다.- 지역에서는 국비확보가 어렵다보니 지역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지역사업이 수 천가지다. 돈이 한정되어 있는 예산당국의 입장에서는 모든 지역사업을 지원할 수 없다. 따라서 예산확보를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지역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할 사업을 우선적으로 선정해야 한다. `무조건 내 것 부터`라는 지역이기주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지역 간 협의를 해야 한다. 대구와 경북의 경우 2006년 3월에 양 광역단체간 경제통합 각서를 체결했다.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로 힘을 합쳐서 우선순위를 정해 중앙정부에 요구하니까 훨씬 성과가 좋았다. 기초생활권도 해당 시·군이 머리를 맞대면 작은 예산으로도 효과를 낼 수 있는 일들이 많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방발전정책의 핵심인 `5+2 광역경제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현 정부에서는 `5+2`가 기본축이지만 길게 내다보면 `2+1 광역경제권`, 통일 이후에는 `3+1 광역경제권`이 될 것이다. `2+1 광역경제권`은 수도권, 충청권, 강원도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중부경제권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미 그런 흐름을 보이고 있다. 영·호남은 아직 초보단계이지만 남부경제권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제주도는 천혜의 관광지인 만큼 `동양의 하와이`로 조성해야 한다. 광역경제권은 세계적 추세다. 일본 혼슈의 경우 도쿄권, 나고야권, 오사카권 등 3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다보니 최근 하나로 합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현 정부의 임기가 2년도 채 남지 않은 만큼 `5+2 광역경제권` 개발계획이 흐지부지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지난 2008년에 발표된 `5+2 광역경제권`의 핵심은 30대 선도프로젝트, 광역권 20개 선도산업 육성이다. 이 개발계획과 연계가 되는 게 4대강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낙동강은 대경권·동남권, 영산강은 호남권 개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4대강 개발사업이 지류지천 정비까지 마무리되면 `5+2 광역경제권` 개발도 한층 탄력을 받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5+2 광역경제권`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남은 기간동안 `5+2 광역경제권`이 정착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지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규제철폐가 필요하다는 여론도 있다. 남해안의 경우 한려해상국립공원 규제로 인해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규제는 양면성이 있다.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국토관리라는 측면에서 규제가 꼭 필요한 부분도 있다. 남해안의 경우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당장 공장이 들어오면 지역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멀리 본다면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는 게 더 부가가치가 높다. 한려수도를 중심으로 여수와 통영을 양쪽 포스트로 두고, 남해안 양쪽 끝인 부산과 목포를 잇는 남해안 벨트개발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수도권 일괄규제로 인해 경기지역 일부는 더 낙후되고 있다. 수도권 규제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수도권 규제로 인해 경기 동북부 지역은 피해를 입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 정부들어 수도권 규제가 거의 90% 이상 풀렸다. 수도권 규제가 풀리다 보니 충청권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수도권 규제가 충청권 발전에 도움이 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수도권만 살자고 규제를 푸는 것은 안 된다. 지방도 살 수 있는 정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과학벨트·LH공사 이전 등 국책사업을 놓고 지역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국책사업을 유치하기 위해 지역 간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지방이 못살기 때문이다. 국책사업을 유치하면 천지개벽한다고 생각하는 데 이는 잘못된 생이다. 그것보다는 지방현실에 맞는 산업정책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광주시의 경우 전기자동차와 광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 타 지역과 차별화하는 데 성공했다./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11-04-11

`先行-後言`으로 이끈다면 통하겠죠

김정기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 경북 영천이 고향으로 알려진 김정기(55)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은 사실 대구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구 종로초등학교와 대구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 사회교육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이후 미국 뉴욕대학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행정 석사와 한양대에서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마쳤다.공직은 대학원 재학때 행정고시에 합격, 문교부 사무관으로 출발해 교육부 총무과장, 경북도교육청 부교육감, 국제교육정보화기획관, 교육부 평생학습국장, 평생직업교육지원국장 등을 거쳐 선문대 부총장으로 있다가 청와대 교육비서관으로 근무했으며, 지난해 9월 3년 임기의 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 부임했다.김 이사장을 만나 고향에 대한 추억과 교직원공제회의 현안 등에 대해 들었다. 편집자주법관 꿈꾸던 소년 행시에 합격30년간 교육 공직자로 `열과 성`“교육정보화 계획 입안 가장 보람”인터뷰를 위해 김정기 이사장 집무실에 들어서자 책상 맞은편 정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친필휘호가 눈에 들어왔다. `교직안정, 대통령 박정희 1971년 7월1일`이라고 쓰여 있었다.김 이사장은 “교직원 공제회가 출범한 해에 쓰여진 글씨로 부산 어느 고서점에서 발견됐는 데, 생활안정과 복리증진의 교직원 공제회 정신과 맞아떨어지는 휘호라고 생각해 집무실에 걸어두라고 했다”고 설명했다.박 전 대통령의 글씨는 오랜 세월을 지나며 다소 색이 바래고, 얼룩졌지만 아직도 서체에서는 힘이 넘쳐보였고, 교원들의 복지증진에 대한 김 이사장의 결의도 한층 굳게 느껴졌다.지난해 교직원공제회 수장 맡아`윤리경영` 원칙으로 창의적 수행“고향인재 아낌없이 지원하고파”-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어릴 때는 법관이나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30년 교육부 공직자 생활을 마감하고 보니,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고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직장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어릴 적 희망과 궤적이 비슷한 생활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향에서 지낼 때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나는 사실 태어 난 곳도, 유년시절과 초·중·고등학교를 마친 곳도 모두 대구다. 그러나 지금도 고향을 물으면 경북 영천이라고 말한다. 백부님이 고향을 지켰고 아버님이 대구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영천에서는 살지는 않았지만, 매년 정월 초하루 제사를 지내거나 여름방학이나 시월 집안 묘사에는 늘 아버님을 따라 영천 청통면 원촌동 백부님 댁에서 사촌들과 같이 뛰어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또 은혜사 본당 마당과 운부암, 백흥암에 들러 사촌들과 놀았던 일들도 즐거운 유년시절의 추억으로 각인돼있다.-중학교와 고교때 남다른 취미활동이나 특기가 있었나. 있다면 어떤 것인가.◆고등학교때 농구를 좋아해 주위가 어두워져 농구골대의 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친구들과 농구를 즐겼던 기억이 난다. 또 고등학교 재학때 청심학술토론회라는 서클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열정과 순수성을 가진 친구들이 모여서 열을 올리며 학술토론을 벌였던 일이 새삼스럽다. 당시 서클 선배나 동료 후배로는 배인준 동아일보 주필, 곽성문 전 국회의원, 장병수 롯데 홍보이사, 이재용 전 환경부장관, 엄동섭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원장 등이 있다.-학교 졸업후 공직에 입문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서울대 1학년때 교양과정부에 소속돼 인문, 사회, 교육계열이 함께 공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학문계열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고 교유를 하게 됐다.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같이 지내던 친구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등 성과를 내는 것을 보고 경쟁의식이 발동했다. 교직보다 더 넓은 분야의 일을 해보고 싶기도 해서 행정고시에 도전하게 됐다. 결국 대학원 1학년때 합격해 공직에 발을 들여 놓게 됐다.-교육부에 근무할 때 보람있었던 일을 소개한다면.◆교육부에 근무할 때 교직발전종합대책을 세워 연구휴직제 등을 만들어서 시행한 일, 정보화기획관으로 오랫동안 하면서 초·중·등 교육정보화 5개년계획, 대학정보화 5개년계획 등을 입안했던 일이 보람 있었다. 또 갈등은 있었지만 로스쿨도 내가 주도했는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경남을 하나 더 주라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김신일 교육부총리가 난감해했지만 “지금 흔들면 다 무너집니다”하며 버텼다. 또 하나 교육정보화시스템인 나이스시스템을 계획하고, 구축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그 뒤 전교조가 이를 문제삼아 다소 시끄럽긴 했지만 공직자로서 보람있었던 순간들이었다.-청와대 교육비서관으로 재직했는데,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지난 2008년 촛불사태 이후 제 2기 청와대 비서진으로 정진곤 한양대 교수가 교육문화수석으로 임명되자 교육부를 잘 알고 교육정책에 대해 보좌할 비서관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당시 선문대 부총장으로 있던 내가 추천돼 비서관으로 들어가게됐다.-평소 생활할 때 좌우명이 있다면.◆행정고시 합격후 수습할 때 일이다. 경제부처 2개월 비경제부처 2개월 도청·군청 등도 포함해서 1년정도 순환근무를 하게 되는데, 나는 경산군에 근무했다. 당시 경북도 기획관이 고등학교 선배였는데, 한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있다. 그 선배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잊지마라`고 했다. 그때는 웃어넘겼는 데, 공직생활을 해보니까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아 좌우명으로 삼고있다. 집에서는 `상경하애(上敬下愛)`를 가훈으로 삼고있다.-한국교직원공제회를 소개한다면.◆한국교직원공제회는 모든 교직원들이 재직 중에는 물론 퇴직 후에도 교직의 보람과 생활의 풍요함을 누릴 수 있도록 지난 1971년 특별법으로 설립된 교직원복지기관이다. 설립 당시 회원수 7만명, 자산 13억원에 불과했던 공제회는 이제는 회원수 61만명, 자산 18조원, 그리고 9개의 산하사업체를 보유한 국민기업으로 크게 성장했다.-교직원공제회의 현안이 있다면 무엇인가.◆무엇보다 금융사업 및 개발사업 부문의 수익 극대화가 최대 현안이다.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 투자를 비롯해, 인천신공항고속도로,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등 SOC 사업, 대규모 부동산 사업, 해외투자 사업 등 투자선 확대를 통해 장기 안정적인 수익원 마련에 주력하고 있다. 올해는 총 투자자산을 12조6천억원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금융사업부문에 9조원, 개발사업부문에 3조6천억원을 운용할 계획이다. 내년 상반기 중 총 자산규모가 2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남다른 각오나 감회가 있다면.◆지난해 9월 취임하면서 `윤리경영`을 가장 중요한 경영원칙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윤리경영을 바탕으로 회원들과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기업,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공제회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해 나갈 생각이다. 옛 성현의 말 가운데 `선행기언(先行其言) 이후종지(而後從之)`이란 말이 있다. 바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먼저 실천한 후에 그것을 말하라`는 뜻인데, 임기 동안 이 경구를 마음에 깊이 새겨 이사장으로서의 직책을 창의적으로 수행해 나갈 생각이다.-이사장으로서 가장 중점 추진하고 있는 현안은 무엇인가.◆창립 40주년을 계기로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확고한 비전, 미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갈 새로운 가치,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도전적인 경영전략을 세우고 추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 3월1일부로 조직체계를 크게 바꾸고, 창사 이래 최대 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조직개편의 핵심은 크게 세가지다. △회원복지 기능의 강화 △미래전략실의 신설 △해외 투자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췄다.-이사장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취임 때 약속한 윤리경영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일이다. 윤리경영, 준법경영이라는 굳건한 토대하에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통해 60만 교직원들의 생활안정을 확고하게 책임지고 격조높은 생활, 문화복지서비스의 수준을 크게 끌어 올리는 일에 매진할 생각이다.-고향사람들에게 인사말을 한다면.◆30여년간의 교육부 공직생활 중에 바쁘다는 핑계로 고향을 자주 방문하지 못했고 고향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다. 이제부터라도 고향발전을 위해, 특히 고향 출신 인재들이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돕는데 일조하겠다. 영천 출신 재경 향우들과 조그만 장학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재경 영천학사에도 자주 찾아가 인생의 멘토로서 학생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더 고민해 볼 작정이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11-04-08

