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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그들에게 차안의 번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더없이 슬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차안의 사람이기 때문일까 …

어쩌다 보니 40여 개 나라를 여행했다. 세칭 ‘돈 많고 시간 넉넉한’ 팔자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해 몰락한 조부와 세상에 대한 불평과 분노를 가슴에 안고 일찍 죽은 선친을 가진 가난한 노동자지만, 끽해야(?) 4만km가 조금 넘는 둘레를 가진 ‘내가 태어난 별’ 지구를 한 바퀴쯤은 돌아보고 싶었다.서른 즈음부터 1년이면 1~2번, 많게는 3번까지 다른 나라로 향하는 비행기나 배에 올랐다. 짧게는 3~4일에서 길게는 10개월의 기간. 그런 장단기 여행자의 삶이 20년 가까이 이어졌다.2020년은 특별하고 비극적인 해로 모든 여행자들에게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동, 남·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지구 전체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몰고 온 공포에 떨고 있다.외국 여행은 고사하고 제 나라 다른 도시로의 이동과 이웃 간의 왕래마저 눈치가 보이고 두려운 시절. 13세기 페스트가 그려낸 ‘지옥의 풍경’이 이러했을까?자신의 뜻이 아닌 바이러스로 인해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으니, 반대급부로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 대한 갈망은 무한으로 증폭한다.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었던 나라’에 대한 그리움도 이에 비례해 커진다.▲달관한 듯, 그러나 서글픈 인도인들의 눈동자“놀랍다” 또는 “생소하다”는 표현이 딱 잘 어울리는 국가 인도. 유럽 사람들은 “인크레더블 인디아(Incredibl India)”라고 말한다.인도는 기자의 첫 번째 장기 배낭여행지였다. 28박29일 동안 뭄바이에서 트리밴드럼까지 인도의 남서쪽 해변을 따라 떠돌았다. 당연지사 많은 현지인들을 만났다.‘이번 삶이 끝이 아니고, 다음 생이 존재한다’는 윤회를 믿는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 태반이 힌두교도인 그들은 현실의 가난과 고통을 애써 외면한다. 하루에 한 끼, 그것도 우리 돈 1천 원에 미치지 못하는 허술한 식사를 하면서도 매일 웃는다.또한, 인도인들 절대다수의 머릿속엔 ‘해외 여행’이라는 개념이 없는 듯했다. 남부 해변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작은 마을의 개천가. 다정해 보이는 할머니와 손녀를 만났다.이빨이 3~4개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는 자신이 몇 살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인도의 인권운동가·1869~1948)가 살아 있을 때 태어나 기자를 만난 그날까지 동네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당연지사 한국이 어디쯤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비행기? 버스도 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손녀딸이 더듬거리며 할머니의 생을 짧게 요약해줬다. 긴 설명도 필요치 않았다.그 노파에게 세상이란 죄 없이 갇힌 감옥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2020년 오늘, 우리의 답답함을 80년쯤 살아낸 것이다. 상상력조차 가닿지 않는 아득한 세월이다.그러나, 그럼에도 할머니는 낯선 여행자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손녀도 마찬가지.두 사람의 눈동자는 차안(此岸)의 잡다한 번뇌와 고민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달관(達觀)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하지만 더없이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건 기자가 피안(彼岸)을 보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차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지금도 인도 할머니와 손녀를 만난 그날, 그 장면이 떠오를 때면 한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삶의 비의(悲意)와 눈물을 탁월하게 형상화해낸 이승철(62) 시 ‘순천 와온에 와서’의 문장이 눈앞으로 흘러간다.▲2020년 오늘, 우리는 윤회를 믿는 염소보다 행복한가?그것이 실연인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슬픈 사연을 가진 시적 화자는 저물녘 석양이 심장을 쪼그라지게 만드는 서쪽 바닷가 와온마을에 간다.거기서 ‘다시는 너로 인해 무너지지 않겠노라며/얼마나 다짐하며 속울음 삼켰던가’라고 가슴을 치며 ‘바다를 품지 못한 육신은 저리도 허허로웠다’고 한탄한다.그러나 너나없이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돌봐야 할 식구가 하나 둘 사라지고, 썰렁해진 빈 방에서 홀로 담배나 피워대는 허망한 일에 다름없다.그래서다. 그곳이 와온마을이건, 인도의 바닷가마을이건 ‘육통 구멍에 들숨 하나 모셔 살기 힘들어/그날 또다시 찾아간 와온 바다 위로/곰삭은 뼛가루만 말없이 넘실대고 있었다’고 시를 마무리한다.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1941~2018)가 연출한 영화 중에 ‘리틀 부다(Little Buddha)’란 게 있다.불교 큰 스승의 환생이라고 지목된 꼬마아이의 행적과 해탈을 향해 가는 석가모니의 삶에 카메라를 밀착시킨 이 작품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곧 목이 잘릴 염소 한 마리가 울고 있기에 백정이 묻는다.“죽음이 슬퍼서 그러느냐?”염소가 답한다.“아니다. 나는 1만 번째 다시 태어날 땐 사람이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 9999번 환생을 겪었고 지금이 1만 번째 죽음이다. 다음 생엔 사람으로 태어난다. 슬퍼서가 아니라 기뻐서 운다.”그런데 염소가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게 과연 기쁜 일일까? 베르톨루치 감독이 객석을 향해 던진 화두의 선명함이 영화를 본 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안에 남았다.시인이란 세상과 인간을 회의하고 아프게 들여다보는 존재.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시인 이승철 역시 이런 말로 2020년 코로나19 시대를 사는 우리가 2600년 전 윤회를 믿었던 염소보다 진정으로 행복한지 묻고 있다.“황량하던 농갓집 햇살과 더불어 온종일/나부대며 쏘다닐 때 썰물 져 가던 먼 바다/한 목숨이 왜 이리 길어야 하는지 생각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12-10

흑백처럼 어두운 땅그래도 희망은 있다

21세기 벽두. 빈자와 부자는 같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화려한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세칭 ‘명품 가방’의 가격이 곧 오를 예정이라는 뉴스가 나오자 아침부터 값이 오르기 전 그 가방을 사려는 사람들이 명품매장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그 일이 있기 불과 얼마 전. 생존의 위기에 몰린 수천 명의 소상공인들은 명품 가방 1~2개 가격에 해당하는 대출금을 신청하기 위해 은행과 관공서 앞에서 밤샘을 했다. 대부분 조그만 술집과 소규모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가난은 부끄럽지 않은 것”이지만 매우 자주 인간을 불편하게 한다.또한 “단순히 돈이 많다는 건 자랑할 일이 못 된다”고 말하지만 가지고 있는 많은 돈은 어떤 인간이건 그를 우쭐하게 만든다. 누가 있어 이 사실을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빈부의 차이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살아가는 전혀 다른 삶은 한국에서만 목격되는 게 아니다. 유럽이건 아시아건, 아메리카건 아프리카건 전 세계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더불어 과거와 지금, 현재와 앞으로도 유사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알바니아와 캄보디아에서 마주친 빈곤지금으로부터 9년 전쯤이다. 조그만 배낭 하나 메고 중동과 유럽을 여행하던 기자는 알바니아 듀레스에서 이탈리아 남부 해변도시 바리로 가는 배를 탄 적이 있다. 15시간의 항해로 아드리아해(海)를 건너는, 최소 1천여 명을 태울 수 있는 거대한 여객선이었다.거기엔 침대와 이불 없이 맨바닥에 앉아 있어야 하는 3등석과 샤워실과 발코니까지 갖춘 1등석이 동시에 존재했다.배가 출발하기 몇 시간 전부터 3등석 티켓을 사려는 승객들로 매표소 앞이 시장통인양 북적였다.대부분이 경제적으로 곤궁한 동유럽을 떠나 비교적 부유한 남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서 일거리를 찾으려는 이들이라고 했다. 젊은이는 물론 노인들도 적지 않았고, 허술한 옷차림의 엄마 품에 안긴 젖먹이 아기도 여럿이었다.1등석과 특실 승객들은 그 난장판에서 훌쩍 비껴나 있었다. 비싼 티켓을 발권하는 창구는 한산했고, 1등석 티켓 구매자들은 3등석 승객들의 출입이 제한된 출구를 지나 편하게 배에 올랐으므로.크메르의 고대 유적을 보기 위해 몇 차례 찾았던 캄보디아의 국경 도시 포이펫에서 목도한 한빈(寒貧)의 풍경도 기억 속에 또렷하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포장되지 않은 질퍽한 거리. 채 150cm가 될까 말까한 조그만 체구의 아주머니들이 자기 몸보다 5~6배는 커 보이는 리어카에 짐을 잔뜩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특별한 기술 없는 캄보디아 육체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2~3달러에 불과하다고 들었다.포이펫만이 아니다. 프놈펜과 시아누크빌 등 캄보디아 상당수 도시엔 오로지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장사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듯했다.싸구려 음료수 몇 병과 과자 몇 봉지, 조악한 품질의 휴지나 비누 따위를 낡은 판자 위에 깔아 놓고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캄보디아 구멍가게 상인들이 벌어들이는 하루 수입은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보잘것없을 게 분명할 터.허름한 가게에서 맥주 서너 병을 청해 먼지 날리는 길에서 마실 때면 괜히 서글프고 마음 아팠다. 그런데, 돌아보면 알바니아와 캄보디아만이 아니었다. 한국 또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절대적 가난을 국민 대부분이 앓았다.초등학생도 100만 원짜리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양이 아닌 질을 따지는 한국인. 그러나 그런 시절을 살아온 건 불과 얼마 전부터다. 인간에게 수치심과 자존심을 버리게 만드는 가난. 우리 역시 오랫동안 그런 세월을 살아왔다.눈 맑고 선량한 인품을 가진 시인 나해철(64)의 절창 ‘영산포’가 그려내는 건 부정할 수 없는 30~40년 전 우리네 ‘가난의 풍경’이다.▲웃음과 희망, 가난을 이기는 힘은…한 세대 전 한국. 번성했던 포구가 쇠락을 길을 걸으면서 그곳의 젊은 여성들은 도시로 떠났다.가난한 살림에 자기 입 하나라도 줄이고, 동생들의 연필과 스케치북을 사주기 위한 공장행. 비단 영산포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경상도와 충청도 시골 마을에도 그런 처녀는 흔전만전이었다.울면서 마을을 떠난 누이들은 ‘빈손의 설움 속에 살아온 어머니가 묻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쉽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끊지 못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늘 같이 흐르고’ 누이는 철 지난 ‘개나리꽃처럼’ 시들어갔다.아무리 기다려도 누님은 오지 않았고, 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누이를 아는 모두가 오래도록 소리 죽여 울 수밖에 없었던 시난고난의 세월을 우리도 지나왔다. 캄보디아나 알바니아의 서민들처럼.그렇다면 가난은 인간의 모든 ‘존재 조건’을 박탈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현재의 한국을 보면. 그래서다. 빈곤 속에서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는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제넘지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태도, 결핍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우리 또한 그러했다”고.앞서도 말했지만 가난이 자랑스러울 건 없다. 하지만 그걸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14

