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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궂은 날 버티며…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으로

◇ 옴스크 가는 길, 중국 라이더들과 만나다옴스크에서 드디어 현묵 군을 만났다. 대구가 고향인 현묵 군은 같은 배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고 오토바이를 열차에 실어 옴스크로 보냈었다. 러시아를 벗어날 때까지 동행하기로 했다.옷을 얼마나 껴입었는지 헤아려보니 상의만 여섯 벌이다. 티셔츠, 조끼, 슈트 내피, 슈트, 비옷, 형광조끼. 그렇게 입고도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떨었다. 비가 눈보라로 변하더니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옷에 붙은 눈이 바로 얼어붙을 정도였다. 시베리아 날씨는 정말 종잡을 수 없다. 5월 말에 난데없는 눈보라라니.도저히 그대로 달릴 수 없어 간이 버스 정류소에서 멈췄다. 현묵 군과 다시 옴스크로 돌아갈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찰나 10대가 넘는 오토바이가 지나갔다.라이더 10명에 지원차량 2대까지 함께 가는 횡단 여행팀이었다. 만약 그 팀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다시 되돌아갔을 수도. 나중에 그들과 카페에서 만나 식사하며 인사했다. 그들은 중국 라이더였다. 여러 기업에서 후원을 받은 듯했다. 미캐닉이 동행하고 고장난 오토바이를 실을 수 있는 밴과 쉴 수 있는 캠핑카까지 갖춘 대형 프로젝트 팀이었다.이런 날씨에 아무 곳에서나 편히 쉴 수 있는 캠핑카까지 뒤따른다면 딱히 힘들 것도 없겠다 싶어 부러웠다. 그들은 상하이에서 출발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중이었다.우리도 북한과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들처럼 배를 타지 않고서 바로 국경을 통과해 여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런 날이 올지. 한 중국 라이더가 유명한 한국인 라이더를 안다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김선호 씨(2018 BMW GS 트로피 한국 대표선수)와 친구였다. 그가 전화 연결을 해준 덕분에 김선호 씨와 통화까지 할 수 있었다.투먼에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했지만 숙소를 잡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저렴한 러시아 숙소들은 대부분 폐쇄적인 출입문(?)을 가졌다. 카메라나 직접 방문자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준다. 두 번째 방문했던 곳은 분명 안에서 소리가 났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마 우리 꼴을 보고 수상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행색은 거지 중에 상거지에 가까우니….러시아에 도착하고서 내내 비를 맞고 다닌데다 외투는 한 번도 빨아 입지도 못했다. 종일 흙탕물을 맞고 다닌 터라 날이 저물 때쯤에는 꼴이 더 사나울 수밖에. 그래도 투먼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덕에 깨끗한 숙소를 구해 들어왔다. P군이 탁월한 선택을 했다. 지금까지 묵었던 곳 중에 최고였다. 오토바이도 안전하게 둘 수 있는 주차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아무래도 추위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나씩 고장나는 물건들, 괜찮을까이제 예카테린부르크로 간다. 이렇게 화창할 수가. 달리기 완벽한 날이었다. 저렴하고 훌륭한 숙소에서 충분히 휴식도 취했고, 오랜만에 장도 봐서 영양 보충도 했다. 소시지에 라면에 요구르트에 치즈에 빵에 과자에... 꽤 많이 샀는데도 900루블(1만5천 원). 보드카 매대 앞에서 한참 구경했다. 어느 마트에 가더라도 주류 매대가 잘 갖춰져 있다. 우리네 같으면 큰 마트에 가야만 볼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그만큼 러시아인들이 술을 가까이한다는 증거겠지.러시아의 체감 물가는 한국의 절반 정도다. 물론 모스크바 같은 큰 도시의 물가는 만만치 않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생활할 수 있다. 옥탄가 95인 고급 휘발유 값도 45루블(850원) 정도다.러시아 사람들의 벌이를 생각하면 이 물가가 적당한 것인지 나로선 짐작할 수 없다. 일반 러시아 국민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본다면 저렴한 물가인지는 모르겠다.물건들이 하나씩 고장 나고 있다.작동불능인 에어펌프는 이미 버렸고, 시계는 5월 14일 오후 6시에 멈춰버렸다. 오기 전에 배터리를 갈고 왔는데, 이럴 수가.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 가서 쿠델카의 손목시계 사진을 오마주 할 계획이었다. 멈춘 시계 그대로 찍는 것도 재밌을 듯하나 왜 벌써 고장 났는지. 바짓가랑이도 해졌다. 중고 슈트를 구입했으나 그동안 별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에야 하필 가랑이가 찢어지다니.숙소 주인 아주머니께 실과 바늘을 빌려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현묵 씨가 가방에서 꺼내주었다. 여동생이 혹시 모르니 챙겨가라 했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안쪽으로 수선을 해야 깔끔한데 내피를 뜯어내야 해서 그냥 바깥쪽으로 임시로 꿰맸다. 면실이라 오래 버티지 못할 듯하고 나일론실을 구해 다시 꿰매는 수밖에. 계속 비에 젖었다 말랐다 반복한 부츠는 뒤꿈치 접합 부분이 점점 벌어져 비가 내릴 때는 어김없이 물이 스며들었다. 아직 여행의 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여러 문제들이 계속 연쇄 반응처럼 일어날 줄이야.시베리아를 지나는 동안 몸도 물건도 만신창이가 되고 있지만 러시아 라이더들의 호의는 계속 이어졌다.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는 도중 잠시 쉬며 체인에 오일을 바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길을 가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멈춰 도와주려는 라이더가 그 시간동안 두 팀이나 있었다.◇ 우랄 산맥을 넘어 유럽에 가까워지다드디어 우랄산맥을 넘었다. 집을 떠난 지 18일째.이제 지리적으론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으로 넘어온 셈. 바이칼을 끼고 이르쿠츠크로 가는 숲길이 최고라고 했었는데 첼랴빈스크에서 우랄산맥을 넘어 우파 가는 길이 더 아름다웠다.규모에서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이쿠츠크 가는 길이 라이트급이라면 우랄산맥 넘는 길은 울트라 헤비급이라고 해야겠다.달리는데 정신이 팔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눈과 마음으로 담았으니 그걸로 만족한다.산맥을 넘다 자전거로 여행 중인 다이스케 군을 만났다. 알래스카에서 시작해 계속 여행 중이다. 그는 볕에 까맣게 그을린 선한 얼굴을 가졌다. 그의 여행일기장에 나의 이름을 남겼다.매일매일 꼼꼼하게 자신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쓰는 사람을 보면 반갑다. 언젠가 다시 만나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무엇을 찾아 여행 중인 걸까.우파에 가까워서 한참 길 위에서 멈춰있었다. 1시간 넘게 정체되어 있었는데 느긋하게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운전자들이 많았다. 그러고보니 경적을 울리는 운전자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현묵 군이나 나나 러시아 운전자들의 오토바이에 대한 배려가 우리보다 훨씬 낫다는데 달리면서도 계속 공감했다.울란우데에 있는 ‘젊은 스쿠터’ 팀은 오토바이가 계속 말썽인 모양이다. 오토바이를 기차에 실어 모스크바로 보내고 팀원들 모두 버스로 몽골로 갔다 다시 모스크바로 향한다고.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기면 몸도 마음도 지칠 수밖에 없다. 우파에 들어와서도 결국 젖을 만큼 비를 맞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숙소에 도착하고서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맑은 날이 별로 없다. 꼭 장마철 날씨 같다.어제 가랑이 터진 바지를 겨우 꿰맸는데 오늘은 왼쪽 겨드랑이가 터졌다. 근육을 키우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옷이 해지는지 모르겠다. 나중에는 기운 자국으로 덕지덕지할 듯. 입을만한 라이딩 기어는 워낙 비싸니 돌아갈 때까지 어떻게든 바느질로 버티는 수밖에. 문제없이 달린다면 3일 후면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이제 시베리아도 거의 건너온 셈이다.    /조경국

2020-03-10

끝도 없이 이어진 길… “기회를 찾아 떠나보자”