서울 노원을 안동출신 권영진 국회의원

경북 안동출신의 권영진(서울 노원을)의원은 안동시 남선면의 60호 남짓되는 산골짜기인 양짓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안동서 나온 그는 대구 청구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고려대 대학원에 다닐 때는 총학생회장도 지냈다. 현재 한나라당 초선의원들의 모임인 민본21 회원으로서 의정활동에 열심인 권 의원을 만나 그가 꿈꿔 온 것과 그가 꿈꾸는 것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8년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어릴 때 조그만 마을에서 자라다 보니 나이가 1~2살 많은 동네 형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니까 갈이 놀던 친구들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어디에 갔나하고 찾아보니 모두 학교에 갔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냥 학교에 가서 같이 다녔습니다. 그때 학교는 천막을 치고 학생을 가르쳤는 데, 다른 친구들은 출석을 부르고 저만 출석을 안불러주는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졸라서 출석부에 이름을 올려달라고 통사정해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나마 2학년 올라갈 때는 어리다고 진학도 안됐습니다. 그래서 1학년을 2번 다녔고, 5학년때는 안동시내로 전학을 갔는 데, 키도 작고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못받아주겠다고 해 다시 4학년으로 낮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8년 다녔습니다. 문제는 그 뒤인데, 중학교 다닐 때 본의아니게 선배들에게 많이 혼났습니다. 학교 교문앞에 서 있는 선도역할하는 형들 가운데 초등학교 친구들이 많았기에 “○○야!”하고 이름 부르다가 혼났습니다. 그랬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납니다. -청구고등학교에 다닐 때 재미있는 얘기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청구고등학교가 축구로 유명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청구고를 물어보니 중앙상고를 지나서 언덕위에 있는 학교라기에 찾아갔는 데,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이쪽 축구골대와 맞은 편 골대 사이로 모래 먼지가 휘리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처음에는 `뭐 이런 학교를 다녀야 하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청구고 출신 축구선수는 유명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변병주, 박경훈, 백종철 등이 유명하죠. -축구로 유명한 학교인 만큼 축구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고교 2학년때 가을 전국대회때 청구고가 결승전에 진출했는 데, 선생님께 응원을 보내달라고 졸랐는 데, 허락을 안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 하숙비를 몽땅 털어 친구들과 함께 5명이 집단으로 무단결석을 하고 응원을 갔습니다. 열심히 응원을 했는 데도 지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시무룩하게 학교에 갔는 데, 교감선생님이 교문을 지키고 계셨어요. 교무실로 잡혀가 내내 벌을 서다가 마지막에는 `애교심이 가상하다`는 이유로 용서를 받았던 게 기억납니다. 그 다음해에는 이게 계기가 됐는 지는 몰라도 전국대회 결승전에 전교생이 응원을 갔던 것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통일원 통일정책 보좌관으로 근무했는 데, 어떤 계기로 들어가게 됐습니까. ▲저는 80학번 민주화운동 세대였습니다. 그래서 공부보다 데모를 더 많이 했죠. 저는 그때 우리나라가 분단이 된 상태에서는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한과 관련한 공부를 했습니다. 석사와 박사학위 논문도 북한과 통일문제가 주제였는 데, 1990년 석사학위 끝날 무렵 재야통일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도권 통일운동으로 궤도를 바꿨습니다. 그뒤 통일원 공채시험을 쳐 5급 사무관으로 6년 7개월 근무했는 데, 통일문제는 관료적 합리성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997년 2월 통일원에서 사표를 내고 그만뒀습니다. 그때 저는 “통일은 의지만으로는 안되지만 언젠가는 된다. 그러나 통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통일이 돼야 하며, 통일 이후가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즉 남북이 함께 잘 사는 통일이 중요하고, 정작 통일사업보다 나라를 선진강국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는 바로 교육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로 돌아가서 박사학위도 하고, 교수생활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판단에도 불국하고 정치에 뛰어든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제 유전자 또는 DNA위에 정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1999년에 이회창 총재를 도와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보좌역으로 일했습니다. 선진강국이 되려면 리더쉽이 중요하고, 민주화 이후 지도자는 국가경영자적 리더쉽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이회창 총재를 돕기로 했습니다. 정치권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 총재가 대통령으로서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총재는 제게 “젊은 부대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했고, 저도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나라당에 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때입니다. 저는 소장개혁 그룹으로 `미래연대`를 만들었습니다. 2000년 총선때, 저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미래연대를 통해 국회에 젊은 피가 수혈됐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원희룡 의원이 당시 공동대표를 맡았고, 총선을 통해 멤버가운데 무려 14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2년뒤인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해 패배하고 말았고, 이 총재를 중심으로 한 꿈과 비전 역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대학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고민이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1월 다음해에 있는 2004년 총선에 출마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지역구는 서울 노원구 지역을 선택했고, 2003년 8월 그 지역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역구를 선택할 때 무척 고심이 됐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학교친구들이 많은 대구가 아니라 서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은 그 당시 대구에 있는 동기들을 두루 만났습니다. 한 50명쯤 될 겁니다. “대구에서 나와라, 같이 정치하자”는 친구도 있었지만, “대구에서는 큰 정치가 어렵다. 큰 물에서 정치를 해라”고 충고해 주는 친구가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후자의 충고를 따랐습니다. 정치판 자체가 편가르기나 친구나 친인척과 사이가 소원해 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고향은 고향대로 두고, 정치는 서울에서, 큰 물에서 하기로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다만 노원구를 선택한 것은 노원구 중계동이 서울 다른 지역보다도 교육열도 높은 데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선대위원장을 했던 임채정 전 국회의장이 출마한다고 해 정치거물인 임 전 의장에게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출마를 결심한 이상 빨리 유권자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해 이사도 서둘러 했습니다. 강북은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불모지이지만 깃발을 세워보겠다는 각오도 있었습니다.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셨죠. -정치입문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던 셈인데, 낙선때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당시 낙선은 제 정치인생에서 큰 자양분이 됐습니다. 겨우 8개월 선거를 준비해 당선됐다면 유권자 한분 한분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1.9% 표차로 낙선했는 데, 투표 3일전까지는 이기는 것으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 민주당 정동영 대표의 노인폄하 발언 여파가 역작용을 일으켜 상대후보의 표를 응집시키는 바람에 제가 떨어진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저는 그때 `약자를 위한 정치`와 `나눔과 배려의 정치`를 펴겠다고 강조해왔기에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상대방에게 몰표를 몰아주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 까`. 저는 그때 어려운 분들을 마음으로 위하는 정치인이란 신뢰를 받지 못했다는 뼈저린 반성을 했습니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치인이 되려면 지역에 뿌리를 깊이 내린 정치인이 돼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4년동안 원외위원장으로서 저는 열심히 뛰었습니다. 2006년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서 장애인 단체로부터 감사패도 받았습니다. (권 의원은 이때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장애인 콜택시를 당시 120대에서 280대로 획기적으로 늘렸고, 바다구경조차 어려운 장애인을 위해 해변캠프를 조성하는 등 장애인 복지정책에 힘썼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시정을 평가한다면. ▲오세훈 시장과는 고대 1년 선후배 사이인데다 미래연대 멤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울시장과 정무부시장으로 취임한 뒤 “여러 사람이 반대하더라도 지금부터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장기계획으로 지금 당장 시작하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래서 문화, 디자인,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계획은 모두 8~10년 계획입니다. 임기 4년 막바지인 오세훈 시장도 그래서 한 번 더 서울시장에 출마해 프로젝트를 완성할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초창기에는 시민들이 `디자인 서울`이란 화두에도 공감하지 않았는 데, 이제는 디자인 코리아로 발전했습니다. 잘 시작했다고 봅니다. 또 주거정책과 관련해서는 집이란 곳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란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쉬프트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선풍적인 호응을 받고 있죠. 후분양제도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장애인 정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가 있다면. ▲노원구가 서울에서 장애인이 가장 많은 지역구입니다. 그래서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히 관심을 갖게됐습니다. 특히 장애인들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도 작은 것에 고마워하고, 인간적으로 더 따뜻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배구협회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더구나 장애는 후천적인 것이 90%인 만큼 누구나 잠재적인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 정책은 비장애인의 보험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끝으로 권 의원의 정치철학은 어떤 것입니까. ▲자유민주주의에서 좋은 공동체는 승자로서 앞서가는 사람은 세금내고 공정한 질서를 지키는 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패자나 낙오자에 대해서는 나눔과 배려로 지원을 해 줘야 합니다. 이런게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그런데서 의미와 보람과 사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민본21이란 초선의원 모임을 통해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정책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느쪽이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09-10-05

에이스리서치 예천출신 조재목 대표

경북 예천출신의 조재목(49) 에이스리서치 대표는 대구·경북지역에서 정치지망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사다. 대구·경북지역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정치전문 여론조사기관으로는 손가락에 꼽는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조사연구방법론에 관한 한 국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만큼 치열한 공부를 통해 정치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자부심으로 대구에 여론조사전문기관 에이스리서치를 세운 지 벌써 15년. 지난 2003년에는 서울에, 2005년에는 중국 북경에 별도 법인을 세웠다. 주로 외국계 기업들이 선점하고 있는 여론조사업계에서 꿇리지 않고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에이스리서치는 앞으로 수요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기업 마케팅 분야를 더욱 키우려는 의욕에 가득 차 있다. 조재목 대표를 최근 새로 단장한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나 회사 설립을 전후한 뒷이야기, 선거여론조사를 둘러싼 에피소드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대구·경북 여론조사 전문기관으로서 서울 사무실 확장·이전이 반갑습니다. ▲저는 1994년 대구에서 처음 에이스리서치를 설립해 15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2003년 1월 대구와는 별도로 서울 에이스리서치를 설립했죠. 이는 대구에서 성장한 기업이 돈을 번 뒤 서울로 옮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나름의 애향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국법인은 2005년 북경에 사무소 개념으로 설립했는데, 앞으로 중국이 세계 경제를 주도할 것이란 전망이고 보면 중국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봅니다. 에이스리서치에 근무하는 상근 직원은 15명이다. 그렇지만 비정규 계약직은 100여명을 넘어선다. 전화 여론조사나 면접조사나 모두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채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울 사무실에만 전화부스가 60석 있고, 대구 사무실은 서울보다 더 커서 80석의 전화여론조사 부스가 상시운영되고 있다. 연간 매출은 15억~20억원 정도라고 했다. “일 년씩 계약하는 마케팅 조사부문보다는 단발적인 정치여론조사나 사회여론조사에 치중해 왔기에 매출규모가 크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조 대표는 “선거가 있는 해는 매출규모가 크게 변하니까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리서치업계에서 에이스리서치의 위상은 어느 정도입니까. ▲리서치업계는 기본적으로 자본력이 뒷받침된 외국계 업체가 톱을 달립니다. TNS나 닐슨이 1위와 2위를 다툽니다. 이들 업체들은 주로 기업마케팅을 다루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기업비밀도 많이 다루니까, 일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지도 않구요. 토종브랜드로는 한국리서치나 갤럽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에이스리서치는 기업마케팅 부문보다 정치나 정책분야 조사를 많이 하다 보니 매출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래도 전국에서 15위권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 대표가 자본력이 뒷받침돼야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경쟁이 치열한 리서치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데는 사연이 있었다. 조 대표는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때 대구로 이사 와서 남산초등학교, 사대부속중학교, 영남고교를 거쳐 1988년 계명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이어 1990년 계명대 대학원 심리학과 석사를 취득한 뒤 박사학위를 위해 곧바로 프린스턴 대학 유학을 가려 했다. 그런데 그 해에 계명대에 처음 심리학과 박사과정이 생겼다. 학교에서는 “박사과정 1회 졸업생은 특혜가 있으니, 유학은 안 가도 교수가 될 수 있다”고 설득을 했고, 그 말에 대학교수가 꿈이었던 조 대표는 그냥 눌러앉아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비사특별장학생으로 전면장학금까지 받았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지도교수와 사이가 벌어져 학업에 열중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조 대표는 1994년 학교를 나와서 에이스리서치를 설립해 리서치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정치 여론조사를 처음 한 고객은 누구였습니까. ▲최초 고객은 대학 다닐 때 문희갑 전 시장이 무소속으로 대구시장에 출마했을 때로 기억합니다. 정치여론조사로는 그때가 처음이었고, 회사를 차린 후 본격적으로 한 것은 얼마 전 돌아가신 이의근 전 경북도지사 선거 때입니다. -정치 여론조사를 하는 동안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데요. ▲박근혜 전 대표가 대구 달성군에 자리 잡게 된 데는 제가 일조를 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당초 박 전 대표는 경북지역 보궐선거에서 문경·예천에 내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구 달성군에 상대후보가 당시 실세였던 엄삼탁 전 병무청장이 내정되면서 적수를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당시 대구 지부장이었던 강재섭 전 대표가 이를 두고 고민하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문경·예천에 내정돼 있는 박근혜 전 대표를 국민적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만큼 달성에 냅시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알겠지만, 엄삼탁 후보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후보로 생각됩니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강 전 대표가 이를 허락했고, 여론조사를 해 보니 과연 박 전 대표가 이기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표는 대구 달성군, 문경·예천에는 당시 문경전문대 학장인 신영국씨가 공천됐고, 의성에는 정창화씨가 공천돼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보궐선거에서 모두 이기는 결과를 연출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해 있었던 18대 총선도 친박연대와 친박무소속 후보의 출현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어땠습니까. ▲당시 수도권과 대구·경북지역 총선의 선거결과는 모두 예측 가능했습니다. 차이가 크게 나타난 곳은 박근혜 효과가 더 나온 지역이었다는 분석입니다. 처음 친박연대나 친박무소속 연대후보들은 그리 선전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는 투표 7일 전까지도 그런 양상을 보이다가 막판 3,4일을 남겨두고 여론조사결과가 뒤집어진 겁니다. 그래서 일반국민들은 막판 여론조사 결과를 알 수 없으니, 뒤집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여론조사를 했던 후보들은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정치여론조사 가운데 어떤 선거가 여론조사 결과와 잘 들어맞는지요. ▲여론조사로 선거결과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대통령선거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경선결과나 본선 선거결과 모두 1% 이내 오차로 맞췄으니까요. 그다음이 광역자치단체장, 그리고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입니다. 제일 어려운 게 국회의원 총선입니다. 총선의 경우 그때 어떤 바람이 부느냐에 따라 막판 뒤집기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궐선거는 결과 예측이 매우 쉽습니다. -그러면 지난 4월 경주지역 재보선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여론조사가 상당히 빗나가는 바람에 말들이 많았는데요. ▲당시 경주지역 재보선 때는 한국 유수의 여론조사전문기관들이 모두 틀렸습니다. 이런 경우는 해석도 어렵습니다. 갤럽의 경우 한나라당 정종복 전 의원이 12.8%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고, 중앙일간지 자체조사에서도 14% 앞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래도 9.8%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 결과와 제일 작은 오차를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결과가 빗나갔으니, 조사전문가로서 뭐라 변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여론조사를 하는 것은 국을 끓이는 데, 국 맛을 보기 위해 다 먹어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국 맛을 보려면 국을 잘 섞은 뒤 떠먹어봐야 국맛을 알 수 있겠죠. 그런데 경주지역의 경우 이 국에 다른 이물질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즉 성실히 응답하지 않으려는 유권자들이 너무 많았던 거죠. 저도 현지에 가보니 분위기는 한나라당이 불리한 것 같은 데, 여론조사결과는 여당후보가 이기는 것으로 나오니 그대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죠. -여론조사 전문기관 대표로서 보람은 어떤 것입니까. ▲정부 정책이나 지역 현안문제에 대한 조사에 여론조사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지역민의 여론을 응집하는 역할을 할 때 보람이 있죠. 또 어떤 정책이 여론조사를 통해 사전적으로 맞을까 어떨까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눈높이와 맞는 정책인지 아닌지를 알려주고, 해결책도 제시하는 것이 여론조사의 순기능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정책실행 평가도 가능하죠. 결국 여론조사는 국가나 자치단체 운영에 꼭 필요한 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여론조사 전문가로서 앞으로 다가올 19대 총선을 전망한다면. ▲지역구도가 많이 완화돼 변화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동안 영남과 호남이 갈라져 있었다면 내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완화될 것이고, 19대 총선에서는 더욱 완화돼 후보의 능력위주로 선거가 치러지지 않을까 하는 전망입니다. 나라발전을 위해서도 후보능력 위주로 뽑는 그런 선거가 되길 희망하기도 하구요. -대구·경북지역민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면. ▲여론조사는 DM이나 방문판매와 같이 영리목적이 아닙니다. 즉 여론조사와 마케팅은 구분돼야 한다는 겁니다. 여론조사 요청이 올 때 성실히 답변해주시면 지역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09-09-28