세상의 모든 중년에게 보내는 위로

중년은 40~50대를 지칭하는 단어다. 묘한 시기다.20대들 앞에선 “나도 아직 젊어”라고 하기에 부끄럽고, 노인들을 향해 “함께 늙어가는 처지”라고 말했다간 핀잔을 먹게 되는 나이.모험과 도전에 방점을 찍고 무모하게 훌쩍 먼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젊은이도 아니고, 골방에 틀어박혀 시린 무릎을 스스로 주무르며 옛날이나 추억하는 늙은이도 아닌 중년. 용기는 사라지고, 지혜는 아직 모자란 어중간한 시절.기자는 바로 이 중년의 한가운데를 살고 있다. 학교와 직장 등에서 만난 친구들도 비슷한 연배. 가끔 모여 세상의 화제를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기울일 때면 이야기의 주제나 소재가 청년 시절과는 판이하다는 걸 느낀다.중년이 된 이들이 낯선 외국에서 하루 15시간 버스를 타고 떠도는 배낭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에 대해서도 더 이상 주절주절 하지 않는다. 그러면 매너리즘 속에서 겨우겨우 견디고 있는 생이 더 피곤하고 귀찮아진다.보통 중년들의 술자리 이야깃거리란 새로 바꾼 자동차의 좌석이 얼마나 쾌적한지, 이른바 일류 대학에 들어간 자식이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지, 사놓은 주식이나 시골 땅의 시세가 얼마나 올랐는지 등일 경우가 흔하다. 주위를 돌아보면 이게 과장이 아니란 걸 단박에 알게 된다.지금으로부터 2천500년 전 공자는 ‘논어’ 학이(學而)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이걸 요즘 세대가 사용하는 문장으로 풀어보면 대충 이런 이야기다.“남이 너를 알아주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가 남을 알지 못함을 경계해라.”참으로 근사한 말이다. 사실 중년이라면 이 정도 사람의 도리는 깨닫고 실천해야 맞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게 결코 쉽지 않다.▲세상, 저항과 극복의 대상에서 이해와 해석의 대상으로중년보다 훨씬 젊은 청춘들에게 세상은 저항과 극복의 대상이다.일렁이는 조그만 파도에도 뒤집힐 것 같은 쪽배에 몸을 싣고 거대한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항해를 떠날 용기가 그들에겐 있다.육체는 물론 그 육체에 탑재된 정신까지도 한없이 뜨겁고 건강한 시절. 그들에겐 세상이 무섭지 않을 터. 청년에겐 끝을 알 수 없는 짙푸른 바다가 모험 가득한 세계의 낭만적인 은유로 보일 것이다.청년이 막 항구를 떠난 신형 선박이라면, 중년은 부표 없는 거친 바다를 떠돌다 지쳐 포구에 정박한 낡은 배다. 지나온 항해의 힘겨움을 알기에 앞으로 넘어야 할 파도가 두려운 선원의 심정은 중년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공자처럼 빼어난 현인(賢人)이야 경험의 축적 속에서 나이 들어가며 겸양과 덕을 쌓아가지만, 보통의 사람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야속하고 미울 뿐이다.앞서 언급한 ‘학이 편’의 문구를 눈앞에 가져다 펼쳐줘도 “아직도 내가 누구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는데, 왜 다른 사람들 사정까지 헤아리고 살아야 하나?”라는 투정이 나올 게 뻔하다. 그러면서도 괜스레 부끄러워할 것이다. 남들이 나잇값 못한다고 손가락질 할까 싶어.거듭 말하지만 청년에게 세상이란 극복과 저항과 대상이다. 그 시절이 지나면 누구에게나 중년이 온다. 그때가 되면 세상은 이해와 해석의 대상으로 모습을 바꾼다.시인 김광규(79)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40년 전쯤 김 시인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를 쓴다. 그가 중년에 들어섰을 무렵이다.▲스스로를 용서하고 이해한다면 중년의 삶도…‘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오래된 회색 판화와 닮았다. 행간의 의미를 곱씹을수록 우울해진다. 초반엔 빛나는 청년의 나날을, 뒤에는 이와 대비되는 중년의 비루한 오늘을 너무나 명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세상사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던’ 청년의 시간이 지나고 원하지 않았음에도 중년이 된 사내들.한때는 차가운 방을 자신들의 체온으로 덥히던 그들. 쏜살처럼 흘러버린 세월은 그들을 아래와 같은 슬픈 노래나 합창하게 만들었다.‘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그리고…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서/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게 했다.’적지 않은 이들이 대책 없이 나이 먹어가는 걸 서글퍼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면 영원한 청년은 세상에 없고, 청년시절 없이 생겨난 중년도 없다. 그렇다면 이 중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게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세상을 해석하고 분석할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의 자신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 허술하고 하찮을지라도 제 삶을 따스하게 포옹하는 것. 그래야 마음이라도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이 땅의 모든 중년이 공자처럼 ‘온갖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하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들만 사는 세상은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기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07

사라지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다… 그 존재의 흔적들 뿐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음이란 삶의 대극이 아닌 일부”라고 잘라 말했다. 토를 달 것도 없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은 자석의 N극과 S극, 혹은 물과 기름이 아니라 같은 밀도의 액체를 섞어놓은 혼합주스처럼 존재한다.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살아서 숨 쉬고 움직이는 인간 중 99%는 애써 부정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연한 사실이 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민족과 인종, 종교와 경제 문제로 야기된 전쟁은 그 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지 않은 인간을 먼저 죽음으로 내몬다. 세계 1·2차대전이 그랬고, 한국전쟁이 그랬으며, 아프리카와 동유럽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내전이 그랬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한 광기 어린 인종주의자의 일그러진 욕망은 유대인 수백 만 명의 죽음과 수난으로 현대사에 기록됐다.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선 70년 전 한국인들은 어제까지 형, 동생으로 부르던 서로의 가슴에 총을 쏘아댔다.이슬람과 가톨릭, 기독교와 정교회로 각기 다른 신을 섬기던 이들 역시 “망할 이교도”라고 상대방을 힐난하며 이웃의 팔다리를 잘랐다. 함께 저녁을 먹던 식탁으로 핏물이 튀었다.최근 전 세계를 패닉으로 몰고 간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세상 어디에도 끔찍하고 해괴한 병에 걸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전쟁에서 사용되는 총탄에 눈이 달리지 않았듯, 바이러스 또한 사람을 가려 습격하지 않는다.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도, 패륜을 거듭하던 천하의 악당도, 어린아이도, 팔순의 노인도 갑작스레 닥쳐오는 전쟁과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죽음의 음습한 그림자를 피해갈 수 없다.▲자신은 사라지지 않을 줄 알던 이들이 남긴 흔적인간은 선한 동시에 악하고, 현명한 동시에 우매하다. 역사란 그걸 증명해온 과정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우매한 자들은 앞서 언급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본질 해석’을 믿지 않거나 백안시했다. 자기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성당과 사찰, 교회가 사후의 행복을 빌기 위한 기원의 공간이라면 거대한 궁전은 살아서의 영화를 끝까지 누리겠다는 욕망의 물질적 현현(顯現)이다. 마침내는 삶의 덧없음을 보여주는.아시아와 유럽, 중동을 여러 차례 여행하며 적지 않은 숫자의 궁전을 보았다. 짧게는 수백 년 전에 축조된 것부터, 멀리는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까지.인도의 북부. 널찍한 호수 근처에 깎아지른 듯 직각에 가깝게 서있는 커다란 석벽. 그 뒤 웅장한 산이 품고 있는 성(城)의 모습은 현실 바깥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하얀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룬 성채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환하게 눈부셨다.터키 동쪽 끝 조그만 마을 도우베야짓에서 만난 이삭파샤 궁전은 신비하기까지 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졌다는 풍문이 떠도는 산 속에 들어선 미려한 고궁(古宮). 유럽에서 온 여행자들은 세월의 풍화를 이겨낸 오래된 흙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이란의 페르세폴리스를 둘러볼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자그마치 2천500년 전 옛날. 당시 지구의 1/4을 지배했던 페르시아 왕조의 위세를 짐작하게 해주는 광활한 유적지인 페르세폴리스. 황량한 사막 위에 세워진 정교한 조각과 엄청난 규모의 열주(列柱)가 한계를 몰랐던 왕들의 권력을 우회적으로 보여줬다.하지만 한 걸음만 물러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자. 그 궁전과 건축물은 영주(領主)나 왕 혼자서 만든 게 아니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 아름답고 휘황한 궁궐과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땀과 피를 흘린 건 피지배 계층이었을 터.최소한 자신만은 영원한 행복, 영원한 권력, 영원한 삶을 지속할 것이라 착각했던 한 사람을 위해 만 사람이 원치 않는 희생을 치른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고성이 아닐까?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는 엄연한 명제에 눈 돌린 지배자들.오래 전 축조된 거대한 성과 건축물은 비이성의 영역에서 영원을 지향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그렇다면 이성의 영역에서 꿈꾸는 영원이란 뭘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내놓을 수 있는 시가 서른도 되기 전 안타깝게 요절한 기형도(1960~1989)의 ‘오래된 서적’이다.▲왕이 원했던 ‘영원’과 시인이 꿈꾼 ‘영원’일본 소설가가 죽음과 삶의 상관관계를 정의했다면, 한국의 시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에 접근하는 방법을 시(詩)라는 수단을 통해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하루키보다 기형도가 한 수 위다.예민했던 청년시인 기형도는 책을 통해 영원을 꿈꾼다. 독서가 있었기에 ‘기적적’으로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텅 빈 희망 속에서’ 책은 영원에 이르는 길을 인간에게 알려준다.책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길을 본 시인은 이런 깨달음도 얻게 된다.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라는.고대의 왕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영원에 다가서고자 했다. 웅장한 궁궐을 짓고, 눈부신 보석으로 장식된 조각을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권력자도 영원히는 고사하고 100년도 살지 못했다.반면 시인은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꿈꾸어야 한다/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는 노래로 영원을 추구하는 또 다른 길을 일러 주고 있다.한 명 예외 없이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둘 중 어떤 방법으로 영원을 지향해야 할까. 왕의 방식? 아니면 시인의 방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30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시대, ‘불멸’을 떠올리다

