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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혼을 이어 가는 사람들

유구한 세월 속에서 어느 한 시점의 손길과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조선시대 형벌 중에서 ‘유3천리’ 형을 받아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던 220여 명 중 굵직한 사건 34개를 추려내어 그들이 이곳까지 와야만 했던 사연과 남긴 흔적들을 살펴보는 일은 더욱 그랬다. 이는 그동안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생소한 내용들이었기에 나름 사료들을 찾는 데는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작업은 과거와 교감하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과 교감하는 일이었기에 내내 행복했다.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처럼 이곳에서 객사한 유배인도 있었고, 충신 박팽년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처럼 끝까지 복권되지 않아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과 애환을 품은 채 죽어간 사람들의 애환도 다루었다.다산과 우암 같은 석학들이 있었는가 하면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 항쟁에 희생되어 온 사람들, 그리고 ‘정감록’의 예언을 토대로 유토피아를 꿈꾸며 왕권과 지배계층의 부조리에 저항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사람들의 레퍼토리도 있었다.이들의 사연들을 엮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파란만장했던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꿰뚫어졌다.글을 써내려가는 동안 유배라는 것은 억울하면서도 가혹한 형벌이었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지만, 그 내면에는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유배는 오히려 선비들에게 염치와 명분의 상징이었고, 때로는 자기완성의 공간이었으며 자기성찰의 기회이기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이제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들이 지나간 ‘경상도 장기(長鬐)’라는 그 자리에는 역사와 효충(孝忠)과 예가 면면(綿綿)히 흐르고 있었다. ‘귀양지’라는 부정적인 면 보다는 학문을 숭상하고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을 고즈넉하게 간직하며 긍정의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좋은 예가 2001년 12월 22일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나란히 세워진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였다.이 비들의 건립은 ‘장기발전연구회’의 노력과 뜻있는 지역 인사들이 앞장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기발전연구회는 낙후된 장기(長鬐)의 발전을 염원하는 뜻있는 인사들의 모임체였다. 그 구성원들은 교수, 교사, 사업가, 회사원, 공무원, 농·어업인 등 다양했다. 매년 장기지역의 역사, 문화, 예술, 민속, 산업 및 기타 분야에 대한 조사 연구와 교육을 해온 자생단체였다.이들의 주선으로 2001년 12월 22일, 다산과 우암 두 집안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적비 제막(除幕)식이 거행되었다.다산 측에서는 법무부장관을 지낸 정해창씨가 집안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왔고, 우암 측에서도 송월술 외 여러분의 자손들이 참석하였다. 비석의 주인공들은 살아서는 결코 나란히 서지 못할 노론과 남인의 대표자였겠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 와서 어느 사람의 학문은 옳았고, 누구의 학문은 돼먹지 않았다고 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이날 두 가문의 후손들은 각자 선조들이 유배를 왔던 이 자리에서 화합의 악수를 나눴다.장기에 독특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에 대한 유허비도 건립했다.2008년 11월 22일, 영의정으로 있다가 기사환국 때 이곳에 유배를 와 죽은 퇴우당 김수흥 선생 유적비를 건립했다. 멀리서 퇴우당의 후손들이 참석하여 이곳사람들의 성의에 감사해 했다.회재 이언적 선생의 흔적을 찾아 그가 남긴 시를 적어 현장에 시비(詩碑)를 건립했을 때는 여강이씨 문중에서 감사패를 갖고 와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장기충효관도 지었다. 장기사람들이 민간자본 보조금을 받아 2004년 6월 19일 개관 하였다.운영비는 순전히 장기발전연구회와 지역 유지들의 협찬금으로 충당하다가 건물과 부지 일체를 포항시에 기부 체납했다.이곳에는 장기 출신 의병장, 장군, 애국지사, 예술가들의 사료뿐만 아니라 장기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그리고 각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각종 고서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강당에서는 얼마 전까지도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사자소학, 명심보감, 한글·한문서예, 경전강독 등을 교육했다.역사책의 발간과 학술대회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06년 12월 1일에 발행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는 장기지역의 향토사를 총 망라한 것이었다. 전국 읍·면 단위에서 이 정도 수준의 역사책을 발간하는 것은 보기 드물다는 전문가들의 혹평도 있었다.2007년 11월 14일, 포항시청 대회의실에서 ‘포항 장기현과 우암 송시열’이란 주제로 개최한 학술대회에는 정주영, 이민홍, 이종길, 김윤규, 배용일 등 장장한 석학들이 나와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뿐만 아니다. 애국지사들의 추모비 건립은 더 의미가 있다.장헌문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지역출신 애국지사다. 출소 후 광복이 되기도 전에 사망하였고, 직계 유족들조차도 일제의 등살에 시달리다가 만주로 피신했다. 이후로 직계후손들의 생사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음인지 그의 공적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그의 행적들을 애석히 여긴 장기사람들이 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나섰다.후세의 본보기로 삼기 위해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번듯하게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201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일이다.지역 출신 엄주동 선생도 항일투사로 유명하다. 장기면 임중리 출생인 그는 1916년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羅喆)과 같이 활동하다가 나철 선생이 구월산에서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여 자결한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총재인 서일(徐一)의 연락책으로 활약하였다.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였고, 1921년 상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과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미곡상을 경영하기도 하다가 1929년 이후에는 국내에서 서상일(徐相一) 등과 같이 군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하였다.그의 숭고한 얼을 추모하고 후세 교육의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장기사람들은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그게 2016년이었던가 보다.이것만일까. 유배인들이 남긴 사료들을 활용한 문화관광 콘텐츠의 필요성을 깨달았다.이미 경남 남해군이 서포 김만중 등의 유배역사를 유배문학촌으로 관광 상품화 했듯이 장기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흔적과 유산을 잘 활용을 하면 관광은 물론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에는 면장과 지역 시의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고, 이강덕 시장 이하 포항시 담당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장기발전연구회 이민홍 회장이 연구한 우암의 ‘적거실기’, 필자가 그때까지 여러 고서에서 찾아낸 117명(현재는 220여 명)의 명단과 이미 발행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등도 실증의 토대가 되었다.이를 바탕으로 드디어 2019년 3월, 장기면 서촌리 일대 1만여㎡ 부지에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 개관 됐다. 이곳은 앞으로 지조와 충절의 선비문화 계승을 위한 테마공간으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조선시대 장기지역에는 우암을 배향한 죽림서원을 비롯해 지역의 충신과 학자들을 모시며 강학(講學)을 하는 서원이 12개나 있었다. 한 개의 현(縣)에 12개의 서원이 있었다는 것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거기다 향교까지 있었으니 지방의 교육열이 어떠했는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 교육열은 현대까지 이어졌다.당연히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별 네 개의 공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장군, 국세청장, 도의회의장, 세무서장, 문경시장, 국회의원, 포항시장, 구청장, 정당의 위원장, 학교의 재단이사장, 교육장, 교수, 대학총장, 각 급 학교의 교장, 의사, 판·판검사, 변호사, 예술가, 문학인 등이 수두룩한가 하면, 재계를 주름잡은 굴지의 그룹 회장들이 줄줄이 나왔다.그것뿐이겠는가. 사법·행정·외무고시에 합격한 자만도 수십 명이다. 그래서 ‘장기 가서 고시자랑 하지마라’는 유행어도 생겨나지 않았던가. 근래에는 정계, 관계, 학계 등에 두루 포진해 있는 장기사람들로 인해 ‘마카다(온통) 장기판’이라는 새로운 유행어도 나돈다.장기사람들이 지금도 각계각층에서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자산과 전통들을 이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그동안 관심 있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과 격려를 받았다.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장기를 찾아 한번쯤은 유배인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면 큰 소득이다. 장기유배문화체험촌에서 장기읍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대숲 길은 숨겨진 비경이다. 그 길을 ‘우암과 다산의 사색의 길’이라 이름 붙였다. 누군가가 이 길을 거닐면서 우암과 다산이 이곳에 유배 와서 가졌을 사색과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면 이제까지 필자가 연재한 이 졸필들의 보람으로 여길까 한다. /향토사학자 이상준끝

2020-03-10

세도정치가 불러온 백성들의 난

세도정치란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를 말한다. 조선후기에 세도정치가 생긴 이유는 어린 왕이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탓이 컸다. 정조가 죽고 난 다음 열한 살 먹은 순조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이때 처가인 안동김씨 가문이 정치일선에 나섰다. 그렇게 34년 통치를 마감한 순조는 왕통을 아들 효명세자에게 이어줄 작정이었으나, 그 세자가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왕위는 손자인 헌종에게 돌아갔다. 그때 헌종의 나이는 여덟 살 꼬마였다. 헌종의 어머니는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이었기에 이제는 풍양조씨가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그 다음 임금이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철종이었는데, 철종의 비는 다시 안동김씨 가에서 간택되었다. 그래서 안동김씨의 세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왕의 외척, 즉 처가나 외가가 권력을 잡았다고 해도 정직하고 바르게 정치를 했으면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외척세력들이 핵심 정치집단을 형성하면서 모든 권력을 장악한데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문만을 위한 정치를 하게 되면서 부정부패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특히 삼정의 문란이라 하여 전정·군정·환곡 등의 세금제도가 엉망이 돼 버렸다.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가난한 농민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농토에서 불필요한 노동력이 다량으로 축출되었다. 이들은 결국 고향을 버리고 유민(流民)이 되어 떠돌아다니거나, 세금을 피해 산속에 숨어 살면서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더하여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일부 광산은 이른바 잠채(潛採)라 하여 불법적인 형태로 채광되기도 했다. 농토를 잃은 유민들은 이런 광산에 모여들어 경제력을 모은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화적패거리가 되어 횡행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들이 조정에 대한 강한 불만세력으로 성장하였다.농민들 외에도 조정에 불만을 가진 층이 적지 않았다. 특히 평안도 지방은 대청무역(對淸貿易)이 활발해져서 유상(柳商:평양상인)이나 만상(灣商:의주상인) 가운데는 대상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성장한 만큼의 사회적·정치적 지위가 따르지 못했다. 이들이 축적한 부(富)가 오히려 조정이나 수령들로부터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평양감사는 돈벌이가 가장 잘되는 가장 부러운 요직으로 여겨져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유행어가 이래서 생겨났다.지역적인 불만도 갈수록 누적되었다.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한양의 양반들만 청요직에 임명되었고, 서북사람들은 한직에 배정되었다.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세도가와 결탁한 대상인들이 모든 이익을 독차지하면서 다른 상인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각계각층에서 일어난 이런 불만 세력들은 서로 연결되어 뭉치면서 반항의 싹을 틔웠다.그 반항의 싹이 1811년 12월 18일 드디어 밖으로 드러났다. 평안도 가산(嘉山)에서 일군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 졌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평서원수(平西元帥)라 불리던 홍경래(洪景來)가 있었다. 그는 평안도 용강 출신으로,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평안도 출신인 그가 합격할 수는 없었다. 사실상 평민이 된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했고, 이 상황을 갈아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홍경래는 비밀리에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가산 지역에서 우군칙(禹君則)과 이희저(李禧著)를, 곽산 지역에서는 홍총각과 김창시(金昌始)를, 개천 지역에서 이제초(李齊初)를, 황주 지역에서 김사용(金士用)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지도부는 사회에서 밀려난 다양한 계층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양반 출신인 진사 김창시가 있었는가 하면, 상업과 광업에 종사하였던 우군칙이 있었고, 대상인인 이희저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지방차별 타파를 구호로 내걸었다. 당시 평안도가 안고 있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에 대한 불만이 지역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들을 하나로 묶었던 것이다.지도부를 구성한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군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곳에서 광산을 개발한다며 사람들을 모았다. 삽시간에 1천여 명이 모였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생활이 어려운 농민층이었다. 홍경래는 이들을 봉기군으로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다. 1811년에는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었다. 특히 평안도는 피해가 극심했다. 홍경래는 이때가 봉기에 적당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대원수를 맡고 부원수에 김사용, 선봉장에 홍총각, 후군장에 이제초를 배치하고 우군칙과 김창시에게는 모사(謀士)의 역할을 맡겼다.홍경래는 봉기군을 남북 진영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였다. 당시 봉기군의 초반 행로는 의외로 순탄하여 전투다운 전투 한번 없이 주변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한순간에 가산과 곽산 관아를 접수하였고, 이후 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박천 등지를 접수하여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의 아홉 개 읍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각 지역마다 내응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책임한 지방관들의 태도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심지어 관청의 군교사령들이 봉기군에 가담하기까지 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수령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거나 아예 항복을 해버렸다. 다만 가산군수 정시(鄭蓍)는 달랐다. 그는 끝까지 봉기군에 저항하다 살해되었다.항복한 지방관 가운데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도 있었다. 김익순은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김병연(金炳淵)의 할아버지다. 가산군수 정시는 싸우다가 죽어 영웅이 되었지만, 김익순은 봉기군에 항복했기에 천고의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했다. 그의 집안 또한 몰락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김병연은 어머니와 형 등과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어머니는 이런 사정을 어린 김병연에게는 철저히 숨겼다. 불행한 가정사를 알 길이 없었던 김병연은 성장하여 향시에서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향시의 시제가 ‘가산군수 정시의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는 것이었다. 김병연은 김익순의 불충에 대해서 ‘한 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그는 이 글로 장원급제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익순이 바로 친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스스로 천지간의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초반에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봉기군은 그러나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거듭 패한 봉기군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집결했다. 이후 3개월 동안 정주성에서 이루어진 봉기군의 저항은 처절했다. 계속되는 진압군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이면서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정주성 밖에서는 관권에서 이탈된 민심이 성에서 농성하는 봉기군을 도우기도 했다.대치가 계속되면서 진압군 측에서는 정주성의 함락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화약을 매설하여 성을 폭발시킨 뒤에야 봉기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게 홍경래가 거병한 지 4개월 만인 1812년 4월 18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전사하였고, 약 2천938명의 봉기군이 체포되었다.한편, 난이 진행되면서 조정에서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일선 관리들에 대해 문책을 했다. 이에 따라 조선조 정치1번지로 통했던 경상도 장기 땅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연좌된 가족들이 줄줄이 유배되어 장기(長䰇)로 왔기 때문이었다.우선 난이 채 진압되기도 전인 1812년(순조 12) 2월 6일, 정성한(鄭聖翰)을 참형에 처한 다음 가산을 적몰(籍沒)하고 연좌된 가족들을 유3천리 유배형에 처하는 판결이 있었다. 정성한이 살았던 평안도 철산부는 연대책임을 물어 현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따라 그해 3월 28일, 정성한의 처 전녀(田女)가 장기로 유배되어 왔다.정성한의 죄목은 숙부인 정경행(鄭敬行)과 같이 충신의 후손으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고,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아가 지방 수령으로 있던 사람이었지만, 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숙부와 조카가 나란히 봉기군의 두목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봉기군에 항복하여 용천현감이란 직책을 받기도 했다. 결국 봉기군에 군량미를 제공하고 진압군을 공격하는 등 모반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난이 평정된 후에도 유배행렬은 계속되었다. 1812년(순조 12)년 7월 13일, 봉기군에 항복한 평안도 서림진(西林鎭) 첨사(僉使) 김인후(金仁厚), 임용(林溶)등에 대한 처벌이 있었다. 김인후가 항복한 것은 김익순과 다름이 없다하였고, 임용은 관리로 있었으나 난리를 듣고는 적진에 자진해서 들어가서 창감(倉監)이란 직을 맡았다가 승진되어 좌수(座首)까지 했다는 것이다. 모두 모반 대역죄를 적용하여 참형에 처했고, 가족들은 유배를 보냈다. 이에 따라 그해 7월 28일 김인후의 첩 점례(占禮), 그해 11월 12일에는 임용의 조카 임도양(林道陽)이 각각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홍경래와 농민군이 봉기한 이유는 지역차별 없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부패한 정권의 타도를 꿈꾸었다. 난이 성공을 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진인(眞人)이 나타나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정감록의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로, 지배세력의 부정을 넘어 ‘이씨왕조’의 타도까지 꿈꾸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지방차별 타파라는 명분이 전국적인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던 것이다. 보다 더 큰 신분제폐지나 토지개혁, 그리고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집약된 삼정(三政) 문란에 대한 개혁조치가 없었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 난은 세도정치를 타파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장기간의 준비를 거친 민란이었기에 19세기 농민항쟁의 선구적 역할로 평가를 받았다.평안도민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부세제도의 모순은 시정되지 않았다. 철종대에 이르자 불만을 품은 민중의 항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주민란이었다. 홍경래의 난을 경험한 일반농민층은 봉건정부의 강압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대원군 집권기에도 이필제의 난(1871) 등으로 지속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1894년 갑오동학혁명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향토사학자 이상준

2020-03-03

죽음의 문턱에서장기(長䰇)로…

노론의 거두 우암이 장기현을 떠난 지 120년이 지났다. 이제는 남인계열의 핵심인물 한 분이 장기현으로 왔다. 1801년(순조 1) 3월 9일 다산 정약용이 장기로 유배된 것이다. ‘신유박해’라고도 이름 붙여진 천주교 박해사건이 다산으로 하여금 이곳과 인연을 맺게 했다.다산은 1762년(영조38)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다산이 태어난 해인 임오년(壬午年, 1762)은 영조의 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어 임금의 대리청정을 맡아보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해였다. 이 끔찍한 사건으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이 싸움의 연장선상에서 신유옥사(辛酉獄事)도 일어났다.다산은 나이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렸던 그는 큰형수(정약현의 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다산의 큰형수는 초창기 천주교 연구자인 이벽(李檗)의 누님이었다. 그래서 이벽은 누님의 집을 드나들면서 다산 형제와 깊은 교제를 나눴다. 그러다 큰형수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1784년 4월 15일에 형수의 4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다산 형제들이 고향에 모였다. 그곳에 이벽도 찾아왔고 제사를 지낸 뒤 함께 한양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이 배 안에서 정약용은 둘째형 정약전과 함께 이벽이 건네준 서학(西學) 서적을 접하고 천주교에 잠시나마 빠져 들었다.하지만 다산은 이때 이미 벼슬길에 올라있었고,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바쁜 일과를 보내는 터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적힌 다산의 글을 보면 그는 분명히 천주교에 잠깐 관심을 가졌을 뿐이지, 깊이 믿지는 않았던 것 같다.조선 중기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조선사회에서 보면 도리에 한참 어긋나는 사교(邪敎)였다. 성리학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산의 집안은 숙명과도 같이 초기 천주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형수의 동생인 이벽은 조선시대 천주교 초기의 교도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이었다.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다산의 큰 매형이었고, 백서사건으로 처형된 황사영은 다산의 조카사위(정약현의 아들)였다.조마조마하던 찰나에 천주교인들이 조선 양반사회를 뒤흔든 큰 사건이 일어났다. 신해년(辛亥年·1791년)에 전라도 진산 (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다 발각된 것이다. 이른바 ‘분주폐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참형에 처해졌다. 사건의 당사자인 윤지충은 다산의 외사촌이었고, 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사촌이었다. 이때부터 노론 벽파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남인 시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공격의 대상은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이었는데 대부분 남인들이었다.그러던 중 1795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와 북악산 아래에 거주하며 전교(傳敎)활동을 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주신부는 피신하였고, 그를 국내로 맞아들였던 지황(池璜), 윤유일(尹有一), 최인길(崔仁吉)은 체포되어 장살(杖殺)당했다. 이 일로 천주교 문제는 정치권 정면으로 부상했고 노론 벽파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연이은 천주교 관련 사건으로 정조 임금도 이제 더 이상 남인 학자들을 지켜주기가 곤란해졌다. 그해 가을에 이가환을 공조판서에서 충주목사로 좌천시키고, 이승훈은 예산현으로 유배를 보내고, 정약용은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금정 찰방으로 좌천시켰다.이런 와중에 1800년 6월 정조가 갑자기 사망했다. 나이 어린(11세) 순조가 즉위하게 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그녀는 김한구(金漢耈)의 딸로서, 1759년(영조 35년) 정조가 세손으로 세워지던 바로 그 해에 14세의 어린 몸으로 영조의 계비가 되어 궁에 들어온 여자였다. 그녀의 오빠이며 벽파의 우두머리인 김구주는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홍봉한(洪鳳漢)을 축출하려는 상소운동을 일으켰다. 홍봉한은 정조의 외조부이자 시파의 영수였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제는 왕의 미움을 사게 되어 그 해에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감형되어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 김구주는 흑산도에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잠시 풀려났고, 1785년 다시 전라도 나주(羅州)로 유배되어 살던 중 얼마 못되어 숨을 거뒀다. 이렇게 김구주가 비참하게 죽자 그의 여동생인 정순왕후는 정조 재위 24년 동안 임금은 물론 남인 시파 사람들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1800년 11월 하순,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 정순왕후는 시파의 모든 고관들부터 파직시켜버렸다. 이에는 천주교가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801년 1월 11일 정순왕후는 만약 서학을 믿다가 적발되면 코를 배고 멸종시키겠다는 엄금조서를 반포했던 것이다. 부모와 임금을 모시지 않는 천주교는 인륜을 파괴하고 교화에 어긋난다는 구실을 달았지만 실상은 천주교를 빌미로 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이게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긴급명령 쯤 될 것이다.이때 책롱사건( 冊籠事件)이 발생했다. 1801년 2월, 이때 명도회장(明道會長)이었던 정약종(丁若鍾)은 양근(楊根)에서 정순왕후의 긴급명령을 피해 서울로 이사와 있었다. 그는 신변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이 담긴 책 고리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는‘임도마’라는 신도에게 그 고리짝을 지게에 지게하고 나무꾼처럼 보이려고 솔가지로 덮었는데, 솔잎이 너무 적어서 몰래 잡은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의심받아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었다. 책롱 속에는 대 여섯 사람의 문서가 섞여 들어있었다. 그 가운데는 다산의 집 서찰(書札)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사 과정에서 상자의 내용물이 밝혀지자 사건이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관되었고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역적으로 취급되어 심문을 받았다. 다산도 예외 없이 혐의를 뒤집어 쓴 채 1801년 2월 9일 하옥되었다.먼저 권철신·이가환은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중에서 숨을 거뒀고, 2월 26일, 초기 천주교 지도자들인 이승훈·정약종·최필공·홍교만·홍낙민·최창현 등 6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를 당했다.다산은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투옥 된지 19일 만인 27일 밤 이고(二鼓)에 다행히 죽음은 면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 전교(傳敎)를 위하여 청나라에서 건너온 주문모 신부도 모진 고문 끝에 그해 4월 19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종친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사사(賜死)당했다. 이게 이른바 신유사옥이다. 신유옥사라고도 한다.다산은 유배가 결정된 그 다음날 길을 떠나 숭례문에서 남으로 3리에 있는 석우촌(石隅村)이란 마을에서 숙부님과 형님들을 이별하였고, 한강 남쪽에 있는 사평촌(沙坪村: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처자와 이별했다. 그믐날 경기도 안성(죽산), 3월 초하루 가흥(충주시 가금면)에 묵고 초이틀 충주에서 서쪽으로 30 리에 있는 하담(荷潭: 충주시 금가면)의 선영에 들렀다. 계속하여 탄금대를 지나 조령을 넘고 문경과 함창(경북 상주시 함창읍)을 거쳐 3월 9일에야 경상도 장기(長䰇) 땅에 도착했다.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마현리 ‘구석(龜石)골’ 늙은 장교(莊校) ‘성선봉(成善封)’ 집에서 기거를 하였다. 성선봉이 다산을 보호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보수주인이 된 것이다. 성선봉은 장기현의 아전이나 군교로 짐작되고, 그의 집은 현재 장기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이미 예송사건에 휘말린 우암 송시열이 유배객으로 머물다 간 곳이기도 했다.옥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01년 9월 15일 황사영이 중국 북경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려 한 편지가 조정에 압수당한 것이다. 이른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었다. 백서의 내용에 충격을 받은 조정은 천주교인을 반역의 무리로 지목하여 그해 겨울 또 한 번의 옥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그해 10월 20일 정약은 장기에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갔다. 다행이 이번에도 다산은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되어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으로 이배(移配)되어 갔다.유배 첫해인 신유년은 다산의 총 유배기간 18년을 대표하는 한 해였다. 그래서 일까. 다산은 유배기간 동안 234편에 해당하는 537수의 시를 남겼는데, 이중에서 유배 첫해인 신유년(1801)에 남긴 시만 75편 184수에 해당한다. 신유년에 쓰인 이 작품들이 대부분 장기(長䰇)에서 창작된 것이거나 이곳에서 창작하여 후에 다른 곳에 가서 발표한 것들이었다. 장기에서 보낸 유배 첫해가 다산의 전 유배기간을 대표하는 해라고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다산은 처음에는 장기의 풍물들을 시로 묘사하다가 차츰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풍속과 애환을 그리는 데로 나아갔다. 그 속에서 민간의 가난함을 발견하고 가난의 원인이 당시 사회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함을 밝히려 애썼다. 그는 이곳을 고향으로 삼으려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이런 마음은 시와 글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그는 장기에서 시와 저술활동만 한 게 아니었다. 실학자답게 어부들이 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쳐 버리는 것을 보고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 것을 권고했다. 그물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갔다가 사용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는가 하면, 보(洑)를 만들어 물을 가두는 공법을 전수하기도 했다.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의금부도사에게 다시 체포되어 허겁지겁 압송될 때 이곳에서 저술한 기해방례변, 이아술, 촌병혹치 등의 저서가 분실되었다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그가 장기에서 남긴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고시 27수 등 180여수나 되는 시와 그에 내포된 애민사상은 여전히 장기의 정신적 ‘유적’으로 남아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한 향기를 품어내고 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2-25

