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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일흔다섯번째(마지막) 안부 - 스며들기

아침저녁은 이미 가을입니다. 저 고요한 세상 속에 참 많은 일들이 다녀갑니다. 누군가 살다 지는 곁에서 누군가 부지런히 피어나며 그렇게 제각각 정성들여 삶을 굴리느라 묵묵합니다. 가장 사소한 것으로 스며들기 위해 생이 저리 움직이고 있습니다. 친정아버지의 복숭아나무가 올해도 복숭아를 보냈습니다. 둥글게 잘 익은 계절이 바구니 속에 담겨 왔네요. 복숭아나무 한 그루 얻어다가 나무 농장 귀퉁이에 구덩이를 파고 꼭꼭 밟아 심으시던 오래 전 아버지도 따라 왔습니다. 봄 마다 피던 복사꽃도 따라 왔습니다. 굵고 탐스러운 것만을 골라 혹여 짓무를 새라 사이사이에 덧댄 정성이 받아 든 마음을 평평하게, 고르게 다스립니다. 복숭아 하나가 참 많은 것의 손을 잡고 가는 시간 입니다. 그러고 보니 크고 거대한 것에 딱딱하게 굳어 긴장하던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핀 꽃밭들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놓인 사물들,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는 개울이나 구름 앞에서 오히려 평평하여 장대해지곤 하였네요. 사소하여 자유로운 영혼들, 아니, 치열하게 고통을 뚫고 온 것일수록 제 모습 고스란히 세상에 스밀 줄 알아서 개망초 하나 본 순간부터 계절은 온통 망초밭이요. 능소화 피었구나 순간부터 담마다 능소화 넘는 것이었겠지요. 가을로 스민 사람들 바다로 스민 사람들 꽃으로 파도로 바람으로 더 깊이 스며 든 기억, 그 추억들. 오늘, 그대 왼쪽 의자에 앉아 우리가 아침마다 열고 걸어가는 들판을 바라봅니다. 콩 밭 언저리마다 떠오르는 등 굽은 아낙처럼 이제 `인동초`로 스며 든 한 사람의 부재가 세상을 평평하게 조율하는 들판이 되고 있습니다. 그대와 나 또한 저 언저리 자유로운 이름 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삶이길 바라며 일흔 다섯 번째 안부를 놓고 일어섭니다.끝

2009-08-25

일흔네번째 안부 - 우리는 한 배를 탔다

집을 떠나온 지 아흐레째, 한국해양대학교 실습선 한바다 호를 타고 울릉도로 가고 있습니다. 물결에 조금씩 기우뚱거리는 책상에 앉아 그대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 스탠드 불빛 아래 작은 시간은 자정을 조금 지나고 있네요. 오후 10시25분 마산 항을 출발, 오색 불빛 찬란한 마창대교 아래를 유유히 지나 두 시간 남짓 만에 멀리 부산 동두말등대를 만났습니다. 바다에서 보는 부산의 밤 풍경에 괜스레 마음 벅차고 물결에 환하게 길을 낸 달이 너무나 고운 탓에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의 고단함이 스르르 지워지네요. 그간의 일정을 돌아보니 참 다난했습니다. 1박이 예정되었던 백령도에선 다행히 해병대 극기 훈련은 마쳤지만 태풍의 기운이 몰고 오는 파고 때문에 장병들과의 시간을 뒤로하고 부랴부랴 다시 배에 올라야 했지요. 다시 긴 시간 흘러 평택항으로 돌아와 장대비 쏟아지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목포에 닿았구요. 목포해양대학교 새누리호에서 잠을 자고는 다음날은 해남으로 여수로 발걸음 옮기며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뜨겁게 스며들었지요. 손을 잡고 일을 돕고 특산물을 찾아다니며 영상에 담아 섬을 지나면 또 섬인 시간을 흘렀네요. 제주에서는 애광원을 찾아 지체장애 원생들과 삼성중공업을 찾았을 때는 우리나라 조선업의 미래와 가능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푸릇푸릇한 청년들의 지치지 않는 열정 속에서 아, 저에게도 새로운 힘이 솟아 나는 걸 느꼈습니다. 함께 가고 싶었지요. 함께 흐르고 싶었지요. 당당하게 모든 보폭을 맞추며 뜨겁고 아득한 여름을 지나고 싶었습니다. 104명의 대학생과 보도진 그리고 도중에 합류하였다 내리는 응원자들. 왼쪽 가슴에 새겨진 `우리는 한 배를 탔다`는 로고를 새기고 또 새기며 지칠수록 손을 내밀고 잡으며 함께 가는 해양영토대장정. 이제 내일 오후엔 울릉도에 닿아 해안 순례를 하고 모레는 성인봉에 올랐다가 독도로 들어 갈 일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내 나라 바다를 느끼고 해양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과 그에 대한 방책을 논의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배를 타고 희망을 항해하고 있습니다.