자연보호중앙연맹 포항출신 이수광 총재

“독도문제 좀 더 관심 갖고 적극적인 태도 취해야”포항출신의 이수광 자연보호중앙연맹 총재는 약 30년째 독도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경영학박사이자 공인회계사로서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회계법인인 안건회계법인을 창립해 회장까지 지낸 이 총재는 스킨스쿠버다이빙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수중탐험대를 창설해 현재도 대장을 맡고 있고, 서울대학교 해양연구소 여름 바다학교 교장도 맡고 있다. 지난 2001년 10월에는 독도중앙연맹을 창립해 총재로 봉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독도 명예특별시장을 맡고있다. 이런 자연보호운동과 함께 나라 사랑에 대한 열정 때문에 최근에는 세계자연보전연맹 한국위원회 수석부회장도 맡게 됐다. 이 총재를 만나 다채로운 이력에 얽힌 이야기와 에피소드, 그리고 독도 이야기 등을 들어봤다.편집자주회계법인 회장으로 지내면서 시간·경제적 여유 생겨 사회봉사 시작 국내 최초 독도 해저지형 연구논문 발표… 독도 명예시민 운동 전개 -먼저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저는 포항시 북구 남빈동 412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죽도시장 앞쪽이어서 해변가 마을이었고, 송도해수욕장은 저의 놀이터였죠. 6·25때 대구로 피난 나오게 됐고, 대구 달성초등학교와 계성중학교를 거쳐 계성고를 다니다 서울로 전학해 선린상고와 건국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공인회계사 생활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대학교를 졸업한 뒤 신한제분에 입사해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직장에 다니면서 시험을 준비해 1968년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 뒤 금성화섬이란 섬유회사에 다니다 1976년부터 공인회계사 개업을 했는데, 처음에는 아주회계법인 대표를 맡았다가 안건회계법인을 창립해 대표와 회장까지 지냈죠. -자연보호중앙연맹 총재를 맡았는데, 처음 여기에 뛰어든 계기가 무엇입니까. ▲공인회계사로서 회계법인 대표와 회장을 지내면서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었기에 사회봉사 차원에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특히 스킨스쿠버 다이빙이란 자연친화적인 취미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보호운동을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기도 했구요. 1977년 자연보호중앙연맹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해서 32년째 꾸준히 하고 있는 셈입니다.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배운 것은 언제이며, 어떻게 배웠습니까. ▲처음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배운 것은 대학 다닐 때니까 약 45년쯤 됐을 것 같네요. 그때는 잠수장비가 없어서 군 특수부대인 UDT에서 쓰던 장비가 나오면 그걸 갖고 어깨너머로 배웠죠. 어렸을 때부터 수영이 몸에 밴 상태였기에 남들보다는 쉬웠습니다. 그래서 동호인들을 모아 한국수중탐험대를 창설했고, 매년 여름에는 청소년 해양학교를 열어 학생들에게 수중탐험을 가르쳤습니다. 그게 1979년 무렵이었으니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만도 30년쯤 됐네요. 제게 스킨 스쿠버다이빙을 배운 사람이 1만명이 넘을 것입니다. 야간 수중 다이빙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방송국 카메라 기자들에게 수중촬영을 하는 것은 거의 제가 가르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MBC에서 방송용 ENG방수카메라를 처음 가져온 이후 수많은 방송국 사람들과 연예인들이 스킨스쿠버와 함께 수중촬영을 배웠죠.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수중촬영 전문가가 많이 늘었습니다.(웃음) -스킨스쿠버 다이빙 전문가로서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 데, 소개해 주시죠. ▲건국대 상학과를 다닐 때 해양학술조사를 많이 다녔어요. 당시 거문도와 백도의 학술조사를 나갔을 때 얘기입니다. 백도 동굴 수중탐사를 하면서 랍스터가 많이 있길 래 채집을 하고 있는데, 상어가 나타났습니다. 바깥에 대 놓은 배에서는 비상이 걸렸죠. 모두들 정신없이 피하느라고 난리법석을 피웠는데, 다 피했다고 한숨 돌리고 보니 제가 아직도 나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상어에게 공격을 당한 것 아니냐`며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나 봐요. 저는 랍스터 채집에 빠져서 상어가 나타난 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눈치를 챘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리 마을주민들에게 그곳에 가끔 상어가 나타나는 데, 망치 상어종류로서 사람을 공격하는 성향은 별로 없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바다 바닥에 가만히 앉아 상어를 관찰하다가 상어가 다른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채집망까지 챙겨서 배로 귀환했습니다. 일행은 저의 침착, 대담무쌍한 행동에 탄복했고, 저는 그때 완전 영웅(?)이 됐죠. -독도 학술조사를 많이 하신 것으로 압니다. 어떤 사연이 있습니까. ▲1981년쯤 독도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독도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1956년에 산악연맹 등반대가 낸 자료가 있었는데, 정작 바다에 대한 학술자료는 하나도 없었죠. 그래서 `우리 땅인 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 학술조사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당시 자연보호협회가 각계 전문가로 구성한 독도종합학술조사단을 구성했는데, 그때 수중탐험대장을 맡으면서 독도와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그때 조사단장은 서울대 홍순우 교수였는 데, 당시 조사 보고서로 제가 낸 논문이 `독도의 해저지형`입니다. 이게 국내 최초의 독도 해저지형에 대한 연구논문이어서 그 뒤로 여러 논문에 많이 인용됐죠. 1995년 제2차 울릉도 및 독도 자연실태 종합학술조사단이 구성됐는 데, 그때는 제가 부단장을 맡아 조사활동을 펼쳤고,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회에 걸친 독도의 동도, 울릉도에 대한 자연실태종합학술조사단에서는 제가 단장으로 조사단을 이끌었습니다. 독도처럼 영토분쟁의 가능성이 있는 땅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많아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앞으로도 독도에 대한 학술조사는 계속돼야 합니다. -독도중앙연맹 총재이자 독도명예특별시장으로도 일하고 있는데, 사연을 소개하신다면. ▲독도 학술조사를 하고, 독도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과 모임을 하다가 공식화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2001년쯤에 `독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독사모)를 결성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툭하면 일본에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독도를 명예 특별시로 선포, 명예시민을 다수 등록해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국가차원에서 독도를 차지하기 위한 교묘하고 장기적인 포석을 놓고 있습니다.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영역을 슬금슬금 넓히더니 독도 근처에서 어업을 하는 어민을 위해 독도에 의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의사를 허용하면 그다음에는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병력을 파견한다는 얘기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독도에 살지는 않더라도 독도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독도의 명예시민이 되어 활동하는 방안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결국 2007년 1월1일 울릉군민회관에서 회원 200여명과 함께 독도 명예 특별시를 선포했습니다. 현재 특별시민으로 울릉도 주민을 포함해 1만5천명이 등록돼 있는 데, 목표는 100만명입니다. 언론에도 크게 떠들지 않고, 자연보호연맹과 함께 조용히 민간차원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도를 명예 특별시로 선포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독도에 대한 실효적 점유를 강화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독도 명예시민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독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독도의 학술적 가치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관광목적이든 학술목적이든 독도에 자주 감으로써 독도가 우리 땅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부가 이런 운동을 주도하면 당장 해결될 성질의 문제도 아닌데, 일본과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빚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은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명예시민 확장운동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명예시민 목표가 100만명인 것은 100만명이 특별시가 되기 위한 최소 인구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등록할 때 명예시민에게 1만원씩의 등록비를 받고 있는데, 순수하게 십시일반 시민의 힘으로 독도를 지키겠다는 의미입니다. 독도 명예특별시민은 천연자원인 독도의 자연을 보호하는 운동과 독도에 대한 자료수집활동, 교양강좌, 간담회 개최 등을 통해 각종 문화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회원이 어느 정도 모이면 서울에 독도박물관을 짓고, 독도를 지킨 안용복 장군, 홍순칠 대장 등 33명의 동상도 건립할 예정입니다. 울릉도에 있는 독도 박물관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고,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도를 피부로 느껴야 합니다. 동도와 서도의 교통로를 개설하는 것도 계획 중 하나입니다. -끝으로 독도 지킴이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데, 바라는 게 있다면. ▲독도가 중요한 까닭은 섬 자체보다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바다영토 때문입니다. 다만 일본은 항상 독도에 관심을 보이며, 총선에서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 탈환이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고, 자위대가 가상 독도 상륙훈련을 하는 등 국가차원에서 독도문제에 접근하고 있는데, 우리는 일본 측의 망언이 있을 때만 관심을 보이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정부도 독도 문제에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09-09-21

