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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왕의 남자들, 장기로 오다

환관(宦官)은 통상 내시(內侍)라고도 불렀다. 환관들은 거세된 남자로, 궁에서 일하는 직책이다. 이들은 내시부(內侍府)에 속해 대궐 안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위,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비서관의 일종이었다. 내시부의 정원은 140명. 그들은 왕과 왕비 등 왕족을 모신 유일한 남자 궁인이었다.내시부의 으뜸 벼슬은 왕의 식사와 수행비서 역할을 하는 종2품 ‘상선’이었다. 종2품은 조선시대 제4위 품계로 그동안 ‘내시’하면 떠올리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권력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를 중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시황을 보좌하던 환관 조고(趙高)는 ‘황제의 자리를 맏아들 부소에게 넘기라’는 진시황의 유언을 무시한다. 그는 둘째아들 호해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긴 후 부소를 죽이고 권력을 농단하기에 이른다. 일개 환관에 의해 황제의 권력이 좌지우지되었던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나라는 결국 통일된 지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우리나라에서는 환관하면 김처선(金處善)이라는 사람이 떠오른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조선 전기 여러 왕을 시종한 그는 문종 때 경상도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단종 때 풀려나 직첩이 되돌려졌다. 1455년(단종3) 정변에 관련되어 삭직·유배되었고, 세조 때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나, 세조의 미움을 받아 자주 장형을 당하였다. 성종 때에는 의술을 알아 대비의 신병치료에 이바지하여 가자(加資)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다시 시종에 임하였으나, 직언을 잘하여 미움을 받았다. 1505년 연산군이 스스로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벌여 그 음란함이 극에 달하자, “임금치고 이토록 문란한 왕은 없었소이다“라고 극간(極諫)하다가 다리와 혀가 잘려 죽었다. 연산군은 그의 집을 당일로 철거하여 못을 파고 죄명을 돌에 새겨 그 집 길가에 묻고 담을 쌓게 하였다. 모든 문서에 ‘처(處)’자 사용을 금하여 처용무(處容舞)를 풍두무(豊頭舞)로 고치고, 일력 중 처서의 ‘처’자가 김처선의 ‘처’자와 같다하여 조서(徂暑)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김처선의 양자도 죽였고, 친족을 칠촌까지 연좌하여 처벌하였다. 하지만 1751년(영조 27)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이런 환관들은 당파싸움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특히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문제가 되었던 광해군과 인조, 남인과 서인이 경쟁하였던 숙종대, 노론이 주도하면서 소론이 대항하였던 경종과 영조의 교체시기, 노론이 정국을 장악했던 정조 즉위 전후에는 서로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반 및 역모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럴 때는 왕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도 중요하였지만, 때에 따라서는 왕을 제거해야할 필요성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환관과 궁녀들이 꼭 개입되었다. 왕의 의중을 알아내는 일, 음식물에 독약을 넣거나, 왕자나 왕비가 병들어 죽기를 바라는 뜻으로 흉한 물건을 일정한 곳에 묻는 이른바 매흉(埋兇)의 실행자들은 대부분 환관과 궁녀들이었다.그 구체적인 실례는 많다. 광해군때 영창대군 옹립 사건에는 선조의 총애를 받던 환관 민희건이 끼어있다. 민희건은 선조가 죽던 날 어필(御筆)을 본떠서 밀지(密旨)라고 속인 뒤 유영경(柳永慶)에게 내주어 영창대군을 보호하게 하였다. 인조때 광해군 복위운동에도 환관 배희도가 등장한다. 유호립은 궁내사람들과 짜고 궁중에 들어가 인조를 살해하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군사가 서울에 도착하면, 환관 배희도에게 용사(勇士) 2인을 주어 인조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경종때 박상검(朴尙儉)이란 환관이 있었다. 그는 충주(忠州) 박씨로 평안도 영변 사람이다. 어려서 바로 이웃집에 살고 있던 심익창(沈益昌)에게 수학하였다. 마침 김일경과 원휘(元徽)가 차례로 영변부사로 부임해 심익창의 집에 자주 드나들자 박상검도 이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뒤에 이들의 힘으로 궁궐에 환관으로 들어갔는데, 그때는 김일경이 소론의 거두가 되어 있었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서로 붕당을 지어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헐뜯고 싸울 때인데, 김일경이 박상검을 조정에 환관으로 심어 놓은 것이었다.그 동안의 흘러온 과정을 잠시 살피자면,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은 노론의 반대를 받았으나 소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게 1720년이다. 하지만 병약했던 경종은 즉위한 지 1년 되던 해(1721년), 노론 대신들인 김창집·이건명 등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고, 그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당시 김일경과 박필몽을 필두로 한 소론측은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는 것을 저지하고 나섰다. 결국 경종은 다시 친정(親政)을 하고, 그해 음력 12월 김일경 등의 탄핵을 받아들여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 등을 면직시키는 등 정국이 회오리치고 있었다.이 무렵 김일경은 심복인 박상검을 이용해 노론의 지지를 받는 왕세제 연잉군을 아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박상검은 김일경의 무리로부터 받은 은화 수천 냥을 이용해 먼저 궁내에 있는 환관과 궁녀들을 매수하였다. 반면 매수에 응하지 않는 노론계 환관들에게는 이간질하여 궁내에서 몰아냈다. 우선 자신의 편에 서지 않았던 환관 장세상(張世相)·고봉헌(高鳳獻)·송상욱(宋尙郁)이 그 쫓겨날 대상이었다.소론을 지지하던 경종은 박상검 등의 고자질을 믿고 1721년(경종1) 12월 23일, 장세상을 경성부에, 고봉헌을 광양현에, 송상욱을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시켜 버렸다. 이때 이들의 가족들도 연좌되었는데, 장세상의 가족인 장두명(張斗明)도 송상욱과 같이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정적들을 제거한 박상검은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722년 1월, 궁 안에 돌아다니는 여우를 잡는다는 구실로 청휘문(淸暉門)에 여우 덫을 놓고 함정을 파놓았다. 이로 인해 왕세제가 경종에게 문안을 드리거나, 아침저녁으로 진짓상 돌보러 가는 길이 가로막혀버렸다. 당연히 경종과 왕세제 사이에는 오해와 불화가 조성되었다. 이들은 대전(大殿)의 궁녀들에게 왕세제를 헐뜯는 말을 퍼뜨리도록 해 경종이 이를 믿고 왕세제를 제거할 수 있는 명목을 만들었다.이 낌새를 눈치 챈 연잉군이 들고 나섰다. 그는 밤에 입직하던 궁관(立直宮官)과 익위사관(翊衛司官)을 불러 모아 놓고 환관 한두 명이 나를 제거하려 하니, 그들의 독수(毒手)를 피하기 위해 사위(辭位:왕세자의 자리를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이튿날 아침 대신들의 주청으로 주모자를 국문하라는 경종의 명령이 떨어졌다. 예상외로 일이 커지자 소론의 영수이던 영의정 조태구, 같은 무리의 김일경 등은 시침을 뚝 떼고 모든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빨리 처벌하라고 길길이 뛰었다. 자신들의 음모가 탄로 날 것을 걱정하여 미리 관련자들을 잡아 처치해버리려는 심보였다.의금부에서는 환관 박상검과 문유도(文有道), 궁인인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수사를 개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석렬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잡혀온 필정도 옥중에서 자살해버렸다. 박상검과 문유도에 대해서만 국문(鞠問)이 이루어졌으나, 이들은 끝내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버티기만 하면 김일경 등이 알아서 석방해 주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관련자들을 추가로 잡아들여 심문을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혐의가 확인되지 않았다. 1722년(경종2) 1월 4일, 문유도도 심문을 받던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결국 그해 1월 6일, 박상검은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도 전에 같은 계파인 소론의 관리들에 의해 능지처참 당하였고,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이를 두고 역사에서는 ‘박상검의 옥’이라고 한다.결과적으로 박상검은 소론의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고 경종과 왕세제 사이에 불화를 일으켜 왕세제를 없애려 했지만 토사구팽이 되고 말았다.소론의 이간질을 믿고 경종이 송상욱을 장기까지 유배 보낸 이유를 보면 옹색하기 그지없다. 유배형벌 중에서도 가장 중한 유3천5백리에 처한 이유가 고작 ‘잔소리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처사에 대해서 신하들도 임금이 중도를 잃었다며 걱정을 하는 모습이 경종실록에 보인다.송상욱과 장두명이 박상검의 계략에 밀려 장기로 유배 온 지 3년 후인 1724년에 경종이 죽었다. 재위 4년 만이었다.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뒤로하고 이제 노론의 지지를 받던 연잉군이 영조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그해 10월 19일, 송상욱은 해배되어 장기를 떠났다. 그 이듬해인 1725년, 김일경 등이 박상검의 배후로 지목되어 탄핵되었고, 환관 손형좌(孫荊佐) 등에 대한 국문이 이루어지면서 이 사건은 다시 노론과 소론의 대립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 무렵인 1725년 4월 9일, 그제야 장기에 와서 3년 넘게 유배살이를 하던 장두명도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뒤에 자세하게 논하겠지만, 신임사화란 것이 있었다. 노론은 신임사화를 주도한 조태구, 김일경, 목호룡(睦虎龍) 등을 공격하기 위해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와 관련자의 처벌을 주장했다. 결국 영조 때에 다시 쓰인 경종수정실록에는 “박상검(朴尙儉)이 김일경의 손발이 되어 은밀한 기회를 몰래 주선하여 안에서 해적(害賊)이 되어 안팎에서 선동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해배되어 한양으로 올라간 송상욱은 다시 제시내관(祭侍內官)으로 복직되어 궁중생활을 이어 나갔다.서울 도봉구 창동과 월계동 사이에 걸쳐 있는 초안산에는 내시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사람들은 여기를 ‘내시내 산’이라고 한다. 장기로 온 송상욱이나 그를 모함하여 장기로 보낸 박상검이나, 그들의 신분이 내시였으므로 모두 이곳에 묻혔을 것이다. 산자락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시들의 묘는 문인석 등의 석물들이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다. 누구나 이곳에 와 보면, 너무 많은 묘에 놀라고 허술한 관리에 한 번 더 놀란다. 무덤들도 봉분이 온전한 것은 거의 없고, 소나무나 아카시 나무들이 봉분 위에 자라고 있다. 한눈에 봐도 그 누구도 이 무덤들을 거의 돌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이한 모습은 여기 무덤과 석물들이 하나같이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어서도 궁궐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임금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서란다. 생식기를 잘려버린 것도 모자라 죽어서까지 충성을 강요당한 이들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위정자들에게 희생된 영혼들이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지 을씨년스럽기조차 하다.하지만 일제 강점기까지 매년 가을이면 산 아래 마을 민초들이 후손이 없는 내시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안내문 글귀에서 그나마 위안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0-01

영의정이 장기에서 죽다

1690년(숙종 16) 10월 12일, 사늘한 바람이 간간히 불어오는 들녘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외지 손님이라곤 손꼽힐 정도로 한적하던 경상도 장기 땅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내려왔고, 장기현감은 이들을 수발하느라 혼비백산이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작년 2월에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영의정이 갑자기 객사를 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직책도 그렇거니와, 그가 다름 아닌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인 김수흥(金壽興)이었다. 그의 명성하나로도 전국의 이목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집중되기에는 충분했다.김상헌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었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던 그가 후에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지은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필수고전 시가가 되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세도가문인 안동(장동) 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에서 출발했다.하지만 이 집안도 한 때 이처럼 고통을 겪을 때가 있었고, 그 고뇌의 현장이 바로 경상도 장기현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숙종 집권기의 환국정치에 대해 약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환국(換局)은 ‘시국 또는 판국이 바뀌는 것’을 일컫는데, 숙종의 재위 기간에만 세 번의 환국이 있었다. 숙종은 이 환국정치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이끌어 갔다.숙종이 임금 자리에 오를 때의 집권세력이었던 남인은 힘이 너무 강했다. 그 유명한 우암조차 몰아낸 무소불위의 세력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남인의 힘을 약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남인의 영수였던 영의정 허적이 자신의 아버지 잔치를 위해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궁궐에서 쓰는 천막을 집으로 가져가고, 궁궐의 악공들을 동원한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남인들을 역모로 몰아 쫓아내고 서인들을 적극 등용하는데, 이를 경신환국(1680)이라 한다.이렇게 권력을 다시 잡은 서인들은 자기들 세상이 영원할 줄 알았다. 이제 모든 자리가 서인 일색이었으니 자신들이 지도권을 놓칠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숙종의 생각은 달랐다. 두 번째 정치 승부수가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이다. 이 해에 궁녀 장옥정이 낳은 왕자 윤(昀)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는 문제를 놓고 남인과 서인 간에 격돌이 일어났다. 숙종은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옥정을 희빈(禧嬪)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정비(正妃) 민씨(인현왕후)가 아직 나이가 젊으므로 그녀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서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했다. 숙종은 어느새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해서는 남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숙종은 남인을 재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장옥정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왕비 인현왕후 민씨는 쫓겨났고, 송시열은 삭탈관작 당하고 제주로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때 송시열과 같은 계열에 섰던 김수흥도 관작을 삭탈당하고 장기현으로 유배되고, 동생인 김수항도 남인들의 공격을 받고 사사되는 등 서인의 거물 100여 명 이상이 파직되거나 유배를 갔다. 그 대신 권대운·김덕원·목래선 등의 남인이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 이게 기사환국이다.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들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1694년 다시 한 번 환국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숙종은 희빈이 너무 방자하게 굴자, 민씨(인현왕후)를 쫓아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인들 중 일부가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했고, 이것을 안 남인들은 민씨 복위 운동에 관여한 서인들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오히려 남인 세력을 쫓아내고 서인을 다시 등용했던 것이다. 기사환국으로 왕후(王后)가 된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켰다. 이해가 1694년 갑술년(甲戌年)이라고 해서 갑술환국이라고 한다.기사환국으로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김수흥은 호가 퇴우당(退憂堂)이다. 동생도 영의정을 지냈는데, 앞서 언급한 김수항이다. 이들 형제들은 조선후기에 문명을 떨쳤던 장동(壯洞)김씨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서울 장의동(壯義洞)을 터전으로 한 장동김씨는 원래는 안동김씨인데, 이들만 따로 신안동김씨라고도 한다.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한 김상용, 앞서 언급한 김상헌 등이 이 가문에서 나와 충절로 가문을 빛냈다. 김상헌에게는 수증·수흥·수항이라는 세 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모두 높은 벼슬을 하여 이 삼형제를 삼수(三壽)라고 했고, 증손인 창집·창협·창흡·창업·창집·창립 등 여섯 명도 모두 걸출하여 이들을 육창(六昌)이라 했다. 이들 삼수육창(三壽六昌)은 조선후기의 정치·사상·문화·학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에도 김원행, 김조순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명성과 덕망을 드날렸다. 순조 때 김조순을 시작으로 조선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1626년(인조4) 10월 16일 태어난 김수흥은 조부 김상헌으로부터 가학을 이어받았다. 김상헌의 학통은 율곡과 김장생으로 이어온 서인이었다. 따라서 김수흥은 송시열과 송준길로 이어진 서인 학문의 정맥을 접하게 된 것이다.명문가에서 성장한 김수흥은 동생 김수항과 함께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요직을 거치다가 36세에는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사간원 대사간, 한성부 우윤, 승정원 도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의 호인 퇴우(退憂)가 말해주듯 그는 벼슬에 나아갔을 때에나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에도 임금과 백성에 대한 근심을 우선적으로 하였다. 48세에는 종1품의 품계에 올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다음해 국정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까지 올랐다.김수흥은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듯 했으나, 현종과 숙종 연간에 빈번하게 일어난 옥사(獄事)로 인하여 유배와 은거를 하는 등 부침이 많았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춘천으로 유배를 다녀오는 가하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영중추부사로 복직했다. 아우 김수항의 뒤를 이어 1688년에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689년 2월에 기사환국으로 된서리를 맞고 장기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장기로 온 김수흥은 마치 15년 전에 이곳에서 왔던 우암 송시열이 그랬던 것처럼 장기사람들 틈에 끼여 토속을 즐기며 강학에도 힘썼으나, 아쉽게도 이듬해인 1690년 10월 12일 병을 얻어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의 갑작스런 객사는 조선왕조실록에 졸기(卒記)가 실릴 정도로 세상의 이목거리였다.장기에서 죽은 김수흥의 관(棺)은 경주를 통해 서울로 갔다. 김수흥의 상구(喪柩)가 올라갈 때에, 경주 영장(營將) 남헌(南巚)은 편오군(編伍軍) 2개 부대를 편성하여 그의 관을 메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었다. 나중에 남인들이 이를 알고 문제 삼아 남헌은 사헌부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김수흥은 오랫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일들에 관련된 수많은 상소와 차자(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려 당시의 병폐를 지적하였고, 이를 시정할 계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국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의 개진은 충군우민(忠君愚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0권 5책으로 편찬된 그의 문집 퇴우당집(退憂堂集)에 소차(疏箚)·계(啓)·의(議)가 6권이나 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그가 시무(時務)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그의 문집에는 장기 유배지에서 쓴 시들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몇 편을 소개하면 이렇다.장기 배소에 도착하여 의금부 감압관 오수대(吳遂大)를 조정으로 보내며/ 到長鬐配所 別吳金吾 遂大 還朝큰 바다가 동쪽에 붙어있고/ 大海東臨近무리지은 산들은 북쪽멀리 아득하네/ 群山北望遙떠도는 삶은 본래 이와 같은 것/ 浮生本如此함께 한 자 보내고 나니 내 넋조차 사라지네/ 莫遣旅魂消영남대로 봄바람 사납지만/ 嶺路春風厲강담(江潭)의 풀 색깔은 새롭구나/ 江潭草色新외로운 신하 임금 그리워 눈물짓고/ 孤臣戀君淚북쪽으로 돌아간 사람 지워지질 않네/ 灑向北歸人봉산에서 보고 느낀 일/ 蓬山卽事한양에서 10년 동안 이룬 것이 고작/ 京洛十年成底事천리 밖 바닷가에 여생을 부치는 일인가/ 海山千里寄殘生짧은 봄밤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春宵旅榻仍無寐자리에 누워 거센 파도소리만 듣고 있네/ 臥聽長鯨鼓浪聲장기에서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김수흥은 1694년 갑술환국 때 송시열과 같이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가 죽은 지 5년 만이었다. 이때부터 사림들이 우암 송시열을 향사하는 원사(서원·사우 및 영당)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장기사람들도 우암 영당(影堂) 건립을 추진했다. 현재 장기면 읍내리 용전이란 곳에 터를 마련하고 1707년에 죽림서원 건축을 시작하여 1708년에 완공을 보았다. 1709년 4월 6일에는 우암 영정을 봉안하였고, 퇴우당 김수흥의 문집도 같이 이곳에 보관하였다.이렇듯 김수흥은 정국의 변동에 따라 부침이 심하였지만 충군우민(忠君憂民·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함)과 선우후락(先憂後樂·다른 사람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길 것은 다른 사람보다 나중에 즐김)하는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은 그의 문학세계에도 깊이 스며들어 젖어 있다. 그리고 죽림서원과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또 다른 노론계 인맥들을 통해 장기사람들에게도 그의 사상이 깊이 전파되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9-24