현감이 되레임지(任地)의 유배인으로…

1788년(정조 12) 10월 말경이었다. 경상도 장기현감으로 있었던 유환보(柳煥輔)가 떠난 지 수개월 만에 다시 장기현으로 되돌아왔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현감이 아니라 유배객의 신분이었다. 관직은 삭탈된 채 ‘탐관오리’란 오명까지 달고 온 그를 보고 사람들은 인과응보가 따로 없다며 수군댔다.사건의 발단은 경상도 장기현에 사는 김성걸(金聖乞)이란 사람의 격쟁(擊錚)에서 비롯됐다. 격쟁이란 조선시대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를 말한다. 조선 전기에 있었던 신문고 제도의 뒤를 이어 이용된 것으로, 16세기 중종·명종 연간에 관행적으로 정착된 제도였다.허나, 격쟁은 합법적인 호소 수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격쟁 사건이 일어나면 일단 격쟁인은 피의자로 간주되어 형조에서 그를 체포하여 갔다. 형조에서는 의례적으로 그에게 곤장을 친 다음, 억울한 내용을 구두로 진술하라고 했다. 격쟁인의 진술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간에 빠짐없이 3일 이내에 국왕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격쟁은 신체적 고통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모르는 하층민들에게는 좋은 구제수단으로 애용되었던 것이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격쟁이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제도의 정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긴 게 ‘4건사(四件事)’라는 것이다. 격쟁인에 대한 처벌문제와 함께 격쟁을 할 수 있는 사유를 4가지로 제한했던 것이다. 그 4가지 사유란 형벌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 부자(父子) 관계를 밝히는 일, 적첩(嫡妾)을 가리는 일, 양천(良賤)을 가리는 일 등이었다. 처벌조항도 만들었다. 만약 격쟁의 내용이 무고(誣告)로 판명될 때는 격쟁인에게 곤장 80대를 가했다. 하지만 이런 제한과 처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격쟁은 더욱 빈발하였다.1744년(영조 20)에는 격쟁할 수 있는 ‘4건사(四件事)’의 내용을 바꾸었다. 즉 자손이 조상를 위하여,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아우가 형을 위하여, 노비가 주인을 위하여 하는 격쟁만 허용되었던 것이다. 함부로 격쟁하는 것에 대한 처벌규정도 한층 강화했다. 상습적으로 격쟁을 일삼는 자는 전가사변(全家徙邊·전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한 형벌)에 처하고, 관리를 무고한 자는 장(杖) 80을 치고, 거짓으로 격쟁한 자는 장 100에 처하는 등의 중벌을 규정하였다.하지만 갖은 통제책에도 불구하고 격쟁이 더욱 늘고 남발되는 추세를 보이자, 1771년(영조 47)에는 창덕궁 남쪽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여 격쟁 대신에 민원(民怨)을 수렴하기도 했다.그렇다면 김성걸에게는 어떠한 억울함이 있었을까? 그 내용은 이랬다. 병오년(1786년)에 경희궁(景熙宮)을 보수할 때였다. 장기에 살고 있던 김성걸은 궁궐 보수에 필요한 뇌록(磊綠) 500두(斗)를 납품한 사실이 있었다. 그 값으로 나라로부터 조(租:벼) 2343석(石)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서 관리들이 다 떼어먹고 자신은 그 값의 1/3 도 안되는 745석만을 받았던 것이다. 현청을 찾아가 따졌으나 모두 나 몰라라 했다. 분통이 터진 그는 1788년 9월 4일 장기에서 860리 떨어진 한양까지 물어물어 올라갔다. 며칠 동안 그는 궁궐 앞에서 징을 치며 없어진 뇌록 값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던 것이다.딱한 사정을 보고받은 임금 정조는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령을 내려 사실을 조사하라고 했다. 조사한 결과 당시 장기현감 유환보가 중간에서 뇌록 값을 착복했음이 밝혀졌다. 유환보는 1785년(정조 9)년 12월 27일 장기현감으로 부임하여 약 1년 6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1787(정조 11)년 5월 23일 흥해군수로 영전하여 간 사람이었다. 그는 흥해군수로 있을 때도 강제로 아전의 곡식을 빼앗고 뻔뻔스레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고 한다.1788년(정조 12) 10월 19일, 임금은 유환보를 잡아다가 전에 그가 현감으로 근무했던 장기현에 물한년((勿限年·햇수의 한정이 없음) 정배를 보내버렸다. 유형은 원래 기한이 없이 종신을 원칙이었지만, 중간에 죄가 감등되거나 단순한 자리 이동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기도 하고 사면으로 형이 풀리기도 하였다. 이런 것을 아예 못하도록 ‘물한년’의 조건을 붙여 그를 유배 보낸 것이다.‘뇌록(磊碌)’은 안료(顔料)의 일종이다. 이 암석은 어린 쑥이 올라올 때의 색보다 조금 더 진한 청록색을 띤다. 장기 ‘뇌록’은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丹靑)에 반드시 필요한 귀중한 자연 광물 착색제였던 것이다. 이게 전국에서 유일하게도 장기에서만 생산되었다. 그래서 장기현감은 뇌록을 조달하는 게 가장 큰 임무였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궁궐 수리에 필요한 뇌록을 빨리 올려 보내지 않았던 장기현감 신률(申嵂)을 파직했다는 기록도 보인다.광물이다 보니 채굴량은 한계가 있었다. 천길 깊은 곳까지 굴을 파고 들어가야 양질의 뇌록이 채취되는 실정이었기에, 매몰사고가 빈발하여 연달아 장정들이 죽어 나갔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깊은 굴을 파내려 가다가 50명이 압사했는데, 지금도 비바람이 칠 때면 귀신이 원통해 우는 소리가 굴 앞에서 난다고 한다. 지역민들은 뇌록을 파내던 이 굴을 ‘매새 구디이(굴)’ 또는 ‘쉰 구디이’라고 부른다. ‘쉰 구디이’라 부르는 것은 채굴하던 인부들이 매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들이 가 보았더니 채굴광 부근에 주인 잃은 ‘초배기(대나무 도시락)’ 쉰 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50명이 죽은 구덩이라는 뜻으로 ‘쉰 구덩이’라고 불러 왔다는 것이다. 그 파낸 굴의 깊이가 하도 깊어 명주실타래 서너 개를 풀어 넣어도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이렇게 목숨 걸고 캐낸 뇌록 값을 현감이 중간에서 착복했으니 그 억울한 심정이 어떠했겠는가.유환보는 파직되어 장기로 유배를 왔지만,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장기현 이방(吏房) 정덕유(鄭德裕)가 타깃이 되었다. 격쟁을 한 김성걸이 일자무식이었던 게 화근이었다. 김성걸이 매일 관가에 나와 뇌록 값을 못 받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내용을 잘 알고 있던 정덕유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대신 글로 적어 줬던 것이다. 형조에서는 정덕유가 어리석은 백성을 종용하여 구관을 모함한 것이라며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당사자인 김성걸도 먼 곳으로 유배를 갔다. 격쟁의 조건으로 정해 놓은 4건사(四件事)에 해당되지 않은 일로 임금을 놀라게 했다는 이유였다.조선 500년 동안 장기현에는 270 명이 넘는 현감들이 부임했다. 그중 선정을 베푼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 관리들은 일부 아전들과 결탁하여 주민들의 삶을 핍박하게 만들었다. 세조 때는 이의돈(李義敦)이란 자가 부임해 왔다. 이 사람은 고을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풀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공물로 거두어 둔 건어(乾魚) 50마리와 녹포(鹿脯:말린 사슴고기) 1속(束)을 대신(大臣)의 집에 뇌물로 바친 일이 들통 나 사헌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탄핵되었다. 선조 때 현감으로 온 정응정(鄭應井)이란 자는 더했다. 인품이 외람된 것은 차치하고, 도임한 이후 재물을 침탈하는 것만 일삼다가 결국 임금에게까지 그 사실이 알려져 파직 당했다. 광해군 때 현감으로 온 신방로(辛邦櫓)란 자도 마찬가지였다. 부임한 후로 백성을 수탈하여 자신을 살찌우는 것만을 일삼아 연해의 잔약한 고을이 날로 형편이 없어지고 있었다. 사헌부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광해군에게 파직을 명하라고 하였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임금은 천천히 결정하겠다며 뒤로 미루었다. 그가 왕실과 어떤 연이 닿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으리란 것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사정이 이렇다보니 암행어사도 여러 차례 다녀갔다. 현종 때는 장기현감 손흠(孫欽)의 비위사실이 암행어사에게 적발되어 추문(推問)을 당했으며, 효종 때는 장기현감 김양국(金樑國)의 범법사실이 적발되어 의금부 나장이 직접 와서 잡아가기도 했다. 숙종때는 암행어사 이언강(李彦綱)이 장기현감 박첨단(朴燂段) 등을 암행감찰하고 그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한 문서도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도 왔다 갔다. 그가 이곳의 실상을 파악하여 임금에게 올린 보고문은 당시 피폐했던 지역의 사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이곳 고을의 힘이 지극히 가난한 까닭은 한양에서 거의 천리나 되고, 또 능력 있고 세력 있는 자는 본래 현감으로 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이처럼 탐관오리들이 제멋대로 평민을 토색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먼 연해고을의 힘없는 백성들은 사는 것이 곧 고난이었다. 비록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한양의 대궐이 높고 멀어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이런 고을의 실상은 신유박해로 이곳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의 글에도 면면히 묘사되어 있다.‘민의창달(民意暢達)’의 기치를 내세운 정조의 애민(愛民)정책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격쟁제도마저도 이곳 민초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후환을 알면서도 이들의 애환을 대변하고 차라리 유배형을 택했던 장기사람 ‘정덕유’ 같은 하급관리가 그들에게는 그 어떤 고관대작들보다 더 우러러 보였을 것이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2020-02-18

정감록(鄭鑑錄)역모사건

1787년(정조 11년)년 5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50대 후반의 여인이 장기로 유배를 와 관비가 되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계우(溪佑)라 했다. 바로 정감록(鄭鑑錄) 역모사건의 연루자로 몰려 효시(梟示)를 당한 유한경(劉漢敬)의 친어머니였다.‘정감록’은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이다. 그 종류도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정작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책은 여러 비기(祕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 ·풍수지리설 ·도교사상 등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즉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도읍 몇 백 년이 이어지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 도읍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는 책이다.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 ·무학(無學) ·토정(土亭) ·격암(格庵) 등의 예언집도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국왕의 심기를 극도로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읽어서도 소지해서도 안 되는 금서였다. 그러나 그런 금압((禁壓))에도 불구하고 필사본의 형태로 전국 각지에 널리 퍼지면서 조선 말기에 각종 반란과 동학 등 신흥종교의 등장을 야기하기도 했다.정조 9년(1785) 3월, 경상도 하동 지리산일대에서 정감록을 사상적 틀로 새 왕조를 꿈꾸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문양해 역모사건’ 또는 ‘홍복영의 옥사사건’이라고 한다. 그 배경에는 정조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다 실각한 홍국영(洪國榮)의 세력들이 있었다.홍국영 일파들이 정조에게 반감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1777년 정조는 자신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숙위소를 설치하고 홍국영을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의 권세가 너무 커지자 1779년 그를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숙위소도 혁파해버렸다. 그러자 그 잔여세력들의 역모 시도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홍국영의 사촌동생인 홍복영(洪福榮) 일파가 또다시 새 정치판을 원하며 역모를 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복영은 측근인 이율(李瑮), 양형(梁衡) 등과 의논해서 문양해 등 이른바 산속에서 술법(術法)을 행하면서 민심을 모으고 있던 도인(道人) 세력들을 끌어 들이고, 이들을 이용해 유언비어로 민심을 동요시켜 새 왕조를 건립하려 했던 것이다.그 본부는 하동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은 삼국 시대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라의 국가제사인 ‘중사(中祀)’를 지내던 곳이었다. 고려 시대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 리(里)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은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라고 하였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도참설의 이상향인 청학동이 하동 지리산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정감록과 같은 비기가 나돌고, 숙종 대 이후 성행하기 시작하는 미륵세상의 갈망에서 본다면, 이런 지리산 청학동은 더 없는 사회변혁 세력의 의지처가 되기에 좋았다.정작 그 청학동의 위치에 대해서는 어떤 이는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현재의 청학동이 그곳이라고 했고, 김일손은 쌍계사 북동쪽 계곡에 있는 불일폭포 부근이라고 했다. 유운룡은 그게 아니고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 있는 세석평전이 그곳이라고 했는가 하면, 하동 악양면 등촌리에 있는 청학이골이 바로 청학동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김종직은 피아골이 바로 그곳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홍복영의 사주를 받은 지사(地師·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를 잡아 주는 사람) 양형(梁衡)은 지리산 일대의 도사들을 다스릴만한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적임자가 친척 조카인 문양해였다. 문양해는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평민이었다.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그는 상당한 도를 닦아 도인(道人)으로 통했다. 1783년 양형은 홍복영으로부터 자금을 받아와 하동의 지리산 쌍계사 골짜기 깊은 곳에 백여 칸의 집부터 지었다. 그 집의 당호를 ‘하천산당(荷川山堂)’이라고 붙이고 이곳에 문양해를 불러와 머무르게 했다.문양해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동조자를 모았다. 그의 아버지 문광겸도 이곳으로 와서 지하본부를 총괄했고, 3촌 문광덕도 주거지를 하동으로 옮겨 약포(藥鋪)를 경영했다. 이들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하는 주형채·오도하 등과 연계를 맺으면서 한양과 지방 각지에서도 동참할 자를 모았다.이에 동참한 사람들은 승려 부류인 유한경·이태수·김명복 및 거사(居士) 출신인 조거사(趙居士) 등이었다. 이들은 ‘지리산 선원(仙苑)의 이인(異人)들’로부터 들은 내용이라며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지리산 이인들’은 지리산의 선원(仙苑)인 하천산당에 은거하면서 선술(仙術)과 술법으로 정감록을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리산 선원의 이인(異人·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은 향악(香嶽)으로 불린 김호(金灝), 징담(澄潭)으로 불린 고경명(高輕明), 노선생(老先生)으로 불린 이현성(李玄晟), 일양자(一陽子)로 불린 모문룡(茅文龍) 등이었다. 문양해는 이 이인들이 ‘정감록’ 같은 예언서에 적힌 내용을 해석해서 주면 이를 중간매개자를 통해 전국에 유포하는 역할을 했다.중인 출신의 양형은 ‘정감록’ 지하조직의 서울지부 책임자였다. 그는 서울의 조직원들에게 향악 선생과 노선생의 말을 전했다. 그 말들은 문양해로부터 전해들은 장차 나라가 어지럽게 된다는 예언들이었다. 더하여 홍복영은 구체적으로 ‘장차 나라가 셋으로 쪼개질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른바 ‘동국삼분지설(東國三分之說)’이다. 조선이 삼국으로 분열될 징조는 산천(山川)과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에 나타나 있었단다. 나라를 셋으로 나눠 가질 영웅들은 강원도 통천의 유(劉)씨, 전라도 영암의 김(金)씨 그리고 정(鄭)씨라 했다. 이중 정씨는 남해의 어느 섬에 숨어 있는데, 때가 되면 전국을 통일하여 나라를 세울 거라고 했다. 정씨가 출현할 시기는 정조 9년(을사년) 3월이 거병시기로 예정돼 있다고 했다. 이는 역성혁명, 즉 이씨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정씨왕조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었다. 문양해는 도당을 불러 모아서 그 날짜를 정하고, 거사할 계획까지 세웠다.그러나 이 사건은 거사계획 단계에서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문양해 등은 1785년 2월 29일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의 고변으로 말미암아 혁명적인 이상국가 건설에 실패하였다. 하늘의 뜻과 산천의 기운으로 무능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사람에 의해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이 사건으로 1785년(정조9) 3월 29일 주모자 문양해는 참형에 처해졌다. 응좌인(應坐人)들도 덩달아 처벌되었는데, 어미 아기(阿只)는 황해도 풍천부(豐川府) 초도(椒島)에 계집종이 되었고, 아우 문금득(文錦得)은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에 종이 되었다. 누이 문복혜(文福惠)는 평안도 운산군(雲山郡)의 계집종이 되었고, 누이 문숙혜(文淑惠)는 양덕현(陽德縣)의 계집종이 되었다. 문인방(文仁邦)·이율(李瑮)은 효시되었다. 문광겸(文光謙)은 지레 겁을 먹고 자살하였고, 주형로(朱炯魯)와 오도하(吳道夏)는 사형을 감하여 귀양 보냈다. 양형(梁衡)은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하동에 있던 홍복영도 사형에 처해졌다.사건의 여파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1786년 2월 11일(정조 10) 유한경·이태수·김명복 및 조거사(趙居士)가 삼수(三水) 인차동(仁遮洞) 이문목(李文穆)의 집에 모여 흉서를 작성하여 퍼뜨리다가 이태수와 유한경이 잡혔다. 국문결과 이들은 문양해 사건의 공범이란 사실이 밝혀져 모두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연좌된 사람은 그 이듬해인 1787년(정조 11) 5월 3일에야 처벌이 이루어졌다. 유한경의 아버지 유계청(劉溪淸)은 연좌되어 교형에 처해졌고, 그의 어머니 계우(溪佑)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와서 노비가 되었던 것이다.유한경은 평안도 안주목에서 태어났고, 이태수는 전라도 순천부 고돌산(古突山)에서 태어났다. 이들이 역모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그들의 고향 고을에도 연대책임을 물어 안주목(安州牧)을 강등하여 안북현(安北縣)으로 삼고, 순천부(順天府)를 강등하여 순천현(順天縣)으로 삼았다.‘정감록’은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과 당파싸움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한 다음에는 정씨가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범씨가 일어나 한 민족을 구원한다’는 게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이었던 것이다.정조 9년에 일어났던 이 홍복영·문양해 역모사건은 정감록을 이용하여 체제 변혁을 시도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2-11