한나라당 장애인위원장 대구출신 윤석용 의원

“세상 사람 모두가 예비장애인입니다” 한나라당 장애인위원장을 맡고있는 윤석용(서울 강동을)의원이 국회에 입성하면서 국회의원들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지체장애 2급인 장애인으로서 정상인들과 함께 18대 지역구 총선에 출마해 당당히 국회에 입성한 윤 의원은 “인생 자체가 장애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나이 들면서 이빨빠지고, 허리 힘없고, 무릎 아프면 장애인 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대구출신의 윤석용 의원을 만나 그가 살아온 역정과 꿈, 장애인을 위해 펼치고 싶은 정책 등을 들어봤다.편집자주 한나라당 윤석용 의원은 지난 16대 총선에서 당공천을 신청했지만 탈락했고, 17대 총선에서는 공천을 받았지만, 1천300여표차로 낙선했다. 18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유혹을 받았지만 이를 뿌리치고 서울 강동을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쉽게 국회에 입성할 수 있는 길을 두고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해 힘겨운 선거전을 치른 배경은 무엇일까. 윤 의원은 “장애인이 선거를 치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고 말했다. 장애인으로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일일게다. 18대 총선에서 장애인 국회의원은 모두 8명이며, 이 가운데 지역구 의원은 윤 의원을 포함해 단 2명이다. 윤 의원이 국회에 들어온 후 이런저런 변화들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국회내에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많아졌다. “지난 3년간 한나라당 장애인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국회안의 화장실 시설을 장애인용으로 개·보수하자고 건의했는 데, 안됐어요. 이번에 원내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 개·보수부터 했습니다. 그렇게 49곳의 시설을 바꿨습니다.” 윤 의원이 마지막으로 바꾼 국회시설은 국회의사당 올라가는 계단의 손잡이였다. 이 시설 개·보수를 둘러싼 내막은 이랬다. “`국회의사당 올라가는 빨간 카펫 깔린 계단에 장애인용 손잡이를 만들자`고 했더니 `안된다`고 해요. `왜 안되냐`고 하니, `국회 권위에 금이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국회의장을 장애인차별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계단에 손잡이를 설치해주더군요.” -어린 시절은 어땠습니까? ▲저는 한 살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 한 쪽을 쓰지 못하게 됐습니다. 소아마비를 처음 앓았을 때는 목 밑까지 마비돼 입만 겨우 움직였는 데, 지금처럼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을 정도나마 된 것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덕분이었죠. 대구 종로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주변의 이런 보살핌 덕분에 내가 장애를 입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친구들도 자신들과 같은 아이들로 여겼고, 몸이 아픈 나를 친구들이 등하굣길에 업어주면서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도 혼자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저를 업어서 보내주기도 했죠. -학교생활이나 진학 등에서 불이익을 많이 당했다고 들었는데요.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보니 장애가 실감이 났습니다. 대구에서는 공부를 잘하면 경북중이나 사대부중으로 진학을 했는 데, 저는 성적이 좋았다고 생각됐는데도 두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성적이 못했던 친구들은 입학을 하고 말입니다. 대학입시때는 더 했습니다. 입시를 치른 후 경북대와 연세대 공대에 지원을 했는 데, 두 학교가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했습니다.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을텐데, 경희대 한의학과에는 어떻게 입학할 수 있었습니까. ▲대학입시때까지 한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는 데, 어머니 권유로 한의학과에 응시하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집안 내력인가 보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증조부(윤영렬)께서 고종때 어의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약방을 한데다 친척 가운데 의사, 약사, 한의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71년 경희대 한의대 입학시험에서 필기시험은 합격했지만, 신체검사서 떨어졌습니다. 다른 장애인 수험생 10여명도 모두 탈락했죠. 그때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던 외삼촌(모성진)이 친하게 지내던 당시 실력자이자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육인수 전 공화당 의원에게 저의 입학을 부탁했습니다. 육인수 전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 이야기를 했고, 박 대통령이 경희대측에 저의 입학을 지시해 저 혼자 합격했습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상태여서 부정입학은 아니니까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제가 경희대 한의학과 최초의 장애인학생이란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후 서울 천호동에 자리잡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서울에서 가장 못살던 동네였습니다. 무허가 판자촌, 재래식 시장, 사창가, 비닐하우스 등으로 뒤덮여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병원진료를 못받는 사람에게 무료진료를 해주고 싶었어요. (윤 의원이 운영하는 천호한의원에 들어서면 안내데스크 뒤로 `아래사항에 해당되는 분은 치료비를 내지 마세요. 생활보호대상자, 중증장애인, 환경미화원, 소방관, 사회복지사, 집배원, 순경, 목회자, 그외 원장님과 잘아시는분-꼭 내시겠다면 이동목욕봉사차량 성금함에 정성을 모아주세요`라는 글이 적혀있다.) -사회복지재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 데, 어떻게 설립하게 됐습니까. ▲지난 1983년 강동사회복지개발원을 설립해 80년대 중반부터 연간 1~2억원씩, 한의원을 운영해 번 돈 가운데 세금과 가족 생활비 일부를 빼고 모두 복지개발원에 넣었습니다. 1992년에는 천호한의원 건물 등 자신의 전재산 10여억원을 기증해 강동사회복지개발원을 사회복지법인 대한사회복지개발원으로 확대개편했습니다.(윤 의원은 현재 자신과 가족명의의 집 한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성내종합사회복지관을 지어 장애인과 저소득층, 아이들에 대한 종합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복지관 산하에는 디딤돌 교육원과 곡교어린이집이 있습니다. -17대 총선에 낙선했을 때 얘기를 들려주시죠. ▲지난 17대 총선때 어처구니없게 병역기피를 했다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2급 장애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병역면제가 됩니다. 그런데 후보자 소개에는 `병역미필`로 나와요. 여성은 `병역면제`로 나와서 오해가 없지만, 남성은 병역필 아니면 병역미필로 기재됩니다. 마치 병역을 일부러 회피한 사람처럼 보이죠. 그 때 투표 결과 1천300여표 차이로 떨어졌는 데, 군대에 가 있는 유권자들이 대부분인 부재자 투표에서 1천여표나 차이가 났지요. 억울한 사람을 없애기 위해서 이 부분도 개정안을 내놨습니다. -거리에서 선거운동할 때 힘들지 않았습니까. ▲현행 선거법상 후보자와 배우자, 보좌관 1명 등 3명이 후보자의 명함을 돌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저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은 한쪽은 지팡이를 짚어야 하니까, 명함을 줄 수가 없습니다. 상대후보는 3명이 명함을 돌리는 데, 저는 2명이 나눠줄 수 밖에 없는거죠. 그래서 선거운동원이 저 대신 옆에서 명함을 돌리는 데, 이게 위법이라고 매일 고발을 당해 과태료를 50만원씩 물어야 했습니다. 이런 것도 법개정해야 합니다. 만약 배우자도 장애인일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활동 보조인은 명함을 돌릴 수 있도록 예외규정을 두면 될 것입니다. -18대 총선에서 선거전을 치르느라 많이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상인에게도 선거전은 힘듭니다. 한번은 명함을 돌리기 위해 가게에 들어갔는 데, 주인 표정이 안좋게 변하는 겁니다. 그래서 명함을 두고 돌아나오는데, `이런 ××, 아침부터 재수없게 병신이 들어오는 거야`라는 말이 뒷통수에 박히는 겁니다. 그 후부터는 아침에는 절대로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제 선거운동 하겠다고 다른 사람 기분 망치게 하면 안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는 제 처가 들어가 무릎꿇고 명함을 건넸습니다. 집사람이 참 고생많았습니다. -장애인 차량 LPG연료 면세제도가 올해말 폐지되는 것으로 아는 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노무현 정권 시절인 3년 전에 일몰법으로 만들어져 올해말로 종결되도록 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나라당이 똥바가지를 뒤집어쓰게 된 법이죠. 비정규직법과 똑같이 말입니다. LPG연료 면세제도는 비장애인이 악용해서 타고다니는 바람에 문제가 됐습니다. 장애인은 월세나 전세를 들고 있는 상황이라도 승용차가 필요합니다. 이는 연간 2천600억원 예산으로 61만여명의 장애인 삶이 향상되고, 이동권이 보장돼 경제적 파급효과는 2조원 이상입니다. 따라서 이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즉각 철회돼야 합니다. -지방이양된 장애인 복지사업의 중앙환원도 시급하다고요. ▲노무현 정부때 67개 사회복지사업이 지방으로 이양됐습니다. 그러나 지방은 재정 자립도가 낮습니다. 예를 들면 꽃동네같은 마을이 충북 음성이나 경기도 가평, 제주도 등지에 있는 데, 여기에는 전국에서 장애인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해당 지역 자치단체에서 이 예산을 맡으라고 하면 `전국의 장애인을 왜 우리가 담당 하나`하는 불만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또 장애인 복지관 하나 짓기도 어렵게 됩니다. 복지관 지으면 정부 50%, 지방 50%로 운영해야 하는 데, 지방재정이 없어 월급을 못 준다는 겁니다. 실제로 대구에 갔더니 장애인을 위한 콜택시를 30대 사놨는 데, 10대만 운용하고, 20대는 놀고 있더라구요. 물어보니 운영예산이 없다는 겁니다. 대구 달서구의 장애인재활작업장도 국비가 내려와도 지방예산이 없어 운영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끝으로 대구·경북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구 경북지역민께 아무리 어렵더라도 희망을 갖고,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저 처럼 장애인도 국회의원 되는 걸 보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대구는 제 고향입니다. 지난번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할 때 용역을 의뢰할 수 있도록 예산 10억원을 확보해주기도 했죠. 또 지금도 대구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계십니다. 비록 지금은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십니다만. 이번 추석때도 대구에 내려갑니다. 어쨌든 지금 대구가 어려운 것은 산업기반이 없어서 그런 만큼 시민들이 일치단결 해 옛날의 영화를 찾아오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집권을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대구·경북지역민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힘내십시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09-09-14

박상희 中企포럼 대표·(주)미주금속 회장

대구시 달성군이 고향인 박상희(58·사진) (주)미주 및 미주금속 회장은 지난 2006년 결성된 최초의 NGO성격의 중소기업 모임인 `중소기업포럼` 대표를 맡고있다. 포럼은 박상희 회장이 결성을 주도했고, 현재 약 2천600여명의 CEO가 가입돼 있다. 박 회장은 이미 43세의 젊은 나이에 중소기업중앙회의 최연소 민선회장으로 선출돼 연임했으며, 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 지난 2002년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해 대선때는 한나라당 선대위 중소기업 특위 위원장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뛰기도 했던 박 회장을 만나 지난 세월의 에피소드와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들어봤다.편집자주 -최연소(43세) 중소기업중앙회장이 될 수 있었던 남다른 배경이 있었을 듯 합니다.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는 데, 전두환 대통령과 형인 전경환씨와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소개로) 30세에 모르는 장관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청와대 수행 경제인 리스트에 매번 끼어 외국을 다녔습니다. 이런 인맥을 갖고, 10여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철강조합 이사장이 됐을 때 다른 업체 사장들이 부탁하는 민원해결을 많이 해줬죠. 당시 중소기업 중앙회장으로서는 국세청장 면담도 제대로 안될 시절, 일개 조합장이 넓은 인맥으로 민원을 해결해 주다보니 그런 것이 밑거름이 돼 중앙회장이 된 것으로 압니다. 1995년 2월 중소기업 중앙회장이 됐을 때 정몽구 회장이 축하방문차 사무실에 들렀을 정도였죠. 다만 그런 청탁을 많이 하고도 아직까지 별탈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돈은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YS정권때에 중소기업청을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중소기업 중앙회장이 되고 난 뒤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당시 산업자원부를 중소기업부로 바꾸자고 제안했죠. 입만 열면 중소기업을 도와준다고 하는 데, 중소기업정책은 산자부 중소기업국장 아래 27명의 직원이 약 1천300억원 예산으로 중소기업 정책을 펴 온 게 전부였습니다. 이걸 지적하면서 예산과 조직이 있어야 도와줄 것 아니냐는 논리를 폈습니다. 청와대에서도 이런 논리에 제대로 대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박재윤 당시 경제수석도 “그 말이 맞다”고 수긍했습니다. 그래서 산자부가 중소기업부로 바뀌나 보다 했는 데, 나중에는 어떻게 됐는 지 `중소기업청`이 신설되는 쪽으로 낙착됐습니다. `관료의 힘`때문으로 추측되지만, 이 정도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중소기업청이 설립돼 중소기업 지원이 늘어나게 됐으니 말입니다. -DJ정권때 중소기업중앙회장을 지내면서 소개할 만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뒤인 1999년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됐습니다. 저는 당시 IMF로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시기에 구조조정 대상이 돼야 할 그룹회장을 전경련회장으로 세우는 데, 반대를 했습니다. 경제 5단체장과 청와대 김중권 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환난극복을 위한 대책회의를 하기 위해 청와대에 모였을 때입니다. 김우중 회장도 참석한 그 자리에서 나는 “재벌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이고, 구조조정 대상인 대우회장을 전경련 회장으로 세우는 데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전경련부터 구조조정하라”는 주문이었죠. 그러자 김 회장은 “아무리 그렇지만 재벌을 너무 부정적으로 애기하는 것 아니냐”며 목청을 높였고, 나는 “대기업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상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장에 안좋은 영향을 미치는 재벌은 정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오히려 내 편을 들었습니다. “중소기업의 열정과 애정을 느끼며 잘해보자”는 얘기였죠. 이렇게 되자 김 회장은 “우리는 그렇게 얘기하면 기업 안하겠다”고 격하게 반발했고, 김 대통령도 “내가 언제 기업하지 말라고 했나”고 역정을 냈습니다. 아마 대우 김 회장은 기업이 풍전등화일 당시에 대통령 마저 자신 편을 들어주지 않자 `죽기아니면 살기`라는 절박한 심경으로 항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구출신 경제인으로서 민주당 국회의원이 된 것은 상당히 의외인데, 지난 일이긴 하지만 배경이 궁금합니다. ▲당시 민주당 비례대표에 장태완 장군, 그리고 김운용씨, 노총에서는 박인상씨 등이 영입됐는 데, 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정치는 안한다”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도 비례대표 상위순번을 주겠다고 제의했는 데도 거절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식사한 번 하자고 해 식사를 했는 데, “정치 한번 같이 해보자”고 해서 “언제 좋은 기회가 오면 같이 정치 해보고싶다”고 겸양의 말만 하고 나왔는 데, 다음날 저와 이한동씨가 자민련 비례대표로 간다고 대서특필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 기사를 보고, 화를 내면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해 “정치의사를 묻길 래 덕담을 했는 데, 일방적으로 이렇게 발표가 됐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한광옥 비서실장이 옆에 있다가 다시 정치 입문을 간곡히 권하고, 김대중 대통령도 다른 사람보고 다 나가라고 한 뒤 “나도 목포상고 나와 27세에 국회의원 했고, 당신도 대구상고 나와 28세부터 사업하고 있는 점이 비슷하다. 같이 뜻 모아 정치 한번 하자. 집이라 생각하고 수시로 놀러오고.”라며 간곡히 권하는 바람에 더 이상 거절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국회의원과 중소기업 중앙회장을 겸임하는 것으로 하면 하겠다”고 대답했죠. 다음날 부터 야당에서 신문마다 성명을 내서 “박상희 중앙회장 물러가라”고 해 결국 6개월 만에 중앙회장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때 처음부터 중소기업 중앙회장을 던지고 국회에 들어갔으면 일하기는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일할 때 내가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건립에 일조했다고 들었습니다. ▲2000년부터 4년간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여당(민주당) 간사를 하면서 당시 한나라당 강재섭, 박근혜 의원과 힘을 합쳐 DGIST 법안 처리에 앞장섰습니다. 당시 광주와 대구에 과학기술원을 만들자고 한나라당이 제안했고, 여기에 대해 민주당의 당론은 반대였습니다. 그런 것을 내가 회의에 나가서 당론과는 반대로 찬성을 했습니다. 당에서 “왜 그랬냐”고 추궁하기에 “내가 민주당에 머슴살이하려 왔는 데, 고향을 위해 그것 하나 찬성못하면 뭐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나무라지는 않더군요. -역대 정권의 중소기업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먼저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는 부품소재산업 육성을 위해 1천개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폈는 데, 이게 상당히 효과를 거뒀다고 봅니다. 당시 박성상 한은총재가 이 정책을 적극 펼쳤죠. 김영삼 대통령은 중소기업청을 설립해 중소기업 살리기에 나섰고, 김대중 대통령은 재벌개혁에 앞장서 상대적으로 중소기업 활성화에 힘을 썼습니다. 정보통신부를 만들어 IT산업에도 힘썼고요. 노무현 정부는 중소기업 정책에 대해 그리 평가할 만 한게 없습니다. 끝으로 이명박 정부는 노력은 많이 하는 데, 효과는 그리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소기업 정책보다는 서민대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소기업 특별위원회를 없앤 것도 아쉽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중소기업을 살리려면 청와대에 중소기업 비서관이 아니라 중소기업특보를 신설, 대통령에게 부담없이 얘기하고, 정책을 홍보할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으로 주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중소기업에게 시장을 돌려줘야 합니다. 중소기업이 물건을 만들면 팔 곳이 있어야 하는 데, 장사를 할 만한 시장은 모두 대기업이 독식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중소규모 시장을 잠식하지 못하게 중소기업에 불합리한 제도를 과감하게 뜯어고쳐야 합니다. 대기업은 위장 중소기업까지 만들어 장사가 될 만한 것은 다 해먹고 있습니다. 대기업들은 철강이면 철강, 조선이 조선 등 글로벌 시장에서 1등하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정부의 대기업 정책이 돼야 합니다. 나머지 시장은 중소기업에 돌려줘야 합니다. -지난 총선때 민주당을 탈당하고, 대구 달서을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는 데, 향후 국회 진출계획은? ▲달성군 구지가 고향이지만 박근혜 대표 지역구에는 공천신청이 곤란해 대구 달서병에 신청하려고 사무실 계약까지 했다가 다른 사람의 권유로 대구 달서을에 신청하게 됐습니다. 결국 공천에 떨어지고 말았죠. 앞으로 정치를 하게된다면 중소기업을 대변하고, 고향발전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마음으로 고향에 가서 (지역구 국회의원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09-09-07

