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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꿈이 있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그 길 가야 후회 남지 않으리…

◇ 18개국 38,000킬로미터를 달려 집으로118일(2019년 5월 10일-8월 30일) 동안 38,000킬로미터를 달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체코-오스트리아-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벨기에-네덜란드-독일-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에스토니아(18개국)를 돌아 다시 러시아를 지나왔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딱히 일상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생업을 뒷전에 두고 다녀왔으니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고단하게 밥벌이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한 번도 떠난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여행의 기억이 평생 자산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장엄한 시베리아와 북유럽의 자연 속을 마음껏 달린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다.처음 세웠던 계획, 유럽의 서점과 도서관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오겠다는 다짐은 흐지부지 되었고 그야말로 주마간산 달리기만 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없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아내와 아이들이 여행을 끝낸 모습을 보고 했던 말은 “몇 개월 동안 10년은 늙은 것 같아!”였다. 4개월 동안 많은 에너지를 썼고 한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예전처럼 몸으로 밀어붙이는 건 더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고, 철없이 집을 떠나 길을 헤매는 일이 예전과 다르게 힘들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언제까지 철없는 일에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행하는 동안 돌아가면 덜 소비하고 더 단순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것은 정리하고, 가진 것은 가능한 살려 쓰고, 능력 밖의 일은 쳐다보지 않고, 목적 없이 멀리 떠나지 않고, 사람 모으는 일에 힘쓰지 않고, 관심 없는 일에 허투루 에너지를 흩지 않고. 이번 여행에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내가 가진 에너지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지만,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단순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항로가 다시 열리길여행을 다녀오고 1년이란 짧은 시간이 지난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한 이후부터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여행 하는 동안 거쳐 간 국가들 대부분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 받고 있고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다. 사람도 물류도 오가기 힘들어지니 점점 항로도 해로도 오가는 비행기와 배가 줄고 있다. 당장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던 페리도 운항을 멈추었다. 예정되어 있던 포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항로도 언제 열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여행, 항공, 해운 등 많은 분야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9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전쟁이 아닌 바이러스가 세상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지난해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오토바이 대륙 횡단 여행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내일도 예측하지 못하는 게 사람 일이라 마음먹은 것은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다. 마흔 이후의 삶은 상승의 변곡점을 찍고 내리막을 걷는 일만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뒤로 미뤄선 안 된다. 내일, 한 달 후, 내년에, 형편이 나아지면…. 하고 싶었던 일을 뒤로 미루면 결국 나중에 후회할 일만 남는다. 다들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일상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일도 가족도 잠시 놓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세상일은 모두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거둘 수가 없는 법이다.대륙 횡단 여행, 오토바이 여행을 꿈꾸는 분들을 가끔 만난다. 딱 한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한다는 건 무리지만 여행하는 동안 절실히 느낀 건 ‘체력’이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중도포기하기 쉽다.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대사를 보고 무릎을 쳤었다. 사범이 바둑판을 앞에 두고 담담하게 주인공 장그래에게 말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야하는 여행에선 첫째도 둘째도 체력이다.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집중력만 잃지 않았다면 러시아를 벗어나며 미끄러졌던 사고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니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니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데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니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고마운 친구이자 독자였던 형주 씨를 기억하며사십 대에 1년 동안 여행자로 살겠다는 버킷리스트는 이뤘으니 남은 3년 동안(난 마흔일곱이다) 오십 대에 해보고 싶은 것들에 대해 계획을 세워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다녀왔던 긴 여행 대부분 준비 기간이 3년이었다. 이번 여행도 경비를 마련하고 오토바이 정비하는 법을 배우고…. 준비하는데 3년이 걸렸다. 지천명이 되면 오토바이를 두고 자전거로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게 꿈이다. 자전거 여행에 대한 영감은 우랄 산맥을 넘다 만난 다이스케 씨에게 얻었다. 그는 3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여행했고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가 요트로 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길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모든 걸 갖추고 떠난 이가 없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고, 기회가 왔을 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을 뿐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책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여행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고,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호기심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나의 스승이었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이 사라지는 순간 더는 여행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여행을 다녀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 분들 중에 남형주 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형주 씨에 대해선 지난 1월 22일자 연재글에 동해항까지 마중 나온 일로 짧게 언급하기도 했다. 형주 씨를 처음 만난 건 2017년 여름이었고, 졸저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을 읽었다며 파주에서 찾아왔었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인연으로 성수공고에서 진행됐던 오토바이 정비 수업도 함께 듣고, 형주 씨가 운영하는 펜션에서 북토크도 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책방을 찾아 여행하는 이야기를 누가 재밌게 읽어줄까 했었는데, 형주 씨 한 사람 덕분에 그 걱정을 덜었었다. 이태준 선생은 “목전에는 독자가 적어도 좋다. 아니 한 사람도 없어도 슬플 것이 없다”고 썼지만 그건 거짓말에 가깝다. 읽는 이 없는 글을 쓴다는 건 고단하고 슬픈 일이다.형주 씨는 내게 소중한 친구이자 독자였다. 여행기도 꼬박꼬박 읽고 있다며 연락했었다. 그런 형주 씨가 사고로 지난 5월 세상을 떠났다. 조만간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나겠다고, 지금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연락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었다. 형주 씨의 소식을 듣고 인생은 짧고 덧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떠났다 돌아오고 누군가에겐 꿈으로 남았을 뿐이다. 불공평한 일이다. 꿈이 있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길을 가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형주 씨를 떠올리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7개월 동안 서른한 번의 소중한 지면을 내준 경북매일과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끝

2020-07-28

후회 없이 달려본 ‘길의 끝’… 여행의 깊이를 찾아가다

◇ 다시 시베리아를 달리다모스크바를 떠나 처음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야 한다. 오토바이든 차든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났던 이들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지 않는다. 시베리아를 지나는 고생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고, 그 시간 동안 유럽에서 머무르며 여행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처음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계획했을 때도 여느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최서단 포르투갈 호카곶까지 갔다가 스페인에서 오토바이를 배로 보내고 여유롭게 파리나 베를린 같은 유럽의 대도시에 가서 지내다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었다. 왕복한다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2018년 계획했던 여행이 러시아 월드컵으로 틀어지고(아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을 예약할 수 없었다.) 2019년 다시 떠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왕 다녀오는 거 처음부터 끝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오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다시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건 힘들 테니 이번 기회에 후회 없이 달려보자 싶었다.처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할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돌아가는 길은 담담했다. 느긋하게 무리하지 않고 달리며 처음 달릴 때 놓쳤던 걸 자세히 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다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문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때까지 8월 내내 러시아 곳곳은 이상기후로 몸살을 알았다. 유럽의 폭염을 벗어나니 시베리아에선 폭우가 자주 쏟아졌다.그리고 10년이 된 로시가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그동안 관리를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이와 짧은 기간 동안 달린 거리를 생각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모스크바에서 2천500㎞쯤 달려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을 때는 그동안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튀어나왔다. 진동을 흡수하는 뒷바퀴 고무 댐퍼와 베어링, 체인, 스프라켓 모두 교체해야 했다.노보시비르스크의 수리점을 찾아갔으나 당장 부품이 없어 일주일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만 듣고 고민에 빠졌다. 부품이 오길 기다렸다간 9월이 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750㎞ 떨어진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부품이 있다는 이야길 듣고 무조건 짐을 챙겨 출발했다. 다행인 것은 크라스노야르스크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 편에 있다는 것.◇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멈춰서다결국 크라스노야르스크 가는 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뒷바퀴 휠 베어링이 마모되어 파편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시베리아 허허벌판에서 또다시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러시아를 벗어나기 직전 미끄러져 오토바이가 크게 부서진 이후 또다시 큰 난관에 부딪힌 셈. 어떻게든 달려보려 했지만 이대로 주행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결국 오토바이는 길가에 세워놓고 타박타박 걸어서 근처 카페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영어도 통하지 않고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어서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다. 오토바이가 고장 나서 싣고 갈 트럭이 필요하다고. 문자 이전에 그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런 상황에서 실감할 줄이야.카페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앞 테이블에서 명함을 찾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에 있는 견인트럭 기사에게 연락하는 중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 10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캐메로보였다. 견인트럭이 오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다. 견인비를 흥정하고(1500루블) 캐메로보까지 가는 데만 또 3시간(오토바이를 싣고선 빠른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캐메로보에 BMW 오토바이를 고칠 수 있는 곳을 찾느라 또 몇 시간을 보냈다. 정비소를 몇 곳이나 돌아보았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견인트럭 기사 아저씨(안타깝게도 통성명했으나 기억하지 못한다)가 아니었다면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가는 길이 험난했을 것이다. 예정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그가 여러 곳 수소문해서 오토바이를 내려준 곳은 ‘FBR모토’였다. 여러 곳이 문제였지만 뒷바퀴 휠 베어링이 가장 큰 문제였다. 3개의 베어링이 들어가는데 2개는 규격품이 있지만 1개가 모자랐다. 미캐닉 빅토르 씨가 근처 자동차 수리점에 가서 딱 맞는 베어링을 찾아와선 나에게 “럭키 가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을 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난관에 빠질 때마다 항상 선한 사람들이 나타나 해결해주는 건 나의 복이다.국경을 넘어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마다 항상 그랬다. 단 한 번도 물건을 도둑맞은 적도 없고 누구에게 속은 적도 없다.◇ 비를 뚫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다‘FBR모토’에서 말썽이 생길만한 모든 부품을 교체하고 난 뒤 캐메로보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진 날씨 외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온전히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다.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를 약 3천㎞ 남겨둔 치타에 도착해서 느긋하게 여행하겠다는 나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다. 일주일에 딱 한 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떠나는 배가 있는데 추석을 한 주 앞두고 떠나는 배가 취소되었다는 통관대행사의 메일을 받았다. 그 전에 떠나는 배를 타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하고 그 다음에 떠나는 배는 추석 귀경 행렬과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정이었다.푸틴 대통령이 참석하고 여러 국가의 고위 관계자가 참여하는 동방경제포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탓이었다. 딱 5일을 남겨놓고 치타에 도착했으니 통관대행회사에 오토바이를 입고하는 날을 따지면 무슨 일이 있어도 4일 안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야만 했다. 하루 700㎞는 무조건 달려야만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 4일 동안 거의 내내 비를 맞은 건 여행의 피날레 치곤 꽤나 스릴 있고 잔인했다.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니 마지막 힘까지 탈탈 털어서 쓰고 쭉정이만 남은 기분이었다. 처음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종일 잠만 잤다. 숙소 근처 한국 영사관이 있어 지날 때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는 날이 기억났다. 면허증 번역 공증서를 받으러 갔을 때 영사님이 직접 나와서 “안전하게 다녀오라” 당부했었다. 2018년 떠났던 여행자가 횡단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이런저런 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나니까. 지난 100여 일이 꼭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 같다. 다시 출발하기 위해 숙소에서 쉬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출발할 때 들떴던 감정은 사라졌고, 시원하고 섭섭한 마음과 마냥 헤벌쭉해서 달리다 (통장 잔고를 포함해) 탈탈 털려버린 것들을 어떻게 채워 넣나 하는 걱정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리 걱정한다고 뾰족한 수도 없으니 언제나처럼 내일 걱정은 내일, 모레 걱정은 모레 하는 걸로.아직 집에 돌아갈 일이 남았지만 건강하게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다. 100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달린 거리가 약 3만8천㎞, 그야말로 ‘주마간산’이나 마찬가지인 여행이었다. 이런 여행에서 깊이를 찾는 건 무리가 당연하다. 처음 세웠던 계획은 어느 도시에 머무를 때마다 서점과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 삶의 안목을 높이고 싶었다. 하지만 먹고, 자고, 달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빠듯한 경비를 아껴 쓰느라 무엇이든 마음껏 해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제 불혹이 되었을 때 세웠던 1년 동안 여행자로 살겠다는 꿈(칭다오에서 싱가포르까지 7개월, 일본에서 한 달, 유라시아 횡단 4개월)을 이뤘으니 돌아가면 엉덩이 들썩대지 말고 뭐든 해야겠구나 싶다. 그런데 왜 시간은 언제나 돌아보기 무섭게 빠르게 흐르는지 모르겠다.     /조경국

2020-07-21

이상적인 공산국가를 꿈꾸었던, 그들과의 만남

◇ 네바 강에서 펼쳐지는 러시아 해군의 관함식상트 페트르부르크 거리마다 군인들로 넘쳤다. 한눈에 봐도 해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특이한 건 러시아 해군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군인들도 많았는데, 이렇게 해군들이 많은 이유를 함께 방을 쓰는 친구가 알려주었다. 매년 7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러시아 해군 창설 기념 관함식과 축제를 하기 때문에 러시아 해군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우호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 군인들도 많은 거라고. 겨울 궁전이 바로 보이는 네바 강변에는 여러 척의 군함과 잠수함까지 도열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평일부터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북적였다. 지금 이 시기가 어쩌면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가장 붐비는 시기일지도, 금요일이 되자 빈 침대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8개의 침대 중 4개는 한 가족이 차지했는데 제대로 휴가를 즐기는 듯 저녁이 되면 그날 쇼핑한 것을 펼쳐놓고 정리하며 즐거워했다. 그들이 온 곳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3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첼랴빈스크였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파로 올 때 머물지 않고 그냥 스쳐왔던 곳이다. 이렇게 온 가족이 휴가를 떠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 것이다. ‘국내여행’이지만 거리로 치면 국내여행이라 할 수가 없다. 러시아 해군 창설일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왔는데 자기들은 이 날짜에 맞추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고, 나에겐 운이 좋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딱히 이런 무기들을 늘어놓은 행사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저 무심히 구경할 뿐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날, 일요일 밤엔 내내 네바 강과 전함들을 밝히는 화려한 불꽃놀이와 사람들의 함성이 이어졌다.러시아는 오랜 세월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한 부동항을 확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평양으로 나아가기 위해 제정 러시아 시대에 블라디보스토크를 태평양 함대의 군항으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과거 표토르 대제가 발트해에 접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긴 것도, 현재 러시아 본토에서 동떨어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국경을 거쳐 가야하는 항구도시 칼리닌그라드를 포기하지 않고 발틱함대 사령부를 두고 있는 것은 어떻게든 유럽을 견제하고 바다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기 위함이다. 아무리 넓은 영토를 가졌어도 바닷길을 포기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로선 바닷길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발틱 함대는 태평양 함대와 흑해 함대에 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수도 모스크바와 가장 가깝고 가장 많은 물류가 오가는 유럽 항로를 지켜야 하니 임무가 가장 막중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오는 길에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아직 공사구간인 곳을 제외하고 아주 여유롭게 모스크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약 800킬로미터 거리인데 만약 일반 도로로 달렸으면 예정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속도로로 달렸음에도 쉬는 시간을 포함해 12시간이 걸렸다. 쉬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는데도 모스크바 시내에 들어와 정체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에 와서 고속도로를 달리면 왜 우리나라는 오토바이의 고속도로 통행을 막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세계에서 오토바이가 고속도로를 달릴 수 없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정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는 한국이 유일하다. 배기량이 낮은 오토바이의 경우 통행을 제한하는 경우는 있어도 지금까지 여행한 국가 중에서 고속도로를 달리지 못한 나라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자동차 전용도로도 오토바이를 달릴 수 없게 만들어 ‘통행의 자유’를 제한한다. 오토바이와 오토바이 운전자에 대한 차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이렇게 고속도로를 달리다 다시 돌아가 차별 받을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아쉽다. 오토바이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건 차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히려 가해의 위험은 자동차가 더 크다. 오토바이든 자동차든 단지 이동의 도구일 뿐 모든 건 운전자에게 달린 것이라 생각한다.모스크바부턴 이제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모스크바에 며칠 머무르는 동안 K 선생님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K 선생님은 동향인데 모스크바에서 민박과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편안하게 지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K선생님의 민박집은 아르바뜨 거리와 가까워 관광하기도 편했다.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시내와도 먼 곳에 숙소를 잡았고, 오토바이 부품을 구하느라 시간을 많이 쓴 탓에 제대로 시내 구경을 하지도 못했다. 이제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경험했던 길을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편안해졌다.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전혀 예상할 수는 없지만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조바심은 내려놓고 여유롭게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추위가 오기 전, 추석 전에 돌아가려면 무조건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골목길에서 만난 엥겔스처음 모스크바에 왔을 때는 서점을 한 곳도 찾아보지 못했었다. 모스크바 대학 근처에 괜찮은 서점이 여럿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가보자 싶어 명소 위주로만 돌아다녔었다. 숙소 가까이 있는 돔 서점을 찾았다. 지하 1층, 지상 2층까지 규모가 큰 서점이다. 우리로 치면 광화문 교보문고 같은 느낌이었다. 카페도 있고 장난감, 문구부터 모든 분야의 책을 모두 구할 수 있는 서점이다. 내부 인테리어도 훌륭했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2층에 팔고 있는 미니북이 탐났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50년의 역사를 가진(1967년 개점)만큼 책과 관련된 행사들도 자주 열리는 듯했다. 서점을 나와 아르바뜨 거리 남쪽에 있는 톨스토이 국립 박물관과 푸쉬킨 기념관을 찾아 골목길을 걸었다. 아르바뜨 거리에 있는 헌책 노점은 책을 찾는 손님의 거의 없었다.아르바뜨 거리 남쪽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흩어져 있다. 이리저리 골목길을 헤매다 톨스토이 국립 박물관 근처에서 엥겔스의 동상을 마주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평생 동지였으며,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는 동안 물심양면 도왔다. 산업혁명 이후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들어온 농민들은 노동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삶은 곤궁했다. 그는 독일 출신이었으나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던 영국 맨체스터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자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은 부르주아 계급이었으나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집안도 부유했고,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핍박받는 노동자의 삶을 기록하고 공산주의 이론을 정립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노동자들의 혁명은 성공한 적이 있으나 이상적인 공산국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밀한 이론도 인간의 욕망이란 변수 앞에선 꼼짝없이 길을 헤맬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다.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시 외곽에 있는 푸드시티에 다녀왔다. 러시아 전역에서 생산된 과일과 야채, 각종 농산품이 모이는 거대한 시장이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견과류가 굉장히 쌌다. 구역별로 나뉜 거대한 트럭 주차장이 그대로 시장이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트럭 뒷문을 열어놓고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는 농민과 상인들의 에너지가 넘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자신이 살던 시대를 증명하는 가장 훌륭한 이론이었으나 세상은 하나의 이론으로 재단하고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당장 내일 닥칠 일도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이제 모스크바를 떠날 일만 남았다.    /조경국