훈련대장 일가의 몰락

능성구씨는 무인(武人)의 명가였다. ‘능성구씨사료집’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총 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진사 144명, 문과 55명, 무과 363명으로 무과 출신이 65%를 차지한다. 따라서 능성구씨는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 권력의 핵심에서 가문의 세를 떨쳤다. 하지만 정조의 즉위 후 10년 만인 1786년 12월 9일, 구선복이 역모죄로 몰려 조카인 구명겸과 함께 죽음을 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문효세자가 죽자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세자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구선복 옥사’가 이 집안을 몰락의 길로 걷게 했다이 옥사의 연좌인으로 1787년(정조 11년) 1월 15일, 구명겸(具明謙)의 첩 아기련(阿只連)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구명겸은 구선복의 조카이기도 하였지만, 마흔 살에 황해도병마절도사라는 중책을 맡은 이래 좌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두루 거치며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는 구선복의 힘이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노론에 속한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 때 그 뒤주의 감시책임을 맡은 포도대장이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사도세자의 뒤주를 마련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그는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조롱하기까지 했으며, 당시 세손이던 정조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세손은 이 모습을 보고 장차 자신이 왕이 되면 반드시 구선복을 징치(懲治)하리라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1792년(정조 16) 윤 4월 27일자 ‘정조실록’의 기록은 정조가 그동안 얼마나 구선복을 증오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조는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자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뒤 끝에 붙은 말을 줄여 버림)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때 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라고 했다. 이는 정조가 그동안 극도의 인내로 복수의 칼을 품고 있었음을 고백한 것이었다.그랬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말자 노론 벽파의 영수 홍인한과 정후겸을 처단했지만, 막상 구선복은 징치하지 못했다. 그것은 구씨 일가가 무시무시한 병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구선복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구선복은 1757년(영조 33) 총융사로서 최초의 군영대장에 오른 이후 1765(영조 41)년에 마침내 훈련대장에 올랐다. 그는 종형이었던 구선행(具善行)과 번갈아가며 병권을 잡아 무반 벌열로서의 위세를 보여주었다. 정조 즉위 이후에는 홍국영과 교대로 훈련대장과 금위대장을 역임하였으며, 홍국영의 실각 이후에도 1786년(정조 10)까지 훈련대장의 직위를 유지했다. 정조가 즉위한 후 10년이 되었지만 그 10년 동안 중간 중간 홍국영이 맡은 3년의 기간을 뺀 7년간은 구선복이 훈련대장을 맡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장들이 그를 ‘무종(武宗)’이라 받들 정도로 그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구선복의 배경도 막강했다. 윗대부터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출신이기도 했지만, 특히 정조 즉위 초 영의정을 역임한 소론의 거두 김상철(金尙喆)과는 사돈지간이었다. 김상철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화완옹주(和緩翁主·영조와 영빈 이씨의 딸)와도 인척간이었다. 화완옹주의 시아버지인 정우량(鄭羽良)의 사위가 바로 김상철이었던 것이다. 그는 소론임에도 노론벽파인 정후겸·김귀주·홍인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인물이었다. 구선복도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기에 정조는 즉위하고도 10여년간은 강력한 그의 힘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이런 구선복은 훈련도감에서 궁중으로 파견한 하리(下吏)들을 통해 조정 대소사를 일일이 보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오라버니인 좌의정 홍낙성을 빈연(賓筵·손님을 위해 베푸는 잔치)에서 업신여길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 그래서 정조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선복 일당을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드디어 정조에게 기회가 왔다. 도승지 홍국영이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정조 초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원빈)으로 들이기도 하면서 엄청난 권세를 부렸다. 그런데 원빈이 후사 없이 일찍 죽어버리자 홍국영은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장차 왕이 될 세자로 삼으려고 했다. 홍국영은 이 일로 정조의 미움을 사 축출되었다.그런 일이 있은 후 정조와 의빈성씨(宜嬪成氏) 사이에 문효세자가 태어났다. 당시 의빈은 후궁이 아닌 궁녀였기 때문에 정조는 문효세자를 원자로 정하기를 주저했으나, 소론의 요구로 결국 생후 3개월 만에 원자로 삼았다. 1784년 7월, 정조는 태어난 지 만 22개월짜리 원자를 세자로 책봉했다.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 책봉에 해당한다. 하지만 왕세자로 책봉됐던 문효세자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786년 6월 6일 홍역으로 죽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의빈성씨도 같은 해 9월, 출산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의빈성씨의 죽음을 두고 조정에서는 홍국영이 상계군 담의 일파와 짜고 그녀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상계군을 공석이 된 세자자리에 앉히려는 역모가 있다는 것이다. 상계군은 은언군(恩彦君) 인(4104)의 아들이었다. 은언군은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사도세자)의 서장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는 이 의혹을 공식화하는 언문전교까지 내렸다. 그녀는 반드시 역적을 찾아내어 처단해야 한다며 정조를 압박했다. 실제 정순왕후의 하교는 은언군을 노린 것이었다. 정조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생인 은언군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할 작정이었다. 그래야만 혹 정조가 후손을 낳지 못할 때 자신들이 마음대로 왕의 자리를 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하지만 일은 정순왕후의 의도와는 영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정조는 이 사태를 구선복일가를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의심의 핵심에 있던 상계군 담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이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진 상계군의 외할아버지 송낙휴(宋樂休)는 김상철과 구이겸(具以謙)이 역모에 연관되어 있다는 고변을 했다. 즉 상계군이 죽기 전에 자신에게 고백을 한 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구선복, 구명겸 등이 짜고 상계군을 세자로 앉히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김상철은 구선복의 사돈이었고, 구이겸은 구선복의 양아들이었다.급기야 역모죄를 수사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고 중심인물인 구선복이 잡혀왔다. 구선복은 처음에는 자신을 몰아내려는 음모라며 결백을 주장하다가 장언회(張彦恢)와 대질하자 결국에는 승복을 했다. 1년 전에 있었던 홍복영과 문양해의 역모사건에 자신과 구명겸 등이 관여하여 정조를 죽이고 상계군 담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반정(反正)을 추진하다 그만 두었다고 실토를 한 것이다.1786년(정조10) 12월 9일, 정조는 구선복을 최고의 형벌인 능지처사에 처했다. 구명겸에 대해서는 남문(南門) 밖에 삼군(三軍)을 크게 모아 놓고 조리를 돌린 뒤에 목을 베어 매달아 효수(梟首)하였다. 구이겸은 그 다음해인 1787년 1월 9일 의금부도사를 과천현에 보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연좌인들에 대한 처벌도 있었다. 1787년 1월 15일, 구명겸의 가족과 처첩들은 전부 노비가 되었다. 처(妻) 정임(丁任)은 전라도 흥양현 발도, 첩(妾) 아기련(阿只連)은 경상도 장기현, 첩 아기(阿只)는 함경도 부령부, 첩 희안(喜安)은 길주목, 며느리 유임(有任)은 전라도 해남현, 서모(庶母) 함봉(咸鳳)은 함경도 이성현, 서모(庶母) 매선(梅善)은 경상도 하동부, 서녀(庶女) 순임(順任)은 전라도 흥덕현, 서녀(庶女) 희임(喜任)은 보성군, 손녀 소숙(小淑)은 평안도 희천군, 손녀 정숙(貞淑)은 영원군의 노비가 되었다. 그해 갓 태어난 손자는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의 노비가 되었다.이 사건 이후 정조는 국왕을 음해하여 반정의 기운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음을 신하들에게 토로하면서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정조는 “병오년에 이르러서야 국법에 의해 처단되었는데 시신을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 어찌 이 역적에게 법을 충분히 적용했다고 하겠는가. 사실은 살점을 씹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았었다.” 고 했다. 또 재위 16년 5월에 다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역적 구선복의 일은, 그의 극도로 흉악함을 어찌 하루라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 스스로 천주(天誅:하늘의 주벌)를 범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죽였던 것이다”고 했다. 부친을 죽음으로 몬 인물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하지 않고 스스로 법망에 걸린 후 처벌했다는 뜻이다.결국 정순왕후가 정조의 동생 은언군을 죽이기 위해 시작된 언문전교 사건은 노론의 노련한 장수 구선복 일가를 몰락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다. 노론이 밀고 있던 정순황후측은 군부 한 축이 무너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대반전으로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정조는 오군영의 대표인 훈련도감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친위 군영인 장용영(壯勇營) 창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2-04

충효의 고장에 ‘호래자식’이 웬 말

강상죄(綱常罪)는 삼강과 오상의 도덕을 해친 범죄를 말한다. 삼강오상은 현대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이다.조선시대는 유교 윤리가 통치의 근간 이념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그래서 불효죄는 본인을 처형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살던 고을 읍호가 강등되고 관할 수령은 파직되는 경우도 허다했다.1751년(영조 27년) 9월경에 충남 예산에 살고 있던 박우천((朴右天)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는데, 그 죄목이 바로 ‘불효죄’였다. 박우천이 그의 어미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상이란 먼 곳에서 어버이의 죽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달려오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상례(喪禮)에서 분상은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그래서 분상하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편의를 보아주는 것이 통례였지만, 상주가 이 절차를 어길 때는 가차 없는 처벌이 내려졌다.통상적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은 1~2년이면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관례적이었는데, 박우천은 어찌된 영문인지 유배가 풀리지 않았다. 그가 장기로 온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박우천을 관리하던 장기현감이 그의 고향인 오산(烏山·현재 충남 예산) 현감에게 공문을 보내 사실조회를 했다. 그가 도대체 어떤 모진 죄를 저질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수개월 후 오산현감이 답장을 보내왔다. 우선 공부상에 적힌 범죄사실로는 강상죄의 구성요건이 충분했다. 이 사건의 당초 고발자는 박우천의 외삼촌인 김선의였다. 김선의는 나이가 많은데도 자식이 없었다. 게다가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어서 박우천에게 얹혀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었다. 김선의는 노망(老妄)이 들어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조금만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좌수어른이나 관가에 고발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래도 박우천은 그의 생질인 까닭에 감히 다투거나 따지지도 못하고 매번 순종하여 그의 청을 받아주었다고 한다.그런데, 신미년(1751, 영조27)에 이르러 김선의가 박우천에게 돈 10냥을 달라고 해서 줬더니 그 돈을 생활비에 쓰지 않고 그의 처족(妻族)에게 줘버렸다. 박우천이 이 사실을 알고 그 돈을 돌려달라고 누차 말하였는데도 김선의는 돌려주지 않았다. 박우천과 김선의는 모두 성격이 날카롭고 표독한 사람들이었다. 둘은 이 문제로 술을 마시고 다투며 따지다가 술에 취한 김선의가 홧김에 관아에 박우천을 고발해버렸다. 김선의는 자신의 생질인 박우천이 그 어미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고 또 약간의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러운 오물을 자신의 입속에 채워 넣었다는 것이었다. 실제 고발하러 온 김선의의 입에는 오물이 칠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감이 봤을 때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미의 상(喪)에 분상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외삼촌을 구타하고 입에 오물까지 처넣었으니 천하에 이런 호래자식이 없다고 생각했다. 광패한 박우천의 행위에 매우 놀란 현감은 전라감영에 보고하여 그를 섬에 유배하기로 조율(照律)을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것이 이제까지 인정된 사실이었다.장기현감의 사실조회 요청에 따라 현임 오산현감은 신사년(1761, 영조 37년) 9월 초3일, 박우천의 10년 전 죄상을 물어보기 위해 그의 고향인 현내면 연지동(蓮池洞)의 좌상(座上) 윤취번(尹就幡)과 유사(有司) 배악불이(裵惡不伊), 그리고 박우천의 인척인 송인철을 불러 위에서 밝힌 인정사실이 틀림없는지 다시 조사를 했다.그런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참고인들로 불려나온 동네사람들의 진술은 공부상에 적힌 위의 내용과는 좀 달랐다. 오물을 김선의의 입속에 채울 때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기에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으나, 모친상에 그가 분상하지 않았다는 일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당시 박우천은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던 사령(使令)으로 있었는데, 관가의 심부름이 없는 날이면 관문(官門)에서 오래 지냈고 애당초 멀리 나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어미의 병이 여러 달 낫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는데, 그때 박우천이 분명히 분상을 했다는 것이다. 발상(發喪)할 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가서 조문하였으며 행상(行喪)할 때에도 동네 사람들이 모두 상여를 메고 갔기 때문에 박우천이 상여를 뒤따라가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했다. 그 뒤에 박우천이 장사하러 다른 곳에 나갔다가 여러 달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사실이 있었는데, 김선의가 이것을 분상(奔喪)하지 않은 것으로 허위 고발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박우천이 멀리 장기현으로 귀양을 간 사실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애매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진술했다.김선의의 생질 송인철도 김선의는 외삼촌이고 박우천은 이종(姨從)간이 되지만, 어느 쪽도 두둔할 필요가 없다면서 본리(本里) 좌상과 유사의 진술내용이 사실과 다름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사실이 이러하다면, 10년 전에 내려진 박우천에 대한 유3천리의 판결은 사실인정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책임 있는 관리였다면 그 판결의 당부(當否)를 다시 심리하는 비상수단적인 구제방법을 거쳐 그를 즉시 해배시켜야 할 것이지만, 장기현감은 위와 같은 답변을 통보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앉았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782년(정조 6년) 12월 6일 유배인들의 처리에 관한 형조의 문서에도 박우천은 여전히 장기현의 유배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정통 유학이 깊이 뿌리 내린 장기현은 “충효의 본고장”이라할 만큼 충효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장기면 양포리의 장인풍(張仁豊), 임중리의 김사민(金士敏), 산서리의 최학진(崔鶴振)과 김시상(金時相), 정천리의 김윤찬(金潤瓚), 금곡리의 허기(許琦), 대곡리의 박춘무의 처 김해김씨 등 조선시대 효와 열의 행적들이 정효각, 효자각, 열녀각과 함께 남아있다.효자·열녀각에 얽힌 사연들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산서리 김시상의 효행은 효자비에 전하는 비문 뿐 아니라 ‘효행전(孝行傳)’이라는 서사적 구조를 갖춘 문헌설화까지 전해온다. 김시상은 영조 때 인물로 8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소년가장이 된 시상은 집안이 가난하여 시장에 나무를 해다 팔아서 식량을 구해 어머니를 봉양해 왔다. 하루는 장터에 갔다가 어머니에게 드릴 고기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솔개가 날아와 고기를 빼앗아 갔다. 난감해진 시상은 고기를 다시 사려고 했지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머니의 밥상에 난데없는 고기가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시상이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까 솔개 한 마리가 문 앞에 날아와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갔기에 자세히 보니 그게 고기였다고 했다. 그 묶은 끈을 확인한 결과 시상이 낮에 시장에서 산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 밥상의 반찬이 허술하고 아들의 걸음이 늦음을 하늘이 알고 솔개를 보내 먼저 고기를 집으로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언젠가 시상의 어머니에게 안질이 생겨 실명위기에 놓였다. 시상은 집 뒤에 정화수를 떠놓고 꿇어앉아 저녁마다 북두칠성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하늘도 감응을 받았는지 어머니의 눈이 다시 밝아졌다. 어머니의 연세가 일흔이 되었을 때였다. 병석에 누워 신음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숨을 거두려하자 시상은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하늘에 축원을 하면서 어머니 입에 드리우니 피가 목에 넘어가며 다시 회생하였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5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어머니의 상을 치른 후 시상이 하루는 성묘를 가는데 산처럼 큰 호랑이가 길목에 버티고 앉아 길을 막고 있었다. 시상이 호랑이를 꾸짖어 “너는 산중 영물이요 나는 인간죄인이라, 가는 길이 각각 다른데 어찌하여 어버이 보려고 가는 자식 앞을 막고 앉았는고? 빨리 산으로 가거라” 하니 호랑이가 물러갔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이런 효자를 나라에서도 알고 영조 23년(1747)에 효자각을 건립하게 하였다고 한다.장기 금곡리에는 ‘삼효각(三孝閣)’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이곳에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한 허기(許琦)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나이 18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묘소 옆에 움막을 치고 기거를 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 어머니에게도 예를 다하고 공손하게 대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 했다. 그는 나이가 어려 상을 당했던 관계로 아버지의 묘 터를 잘 골라 쓰지 못하였던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뒤늦게 좋은 명당 터를 찾아 이장을 한 다음 제사를 드렸더니 이상하게도 술잔에 부어두었던 술 3잔이 모두 말라 없어지는 게 아닌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아버지 제삿날 제사를 지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시와 똑 같이 제상에 앉아 있어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놀란 일이 있었다 한다.허기에게는 허식(許湜)과 허온(許溫)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허식은 장가 간지 8년 만에 불행하게도 세상을 떴다. 허식의 처 곡강 최씨(曲江 崔氏)는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정성을 다 했다. 시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한 달이 넘도록 자리에 눕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변을 손수 받아 처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시어머니의 추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허온의 처인 월성 최씨(月城 崔氏) 역시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허씨 가문에 시집 온 뒤에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했다. 시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직접 변을 받아내기도 하고, 또 변의 맛을 보아가면서까지 병환의 상태를 점검하며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했다.어느 해 겨울, 찬바람이 불고 눈이 하얗게 쌓인 날이었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최씨는 무작정 길을 나섰으나 고기를 팔러 다니는 상인이 없어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홀연히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 도로변에 앉았다. 최씨가 쫓아가서 손으로 잡아 그것으로 시아버지의 저녁 반찬을 해드린 일이 있었다.이런 허기와 그 두 며느리의 효행은 금방 고을전체에 퍼졌다. 이에 조선 순조 때 도내의 유림(儒林)들이 연명하여 경상감사와 예조에 장계를 올렸더니 왕께서도 감명을 받고 정려(旌閭)를 내렸다.‘반면교사’란 말이 있다. 부정적인 것을 보고 긍정적으로 개선할 때, 그 부정적인 것을 반면교사라고 하였다. 장기에 효자와 효부가 많은 이유는 애당초 유현(儒賢)의 고을로 예절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던 점도 있었지만, 강상죄로 인해 장기로 유배를 오는 여러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1-28

영화 역린(逆鱗)의 주인공들

‘정조시해 미수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 정유역변은 1777년 정유년에 있었던 반역 사건을 일컫는다. 홍지해(洪趾海)를 귀양 보낸 정조에게 불만을 품은 그의 아들 홍상범이 주축이 되어 정조를 시해하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 사건이다.이 사건 역시 경상도 장기현을 비껴나갈 수는 없었다.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될 무렵 홍상범의 처 정희순(鄭喜順)이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유배를 와 관노가 되었던 것이다. 한때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누렸던 ‘역린(逆鱗)’은 자객이 왕의 거처인 경희궁 존현각에 침투했던 이 실화를 배경으로 픽션을 곁들여 만들어진 것이다.사건의 기원은 홍상범의 할아버지인 홍계희(洪啓禧)에게서 비롯된다. 홍계희 부인은 영조 때 노론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상로의 조카였다. 때문에 홍계희는 1762년 임오화변 때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홍인한과 처삼촌인 김상로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 중 한 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도 홍계희는 각 조의 판서 등을 두루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운 좋게도 정조가 즉위하기 5년 전인 1771년(영조 47)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까지 제수하였다.홍계희에게는 형조판서를 지낸 홍지해,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홍술해, 지제교를 지낸 홍경해, 선공감 감역을 지낸 홍염해, 진사 홍찬해 등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들 뿐 아니라 홍상간을 비롯한 손자들까지도 모두 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집안의 자손들은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노선을 따라 홍인한·정후겸 등과 더불어 정조의 즉위를 극구 반대하는 무리에 앞장섰다. 이게 집안의 화를 불러왔다.1776년, 25세의 나이에 정조가 즉위했다. 즉위하자말자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했다. 이무렵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재직 중이던 윤약연(尹若淵)이 임금의 하교에 따라 홍인한 일당의 상소들을 검토하게 되었는데, 이때 윤약연은 대역죄인으로 판정되었던 홍인한의 편을 들어 그를 충신으로 묘사해서 임금에게 보고를 올렸다. 정조는 이를 보고 진노하여 ‘대역죄인을 비호한다’는 죄목으로 절도(絶島)에 유배보내 버렸다. 이들 무리와 같이 사사건건 정조를 비방했던 홍상간도 ‘왕권에 도전했다’는 혐의로 잡혀와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홍상간의 아버지 홍지해도 아들 사건에 연관되어 국문을 받고 귀양을 갔다. 홍상간의 삼촌이자 홍지해의 동생인 홍찬해는 흑산도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뿐만 아니었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홍술해에게는 장전(臟錢 옳지 못한 짓으로 얻은 돈) 4만 냥에 대한 혐의와 조(租) 2500석, 소나무 260주를 개인적으로 빼돌린 혐의를 적용해 흑산도에 위리안치시켜버렸다. 그야말로 정조의 반대편에 섰던 남양 홍씨 일가는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이에 홍계희의 후손들은 정조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이 일에 홍지해의 아들 홍상범이 앞장섰다. 그는 천민출신 장사꾼 전흥문(田興文)을 포섭했다. 전흥문은 궁성호위군관 강용휘를 끌어들여 20여 명의 무사들을 준비했다.1777년 7월 28일, 드디어 홍상범은 암살단을 궁중에 침투시켜 정조를 살해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궁중별감 강계창(강용휘의 조카)과 궁중 나인 강월혜(강용휘의 딸)의 길 안내로 정조가 머물고 있는 경희궁 존현각까지 별 어려움 없이 당도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강용휘와 전흥문은 존현각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잠든 정조를 살해하는 게 그들의 최종목표였다.그러나 존현각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하나씩 들어내는 순간, 때마침 독서 중이던 정조가 수상한 기척을 감지했다. 정조가 호위내관들을 불렀지만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객들은 낌새를 채고 달아났다. 호위병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 보니 기와가 뜯겨지고 자갈·모래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숙위(宿衛 경호) 군사가 대궐 담장과 금중(禁中 궁궐) 수색에 나섰으나 어두운 밤이었고 수풀이 무성해 범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이튿날 새벽, 정조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대신들에게 경비가 허술함을 꾸짖으면서 비상 경호 대책을 수립하게 했다. 위장(衛將)이 하룻밤에 다섯 교대로 순찰하던 옛 제도를 부활시키고 내시부에 속한 하인들 중에서 근본이 불분명한 인물들을 교체했다. 범인을 잡기 위해 엿새 동안 도성문을 닫고 수색하였으나 끝내 범인들을 잡지 못했다.정조는 존현각이 너무 노출돼 있어 경비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속명의록. 이 책은 정조 즉위초 홍상범(洪相範) 등의 역모사건을 1777년 7월부터 1778년 2월까지 순차적으로 사건의 처결사항을 상술(詳述)한 다음 정신(庭臣)들의 이에 대한 의견을 적은 것이다. 당시 정조의 즉위를 둘러싼 왕실과 외척 사이의 암투와 그 실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1777년 8월 11일 밤이었다. 정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지 닷새가 지난 시점이었다. 수포군(守鋪軍)이 잠든 것을 확인한 한 무리가 창덕궁 서문(경추문) 북쪽 담장을 넘으려다가 마침 문을 지키던 군사 김춘득(金春得) 등에게 붙잡혔다. 특별경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대담하게 다시 대궐 담을 넘던 사람은 바로 십 수 일 전 존현각으로 침입했던 그 전흥문이었다.정조가 전흥문을 친국한 결과 그 배후가 드러났다. 바로 홍상범이 주범이었고, 그 뒤에는 흑산도에 유배가 있던 아버지 홍술해가 있었다. 홍술해의 종 최세복이 서울과 흑산도를 오가며 홍술해의 지시를 전달했던 것이다. 이들은 최세복을 배설방 고지기로 삼아 도승지 홍국영을 제거하고 정조까지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배설방은 궁중 행사 때 여러가지 기구를 설치하는 관청으로 배설방 고지기는 궁궐 편전(便殿) 앞 차비문(差備門)까지 드나들 수 있었다. 이때 기회를 봐서 자객들이 정조를 시해하기로 작전을 짰던 것이다.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집안의 또 다른 추가 역모사실이 함께 발각되었다. 홍상범의 어머니인 이효임(李孝任·홍술해의 부인)이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녀 점방(占房)과 그 무녀의 남편 김흥조를 끌어들여 정조와 홍국영을 대상으로 ‘저주의 굿판’을 벌였던 것이다. 이효임은 홍술해가 귀양갈 때 부적(符籍)을 베개 속에 넣어 보낼 정도로 무속을 신봉했다고 한다.효임의 의뢰를 받은 무녀는 오방(五方)의 우물물과 홍국영의 집 우물물을 구해 홍술해 집 우물물과 섞어 한 그릇으로 만든 다음, 그 물을 홍술해의 우물에 쏟았다. 홍국영의 기를 빼앗고자 함이었다. 홍국영이 대상이 된 이유는 홍국영이 정조를 목숨을 걸고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녀 점방은 붉은 안료(朱砂)로 정조와 홍국영의 화상(畵像)을 그렸다. 이들은 쑥대화살에 그 두 화상을 얽어매고 공중에 쏘면서 둘은 반드시 죽는다고 저주했다. 홍국영의 집에는 저주의 부적까지 만들어 붙였다.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들과 연관된 또 다른 사실이 발각되었던 것이다. 홍계희의 8촌에 해당하는 홍계능(洪啓能)이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과 모의하여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자와 경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전군 이찬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홍상길은 예문관 청지기 이기동(李奇同)의 친족 나인인 궁비(宮婢) 이영단(李永丹)을 시켜 한밤중에 정조의 침실에 들어가 살해하려고 계획했다. 여기에는 내시 안국래(安國來)도 관련됐다. 국왕의 호위군관부터 궁중의 나인·내시까지 임금을 보호해야 하는 모든 직책의 궁인이 연루된 사건이었다.이런 홍계희 후손들의 역모사건은 한 달간 국문을 한 결과 정리가 되었다. 1777년 8월 14일, 홍상범은 광진(廣津)에서 책형(磔刑)으로 처단되었다. 책형은 시체를 저자에서 찢어 죽이는 형벌로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홍계능도 주모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홍필해는 장형을 맞아 죽고, 유배지에서 이를 배후 조종한 홍술해·홍지해·홍찬해 형제 등은 능지처사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홍씨 가문으로 처형된 주동자가 23명이나 된다고 한다. 은전군 이찬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미 죽고 없는 홍상범의 할아버지 홍계희도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이들의 가족과 친척들도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는데, 이때 홍상범의 처 정희순이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장기현(長䰇縣)의 노비가 되었다.한편, 이 사건으로 희순이 장기현으로 옴으로 인해 이 가문은 2대에 걸쳐 장기현에 유배당하는 기이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아시다시피, 임오화변 때 홍문관 교리로 있던 홍지해가 화를 입고 1762년 윤 5월 14일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사실이 있었다. 홍지해는 바로 희순의 시아버지였다. 불행하게도 희순은 장기에 도착한 이튿날 자살하였다. 어제까지 양반집 젊은 규수로 있다가 극변(極邊) 연해(沿海)고을의 관노비로 전락했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겠는가. 희순은 동래 정씨이고 1748년(甲戌)생이라고 한다. 장기에 유배올 당시 그녀의 나이는 29세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좌의정 정존겸(鄭存謙)의 친딸이라는 것이다. 정존겸은 1776년(정조 즉위년) 시파(時派)로서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사건 당시에는 좌의정으로 있었다. 아버지가 현직 좌의정이었지만 딸이 역적의 연좌인으로 몰려 노비로 전락되고, 유배지에서 자결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908년(융희2년) 9월에 전라북도 장수군 수남면 용계리에 살고 있던 홍술해의 6대손은 정유역변에 희생된 정희순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각사등록(各司謄錄)에 실린 이 청원서를 읽어보면 파란만장했던 이 집안의 삶이 마치 한편의 영화인 양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가 사라진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1-21