불과 몇 개월 전. 이전엔 들어본 적 없는 생경한 이름의 바이러스 하나가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 ‘코로나19’라고 했다. 이후의 상황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듯하다.우리가 온전하고 완벽하며 변함없을 것이라 믿어왔던 ‘일상’이 파탄을 맞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만 바이러스 하나가 ‘지구의 지배자’라 스스로를 추켜세웠던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죽었고, 영국 총리 보리슨 존슨은 중환자실까지 실려 갔다가 한참 후에야 초췌한 모습으로 TV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탈리아는 국가 전체가 비상등이 켜진 폐차 직전 자가용 형국이다.점잖던 프랑스의 장관이 “왜 우리나라로 와야 할 마스크가 미국으로 간 것인가”라며 목소리 높여 분노했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유럽연합이 역사상 가장 큰 혼란에 빠졌다”고 한탄했다.유럽만이 아니다. ‘지구 위 경찰국가’를 자임하며 제 나라에 위협이 된다면 중동이건 아시아건 폭탄부터 쏟아붓고 보던 초강대국 미국의 자존심도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미 2만여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숨졌고,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한 병원 빈 방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신을 촬영한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한국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선진화된 사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던 유럽과 미국의 방역 체계는 생각보다 허술했고 형편없었다.‘코로나19’가 야기한 이번 사태 이후 세상을 움직여온 패러다임이 대폭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서양은 동양을 향해 더 이상 ‘의료기술의 우위’를 말하기가 어렵게 됐고, 비교적 간단했던 국가간 이동에도 유무형의 장벽이 생길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보통 사람들의 자유로운 세계여행이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더불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한 비대면 강의와 교육이 보편화 될 것이라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일부 국가에서 야생동물을 함부로 먹던 습관도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사회·문화의 많은 측면들이 ‘코로나19 사태’ 전과 달라질 것이다.▲모래 위에 세워진 성 같았던 인간의 일상서양과 동양이 매한가지다. 유럽과 미국,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중동과 아프리카가 다를 바 없다. 소소한 기쁨과 자그마한 웃음으로 행복감을 느끼곤 했던 인간의 일상은 철옹성이 아닌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20년 봄의 각성’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허방다리 위를 걷는 위태로움에 처한 이때. 우리들은 쉽고 허술하게 무너지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과 ‘불멸하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캄보디아의 작은 도시 시엠립. 도처에 흩어져있는 크메르(Khmer)의 고대 유적들은 여행자의 눈을 매혹한다. 앙코르와트, 앙코르톰, 타프롬….크메르 제국은 지금으로부터 1천100년 전 생겨난 동남아시아의 고대 왕조. 현재의 캄보디아 지역에서 번성했다. 중국은 이곳을 ‘진랍(眞臘)’이라 불렀고,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세력이 커졌을 땐 캄보디아는 물론 주변 태국 동북부와 라오스·베트남 일부까지 통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바로 이 왕조의 가장 유명한 유적이 한국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앙코르와트다. 힌두교와 불교 관련 건축물과 조각품을 원 없이 만날 수 있는 곳.크메르 사람들은 왕이 죽으면 섬기던 신(神)과 하나로 합쳐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앙코르와트를 포함한 시엠립의 사원들은 각기 다른 왕이 자신과 합일하게 될 신을 위해 축조한 것이다,이제까지 다섯 번에 걸쳐 앙코르와트를 찾았다. 부조(浮彫) 한 점, 한 점에서 크메르의 역사와 유구한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었다.앙코르와트의 길고 긴 회랑에선 태양을 가려주는 차양막을 펼친 커다란 코끼리에 올라 정복 전쟁을 지휘하는 크메르의 왕들과 힌두교의 요정 압사라(Apsaras)의 돋을새김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것들이 적어도 800년 전에 새긴 것이라는 사실은 언제 봐도 잘 믿기지 않는다. 너무나 또렷한 형상으로 어제 만든 듯 존재하는 부조. 크메르 사원 석벽에 새겨진 조각들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부연 없이도 알게 해주는 증거물 중 하나다.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앙코르와트의 복도에선 자연스레 ‘불멸’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면 오탁번(77) 시인의 절창 ‘너의 별에서’가 떠오르곤 했다.▲‘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겠지만...그것이 정신의 영역이건 육체적인 것이건 사람들은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덧없고 헛된 욕망일지라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무한히 존재하는 ‘불멸’을 지향해왔다. 사랑도 불멸의 영역이 되기를 기원했다.시인 역시 ‘무서운 광속으로 다가와서/나도 모르는 나의 생애를 불 밝혀 놓는’ 사랑에 놀라워한다. ‘흰 수염 가득한 턱을 고이고/생각에 잠기고 또 잠기지만’ 사랑의 실체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별이 내뿜는 사랑의 빛은/1초에 우주를 일흔 바퀴씩 돌면서/너의 전생에서부터 오늘 한강 물결까지/완전하게 발가벗기고 있다’는 걸. 그래서다. 인간은 영원히 사랑 안에서 살다가 죽고 싶다. 불멸과 포옹하고 싶은 욕망에 들뜬다.캄보디아 시엠립엔 할리우드 영화 ‘툼 레이더’의 촬영 장소로 유명한 또 하나의 사원이 있다. 타프롬이다.거기선 열대의 거대한 나무와 석조 건축물이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한 몸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백 년간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다가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은 형상.모래성처럼 허술한 인간의 일상, 그걸 무너뜨린 바이러스, 천 년을 변치 않은 앙코르와트의 조각들, 오랜 대립 끝에 돌과 나무가 하나의 몸으로 사랑과 불멸을 꿈꾸게 된 사원…. 연결고리가 분명치 않은 이것들을 떠올리는 봄날이 어지럽다. 곧 깨어날 꿈이었으면 좋겠다./사진제공 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16

‘큰 섬’에서 미래를 낙관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혹자는 “그린란드(Greenland·대서양과 북극해 사이에 위치한 섬)보다 큰 건 섬이 아니라 대륙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또 다른 어떤 이들은 “어쨌거나 크기와는 관계없이 바다 위에 떠 있으니 섬이지 뭐…”라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둘러싼 재밌는 설전이다.지구 위에서 6번째로 큰 국가지만 인구는 한국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오스트레일리아. 두어 해 전 캥거루와 거대한 붉은 사막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1주일쯤 머물렀다.경험한 바에 의하면 오스트레일리아는 땅덩어리만이 아닌 대부분의 것들이 컸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서라면 183cm에 87kg쯤 되는 기자가 작은 편이 아니다.근데, 브리즈번 시내와 선샤인 코스트에서 만난 거리 청소부와 식당 아저씨, 버스 운전기사는 모두 100kg이 훨씬 넘어 보였고 키 역시 보통의 한국인보다 한 뼘은 커보였다. 갑자기 어린애가 돼버린 듯한 기이한 기분으로 둘러본 골드코스트 해변의 규모 역시 혀를 내두를 정도로 광활했다.사우스포트에서 시작해 서퍼스 파라다이스, 벌리 헤즈, 쿨랑가타 등 4개 도시로 구성된 골드코스트의 해변은 족히 20리는 뻗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한쪽 끝에서 바라보면 반대편 끝이 가물가물 아득했다. 마치 살아서의 세상 차안(此岸)과 죽지 못하면 알 수 없는 피안(彼岸)의 거리처럼.그 해변에서 건장한 체격의 호주 사람들이 파도타기를 하거나, 헤엄을 치거나, 일광욕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바다와 접한 식당에서 보니 그 나라 사람들은 덩치만큼 먹는 양도 상당했다. 10대 소년 앞에 놓인 스테이크 크기가 한국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스테이크의 2배는 돼보였다. 우리 일행은 결국 그걸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크기’와 ‘여유로움’에서 압도적인 나라브리즈번 외곽에선 호주 집의 크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손만 뻗으면 바닷물이 닿을 거리에 지어진 고급 주택들 앞엔 아프리카나 중동의 독재자들까지 욕심낼 만한 잘빠진 요트가 줄줄이 정박돼 있었다. ‘1가구 1자동차’가 아닌 ‘1저택 1요트’의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지금이야 형편이 많이 달라졌지만, 국토는 넓고 인구는 적은 오스트레일리아는 20세기 한 때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손꼽혔다.빈부의 격차가 비교적 크지 않았고, 사회복지도 나쁘지 않았다. 제 나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이민자에게도 관대했다고 한다. 나눠 먹을 빵의 크기가 꽤 컸던 시절 이야기지만.오래 전 베트남 하롱베이 여행에서 부부와 아들 둘로 이뤄진 호주 가족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기계 수리공으로 25년쯤 일했다는 40대 중반의 호주인 아버지는 “내 집엔 테니스장과 수영장이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밀집돼 사는 한국에서라면 고졸 노동자가 그런 집을 가지기가 쉽지 않을 터.한국보다는 삶의 형편이 좀 더 좋아서였을까?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 대다수는 여유로움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버스에 오를 때도 앞서 탄 승객이 거스름돈을 받을 때까지 여유 있게 기다릴 줄 알았고, 버스기사 역시 탑승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거리에선 경보 선수인양 걸음을 빨리하는 이들을 보기 힘들었고, 자신이 주문한 음료나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안달하며 목소리 높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골드코스트 해변 야외 레스토랑에서 느릿느릿 여유롭게 점심을 즐기는 호주인들을 보며, 매번 급하게 숟가락을 놀려야 했던 한국에서의 점심시간이 떠올랐다.크고 여유로운 국가 호주에서 우리는 왜 ‘빨리빨리’라는 단어에만 방점을 찍은 채 강퍅한 표정으로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때 동시에 떠오른 게 김승희(68)의 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였다.▲조금은 여유롭게 미래를 낙관해야….세상과 인간을 향한 민감하고 예리한 촉수를 가진 김승희 시인은 한국 현대문학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중진 작가다. 그는 앞서 언급한 시에서 중의적 의미를 가진 ‘그래도’라는 단어를 재치 있게 사용한다.우리가 통상 말하는 ‘그래도’라는 단어는 ‘그렇다 하더라도’의 의미를 지녔다. 그런데, 김 시인은 ‘그래도’를 제주도나 울릉도와 같은 섬(島)의 의미로도 쓰고 있다.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시적 변용이고, 재기 발랄한 문학적 장치다.김승희에 의하자면 ‘가장 낮은 곳에/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섬 ‘그래도’엔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그 사람들은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골방에서 목을 매고/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하지만 어떤 고통과 수난에도 ‘ 타오르는 찬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아간다.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면 시의 마지막에선 메시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라는 섬에서/그래도 부둥켜안고/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는 위무의 메시지.무시무시한 바이러스의 횡포에 봄 같지 않은 봄이 길어진다. 다른 도시에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절.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인간을 외떨어진 섬처럼 서글프게 한다.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억지로라도 여유로움을 만들어 김승희 시인이 안내하는 미래를 낙관해야 하지 않을까? 삶이 지속되는 한 희망이 온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으므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09