장기에 가면 장기사람들은아직까지 우암(尤庵) 선생이야기 하고…

우암의 은행나무.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장기초등학교의 교목이 은행나무인 것도 여기서 연유된 것이다. 원목은 고사하고 그 뿌리에서 난 손자나무가 다시 자라나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우암 송시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람마다 호불호의 견해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이름이 등장한다.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이렇듯 한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우암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것은 1675년 6월 10일이었다. 그는 약 4년간 이곳 마현리에 머물면서 장기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같이하다가 갔다. 가도 그냥 간 것이 아니었다. 17세기 후반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국노거유(國老巨儒)답게 장기사람에게 그의 사상과 철학들을 한 움큼 심어놓고 갔다.그런 면에서 우암의 장기현 유배는 지역민들로 봐서는 더할 나위없는 행운이었다. 아니 장기뿐만 아니라 영남지역 전체에도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인근고을에서 무수한 수령들과 학자들이 우암을 찾아와서 문안을 올렸고, 한양에서 아예 보따리를 싸서 내려온 선비들이 그에게 학업을 전수받기를 간청했던 사실들에서 이 같은 영향력의 실상을 확인할 수가 있다.우암이 장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674년(갑인년)에 일어났던 제 2차 예송(禮訟)논쟁이었다. ‘며느리인 왕비가 죽었을 때, 살아 있는 시어머니(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맞는가?’란 논쟁거리에 휘말려 장기까지 유배를 온 것이다.논쟁의 불씨를 제공한 사람은 인조이다. 소현·봉림·안평·용성대군을 낳은 인렬왕후 한씨가 죽자는 인조는 조대비(자의대비, 장렬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이때 인조의 나이는 마흔넷이었고, 조대비는 아들인 효종(봉림)보다도 다섯 살이나 아래인 열다섯이었다. 그러다보니 효종과 효종의 비(인선왕후) 두 사람이 다 죽을 때까지도 조대비가 살아 있는 특이한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는 신하가 보는 예법책과 왕족이 보는 예법책이 달랐다. 양반들은 주자가례에 적힌 예법을, 왕족은 경국대전을 따랐던 것이다. 문제는 경국대전에 조대비 같은 특이한 경우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가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첫 번째 논쟁(1차 예송논쟁)은 1659년(기해년)에 일어났다. 먼저 효종이 죽었다. 효종은 인조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의 상(喪)에 어머니(계모)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게 논점이었다. 원래 왕실의 예법대로 하자면 장남이 죽었을 때는 3년, 차남이 죽었을 때는 1년이었다. 그래서 조대비는 이미 장남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3년 동안 상복을 입은 적이 있었다.이에 대해 서인인 송시열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조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살아있는 부모는 장자의 경우 3년, 차남 이하는 1년간 상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왕도 결국 사대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같은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신하이지만 세력을 얻은 서인들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느껴지는 부분이다.그러나 남인인 윤휴와 허목은 이들과 견해가 달랐다. 효종이 비록 차남이긴 하지만, 결국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남과 같이 대우하여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왕이니까 주자가례가 아니라 특별한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상주인 현종의 입장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인 효종을 맏아들로 대접하지 않겠다는 건, 정당하게 왕위를 이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그의 아들인 현종 자신도 정당하지 못한 왕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어린 왕이었던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서인과 등을 돌릴 수도 없을 뿐더러, 싸움이 너무 길어질 경우 나라를 다스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1년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송시열, 송준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우암이 장기로 유배온 계기를 만든 두 번째 논쟁(2차 예송논쟁)은 1674년(갑인년)에 일어났다. 이제는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죽었다. 그때까지도 살아있던 시어머니 조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할지를 놓고 또 논쟁이 벌어졌다. 주자가례에는 첫째 며느리의 경우는 1년, 둘째 며느리에게는 9개월간 상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 며느리이므로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남인은 효종이 임금이 되었으므로 인선왕후도 당연히 장자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예를 갖추어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번에는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동안 15년이나 왕위에 머무르면서 정치에 노련해진 현종은 더 이상 서인들에게 휘둘리지 않았던 것이다.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윤휴, 허목)들이 권력을 잡았다. 반면 세력에서 밀려난 서인의 대표 송시열은 쫓겨나 포항 장기로 귀양을 오게 된 것이다.예송논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왕실의 예절을 따지는 소모적인 다툼처럼 보였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문제이다. 이것은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문제와 신하들 간의 정치적인 대립이 얽히면서, 숙종 때에 와서는 더 큰 다툼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이 사건으로 우암이 장기에 위리안치된 이후, 인근 고을의 수많은 사람들과 중앙의 우암 인맥들이 장기를 찾아왔다. 1676년 2월 3일에는 명재(明齋) 윤증(尹拯)도 왔다갔다. 윤증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가 유명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그가 장기현을 방문한 후 노론과 소론이 분화되고 그가 소론의 거두가 된 탓이다.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죽자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行狀)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은 ‘박세채가 쓴 행장에 이미 다 잘 나와 있다.’ 고 기피하면서 무성의하고 비판적인 내용으로 묘갈명을 지어줬다. 그리고 묘갈명 끝에다 술이부작(述而不作·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새로 지어내지 않는다)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는 탐탁하지 않은 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한때 스승이던 송시열이 부친의 묘갈명을 대충 지어주자 아쉬움이 남았던 윤증은 송시열이 장기에 있을 때인 병진년(1676년) 2월 28일, 추풍령을 넘어 장기까지 찾아와서 다시 써 달라고 부탁했지만, 송시열은 이것마저 거절했다.송시열과 윤선거는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가 되었다. 하지만 송시열이 경전주해(經傳註解) 문제로 윤휴(尹鑴)라는 사람과 사이가 나빠졌다. 송시열은 유학의 정맥이 윤휴 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했고,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그런데 윤선거는 평소 윤휴와 친교가 깊었기에 사사건건 윤휴의 편을 들면서 그를 두둔했다. 이 일로 송시열과 윤선거의 사이마저도 비틀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다른 선비들과 함께 결사항전을 약속하고도, 어머니와 함께 평복을 입고 빠져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27세의 윤선거의 판단과 동기는 매우 복잡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외형적으로 그것이 그때 조선을 지배하던 이른바 ‘의리’와 ‘명분’에 어긋났다는 사실은 뚜렷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우암도 그를 의리가 없고 불충한 사람으로 보았다는 설도 있다.어쨌든 묘갈명을 계기로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 윤증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두 사람 사이의 불화는 윤증과 송시열이 서로를 비방했던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이어졌고, 끝내는 노론과 소론의 분당으로까지 비화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갈라진 이유가 윤증이 장기에 있는 우암을 만나고 간 이후부터였다고 하니, 조선 후기 정치사의 소용돌이 속에 장기현이 있었던 것이다.인근 수령들도 장기에 있던 우암을 배알하였다. 1679년 당시 영천군수로 있던 이사영(李思永)은 매월 우암에게 먹을 것을 보내주다가 이것이 문제되어 파직당하기도 했다. 장기 주민들과 우암의 접촉도 관심을 끈다. 어느 늦은 봄날 인근 주민이 살아있는 암꿩 한 마리를 잡아와서 우암에게 주었다. 우암은 여러 번 꿩을 어루만지다가 그 사람에게, “교미를 하고 새끼를 칠 때인 만큼 알을 품고 있는 금조(禽鳥)를 죽일 수는 없다.” 라고 하면서 꿩을 되돌려 주었다. 꿩을 다시 받은 주민은 숲 속에 그 꿩을 놓아주었다. 얼마 후 그 암꿩이 새끼들을 거느리고 산간을 나다니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는 우암의 인품이 숲속의 새들에게까지 자비로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이와 곁들여 우암이 학질병까지 낫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고도 한다. 장기는 남방이기 때문에 학질이 많았는데, 주민 중에 이 병에 걸린 자가 고통을 참지 못하다가 우암의 적거지 가시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자 병이 나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암이 떠나간 후에도 장기사람들은 학질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송대감(宋大監)’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서 등에 붙이면 즉시 병이 치유되었다고 했다. 이는 우암이 장기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글자를 써서 붙였다고 해서 병이 나을 까닭이 없다. 비록 장기로 유배를 온 신분이었지만, 학질이 물러날 만큼 우암이 위엄 있었고 무서운 존재로 부각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우암이 장기에 유배된 이후부터 지방의 풍속이 크게 변화된 것도 있다. 그 중에서도 새해의 차례를 섣달 그믐날에 행하던 풍속을 우암이 바로잡아 ‘설날(元日)’에 행하게 했다는 것이다. 설날(元日)은 응당 해가 뜬 이후부터이니, 아침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절에 맞는다는 것이다.우암은 장기 유배 생활 중에서도 학문을 계속하였다. 찾아오는 전국의 문인들에게 강학하였으며, 때로는 지역민을 모아 가르쳤다. 우암이 머물던 집의 주인인 오도전은 4년간 우암에게 수학하여 향교의 훈장이 되었다. 장기사람 서유원과 이동철 등도 꾸준히 문하에 출입한 문인이었다. 이들은 후일 죽림서원을 창건하고 그 역사를 고증하는 일에 한몫을 하였다.우암은 대략 222제 297수의 시를 유배지 장기에서 창작했다. 이 시들을 통하여 우암은 다양한 심회를 시로 형상화했다. 또 주자대전차의와 정서분류는 장기 유배기간 동안에 저술된 대표적인 학술서이다. 이것 외에도 장기에서 지은 문충공포은정선생신도비문과 전 장기현감 이수일의 묘갈명이 전한다.우암은 1679년 4월 10일 장기를 떠났다. 우암이 처음 장기로 왔을 때부터 적거지 안에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스스로 싹을 틔웠다. 거제도로 이배될 시점에 그 나무는 제법 자랐다. 우암은 그것을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죽교(竹轎·대나무로 만든 가마)에 올라서 떠나갔다. 오도전 등 장기 제자들 일부는 선생의 가재도구를 챙겨서 짊어지고 거제도까지 수행했다. 그러나 남은 제자들은 다시 돌아올 기약도 없이 떠나는 스승을 만감에 젖어서 전송했다. 우암에게 배운 장기 선비들이 얼마나 스승에게 감사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340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장기 땅에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가 심은 은행나무가 늙어서 죽고 아들나무가 생겨났다가 또 죽고, 이제는 그 뿌리에서 생겨난 손자나무가 그때의 사실들을 이야기 한다. 설령 이 은행나무가 죽고 또 죽기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생명을 다할 때까지, 우암의 회상들은 여기 장기 땅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9-17

과옥죄인(科獄罪人)

과옥죄인(科獄罪人)은 과거 시험에서 부정을 저지른 죄인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험이 있는 곳이면 부정행위는 있게 마련이다. 조선시대 유배형벌 중 ‘유 3천5백리’에 해당하는 경상도 장기현에는 조선조 내내 과옥죄인들의 유배행렬이 끊어지질 않았다.과거 제도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도 788년 신라 원성왕 때 ‘독서출신과’라는 시험이 있었다. 독서 능력에 따라 상중하 3품으로 나누어 등용하였던 제도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과거는 고려 광종 때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과거 제도는 우리나라 정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조선시대의 과거 과목에는 문과와 무과, 생원과와 진사과가 있었다. 이 밖에 중인들이 보는 잡과에 역관을 뽑는 역과, 의원을 뽑는 의과, 천문 지리를 맡아 보는 음양과와 법률을 다루는 율과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문과는 문관의 등용 자격시험으로 가장 중시되어 대과(大科)라고도 하였다. 반면 성균관에 입학자격이 주어지는 생원과와 진사과는 소과(小科)로 불렀다. 문과는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가 있었다.과거제도의 본래 목적은 능력 있는 인재 선발에 있었다. 그런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의 공정성이 전제되어야 했다. 조선시대에도 과거시험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많았다. 부자(父子), 형제나 가까운 친척이 한곳에서 시험을 치르지 못하도록 시험장을 나누어 운영했고, 응시생이 자신의 친인척일 경우에는 시험관에 임명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해당자들을 먼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는 등으로 엄하게 처벌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정행위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점점 그 수법도 교묘해지거나 대담해졌다. 오죽했으면 “돈만 있으면 어사화도 얻을 수 있다(御賜花耶 金銀花耶)”라는 속언까지 생겨났을까.과거시험의 절차에서도 부조리를 없애려는 노력이 있긴 했다. 우선 과거 응시자의 자격을 심사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던 제도를 ‘녹명(錄名)’이라고 한다. 그래서 과거를 보기 위해 수험생들은 먼저 녹명소(錄名所)에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해야 했다. 사조단자는 응시자 및 그 아버지·할아버지·외할아버지·증조부의 관직과 성명·본관·거주지를 튼튼한 백지에 기록한 것으로, 양인과 서얼을 가려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오늘날 일반인에게 알려진 ‘사주단지’라고 하는 것은 본인의 생년월일과 출생한 시각 정도만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사조단자’가 잘못 전해진 것이다. 보단자는 일명 보결(保結)이라고도 하는데, 6품 이상의 조관(朝官·국가공무원)이 서명 날인한 신원보증서이다.녹명소에서 녹명관은 사조단자와 보단자를 접수한 다음 응시자의 사조 가운데 경국대전에 규정한 결격 사유가 없는가 살펴보고 이상이 없을 때 녹명책에 기입하였다. 특혜를 받은 응시자라 하더라도 녹명하지 않으면 자격이 상실되었다. 만약 녹명에 부정이 있을 경우, 지방의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앙 기구인 경재소의 해당 관원과 사관원은 파직되고, 응시자는 유배를 가야만 할 정도로 엄격히 다스렸다.시험장에는 수험생 이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수험생들은 시험장 입구에서 필기도구 이외의 책이나 쪽지를 소지하고 있는지를 점검받아야만 했다. 이때 더러는 긴 도포자락에 빼곡히 예상 답안을 써왔다가 잡히기도 했고, 붓두껍에 답안을 숨겼다가 적발된 사람도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가서는 6자(약 1.8m) 씩의 거리를 두게 했지만, 담벼락 밑이나 구석진 곳 등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한 쟁탈전도 벌어졌다. 담장 주변의 장소에 자리를 잡아 하인을 시켜 종이쪽지를 건네받으려는 심보였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과거시험장의 모습은 때로는 난장판이었고, 각 당파간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으며,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과거시험 응시의 자격은 천민을 제외하고 농민, 상인, 중인, 양반까지 가능했지만, 현실적으로 생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부에 매달려 과거에 응시하기란 어려웠다. 때문에 과거는 집안 사정이 나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다. 양반들은 체면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고, 세도가와 부잣집에서는 출제관에게 미리 뇌물을 바치는가 하면, 문장을 잘 짓는 자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사서 대신 시험을 치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과거에 합격하기도 했다.부정부패는 특히 소과(小科)인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많았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그리고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의 제목으로 문예창작의 재능을 각각 시험하였다. 이 시험 합격자에게는 생원 또는 진사라고 하는 일종의 학위를 수여하였다. 시험은 3년에 한차례씩 정규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왕의 즉위와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해 실시하는 증광별시(增廣別試)가 있었다.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 백태(百態)는 과옥죄인이 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인물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대충 정리가 된다.1660년(현종1) 1월 22일자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홍익기(洪益祺)란 응시자가 부정행위로 적발되어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그는 현종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국자감에서 실시했던 증광문과의 생원시와 진사시 두 곳에 응시했다. 홍익기는 녹명소에 제출한 응시원서에 마치 자신이 ‘홍익조(洪益祚)’인 것처럼 적었고, 아버지의 이름까지 위조한 사조단자를 제출하여 시험관을 믿게 한 다음 시험장까지 들어갔다가 들통이 났다. 결국 그는 홍익조라는 사람을 대신해 시험을 봐주는 대사(代寫)행위를 하였고, 이를 위해서 사조단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고치는 녹명(錄名) 조작의 부정행위까지 저질렀던 것이다.이 일로 과옥죄인이 된 홍익기는 1660년 1월 말경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그 후 1666년 승정원일기에도 장기현에 정배 중이던 유배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6년 이상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홍익기처럼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 중에는 과거장 앞에서 시제(試題·시험 제목)에 따른 시권(試券·답안지)을 미리 작성하여 응시생에게 팔아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오늘날로 치면 족집게 강사들이 예상문제와 답안을 미리 작성하여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들에게 판매한 것이다. 1746년(영조 22) 경연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는 임금에게 “근래에 선비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기 때문에 일종의 글을 파는 무리들이 선비들을 그르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이런 폐단을 통렬히 금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글을 파는 사람들을 고발하였다. 이에 남옥이란 사람이 체포되어 매문(賣文·글을 파는 것)의 죄목으로 황해도 안악(安岳)에 유배된 사례도 있다.소과에 응시하는 사람에게는 ‘조흘강((照訖講)’이라는 예비시험을 실시했다. 호적 대조를 마친 응시자들에게 소학(小學)으로 강(講)하여 이에 합격된 사람에 한하여 그 증서로 조흘첩(照訖帖)을 주어 초시에 응시하게 했던 제도이다. 여기서 발급한 합격증은 본 시험 응시를 위한 녹명의 절차를 밟을 때 반드시 제시해야 하는 일종의 신분확인증 구실을 했다.이런 조흘강에 대신 들어가서 강(講)을 본 죄로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사람도 있었다. 바로 평양에 사는 이희태(李熙泰)란 사람이다. 그는 1791년(정조15년) 8월 21일 과옥죄인 신분으로 이곳으로 와 충군되었다. 또 1792년(정조16) 6월 18일에는 류경항(柳景恒)이란 사람이 역시 나이를 속이고 형 대신 조흘강에 들어가서 강을 보다가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정현렴(鄭顯念)이란 사람은 1852년(철종3) 11월 9일, 소과 초시의 한 종류인 합제(合製) 때에 시험장을 어지럽힌 죄로 장기현으로 와서 충군(充軍)되었다. 또 심의경(沈宜慶)은 1880년(고종 17) 4월 27일, 패악한 무리들과 연접하여 서로 답안지를 훔쳐보거나 베껴 쓰다가 역시 장기현으로 유배를 오기도 했다.문과시험에서의 부정행위는 이런 것만이 아니었다.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거나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 시험관을 매수하여 답안지 내용의 일부 또는 답안지의 번호를 알려주어 채점 때에 참고하게 하는 것, 남의 글장을 훔쳐서 봉내의 성명을 도려 버리고 자기의 성명을 써 넣는 환비봉(換7955封), 차술(借述)이라 하여 남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 경우, 심지어는 시험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등 과거장의 부정행위 행태는 당시 양반 사회의 이면과 관료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 되기도 했다.한편, 시험의 부정행위는 무과(武科)에서도 있었다. 원응상(元應常)이란 사람은 1783년(정조7) 9월 24일, 활쏘기 시험에서 자기 대신 남을 내보내는 부정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었다. 법에 따라 그는 장기현으로 유배를 와 수군에 보충되었다. 또 1873년(고종 10) 9월 4일에는 김창순(金彰淳)이란 자가 무과선발시험에서 불법으로 과거시험장에 들어가는 간계(奸計)를 부리다가 역시 장기현으로 와 충군되었다.조선시대 양반은 3대까지는 신분이 유지되었지만, 그 이하 자손 중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나오지 못하면 양반 자격이 상실되었다. 그래서 생원이나 진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가문과 후손의 영예를 위해서도 절실한 소원이었다. 물론, 그들 중 관계 진출을 목적으로 다시 문과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고 생원과 진사의 자격만을 원해서 과거를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조선조 양반사회에서 어떤 한 가문이나 지역의 품격을 논할 때는 반드시 그 가문 또는 지역에서 배출된 홍패(紅牌)와 백패(白牌)의 숫자를 따졌다. 홍패는 문무과(文武科)에 급제한 사람이나 잡과에 입격한 사람에게 내어 주는 증서였고, 백패는 생원·진사과 복시 합격자인 생원·진사에게 발급한 합격증서였다. 과거제도의 부정행위가 조선 500년 내내 끊이지 않았던 배경에는 이와 같은 사회 풍조 탓도 컸다.요즈음 대학입시에서 학교장추천 우선 선발제나 기여입학제도가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재능이 있으면서 초야에 숨어사는 인재 발굴을 위해 천거제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수시로 있었다. 과거제도가 지나치게 시험성적에만 의존하고 유력한 집안의 자손에게만 유리하다는 평에 따른 대안이었다. 그러나 기본 방향은 시험성적, 즉 실력에 의한 인재 등용이었다.과거시험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비록 운영 문란과 늘어가는 합격자 수로 인해 회의적인 의견이 다수 제기됐지만, 선비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제도로 자리잡는 데는 변동이 없었다.능력 있는 인재에게 신분상승의 길을 열어주는 시험제도는 지금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겠지만, 시험의 시행에는 반드시 기회균등과 공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개천에서도 용이 나기를 갈망하는 민초들에게 장밋빛의 희망이라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9-10