정적(政敵)은 또 정적을 낳고…

1776년 3월, 영조가 세상을 떠났다.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지 석 달 만이었다. 이제 세손이었던 정조가 마침내 스물다섯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정조가 왕위에 오른 첫날, 그는 여러 대신들 앞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했다. 편전에 도열해 있던 신하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조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앞으로 20년 동안 사도세자를 언급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역모죄로 다스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히고 정국을 시작한 것이다.조정은 아직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세손의 즉위를 결사적으로 막은 무리였다. 때문에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해놓은 상태였다. 그런 세손이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세자 시절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노론 벽파에 대해 처벌할 뜻을 비쳤으니, 다들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정조의 정적(政敵)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홍인한(洪麟漢)이었다. 홍인한은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의 이복동생이었지만, 세손의 외종조부가 되는 것을 미끼로 안으로는 정후겸(鄭厚謙) 모자와 밖으로는 윤양후(尹養厚)·홍지해(洪趾海) 등과 결탁하여 위세를 부렸다. 형인 홍봉한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는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으나 결국에는 정조를 도우려는 시파로 돌아왔지만, 작은 외할아버지인 홍인한은 세손의 즉위를 목숨 걸고 반대하는 노론 벽파의 영수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정조는 그런 홍인한부터 고금도에 위리안치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다.정후겸도 화를 피해가진 못했다. 정후겸은 본래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 출신이었으나, 영조의 서녀(庶女) 화완옹주(和緩翁主: 정치달의 처)의 양자가 되면서부터 궁궐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16세로 장원봉사(掌苑奉事)가 되고, 1767년(영조 43) 수찬에 올랐다. 이어 부교리·지평을 역임하고 1768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호조참판·공조참판을 지냈다. 성격이 매우 교활하고 간사하였다고 한다. 그는 영조를 등에 업고 당시 세도가였던 홍인한과 더불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다가 세손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이를 극력 반대했다. 동궁에 사인을 비밀리에 보내 세손의 언동을 살피게 하였고, 세손이 금주령(禁酒令) 중인데도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여기에는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화완옹주도 한몫을 했다. 정후겸의 양어머니인 화완옹주는 과거 사도세자의 비행과 실수를 그대로 부왕 영조에게 고해바쳐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하는데 일조를 한 인물이었다.정조는 그런 정후겸을 경원에 위리안치시켰다가 사사시켰고, 화완옹주도 옹주 작위를 박탈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사가로 내쫓았다.그 다음 척결대상은 숙의문씨(淑儀文氏) 자매와 김상로였다.숙의문씨는 원래 효장세자(진종)의 부인 효순왕후(孝純王后·영조의 첫째아들인 효장세자의 비)의 궁인으로 있었는데, 1751년 음력 11월, 효순왕후가 사망하자 그 빈전을 찾았던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承恩)을 입었다고 한다. 이후 문씨는 영조와의 사이에 화령옹주를 낳고 정4품 소원에 책봉되었다. 당시 영조는 승지에게 문씨의 후궁 교지에 어보를 찍으라고 하였는데, 승지 윤광의가 이를 거절하자 다른 승지를 시켜 어보를 찍게 할 정도로 그녀를 아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문씨는 화길옹주를 낳았고, 종2품의 숙의(淑儀)로 진봉되었다.이런 숙의문씨에게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녀는 1749년부터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하였다. 그녀에게는 문성국(文聖國)이란 친정오빠가 있었다. 그녀는 오빠 및 노론 세력과 결탁하여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이간질시키는데 혈안이 됐다. 이들은 영조에게 사도세자가 ‘침소에 문안도 제때 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찬을 살피는 일도 제때에 하지 않고, 심하게는 인명을 살해하고 여색을 지나치게 탐한다’ 고 일러바쳤다. 영조는 이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사도세자를 내쳤다. 결국 이들 형제들이 김상로와 같이 사도세자를 모략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들이었다.정조가 이들을 가만둘 리 없었다. 1776년 3월 30일, 정조는 숙위문씨의 작위를 박탈하고, 저자도(뚝섬)에 위리안치시켰다. 이날 이후 숙위문씨는 ‘문녀(文女)’라 하여 격하된 호칭으로 기록되어졌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1776년 8월 10일, 문녀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위문씨의 어머니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노비로 삼았다. 문녀의 동생 문성국에게도 역률(逆律)을 적용했다.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 노비로 격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문성국은 그 다음날 부인과 함께 집에서 자살해버렸다. 그의 가족들은 연좌되어 노비로 전락하였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이때 문성국의 아들인 문경환(文景煥)이 연좌되어 경상도 장기(長䰇)로 왔다. 그게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1일이었다.정조가 등극했을 때 김상로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래도 정조는 김상로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명하였다. 그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시켰으므로 만고의 역적이라는 것이었다. 1762년 임오화변 때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왕의 동조를 얻었다. 그러나 후일 영조는 세손에게 남긴 글 등에서 ‘너의 아비를 죽이게 한 것은 아무래도 김상로다. 그 자야 말로 바로 너의 원수다’라고 지목할 정도로 그때의 일을 후회하면서 그를 청주에 유배보낸 적도 있었다.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유언처럼 남긴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4일, 김상로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아내와 네 명의 자식들을 모두 관노로 삼게 했다. 이때 김상로의 며느리 효임(孝任)과 손녀 김주옥(金珠玉)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와서 노비가 되었다.이 무렵 불꽃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공세에 나섰던 소론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정조가 노론 벽파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얼마 남아있지 않았던 소론 시파들은 고무되었다. 이들은 일부 온건 남인과 뜻을 같이하며 사도세자를 동정하던 무리였다.소론은 정조가 즉위하자 즉시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고 나왔다. 상소는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1일 시골 유생 이일화(李一和) 명의로 올라왔다. 내용은 임오화변에 이르게 한 해당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재한(趙載翰)이 사주를 한 것이었다.영조 때 승지와 대사간을 역임한 조재한은 소론으로 우의정을 지낸 조현명의 아들이자 조재호(趙載浩)의 조카였다. 아시다시피 조재호는 효순왕후의 오빠였다.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부여)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 은거하였다. 1762년 임오화변 때 사도세자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오히려 홍봉한 등에 의해 역모로 몰려 종성으로 유배, 사사된 인물이었다. 그는 죽었지만 조카 조재한이 배후에서 소론 시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일화의 상소에 뒤이어 전 승지 이덕사(李德師)와 전 사간원 정언 유한신(柳翰申)이 똑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때까지 명맥을 유지해왔던 소론들의 조직적인 공세였다.이에 대해 정조의 태도는 뜻밖이었다. 오히려 이들의 행위에 대해 ‘어리석은 짓 아니면 미치광이 짓’이라며 크게 화를 냈다. 급기야 국청이 설치되었다. 잡혀온 조재한이 ‘이일화의 상소를 내가 사주했다’고 자백하자 정조는 그를 참형에 처했다. 이어서 이덕사, 유한신도 참수되었다. 이들의 죄목은 사도세자에 대한 언급을 할 시는 대역부도죄로 처단하라는 영조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6일, 조재한의 연좌인으로 그의 조카 조상특(趙尙特)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와 안치되었다.정조가 이런 조치를 내린데는 소론의 성급한 공세가 원인이었다. 겨우 즉위에는 성공했지만 정조의 왕권은 아직 노론에 맞서기에는 크게 미약했다. 게다가 정조뿐 아니라 소론도 사도세자 문제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사도세자 비극의 정점에 영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려면 뒤주에 넣어 죽게 한 영조의 처분이 잘못된 처사란 것을 선언해야 하는데, 이 경우는 노론이 들고일어날게 분명했다. 이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의 태생적 모순이었던 것이다.이 무렵에 들어오면서부터 동해안 땅 끝 고을 장기현의 실상은 참담했다. 바닷가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배가 뒤집혀 사람들이 빠져 죽기도 했고, 흉년이 연달아 들었다. 나라에서는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해 휼전(恤典)을 베풀기도 했다. 흉년에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숱한 사람들이 기근과 역병으로 죽어나가자 당시 장기현감이 군작미(軍作米)를 풀어 백성들에게 조곡(助穀)으로 내어 줬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오히려 벌을 받기도 했고, 감독기관인 경상감사가 파직되기도 했다.이런 사정인데도 경상도 장기현으로 배정되는 유배인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지역의 열악한 살림으로는 넘쳐나는 유배인들을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유배인과 지역민이 다 같이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세월이 8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급기야 조정에서도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유배인들을 분산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8년간 노비로 있던 숙의문씨의 조카 문경환은 1784년(정조8) 3월 2일, 살림이 좀 더 넉넉한 도내의 다른 현(縣)으로 이배되어 떠나갔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1-14

패초(牌招)를 어긴 죄

폐초(牌招)는 조선시대 임금이 비상사태나 야간에 급히 주요 관원들을 궁궐로 불러들이는 것을 말한다. 도구는 명패(命牌)를 사용하는데, 그 모양새는 둥근 나무판에 붉은 색칠이 되어 있었다. 그 한 면에는 ‘명(命)’자가 씌어 있고 다른 면에는 대상 관원의 관직과 이름, 도착해야할 연,월,일이 적혀 있다. 뒷면에는 임금의 수결(手決)이 찍혀 있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 명패를 내리면, 승정원관리는 이를 받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승정원에 보관하고 다른 한쪽은 부름을 받은 신하에게 보냈다.이 패는 왕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패초를 받으면 지정된 시간 내에 입궐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수양대군이 패초를 사용해 당시 재상인 황보 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영양위(정종) 궁으로 불러 살해한 것은 유명하다.대전회통의 규정에 의하면, 관원이 명패를 받으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궁궐까지 와서 그 명패를 봉납해야 했다. 단 대신(大臣)은 제외된다고 되어 있다. 이를 어긴 자는 2품 이상이면 엄중히 추단하고, 정3품 통정대부 이하이면 의금부에서 추단하여 파직한다. 또 명패를 망가뜨린 자는 곤장 90대를 치고 도(徒) 2년에 처했다.비록 ‘대신(大臣)은 제외한다’는 예외규정은 있었지만, 원래부터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패초해서 오지 않은 예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조선 쇠퇴기인 1700~1800년대에 들어오면 신하들이 패초에 응하지 않은 일이 잦았다.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다. 왕이 발령을 내면 예를 앞세워 사양하는 척 하며 패초를 어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 자체를 스스로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여기는 풍조까지 만연해졌다. 그래서 패초를 어긴 자는 태(笞) 50대를 친다는 규정도 생겨났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이 문제는 왕권의 강약, 당시의 정치적 환경 등을 가늠하게 하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영조집권기 후반에 들어오면 패초를 어기는 사건이 더 빈발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관리로 임용이 되면 패초를 받고도 저마다 핑계를 대고 약삭빠르게 피하면서 나오지 않았다. 특히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직에 임명된 대간들이 더욱 그랬다.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가 얽히면서 그 관직 자체가 언젠가는 당쟁에 휘말려 화를 입게 될 것이란 예단에서였을 것이다.1766년(영조 42) 6월 15일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관직) 윤석주(尹錫周)가 패초를 어긴 죄로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지평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책무는 막중하였다. 때문에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윤석주는 임금의 부름에도 시골에 있다며 거짓말하고 나가지 않았다. 후에 이를 알게 된 영조는 ‘신하들이 대간의 추천에만 오르면 모두 말을 타거나 나귀를 타고 달아나니, 도적이 만약 쳐들어오면 이 무리는 모두 장차 달아날 것이다. 그러니 누가 나라를 위하여 절의(節義)를 세우겠는가?’라고 화를 내며 그를 장기(長䰇)로 유배를 보냈다.패초를 어겨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특이한 사람도 있었다. 같은 곳에 두 번이나 유배를 온 송영(宋鍈)이란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1753년(영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7대 할아버지인 송석범(宋碩範)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그가 세 번째 명나라에 갈 때는 위험한 바닷길을 이용했는데, 북경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상원절(上元節·음력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는 먼 길을 온 그에게 친히 옥등(玉燈)과 주준(酒樽·술 항아리)을 선물로 내렸다. 이 집안에서는 이를 대대로 가보로 챙겨 내려왔다.영조 때에 이르러, 송영은 주서(注書·승정원의 정7품 관직)로 있었다. 1754년(영조 30년) 2월 24일, 경연에 참석하는 신하들 중에서 누가 송영의 집에 가면 희한한 가보가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영조가 궁금하여 송영에게 그것들을 갖고 와서 좀 보여 달라고 했다. 송영의 아버지 송양필(宋良弼)이 등(燈)과 준(樽·항아리)을 가지고 입시(入侍)했다. 임금이 이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고는 등과 항아리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영조는 송양필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7품 주서였던 송영을 특별히 6품으로 승진시켜줬다.조선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정신적 혼돈에 빠져 있었다. 오랑캐의 나라라고 여기던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새 책봉국이 되었지만, 조선 지배층의 의식 속엔 여전히 명나라가 있었다. 유교질서의 종주국이 사라지면서 조선의 지배질서마저 흔들릴 위기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목소리만 높았던 북벌론도 기세가 꺾이자, 왕실로서는 명나라에 임진왜란 때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명분론인 ‘존명의리’ 의 이데올로기를 복구할 상징물이 필요했다.그래서 숙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 신종의 은덕을 기린다는 취지로 궁궐 안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왕이 직접 제례를 올렸다. 이를 이어받은 영조는 명나라 태조와 의종을 제례의 대상에 추가시켜다. 태조는 조선의 창업을 승인하고 국호를 정해준 왕이었고, 의종은 조선이 남한산성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군을 보내줬으므로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영조는 송영과 송양필에게 임금이 대보단에 제사지낼 때는 같이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도 줬다. 원래 이 제사에는 삼학사(三學士)의 자손 및 오충신(五忠臣)의 자손으로 관직이 있는 자가 임금을 모시고 함께 제사를 지내 오던 것이었다.아시다시피, 삼학사란 병자호란 때에 청국에 항복함을 반대하고,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한 세 사람의 학사. 곧 홍익한·윤집·오달제를 말한다. 이들 척화신(斥和臣)들은 청나라에 붙잡혀가서 끝끝내 굴하지 않고 마침내 참혹하게 죽었다. 오충신 역시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함을 반대하고 척화를 계속 주장하다가 인조 20년(1642) 12월에 청나라에 붙잡혀 갔던 신익성·허계·이명한·이경여 등을 말한다. 이들의 틈에 송영이 끼인 것이다. 정조는 송영의 가족들이 대보단 제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황명(皇明)을 위하고, 충절(忠節)을 장려하는 뜻’이라고 했다.영조의 송영에 대한 배려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72년(영조 48) 5월 9일, 송영은 국가의 의례를 관장하였던 통례원(通禮院)의 통례(通禮·정3품)로 발령을 받았다. 관리로 임용한다는 패초를 받으면 직접 궁궐에 나아가 임금을 뵙고 이름을 아뢰고 공손히 절하여 인사를 올리는 절차가 있었다. 이를 ‘출숙(出肅)’이라고 한다. 그런데, 송영은 패초를 받고도 출숙하지 않았다. 영조는 출숙하지 않은 그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패초를 어겨 귀양을 보낸 경우는 통상적으로 1~2년 후에는 해배되었다. 이런 경우 임금은 다시 당사자를 불러올려 앞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임명한다. 귀양으로 이미 한 차례 명분이 축적된 데다, 시기하는 무리들도 매번 발목을 잡아챌 수가 없어 이때는 큰 저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송영의 경우도 1775년(영조 51년) 11월 17일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그런데, 송영은 이번에도 왕이 부르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영조 말년 당시로 봐서 대사간의 역할은 잘해봐야 본전이라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화가 난 영조는 패초를 어긴 그를 그날 바로 경상도 장기현으로 다시 유배를 보내버렸다. 이래서 송영은 두 번이나 장기와 인연을 맺은 특출한 유배인이 된 것이다. 두 번째로 왔던 그는 2개월도 채 안 된 1776년 1월 5일 싱겁게도 유배에서 풀려났다.그런 송영이 정조 때에는 대사간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정조 초기인 1780년(정조 4년) 대사간으로 임명된 이래 1788년 1월까지 8년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대사간으로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였다. 대사간이란 사간원의 으뜸벼슬이었다. 국왕에 대한 간쟁, 신료에 대한 탄핵, 당대의 정치·인사 문제 등에 대하여 언론을 담당했으며, 국왕의 시종 신료로서 경연(經筵)·서연(書筵)에 참여하였다. 또한 의정부 및 6조와 함께 법률 제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였으며, 5품 이하 관료의 인사 임명장과 법제 제정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서명하는 권리)을 행사하였다.이처럼 대사간의 임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선호하는 요직으로 인정되어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강직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교체 시에도 지방관으로 폄출하지 않았으며, 승진 시에는 파직 기간도 근무 일수에 포함시켜 주었다.송영이 대사간 직에서 물러나는 장면도 이채롭다. 1788년(정조 12년) 1월 5일, 정조가 송영을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등연(登筵) 때 난모(煖帽·겨울에 쓰는 방한모의 총칭)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체직시켜버렸다. 등연이란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기 위해 신하를 소집하는 것이다. 이런 엄숙한 자리에 모범을 보이고 오히려 이를 규찰해야 할 대사간이 복장불량 상태로 나타났으니, 임금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그 후로도 송영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여러 군데서 보인다. 병조참판과 형조참판 등으로 임용된 기록이 있는가 하면, 1793년(정조 17) 11월 28일에는 한성부좌윤으로 있으면서 관아에 늦게 이르렀다 하여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1796년(정조20) 3월 6일에는 의금부당상으로 있다가 법집행 실수를 이유로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4월 20일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풀려나기도 했다.임금이 바뀌어 순조 때인 1808년(순조8) 2월 5일, 그는 다시 대사간에 임명이 되었으니 무려 영조,정조,순조 3대에 걸쳐 대사간을 역임한 셈이다. 1812년 5월 대호군(大護軍·조선시대 오위의 종3품 관직)으로 있다가 죽었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졸기’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희대의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1-07