방 안에 갇힌 스무 살 청춘들에게 건네는 위로

학생들의 일상 자체가 마비된 상황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방학 동안 얼굴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만나 반가운 인사 나눌 때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려왔지만, 4월이 왔음에도 온전한 개학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아직은 혼자서 모든 걸 해내는 게 서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둔 맞벌이 부모들은 마음 놓고 자식을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이다.조금 컸지만 중학생과 고등학생도 형편은 비슷하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아들, 딸과 신경전을 벌인다는 부모가 적지 않다.학원을 보내려고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쩐지 불안스럽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접촉으로 인한 감염’ 탓이다.학생만이 아니다. 교사들의 고충도 적지 않을 듯하다. 사람은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법. 익숙한 교단이 아닌 컴퓨터 모니터와 연결된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강의용 동영상’을 만들며 밤을 새는 교사와 교수가 많다는 뉴스가 들려온다.갑자기 등장해 한순간에 세계를 멈춰버린 강위력한 바이러스가 사람들 삶의 형식은 물론, 내용마저 바꾸고 있다.▲‘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불행한 젊은이들이러니저러니 해도 볕 좋고 꽃향기 가득한 이 빛나는 4월에 가장 불쌍해 보이는 건 스무 살 청춘들이다.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갓 대학에 들어가거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이들. 그들이 꼼짝없이 방 안에 갇힌 2020년 4월.한 세대 전 스무 살을 보낸 젊은이들은 어땠을까? 기자의 경험과 기억에 의하면 4월은 눈부신 달이었다. 따스한 바람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망울을 터뜨린 벚꽃. 그 아래서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거나, 버스를 타고 나간 교외에서 너무나 관능적인 빛깔의 복사꽃과 만나는 계절.마치 폭설처럼 시야를 가리던 연분홍 벚꽃 잎들. 그걸 배경으로 “우리네 젊은 날도 언젠가는 저렇듯 허무하게 지겠지”라는 너스레를 떨며 슬그머니 연인의 손을 잡던 20대 청춘들.2020년과 달리 20세기의 젊음은 고통스러웠기에 아름다울 수 있었다. 그랬다. 그런 역설과 반어가 통하던 시절이었다.답답하고 갑갑한 현실은 좋았던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그 호시절의 재료가 돼준 영화와 노래도 더불어 기억 속에서 불러오게 된다. 낭만이 거세된 4월을 살고 있는 지금의 스무 살 청춘들에겐 어떤 영화와 노래가 어울릴까? 주제넘지만 추천해 볼까. 먼저 영화 이야기다.▲빛나는 낭만을 다룬 영화 ‘4월 이야기’벚꽃이 눈처럼 시야를 가리는 도쿄 근교의 작은 도시 무사시노(武藏野).홋카이도 시골에서 그곳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 니레노 우즈키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당신은 빛나는 벚꽃보다 아름답습니다”라고 적힌 예쁜 플래카드다.일본에 대한 관심이 있는 관객들에게 ‘무사시노’는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다.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피터 캣(Peter Cat)이란 카페를 만들어 끈적이는 찰리 파커와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의 쿨 재즈를 밤낮없이 틀어대던 도시.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무라카미 류의 매력적인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무대가 된 도시.바로 이 무사시노에서 이와이 슌지는 “세상은 사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든다. ‘4월 이야기’다.카메라는 시종일관 첫사랑인 고등학교 선배를 잊지 못해 무사시노까지 와서 같은 학교에 입학한 니레노 우즈키를 쫓아다닌다.이와이 슌지의 렌즈 속에 담긴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도시를 뒤덮은 연분홍 벚꽃, 새내기들의 밝고 활기찬 웃음, 넓고 푸른 잔디밭, 거기에 스크린의 색감까지 은은한 황갈색이 감도는 낭만적인 톤이다.세상과 사람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보편적이다. 그건 한국과 일본이 다를 수 없다.최인호의 소설 ‘겨울 나그네’를 읽고는 자전거를 사고, 그 자전거에 부딪쳐줄 소녀를 찾아 교정을 누비던 스무 살 청년들. 그런 로맨스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임을 알게 되기까지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한 법.영화 ‘4월 이야기’는 단조롭고 심상하다. 근사한 남자 선배를 보기 위해 무사시노를 찾아온 예쁜 후배.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어색하고 서투르다. 차마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선배의 곁을 서성이기만 하는 여린 마음. 그리고, 마침내 흩뿌리는 봄비 아래서 이뤄지는 스무 살의 첫사랑.이 영화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란 아주 당연한 진리를 느릿느릿하며, 쉽고, 아름답게 우리 귀에 속삭여준다.그래서일까? 작위적인 벚꽃 날림의 연출도, 서툴게 보이는 조연들의 연기도, 여배우가 직접 연주했다는 초등학생 수준의 피아노 솜씨도 용서가 가능해진다.선과 악의 대립 구조도,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도, 그 흔한 악역 하나 등장하지 않는 밋밋한 영화 ‘4월 이야기’.그러나 상영 시간 내내 관객은 이와이 슌지 감독이 의도한 ‘사랑과 그로 인한 가슴 흔들림’에 동화된다.그래서다. 바이러스가 횡행하는 바깥을 피해 방 안에 갇혔지만, 사랑과 낭만을 꿈꿀 것이 분명한 세상 모든 스무 살에게 ‘4월 이야기’의 속삭임을 소개하고 싶다. 이런 것이다.“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이다. 그러니 네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 사랑을 배우고 익히고 행하라. 그것만 하기에도 인간의 삶은 짧다.”▲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면….벚꽃이 도시 전체를 핑크색으로 물들이는 경북 경주와 경남 진해는 물론, 꽃놀이 인파로 걷기조차 힘들었던 서울 여의도까지 “제발 찾아오지 말아주세요”라며 관광객을 마다하는 희귀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요즈음.마음으로나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봄과 벚꽃을 마주하려는 청춘들에게 시 한 편을 선물하려 한다.‘무겁고 불편한 오늘과/저당 잡힌 내일’을 잠시 잊고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바란다면 조용히 혼자서 읊조려 보시기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02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평화로움에 잠기고 싶지만

중국과 이란이 위기로 휘청거리더니, 이젠 미국과 이탈리아, 독일과 프랑스, 영국과 스페인까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로 인해 국가가 통째로 멈춰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거대도시 뉴욕과 런던 거리에선 오가는 차량을 볼 수 없고, 이탈리아 외곽 지역 노인들은 의료진을 찾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여름에 일본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던 올림픽은 전례 없이 연기가 진지하게 논의됐다.프랑스 대통령과 영국 총리는 연일 TV에 나와 “사람들 간의 접촉을 줄이고 집에 있어 달라”고 목소리 높여 호소한다. 미국과 유럽만이 아닌 중동도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다.한국 또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초토화 된 실정이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까지 “아사(餓死) 직전”이라는 호소를 정부에 보내고 있고, 최근엔 이웃과 친구들끼리의 다감한 커뮤니케이션도 눈에 띄게 줄었다. 특정 집단이나 지역에 대한 질타와 조롱도 비등한다.여기에 멀쩡하게 생겨서 더 경악스런 청년 한 명은 가장 악질적인 방식으로 미성년자들의 성을 착취해 신문과 방송을 뜨겁게 달궜다.서울 종로경찰서 앞에 얼굴을 드러낸 조주빈(25)은 스스로를 “악마”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너는 악마도 아니고 더러운 세균일 뿐”이라며 분노했다.▲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리운 풍경대체 2020년 봄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봄이 품에 안아 데리고 오는 희망과 꿈이라는 분홍빛 단어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들려오는 건 온통 짜증 섞인 불만과 안타까운 비명뿐.식구와 연인의 손을 잡고 벚꽃과 매화 흩날리는 강변에서 소박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환히 웃던 지난해 봄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 전체가 비극적으로 꾸며진 시뮬레이션 세트장 같다.불투명한 미래와 비루한 오늘은 자연스레 좋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어디에 ‘행복한 꿈’을 파는 가게가 있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한 후 아주 길고 긴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을 정도다. 올해 봄이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기자 하나만은 아닐 듯하다.떠올려보면 행복한 꿈같았던 과거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봄날 백일몽 같은 기억들.몇 해 전 라오스를 여행했을 때다.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밝은 미소로 타인을 대하는 그 나라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에 매료됐다.철없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시시때때로 조용한 웃음을 보여주던 라오스.낡은 버스에 올라 그 나라 남부에서 시작해 북부까지를 2주쯤 돌아다녔다. 당연지사 많은 이들을 만났다.시장에서 남편이 사준 중국산 청바지 하나에 감동해 눈물 흘리던 어린 신부, 외국인이 준 조그만 사탕 하나를 동생에게 양보하며 쑥스러워하던 초등학생, 자식을 11명이나 둔 마흔아홉 살 농부까지. 그들 모두는 빈한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행복해보였다.‘동남아시아의 젖줄’로 불리는 메콩강과 그 지류들. 흙빛으로 숨죽이며 수천 년을 흘러온 라오스의 강이 선물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저물 무렵 강 언덕에 드러누운 기자는 그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떠올렸다.▲희망과 꿈을 빌던 라오스 동승(童僧)처럼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이 상을 선정하는 기관인 스웨덴 한림원은 네루다의 작품을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운명과 희망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평했다.생후 2개월 때 어머니를 잃은 불행한 유년,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10대 시절, 눈앞에서 봐야했던 스페인 내전의 광기와 처참함, 정치적 지향으로 인한 오랜 망명 생활까지. 네루다의 삶은 희망과 꿈을 떠올리기 힘든 나날로 점철됐다. 그러나 시인은 끝끝내 인간의 당연한 권리인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그는 언제나 희망으로 건너가는 ‘꿈’을 노래했다. 때론 감미로운 목소리로, 때로는 거친 함성으로.‘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이어지는 전개는 결코 어둡지 않다. 이 시에선 유독 ‘그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게 ‘희망’과 ‘꿈’의 은유라는 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네루다는 ‘그녀’를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희망과 꿈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마지막 행처럼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 바치는 마지막 시라고 할지라도’ 가치 있는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시인만이 아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포악한 바이러스와 추악한 욕망에 눈먼 악마를 앞에 둔 이런 막막한 상황일수록 더더욱.그날, 강변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길. 소승불교 사원에서 조그만 손을 모아 합장하는 어린 라오스 승려들을 봤다. 그 동승들 또한 분명 희망과 꿈을 빌고 있었으리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26