◇ 칸스크 가는 길, 드넓은 숲과 초원이르쿠츠크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크라노스야르스크까지 가려했으나 결국 칸스크에서 멈췄다.로시를 지하 주차장에서 꺼내지 못해 출발이 늦어져 크라노스야르스크까지 가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 창고 열쇠를 가진 직원이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일정이 꼬여버렸다.모든 짐을 챙겨 숙소 마당에 내려놓고 아침 일찍부터 직원이 오길 기다렸지만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하필 내가 출발하려는 날 늦게 출근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칸스크까진 약 800킬로미터, 크라노스야르스크까진 10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 아침 일찍 출발해도 크라노스야르스크에는 밤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도시 사이 거리가 워낙 멀고 가능하면 큰 도시에 가야만 더 저렴하고 깨끗한 숙소를 찾고 밥을 먹을 수 있으니 무리하더라도 달리는 수밖에.종일 달리기만 했다. 이르쿠츠크를 벗어나자 숲과 초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솔직히 러시아의 넓은 땅덩이가 부러웠다. 강진 땅끝마을에서 고성 통일 전망대까지 달려봐야 700킬로미터가 되질 않는다. 2014년 작은 스쿠터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전국일주를 다녀왔을 때 우리나라를 한 바퀴 돈 거리가 약 2200킬로미터였다. 제주도 한 바퀴까지 포함해도 2500킬로미터면 끝난다.이놈의 러시아 땅은 가도 가도 끝날 줄을 모른다. 러시아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진출한 가장 큰 이유는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던 모피가 부르조아 계급의 성장으로 수요가 폭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모피를 얻기 위해 동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16세기 이반 뇌제는 그들을 더욱 부추겼고 영토 확장의 기회로 삼았다. 탐험가와 사냥꾼들이 시베리아를 건너 길을 내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새로운 땅을 기회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도로가 나고, 마을이 생겼다. 이반 뇌제가 영토 확장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러시아는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모피의 수요가 늘어난 것만으로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설명할 순 없다. 이반 뇌제의 영토에 대한 욕구는 어쩌면 광기에 가까웠을 수도.◇ 러시아 라이더 마르쫌을 만나다칸스크까지 가는 길에도 여러 번 소나기를 만났다. 비가 나를 따라다니는 건지 내가 비를 따라다니는 건지 알 수 없는 하루였다. 오후 늦게서야 날이 완전히 개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 눈을 제외한 모든 기상 상황을 다 경험한 듯 우박까지 맞아보았으니.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도로는 일부 구간만 제외하곤 대부분 왕복 2차선 도로고 대형트럭들이 많아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 공사 구간도 많은데다 비까지 내리면 속도를 낼 수 없어서 오히려 더 위험하다. 중간에 비도 피하고 끼니도 해결할 겸 두 번 쉬었는데 저녁을 먹을 때 사이드카가 달린 빨간 러시아제 오토바이 우랄을 타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마가단까지 여행 중인 마르쫌을 만났다.오토바이가 비를 맞으며 세워져 있는 걸 보고 가던 길을 돌아왔다고. 만나자마자 “괜찮냐?”고 물었다. 사실 그때 나는 라면 물 끓이는 중이었는데 등을 보이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단다. 마르쫌은 모스크바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한다고. 그의 우랄을 대충 훑어보았는데도 얼마나 자신의 오토바이를 사랑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사소한 액세서리까지도 모두 ‘깔맞춤’에 정성 들여 정비한 티가 났다. 마르쫌에게 숙소 정보도 얻고, 노보시비르스크의 실력 있는 미캐닉 연락처도 얻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여행을 즐기는 라이더들 커뮤니티가 있어 어디에 있든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마르쫌 뿐만 아니라 러시아 라이더들은 외지에서 넘어온 오토바이 여행자들을 친구처럼 돕는 게 전통인 듯하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비가 잦아들 때까지 그는 차를, 나는 커피를 마시며 짧은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다. 그리고 서로 연락처도 교환했다.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하며 숙소에 들어왔더니 쉰 냄새가 진동했다. 가장 큰 문제는 부츠, 완전 방수가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빗물에 발가락이 퉁퉁 불었다. 옷처럼 쉽게 마르지도 않고 쉴 때마다 햇빛에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신발 밑창도 꺼내놓고 말려야했다. 비를 피해 중간주간 쉬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한 탓에 밤늦게야 숙소(오케이호스텔)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의 5000킬로미터를 달린 셈이니 이제 겨우 러시아를 절반 지났을 뿐. 아직 10일쯤 더 달려야 러시아와 라트비아 국경에 닿을 듯하다.◇ 솜씨 좋은 미캐닉 이고르와 우랄 오토바이칸스크에선 잠만 잤을 뿐 어디 한 곳 둘러보지 않고 바로 옴스크로 향했다. 거의 1000킬로미터를 달려왔는데 숙소를 구하지 못해 옴스크 시내에서 또 빙빙 돌았다. 겨우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방을 잡아 들어왔다.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런 곳을 찾기 어렵다. 특히 주말에는 저렴하고 괜찮은 곳은 일찍 예약하지 않으면 허탕 칠 수도 있다. 옴스크 오는 길에 노보시비르스크에 들러 정비했다. 지난 번 비포장도로를 오래 달린 이후로 이곳저곳 삐거덕거리는 곳이 생겼다. 어제 만난 마르쫌이 알려준 안드레아라는 미캐닉을 찾아갔으나 자리를 비워 그의 친구를 소개 받았다. 혼다 자동차의 미캐닉으로 일하고 있는 이고르는 우랄 라이더기도 하다.로시를 받자마자 능숙하게 문제들을 해결해주었다. 부품이 없는 것은 자신의 우랄에서 빼내 로시에 이식(?)했다. 정비공장에 세워져 있는 우랄 최신형 모델에 앉아보기도 했다. 엔진 실린더가 좌우로 움직이는 수평대향 대형엔진을 사용하는 오토바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BMW와 모토구찌, 그리고 우랄 일부 고배기량 모델에 수평대향 엔진이 장착되어 있다. 실제 주행해본 적은 없지만 장거리 라이딩을 할 때 피로가 적고 무게중심이 낮아 조작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고 들었다. 우랄 오토바이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적국이 되기 전 BMW의 기술을 빌려 군납용 오토바이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우랄의 시작이다.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한 소련이 독일에 있던 BMW 오토바이 생산라인을 뜯어 와서 아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오토바이나 내가 앉아본 최신형이나 우랄의 기본 디자인은 오랜 세월 거의 변함이 없는 듯하다.이고르가 유튜브로 물이 세차게 흐르는 강을 우랄을 타고 건너는 자신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물에 완전히 잠겼는데도 시동이 꺼지지 않고 다들 강을 건넜다. 사이드카의 바퀴에도 동력을 전달할 수 있으니 웬만한 험지나 강도 헤쳐 나갈 수 있다. 매력 있는 오토바이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쉽게도 수입사가 없다. 국내 오토바이 시장은 혼다, 야마하 등 일제 오토바이의 점유율이 아주 높다. 오토바이에 대한 도로 규제가 많고 시장이 작으니 다양한 우랄 같은 오토바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엄격한 환경 검사도 수입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 이고르의 꼼꼼한 정비 덕분에 든든하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타이어 교체할 때 체인만 함께 점검하면 된다.옴스크에서 현묵 씨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오토바이를 기차에 실어 노보시비르스크로 보냈고 거기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달리기 부담스러우면 기차로 미리 실어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인 듯하다. 현묵 씨와는 모스크바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내내 혼자 달리다 드디어 함께 갈 동료를 만났다.    /조경국

2020-03-03

호수와 숲을 지나… 낯설은 아름다움은 예술이 되다

◇시리도록 푸른 호수를 지나다드디어 바이칼호를 보았다. 집을 떠난 지 11일만이었다. 유라시아대륙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아직도 원시 상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바이칼호는 눈부시게 푸르고 아름다웠다. 6월이 가까워졌는데도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얼음이 호수 가장자리에 밀려와 있었다.바이칼 호수 남쪽엔 설산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태고부터 저 산의 눈이 봄볕에 녹아 숲을 적시고 낮은 곳으로 흘러 지금의 바이칼을 만들었을 것이다. 멀리서 보면 호수 그 자체가 푸른 보석이지만 가까이 가면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지천을 통해 흘러 들어간다. 바이칼호의 수원이 되는 강은 300개가 넘고 이렇게 바이칼호에 담긴 물은 안가라 강과 예니세이 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나간다. 호숫가에 마을에 쌓인 쓰레기를 보며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종은 인간이 유일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쓰레기와 오수가 바이칼호를 더럽힐 것이다.바이칼호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의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바이칼호가 관광지화 되면서 방문객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09년에는 30만 명 수준이었던 것이 2015년에 130만 명을 넘어섰다는 기사를 읽은 것이 오래 전이었으니 그보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바이칼호를 찾을 것이다.바이칼호에서만 사는 물고기인 ‘오물’이 크게 줄고 대신 녹조가 계속 늘고 있는 것도 결국 사람들이 분별없이 버린 쓰레기와 폐수 때문일 것이다. 지구온난화가 계속되면 주변 설산의 눈이 녹고 수원도 메말라 바이칼호로 흘러가는 수량도 그만큼 줄어들어 오염도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 날씨가 더워질수록 수온이 올라갈 테고 생태계도 바뀌고 자정 능력도 떨어지겠지. 낮은 수온에서만 서식이 가능한 ‘오물’이 급격히 줄어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어쨌거나 멀리서 본 바이칼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횡단 여행자들이 대부분 묵어가는 알혼섬에 가는 건 깔끔하게 포기했다. 바이칼호 주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이르쿠츠크로 바로 달렸다.◇울창한 타이가 숲을 지나 이르쿠츠크에바이칼 호수를 지나 이르쿠츠크로 가는 타이가 숲은 지금까지 달려본 곳 중에 손꼽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헬멧 실드를 올리고 달리니 나무 향기가 진하다. 어제 고생한 걸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바이칼호로 오며 길을 잘못 들어 비포장도로를 100킬로미터쯤 달렸지만, 숲길을 그만큼 달렸으니. 이르쿠츠크 시내에 들어오니 이전 도시들과는 다르게 풍요로운 기운이 가득하다. 숲과 강과 호수를 가까이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런 기운이 모이는 것이리라.이르쿠츠크의 숙소는 아주 낡은 저택을 개조한 곳(세븐 트레블 호스텔)이었다. 도착했을 때 철문이 굳게 닫혀 있고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영업하지 않는 줄 알고 한참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마당을 청소하러 나온 직원에게 손을 흔들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오토바이도 지하 창고에 주차하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6인실 1박에 500루블, 우리 돈으로 1만 원도 하지 않았지만 침구도 깨끗하고, 요리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엌까지 있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니 잠이 쏟아졌다. 집을 떠나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어떻게든 빨리 시베리아를 벗어나 모스크바에 도착해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고서야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점심때까지 침대에서 꼼짝 않고 잠만 잤다.5,000킬로미터 가까이 달린 터라 오토바이 정비가 필요했다. 여분의 엔진오일과 오일 필터, 체인 루브를 구입해야 했다. 이르쿠츠크에서 가장 유명한 오토바이 숍을 찾아 타박타박 한 시간쯤 걸었다. 가는 길에 우연히 작은 헌책방 ‘북박스’를 만났다. 이번 여행에선 굳이 책방을 찾아다니지 않기로 했다. 여유가 되면 찾아보고 아니면 느긋하게 달리며 즐기기로 했었다. 그래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냥 스쳐 지났을 수도 있었던 북박스가 멀리서도 보였다. 책방지기 나딤에게 인사하고 책방을 구경했다. 5평 남짓 될까. 19세기에 지어진 작고 오래된 목조 건물에 책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문을 연 지는 5개월이지만 자신의 파트너는 10년 동안 책방을 운영했단다.책방에서 유일한 한국책(대원사 빛깔 있는 책들 ‘탈’)도 바로 꺼내서 보여주고 한국어판 러시아어 교재도 찾아주었다. 얼마 전 바이칼의 식물에 관한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이르쿠츠크에 온 한국인들이 다녀가기도 했단다. 사진책에 관심 있다니 바이칼에 관한 사진집도 바로 꺼내주었다. 책방을 돌아보다 바이칼 주변에 사는 새들을 세밀화로 그린 아담한 책이 탐났지만 내려놓았다. 오토바이로 여행 중이라 책을 살 수 없어 미안하다 말했다. 서로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고 문을 열고 나오는데 나딤이 붙잡으며 보여줄 것이 있노라 했다. 1912년에 출간된 삽화가 들어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초판본이었다. ‘전쟁과 평화’가 책으로 묶여 나온 건 1869년이고 이렇게 삽화가 들어간 건 이 책이 처음이라고 했다. 장정도 훌륭하고 삽화도 아름다웠다. 3권이 한 세트였고 가격은 4만 루블. 현재 우리 돈으로 75만원.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며 100년 전 잉크와 종이 냄새를 맡았다. 여유 있는 여행자였다면 까짓 지갑을 털었을 테다.◇ ‘전쟁과 평화’ 초판본을 만나다엔진오일 3리터를 들고 오는 길에 장을 봤다. 라면 5개, 스프 5개, 빵, 쨈, 그리고 얇은 파스타면을 샀다. 라면이나 스프를 끓일 때 파스타면을 추가로 넣어서 양을 불린다. 오토바이로 이동하면서 매 끼니마다 식당에 가서 먹는 건 귀찮기도 하고 사치다. 출출할 때마다 간단하게 허기를 해결할 수 있는 요리를 직접 하는 수밖에. 꽤 많이 샀다고 생각했는데 400루블, 약 8천 원어치다. 숙소에 장본 것을 가져다 놓고 시내를 쏘다녔다. 지도를 보고 주로 동상을 기점으로 삼아 돌아다니니 편했다. 이르쿠츠크의 상징 담비를 물고 있는 바브르(호랑이)를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의관 간호사 기념비, 알렉산더 3세, 극작가 밤필로프, 레닌, 다시 바브르로 돌아오는 코스로 산책했다. 그리고 130지구에서 거리공연을 보는 걸로 마무리. 130지구는 관광객도 많고 거리 끝에 대형 백화점이 있었다. 중국 관광객이 현지인만큼 많았다. 그래선지 간판에도 중국어 표기가 많았다. 중국과 그리 멀지 않으니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올 수 있겠지.이르쿠츠크에는 아름다운 건물이 많은데 특히 옛 목조주택은 예술품을 보는 듯하다. 나무를 아낌없이 쓸 수 있는 자연 환경의 결과물이리라. 하지만 대부분 낡고 관리가 되지 않는 듯하여 안타깝다. 보존만 잘 한다면 그 자체가 이르쿠츠크의 훌륭한 문화자산일 텐데 버려져 폐가가 되어가는 건물들이 내가 돌아본 지역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바이칼과 타이가 숲에서 얻은 재료로 만든 집과 일상용품들이 후대까지 잘 전해졌으면 좋겠다. 숙소로 복귀하기 전 다시 시장에 들렀다. 같은 방을 쓰는 중국 무역상 류 씨가 왜 이르쿠츠크에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 몽골인, 중국인….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근대 이전에는 모피를 거래하기 위해, 지금은 생필품을 비롯한 여러 물건을 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바이칼호 주변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르쿠츠크를 찾는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시내를 관통하는 앙가라 강을 따라 걸었다. 앙가라 강 둔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르쿠츠크에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생각했다. 편하게 와서 이곳에서 오토바이를 빌린 다음 바이칼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갈 길 바쁜 여행자니 다음 여정을 미룰 수가 없었다.   /조경국

