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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기업 흑자 전환시키는 `마이더스의 손`

김진호기자
등록일 2009-06-29 00:00 게재일 2009-06-29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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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기업 구원투수`, `소방수 CEO`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경북 김천출신의 배영호 코오롱 사장이다. 우연찮게도 적자기업만을 맡아 흑자기업으로 바꿔놓은 이력때문이다.

적자에 허덕이던 코오롱제약을 살려냈고, 코오롱유화의 성장기반을 닦아놓은 게 바로 그다. 강성노조로 소문난 구미 코오롱 노조를 보듬어 지난 2007년 `항구적 무파업선언`까지 이끌어낸 후 영업이익도 지난해에 비해 두배 가까이 불렸다. 글로벌 경기침체속에 코오롱을 고부가가치 기업으로 변모시킨 배영호 사장의 어린시절 추억들과 경영자로서의 성공비결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고향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비록 태어나기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부친 고향이 김천시 조마면이어서 김천출신이라고 해야겠죠. 학교는 부산 초량초등학교를 다니다 김천으로 전학해 서부초등학교와 김천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죠. 어릴 때 추억이라면 이사만 열 번 정도 다닐 정도로 집안사정이 어려웠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세끼 밥 잘먹는 게 꿈이었죠. 소풍때는 부추김치만 싸갔을 정도였습니다.

-대학때 섬유공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한창 공부해야할 고등학교 3학년때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해야했습니다. 당시 가르치던 아이가 제일모직 공장장집이었어요. 매일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빚독촉하던 일이 다반사였던 제 입장에서 `나는 앞으로 사업은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한 데다, 그 집의 생활이 매우 윤택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섬유쪽이 취직도 잘 되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섬유공학을 전공하게 됐죠.

-입사후 임원만 21년, CEO경력도 11년째에다 `적자기업 구원투수`란 별명을 얻었는 데, 어떤 뜻입니까.

▲워낙 상태가 안좋은 사업을 자꾸 맡다보니 제가 기업인이라기 보다 의사라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았을 정도입니다. 가장 먼저 미국 뉴욕지사 근무후 1981년 귀국해 타이어코드 사업부장을 맡았는 데, 가동률이 40%도 안돼 존폐기로에 서있었습니다. 이유를 살펴보니 거래선이 금호타이어에 의존하고 있어 그 회사가 파업하면 조업이 중단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최고의 타이어회사인 미국의 굿이어사에 납품할 수 있도록 1년여 노력끝에 판로를 뚫었습니다. 그 결과 적자에서 흑자로 돌릴 수 있었죠. 1998년에는 코오롱 제약겸 코오롱 유화 사장으로 발령났는 데, 코오롱 제약은 부도직전이었습니다. 저는 부임하자 마자 300여명의 전 직원에게 1인당 100만원의 격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직원 사기부터 올려놓고, 발로 뛰는 영업망을 점검해야겠다는 `역발상`을 했는 데, 이게 먹혀들었죠. 1년여만에 흑자로 돌려놨습니다. 코오롱유화 역시 재임기간동안 매출이 두배이상 늘었고, 수익구조가 개선돼 이제는 알짜배기 회사가 됐습니다. 코오롱 사장에 취임한 뒤에는 노조문제를 해결했고, 이어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통해 지난 1.4분기 매출액 4천311억원, 영업이익 405억원으로 지난 해 동기에 비해 영업이익이 두배가까이 불었습니다. 이런 성과가 그런 별명의 유래가 된 셈입니다.