붉은 태양 보며 희망의 노래 부를 날을 기다린다

저무는 태양이 소멸과 우울함이란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면, 솟아오는 붉은 해가 연출하는 일출은 희망과 새로움의 은유다.그래서다. 많은 사람들은 새해가 오면 바닷가로 몰려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꿈과 소망이 이뤄지기를 빌곤 한다.2020년이 시작된 지 70일 넘었지만 올해는 ‘희망’과 ‘다시 시작함’의 메타포인 일출이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기자만이 아닌 적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코로나19로 인한 비극적 사태’가 아직 안정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의 바이러스 감염 확진자는 차츰 줄어들고 있는 추세지만, 다른 지역에서 또 다른 ‘코로나19 폭탄’이 터지고 있는 형국이다.이번 주 중반엔 서울의 한 건물에서 90명 이상의 새로운 감염자가 나타났고, 다른 도시에서도 특정한 몇몇 공간에서 수십 명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가 확인되기도 했다.국가를 가리지 않고 창궐하는 바이러스의 위험성은 가까운 중국과 일본도 여전하고, 이로 인해 활발했던 두 나라와의 경제·문화적 교류도 자의 반 타의 반 거의 끊어진 상태다.항공업계와 여행업계는 직격탄을 맞아 휘청댄다. 상당수의 항공·여행업 종사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임금 삭감과 순환 근무, 장단기 휴직과 실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뉴스가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세계로 뻗어나가던 하늘길이 한 순간에 막혀버린 것이다.그뿐 아니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도 비상 상황에 들어섰고, 이란에선 정부 고위층 인사 여러 명이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사망한 이들도 적지 않다는 외신 보도가 들려온다. 이란은 장기간의 경제 제재와 봉쇄 탓에 진단 장비와 약품이 부족하니 앞으로가 더 문제다.설상가상 미국의 감염자 증가 속도 또한 가파르다. 최근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 등 최고위층 지도부가 한국인 입국 금지를 심각하게 논의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미국으로 오가는 길도 폐쇄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따스한 햇살이 ‘코로나19’를 태우는 상상을 하며…인간은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동물이다. 붉은 보석처럼 환하고 아름답게 밝아오는 일출의 아침을 보면서 소원을 말할 때도 가장 먼저 자기 자신과 관련된 일들을 떠올린다.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다른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대학 입학 시험과 승진 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원합니다’ 등등.개개의 인간이 지닌 희망과 소망의 범위는 지극히 협소하다. 그게 넓어진다 한들 겨우 가족 등의 아주 가까운 피붙이나 소수의 친구를 위한 것들에서 멈추기 십상이다. 하지만 누가 그걸 탓하랴. 너나없이 우리 대부분은 일상을 허위허위 살아가는 겁 많은 소시민일 뿐인데.9년 전쯤 이란을 여행했을 때다. 해변과 호숫가, 강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 경험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고대 도시 야즈드(Yazd)에서 처음으로 본 사막에서의 일출은 생경했고, 그랬기에 더 장엄했다. 야즈드는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의 피신처이기도 했던 곳. 이른바 수난과 고통을 어느 지역보다 많이 겪은 곳이다.그날이다. 어둡던 모래밭에 눈부신 햇살을 무한정 뿌리며 이글거리는 사막의 태양을 함께 맞이하던 독일 청년과 이란 성직자에게 농담처럼 물었다.“한국에선 사람들이 해를 보며 소원을 빌어. 이처럼 아름다운 일출을 봤으니 너희들도 소원 하나쯤 말해보지 그래.” 연이어 돌아온 두 사람의 대답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이란의 성직자는 “우리 아이들이 차별과 폭력 없는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독일에서 온 20대 초반 젊은이는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 사라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들려줬던 것.만약 그날 기자가 박두진(1916~1998)의 시집(詩集)을 들고 있었더라면 ‘해’라는 박 시인 최고의 절창을 낭송해줬을 게 분명하다.절망을 떨치고 희망으로 걸어가는 흥겹고도 단호한 행진곡 같은 시, 어떤 지독한 바이러스도 단번에 활활 태워버릴 에너지로 넘치는 시 말이다.▲꽃과 함께 나른한 봄을 즐길 시간이 올해도 오겠지‘만 사람의 손가락질은 심장으로 날아오는 독화살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저주가 그 저주받는 대상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걸 뒤집어 해석하면 ‘만 사람의 간절한 기원은 어떤 극악한 저주도 풀 수 있다’는 게 아닐지.거창한 소원이 아니면 어떠랴. 지금은 한국인 모두의 희망 섞인 소망이 하나로 모여도 좋을 시기다.그게 어느 바닷가이건 무슨 상관일까. 또한 거기에 몇 명이 모였다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그저 다들 똑같은 심정으로 이런 소망을 빌어보면 어떨까.“저 뜨거운 햇살에 지긋지긋하고 징그러운 바이러스가 녹아내리기를 바란다. 바로 그 자리에 분홍빛 진달래는 필 것이고, 우리는 지난해처럼 빛나는 꿈을 노래할 것이다.”이번 주말엔 마스크를 벗고 가까운 산길에서 깔깔대며 기자와 이웃들을 반길 봄꽃과 반갑게 악수하고 싶다. 아래는 ‘돗돔’을 희망으로 은유한 졸시다.돗돔을 기다리며수영하는 아이를 삼킨다는 거대한 은빛비늘/소문은 끈질기게 떠돌았다/누군가는 아름드리 참나무를 꺾어/해지는 방파제 끝에서 오랫동안 서성이고새까만 낯짝의 사내들이/닻을 올리고 먼 바다로 떠날 무렵/선착장마다 만삭의 아내들이 흐느꼈다/길잡이굿의 징소리로도 돌아오지 못할 사람들먼저 떠난 작은 섬의 노인은 낡은 액자 속에서/아직도 귀때기 파란 스무 살인데/부랴부랴 굵은 낚시를 건사하는/남편의 손놀림은 아내를 무시한 채 등을 돌렸다/주춤대던 아이의 울먹거림은 기어코 울음이 되고허나, 공포와 마주 서지 않는 삶이란 여기 없으니/기어코 떨쳐야할 두려움 너머로/보라, 저기 울컥대는 파도 위 날랜 달음질로/돗돔이 돌아온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 구창웅