2020-02-25

비에 젖은 시련의 날도 추억… 오랜 세월 로시와 함께하고 싶다

◇짐 줄이기,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이 기본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을 안전하고 편하게 하려면 자신만의 짐싸기 법칙이 필요하다. 짐을 실을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경박단소하고 효율 높은 용품들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 물건들은 대부분 비싸기 마련이라 어느 선에서 타협해야만 한다. 여유가 있다면야 그런 제품들을 구하겠지만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면 이전 경험에 따라야 한다. 필요 없는 물건은 줄이고 방한 용품은 빠짐없이 챙겨야 한다.‘젊은 스쿠터 팀’이 치타를 향해 떠날 때, 불편하게 짐을 싣고 다니는 친구도 있어 어떻게든 단단히 싸매라고 했지만 많이 불안해보였다.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짐의 부피를 줄이고 펄럭거리지 않도록 여며야 하는데 뭔가 어설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진심을 담은 충고도 반복하면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이다. 저리 달리면 불편하고 빨리 피로해질 텐데 걱정이 되었지만 “조심히 달리라”는 말로 충고를 대신했다.작은 불편이 피로가 되어 쌓이면 오토바이도 라이더도 힘들어진다. 미리 불편함을 없애야 한다. 출발 전도, 어딘가 도착해서도 미리 달릴 준비를 하고 짐 내리는 작업은 간결하게 끝내는 게 좋다. 생각보다 그 시간이 꽤 오래 걸리기도 하고 비가 오거나 날이 저물었을 땐 이런 사소한 것 때문에 지치기도 하니까.결국 경험이 쌓여야 한다. 몸으로 익히는 게 가장 확실하다.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 많이 배웠다.오후 늦게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자마자 체인에 기름칠을 했다. 적어도 1,000킬로미터를 달리면 체인 점검을 해야 한다. 러시아에 와선 두 번째 체인 기름칠. 빗길을 달렸더니 로시가 엉망진창이다. 약국에서 아이들 감기약 넣어주는 약병에 체인 오일을 넣어왔다. 저렴하고 점도가 높아 장거리 여행용으로 적당한 듯하다.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교체해야 할 것이 체인과 엔진 오일이다. 엔진 오일은 5,000킬로미터마다 한 번씩, 오일 필터는 10,000킬로미터마다, 타이어나 기타 소모 부품은 자주 들여다 보고 적절한 시기에 교체해야 한다.◇러시아 한증막 ‘빠냐’에서 추위를 떨치다주머니에 동전이 많이 남아 숙소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30루블,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 동전이 주머니에 짤랑거리면 물을 사거나 커피를 주문한다. 끓여 마셔도 되지만 카페에 편안하게 앉아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습도 보고 일기도 쓰고. 어째 이곳은 손님보다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은 듯하다.비가 그치고 이리저리 동네를 어슬렁거렸는데 큰 도로를 제외하곤 적막하다. 아주 작은 동네기도 하고 외지인이 찾지 않는 초원 위 외딴 섬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사람들을 만나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숙소에 씻을 만한 곳이 없어 왜 그런가 궁금했었다. 화장실도 하나뿐이고 샤워를 할 수 없어서 어제는 대충 씻고 잤다. 샤워를 할 수 없느냐 직원에게 물었더니 150루블이라고 해서 의아했다. 하루 방값이 500루블인데 샤워하는데 150루블이라니.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 아무래도 씻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값을 치르고 샤워실에 들어갔다. 샤워실에 들어서고야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씻는 곳이 아니라 ‘빠냐’라고 하는 러시아 한증막이었다. 충분히 값을 치를 만했다. 엊그제 묵은 숙소도 샤워실이 없었는데 따로 빠냐가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한증막에 벗고 누워 있으니 비를 맞으며 몸에 스민 한기가 봄볕 고드름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30분 제한이 있었지만 나 혼자 뿐이라 한 시간쯤 있었다. 땀을 엄청 흘렸더니 볼이 쑥 들어간 기분. 다음 숙소에 묵을 때 빠냐가 있으면 무조건 이용하기로.아침 일찍 울란우데로 출발하려던 계획이 비 때문에 틀어져버렸다. 일어나자 아침에는 그친다는 비가 오후까지 내린다고 예보가 바뀌어 있었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비가 잦아지길 기다리다 출발. 시련의 날이 될 줄은 출발할 때까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네르친스크에서 울란우데까지 약 800킬로미터. 비와 눈과 추위와 더는 경험하지 못할 긴긴 ‘빨래판’ 비포장 도로까지. 온갖 난관을 모두 뚫고 새벽 1시30분 숙소에 도착했다.5월 중순이었지만 치타 근처는 고도가 높아선지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네르친스크의 비가 치타에선 눈이 되어 내린 듯했다. 도로는 녹았지만 주변 풍경은 온통 하얗게 눈이 덮여있었다. 손끝 발끝에 감각이 없었다. 바람이 스미는 곳엔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무리 껴입어도 냉기를 막을 수 없었다. 헬멧 쉴드에 계속 습기가 차서 앞을 보기 힘들었다.습기를 없애기 위해 쉴드를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쉴드를 올릴 때마다 시베리아의 시린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눈물과 콧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 이런 눈 덮인 고원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얼어 죽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눈 쌓인 고원에서 베테랑 여행자를 만나다시베리아의 꽃샘추위(?)에 치를 떨며 달리고 있는데 크리스 씨를 만났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넘어와 유라시아 횡단 중이었다.장갑을 세 겹이나 꼈는데도 손이 시려 더는 가지 못하고 쉬는 중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 장갑을 한 겹 한 겹 벗었다. 그의 낡은 스즈키 650DR은 깨진 곳을 임시 보수하느라 테이프가 덕지덕지했다.한 눈에 봐도 베테랑 라이더란 걸 알 수 있었다. 초콜릿과 에너지바를 서로 나눠 먹으며 날씨를 ‘욕했다’.내가 하루에 500킬로미터 이상 이동한다니 놀랍다고 했다. 자신의 650DR은 단기통이라 진동이 심해 오래 탈 수가 없다고. 잠시 로시를 부러워하는 듯 보였다. 사실 실린더 수가 많을수록 엔진 진동이 덜하다. 대신 실린더 수가 적으면 구조가 간단해 정비가 쉬운 장점이 있다. 로시는 2기통. 500cc이상은 2기통이 많다. 650DR은 650cc인데도 단기통인 특별한 모델인데 한때 대륙횡단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었다. 지금은 단종된 상태.도로 상태를 장담할 수 없는 장거리 여행을 준비할 때는 어떤 오토바이를 선택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가장 현명한 선택은 온-오프로드를 가리지 않는 멀티 퍼포스(‘듀얼 퍼포스’라고도 한다)형 500cc 내외 배기량의 오토바이다.배기량이 작으면 힘이 없어 힘들고 배기량이 너무 크면 오토바이 자체 무게와 크기가 부담스러워 피곤할 수 있다.자신의 체형에 맞고 연비가 좋고 짐 실을 공간이 최대한 많이 나올 수 있는 오토바이가 최고다. 650DR은 현재 생산되진 않지만 그런 조건에 딱 맞는 오토바이 중 하나였다.생산된 지 오래된 오토바이를 어떻게든 고쳐서 타고 다니는 외국 여행자들 사연을 종종 읽곤 했는데 크리스 씨도 그런 여행자였다. 그의 650DR 적산 거리는 100,000킬로미터가 넘은 상태였다.나의 로시는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끝내도 70,000킬로미터가 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오랜 세월 자신의 오토바이를 아끼고 수리해가며 여행하는 그들처럼 로시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치타에서 울란우데 가는 길 중 대부분의 라이더가 선택하는 남쪽 길이 공사 중인 곳이 많고 힘든 코스라는 정보를 얻고 북쪽 길로 달렸는데 힘든 코스긴 매한가지였다. 비포장도로에 들어섰을 때 빨리 판단했어야 했다.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비포장도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엄청난 진동 때문에 핸들을 놓칠까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욕심 부리지 않고 치타에서 멈췄어야 했다.후회가 밀려왔지만 다시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상태. 역시나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조경국