정쟁에 희생된 불운한 군주

1628년 (인조6) 2월 4일, 인조가 반정으로 왕권을 잡은 지 6년이 될 무렵이었다. 설명절 분위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류백수(柳栢壽)라는 낯선 사람이 고을에 들어섰다. 절충장군(정3품 무관)이었던 그는 그냥 몸만 온 것이 아니라, 최근 몇 년간 한양에서 회오리쳤던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까지 짊어지고 왔다.이야깃거리의 실마리는 광해군이었다. 선조는 한참 동안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대신 후궁 출신 사이에서만 1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공빈김씨(恭嬪金氏)와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광해군이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봐서 그가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도성과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란을 가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분노로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자신이 포기한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광해군은 난중에 의병들을 모아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백성들의 명망을 한 몸에 받았다. 광해군의 왕위계승권은 요지부동할 것 같았고, 그 자신 또한 좋은 임금이 되기 위한 자질을 키워 나갔다.그런데 사달이 났다. 중전인 인목대비가 뒤늦게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다. 불행의 씨앗은 여기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조정에는 신하들이 어떤 왕자를 지지하느냐를 두고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 대북은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세자였던 광해군을 지지했으며, 소북은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적자인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선조도 이제는 마음을 바꿔 영창대군을 왕으로 앉히려 했다. 그러나 결말을 짓지 못한 채 선조는 죽었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광해군이 조선의 15대 왕이 되었다. 아무리 적자라도 겨우 두 살배기인 영창대군이 왕이 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날개를 단 대북 정권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를 이끈 공이 있음에도 선무공신으로 책정되는 것을 방해한 것, 선조가 병이 위중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을 방해한 것 등을 이유로 유영경을 비롯한 영창대군 지지 세력들을 공격했다. 유영경은 결국 삭탈관작 되고 유배를 가서 죽었다. 이를 시작으로 소북의 여러 인사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그러나 광해군에게는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었다. 이제는 명나라에서 즉위를 반대한 것이다.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 어떻게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차지했냐는 것이었다. 임해군도 이에 동조하여 동생인 광해군이 자신을 밀어내고 왕이 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북파들은 우선 임해군부터 모반대역죄를 씌워 강화로 귀양 보내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 유배를 간 임해군은 얼마 후 유배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후에도 진릉군, 능창군 등의 왕족들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죽어나갔다. 왕자와 왕족들이 여럿이 제거되었지만, 대북파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영창대군이었다. 적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정통성 논란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때 일어난 것이 ‘칠서(七庶)의 옥’이다. 이 사건은 대북파가 영창대군과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까지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1613년(광해군 5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했던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이때의 범인들은 서인(西人)의 거두로서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庶子) 박응서(朴應犀)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 달래는 상소를 올린바 있었는데 거부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범죄단체를 조직하여 전국을 무대로 화적질을 일삼다가, 문경새재에서 한건 하고 붙잡힌 것이었다.오늘날로 치면 이른바 특수강도 살인사건인 것인데, 대북파의 중심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꾸몄다.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은 박응서에게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연루되었다고 거짓 자백을 하면 목숨만은 건져 주겠다고 꾀었다. 결국 박응서는 김제남은 물론 영창대군과 인목대비까지 역모에 가담했다며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파장은 대단했다.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해서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 받았던 신흠 등 7명의 대신과 이정구 등 서인(西人)세력 수십 명이 하옥됐다. 또한 이 사건의 추국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양어머니인 의인왕후의 능에다 무당을 보내 저주했던 일까지 발각되었다.곧바로 영창대군을 처단하라는 삼사와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김제남은 임금이 내린 독약으로 스스로 죽었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했다. 이제 겨우 여덟 살인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되었고, 곧바로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임해군에 이어 영창대군까지 살해되면서 광해군은 형제들을 죽인 패륜의 멍에를 쓰게 되었다. 이게 계축년에 일어났다 하여 ‘계축옥사’라고 한다.한편, 아버지에 이어 어린 자식까지 잃고 슬픔에 빠진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홀로 남겨진 채 사실상 연금 상태로 지냈다. 그런 와중에 경운궁에서 임금을 비방하는 내용의 익명서가 발견됨으로써 인목대비 폐비와 폐모(廢母)에 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1월, 마침내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대북은 폐비에 반대한 인사들인 서인(西人)들에게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이항복처럼 끝내 폐비·폐모론에 동조하지 않다가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이항복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귀양 가는 길에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란 시조가 유명하다.광해군은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이런 대북파들의 전횡을 묵과했다. 스스로 반정의 불씨를 키운 셈이었다. 그 불씨에 불이 붙은 것은 1623년 4월 11일이었다. 이서, 이귀 등을 주축으로 한 서인(西人) 반정군이 창덕궁에 들이닥쳤다. 반정의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광해군은 그제야 후원문(後苑門)을 통해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곧바로 붙잡혔다. 집권세력이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이 처형되었고, 2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렇게 하여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끝이 났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16대 왕 인조다. 그래서 이를 인조반정이라 한다.광해군은 문성군부인 유씨, 그리고 폐세자 이지(李祗)부부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해 7월, 이지는 위리안치 된 집에서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인조의 명에 따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장면을 나무위에서 목도한 며느리 폐빈 박씨도 남편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 부부를 잃은 충격으로 폐비 유씨 또한 세상을 하직했다.혼자 남은 광해는 인조반정 이듬해인 1624년, 다시 태안으로 옮겨진다. 표면상의 이유는 그해 일어난 이괄(李适)의 반란군과의 내통에 대한 우려였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조선과 중국과의 미묘한 외교적 갈등을 살펴야 한다.명나라가 서서히 세력이 약해지자, 1616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후금(청나라)을 건국했다. 광해군 시절에는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명·후금·조선 세 나라가 아무런 마찰이 없이 지냈다. 하지만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금나라를 배척하는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했다. 따라서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준비하던 후금으로서는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복해야만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또한 후금은 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려 이를 조선으로부터 교역을 통해 얻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 태종에게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결국 1627년(인조5) 1월, 후금이 조선을 침입했다. 정묘호란이었다. 이 전쟁에서 조선은 졌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국이 된다는 맹약과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잡아가는 조건의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난 다음에야 철수를 했다.인조의 정묘호란 패배는 안 그래도 군적법(軍籍法)과 호패법 시행 등으로 동요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실리외교를 택한 군주 광해군을 떠올리게 했다. 이때를 놓칠세라 권력에서 밀려난 대북파 잔존 세력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중 유효립(柳孝立)은 이 기회가 광해군을 복위시키는 적기라고 판단했다. 유효립의 아버지 유희견은 광해군의 첫째 처남이었지만 일찍 죽고 없었다. 하지만 살아있던 숙부 유희분(柳希奮)과 유희발(柳希發)은 인조반정 당시 참형을 당했고, 당상관 승지로 있던 유효립은 제천으로 유배를 가 있던 유배인의 신분이었다.유효립은 궁내사람들과 짜고 궁중에 들어가 인조를 살해하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의 실행을 위해 그는 먼저 계룡산으로 천도하는 것과, 인성군이 왕이 되는 것이 천명이라는 비결을 유포함으로써 세력을 규합했다. 아울러 몰래 가마를 타고 서울로 가서 전 세마(洗馬) 허유(許900C) 등과 모의하고, 도감초관(都監哨官) 윤계륜(尹繼倫) 등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과 결탁하는 한편, 궁궐의 내시와 대궐문의 수문장까지 포섭을 했다. 이들은 1628년(인조6) 1월 4일 대궐문을 열고 임금의 침전에 곧장 들어가기로 작전을 짜고,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몰래 잠입하려는 찰나였다.그러나 이 일은 하루 전인 1628년(인조 6) 1월 3일, 죽산에 사는 전 부사 허적의 고변으로 탄로가 나버렸다. 난을 기획한 유효립 등 관련자 50여 명은 모두 잡혀 처형되었다. 반면 공을 세운 허적 등 11명은 영사공신(寧社功臣)에 책봉되었다.비극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위 사건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역모 관련자와 광해군이 밀지를 서로 주고받았고, 광해군이 강화에서 인성군과 연락하여 집의 하인들을 모아 군사로 삼았던 사실이 탄로나게 되었다. 유배인들끼리 서로 서신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범행을 계획했던 것이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경비를 철저히 이행하지 않은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이 있었다. 류백수(柳栢壽)는 당시 중추부(中樞府) 당상관(堂上官)인 첨지중추부사로서 이들의 경비를 맡은 책임자였다. 그는 경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는 죄로 복위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똑같이 죽임을 당할 처지까지 왔다. 하지만 전에 쌓았던 공을 참작하여 인조는 그를 죽이지는 않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이다.이런 경위로 장기에 온 류백수는 3년 동안 이곳에서 머물다가 1631년(인조9) 5월 22일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우리나라 역대 왕들 가운데 광해군 만큼 극과 극의 상반된 평가를 받는 제왕도 없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킬 때 열거한 죄목들을 보면, 그는 불효자였고, 왕자와 왕족들을 죽인 불목(不睦)한 왕이었다. 또 오랑캐인 후금(청)과 교류를 하였으며,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폭군으로 매도되었다. 반면 중국의 명·청 교체기의 어려운 국제적 상황에서 ‘중립외교’ 또는 ‘실리외교’의 노선을 펼쳐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했던 탁월한 군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던 광해군의 실리외교 노선이 실패한 정책이었는지 성공한 정책이었는지는 곧 바로 판가름이 났다. 광해군과는 달리 반정 인사들이 취한 후금배척정책은 정묘·병자호란이라는 커다란 전쟁으로 되돌아 왔고, 인조가 삼전도의 그 꽁꽁 얼어붙은 맨땅에서 오랑캐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아홉 번이나 처박으며 항복을 해야만 했던 치욕을 낳았던 것이다. 광해군이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임금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역사는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는 모두 과거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과거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현재의 이 상황도 설명할 수가 없다. 역사는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지배하는, 살아있는 현재인 것이다./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9-03

장기로 온명신(名臣)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도와 준 세력들이 있었다. 세조는 이들의 공을 잊지 않았다. 계유정난 때 공을 세운 43명에게는 정난공신, 왕위를 잇는 데 일조를 한 44명에게는 좌익공신이란 훈호를 각각 줘서 우대했다. 한명회 등 이른바 훈구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국가로부터 공신전과 과전을 부여받아 대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정부 정승과 판서 등 요직을 독점하면서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한때 이들은 남이(南怡) 등 신진세력들로부터 정치적 도전을 받긴 했으나, 유자광의 고발로 남이가 제거된 이후에는 더욱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1469년 음력 11월 28일, 나이 열세 살의 성종이 즉위했다. 수렴청정에 나선 정희왕후도 훈구세력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술 더 떠서 정희황후는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 등 73명을 좌리공신으로 책봉해 우대해줬다.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 어린 임금을 더욱더 잘 보좌해 달라는 취지에서였다. 이제 조정은 훈구세력들이 좌지우지했다. 권력자들이 늘어나자 이에 비례해 권력다툼과 부정부패가 덩달아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훈구파가 있는 반면에 사림파가 있었다. 사림파는 여말(麗末)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간 선비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초야에 묻혀 살며 성리학을 사상의 기반으로 삼고 유교 경전을 중시했다. 또 의리와 명분, 절개를 강조했으므로 당연히 수양대군이 임금이 된 것에도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사림들이 중앙의 정치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제9대 성종 때였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중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있던 훈구파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3사의 관리로 등용했다. 당시 사림파의 중심인물은 김종직이었는데, 그는 고려에 절개를 지켜 경상도에 낙향했던 길재의 학풍을 이은 인물이었다. 그의 제자들로는 정여창, 김굉필, 남효온, 김일손 등이 있었다.정치적 일선에 나선 사림파는 훈구 대신들의 비행을 규탄하였고,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까지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에도 맞섰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야생귀족(野生貴族)들인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다. 태생부터가 서로 다른 두 집단 간의 반목은 성종을 거쳐 연산군에 이르자 얼굴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릴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이런 대립 속에서 유자광과 김종직 간에도 묵은 감정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실록에 사관이 써둔 일화가 있다. 경남 함양에 학사루(學士樓)가 있다. 이 누각은 통일신라시대 함양태수로 왔던 최치원이 자주 올랐던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유자광도 함양을 유람하다가 학사루의 절경에 감탄하여 시를 짓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이곳에 걸었다. 그러나 유자광의 현판은 곧 사라졌다. 함양 군수로 부임하게 된 김종직이 이를 보고 ‘소인배의 글’이라며 당장 떼어내 불사르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입소문을 타고 유자광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김종직의 유자광에 대한 모욕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제자들이 송별시회를 마련했는데,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인사를 왔다.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술잔을 권하자 옆에 있던 제자 홍유손(洪裕孫)이 그에게 ‘누가 현판을 해서 걸어줄지도 모르니 시 한 수를 지어보라’고 했다. 홍유손은 나이가 제일 어린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가 학사루 사건을 빗대어 유자광을 조롱한 것이었다. 어쩌면 유자광이 김종직과 그 일파들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유자광이 이들에게 복수할 기회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 연산군이 즉위하고 전대 왕 성종의 실록을 집필하던 과정이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에 기록한 사실이 있었다. 당시 이극돈은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사초를 편수(編修)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사초를 보다가 김일손이 자신에 대해 언급하며 ‘신하로서 바르지 않은 행동’이라고 기술해 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찾아가 그 내용을 빼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김일손은 이극돈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다.이극돈은 자신의 허물을 들추는 이야기가 더 있는지 사초를 살피게 되었는데, 그러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칭찬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았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쓴 글로 중국 초나라의 항우라는 사람이 의제라는 왕을 죽여 강물에 던져 버린 일을 슬퍼하는 제문이었다. 여기에는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은근히 비꼬는 뜻이 담겨 있었다.이극돈은 유자광에게 달려가 이 일을 알렸다. 그는 당장 조정의 원로대신들인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등을 찾아갔다. 훈구파를 이끌고 있던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날 밤 바로 대궐에 들어가 연산군에게 고변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에 세조와 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등 반체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일러바쳤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아버지와는 달리 왕의 권위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성품의 소유자로, 왕권에 도전하는 사림들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 때를 맞춰 연산군의 손에 굴러들어온 조의제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정치적 무기였다.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였다. 이어서 김일손·권오복·이목·허반·권경유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강겸·이수공·정승조·홍한·정희랑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이종준·이주·박한주·임희재·강백진·조위(曺偉)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앞서 유자광을 조롱하였던 홍유손도 당연히 체포되어 종의 신분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이로써 유자광은 공을 인정받아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 사림들을 탄압함으로서 수많은 목숨을 자신의 권력과 맞바꾼 셈이었다. 이 사건은 사초 때문에 일어난 사화라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이쯤에서 양희지((楊熙止)란 인물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1432년에 순창군수를 지낸 양맹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객지를 전전하다 울산에 살고 있던 양근군수(楊根郡守) 이종근의 딸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울산에서 살게 되었다. 1474년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1476년 6월 채수·허침·권건·조위·유호인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는데, 김종직이 축하 시를 보내오기도 했다. 1478년 홍문관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있을 때 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1486년 모친의 3년 상을 마친 뒤 예조좌랑에 임명되어 벼슬할 뜻이 없었으나, 김종직과 김굉필이 편지를 보내 간곡히 권하므로 벼슬에 나가기도 했다. 양희지는 훗날 조선 성리학의 큰 별이자 도학정치의 길을 연 조광조를 김굉필의 문하에 들게 한다.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을 때, 그해 겨울 조광조에게 희천까지 김굉필을 찾아가게 한다. 유배지에서 김굉필은 혼신의 힘으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맥을 잇게 했다. 이런 행적으로 봐서 양희지는 사림파 계통의 학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1494년 연산군 즉위 후 양희지는 상의원(尙衣院) 책임자로 있으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98년 대사간으로 있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무호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관직을 사직하였다. 문제가 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그로부터 2년 뒤인 1500년 2월, 양희지는 다시 복관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던 그해 5월, 그는 무오사화와 같은 원옥(寃獄)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무오사화 때 북쪽 변방으로 유배보냈던 사람들을 남쪽지방으로 이배(移配)시킬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과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조위가 함경도 의주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특히 조위는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498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의주에 유배되었던 것이다. 양희지의 상소로 순천으로 배소가 옮겨진 뒤, 조위는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었으며, 그곳에서 죽었다.이런 양희지의 일련의 행위들은 훈구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양희지의 문집인 대봉집(大峰集)에 실린 ‘행장(行狀)’을 참고하면, 그는 1500년 5월에 위에 언급한 상소가 문제되어 노사신·유자광의 탄핵을 받았다. 양희지는 이들로부터 역적을 비호한다는 호역(護逆) 죄목에 몰려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까지 왔다. 하지만 그해 9월, 신수근의 변호로 목숨은 부지했으나 삭직(削職)되었다. 관직을 뺏긴 양희지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방축(放逐)을 ‘자처(自處)’하였다. ‘방축’이란 유배이긴 하나, 통상적인 유배보다는 한 등급 감경하여 벼슬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내 쫓는 방축향리(放逐鄕里)를 말한다. 그런데 양희지의 고향은 장기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울산에서 살았고, 그의 나이 40세 전후 때 가족들이 대구로 옮겨가서 살았다. 위 행장에 ‘자처(自處)’해서 장기로 와서 은둔을 했다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자원안치(自願安置)의 성격이 짙다. 자원안치란 죄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안치(安置)하던 제도를 말한다. 어쨌거나 그는 1502년에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서용되었으므로 장기에서 머문 기간은 약 2년 정도였다고 보아진다. 장기를 떠난 후 양희지는 1503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종2품)으로 재임하다가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83년이 지난 1786년(정조 10) 대구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되었다.양희지는 훤칠한 풍모와 맑고 시원한 기상이 있었으며, 학문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성품 또한 청백하여 조선 500년 역사상 흔치않은 명신(名臣)으로 기록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사표로 삼아야 할 한 위인이 무오사화로 인해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됨됨이, 즉 ‘인품의 향기’를 장기 땅에 뿌려놓고 갔다./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8-27