“긴 안목·참을성 가진 리더가 지역발전 이끌어야”

경북 영덕출신의 남효채 전 경북도 행정부지사가 지난달 행정안전부 산하기관인 한국지역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지난 해 4월 총선때 영양·영덕·울진·봉화 지역구에 예비후보로 뛰며 국회 입성을 노렸던 그는 한나라당 공천 탈락후 출마를 포기하고 한나라당 강석호 의원을 도왔다. 영남대 출신으로서 행정고시에 최연소 합격해 지역사회에서 이름을 날렸던 남 이사장을 서울시내 한 커피숍에서 만나 공직시절의 추억들과 근황, 포부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얘기들을 들어봤다.편집자주 -공직을 꿈꾸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어릴 때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가장 안정된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와 국민들에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가였죠. 그런 걸 생각하니 공무원이 내가 생각한 것을 이뤄줄 수 있다 싶었습니다. -공직생활하면서 가장 보람된 일이 있다면. ▲영양군수로 있을 때 중앙과 도의 예산을 많이 따내 지역개발을 추진할 수 있었던 때입니다. 이 때문에 주민소득사업을 전무후무하게 가장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졌죠. 또 도와 중앙에서 근무할 때 고향 영덕의 장기발전을 위해 예산지원을 많이 하도록 하고, 국가개발계획에 영덕이 포함되도록 애썼던 일도 보람있는 일입니다. -한국지역진흥재단을 맡았는 데, 어떤 일을 하는 곳입니까. ▲행정안전부 산하 기관인 데, 각 지역별, 권역별 문화·사회나 생산품 정보, 기업투자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하고, 알리고, 그것이 지역진흥을 위해 국내외 사람이나 자본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업무파악이 끝났습니다. 앞으로 조직을 키우고, 인력이나 재정, 사업규모를 적극 키워야 조직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할 작정입니다. -대구·경북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인 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문제입니까. ▲`자기 팔 자기 흔들기`식의 행태나 안 그런 척 하면서 무척 이기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남이나 충청, 경인지역 사람들에 비해 교양이나 문화가 없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리더들이 자기 이익만 알고, 다른 사람들을 챙기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유독 예외적인 것이 경북고 동창들만은 자기들끼리 다한다는 평판을 받고 있죠. -대구·경북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노장들은 `공성신퇴`(功成身退:공을 이룬 뒤에는 스스로 물러난다)를 알아야 하는 데, 그게 돼야 합니다. 이런 점은 저도 부끄럽습니다. 나이들어 보니 소명의식이나 이념, 투쟁은 없고, 자기의 생명감이나 존재감 느끼기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이 시대와 이 경제에 맞는 대구·경북지역사람의 장점을 키워서 구체화해야 하고, `빨리빨리` 또는 `대충대충`에서 긴 안목 큰 시야와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동해안 발전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봅니까. ▲20년만에 지역발전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기지개 펴다가 끝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하루빨리 지역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창의력과 창조성이 있는 약간의 이단(?)이라고 할까요, 이른바 `괴짜 정치인`이 자치단체장을 맡아 지역발전을 선도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지휘관이 능력있는 공무원들에게 영혼을 불어넣어주고, 개인기를 키워주고, 외부의 선각자집단, 즉 지식인이나 기술인들과 연결시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지휘관이 소명의식을 갖고 일하는 지역은 부쩍 크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남 여수나 함평, 경기도 성남 같은 경우가 그런 모델이라고 봅니다. -미래에 대구·경북지역이 잘 살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창의력을 가진 우수한 개인들이 팀웍을 이루고, 신기술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신 산업분야에 지역 잠재력이 투입되고, 10~20년 후를 내다보는 우리 지역 특유의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지방행정체제 개편과 관련해 유독 경북지역만 통합움직임이 없다는 얘기만 해도 그만큼 공부나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일명 `7부능선`에 있는 여론주도층들이 먹고살만 하니까 노력을 하지 않는 겁니다. 충청도의 경우 `이회창`카드를 다시 살려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첨단의료복합단지도 충북 오송과 공동선정되는 바람에 앞으로 10~20년 지나면 대구지역에는 하청업체 몇개밖에 남지 않을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많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지방행정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어떤 것이 될까요. ▲3가지 키워드로 정리하면, 깔아주고, 엮어주고, 키워주면 될 것입니다. 먼저 신뢰나 반부패, 공정한 경쟁 등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깔아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기술과 자본, 지식이 통섭·융합되도록 소통시켜주고, 엮어주는 것이 필요하며, 3차 혁명시대로서 개인의 시대에 맞게 지역에 먹을 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우수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지방자치 단체장들은 혁신적인 사고로 지역발전에 나서야 하고, `표모으기`만 하는 행태는 버려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내년 지방선거나 향후 총선에 나갈 계획이 있습니까.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는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 사실이 영덕지역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습니다. 절대로 나가지 않을 작정입니다. 정치인이 돼야 하는 총선은 더 말할 게 없습니다. 능력이 모자라기도 하고, 제게 맞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행정가 또는 대학교를 맡아 책임지고 운영하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 분야의 공부도 했으니 말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남효채 한국지역진흥재단 이사장은남 이사장은 1952년 9월7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에서 태어났다. 영덕초등학교와 영덕중학교, 경북대 사대부고를 거쳐 영남대 법정대를 졸업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과 미국 워싱턴대 대학원에서 각각 도시계획학 석사와 정책분석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영남대 3학년 재학중인 지난 1973년 제13회 행정고시에 최연소 합격했으며, 이후 해군장교로 복무한 뒤 경북도 법제과장으로 공직에 입문한 뒤 이어 내무부 계장, 경북 영양군수, 군위군수,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행정관 등을 거쳐 상주시장, 구미·포항 부시장, 행정자치부 감사국장, 경북도 행정부지사를 역임했다. 이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상임감사를 지냈으며, 현재 행정안전부 산하 한국지역진흥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09-08-31

김법완 한국보건산업진흥원장

“`의료메카` 첨복단지 조성 지금부터가 시작” 해외환자 유치·글로벌 협력 강화로 의료산업 선진화 주력화장품 산업·신약·국산의료기기 개발 등 RD사업 지원첨단의료복합단지 대구 선정은 `저력있는 도시` 입증한 것경북 의성출신의 김법완 한국보건산업진흥원장은 최근 몇달동안 첨단의료복합단지 선정때문에 눈코 뜰새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대구 신서혁신도시와 충북 오송의 공동 선정으로 결론난 첨단의료복합단지 선정에 심사위원 8명을 선임했을 뿐 아니라 보건복지부 산하 출연연구기관장으로서 의견도 개진해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북출신 기관장이란 이유로 애꿎은(?) 오해도 적지 않았지만, 김 원장은 “대구·경북이 지난 정부때 소외됐던 점을 부인할 수 없으며, 대구의 의료인프라가 충분하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봐도 대구가 선정된 것은 잘된 일”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동아일보에서 선정한 비뇨기과(비뇨기종양부문) 명의로 뽑히기도 한 김 원장을 만나 학창시절부터 최근의 보건산업진흥원 얘기까지 들어봤다.편집자주 -어릴 때 고향에서의 추억이나 별명 등 학창시절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고향은 경북 의성인데 초등학교때 대구로 이사와서 삼덕초등학교를 다녔고, 경북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학창시절 별명은 법완이란 이름이 특이해 비슷한 어감이었는지 `뽀빠이`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 시절에는 등산을 즐겼고, 운동으로는 태권도를 했습니다. 등산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는 정도로 좋아해서 백두대간 산행도 여러 번 했습니다. 한국산악회 모임에도 35년째 참여하고 있죠. 태권도는 대학교 2학년때까지 했습니다. (“몇단까지 땄느냐”는 질문에 그는 “몇단이라고 밝힐 것까지 없고 3단 이상”이라고만 했다). 요즘 취미는 자전거타기와 주말농장 가꾸기인데 주말농장은 벌써 8년째 참여하고 있습니다. -의사의 길로 들어 선 계기가 있었는 지 궁금합니다. ▲4형제 가운데 제일 큰 형님만 사업을 하고, 바로 위인 보완형이 경북대 내과교수로 있고, 아래인 동생 정완은 최근까지 치대교수로 있다가 개원한다고 퇴직했습니다. 또 집안에 사촌이내에만 10명이 넘는다고 하면 어떤 분위기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형제의 아들이 모두 9명인데 그 중에 6명이 의사가 됐으니 2대에 걸쳐 의사들이 많이 난 셈입니다. 제가 비뇨기과 의사가 된 것은 집안 분위기상 자연스럽게 의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면서 됐다고 해야겠죠. 누가 강요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의 부친은 경북대에서 역사과 교수로 재직했던 김영하씨로 지난 2007년 작고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어떤 기관인지 소개하신다면.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으로서 RD의 70%를 관장하는 지원기관이며, 보건복지부 정책의 78%를 제공하는 보건복지부 출연 연구기관입니다. 의료나 화장품 등 국내 보건산업 육성을 위해 10년전 설립된 기구로 최근에는 해외 환자유치사업과 글로벌협력프로젝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취임한 지 이제 1년남짓인데 취임후 가장 주력한 사업이나 현안은 어떤 것입니까. ▲보건산업진흥원의 목적인 의료산업 선진화를 위한 것이니 만큼 해외환자 유치사업과 공공의료 활동, RD자금 배가 등에 주력해 왔습니다. 특히 해외환자 유치는 지난해 1만7천명에서 올해는 8만명으로 급증했고, 경제효과도 지난해 2천500억원에서 올해는 1조3천억원에 늘었습니다. 앞으로 2012년까지 20만명을 돌파해 20조원의 경제효과를 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처럼 해외환자 유치실적이 급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외국인환자 유치와 관련한 의료법이 개정된 것이 해외환자 유치의 물꼬를 텄고, 그 다음으로는 해외에 우리나라 의료수준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해외환자 유치를 위한 거점센터를 늘려나간 데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보건산업진흥원에서는 이미 미국과 싱가포르, 북경에 유치센터를 설립했고, 조만간 러시아와 몽골에도 설립할 계획입니다. -화장품 산업에 대한 지원도 보건산업진흥원에서 한다고 들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화장품산업에 대해서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프랑스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화장품산업에 대해 국가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데 전세계에서 두번째로 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보건복지부도 화장품 산업지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뿐 아니라 저도 화장품 산업 육성을 위한 세부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수출을 위해서는 수출지원센터를 통해 여러나라의 수출입 인허가 정보를 수집해 화장품업계에 제공하고 있고, RD지원을 위해서 예산지원을 크게 늘릴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예산이 많이 지원되지 않아 RD자금으로 60억원이 지원됐는데 올해는 200억원 정도로 늘리려고 합니다. 특히 대구에서는 화장품에 관심을 가진 한의사와 약사가 공동으로 한약재를 베이스로 한 화장품을 개발하는 사례가 있는데 이런 국제적 경쟁력이 있는, 특화된 화장품 산업에 대해 지원할 계획입니다. -보건산업진흥원이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지난 95년 128억원으로 시작된 RD지원 사업이 지난 2007년까지 13년간 모두 9천261억원이 투자됐고, 지난해에는 1천527억원이 투자됐습니다. 주요 성과로는 발기부전치료제인 자이데나, B형간염 치료제인 레보비르 등 국산신약 9건이 개발됐고, 신약기술 수출 13건, 초음파영상진단기, 셍체계측기기 등 국산의료기기 상품 출시 92건 등이 있습니다. 사업초기에는 기초연구 중심의 지원을 해서 논문중심의 성과를 거뒀으나, 지난 2002년이후에는 신약개발, 의료기기 개발 등에 지원을 집중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국가연구개발사업 평가에서도 우리 RD사업이 2년 연속 우수한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이번에 대구와 오송이 공동 유치한 첨단의료복합단지에 대해 총평을 하신다면. ▲직접 심사위원도 선임하고, 의견을 낸 입장에서 여러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다만 대구·경북이 지난 15년동안 소외돼왔는 데도 불구하고, 역시 저력있는 도시라는 것이 입증됐다고 봅니다. 의료인프라와 RD, 의료기기와 관련한 전자공학과 등의 인력도 있는데다 자동차부품산업이나 섬유계통이 의료용으로 개발되고 있는 게 점수를 더 받은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지역에 비해 100년의 전통을 가진 경북대와 계명대 병원이 있다는 점도 가점요인이 됐구요. 전체적으로 대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2등에 비해서 점수차가 상당폭 벌어졌던 게 사실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지역균형개발 항목이 들어가 대구가 더 많은 점수를 받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지역균형개발 항목에서는 다른 지역보다도 점수를 낮게 받았습니다. 인구 100만이상의 대도시가 인근에 없어야 하는데 대구만 해도 인구 250만명이기 때문에 지역균형개발 항목에서 점수를 더 받을 수는 없지요. 충북 오송만 해도 이 항목에서는 대구보다 점수를 더 받았죠. -공동 유치후 예산배분이나 민간투자 유치 등에서 여러가지 걱정이 많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한다고 보십니까. ▲어쨌든 첨단의료복합단지를 유치한 만큼 제대로 계획을 세워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단지로 만들어내는데 총력을 다해야 겠죠. 단지 유치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대구·경북지역민들도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갖고 함께 힘을 모아야 첨단의료복합단지가 성공적으로 조성될 것으로 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김법완 한국보건산업진흥원장은 김법완 원장은 1952년 1월20일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대구 삼덕초등학교와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 의과대에서 3년간 조교수를 지냈으며, 지난 1986년 경북대 의대 교수로 부임해 경북대 기획부처장과 대구 경북 테크노파크 추진단장을 지냈고, 경북대 제2캠퍼스 추진단장과 경북대병원 기획조정실장, 학생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암학회 및 대한비뇨기과학회 이사로서 한국보건산업진흥원장을 맡고 있다.