2020-02-18

역사 속 ‘자유시 참변’… 세월마저 멈춘 듯 상처투성이

◇ 자유시 참변의 현장을 찾다비를 피해 하룻밤 보낼 수 있었지만 타이어 공기압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공기가 반쯤 빠진 타이어로 장거리를 속도를 내어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출발하자마자 주인아저씨가 알려준 에어 펌프가 있을만한 주유소로 갔으나 허탕, 다른 주유소를 찾아나서야 했다. 이른 아침이라 자동차 정비소는 문을 열기 전이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마지막 주유소에 가서도 에어 펌프는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망하긴 일렀다. 휘발유를 넣는 동안 내게 어디서 왔느냐 질문을 던진 노신사가 직원과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을 따라오라 했다. 노신사는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꼼뿌레샤!”를 꺼내 깊은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의 차 트렁크엔 웬만한 공구들이 다 실려 있었다. 하긴 인적 없는 시베리아 들판에서 고장이라도 난다면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비사나 견인차를 부르는 것도 쉽지는 않을 테고 부르더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간단한 정비는 다들 스스로 하겠지. 공기를 가득 넣은 만큼 자신감도 불어났다. 어제만 해도 달리면서 조마조마했었는데 불안감이 완벽하게 가셨다.시베리아를 지나며 구체적인 경유지를 딱 한 곳 정했었다. 옛날 ‘자유시’라 불렸던 스보보드니. 그곳 역에 있는 급수탑이 경유지였다. 시베리아 횡단 메인도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긴 했지만 자유시만큼은 꼭 가보고 싶었다.1921년 6월 28일 독립군이 소비에트 적군에게 공격받아 학살당하고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혀 독립군 조직 자체가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던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바로 그곳이다.자유시 참변으로 홍범도 장군은 소비에트 적군에게 붙잡혀 카자흐스탄까지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의 승리로 기세를 올렸으나 독립군은 항상 변변한 무기조차 구하기 힘든 나라 잃은 군인이었다.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자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고자 찾았던 자유시에서 오히려 큰 화를 당하고 이후 다시 투쟁을 위한 대오를 갖추기까지 많은 세월을 허비해야 했다. 당시 소비에트 적군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길 포기하고 그들의 회유에 만주 일대에서 모여든 독립군을 오히려 무장 해제시키려 했다. 아직 왕정 복고를 노리는 백군과의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의 독립군을 지원하는 건 무리였다. 오히려 일본의 공격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그뿐 아니라 독립군 내부의 주도권을 놓고 일어난 내분도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었다. 스보보드니 역 급수탑 주변은 소비에트 적군의 무장해제 명령을 거부한 독립군이 당시 마지막 항전을 벌인 곳이다.스보보드니 가는 길은 황량했다. 100년 전 독립군들은 나라를 떠나 이역만리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이곳까지 목숨을 걸고 왔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천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이곳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왔지만 동료들과 소비에트 적군의 배신으로 눈물을 삼키며 흩어져야 했다. 스보보드니는 시라고 하기에도 작은 마을이었다.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도 포장 상태가 엉망이었고 건물들도 세월이 오래 전 멈춰버린 듯 낡아 있었다. 역사의 현장이었던 급수탑도 마찬가지. 육교 위에 서서 급수탑과 역 주위를 살피니 ‘산천은 의구하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옛말이 절로 떠올랐다.이곳에서 독립을 위해 총칼을 들었던 용감한 청년들은 몇이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스보보드니를 벗어나며 그 시절 독립군이 불렀다는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을 가만히 읊조렸다.광야를 헤치며 달리는 사나이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몽고 땅흐르고 또 흘러 부평초 같은 몸고향을 떠난 지 그 몇 해 이런가석양 하늘 등에 지고 달려가는 독립군아남아 일생 가는 길은 미련이 없어라.◇ 먼저 떠난 젊은 여행자들을 만나다제야강(흑하)을 다시 거슬러 올라 모고차로 향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와 비바람 때문에 결국 모고차까지 가길 포기했다. 800킬로미터쯤 달려 숲이 첩첩 겹친 작은 마을 예로페이라는 곳에 멈추고 숙소를 찾아 들어왔다.종일 비가 오다 숙소에 들어올 때쯤 그쳤다. 이놈의 비. 예전 빗길에 미끄러진 아픈 기억이 있어서 빗길 주행은 항상 피곤하고 몸이 빨리 굳는다. 힘을 빼고 타야 오래 달릴 수 있는데 커브길이나 비포장길을 만나면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달리다 쉴 때는 커피 한 잔 끓여 마시는 게 즐거움이다. 집에서 아이들 컵라면 두 개를 몰래 가져와 아껴 두었는데 밥 사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하나 꺼냈다. 아우 성진이 선물로 챙겨준 칼로리바는 출출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었다.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자에겐 정말 탁월한 선물인 듯. 치타에 가까워질수록 초원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자연 환경이 바뀌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좀처럼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니 드넓은 지형을 만나면 괜스레 가슴이 뛴다.예로페이에서 하룻밤 묵고 네르친스크를 향해 달리다 일주일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먼저 도착해 출발한 팀을 만났다. 20대 청년 다섯 명이서 스쿠터를 타고 포르투갈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숙소를 잡고 밥을 얻어먹고 대신 맥주를 샀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이렇게 멀리 여행할 수 있다는 건 두고두고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예로페이에 오기까지 꽤나 고생한 모양이었다. 배기량이 큰 오토바이로도 쉽지 않은데 작은 스쿠터로 달리며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경험을 쌓았다. 중고로 구해온 친구들의 스쿠터는 언뜻 보아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젊은 ‘스쿠터 팀’은 얼마 남지 않은 대도시인 치타에서 정비하고 몽골로 넘어 갔다가 유럽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다.예보대로 다음 날도 비가 내렸다. 냉기가 가득한 봄비. 해가 지면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다. 오는 길에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도 봤다. 더는 비를 맞으며 달릴 마음이 없었다. 이미 많은 비를 맞으며 왔고 떠나온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피로했다. 4일 만에 3천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달렸으니. 일주일 전에 출발한 친구들을 따라잡았다는 건 그만큼 무리했다는 증거였다. 비가 그칠 때까지 며칠이든 쉬기로 마음을 굳혔다. ‘스쿠터 팀’은 다음 여정을 위해 치타로 출발했다. 마음 편히 쉰다고 생각하니 여유가 생겼다. 모든 짐을 풀어놓고 다시 정리했다. 가져왔을 거라 생각했던 예비 안경을 놓고 온 것과 또 몇 가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생각났다. 읽고 참고할 모든 자료들을 고장난 휴대폰에 넣어왔으니 그냥 그때그때 얻은 정보들로 일정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오히려 결정을 머뭇거리게 만들 수도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이틀 전에 묵었던 곳처럼 네르친스크의 숙소도 건물만 컸지 휑했다. 원래 주유소까지 운영했던 곳이었는데 주유기는 버려진 채로 있다. 카페 영업으로 겨우 버티는 느낌이다. 대부분 횡단도로의 숙박업소는 카페를 겸하고 있다. 주로 트럭 운전자들이 이용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진 9천킬로미터가 넘으니 아직 3분의 1도 가지 않은 셈이다.별 문제가 없다면 보름 정도면 러시아를 통과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비가 오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 단정할 수 없었다. 숙소 벽에 네르친스크의 옛 모습을 담은 복사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쇠사슬에 묶인 수형자들 사진에 눈길이 오래 멈췄다. 동토의 땅에 철로와 도로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확장과 개발은 언제나 폭력과 강제를 동반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조경국

2020-02-11

고독한 홀로 여행… 뜻밖의 김치와 상상 밖의 여로

◇ 아무르 강을 건너 시베리아 고원으로하바로프스크를 지나 아무르 강을 건너 벨로고르스크까지 달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진 북으로 올라가지만 하바로프스크를 기점으로 달리는 방향이 서쪽으로 바뀐다. 아무르 강부터 시베리아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시베리아는 서쪽 우랄산맥에서 태평양 연안까지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러시아말로는 ‘시비르’)이다.시베리아라는 말에 ‘추위’가 함께 연상되는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며 달렸다. 낮인데도 해가 구름에 가리면 냉기가 손끝과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아무르강에서 150킬로미터쯤 달리면 작은 도시 비로비잔이 나오고 그 이후론 언제 끝날지 가늠하기 힘든 고원지대로 들어선다.비로비잔에서 모고차까진 오버랜더(대륙횡단여행자)들에게 꽤나 힘든 코스로 알려져 있다. 5월에도 영하로 떨어질 때가 있고 산속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예측 불가. 아예 비옷을 껴입고 달려야 했다. 도로엔 지뢰밭처럼 포트홀이 깔려 있어 속도를 쉽게 낼 수 없었다. 아침 출발할 때 계획했던 거리와 시간은 지킬 수가 없다는 걸 이미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할 때부터 깨달았다.어쩐지 문제없이 잘 나간다 했더니만... 뒷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긴 못이 구부러진 채 뒷 타이어에 박혀 있었다. 롱노즈 플라이어를 꺼내 조심스럽게 빼며 펑크가 아니길 바랐지만 바람이 샜다. 바람이 새는 걸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침을 구멍에 잔뜩 묻히면 된다. 침을 묻히니 기포가 조금씩 올라왔다. 이럴 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고 펑크 때운 경험도 있어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못이 비딱하게 구멍을 냈음에도 펑크 씰(라이더들은 그 모양 때문에 ‘지렁이’라 부른다)이 잘 붙었다. 때운 곳에 문제가 없는지 또 침을 잔뜩 손가락에 묻혀 타이어에 발랐더니 입 안에서 타이어 맛이 났다.문제는 펑크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함께 가져온 배터리에 연결해 사용하는 에어펌프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았다. 자동 펌프냐 수동 펌프냐를 두고 편한 쪽을 선택한 나의 실수였다. 떠나기 전 점검했을 땐 분명 제대로 작동했었다. 가장 험한 길을 달리고 있을 때 하필 고장날 줄이야. 빠진 만큼 공기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펌프가 작동하지 않으니... 혹시나 배터리나 배선에 문제가 없는지 배터리 쪽 카울을 뜯어야 했다. 다른 문제는 없었다. 타이어 공기압이 부족해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돌발 상황… 펑크가 나다치타로 가는 A-297 도로에서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하바로프스크로 가는 라이더 알렉스를 만났다. 거의 오가는 차량을 볼 수 없는 고원 외딴 도로에서 오토바이 여행자를 만나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는 천천히 달리고 있는 나를 보며 경적을 울리며 오토바이를 세웠다. 오토바이 여행자들에 대한 러시아 라이더들의 끈끈한 우정과 친절은 유명하다.시베리아 횡단 여행 중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러시아 라이더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경험담을 자주 들었다. 들은대로 그도 어떻게든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인터넷도 전화도 터지지 않는 그곳에서 내게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려던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해가 지기 전 최대한 빨리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행운을 빈다고 말하는 것 말곤 그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맑았던 하늘에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그는 두둥거리는 낡은 할리 데이비슨의 엔진 소리를 높여 동쪽으로 사라졌다.알렉스가 말한 벨로고르스크쯤 오니 엄청난 먹구름이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만약 해가 지고 비까지 내리는 상황에 벨로고르스크까지 오질 못했으면 간이 버스정류장 같은 곳에서 노숙해야 했을 수도. 하바로프스크에서 치타까지 2천 킬로미터가 넘는 구간 사이엔 큰 도시가 없다. 벨로고르스크도 인구 6만 명쯤 되는 작은 읍내 같은 곳이다. 750킬로미터를 달렸고 소나기는 이미 한 차례 맞아 몸과 마음이 눅진해진 상태. 더는 비와 다투고 싶지 않아 가장 가까운 숙소를 찾았다.카페를 겸한 게스트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다스런 주인아저씨 알렉스는 내게 한국에서 온 라이더들이 이곳에서 묵고 갔다며 자신의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젊은이들이 흥겹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이 젊은 라이더들과는 나중에 만나게 된다.) 함께 팀을 이뤄 여행 중인 듯했다.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짐을 풀고 잠시 누우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홀로 여행을 떠나는 라이더도 있지만 유라시아 횡단의 경우 워낙 먼 거리를 달려야 하니 처음부터 동료와 함께 준비하거나 출발할 때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 함께 달리는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 홀로 떠나는 것이 좋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예측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맞는 동료와 함께라면 훨씬 여행의 피로가 줄어들 테다.하지만 다시 떠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혼자 떠나는 편을 선택할듯 싶다. 여행은 어쩌면 온갖 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이니 마다할 수가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 ‘나는 없고 관계만 있는 일상’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채 산다. 누군가 곁에 없으면 고독하고 불안해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가 될 테니 미리 고독을 맛보는 일 따윈 굳이 할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방주사처럼 완전한 고독을 미리 체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비를 피해 벨로고르스크에서 쉬다주인아저씨가 불러 카페로 나갔더니 커피와 빵과 김치를 내놓았다. 빵과 김치라니! 시베리아 작은 마을 카페에서 김치를 맛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실 이 김치는 앞서 묵었던 친구들 것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숙소에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연속으로 묵어가는 행운을 잡은 주인아저씨는 계속 한국 여행자들이 벨로고르스크를 지나가는지 궁금해 했다. 내가 빵을 먹는 동안 내 앞에 앉아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 내게 물었다. 하지만 번역기는 엉뚱한 말을 내뱉었고, 나는 “야 니 즈나유”(잘 모르겠어요)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했다.그는 끈질기게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에야 그가 묻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여행자들도 이곳을 지날 거고 그들에게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는 이곳을 추천하겠다고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야 내 앞에서 자리를 떴다. 이런 궁벽한 마을에서 외국인 여행자가 묵고 가는 일은 드물 테니 홍보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토바이를 주차하며 잠시 둘러본 느낌으론 이 게스트하우스는 큰 돈을 투자했지만 제대로 영업도 하지 못하고 퇴락해버린 공간 같았다.잠시 카페 소파에 앉아 졸다 인기척이 나서 눈을 뜨니 자그마한 체구의 젊은 남자가 접시를 치우고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스파시바”(고마워요)라고 말하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옅은 금발에 핏기 없는 얼굴을 가진 그의 눈빛은 공허했고, 어딘가 모르게 결핍되고 신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요리도 청소도 모두 그의 몫인 듯했다. 주인아저씨는 오로지 돈 만지는 일만 할 뿐이었다.테이블을 치우는 그의 손은 어렸을 때부터 험한 일을 해온 듯 손마디가 굵고 거칠었다. 손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나. 그날 밤 샤샤는 내 옆 침대에서 잤다. 따로 방이 없는 듯했다. 침대가 스무 개쯤 있는 넓은 방에 그와 나 뿐이었다. 샤샤는 밤새 뒤척이며 이를 갈았고 나는 비가 그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만약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었을 테다. 하지만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떠나기 전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나가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고 나는 로시의 시동을 걸어 예로페이로 향했다.    /조경국