2020-03-12

어떤 어둠 속에서도 봄은 오고 꽃은 핀다

이처럼 참담하고 막막한 봄이 또 있었던가? 오십이면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나이다. 그 50년 세월 동안 2020년 봄 같은 건 겪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개인의 문제가 아닌 느닷없이 이 땅, 아니 인간이 사는 지구 전체에 밀어닥친 ‘코로나19’라는 병원균 탓이다. 초대받지 않은 공포스럽고 몰인정한 바이러스.거리엔 우울한 눈빛 아래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멀찌감치 서로를 피해 다니고, 평소 점심과 저녁을 먹던 식당엔 손님이 없다.가게 주인들은 “전기세도 못 낼 지경”이라고 한다. 택시기사들 역시 “이대로라면 병으로 죽는 게 아니라 굶어서 죽을 판”이라는 하소연을 하고. 매서운 추위 뒤에 다가올 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몇 주 사이에 한국 대부분의 도시가 디스토피아(Dystopia)를 다룬 SF영화 속 장면처럼 어둡고 눅눅해졌다. 앞으로도 내내 이 ‘수난의 겨울’이 끝나지 않는 건 아닐까 의심하는 이들까지 생겼다. 비관과 불안이 사회를 야금야금 파먹고 있다.확진 받은 환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대구·경북만이 아니다. 친구들 다수가 생활하는 서울도, 친인척이 사는 부산·경남도, 지인들 몇몇이 삶의 터전으로 옮겨간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걱정 속을 헤맨다.이 시기면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 아래로 사람들이 몰리고, 곧 난분분 꽃잎을 휘날릴 벚나무의 개화를 기다리는 게 당연한 시절을 살아왔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런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나 그 봄이 봄 같지 않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일상은 무너지고, 웃음은 사라졌으며, 어울림의 즐거움은 자취를 감췄다. 꽃과 꽃을 피우는 나무에 대한 찬사와 동경이 사라진 오늘. 자꾸 청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영화 ‘희생’(The Sacrifice)을 보던 날 밤이 떠오르고19세기를 대표하는 표상주의 작가 로트레아몽(1846~1870)이 쓴 시 중에 ‘나무’라는 게 있다. 너무나 짧아서 역설적으로 길고 강렬한 울림을 주는 작품. 단 한 줄의 노래다.‘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겨우 하나를 알면서 열을 아는 것처럼 목소리 높이던 문학청년들을 한없는 자기반성 속으로 이끌었던 시. 그들에게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나무가 왜 위대한가?” 많은 이들이 대답을 찾고자 골몰했다.기자 역시 궁금했다. 그때 만난 영화가 러시아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희생’이었다. 거기엔 고사목(枯死木)에서 꽃이 필 것임을 믿는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한다. 아들은 언어 상실증에 걸려있다.“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러나, 너는 침묵하는구나. 마치 말 없는 철갑상어와 같이…”라는 아버지의 독백으로 시작해 마침내 입을 연 아들의 “태초에 말이 있었다죠. 그런데 그 말이 무엇이었을까요?”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영화.여기서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불어오는 바람과 떠가는 구름, 흐릿한 햇살과 강물의 흐름까지를 미세하게 포착해 영상에 담아낸다.특히 말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부자(父子)의 모습은 감동과 눈물을 부른다.영화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까운 롱 테이크 화면, 오차 하나 없는 밀도 높은 카메라의 섬세한 움직임, 시나리오 속에 내포된 강렬한 메시지는 ‘희생’을 빼어난 문학작품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서 맛본 좌절감으로 인해 삶에서 희망을 찾기 힘들었던 20세기 말의 청년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그들을 위로한 건 이성부(1942~2012)였다. 아니, 그의 시 ‘봄’이었다.▲그래도 놓치지 말아야 할 ‘희망’과 ‘생명’을 향한 경외영화 ‘희생’의 마지막 시퀀스는 이렇다. 언어를 잃었던 아이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죽은 나무에 물을 주던 아버지를 떠올린다.어떤 극악한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았던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 메말랐던 가지 가득 푸른 잎사귀를 단 나무 아래 평화롭게 누워있는 나른한 꿈. 너와 내가 잊었지만 엄연한 청사진. 포기할 수 없는 미래의 꿈.맞다. 그랬다. 곧 멸망할 것이라던 위기의 세상과 아들을 구한 건 죽은 나무의 생명조차도 구원과 부활의 대상으로 믿었던 아버지의 꿈이었다.절망과 비탄, 눈물과 원망을 반복하는 생일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 이것이 인류를 오늘의 삶으로 이끌어 왔다. 누가 그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겠는가?그래서다. 타르코프스키가 영상을 통해 전한 것과 거의 같은 메시지를 시인 이성부의 문장에서도 읽는다.‘꽃’과 ‘나무’가 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이성부는 바이러스 횡행하는 2020년 3월을 마치 예언이나 한 듯 시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고. 그리고 연이어 그 고통과 수난을 이렇게 진단한다. 어느 순간 인간이 살아간다는 건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라고.하지만 시는 ‘절망의 진단’만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망을 향해 나아간다. 이런 대목이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이전을 살아온 문인들은 말했다.“시는 추락하는 것의 슬픔이 아닌, 추락을 거부하는 이들의 전망을 노래해야 한다”고.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올해는 봄이 없을 듯했다. 습기 가득한 침침한 거리,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간을 견디는 시민들, 갑갑한 마스크 속에서 말을 잃은 이들의 두려움, 격리된 적지 않은 숫자의 ‘코로나19’ 환자들을 보며 정부조차 믿기 힘들어진 연약해진 마음.그러나, 사람이 ‘희망’과 ‘생명’에 대한 외경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앞서 언급한 모든 비극적 인식보다 더 위험할 터. 그래서다. 아직은 이런 말을 하고 싶다.“이성부의 시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읽고 보며 얻은 깨달음을 버리지 않길 바란다. 아무리 짙은 어둠 속에서도 꽃은 피고, 빛나는 봄은 온다. 그 믿음이 우리를 살아있게 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05

무신론자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날이 있으니…

젊은 시절. 적지 않은 숫자의 무신론자 청년들을 매혹시킨 이야기를 들었다. 아르헨티나 출신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의 에피소드다.쿠바 혁명이 성공적으로 완수된 후 아프리카 콩고 등을 떠돌던 게바라는 죽기 몇 해 전부터 볼리비아에서 소수의 농민들과 함께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전체를 해방시키려던 ‘이상주의자’ 게바라의 꿈은 동료의 밀고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나버린다.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된 게바라를 미국 CIA에서 파견된 심문관이 조사한다. 둘 사이에선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심문관: “당신의 행위는 신(神)이 만든 질서에 반하는 것이다.”게바라: “신?”심문관: “그렇다. 당신도 신을 믿는가?”게바라: “아니. 난 인간만을 믿는다.”이후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게바라는 총살당했고, 이후 수십 년간 시체조차 고향인 아르헨티나로도, 그가 사랑한 나라 쿠바로도 돌아가지 못했다.기자는 신을 믿지 않는다. 무신론자다. 게바라처럼 장대하고 염결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저 자신의 기준으로 설정한 합리와 이성의 바깥에 신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을 믿는 사람들을 경원하거나 조롱해본 적은 없다. 세상과 사물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아니, 오히려 진실한 마음과 겸허한 태도로 신을 섬기는 이들에게 ‘무언가 가슴 찡한’ 감동 비슷한 걸 받은 적도 있다.▲방콕의 ‘왓 아룬’을 앞에 두고 본 광경1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태국의 수도 방콕을 몇 차례 오갔다. 거긴 일 년 내내 무더위에 혀를 빼물게 되는 곳이다. 용광로 옆에 서있는 듯한 괴로움을 떨치려 강 위를 시원스레 달리는 수상버스에 올랐던 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멀리 보이는 탑을 향해 고개 숙이는 한 무리의 태국 사람들을 목도했다. 왓 아룬(Wat Arun·새벽사원)을 지날 때였다.수상버스가 오르내리는 차오프라야강(江) 한편에 자리한 이 사원의 늙은 나무들은 태국 아유타야 왕조의 번성과 멸망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게다가 사원 가운데 우뚝 선 높이 80m의 불탑은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고 있어 태국인들이 신령스럽게 떠받든다.바로 그 탑을 향해 공손히 머리 조아리며 무언가를 염원하는 사람들. 그 모습이 어찌나 경건해 보였던지 술에 취해 떠들던 외국인 관광객들 모두가 입을 다물 정도였다. 기자 또한 자기 외의 어떤 존재에게 희망과 꿈을 비는 광경을 오랫동안 숙연하게 바라봤다.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신의 존재를 신뢰하며 숭배하는 사람들의 합장(合掌)을 진지하게 지켜본 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궁금했다. 저들이 어떤 걸 기원하고, 무얼 소망하고 있는지가. 그러나 도저히 알 수 없는 일. 다만 중학교 시절 읽었던 시 한 편이 맥락 없이 떠올랐을 뿐이다. 김종길(1926~2017) 시인의 ‘성탄제’였다.▲‘앙코르 와트’는 간절한 바람이 흐르는 공간신의 존재는 ‘도저한 자기희생’과 타자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성탄제’에서 보여지는 아버지에게선 ‘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추운 겨울날 ‘눈 속을’ 헤쳐 아픈 아이를 위해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오는 가난한 아비.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자식에겐 그가 신처럼 보였을 게 분명하다.절대자에게 기대고 싶은 건 어린아이만이 아닐 터. 어른들 역시 그런 마음을 숨기고 살 뿐이다. 그래서다. 김종길은 시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한다.“아버지(신 혹은, 절대자)가 눈 속에서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고. 여기서 ‘산수유’란 분명 뜨거운 위로나 크나큰 위안의 은유일 터. 태국 이상으로 신을 믿는 이들이 많은 캄보디아에서도 저마다의 간절한 바람을 손 모아 비는 사람을 여럿 볼 수 있었다. ‘크메르 왕들의 도시’로 불리는 시엠립 앙코르 와트(Angkor Wat)에서였다.1천 년 전 크메르인들은 왕과 귀족이 죽으면 섬겼던 신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그런 이유로 다수의 왕들이 사후(死後) 자기와 합쳐질 신의 사원을 경쟁하듯 축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앙코르 유적군(遺蹟群)’이다.힌두교와 불교, 10세기 전 왕과 신화 속 여신의 형상 수천수만 개가 곳곳에 산재한 거기서 보았다. 석상 앞에서 무언가를 웅얼거리며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기도하는 캄보디아인들을.대체 인간에게 신이란, 신에게 인간이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이고 존재일까? 유신론자들에겐 정말 신의 실체가 감지될까? 신은 어떤 공간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낯선 국가 사원 앞에 선 무신론자의 궁금증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신이 보고 싶고, 신을 느끼고 싶었다.2020년 2월. 절대자에게 기대 무언가를 빌고 싶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대구와 경상북도, 아니 한국 전체가 ‘코로나 19’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의 습격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요즈음. 조금 과장하면 도시들 대부분이 말벌집을 건드려 놓은 것처럼 불안하고 위태롭다. 누구라도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이처럼 흉흉한 시절임에도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의 주인이 제 몫으로 사놓은 마스크 중 2개를 꺼내 흔쾌하게 내밀었다. 마스크 구입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 텐데도.“이런 때일수록 뭐든 나눠야죠.” 이 말을 전하며 쓸쓸하게 웃는 그에게서 신의 그림자를 느꼈다고 하면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할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 구창웅