정쟁에 희생된 문사(文士)들

1770년(영조 46) 11월 26일, 한양에서 이경오(李敬吾)란 선비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유배객의 신분이었는데도 지역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앞 다투어 그를 맞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바로 초림체(椒林體)의 대가인 우념재(雨念齋) 이봉환((李鳳煥)의 장남이었던 것이다.이봉환은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문사(文士)였기에 한적한 시골 현(縣)의 사족(士族)들이 그의 시편과 글을 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봉환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상소를 올린 최익남(崔益男)과 공범으로 간주되어 신문을 받다가 죽었고, 그의 큰 아들이 아버지 죄에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것이다.시계를 잠시 뒤로 돌려보자. 1762년(영조 38) 윤5월 17일이었다. 나경언의 고변사건에 이어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사도세자가 무더운 초여름 날 뒤주 속에 갇혀 8일 동안 울부짖다가 죽은 것이다. 이런 처참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조정 대신들 중 누구하나 나서서 말리는 이가 없었다. 정권의 핵심에 있던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수방관했다. 소론에게 우호적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는 부왕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이 무렵 조정에는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洪鳳漢)이 실세로 있었지만, 그도 이 비참한 세자의 죽음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심지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오히려 반(反) 사도세자 세력에 가담했다. 홍봉한 측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집안의 당파적 이해 때문에 세자를 희생시킨 것이 아니냐는 논의까지 대두되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번창했다. 홍봉한은 영의정을, 홍인한은 우의정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뿐만 아니다. 홍봉한의 맏아들인 홍낙인은 대사헌, 둘째 아들 홍낙신과 홍낙임은 승지, 사촌인 홍송한은 형조판서, 조카인 홍낙성은 이조판서, 조카 홍낙명은 대사간과 대사헌의 자리를 각각 차고앉았다.시간이 지나 임오화변의 충격이 서서히 정리되어 가면서 노론은 두 파로 갈라졌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시파와 죽음이 당연했다는 벽파로 나눠진 것이다. 벽파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그녀의 친정오빠인 김귀주가 축이었다. 이들은 영조의 믿음을 독차지하고 있던 홍봉한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래서 공홍파(攻洪派)란 이름을 붙였다. 반면 홍봉한을 지지하는 시파들을 부홍파(扶洪派)라 했다. 처음 홍봉한과 김귀주 두 외척 가문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는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세자가 사라지자 이제는 노론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이때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로 돌아서 있었다. 김귀주는 그런 홍봉한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했다.공홍파의 공격은 1770년(영조 46) 3월 22일, 청주 유생 한유(韓愈)가 올린 상소문으로 구체화되었다. 한유는 자신의 팔뚝에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내용을 새겨 넣고 도끼를 메고 상경했다. 그는 궁궐 앞에 나아가 엎드린 채 ‘홍봉한의 부자·형제가 권세를 휘두르며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청컨대 이 도끼로 먼저 나를 죽이고 뒤에 홍봉한을 처단하라’고 했다. 영조는 이 상소가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홍봉한의 세력들을 공격하는 것이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 나머지 한유를 귀양보내버렸다. 실제로 한유가 이런 행동으로 나오기까지는 공홍파의 사주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 상소는 심의지(沈儀之)가 올리려고 했다. 공홍파들은 심의지가 한양의 사족(士族)이기 때문에 영조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며 청주에 살고 있던 한유에게 그 상소를 대신 올리도록 한 것이었다.그로부터 8개월 후인 1770년(영조 46) 11월, 이번에는 부홍파들이 반격에 나섰다. 이조 좌랑 최익남(崔益男)이 반박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새로 왕세손에 책봉된 동궁(東宮·정조)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와 사당에 성묘도 하지 않아 정과 예가 부족하고, 벽파의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당파를 짓고 있으니 처단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는 영조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영조는 민감한 사도세자와 세손의 문제를 언급하며 나오는 것에 대해 발끈했다. 격노한 영조는 왕실에 대한 모종의 음해세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최익남과 연루자들을 붙잡아와 국문했다. 잡힌 사람들은 모두가 홍봉한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공홍파들은 ‘최익남의 배후에 홍봉한이 있으니 진상을 밝혀야 한다’며 공세를 취했다.영조는 최익남을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하라는 명을 내리고, 그 상소문은 즉각 불살라버리게 하였다. 최익남은 유배를 떠나기도 전에 매를 맞아 죽었다. 이어서 영조는 홍봉한의 배후라고 의심되는 최백남(崔百男·최익남의 동생)·정석오(鄭晳吾)·이봉환(李鳳煥)·문희민(文喜珉)·이성보(李成普)·남옥(南玉) 등을 체포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애석하게도 이봉환과 남옥은 투옥되어 신문을 받다가 장형(杖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최익남의 상소를 미리 빌려다 보았다는 죄로 이재휘(李載徽)와 이만식(李萬軾), 그리고 이봉환의 이웃에 사는 유생 정석오(鄭晳吾)도 유배를 보냈다.이를 최익남의 옥사라 하기도 하고, 경인옥(庚寅獄)이라고도 한다.이때 화를 당한 이봉환의 가문은 삼대(三代)에 걸쳐 모두 문집을 남긴 서얼 명가였다. 이봉환은 18세기의 날카롭고도 새로운 시풍으로 서얼(庶孼)의 시체(詩體)라고 평가되는 ‘초림체’(椒林體)를 창안한 사람이었다. 그의 학맥은 아들 이명오(李明五)와 손자 이만용(李晩用)으로 이어졌다.이봉환은 어릴 적 장동김씨 가문의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로부터 사숙(私淑)하였기에 그 영향권에 있었다. 그는 1733년(영조 9)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후 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가 1748년(영조 24) 홍계희(洪啓禧)와 같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가 관료로 진출한 것은 홍봉한의 역할이 컸다. 1765년(영조 41) 홍봉한이 그를 남옥·성대중과 함께 서얼 출신 인재로 추천한 것이다. 당시 서얼 문사들은 한시에 섬세한 묘사와 사회에 대한 울분을 담았는데, 이를 초림체라 했다.이명계(李命啓), 남옥 등 이봉환의 벗들도 모두 이 시풍을 좇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문학세계의 전반적인 특징은, 김창흡(金昌翕)과 육유(陸游)의 시 세계를 추종하였고 서정성이 강한 시를 지었다. 이들의 시풍은 이후 백탑시파(원각사지 10층 석탑 인근에 살았던 북학파 시인)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박지원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문(文)에 있어서는 당송고문(唐宋古文)의 경향을 띠었다.이봉환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시를 배워 시사(詩史)에 능하였다. 그중에서도 차남인 이명오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봉환의 손자이자 이명오의 아들인 이만용도 시문(詩文)을 잘 해서 조선 후기 사대가(四大家)로 뽑히며 명성이 자자했다.현재의 서울 삼청동 133-1과 2번지 일대에 옥호정(玉壺亭)이 있었다. 이 집은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金祖淳)의 별장이었다. 김조순은 이곳에서 선비들의 예원(藝苑)집단인 백련사(白蓮社)를 경영하며 이명오를 비롯한 김이교(金履喬), 이복현(李復鉉), 김려(金鑢), 김이양(金履陽), 신위(申緯) 등과 교유했다.이처럼 주목받던 이봉환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정쟁(政爭)의 중심으로 쓸려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의 다섯 아들들도 연좌되어 다섯 군데로 뿔뿔이 흩어져 귀양을 갔다. 이때 장남 이경오가 장기(長䰇)로 오고, 차남 이명오는 전라도 강진현으로 갔다.그 후 이봉환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죄를 신원하기 위해 벌인 노력은 눈물겹다. 아버지가 물고당한 것을 원통히 생각하여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길거리에 거적을 깔고 옷을 바꾸어 입지 않고, 왕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수차 탄원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아들과 손자들은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경화세족(京華世族·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 들과 끊임없이 사귐을 맺었다. 한양 일대에서 활동한 양반들 가운데 이들 삼대의 시문집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사람은 명사(名士)가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이명오의 시문집인 박옹시초(泊翁詩抄) 첫머리에는 홍취영(洪就榮), 김좌근(金左根), 정원용(鄭元容), 조두순(趙斗淳), 윤정현(尹定鉉), 김병학(金炳學), 남병철(南秉哲) 등의 경화거족(京華巨族·화려한 서울의 재력가)들이 쓴 서문이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는 김정희, 신위, 정학연 등과 주고받은 시가 적잖이 수록되어 있어 이들과 교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 중 특별히 정학연(정약용의 아들)과 함께 지은 시가 많이 보여 두 사람의 친분을 짐작케 한다. 이봉환 가문이 비록 서얼 출신이지만 그 위세가 여느 사대부 문벌가 못지않게 대단했음을 짐작케 하는 증거들이다.이런 자손들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1804년에 들어서 정조는 이봉환을 신원(伸寃)·표창(表彰)하고 그 자손들을 서용하겠다고 약속하면서, 25결(結)이라는 토지까지 하사했다. 정조는 이명오의 문집을 들이라 명하고, 아울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와 주자(朱子)의 글을 가려 뽑아 바치게 했다. 그만큼 이명오의 글이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1809년(순조 9) 김이도(金履度)·김조순 등의 도움으로 이봉환은 신원이 된다. 1910년(순종 3) 순종은 죽은 이봉환을 정2품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였다가 다시 충정(忠正)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자 이명오는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내왕하였고, 벼슬이 종3품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죄로 연좌되어 장기로 왔던 이명오의 형 이경오는 1772년(영조 48) 유배가 풀렸다. 그가 장기에서 머문 기간은 약 2년간이었지만 한양에서 당시에 유행했던 초림체(椒林體)의 한시들을 장기 땅에 마음껏 펼쳐놓고 갔다. 그에게 장기는 말 못할 고통의 장소였을지도 모르지만, 장기사람들에게 그는 신문학의 전달자이자 더 높은 문화의 보급자였던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2-17

조선조 왕들의음주와의 전쟁

조선시대 왕들은 통치의 수단으로 금주령(禁酒令)을 곧잘 내렸다. 특히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는 더욱 그랬다.태종은 집권 초기부터 빈번하게 금주령을 내렸는데,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스무 차례가 넘는다. 세종은 재난이나 이변이 없더라도 매번 농사철에는 술을 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영조는 재위 기간 52년 중 50년 동안 금주령을 내려 조선시대 국왕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금주령을 시행한 임금으로 꼽히고 있다.1764년(영조 40) 음력 5월, 전라도 영광군수로 있던 윤면동(尹冕東)이란 사람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관내 사람들 중에서 금주령을 위반한 사람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윤면동이란 어떤 사람일까? 공교롭게도 그와 가장 악연인 사람의 기록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원교 이광사가 쓴 원교집선(圓嶠集選)에 의하면, 원교는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때로는 학동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비교적 안정적인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데, 1762년(영조 38년)에 들어와 갑자기 진도에 이배된 뒤 다시 신지도로 옮기게 된다. 그 이유가 바로 윤면동이 올린 장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윤면동은 임금에게 ‘원교가 북쪽 변방에서 선비들을 다수 모아 글씨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민심을 선동할 우려가 있으니 작은 섬에 이배하라’고 요구를 했다. 이 상소에 의해 섬으로 옮겨진 원교는 신지도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그런 윤면동이 이번에는 자신이 서해극변에서 동쪽 끝 연변(沿邊) 장기현으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된 것이다.농경이 기본인 조선사회에서 술을 마구 빚어내는 일은 큰 문젯거리였다. 술을 빚으면 열 사람이 먹을 곡식을 한 사람이 마셔 없앤다. 1733년(영조 9) 1월 10일, 도성(都城)의 쌀값이 뛰면서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비변사의 당상관 김동필(金東弼)이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시기가 바로 세초(歲初)라 집집마다 삼해주(三亥酒)를 빚고 있었다. 삼강(三江)에 정박하고 있으면서 미곡을 파는 미선(米船)들이 모두 술을 많이 빚는 가정으로 미곡을 매도하고 있었기에 시중에 나돌 쌀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임금에게 금주령을 엄격히 내리자고 건의를 했고, 영조는 이를 받아들여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 백성과 관리들을 단속하기에 이른다.하지만 금주령은 지방에서는 비교적 엄격하게 준행되었으나, 한양의 사대부·관료사회에서 이 같은 명령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굶어서 죽어나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술을 빚어 알곡을 탕진하는 일이 여전히 계속된 것이다. 환자가 약재를 넣은 청주를 마시는 것은 허용되었으므로 특권층들은 쌀로 청주를 빚어 약으로 쓰는 술, 곧 ‘약주’라고 속이고 먹었으므로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다.1755년(영조 31) 여름에는 장맛비가 한 달 동안 이어지더니 큰 홍수가 났다.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심한 흉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관아의 벼슬아치와 양반 지주들은 음주가무에 태평세월을 보냈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지방에 국한해 금주령을 내렸지만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해 9월, 이를 보다 못한 영조가 직접 나서서 온 나라에 금주령을 내리고 스스로 궁궐 안에 두었던 술을 모두 없앴다. 제사와 나라의 잔치 때도 감주만 쓰도록 했다. 대사헌 구상(具庠)이 “제발 제사 때 탁주라도 쓰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오히려 금주령을 위반한 자는 중죄로 다스린다고 공표했다.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3개월의 유예기간 후 1756년(영조 32) 정월부터 전국에 금주령이 시행되었다. 이는 조선 전 시대를 걸쳐 가장 엄격한 것이었다.1758년(영조 34)에도 큰 흉작이 들었다. 영조는 홍화문(弘化門·창경궁 정문)에 나가 백성들에게 금주윤음(禁酒綸音·금주에 대해 왕이 특별히 내리는 문서)을 또 발표했다. 이번에는 만약 위반자가 있을 시는 효수(梟首)하겠다고 했다. 이때의 금주령은 이미 흉년의 곡식절약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귀중한 곡식을 술을 빚는 데 낭비하지 말 것은 물론이고, 술에 취한 관리들이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경계하자는 것이었다.이런 서슬 퍼런 분위기에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었다. 1762년 9월, 남병사(함경도 북청의 병마절도사를 말함) 윤구연(尹九淵)이 매일같이 술을 마셔 취해있다는 대사헌 남태회의 상소가 올라왔다. 영조는 상소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라는 비답을 내렸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선전관 조성(趙峸)이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를 발견하고 영조에게 아뢰자, 영조는 당장 그를 잡아오도록 지시했다. 그해 9월 17일, 영조는 남대문으로 가서 잡혀온 윤구연을 친국을 했다. 그의 옆에는 술 냄새가 솔솔 나는 빈 항아리와 약간의 누룩이 증거물로 놓여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윤구언은 실수를 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영조는 도성의 백성과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참수형에 처했다. 이날 영의정 신만·좌의정 홍봉한·우의정 윤동도가 차자(箚子·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려 윤구연의 죄에 대해 용서할 것을 드세게 주장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고 말았다.비참하게 죽은 윤구연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려 남대문에 걸렸지만, 술 항아리가 금주령이 내려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억울했다는 이야기가 한동안 회자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구연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우수군절도사 등 여러 무관직을 역임했다. 1751년(영조 27) 8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제주목사 재임 중에는 각 관청의 관리를 철저히 단속해 업무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백성의 어려운 형편을 고려해 요역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제주 오등동 한천(漢川) 상류에 위치한 방선문(訪仙門) 계곡의 바위 절벽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명(磨崖銘)이 아직도 남아 있다. 또 1757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시절에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청주시 상당구에 그를 잊지 않으려는 불망비가 아직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적어도 술이나 퍼마시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 나태한 관리는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영조가 1774년(영조 50)에 들어서 이미 죽고 없는 윤구연에게 다시 직첩(職牒)을 지급하라는 명을 내린 것만 봐도 그렇다.1763년 (영조 39) 6월 20일, 이번에는 포도대장 정여직(鄭汝稷)이 잡혀왔다. 야경을 준비하던 어영청 소속 순라군들이 금령을 어기고 술을 마시다가 암행어사에게 적발된 것이다. 영조는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장안의 백성들을 모아 놓고 책임자인 그를 남양(南陽·전라남도 고흥)으로 귀양 보냈다. 곧이어 병조 판서로 하여금 노량진에 가서 중군(中軍·부대장을 호위하며 실질적인 임무를 관장하던 관리)에게 곤장 열 대를 때린 뒤에 파면토록 하고, 패장(牌將· 군졸을 거느리던 사람) 또한 곤장으로 다스린 후 충군(充軍· 계급을 강등하여 수군이나 변방으로 보내던 군역)하도록 명했다.이날 영조는 연석해 있던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으로부터 해괴한 보고를 받는다. 전 장성 부사(長城府使) 최홍보(崔弘輔)의 기생첩이 금주령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가관인 것은 이를 안 최홍보의 부관(部官)이 그녀에게 태형(笞刑)을 가하자 그 기첩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홑이불을 덮어쓰고 도랑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화가 난 영조는 이 사실을 숨기고 아뢰지 않은 관련자들을 모두 처벌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사대부 중 기첩을 데리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원래 기생의 적(籍)으로 되돌리고, 그 숫자를 왕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어제경민음(御製警民音). 조선 후기 영조가 백성들에게 내린 금주령(禁酒令)이 잘 시행되지 않는 것을 개탄하며 백성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내린 조칙을 간행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이런 일이 있고 나서도 금주령 위반자는 계속해서 나왔다. 영조는 삼남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금주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곳의 지방관을 색출하라고 명령하였다. 암행어사들은 충청의 강경 쪽에서 술이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포착하였다. 1764년(영조 40) 5월, 드디어 양천(陽川)에서 술을 빚은 사람이 강화도의 선상(船商)에게 팔다가 적발되었다. 일당들이 모두 포청(捕廳)으로 잡혀왔다. 그달 3일, 영조는 강화도관할 책임자인 강화유수 정실(鄭宲)을 파직시켰다. 술을 생산한 곳의 지방관 양천현감 박명양(朴鳴陽)도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귀양 보내고 이 두 고을을 감독했던 전 관찰사 남태제(南泰齊)를 양재역(良才驛)에 귀양을 보냈다. 음주를 위반한 백성 네 사람은 형조에 명하여 칼을 씌워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하게 했다.이때 단속된 사람들 중에는 전라도 영광군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물건을 배에 싣고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경강(京江·뚝섬으로부터 양화도에 이르는 한강의 일대)에서 술을 취급하다가 순라군에게 적발되었던 것이다. 그 책임을 지고 해당 고을의 군수인 윤면동이 1764년(영조 40) 5월 4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영조의 금주령은 과격하고도 잔인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영조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다만 금주령을 범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싶었든지 마신 술의 다과(多寡)로 등급을 나누어 죄를 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단속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뿐이라는 비판이 계속되었고, 심지어 영조가 남몰래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돌았다. 검토관 조명겸(趙明謙)이 영조에게 음주를 경계할 것을 권하자 영조는 “내가 마시는 것은 소주가 아닌 오미자차”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왕실과 관료층이 금령을 지키지 않게 되자 실행 실무부서인 사헌부 관원 전원이 그 책임을 지고 사직을 청하는 사태도 있었다. 지배층 스스로가 금령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민간에만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하지만 영조의 금주령은 정조 때에 와서야 비로소 해제되었다. 정조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해 신하들이 만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애주가 임금 덕분인지 정조 때에는 주막 문화가 발달했다. 밤이 새도록 술을 파는 날밤집, ‘목로’라는 나무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선술집, 안주인은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팔뚝만 내밀어 술과 안주를 내준다는 팔뚝집 등은 모두 정조 이후에 등장한 술집의 형태였다.요즘 들어 자동차의 음주운전이 큰 사회적 문제로 다가 온다. 조선조 금주령이 춘궁기의 곡식저축과 더불어 예도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음주단속은 음주 운전자에 대한 처벌과 계도가 주목적인 것이다. 음주단속의 목적과 명분은 달라졌지만, 나라와 술꾼간의 음주전쟁은 지금도 끝나지가 않았다./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2-10

달문(達文)이를 아시나요

1764년(영조 40) 4월 초순경이었다. ‘달문(達文)’이란 사람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의 추국(推鞠·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는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된 그 해 4월 17일, 이상묵(李尙默)이란 사람이 달문이를 사칭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이를 두고 ‘이태정(李太丁) 역모사건’이라고 한다.달문이란 누구일까. 그는 1707년생으로 성은 이씨요. 이름이 달문이다. 이달문은 조선 팔도를 뒤흔든 최고의 스타 연예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18세기 ‘아이돌’이었던 것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산대나례(山臺儺禮)였다. 산대(山臺)는 큰 길가나 빈터에 마련한 임시 무대를 말하는 것이고, 나례는 본래 귀신을 쫓는 의식인데, 광대놀음으로 더 잘 알려진 연희였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나 중국 사신의 행차를 환영하기 위해서 광화문 앞 대로변에 임시무대를 세우고 나례를 거행하였다. 이때는 으레 탈을 쓴 광대 달문이가 주연으로 등장했다. 그가 나타나면 장안의 풍류와 무협을 숭상한 유협(遊俠·협객)의 부류들이 그를 상석(上席)에 앉히고, 마치 왕을 모시듯 떠받들었다고 한다.달문은 단지 몸놀림으로 줄타기나 땅재주를 부리는 광대가 아니었다. 재담이나 흉내 내기와 같은 연기에도 타고 났다. 땅재주를 부리는 중간에도 눈을 흘기며 비뚤어진 입에서 지껄이는 어릿광대의 연기와 입심은 가히 따라갈 자가 없었다. 언젠가는 길을 가다가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았다. 달문이 갑자기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흉내내자 싸우던 당사자들이 웃느라 싸움을 멈췄다는 이야기도 있다.우상에 가까운 명성에 비해 달문의 출신성분은 미미했다. 미천한 거지출신에다 얼굴마저 못생겼다고 한다. 입은 비뚤어졌는데, 그것도 너무 커서 얼굴의 반은 입인 것처럼 보였다. 몰골도 꾀죄죄해 째진 눈에 눈곱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싯적에는 청계천의 거지 패거리와 어울리면서 당시 하층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각종 연희를 골고루 배울 수 있었다.그가 특기를 보인 연희는 만석중놀이와 철괴무, 팔풍무였다. 만석중놀이는 황진이의 미모에 빠져 파계했다는 지족(知足)선사를 조롱하는 내용의 탈춤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공연됐다. 철괴무(鐵拐舞)는 이철괴(李鐵拐)라는 기괴한 모습의 신선을 흉내내면서 동쪽으로 달리다 서쪽으로 내닫는 역동적인 춤으로, 산대놀이의 하나였다. 팔풍무(八風舞)는 남사당놀이의 땅재주넘기와 유사한 놀이였다.달문이는 전국 순회공연도 다녔다. 1747년 무렵, 그는 영남을 시작으로 호남, 호서를 거쳐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스타 광문이 고을에 나타나는 날이면 천민에서부터 사대부까지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달문의 고객 중에는 어사 박문수도 있었고, 좌의정 벼슬까지 했던 풍원군 조현명도 있었다. 그는 머리를 길게 땋은 채 장가도 들지 않은 추남이었지만, 그와 공연을 함께하는 기생들은 절세미인들이었다. 광문이 때때로 재상가집 연회나 왕손들의 잔치에 초청될 때면 이름난 기생들을 이끌고 가서 한껏 풍류를 과시하기도 했다.달문이 뭇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뛰어난 재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의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이런 면모는 당대 및 후대 문인들의 관심을 끌었기에 여러 편의 문학작품으로도 형상화되었다. 어려서부터 달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실제로 만난 적도 있다는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달문의 의로운 행실을 알리기 위해 광문자전(廣文者傳)이란 소설을 지었다. 실존인물 달문을 ‘광문’으로 이름을 바꾼 이 소설은 비천한 거지인 광문의 순진성과 거짓 없는 인격을 그려 양반·서민 가릴 것 없이 인간은 다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권모술수가 판을 치던 당시의 양반사회를 은근히 풍자했다.이것뿐만 아니다. 역관이자 시인인 홍신유는 달문가라는 서사시를 지어 예술가로서의 달문의 삶을 조망하였다. 그 밖에도 이규상, 이옥, 조수삼 등도 달문에 관한 이야기를 문학작품으로 남겼다. 이처럼 달문의 명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역모 사건에 그가 말려든 것이다.때는 1764년(영조 40) 봄, 달문이 쉰여덟 살 되던 해였다. 경상도 영남지역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1728년에 일어난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의 잔당으로 영남지역에 숨어살던 이태정이란 사람이었다. 이태정은 나주목사로 있다가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은 이하징(李夏徵)의 서자(庶子)였다. 따라서 이태정의 역모사건은 반영조의 기치를 내건 소론의 실세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이태정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방법을 강구하다가 당시 전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달문의 명성을 생각해냈다. 사회적 분위기로 봐서 달문이의 인기를 이용하면 민초들의 세력을 쉽게 규합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태정은 자신을 달문의 친동생 ‘달손(達孫)’이라고 속였다. 그의 공범인 작은만(者斤萬)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이 달문의 아들이라고 사칭했다. 이들은 같은 무리인 이상묵(李尙默)과 같이 노비, 점쟁이, 승려 등의 천민세력을 규합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세력이 규합되자 이들은 나라를 원망하는 망측스러운 말을 지어내고, 또 음흉하고 참혹한 시(詩)를 지어 퍼뜨리고 다녔다.그런데, 달문이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떠꺼머리총각이라는 사실은 온 조선 땅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에게 동생과 자식이 있다고 했으니 의심을 품은 홍유(洪洧)라는 사람이 관가에 이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일당들이 모두 붙잡히게 된다.1764년 4월 17일, 영조가 직접 사복시(司僕寺)에 나아가 영남 죄인 작은만·홍유·이상묵·이달손(李達孫)·강취성(姜就成)과 승려 도행(道行)·문담(文淡) 및 달문 등을 친국(親鞫·중죄인을 임금이 직접 신문함)하였다. 이달손이 자신은 이태정임을 밝히고 대역부도죄를 시인하자, 영조는 숭례문에 직접 나아가서 그를 참수형에 처했다. 그의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의 적에 올리고 재산은 몰수했다. 나머지 가담자들은 모두 정상을 참작하여 멀리 귀양 보내도록 했다. 이때 가담정도가 경미한 작은만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고, 이상묵은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가 결정되었던 것이다.그런데, 정작 조사를 해보니 달문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영조는 그를 죽이려했다. ‘머리가 반백인데도 총각의 모습을 꾸며 인심을 현혹시키고 풍속을 괴란하였다’는 이유였다. 영조가 이런 착상을 하게 된 근거는 중국의 예에 따른 것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경공이 협곡(夾谷)에 나들이를 나갔는데, 이때 오랑캐가 풍악을 울리고 광대가 희롱을 하며 나오자 공자가 제후에게 ‘필부(匹夫)로 제후를 현혹한자는 죄가 마땅히 참수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여 처단한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주위에서 반발이 심했다. 만약 달문을 죽일 경우 민란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영조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를 죽이지는 않고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귀양을 보냈다. ‘달문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인심을 미혹시켜 역적 이태정이 그 모습을 본뜨고 그 말투를 본뜨게 했다. 비록 본건에는 연루된 일이 없으나, 그 사람 자체가 난리의 근본이므로 변방에 유배 보낸다’는 이유를 달았다.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영조의 눈에는 달문의 행적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국을 누비며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문은 언제든지 세력을 모아 자신에게 도전해 올지도 모르는 위험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영조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이가 많은데도 머리를 땋아 내린 자는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고 전국에 공포할 정도로 민감하게 대처했다. 이게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조선 최초의 장발단속 규정이다.원래 작은만이란 사람은 경상도 개령(김천시 개령면)에 있는 수다사에서 밥을 빌어먹던 사람이었다. 그는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절에 사는 스님들이 달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스님들은 모두가 달문이를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작은만은 달문이의 이름을 팔면 구박받지 않고 절밥을 더 잘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가 바로 그 달문의 아들입니다’라고 했다. 스님들이 깜짝 놀라 그때부터 작은만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역모를 꾀하던 이태정이었다. 그는 작은만이 스님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달문이를 이용하면 쉽게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만에게 자기를 작은아버지라고 불러주면 앞으로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꾀었다. 그때부터 작은만은 이태정을 삼촌이라 불렀고, 이태정은 자신이 달문의 친동생처럼 행동하게 된 것이다.이런 일로 달문은 경성에 유배 갔다가 다음해 9월 5일에 방면됐다. 달문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오자 남녀노소가 떼거리로 몰려나왔다. 구경꾼들로 인해 한양의 저잣거리가 한동안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는 그 사이에도 식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달문은 옛날의 그 달문이 아니었다. 열혈 팬들의 환대를 마다하고 어디론가 훌쩍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명성을 뒤로한 채 홀연히 사라진 그를 사람들은 추억하며 그리워했다.달문은 왜 이렇게 유명세를 탔을까. 비록 가문이 몰락하여 걸인의 생활을 하였지만, 신의와 의협심이 남달랐다. 남들이 업신여기는 기생과도 인간적인 교유를 맺었다. 외모가 못 생기고 어리석게 보였으나 생각이 깊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았다. 심지어 자신의 인기와 명성을 이용하는 자들로 인해 억울한 유배생활을 하고 돌아왔지만 원망하지도 않았다.복잡다단한 인생 역정을 지닌 광대 달문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절정에 닿은 인기를 마다하고 바람처럼 사라져 오히려 더 유명해졌던 이달문. 그의 파란만장한 행적들이 가을걷이 끝난 빈 들판처럼 허허롭게 다가온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2-03

