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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지고, 부서지고, 쓰라린… 러시아 마지막 날의 흔적들

등록일 2020-03-31 20:12 게재일 2020-04-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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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자칫하면 여행이 끝날 뻔했던 위기
미끄러져 부서지고 깨진 오토바이를 덕테이프로 겨우 붙여 숙소까지 끌고 왔다.
미끄러져 부서지고 깨진 오토바이를 덕테이프로 겨우 붙여 숙소까지 끌고 왔다.

◇ 러시아에서 마지막 날, 미끄러져 넘어지다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날 이번 여행도 끝날 뻔 했다. 모두 내가 잘못한 탓이다. 도로에 떨어진 돌을 피하려다 미끄러졌다. 다행히 크게 속도를 내지 않았고 도로에 흙이 깔린 곳에서 넘어졌다. 긴장을 늦추고 있었던 탓이다.

나는 다친 곳이 전혀 없었지만 로시는 만신창이. 양쪽 카울과 앞쪽 깜박이등 하나가 깨졌다.

더 큰 문제는 헤드라이트와 계기판을 잡아주는 지지대가 부러지고 사이드 박스 하나가 완전히 회생 불능이 된 것이다. 사이드 박스는 폐기처분하고 헤드라이트와 계기판은 덕테이프(덕테이프는 그야말로 만능이다!)로 고정시켜 숙소에 들어왔다.

엔진이나 미션, 전장에는 문제가 없다. 넘어진 후 잠시 시동이 켜지지 않아 고민했었는데 다행히도 시동도 켜지고 경고등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일이 새는 곳도 없고.

6-7미터쯤 미끄러진 듯한데 몸이 성한 건 슈트와 부츠 때문이다. 이리저리 기운 슈트와 물 새는 부츠가 제대로 역할을 했다. 사고로 바지 밑단이 찢어져 또 기워야 했다. 덕테이프로 고정하고 계속 달릴 수 없어 숙소에 와서 고장난 것들을 완전히 분리했다.

숙소 주차장 구석에 모든 공구를 펼쳐놓고 달릴 수 있도록 수리했다.
숙소 주차장 구석에 모든 공구를 펼쳐놓고 달릴 수 있도록 수리했다.

안개등도 하나가 완전히 부서져 분리했다. 깨진 카울과 지지대, 앞 물받이를 수선했다. 가장 구경이 작은 별렌치를 버너에 달궈 구멍을 뚫고 케이블타이로 꿰맸다. 오토바이까지 깁다니. 이렇게 만들어 미안하다! 로시.

미끄러지며 헬멧 안으로 흙이 밀고 들어왔을 때,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혹시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잠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찰나가 지나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어쨌거나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다. 달리지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여행은 계속된다.

계속 달려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하지만 오늘 일로 일정이 틀어질 수도. 임시조치해둔 부품을 꼭 교환해야 한다. 우선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가서 알아보기로. 어떻게든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 러시아여 안녕!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로

사고로 대범함+2, 상황대처능력+3.5 정도 능력치 상승했으나 에너지-7, 지출-10. 응급조치한 부분은 비포장길을 달렸음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임시로 묶어둔 부분이 피로가 누적되면 별 수 없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우선 라트비아로 넘어가야 해서 러시아의 벨리키예루키에서 가장 가까운 남쪽 국경검문소로 갔다.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넘어가려면 그린카드(유럽 자동차보험)를 만들어야 한다.

국경 검문소 가까이 세 곳이나 보험회사 사무실에 들렀는데도 발급이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라트비아에 가서 만들어야 한다고. 예전 여행자들이 남긴 정보가 틀린 경우도 종종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 계속 나온다. 러시아 검문소에서 짐까지 검사 받았지만 다시 돌아나와야 했다.

러시아 국경 근처 보험회사. 하지만 유럽 그린카드는 구입할 수 없었다.
러시아 국경 근처 보험회사. 하지만 유럽 그린카드는 구입할 수 없었다.

결국 라트비아 국경 검문소 안에서 그린카드를 발급 받을 수 있는 북쪽에 가서야 입국할 수 있었다. 3개월 보험료가 53유로.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한데 내가 가진 카드 모두 불가능. 다행히 지갑 안에 60유로가 있어 그린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때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되었던 건 국내 점검시간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오후 6시 정각부터 몇 분 사이 결제를 시도했었으니까. 한국보다 6시간 빠르니 그때 국내는 자정. 나중에 숙소에 와서 문제없이 지불 가능한 걸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갑 속에 150달러와 60유로, 그리고 쓰고 남은 루블화 약간 뿐이었으니까. 카드로 인출하거나 결제를 할 수 없으면 난감할 수밖에.