환술(幻術)을 쓰는 파계승(破戒僧)들

환술(幻術)은 재빠른 손놀림이나 여러 가지 장치 등을 이용하여 눈속임으로 불가사의한 광경을 보여주는 연희의 일종이다. 지금은 마술(魔術)이나 요술이란 말을 쓴다.우리나라는 환술에 관한 문헌기록이 매우 드물다. 삼국시대의 환술에 대한 기록은 입호무(入壺舞)가 유일하다.‘신서고악도’에 실린 입호무에 대한 그림을 보면, 재주꾼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작은 항아리에 몸을 구겨 넣어 반대편에 놓인 다른 항아리로 빠져 나오는 모습이다. 마치 오늘날의 마술사들을 연상케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을 토해내는 토화(吐火)와 칼을 삼키는 탄도(呑刀)가 있었다.조선시대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환술이 선을 보였다. 사용되는 여러 가지 기술들이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었던 것이다. 기묘한 재주를 부려 여러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던 환술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자, 이를 나쁜 용도에 사용하는 일당들이 생겨났다. 바로 1473년(성종4) 조선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중(僧) 설징(雪澄) 등 25명의 패거리였다. 이들은 천안(天安)에 살고 있는 승려들이었음에도 모두 관비(官婢)를 처(妻)로 삼고 있었다. 이른바 파계승들이었다. 이 파계승들은 계율을 깨뜨린 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속여 재물을 탈취했다. 오늘날로 치면 장터를 돌아다니며 장꾼들을 속여 돈을 편취하는 야바위꾼들이던 것이다.이들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직인까지 찍힌 문서를 위조해 사기를 쳤다. 그 위조한 문서 내용도 그럴듯했다. ‘어떤 현(縣)의 아무개가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한다 하므로, 내가 기쁘게 들었다. 지금 가는 비구니 아무개의 말을 들으니, 금강산 아무개 절(寺)에서 승려가 입는 옷을 만든다 하니, 거기 소용되는 면포(綿布) 몇 필(匹)을 허락해 보낸다면, 너희들의 부역을 영구히 면제시키고 양민(良民)으로 놓아주겠다.’는 것이었다.이들은 자신들이 도사인 것처럼 요술도 부렸다. 사람의 젖으로 재(灰)를 개어 종이에 글자를 쓰거나 불상(佛像)을 그려서, 그 종이를 물에 담그면 흰색 무늬 불상이 되고, 불에 비치면 붉은색 무늬의 불상이 되었다. 또 사람의 오줌으로 팔뚝과 손등에 부처를 그리고 글씨를 쓴 후에, 소나무 숯가루를 뿌리고 털어내면 마치 문신을 새긴 것처럼 그곳에 검은색 글씨나 무늬가 생겨났다. 글자나 그림을 순식간에 나타나게 하거나 색상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으니, 백성들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홀려 재산을 홀딱 날린 사람들이 속속 늘어났다. 부역과 천민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왕실 실권자의 문서도 있거니와, 도술을 쓰는 믿을 만한 승려들이 그 문서를 제시하며 행사를 했으니 속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지방 수령들이 여기저기서 피해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당시 명의를 도용당한 대왕대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 윤씨였다. 이 무렵은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갑자기 죽고, 열세 살 어린 나이의 성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였다. 그래서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됐다. 조선 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그녀는 조선이 개국한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을 하였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처음 왕자의 아내로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이후 왕비가 되었고, 후대의 왕을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놓쳐버리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수렴청정을 통해 7년간 국가정책 최고결정권자의 자리에 있기도 하였다. 정희왕후의 65년여 연간의 인생은 격동의 조선 전기 정치사 어느 한 부분에서도 빠진 적이 없었다. 스님이라고 하는 자들이 도술을 쓰며 왕실의 공문서를 위조해 백성들을 기망하고 다녔던 이때도 정희왕후는 그 정점에 있었다. 이 패거리들로 인해 전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조정에서는 의금부에 특명을 내려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했다. 의금부에서는 한 달 동안 수사를 한 끝에 범인 일당 중 일부를 잡아들였다. 잡힌 사람들은 승려 설징과 일본에서 온 승려 신옥(信玉), 권문세가에서 부리는 노비 기금동(奇今同), 농민 출신 군인인 이계산(李繼山), 김맹산(金孟山) 등이었다. 일당 중 승려 설산(雪山)·월심(月心)·계엄(戒嚴)·성명(性明) 등 십 수 명은 이미 낌새를 채고 줄행랑을 쳐버려 잡지를 못했다.1474년 1월 4일, 임금은 검거된 사람들 중 주모자급을 모두 참형에 처했다. 일당 중 김맹산의 가담 정도는 경미하였다. 그는 바람잡이 격이었다. 그래서 이날 참형은 면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역(役)에 처해진 그는 엄동설한에 동상으로 퉁퉁 부은 발로 860리를 걸어서 왔다. 하루 95리를 걸어야 9일반이 걸리는 머나먼 유배길이었다. 조선시대 역이란 죄수나 새로 노비·기생 따위의 천인(賤人)이 된 사람에게 노역(勞役)이나 신역(身役)을 배정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김맹산처럼 조선시대 유배형을 받아 역에 처해진 사람들의 집행과정은 어떠하였을까? 유형은 천민부터 양반까지 모두 받는 형이었는데, 신분에 따라 유배 가는 모습도 천차만별이었다. 천민이나 평민은 걸어서 갔다. 이들을 유배지로 호송하는 호송관은 역(驛)이 해당되는 지역의 포졸들이 했다. 역과 역을 릴레이식으로 연결해서 유배지 해당역까지 인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포졸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유배자를 다음 역까지 이동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 일이 귀찮은지라 빨리 유배자를 다른 역까지 보내고 일을 끝내려는 심보였다.반면 관직을 가진 관원의 경우는 당하관인 경우 나장(羅將)이 담당했고, 당상관의 경우는 서리(書吏)가 호송을 책임졌다. 고위급 관리의 경우에는 의금부 도사가 호송을 담당했다. 평민들과는 달리 이들의 호송은 말을 타고 여유롭게 갔으니, 양반사회의 신분차별이 여기에서도 나타났다. 유배자들은 이들 호송관의 노자까지 책임져야 했다. 규정상 하루 80∼90리는 가야 했고 보통 수일에서 수십일 걸리는 길이었으므로, 밥값과 숙박비만 해도 만만치가 않았다. 신분이 높아 호송하는 인원이 많아지면 그에 따른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가난한 선비와 평민들은 하인이나 말 한필 없이 홀로 가야만 했다. 곤장을 맞고 성치 않은 몸으로 유배에 나선 이들에게 유배길은 곧 생과 사가 교차되는 죽음의 길이기도 했다.형벌로 과해지는 역(定役)은 변방의 역리(驛吏)나 관노비, 충군(充軍) 따위였다. 특히 충군은 군역에 복무를 하도록 한 것인데, 정군(正軍)으로서의 군역이 아니고 고된 천역인 수군이나 국경수비대 등에 충당되었기 때문에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엄한 형벌의 하나였다.조선시대 장기현에는 복길·뇌성·발산 3개의 봉수대가 있었고, 읍지(1832년)에 의하면 이에 속한 봉군만 해도 300명 넘게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종4품의 만호(萬戶)가 수장으로 있는 포이포진(包伊浦鎭)이 있었다. 포이포진은 조선 세종 때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오늘날 포항 장기면 모포리에 설치하였는데, 진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병선 8척 군사 5백89명이 있다’고 했다. 이런 사정으로 장기현에 배정된 유배인들 중에는 봉수대를 지키는 봉군 아니면 포이포진의 수군에 충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김맹산도 위 둘 중 한곳에 충군되었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이 사건을 계기로 성종은 명령을 내려 백성들이 환술에 속지 말 것을 전국에 지시하였다. 그 후로부터 환술은 조선 내내 속임수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범죄로 취급되었다.하지만, 이런 엄한 금령과 처벌에도 불구하고, 환술과 도술에 능했던 유명한 인물이 또 나타났다. 바로 ‘전우치(田禹治)’란 사람이다. 그는 중종 때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사퇴하고 송도에 은거하면서 도술가(道術家)로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조선 중기 유명한 문신인 신광한(申光漢), 송인수(宋麟壽) 등과 친하게 지냈다고 전한다. 하루는 신광한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던 중에 입에 넣은 밥알을 내뿜자 그것이 각각 흰나비로 변하여 날아갔다고 한다.또 어느 때는 가느다란 새끼 수백 발을 하늘에 던지고 동자(童子)를 시켜 하늘에 올라가 천도(天桃:복숭아)를 따오게 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그를 잡아다가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신천옥(信川獄)에 가두었는데, 옥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뒤에 친척들이 이장(移葬)하려고 무덤을 파보니 시체 없는 빈 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산집(五山集)’에 의하면, 어느 날 전우치가 차식(車軾)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 1질(帙)을 빌려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는 이미 전우치가 죽은 지 한참 후였다는 것이다. 전우치의 혼백이 와서 책을 빌려갔다는 이야기다. 이뿐 아니라 후세에 전하는 각종 문헌에는 그에 관한 신비한 행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이러한 실존인물 전우치의 행적을 소설화한 작품도 나왔다. 바로 ‘전우치전’이다. 그 줄거리는 탐관오리들을 골탕 먹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민생고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앞서 성종때 김맹산 패거리들이 환술을 악용했던 것과는 달리 전우치는 부패한 사회와 탐관오리들을 고발하고 응징하여,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개혁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다.한편으로 보면, 환술이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기술이긴 하지만, 억눌린 민초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는 그만한 게 없었다. 그리고 많은 환술에는 과학이 숨어 있었다. 자연과학의 원리에 뛰어난 연기력을 더하면 일반 상식을 초월하는 멋진 환술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화학이나 물리학적 원리를 이용하면 더욱 그랬다.김맹산 등의 패거리가 백성들을 속이기 위해 사용한 것은 화학의 원리를 응용한 환술이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 중국으로부터 서양문물이 조금씩 들어오게 되고, 일부 눈을 뜬 사람들이 화학변화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서 환술의 기술에도 변화가 왔다. 종이에 글자나 도화를 나타나게 하거나 글자와 그림의 색상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 펄펄 끓는 솥에 손을 넣어도 화상을 입지 않는 것, 불을 입에서 토해내는 환술 등은 사물의 화학적 변화를 이용하는 수법이다.앞서 언급한 패거리들이 사용한 수법도 알고 보면 간단하다. 광물인 초석(硝石)을 물에 섞은 후 붓에 그 물을 묻혀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글자와 그림이 마르면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향불에 쬐면 그것들이 다시 나타난다. 색깔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도 종이와 물에 비밀이 있다. 종이는 보통 종이가 아닌 강황지(薑黃紙)를 사용하고, 물은 소다수를 사용한다. 강황이 소다를 만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화학적 변화를 일당들이 알고 이용한 것이다.환술을 사기행각에 이용하다 장기현 역(役)에 처해진 김맹산은 1476년 1월 21일까지 약 2년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갔다. 이후에도 환술 때문에 옥사한 전우치의 예에서도 보듯이,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환술을 쓰다가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는 내용이 더러 있다. 그래서 환술은 공연으로 승화되지 못했고, 음지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조선시대 양반층들은 그래도 문화생활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시를 짓고 회화를 그리고, 때로는 기생들과 가무를 즐기며 회포를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달랐다. 대중문화가 없던 시절, 환술조차도 마음대로 관람하지 못했던 시대를 살다간 민초들의 삶이 왠지 애처롭게 느껴진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8-20

역적의 굴레

세조가 왕권을 잡은 지 13년이 되는 해였다. 북쪽 변방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다. 전 회령부사 이시애가 절도사 강효문(康孝文)과 그 일행들을 참살하고,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일대를 장악한 것이다. 이 난은 약 3개월간 지속되었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한양에서 700여리 떨어진 경상도 장기 땅에도 전해질 무렵, 한 무리의 유배객들이 우르르 이곳으로 몰려왔다. 이 난에 연좌된 사람들이었다. 그 숫자는 무려 십 수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여기에 연좌됐던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장기로 왔다.이시애는 함길도의 토호로 그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이원경(李原景)은 원래 평안도 출신으로 고려 말기에 원나라의 장수로 있다가, 이성계가 동녕부를 정벌할 때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에 항복한 장수였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에는 삭방도 첨절제사 등을 역임하며 함길도에서 터전을 닦았다. 아버지 이인화(李仁和)도 막강했다. 그는 회령, 경원 등 북방 지역의 절제사, 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6진의 개척과 수비에 상당한 공을 세워 세조 즉위 후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관이 된 이시애도 회령·경흥 등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난을 일으키기 불과 3년 전까지도 회령부사로 있었다.함길도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었고, 또 김종서의 6진 개척 때 토호들이 공을 세웠기 때문에 다른 지방에 비해 이들의 영향력이 컸다. 또 지리적으로는 여진과 가까워 세종 때는 이 지역 호족들을 우대하여 수령으로 임명하였고, 광범위한 자치권과 특혜를 주면서 백성들의 이주를 장려하기도 했다.하지만 세조는 달랐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다는 구실로 함길도 출신 수령 임명을 제한하고, 한양출신 수령들로 대체시켰다. 중앙에서 내려간 관리들은 특히 유향소(留鄕所)와 큰 갈등을 빚었다. 유향소란 일종의 지방자치기구였다. 지방의 유지들이 그 지방의 풍속을 바로잡고 관리들의 횡포를 견제하는 기능도 갖고 있었기에, 원초적으로 유향소는 관리들과 마찰이 생길 여지가 있긴 했지만, 특히 함길도는 더했다. 이런 와중에 절도사로 부임 해온 강효문의 비행은 이미 도를 넘어 심각한 수준이었다. 마침 어머니의 상을 당해 고향 길주에 머물고 있었던 이시애는 피가 끓어올랐다.결국 이시애는 1467년 5월 16일, 이 지역의 유향소 세력과 힘을 합쳐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우선 강효문부터 죽이고, ‘남도의 군대가 올라와 함길도 사람을 다 죽인다’라고 선동을 하여 도민들을 끌어들였다. 한편으로는 세조에게 ‘절도사 강효문이 한양의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의 군사를 끌고 한양으로 올라가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거짓보고를 올려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실제 이 보고로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를 옥에 가두는 해프닝까지 벌였다. 그 사이 이시애는 함길도 일대의 성을 모두 장악해버렸다.조정에서는 뒤늦게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음을 파악하고,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을 편성했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3만 관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이시애는 배신한 측근들에게 잡혀 토벌군에게 인계됐고, 토벌군 진지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시애의 동생 등 참여한 가족들과 평소 그를 따르던 맹숭인(孟崇仁), 최득경(崔得敬), 함여해(咸汝諧), 박진효(朴盡孝), 최옥동(崔玉同) 등의 측근 장수 수십 명이 모두 참형을 당했다.세조는 난을 계기로 북도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통치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반란의 근거지가 되었던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시켰다.이들과 연좌(緣坐)된 가족들에 대한 처벌은 세조가 죽고 난 다음인 1469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이루어졌다. 연좌된 사람이 워낙 많았고, 그중에는 나이가 차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장기현에는 1469년 (예종1) 2월 1일부터 1482년(성종13) 2월 5일까지, 무려 13년간에 걸쳐서 16명이 배속되었다. 이시애 첩의 딸 이비(李非)와 조카 이무산(李茂山)을 선두로 맹숭인의 첩 경원화(慶源花)와 딸 거부비(巨夫非), 최득경의 아내 옥금(玉今), 아들 벌응거(伐應巨), 동생 최민경(崔敏敬)과 최빙경(崔氷京), 조카 최여허(崔汝虛)와 최석종(崔石宗)이 그들이다. 맹숭인은 함길도 경원(慶源)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겸사복(兼司僕)이라는 관직에 있다가 난에 가담한 사람이었고, 최득경 역시 같은 곳 출신으로 조선의 공신적에 등재된 사람이었으나, 이 난에 참여하였다.그 외에도 반군의 장수로 활동한 함여해의 아내 막가(莫加). 딸 함석을장(咸石乙莊), 함구부(咸仇夫)가 왔고, 박진효의 아내 월화(月花), 최옥동의 동생 최산(崔山)도 이곳으로 왔다. 이들 중 이비, 이무산, 최산, 함석을장, 함구부, 최여허, 최석종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였음에도 예외 없이 유배의 쓰라린 맛을 봐야 했다.장기로 온 이들은 역모를 꿈꾼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역모자의 가족이었다는 이유로 먼 북방에서 동해 끝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는 조선 중기에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잘 나타나 있다. 홀로 되어 유배 온 여인을 관청의 백정이나 관노들이 온갖 수를 써서 자신들의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는 것이다. 전남 완도군 일대에서 전해오는 ‘처녀풍과 소금비(鹽雨)’에 관한 이야기는, 비록 고금도에 유배된 장현경(張玄慶)의 처와 자녀가 겪어야만 했던 서글픈 가족사지만, 조선시대 대부분 여성 유배인들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장현경은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인동부(지금의 구미·선산·칠곡)에 살았다.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인산(因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인동부사였던 이갑회(李甲會)는 분위기 파악도 못했는지, 하필 이때 풍악을 울리면서 부친의 생신연을 마련하였다. 이에 분개한 장현경의 아버지 장시경(張時景)은 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나, 국상 중에 예의에 어긋난다며 거절하였다. 이갑회는 이에 앙심을 품고 오히려 ‘장시경 형제가 정조 독살설을 유포해서 세력을 모아 서울로 진격, 노론벽파를 제거하려 한다’고 관찰사에게 고변을 했다. 졸지에 역모죄를 뒤집어 쓴 장씨 일가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이어졌고, 인동은 10월 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되기까지 했다.이 사건으로 장현경의 처와 자식들이 1800년 8월에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를 온지 9년이 지난 1809년의 일이었다. 이때 큰딸은 스물두 살, 작은 딸은 열네 살, 사내애는 겨우 열 살이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진((鎭)이 있었는데, 하루는 진영의 군졸 한명이 술에 취해서 돌아가다가 울타리 구멍으로 큰딸을 엿보고 유혹하기 시작했다. 큰 딸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으나, 군졸의 추태 행위는 계속되었다. 군졸은 ‘네가 아무리 거절해봤자 끝내는 내 여자가 될 것’이라며 겁을 줬다. 분을 참지 못한 큰 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곧바로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소식을 들은 그의 어미도 바다에 투신했다. 이를 보고 둘째 딸도 물에 뛰어들려고 했으나, 어미가 “너는 살아서 관가에 가 이 사실을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며 만류해 죽지는 않았다.둘째 딸이 섬의 보장(堡將)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렸다. 보장은 이 사실을 강진현에 보고했고, 현감 이건식(李健植)이 현장에 나가 검시(檢屍)를 한 후 전라도관찰사에게 수사기록 일체를 넘겼다. 민심이 뒤끓고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해남 수군사(水軍使) 권탁(權逴)도 나섰다. 관찰사에게 고금도 수장(守將)과 강진현감을 파직시켜야 한다는 장계까지 올렸다. 갑자기 파직 위기에 처한 현감은 아전과 의논하여 비장(裨將 관찰사 수행비서)에게 돈 천 냥을 뇌물로 썼다. 그러자 관찰사가 검안(檢案) 서류 일체를 현에 되돌려주고, 수영(水營)에서 올린 장계도 되돌려보냈다. 현감은 끄떡없이 살아남았고 추행을 했던 군졸과 상관의 죄도 불문에 부쳐졌다. 사건이 사장(死藏)되어 버린 것이다.그로부터 이 섬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음해 7월 28일, 장씨 처와 큰 딸이 죽은 지 꼭 1년이 되는 기일(忌日)이었다. 큰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서는 은산(銀山)이나 설악(雪嶽)과도 같은 파도가 일었다. 바람에 파도의 물거품이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산꼭대기까지 소금비를 뿌렸다. 염분을 맞은 곡식과 초목들은 모두 말라 죽어 섬 전체가 흉년이 들었다. 이듬해 같은 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바닷가 백성들은 이 바람이 억울하게 죽은 장씨 딸의 원혼(冤魂)이라고 하여 ‘처녀풍(處女風)’이라고 불렀다. 얼마 후 암행어사로 홍대호(洪大浩)란 사람이 내려왔는데, 그도 이 기막힌 사연을 들었지만 역시 묵인하고 가버렸다.다산 정약용은 이 사실을 강진 다산초당에 있을 때 전해들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진실을 파헤쳐 탐관오리들을 처벌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없었던 것이다. 동병상련이랄까. 그는 조용히 ‘소금비(鹽雨)’란 시문(賦)을 짓고, 그 경위를 ‘고금도 장씨 딸에 대한 기사’란 제목으로 자세하게 남겼다. 그래서 다산 시문집에 그 전말이 전한다.다산은 이후 여성 유배인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목민심서’에도 여성 유배인들에 대한 처우를 거론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이루어지는 점고(點考)가 문제였다. 유배인들은 달마다 두 번씩 삭망점고(朔望點考)를 받아야만 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수령에게 가서 점검을 받았던 것이다. 이외에 수시로 받는 별점고(別點考)도 있었다. 질이 좋지 않은 수령은 이런 점고를 빙자해서 딴 마음을 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이를 안 다산은 ‘여성 유배자의 거주지에는 남자들의 출입을 금하며, 여성 유배인이 점고를 받을 때는 얼굴을 가리고 관아에 들어오게 하고, 수령은 문을 닫아걸고 여자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심문을 마친 뒤에는 관비를 시켜서 집에 호송하게 하고, 남자들이 주위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여, 여성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전도 그 이후도 다산의 이와 같은 권고가 받아들여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이시애의 난에 연좌되어 역적의 굴레를 쓰고 이곳에 온 여성들이 어디서 머물렀는지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이 ‘고금도 장씨 딸’의 경우처럼 얼마나 많은 유린과 능욕을 당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신창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성난 파돗소리와, 양포항에서 성황당고개를 넘어오는 남쪽 바람이, 당시에 겪었던 이들의 서러움과 막막함을 전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쓰릴 뿐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8-06