왕이 왕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 (영조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백성들은 감히 접근조차 어려운 구중궁궐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지만, 엽기적이고도 비극적인 이 사건은 한양에서 864리 떨어진 경상도 장기현 사람들에게도 마치 곁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해 윤5월 15일 장기로 온 홍지해(洪趾海)와 뒤이어 7월 11일에 온 목애(睦愛)가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사도세자의 비극을 부른 이 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얽혀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이유 하나를 꼽으라면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들 수 있다. 신임의리는 1721년(신축년)∼1722년(임인년)에 경종 대신 연잉군을 지지하다가 곤란을 겪었던 노론 측의 의리를 부르는 말이다.역사를 돌이키자면, 숙종이 사망할 무렵인 1700년대의 조선 조정은 세자(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으로 나뉘었다. 그때는 소론이 지지하던 세자가 경종 임금에 올랐으나, 경종은 병으로 몸이 약했다. 노론은 그런 경종에게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까지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이 일로 노론의 대표주자인 영의정 김창집 등 수백여 명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이른바 ‘신임옥사’란 것이다.경종이 일찍 죽고 이제 연잉군이 영조임금으로 즉위했다. 영조는 즉위하자말자 그때 자신에게 기울였던 노론들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른바 ‘신임의리’를 지킨 것이다. 덕분에 한동안 노론의 세상이 됐다.하지만 세월이 흘러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혈기왕성한 세자는 노론의 특수한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사도세자는 노론들이 내세우는 신임의리를 나 몰라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노론과 사도세자 간에는 첨예한 갈등이 생겼다. 이는 아버지 영조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까지 왜곡되게 받아들여지면서 그 결말은 비참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이다.영조에게는 모두 여섯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아들 복이 없었다. 첫째 아들 효장세자는 일찍 병으로 죽었다. 그로부터 7년 뒤, 나이 마흔 둘에야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얼마나 애지중지했든지 영조는 이듬해 그 아이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자는 1744년에 혜경궁 홍씨(헌경왕후)와 혼례를 올리고, 열다섯 살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며 정계에 관여했다.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사도세자의 악행에 대해 구구절절 기록하고 있다.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도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손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환관을 죽이고 그 머리를 자신의 부인에게 가져다준 일, 영조의 침방나인이었던 박씨를 건드려 임신시킨 일, 후궁을 살해한 일, 가선이라는 여자를 겁탈하고 궁중에 몰래 들인 일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둘 때 반포한 폐세자반교문에 따르면, 세자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백여 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데, 정작 영조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이 있기 전까지는 세자가 이렇게까지 패륜아인지 몰랐던 모양이다.잠시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조정에는 영의정 홍봉한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로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다. 이 무렵, 조정에는 사도세자를 시기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김한구(金漢耉)였다. 김한구는 이제 겨우 열다섯 된 딸을 영조의 계비(정순왕후)로 들여보내면서 실권을 잡으려 했다. 그때 영조의 나이는 예순 다섯이었고, 이미 궁중에는 정순왕후보다 열 살이나 많은 아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김한구는 사도세자 측과는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는 아들 김귀주(金龜柱)와 함께 외척당인 남당을 만들어서 당시 실세인 북당의 홍봉한과 대립하였다. 이들은 홍봉한을 탄핵하는데 주력해 공홍파(攻洪派)라고 불렸다. 하지만 영조가 오히려 홍봉한 등 척신들을 끼고돌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김한구는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윤급(尹汲) 등과 힘을 합쳐 홍봉한 세력을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그때 끌어들인 사람이 나경언이다.나경언은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다고 한다. 김한구 등은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을 시켜 형조를 찾아가 ‘환시(宦侍)들이 반란을 모의한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반란사건은 사안이 엄중하므로 임금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영조가 친국을 하자 나경언은 갑자기 옷소매에서 미리 준비해둔 고변서 한 장을 꺼내 바쳤다. 그 고변서에는 “세자가 일찍이 궁녀를 살해하고, 여승을 궁중에 들여 풍기를 문란시키고,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안도에 몰래 나갔으며, 북성에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라는 등 세자의 비행 10여 조가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나경언은 ‘동궁을 무함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고 자백을 하였다.충격을 받은 영조는 탕제(湯劑)와 정무(政務)를 거부하며, 세자에 대한 실망과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엉겁결에 영조 앞에 불려나온 세자는 창경궁 시민당(時敏堂)에서 20일 넘도록 대명(待命)하며 석고대죄해야 했다.억울함을 느낀 사도세자는 나경언과의 대질을 요구하였으나, 영조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이후 세자의 비행 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을 내렸다. 세자가 자결하지 않고 버티자 결국 영조는 1762년 윤5월 13일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뒤주 속에 가뒀다. 속에 갇혔던 세자는 8일 만에 굶어죽었다. 이때 사도세자의 비행과 임오화변이 있었던 그날의 상황 등은 훗날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하는 배경이 되었다.그런데, 이 사건을 세밀히 따져보면 의심이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나경언의 신분부터 보자. 남의 집 하인에 불과했는데, 일개 하인이 목숨을 걸고 일국의 세자를 고발해야할만한 동기가 있었을까? 심지어 나경언은 자신이 갖다 바친 고변서의 내용도 숙지하지 못했다. 그 배후가 의심되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 당일 판의금부사 한익모(韓翼謩)는 나경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이를 사주한 배후를 철저히 가려야한다고 주청했으나, 영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파직시켰다. 홍문관 관리들도 들고 나섰다. 바로 김종정(金鍾正)·박사해(朴師海)·남현로(南玄老)·홍지해(洪趾海)·이득배(李得培)가 그들이다. 이들은 윤5월 6일, 나경언을 빨리 역모죄로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크게 노하였다. 이 상소를 받아 준 승지 및 관리들의 파직을 명하고, 접수한 상소들을 모두 되돌려주게 하였다. 이튿날까지 영조는 분이 안 풀렸던지 상소를 올린 자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영남 바닷가(沿海)로 정배하라는 명을 내렸다.이에 따라 응교(應敎) 김종정은 청하현, 교리(校理) 박사해는 장기현, 교리(校理) 홍지해는 동래부로 귀양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날 다시 남현노(南玄老)와 김종정, 홍지해와 박사해의 배소를 서로 바꾸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홍지해가 윤5월 14일 경상도 장기로 오고, 박사해는 동래부로 귀양을 가게 된다. 영조는 이어서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문책하였다.영조의 이런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상소는 이어졌다. 홍낙순(洪樂純)과 남태제(南泰齊) 등이 나서서 ‘나경언은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 이라는 주장을 계속해서 올리자 영조의 마음도 이제는 돌아섰다. 그해 윤5월 22일, 영조는 ‘나경언의 행동이 가상하지만, 형조에 거짓으로 반란이 있다고 신고하여 임금을 놀라게 한 죄가 있다’는 이유로 결국 그를 참수하기에 이른다.이 사건으로 또 한사람이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는데, 여자였다. 바로 1762년 (영조38) 7월 11일 목중도(睦重道)의 나이어린 손녀 목애가 연좌되어 장기로 온 것이다.춘천에 살고 있던 조재호(趙載浩)는 사도세자를 구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조재호는 효순왕후(영조의 장남으로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비) 조씨의 오빠였다. 조재호는 과거에 급제한지 불과 10년 만에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사도세자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구하기 위해 뜻을 같이한 목중도 등과 함께 한양으로 왔지만, 모두 역모죄로 몰렸다. 이들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졸지에 할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장기로 온 목애는 34년간 이곳에서 관노(官奴)로 있다가 1796년(정조 20) 1월 11일에야 유배가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장기현 관아에서 썩힌 후였다.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곧바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줬다. 그리고 아버지의 불명예스런 죽음으로 세손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조치도 강구했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을 영조의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영조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륜(天倫)보다도 세손이 왕(정조)이 되었을 때 겪어야 할 다음의 정치적 상황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하지만, 1777년 재위한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후에도 사도세자를 추존해달라는 상소가 계속되었다. 이때 조선 최초로 ‘만인소’란 게 나왔다. 영남 유생 1만 57인이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위해 연명 상소를 한 것이다.노론은 둘로 갈라져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파와 그렇지 않은 벽파로 나뉘었다. 두 당파는 정조의 탕평책으로 붕당 간의 싸움이 약간은 완화되었지만,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1801)하자, 권력은 다시 노론 벽파에게 넘어갔다. 특히 노론 중에서도 왕실의 외척들 손에 조정이 좌지우지되면서 조선사회는 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2019-11-26

괘서사건과 이성 잃은 영조

경종 즉위 후 노론과 소론은 연잉군(훗날 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급기야 서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아가는 극단적 붕당싸움으로 번졌다. 이런 복잡한 시기에 경종이 갑자기 죽고 노론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즉위했다. 위기에 처한 소론의 급진세력(준소)과 남인들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이들의 불만은 결국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으로 표출되었다.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무신난이 진압된 뒤에도 또다시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두고 윤지(尹志)가 주도하였다고 하여 ‘윤지(尹志)의 난,’ 또는 옥사가 일어난 해가 1755년 을해년(乙亥年)이므로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한다.엄밀히 따지자면 을해옥사는 이해 2월에 발생한 나주괘서사건과 바로 뒤이어 5월에 일어난 ‘심정연(沈鼎衍) 시권(試卷:답안지)사건’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나주괘서사건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을 불만을 품은 소론급진 세력들의 역모로 몰아갔다. 사건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 되자 으레 그랬듯이 유3천리 경상도 장기현은 유배인들을 맞느라 분주했다. 장기로 배정된 유배인의 숫자는 확인된 것만 무려 아홉 명이나 된다. 김창대((金昌大), 이양조(李陽祚), 이석조(李錫祚), 단이(丹伊), 단이의 강보에 싸인 생후 1년 미만 된 아이, 강이노(姜二老), 이백련(李白連), 성불상 희(喜), 김몽성(金夢成)이 그들이다.이 사건의 발단은 단순했다. 1755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는 나주의 객사 망화루(望華樓) 벽에 익명의 괘서(掛書)가 붙은 사실을 보고받고 조정에 급보했다. 괘서는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 차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필시 무신여당의 행위라고 단정을 짓고 좌우 포도대장에게 기한을 주며 괘서의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수사 7일 만에 주모자로 체포된 자는 나주에 살던 윤지(尹志)였다. 그는 숙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윤취상(尹就商)은 형조판서를 지낸 인물인데, 1724년(영조 즉위)에 있었던 김일경(金一鏡·소론의 거두)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죽었다. 윤지도 그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년 만에 나주로 이배(移配)된 인물이었다.윤지는 자신의 가문을 파멸로 몰아넣은 노론과 영조를 언젠가는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세력들을 모아야 했다. 우선 아들 윤광철(尹光哲)을 통해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필묵계(筆墨契)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표면적으로는 학동들의 계모임이었지만, 실제로는 거사를 위한 비밀결사단체였다. 또 전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과 아전들도 포섭했다. 집안과 교유하던 유배인들 뿐 아니라, 서울과 충청도 지역에서도 뜻을 같이하는 집안들을 끌어들였다. 세력이 결집되자 윤지는 먼저 민심을 동요시키고자 했다. 1755년(영조 31) 정월, 그는 조정을 비방하는 익명의 글을 작성하여 처남과 집안의 노비를 시켜 몰래 나주 객사에 붙이도록 했다. 하지만 수사망을 피해나가진 못했다. 작은 고을에서 목숨을 걸고 영조를 비난할 만큼 간 큰 양반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수사는 40일간 진행되었다. 윤지와 친분관계에 있던 나주 지역의 관리와 아전들, 같은 처지에 있던 유배인들, 윤지에게 학문을 배웠던 자들, 편지를 주고받았던 서울의 소론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체포되었다. 윤지는 영조의 직접 심문을 받았으나 자백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능지처사되었다.이 해 3월 8일, 영조는 왕세자인 사도세자를 비롯한 백관과 도성의 백성들이 지켜보도록 한 뒤, 참혹하게 윤지의 아들 윤광철을 공개 처형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절대 권력을 과시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한 본보기의 하나였다. 이로써 윤취상의 집안은 아들인 윤지와 손자 윤광철까지 3대가 영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린 영조는 윤지 부자의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버렸다. 박찬신(朴纘新)은 자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즉시 남대문 밖에서 효시되었다. 이들 외에도 조정과 포도청 등에서 60여 명이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김윤(金潤)·조동하(趙東夏)·민후기(閔厚基)·민효달(閔孝達)·김주천(金柱天)·이시희(李時熙)·이명조(李明祚) 등도 공범으로 몰려 함께 참형을 당했다. 이광사(李匡師)·윤득구(尹得九) 등은 귀양을 갔다. 특히 서예가이자 양명학자로 유명한 이광사는 윤광철과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것 때문에 의금부에 하옥되었는데, 그가 참형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에 절망감을 느낀 부인 유씨는 두 아들과 일곱 살 배기 딸 하나를 두고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친국 끝에 종신유배형을 받은 이광사는 총 23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유배지 신지도(薪智島)에서 생을 마감했다.이 사건으로 모두 65명이 화를 입었다. 영조 재위기간에 모두 열다섯 차례의 괘서사건이 발생했는데, 단일 괘서사건으로 가장 많은 인명이 살상된 것이다.피비린내가 잠시 멈춘 그해 3월 20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김창대(金昌大)는 사건 연루자인 임천대(林天大)와 같이 나주에서 조직한 필묵계 계원 중 한 사람이었다. 또 그보다 열흘 뒤에 장기현에 도착한 이양조(李陽祚)와 이석조(李錫祚)는 참형을 당한 이명조의 동생들이었다. 이들은 한양 사람들로서 윤광철과 교유했다는 이유로 화를 입었다.영조는 나주괘서사건을 처리한 후 종묘에 나가 역적들을 토벌했다고 고하고, 5월 2일에 춘당대(春塘臺)에서 특별과거시험인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를 열었다. 나주 괘서사건이 마무리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실시한 특별과거시험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시험장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험 답안지(試券)에 콩알만 한 작은 글씨로 영조의 치세와 조정의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비판하는 내용과, 익명의 투서까지 함께 나왔던 것이다. 영조실록에는 답안지와 같이 제출한 투서의 내용이 너무 적나라하여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 있다.조사결과 주인공은 나이 스물아홉의 심정연이었다. 심정연은 본관이 청송(靑松)이고,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무신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이미 큰 화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 심수관(沈受觀)과 형인 심성연(沈成衍)·심익연(沈益衍)이 모두 무신난 때 죽임을 당했다. 심정연은 친국하는 영조에게 ‘이는 일생 동안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으로 과장(科場)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써 두었던 것’이라고 답했다.심정연은 윤지의 숙부 윤혜(尹惠)와 모의했으며, 김일경의 종손인 김요채(金耀采)·김요백(金耀白) 등과 같이 춘천에서 거병(擧兵)을 계획했다고 자백했다. 사건은 이제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윤혜를 비롯한 여러 명이 춘천에서 잡혀왔다. 영조는 갑옷을 입고 숭례문의 누각에 서서 그들의 심문을 감독했다. 윤혜로부터 압수한 문서에는 선왕들의 휘(諱:이름)가 적혀 있었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내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참고하려고 썼다’고 태연스럽게 답했다. 영조가 주장(朱杖:붉은 곤장)으로 마구 치게 했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종묘로 달려간 영조가 엎드려 ‘저의 부덕으로 욕이 종묘에 까지 미쳤으니 제가 어떻게 살겠습니까?’라고 흐느낄 정도로 선왕들의 휘는 금기였던 것이다.윤혜가 드디어 대역부도의 죄를 시인하자 영조는 대취타(大吹打:군악)를 울리도록 지시했다. 훈련대장 김성응(金聖應)에게는 윤혜를 효수(梟首)하게 한 후, 그 머리를 깃대 끝에 매달고 여러 백관에게 돌아가며 조리돌리도록 명했다. 이를 말리는 판부사 이종성을 곧바로 귀양보내고, 즉시 윤혜의 머리를 바치지 않은 김성응에게는 곤장까지 친 후 귀양을 보내버렸다. 영조실록에도 이때 영조는 ‘술에 취해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분노 속에 이성을 상실한 영조는 그나마 남아 있던 소론세력들을 대거 숙청하기에 이른다.심정연은 주모자 윤혜·김도성(金道成)·신치윤(申致雲)·강몽협(姜夢協)·강몽상(姜夢相)·유봉린(柳鳳麟)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이 밖에도 김일경의 일파라고 하여 김인제(金寅濟)·박사집(朴師緝)·이전(李佺)·이준(李峻)·유수원(柳壽垣)·김성(金渻) 등도 참형을 당했고, 그 가족들이 연좌된 것이다. 아울러 심정연 등이 춘천부의 사람들이었으므로 춘천부가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유수원이 충주 출신이었으므로 충주목(牧)이 충원현(縣)으로 강등되었다.그 여파는 동해 땅 끝 장기고을까지 흘러들어 왔다. 1755년 (영조31) 5월 14일, 강몽상의 처 단이(丹伊)와 그해 출생하여 아직 이름도 짓지 못했던 아들 하나, 그리고 조카 강이노(姜二老)가 유배객의 신분이 되어 장기현으로 왔다. 강몽상은 강몽협의 사촌 동생인데, 60여 명으로 춘천부(春川府)를 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그해 5월 18일에는 이준(李埈)의 손자 백련(白連), 며느리(子婦) 희(喜)가 왔고, 6월 9일에는 김성(金渻)의 서질 아들 김몽성(金夢成)이 장기로 왔다.연달아 일어난 이 두 사건으로 처형당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달했다. 영조는 이미 지난 무신난 때 용서해 줬던 사건의 관련자들을 다시 역적으로 규정짓고 해당 가족들을 연좌시켜 처단하기도 했다. 또 이종성(李宗城)·박문수(朴文秀) 등 극소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소론 온건파들도 모두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해 11월, 영조는 이를 계기로 천의소감(闡義昭鑑)이란 책자를 펴냈다. 을해옥사에 연루된 인사들의 숙청, 왕위계승 과정, 재위 기간에 발생한 옥사 처리의 정치적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서였다.다음 해인 1756년(영조 32) 2월, 영조는 노론에서 정신적 지주로 삼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다. 드디어 노론이 한 당파의 이념을 뛰어 넘어 국가의 이념임을 선포한 셈이었다. 소론과 남인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정도로 전락하였고, 노론들의 독주가 진행되었다. 아울러 전제군주가 된 영조는 어지간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자신이 원하는 일은 밀어붙였다. 균역법의 전면 실시, 서얼의 등용 등 영조 후반의 과감한 제도개혁은 이처럼 광기(狂氣)의 피비린내 나는 굿판을 벌이고 나서야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1-19