2020-02-27

눈 쌓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걷다가…

중년 이상의 한국인들이 ‘러시아’라고 발음하면 연이어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들이 있다. 대부분 정치적인 것들이다.1917년 영국 망명에서 돌아와 볼셰비키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 ‘당의 무오류성’을 설파한 스탈린,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연이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보리스 옐친의 보드카 폭음, 그리고 최근 ‘21세기의 차르(제정시대의 황제)’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권력욕까지.1980~90년대 한국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이들은 러시아 혁명 역사와 그 나라 정치 지형의 변화를 원하건, 원치 않건 듣고 보며 살았다.비단 ‘이상적 사회주의’를 꿈꾸던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 해도. 그때부터 우리에게 러시아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였다.1990년대 초반. 밧줄에 묶인 레닌의 동상이 거리로 끌어내려지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안타까워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환호했다.‘어째서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은 100년도 안 돼 실패로 막을 내린 것인가’를 탐구하러 러시아로 유학을 떠난 이들도 있었고, ‘그것 봐라. 이데올로기는 절대로 개별 인간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며 소련 연방의 몰락을 당연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20대 청춘들 대부분은 더 이상 ‘러시아 혁명사’를 읽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난 시절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이름은 고차원의 방정식처럼 낯설다. 이런 세태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구세대가 지극한 정치적 관심으로 러시아를 바라봤다면, 신세대는 ‘여행지로서의 러시아’ 혹은 ‘이국적 매력의 러시아’로 관심의 초점을 돌렸다.그렇다면 이제 막 50대에 들어선 기자는 어떨까? 러시아에 관해서라면 구세대보다는 신세대의 감성에 가깝다는 게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러시아 여행’과 ‘러시아 문화’가 일상이 된 시대를 살며여행을 하다보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자연스레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이 반복되다보면 사람들의 외형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나라별 특징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게 흥미롭고 신기하다.기자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많은 수의 러시아인은 ‘근사한 하드웨어’를 갖췄다. 키는 크고, 골격은 단단하며, 팔과 다리는 시원스럽게 길다.푸른 눈동자와 곱슬거리는 금발의 러시아 여성은 아시아와 유럽 어느 여행지에서도 돌올하게 눈에 띈다.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는 시니컬한 슬라브족 여성이 매력적이라 느끼는 건 비단 한국인들만이 아니었다.몇 해 전 로마의 조그만 호텔에서 함께 묵은 스페인 대학생도, 프랑스 은행원도, 아르헨티나 전기기술자도 “슬라브 여자, 정말 예쁘지”라고 입을 모았다.지난해 말 다녀온 러시아 극동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거기서 러시아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여권 검사와 입국 수속을 돕기 위해 ‘포항 발 블라디보스토크 행 크루즈’에 오른 러시아 출입국관리소 직원들 중 절반쯤은 여성이었다.검은 코트에 털모자를 쓰고 발 맞춰 걸어 다니는 그녀들에게 승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마치 일류 모델들의 패션쇼 같았다.그 광경을 보며 곧 배에서 내려 여행하게 될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던 건 비단 기자뿐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세기와 달리 21세기 한국인의 관심은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정치가 아닌 ‘러시아 여행’과 ‘러시아 문화·예술’이 됐다.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순간 떠오른 시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백석(1912~1996)의 사랑 노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슬라브 여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가진 연인과 눈 덮인 러시아와 가까운 북관(北關)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낯선 도시에서 떠올린 젊은 날의 첫사랑블라디보스토크는 문학청년들에겐 ‘문장강화’를 쓴 소설가 이태준(1905~?)이 네 살 꼬마였을 때 아버지를 잃은 곳으로 기억되는 도시.새파랗게 젊었을 어머니와 함께 창밖으로 거센 눈보라 치는 차가운 방에서 부친의 시체를 바라보며 통곡했을 어린 이태준을 떠올리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일제강점기엔 이태준의 아버지 외에도 적지 않은 ‘조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저마다의 이유로 살던 곳을 떠나 간난신고의 삶을 이어가던 슬픔과 눈물의 공간이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였다.하지만 그건 이미 100년 전 이야기. 지금의 관광객들은 블라디보스토크라 하면 낭만적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점 혹은, 먹음직스런 킹크랩과 러시아식 꼬치구이 샤슬릭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중국, 북한과 인접했기에 지난 세기엔 해삼위(海參5D34)라고도 불렸던 그곳에서 꼬박 하루를 여행자로 지냈다.눈 쌓인 길 위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아르바트 거리와 해양공원, 독수리 전망대와 러시아 정교회 성당, 붉은 지붕이 예쁜 토카렙스키 등대를 돌아봤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갖가지 형태의 동상들은 흩뿌리는 진눈깨비에 젖어 있었다.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걷던 곳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낭만이 거세된 중년사내의 우울 또는 서러움이었을 터.그걸 위로해준 건 조그만 공원에서 만난 러시아 사람들이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꽁꽁 언 광장에서 매력적인 노래와 춤을 보여주던 그들은 인종과 국적이 다른 이방인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옆에 선 러시아 여자의 푸른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다웠다.그때였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구가 다시 마음에 새겨졌고, 흐릿하게 남아 있던 스무 살 첫사랑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잊고 살았던 청춘 시절의 고향 같아졌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 류태규

2020-02-20

거대한 황제의 동상 앞에서 떠올린 인간 존재의 비루함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다. 나라 인구의 1/3이 그 도시에 산다. 20세기 초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 연방은 국경을 맞댄 몽골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경제적 지배까지 면밀하게 계획했다.소련에서 생산된 석탄이 울란바토르로 대량 유입됐고, 몽골은 아직까지 그때 만들어진 난방 시스템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 1~2월 울란바토르의 기온은 영하 20℃를 밑돈다. 숨을 들이쉬면 코로 들어가는 공기 중 습기가 얼어붙어 콧속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의 추위다. 직접 느껴보면? 끔찍하고도 재밌다.독한 술 보드카와 달군 돌에 구운 양고기만으로는 달랠 수 없는 차가움.그래서다. 몽골을 여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탄 연기 가득한 갑갑한 공간 울란바토르를 빠져나와 초원을 달리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기자 역시 그러했다.도심 한복판에서 겨우 1시간 남짓 차를 타고 막막한 초원 위를 내달렸을까? 함께 한 일행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저게 뭐야?”야트막한 산과 기암괴석, 향기로운 들꽃이 아름다운 몽골 테렐지 국립공원(Gorkhi-Terelj National Park)엔 인공적으로 만든 조형물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곳에 아파트 20층 높이는 족히 될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동상이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칭기즈칸(1162~1227)이었다. 아니 칭기즈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었다.높이 40m, 무게 250t의 어마어마한 크기. 그 앞에선 입을 딱 벌리고 놀라는 것 외에는 별로 할 게 없었다.▲장쾌한 왕의 삶 앞에 바쳐진 거대한 동상칭기즈칸이 황금 채찍을 들고 말에 오른 모습을 재현한 기마상(騎馬像)은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해 지구 위에 존재하는 동상 중 가장 거대하다고 알려져 있다.사실 칭기즈칸은 제 나라에선 ‘신(神)’으로 추앙받는다. 죽은 지 800년이 가깝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칭기즈칸의 시대처럼 넓은 영토와 강한 국력을 가져보지 못한 몽골 사람들은 ‘좋았던 그 옛날’을 빛나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칭기즈’는 위대한, ‘칸’은 황제로 번역되니 그 이름에서부터 존경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몽골인들은 말한다. “칭기즈칸이 없었다면 누가 힘없고 인구도 적은 우리나라를 제대로 기억하겠는가?”그랬다. 13세기에 주위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해 거대한 제국의 기틀을 닦은 칭기즈칸은 비교적 합리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고유의 문자까지 만들었다.그의 손자 쿠빌라이칸(1215~1294)은 할아버지가 닦아놓은 길 위를 종횡무진 달려 더 넓은 땅을 몽골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구 면적의 30%에 해당했던 원나라의 영토. 그때까지 어떤 국가도, 어떤 왕도 가져보지 못한 방대한 넓이였다.겨우 수십 마리의 양이나 키우며, 물과 가축의 먹이를 찾아 거친 벌판을 헤매던 오합지졸 같은 사람들을 모으고 통합해 ‘잘난 체 하는’ 유럽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동양의 황제.물론 당시 원나라 기병대에게 짓밟힌 아시아와 중동, 유럽 일부 국가에선 ‘잔혹한 정복자’로 칭기즈칸을 폄훼하기도 한다.인간에 대한 평가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게 세상사 이치. 칭기즈칸 역시 몽골 사람들에겐 영웅이지만, 정복지의 국민들에겐 ‘무서운 악당’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법이다.몽골인들의 칭기즈칸 사랑은 유별나게 느껴질 정도다. 랜드마크가 될 만한 건물과 광장의 상당수에 ‘칭기즈’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뿐인가. 몽골에서 가장 비싼 보드카의 명칭도 ‘칭기즈칸’이다.그러니 ‘장쾌한 삶’을 살았던 자신들의 왕을 추앙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조형물을 만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기자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황제 동상 앞에서 ‘작고 사소한’ 절망과 슬픔을 노래한 시인 김수영(1921~1968)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떠올리고 있었다. 몽골 초원의 보잘것없는 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거대함’과 ‘사소함’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들김수영은 민감한 문학적 촉수를 통해 20세기에 살면서 21세기를 예언한 작가다. 그는 그것이 권력이건 자본이건 ‘거대한’ 힘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화풀이나 해대는 ‘사소한’ 소시민의 모습을 아프게 그려냈다. 이미 반세기 전에.‘왕궁의 음탕’이 아닌 가진 것 없는 허름한 ‘설렁탕집 주인’에게, ‘구청 직원’이 아닌 만만한 ‘야경꾼’에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며 욱대기는 김수영의 작품 속 인물은 2020년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한 달 내내 말을 타고 휘몰아쳐 달려도 다 돌아볼 수 없는 ‘광대한 영토’를 욕망했던 칭기즈칸, 이와는 반대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라고 노래하며 ‘사소한 서러움’을 속을 살았던 김수영.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답변을 내놓기가 몹시 어렵다. 본디 인간이란 거대함과 사소함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가로놓여있다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부산에 포로수용소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너어스들 옆에서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 구창웅