슬퍼라. 사육신(死六臣)

1456년 7월 초순,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몰골이 꾀죄죄한 두 남자가 포항 장기 땅을 밟았다. 절뚝거리는 다리에다 비에 젖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들어서는 그 행색이 한눈에 봐도 유배객이었다. 이름이 박용이(朴龍伊)와 박사평(朴斯枰)이라고 하는 이들은 형제지간이었는데, 능지처참 당한 박중림(朴仲林:박팽년의 아버지)의 조카들이었다. 이들은 모반대역죄의 연좌에 걸려 그해 6월 28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이래 하루에 80리씩을 걸어서 이제 도착한 것이다.이들이 여기까지 온 비통한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왕조의 불행한 시작인 계유정난을 알아야하고, 이것과 맞물려 신권(臣權)과 왕권의 갈등이 불러온 단종 복위운동을 살펴봐야 한다.세종의 맏아들 문종은 몸이 약해 재위 2년4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죽기 전 문종은 후사가 걱정이었다. 아버지 세종이 정비(正妃)에서만 8남 2녀, 또 다섯 후궁에서도 10남 2녀의 형제를 두었으니, 이들 중 누군가가 세자를 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좌의정 정분(鄭苯)·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세자가 왕이 되었을 때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문종이 죽고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마저도 이미 3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측근에서 후원해줄 세력이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의 유지(遺旨)에 따라 원로대신 김종서·황보인 등에 의존하여 정치를 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대신들은 아버지 형제 중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던 수양대군과 상당한 마찰이 있었고, 아버지가 아꼈던 집현전 출신의 젊은 유신(儒臣)들과도 정치적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수양대군은 집현전 출신 관료, 정치무대에서 소외당한 한명회(韓明澮)같은 하급관리, 그리고 홍달손(洪達孫)을 비롯한 무사(武士)들을 규합하여 일순간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김종서 등 대신들 수십 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해버렸다. 이른바 1453년(단종1) 10월 10일에 일어났던 계유정난이다. 이것은 박팽년을 비롯한 수백 가문에 대한 비극의 서막이었다.권세에 앉은 수양대군은 강력하게 자신에게 맞선 안평대군을 강화로 축출한 뒤 독약을 내려 죽게 하고, 이어 끝까지 단종을 지키려던 금성대군마저 역모죄를 씌워 유배를 보내 버렸다. 친형제들과 원로대신들을 정리한 수양대군은 정난을 일으킨 지 1년8개월 만에 단종을 이름뿐인 상왕(上王)으로 물러 앉히고, 세조로 즉위했다.이제 세종조 말기부터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바라고 갈망해 오던 집현전 출신 유신들도 세조와 함께 자신들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었다. 세조의 정치운영은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태조가 건국 초기부터 도입하여 추진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폐지해버렸다. 이는 최고관부인 의정부가 3정승 합의하에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도록 한 통치체제인데, 이것부터 없앤 것이다. 그 대신 판서가 나랏일을 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는 6조(六曹) 직계제(直啓制)를 실시했다. 신하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국왕이 중심이 되는 전제정치를 지향한 결과였다. 집현전 출신 유신들이 극구 반대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정국은 세조의 독주로 진행되었고, 정치운영론을 둘러싼 신권(臣權)과 왕권의 대립은 점점 고조되어만 갔다.이런 갈등은 자연스럽게 단종 복위운동으로 이어졌다. 세조의 정치운영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 신하들이 세조를 왕위에서 몰아낼 궁리를 해 냈던 것이다. 이들은 거사일을 1456년(세조2) 음력 6월 1일로 잡았다. 이날은 세조가 창덕궁에서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열기로 한 날이었다. 연회에서 왕의 호위를 맡은 별운검(別雲劍)으로 이쪽편인 유응부, 박쟁을 세워두었다가 행사 중 적당한 시기를 봐서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별운검을 동반하는 것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한명회가 그날 아침에 갑자기 별운검의 시위를 폐지해버렸다. 이에 암살 계획은 실행 일보 직전에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거사 계획을 미루기로 했다.그런데, 일이 꼬여 버렸다. 모의에 참여했던 성균 사예(司藝) 김질(金礩)이 거사가 실패했다고 판단해 지레 겁을 먹었던 모양이다. 그는 바로 다음 날,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우찬성(종1품)이었던 정찬손은 사위를 대동하고 곧바로 세조에게 쫓아가 모반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날로 관련자들이 모두 잡혀와 옥사(獄事)가 일어났다.1456년(세조2) 음력 6월 2일에 일어난 이 엄청난 옥사에는 사육신을 비롯한 70여명이 처형됐다.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하고 그 서책들을 예문관으로 옮겼다. 이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의 여자 가족들 중에 관공서 노비로 전락한 여성이 172명이고, 공신 집에 끌려가 종이 된 부녀자가 181명이나 됐다.거론된 이들은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가리지 않고 팔과 다리를 수레에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여덟 차례나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 가운데 41명이 거열을 당했다. 처형된 이들의 머리는 사흘 동안 거리에 효수(梟首)됐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쟁, 권자신, 송석동, 윤영손, 이휘가 그들이다. 이후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이 더 밝혀졌는데, 심신, 이유기, 이의영, 이정상, 이지영, 이오, 황선보 등이 그들이다.이날 박팽년은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의 아버지인 박중림까지도 가담했다고 실토를 하고는 결국 형장(刑場)에서 숨을 거뒀다. 이제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심문 도중에 죽은 박팽년과 잡히기 전에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유성원과 허조(許慥)에 대해서도 따로 시체를 거열하고 저자에 3일 동안 효수했다. 찢긴 시체들은 모두 처형장인 새남터에 버려졌으나, 생육신 중 한 명인 김시습이 몰래 수습했다는 말이 전해진다.이때 죽음을 당한 여섯 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르는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의 여섯 사람이다. 최근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었는데,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도 사육신과 같은 충신이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제는 사칠신(死七臣)이라 불러야 맞다.반역 연좌인에 대한 처벌도 있었다. 사건에 참여한 이들의 친자식들은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에 처해졌다. 그 외에 어머니와 딸, 처와 첩, 할아버지와 손자, 형제자매 뿐 아니라 아들의 처와 첩들은 국경 부근 작은 고을의 노비로 보내졌다.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원방잔읍(遠方殘邑:쇠하여 황폐해진 고을)으로 보내 노비로 삼았다.박용이와 박사평은 난에 참여한 박중림 형제의 자식들이었으므로, 원방잔읍인 경상도 장기로 보내졌다. 한양에서 보면 그곳에서 700여 리 떨어진 장기가 바로 ‘먼 지방의 쇠잔한 고을’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사건을 주도한 박팽년의 가문은, 세조로부터 다른 어느 가담자보다도 철저하게 응징을 당했다. 극형에 처해진 사람도 가장 많았고, 여종이 된 처와 첩도 가장 많았으며, 몰수된 전답도 제일 많았다. 그 이유는 부자(父子)가 모두 가담되었을 뿐 아니라, 잡혀온 박팽년이 세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세조를 왕이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박팽년은 1447년 과거에 급제하고, 1453년(단종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집현전 학사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한 적도 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자신을 ‘신하(臣)’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사건 당시에는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도 참여했다.박중림 역시 1427년 과거에 급제하여 1453년 예문관대제학·공조판서 겸 집현전제학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대사헌과 형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국법 집행이 엄정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크게 통분해 벼슬을 내놓겠다는 뜻을 밝히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그에게 이조판서를 주어 회유했으나 끝내 사양했다. 이듬해 아들 팽년과 집현전 제자들이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가담했다가 거열형을 당한 것이다.분노한 세조는 박팽년의 가족들 중 남자는 젖먹이까지 모두 죽여 3대를 멸해버렸다. 이때 죽임을 당한 형제들은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박대년(朴大年), 박영년(朴永年)이고, 아들들은 박헌(朴憲),박순(朴詢),박분(朴苯)이다. 이는 친자식이라도 15세 이하면 죽이지 않고 종으로 삼는다는 율문의 규정을 넘어서는 가혹한 처사였다.박팽년, 그리고 그의 형제들 아내와 딸들에게도 불행이 닥쳐왔다. 모두 임금의 종친과 대신들의 집 노비로 보내져야 하는 기구하고도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던 것이다. 특히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은 한때 팽년과 집현전 동료 학사였던 영의정 정인지에게 종으로 보내졌다. 세조 편에 섰던 정인지는 이 사건으로 옥금 뿐 아니라 김종서의 며느리와 딸, 손녀들까지도 종으로 하사받았다. 팽년의 제수(弟嫂) 내은비(內隱非)는 태종의 사위 권공(權恭)에게, 또 다른 제수 무작지(無作只)는 익현군(翼峴君) 이곤(李璭)에게, 형수 정수(貞守)는 강성군(江城君) 봉석주(奉石柱)에게 각각 노비로 보내졌다. 팽년의 큰며느리 경비(敬非)와 둘째며느리 옥덕(玉德)은 나란히 이조 참판 구치관(具致寬)의 노비가 되었다. 박팽년 일가의 토지도 모두 분할되어 왕실종친과 대신들에게 나누어졌다. 경기도 과천 금사라기 땅은 황희 정승의 아들인 황수신(黃守身)에게 주어졌다.이처럼 집안이 풍비박산된 채 장기로 온 박용이와 박사평은 잠시 관노로 있다가 ‘난신(亂臣)에 연좌된 사람 가운데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은 안치(安置)하라’는 왕의 지시에 따라 곧 관노는 면하였지만, 12년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468년 9월 6일에야 방면되었다.역신·난신으로 규정된 사육신에 대한 신원(伸冤)은 사건이 발생한 지 235년이 지난 1691년(숙종17)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논란들이 일었지만, 충신을 역적으로 둔갑시킨 채 역사에 그대로 둘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명예가 회복된 이후 이들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높이 추앙받는 충절의 상징으로 내세워졌다.외로운 유배의 땅에 버려진 듯 내팽개쳐졌던 박팽년의 가족들, 그들은 ‘바닷가에 쇠하고 황폐한 고을’로 여겼던 이곳 사람들에게 ‘불사이군(不事二君)’이 어떤 것인지를 본보기로 남겨놓고 떠나갔다./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30