2020-07-14

국경을 넘어… 상상 그 이상의 경험을 만나볼까

◇ 러시아 국경을 넘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드디어 러시아로 들어왔다. 꽤나 더운 날씨였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들어와선 대차게 내리는 소나기를 피할 겨를도 없이 맞았다. 탈린에서 비 때문에 하루 더 쉰 보람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볕에 뽀송뽀송하게 말렸던 부츠도 슈트도 다시 물에 젖어버렸다. 말짱 도루묵!탈린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려면 나바르라는 작은 국경도시를 지나야 한다. 그냥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면 될 줄 알았는데 특이하게도 검문소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차량 대기소에 가서 통과요금(2.5유로)을 내고 영수증과 접수증을 받아 검문소로 가야한다. 대기소는 어마어마하게 큰 주차장인데 탈린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차량이 그만큼 많은 듯하다. 가능하면 기다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통과하기 위해 아침 6시가 되기 전 탈린에서 출발했다. 탈린에서 나바르까지 가는 길은 포장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소련으로부터 1991년 독립하고 난 후 에스토니아는 러시아보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결국 2004년 유럽 연합에 가입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한 후론 완전히 러시아와 관계는 소원해졌다.유럽으로 향하는 길과 러시아로 향하는 길의 포장상태만 봐도 그 관계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 그건 에스토니아뿐만 아니라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마찬가지다. 8시 30분쯤 대기소에 도착해 수속을 밟고 러시아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다. 500미터 남짓 국경을 넘는데 3시간이나 걸리니(거의 대기줄이 없었음에도) 자주 넘어야 하는 이들은 얼마나 피곤할지.국경검문소를 넘을 때마다 그곳 직원들의 반복된 질문이 바로 ‘영문차량등록증’이 진짜냐는 것. 외국으로 오토바이(차량도 마찬가지)를 가지고 나가기 위해선 차량등록사업소에 가서(면 단위는 면사무소) 영문차량등록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직인만 찍혀있다 뿐이지 정식 공문서로 보기 어려운 수준이라 그들 입장에선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원래 차량등록증도 마찬가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토바이나 차를 가지고 떠난 분들이 흔히 겪는 경험이다. 육지로 이동할 수 없는 섬이나 마찬가지인 우리에게 영문차량등록증이 필요한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극소수를 위해 제대로 만든 공문서 양식을 만드는 건 행정력 낭비일 수도 있겠지만,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자유롭게 차량이 이동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지만 미리 이런 사소한 것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양식을 참고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고 자유롭게 아시아와 유럽을 다닐 날이 오지 않겠나. 에스토니아 검문소에서도 러시아 검문소에서도 차량등록증의 진위 여부를 가리느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통관 서류부터 보험 서류까지 모두 보여야 했고. 특히 ‘도큐먼트’를 중요시하는 러시아나 구 소련권 국가의 공무원들은 우리네 차량등록증의 수준(?)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항상 의심 받는 영문차량등록증국경통과에 시간이 한참이나 걸리고 소나기까지 맞았지만 러시아에 오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많은 나라를 여행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성향이랄까. 러시아를 달리며 날씨로 고생한 것을 제외하곤 꽤 편안하게 다녔다. 러시아가 좋았던 이유는 역시나 물가가 저렴한 탓이었고,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토바이 여행자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을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만난 탓이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은 것도 마음이 편안 이유 중 하나겠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선 배를 개조해 만든 숙소에 짐을 풀었는데 1박에 7천 원 정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에 이런 가격으로 묵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일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들어오면서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페트로 그라츠키 섬(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여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으로 들어오면서 거리에 비해 꽤 비싼 통행료를 냈다. 러시아에선 유료 도로를 이용한 적이 없었는데 에스토니아의 국경도시 나르바를 통과해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진 약 180킬로미터로 짧은 거리였지만 국경을 통과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도심을 관통하는 길은 포기했다.만약 도심을 통과하면 예상보다 늦게 숙소에 도착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유료 도로를 벗어나 숙소를 찾기 위해 도심으로 들어오자마자 길을 잘못 들어 고생했을 뿐 아니라 숙소를 찾지 못해 또 길을 헤매느라 시간을 허비했다.네바강 지류에 떠있는 배가 숙소였던지라 배를 매어둔 선착장 입구를 찾지 못하고 그 주위를 계속 맴돌기만 했다. 오토바이를 세울만한 장소를 찾느라 또 이리저리 다니느라 녹초가 되어버렸다. 숙소 직원에게 길가에 주차된 오토바이 사진을 보여주며 괜찮은지 물었지만 문제가 생겨도 책임질 수 없다고 최대한 숙소 가까이 가져다 놓으란 이야기만 들었다. 하지만 더는 움직일 힘도 없어 그대로 방에 들어가 씻지도 않고 슈트를 입은 채로 누웠다.◇ 표트르 대제의 야망이 만든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1713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그로부터 1917년 3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거쳐 로마노프 왕조가 끝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고 1918년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러시아 제국의 중심지였다.표트르 대제는 유럽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네바 강의 하류, 핀란드 만과 접한 습지였던 이곳을 개발해 도시를 세우기 위해 엄청난 공력을 들였다. 습지를 메워 건물을 짓기 위해 기반을 닦을 엄청난 석재가 필요했는데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배에 일정 무게 이상의 돌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표트르 대제가 모스크바를 두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삼기위해 노력했던 이유는 그가 어린 시절 이복누이 소피아 공주의 쿠데타로 크렘린 궁에서 쫓겨나 외국인 거주지에서 살았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그는 외국인 거주지에서 살던 청소년기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이주해온 기술자들과 교류하며 석공과 목공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데 열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변방으로 힘이 없었던 러시아를 어떻게든 유럽에 편입시키고 영토를 넓히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의 꿈은 그 시절부터 키웠던 것이고, 말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거대한 토목공사에 집착했던 이유는 낡은 것을 버린 새로운 러시아의 상징을 자신이 죽기 전에 남기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유럽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만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아들이자 왕위를 물려받을 황태자를 죽음으로 몰고 수많은 반대자를 처형했으며, 토목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반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 도시와 성을 만드는 토목공사는 결국 권력자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침대에 누워 지도를 보며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과 그동안 저질렀던 실수들을 천천히 복기했다. 이제 출발해서 달려왔던 1만㎞를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오토바이를 받아 시동을 걸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80일, 3만㎞ 가까이 달렸다.러시아나 유럽을 제대로 보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는 게 두고두고 안타깝다. ‘주마간산’은 나 같은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조경국

2020-07-07

탈린에 관하여… 지식과 정보를 얻는 다양한 방법들

◇ 구글맵 안내를 무시한 걸 후회하다로시 데려와서 일본 일주를 다녀온 지가 4년이 지났다. 매년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정하고 그것만은 좌고우면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7년이 지났다. 이제 돌아가면 올해 마지막 버킷 리스트(책방 이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불혹이 지나며 그 이전보다 시간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걸 실감한다.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집단은 아마 구글이 아닐까. 숙소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가려고 구글맵을 열고 경로를 검색하니 빠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알려 준다. 무시하고 어제 왔던 빠른 길로 나가니 경찰이 통제 중이다. 구글맵이 안내를 믿어야 했다.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실시간 교통 정보를 반영해 길을 안내한다. 결국 처음 안내한 길로 돌아왔다. 안드로이드폰과 구글을 사용하는 모든 사용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도 GPS나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면 어디서 무엇을 찍었는지 기록이 남는다.얼마 전 재미삼아 구글 지역 정보에 올렸던 사진들이 조회수가 25,000회가 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들은 이렇게 개인이 올린 정보를 바탕으로 더 몸집을 불리고 이익을 취할 것이다.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이야말로 기업의 경쟁력이다.구글은 어느 기업도 넘보지 못할 정보력을 이미 갖추었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술에 엄청난 자본을 쏟아 붓고 있으니 구글을 뛰어넘으려면 새로운 ‘혁명’이 필요할 수도.2013년 7개월 동안 배낭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챙겼던 것은 ‘론니 플래닛’이었다. 고작 6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정보를 얻는 방법은 책에서 인터넷으로 급속히 바뀌었다. 인터넷을 주로 사용하는 도구도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동했고. 책의 가치가 변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해졌고 ‘실시간’ 나의 행동을 결정하거나 바로 쓰고 버리는(?) 가벼운 정보를 책으로 얻는 시대는 저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책은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는 고전을 재생산하고 영속해야 하는 지식만 담는, 책이 만들어진 시대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물건의 역할도 포함해야겠다. 어느 시대라도 수집욕을 떨치지 못하는 장서가는 존재할 테니. 이런 시대에 헌책방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헬싱키에서 탈린행 페리를 타다헬싱키에서 탈린까지는 페리로 약 2시간 30분 거리다.(바이킹라인 오토바이 선적료 포함 편도 약 5만원) 페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 왕복하고 그만큼 사람도 차도 물건들도 건너가고 온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올 때보다 오토바이 여행자들이 많았다. 배 안으로 들어가 주차하고 고정줄로 묶는 작업을 마쳐야 객실로 올라갈 수 있다. 제주도나 일본으로 오토바이를 실어갈 때는 직원들이 대신했었다. 어제 한 번 해봤다고 다른 라이더를 도와주는 여유까지 부렸다.탈린은 이웃 리가와 비슷한 분위기다. 오자마자 부츠를 볕에 말리고 빨래부터 했다. 말뫼에서 이곳까지 거의 달리기만 하고 이틀 비를 맞았더니 꼬질꼬질하기가 상거지나 마찬가지. 탈린에선 여유롭게 며칠 지내다 가기로. 여기서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진 약 350킬로미터. 이제 왔던 길을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근처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500밀리리터 생수를 2유로를 주고 사마셔야 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선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물값 뿐만 아니라 기름값도 방값도 뭐든 다 비싸니 나 같은 여행자에겐 아주 가혹한(?) 곳이었다.탈린에 와선 마음껏 쇼핑을 즐겼다. 그래봐야 이곳에 있는 동안 먹을 식료품만 잔뜩 샀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숙소에서 끼니를 대부분 해결한다. 탈린의 체감 물가는 북유럽 국가의 1/3 수준. 우유, 식빵, 뮤즐리, 잼, 소시지, 토마토, 마늘, 고추절임, 치즈, 계란, 빨랫비누 등등을 샀는데 21유로가 나왔다. 3일 동안 충분히 먹을 양이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소시지에 P선생님이 주신 쌈장을 발라 먹었는데 먹을 만했다. 고추절임도 맵싸하니 괜찮았다.러시아에 들어가기 전에 로시 상태를 점검해야 했다. 체인 장력 조절하고, 에어필터를 꺼내 대충 먼지를 털어냈다. 다행히 큰 이물질은 없었다. 지난 번 바르샤바 패트롤 모터스에서 교환할 때 날벌레들이 필터에 끼어 있었다. 아마 다시 시베리아를 지나갈 때 같은 일을 겪을 듯해 공기흡입구를 아예 방충망을 구해 씌웠다. 체인과 스프라켓도 적산거리가 60,000킬로미터가 가까워 모스크바에 가서 교체해야 한다. 집에서 여기까지 달린 거리도 약 27,000킬로미터. 사용할 수 있는 거의 한계까지 온 듯. 그래도 자주 체인 오일을 바른 것이 효과가 있었다. 사고만 없었다면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하루 자고 나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숙소에서 체크아웃했다. 지금 묵는 곳은 주인이 자리를 지키는 곳이 아니고 청소하고 체크인 시간에만 잠시 들렀다 간다. 주차장에도 로시만 덩그러니. 아무래도 구도심에서 떨어져 있고 무료 주차장이 있는 곳이라서 차를 가진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듯하다. 우리 집인양 부엌도 샤워실도 사용할 수 있어 좋긴 한데 이렇게 휑한 분위기는 처음이다. 대부분 복작복작한 도미토리에서 지내다 큰 집을 전세낸 듯 있으니. 어제만 해도 거의 빈방이 없었다.◇ 시대 아우르는 건축물 가득한 탈린을 걷다탈린 구도심은 지금까지 들렀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옛 성벽이 일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성벽 안과 밖은 풍경이 딴판이다. 구도심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성벽 밖은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이 차분하다.탈린도 리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건물을 올리고 이곳저곳 공사 중인 곳이 많다. 탈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발트해로 나갈 수 있는 전초지가 될 수 있는 지역이다 보니 북유럽 국가와 러시아 사이에서 많은 부침을 겪었고,(구도심의 높은 성벽이 그 증거겠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해가 1991년이니 신생 국가나 다름없는 셈이다. 외부로 나아가기 좋은 지역은 그만큼 외침의 가능성이 있으니 좋다 나쁘다 말하기가 어렵다.탈린 거리를 걷다보면 중세부터 현대까지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채롭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관광지인 구도심을 제외하곤 빠르게 개발되고 풍경이 바뀌지 않을까. 10년 후쯤 리가나 탈린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확실히 비교할 수 있겠지.숙소로 돌아오다 호텔 카지노 주차장에서 몸집 큰 두 남자가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윽박지르는 장면을 봤다. 그는 도박빚이 있는 것일까. 탈린으로 오는 페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카지노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곤 놀랐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넘어오는 페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리가에서도 시내 중심가에 많은 카지노들이 있는 걸 보고 놀라웠는데 오랜 세월 공산국가였기에 오히려 자본주의의 폐해에 쉽게 물들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아침부터 비가 내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걸 하루 늦추었다. 느긋하게 하루 더 쉬어 가기로. 오늘도 나 이외 다른 손님은 없었고 짐을 최대한 줄일 생각으로 모든 음식 재료를 꺼내놓고 끼니마다 요리해 먹었다. P선생님이 주신 쌀로 마늘밥을 짓고 뜨거운 물에 쌈장을 풀어 된장국까지 만들었다. 쌈장국(?)은 의외로 먹을 만했다. 파만 있었어도. 이가 없으면 잇몸이니까 있는 걸로 뭐든 만들어 먹는다.나만의 여행 3원칙은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고, 쓸 수(기록) 있을 때 쓴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나중으로 미루면 후회와 낭패를 동시에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쓰는 건 옵션으로 치더라도 먹고 자는 건 가능할 때 무조건 1순위로 둬야 긴 여행에서 버티기 쉬운 듯하다. 오늘은 내내 숙소에서 밥만 먹고 비 구경만 했다. 내일은 최대한 아침 일찍 출발해 러시아 국경을 넘을 생각이다. 이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간다.