2020-02-04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별빛 쏟아지는 자작나무 길을 달리다

◇ 여행의 필수품, 휴대폰 유심카드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으나 로시(오토바이)를 바로 받을 수 없었다. 통관에 걸리는 시간이 보통 이틀, 길면 일주일을 넘길 수도 있다고. 오토바이를 찾기까지 통관대행회사 근처 숙소에서 마냥 연락을 기다려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려 입국심사를 받고 난 다음 통관대행회사 직원을 만나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휴대폰 유심카드 구입이었다. 옛 여행자 같으면 가까운 서점에 지도를 구하러 갔겠지만 요즘엔 인터넷이 연결되는 휴대폰만 있으면 지도뿐만 아니라 숙소 예약부터 통역까지 여행자가 겪는 거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니 유심카드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여객선터미널 근처 통신회사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선불제 유심카드를 받았다. 인터넷과 전화가 되는 걸 확인하고 아내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에야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낯선 도시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함께 떠나온 일행과 연락처를 교환하고 위치추적 앱(Zenly)을 설치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비였다.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어디에서 묵는지 위치추적 앱만 켜면 알 수 있었다. 유심카드를 구입하곤 각자 예약한 숙소로 흩어졌다.예약한 숙소는 1박에 1만 원쯤(600루블)하는 보야지호스텔, 남성 전용 8인실이었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니 덩치가 산만한 남자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오토바이 슈트를 입고 헬멧을 들고 있는 여행자를 쉽게 보긴 힘들 테니. 남자들만 있는 공간에서만 나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짐을 풀고 침대에 앉으니 맞은편에 앉는 왈랴크 씨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왔다.“야 카레이스키”(나는 한국인입니다)라는 말만 두어 번 반복하곤 당신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곤 나를 제외한 6명의 남자들이 서로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논쟁의 중심에 내가 있는 듯했으나 언어의 장벽은 높고 두터워 단 한 마디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하비프 씨였다. 인천에서 일하는 타지키스탄 사람. 바로 위의 침대를 쓰는 그는 유창하게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번갈아가며 말했고, 나의 정체(?)에 대해 다른 사람에서 설명했다. 한국인이 맞고(내가 분명 ‘카레이스키’라고 말했음에도 그들은 내가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책방을 하고 있으며 유럽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할 계획이라고. 하비프 씨가 설명을 끝내자 다들 엄지를 치켜세우며 나를 격려했다. 시베리아는 5월에도 추우니 조심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자신들이 온 곳이 어딘지 말해주었다.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중앙아시아나 타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사람들이었다.◇ 첫날 밤, 러시아말을 배우다하비프 씨와 친구 무즈카쉬 씨는 비자문제로 잠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다고 했다. 한국 체류기간이 끝나면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러시아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고 했다. 고향인 타지키스탄까진 너무 멀어 가장 비용이 저렴한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비자문제를 해결한다고 했다. 벌써 5년이나 한국에서 일했고(원래 그의 직업은 교사였다.) 자녀가 다섯이나 되어 열심히 벌어야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말했지만, 가족을 두고 먼 이국에서 하루하루 버텨야하는 그가 안쓰러웠다.보야지호스텔에서 묵는 이틀 동안 하비프 씨는 식사를 할 때마다 나를 챙겼다. 근처 식료품점에서 사온 빵과 주스, 통조림, 약간의 채소가 전부였으나 내겐 성찬이었다. 식사뿐만 아니었다. 여행하는 동안 꼭 필요한 러시아어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가 알려준 러시아어는 따로 받아 적어놓고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할레브와 말라크, 코페는 러시아를 여행하는 내내 달고 살았다. 아래 ‘기초 회화’만으로 러시아를 건너가는데 별 문제가 없었으니 그의 짧은 러시아어 강의는 효과만점이었다.할레브 - 빵말라크 - 우유코페 - 커피카로아 마야사 - 쇠고기리바 - 생선다이티 - 주세요바춈 - 얼마입니까?즈드라스트위테 - 안녕하세요이드비나테 - 미안합니다무주키 - 아저씨데오시카 - 아주머니스파시바 오촘프쿠스노 - 잘 먹었습니다◇ 로시를 받고 먼저 시베리아로…이튿날, 휴대폰이 제대로 충전되지 않는 문제가 생겨 수리점을 찾아갔으나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중고 휴대폰을 구입해야만 했다. 떠나기 전부터 휴대폰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불안했는데 떠나서야 문제가 터졌다. 혹시 모르니 미리 휴대폰을 하나 더 챙겨가라는 경험 많은 친구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쨌거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이곳저곳을 쏘다닌 덕분에 길을 수월하게 익힐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고향인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동상도 보고 아르바뜨 거리도 가고,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헤매기도 했다. 종일 휴대폰을 고치기 위해 걸어 다녀 파김치가 되어 숙소에 들어가서 또 하비프 씨에게 저녁밥을 얻어먹고 러시아 여행에 대한 정보를 여러 가지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내게 베풀어준 친절은 처음부터 꼬일 듯했던 나의 여정이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드디어 3일째, 오후에 세관에서 로시를 찾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로시를 찾기 전에 영사관에 가서 면허증 번역공증서를 받아야만 했다. 러시아에선 한국에서 발급받은 국제면허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따로 영사관을 찾아 번역공증서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어로 작성한 신청서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미리 준비한 덕분에 쉽게 발급받을 수 있었다. 번역공증서를 발급받는 동안 영사관 관계자에게 2018년 7월 있었던 사고에 대해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트럭과 추돌해 라이더가 사망했고 영사관 직원이 이틀이나 걸려서야 사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워낙 땅이 넓고 교통이 불편해 사고가 나더라도 쉽게 해결하기 힘드니 시베리아를 통과할 때는 각별히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사망사고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사고들이 무시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일행 중 한 분도 첫 번째 여행에서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크게 다쳐 돌아와야 했고 절치부심하여 다시 도전한다고 했다.배에 오토바이를 실을 때 선사 직원에게 한 해 유라시아를 왕복해 다시 오토바이를 싣고 돌아오는 여행자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을 때 “떠나는 사람은 100명 정도지만 왕복해서 오는 경우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패 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만났을 때는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그렇게 마음을 잡았다.오후 5시 로시를 세관에서 받자마자 함께 배를 타고 왔던 분들께 작별인사를 하고 하바롭스크로 달렸다. 하바롭스크까지 거리는 약 750킬로미터. 새벽 2시까지 550킬로미터쯤 달리다 멈추고 길가에서 침낭을 깔고 노숙했다. 일찌감치 숙소를 잡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자작나무가 춤추고 별빛이 쏟아지는 밤길 위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길엔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이 나 홀로였다.   /조경국