우리가 상납할거라곤 노루가죽 밖에 없었다오

1423년(세종 5년) 10월 초,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들판을 따라 한 선비가 장기로 유배를 왔다. 바로 그해 9월 26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최윤복(崔閏福)이란 사람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의주 판관으로 있었다.그는 개국공신의 아들이었다. 윤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고려말 조선초 경상도 창원 출신 무신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 그의 친형인 최윤덕(崔閏德)은 꽤 유명하다. 세종 때 김종서와 함께 평안도와 함경도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낸 뒤 4군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선을 확정지은 인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무인 출신이었지만 정승까지 역임하고 세종으로부터 궤장(나라에서 국가에 유공한 늙은 대신에게 내려 주던 궤와 지팡이)까지 하사받았다. 괜찮은 가문의 엄격하고 인자한 형님 밑에서 자란 최윤복이었지만, 불미스럽게도 그는 ‘뇌물공여’ 사건을 저지르고 장기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되었다.세상 어디든 뇌물이 없는 사회는 없었다.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도 뇌물은 성행했다. 조선시대의 뇌물은 ‘분경(奔競)’과 함께 따라다녔다. ‘분경’이란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이다. 즉 뇌물을 들고 권세가의 집으로 찾아가 청탁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관직 사냥이라고 하여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고도 불렀다.조선시대를 연 태조부터 적극적으로 뇌물 타파를 외치며 분경을 없애려고 했다. 태조는 뇌물로 관직을 사고파는 엽관운동이 고려 말부터 성행했던 것을 꼬집으며 이를 없애려 했지만,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뇌물 수수가 만연했다. 정종(定宗)이 분경을 금지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는데도 실효성은 별로 없었다. 태종 때는 김점(金漸)의 뇌물비리가 조선천지를 떠들썩하게 했다.그는 후궁인 숙공궁주((肅恭宮主)의 아버지로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너무 많은 뇌물을 받아 문제를 일으켰다. 여러 고을에서 뇌물을 거둬들인 것은 물론 감형을 원하는 죄수들에게도 뇌물을 요구했다. 북경에서 사신과 함께 돌아오는 상인(商人)들에게는 뇌물을 받아야만 입국을 허락했을 정도였다. 이를 알고 김점을 문책하던 태종은 “숙공궁주가 그대로 궁중에 있으면 공정한 의(義)와 사정(私情)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라며 후궁을 궐 밖으로 내쫓았다. 이후 태종은 분경금지를 법제화한다.하지만 분경은 그 특성상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지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이 한양으로의 출셋길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앙 권력자들에게 줄을 대고 노골적으로 뇌물을 바쳤던 것이다. 군대 징집이나 세금 면제, 형벌 감형을 청탁하는 뇌물도 많았다. 그렇게 주고받은 뇌물은 보편적으로는 은으로 만든 돈이나 토지문서, 노비 등이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으로 확인해보면 특이한 뇌물도 있다. 더덕, 문어, 노루나 사슴가죽이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개고기나 잡채도 뇌물로 제공되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뇌물의 종류가 달랐던 것이다.중종 때 김안로(金安老)는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하게 되자 왕과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위세가 등등했던 김안로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를 안 이팽수(李彭壽)란 사람은 봉상시(奉常寺:국가제사를 관장하는 관청) 참봉(종9품)으로 있으면서 김안로에게 개고기를 자주 상납했다. 그는 크고 살찐 개를 골라 견적(개고기 구이)을 해서 매번 김안로의 구미를 맞췄다고 한다. 이후 김안로는 그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임금 비서실의 정7품)에 등용시켜 주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가장(家獐)은 ‘삶은 개고기(烹炙犬肉)’를 가리킨다. 결국 이팽수는 ‘개고기로 주서가 된 사람’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조선왕조실록에 남겼다.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뜬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진복창(陳復昌)이란 인물이었다. 진복창은 한때 이팽수와 함께 봉상시 주부(정6품)로 근무한 적이 있던 직장동료였다. 그는 이팽수가 한 것처럼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했다. 하지만 김안로의 입에는 진복창의 개요리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안로는 ‘이팽수의 개고기보다 맛이 없다’는 질책까지 하며 진복창의 청탁은 들어주지 않았다.실록에는 광해군 때의 ‘잡채 판서’ 그리고 ‘더덕 정승’도 기술되어있다. 광해군에게 잡채를 뇌물로 바친 사람은 이충(李沖)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충은 갖은 채소를 볶아 만든 잡채를 광해군에게 올렸는데,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그 덕택에 이충은 호조판서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길에 오가면, 삼척동자도 그를 알아보고 ‘잡채 판서’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그를 만나면 너나없이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겼던 것이다.더덕 정승은 더덕으로 좌의정까지 한 한효순(韓孝純)을 일컫는다. 옛날엔 더덕을 모래밭에서 나는 인삼이라고 해서 사삼(沙蔘)이라고 했다. 한효순은 이 더덕으로 꿀떡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쳐 총애를 입고 정승이 되었다. ‘사삼 정승의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구나’라고 이들을 조롱하는 풍자시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실록에는 세종 때 대사헌이던 신개(申槪)가 강원도 고성 수령 최치(崔値)라는 자로부터 문어 두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가 구설에 오르자 스스로 사직 상소를 올린 기록도 보인다.이처럼 뇌물의 종류는 천차만별이지만, 최윤복이 뇌물로 쓴 물건은 노루 및 사슴가죽과 살코기였다. 조선시대 노루와 사슴고기는 왕실의 각종 제의에 중요한 제물(祭物)로 쓰였다. 사슴고기로 만든 것은 건녹포(乾鹿脯)라 하고, 노루고기로 만든 것은 건장포(乾獐脯)라 한다.최윤복은 이것들을 서울과 지방의 여러 곳에 뇌물로 쓰고, 또 졸곡(卒哭) 전에 포(脯)를 서로 증정하였다는 것이다. 졸곡제사는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가려서 지내는 것인데, 마침 이때가 태종이 죽고 아직 졸곡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의주목관(義州牧官) 창고에 있던 그 노루와 사슴 고기들은 공물로 받아 둔 것들이었다. 당연히 궁중에 써야할 것들이었는데, 이를 사사로이 뇌물로 제공했으니 사건이 더 커지게 된 것이다.왕실에서 쓰는 포육(脯肉)은 공물로 받는 것 외에도 왕실의 사냥인 강무(講武) 때 잡은 노루와 사슴으로도 마련하였다. 더러는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별사옹(別司饔)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직접 만들게도 하였다. 녹포로 만들지 않은 고기는 소금에 절여 숙성 시킨 녹해를 만들어서 제례에 사용하기도 했다.하지만 최윤복이 이것들을 뇌물로 쓸 세종(世宗)대에는 인구가 늘어나 산을 개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노루와 사슴이 매우 귀했다. 그럼에도 중앙의 각 관사(官司)에서는 사용량이 줄지 않아 지방관들에게 공납을 독촉했다. 이를 조달하지 못해 숫자를 감하거나 제외해달라는 충청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의 문서는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노루와 사슴 건포(乾脯)를 준비하기 위해 사냥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이 산과 들을 덮고 열흘 동안이나 사냥을 해도 잡은 짐승은 두세 마리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도저히 할당량을 조달하지 못하겠으니 공물에서 제외해 달라는 지방수령들의 다급한 상소가 빗발쳤음은 물론이다. 공급이 달렸으므로 궁중의 의료와 시약(施藥)을 관장하는 전의감(典醫監)에 바치는 녹각(鹿角)과 여러 도(道)의 군기(軍器) 장식(粧飾)에 사용되는 사슴뿔 한 척(隻) 값이 면포로는 한 필이 넘었고, 미곡으로는 20여 말(斗)에 달한다고 했다.이렇게 귀한 노루와 사슴고기가 마침 의주목 관아에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의주 목사(義州牧使)는 김을신(金乙辛)이었는데, 그도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 생각은 않고 판관과 똑 같이 권력 있는 집과 호세(豪勢)한 곳에 공공연히 뇌물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의주는 국경지역에 있었으므로 명나라로 드나드는 고관대작들이 반드시 머물고 가는 곳이었다. 관리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조(吏曹)의 요직자나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정승들이 주로 사신으로 임명되어 이곳을 지나쳤다.이 사건에서 뇌물을 받은 사람은 형조판서 이발(李潑)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수(李隨)였다. 이들은 태종(太宗)이 돌아가신 것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한 부고사(訃告使)와 부사(副使)가 되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목에 들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목사와 판관이 모두 포수(脯脩:얇게 잘라서 말린 고기)를 뇌물로 제공했던 것이다.의금부에서 관리를 파견해서 감찰을 해보니 그동안 김을신이 관청 안의 가죽과 살코기를 뇌물로 쓴 장물(贓物)이 1백 89관이었고, 최윤복이 거들낸 게 13관이나 되었다. 1423년 9월 26일, 의금부에서는 이 사건의 죄책을 물어 김을신을 경상도 안음으로, 최윤복을 경상도 장기현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그 뇌물로 쓴 물건들은 한성부로 하여금 추징하도록 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은 이발(李潑)과 이수(李隨)는 면직되는데 그쳤다. 요즘과 다르게 뇌물을 받는 사람보다도 주는 사람을 더 가혹하게 처벌했던 이상한 시대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언제 자신들도 같은 처지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정자(爲政者)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이때 장기로 유배를 온 최윤복은 1년 4개월이 지난 1425년 1월에야 풀려났지만 바로 사망하였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관료 길에 들어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지만, 후회와 괴로움을 곱씹다가 인생을 마친 것이다. 사망 후인 1425년 11월 20일에야 사면이 된다. 공신의 아들임이 참작되었기 때문이다.뇌물과 청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한 순간 잘못된 선택들이 후대의 냉혹한 평가를 받고, 역사에 우셋거리로 남아 회자된다는 사실을 이 사건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역사는 미래라고 하지 않았나.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앞날을 예찰(豫察)하라는 귀중한 울림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22

임금 위에 상왕(上王)이 있다는 줄도 모르고…

홍여방의 장기현 유배가 결정된 날이 1420년 4월 26일이었으니, 여기 도착한 날짜는 아마 그해 5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대사헌은 사헌부의 수장(首長)으로 종2품이다. 지금으로 치면 검찰총장 격이다. 역할로 본다면 수사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재의 검찰보다는 훨씬 권력이 막강했고, 간여하는 범위도 넓었다. 우선 정사를 토론하고 모든 벼슬아치를 규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현재의 감사원의 기능이다. 또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며 협잡행위를 단속하는 업무도 사헌부의 일이었다.사헌부 관리는 대관(臺官)이라고 한다. 길에서 대관을 보면 왕족이든 대신(大臣)이든 먼저 피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위세는 대단했다. 이들은 국왕에 맞서 탄핵하고 간쟁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다른 관원의 모범이 돼야 했고, 요직이었기에 명망 있는 자들이 천거되었다.이런 사헌부의 최고 책임자인 홍여방(洪汝方)이 장기에 온 것이니 얼마나 떠들썩했겠나. 그냥 온 게 아니라 충의위(忠義衛)의 적을 삭제당하고 대사헌 직첩도 뺏긴 채였다. 충의위란 1418년(세종 즉위년)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의 3공신 자손들이 주로 소속되도록 만들어진 특수층에 대한 일종의 우대 기관이었다. 그 좋은 신분까지 삭탈당하고 먼 극변지역인 장기까지 유배온 것으로 봐서는 중앙에서 무슨 큰 일이 있긴 있었나보다. 도대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여기까지 왔을까.1418년 8월, 태종은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장남 양녕대군의 세자자격을 박탈하고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 했다. 대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얼마 뒤 자신은 왕위에서 물러나고 충녕대군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줬는데, 이렇게 즉위한 임금이 그 유명한 세종이다.하지만 세종은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아버지 태종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태종이 물러난 임금, 즉 상왕(上王)이 되었음에도 군사권과 국가 대사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애초에 태종이 일찌감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유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아들 세종이 마음껏 꿈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지지기반과 주변 환경들을 다져주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얼마 뒤, 강상인의 옥사가 일어났다. 병조참판이었으나 태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사실상 병조의 수장행세를 했던 강상인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태종이 분명 군사권은 자신이 맡는다고 선언했었으나 강상인은 태종을 무시하고 세종에게 군무(軍務)를 보고하고 일을 처리했다. 태종은 이를 지켜보다 그를 괘씸한 놈이라며 국문을 한 뒤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이 급작스럽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지나간 후, 태종은 개국공신 심덕부의 아들이자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이 마음에 걸렸다. 고심 끝에 강상인의 사건을 다시 꺼내들었다. 강상인과 심온을 억지로 연루시킨 것이다. 심온이 영의정 신분으로 명나라 사은사로 떠날 때 요란했던 전별식이 빌미가 되었다. 강상인을 국문하면서 그의 입에서 ‘심온’이란 두 글자가 나오도록 고문을 했고, 고문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강상인은 역모죄로 몰려 이번에는 사지가 찢겨지는 형벌에 처해졌다. 일단 처리된 사건은 다시 다루지 않는다는 법의 일반원칙인 ‘일사부재리 원칙(一事不再理原則)’도 그때는 통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영문도 모르고 명나라에서 돌아온 심온은 역모죄의 주범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었다. 강상인, 심온 등과 친한 이관 등 여러 관리들이 참형에 처해졌고, 그 일족들은 처형되거나 연좌제에 걸려 변방으로 유배를 갔다. 부인과 딸들이 관노가 된 것도 부지기수다.태종이 이런 일을 저지른 이유는 간단했다. 왕의 외척과 공신들이 권력을 농단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세력들을 미리 제거해준 것이다. 덕분에 세종은 손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성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신세력과 외척세력들이 제거되었음에도 태종은 상왕의 신분으로 4년간 줄곧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며 국정을 감독했다. 그러면서 틈나는 대로 강원도 철원으로 나가 사냥을 즐겼다. 철원은 일찍부터 태종이 강무장(講武場)으로 자주 이용했던 곳이다. 강무장이란 임금이 사냥을 하거나 군대를 훈련시키던 무예 연마장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세종 두 왕이 모두 21회에 걸쳐 97일간 철원 고석정(孤石亭) 일대에서 강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태종은 아들 세종뿐 아니라 때로는 손자인 문종을 대동하고 자주 이곳을 방문하였고, 강무를 마치고는 위로연을 베풀었다고 한다.사건은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1420년 4월에 일어났다. 모내기 철에 가뭄이 극심하여 농심마저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필 이때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철원으로 강무를 겸해서 나들이를 가겠다는 것이었다. 말이 나들이이지 임금보다 더 높은 상왕의 행차이므로 당연히 이를 호위하는 군사들과 시종들이 따라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강무에 필요한 철원평야 일대의 전답과 농민들이 동원되어야하는 성가신 행사였다.이때 정사를 토론하고 벼슬아치를 규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던 사헌부 수장 홍여방이 나섰다. 그는 장령 송인산(宋仁山)·지평 허척(許倜)·집의 박서생(朴瑞生)·장령 정연(鄭淵) 등의 관리들을 모아 놓고 ‘상왕이 지금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가뭄에 군사들과 시종들을 데리고 나들이 나선다’며 그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병조의 영사(兵曹令史) 안유인(安有仁)이란 자를 직접 불러서 상왕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동향을 파악하라고 했다.홍여방은 조사를 마친 뒤, 허척을 시켜 임금(세종)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상왕의 행차를 금지시키라고 했다. 사태를 파악한 세종은 태종에게 신하들의 의견이 이러하니 행동을 자제해 주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부탁을 하게 된다. 세종으로부터 사실상 ‘강무를 금지하라’ 는 명령을 들은 태종은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대노했다. 태종은 ‘그런 일이 있으면 엄연히 내 아들(세종)이나 대신, 또는 병조에 알려 나에게 전달하게 할 것이지, 상왕인 나를 마치 일반 신하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죄를 규탄하는 것처럼 절차를 취하며 임금에게 그런 행위를 못하게 하도록 재촉까지 한단 말인가’라며 길길이 뛰었다.태종도 강무 나들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뭄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들판에는 아직 파종도 하지 않아 농작물 피해도 없었으며, 마침 최근에 적은 비도 내렸다. 모든 응접 절차에는 농민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그들에게 번거로운 폐가 없을 뿐더러, 군사는 단지 백 명을 거느리고 갈 작정이었다. 곡식이 없는 빈 땅에 3∼4일간 가서 사냥이나 즐기다 오려고 했던 것인데, 대신들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대사헌이란 자가 자신의 허락 없이 병조의 관리들을 불러다 동태까지 조사를 했다는 데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를 임금에게까지 고자질하여 문제를 삼으려는 행동까지 취했으니 상왕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다고 생각했다.이 무렵 태종은 공신세력과 외척세력에 대해서는 심하게 알레르기를 갖고 있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병권에 대해서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털끝만큼도 허용하지 않을 시점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었다. 화가 단단히 난 태종은 자신의 거둥을 제지한 신하들을 국문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결국 홍여방·송인산·허척·박서생과 정연 등은 모두 의금부 감옥에 하옥되었다. 의금부에서는 홍여방 등이 직접 병조의 서리를 불러 기탄없이 상왕의 거동을 취조하듯 물었으니,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예절에 벗어나는 것이고, 또 상왕을 시위하는 군사들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그 마음에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며 추달을 한 후, 이들 모두에게 대역죄를 적용했다.1420년 4월 26일 의금부에서는 홍여방을 경상도 장기현으로, 서생은 상주로, 송인산은 익산으로, 정연은 진산으로, 허척은 영천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이런 처분이 있었음에도 사간원에서는 이들에게 더 큰 처벌을 해야 한다는 상소가 이어진다.홍여방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남양(南陽)이다. 그는 수양대군의 며느리인 인수대비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판서를 지낸 홍길민(洪吉旻)이다. 홍길민은 이성계를 추대하며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훈된 개국공신이다.태종은 개국공신 집안인 홍여방을 홧김에 먼 바닷가 장기까지 내쫓고 나니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병조참의로 있으면서 왕에게 직언을 잘 하던 원숙(元肅)을 불러 ‘홍여방이 개국공신의 아들인데도 공신적(功臣籍)을 삭제당하고 멀리 귀양 가 있으니 노모가 아들을 무척 보고 싶어 한다. 진실로 불쌍한 일이다’ 며 세종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세종은 상왕의 내심을 읽고 1420년 9월 5일 선지(宣旨)를 내렸다. 이 조치에 따라 홍여방은 그해 9월 중순경에 장기에서 경기도 장단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422년 4월 10일 풀려난다. 그때 충의위(忠義衛)에 환속되고 직첩도 돌려받게 된다. 유배기간 중에도 그는 연주정(戀主亭)을 지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표시하기도 했다.직첩을 돌려받고 얼마 후 그는 한성부윤이 되었다. 2년 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한 번 장기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시와 술을 좋아하며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나 직언을 잘하였다고 한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에 언양(彦陽)을 노래한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언양현조에 실려 있다. 또 청송을 순시할 때 찬경루(讚慶樓)에 올라 세종의 비 소헌왕후를 생각하며 기문을 지어 걸기도 했다. 그러나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시인 1430년, 임금께 예물(禮物)로 바치는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기도 한다. 요즘으로 치면 도지사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가 문어하나 때문에 관직을 잃었던 이유는, 당시 문어는 중국 황제에게도 바치고 따로 무역도 했으며,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는 중요한 진상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3년 후 다시 복귀되어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는 등 탄탄대로를 걷다가 1438년 술에 중독되어 죽었다고 한다. 홍여방의 죽음에 대해서도 조선왕조실록은 놓치지 않고 ‘이조판서 홍여방 졸기’를 기록해 두었다. 그가 죽자 세종은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고 문상을 했으며, 부의를 보냈다. 시호를 문량(文良)으로 내려주었다.한편, 홍여방이 장기로 유배를 왔을 때는 그보다 2년 먼저 와서 터를 잡고 있던 유배객이 있었다. 바로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곳에 와 있던 이원강이었다. 이원강은 강상인 옥사에서 참형을 당한 이조참판 이관(李灌)의 숙부였는데, 그 집안과 홍여방과는 적대관계에 있었다.홍여방은 이곳으로 유배를 오기 10일전에 ‘2년 전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된 이관과 심온 등이 반역죄를 저질렀으니 그들에게 더 큰 벌을 내려 달라’는 상소까지 올렸다. 이 상소를 올린 지 10일 후, 그 자신도 대역죄의 죄를 뒤집어쓰고 장기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가 보다. 운명의 장난처럼, 서로 싸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꼭 결정적인 순간에 마주칠 때가 있다. 천리 먼 길, 고개를 넘고 또 넘고 도착한 경상도 장기 땅, 물설고 낯선 장기 땅에서 이제는 같은 대역죄인 신분이 되어 맞닥뜨린 두 사람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둘 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온 것은 마찬가지다. 그때는 내가 왜 그랬을까. 오늘은 이랬지만 내일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15

혈연이 채운 족쇄, 연좌제(緣坐制)