2020-06-30

비 내리는 날, 의지할 곳 없는 낯선 여행… 아름다운 풍경에 젖다

◇ 오슬로에서 마주친 난민들오슬로 시내에 나갔다가 온가족이(난민인 듯했다) 구걸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어디서나 여성과 아이들은 가난이나 차별 앞에 가장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유럽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이 계속 증가하고 유럽 대부분 국가들은 그들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반난민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유럽 내 극우정당들은 국민들의 난민 혐오 정서에 기대 세를 불리고 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정세가 안정되지 않는 이상 유럽도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분쟁이나 정치적인 문제로 고향을 떠나는 난민뿐만 아니라 미래로 갈수록 기후 문제로 인한 난민도 늘 수밖에 없을 테니 미래가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불황이라도 찾아온다면 극우 정당이 더욱 활개를 칠 것이다. 오슬로 시내는 주말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노르웨이 궁전에서 시청 광장으로 이어지는 거리만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공원에서 반라로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겨울이 길고 맑은 날이 드문 북구에선 저렇게라도 햇볕을 쬐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모양이다. 숙소 근처 공원을 지나다 해수욕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P선생님께서 손수 밥과 수육까지 하셨다. 현지 음식은 입맛에 맞지 않으셔서 여행하는 동안 대부분 직접 요리해서 드셨단다. 얼마 만에 먹는 밥인지 모르겠다. 대부분 빵과 치즈와 우유와 커피로 끼니를 해결했는데. 점심과 저녁까지 선생님과 함께 식사했다. 선생님께 쌀과 된장을 조금만 얻어 가기로 했다. 선생님과 렌터카 회사에 다녀왔다. 유럽에서만 판매되는 현대 i20을 빌려 운전하고 왔다. 하루 렌트 비용이 우리 돈으로 약 10만원. 수동 기어를 다뤄본 적이 오래고 네비게이션 보는 것이 익숙지 않다며 회사에서 숙소까지만 운전을 부탁하셨다. 함께 여행하던 분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일주일 동안 혼자 운전해서 다녀야 할 텐데 걱정스러웠다. 노르웨이에서 여행을 끝내고 아이슬란드까지 가실 모양이다. 일단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선생님께 쌀과 된장을 얻고 오슬로를 떠나 스톡홀름으로 출발했다.◇ 오슬로를 떠나 스톡홀름으로 향하다스톡홀름에 들어올 때까지 내내 비가 왔다. 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지고 비까지 내리니 비옷을 입고 있는데도 한기가 스몄다.어제 날씨를 확인했을 때만 해도 분명 흐리다고만 했는데 500킬로미터 넘게 달리는 내내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스톡홀름에 도착할 땐 온몸이 젖은 상태였다. 10시간 넘는 주행에는 비옷도 무용지물. 비를 맞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동안 아름다운 풍경에 취했다. 비를 맞는 것쯤은 별 것 아니었다. 숲에서 숲으로 달리는 동안 거울 같은 호수와 강을 만났다. 내가 보았던 호수와 강은 모두 베네른 호의 자식들이었겠지. 오가는 차들이 거의 없는 고요한 스칸디나비아 숲길을 헬멧 쉴드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내며 홀로 달리는 경험은 무엇으로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스톡홀름에서 이틀 묵고, 이제 곧 헬싱키를 지나 다시 러시아로 넘어갈 예정.홀로 떠나야 아프고 약한 곳이 어딘지 확실히 드러난다. 의지할 곳이 있거나 관계가 이어져 있을 때 숨어 있던 감정이나 욕망이 온전히 혼자일 때 날 것으로 또렷이 보인다. 그걸 다스리는 것은 나중 문제고 우선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행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도 가끔 외부와 단절된 시간이 필요하다.관계라는 그물에 갇혀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써야 하고 나중에는 다시 채울 기회조차 놓치고 만다. 물론 관계에서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건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듯하다.스톡홀름에 도착해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숙소 주변을 빙빙 돌았다. 눈치껏 오토바이를 세워둔 곳이 있으면 같이 두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건지 길에 오토바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건물 뒤쪽에다 세워두었다. 무료 주차장이 있는 숙소는 시외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시내에 있는 숙소는 주차비를 내야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으니 ‘공짜’로 주차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동네 골목길을 도는경우가 종종 있다.덕분에 이곳 분위기가 어떤지 자연스럽게 살펴보게 된다.말뫼도 오슬로도 이곳 스톡홀름도 거리에 사람들이 별로 없다.저녁 6시 이후론 가게 문을 닫은 곳도 많고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북유럽 사람들은 다들 집에서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걸까, 아니면 저녁과 밤의 시간대를 우리와는 다르게 대하는 태도와 문화가 있는 걸까 궁금했다. 만약 우리에게 밤 10시까지도 태양 빛이 어스름하게 남아 있다면 ‘열심히’ 일하거나 즐기는 사람이 많을 텐데. 오늘도 어제처럼 결국 비를 맞고 말았다. 바다를 곁에 두고 있는 스톡홀름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어제 비를 맞은 휴대폰이 혼자 꺼지고 켜지고 반복하더니 배터리를 모두 쓰고 다시 충전하고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북유럽의 고요한 숲과 호수를 가로질러 발트해로휴대폰 인증 문제 때문에 페리를 예약할 수 없어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대신 예약해 달라 부탁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까지 오토바이를 실어가는 최저 비용은 우리 돈으로 약 125,000원. 일찍 예약하거나 시즌에 따라 가격이 다른 모양이다.스톡홀름에서 헬싱키까진 뱃길로 약 500킬로미터. 페리로 투르쿠로 가서 내륙으로 약 200킬로미터 달리는 방법도 있다. 오후 4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9시 30분에 도착한다. 차량으로 페리를 이용할 때는 터미널이 아니라 차량 게이트가 따로 있다. 터미널에 가서 예약했다고 티켓을 받으려고 하니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직원이 친절하게 지도를 출력해서 길을 알려주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두 사람 뿐이었고 자전거 여행자들이 많았다. 한 자전거 여행자의 짐 꾸림이 내가 보기엔 딱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아이 둘을 캐리어에 태우고 전기 자전거로 달리는 엄마도 봤다. 생활 자전거에 배낭만 질끈 묶고 일상복으로 배를 타는 이도 있었다. 그는 헬싱키가 집일 수도.온갖 종류의 자전거에 짐을 꾸려 싣고 떠나는 사람들을 보고 다음 장거리 여행은 자전거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당분간은 불가능한 일인 듯싶다.3년쯤 있다가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기면... 그땐 정말 집에서 쫓겨날 수도. 발트해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헬싱키에서 하룻밤 보내고 다시 페리를 타고 에스토니아 탈린으로 갈 생각이다.헬싱키로 페리로 넘어오며 소파에서 쪽잠을 잤더니 온몸이 뻣뻣.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객실, 식사 옵션을 모두 뺀 덕분이다. 객실을 예약하지 않은 노련한 여행자들은 미리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소파를 선점하고 나처럼 뭘 잘 모르는 여행자들은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곳으로. 원형 소파라 잔뜩 웅크려야만 자야만 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오는 중에 마리에함 섬에 잠시 기항했다. 항구로 들어가는 걸 갑판에 나가 구경했는데 이렇게 큰 배가 바위섬들을 아슬하게 스쳐가며 항해하는 것이 놀라웠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듯한 작은 섬에도 집이나 건물이 있었다. 별장 같은 곳일까, 아니면 어부들이 사용하는 임시 거주지일까 궁금했다. 오는 동안 요트나 보트, 여러 작은 배들이 자유롭게 다니는 걸 보았고 저들은 저 작은 섬에도 쉽게 들락날락 할 수 있을 테니 음식과 연료만 충분하다면 저런 곳에서 한철 나는 것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작게라도 숲이 있고 낚시 실력만 있다면 더 오래 있을 수도.헬싱키에 도착하니 많은 경찰이 도로에 경비를 서고 있었다. 무슨 큰 행사를 앞두고 있는 듯했다. 희한하게 축제나 행사를 잘 피해서(?) 다니고 있다. 축제 기간이면 잠잘 곳을 구하기도 힘들고 오토바이를 주차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 나로선 피하는 게 오히려 득이다. 체크인 날짜를 어제로 예약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같은 침대 앞에서 나와 다른 여행자가 짐을 내려놓고 멀뚱하게 있었는데 숙소에서 보낸 메일을 확인하니 내 잘못이었다. 직원이 나를 원래 예약했던 방보다 더 나은 곳으로 배정해주었다.그 친구보다 아마 내가 훨씬 나이가 들어 보여 배려해준 것이리라. 아니면 청소가 끝날 때까지 묵묵하게 기다려준 덕분일 수도. 숙소 뒤편 숲길을 걷다 축구장에서 뛰어노는 친구들을 한참 구경하고 들어왔다. 헬싱키는 정말 점만 찍고 간다. 시내 구경은 내일 여객선 터미널에 주차해놓고 다녀오기로. 내일 오후 페리를 타고 탈린으로 간다. 북유럽에선 모든 것이 비싸니 지출을 줄이는 데만 신경 쓰고 있다. 이제 곧 러시아로 넘어가니 비용 걱정은 한시름 놓을 듯하다. /조경국

2020-06-23

노르웨이의 깨끗한 공기… 긴 여행의 선명한 기억으로 한 컷

◇ 페리 예약에 실패하다함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말뫼로 넘어가는 페리를 예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페리 예약 사이트에서 카드 결제를 하려니 국내 휴대폰 인증을 받아야 한다. 로밍 신청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인증을 받을 수가 없다. 항구까지 가서 해결하는 수밖에.북유럽에서 다시 러시아로 들어가려면 두어 번 페리를 이용해야 하는데 예약할 수가 없으니 한참 기다리거나 아예 타지 못할 상황도 염두에 둬야한다.아주 작은 문제가 가끔 이렇게 다음 여정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함부르크에서 2박 3일, 이제 나머지 일정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만약 페리를 이용할 수 없다면 스톡홀름에서 오울루를 거쳐 헬싱키로 가야할 수도 있다.그렇게 육로로 돌아간다면 2000킬로미터, 최소 4일은 더 잡아야 한다. 함부르크 숙소는 겉은 너저분한데 안은 깔끔 그 자체다. 주차도 무료로 할 수 있고 부엌도 있고 큰 마트도 바로 옆 건물이라 편리하다. 거기다 4인실 방을 혼자 쓴다. 암스테르담과 비교하면 여긴 5성급 호텔이었다.오전에 빨래하고 계란 삶고(간식 겸 비상식량) 바느질하고… 오후 늦게 시내 구경이나 할까 나갔다가 휴대폰을 챙겨가지 않아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휴대폰을 숙소 부엌 식탁 위에 올려놓은 줄도 모르고 잃어버렸나 망연자실했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다시 나가려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 삶은 계란 까먹고 그냥 가만히 눈감고 있었다. 눈이 쉬이 시린 증상은 오래 되었는데 햇빛을 보고 달리니 더욱 심해졌다. 선글라스를 껴도 시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쉴 때 눈을 감고 있는 게 최선이다. 독일의 생필품 물가가 싸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어제 오늘 숙소 옆 알디 마트에서 우유, 계란, 샴푸, 식빵 등을 샀는데 확실히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듯하다. 우유 1리터 0.73유로, 샴푸 0.65유로, 계란 6개 1.25유로, 식빵 0.95유로. 우리보다 훨씬 소득 수준이 높은데도 식료품이나 생필품 물가가 저렴한 이유가 뭘까. 정부가 생필품에 대해서 보조를 하거나 가격 상한선을 정해둔 걸까. 알디 마트가 가격 경쟁력으로 유명하다지만 이 정도면 놀랍다.잠시 동네를 둘러본 것이 다지만 밖은 꾸미지 않으나 안은 꽉 차 있는 느낌이랄까.지금 묵고 있는 숙소도 그렇고. 내실이 튼튼하기 때문에 유럽의 중심 국가가 될 수 있었겠지. 어쨌거나 장을 보면서 독일에선 적게 벌고 가난해도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다. 비가 내리다말다 하더니 날이 어두워지니 빗방울이 더 굵어진다. 출발하는 내일 아침에는 그쳐야 할 텐데.◇ 드디어 북유럽으로… 스웨덴 말뫼에 도착10시쯤 비가 그쳤지만 함부르크를 벗어나자 비구름과 함께 달렸다. 셀란 섬에 들어서서야 겨우 해가 나기 시작했다. 푸트가르덴에서 페리 타는 걸 포기하고 셀란 섬을 거쳐 말뫼로 왔다.페리를 탔으면 200킬로미터 남짓 거리도 단축시키고 비용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예약하지 않고 가기엔 불안해 둘러가는 길을 선택했다. 셀란 섬을 거쳐 말뫼로 가려면 바다 위 다리를 세 곳이나 통과(톨게이트가 있는 다리는 두 곳이었다)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우리 돈으로 6만원(130+233 덴마크 크로네)이 넘는다. 덴마크를 지나가는 비용치고는 꽤나 비싼 셈. 함부르크에서 말뫼까진 약 510킬로미터.페리를 이용해도 오토바이 선적비가 49유로니 이러나 저러나 치를 수밖에 없는 비용이다. 말뫼에선 하루만 묵고 바로 오슬로로.뒷바퀴에서 뭔가 걸리는 듯한 소리가 나서 오슬로에 가서 점검해야 할 듯. 아무리 살펴봐도 걸릴만한 것이 없는데 툭툭거리는 소리가 난다. 체인 유격은 조절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휠베어링 문제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뒷바퀴 쪽에서 계속 소리가 나서 말뫼를 벗어나자마자 휴게소에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혹시 풀린 나사가 없나 일일이 조이고 체인 장력도 다시 조절했다. 매뉴얼에 나오는 값으로 정확하게 맞출 수는 없으니 눈대중 손대중으로 조절하는데 하다 보니 이것도 감이 잡힌다. 소음의 원인은 머플러 연결 나사였던 모양이다. 심하게 풀린 곳은 거기 밖에 없었고 작업을 하고난 이후에 소음은 사라졌다.혹시나 부품을 교체해야 하는 문제였다면 난감했을 텐데 다행. 소음이 나면 어떻게든 해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달릴 수가 없다. 소음이 나면 문제가 있다는 신호이고 그대로 방치하면 작은 문제가 큰 문제가 될 가능성 높다.◇ 오슬로에서 P선생님을 만나다말뫼에서 오슬로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바다, 강, 호수, 들, 숲이 탁 트인 도로 양 옆으로 가는 내내 이어졌다.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니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캠핑카는 물론이고 트레일러나 지붕 위에 자전거, 카약, 캠핑 장비를 이고지고 가는 차들이 많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까지 갖추었으니 이곳 사람들이 솔직히 부럽다.그중 가장 부러운 것은 공기였다. 들숨에 폐가 깨끗한 공기로 부풀어 오를 때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상쾌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도 이 기분은 잊지 못할 듯하다.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은 날은 더더욱 그렇겠지. 깨끗한 공기와 물을 마시고 사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이니….오슬로에서 P선생님을 뵈었다. 말뫼에서 하루만 묵고 급하게 오슬로에 온 이유도 선생님을 뵙기 위해서다. 선생님은 나와 같은 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쿠터를 타고 출발했다.함께 출발했던 6명중 세 분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갔다. 우리보다 한 주 앞서 출발했던 팀들도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다. 선생님의 스쿠터도 문제가 생겨 결국 이곳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려보낸 상태. 렌터카를 빌려 여행을 계속하실 생각이었으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선생님의 마지막 목적지는 아이슬란드. 처음 계획은 스쿠터를 가지고 배로 아이슬란드에 가는 것이었다.이렇게 다시 오긴 힘들 테니 렌터카를 빌려서라도 돌아보고 가시겠다고. 오슬로까지 온 이유는 선생님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오슬로에 있는 동안 렌트카 빌리는 걸 도와드리고 잠시 같은 숙소에서 지내기로 했다.긴 여행을 떠나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오토바이 여행은 여러 장점도 있지만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수습하기 힘들고 몸도 마음도 허물어지기 쉬운 듯.생각지 못했던 비용이 드는 것도 문제. 집으로 돌아가신 분들이나 P선생님, 나까지도 모두 비슷한 문제를 겪었고 나는 운 좋게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선생님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 두 달 넘게 달려왔는데 선명하게 기억 남는 건 몇 장면뿐이다.복지 정책이 잘 되어 있는 선진국이라 해도 그늘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재 묵고 있는 앤커 아파트는 오슬로에서 숙박비가 가장 저렴한 곳이고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거대한 합숙소 같은 곳인데 나 같은 여행자보다 오슬로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더 많은 듯하다.어느 국가나 사회든 음지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곳을 이주 노동자나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채운다. 내가 묵는 방엔 13개의 2층 침대가 있고 대부분 새벽이나 밤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묵는다.한 층에 이런 방이 몇 개인지 모르겠다. 커다란 빌딩 전체가 이런 방들이다.(물론 비싼 방도 있다.)거의 기업형 숙박업소. 일자리라도 있다면 이런 곳에서 묵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잠잘 곳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묵고 있는 걸까.