2009-08-17

권오을 전 국회의원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긍심 가져야” 미 스텐퍼드대 아태연구소 객원연구원 생활 정리 귀국청와대 개각·개편 앞두고 `정무장관 기용` 하마평 올라여야 대립에 원칙 강조·지역구 활동으로 정계 복귀 꿈꿔권오을 전 의원이 지난 달 24일 저녁 미국 스텐퍼드대 아태연구소 객원연구원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지난 6월 모친상을 당해 일시 귀국했던 권 의원은 이번에는 완전히 귀국했다. 예정했던 1년간의 외유가 끝났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명박 대통령이 개각과 청와대 개편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귀국한 권 의원을 만나 어릴 때의 꿈부터 시작해 지난 총선얘기며, 미국서 생활한 얘기들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권오을 전 의원은 이날 여의도에서 지인들과 점심을 함께 한 뒤 편한 콤비 정장에 노타이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3선의원으로 지낼 때도 기자들과는 편한 차림에 소탈한 말투였던 권 의원은 이날 오랜만에 여의도 방문이 남다른 감회로 다가온 것 같았다. 권 의원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 들어오면서 출입증을 작성을 해야 하는 지 고민하다가 출입증을 작성하고 있자니 자신을 알아본 국회 관계자가 “왜 그러십니까. 출입증을 작성하지 않아도 됩니다”라며 출입을 허용한 데 대해 무척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어릴 때 꿈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릴 때 꿈은 출세하는 것이었다고 하면 이상한지 모르겠네요. 당시 출세라면 고시를 하거나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는 데, 그 당시 국회의원은 요즘과는 달리 상당히 존경을 받았다는 생각입니다. -미국서 언제 돌아왔으며, 미국 생활 소감을 듣고 싶은 데요. ▲지난 달 24일 밤에 귀국했습니다. 귀국직후 곧바로 고향인 안동에 내려가 모친 산소를 참배하고 고향 어른들께 인사를 한 뒤 지난달 27일 상경해 지인들을 만나는 중입니다. 미국생활소감이라면 그저 잘 쉬었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네요. -미국서 배운 것이 있다면. ▲미국정치도 민주당과 공화당이 엄청나게 토론하고 싸우지만 멋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결론이 납니다. 이런 때 와신상담해 다음 선거때 보자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는 그렇지 못합니다. 할말 다하고 토론하고, 4년을 맡겼으면 다음 총선때 보자고 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거죠. 이런 것은 여야의 리더십이 없다는 얘깁니다. 리더십이 있으면 그렇게 끌고 갈 수 있을 텐데 그런 리더십이 없어서 안되는 것입니다. -미국 여행을 얼마나 하셨는 지요. ▲미국여행을 한달씩 두어번 했습니다. 미국 전역을 일주했는 데, 기후도 다양하고, 인종도 다양하고, 풍속도 다양한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뉴멕시코를 가보니 미국땅인지도 모를 정도로 멕시코의 풍속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 이색적이었습니다. 또 하나 느낀 점은 우리나라에서는 나이가 들어서 생긴 흰머리에 염색을 많이 하는 데, 미국에서는 염색을 거의 하지 않는 게 특징입니다. 또 여름에 가을이나 겨울 옷을 입고 나가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생활을 존중하고, 사생활을 존중하는 생활문화가 정착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전체의 조화가 이뤄져서 미국이 꾸려져 나가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내다 이번에 처음 쉰 것으로 아는 데, 국회의원 생활에 대한 결산은 해보셨는지 궁금합니다. ▲경북도의원을 마치고, 국회의원에 나서기 전에 1년정도 쉰 것을 제외하고는 이번이 처음 쉬는 것이었습니다. 거창하게 결산을 하기 보다는 지난 18대 총선에서 공천을 못받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확정발표가 났을 때 다른 사람에 비해 빨리 알 수 있었는 데, 결론을 듣자마자 프로선수가 몸관리를 잘 못해 좋은 성적을 못내면 팬들에게 미안한 것처럼 가장 미안하게 생각된 게 안동시민이었습니다. 야당 12년동안 지지해 줬는 데, 여당되고 난 뒤에는 공천에도 떨어져 죄짓는 기분이었습니다. 공천에서 떨어진 직후 10일 동안 두루막을 입고, 석고대죄했던 일도 그런 마음뿐이었습니다. 실컷 키워 놓으니까 제 앞도 못가리고, 목이 잘렸으니 달리 할말이 없지요. -국회의원을 그만 둔 뒤 국회의원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지요. ▲국회의원은 흔히 국민의 머슴이라고 하는 데, 저는 국민의 대표라고 생각하고 일을 해 왔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민을 대표한 사람이 국회의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머슴을 자처하며 몸을 낮추는 것은 좋은 데, 할 일을 챙기거나 국민의 대표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부분은 아쉽습니다. 국회의원이 주인을 대표한다는 자긍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정계복귀 수순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 지 궁금합니다. ▲저도 가닥을 잡기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총선은 2년6개월 가량 남아있어 정치적 복귀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하기는 해야 하는 데…. 최근 신문에 거론되는 `정무장관 기용설`에 대해서는 저도 알지 못하는 일이고, 또 내 의지로 하고싶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잖습니까. 기회가 주어지면 열심히 할 것이고, 아니면 지켜볼 수 밖에 없지요. -요즘도 내년에 경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할 것이란 전망이 파다한 데요. ▲현재로서는 계획이 없습니다. 중앙정치를 해야죠. 한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이미 6년 이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당이 선거를 하면 들러리만 서고, 물러나는 것 아니냐는 지적들이 있었습니다. 당이 선거를 하면 책임을 져야 하는 데, 당이 찬밥됐다고 `이건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건 아닙니다. -최근 정치권에서 나오는 얘기 가운데 개헌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라주인인 국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아닌거죠. 내각책임제의 경우도 국민들이 원하면 가능한 것입니다. 지방소환제와 마찬가지로, 중앙도 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정치권이 여야 대립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정치권에 한마디 훈수를 한다면. ▲어려울 수록 원칙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경호권을 발동하고도 법안통과를 못하면 안될 일이죠. 한나라당은 그대로 가고, 민주당은 장외에서 뛰는 모양새는 그리 좋지 않지만, 국회의장이나 여야도 타협이나 협상도 원칙에 입각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스냐 노냐를 묻고, 표결처리후 다음에는 총선에서 심판받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방송법의 경우 내용은 잘 모르지만, 여론독점문제를 고치자는 것으로 압니다. 야당의 주장은 국민을 모독하는 것 같습니다. 땡전뉴스를 7년이나 했는데도 투표할 때는 야당을 찍었습니다. 그런 국민인데, 국민을 모독하는 것이고, 국민이 판단할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민주당도 까놓고, 당의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게 더 설득력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전투환대통령 시절에 만든 방송법을 고치자는 것이고, 방송독점과 노조방송을 고치자는 것인 데 반대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방송법과 관련, 여당의 판단이 옳다는 얘깁니까. ▲국민들에게 다양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얘깁니다. 물론 집권여당의 정치적 목적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문과 방송이 친여권이라 해도 국민은 판단을 올바로 내려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활동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당장은 별다른 활동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역에 `낙동포럼 사랑방`이란 사무실을 위주로 지역구 활동을 하면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찾아봐야 할 듯 합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권오을 전 의원은 1957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경북고교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경북도의원을 지냈으며, 15대때 안동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16대, 17대 국회의원으로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당 정책위 부의장을 지냈으며,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장을 역임했다. 이명박 대통령 경선때 유세단장을 맡았던 공신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18대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 객원연구원으로 1년을 지낸 뒤 최근 귀국해 정계복귀를 꿈꾸고 있다.

2009-08-03

김국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

“인재경영·조직변화 추구하는 인사관리 전문가” 한국지방재정공제회는 공익성 추구하는 공제사업의 메카옥외광고센터 개소 등 사업영역 다각화로 수익창출 모색조직내 독서클럽 활성화… 내부역량 향상 변화 이끌어내 경북 안동출신의 김국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은 행정자치부 조직정책과장, 인사국장, 의정관 등을 역임하며 인사관리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4월 전국지방자치단체의 재해복구나 손해배상 등 공제사업을 취급하는 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이인위본(以人爲本)과 무한히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해 조직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응형무궁(應形無窮)을 경영철학으로 공제회 발전에 힘쓰고 있다. 김 이사장을 만나 고향 안동에서의 학창시절과 공제회 운영에 대한 얘기 등을 들어봤다.편집자주 -고향인 안동에서 지낼 때 추억 가운데 기억나는 게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저는 안동에서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지냈습니다. 전통 유림의 가풍에서 자라난 탓으로 항상 올바른 생각을 가꿔 나가고 책을 가까이 하는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특히 음악을 좋아해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합창단에서 활동했으며, 중학교 때는 학교 콩쿠르 대회에 반 대표로 나가서 입상한 경험도 있습니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100곡은 기본입니다. -고향을 떠나 대구서 고등학교를 다녔는 데, 에피소드가 있다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꿈에도 그리던 대구로 진학했습니다. 당시에는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안동에서는 대구만 해도 대도시로서 선망의 대상이 됐습니다.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하숙비가 너무 아깝기도 하고, 스스로 독립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학교 근처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기간 동안 저의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큰 힘이 됐지요. 일주일에 한 번 김치랑 된장이랑 반찬이랑 가득가득 싸서 머리에 이고 대구역으로 오시는 정성에 부모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깊게 누릴 수 있었던 행운을 가졌습니다. -대학졸업하던 해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는 데, 서울서 대학을 다닐 때 공부는 어떻게 했습니까. ▲서울서 대학을 다닐때는 학교 분위기상 고시공부에 전념하다 보니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4학년 졸업 카니발 때 참석은 해야하는 데 여학생 파트너가 없어서 친구하고 둘이서 서울 명륜동 학교앞 찻집을 전전하면서 파트너 구하러 다닌 적도 있을 정도였죠. 학업의 성취는 1974년 당시 2학년 겨울방학 때 안동 근처 학가산 중턱에 있는 광흥사에서 공부하던 때입니다. 불과 두 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산사에서의 학업집중도는 어디에서도 가져 보지 못한 좋은 기회였습니다. 저의 학교시절은 이렇게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소중한 시기였습니다. -공직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무엇보다 철도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법대 행정학과에 진학해서는 당시 명문학교의 기준이 고시합격이라는 분위기가 있어서 먼저 공직에 진출한 선배들로 부터의 자극도 한 몫을 했죠. 같은 학우들 가운데 고시합격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해서 일상의 환경이 모두가 고시공부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여건이었습니다. 그 이외의 동기라면 무엇보다도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집안의 전통과 가풍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행안부(옛날 총무처) 공무원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일과 힘들었던 일은 어떤 것입니까. ▲공무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주로 정부 조직관리와 인사제도와 운영, 행정정보화 업무를 수행해 왔습니다. 국장직으로는 정부 인사관리를 총괄하는 인사국장과 정부혁신 업무를 기획하는 혁신기획국장, 정부 행사와 의전업무를 총괄하는 의정관을 지내고, 최근에는 1급인 소청심사위원으로 재직 했습니다. 항상 저의 맡은 일이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정부내에 가장 중요한 분야와 관련되는 기능을 지원하는 일이었고, 담당 기능에 대해 새로운 방식을 적용하고 정책을 개선해 나름대로 행정의 선진화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힘들었던 기억은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부정과 비리로 명예롭지 못하게 은퇴하는 공직자들이 있어서 같은 공무원으로서 자긍심이 떨어질 수 있다는 문제로 고민도 많이 해 보았지요. -한국지방재정공제회가 무슨 일을 하는 지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 데, 소개해 주신다면.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재정적 지원 전문기관으로서 공유재산에 대한 손해배상과 재해복구 공제사업이 주요업무입니다. 그 이외에 지방청사 정비 지원사업, 옥외광고 사업, 적립금 운용을 통한 투자수익사업, 지방재정세미나 개최 등 회원지원 사업을 실시하는 특수법인이죠.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사업이란 점에서 보험과 공통점이 있지만, 기업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보험사와 달리 회원인 자치단체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역주민 이익을 목적으로 운영된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공제회는 지난해 5월 옥외광고센터를 개소하는 등 사업영역 다각화에도 나서고 있습니다. 또 자치단체 이장과 통장상해공제, 하수도 준설기 배상공제 등 신규사업개발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재정공제회 이사장으로서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취임직후 공제회 중장기 발전전략인 `KLFA Vision2020`을 선포, 공제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옥외광고사업을 새롭게 추진해 `대한민국최고의 공제서비스기관`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최상의 공제서비스, 다향하고 종합적인 금융서비스, 옥외광고산업의 선진화를 3대목표로 하고, 창의적인 조직, 성장하는 기관, 고객만족경영의 3가지 추진전략으로 비전달성을 위해 뛰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기관의 만족은 우선 내부고객의 만족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믿기때문에 조직내 임원과 직원들이 참여하는 자원봉사클럽인 리더스 클럽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조직내 독서클럽을 활성화하고 있습니다. 독서클럽에서는 경영관련 서적과 인문학 공부를 통해 감성리더십을 배우고, 부서간 장벽을 허물어 의사소통을 활성화시켜 내부역량을 향상시키는 변화도 가져왔습니다. 조직문화를 활성화해 개인의 역량을 개발하고 성장을 뒷받침하는 기관으로 거듭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시게 됐다는 데, 만학을 하게 된 동기와 학위취득과 관련해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저는 1977년도에 학부를 마치고 10년 뒤인 1987년에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정책학 분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 이후 약 20년 뒤인 2006년에 저의 모교인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됐지요. 저는 평소에 평생학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나이들어서, 특히 저의공직에서의 경험과 지식을 과학적 접근방법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다는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박사학위 논문은 현 정부들어서 공직사회에서 문제로 제기돼 온 고위공무원단제도에 대한 평가를 통해 정책적 개선방안을 도출하기 위한 실증적 연구입니다. 앞으로도 공부는 평생토록 하고 싶으며, 기회가 온다면 대학에서 제가 관심있게 공부하고 경험한 내용을 후학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끝으로 고향인 대구·경북지역민들에게 당부 또는 안부 한 마디. ▲저는 경북에서 태어나서 유소년 시절을 보내고 자라서는 대구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한 시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객지에서 생활하더라도 병들고 나이들어서는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땅에서 자라는 곡식과 야채, 과일을 먹어야 원기를 회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출향인사들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도 많이 하시고,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도 하고 계시지만, 고향을 자주 찾으시고 또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을 위해 헌신하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김국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은 김국현 이사장은 1955년 5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안동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고등학교와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졸업하는 해에 행시 19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미국인디애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오는 8월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할 예정이다. 공직에서는 총무처 행정전산과장,조직1·2과장을 거쳐 행정자치부 조직정책과장, 인사국장, 의정관, 행정안전부 소청심사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2009-07-27