임금이 세종으로 바뀌었다는 바로 그 해, 1418년 12월 초순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길등재를 넘고 휑한 방산천을 따라 내려와 장기현에 도착한 초로(初老)의 한 선비가 있었다.그의 이름은 이원강(李元綱)이었다. 바로 이조참판이던 이관(李灌)의 숙부이다. 11월 26일 벌어진 강상인(姜尙仁)의 옥사(獄事)에서 이관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이원강은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는데,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이원강이 여기까지 온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세종 즉위년에 피바람 몰아쳤던 그 강상인의 옥사에 대해 짚어봐야 한다.1418년 8월, 태종은 18년간의 통치를 마감하고 세자인 충녕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준다. 하지만 조선 임금 중 가장 정치력이 뛰어났던 태종이 그대로 물러 날리는 만무했다. 자신이 왕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정적들이 제거되었으니, 이들의 잔여세력들이 공격해올 것이 분명했다. 또 세종은 장자가 아닌 셋째아들이다. 그것도 나이 스물두 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공신세력과 외척세력들에 의해 휘둘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임금 자리는 넘겨주지만 자신이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병권과 국가적 대사는 직접 챙기겠다고 선언했다. 상왕이란 임금이 생존해 있으면서 왕위를 다음 임금에게 물려주었을 때 물러난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상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셈이었으니, 과연 정치력 9단의 태종다운 처세였다.그 무렵 중앙무대에는 공신인 강상인과 외척인 심온(沈溫)의 세력들이 버티고 있었다. 강상인은 태종의 최측근 가신(家臣)으로 태종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인물이다. 이후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을 거쳐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를 선언하기 직전인 7월에 병조참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참판이었지만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병조의 일을 총괄하고 있었으니 의심 많은 태종에게는 은근히 걱정거리였다. 심온은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세종의 장인이었다. 현직 영의정이고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이다. 그를 따르는 육조(六吏曹)의 관리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의 동생 심정(沈泟)은 군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도총제(都摠制)이면서 병조참판 강상인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 세력들이 태종에게는 항상 마음에 걸렸다. 태종은 강상인과 심온의 세력들이 제거되어야 앞으로 세종이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태종이 벼르고 있던 참에 두 세력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1418년 8월 15일, 강상인과 도총제 심정 등이 궁궐을 수비하는 금위군의 편제를 보고도 없이 바꾸어버린 것이다. 금위군이란 궁중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ㆍ경비하던 친위병을 말하는 것인데, 원래 한 개의 편제이던 군대를 둘로 분리하여 태종이 거처하는 수강궁과 세종이 거처하는 경복궁을 나누어 수비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은 당연히 병권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태종에게 보고하여 처리해야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세종에게만 보고를 하고 태종을 무시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태종이 전날 강상인에게 병조에 근무할 괜찮은 사람 하나를 천거하라고 했더니 보고도 없이 자기의 친동생 강상례(姜尙禮)를 채용하고 병조 사직(司直)이라는 벼슬을 줘버렸다. 사직은 서울의 각 문(門) 가운데 일부의 파수(把守) 책임을 맡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태종이 강상인에게 이 일의 자초지종을 캐묻자 강상인은 세종이 시켜서 한 일이다라며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왕권을 양위 한다는 뜻을 밝힌 지 보름도 안 되서 벌써 이들이 병권을 좌지우지하는 기류가 감지되자 태종이 진노할 일이었다. 태종은 그동안 믿고 병권까지 맡겼던 강상인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여러 가지 실험으로 그의 충성심을 관찰해보았다. 결국 태종은 강상인은 간사하고 자신을 속이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이제 강상인을 제거해야할 구실만 남아있었다. 이참에 강상인 뿐 만 아니라 왕실의 외척인 심온과 그를 따르는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무리들도 함께 제거할 작정이었다.태종은 곧바로 관련자들을 불러 보고도 없이 군대의 편제를 제멋대로 바꾼 일에 대해 심문을 했다. 일이 터지자 반대세력이었던 좌의정 박은(朴訔) 등은 정적들을 제거할 기회는 바로 이때라고 생각했다. 이에 반대세력들은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며 강상인을 비롯한 박습 등 병조 관리들을 모두 중죄에 처하라는 탄핵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태종은 어떻게든 이 일에 심온을 끼워 넣어 그를 권력에서 배제시킬 방도도 찾았지만, 이 사건과 심온의 관련성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태종은 관련자들이 원종공신이고 그 동안 자신을 섬긴 노고를 참작해 이번만은 경고차원에서 넘어가려 했다. 하여 강상인과 심정(沈泟), 병조판서 박습의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이들을 모두 고향 근처로 귀양을 보냈다. 하지만 반대세력들은 이정도 처분으로는 분에 차지 않았다. 형조 판서 김여지(金汝知)·대사헌(大司憲) 허지(許遲)·좌사간(左司諫) 최관(崔關) 등이 연합상소를 올려 더 강하게 처벌해 달라고 요구했다. 태종은 이에 못 이겨 강상인을 다시 함경남도 단천(端川)의 관노(官奴)로 보내고, 박습과 병조정랑과 좌랑 등도 더 먼 극변으로 이배시켰다. 사건은 여기서 일단락되는가 싶었다.그런데, 또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해 9월 8일, 영의정 심온이 세종 즉위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해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중국으로 떠나는 날 연서역에는 실세인 그를 전별하러 나온 관리와 양반들의 마차가 한양거리 전체를 뒤덮을 정도였다.그 사실을 그해 11월경에야 알게 된 태종은 위기를 느꼈다. 외척에 대한 지지 세력이 크다는 것은 곧 왕권이 약해지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래서 태종은 일찍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음에도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죽여 없애는 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신하들 중에는 앞으로 청송 심씨 일가의 세도를 염려하고 진작부터에 차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반대세력들은 이때도 놓치지 않았다. 평소 강상인과 심정에게 유감을 품고 있던 병조좌랑 안헌오(安憲五)가 태종에게 이들이 오래전부터 “군사는 마땅히 한 곳(세종)에 돌아가야 한다”며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해 왔다고 밀고했다. 격분한 태종은 이들이 병권을 이용해 역모를 모의했다고 몰아붙였다. 경남 사천에 유배 중이던 박습과 함경도 단천에서 관노로 있던 강상인을 압송해와 취조를 했다. 박습은 그런 일이 없노라고 부인했다. 강상인은 열흘 넘게 받은 압슬형(壓膝刑)의 모진 고문 끝에 자백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자백은 자신이 심정, 이관(李灌)과 같이 태종은 병권에서 물러나고 세종에게 모든 왕권을 넘겨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이 바라는 자백은 이것이 아니었다. 외척의 우두머리인 심온과 관련된 진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태종은 강상인에게 또 압슬형을 가했다. 강상인은 고문에 못 이겨 심온도 자신들과 뜻을 같이했다는 취지의 자백을 했다. 태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노하며 “주모자는 심온이다. 모든 역모는 심온에게서 나왔다” 며 외쳤다. 태종은 전 병조판서 박습을 다시 불러내어 더 모진 압슬형의 고문을 가해 강상인의 진술과 같은 취지의 자백도 받아냈다.이제 태종의 각본대로 모든 그림이 나왔다. 그 각본이란 게 강상인의 옥(獄)을 심온에게까지 연결시켜 심온도 함께 제거하는 것이었다. 1418년 11월 26일, 태종은 백관을 모아 놓고 강상인·박습·심정·이관은 모반대역(謀叛大逆)로 처단하라고 했다. 그때까지 심온은 명나라에 있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일부 신하들은 심온이 명나라에 있으므로 그와 공범들을 대질시켜 심온의 혐의 유무를 명백히 하고 처단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했으나, 박은은 대질심문 없이 심온을 모반죄로 처벌하자고 주장했다.의금부 관리들은 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수레에 강상인을 묶어 사지를 찢어 죽였다. 강상인은 죽기 전 수레 위에서 ‘사실 나는 죄가 없는데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으로 죽는다’며 울부짖었다. 나머지 사람들인 박습·심정·이관 등은 서대문 밖 근교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태종은 심온이 명나라에서 수작을 부리고 돌아오지 않거나 아예 도망할 염려가 있으니, 의금부 진무(鎭撫)를 급파하여 압송해 오라고 했다. 심온은 사은사에서 돌아오는 즉시 의주(義州)에서 기다리던 금부진무 이욱(李勖)에게 체포 되었다. 압송 도중인데도 태종은 사람을 보내 수원(水原)에서 만난 그에게 사약을 내려 처형하였다. 죽기 전 심온은 금부진무에게 ‘명나라에 들어 간 뒤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무슨 일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태종을 한번만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청을 하였으나, 태종은 사람을 시켜 ‘이미 죽은 사람들인데 누구와 대면하겠다는 말인가’라며 냉정하게 거절했다.이게 강상인 옥사의 전말이다. 강상인의 옥사는 병권을 남용한 그의 개인적인 과오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태종의 병권에 대한 집념 및 외척 경계에서 빚어진 것이었다.‘기재잡기(寄齋雜記)’ 등 야사(野史)에는 심온이 사약을 받으면서 원수지간이 된 박은을 원망하며 자자손손 박씨들과는 혼인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심온의 신도비명에도 이러한 유언을 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청송 심씨와 박씨가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 가승(家乘)은 이래서 생긴 일이다.의금부 제조(提調) 유정현(柳廷顯) 등은 심온의 아내 안씨 또한 천안으로 유배를 보내 종으로 삼기를 청했다. 결국 안씨는 의금부의 여종이 됐다. 이들은 심온의 딸인 왕비 소헌왕후 심씨도 죄인의 여식이므로 폐위해야 한다고 주청을 했다. 그러나 세종이 극구 나서서 말렸다. 태종은 소헌왕후가 많은 자손을 낳았고, 세종과 금슬이 좋다는 이유를 들어 폐출은 시키지 않았다.이 사건은 외척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문종은 심온의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한편, 이 옥사에서 참형을 당한 이관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충청도경차관, 사헌부집의, 경기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냈다. 아버지는 고려와 조선 초기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원굉(李元紘)이다. 이 사건으로 이관의 아들 이소인(李紹仁)은 울산(蔚山)으로, 형 이약(李鑰)은 통천(通川)으로 유배를 가 모두 관노가 되었다. 이관의 숙부 이원즙(李元緝)은 평해(平海)로, 조카 이말한(李末漢)은 거제(巨濟)로, 이백장(李伯長)은 장흥(長興)으로 귀양 갔다. 이때 숙부 이원강도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던 것인데, 모두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책임을 지우는 연좌제(緣坐制)의 족쇄에 걸린 것이다조선시대에는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을 빌려 와 사용했다. 이 법은 ‘모반대역죄’를 아주 강하게 처벌하고 있다. 대역죄를 지은 본인은 능지처참하고 그의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목을 매달아 죽인다. 그의 16세 이하의 아들과 어머니·처와 첩·할아버지와 손자·형제자매 및 아들의 처와 첩은 공신가(功臣家)의 종으로 삼는다. 또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며, 백숙부와 조카는 동거여부를 불문하고 유 3천리 안치형(安置刑)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다행히 강상인의 옥사에서는 태종도 도리에 어긋남을 알았음인지 관련자들의 아들들의 목숨만은 부지하게 배려를 했다.조선시대 초기부터 일단 모반대역죄가 발생하면 연좌제에 걸린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단종복위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시애사건의 경우는 연좌된 사람이 300여 명에 이른다. 길고도 가혹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의 연좌법은 갑오개혁 때인 1894년에 와서야 폐지되었다.강상인의 옥사에 연좌되어 피해를 본 인천이씨 집안은 청송심씨 집안보다는 먼저인 1459년(세조 5), 이관의 손자 이우(李祐)의 상소로 신원이 되어 자손들도 관직에 출사 할 수 있게 되었다.역모자의 숙부라는 혈연의 족쇄를 차고, 왕권강화와 외척척결이라는 운명적 이유로 장기까지 온 이원강은 주거마저도 제한 된 ‘안치(安置)’였다. 그의 억울한 유배살이는 두고두고 장기 땅에 한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08

토사구팽 된 외척과 공신(功臣)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였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1409년 10월 초순경,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공신(功臣)의 아들 한명이 포항 장기로 유배를 왔다. 10월 2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던 날만 해도 그게 어느 쪽에 붙어있는 땅인지도 몰랐다. 한양에서 말을 타고 영남대로를 따라 9일 반이 걸려 도착한 바닷가 고을은 한없이 빈한해 보였다. 살아갈 날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형조정랑((刑曹正郞))이라는 중앙 관리였지만 지금은 유배객의 신분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승조(李承祚)였다. 바로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우의정이었던 이무(李茂)의 둘째아들이다.이승조가 장기로 유배 온 사연은 우선 태종의 정비(靜妃) 원경왕후 민씨, 제1·2차 왕자의 난, 민무구·무질의 옥사(獄事),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이무의 옥사에 대한 내막을 알아야 풀린다. 옥사란 반역, 살인 따위의 크고 중대한 범죄를 다스리는 사건을 말한다. 옥사가 일어나면 관련자들은 대부분 대역죄로 효수되거나 사약을 받아 죽었고, 가족들은 연좌되어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원경왕후 민씨는 이방원의 정치적 내조자이자 동지였다. 뛰어난 결단력으로 남편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된다. 1398년 8월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 때 민씨는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몸이 불편한 태조 곁에서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자신이 복통이 심하다는 것을 핑계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동생 민무구·무질과 함께 친정으로 빼돌렸던 무기와 사병을 내어주어 정도전· 남은을 기습할 수 있게 했다. 정도전·남은 등을 죽인 방원은 이성계가 기거하던 청량전으로 가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씨 소생의 세자 방석과 세자빈 심씨, 방번, 경순공주 등도 모두 제거했다. 이 난을 성공하게 도와 준 민무구·무질 형제는 이래서 태종조 초기까지만 해도 최대 공신이자 외척으로 대우를 받았다.그런데 태종은 보위에 오르자 생각이 달라졌다.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계속 늘리는가 하면, 자신의 즉위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원경왕후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불화는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후궁 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았다.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둘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결국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른다.민무구·무질 형제의 옥은 1407년(태종 7) 7월에 발생했다. 이들이 옥사에 연루된 이유는 원경왕후와 태종의 불화도 있었지만, 이들 형제들의 경솔한 입버릇과 방자한 행동들이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원경왕후가 낳은 양녕·효령·충녕·성녕의 4대군 중 양녕에게 의탁하여 권세를 탐했다.이들의 행동은 1406년(태종 6) 8월에 난데없이 일어난 선위파동(禪位波動)을 불러왔다. 선위라 함은, 군주가 살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군주의 지위를 물려주는 일을 가리킨다. 보통 같은 왕조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있는 것을 말한다. 태종은 1404년 양녕을 왕세자로 책봉 후, 건강상의 이유로 13세의 왕세자에게 선위 표명하고 신료들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때 민무구 형제들이 태종이 놓아둔 덫에 걸려들었다. 민씨 형제들은 ‘태종에게는 세자가 있으니 다른 왕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며 다니다가 협유집권을 도모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쓴 것이다.이들 형제들의 행동은 정부와 대간의 시비로 발전해갔다. 이 일로 1407년 7월, 정부와 대간이 개편되고 하륜(河崙)은 책임을 지고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6일 후 민무구 형제의 처벌을 청하는 이화(李和)의 상소로 이들도 결국 투옥되는 옥(獄)이 벌어지게 된다.태종은 교서에서 민씨 형제의 죄목을 10가지로 열거했는데 가장 중요한 죄목이 협유집권의 도모였다. 즉, 1402년 왕이 창종을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몰래 병세를 엿보며 은근히 어린 세자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신 이무(李茂)의 집에 가서 왕에 대한 불평을 토로했다는 것 등이었다. 두 형제는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몰려 연안(延安)으로 귀양 갔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원경왕후가 태종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친정아버지 민제(閔霽)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그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태종은 민무구 형제들의 공신녹권까지 박탈해버렸다.태종은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장인 민제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들의 생명만큼은 보전해줬다. 1408년(태종8) 민제의 병이 위독해지자, 태종은 두 형제를 귀양에서 풀어 부자가 만날 수 있도록 했고, 태종도 직접 장인에게 병문안을 갔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1408년 9월 15일 민제는 노병으로 죽었다. 태종이 슬퍼하고 친히 상가에 찾아가서 치제(致祭)하였으나, 곧 민무구 형제를 체포하여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409년 10월, ‘이무(李茂)의 난언(亂言)’ 사건이 발생한다. 이무가 주위 사람들에게 “근일에 부산하게 민무구 형제의 죄를 청하는데,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겠다. 안순(安純) 등의 무리가 붕당을 만들어 매번 민씨 형제의 일을 선동해 죄를 가하려고 하는데, 상감께서 이를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섣불리 내뱉은 이 말이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큰 문제로 확대되었다. 이무와 친한 관리들이 대부분 잡혀와 역모죄로 몰려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태종은 이 사건을 빌미로 1410년(태종10) 3월 17일, 민무구 형제도 역모로 몰아 사약을 내려 처형하였다. 이를 이무의 옥사라고 한다.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1415년(태종15) 세자 양녕대군이 민무구의 동생인 민무휼·무회 형제를 고발했다. 내용은 두 형제의 언행이 불충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불충한 언행이 사실로 밝혀지자, 태종은 1416년(태종16) 이 형제들에도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결국 원경왕후 민씨 집안은 4형제가 참혹하게 죽는 불운한 집안이 되었다. 경솔한 입버릇들이 태종의 무자비하고 의도적인 외척 숙청작업에 빌미를 제공하여 한때 누렸던 영화의 꿈도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던 것이다.민씨 집안과 연관되어 피해를 본 이무의 집안은 또 어떠한가. 조선 건국과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방원은 처음에는 쿠데타의 주역들을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책봉하여 우대했다. 그런데 이들이 새로운 권력집단을 형성하면서 왕권을 위태롭게 하자 태종은 어떤 방법이로든 공신들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역모로 몰아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이무(李茂)도 그 대상 중 한명이었다.이무와 이방원은 삽혈동맹(6B43血同盟)을 맺은 관계였다. 그런 이무는 1398년(태조 7년)에 이방원의 오른팔이 되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정사공신에 오른다. 또 1400년(정종 2)에는 판삼군부사로서 이방원을 도와 2차 왕자의(난방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좌명공신에도 올랐다.태종이 이무를 죽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1차 왕자의 난 때 이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중간에 서서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무가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 형제와 더불어 어린 세자를 세우려 하였고 그들과 같이 협유집권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명분에 불과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태종이 그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무는 문무를 겸한 문신이었지만, 누구 편도 아니었다. 여말선초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그는 항상 이긴 자의 편이었다. 위화도 회군 후에 이인임의 무리라고 공격받았으나 회군공신이 되었고, 1392년 5월에 정몽주의 남은 무리로 탄핵받아 파직되기도 했지만, 조선왕조의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제 1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사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본래 정도전, 남은 등과 좋았는데 중간에 서서 사태를 살피다 승자를 따랐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무의 이런 어정쩡하고도 승자지향적인 태도는 태종에게 불충으로 비쳤고, 왕권이 제도적으로 안정된 후에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 1호로 분류가 되었던 것이다.태종은 ‘장차의 반역을 말한 것도 반역을 실제로 행한 것과 같이 처벌해야 한다’는 ‘춘추공양전 금장(今將)의 의리’를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내세웠다. 이로써 공신들이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억지(抑止)하고 세자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의 형성도 미연에 차단하려 했다. 병권을 오래 잡고 있던 이무가 태종에게는 큰 두려움거리였다. 문관으로 입신했으나, 문무를 겸비한 이무는 태조 초부터 죽임을 당한 그 해까지 오랜 기간 동안 병권에 간여하였다. 1396년에는 5도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일본의 이키섬(壹岐島)과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충성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무가 병권까지 잡고 있으면서 세자의 외삼촌인 민무구 형제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니, 태종으로 봐서는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었다.언젠가는 이무를 죽여 없애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태종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409년 5월, 우의정겸 판병조판사(右政丞兼判兵曹判事)을 맡고 있던 이무가 태종에게 보고도하지 않고 병조의 인사에 개입하여 민무질 형제와 친한 이지성(李之誠)의 품계와 관직을 올려 줘버렸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병권에 대해 매우 민감해 하던 태종은 1409년 10월 2일 이무를 불러 이제까지 그가 잘못한 일들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창원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10월 5일 사람을 보내 쫓아가 이무가 안성군 죽주(현재의 竹山)에 이르렀을 때 목을 베어 죽였다. 결국 태종은 현직 우의정인 이무의 행동을 모반대역죄로 간주한 것이다.태종은 이 옥사에 다른 좌명공신과 원종공신 여러 명도 연루시켜 같이 참수(斬首)했다. 조희민·류기·조박·윤목·이빈·강사덕 등이 모두 이무와 같은 무리로 몰려 죽임을 당한 공신들이다. 이들의 가족과 친족들에게도 연좌죄를 적용했다. 이에 따라 1409년 10월 2일 어렵게 목숨을 부지한 이무의 아들들 중 둘째 아들인 이승조(李承祚)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태종이 취한 왕권강화의 희생물인 이무는 뒤에 신원되면서 아들들의 귀양살이도 풀려 다시 벼슬길에 나갔다. 이승조는 태천군수, 온성부사, 가선대부 경상좌도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남은 생을 마감했다.민무구 형제와 함께 이무를 죽음으로 까지 몰고 간 난언(亂言)은 내용으로 봐서는 모반대역이 아니다. 단지 ‘막되고 잡된 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태종은 이를 빌미로 외척과 많은 공신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겨주었다. 첫째는 입놀림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고들 한다. 아무리 조심해도 한번 내뱉은 말은 발 달린 말처럼 퍼져 나가 문제를 일으킨다. 평소 언행만 조심했더라면 이들이 목숨을 잃는 화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너무 높은 벼슬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는 경주 최부자집 가훈은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인 것 같다.최부자 집안에서는 왜 진사에 합격하고도 대과를 치르거나 관직을 받지 못하게 했을까. 그것은 정치나 권력자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는 꾸짖음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치고 화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왕권도전으로 몰려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색당파에 휩쓸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원한과 재앙을 흩뿌렸다. 사회의 미덕과 가정의 평온도 훼손되기 일쑤였다.공신의 아들 이승조의 장기현 유배는 이런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남겨주고 떠나갔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01