2020-06-16

이름난 관광지엔 많은 이들이… 색다른 만남이 머문 곳

◇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그렇게 펄펄 끓던 날씨가 갑자기 초가을 날씨처럼 바뀌었다. 벨기에를 넘어오며 쌀쌀한 바람이 불어 비옷을 껴입었다. 이탈리아부터 프랑스까진 고속도로 통행료를 냈는데 벨기에도 네덜란드도 톨게이트가 따로 없었다.파리에서 릴까지(약 230킬로미터) 통행료가 18.5유로. 파리에서 암스테르담까진 약 540킬로미터다. 팜플로나에서 여기까지 프랑스를 지나오는 동안 정확하진 않지만 통행료로 10만원 훨씬 넘게 쓴 듯하다. 유럽은 각 나라마다 톨게이트를 지날 때 통행료를 내거나 통행증인 비넷을 구입해야 하는 곳도 있고 아예 무료인 곳도 있다. 비넷을 구입해야하는 나라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은 통행료를 내야 한다.체코 프라하에서 유심카드를 산 이후 더는 유심카드를 구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했는데 미리 지도를 다운받아두고 고속도로 휴게소와 숙소에서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니 딱히 더는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아예 국내에서 사용하던 전화는 정지시켰고 사용하던 휴대폰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장나는 바람에 휴대폰 인증이나 인증서가 필요한 모든 정보에서 차단된 상태. 페이스북과 메신저 그리고 카카오톡으로 몇몇 사람들과 연락만 가능하다. 그래도 별 일 없이 두 달이 지났다.급하고 중요하다 싶은 일도 막상 멀찍이 떨어져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고, 그리 급하지 않은 일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당장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룻밤 묵어갈 곳과 내일도 집으로 향해 갈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달리면 달릴수록 단순해지고 있달까.(원래 단순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오토바이 여행의 좋은 점은 복잡한 생각의 잔가지를 모두 쳐낼 수 있다는 거다. 복잡하고 위험한 곳일수록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다고 이 집중력이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로시에서 내리는 순간 끊기듯 풀린다. 파리에서 벗어나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암스테르담의 세련된 예술서 전문서점 ‘멘도’덥지도 춥지도 않고 걸어다니기 딱 좋은 날씨. 암스테르담은 오밀조밀한 시가지를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있었다.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많고 시 외곽까지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어 숙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탔으면 더 좋았을 걸 후회했다. 시내로 나가기 위해 지하철 타러 갔다 실수를 했다. 지하철 승차권을 사야했는데 기차 승차권을 사서 기차를 탈 뻔 했다. 왕복 승차권이 6유로가 넘어 네덜란드는 지하철비도 비싸구나 놀랐는데 플랫폼에서 기다리며 아무래도 이상해 곁에 선 반짝이는 초록색 눈을 가진 아가씨에게 “센터럴 스테이션 가는 거 맞나요?” 물었다.여긴 기차를 타는 곳이고 지하철은 입구가 반대쪽에 있고 거기서 승차권을 사야 한다고….관광하러 왔다면 1일 승차권(8유로)을 사는 것이 좋다고도 알려주었다. 그녀는 내가 헤맬 것을 염려해선지 지하철 승차권 사는 곳 출구까지 데려다 주었다.아쉽게도 안네 프랑크의 집도 반 고흐 미술관도 보지 못했다. 예약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하면 될 거라 생각했었다. 평일인데 뭐 사람이 많을까 싶었다.이번 주는 물론이고 다음 주까지도 예약이 밀려있었다. 결국 안네 프랑크의 집 외관만 보고 왔다. 입구에 길게 줄을 서 있는 걸 보고 한숨만. 유럽도 방학과 휴가철이 겹쳐 어딜 가나 이름난 곳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곳에서도 중국 관광객이 많았다.안네의 집 근처에 있는 서점을 찾아다녔다. 내부가 온통 검은 색인 예술서를 파는 멘도 서점과 주변 서점들을 구경했다. 멘도는 외부 진열장부터 세련미가 넘쳤다.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테리어와 책을 전시하는 방식이 훌륭했다. 예술서만 취급하고 있는 것도 좋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서점 중에 가장 자신의 ‘색깔’이 확실한 곳으로 꼽아야겠다.책 욕심을 버리기도 힘들고 헌책방이니 책을 가릴 처지가 아니지만 만약 새 책으로 한 가지 분야만 집중한다면 멘도 같은 서점이면 좋겠다 싶다. 거리엔 사람들이 많았지만 멘도 서점엔 나를 포함해 손님이 딱 두 명이었다. 주변 다른 곳도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포르투의 ‘렐루 서점’나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처럼 역사를 가지고 영화에 나오거나 유명 작가와 관련이 있지 않으면 책 팔기는 어디든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여유만 있다면 사고 싶은 사진집이 많았으나... 책 욕심은 이제 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처지에 책 욕심이라니. 돌아가면 최대한 책을 줄이겠다고 마음먹은 터인데 멋진 책을 보면 그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한다.휴스 마르세유 사진 박물관에 들러 디나 로손과 엘스페스 디에드릭스의 사진전을 보고 왔다. 두 사람 모두 여성 사진가다. 디나 로손은 자신이 만난 흑인들을 담은, 엘스페스 디에드릭스는 바다 밑 생물을 촬영한 작품. 휴스 마르세유 박물관 건물은 17세기 지어졌고 4층까지 아주 많은 방이 있었다. 전혀 색깔이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을 방마다 교차 전시해 좋았다. 여행 중에 사진 전시를 여럿 보았는데 단순히 사진만 전시하는 경우는 없었다. 영상과 오브제, 작품과 관련 있는 작은 수집품까지 함께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진 ‘전시’가 작품을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것도 중요하구나 깨달았달까. 이게 트렌드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전시를 구성하는 기획자의 능력이 중요한 거겠지.◇ 예의바른 젊은 친구들과 같은 방에서 지내다어느 숙소에서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 함께 방을 쓰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살금살금 샤워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덥수룩한 머리는 그 사이 흰머리가 더 는 듯하고 수염도 깎지 않은 지 오래라 딱 집에서 쫓겨난 중년 남자 행색이다.암스테르담 숙소는 한 방에 침대가 8개인데 단체여행 온 젊은이들로 북적북적. 2박 3일 동안 어디 전쟁터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내가 없었다면 밤새 이야기하고 놀았을 텐데 나를 배려해선지 머리맡 전등을 끄면 다들 조용히 취침 준비를 했다. 가끔 이런 상황을 만나면 이제 도미토리에서 젊은이들과 같이 방을 쓸 나이는 아니구나 싶다. 형편에 따라 숙소를 정하지만 이렇게 젊은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쳐서야….함부르크로 향하는 중에 휴게소에서 데이비드 아저씨 부부를 만났다. 파리에 사시는데 바르샤바로 여행 가는 중에 주차해둔 로시를 보고 이야기를 건네셨다. 부인 크리스틴 아주머니의 친척이 대한항공에서 파일럿으로 일하고 있어 서울에도 다녀왔단다. 아저씨는 혼다 골드윙을 타는 라이더라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토바이로 왔다니 “허리는 괜찮나?” 걱정부터 하셨다. 허리보다는 계속 빛을 보고 달리니 눈이 항상 피로해서 문제다.헤어지고 다시 달리다 잠시 쉬기 위해 휴게소에 들어갔더니 마중 나온 것처럼 데이비드 아저씨가 주차장에서 내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내가 가는 걸 우연히 다시 보고 따라 들어왔다고.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서울에 오거나 파리에 갈 일이 있으면 연락하기로. 이번 여행에서 단 한 명도 악한 이를 만나지 못했다. 복인가 보다.

2020-06-09

우뚝 솟은 에펠탑의 파리… 화려하고 큰 도시 갈림길의 연속

◇ 유럽의 중심 파리에 도착하다주말을 앞둔 금요일에 파리 같은 대도시로 들어가는 건 굳이 예상하지 않아도 고생길이 될 게 뻔하다. 차량 정체는 기본이고 길이 익숙지 않아 갈림길에서 착각해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라도 하면 난감하다. 그래서 미리 지도를 여러 번 확인하고, 특히 숙소 주변 지리를 머릿속에 넣어두어야 한다. 지금까지 오토바이로 가본 곳 가운데 가장 운전하기 어려웠던 곳은 부산이었고(하필 휴대폰이 없었다), 그 다음은 도쿄였다. 고가도로가 많은 도쿄에선 툭하면 GPS 신호를 잡지 못해 도심을 빠져나오는데 애를 먹었었다. 그 다음이 서울이다. 서울과 부산에서 운전을 어렵지 않게 하는 사람이면 유럽 도시쯤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닐까. 지도 어플인 구글맵과 맵스미의 기능이 출중해서 갈림길에서만 집중하면 목적지까지 운전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길이 막히거나 꼬불꼬불한 골목이 많은 구도심에서 길을 헤매는 건 어느 정도 각오해야만 한다.금요일에 파리로 들어간다는 게 꽤나 부담스러웠는데 오히려 파리에서 시외로 나가는 도로의 정체가 심했고 상경길은 거의 막히지 않아 수월하게 숙소가 있는 곳까지 왔다. 프랑스의 바캉스는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쯤부터 시작이라는데 폭염이 계속되다 보니 아예 일찌감치 파리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파리 도착 100킬로미터 전부터 하행선은 차들이 가다서다 반복 중이었다. 파리로 들어가는 상행선은 막힘없이 속도를 낼 수 있었다.내가 묵는 곳은 6층짜리 옛날 아파트를 개조한 호스텔, 엘리베이터가 없고 좁은 원형 계단을 걸어 올라야했다. 배낭이 계단 난간에 걸릴 정도로 비좁았다. 최대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원형 계단 외엔 방법이 없을 듯. 가구들은 어떻게 방으로 옮겼을지 궁금하다. 숙소에서 에펠탑까진 약 4킬로미터 거리. 오토바이는 숙소에 주차장이 없이 길에 세워두었다. 주변에 주차해둔 오토바이가 많다. 숙소를 예약할 때 ‘구글 스트리트뷰’로 주변에 오토바이를 세울만한 곳이 있는지(다른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지)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대도시 숙소는 주차장이 있는 곳은 비싸고 따로 주차비를 내야하는 곳이 많아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다. 골목길에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의 통행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으면 눈치껏 다른 오토바이 곁에 세운다.◇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까지 걷다숙소에서 하룻밤 푹 자고 아침 일찍 파리 시내 관광에 나섰다. 콩코드 광장,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에펠탑으로 한 바퀴 돌고 버스 타고 몽파르나스 빌딩까지 와서 걸어서 숙소에 왔다. 메트로 6호선 일부 구간이 공사 중이어서 이 구간 안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셰 미술관은 아예 갈 생각이 없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주말에 그런 곳에 가면 제대로 관람하기도 힘들 뿐더러 피로만 더하기 십상이다. 아쉽지만 차라리 그 시간에 어디 공원이나 골목길을 걷는 편이 낫다.7월 14일 혁명기념일에 퍼레이드가 있는지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으로 이어지는 샹젤리제 거리에는 한창 관람석과 무대를 만들고 있었다. 곳곳에 경찰이 경비를 서고 있고 일부 도로는 통제 중이었다. 샹젤리제 거리는 세계의 명품 브랜드를 모두 모아놓은 듯.특히 루이뷔통 매장 앞에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쇼핑백을 들고 활짝 웃으며 나오는 손님 중 절반 이상은 아시아인인 듯했다. 그 앞에서 잠시 쉬며 숫자를 헤아려 봤다.도시의 규모, 특히 수도의 규모는 그 나라가 가진(혹은 가졌던) 권력의 크기와 비례한다.한때 유럽을 제패하고 광활한 식민지를 가졌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한때 그 권력의 정점에 있던 곳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번영했던 시절 넘치는 부를 도시를 키우고 기념물을 세우는 데 썼다. 파리는 유럽의 도시 중 가장 선명하게 권력과 부의 크기를 보여주는 곳이라 생각한다.그 시절 축적해둔 것만으로도 파리는 여전히 영화를 누리는 중이다. 개선문에선 무명용사에 헌화하는 백발성성한 노병들의 행진이 있었다.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인 듯.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패전을 앙갚음하며 파리 개선문을 통과해 에펠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폴레옹이 1805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둔 아우스터리츠 전투 후 짓기 시작했으나 생전 완공을 보진 못했다.에펠탑은 주변이 유리벽으로 막혀 있고 티켓을 구입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나 줄이 길었다. 한번 올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근처 공원 나무 그늘 밑에서 한참 쉬었다. 주변에 에펠탑 기념품을 파는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관광객은 많았지만 구입하는 사람들은 거의 보질 못했다. 저 사람들은 저리 팔아서 밥 먹고 살 수 있을까, ‘에펠탑 기념품도 책만큼 안 팔리는구나’ 하고 잠시 쓸 데 없는 걱정을 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파리의 마지막 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곳저곳 다니는 게 제법 익숙해질만 하면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게 아쉽다. 여유가 있다면 파리에선 한 달쯤 지내며 꼼꼼하게 돌아보아도 좋겠다. 오고 가는 날을 제외하고 딱 이틀 동안 파리에 머무르며 다니는 것만으론 한참 부족하다.이렇게 화려하고 큰 도시를 단 3일만 있다 떠나야 한다니. 여행을 떠나기 전 가보려고 계획했던 곳의 아주 일부만 둘러보았을 뿐이다. 파리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 이동하는 데만 많은 시간과 체력을 쓰고 집중해야 하니 실제 무언가 보고 느낄 시간은 모자라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곳이라도 마냥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다.오전엔 바케트와 우유를 사서 파리의 14구 골목길을 산책했고 오후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근처를 돌아다녔다. ‘셰익스피어’도 렐루서점과 마찬가지로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대했던 것만큼 멋진 곳이었고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문 열자마자 첫 손님으로 입장하지 않는 이상 이 ‘유명 서점’에서 찬찬히 서가를 둘러보고 책 냄새를 맡고 고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근처 센 강변엔 헌책을 파는 노점들이 있지만 책을 고르는 손님들보다 기념품을 구경하는 손님들이 더 많았다. 책만 파는 가게보다 기념품을 함께 취급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화재 사고가 났던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고 페르 라셰즈 묘지로 가기 위해 강변을 걸으며 헌책 파는 노점을 여러 곳 유심히 보았지만 책을 사 가는 사람들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책이 아닌 공간을 ‘소비’하기 위해 서점을 찾는 것일 수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와 센 강변의 헌책노점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오후 6시 해가 아직 중천에 있었지만 페르 라셰즈는 묘지에 갔다가 쫓기듯 나오고 말았다. 이곳엔 알퐁스 도데,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세상을 떠나고도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묻힌 곳이다. 묘지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묘를 찾을 수 있는 지도가 있다. 이름을 기억할만한 이가 100명이 넘는다. 파리는 이곳에 묻힌 사람들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숙소에 돌아와서 미리 짐을 쌌다.내일은 아침 일찍 암스테르담으로. 이제 북유럽으로 간다.    /조경국

2020-06-02

걷고 또 걷고… 순례자의 종착지엔 고행의 눈물이 흐르고

◇ 산티아고 순례자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알베르게(숙소)에 순례자가 아닌 일반 여행자는 나밖에 없는 듯. 다들 배낭을 침대 맡에 둔 순례자들이다.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광장에 갔더니 순례를 끝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쉬고 있었다. 야고보의 유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했고 그의 유해는 신화 속 이야기처럼 발견되어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곳으로 유해가 옮겨진 시기인 9세기 경 스페인(에스파냐)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고 땅을 되찾고자 했던 에스파냐 지배자들은 유럽 다른 나라의 지원이 필요했다. 순교한 지 1천년이 지난 행방을 알 수 없는 성인의 무덤을 찾아 유해를 옮기고 대성당을 지은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 군사적 이유가 컸다고 할 밖에. 중세시대 신심 가득한 순례자들은 갈 수 없는 예루살렘 대신 이곳을 찾았을 테고 이들은 자연스레 에스파냐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지원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야 돈이든 군대든 만들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벌일 수가 있으니. 어쨌거나 대성당 건축을 시작한 당시 에스파냐의 왕 알폰소 2세는 탁월한 수완가였을 듯하다.가장 많은 순례자가 찾는 프랑스 생 장 삐헤 드 뽀흐에서 이곳 산티아고까지 루트는 약 800킬로미터, 40일 남짓 걸어야 하는 길이다. 신심이 없는 도보여행자일지라도 순례의 마지막 대성당 앞에 서면 아마 이전과는 다른 나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광장엔 흐느껴 우는 순례자들이 많았다. 여행이라기보다 고행에 가까운 길을 걸었던 이유가 다들 있을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순례길의 마지막에 느끼는 저 폭풍과 같은 감정의 북받침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는 것이겠지. 주변에도 이곳을 다녀온 분들이 꽤 있고 이야기도 많이 들어 걷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녀온 기분이다. 언젠가 여유가 되면 순례자가 되어 보고픈 생각도 있지만 가능할지는. 산티아고에서 하룻밤만 자고 700킬로미터를 달려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달리며 많은 순례자들을 봤다. 모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예부터 있던 순례길이 다시금 인기를 끌게 된 이유가 뭘까. 훌륭한 자연환경, 저렴한 숙박시설, 지역 주민의 친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길에 담긴 역사성, 이야기가 아닐까.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했고, 또 새로운 순례자들이 쌓아가는 이야기가 계속 사람들을 카미노로 불러 모으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길만 내는 것으론 부족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길이어야 사람들이 찾겠지.◇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팜플로나팜플로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찾았다. 첫 번째는 헤밍웨이가 이곳에 머물렀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후반부의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에슐리가 젊은 투우사 로메오와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 바로 팜플로나다. 두 번째는 주변 다른 도시보다 숙소가 저렴한 때문이었다. 카미노 여정에 있는 도시라 값싼 알베르게가 많다. 프랑스로 넘어가기 전 머물고 가기 좋은 듯하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은 ‘노인과 바다’라지만 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가장 사랑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도 스페인이 배경이었고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경험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스페인을 아낀 작가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책보다 영화로 아주 어린 시절 먼저 만났다. 마리아 역을 맡았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키스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키스 장면의 그 명대사는 원작자가 아닌 극작가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키스할 때 코는 어디로 가죠? 그게 늘 궁금했어요.”내일 쉬엄쉬엄 헤밍웨이가 단골로 찾았다는 카페도 가보고 이곳저곳 돌아볼 생각이다. 이 먼 이국에서 함양 청년 셋과 한 방에 묵게 됐다. 세상은 넓고도 좁구나.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는 걸까?팜플로나는 산 페르민 축제를 앞두고 구시가지는 벌써 분위기가 무르익는 중이다. 소몰이로 유명한(사람이 소를 모는 건지 소가 사람을 모는 건지 애매한) 산 페르민 축제는 매년 7월 6일부터 시작한다. 만약 축제 기간이었다면 팜플로나에는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다. 질주하는 소와 도망가는 사람이 뒤엉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위험한 놀이를 수 세기 동안(1591년부터 시작) 전통으로 이어온 이유가 뭘까. 단순한 오락으로 보기엔 무모하고 위험하고 잔인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거겠지만.헤밍웨이도 이 소몰이에 참여했고 그래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겠지.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이루나 카페도 슬쩍 구경하고 소몰이 골목을 따라 걷다 팜플로나 시민회관에 들러 산페르민 축제를 찍은 사진전도 보고 19세기 파가니니와 함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사라사테를 기념하는 전시실도 보고 왔다. 찌고르바이젠을 작곡했고 다른 연주자가 범접할 수 없었던 기교로 청중을 사로잡았던 그의 고향이 팜플로나인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거리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갤러리는 조용해서 소파에 앉아 교양 있게(?) 음악을 감상했다. 시민회관 중앙홀엔 축제기간 동안 음악 공연이 있는 듯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만든 무대는 훌륭했다. 낮은 단상과 플라스틱 의자가 놓였을 뿐이지만 건물 자체의 공간감이 워낙 훌륭해 어떤 공연을 하더라도 생동감을 불어넣을 것 같다.◇ 스페인을 지나 다시 프랑스로만화 페스티벌로 유명한 앙굴렘에서 하루 묵으려 했으나 최대한 파리 가까이 가서 쉬는 편이 나을 듯하여 그냥 지나기로. 인구 6만 명의 작은 도시가 만화 페스티벌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뭘까, 한번 그 도시에 가보고 싶었었다. 아쉽지만 포기. 러시아에 들어갈 때까진 최대한 경비를 아껴야 한다. 안개 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보르도의 포도밭을 지나 푸아티에의 밀밭을 가르고 부르주 외곽에 있는 주로 트럭 운전자들이 묵는 숙소에 들어왔다. 파리까진 약 250킬로미터 남았고 팜플로나에서 여기까지 800킬로미터쯤 달렸다. 거의 10시간 넘게 로시를 타고 왔는데 이쯤 달리면 내가 로시인지 로시가 나인지, 오토바이와 몸과 영혼까지 합친 듯한 기분이 든다. 묶어둔 2리터 생수병 안에 햇빛을 받아 따끈하게 데워진 물을 등에다 붓고 장갑을 적셔 더위를 쫓아보지만 마르는 건 순식간이다. 로시와 함께 열덩어리가 되어 유럽을 남에서 북으로 점프하듯 달리는 중이다.오늘처럼 달리는 날엔 숙소에 들어와서 땀에 절은 티셔츠와 속옷, 양말을 빨고 샤워하고 누우면 열을 세기도 전에 곯아떨어진다. 눈을 부비며 하루 일과를 기록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여행 중 유일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내일 계획(주로 지도 검색)을 세우는 시간이니 미룰 수가 없다.하루만 지나도 오늘 있었던 일이 가물거리니. 파리에선 4일 동안 머물 예정이다. 최대한 주말을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쾨벤하운, 오슬로, 스톡홀름, 헬싱키를 거쳐 최대한 빨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갈 작정이다.    /조경국