2020-01-28

간절한 마음, 간절한 기도와 함께 먼 길을 가다

블라디보스토크 행 페리를 타기 이틀 전 아침, 소파에 앉아 가족사진을 찍었다. 매번 긴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이렇게 사진을 찍었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할 테니 사진 한 장쯤 남겨두는 편이 좋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평소처럼 아내와 아이들은 집을 나섰고, 홀로 남아 집안 정리를 끝내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짐을 싣고 로시(오토바이 애칭)의 시동을 걸었다. 드디어 출발…◇무사귀환 고사 지내고 동해로블라디보스토크 행 페리를 타기 이틀 전 아침, 소파에 앉아 가족사진을 찍었다. 매번 긴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이렇게 사진을 찍었다. 2013년 7개월 동안 배낭여행을 떠날 때도 2015년 오토바이를 타고 일본 책방 여행을 떠날 때도 그랬다. 불안감 같은 것은 없었지만 먼 길을 떠나기 전 기록을 남겨야한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할 테니 사진 한 장쯤 남겨두는 편이 좋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평소처럼 아내와 아이들은 집을 나섰고, 홀로 남아 집안 정리를 끝내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짐을 싣고 로시(오토바이 애칭)의 시동을 걸었다. 드디어 출발이었다. 하지만 바로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엔진은 힘있게 돌았지만 충전잭이 작동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충전하지 못하면 길을 찾을 수도, 숙소를 예약할 수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을 수도 없으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해결해야 했다. 며칠 전 필요 없는 선들을 정리하며 충전잭 커넥터를 연결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결국 공구를 빌려 쓸 수 있는 회사(수머신테크)에 가서 다시 카울을 벗기고 빠진 곳을 찾아 연결하고서야 문제를 해결했다. 오토바이 여행에선 아주 사소한 문제가 이렇게 발목을 잡고 시간을 뺏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리 사전 준비를 꼼꼼하게 해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지고 몸도 마음도 지칠 때가 있다. 이럴 땐 조바심 내지 않고 느긋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걸림돌이 정확하게 무언지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 괜히 서두르다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오히려 복잡하게 꼬일 수가 있으니까.충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수 씨 회사에 갔더니 앞마당에 ‘무사귀환 고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오랜 지기의 배려였다. 여행을 준비하며 오토바이를 정비하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떠나는 날까지 이렇게 깜짝 선물을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여행을 준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더 멀리 더 많이 보고 오는 것이 도움을 주신 분들이 내준 숙제라 생각했다. 막걸리 한 잔 부어놓고 절을 하며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도 로시도 잘 버티게 해달라고 빌었다.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이렇게 여행기를 쓸 수 있게된 것도 어쩌면 고사상 앞에서 엎드려 기원한 간절함의 결과가 아닐까. ‘신을 믿지 않지만’ 세상일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계산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 여행하며 필연 같은 우연을 만날 때면 그런 생각이 흔들릴 때도 있다. 어쨌거나 신의 존재한다는 사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나로선 증명할 수 없지만 간절함이 긍정의 인과(因果)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굳게 믿는다. (신을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간절한 기도만큼 인간의 의지를 강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어딨으랴.다시 시동을 걸고 강원도 양양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양양에 사는 아우 성진네였다. 하룻밤 묵고 강릉에서 형주 씨와 그의 친구인 정운 씨를 만나 추암해수욕장까지 함께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파주 쉼표게스트하우스를 운영 중인 형주 씨는 함께 성수공고에서 진행했던 오토바이 정비 과정을 함께 듣기도 했고 그 인연으로 게스트하우스에서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에 대한 강연도 했었다.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파주에서 강릉까지 배웅하러 온 것이다.언젠가 유라시아 횡단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형주 씨도 가지고 있었고 먼저 떠나는 나를 응원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 형주 씨와 헤어지고 추암해수욕장 근처 한적한 공원 구석에 자리 잡고 모든 짐을 내려서 다시 쌌다. 자주 쓰이는 물건은 꺼내기 편한 곳으로. 자주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사이드박스에 나눠 넣었다. 지갑에 있던 돈은 가까운 은행에 가서 모두 입금하고 남은 3천 원으로 우유와 빵을 사고 아까 봐둔 자리로 노숙하기 위해 돌아왔다. 텐트 치기도 귀찮아 해수욕장 공원 정자에 매트리스와 침낭만 깔고 잠을 청했다.◇D데이, 드디어 페리를 타다드디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날.(지난해 5월 13일) 아침 일찍 동해여객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출발 시간이 되자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나는 라이더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 오토바이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라이더는 6명, 일본, 러시아 라이더까지 포함하면 모두 9명이었다.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기간은 4월 말에서 9월 초까지. 그 전이나 그 이후에는 추위가 때문에 오토바이 여행은 힘들다. 대부분 6월에서 7월까지 시베리아 날씨가 온화해질 쯤 예약이 몰린다. 일주일에 한 번 블라디보스토크 행 페리가 출발하고 오토바이는 5~10대 정도만 실을 수 있어 최소한 두 달 전에는 예약을 해야만 배를 탈 수 있다.2019년이 아니라 2018년 5월에 떠나려고 준비를 끝냈지만 예약조차 하지 못하고 포기했었다. 2018년엔 모스크바 월드컵이 열렸고 평소보다 더 많은 여행자들이 몰렸던 탓이었다. 3년 동안 준비했던 여행 계획이 예약조차 못하고 수포로 돌아가자 낙심했고 꽤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다.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오로지 떠날 생각에 부풀어 있었는데 “9월까지 예약이 불가능합니다”란 선사 담당 직원의 답변을 들었을 때 기분이란. 1년에 시베리아를 횡단하려는 오토바이 여행자는 100명 내외, 그들 사이에 내가 낄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빈자리가 생길까 대기자 명단에 올려달라고 했지만 결국 연락이 오지 않았다.그렇게 1년을 기다리고 동해항 세관에서 짐 검사를 끝내고 페리에 오르고서야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예약조차 하지 못했던 지난해의 불운은 끝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바로 현실이 되었다.오토바이 여행자들은 객실 요금을 더 내지 않는 이상 2층 침대가 있는 객실에서 묵는다. 객실 키를 받아 문을 여니 샤워실까지 갖추고 넓은 침대가 있는, 바다가 보이는 1등실이었다. 말로만 듣던 ‘객실 업그레이드’였다. 한 푼이라도 여행 경비를 아끼려 어제만 해도 노숙했던 가난한 여행자의 초발심은 아늑한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봄눈 녹듯 사라졌다. 어떤 불편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결심이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흔들렸다. 사람 마음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지. 이렇게 편한 숙소에서 지내며 여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하지만 이 편안함은 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끝날 터였다.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처지에 맞지 않는 편안함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내일 일은 내일, 모레 일은 모레 걱정하면 되니까.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함께 배에 오른 여행자들과 이야길 나누었다. 여행을 준비한 과정도 목적도 모두 달랐지만 함께 출발선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각자 유라시아 횡단을 위해 각자 수집했던 정보들을 풀어놓았다. 앞서 횡단 여행을 떠난 사람들과 뒤이어 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오토바이나 차량을 이용한 유라시아 횡단 여행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역시 이렇게 직접 들으니 생생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들도 많았다. 목적지도 관심사도 비슷하다보니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사소한 여행 팁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게 페리에서의 밤은 깊어갔다.◇시베리아 횡단의 출발선, 블라디보스토크에 서다꼬박 24시간 동안 동해를 가로지르고서야 배는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도착했다. 갑판에 서서 군함들이 정박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보며 여기에 오기까지 준비했던 지난 4년이 주마등처럼 흘렀다.아니 오토바이를 타고부터 꿈꾸었던 여행이었으니 그보다 기억을 더 과거로 돌려야 했다. 2013년 1년 동안 중국 칭다오에서 포르투갈 포르투까지 가겠다 떠났던 배낭여행에서 7개월쯤 떠돌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와야 했던 그때부터 언젠가는 다시 포르투를 향해 갈 거라 결심했었다. 머무는 곳마다 서점을 찾고 앞으로 책방지기로서 식견을 넓히겠다고 다짐했던 못다한 여행의 마지막 장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이곳에도 봄이 왔지만 바람에선 시베리아의 찬 기운이 스며있었다. 지난 시절 떠났던 긴 여행의 출발지, 칭다오와 시모노세키에 내렸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거칠고 아득한 시베리아가 곧 내 앞에 펼쳐질 거라 생각하니 묘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조경국

2020-01-21

떠나야할 이유 딱 한가지만 있어도, 떠나라

◇독만권서 행만리로… 불혹의 꿈불혹이 되면 1년 동안 여행자로 살겠다는 꿈을 꾸었다. 서른일곱 살 되던 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선 인생을 다시 설계했다. 3년 후 마흔 살이 되는 해엔 지금까지 삶을 완전히 내려놓고 다시 출발선에 서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 번째가 바로 헌책방을 여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행만리로(行萬里路)’였다.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는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여행하라는 오래된 중국 격언이다. 송나라 학자였던 소철이 말했다고도 하고 명나라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동기창의 글에 나온다고도 하나 정확하진 않다. 누가 말했든 그게 무슨 대수랴. 만 권의 책과 만 리의 여행은 인생의 중용을 깨닫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라 생각했다.책으로 쌓은 지식과 몸으로 익힌 경험이 조화를 이뤄야만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옛 중국사람이 여덟 자로 줄여 말한 것뿐. 평생 만 권의 책을 읽기란 힘든 일이니 그만큼 책을 쌓아둔 헌책방을 여는 것으로 대신하지만, 만 리 여행을 떠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불혹이 되면 더는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 다짐했고 실천에 옮겼다. 그러기에 마흔은 그렇게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나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다 해도 아내의 허락을 얻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랴. 남자들의 철없음이 아내의 현명함을 이기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내는 항상 나의 철없음을 쿨하게 받아들였다. 아마 오래 전에 포기한 것일 수도. 1년을 기한으로 잡고 떠났던 첫 번째 배낭여행(2013년, 7개월)도,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을 돌아보고 온 그때도(2015년, 1개월), 그리고 이번 유라시아 횡단 여행(2019년, 4개월)을 떠날 때도 한 번도 반대하지 않았다. 앞서 떠난 여행과는 다르게 이번엔 “보험은 들어놓고 떠나라”고만 했을 뿐이다.2013년 여행의 종착지는 포르투갈 포트투에 있는 렐루 서점이었다. 1년 동안 중국 칭다오에서 시작해 렐루 서점까지 육로로만 이동하며 서점들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행만리로, 처음 떠났던 그 여행은 사정이 생겨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7개월 동안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거쳐 싱가포르까지 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캘커타 대학 앞에 있는 책 시장을 보기 위해 인도 비자를 준비할 즈음 집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고 아내는 언젠가 다시 떠나라는 말로 위로했다. 결국 렐루 서점까지 가는 여정은 아쉽지만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나고서야 렐루 서점을 향해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때는 버스와 기차로 이동했으나 이번에는 오토바이로 움직였다. 렐루 서점은 목적지이자 반환점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오로지 로시(중고로 구입한 오토바이 2011년형 BMW F650G의 애칭, ‘로시난테’의 줄임말)에게 의지해야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나기 위해 꼬박 3년 동안 꿈을 꾸며 준비했다.◇떠나는 날까지 오토바이를 정비하고 짐을 줄이다출발(5월 12일) 보름을 남겨두고 오토바이 통관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보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오토바이(자동차도 마찬가지)를 가져가기 위해선 여러 서류가 필요했다. 임시 수출입신고서부터 세관 사전 신고서까지 모두 일곱 가지 서류를 갖추어야 했다. 선사 담당자에게 ‘문제없다’는 메일을 받고 나서야 드디어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보름을 남겨 놓고도 로시는 여전히 정비 중이었다. 낡은 오토바이다 보니 이것저것 손 볼 것이 많았다. 3년 전 일본 책방 여행을 위해 800만 원을 주고 구입한 로시는 유라시아 횡단을 앞두고 계속 말썽을 부렸다. 주행 중 엔진이 꺼지는 증상(stalling)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전문가에게 맡기면 좋겠지만 비용도 시간도 문제였다. 같은 기종을 타는 해외 라이더들이 남긴 해결 방법을 찾아 부품을 구하고 직접 수리할 수밖에 없었다.엔진 실속의 원인이었던 연료 펌프부터 스파크 플러그, 에어필터, 배터리, 엔진오일... 특별한 장비 없이 교체할 수 있는 건 시간 날 때마다 해두었다. 전문가에게 맡기면 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내 손으로 가능한 것 직접 해보아야 여행 중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떠나기 전까지 아파트 지하주차장 구석에서 오토바이 카울(플라스틱 덮개)을 몇 번이나 벗겼다 다시 조립했는지 모른다. 서울 성수공업고에서 오토바이 기본 정비를 배운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 정비 기술을 익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2017년 성수공업고에서 매년 실시하는 ‘시민을 위한 이륜차 정비교육’을 신청해 2박3일 동안 수업을 들은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스스로 이동수단을 움직여 여행을 떠나야한다면 이동수단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충분히 갖출수록 중도 포기할 확률을 줄일 수 있다. 어쨌거나 떠나는 날까지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로시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짐을 줄이는 것도 큰 과제였다. 여행을 하는데 그리 많은 물건이 필요하진 않다. 하지만 여행자는 항상 일어나지 않을 일, 의외의 경우를 걱정하며 더 많은 물건들을 챙긴다. 여행의 경험이 늘수록 챙겨갈 물건에 대한 욕심이 줄어들었다. 인간은 부족한 상황에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많이 사용하지 않을 물건을 줄이는 대신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걸 이전의 여행 경험을 통해 충분히 몸으로 깨달았다. 옷가지, 캠핑용품은 물론이고 특히 전자제품은 최대한 가져갈 물품에서 제외했다. 노트북도 카메라도 과감하게 뺐다. 기록은 스마트폰과 수첩이면 충분했다. 물론 더 좋은 사진과 영상을 찍고 싶은 욕심은 있었으나 그 욕심이 고생으로 이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았다.최대한 짐을 줄였지만 만약의 사태,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필요한 공구는 줄이기가 힘들었다.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나기 전 장거리 여행에서 문제가 생긴 적은 없지만, 가까운 곳을 다녀오며 난감한 상황을 만났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공구가 있었으면 바로 해결할 수 있을 걸 오랜 시간 불편을 감수하며 달린 적도 있고, 결국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필요한 정비 공구는 경험 많은 라이더들이 추천하는 것으로만 추렸다. 아마존(www.amazon.com)이나 레브질라(www.revzilla.com) 등에서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자를 위한 ‘정비 공구 세트 상품’을 팔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목록을 만들어두고 꽤 오랜 시간을 두고 중복되지 않게 하나씩 준비했다.◇ “쓸데없이 뭐한다고 고생을 사서 하네”출발 전까지 무용(無用)한 일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유용(有用)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떠난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을 때 “쓸데없이 뭐한다고 고생을 사서 하네”라고 하셨으니 유라시아 횡단 여행은 무용한 일. 대륙 횡단 여행자가 되겠다는 꿈은 무용한 일이고 그 꿈을 위해 글값을 받고 여백을 채우는 일이 유용한 일인지는 딱 부러지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게으름뱅이 학자, 정신분석을 말하다’에서 “무용이 유용을 앞선다”고 잘라 말했던 철학자 기시다 슈의 주장은 믿었다. 어쨌거나, 유용이든 무용이든 따질 것도 없이 텐트 생활을 최대한 피하려면 ‘당장 돈이 되는 일’(사람들이 유용하다 믿는 일)은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결국 무용이 앞선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전날까지 컴퓨터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따져보면 스물셋 의대생이었던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낡은 영국 노턴(Norton)제 ‘포데로사’를 타고 4개월 동안 남미를 여행하며 남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무용의 기록이었다. 쿠바를 해방시키고 볼리비아 밀림에서 그는 혁명가로 죽었고, 포데로사와 함께 달린 기록은 유용한 일에만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무용의 우위를 가르쳤다.엔진과 심장의 고동을 맞추고 온몸으로 바람을 가르는 오토바이 여행의 매력, 아니 마력은 그 어떤 여행의 방식보다 강력하다. 혈관의 말초까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강력한 무용의 각성제라고나 할까. 무용한 일일수록 끊임없이 되뇌지 않으면 실행에 옮길 수 없다는 걸 안다. 떠나지 못할 조건들은 충분히 차고 넘치지만, 떠나야 할(떠나고 싶은) 이유가 딱 한 가지만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이번 여행은 2013년에 떠났다 중간에 멈추었던 일곱 달 여정의 연장이었다. 서른일곱에 세웠던 계획을 이어가기까지 딱 10년이 걸렸다. 떠나기 전날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에 마지막 문장으로 썼던, 캄보디아 프놈펜의 디스북스 서점에 걸려 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다시 되새김했다.“길 떠나지 않는 이에겐 세상은 한 페이지 읽다만 책일 뿐.”(The world is a book people who don’t travel only get to read one page.)   /조경국