2009-08-18

칠십세번째 안부 - 짐을 꾸리며

비닐 지퍼 백에 하나 둘 물건을 담아 큰 가방에 담습니다. 최대한 가벼운 옷들과 편안한 신발, 모자와 비옷, 영양제와 비상약을 챙기고 수첩과 녹음기 그리고 카메라와 충전기는 노트북과 함께 넣구요. 깊은 밤 군함 침대에 엎드려 누군가에게 쓸 엽서 몇 장과 우표, 간간이 읽을 작은 글씨의 단행본도 두어 권가지 챙기고 나니 짐은 어느새 산더미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멀미약이 빠졌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저러나 왜 이리도 설레는지요. 오늘밤은 아마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104명의 대학생들과 보름 남짓 함께 할 해양영토대장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육로를 한 발 한 발 디디며 내 나라의 흙내를 맡는 행사는 많았지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닷길을 헤치고 항해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지요. 그러기에 더욱 벅찬 기대와 떨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네요. 평택항에서 해군 LST로 출항하여 서해안 최북단 백령도를 거쳐 목포에서 다시 목포해양대학교 한누리호를 갈아타고 여수, 마라도, 제주도를 지나 마산에 이르지요. 마산에서 한바다호로 교체 승선하여 거제, 울릉도, 독도, 그리고 부산항에 닿는 길고 긴 항해를 우리 모두는 즐거이 준비 합니다. 그저 바다의 풍경만을 감상하며 망망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도시에 정박하여 바다를 끼고 사는 사람들과 유적을 만나고 봉사활동과 퍼포먼스, 그리고 갖가지 체험을 하게 되지요. 서해안 최북단 백령도에선 해병대 극기체험을 한 뒤 화합의 밤을 갖고, 목포에선 우수영 강강술래를, 여수에서는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아 볼 것입니다. 제주에선 자연이 선물한 올레 길을 걷고 바다의 어멍 해녀들과 함께 하고, 거제 애광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펼칠 예정입니다. 독도에선 각자가 가져 온 지역의 흙을 한 데 모으며 의미를 되새길 거구요, 저녁이면 다시 배에 올라 밤바다를 흐르며 둘러앉아 젊은이들은 조별 토론을 할 것입니다. 저는 그 창창한 젊음의 눈빛과 마음을 읽으며 하루하루 일정을 글로 옮기게 되겠지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요.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간 후에는 모두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까요. 가방을 챙기다가 다시 일정표를 봅니다. 해양문화재단이 주관을 하였지만, 그 외에도 참 많은 단체가 함께 했네요. 모두가 차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에게 거는 기대와 희망 때문이리라는 걸 알기에 순간순간은 분명 값지게 흐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서 확장되는 무수한 효과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확연합니다. 문득, `산이 있어 강 흐르나니`라고 쓴 석정의 글씨가 떠오릅니다. 모두가 산이고 강이겠지요. 저,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밤바다 유유히 흐르는 외로운 시간 울렁이는 선상의 침대에 엎드려 그대에게 꼭 한 장 편지 또박 또박 띄울 것을 약속합니다. 이 편지가 그대의 왼쪽의자에 놓일 즈음 저는 망망한 바다 위에 있을 겁니다. 몸에 넘치는 짐을 짊어지고 보름 남짓 바다로의 설레는 항해를 꿈꾸며 말입니다.