2020-05-26

서쪽으로 달린 51일째… 유럽의 동쪽 끝에 서다

◇ 2만2천400㎞, 리스본 도착P에게 연락이 와서 리스본에서 만나기로 했다. P는 나와 반대 방향으로 유럽을 달리는 중.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의 반환점, 혹은 종착점은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호카곶이다.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있는 그곳에서 횡단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경우가 많다.동해항에서 똑같이 출발하고 돌아가는 일정도 얼추 비슷한데 유럽 일정은 정반대다. 대부분 여행자들은 호카곶에 왔다 스페인에서 배로 오토바이를 한국으로 보내고 비행기로 귀국한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돌아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루 더 쉬었다가 상태가 나아지면 출발하려고 했는데(세르반테스 동상 인증샷도 찍고) P와 다시 유럽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을 듯해 리스본으로 왔다. 한낮 더위를 피하려고 아예 새벽에 출발했다.리스본에 와서 엔진오일과 오일필터, 뒷타이어를 갈았다. 모토밀(Motomil)에서 소모품을 교환했다. 한국에서 이곳까지 오토바이로 왔다니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동. 부품비 할인도 받았고 출발하기 전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도로를 돌아나오는 데까지 지켜보며 환송해 감동했다. 혹시나 맡겨 놓고 기다려야 하나 걱정했는데 아주 빠르게 처리해주었다.깨끗하게 세차를 해준 건 기본이고 고정 스트랩, 생수까지 챙겨주는 친절함이라니. 지금까지 달린 거리 약 2만2천400㎞. 내일부턴 집으로 돌아간다. 달릴수록 집과 가까워진다. 두 번째 단락을 끝맺은 기분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니….저녁에 현묵 씨를 만나 서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풀었다. 바르샤바에서 헤어졌으니 그동안 서로 꽤 많은 이야기들이 쌓였다. 역시 더위로 고생한 것이 단연 첫 번째. 나는 이제 북으로 올라가니 더위에선 멀어져 안도하고 현묵 씨는 남쪽으로 가니 걱정이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도시 리스본햇살은 따갑지만 스페인 내륙에 비하면 리스본은 선선한 편이다. 마젤란 동상에서 상조르즈 성까지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마젤란은 조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에스파냐(스페인) 왕가의 후원으로 세계 일주를 떠났다.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진실’을 보여주었고 아메리카 대륙 남단 마젤란 해협을 개척하고 필리핀까지 이르렀지만 그곳 원주민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모험가였지만 향료 무역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무역상이기도 했고, 가는 곳마다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열렬한 전도사 노릇도 했다.결국 그는 끝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지휘했던 5척으로 이뤄진 ‘몰루카 함대’ 중 빅토리아 호만 천신만고 끝에 정향을 싣고 에스파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한 척에 실렸던 정향만으로도 함대의 모든 원정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았다. 미각에 눈을 뜬 당시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고 대항해시대를 여는 기폭제였다.리스본은 정말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아랍, 아프리카 사람들이 절반은 되는 듯하다. 의외로 중국인들이 많아 놀랐다. 번화가에 차이나타운으로 불릴 만한 곳이 있었고 그곳 외에도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은 한때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제국이었지만 지금은 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국가다. 인구는 천만 명 정도고 영토도 그리 크지 않다.시내 중심가를 걷는데 오랜 세월 정체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낡고 훼손된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활력을 느낄 수도 없었다. 잠시 스쳐가는 처지에 속단할 수는 없다. 내내 빵과 샌드위치, 우유만 먹다 케밥집에서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배부르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케밥집인 듯하다. 터키, 인도계 사람들이 운영하는 케밥집을 대도시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럽의 동쪽 끝, 호카곶에 도착하다집을 떠나 서쪽으로 달린 지 51일째 드디어 호카곶에 도착했다. 유럽의 서쪽 끝에서 대서양을 마주보고 섰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옛 뱃사람들은 이 바람을 타고 아메리카로 아프리카로 나아갔겠지. 만약 그 시절 태어났더라면 나도 뱃사람이 되어보았을 텐데.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구름이 내려앉았지만 빗방울이 떨어지진 않았고 덕분에 종일 시원했다. 내륙보다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은 확실히 기온이 낮다. 이 정도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스페인 북쪽 해안을 타고 가다 결국 프랑스 내륙을 거쳐야 한다.유럽 내륙은 여전히 폭염에 시달리고 있지만 30도 이상만 올라가지 않으면 별 문제 없이 달릴 수 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추위와 더위를 아주 골고루 경험했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가는 동안 어떤 날씨를 경험할지 알 수가 없다.엔진오일과 타이어를 교체하고 체인 루브까지 칠했더니 확실히 매끄럽게 잘 나간다. 이제 엔진오일만 두 번 교체하면 더는 신경 쓸 것이 없다. 오일필터는 여분으로 모토밀에서 구입했다. 앞서 겪었던 사고 같은 일만 피하고 이제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잘 쉬며 달리는 일만 남았다.무리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달리다보면 다음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로틀을 당길 때가 많다.출발할 때 예상과는 다르게 날씨나 도로 상태뿐만 아니라 온갖 변수들이 생기니, 그 변수들을 최소한의 에너지를 써서 극복하는 게 오토바이 여행의 묘미다.산티아고 오는 길에 포르투 렐루 서점에 들렀다. 정확히는 겉만 보고 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포기했다. 구경하고 나온 손님들만큼 입장할 수 있다. 근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도 줄은 그대로였다.렐루 서점은 책을 파는 서점이라기보다 관광명소라고 해야겠다. 오랜 시간 이곳에 오길 바랐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책과 오랜 역사를 품은 공간이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듯하여 아쉬운 마음이 크다.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서점이 자리를 지키고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사라지는 것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옛 역할을 할 수 없더라도 간판을 내리지 않는 게 낫지 않나. 돌아가면 다시 책방 문을 열어야 한다.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딱 지치지 않을 만큼 에너지를 쓰며 버틸 생각이다. 줄어든 몸피만큼 에너지도 줄일 수 있겠지. 가만히 엎드려 책방에서 혼자 꼼지락거리며 할 수 있는 재미난 일을 찾아야겠다. 멀리 돌아다니는 건 이번 여행을 끝으로 더는 하기 힘들테니.산티아고 숙소는 순례자들로 넘친다. 16개 침대에 빈자리라곤 딱 2개. 한국에서 온 순례자가 그중 3명(1명은 정확하진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오니 실감할 수 있다. 도보 여행자야말로 여행의 순수한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내일은 산티아고에서 하루 쉬고 모레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팜플로나에 갈 계획이다.    /조경국

2020-05-19

블록 하나 사이에 두고 100년 된 헌책방… 동떨어진 세상 속 공간

◇ 니스에서 아름다운 소르본느 서점을 만나다고모댁에 지내며 잠시 기록하는 걸 멈췄다. 매일 기록한다는 건 굉장한 인내심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잠들기 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써두지 않으면 눈을 감기 힘들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잠이 쏟아져도 기록하려 노력했던 건 오랜 기간 준비하고 떠나온 이번 여정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떠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다시 하기 힘든 경험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떠나기 위해 고생했던 것들을 보상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남는 것은 언제나 일기와 사진뿐이었다.40일 넘게 달려오며 바닥난 에너지를 다시 충전했다. 그래도 그냥 쉬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고모부의 설명을 들으며 니스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과 전시관을 돌아보고 문 연 지 100년 가까운(1931년) 헌책방 ‘소르본느 서점’도 다녀왔다. 프랑스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서점이 점점 줄어들고 있단다. 서점을 여러 곳 찾아다녔으나 문을 닫은 곳도 있고, 예전보다 형편이 어려워진 곳도 있었다. 그나마 소르본느 서점은 규모도 크고 갖춘 장서도 훌륭했으나 손님은 많지 않았다.한 블록만 내려가도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해안도로였으나 소르본느 서점은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 속에 있는 공간 같았다. 소르본느 서점의 원주인은 러시아 혁명을 피해 니스에 정착한 망명 귀족이었다.니스는 오랜 세월 유럽의 이름난 휴양지라 이곳을 찾고, 거주했던 예술가와 귀족들이 많았고 그 덕분인지 작은 도시임에도(35만 명, 근교 거주자 포함 100만) 그들이 남긴 문화 자산으로 풍요로운 곳이다 . 그중에서도 특히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앙리 마티스와 세잔과 피카소는 니스를 사랑했던 예술가들이다. 니스의 강렬하고 투명한 햇볕은 끊임없이 창작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매개였겠지. 그들이 만든 이야기와 작품이 남았기 때문에 니스는 단순한 휴양지 이상의 가치를 지닌 도시라고 생각했다. 도시를 풍성하게 하는 건 새로운 공장이나 건물이 아니라 예술가와 그들이 만든 이야기, 그리고 훼손하지 않은 유적과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작은 할아버지의 부고를 듣다3일 동안 니스에서 충분히 쉬고 새벽 니스를 떠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은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야한다. 스페인으로 넘어오기 직전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톨게이트에서 줄을 잘못 서서 진땀을 뺐다. 뒤에 줄을 길게 서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게 어렵다. 스페인에 들어와선 톨게이트 앞에서 매의 눈으로 현금을 낼 수 있는 통로를 찾아들어갔다. 어떻게 결제하는지도 앞 운전자를 자세히 관찰했다.무더위에 오토바이를 타고 대도시로 들어가는 건 항상 괴롭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시베리아의 서늘한 바람을 벌써 맞고 싶으니. 신용카드로 통행료를 내려고 했더니 불가. 결국 직원 호출 버튼을 눌러 카드번호를 불러주고서야 결제할 수 있었다. 스피커로 다른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는데(프랑스어가 들릴 리가) 크레디트 카드와 넘버만 또렷하게 들렸다. 눈치가 갈수록 늘고 있다.프랑스도 스페인도 유인 톨게이트가 없다. 모두 기계다.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 기계가 편리할 것 같지만 기계가 해결책은 내놓지 못한다.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결국 사람의 손을 거쳐야한다. 기업의 이익과 효율을 위해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는 것은 결국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소득의 불균형을 가져올 뿐이다.바르셀로나에서 이틀 밤 묵고 마드리드로. 반환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바르셀로나에선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들을 보고 싶었다. 책과 사진으로 보았던 그의 작품들은 시대와 관습을 완전히 뛰어넘는 천재의 것이었다. 하지만 숙소를 떠날 수 없었다. 작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하고 싶었던 건 모두 포기했다. 집안의 장손으로 응당 장례를 도와야했는데, 이리 멀리 떠나와 있으니. 이틀 동안 숙소 밖을 나가지 않았다. 불혹이 지나며 기쁜 일보다 슬픈 일에 불려가거나 소식을 듣는 게 부쩍 횟수가 늘었다.◇ 폭염을 뚫고 마드리드로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왔다. 사라고사 근처에선 한낮 기온이 37도까지 올랐다. 헬멧 내피와 슈트를 물에 적시며 달렸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말랐다. 서유럽 지역 전체가 이상 고온으로 비상이라는 기사를 숙소에 들어와서 읽었다. 파리는 40도가 넘을 수도 있단다. 숙소에 들어와서 샤워를 했지만 열이 식지 않았다. 온몸이 불덩이 같다. 30도만 넘어도 힘든데 마드리드에 도착할 때까지 35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뙤약볕 아래 달리는 건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오늘 마신 물이 3리터가 넘는다. 이번 주 내내 뜨거운 염천이라니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열기가 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더위를 참으며 달리는 것도 힘든 일이다.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갔다 반환점인 포르토 렐루서점까진 약 1,000킬로미터. 이런 날씨가 파리를 넘어갈 때까지 계속 된다면 5,000킬로미터를 버텨야 한다. 하루 주행 거리를 짧게 잡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오늘 달린 600킬로미터가 나로선 임계치인 듯.모든 열이 눈으로 몰린 것 같았다. 끼니를 모두 거르고 수건에 물을 적셔 눈에 대고 종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런 날씨에 헬멧을 쓰고 있으면 달리고 있어도 머리가 뜨겁다. 쉴드를 열면 도로 위에서 달궈진 바람이…. 한증막 문을 여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들어오듯 한다. 밤이 되곤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눈두덩이 열은 그대로였다. 강한 빛을 계속 마주보고 달렸더니 눈도 얼마나 시린지. 선글라스를 해도 어느 선을 넘어가면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몸 상태가 이상하면 가장 빨리 신호를 주는 곳이 눈이다. 나이가 들수록 빛에 더 예민해지는 듯하다.결국 리스본에서의 계획도 모두 접었다. 숙소 가까이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있는데도 꼼짝할 수 없었다. 밤이 될 때까지 물수건을 눈에 붙이고 누워 있었으니까. 나까지 모두 5명 한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해가 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에어컨도 없는 방이라 창문으로 넘어오는 바람이 잠시 쉬기라도 하면 금방 더위가 찼다. 저녁 6시쯤 기온이 39도였다. “인페르노(화염지옥)가 온다”는 어느 스페인 기상 캐스터의 말을 빌린 신문기사를 읽었다. 이래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나.이번 여행의 소득이라면 대륙을 가로지르며 ‘기후변화’를 직접 몸으로 경험한 것이다. 예전 후쿠시마 원전과 가까운 나미에초에 갔을 때 보고 느꼈던 것과 근사치에 가까운 깨달음이다. 지구는 이미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2020-05-12

모짜르트 생가·미라벨궁 지나 베로나… 옛 정취 그대로인 도시들

◇ 바르샤바를 떠나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오스트리아로 넘어오니 돈의 가치가 달라졌다. 프라하에서 묵었던 디스카운트 프라하 호텔은 2박 요금이 아침밥 포함 15.6유로였다. 6인실 도미토리였지만 부엌이 있어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편했다. 잘츠부르크에선 아예 호스텔을 검색할 수도 없었다. 숙소를 잡을 때 기준은 무료 주차와 최저 가격. 거기에 부엌이 있는 곳이면 무조건 오케이. 짤츠부르크에선 그 기준이 아예 통하지 않았다.결국 시내에서 꽤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다. 1인실 조식 포함 50유로. 부킹닷컴 어플로 검색한 최저가. 일반 가정집 다락방인데 비싸지만 50유로가 아깝지 않은 곳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도 친절하고 깨끗하고 주변 경관이 정말 아름다웠다. 문 열고 나가면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 페페가 놀고 있을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것보단 마리아와 폰 트랩 대령의 아이들이 ‘도레미송’을 부르고 있을 것 같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짤츠부르크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어쨌거나 여행을 떠난 후 처음 누려보는 호사였다. 지금껏 1인실은 한 번도 묵어보지 못했다. 만약 캠핑 장비를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알프스 주변이나 북유럽에선 캠핑장을 이용했을 텐데 사고로 사이드박스를 잃어버린 후유증이 크다. 사이드박스가 완전히 깨져버려 그 안에 있는 캠핑 장비를 모두 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텐트 치고 자는 재미를 빼앗겨 버린 슬픔보다 경비를 줄일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린 아쉬움이 더 크다.짐을 풀자마자 시내 구경에 나섰다. 대중교통 이용하기 애매한 곳에 숙소가 있어서 그냥 걸어서 다녔다. 걸은 거리만 20킬로미터쯤 될 듯하다. 프라하에서 새벽에 일어나 400킬로미터를 달려오곤 쉬지도 않고 종종거리며 시내 구경하고 돌아왔더니 파김치. 모차르트 생가, 미라벨궁, 기타 등등, 서점 세 곳... 그냥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잘자흐 강변에 앉아 쉬며 어디를 가볼까 지도를 보는데 바로 근처에 아우구스티너 맥주 양조장이 있었다. 안 그래도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픈 참이었다. 아우구스티너 양조장에서 맥주를 마신 건 두고두고 술자리 자랑거리가 될 듯하다. 사실 맥주를 어떻게 사 마시는지 몰라 한참 헤맸다. 아우구스티너 수도원 맥주의 역사는 1621년에 시작되었지만 현재 양조장 건물은 1912년에 지어졌다.건물 밖 넓은 정원은 오후 3시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로 가득 찼다. 관광객을 제외하곤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이곳 양조장은 우리로 치면 오래된 막걸리 술도가 같은 거겠지. 실내 홀과 야외 정원까지 합치면 2천 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잘츠부르크 여행은 커다란 상수리나무 밑에서 저민 소시지와 샐러드를 안주 삼아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마신 걸로 충분히 만족.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 매장에 들러 박스를 고정할 스트랩을 구입했다. 박스 지지대에 금이 간 걸 뒤늦게 발견했다. 미리 묶어두지 않으면 나머지 박스들까지 떨어져버릴 수도. 이제 드디어 이탈리아로 넘어가 라이더라면 누구나 한 번쯤 달려보길 꿈꾸는 돌로미티 패스를 달린다.◇ 라이더의 꿈, 돌로미티 패스를 달리다돌로미티를 달리고 싶다고 일기에 썼던 게 2017년 9월 22일. 드디어 그 꿈을 이뤘다. 잘츠부르크를 출발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 펠버 타우에른 터널을 지나 돌로미티 산맥을 넘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인 이탈리아 베로나에 왔다. 돌로미티의 산들은 장엄하고 박력이 넘친다. 깎아지르고 우뚝 솟은 산들을 보노라니 탄탄한 근육을 뽐내는 옛 신화 속 영웅들인 듯싶다. 미로처럼 꺾이고 숲으로 하염없이 들어가는 길을 달리다보니 신화의 한 페이지를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 황홀했다. 눈부신 만년설, 청량한 공기, 비를 흠뻑 맞으며 급경사를 돌아나갈 때의 아찔함까지…. 오랫동안 잊지 못할 테다. 돌로미티를 넘는 경험은 유라시아 횡단의 하이라이트였다고 해도 좋겠다. 영상을 촬영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아쉽다.베로나에 온 것은 딱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고모가 계신 프랑스 니스까지 가야하니 베니스로 들어가면 니스가 멀어지고 밀라노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 중간에 있는 베로나를 선택했다. 베니스나 밀라노에 비해 덜 유명한 탓에 오히려 북적이지 않고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베로나 아레나(원형극장)는 로마시대에 지어져 지금도 오페라 공연이 열린다.베로나에 도착했을 땐 여름 오페라 페스티벌이 시작되어 준비가 한창이었다. 광장 한쪽에 스핑크스와 이집트 상징물들이 쌓여 있는 걸 보니 ‘아이다’가 무대에 올려질 듯했다.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건물이 아직도 굳건하다는 것도, 거기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것도 부럽다. 이미 토대가 있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것과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걸 만드는 건 격차가 크다. 작게나마 있는 것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훼손하기 일쑤인 것들을 말해보아야 무슨 소용이겠나. 베로나 골목 구석구석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고대 로마에서 현재까지 시간과 역사가 중첩된 공간이다. 이탈리아의 이름난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겠지. 옛것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도시의 매력을 풍성하게 한다.◇ 이탈리아 남자의 매력, 패션 감각과 ‘리액션’흔히 말하는 이탈리아 남자의 매력이란 바로 이것인가, 숙소 주인 아저씨를 보고 느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데 세련되고 깔끔한 옷차림에 호텔리어 수준의 상차림은 기본(혹시 전직 호텔리어였을까). 매력의 핵심은 공감 능력이었다. 손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데 ‘리액션’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이게 얼마나 어려운가.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아저씨의 모범을 본 듯하다.베로나에서 니스로 넘어오는 길은 약 450킬로미터. 제노아에서 니스까진 지중해를 왼쪽으로 끼고 달린다. 잘 닦인 해안길이 아니라 험한 산을 뚫고 계곡에 다리를 놓아 연결한 도로다. 터널과 다리를 각각 200개씩은 지났을 듯. 고속도로가 끝날 쯤 통행료가 꽤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40.5유로를 계산했다. 이탈리아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방식이 우리와 같다. 100킬로미터에 10유로의 비용이 든다고 생각하면 될 듯.한때 유행했던(지금도 유행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중해풍’ 원조를 달리면서 곁눈질로 보았다. 이건 그 마을 전체가 색과 스타일을 공유해야만 매력을 가지는 듯하다. 주변 경관과 상관없이 지중해풍 건물을 짓는다면 우리네 환경에선 튀기만 할 뿐 쉽게 어울리기는 어렵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옅은 황톳빛 기와와 벽체로 마감했는데, 지중해의 푸른빛과 마을을 감싸고 있는 녹색을 중화시키는 색이었다. 바다와 땅과 숲을 공간과 색으로 표현한다면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을 표본으로 삼으면 되겠다.집을 떠난 지 43일 만에 드디어 프랑스 니스 고모댁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지 모르겠다. 니스 시내로 들어오는 길이 막혀 꽤나 힘들었다.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이었다. 시내가 밤늦도록 북적북적. 고모부, 고모와 니스 해변에서 맥주도 마시고, 골목길에서 열리는 음악 공연도 잠시 구경했다.고모부께선 니스 경찰서에서 무료 통역 봉사활동을 하신다. 도착한 날 렌터카를 빌려 니스를 찾은 한국 관광객들이 차에 둔 짐들을 도둑맞아 통역을 도와주러 가셨는데, 도둑이 차 유리를 깨고 짐을 몽땅 훔쳐갔다고. 렌터카로 여행하는 경우 무조건 트렁크에 넣어야 한다. 가능하면 트렁크가 있는 렌터카를 빌리는 게 나을 듯. 그리고 차를 빌릴 때 파손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    /조경국