유토피아를 꿈꾼 사람들

어떤 이는 영·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탕평책을 실시해서 붕당의 폐해를 줄이려 했고, 세금 부담을 들어주기 위한 균역법을 실시했다.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신문고를 부활하는가 하면 학문과 제도를 정비했고, 많은 책을 펴내 문화발전에 도 기여를 했다. 규장각을 짓게 하고 정약용, 박제가 같은 숱한 인재들도 나왔다. 새로운 학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실학이 점차 뿌리를 내린 것도 이시기였다.이런 치적들이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통치한 18세기는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역모사건이 많았다. 정감록과 같은 조선왕조의 몰락을 예언한 서적들이 급속하게 퍼져 나간 것도 이때였다. 이들 비결서(秘訣書)들이 역모세력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때의 ‘역모사건’이란 ‘왕권과 지배계층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말한다. 현재로 치면 정치적 집단 간의 정견의 차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데모나 집회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때문에 이 시기에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유배객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모두가 역모사건에 엮였거나 아니면 연좌된 그 가족들이었다. 1748년(영조24) 2월 29일 장기로 온 심해용(沈海容)과 1760년(영조36) 3월 21일 유배를 온 이광필(李光弼)은 이색·이염의 모반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다. 또 1755년(영조 31) 3월 17일에 장기로 온 이차원(李次願)은 권혜·권집의 모반사건에 연좌된 왕실의 여자였다. 이 두 사건의 당색은 1728년(영조4) 3월에 일어난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과 맥을 같이했다. 무신당(戊申黨)과 뜻을 같이하는 남인계열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반영조의 기치를 내걸고 모반을 시도했던 것이다.무신난 잔당들은 하나같이 백성들을 선동하는 수단으로 괘서를 내걸었다. 이때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것이 정감록(鄭鑑錄이었다. 정감록에는 ‘조선은 운명이 다했으니 진인(眞人)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간다’는 예언이 적혀있었다. 이는 기존의 도참설에 비해 역성혁명과 이상사회의 지향에 대한 논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기에 난의 주모자들은 이를 통해 민심을 얻고자 했다.흔히 무신난의 핵심인물로는 이인좌를 꼽지만, 그에 못지않게 황진기(黃鎭紀)란 불가사의한 인물이 있었다. 선전관으로 있다가 무신난에 가담했던 그는 이인좌와는 달리 그때 잡히지도 않았다.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황진기는 역적임에도 지략과 검술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황진기 아버지 황부(黃溥)는 함경도 경흥부사(종3품)로 무신난에 가담했다가 1728년(영조4) 6월에 잡혀 죽었다. 그는 죽었지만 아들 황진기가 홀연히 나타나더니 백성들의 이상향을 충족시켜줄 구심체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졸지에 나타난 황진기는 정감록에서 예언한 정도령과 함께 그 시대의 ‘메시아’요 ‘미륵’과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던 것이다.동해 가운데 삼봉도(三峯島)라는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은 둘레가 매우 크고 사람도 많으나 옛날부터 나라의 교화를 벗어나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섬이라고 했다. 황진기는 이 섬에 살고 있었다. 때가되면 가난하고 미천한 자를 위해 망명 역적인 그가 장군이 되어 진인(鄭眞) 정씨를 모시고 울릉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에게 청주와 문의(충청도 청원군 문의면)가 먼저 함락되고, 곧이어 한양이 함락될 것이라고 했다. 그 후에는 이(李)씨 대신에 정(鄭)씨가 들어서서 가난 없고 귀천 없는 새 세상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게 이른바 해도진인(海島眞人) 설이다.황진기가 등장하는 해도진인설에는 전설의 저 편으로 숨은 아틀란티스와 같은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그곳은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진 도시라고 했다. 나라가 부유해 백성들은 세금 걱정이 없었다. 강력한 군대가 있어 전쟁걱정도 없었다.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초(超)고대문명이 전설만을 남기고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바로 아틀란티스 이야기다. 해도진인설에 등장하는 미지의 섬 ‘삼봉도’는 조선의 아틀란티스였다. 조선지배층의 부패와 부조리, 차별 등을 타파하고 삼봉도에서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타난 황진기는 그래서 모든 백성들의 구세주요 영웅이었다. 대부분의 모반사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무신난으로부터 17년의 세월이 흐른 1745년 12월, 황진기는 충청도 서산에 있는 가야산 백암사(白巖寺)의 승려로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무신난 때 핵심역할을 하다가 처단된 사람들의 가족들을 끌어 모았다. 황진기는 이들을 이끌고 전라도 낙도(樂島)에서 영조 타도를 외치며 또다시 봉기를 했다. 이들은 황해·평안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오랑캐들을 불러들여 평안·함경도 북변(北邊) 땅을 점령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난의 주동자들이 모두 잡혀 영조의 친국을 받고 능지처사되었지만, 이번에도 황진기는 청(淸)나라로 도피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흔치않은 망명사건이 발생하면서 영조와 조정은 바짝 긴장했다. 황진기가 이미 처벌된 무리의 일당들과 연락해서 다시 역모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를 잡기 위해 청나라로 군사를 보내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국내외 어느 곳에서도 황진기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 뒤에도 황진기는 ‘평안도에서 중이 되었다’ ‘충남 가야산에서 은둔했다’는 등의 소문만 무성했고, 20년이 넘도록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 때 180여 개에 달했다던 충남 가야산의 절집은 그가 도피했다는 풍문이 돈 이후에는 거의 폐사가 됐다고 한다.조정은 황진기 대신 그의 가족들을 잡아와 고문을 하고 닦달했다. 1752년(영조28) 11월 9일에는 황진기의 아들 황영(黃英)이 붙잡혀와 포도청에서 조사를 받다가 죽었다. 하지만 황진기는 그 후 수많은 수배령에도 끝내 붙잡히지 않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745년(영조 21) 10월, 무신여당 이색과 이염 등이 모반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영조의 친국을 받았다. 흉서를 만들어 한양에서 퍼트리다가 붙잡힌 것이다. 이색은 무신난에 가담한 이순관(李順觀)의 친척으로 남인계열이었다. 이염 역시 무신난에 연루되어 능지처사된 이만구(李萬衢)의 숙부였다.이들이 지은 흉서의 내용에도 황진기가 등장한다. 황진기가 칠보사(七寶寺)의 중이 되었다가 모반하여 승군을 조직하였고, 그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북변을 할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색은 황진기가 지금은 환속해서 무산(茂山)에서 살고 있다며 민중을 선동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말을 믿고 육진(六鎭) 일대 지리에 익숙한 오위장 이양중(李陽重)에게 명하여 황진기를 붙잡도록 했다. 이양중이 국경지대로 나가 탐문했으나 헛수고였다.이색·이염의 괘서사건은 모반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당사자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능지처사되었다. 이때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 온 심해용은 역적으로 몰린 이색의 생질이었다. 이색과 이염은 이미 3년 전에 처형되었지만, 1748년에 와서 심해용도 그때의 역모사건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이 괘서사건은 그 후에도 계속 여파가 미쳐 1760년(영조36) 3월 21일 이광필이 같은 무리로 몰려 장기로 유배되어 왔다. 그는 고치룡(高致龍)과 중(僧) 청윤(淸潤) 등과 함께 잡술(雜術)을 가지고 나쁜 무리들을 종용하였다는 이유였다.한편, 1748년(영조 24) 11월에는 권혜(權嵇) · 권집(權鏶)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권혜는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의 외손자로서 당시 열여덟 청년이었다. 이증은 효종의 4세손으로, 영조와 8촌간이다. 영조의 근친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증은 영조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다. 1743년 이증은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과 더불어 사도세자의 관례(冠禮)를 주재하기도 했다. 영조는 이증의 집 사당에 제14대 선조의 서자인 왕자 의창군, 인조의 막내아들인 낙선군의 신위 뿐 아니라,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신위를 옮겨 제사를 지낼 정도로 그를 아꼈다.그런데 1748년 11월, 이증의 집 묘당(廟堂)에서 괴이한 투서가 발견되었다. 국문(鞫問)결과 놀랍게도 그 투서는 이증의 동생인 이학(李學)과 외손인 권혜·권집 형제가 작성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증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역모혐의를 덮어선 이증은 삼사로부터 집요한 탄핵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죽었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755년(영조 31)까지 삼사의 끈질긴 탄핵이 이루어졌다. 그해 3월 17일 이증의 딸이자 권혜의 어머니인 이차원(李次願)이 이 사건에 연좌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이는 왕실의 딸이 장기로 유배를 온 최초의 사례가 된다.이처럼 18세기부터 일어난 각종 반란이나 대규모 민란에는 거의 정감록이 등장했다.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만민 평등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정감록의 예언은 조정에서 밀려난 양반들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초들에게 조선판 ‘유토피아’였다.돌이켜보면, 조선 후기 백성들은 자연재해에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정치도 평탄치는 않았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고 법전을 정비하며 혼탁한 사회를 정비하였다고는 하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당파싸움은 근절되지 않았다. 이에 지배계층에 저항하는 무리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정계에서 배제된 양반들이 동조 세력을 규합하고 거사를 추진했다. 이들은 이상사회 구현을 목표로 삼았다. 이때마다 정감록이 사상적 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이런 반체제 변혁 운동이 꿈틀거리고 있었음에도 18세기 조선의 지배계층은 위기의식이 없었다. 그들은 영·정조라는 현명한 군주와 함께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학문 또는 예술의 부활을 꿈꾸며 백성들의 요구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은 그저 부덕하고 불손한 역모자들에 불과했다.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홍경래의 난,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왕조체제 붕괴라는 무서운 대가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대가는 시대의 경고를 무시해 버린 왕실과 조정 뿐 아니라 힘없는 민초들까지도, 꺼져 들어가는 패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1-12

읍호(邑號)를 강등하라

1739년(영조15) 10월 11일, 전라도 남원에 사는 양재육(梁再六)이란 사람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땟국이 꾀죄죄하게 흐르는 찢어진 옷, 헝클어진 머리에 오목한 눈만 번들거리는 그의 몰골에서, 걸어온 ‘유3천리’ 유배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실감케 했다.양재육은 평범한 농부였다. 헌데 그가 동해안 땅 끝 고을인 여기까지 흘러온 사연은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로 유명한 저 남원부(南原府)를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킬 만큼 큰 사건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읍호(邑號)는 고을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고을의 위격(位格)’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들은 집단적 상벌 조치의 하나로 읍호를 올리거나 내림으로써 왕실에 대한 충성과 협조를 강요했다. 왕비의 출신지나 왕의 태실을 봉안하는 곳 , 또는 왕사나 국사의 고향과 같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을은 읍호가 승급된다. 반면에 고을에서 삼강(三綱:군신·부자·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과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의 5가지 기본적 덕목)의 도덕을 심하게 위반한 강상죄인(綱常罪人)이나 대역죄인이 발생한 고을은 읍호가 강등되기도 했다. 나름의 효과가 있었기에 조선 내내 왕들은 지방통제의 수단으로서 이 제도를 자주 이용하였다.장기현이 속한 경주부도 ‘읍호강등’의 수모를 겪은 곳이다. 1650년(효종 원년) 경주부의 속현으로 있던 기계(杞溪·현재 포항 기계면)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천에서 도망해 온 종 대립(大立)이란 자가 기계로 도망을 와서 숨어 살고 있었다. 본 주인이 어떻게 알고 그를 찾아와 잡으려 하자, 그는 도리어 그 주인을 죽여 버렸다.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이 사건은 강상죄에 해당되었으므로 대립은 처형되었고, 경주부(府)의 읍호는 강등되어 경주목(牧)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살인이 일어난 곳은 경주부 기계현이지만, 죽은 주인과 종 대립은 사실상 예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게 전개됐다. 본래 강등된 읍호는 10년이 지나야 승호하였지만, 이 사건은 8년 후 다시 부(府)로 승격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년 뒤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관내에서 발생했다.1665년(현종6) 8월, 경주부 서면(西面)에 사는 이경무(李慶楙)가 아내를 박대하자 그의 아내 곽영(郭英)이 원한을 품고 아들 이만(李萬)과 공모하여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이들 모자는 집에서 거느리는 노비 옥매(玉梅)와 같은 집에 살고 있던 임용(林龍)·사남(士男)·최덕창(崔德昌)·암외(巖外)·치만(致萬) 등과 함께 밤을 틈타 경무를 돌로 쳐 죽였다. 조정은 이를 강상윤리를 위반한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하여 매우 엄중하게 다스렸다. 임금이 특별히 경차관(敬差官) 신후재(申厚載)를 내려 보내 조사하게 했다. 후재가 미처 경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곽영은 옥에서 죽었다. 이만 및 같은 패거리들이 범죄사실을 순순히 자백하였으므로 모두 한양으로 압송해가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이들처럼 극도로 흉악무도한 자는 잠시라도 이 땅에서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그믐과 보름의 금기에 구애받지 말고 즉시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덩달아 경주부윤은 종2품에서 2등급이나 낮은 종3품 부사로 강등되었다. 이 사건은 죄질이 매우 좋지 않았기에 경주가 다시 부윤이 부임하는 부(府)로 승호하는 데는 14년이나 걸렸다.영조 시대에는 남인들과 준소(峻少·소론 강경파)들의 입지가 너무 좁았다. 영조 4년의 무신난(이인좌의 난)은 정계에서 배제되고 중앙의 실권에서 멀어진 남인과 소외된 준소 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반란 이후에도 뚜렷한 대안이나 해결책이 없던 현실 속에서 이들은 영조와 노론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지만, 재위기간 중 반을 넘는 전반기 30여 년을 각종 모반과 반역에 시달리면서 불안하게 보냈다.1733년(영조9) 7월, 남원의 성 변두리에서 괘서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을 비난하고 정부의 관리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리고 글 아래쪽에 이여매(李汝梅)와 이여진(李汝榛) 형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관에서는 이들 형제를 즉시 체포하여 추궁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고을을 탐문하던 남원현감은 김영건의 집에 똑 같은 흉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체포하여 추궁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 괘서사건의 주모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영건과 그 아들들은 이여매 형제와 평소 원한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처벌받게 할 목적으로 괘서 아래쪽에 마치 이 형제가 그 글을 작성한 것처럼 이름을 적어 넣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김영건을 비롯한 김원팔 형제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1739년(영조15)에 일어난 양찬규(梁纘揆)의 옥사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이미 무신난이 일어난 지 11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그동안 관련자들이 다수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남원 지역에서는 여전히 무신난의 재현을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양찬규의 모반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표면에 드러났다.사건의 내용은 이랬다. 1739년 9월 16일, 두 남자가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집에 찾아와 문지기에게 남원에 사는 친척이라고 전하며 주인 만나기를 청했다. 김주신은 숙종의 장인이었다. 그러나 행색이 초라한 이들을 보고 문지기가 밖에서 쫓아버렸다. 얼마지 않아 이들이 다시 찾아와 이번에는 서장(書狀·편지)을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전해야 한다고 했다. 종들이 ‘여기는 서장을 바치는 곳이 아니다’ 라고 하며 또 쫓았으나, 뭔가 꺼림칙하여 포도청에 이런 사실을 신고하였다. 포도청에서는 이들의 뒤를 밟아 그 중의 한 사람을 잡아 성명을 물어보니 양찬규라고 했다. 그의 주머니를 수색해보니 봉투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부원군 집에 바치는 글이었고, 하나는 ‘감고원몽(感故園夢)’이란 제목이 달린 글이었는데 거의 200구(句)나 되는 것이었다. 그 글들의 내용은 요사하고 간악하였고, 기괴한 말이 많았다.우포장 구성임(具聖任)은 우선 사람은 석방하고 그런 사실이 있음을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알렸다. 김재로는 구성임을 대동하여 증거물을 가지고 영조에게 가서 ‘어떤 미친놈이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보고를 했다. 실제로 양찬귀는 자신이 왕자라고 자청하는 등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녔던 것이다.그런데, 영조의 생각은 달랐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필시 무슨 음모가 있을 것이고, 그 배후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친국을 열었다. 얼마 후 다시 잡혀온 양찬규·양안귀 형제는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했다. 자신들이 남원에 살고 있는 일가친척들과 광주에 사는 백성 최태원, 이덕방 등과 함께 호남의 괘서를 짓고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영조는 반드시 이들이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의 거두 김일경·박필몽의 잔당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선 양찬규 형제를 대역부도죄로 참형에 처하고, 남원부를 일신현으로 혁파하는 조치를 내렸다. 당시 남원부사 권감(權瑊)에게도 책임을 물어 즉시 파직시켰다. 이어서 남원과 호남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관련자들을 전부 잡아들여 추국했다. 이 과정에서 더러는 고문으로 죽고 남은 사람들은 극변으로 유배되어 갔다.그 후에도 영조는 미심쩍었든지 암행어사 이이장(李彝章)을 남원에 파견하여 동정을 살폈으나, 역모를 꾸몄다는 정황은 찾지 못했다. 오히려 평소 양찬규와 그의 아우 양안귀는 무명옷 속에 들어있는 솜을 빼내어 술을 사먹기도 했고, 패랭이에 용을 그려 머리에 쓰고 다니는가 하면, 사람들이 바늘로 두렵게 하면 겁을 먹고 달아나는 등 미치고 실성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다녔다는 진술만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양찬규의 옥사는 두고두고 신빙성에 의문이 가는 사건이었다.어찌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 옥사에 연좌되어 장기로 유배를 온 양재육은 양찬규의 삼촌이었다. 이 사건으로 양찬규의 또 다른 삼촌인 양재구(梁再九)·양재팔(梁再八)·양재오(梁再五)도 모두 연좌되어 먼 곳으로 유배를 갔다.읍호가 강등된 남원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부로 승격이 되었다. 그때 파직된 남원부사 권감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다행히 다시 서용되어 1744년(영조20) 동지중추부사(종2품)가 되었다.한편, 양찬규의 옥사가 있은 지 23년이 흘렀다. 1762년(영조38) 8월 4일이었다. 이번에는 전라도 담양도호부(都護府)의 읍호를 담양군으로 강등시키면서 장기현으로 유배 온 가족들이 있었다. 이홍범(李弘範)의 손녀 이황(李黃)과 이광(李光)이 그들이다. 이홍범은 담양좌수(潭陽座首)로 있으면서 영조를 망측스러운 말로 비방했던 사실이 3년 후에 밝혀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홍범·이창거·이상필·이세진이 역모죄로 참형을 당하고 가족들은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와 노비가 된 것이다.담양은 고려 때는 현(縣)이었으나 1395년(태조 4) 국사 조구의 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였다. 다시 1399년(정종 1) 정종의 비 김씨의 외가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부로 승격한 뒤, 1413년(태종 13) 담양도호부가 되었다. 이런 도호부가 1762년에 와서 역적 이홍범의 태생지라 하여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던 것이다. 이때 강등된 담양은 10년 후인 1772년 담양도호부로 다시 승격되었다.이후에도 무신난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영조가 사색당파를 고루 탕평했다고는 하지만 남인과 준소 세력이 정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은 괘서, 비기, 투서 등의 형태로 계속 표출되었다. 1748년(영조 24) 권혜·권집의 투서 사건, 1755년(영조 31)의 이하징·윤지의 괘서 사건, 신치운·심정연 흉서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모두 무신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건들이었다. 덩달아 유3천리 경상도 장기현은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소론(준소)들의 적거지(謫居地)로 자주 이용되었다. 유배객들이 늘어감에 따라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할 장기현 아전과 백성들의 시름도 이에 비례하여 깊어만 갔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1-05

매흉(埋兇)으로 왕자를 죽이다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이 끝난 1728년 11월이었다. 영조의 외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홀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세자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그로부터 2년 뒤인 1730년(영조6) 3월, 궁궐 안에서 매흉((埋兇)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매흉이란 저주를 통해 왕과 세자 등 왕실의 가족들을 병들게 하거나 죽기를 바라는 뜻으로 흉한 물건을 일정한 곳에 묻는 것이고, 화흉(和兇)은 이 저주물들을 왕실 가족에게 먹이는 독살기도를 말한다.과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추국(왕명으로 의금부에서 수행한 중죄인의 심문)결과 2년 전 무신난에서 피해를 본 소론과 남인 일파들의 짓임이 밝혀졌다. 이들은 궁녀들을 사주하여 궁궐 안 곳곳에 사람의 뼛가루와 흉물을 묻어놓았고, 그런 흉물을 음식물에 섞어 세자와 공주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한 궁녀는 임금이 쓰는 뒷간부근 흙을 식칼로 판 뒤 저주의 말을 읊으면서 인골을 묻었다며 자백도 했다.이 해괴망측한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보면, 보통 사람의 상식과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효장세자의 이름은 행(緈), 아명은 만복(萬福), 자는 성경(聖敬)이다. 1719년(숙종45) 2월 15일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빈이씨는 동궁전 나인(內人)이었는데, 영조가 연잉군 시절 사가로 불러들여 첩으로 삼은 여인이다. 1721년(경종1) 8월 연잉군이 노론의 적극적인 지지로 왕세제가 되었을 때 정빈이씨도 내명부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효장세자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남의 품에서 자란 것이다.1724년(경종4)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훈 이씨는 내명부 정4품 소원(昭媛)에 추증되었고, 아들 이행은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1725년(영조1) 2월, 우윤 심정보, 예조판서 민진원이 경의군을 왕세자로 봉하자는 상소에 따라 영조는 경의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3월 20일 인정전에서 책봉례를 거행했다. 그때부터 효장세자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서연(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에 참여하여 왕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효장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다. 1727년(영조3) 9월, 영조는 풍양조씨 가문의 이조 참의 조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고, 세자빈은 그 보다 세 살 위인 열두 살이었다. 세자빈 조씨는 성품이 온유하고 다정다감해서 시아버지 영조의 마음에 쏙 들었다. 똑똑한 왕세자와 착한 며느리를 바라보면서 영조는 당쟁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조정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길지가 않았다.잠시 필름을 과거로 돌려보자. 1728년(영조4) 3월, 이인좌 등 남인과 소론 강경파들이 밀풍군 이탄을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이 소론 온건파 계열(緩少系列)의 영의정 이광좌, 병조판서 오명항 등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반란은 한 달여 만에 진압되었다. 영조는 당쟁이 국왕을 끌어내리려는 반란으로 비화하자 새삼 붕당의 폐해를 절감했다. 하지만 당쟁이란 것이 원래 정치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그래서 국왕으로서 이를 무작정 배척하기보다는 양자를 공평하게 등용하여 조정에 참여시키는 탕평책까지 구상했다.한데 그해 11월, 효장세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그달 16일 경복궁 자선당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효장세자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굳고 효성이 지극했다. 졸지에 믿고 사랑했던 후계자를 잃은 영조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임금이 자식을 잃고 애절하게 통곡하자 입시하고 있던 신하들까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고 한다.1729년(영조5) 1월 13일, 영조는 죽은 왕세자의 시호를 효장(孝章)으로 정했다. 지혜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고, 경건하고 신중하며 고상하고 현명한 것을 장(章)이라 했다. 효장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가례(嘉禮)를 치른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세자빈 조씨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합방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청상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1730년(영조6) 봄바람에 아지랑이가 나부낄 3월이었다. 그러고 보니 효장세자가 죽은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영조가 궁궐 내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여러 전각 근처에서 흉물이 묻혀있는 흔적을 발견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영조는 바로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소론 일당의 지시를 받은 궁녀 박순정, 김순혜, 무당 태자 등이 과부 이세정으로부터 건네받은 사람의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동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었고, 예전부터 그것을 음식에 타서 왕세자와 강보에 싸인 네 명의 옹주에게 먹였다고 자백했다. 이를 먹은 화순옹주는 홍진과 함께 하혈 증세로 시달렸다. 영조는 비로소 효장세자의 죽음이 저들의 지속적인 매흉(埋兇)과 화흉(和凶) 탓임을 알게 되었다. 영조의 놀라움과 분개는 극에 달했다. 그달 9일자 영조실록의 기사에는 분개한 영조의 목소리가 가감 없이 실려 있다.궐내에서 매흉과 화흉을 직접 행동에 옮긴 박순정은 효장세자를 두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보살폈던 최측근 궁녀였으니, 영조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효장세자가 요양을 위해 거처를 옮겼을 때도 계속 따라다니며 독수(毒手)를 펼쳤다. 그녀가 세자에게 먹인 뼛가루의 재료는 대현산(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여러 무덤에서 채취했거나, 길가에 거적으로 말아놓은 개가 뜯어 먹다만 시체, 혹은 불에 탄 사람의 해골이었다. 끼니 때마다 그처럼 비위생적인 흉물을 섭취한 효장세자는 단기간에 위중한 상태에 빠져들었고, 병의 원인을 알 리 없는 의관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효장세자의 사인이 밝혀지면서 충격을 받은 영조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사건 당일 영조는 대신들과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 당상, 좌·우포도대장을 불러들인 다음 새벽 3시에 국청을 열고 죄인들을 심문했다. 주모자 박순정과 이세정, 그들을 도와 궐내에 흉물을 묻거나 먹인 궁녀들과 여종들이 모조리 처형됐다.조사가 진행될수록 이 사건의 배후 인물은 궁궐 밖으로 확대됐다. 가장 먼저 조사 대상에 오른 사람은 가선대부 박도창(朴道昌)이었다. 그는 무신난 이전에 강성파 소론계인 전라감사 황이장, 권첨, 정사효의 군관을 차례로 지내며 명성을 얻었고, 진휼을 잘해서 종2품 당상관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또한 박도창은 순천 방답진(防踏鎭)에 노비 수백여 명을 거느리고 있던 재력가였고, 장흥 등 바닷가 인근 읍의 뱃사람들과도 모두 친했으므로 따르는 세력들도 상당했다. 그와 공모한 자들도 있었다. 정사효의 첫째 아들 정도륭, 정사효의 둘째아들이자 여흥군의 매부인 정도중, 그리고 정사효의 서얼 동생 정사공 등이 박도창과 함께 이 일을 꾸민 것으로 밝혀졌다.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무신난에 가담한 혐의로 국문을 받다가 죽은 인물이고,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가 지난 무신난에서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었다.이 사건에서 박도창은 궁궐안의 사람들과 결탁하고 내통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여종 하복랑을 궁궐로 들여보내 궁녀들에게 뼛가루 등 흉물을 넘겨주었고, 소요되는 비용은 정도륭이 지원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소론과 남인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을 제거해야 하고, 노론을 제거하려면 그들이 받드는 영조를 제거해야 했다. 바로 그 시작이 임금의 피붙이인 세자와 옹주들의 제거였다. 반란에 성공을 하면 양원군(성종의 15남)의 아들인 여흥군 이해(李垓)나 여릉군 이기(李圻)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이었다.이 무렵 영조를 놀라게 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엽기적인 매흉·화흉 사건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4월 중순이었다. 19세의 어린 환관 최필웅 등 여러 명이 한밤중에 궁궐 담장을 넘어갔다가 체포된 것이다. 부쩍 의심을 품은 영조가 앞서 있었던 매흉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엄중한 심문을 명했다. 심한 낙형(烙刑·불에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져 고문을 가하는 신문)을 견디지 못한 최필웅은 자신이 정사효의 일가붙이인 남인 박재창의 지시에 따랐다고 자백했다. 박재창이 일단의 노비들을 궐내에 잠입시켜 미리 구입한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고, 궁인들이 놀라 뛰쳐나가면 자객 이태건이 임금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연이어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은 같은 무리의 사람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이었던 것이다.경술년(1730) 이 해 이 두 모반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약 200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조사는 1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상궁, 환관 등 사건을 일으킨 직접 당사자들은 즉시 처형되었다. 그리고 무신난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던 정사효, 권첨, 목중형의 핵심 세력들과 그 이전에 김일경 상소에 동참했으나 영조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이진유, 윤성시, 서종하 등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또한 무신년 당시 괘서사건에 관련되었다가 살아남은 나머지 인물들도 이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모두 처형되거나 신문을 받던 중 고문으로 죽었다.아이러니하게도, 경술년에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였던 반대세력들을 뿌리째 제거할 수 있었다. 남인과 강경파 소론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영조와 노론에게 완전히 진압당하면서 재기불능 상태로 추락하고 만다. 수십 년에 걸친 남인· 준소((峻少)와 영조의 대결은 결국 영조의 완판승리로 끝이 났고, 한계를 여실이 드러낸 탕평정책도 막을 내렸다. 이후 정국은 노론의 일방적 독주로 전개가 되었다.이 희대의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도창은 심문도중에 독살을 당했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매질을 견디기 힘들었던 본인들의 뜻도 있었으나, 죄를 시인하게 되면 가족들은 연좌를 당하게 될 것이며, 가산도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염려한 집안사람들이 의금부 나장에게 뇌물을 주고 독약을 타 먹여 죽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이다.박도창은 그렇게 죽었지만, 연좌된 첩 덕순(順德)과 첩의 아들 아지(阿只), 첩의 딸 영애(永愛)가 이 엄청난 사건의 뒷이야기를 짊어지고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그게 1730년 4월 29일이었다.당쟁은 선악의 측면이 공존한다. 그 나름의 이념과 제도를 갖추어 적절하게 운영하면 사회발전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 된다. 어린 세자와 옹주들에게 무덤에서 파온 부패한 인골을 갈아 먹였다는 이 사실이 부끄럽게도 영조실록에 정사(正史)로 기록되어 있다. 당리당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당쟁의 폐해를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뜻일 거다. 당쟁은 시대적으로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다만 그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0-29