2009-08-11

일흔두번째 안부 - 꿈 여무는 소리

팔월 첫 토요일 오후, 구룡포청소년수련원에는 경상북도 지역의 여고생 100여 명이 모였는데요. 바로 차세대 여성 리더를 위한 `2009 BPW 리더십 캠프`에 참가한 학생들이랍니다. 사단법인 전문직여성 한국연맹 포항, 구미, 영천클럽에서 주관한 이 행사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청소년, 특히 여고생들에게 다양한 직업에 대한 모색의 기회와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당당한 전문직 여성으로의 행복한 삶을 꿈꾸게 하는 자리였지요. 정치, 경제, 경영, 금융, 사회복지, 언론, 의료, 교육 등 참여한 패널들의 분야가 무척 다양했는데요. 저는 문화예술 쪽을 시안갤러리 큐레이터 한지혜씨와 맡았답니다. 강의실 책상을 붙이고 둥글게 둘러앉아 서로를 바라보았지요. 청도에서 온 슬기와 재연이, 프리랜서가 꿈인 진안이, 감포에서 온 지영이... 모두들 얼마나 밝고 당당하던 지요. 6학년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박하늘바다`라는 예쁜 이름의 친구는 저작권과 출판에 관한 이모저모를 제법 구체적으로 묻네요. 외고에 다니는 정민이는 장래에 우리말을 세계에 알리는 꿈을 꾸고 있다는데요. 문학작품을 읽고 직접 써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구요. 뿐만 아니라 건축이나 디자인에 관련한 미술에 관심 있는 친구들은 큐레이터란 무엇이며,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어떤 보람이 있는지, 또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서도 꼬치꼬치 파고듭니다. 아직 이십 대 후반이라 학생들에겐 언니처럼 다가 간 한지혜씨는 디자인을 전공하고 박물관에서, 미술관에서 근무해 온 경력을 토대로 경험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준비해 온 자료를 선물하기도 했어요. 그 시간 다른 강의실에선 교육자로 언론인으로 사회복지사로 그리고 정치인으로 군인으로 경찰로 당당하게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여성들이 마악 세상의 일과 직업을 향해 눈을 뜨는 학생들에게 다가앉아 용기와 희망과 자부심을 심어 주고 있었지요. 그렇게 그렇게 이끌어 주고 손 내미는 자리로 시원한 바람 바다에서 불어오고 까뭇까뭇 씨앗 여무는 해바라기처럼 단단하게 꿈 여무는 청춘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2009-08-04