2020-05-05

독재자의 시대… 철조망 둘러싸인 절망 가득했던 금단의 공간

◇ 바르샤바를 떠나 크라쿠프로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로 향했다. 비가 온다. 다행히 크라쿠프 숙소에 도착하고서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내는 나가기 어렵겠다. 오는 길에 잠시 스칼라성에 들렀고 엉뚱한 곳을 숙소로 착각해 헤매기도 했다. 주행 중 문제는 없었다. 이 상태만 유지하면 된다. 로시를 수리하느라 리가와 바르샤바에서 시간과 경비를 예상보다 많이 써버린 탓에 나머지 일정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포르투갈까지 갔다가 스웨덴, 핀란드로 해서 다시 러시아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는 여정이니 물가가 비싼 곳에선 아쉽지만 체류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크라쿠프로 내려온 이유는 이곳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기 위해서다.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히틀러와 나치가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현장을 보고 싶었다. 한 사람의 광기가 집단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토록 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는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가진 악은 선함보다 훨씬 더 끄집어내기 쉽고 또 힘을 키우기 쉬운 듯하다. 특히 독재자의 시대에선(우리도 마찬가지 시대를 지나왔다) 악의 평범성은 너무나 쉽게 일상이 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주범 중 한 사람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의 중령으로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학살하는 책임자였다. 그는 가족들과 아르헨티나로 몰래 이주해 이름을 숨기고 살다 이스라엘 정보국에 체포되어 재판받았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성찰하지 않는 인간이 어떤 가공할 결과를 초래하는지, 서로 죽고 죽이는 폭력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아이히만의 사례는 잘 보여준다.’크라쿠프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기도 하다. 시내에 가면 그의 법랑냄비 공장이 있다. 오스카 쉰들러도 나치당원이었으나 그는 자신 공장에서 일하던 수용소에서 데려온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1천2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구했다. 선과 악은 공존하지만 악은 ‘평범’만으로도 그 해악의 경계가 없고 용기를 내어야만 하는 선은 그 수고에 비해 이로움을 내기 힘든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선한 사람이 되기 힘든 것이겠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다개인 방문자는 아침 일찍 가야한다는 말이 맞았다. 단체로 아우슈비츠를 찾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가이드 해설 없이 관람하려면 오전 9시 이전에만 가능하다는 이야길 들었다. 숙소에서 7시에 나와 아침 8시 30분이 되기 전에 도착했다. 그 시간에도 주차장엔 버스들로 가득했다. 여권을 보여주고 무료입장권을 얻었다. 들어가기 전 가방이나 큰 소지품은 유료 보관소에 맡겨야 했다.(헬멧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주차장 입구 큰 도로에는 유대인을 실어 나르던 기차 선로가 놓여 있고 수용소는 이중 철망 속에 붉은 벽돌 건물들이 20여동 나란히 서있었다. 수용소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걷어내고 현재의 풍경만 놓고 보면 한적한 시골에 있는 오래된 작은 대학 캠퍼스 같은 느낌이다.(원래 이곳은 폴란드군의 병영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상상도 못할 만행이 자행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철저하게 산자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장치들이 곳곳에 있었다.수용소와 수용소 건물 사이에 만들어 놓은 총살 집행장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메아리쳐 울리도록 했다. 바로 옆 지하 감방은 소련과 폴란드에서 잡혀온 사상범들을 대상으로 가스 실험을 했던 곳이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절대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절망만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다.보헤미안(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집시)을 가뒀던 수용소 건물에 전시된 두 손가락을 합쳐놓은 크기의 작은 수첩에 빼곡히 적힌 글자가 살아남은, 기록을 남겨 기어코 그 시절을 버텨 지금까지 살아있는 영혼이 아닐까 생각했다.이 작은 규모의 수용소에서 그 많은 유대인과 집시, 히틀러에 반대하는 이들을 죽이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고 바로 옆 화구 속에 시체를 밀어 넣어 태웠다. 전쟁은 언제나 인간을 광기 속으로 몰아넣고 인간임을 망각하게 만든다. 평화의 길을 두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부추기는 이들은 대부분 타인을 희생해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연장하려는 이들이다.프라하까지 달려 저녁 무렵 도착해 자정이 되도록 시내를 쏘다녔다. 슬리퍼 신고 심카드 사러 나갔다가 그 길로 프라하 성부터 카를교 일대까지 모두 돌아본. 덕분에 카프카 기념관 위치도 확인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쿠델카를 따라 찍다바츨라프 광장을 찾았다. 1968년 8월 어느 날, 민주화를 열망했던 프라하 시민들은 바츨라프 광장에서 쫓겨났다. 소련군들은 광장 가로수 그늘 밑에 탱크를 두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겁박했다. 정적이 깔린 광장을 바라보고 젊은 사진가 쿠델카는 6시 3분을 가리키고 있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파인더 안에 넣고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그는 프라하는 떠났다.그가 사진을 찍었음직한 건물을 찾았다. 그 위치엔 ‘뉴요커’라는 의류 매장이 있었고 여름휴가를 위해 신상 수영복을 찾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2019년 6월, 나는 그의 사진을 오마주하기 위해 매장 창가에 서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런…. 고장난 시계를 리가에서 다른 짐들과 함께 집으로 보내버렸다는 걸 잊고 있었다. 결국 뉴요커에서 시계를 20유로쯤 주고 단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샀다. 40년이 훌쩍 지난 바츨라프 광장엔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하다. 새 시계의 시각은 12시 57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바츨라프 광장에서 카프카 기념관으로, 레논벽으로 어젯밤 걸었던 길을 역순으로 돌았다. 책방 두 곳을 구경했고 지인들에게 보낼 엽서를 샀다. 엽서는 프라하에서 샀지만 소인은 프랑스 어느 도시 것이 찍힐 듯하다.죽음을 앞둔 카프카는 자신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맡기며 모두 불태워달라고 했다. 나는 그게 항상 궁금했다. 그토록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면 왜 스스로 없애지 않았는지.(나 같으면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고 그렇게 했을 듯)유언과는 다르게 친구가 자신의 원고를 제대로 평가해줄 것이란 믿음과, 또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강했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복선과 다의의 단어를 쓰기 좋아했던 카프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아니면 마무리 짓지 못한 작품들에 대한 결백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기념관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았고 ‘성’의 줄거리를 짧게 영상으로 옮긴 것을 혼자 여러 번 보았다.그는 언제나 떨쳐버릴 수 없는 아득한 절망에 짓눌린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건 태생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살았던 시대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독일, 오스트리아….어디로 갈지 아직 행선지를 정하지 못했다.

2020-04-28

재미를 주었던 것들…이제, 스칼라 성으로 간다

◇ 구세주, 페트롤헤드스의 미치아이와 도미니크에바 씨에게 소개받은 ‘패트롤헤드스’에 다녀왔다. 패트롤헤드스는 바르샤바 시내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외곽 낡은 창고에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옆에는 생활폐기물 처리장이 있다. 그냥 버리기 어려운 쓰레기들을 신고하고 와서 처리하는 모양이다.냉각팬은 회생불능 판정을 받았다. 합선으로 모터가 탔다. 왜 합선이 되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교체를 해야만 하는 상황. 지금까진 임시조치해서 타고 왔으나 이제 그럴 수 없다. 부품을 새것으로 바꿔야만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미캐닉 미치아이 씨에게 “내 오토바이가 문제가 많다”고 하자 웃으며 “BMW잖아”란다.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첫 번째 사고의 원인은 나의 부주의였고, 쿨링팬이 멈춘 건 출고된 지 10년이 넘었으니 슬슬 노후화된 부품들이 문제가 생길 때가 된 것일 수도.이왕 뜯는 김에 이곳저곳 문제가 없는지 점검했다. 출발하기 전에 교체했던 에어필터는 곤충들과 이물질로 엉망이었고, 구석구석 온갖 날벌레들이 끼어서 지저분한 상태. 흙투성이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쿨링팬 교체 때문에 결국 바르샤바에서 또 며칠 머무르게 되었다. 다른 문제들까지 해결이 된다면 뮌헨은 가지 않아도 된다. 이번 주는 꼼짝할 수 없을 듯.미치아이 씨와 도미니크 씨는 세상일은 별 관심 없는 듯 오토바이만 만지며 사는 미캐닉이자 라이더인 듯싶다. 버스를 타기 위해 마을로 한참 걸어나가다 지갑에 유로화 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돌아가 미치아이 씨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 부탁했다.폴란드는 유럽연합에 속해 있지만 자국 통화를 사용한다. 숙소까지 약 30분 46즈워티(약 1만6천원)이 들었다. 카드 결제. 우리와 택시 요금이 비슷한 듯하다.◇“오토바이 정도는 반드시 있었으면 한다”K선생님은 결국 포기하고 귀국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신 듯하다. 5월 12일 유라시아 횡단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동해항에 모인 사람은 나까지 포함해 6명. 바이칼에 도착하기 전부터 K선생님의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길 들었다. P선생님께 앞 서스펜션 오일이 새서 완전히 내려 앉아 고생 중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선생님은 아직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했다. 같은 날 유라시아 횡단을 떠난 사람들끼리 위치 공유앱을 깔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다.바르샤바에서 만난 H선생님은 지난해 러시아 모고차 근처에서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어 포기하고 올해 다시 도전하셨다. 선생님 오토바이는 구입한 지 1년 남짓 되었는데 문제가 생겨 BMW 본사가 있는 뮌헨으로 가신다고. 원래 함께 가려고 계획했지만 뜻밖에 냉각팬 문제가 생겨나는 바르샤바에 남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워낙 먼 거리를 달려야하니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 누군가는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안전이 먼저.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에선 체력을 유지하고 여유를 잃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토바이는 고장 나면 어떻게든 고치면 되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여유를 잃으면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모두 건강하게 목적지까지 갔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길.지하철을 타고 중심가에 나가 이리저리 어슬렁어슬렁 다녔다. 밤 10시쯤 되어서야 해가 넘어가니 오히려 저녁에 돌아다니기 좋은 듯하다. 낮에는 워낙 덥고 햇살이 뜨거워 그늘이 아니면 금방 땀범벅. 내일쯤 수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연락을 받기로 했다. 지금 있는 숙소에서 우선 4일 더 있기로. 장기투숙(?)이라 요금을 깎아준 듯. 3박 추가요금이 65즈워티(약 2만원).도미니크 씨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숙소에 꼼짝 않고 있었다. 가만히 늘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몸이다. 내 주변의 상황들이 몸을 쓰게 만들 뿐. 애써 무엇을 해야 한다든가 억지로 부지런을 떠는 건 딱 질색이다. 가장 중요한 건 재미다.재밌으면 부지런해질 수도. 자신의 깜냥에 넘치게 ‘애써 억지로’ 무슨 일이건 하다보면 상처 입고 균형을 잃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씩 철들고 부턴 그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가끔 에너지가 넘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이를 만나면 ‘훌륭하신 분이구나’ 생각하지만 쉽게 피로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로를 주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항상 다짐한다.지금껏 내게 재미를 주었던 것들을 꼽아보면 주로 ‘기계류’였다.오토바이는 잘 만든 기계이기도 하고 빨리 달리고픈 인간의 본능에 가장 충실한 이동수단이기도 하다. 몸을 드러내고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하는 오토바이는 위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 위험은 언제나 불시에 찾아온다. 균형이 깨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그 순간 아드레날린이 대폭발한다는 건 아이러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취미 있는 인생’에서 이렇게 말했다.“오토바이가 차보다 위험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지금은 제대로 된 답을 내기 힘든, 내더라도 의미가 없는 시대다. 말하자면 이미지에 빠져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남자가 남자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야말로, 오히려 오토바이 정도는 반드시 있었으면 한다.”◇ 드디어 말끔해진 로시를 찾아오다3일만에 도미니크 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걷고... 패트롤헤드스에 로시를 데리러 다녀왔다.저번에 택시 타고 돌아올 때는 30분도 안 걸렸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했더니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해 2시간이나 걸렸다. 90분 동안 버스와 지하철, 트램을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이 7즈워티(약 2천원)다. 어쨌거나 드디어 로시가 돌아왔다!먼저 패트롤헤드스의 미치아이, 도미니크 씨에게 감사를. 정말 저렴한 비용으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가장 큰 문제였던 부러진 프론트 패널 캐리어와 모터가 타버린 냉각팬을 교체했다.프론트 패널 캐리어는 쉽게 부품을 구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여러 곳 수소문했나보다. 정품은 아니지만 시그널 램프와 안개등도 다시 달았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앞뒤 브레이크 오일도 교환했고, 엉망이었던 에어필터까지 새것으로. 부러진 카울은 당장 주행하는데 문제가 없으니 돌아가서 고치기로. 새로 바꾸기엔 비용이 너무 비싸다.세차까지 해서 오랜만에 말끔해진 로시를 보니 기분이 좋다.내일 폴란드의 옛 수도였던 크라쿠프로 간다 하니 도미니크 씨가 중간에 스칼라 성에 들렀다 가라고 추천했다. 절벽 위에 성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멋진 여행하라며 작별 인사를.그래서 내일 첫 번째 경유지는 스칼라 성으로 잡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내일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정리했다. 미리 빨래도 해놓고. 미리 챙겨놓지 않으면 아침나절이 금방 지난다. 낮엔 워낙 더워서 가능하면 시원한 아침에 출발하는 편이 낫다.그 당시 바르샤바 기온은 33도. 더워서 잠깐 팔을 걷고 달렸는데도 피부가 화끈거릴 정도로 탔다. 바르샤바의 마지막 밤이다.    /조경국