해외에 나올 때는 다른 은행 신용카드를 준비하는 게 좋겠다. 둘 다 같은 은행이라 같은 문제로 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북쪽 국경에서 280킬로미터쯤 달려 밤 11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쪽에서 다시 북쪽으로(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갔는데 비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졌다.), 또 거기서 리가까지. 아주 긴긴 하루였다.

◇ 깜짝 놀랄만한 수리비, 수리를 포기하다

BMW 모토라드에 가서 수리를 의뢰했다. 로시의 모델명은 F650GS TWIN. 2009년식이고 아주 짧은 기간 생산되었고 2011년부턴가 F700GS로 변경되어 나왔다. 호환되는 부품이 많지만 그래도 부품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 거라 생각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수리해야할 부분을 점검하고(밀린 일이 많아서 점검은 하루를 기다려야 한단다.) 독일 본사에 부품을 주문해 수리하기까지 ‘아마도’ 짧게는 일주일에서 2주일은 걸린다고. 일주일과 2주일 사이 ‘메이비(maybe)’가 얼마나 또렷하게 들리던지. 결국 리가에서 최소 10일, 최대 보름은 발이 묶이게 생겼다.

헬멧을 들고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숙소로 걸어 돌아오는데 이렇게 된 거 요즘 유행한다는 ‘ㅇㅇ에서 한 달 살기’를 짧게 해보기로 결심했다.

라트비아 리가 시내 곳곳을 연결하는 트램.
라트비아 리가 시내 곳곳을 연결하는 트램.

사실 이렇게 한 도시에 오래 머무르며 느긋하게 돌아보고 알아 가는 게 가장 추천할만한 여행 방식이라 생각한다. 주마간산, 달리고 달려서 반환점과 종착점를 찍는 여행은 꽤나 피로하고 놓치고 가는 것이 많다. 하지만 시간과 달려야할 할 곳이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마트에 가서 과일(자두와 방울토마토)를 사서 먹었는데 뱃속으로 넘어가자마자 바로 분해되어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과일을 사먹지 않았더니 몸이 바로 반응한다. 옛날 먼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도 과일을 먹을 때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옴스크부터 같이 달렸던 현묵 씨는 리투아니아 쪽으로 먼저 출발하는 걸로. 가능하다면 돌아갈 때 모스크바에서 만나기로 했다. 안전하게 가고 싶은 곳 모두 돌아보길.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내일부터 숙소를 좀 더 저렴한 곳(1박 9유로)으로 옮기기로 했다.

쉬는 동안 라트비아 역사와 지리 공부나 해야겠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려면 대중교통과 음식, 그리고 통신, 이 세 가지를 먼저 해결하는 게 중요한 듯하다.

지금 숙소에서 로시를 맡긴 모토라드까지 걸어가긴 먼 거리라 버스카드를 구입했다.

버스나 트램을 10번 탈 수 있는 카드가 약 11유로. 심카드는 1.5유로짜리를 구입했다. 유심카드는 10일 동안 리가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하니 직원이 알아서 건네주었다. 우리네 편의점 같은 곳에서 두 가지 모두 구입할 수 있다.

러시아 국경을 통과해 리가로 연결된 'A15' 고속도로.
러시아 국경을 통과해 리가로 연결된 'A15' 고속도로.

모토라드에 다녀와서 견적서를 이메일로 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로시를 사랑하지만 이 회사의 애프터서비스 정책은 나 같은 헝그리 라이더는 감당하기 어렵다.

오 마이 갓! 차마 수리금액을 말하기가…. 견적서에 나와 있는 세금만으로 내가 생각했던 수리 금액과 거의 맞먹었다.

문제는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될 부품들까지 견적서에 넣어둔 것. 결국 수리하지 않고 오토바이를 찾으러 가겠노라 답장을 보냈고, 길게 한숨 한 번 쉬고 내가 원하는 곳만 수리할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

모토라드에서만 수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견적서에 나온 수리비를 그대로 내면 이대로 핸들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 번의 실수가 많은 경험을 하게 만든다.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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