일흔한번째 안부 - 축제

철벅이며 파도가 밀려오고 시원한 바람이 노니는 한 여름 밤하늘로 쏘아올린 불꽃이 도시의 어둠을 지우며 참으로 근사하게 피어납니다. 그 작고 빛나는 수 천 수만의 조각들이 쏟아져 내릴 때 바라보는 사람들 일렁이는 함성이 온 세상 가득 차오릅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벅차고 감사한 것인가 모두가 절로 두 손 모으는 시간은 금세 눈부신 꽃밭이 되고 맙니다. 한 손으론 목말 탄 아이를 한 손은 아내 손을 꼭 잡은 젊은 아빠와 돗자리를 깔고 서로 기대앉은 노부부를 지나 어깨를 감싸고 꼭 붙어 선 청춘의 싱그러움이 함께 하네요. 사내 아이 대여섯 파도 가까이 달려가면 그때마다 모래밭은 움푹움푹 음표를 만들고 분주해진 상가의 네온 또한 그 빛을 더하는 것을 그대도 보고 계시는지요. 저 불꽃으로 인해 누군가는 사랑을 이루고 저 불꽃으로 인해 누군가는 주저앉으려던 삶 일으키고 누군가는 저 불꽃으로 인해 병들고 가난한 영혼 치유할 용기를 얻고 또 누군가는 부질없는 욕심과 허영에 흔들리던 마음을 차분히 돌아볼 지도 모릅니다. 그대와 나 저마다 생에 한 아름 짐을 부려 놓고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느닷없는 절망을 만나고 소소한 갈등과 후회의 날들 지나다가도 아슬아슬 다시 희망을 찾아냈지요. 그리 오르고 내리는 행보를 반복하면서도 쉬이 삶을 접지 않는 이유는 길이 끝나는 곳마다 열쇠가 되어 줄 축복 살고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겠구요. 이 축제가 막을 내리면 저마다 낯익은 자리로 돌아가 묵묵히 삶을 굴리겠지만 가슴마다 눈부시게 꽂힌 의욕은 오래 남아 틈틈이 이 말을 되뇌겠지요. `그래, 삶은 축복이야`

2009-07-28

칠십번째 안부 - 당신의 부재(不在)

마당 수돗가에 앉아 분홍자물쇠로 꾹 잠근 문을 봅니다. 벚꽃이 훌훌 날릴 때 저 문을 나선 당신은부용화 큰 얼굴로 피고 모감주나무 씨앗 여무는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으시네요.마당가 채송화는 식구를 늘려 저리 오순도순 피었는데 지난겨울 내내 경로당 앞에 세워졌던 낡은 유모차도안보이네요. 강사리 앞바다 미역돌에 너불너불 미역 자라면 새벽같이 쫒아나가 팔순에도 깊은 자무질 하고봄 햇살 짧다 짧다 부지런히 미역을 다듬어 널던 할머니.큰 덩치에 큰 목청 장부 같아도비오는 날 놀러가서 옛이야기 해 달라 보채면 부처처럼 앉아 시작했던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흐르고 흘러결국은 흠씬 눈물 쏟고야 마는 아픔 많은 당신이셨지요. “내가 이래봬도 대보부텀 강사꺼정 다 디비도 따라 올 년 없는 최고 해녀 였다. 저 바다에 용사처럼 드나들매 살았다 아이가. 그렇다꼬 머시 돈을 모닸나 집을 지았나 암것도 없다마는 이래 문디 귀신같은 오두막살이에 기들아갔다 기나갔다 살아도 내는 내가 참 기특타. 와그라는 줄 아나? 자슥 8남매 무사히 다 키워 부산이고 울산이고 골골 짝짝이 다 심어 났으니 우예 안 기특켔노. 인자 암것도 부러울 기 없다. 물질로 해가 나오매 방구에 무르팍이 하도 찍히가 이래 다리 쪼매 아픈 거 말고는 몸도 성채, 울 자슥들 맨날 지에미 걱정해주고 울 손자 놈들도 손톱 하나 망가진 눔 없이 잘 크재, 머시 근심이겠노.”붉어진 눈 쓱쓱 비비며 씩씩하게 다시 웃던 당신이셨지요. 열아홉 추자도 아가씨가 아픈 사연 안고 흘러 든 강사리.환갑 넘어서야 딱 한 번 단체관광 다녀왔다는 제주도 이야기를 참 여러 번 들려 주셨던 거 기억하시나요?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추자도도 아니고 겨우 제주도까지 간 걸음인데도 얼마나 벅차고 좋았는지를 알 수 있었답니다. 진이 할머니 성게 작업하시는데 우연히 들렀다가 이제야 들었어요.지난겨울 내내 아프던 당신께서 결국 부산 아들네 집에 가셨고 그리고 더 더 먼 곳으로 아주 가셨다는 소식을요. 차려주는 밥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것도 이쁘다시고냄새나는 노인네 좋다고 놀러오는 것도 이쁘다시고 바깥 날씨가 따뜻한데도 전기장판 위로 결국은 저를 앉히시던 당신,그리 골방 쥐 드나들 듯 살던 놈이 좀 바빠졌다는 핑계로 뜸한 사이사이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대한민국 최고로 전망 좋다시던 오두막에 철컥 자물쇠를 걸고 나서며 무슨 생각 하셨을까요. 이렇게 여기 앉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툴툴거리는 유모차 앞세우고 휘~ 휘이 숨비소리 같은 호흡으로보고 싶은 당신이 오실까요? 그럴까요?