2020-04-21

40년 인생, 가장 가슴 뛰는 여행… 그곳엔 자유로움이 있었다

◇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에 가다엊그제 집을 나온 듯한데 벌써 한 달을 채웠다. 이렇게 오래 돌아다니는 여행은 젊은 시절, 20대에 했었어야. 마음은 있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던 날들이었다. 이렇게 훌쩍 나이를 먹고서도 멀리 떠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번 여행이 나의 사십대에 가장 중요한 버킷리스트였다. 지난해 출발하려는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고 바등거리며 다시 떠날 계획을 세운 건 그만큼 ‘유라시아 횡단’이 중요했기 때문이다.지금껏 해보고 싶은 일들 중에 가장 가슴 뛰는 일이었다. 살면서 이것만은 해보고 싶은... 그런게 있지 않나.마흔부터 매년 세 가지씩 버킷리스트를 썼다. 지난해엔 딱 한 가지 ‘유라시아 횡단’만 생각했었다. 그게 한해 미뤄졌고 약간의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여기까지 왔다. 떠나온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바람을 가르며 달릴 때 느끼는 자유로움은 누구와도 공유하기 어렵다.인생은 한 번 뿐이고, 짧고, 뒤돌아보곤 후회할 일을 만들며 산다. 마흔 언저리쯤 겪었던 몇몇 슬프고 강렬했던 경험들이 이 생각을 더 굳게 만들었다. 그리고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에너지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무엇을 하건 회복하는 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 건강할 때 몸을 써서 하고 싶은 일은 해야지, 마음먹은 이유다.오늘은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에 다녀왔다.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라트비아의 주요 작가와 작품을 훑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유럽의 변방이었고,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작품성이 뛰어나더라도 널리 알릴 기회를 잃어버린 작가들이 많았을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테두리 안에서 창작력을 억눌러야 했던 소련 시절, 1950-60년대 그려진 작품들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크기도 대작이거니와 몸을 쓰는 사람들의 생동감과 건강함이 작품 속에 넘쳤다.비구상, 추상은 작품을 보자마자 ‘좋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에 안목이 높지 않은 나로선 작가가 당시 처했던 현실은 접고라도 당장 눈에 들어오는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은 사진을 찍고(허락을 받았다) 작가의 이름도 따로 기록해두었다. 지하 전시장엔 젊은 예술가들의 영상, 설치작품들을 전시 중이었다. 그중 1971년 시베리아로 떠났던 시인 미에르발디스가 촬영한 영상과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와 편지 속에 넣어 보냈던 말린 야생화가 인상 깊었다. 38년이 지난 후 이 편지를 발견하고 영상을 다시 편집해 올린 이는 편지를 받은 친구의 아들(카리스탑스 에피너스, 정확한 발음인지 모르겠다.) 이 전시의 제목은 ‘Forget me not’. 그의 바람대로 그는 잊히지 않았다. 38년 동안 친구의 편지와 꽃을 간직하고 세월을 뛰어넘는 작품으로 만든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잠시 시인의 편지 앞에서 생각했다. 그의 편지를 해석할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돔 천장부터 지하수장고까지 모두 개방되어 있어서(수장고 출입은 불가능) 작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레드카펫을 유유히 밟고 내려오며 돔과 날개처럼 로비를 감싼 계단만으로도 개방감이 훌륭하다 감탄했다. 미술관으로 딱 적당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오늘도 여기저기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녔다.내일 떠난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하고 볼만한 곳들을 더 찾아볼 걸 후회도 된다. 내일은 목적지를 생각지 않고 남쪽으로 출발.◇ 리투아니아 독립의 상징, 십자가 언덕드디어 리가를 떠나기로 했다. 결국 리가에서 해결한 건 아무것도 없다. 러시아를 벗어나 잠시 휴식한 셈. 고장난 곳을 임시 조치하고 오늘 350킬로미터쯤 탔는데 문제가 없는 듯하다. BMW 본사가 있는 뮌헨에 가서 부품을 구하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로시를 받을 때,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넘어올 때의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유럽연합은 교통만 놓고 보자면 가상의 국경선만 존재할 뿐이다.이리 왔다갔다 할 수 있는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쉽게 과거로 되돌리기는 힘들 듯하다. 영국의 ‘브렉시트’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피울 수 있는 고집이 아닐까. 도로를 이용해 이동할 수 있는 편리함을 맛보았다면 단언컨대 브렉시트는 나오지 않았으리라. 우리도 북한과 도로든 기차든 이어져 대륙으로 물류를 이동할 수만 있다면 더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수도. 한번 길을 내기가 어렵지 길이 열리고 나면 쉽게 닫히지는 않을 것이다.아침 떠나올 때 같은 방을 썼던 메르키비 아저씨가 가는 길에 시아울리아리 가까이 있는 ‘십자가 언덕’을 들렀다 카우나스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십자가 언덕은 라트비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곳이다. 원래는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지였으나 나중에는 독립투사들의 영혼을 기리고 평화를 기원하는 공간이 되었다.지금은 누구나 십자가를 놓고 기도하는 이름난 순례지이자 관광지 같다. ‘십자가 언덕’에 놓인 십자가만 10만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충분히 납득이 간다.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을 단체로 찾은 다른 라이더들과 같이 잠시 안전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했다. (다른 라이더들은 다들 십자가를 들고 왔다!) 카우나스에 도착해선 숙소에서 라면 끓여 먹고 커피도 타 마시고 꼼짝 않고 쉬는 중. 메르키비 아저씨가 이곳 구도심도 멋지다고 했는데 내일 아침 일찍 바르샤바로 출발할 예정이라 오늘은 일찍 취침하기로.◇ 새로운 문제, 냉각팬 고장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이대로 달릴 수는 없는 상황. 바르샤바로 들어올 때 혹시 로시가 멈추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라디에이터 열을 식혀주는 냉각팬이 고장난 듯하다. 정지하고 있으면 온도가 치솟고 계속 경고등이 뜬다. 오늘 기온은 32도, 도로 위 온도는 38도까지 올랐다.(고속도로 전광판에서 확인했다.) 이 상태에서 냉각팬이 돌지 않고 도심 도로에서 정체 상태로 있으면 엔진 열이 오를 것은 뻔하다. 또 그 열이 또 고스란히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올라온다. 겨우 숙소를 찾아 들어와서 내일 로시를 끌고 어디로 점검을 받으러 가야하나 고민하는 중에 친한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바르샤바에 있는 자신의 친구 에바 씨에게 연락해보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이란. 한국말이 나보다 더 유창한 에바 씨에게 소개받은 미캐닉을 찾아가기로.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하며 어떻게든 반환점을 향해 가는 중이다.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어놓고 나면 항상 근처 식료품점부터 찾는다. 식사는 가능하면 숙소 부엌에서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거의 매일 장볼 때 콜라를 사서 마신다. 물을 마셔선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랄까. 콜라를 마셔야 그나마 해갈(?)이 된다. 숙소 벤치나 그늘에 앉아 콜라 한잔 마시면서 멍하니 있는 게 낙이다. 그런데 오늘 마신 라임 코카콜라는 오리지널보다 못한 듯하다. 지구가 뜨거워질수록 주가가 오를 기업은 코카콜라일 거다. 지금이라도 여윳돈이 있으면 투자할까보다. 지구온난화로 인류가 멸망하고 새로운 문명종이 나타나 인류의 유적을 발굴하면 가장 흔하게 발견될 것은 코카콜라를 담았던 용기들이 아닐까.    /조경국

2020-04-14

오랜 숲을 간직한 ‘라트비아’… 여유롭게 걷기 좋은 ‘리가’

◇ 수리점을 찾아 헤매고, 부츠를 수선하다오토바이를 가지러 BMW 모토라드에 다녀왔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한 시간쯤 담당자를 기다린 다음에야 찾을 수 있었다. 라트비아 모토라드의 문제점은 미캐닉을 직접 만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제외하고 저것만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게 국내라면 가능했을 텐데 철저하게 손님과 미캐닉 사이에 소통은 할 수 없었다. 숙소 직원에게 소개 받은 곳으로 오토바이를 끌고 갔다. 시내 반대편에 수리점이 있어 겸사겸사 리가의 전체적인 풍경도 감상할 수 있었다.옛 건물들과 숲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점은 리가의 매력. 도심 개발이 한창이지만 구시가지는 잘 보존되어 있고 그걸 보기 위해 찾는 관광객도 많은 듯하다.모토라드를 뒤로 하고 찾아간 수리점 이름은 ‘탠더스’. 미캐닉 마르씨가 로시를 보더니 문제없이 고칠 수 있지만 지금은 작업이 어렵고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오란다. 작은 작업장 안에도 밖에도 대기하고 있는 오토바이가….어쨌거나 함께 교체하거나 손 봐야할 부품에 대해 확인했고 예약했다. 걱정 말라고 하니 걱정은 털어버리는 걸로. 숙소에 돌아와서 밑창 벌어진 부츠를 들고 구두 수선점을 찾아가 맡겼다. 이탈리아 본사에 가려던 계획은 접었다.오래된 건물 1층에 있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꼭 100년 전으로 세월을 거슬러가는 기분이었다. 양쪽 모두 수선하는데 드는 비용은 10유로. 수선공 할아버지께서 금요일에 찾으러 오라고 하셨다. 오토바이 수리를 마칠 때까지 최대한 다음 여정에 차질 없도록 그동안 불편했던 건 매일 하나씩이라도 해결하기로. 거의 한달 내내 입었던 슈트를 세탁하고 국립미술관에 가볼 생각이다. 두 군데 헌책방을 찾았으나 문 여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모두 문을 닫았다. 여기도 나처럼 불량한 책방지기이거나 형편이 어려운 것이겠지. 러시아를 지나오면서 모스크바에서 딱 두 명 책 읽는 사람을 봤고, 리가에선 아직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어디든 책 읽는 사람들이 소멸하고 있는 증거일까.리가 인구는 65만 명(광역 100만 명)정도.라트비아 전체 인구는 약 200만 명이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으로부터 두 번 독립했다.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나쁜 편이지만 현재 리가 인구의 30퍼센트는 러시아인이다.◇ 여유롭게 걷기 좋은 도시, 리가리가에서 5일째. 만약 사고 없이 달렸다면 폴란드를 지나고 있었을 테다. 슈트를 세탁해 널고 짐을 다시 정리했다. 사이드 박스 하나가 없는 상태라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기로. 최소한으로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줄일 짐이 있다. 그러고 보면 평소에도 너무 많은 것을 이고지고 살고 있는지도. 올드 리가(옛 시가지)를 걷다 이대로 미캐닉만 믿고 있을 게 아니라 그냥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낫겠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필요한 부품을 유럽 어디론가 받아서 직접 수리하기로 했다. 우선 계기판 지지대와 양쪽 외장 카울, 앞 오른쪽 방향 지시등, 그리고 사라져버린 몇 개의 볼트와 너트만 있으면 달리는 데 문제가 없으니. 계속 리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간 다시 러시아까지 돌아가는 시간이 촉박할 수밖에 없다. 리가에 있는 공구상가에서 재료를 사서 임시 조치해둔 곳을 보강해 부품 받을 곳까지 달리기로 했다. 공구상가에 가면 무언가 쓸만한 재료들이 있을 것이다.리가는 여유롭게 걷기 좋은 도시다. 인구가 65만 명(광역 100만 명)정도. 라트비아 전체 인구는 약 200만 명이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으로부터 두 번 독립했다.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나쁜 편이지만 현재 리가 인구의 30퍼센트는 러시아인이다.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또 반대로 러시아와 가까이 있고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러시아에 진출하려는 회사나 자본이 라트비아를 교두보로 삼는다는 글을 읽었다.리가 시내에 즐비한 고급 차들과 건설 현장이 그 증거. 생산 시설이 거의 없음에도 부를 누리려면 무역, 금융, 관광, 서비스업 외에는 길이 없다.지리적 이점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번영과 침탈의 가능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북해를 끼고 러시아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독립했음에도 라트비아로선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는 처지리라. 1991년 독립 이후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들어간 것은 최근 러시아와 갈등을 빚고 있는 우크라이나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리가가 가진 도시의 품격은 옛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 올드 리가와 도시를 아늑하게 만드는 오랜 숲인 듯하다. 건물보다 숲에 더 점수를. 왜 내가 사는 동네는 가로수 가지치기를 그렇게 매정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대로 두어도 참 좋을 텐데.◇ 전설의 경주차, 오토유니언 타입 C/D오토유니언 타입 C/D가 리가에 있다고! 입장료 10유로쯤이야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우디의 전신 오토유니언이 만든 전설의 ‘아름다운’ 경주차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덤으로 옛 오토바이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리가 자동차 박물관은 시내 중심가에서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굳이 타입 C/D가 아니더라도 입장료를 낼만큼 충분한 전시물과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인 자동차를 완벽한 상태로 복원하고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물론 그 중 백미는 C/D. 이곳에서 보니 1930년대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다들 특별한 능력을 가졌던 모양이다. 1930년대로 넘어오면서 자동차의 성능도 비약했지만 디자인만 놓고 보면 성능의 발전 이상으로 기계적인 아름다움을 극도로 끌어올린 시대였던 것 같다.리가 자동차 박물관과 이르쿠츠크 앤티크 모터사이클 박물관에서 본 것만으로 글 한 편을 쓸 수도 있겠다. 두 곳 모두 우연히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관람했는데 오토바이나 자동차(작고 실용적인 차를 좋아한다. 러시아에서 LADA 니바 보고 반했다)를 좋아하다보니 이런 류의 박물관은 자연스레 관심이 간다.박물관을 포함한 전시공간은 단순히 소장품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건물만 지어 놓고 계속 새롭게 바꾸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중소 도시의 박물관이라면 현재와 소통할 수 있는 분야, 소장품과 내용을 쉽게 업데이트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다. 내가 사는 동네를 언급해서 그렇지만 한동안 문을 닫았던 청동기 박물관이 그랬다.(그곳에 청동기 박물관을 짓는 게 적절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옛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만, 단순히 옛 유물과 복원품만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가 어렵다. 박물관을 다녀오고 리가 중앙 시장에 가서 밥도 사먹고 체리도 사먹고 내내 쏘다녔다. 일주일쯤 있으니 리가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한낮 기온은 30도, 위도가 우리보다 한참 위인데도 날씨가 뜨겁다. 아래쪽은 얼마나 더울지. 내일이 리가에서 마지막 날이다. 내가 있는 방(4인 도미토리)엔 여행자들이 계속 바뀌어 하이와 굿바이를 반복 중. 모레 아침 일찍 폴란드를 향해 출발할 계획이다.    /조경국

2020-04-07

찢어지고, 부서지고, 쓰라린… 러시아 마지막 날의 흔적들

◇ 러시아에서 마지막 날, 미끄러져 넘어지다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날 이번 여행도 끝날 뻔 했다. 모두 내가 잘못한 탓이다. 도로에 떨어진 돌을 피하려다 미끄러졌다. 다행히 크게 속도를 내지 않았고 도로에 흙이 깔린 곳에서 넘어졌다. 긴장을 늦추고 있었던 탓이다.나는 다친 곳이 전혀 없었지만 로시는 만신창이. 양쪽 카울과 앞쪽 깜박이등 하나가 깨졌다.더 큰 문제는 헤드라이트와 계기판을 잡아주는 지지대가 부러지고 사이드 박스 하나가 완전히 회생 불능이 된 것이다. 사이드 박스는 폐기처분하고 헤드라이트와 계기판은 덕테이프(덕테이프는 그야말로 만능이다!)로 고정시켜 숙소에 들어왔다.엔진이나 미션, 전장에는 문제가 없다. 넘어진 후 잠시 시동이 켜지지 않아 고민했었는데 다행히도 시동도 켜지고 경고등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일이 새는 곳도 없고.6-7미터쯤 미끄러진 듯한데 몸이 성한 건 슈트와 부츠 때문이다. 이리저리 기운 슈트와 물 새는 부츠가 제대로 역할을 했다. 사고로 바지 밑단이 찢어져 또 기워야 했다. 덕테이프로 고정하고 계속 달릴 수 없어 숙소에 와서 고장난 것들을 완전히 분리했다.안개등도 하나가 완전히 부서져 분리했다. 깨진 카울과 지지대, 앞 물받이를 수선했다. 가장 구경이 작은 별렌치를 버너에 달궈 구멍을 뚫고 케이블타이로 꿰맸다. 오토바이까지 깁다니. 이렇게 만들어 미안하다! 로시.미끄러지며 헬멧 안으로 흙이 밀고 들어왔을 때,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혹시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잠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찰나가 지나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어쨌거나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다. 달리지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여행은 계속된다.계속 달려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하지만 오늘 일로 일정이 틀어질 수도. 임시조치해둔 부품을 꼭 교환해야 한다. 우선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가서 알아보기로. 어떻게든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러시아여 안녕!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로사고로 대범함+2, 상황대처능력+3.5 정도 능력치 상승했으나 에너지-7, 지출-10. 응급조치한 부분은 비포장길을 달렸음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임시로 묶어둔 부분이 피로가 누적되면 별 수 없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우선 라트비아로 넘어가야 해서 러시아의 벨리키예루키에서 가장 가까운 남쪽 국경검문소로 갔다.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넘어가려면 그린카드(유럽 자동차보험)를 만들어야 한다.국경 검문소 가까이 세 곳이나 보험회사 사무실에 들렀는데도 발급이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라트비아에 가서 만들어야 한다고. 예전 여행자들이 남긴 정보가 틀린 경우도 종종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 계속 나온다. 러시아 검문소에서 짐까지 검사 받았지만 다시 돌아나와야 했다.결국 라트비아 국경 검문소 안에서 그린카드를 발급 받을 수 있는 북쪽에 가서야 입국할 수 있었다. 3개월 보험료가 53유로.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한데 내가 가진 카드 모두 불가능. 다행히 지갑 안에 60유로가 있어 그린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그때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되었던 건 국내 점검시간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오후 6시 정각부터 몇 분 사이 결제를 시도했었으니까. 한국보다 6시간 빠르니 그때 국내는 자정. 나중에 숙소에 와서 문제없이 지불 가능한 걸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갑 속에 150달러와 60유로, 그리고 쓰고 남은 루블화 약간 뿐이었으니까. 카드로 인출하거나 결제를 할 수 없으면 난감할 수밖에.해외에 나올 때는 다른 은행 신용카드를 준비하는 게 좋겠다. 둘 다 같은 은행이라 같은 문제로 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북쪽 국경에서 280킬로미터쯤 달려 밤 11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쪽에서 다시 북쪽으로(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갔는데 비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졌다.), 또 거기서 리가까지. 아주 긴긴 하루였다.◇ 깜짝 놀랄만한 수리비, 수리를 포기하다BMW 모토라드에 가서 수리를 의뢰했다. 로시의 모델명은 F650GS TWIN. 2009년식이고 아주 짧은 기간 생산되었고 2011년부턴가 F700GS로 변경되어 나왔다. 호환되는 부품이 많지만 그래도 부품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 거라 생각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수리해야할 부분을 점검하고(밀린 일이 많아서 점검은 하루를 기다려야 한단다.) 독일 본사에 부품을 주문해 수리하기까지 ‘아마도’ 짧게는 일주일에서 2주일은 걸린다고. 일주일과 2주일 사이 ‘메이비(maybe)’가 얼마나 또렷하게 들리던지. 결국 리가에서 최소 10일, 최대 보름은 발이 묶이게 생겼다.헬멧을 들고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숙소로 걸어 돌아오는데 이렇게 된 거 요즘 유행한다는 ‘ㅇㅇ에서 한 달 살기’를 짧게 해보기로 결심했다.사실 이렇게 한 도시에 오래 머무르며 느긋하게 돌아보고 알아 가는 게 가장 추천할만한 여행 방식이라 생각한다. 주마간산, 달리고 달려서 반환점과 종착점를 찍는 여행은 꽤나 피로하고 놓치고 가는 것이 많다. 하지만 시간과 달려야할 할 곳이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마트에 가서 과일(자두와 방울토마토)를 사서 먹었는데 뱃속으로 넘어가자마자 바로 분해되어 흡수되는 느낌이었다.그동안 과일을 사먹지 않았더니 몸이 바로 반응한다. 옛날 먼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도 과일을 먹을 때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옴스크부터 같이 달렸던 현묵 씨는 리투아니아 쪽으로 먼저 출발하는 걸로. 가능하다면 돌아갈 때 모스크바에서 만나기로 했다. 안전하게 가고 싶은 곳 모두 돌아보길.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내일부터 숙소를 좀 더 저렴한 곳(1박 9유로)으로 옮기기로 했다.쉬는 동안 라트비아 역사와 지리 공부나 해야겠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려면 대중교통과 음식, 그리고 통신, 이 세 가지를 먼저 해결하는 게 중요한 듯하다.지금 숙소에서 로시를 맡긴 모토라드까지 걸어가긴 먼 거리라 버스카드를 구입했다.버스나 트램을 10번 탈 수 있는 카드가 약 11유로. 심카드는 1.5유로짜리를 구입했다. 유심카드는 10일 동안 리가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하니 직원이 알아서 건네주었다. 우리네 편의점 같은 곳에서 두 가지 모두 구입할 수 있다.모토라드에 다녀와서 견적서를 이메일로 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로시를 사랑하지만 이 회사의 애프터서비스 정책은 나 같은 헝그리 라이더는 감당하기 어렵다.오 마이 갓! 차마 수리금액을 말하기가…. 견적서에 나와 있는 세금만으로 내가 생각했던 수리 금액과 거의 맞먹었다.문제는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될 부품들까지 견적서에 넣어둔 것. 결국 수리하지 않고 오토바이를 찾으러 가겠노라 답장을 보냈고, 길게 한숨 한 번 쉬고 내가 원하는 곳만 수리할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모토라드에서만 수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견적서에 나온 수리비를 그대로 내면 이대로 핸들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한 번의 실수가 많은 경험을 하게 만든다.    /조경국