-강성노조로 유명한 코오롱 노조를 노사화합의 모델로 탈바꿈시켰는 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코오롱 사장으로 취임할 때는 구미 코오롱 노조와의 갈등때문에 회사 존립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최우선으로 노조문제를 해결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혁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데 동의가 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해 취임식을 며칠 앞당겨 치른후 신년을 맞았는 데, 모 일간지 신년특집기사 2면에 GM대우 관련 기사가 난 걸 보게됐습니다. 영국인인 닉 라일리 GM대우사장이 신년 1월1일 인천 앞바다에서 노사상생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사진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두가지를 느꼈습니다. 먼저 인천 대우노조가 노조운동이 제일 심했던 곳인 데, 이런 회사도 노사화합을 이루는 데,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로 외국사람도 노사문제를 잘 해결하는 데, 같은 문화에 같은 민족인 내가 해결못할 일이 없다고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도 자신감만으로 해결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비결이 있었습니까.

▲저는 사원들에게 회사, 즉 CEO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습니다. 저를 믿고 따르면 회사도 발전하고, 사원들에게도 성과급이 돌아올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구미공장장으로 3년을 근무했던 인연이 도움이 됐습니다. 또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3가지를 지시했습니다. 먼저 경산공장에 사장전용 승용차가 있었는 데, 자주 쓰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승용차를 매각토록 지시했습니다. 또 사장이 쓸 수 있는 골프멤버쉽카드도 1개만 남겨놓고 모두 팔도록 했습니다. 비서도 2명에서 1명으로 줄였습니다. 이런 작은 것들부터 솔선수범한다는 자세로 처리했습니다. 또 사원들에 대해 신뢰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전 사원 2천명에게 100만원씩 20억원을 들여 격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이 돈으로 개인부채를 정리하고 같이 열심히 일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흔히 일 잘하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하지만, 저는 먼저 돈을 주면서 일 잘할 것으로 믿는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 데요.

▲코오롱은 임금동결을 3년간 했습니다. 월급을 올리게 되면 회사가 어려워 정리해고를 하게 되니까 오히려 동결해서 성과를 올린 뒤에 성과급을 주겠다고 설득을 했습니다. 성과급을 주면 결국 연봉개념으로 보면 봉급이 오른 것과 같은 효과가 납니다. 그러나 노사간 신뢰가 없어서 대부분 노조가 받아들이지 못하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노조는 받아줬습니다. 저와 회사를 믿어 준 것입니다. 제가 코오롱 유화나 코오롱 제약 사장을 맡아서 적자기업을 흑자기업으로 만들어낸 `마이더스의 손`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던 것도 신뢰의 기반이 된 게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아예 노조가 영업까지 나서서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일명 `노사부부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회사 사장은 남편이고, 노조는 부인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바깥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고, 부인은 집안살림을 아껴쓰고 해야 그 집이 잘된다는 논리죠. 더 잘되는 집은 부인도 밖에 나가서 돈벌어오는 집이 있잖아요.(웃음) 그래서 노조위원장이 거래선에 가서 영업을 하기도 합니다. 대구 상신브레이크도 코오롱의 납품업체인 데, 노조위원장이 직접 가서 “책임지고 좋은 품질의 물건을 제때 납품하겠다”고 영업활동을 펼쳐 화제가 됐죠. 요즘은 노조에서 저보고 자주 공장에 내려오지 말고, 돈많이 벌어서 성과급을 많이 달라고 합니다. 노조위원장이 원가절감팀장을 맡아 뛰고 있고요. 이제 신뢰의 기반을 굳힌 이상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경기침체로 어려운 고향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는 어릴 때 학비가 없어서 시험준비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무한불성(無汗不成)`즉, 땀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려움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극복해 낼 때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배영호 코오롱 사장은

코오롱 배영호 사장은 1944년 부산에서 출생했으나, 초등학교때 부친의 고향인 김천으로 전학해 서부초등학교, 김천중학교를 거쳐 경북고와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주)코오롱에 입사해 뉴욕지사 근무, 타이어코오드 사업부를 거쳐 1989년 산자사업본부장으로 기업의 별인 이사를 달았다. 이후 구미공장장을 거쳐 1998년 코오롱제약 겸 코오롱유화 사장을 맡아 적자기업을 흑자로 돌려놓았으며, 2006년 (주)코오롱 사장으로 취임해 코오롱 도약의 기수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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