2020-01-14

블라디보스토크 다양한 음식·문화·역사 찾아 발길 닿는 곳으로

◇러시아 입국이 이렇게 쉬웠다니!공기 속 습기가 얼어 빛을 내며 흩날렸다. 귓불을 지나는 찬바람 매서웠다. 네오 로만티카 호에서 내리자마자 북국의 도시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처음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던 날(5월 13일)은 봄이었고 내가 사는 한반도의 남녘이나 블라디보스토크나 따뜻하기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12월의 추위는 매서움의 차이가 컸다. 겨우내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곳(경남 진주)에 사니 이런 풍경을 보는 일은 색다른 경험이다.크루즈 여행의 장점은 입출국 절차가 너무 간단하다는 것. 하선 시간보다 일찍 나와 카페테리아에서 쉬고 있었다. 정복을 입고 키가 훌쩍 큰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샤프카(러시아 털모자)를 눌러쓰고 내 앞을 지났다. 잠시 그들을 보며 직원을 뽑는 기준이 키가 아닐까 생각했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모델들의 런웨이를 보는 듯했다. 10명쯤 될까, 그들은 승객들의 여권에 입국허가 도장을 찍기 위해 탄 것이다. 기항지 관광을 위해 하선할 때 승객들은 따로 출입국관리사무소를 거치지 않고 맡긴 여권을 받아 바로 시내 관광을 할 수 있었다. 1200명이 넘는 승객들이 한꺼번에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들이닥친다면 거기서 허비하는 시간만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5월에 오토바이를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는 당연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러시아에서 줄을 서는 건 일상”이라는 이야기를 하도 듣고, 각오해선지 적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줄 서고, 또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라는 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마 바로 실감했다. 그런데 크루즈를 타고 오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사천리였다. 배에서 내려 시내 지도를 얻기 위해 여객선터미널에 들어갔더니 공연이 한창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수병들이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크루즈 입항을 축하하기 위해 (테트리스에도 나오는) 코사크 댄스를 추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앉았다 뛰어오르길 빠른 속도로 반복했다. 코사크 댄스는 보기만 해도 신난다. 수병들이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르고 뛰는 모습은 흡사 초원을 힘차게 내달리는 코사크의 준마를 연상케 한다.러시아를 대표하는 이 코사크 댄스는 원래 15세기 이후 러시아 서남부 지역(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살며 용맹을 떨치던 코사크족의 전통춤이었다. 유목과 농사를 병행했던 그들은 태생부터 전사였고, 이런 전통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졌다. 코사크 기병대의 막강한 전투력은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막아내고 또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잔인하게 제압하며 널리 알려졌다. 크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활약한 그들의 무용담은 ‘세상에서 가장 용맹한 기병대’라는 전설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1918년 러시아 혁명 이후 코사크 기병대는 해산되고 일부는 차르의 백군으로 또 일부는 볼셰비키의 적군으로 나뉘게 된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의 명장면 ‘오데사 계단의 학살’에서 반란군을 잔혹하게 학살하던 병사들이 바로 백군 편에 섰던 코사크들이었다. 주변 이슬람민족인 타타르족과 투르크족에 맞서 땅을 지키고자 했던 코사크들은 어쩔 수 없이 강대국이었던 러시아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고, 또 월등했던 군사적 능력 때문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능력은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영토를 확장하는데도 물론 많은 도움을 주었다.◇아시아의 유럽, 과거의 영화가 관광객을 불러들이다여객선터미널을 나오니 풍경이 익숙했다. 출발할 때와 돌아올 때 10일 가까이 이 주변을 돌아다녔으니 그럴 밖에. 블라디보스토크 관광에 주어진 시간 14시간(8시부터 22시까지)이었다. 여행사에서 음식, 문화, 역사… 여러 주제에 맞춰 다양한 여행 프로그램을 준비해 따로 현지 정보를 수집하지 않아도 편히 다닐 수 있었지만 이미 가본 곳들이 많아 편히 자유롭게 다니기로 했다.아시아의 동쪽 끝자락에 있으나 유럽의 모습을 가진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힘이 알래스카까지 미치던 시절에는 알래스카와 연해주에서 생산된 모피가 집결하는 항구였으나 동북아에서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알렉산드르 2세 시절(재위 1855-1881) 군항으로 발전했다. 알렉산드르 3세 시절 공사를 시작해 니콜라이 2세 치세가 되어서야 공사가 끝난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연결된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1903년 완공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야로슬라브 역까지 총 길이가 9288킬로미터. 여객터미널 바로 옆에는 고풍스런 블라디보스토크 역이 있고 승강장으로 내려가면 시베리아 횡단 기념탑을 볼 수 있다.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 노동자뿐만 아니라 차르를 반대했던 수많은 이들이 시베리아로 끌려와 노역해야 했다. 그들의 피땀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영화를 만든 토대였다. 아무리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해도 길이 이어지지 않으면 통치할 수 없다. 철도를 연결하고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에 함대를 배치한 이후에야 러시아는 동북아에서 제대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다. 유럽 도시를 연상시키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풍경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풍스런 건물이 즐비한 시내를 걷노라면 이곳이 유럽 한복판인지 아시아의 끝자락인지 알 수 없다. 과거 영화를 누렸던 흔적들이 이제 아시아에서 유럽의 향취를 느끼고픈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블라디보스토크가 다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크루즈선을 타고 온 1200명이 넘은 관광객이 단 하루 쓰고 가는 돈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긴 힘들지만 먹고 마시고 작은 기념품을 사더라도 블라디보스토크의 경제에 도움이 될 건 확실하다. 거리에도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관광객을 쉽게 볼 수 있다. 번화한 아르바뜨 거리에는 현지인보다 관광객이 더 많고, 한글 간판도 쉽게 볼 수 있다. 패키지가 아닌 자유 여행을 왔다면 웬만한 곳은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아르바뜨 거리, 잠수함 박물관, 아쿠아리움… 그 외 몇 곳 시내 명승지를 돌아보는 건 하루면 충분하다. 느긋하게 루스키 섬이나 우수리스크, 항카호까지 모두 다녀오려면 일주일도 모자랄 테고. 이번처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다닐 수 있다면 여행 상품을 미리 신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편안하게 버스를 타고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다닐 수 있으니 처음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았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굴요리전문점부터 북한식당까지… 블라디보스토크의 맛짧은 시간 머무르는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의 진미를 모두 맛보았다.(전에 왔을 땐 그러지 못했다. 모두 동행했던 선배 덕분이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최근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유는 유럽의 풍광을 가진 덕분이었지만, 근해에서 많이 잡히는 킹크랩과 대게 등 해산물을 저렴한 비용으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르바뜨 거리 주변에는 이름난 해산물 식당이 여럿 자리 잡고 있고 우리보다 훨씬 싼값에 메뉴를 고를 수 있다. 시내를 벗어나 현지인들이 찾는 바닷가 식당을 찾으면 싱싱한 킹크랩과 대게를 사서 직접 조리해 먹을 수도 있다. 굴요리전문점에서 와인과 굴찜으로 시작해 북한식당(블라디보스토크에는 세 곳의 북한식당이 있고 대게찜 등 해산물을 먹을 수 있는 곳은 고려관이다)에서 러시아 맥주와 녹두전도 먹었다. 금강산식당은 아르바뜨 거리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지만 가는 길에 중앙광장, 잠수함 박물관, 개선문, 졸로토이 대교 옆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망한 선원들을 기리는 추모비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블라디보스토크뿐만 아니라 러시아 대부분 도시들은 이런 전몰기념비를 레닌 동상만큼 쉽게 볼 수 있다. 연합국 힘을 합쳤던 서부전선과는 달리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에 홀로 맞섰던 소련은 700만 명 넘는 전사자를 냈다. 독일군 전사자 350만 명 중 80%가 동부전선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얼마나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는지 알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전쟁이다.금강산식당에서 아르바뜨 거리로 돌아올 땐 직원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 부탁했다. 택시비는 300루블(약 6천 원)이었다. 조금 먼 거리라도 택시를 잘 활용한다면 문제 없이 다닐 수 있다. 카카오택시처럼 얀덱스(Yandex) 어플을 설치해서 사용하면 된다. 아르바뜨 거리에 도착해서 킹크랩 전문점에서 벨루가 보드카 한 잔 마시는 걸로 이번 크루즈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아르바뜨 거리 식당에서 불콰한 얼굴로 나와 여객선터미널까지 걸었다. 배에 오르기 전 레닌 동상 앞에서 환하게 불을 밝힌 블라디보스토크항과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차르의 압제에서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일으켰던 혁명은 이제 묵은 과거가 되었고, 그는 상징으로 남았다.만약 그가 살아와 이 자리에 선다면 과연 혁명이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이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깊은 욕망은 압제와 불평등을 벗어나려는 짧은 혁명기에만 잠시 사라진 척할 뿐이라고, 돌아가는 크루즈에 오르며 생각했다.   /조경국