2020-03-31

1만1천㎞ 달려온 홀로 여행… 우리네랑 다른 풍경을 발견하고

◇ 시베리아 지나 모스크바에 도착하다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한국을 출발해 모스크바까지 로시로 달린 거리가 11,259킬로미터. 집에서 출발한 지 21일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17일이 걸렸다. 춥고 더운 것(도착한 날 모스크바 최고 기온 29도), 그리고 비가 자주 내렸던 걸 제외하면 크게 고생하지 않고 온 듯하다.시베리아 횡단하며 묵었던 숙소나 음식은 가격대비 아주 만족. 뭐 비만 피하고 배만 채울 수 있으면 어디든 뭐든. 혹시나 출발하기 전 겪었던 문제(간헐적 엔진 출력 저하)를 여행 중에 다시 겪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부분도 출발하기 전에 정확하게 진단해서 잘 해결(연료 펌프 교체)한 것 같다. 오는 동안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모스크바에 도착하니 이번 여행의 1막이 끝난 기분이다. 유럽을 여행하고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니 이제 4분의1이 지난 셈. 러시아를 벗어나 유럽 대륙의 가장 동쪽 끝인 포르투갈 호카곶까지 가야 절반. 러시아를 벗어날 때까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최대한 빨리 유럽으로 들어가고 모스크바는 돌아갈 때 여유 있게 둘러보기로. 추위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넉넉하게 9월 중순까지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돌아가야 하니 여유를 부리기 힘들다.엔진오일과 체인루브를 구하려 근처 바이크샵에 가려고 나왔더니 세찬 비가 내려서 포기. 예보가 틀린 적이 거의 없다. 모스크바에선 하루만 쉬며 정비하고 아침 일찍 러시아워를 피해 라트비아로 간다. 유럽 국가로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가려면 보험(그린카드)을 들어야 하는데 라트비아 국경에서 받는 것이 가장 저렴하다.어디로 입국하느냐에 따라 3개월 보험료가 적게는 55유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해 러시아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핀란드로 갈 경우 수백 유로를 내야한다. 대부분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들은 몽골, 중앙아시아를 통과해 동유럽으로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보험료가 저렴한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로 입국하는 경로를 선호한다.이제 유럽 내에서 어떻게 이동할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쉴 때마다 지도를 보는데 동선을 짜는 게 쉽지 않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지만 달릴 거리를 생각하면 여유가 많지 않다. 포기할 건 깔끔하게 미련두지 않기로.◇ 치킨을 먹으려 1시간 넘게 걷다시내 관광이라도 나갈까 했는데 비가 와서 강제 휴식 중. 밀린 빨래도 하고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나 헤아리고 줄일 짐은 없나 뒤적거린다. 하나라도 줄일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좋겠지만 있다 해도 놓고 가긴 어렵다. 한 번도 꺼내지 않은 노트북이 애물단지다. 챙기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었다.몇 년 전 두어 번 긴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만해도 기록이나 숙소와 교통편 예약, 행선지 검색 모두 노트북으로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것만 놓고 왔어도 2킬로그램은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가방을 열 때마다 후회하는 중. 아직 달릴 거리가 많이 남았으니 집으로 돌려보낼 방법을 찾기로 한다.비가 그치자마자 바로 시내에 나갔다. 꽤 먼 거리를 걸었다. 10킬로미터쯤 걸어 다녔다. 모스크바 시내 반대편(숙소는 시내 동쪽 외곽에 있었고, 오토바이 매장은 서쪽 외곽)까지 가서 엔진오일과 체인루브를 샀고, 저녁으로 치맥을 먹었다. 길을 가다 오븐에 굽는 통닭을 봤고 숙소에 들어갔다가 다시 그 가게까지 걸어 1시간 넘게 기다려 사 왔다. 닭이 꽤 큰데 가격은 330루블(약 6천원)이었다.현재 함께 달리고 있는 현묵 군은 휴대폰 거치대와 탑박스를 가져오지 않아 고생 중이다. 어제 방문했던 매장에서 적당한 것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찾는 물건이 없어서 실패했다.여행을 시작한 이후에는 무엇이든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은 처음 시작할 때 선택을 잘 해야만 불편을 줄일 수가 있다. 여행 경비를 최대한 아껴야 하는 처지에선 기존에 가져온 것을 두고 다시 구입하는 것이 쉽지 않다. 탑박스가 진열된 매대 앞에서 한참 고민하고 계산기를 두드렸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포기. 나도 탱크백과 여름용 라이딩 자켓을 보고 마음이 혹했으나 가격표를 보고 가만히 내려놓았다. 러시아 오토바이 매장의 물건 값은 우리와 거의 비슷하거나 아주 약간 저렴한 듯.우리가 묵는 숙소는 커다란 낡은 창고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높은 담으로 아예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트럭이나 버스 운전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듯하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런 곳에 숙소가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붉은 광장에서 감상한 ’백조의 호수’다시 하룻밤을 보내고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바이크샵을 찾아 나섰다. 어제 구입하지 못한 물건들 때문이었다. 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미니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이나 걸려서 도착했지만 역시나 이곳도 현묵 군이 찾는 물건이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택시를 제외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트로이카 카드를 구입하면 편리하다. 우리네 교통카드와 같은데 지하철과 버스를 탈 때 사용한다. 단 미니버스는 현금을 내야 한다. 트로이카 카드는 지하철 역에서 구입할 수 있다. 보증금은 50루블이고 원하는 금액만큼 충전해서 사용할 수 있다.돌아오는 길에 모스크바의 상징 성 바실리 성당을 보고 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붉은 광장으로 가는 길에 수산물 박람회도 구경하고 전통복장을 차려 입은 미인이 같이 사진 찍자고 내 손까지 잡았지만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왜 제 손을 잡는지 다 알아요!) 사진을 찍으면 모델료(?)를 요구한다. 주로 어리바리한 동양인 아저씨들이 대상인 듯하다.붉은 광장에는 서가가 가득 찬 부스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책 축제가 일주일 동안 열릴 예정이라 각 부스마다 출판사에서 나온 직원들이 책을 진열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러시아 출판사 사람들도 다들 책 만들고 파느라 고생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마음 같아선 내일 하루 더 짬을 내어보고 싶었으나 갈 길이 머니. 성 바실리 성당 가까이엔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오케스트라가 리허설 중이었다.책 축제에 오케스트라가 공연을 하다니 우리네랑은 스케일이 다른 모습이었다. 크고 작은 책 축제에 가보았지만 이만한 공연은 보지 못했다. 비록 리허설이지만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실시간으로 들으며 붉은 광장을 둘러보게 될 줄은 몰랐다.돌아오는 길에 육교 위에서 병색 가득한 엄마와 함께 구걸하는 아이를 보았다. 예닐곱이나 되었을까. 주머니에 잡히는 동전을 모두 아이가 들고 있는 작은 종이 가방 속에 넣었다. 세상은 언제나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기 마련이다. 해맑은 아이 얼굴을 보며 한 인간에게 주어진 슬픔은 공평하게 총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슬픔은 곱으로 쳐서 감할 수 있기를.내일은 러시아에서 묵는 마지막 밤이 될 듯하다.    /조경국

2020-03-24

숲이 우거진 도시엔, 낡은 아파트와 새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 밀밭 나비떼를 뚫고 카잔으로 달리다우파에서 나와 드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데 호분분 호분분했다. 나비들이 얼마나 많은지 노란 꽃잎이 바람 따라 날리는 듯했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더라면 볼만했겠지만... 참혹한(?) 상황이 이어졌다.나비떼를 뚫고 나오니 오토바이뿐만 아니라 헬멧과 슈트까지 나비 시체로 범벅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살생하고 업을 쌓았다. 오토바이고 라이딩 기어고 나비가 부딪치고 터지며 묻은 노란 체액으로 비린내가 진동했다. 허물을 벗고 드디어 하늘을 나나 했더니 곧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버린 불쌍한 것들. 나비떼는 카잔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나타났다.이제 한국 시간보다 6시간이 빠르다. 시간도 공간도 근미래로 이동한 기분이다. 이곳은 이제 농사철이 시작된 듯. 우랄산맥을 넘은 이후 날씨도 완전히 봄이다. 더는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르겠다. 곳곳에 농기계들이 넓은 들을 일구고 있다. 도로가에 서 있는 마을 상징물도 밀을 소재로 한 곳이 많다. 나베레츠니라는 곳에 있는 케밥집에서 거하게 점심을 먹었다. 대부분 도로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사 먹거나 요리해서 끼니를 해결하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식사를 하자 싶어 찾았다.식당에 가면 러시아어를 읽을 수 없으니 메뉴판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데 다행이도 사진과 가격표가 크게 붙어 있었다. ‘베친’을 시켜 먹었는데 씹는 순간 전통시장 할머니 순대 좌판에 앉은 기분이었다.고기 맛이 이상해 무엇이냐고 직원에게 물었더니 친절하게 번역 어플을 이용해 ‘간’이라고 알려준다. 카잔의 숙소 직원도 여권을 보더니 똑똑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제외하고 러시아에서 러시아인에게 거의 유일하게 들은 우리 말이 ‘간’과 ‘안녕하세요’였다.도로에서 모스크바 표지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모스크바까지 약 700킬로미터가 남았다. 내일 모스크바 외곽까지 이동하고 모레 들어가는 걸로 일정을 잡았다. 현묵 군이 모스크바 한국 대사관에 연락했는데 조지아를 통해 육로로 터키로 들어가는 건 피하라는 답변을 들었다.최근 터키 국경지역 정세가 좋지 않아 여행 자제 경보가 내려졌다. 원래는 터키로 해서 유럽 남부를 여행하고 북쪽으로 빠르게 이동할 계획이었다. 모스크바 가는 동안 좀 더 고민해서 계획을 다시 짜는 걸로.◇ 옛 소련의 낡은 아파트에서 하룻밤조금씩 벌어지더니 부츠 굽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새 걸로 구입한 라이딩 기어인데. 본사가 이탈리아에 있으니 가는 길에 들러 수리를 받을 생각이다.‘이탈리아 명품 부츠’라는 홍보 문구를 보고 구입했으나 품질은 명품이라 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그때까지 밑창이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꽤나 평이 좋은 브랜드였는데 뽑기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일까.우선 덕테이프로 임시로 수선했다. 부츠뿐만 아니라 슈트까지 여기저기 해져 터지기 시작하니 이 정도면 라이딩 기어의 반란이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떨어진 곳들을 찾아 또다시 꿰매고 수선했다.요제프 브로드스키의 ‘하나 반짜리 방’ 같은 곳이 오늘 카잔에서 잡은 숙소다. 소련 시절 지어진 낡고 어두운 아파트인데 5평쯤 되는 작은 방 두 개가 욕실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구조다. 9층 건물인데 엘리베이터는 성인 2명이 타도 비좁다. 일부는 숙박시설로 사용하고 또 일부는 실제 입주민이 살고 있다.요제프 브로드스키의 ‘하나 반짜리 방에서’는 수필집이다.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으나 오래전 절판된 책이다. 소설가 안정효 씨가 번역했다.‘러시아의 우울’, ‘단테의 그늘에서’, ‘그림자를 위하여’ 등 10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하나 반짜리 방에서’는 그 중 한 편인데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매우 작은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1940년 소련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강제노동수용소에 유배당하기도 했고, 결국 1972년 추방당해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이 살았던 공간과 부모님, 자신의 삶에 대한 생생하게 묘사했다. ‘열다섯 살 이후’ 자신만의 공간을 갖기 위해 그가 했던 일은 부모님 방과 자신의 ‘반짜리 방’ 사이에 늘어나는 책과 책장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일이었다. 그의 부모는 두터운 휘장을 쳐서 사생활(?)을 보호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예민한 사춘기 소년에게 책은 정신적 물리적 방벽 역할을 하는구나 생각했다.“해결 방법은 내 쪽에서 점점 더 책장을 많이 쌓아 올리고, 부모의 방 쪽에서는 휘장을 점점 더 두텁게 치는 것이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들은 이 해결 방법과 문제의 본질 자체를 둘 다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과 친구들은 책보다 훨씬 천천히 그 수량이 늘어나게 마련이었고, 그뿐 아니라 책은 일단 소유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아파트였음에도 창틀은 나무고 좁은 베란다는 바닥이 기울었고 녹슨 난간이 아슬했다. 블라디미르는 숲이 우거진 도시다. 나무들이 낡은 아파트들을 숨기고 감싸고 있었다. 숙소 아래서 쉬고 있는데 새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간간히 섞여 들려왔다.베란다에서 두 아저씨가 고개를 내밀고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묻는 것이었다.“까레이스키!”라고 하자 또 북인지 남인지 궁금해 했다. 언제쯤에야 남과 북을 나눌 필요가 없을지.◇ 모스크바까지 남은 거리 170킬로미터드디어 모스크바로 입성하는 날, 어제는 봄이더니 오늘 날씨는 여름이었다. 28도까지 기온이 올랐다. 오토바이의 매력은 많고 많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가장 큰 단점은 몸을 드러내고 타니 날씨에 취약하다는 것.오늘처럼 기온이 올라가는 날 아스팔트 위에 있으면 금방 지친다. 이동하는 동안 1.6리터 생수병을 다 비우고도 목이 탔다. 무거운 라이딩 기어 안으로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앞에 매연을 뿜는 낡은 트럭이라도 있으면 그야말로 고문에 가깝다.지난 주 눈보라를 맞았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뜨거운 여름을 맛보는 중. 이제 곧 남쪽으로 가야하는데 통풍이 잘 되지 않는 지금 슈트로는 버티기 힘들 듯. 어떻게 해야 할지 달리면서 계속 고민했다. 러시아에 들어온 지 17일째, 어제까지만 해도 머뭇거리기 일쑤였는데 이제야 가스차니짜(휴게 음식점)에서 음식 주문하는 요령이 생겼다. 워낙 음식값이 저렴하니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에겐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빵 두 조각과 닭고기 커리 볶음밥, 커피까지 99루블(약 1700원). 매번 음식 이름을 외웠다가도 막상 주문하려면 발음이 잘 되지 않는다. 빵은 클리에프, 볶음밥은 블로우프, 커피는 코페. 모스크바까진 이제 170킬로미터쯤 남았다.하필 3일 내내 비가 내릴 거란다. 모스크바에서 며칠 발이 묶이겠다.   /조경국

2020-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