‘불에는 불’로 맞선 영조의 한 수

영조가 왕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인 1728년 3월, 당시 야당이었던 이인좌(李麟佐) 등이 정권 탈취를 기도하며 난(亂)을 일으켰다. 이 난의 특징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란 점이다. 난이 평정되자 ‘유3천리’에 처해진 연좌인 10명이 각자의 사연을 짊어지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왔다.골수 남인인 이인좌(34세)는 세종대왕의 11세손이었다. 선대 때부터 청주목 송면(松面.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일원에서 살고 있었다. 청천면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제향한 화양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이인좌는 노론의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그들의 위세를 보며 자랐다. 이인좌는 남인이 축출된 1680년(숙종6) 3월의 경신대출척 때 서인에게 사사된 윤휴(尹鑴)의 손녀사위였다. 이런 태생적 여건으로 그는 노론이 집권할 당시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입신(立身)이 어려운 처지였다. 더구나 1694년(숙종20) 갑술환국(폐비민씨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이후 그를 포함한 일족들은 과거시험 응시조차 할 수 없는 폐족(廢族)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가 노론에서 추대한 영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세력을 모아 난을 주도한 것이다.이인좌의 난은 전국적인 내란이었다. 그래서 그 명칭도 지방마다 다르다. 경상도에서는 거창의 정희량이 주도를 하였으므로 정희량의 난,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주도를 했으므로 박필현의 난, 충청도에서는 청주일대의 이인좌가 주도를 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고 한다. 또 누렁 원숭이의 해인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그냥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불린다. 이 난의 내막부터 진압과정을 살펴보면 영조의 탕평정치에 대한 노련한 한 수가 돋보인다.왕이 되기 전 영조는 붕당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임금이 된 후에는 탕평책(蕩平策)을 본격적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를 왕좌에 앉히기까지 공을 들인 노론인사들이 가만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론들은 지난 1721년(경종 1)~1722년 사이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부터 묻고 나왔다. 가장 먼저 말문을 튼 이는 이의연(李義淵)이었다. 지난날 처형된 노론 대신들을 신원(伸寃)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청이었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연합정권이 성립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이의연은 오히려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귀양을 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노론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해 신임옥사를 주도한 김일경을 처벌해야 된다는 상소가 각처에서 연달아 들어왔다. 결국 영조는 김일경과 임인년 고변으로 공신이 된 목호룡을 잡아와 국청(鞫廳)을 열었다. 이들은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후원자인 경종도 이미 죽었고, 어디 기댈 곳이 없었던 소론들은 이제 모두 제 얼굴빛이 아니었다. 천만다행인 것이 그래도 영조가 탕평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조는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면서까지 소론에 대한 탄압을 하면서도 소론의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되도록 붕당을 막아보려고 노력한 결과였다.하지만 영조의 이런 정책에 맞서는 노론의 공격은 집요했다. 결국 영조는 신임옥사 때 노론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앞장 선 이진유 등 여섯 명을 귀양 보냈다. 이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대신들도 조정에서 내쫓고, 민진원과 정호(鄭澔) 등 노론세력들을 영입했다. 득세는 했지만 노론들은 영조의 솜방망이 처분을 못마땅해 했다. 귀양을 보낼게 아니라 이광좌 등 여섯 명은 반드시 참형에 처해야 한다며 계속해서 들볶았다. 참다못한 영조가 발끈했다. 노론 대신들이 무고와 모함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들을 밝혔고, 원통한 것을 풀어줬으면 됐지 더 이상의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온다며 화를 내었다.노론들은 승복은커녕 마치 난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화가 치민 영조는 영부사(領府事) 민진원, 우의정 정호 이하 여러 노론들을 파면하고, 2년 전에 파면했던 소론계의 이광좌·조태억 등을 다시 등용하여 정승으로 삼아버렸다. 정부요직도 소론들로 채워 넣었다. 졸지에 정국이 뒤바뀐 것이다. 노론은 복수에 너무 목메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잃은 꼴이 되었다. 이 해가 정미년(1727)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 한다.영조의 이 정미환국이 바로 이듬해 일어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소론은 온건파인 온소(緩少)와 강경파인 준소(埈少)로 갈라져 있을 때였다. 영조와 공존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소론 온건파들이었다.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 등 준소(埈少) 인사들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할 계획을 짜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반란 세력들의 의견이 분열되었고, 막상 반란이 일어나자 한양 세력들은 내응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무신란을 준비하는 세력들은 남인과 소론의 강경파들이었다. 이들은 난의 명분으로 경종이 영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웠다. 난이 일어나기 1개월 전, 이들은 이런 내용이 적힌 괘서를 전국 주요 길목에 내걸며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단숨에 전국 각지에서 20여 만 명이 동조세력으로 가담했다. 그중에는 향리, 관군, 노비까지 다양한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기회를 엿보던 이들은 1728년(영조4) 3월 15일,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아 합천 묘산에서 기병(起兵)을 하면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반군은 장례 행렬로 위장해 무기를 운반했다. 낮에 가까운 숲 속에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밤이 되면 숨겨둔 무기를 들고 내응 세력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청주성을 점령해버렸다.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 등을 살해하고 청주목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했다. 관아를 점령한 후 백성들에게 곡식을 풀어 나누어주자, 전염병과 기근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살기 위해 반군에 가담했다.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旗)를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군중(軍中)에 설치해 아침저녁으로 곡배를 하면서 군사들을 뭉쳐나갔다.영조는 이 반란에 큰 충격을 입었다. 소론에게 권력을 실어 주었는데도 소론의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더구나 왕위에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그 불안감은 더 컸다.반군은 파죽지세로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한양을 향해 북상할 때, 영조는 또 맞불작전에 들어갔다. 소론인 병조판서 오명항을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불로 불을 끄는 전략에 나섰던 것이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참여한다고 약조는 돼 있었던 소론계 인사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반군들에게 협조를 하지 않았다. 오명항은 오히려 이인좌의 첩자들을 역이용해서 유인전술을 펼쳤다. 반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했고, 반군은 수적 열세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했다. 만약 한양의 반군세력들이 안성·죽산전투에 참여했더라면 상황은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배신으로 3월 24일 안성에 이어 죽산에서도 패한 이인좌는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안성·죽산에서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도 큰 타격을 줬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 초 추풍령을 넘어 남하했을 때에는 영남지방의 반군도 이미 지방관군에 의해 소탕된 후였다. 무신란이 17일여 만에 진압된 것이다.영조는 난을 수습하는데도 직접 나섰다. 수많은 관련자 중 핵심자만 처벌하고 그들을 따라간 백성들은 처벌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영조실록에 무신란의 역적으로 기록된 사람은 총 642명이지만, 이중 62명만 극형에 처해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극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연좌된 일가친족들은 모두 유배를 보냈다. 이때 이들의 친족 일부가 장기로 유배를 온 것인데, 그 일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우선 1728년 (영조4) 6월 21일 안찬서(安賛瑞)의 처 끗열(唜烈), 딸 연이(連伊)와 사매(士每), 아들 일기(日記)등 일가족 4명이 연좌되어 장기로 왔다. 이 집안의 가장인 안찬서는 이인좌의 군대에서 장수로 활동하다 역적으로 몰려 참형에 처해진 후였다.이듬해인 1729년(영조5) 5월 20일에는 최용서(崔龍瑞)의 처 봉업(奉業)이 왔고, 6월에는 아들 최흥선(崔興先), 딸 최아기(崔岳伊)가 연좌되어 장기로 왔다. 가장인 최용서는 이인좌의 군대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였다. 가장은 참형에 처했고 일가족 3명이 장기로 온 것이다.8월 23일에는 울진현 주둔군(駐屯軍)에 노예로 공급되어 있던 조세추(曺世樞)의 동생 탈(梲)과, 유3천리 안치에 처해졌던 조카 조중휴(曺重烋)가 이배되어 장기로 왔다. 조세추는 문경에 기반을 둔 조하주(曺夏疇:1650∼1725)의 일족이었다. 조하주는 이인좌의 외할아버지인데, 처남이 성호 이익(李瀷)이다. 그는 남인으로 영남 제일의 부자였다. 남인의 핵심 축이었던 조하주 문중은 난에 가담하여 재정을 책임지는 등 큰 역할을 하였지만 이 난이 실패함으로서 역적가문으로 몰렸다.난이 평정되고 17년이 지난 후, 새삼스럽게 장기로 유배를 온 사람도 있었다. 당시 조사에서 빠졌던 김덕삼(金德三)의 조카 3명이 숨어살다가 공홍(公洪: 공주 홍주) 감사에게 적발되었던 것이다. 공홍감사는 이를 의금부에 보고를 하였고, 의금부에서는 이들을 유3천리 안치형에 처했다. 이때 김덕삼의 조카 김동엽(金東曄)이 장기로 위리안치되었다. 김덕삼은 이인좌의 난에 깊이 개입하였다가 대역부도죄로 이미 1745년(영조21) 12월 18일 능지처사되었다.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즉위 초부터 주창한 탕평책의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왕권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이라고 할까. 무신란을 평정하는 데는 정미환국으로 등용된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난의 주모자 대부분도 소론이었다. 때문에 소론들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이후에는 노론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소론은 재기 불능상태가 된다. 이 사건 이후 조정에서는 지방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으며, 덩달아 영남지역 선비들의 중앙정계 진출은 앞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게 되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0-22

노론과 소론, 철새들의 도래지(渡來地)

신임옥사(辛壬獄事)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옥사는 ‘감옥에 대거 갇히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사화는 ‘의로운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는 말이다. 즉 조선 전기 훈구파와 사림파가 맞서 싸울 때 사림이 대거 화를 입었던 것을 사화라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조선중기 이후 사림·훈구의 구별이 없어졌을 때, 붕당정치가 이어지면서 ‘일순간에 정권이 확 바뀌는 것’을 사화나 옥사라 하지 않고 그냥 ‘환국’이라고 했다.조선 경종 초기인 1721년(신축년)부터 1722년(임인년)까지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는 문제를 놓고 충돌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노론 4대신과 그 일당 60여 명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까지 연결되어, 노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신임옥사라 한다.신임옥사로 중앙에서 칼바람이 몰아칠 때, 그 여파로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바로 노론계의 신사철, 김광택, 김석증이 그들이다. 신사철은 김재로 등과 함께 소위 ‘삼수육창(三壽六昌)’의 한사람이자 노론 4대신의 중심인물인 김창집(김수항의 아들)의 당이라는 이유로 1723년 1월 19일 장기로 유배를 왔다.김광택은 노론계의 중심인물 60여 명 중 한사람으로 신임옥사 때 죽은 김용택의 동생이었다. 김용택은 숙종이 사류(士類)들을 대거 등용할 때, 이이명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지만 목호룡의 고변으로 하옥되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김석증도 김용택의 가족으로 연좌되어 이곳으로 와 노비가 되었다.이들을 장기현까지 내몰고 온 신임옥사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당파간의 중상과 모략의 연속이었다. 숙종이 죽은 후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올랐다. 숙종은 경종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는데, 바로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었다. 그러니까 경종과 연잉궁은 배다른 형제이다. 정치적 배경이 남인이었던 장희빈은 숙종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들에 의해 사약을 받고 이전에 죽었다.그런 장희빈의 아들이 경종이 되었으니 그도 당연히 남인 편이었다. 이제 노론들의 운명은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는 경종의 편이 될 남인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1694년(숙종 20)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들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서인이 재집권하게 되었던 갑술환국때 남인은 거의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는 이제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대립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소론들은 일부 남아있는 남인들과 힘을 합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경종은 남인을 다시 등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산군처럼 건강하지가 못했다. 즉위 당시 34세였던 경종은 자식을 낳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병석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남인을 구원하여 등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만약 경종이 건강만 따라줬더라면 당시 노론들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노론에게는 경종의 이런 건강 악화가 천만 중 다행이었을 것이다. 노론의 일부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동생인 연잉군을 세자로 삼으라고 압박했다. 몸이 허약하고 자식도 따로 없었던 경종에게는 신하들의 요청을 단번에 물리칠 힘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경종은 노론 대신들의 요구대로 연잉군을 세자로 세웠다. 자식이 아닌 동생을 세웠으니 왕세제라고 해야 맞다. 동생을 세자로 삼는 것을 허용한 경종에게 이번에는 노론이었던 조성복이 상소를 올려 ‘임금이 몸이 약해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라’고 강요를 했다. 경종은 마지못해 이 요구도 받아들였다.이런 노론의 행위를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소론들이었다. 이조참판으로서 소론의 영수인 조태구, 류봉휘(柳鳳輝) 등은 대리청정의 부당성을 상소하였고, 최석항은 한 밤중에 왕을 찾아가 울면서 명령을 환수하기를 청했다. 밤을 꼬박세운 최석항의 설득으로 결국 경종은 대리청정 명령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행위에 대해 노론이 또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론은 떼를 지어 왕에게 몰려가 침전 앞에서 본래대로 대리청정을 시행하라고 호소하였다. 이어서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경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머리만 부여잡고 있었다. 이때에 역사의 획을 긋는 상소가 하나 올라왔다. 1721년(경종1) 12월 6일, 소론의 김일경이라는 사람이 올린 다음과 같은 상소였다.…임금에게 (감히) 대리청정할 것을 요구한 죄를 지은 자들에게 죽음을 내렸다는 임금의 명령과, 승정원과 삼사가 그들이 저지른 죄목을 들어 엄하게 꾸짖도록 임금에게 청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나이다. 법으로 이들을 엄단하시어 군신의 대상을 세우시고 흉적들로 하여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한눈에 봐도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을 척결하여 왕의 권위를 살리라는 탄핵상소였다. 경종은 이 상소를 보자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함께 도저히 노론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경종은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등에 업었다. 이 탄핵상소를 근거로 노론을 쫒아내고 소론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왕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이 잡혀왔다.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 등이 그들인데, 경종이 이들 모두를 극변으로 유배를 보내 위리안치 시켜버렸다.서서히 권력을 잡기 시작한 소론은 내킨 김에 노론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국왕의 마음을 움직인 상소문을 작성한 김일경이 앞장섰다. 그는 이제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어 있었다. 우선 노론의 인물 중 목호룡이란 사람을 매수했다. 목호룡은 남인 천얼 출신으로 청능군(靑陵君)의 집안 노비였으나, 풍수를 배워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를 잡아주고 노비에서 양인이 되었다. 이후에 궁궐의 토지와 곡식을 관리하면서 부호가 되었다. 평소 시를 잘 지어 노론계인 김용택·이희지 등과 친밀하게 지내며 연잉군을 보호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변심을 하고 1722년(경종2) 소론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는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 자신이 노론계의 정인중ㆍ김용택ㆍ이천기ㆍ백망ㆍ심상길ㆍ이희지ㆍ김성행 등 60여 명과 모의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왕에게 고발하였다. 이게 이른바 ‘목호룡의 고변사건’이다.목호룡으로부터 고변을 들은 경종은 크게 노했다. 목호룡이 거론하였던 노론의 인사들을 모두 잡아와 투옥하라고 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이미 유배를 가 있던 노론 4대신들과 그들의 가족 및 추종자들이었다. 백망((白望)은 이것은 세력을 잃은 소론과 남인이 왕세제를 모함하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심문을 담당하고 있던 남인들은 이를 묵살해버렸다.결국 역모자로 거론된 이천기ㆍ김용택 등과, 앞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만들었던 노론 4대신인 이이명 등이 차례로 사형을 당했고, 노론 수백 명이 살해 또는 추방되었다. 반면 목호룡은 이 일로 부사공신(扶社功臣)에 올랐다가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의 벼슬을 받고 동성군(東城君)에 피봉되었다. 이런 노론 숙청 과정이 신축년과 임인년 두 해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앞의 두 글자를 따서 신임옥사라고 한다.이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정국 속에서 가장 겁을 먹은 사람은 연잉군이었다. 자신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이 대거 죽거나 귀양을 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면서, 자신도 언제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조마조마한 세월들이 흘러가고 있었다.그런데, 병약한 몸을 이끌면서도 소론과 남인들을 다시 등용하려고 애썼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경종의 죽음에도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 37세는 몸이 약했다고 하더라도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경종 죽음에 관한 추측 중에는 궁궐에서 일하던 나인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붕당정치가 극으로 치닫던 이 시기에는 궁중에서 일하던 내시와 궁녀들조차도 노론·소론으로 갈라져서 온통 당색이 가득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국왕의 독살설이 나올 법도 하였다.경종이 죽고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말자 노론이 재집권했다. 영조는 이조판서로 있던 김일경부터 유배를 보내버렸다. 그러다가 청주의 유생 송재후의 상소를 발단으로 신임옥사가 무고였다는 노론의 집중적인 탄핵이 시작되었다. 신임옥사의 주동자였던 김일경과 목호룡이 함께 투옥되어 친국을 받았다. 김일경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영조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영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끝내 공모자가 없다고 우겼다. 별수 없이 목호룡과 김일경 두 사람만 당고개(唐古介)에서 목이 잘렸다. 목호룡의 머리는 3일간 거리에 달아매어졌고, 그가 전에 경종에게 밀고한 고변문서는 불태워졌다.노론이 재집권하면서 장기로 유배를 왔던 신사철은 복권이 되었다. 돌아간 그는 대사헌, 호조판서, 예조판서를 계속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걷는 듯 했다. 하지만 정미환국으로 다시 노론이 추방될 때 파직되었다가 1728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에 등용되는 등 부침(浮沈)이 계속되었다. 1740년까지 그는 공조 · 예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여러 번 지냈고, 1745년 판중추부사를 끝으로 관직을 내려놓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 전 현직 문관이 나이 70세 이상이 되면 들어가는 일종의 예우기관이었다. 두 아들도 정승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신임옥사의 여파로 장기에서 1년 넘게 노비생활을 하던 김광택과 김석증도 1725년(영조1) 4월 2일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갔다.한편, 신임옥사가 있은 지 34년이 지난 1755년(영조 31)에는 그 반대세력인 소론계 인사가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바로 소론 4대신의 중심인물인 류봉휘의 조카 류경원(柳景垣)이 이곳으로 와서 안치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류봉휘는 강경 소론파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경종에게 올려 대리청정을 철회하게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1725년 영조가 즉위하고 탕평책으로 노론·소론의 연립정권이 수립될 때 소론이었지만 우의정에 등용됐다. 이어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30여년 후 강경파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새삼스럽게 신임옥사를 일으킨 주동자로 그가 지목되어 탄핵을 받게 되었다. 결국 함경북도 경흥(慶興)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1755년 다시 반역죄로 추형(追刑)을 당했다. 추형을 당할 때 그의 가족들도 연좌되어 며느리와 손자는 물론 조카들까지 모두 유배를 보냈던 것이고, 조카 중 한사람인 류경원이 장기로 온 것이다.역사를 되짚어 보면, 18세기 장기현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이데올로기 싸움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 장기현은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마치 철새처럼 날아와 한동안 머물면서 겨울을 피해갔던, 도래지(渡來地)와도 같은 곳이었다. 아니, 아늑한 보금자리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