2020-01-07

환동해 바닷길 열렸다… 이제 우리는 대륙으로 떠난다

포항이 환동해와 유럽을 잇는 관광과 인적·물적 교류의 시발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 영일만항은 포항시를 출발해 아시아 동쪽 끝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럽 대륙의 끝자락 포르투갈까지 가는 육로 여행의 출발지가 될 것이다. 바로 그 길을 오토바이 타고 완주한 조경국이 본지 연재기사를 통해 ‘새로운 길과 만난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선보인다. 왕복 38000km. 지구 둘레에 맞먹는 그 먼 거리를 함께 달릴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애정을 기대한다.◇ 네오 로만티카 호 타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앞으로 몇 년 동안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포항 영일만항에 정박한 크루즈 네오 로만티카 호를 보고서야 블라디보스토크에 다시 간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선체 길이만 249미터, 배수량 5만7천 톤, 1천800명의 승객과 600명의 승무원이 탈 수 있는 네오 로만티카 호는 모든 시설이 갖춰진 바다 위 작은 도시였다. 솔직히 이렇게 큰 배를 타 본 적은 없었다.이전까지 동해와 블라디보스토크, 부산과 시모노세키, 여수와 제주도를 잇는 그리 크지 않은 페리를 승선한 경험이 전부니 네오 로만티카 호에 오르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어둠이 내린 영일만항에 닻을 내리고 선내에 불을 환하게 밝힌 네오 로만티카 호의 위용은 대단했지만 “크루즈 중에서는 중간급”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그래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 배가 있다는 건가.현재 운항 중인 세계에서 가장 큰 크루즈는 로얄 캐리비안 사의 ‘심포니 호’, 선체 길이가 324미터, 배수량 23만 톤이다. 우리가 잘 아는 타이타닉 호의 선체 길이는 270미터였다. 타이타닉이 건조된 건 이미 100년 전이니 그 사이 더 크고 화려한 배를 타고 여행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선박 건조 기술을 발전시킨 셈이다.네오 로만티카 호의 선사는 이탈리아 제노바에 본사를 둔 코스타 사다. 네오 로만티카 호까지 포함해 모두 15척의 크루즈를 운영 중이다. 1854년 문을 연 해운회사니 그 역사가 깊다. 이렇게 오랜 세월 자신의 업을 지킨 회사를 보면 비결이 무얼까 궁금하다. 작은 헌책방을 7년차 겨우겨우 버티며 꾸리고 있는 자영업자의 처지에선 165년은 실감나지 않는 연력이다.부둣가에서 간단한 승선 환영식이 열리는 걸 보곤 배에 올라 카드를 받았다. 객실을 출입하고 신용카드 대신 물건을 구입하거나 음료를 주문할 때 사용할 카드였다. 그리고 배정받은 객실을 찾았다. 11층까지 객실, 공연장, 레스토랑, 사우나, 수영장 등 승객을 위한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객실이 있는 7층에 내리고서도 방을 찾기 위해 긴 복도를 걸어가야 했다. 바다가 보이는 깨끗한 방에 들어서고야 크루즈 승객이라는 실감이 났다. 크기는 작지만 여느 호텔 객실과 다르지 않았다. TV는 물론이고 냉장고, 화장실까지 갖추었다. 항해 중에도 배가 워낙 커선지 흔들림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예민한 승객들은 뱃멀미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동안 바다에 떠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편안했다.◇ 포항, 환동해 크루즈 관광의 중심지를 꿈꾸다포항에서 크루즈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유라시아 횡단을 떠나던 날의 설렘이 다시 밀려왔다. 물론 지난 5월에 떠날 때는 지금의 호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오토바이 오버랜더(대륙횡단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과 차림이란 저렴하고 남루한 것이니. 크루즈가 있다 해도 탈 생각은 못했을 테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행기를 제외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동해항에서 떠나는 페리 밖에 없었다. 적어도 3개월 전에는 예약해야만 오토바이를 선적할 수 있었다. 떠나는 날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오가는 사람과 물량이 적으니 일주일에 한 번 출발했고 그나마도 얼마 전 선사의 사정으로 휴항 중이다. 북한과 땅이 맞닿아 있지만 섬나라나 마찬가지인 우리에게 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비행기와 배 밖에 없다. 저렴한 비용으로 물류를 이동하기 위해선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어야지만 북한과 관계가 좋아지지 않는 한 기약할 수 없으니 바다를 통하는 것이 최선이다.현재로선 포항이 한반도와 유라시아를 잇는 유일한 접점이다. 이 접점은 오가는 사람과 물건이 늘어날수록 더 큰 힘을 낼 것이다. 포항에서 출발하는 크루즈 여행이 성공을 거두려면 블라디보스토크만이 아니라 금강산, 일본의 삿포로나 니가타를 연결하는 항로를 만들어야 할 테다. 아무리 배 안에서 즐길거리가 많다 해도 항구에 정박해 여행할 수 있는 곳이 한 곳 뿐이라면 크루즈 여행의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만약 포항에서 출발해 금강산, 블라디보스토크, 삿포로를 여행하는 일주일 코스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을까. 우리뿐만 아니라 러시아, 일본 관광객까지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포항시가 앞장서 크루즈 시범 운항을 시작한 이유는 미래를 위해 포항을 환동해 거점, 해양관광도시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사람과 물류가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번 시범운항은 큰 디딤돌을 놓은 것이라 생각한다. 출항 전 환영행사에서 이강덕 포항시장은 “이번 출항을 계기로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등 환동해 국가와 도시간 교류가 확대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포항시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단순히 포항시뿐만 아니라 경북도와 정부가 나서서 지원해야 한다. 유라시아로 향하는 뱃길을 만들고 외연을 넓히는 일은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우리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한반도, 거기다 남북으로 분단된 작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건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경제와 문화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해도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이건 변하지 않는 현실이고 끊임없이 하늘과 바다에 길을 내어야하는 처지다. 언젠가 통일이 되어 남북도 자유로이 오갈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모든 가능성을 열고 길을 만들어야 한다. ‘유라시아 역사 기행’(민음사, 2015)의 저자 강인욱 교수(경희대학교 사학과)는 그의 책에서 “한국은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바닷길의 중심이자 유라시아 대륙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라며 “자고로 한반도는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북방의 이웃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유라시아 역사의 일부를 이루었다”고 설명했다. 우리에게 바닷길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의 책 내용을 일부 옮긴다. 그의 주장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20세기 한국의 문화 역량은 대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재창조하는 것으로 ‘한반도와 바다’의 교류에 기반한 것이었다. 21세기가 되면서 그 교류의 길은 ‘유라시아 대륙-한반도-바닷길’로 넓어지고 있다. 장차 시베리아 철도가 이어지고 남북의 길이 트인다면 한국은 바다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교류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크루즈를 띄운 포항은 이제 ‘교류의 중심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셈이다. 옛 신라의 황금시대는 먼 이민족들과의 교류로 열렸다. 경주와 가까웠던 포항이 그들과 물물교환 하던 항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되고 또 진보한다. 평화와 번영은 문을 열고 길을 만들어야 찾을 수 있다.◇ 크루즈 여행의 재미… 다양한 볼거리와 편안한 쉼32시간, 포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크루즈를 타고 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지루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흥겨운 이벤트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객실로 배달되어 오는 뉴스레터를 보면 매 시간마다 열리는 이벤트와 공연이 빼곡하게 소개되어 있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심심할 틈이 없다. 여유가 있다면 이런 여행을 마다할 사람이 어딨겠나 싶다.3년 전 유라시아 횡단을 떠나겠다 결심하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전까진 블라디보스토크는 한 번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가진 적이 없는 곳이었다. 3년 사이 블라디보스토크는 ‘핫한 여행지’로 떠올랐고, 최근 우리와 일본 사이가 틀어지며 대체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그래선지 모르겠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할 때도 돌아올 때도 한국 관광객을 쉽게 거리에서 숙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시아 동쪽 끝자락에 있으되 유럽의 풍경을 가진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가 차량(오토바이든 자동차든)을 이용해 육로로 유럽을 갈 수 있는 유일한 기점이다. 오토바이를 배에 태우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려 통관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수고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오죽했으면 블라디보스토크 세관에서 오토바이를 받을 때 여행자(6명이 같은 날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시작했다)들 모두 “여행하기도 전에 지칠 지경”이라고 푸념했을 정도였으니까. 시작부터 고생이었다. 고생은 여행이 끝나면 항상 부풀려지는 법이지만 많은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들이 집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다시 시동을 걸 때까지가 가장 힘든 기간이었다고 고백했으니, 이건 분명 사실이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두려움과 긴장감은 쉽게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그렇게 두려움과 긴장감을 안고 도착했던 블라디보스토크를 이렇게 편안하게 크루즈를 타고 다시 여행할 줄은 정말 몰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때까지 배 안에서 편안하게 즐기며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몇 개월 전의 고생했던 기억이 눈 녹듯 사라졌으니까.경남 진주에서 ‘소소책방’을 운영하는 조경국은 1974년 태어났다. 대학에선 국제관계학을 공부했고, 몇몇 직장을 옮겨 다니며 기자와 편집기획자로 근무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낯선 도시의 바람과 만나는 걸 좋아하는 낭만주의자이기도 하다. 한겨레신문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했으며,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 ‘필사의 기초’ ‘책 정리하는 법’ 등의 저자다.

202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