2009-07-21

예순아홉번째 안부 - 포구에서

우기 중인 포구가 눅눅합니다. 다행히도 지난밤엔 바람이 크지 않아 오늘 아침 배들은 제법 많은 청어를 풀었지요. 비닐 옷에 장화를 신은 사내들이 터질 듯 한 뜰채를 힘껏 올려 청어를 쏟으면 한가득 싣고 떠나는 트럭과 중매인들 오토바이 소리로 한동안 판장이 북적였구요. 젖은 배 위에서 밥을 지어 둘러앉은 아침식사 위로 한두 방울 또 비가 다녀가네요. 서둘러 식사를 마친 그대는 끼걱끼걱 흔들리는 뱃머리에 걸터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태우며 먼 곳 바라보았지요. 온통 펄럭이는 오후였던가요? 후둑거리며 굵은 빗방울이 사선으로 칠 때 수협 앞 공중전화 박스에서 비스듬히 기댄 채 어디론가 안부 전하는 당신을 본 적 있어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지만 까무잡잡한 얼굴에 다녀가는 웃음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나는 걸 보며 아마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했지요. 작정하고 잡은 듯 수화기를 오래 놓지 못하는 걸 보며 무척이나 오랜만에 나누는 이야기인가 보다 했구요. 힘이 들지만 참을 만 하다고 날이 덥지만 참을 만 하다고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모처럼 목욕탕에 다녀왔다고 여긴 골목마다 주홍빛 능소화가 담을 넘어 피고 키가 큰 줄기에 빨갛게 하얗게 접시 같은 꽃도 피더라고 그리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였더랬지요. 길고 긴 통화를 마치고 그대가 우산을 펴기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비바람이 치기 시작했어요. 묵직한 할인마트 비닐봉투를 야물게 쥐고 다시 배를 향해 걷는 그대의 걸음이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사뭇 가벼워 보였답니다. 멀고 먼 나라 포구에 정박한 그대의 젊은 날 비록 지금은 눅눅한 외로움의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꿈꾸던 것들을 향해 조금씩 당겨 앉는 귀하디귀한 시절이기를 바라며 포구를 둥글게 돌아 나옵니다.

2009-07-14

예순여덟번째 안부 - 바느질을 하며

그대에게 그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말았지요. 쉬이 사과도 못하고 근심만 돌돌 굴리다가 도무지 꼼수로는 헤어날 길 없어 종일 바느질을 했네요. 입 꼭 다물고 돋보기 끼고 뚫어져라 한 곳만을 바라보며 왼손으론 천을 잡고 오른손으론 바늘을 잡고 한 땀 한 땀 넣었다 빼고 다시 뒤로 찔러 앞으로 빼는 동안 촘촘하게 길을 내는 실의 자국들. 그렇게 커다란 방석 하나를 만들어 갑니다. 도톰하게 속을 채운 뒤 먹물 염색한 천을 테두리에 두르고 쪽물 염색한 천을 가운데 대고 붉은 실로 한 바퀴 흰 실로 한 바퀴 그렇게 깁습니다. 행여 앉는 자리 속이 밀릴까봐 곱하기 모양으로 다시 또 길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 돌려가며 네모를 자꾸 그립니다. 한 줄로는 모자라 또 한 줄 곁에 내니 어느새 톡톡하게 자리를 잡는 귀퉁이가 제법 그럴듯한 방석 매무새로 고개를 듭니다. 이 가느다란 실을 끌고 가는 바늘 하나도 조금만 비껴 지르면 빼또롬해지는 길 선명한데 하물며 함부로 말하고 생각 없이 행동한 나의 모습은 얼마나 흐트러진 자국을 주변에 남겼을까요. 함께 기워가는 세상일 텐데 삐딱하게 돌아앉는 나 하나로 인해 잠시나마 흔들린 우리들 질서에 대해 생각합니다. 올려놓은 음반이 서너 번이나 반복해서 돌아가는 동안 바늘을 쥔 엄지와 검지가 아파 오는 동안 솜씨 없는 바느질로 다시 그대를 생각하는 동안 말없이 말을 건 나와 내가 잘 화해하고 있더군요. 참나무 좌탁 아래 놓아둘까? 강돌 위에 깔고 앉아 강을 바라볼까? 그러다가 아니야, 그대에게 주어야지 하고는 만져보며 또 만져보며 가뿐해진 마음을 부지런히 깁습니다.