안효대 국회의원 (울산 동구)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경북발전 위해 최선”경북 영양 출신의 안효대(울산 동구) 의원은 자신을 특별 사안에 대해 중재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현대중공업이라는 회사의 직원으로 일할 때부터 회사와 노조의 상생을 위해 움직여 왔던 경험이 지금의 국회의원 안효대를 있게 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듯한 그의 속내가 인터뷰 곳곳에 묻어났다.어떨 때에는 속사포처럼 빠른 말을 내뱉다가도 가끔은 감정에 치우친 듯한 인간적인 모습도 간혹 드러내 보인다. 특히나 지난 14일에는 시각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해 시각장애인용 점자 장애인등록증과 주민등록증 발급을 규정한 `장애인복지법`과 `주민등록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마련했다고 밝히는 등 한나라당 내의 서민정책 마련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안 의원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편집자주고향 영양, 청정 자연환경 살린 관광자원화 필요시각장애인용 점자주민증 발급 개정안 마련 등서민이 잘 사는 정책 마련 위해 바쁜 나날 보내-고향이신 영양은 아주 산골입니다.▲영양군은 세계사에도 없는 천연기념물입니다. 과거에는 생산적인 공장 등 개발의 특수가 군세를 유지했는데, 이제는 자연 풍광이 그대로 보전돼 있고 1급수에서 자라는 수많은 어종들이 유지되고 있으며, 산림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된 곳입니다.따라서 고향인 영양군을 관광자원화해, 나름대로 경쟁력 있는 군으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왕피천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가 봤는데, 그곳은 1급수 물고기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그만큼 천연자원 상태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사실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어린 시절의 영양은 어떠했습니까▲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물론 가보면 참 좋은 곳입니다. 저의 아버님이 40여 년 간 교직에 계셨는데, 전근하러 다니시는 아버님을 따라 영양과 봉화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영양 읍내에도 있었지만, 영양군 내의 6개 면을 모두 돌아다닌 것 같습니다. 결국 초등학교를 3번, 중학교를 3번 다녔습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공부가 잘 안된 것도 같습니다.공부를 좀 하려고 하면 전학을 가고, 또 전학을 가고 하다 보니까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초등학교 동창회를 3군데에서 합니다.그런데 저는 그 친구들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저를 다 알더라고요. -그 당시 6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구로 유학을 오셨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대구로 유학을 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부모님을 힘들게 했다고 합니다.하지만 홀홀단신으로 출발한 대구로의 유학이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울산의 현대중공업에 들어가면서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것 같습니다.특히 부모님이 안목을 가지시고 저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잘 받아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성장하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당시, 자취를 하면 연탄불로 밥을 지었고 그 밥을 아랫목에 묻어 놓고 학교에 다녔습니다.물론 도시락도 2개입니다.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보니, 도시락 2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지금 생각하면 도시락 만들기가 쉽지가 않은데 말입니다. -지난 총선에서 정몽준 의원과의 인연이 이슈가 됐습니다. ▲정 최고위원은 현대 중공업 회장 출신입니다.여기에다 같은 학사장교 출신이니, 그 인연이라는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 같습니다.사실 제가 현대중공업의 노사담당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모토는 분명히 법과 제도가 있듯이 노사관계도 원칙이 있어야 하되, 그 원칙이 근로자가 법적 범위내에서 요구해야 하며 회사도 양보를 미덕으로 하는 등 상대방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그 과정에서 당시 회장이었던 정몽준 최고위원과의 인연이 15년이 된 것 같습니다. 현재 당의 2인자 신데, 앞으로 조그만 역할이 있다면 보태야 하는 게 맞는 것으로 봅니다. -진보 1번지라는 울산에서 나오시면서, 조금은 긴장하셨을 텐데요. ▲같은 지역구에 14년을 있었습니다.그래서 이제는 지역 주민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무엇을 발전시켜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속된말로 어느 집에 젓가락 숟가락 수가 몇 개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이 `내가 가면 편하다. 우리 지역의 박사다`라는 생각이 통하게 하려고 합니다.이 이유 덕분에, 제가 선거운동 할 때에도 지역민들에게 “내가 4년 내내 친절하고 성실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항상 이야기했습니다.-고향민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어차피 제가 경북 출신이고 영양 출신인데, 우리 지역과 고향이 잘 되는 길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이는 인간의 기본적 도리이고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인데, 그곳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키운 곳이고 성장시킨 곳인데, 제가 사회적 위치에 있다면 지역을 위해 보답을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니,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박순원기자god02@kbmaeil.com안효대 의원은 1955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영양의 청기초등학교와 수비중학교를 나왔다.이후 대구로 유학, 청구고등학교와 계명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학사장교(ROTC 16기)로 군 복무를 마쳤으며, 현대중공업에서 노사문제 담당자로 15년간 근무하면서 정몽준 의원과 인연을 맺었다.현재는 울산 동구의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서, 장애인과 여성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지역 간 복지 불균형 문제 등 지자체의 근본 회생 방안에 대해 힘쓰고 있다.

2009-07-20

김영화 전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

국내 최초 `새집증후군` 보상 판결 이끌어내 경북 포항출신의 김영화 전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은 요즘 강의준비를 위한 저서집필에 한창이다. 지난 3월부터 연세대학교 외래교수로서 자신이 환경부에서 환경정책을 다뤘던 경험에다 자신의 저서인 환경영향평가론을 덧붙인 강의를 학생들에게 펼쳐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좀 더 충실한 강의를 위해 환경관련 논문과 최근 학계의 동향 등을 반영하기 위해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환경행정의 산 역사`이자 `환경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는 김 전 원장을 만나 고향에서의 추억과 공직에서의 에피소드, 근황 등을 들어봤다.편집자주산림청·지주 수차례 방문… 국립공원 구역조정문제 해결무조건적 환경보호보다 개발도 필요하다는 `환경개선론자`환경·경제 동반성장 위한 `저탄소 녹색성장 전도사` 자처 -어릴때 고향에서 뛰어놀던 추억들 가운데 어떤 일들이 인상에 남아있습니까. ▲어릴 적 기억은 주로 농사일에 관한 기억뿐입니다. 학교를 마치면 소 먹일 풀을 베고, 잡초를 뽑으러 다녔죠.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이런 일을 평생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검정고시를 통해서라도 고교에 진학하게 된 셈입니다. -어릴 때 장래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릴 때는 교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촌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선생님이 가장 좋은 직업으로 보일 때였습니다. 좀 더 커서는 가정형편을 고려해 공짜로 대학을 나올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육사는 아시다시피 학비는 물론이고 잠자리걱정이 없을 뿐 아니라 용돈 걱정도 없어서 좋았습니다. -육사를 졸업한 뒤 군인의 길을 가지 않고, 공무원생활로 뛰어든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그 당시 고 박정희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추진력있고, 청렴한 공무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공무원시험에 응시하도록 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박 전대통령을 매우 존경해 왔기 때문에 그 뜻에 따라 행정공무원 시험을 치르게 됐습니다. 군에서 봉사를 하나 공무원으로서 봉사를 하나, 국가에 대해 봉사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있었고, 존경하는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보람있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공직자로 근무할 때 보람있었던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을 들 수 있을까요. ▲환경부 관리관(1급)으로서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장으로 일할 때입니다. 당시 새집증후군으로 인한 아토피성 피부염에 대한 최초의 피해보상판정을 해 친환경주택건설 자재 개발과 친환경 벽지 및 도료 개발에 기여했던 일이 보람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판정내용은 전국 일간지 1면에 보도될 만큼 관심을 모았습니다. 대형 건설업체가 경기도에 시공한 아파트 벽지 자재에서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물질이 나왔고, 이 때문에 한살난 남자아이의 아토피 피부염이 생겼기 때문에 치료비와 벽지와 도료 등 내부장식을 모두 바꿔주도록 판정을 냈죠. 그 이후 지어지는 아파트에는 모두 친환경벽지 및 도료가 쓰이게 됐습니다. -환경부 자연보전국장으로 근무했을 때는 주로 어떤 업무를 하셨는 지요. ▲당시 환경부가 10년간 해결하려고 노력해도 풀지 못했던 오랜 숙제로 국립공원의 구역조정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업무를 맡은 뒤 땅을 가진 개인과 국립공원의 구역조정문제를 해결했죠. 대전에 있는 산림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땅 주인들을 만나 끈질기게 설득하고 협의해 어렵게 국가적 숙제를 해결했죠. 또 동강유역 생태보전지역 지정문제도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당시 댐 건설이 중지된 후 생태보전지역을 지정해야 했는 데, 영월·평창·정선 지역담당 정책과장을 40여회 만났습니다. 땅을 보상해 사들이고, 비료나 농약을 못쓰게 하고, 유기농으로 유도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환경부 기획예산담당관으로 예산업무를 3년동안 맡았는 데, 이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풍치를 앓으면서 어금니 4개를 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때 환경개선특별회계를 최초로 도입해 환경개선사업의 투자를 확대하고, 관리운영을 효율화하는 데 힘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부가금과 부담금 등을 거둬 일반 세금의 비중을 줄이는 자립형 특별회계 도입이 그때가 처음인 것으로 압니다. -환경영향평가에 대해서는 저서도 쓰셨던 데, 환경영향평가를 한마디로 말하면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환경영향평가는 원래 미국에서 나온 제도인 데, 환경영향평가를 해서 하라거나 하지말라는 결정을 하는 의사결정제도입니다. 다만 미국은 땅이 넓은 나라여서 하지말라고 해도 다른 데 가서 개발사업을 하면 되지만, 일본이나 독일, 또는 우리나라처럼 땅이 좁은 나라에서는 의사결정도구로 쓰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땅이 좁은 나라에서 개발사업을 어차피 해야 한다고 하면 환경영향이 적은 쪽으로, 또는 환경을 해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쪽으로 통제해서 환경을 관리하는 수단으로 바꿔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환경영향평가제도가 사업을 못하게 해야 하는 데, 사업자에게 면죄부를 만들어준다는 비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에) 아주 나쁜 것은 못 들어오게 막아야 하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으나 피해가 있는 것은 피해를 줄이거나 오염을 줄이고, 사후에 계속 오염관리를 해서 환경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운동과 관련해서는 어떤 지론을 갖고 있습니까.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은 대략 두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는 무조건 `개발은 환경파괴`라고 보고, 환경을 개발하지 않고 보호해야 한다는 환경보호론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환경개선론자입니다. 환경도 놔 두면 자체적으로 퇴화하기 때문에 돈을 들여서 더 좋게 만들어야 하고, 개발도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죠. 저는 환경개선론자 입니다. 경제성장이 환경을 개선하고, 환경이 성장을 지원하는 선순환 경제와 환경의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영어로 환경분야 회의도 주재할 만큼 영어에 능통하다고 들었습니다. ▲공무원 생활하면서 아침7시부터 시작하는 종로시사영어학원을 3년동안 다녔습니다. 두달이면 끝나는 코스를 매년 6회 반복해 약 18번 반복한 셈이죠.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눈이 많이 내려 학원에 늦게 도착했는 데, 들어서자 마자 교재의 몇쪽 몇번 문제를 공부하고 있는 지 알 정도가 되더군요. 그리고 난 뒤에 미국유학을 갔는 데, 공부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영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환경분야 회의라면 영어로 충분히 진행할 정도입니다. -현재 정부에서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저탄소 녹색성장은 어떻게 보십니까. ▲저탄소 녹색성장이야 말로 환경개선론자의 사상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정책입니다. 저는 대학강의에서도 녹색기술과 녹색산업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녹색생활화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죠. 에너지 절약이나 물절약, 생활용품절약, 걷기운동 확산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강조합니다. 저 스스로는 `저탄소녹색성장의 전도사`라고 자부하고 있을 만큼 지지하고 있는 정책방향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김영화 전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은 김영화 전 원장은 1950년 경북 포항시 북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기북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검정고시를 거쳐 대구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태국의 아시아과학기술대학원에서 환경공학석사, 영남대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1978년 10월 육사출신을 위한 특별고시를 통해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환경부에서 환경평가, 수질정책, 기획예산 업무를 담당했다. 대구지방환경청장, 영산강환경관리청장, 한강환경관리청장, 환경부 공보관을 거쳤으며, 환경부 자연보전국장과 환경분쟁조정위원장으로 역임한 뒤 지난 2004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으로서 환경기술개발에 힘썼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외래교수로서 환경영향평가와 관련해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지난 2001년에 출간한 `최신 환경영향평가론`이 있는 데, 지난 2006년 2쇄에 들어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교재 또는 참고서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9-07-13