정몽주의 무리이니 경상도 장기현 유배를 명하노라

조선조 맨 처음 포항 장기로 유배를 온 설장수(偰長壽)는 위구르족(Uighur)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사람이다.원나라에서는 위구르를 고창(高昌)이라고 불렀는데, 설장수의 아버지인 설손(偰遜)은 고창 설(偰)씨의 후손이다. 원나라에서 중앙관료로 활동하였던 사람들 중에는 고창 설씨 가문이 막강했다. 이는 시조가 칭기스칸에 협조한 공로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이 유학을 수용하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시조인 위에린테무르(岳璘帖穆爾)는 무신이었지만 자식들에게 논어·맹자·사서 등을 공부시켰다. 때문에 그의 가문에서는 과거 합격자가 줄줄이 나왔을 뿐 아니라 설손의 3대 조부는 원사(元史) 열전 중 충의(忠義)편에 기록될 정도로 뼈대 있는 가문이 되었다.설손은 원나라 황실 교육기관인 단본당(端本堂)에서 황태자에게 경전교육을 담당했다. 이 때 고려 충숙왕 둘째 아들인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공민왕)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강요로 왕자를 원나라에 보내 일정기간 머물게 하고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했다. 빠이앤티무르는 원 왕실에 숙위로 와 있는 신분이었으나 설손과 가깝게 지냈다.원나라는 순제(順帝) 치세로 내려오면서 정치적 혼란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설손은 이제 원나라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과거 공민왕과의 인연을 떠올렸다.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려로 왔다. 살길을 찾아 나선 망명이었다. 이때가 공민왕 8년(1359) 12월, 설장수의 나이 18세 때였다.반원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공민왕은 옛 친구이자 망명객인 설손에게 극진한 예우를 했다. 그에게 고창백(高昌伯)이라는 칭호는 물론이고 전답과 살 집을 마련해 줬다. 이로써 위구르 최고 명문가이던 고창 설씨의 종가(宗家)가 중국에서 고려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고려로 온 설손은 이듬해인 1360년에 설장수 5형제를 남기고 죽었다. 공민왕은 다섯 아들 중 맏이였던 설장수를 특히 아꼈다. 부친의 상중이었음에도 설장수가 과거시험을 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다. 1362년 치러진 과거시험에서 설장수를 포함한 총 33명이 합격했다. 합격자 중에는 조선 개국의 기초를 연 정도전(鄭道傳)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도전과 설장수는 과거시험 동기라는 인연으로 친하게 된다.한편, 설장수의 삼촌이었던 설사(偰斯)는 원나라가 망하자 1367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에게 귀부(歸附)하였다. 이후 설사는 공민왕 18년(1369년) 4월과 19년(1370년) 5월 각각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 그는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을 고려왕으로 봉한다는 주원장의 임명장과 옥새를 갖고 와 고려왕에 대한 책봉조치를 시행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공민왕은 명나라 조정 유력자를 숙부로 둔 설장수를 명나라에 보내 외교문서와 선물을 전달했다.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인맥까지 갖춘 설장수가 원·명 교체기에 중국전문 외교관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그러나 1374년, 공민왕이 피살되고 친원정책을 추진하던 이인임(李仁任)이 정권을 장악하자 설장수의 외교활동에도 검은 구름이 깔렸다. 이인임 일파는 우왕을 추대하면서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18년 만에 다시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이인임 정권의 친원정책은 고려 개혁소장파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불러 왔다. 하지만 정도전·정몽주·이숭인·김구용·권근 등 개혁소장파들은 고려를 방문한 북원의 사신을 영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가 오히려 유배를 가게 되었다.개혁소장파와 뜻을 같이 했던 설장수도 중앙관계에서 밀려나 원주 목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으로 전전했다. 그러면서도 반원파인 정몽주·김구용·박의중·이숭인·박상충·하륜· 정도전 등과는 자주 교류하면서 고려왕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고려후기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계열의 문인들이었다.1391년 설장수는 왕세자 석(奭)이 명나라 황제를 조현(朝見)하러 갈 때 사신으로 갔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친한 친구였던 설장수와 정도전이 결국 숙적(宿敵)으로 갈라서는 원인이 됐다. 이들의 우정이 지속되었던 마지막 시점은 대략 1391년 9월까지였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 등은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린 적이 있었다. 1391년에 와서 공양왕 옹립에 공을 세웠던 9명의 관료들이 ‘정난 9공신’으로 책봉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성계·정도전·정몽주·설장수 등은 생사고락을 같이한 정란 9공신 동료였다. 그러나 정난공신으로 일시적 정권을 장악한 정몽주는 급진 개혁파인 이성계와 정도전을 정계에서 축출해버렸다. 그 무렵에 공양왕의 왕세자 석(奭)을 명나라에 조현(朝見)이라는 명목으로 보내면서 설장수를 특사로 딸려 보낸 것이다.세자의 명나라 조현은 이성계와 정도전이 각각 정계에서 축출됨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일이었다. 이 시기는 이성계 및 정도전 등 조선 개국세력과의 노선이 구분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설장수의 외교적 성공은 곧 세자 및 공양왕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기여하는 행동이었으므로 이성계·정도전과는 입장이 다른 것이었다. 설장수의 이런 외교적 행위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보다는 기존의 고려왕조라는 틀 안에서 개혁을 통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입장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이 일로 설장수는 정도전과 이성계에게 찍히게 되었고, 역성혁명의 대열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었다.이러던 차에 정도전 등과 끝까지 대립했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을 당해버렸다. 고려 왕조의 유지를 바랬던 설장수의 정치적 운명도 이때 바뀌게 되었다. 곧 그에게도 화가 미쳤다. 정도전으로부터 이색과 함께 정몽주의 당이라는 탄핵을 받았다.1392년 7월 30일,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세우고 태조 즉위교서 반포 직후 설장수를 장기로 유배 보내버렸다. 이색·정몽주·우현보 등과 함께 도당(徒黨)을 지어 내란을 음모하였다는 혐의였으나, 이는 정도전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실권을 장악한 정도전은 민개(閔開)를 사주하여 정몽주와 설장수를 탄핵토록 하였다. 민개는 탄핵문에서 설장수가 ‘간교하고 절조가 없는 자로 그저 재산을 불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데도 잘못 등용되어 경상(卿相)의 지위까지 올랐다’고 비판했다.장기에 온 설장수는 6개월만인 1393년 1월, 이성계의 부름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을 떠나갔다. 유배에서는 풀렸지만 이후 그는 정도전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정도전과는 생각이 달랐다. 설장수의 외교적 능력과 가치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신왕조의 개창 초기 대명외교관계를 안정시킬 탁월한 외교관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성계의 집권 이후 대명관계는 파란이 계속되었다. 1394년(태조 3) 명의 주원장은 표전문(表箋問)사건을 일으켜 정도전이 이 문서를 작성한 주범이라고 하면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하였다. 표전문은 핑계였고, 정도전이 추진하는 요동정벌론 등이 여러 가지로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러한 난국에 이성계는 정도전의 견제를 물리치고 설장수를 유배지에서 불러내어 새로 설립한 외교기구인 사역원의 제조(수장) 자리를 맡겼다. 이때 설장수는 조선 500년간 이어진 사역원 운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역관 선발시험을 새롭게 개편하고, 역관들에게 외교실무 수행에 필요한 유교적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교육을 이수토록 하였다. 그는 특히 역관들의 학문적, 인성적 기초로서 ‘소학’(小學) 교육을 중시하였는데, 이를 중국어로 풀어 쓴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직접 저술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역학교재로 오랫동안 사용된 명저였다.이런 설장수에게 이성계는 1396년(태조 5) 계림(鷄林,경주)을 관향(貫鄕)으로 삼도록 사성(賜姓)하였다. 이래서 설장수는 경주 설씨의 실질적인 시조(始祖)가 되었다.1398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되고, 태조에 이어 정종이 즉위하자 설장수는 그해 9월에 세자 책봉사절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의 양위를 고하였다. 명으로 가는 도중에 명 태조 주원장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진향사(進香使)로 임무를 변경하여 외교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동안 그는 8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이것이 마지막 외교임무였다. 1399년 6월에 귀국한 설장수는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11월 16일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정종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조회를 정지하고 제사를 내려 주었으며, 관(官)에서 장사를 지내주고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내렸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며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고 전해지며 문집으로는 ‘운재집(芸齋集)’이 있다. 글씨도 ‘목은집(牧隱集)’에서 볼 수 있듯이 필법이 굳세고 힘차며 법도가 있다.설장수는 여말선초와 원명교체기라는 한반도와 중원의 역사 격변기에 8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훌륭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민족의 외교사에서 위구르 출신 이방인이 정치적 난민으로 귀화하여 이처럼 큰 족적을 남긴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이는 우리 민족 외교의 다문화성과 포용성, 개방성을 상징하는 큰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장기에서 6개월이라는 짧은 유배기간을 보냈지만, 유배기간 내내 그의 깊이 있는 유교적 식견과 사상은 장기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문에서 꼭 해야 할 일이며, 실력을 쌓아놓으면 죽음의 문턱에서도 살아 날 방도가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능수능란한 외교적 수완이 없었더라면 이성계가 그를 다시는 찾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장기에서 지은 시가 영일객관(迎日客館)의 북쪽 의운정(倚雲亭)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이 ‘영일읍지’(1832)와 ‘조선환여승람’(1938) 등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시에는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유배객의 심정이 절절이 녹아있다.의운정(倚雲亭)설장수(偰長壽)山肴海錯托珍羞산나물 바닷고기 진수성찬 벌여놓고野榼村醪慰久留들바가지 촌막걸리 오랜 무료 위로하네半夜窮愁侵客夢한밤중 시름겨워 나그네 꿈 잠기는데一襟爽氣在譙樓한줄기 상쾌한 바람이 문루를 스치누나興來落筆詩篇重흥이 일면 붓을 놓고 시편 거듭 읊으며老去傷情涕泗流늙어가는 시름에 눈물자주 흘리네昭雪此寃終有望이 설움 씻을 희망 끝내는 있으련만皇天還肯濟吾不하늘은 나를 알고 구제해 주실런지/이상준(향토사학자)

2019-06-24

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장기를 ‘유배지’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심지어 장기사람들을 유배 온 사람들의 후손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이처럼 마치 장기지역 전체가 귀양지인 것처럼 인식된 이유는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장기는 신라 때는 지답현(只沓縣)이었다.남으로는 경주의 감포 경계까지, 북으로는 현재의 구룡포와 호미곶까지를 관장하던 동해안의 관방요충지였다.고려 태조23년(940)에 장기현(長 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종9년(1018)에 경주부의 속현이 되었다.공양왕2년(1390)에 현으로 승격하여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동해안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막는 해방(海防) 요충지임을 감안하여 무신으로서 벼슬이 높은 자를 지현사(知縣事)로 파견하였다.관내에는 신라 때에 설치한 시령산성, 만리성 등의 고대 산성들과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토성으로 쌓아 조선 세종 21년(1439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는 장기읍성이 있다.세종 때는 현감 외에 장기 모포리에 포이포진을 설치하고 종4품 무관인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배치하여 진을 관장토록 했다.유배지에서는 유배인들에 대한 감시와 감독이 필수적이다. 장기는 유배인을 감독할 수 있는 감독청으로 현청뿐 아니라 수군만호까지 한 개 더 있다는 점과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연해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조선시대 유배지로는 적격이었다. 유형의 종류는 유배의 거리, 죄의 경중, 집행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조선 초기 ‘경국대전’에는 거리에 따라 유 2천리, 유 2,500리, 유 3천리의 세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다.그러나 이는 대명률(명나라 법률)의 규정을 적용한 것이므로, 아무리 먼 곳도 한양에서 2천리가 넘지 않는 조선 땅에는 사실상 이 규정이 적합하지가 않았다.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거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돌아가는 곡형제도를 쓰기도 하였으나 뚜렷한 기준이 없었다.후에 태종은 대명률의 유배에 관한 규정을 우리 실정에 맞춰 속전(贖錢·형벌대신 내는 금전)을 내면 거리를 감하여 주는 ‘유죄수속법(流罪收贖法)’을 시행하였으나 이도 문제점이 많긴 마찬가지였다. 이에 세종은 전국적으로 유배지를 단축하고 혹은 우회하여 도착시키는 식으로 변용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을 만들었다.즉 경성·경기에 사는 사람들이 유 3천리 형을 받을 경우는 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길도 내에 있는 30개 역(驛) 밖 빈해(바다에 가까운 땅) 고을로 보내고, 유 2천500리는 25개역 밖, 유 2천리는 20개 역 밖에 있는 각 고을로 보내도록 해당고을을 법으로 미리 정해놓은 것이다.이에 따르면 장기는 경성(京城)에서 유 3천리 빈해(濱海) 지역에 해당되었다. 이로서 의금부에서 죄인의 배소를 지정한 곳을 기록한 ‘의금부노정기’에 유3천리 유배지로 장기가 등재되었고, 조선 내내 유배지로 널리 활용되었던 것이다.영조 때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와 같이 험한 곳이나 무인도에는 유배를 금지시켰으므로 영조 이후에는 장기로 유배 온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의금부노정기’에 따르면, 경성에서 장기까지 유배길은 한양-남태령-안성(죽산)-충주-문경-상주-함창-의흥-신령-영천-경주-장기로 연결되는 영남대로였다. 이 길은 서울에서 860리 이고 하루 95리를 걸어 9일 반이 걸려야 도착하는 긴 여정이었다. 유배형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증보문헌비고’에서 볼 수 있듯이 천사(遷徙), 충군(充軍), 정배(定配), 위노(爲奴) 등으로 세분화 된다.천사는 죄인을 고향으로부터 외방 먼 곳으로 이주시키는 형벌이다. 충군은 군역을 부과하는 것이고, 위노는 관의 노비로 삼는 것을 말한다. 정배는 한 장소를 정해 죄인을 유배시키는 것을 말한다.정배 중에 안치(安置)는 유형중에서도 행동의 제한을 가장 많이 받는 형벌로서 유형지에서 다시 일정한 지역 내로 유거하게 하는 것이다.안치는 유거의 성질에 따라 본향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 등이 있다. 이외에도 유형의 일종으로서 집행방법에 따라서는 부처(付處)가 있는데, 이것은 유배인의 평소 공로나 정상 등을 참작하여 유배지로 가는 중간지점 한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처분이다. 그래서 ‘중도부처’라 하였다. 위에 열거한 형벌은 용어 자체의 뜻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유형을 뜻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유배지는 모두 408곳 정도이다.이중 경상도가 81곳으로 가장 많고 전라도가 74곳, 충청도는 70곳이다.실록 등을 분석하면 조선의 대표적인 관직에 나아가 중요 직책이나 고위직에 오른 사람치고 유배길에 오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시대 유배는 관리들에게 흔한 의식치례였다.조선조 장기로 유배가 결정된 유배인은 대략 220여 명(계속 조사 중, 유동적 임)으로 확인된다.이는 단일 현(縣)지역 유배인 수로는 국내에서 제일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조선 태조 1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로 있던 설장수(5070長壽)가 정몽주와 같은 파였다는 탄핵을 받아 장기로 유배 온 것을 비롯하여 세종 때는 개국공신 홍길민의 아들인 대사헌 홍여방, 세조 때는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된 박팽년의 가족들이 연좌되어 대거 이곳으로 왔다. 연산군 때(1500년)는 무오사화에 연루된 대사간 양희지가 왔고, 숙종 때(1675년)는 우암 송시열이 제 2차 예송(禮訟) 사건으로, 기사환국(1689년) 때는 영의정 김수흥이 왔다. 경종 1년(1721년)에는 판서 신사철이 신임사화에, 정조 때(1801년)에는 다산 정약용이 신유박해 사건에 각각 연루되어 장기로 오기도 했다. 유배인들이 머물다 간 유배지는 한 선비에게는 말 못할 고통의 장소였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문학의 산실이자 더 높은 문화의 보급 장소이기도 했다.장기지역을 거쳐 간 수많은 유배객들도 그들이 머물렀던 이곳의 풍광과 서정을 주제로 많은 음영과 저술을 남겼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장기에 머물면서 결코 유배지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여기지 않고 학문연구와 시작에 전념하였다.그가 직접 전해들은 이곳 사람들의 애환과 관리들의 부패상을 우화적이고 은유적인 시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적 설득력을 보탰다. 그런 경험은 후에 그가 ‘목민심서’를 저술하는데도 큰 계기가 되었다.그보다 120여년 먼저 온 우암 송시열은 4년 여간 장기에 머물면서 남인 세력들이 득세한 경상도에 노론계의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후학양성에도 힘을 썼다. 이곳을 거쳐 간 유배인들의 영향으로 장기는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되었다.비록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작은 고을이었지만 중앙의 올곧은 관리들과 좋은 서적들을 접하면서 지식과 문화교류를 활발히 전개하여 충절과 유현의 고을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던 것이다.지금 장기에 가면 유배문화의 흔적들이 있다.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처럼 이곳에서 객사한 유배인도 있고,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처럼 끝까지 복권되지 않아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과 애환을 품은 채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이들의 이야기들을 시대별로 엮으면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무슨 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들은 유배지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지냈으며, 그들이 남긴 사상과 철학은 장기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 녹아있는지를 헤쳐 보려 한다.이 글을 접한 이들이 장기를 찾아 한번쯤은 유배인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다.-영남대 대학원 한국학 전공-향토사학자, 수필가-대표 저서‘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 ‘영일 유배문학 산책’, ‘포항의 3.1운동사’, ‘해와 달의 빛으로 빚어진 땅(공저)’, ‘포항의 독립운동사(공저)’, ‘포항시사(공저)’ 등 다수

2019-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