2009-07-07

예순일곱번째 안부 - 봄이, 짱이, 소낙비

봄이는 화실로 출근합니다. 짤막한 다리로 힘겹게 3층 계단 끙끙 올라 그림 그리는 엄마 곁에서 납작한 코, 동그란 눈으로 종일 맴돌지요. 음악을 들으며 콜콜 잠을 자는 게 대부분이지만 간식 생각이 나면 킁킁 조르기도 하고 위층 체육관에서 아이들 포도 알처럼 쏟아지면 유리문 앞으로 가서 물끄러미 내다보기도 합니다. 봄아~ 지나는 길에 문 밀고 들어서면 어찌나 반가워하는지요. 겅중겅중 뛰고 뱅뱅 돌고 머리라도 쓰다듬을라치면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눈빛을 줍니다. 짱이는 회사에 출근합니다. 큰딸이 낳은 아이를 봐주느라 아내가 서울로 간 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있을 짱이가 걱정되어 데리고 출근하는 아빠, 간식과 사료 그리고 담요까지 꼼꼼하게 챙긴 배낭 속 빵빵 합니다. 그 녀석 물기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면 사장님 체면이고 뭐고 짱이 보다 소중한 건 없습니다. 일가친척 없는 곳에서 젊은 날을 다 소진하며 기업주로 산 세월 컸다고 훌쩍 떠나 저 살기 바쁜 자식들이 서운할 때 마다 정 붙이고 맘 나눈 게 짱이였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짱이가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라고 장난처럼 말하면 무슨 소리냐고 얘처럼 예쁜 애가 어디 있냐고 펄쩍 뛰는 짱이 아빠 보는 마음 간혹 짠할 때가 있답니다. 그게 뭔지 아니까요. 우리 소낙비는 바닷가 마을에 삽니다. 제가 베란다에 앉아 신문을 보면 주둥이를 쭈욱 깔고 곁에 자리를 잡구요.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다 `소낙비야, 오늘 바람 참 좋재?` 하면 눈 지그시 감고 까만 코 발름거리며 `그렇네요` 바람 냄새 맡지요. 태어난 지 40일이 되어 와서 12년 훌쩍 넘는 세월을 살았으니 제가 하는 말, 눈빛, 마음까지 죄다 읽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얼굴로 말입니다. 이젠 녀석도 늙어 예전처럼 뛰노는 일은 줄었지만 글 쓴다고 앉은 늦은 밤이나 어쩌다 홀로 마시는 술상 앞에는 여전히 눈 맞추고 소낙비가 있네요. 봄이 엄마, 짱이 아빠, 그리고 소낙비 엄마는 압니다. 통하는 말 때문에 통하는 글 때문에 막혀버린 세상에서 아무것도 통하는 게 없어 최선을 다하는 녀석들. 그 맑은 눈망울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깊은 소통이고 울림인지를.

2009-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