홍희덕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서민 소비생활 촉진해야 대한민국 경제 되살아나” 2008년 총선 당시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으로 유명세사회적 약자·서민들 권익 옹호·생활향상 노력 보람 느껴현재 비정규직 문제, 정부가 나서 정규직 전환 주도해야"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경북 상주의 조그마한 아이에서 아버지를 도와 일하는 소작농으로, 그리고 우유배달과 도로포장일 등 그 옛날 우리네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가족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러다 청소부, 즉 요즘 같지 않았던 냉대 속의 환경미화원 출신의 국회의원. 그가 경북 상주 출신의 홍희덕(비례대표) 민주노동당 의원이다. 인터뷰를 통해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 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문을 뗀 그의 꿈은 서민이 행복해지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5명 중의 1명인 홍 의원은 다른 정당의 10배의 몫을 해야 한다. 때문에 의원실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오히려 본회의장이나 상임위에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할 지경. 그가 찾아가야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있었던 시간. 그 시간에도 그는 쌍용차 문제라든가, 비정규직법 관련 문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이신데,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78년도만 하더라도 아직 우리나라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70년대 공업화가 진행되고 부동산개발도 진행됐지만 그것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노동자, 서민들은 그때도 지금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초등학교 졸업 후 13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소작농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8년 배곯는 자식들을 볼 수 없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유배달, 도로포장 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93년도에 환경미화원이 되면 자녀들 학자금을 지원해준다는 말에 의정부시에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하게 돼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상주의 은척 초등학교 당시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그 시절 이야기야 다들 어렵고 힘들던 시기였다는 것이 기억합니다. 십릿길이 넘는 거리를 꽁꽁 언 발과 손을 입으로 불며 학교에 가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밤에 산길을 갈 때는 무서워서 크게 노래부르며 뛰어가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난입니다. 다들 가난했지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아버지 농사를 도우며 노동을 했습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습니다. 옛날 기억도 많이 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대구와 경북 출신으로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대구·경북지역이 좀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난한 노동자, 서민의 삶을 살아오다 보니 노동자, 서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진보정당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93년 의정부시에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해서 생활이 조금 나아지나 싶었지만 98년 IMF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환경미화원들의 소속이 의정부시 시설관리공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사회적 약자인 환경미화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을 하게 됐고 자연스레 노동조합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정치세력화를 고민하고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 총선 당시에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으로 유명세를 탔는데. ▲처음 국회에 들어올 때는 사실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년 전 처음 들어올 때처럼 임기가 끝날 때까지 노동자, 서민들의 이해를 대변하자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사회적 약자, 노동자, 서민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의원님은 6,70년대를 산 억척스러운 아버지의 느낌인데, 고향민들에게 하실 말씀은 ▲과거 6,70년대 우리가 살아갈 때 다들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까? 전쟁 직후 이어진 가난과 수많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왔습니다. 지금 또다시 경제위기다 뭐다 하면서 서민들의 삶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의 서민들의 삶도 많이 힘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힘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온 저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저 자신도 다짐하고 있습니다. -현재 비정규직법 문제로 국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은 비정규직의 남용과 차별입니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기간을 유예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는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금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주도해야 합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비정규직법 개악은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오히려 비정규직의 사용을 제한하는 형태로 비정규직의 숫자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저임금의 소폭 인상, 그리고 박사 환경미화원 등이 현재 사회의 모습입니다. 의원님이 바라시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있다면. ▲얼마전 2010년 최저임금이 결정됐습니다. 고작 2.75% 인상, 110원이 올랐습니다. 경영계와 정부에서는 경제가 어려워서 최저임금을 오히려 삭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어떻습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 오히려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많은 나라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경제가 어려울수록 최저임금을 인상해서 서민들이 소비를 하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경제가 살아납니다. 한국은 지금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최저임금은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는 되도록 올려야 합니다. 제가 법안까지 제출해놓은 상황입니다. 이명박 정부와 국회가 진심으로 노동자, 서민들의 생활과 삶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홍희덕 국회의원은 1949년 경북 상주 출생, 은척초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 93년 경기 의정부시 환경미화원으로 입사, 2004년 제3대 경기노동조합 위원장, 2006년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초대위원장, 2008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2009-07-06

적자기업 흑자 전환시키는 `마이더스의 손`

`적자기업 구원투수`, `소방수 CEO`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경북 김천출신의 배영호 코오롱 사장이다. 우연찮게도 적자기업만을 맡아 흑자기업으로 바꿔놓은 이력때문이다. 적자에 허덕이던 코오롱제약을 살려냈고, 코오롱유화의 성장기반을 닦아놓은 게 바로 그다. 강성노조로 소문난 구미 코오롱 노조를 보듬어 지난 2007년 `항구적 무파업선언`까지 이끌어낸 후 영업이익도 지난해에 비해 두배 가까이 불렸다. 글로벌 경기침체속에 코오롱을 고부가가치 기업으로 변모시킨 배영호 사장의 어린시절 추억들과 경영자로서의 성공비결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고향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비록 태어나기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부친 고향이 김천시 조마면이어서 김천출신이라고 해야겠죠. 학교는 부산 초량초등학교를 다니다 김천으로 전학해 서부초등학교와 김천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죠. 어릴 때 추억이라면 이사만 열 번 정도 다닐 정도로 집안사정이 어려웠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세끼 밥 잘먹는 게 꿈이었죠. 소풍때는 부추김치만 싸갔을 정도였습니다. -대학때 섬유공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한창 공부해야할 고등학교 3학년때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해야했습니다. 당시 가르치던 아이가 제일모직 공장장집이었어요. 매일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빚독촉하던 일이 다반사였던 제 입장에서 `나는 앞으로 사업은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한 데다, 그 집의 생활이 매우 윤택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섬유쪽이 취직도 잘 되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섬유공학을 전공하게 됐죠. -입사후 임원만 21년, CEO경력도 11년째에다 `적자기업 구원투수`란 별명을 얻었는 데, 어떤 뜻입니까. ▲워낙 상태가 안좋은 사업을 자꾸 맡다보니 제가 기업인이라기 보다 의사라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았을 정도입니다. 가장 먼저 미국 뉴욕지사 근무후 1981년 귀국해 타이어코드 사업부장을 맡았는 데, 가동률이 40%도 안돼 존폐기로에 서있었습니다. 이유를 살펴보니 거래선이 금호타이어에 의존하고 있어 그 회사가 파업하면 조업이 중단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최고의 타이어회사인 미국의 굿이어사에 납품할 수 있도록 1년여 노력끝에 판로를 뚫었습니다. 그 결과 적자에서 흑자로 돌릴 수 있었죠. 1998년에는 코오롱 제약겸 코오롱 유화 사장으로 발령났는 데, 코오롱 제약은 부도직전이었습니다. 저는 부임하자 마자 300여명의 전 직원에게 1인당 100만원의 격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직원 사기부터 올려놓고, 발로 뛰는 영업망을 점검해야겠다는 `역발상`을 했는 데, 이게 먹혀들었죠. 1년여만에 흑자로 돌려놨습니다. 코오롱유화 역시 재임기간동안 매출이 두배이상 늘었고, 수익구조가 개선돼 이제는 알짜배기 회사가 됐습니다. 코오롱 사장에 취임한 뒤에는 노조문제를 해결했고, 이어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통해 지난 1.4분기 매출액 4천311억원, 영업이익 405억원으로 지난 해 동기에 비해 영업이익이 두배가까이 불었습니다. 이런 성과가 그런 별명의 유래가 된 셈입니다. -강성노조로 유명한 코오롱 노조를 노사화합의 모델로 탈바꿈시켰는 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코오롱 사장으로 취임할 때는 구미 코오롱 노조와의 갈등때문에 회사 존립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최우선으로 노조문제를 해결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혁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데 동의가 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해 취임식을 며칠 앞당겨 치른후 신년을 맞았는 데, 모 일간지 신년특집기사 2면에 GM대우 관련 기사가 난 걸 보게됐습니다. 영국인인 닉 라일리 GM대우사장이 신년 1월1일 인천 앞바다에서 노사상생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사진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두가지를 느꼈습니다. 먼저 인천 대우노조가 노조운동이 제일 심했던 곳인 데, 이런 회사도 노사화합을 이루는 데,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로 외국사람도 노사문제를 잘 해결하는 데, 같은 문화에 같은 민족인 내가 해결못할 일이 없다고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도 자신감만으로 해결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비결이 있었습니까. ▲저는 사원들에게 회사, 즉 CEO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습니다. 저를 믿고 따르면 회사도 발전하고, 사원들에게도 성과급이 돌아올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구미공장장으로 3년을 근무했던 인연이 도움이 됐습니다. 또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3가지를 지시했습니다. 먼저 경산공장에 사장전용 승용차가 있었는 데, 자주 쓰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승용차를 매각토록 지시했습니다. 또 사장이 쓸 수 있는 골프멤버쉽카드도 1개만 남겨놓고 모두 팔도록 했습니다. 비서도 2명에서 1명으로 줄였습니다. 이런 작은 것들부터 솔선수범한다는 자세로 처리했습니다. 또 사원들에 대해 신뢰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전 사원 2천명에게 100만원씩 20억원을 들여 격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이 돈으로 개인부채를 정리하고 같이 열심히 일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흔히 일 잘하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하지만, 저는 먼저 돈을 주면서 일 잘할 것으로 믿는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 데요. ▲코오롱은 임금동결을 3년간 했습니다. 월급을 올리게 되면 회사가 어려워 정리해고를 하게 되니까 오히려 동결해서 성과를 올린 뒤에 성과급을 주겠다고 설득을 했습니다. 성과급을 주면 결국 연봉개념으로 보면 봉급이 오른 것과 같은 효과가 납니다. 그러나 노사간 신뢰가 없어서 대부분 노조가 받아들이지 못하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노조는 받아줬습니다. 저와 회사를 믿어 준 것입니다. 제가 코오롱 유화나 코오롱 제약 사장을 맡아서 적자기업을 흑자기업으로 만들어낸 `마이더스의 손`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던 것도 신뢰의 기반이 된 게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아예 노조가 영업까지 나서서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일명 `노사부부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회사 사장은 남편이고, 노조는 부인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바깥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고, 부인은 집안살림을 아껴쓰고 해야 그 집이 잘된다는 논리죠. 더 잘되는 집은 부인도 밖에 나가서 돈벌어오는 집이 있잖아요.(웃음) 그래서 노조위원장이 거래선에 가서 영업을 하기도 합니다. 대구 상신브레이크도 코오롱의 납품업체인 데, 노조위원장이 직접 가서 “책임지고 좋은 품질의 물건을 제때 납품하겠다”고 영업활동을 펼쳐 화제가 됐죠. 요즘은 노조에서 저보고 자주 공장에 내려오지 말고, 돈많이 벌어서 성과급을 많이 달라고 합니다. 노조위원장이 원가절감팀장을 맡아 뛰고 있고요. 이제 신뢰의 기반을 굳힌 이상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경기침체로 어려운 고향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는 어릴 때 학비가 없어서 시험준비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무한불성(無汗不成)`즉, 땀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려움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극복해 낼 때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배영호 코오롱 사장은 코오롱 배영호 사장은 1944년 부산에서 출생했으나, 초등학교때 부친의 고향인 김천으로 전학해 서부초등학교, 김천중학교를 거쳐 경북고와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주)코오롱에 입사해 뉴욕지사 근무, 타이어코오드 사업부를 거쳐 1989년 산자사업본부장으로 기업의 별인 이사를 달았다. 이후 구미공장장을 거쳐 1998년 코오롱제약 겸 코오롱유화 사장을 맡아 적자기업을 흑자로 돌려놓았으며, 2006년 (주)코오롱 사장으로 취임해 코오롱 도약의 기수로 뛰고 있다.

2009-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