2020-02-13

슬플지라도 ‘겨울 제주도’가 그립다

혼자서, 또는 졸업을 앞둔 학생 때 단체여행으로, 혹은 지난 시절 연인과 함께 제주도를 가곤 했다. 이래저래 따져보니 ‘제주 여행’이 10여 차례가 넘는다.어느 곳을 가도 지척에 짙푸른 바다의 낭만이 있고, 싱싱한 해산물과 흑돼지 고기가 맛있는 섬.봄과 여름에 즐기는 제주도 여행은 물론 좋다. 그러나 ‘겨울 제주’의 매력도 만만찮다. 성산포나 우도에서 차갑게 출렁이는 푸른 물결을 보며 제주의 근현대사를 떠올려보는 건 쓸쓸하고 아프지만 분명 의미 있는 일일 터.몇 해 전이다. 제주에서 몇 년을 살다가 서울로 돌아간 소설가 A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제주도는 국수도 맛있어요. 멸치로 우려낸 국물 맛이 그만이죠. 작업실 아래에 있는 국수 가게를 1년 넘게 드나들었지요.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주인장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는 내 말을 듣고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대꾸가 없더라고요. 서운했지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4.3항쟁에서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아직도 이방인에 대해 저처럼 배타적일까라는 생각에 슬퍼졌어요.”▲제주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시와 소설들1948년 4월 유채꽃 만발하던 때 시작된 제주 사람들의 통곡은 21세기가 돼서야 겨우 위로받을 수 있었다. 국가 차원의 사과와 관련 특별법 제정이 추진된 것.갑작스레 닥쳐온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려 꽁꽁 얼어붙은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간 이들, 줄줄이 묶인 채 폭포 아래로 던져진 이들, 몽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이들. 당시 제주도민의 15%가 죽었다. 지금도 제주도 작은 마을엔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다. 이성이 상실된 광기의 시대였다.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살해된 이들 중 ‘폭도’로 불릴만한 인물은 이덕구와 김운민, 박남해와 김병남 등 무장 게릴라 400~5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3만여 명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억장 무너지는 억울한 죽음이었다.오래전 ‘문학인 평화기원제’ 취재를 위해 제주도를 찾았던 날. 여든에 가까운 할머니 한 명을 만났다.4.3항쟁 때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는 그녀는 행사에 참석한 작가들의 손을 잡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엄마와 오빠까지 다 죽고 저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제발 다시는 이처럼 억울한 일이 없도록 도와주세요”라며 울먹였다. 사실 문학은 4.3항쟁의 진실이 알려지는데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시인 이산하의 ‘한라산’ 등이 대표적이다. 두 작품이 역사적 사실로 직격하고 있다면, 원로 시인 이생진(91)은 우회적이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제주의 서러움과 우울을 노래하고 있다.2년 전 ‘나 홀로 제주여행’을 떠났다. 20대 시절 여자 친구와 추억을 쌓았던 성산포에서 우도를 바라보며 기자는 이생진의 애끓는 시를 기억해냈다.▲풍광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섬으로 남기를타지에서 온 손님을 마냥 살갑게만 대하지 못하는 국숫집 주인, 부모와 형제를 잃고 캄캄한 고통의 터널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 검은 바위 위에서 잡아온 해삼과 멍게를 파는 거친 손등의 해녀들, 아무 것도 모르고 노란 병아리처럼 종종거리며 웃는 제주도의 아이들….수난의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성산포의 바다가 빛나는 보석이 아닌 지울 수 없는 ‘푸른 멍’으로 느껴지는 정도가 고통의 공유 방식일 뿐.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생진 역시 ‘빈 자리’라는 시어를 통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과 공허함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고난의 메타포인 ‘파도’와 타의에 의한 고립을 지칭하는 ‘고독’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 것 또한 제주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생진의 시는 끝없는 절망의 되풀이는 아니다. 행간 곳곳에서 읽히는 위로와 위안의 목소리 때문이다.‘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살아서 그리웠던 사람/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후략)’‘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마지막 대목은 죽음이 아닌 부활의 노래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리밭에도, 섬 꼭대기에도, 심지어 짚신 한 짝에서도 제주의 바람 냄새가 느껴지는 시.다시 ‘겨울 제주’를 가게 된다면 이번엔 성산포의 풍광이 아닌 성산포 사람, 아니 제주도 사람들의 향기에 취해봐야겠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어떤 풍경보다 아름답다./사진제공 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30

그리운 고향, 무엇이 우리를 위로할까?

인간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자신이 첫울음을 터뜨린 잊을 수 없는 땅, 단순히 말과 글만으로는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는 이상향, 끝끝내 돌아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 곳….나이를 먹을수록 그렇다. 입술을 오므려 “고향”이라고 조용히 발음해 볼 때면 쓸쓸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 밥 짓는 냄새 풍겨오던 어두운 부엌, 벌거숭이 어린 친구들과 달려가던 흙길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림자 같은 궁핍보다는 빛나는 햇살의 기억으로.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한국 사람이나 외국인이나 유사한 듯하다. 다음 주면 바로 그 고향을 찾아가는 행렬이 도로마다 장사진을 이룰 것이다. 우리나라도, 중국도, 베트남도. 유럽과 미국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부모 사는 고향을 방문할 때처럼.기자가 아직 젊었던 30대 중반. 이와 유사한 풍경을 저 멀리 ‘타지마할’과 ‘바라나시’의 땅 인도에서도 본 적이 있다. 아래는 그때의 에피소드다.▲‘고향’ 찾는 인도인들 때문에 구할 수 없었던 버스표석양의 아름다움이 심장을 뒤흔드는 인도 서부의 해변 여행을 마치고 이슬람과 힌두 유적이 곳곳에 산재한 흥미로운 내륙 도시 함피로 가기로 결정한 날.느지막이 인도식 카레라이스와 삶은 달걀로 아침을 먹고 함피로 떠나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을 향했다.그런데 이건 뭔가? 버스표가 없단다. 아니, 함피행 버스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무슨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여행자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놀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떠도는 나라가 인도라지만. 듣고 보니 갑자기 버스가 사라진 사연은 이랬다.요 며칠 사이 함피 인근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이 대거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 갑자기 그 노선의 버스만을 증차하기가 사정상 어려워 하루나 이틀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승차가 힘들다는 것.터미널 직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이런 궁여지책을 알려줬다. “사설 여행사 버스표는 있을 테니, 더 늦지 않게 근처 여행사로 가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조언에 따라 근처 여행사 사무실을 서너 군데나 돌아다녔다.하지만, 거기서도 “지금은 당신이 왕이라 해도 함피로 떠나는 버스표를 구하기 힘들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익숙지 않은 사태에 난감하고 화가 났다. ‘왜 하필 내가 버스 티켓이 필요할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라는 혼잣말로 분을 삭이며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차가운 맥주를 몇 잔이고 거푸 들이켰다.그때였다. 할머니-어머니-딸로 보이는 인도 여자들이 눈에 들어온 것은.함피가 고향이라는 그들은 2년 만에 이제나저제나 눈이 빠지도록 피붙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할머니는 여동생을, 어머니는 오빠를, 딸은 또래의 사촌들과 만날 생각에 마음이 들떠 2~3시간 후에나 도착할 버스를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선량해 보이는 조모와 모녀, 그 다정한 3대만이 아니었다. 많은 인도인들이 몇 시간의 지겨운 기다림에도 자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로 간다는 설렘에 세상 누구보다 환하게 웃는 낯으로 터미널 주위를 서성거리는 모습이 그제서야 제대로 보였다.다른 어딘가에서도 본 듯한 낯설고도, 낯익은 풍경에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 정지용(1902~1950)의 목가적인 시 ‘향수’가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모든 사람이 슬픔이 아닌 기쁨을 안고 귀향하길정지용은 타고난 시적 감수성에 일찌감치 공부한 인문학적 근대 지식까지가 더해져 일제강점기 ‘조선의 시왕(詩王)’으로 불렸던 천재 문사(文士)였다. 20세기 초반 한국에선 드물게 모던함으로 무장한 세련된 시인.당대의 문학평론가들은 “이미지의 새로움은 물론이고, 절제된 시어(詩語)의 사용으로 조선 문단의 또 다른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는 최상급의 찬사를 정 시인에 바치곤 했다. 감히 누구도 그런 평가에 “아니다”라고 나서며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런 정지용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일자무식의 농부나 날품팔이 일꾼과 다르지 않았다.시의 제목처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아련한 ‘향수(鄕愁·고향을 기리며 시름함)’를 행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커다란 얼룩소 곁에서 뛰놀던 철없던 유년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언제나 그리운 아버지가 힘겨운 농사일에 가끔은 깜박깜박 졸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동네의 어떤 여자아이보다 머리칼 색깔이 새까맣고 고왔던 어린 누이가 맨발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곤궁한 살림을 이어가던 가난한 지붕 밑이지만, 어떤 부잣집보다 화목했던 식구들이 살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이처럼 자신이 태어난 곳을 ‘낙원’으로 생각하며 아프게 그리워했던 정지용은 한국전쟁 와중에 동료 문인 김기림·박영희 등과 함께 형무소에 수감됐고, 이후 납북돼 다시는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시인은 비극적 한국 현대사에 고향을 뺏겼다.한 주 후면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는 설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사람들만이 아닌 중국인, 베트남인, 인도인도 제 생명의 뿌리가 잉태된 땅을 찾아 연어를 흉내내 거꾸로 헤엄쳐 오를 터.이 ‘고향 회귀(回歸)’가 눈물겨움이 아닌 웃음과 반가움만으로 가득하기를 미리 빌어본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16

동해를 따라 ‘나의 국토’를 걷는 즐거움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사실에 근거한 빤한 이야기다. 그러나, 바다 곁에 산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낭만적인 일. 그래서다. 이 땅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바다’와 관련된 추억 하나쯤 없을 수가 없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10대 후반엔 남쪽 바닷가에서 서툰 연애를 하기 바빴다. 거제와 남해, 해운대 해수욕장과 광안리 해수욕장을 시간이 날 때마다 갔었고, 또래 여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준다는 핑계를 대며 해변에서 아주 멀리 튜브를 밀어버리곤 했다. 겁을 먹은 걔들이 안겨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며.20대엔 다니던 학교와 지척인 서해를 자주 찾았다. 갯벌이 끝도 없이 펼쳐진 그 바다엔 조개와 낙지, 새우와 젓갈 등이 넘쳐났고 그것들을 안주 삼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다소 거칠게 보이더라도 20세기 후반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겐 그런 게 보편이었다.전라북도 부안에 자리한 변산반도. 바닷가를 걷다보면 ‘채석강’이라 이름 붙인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1990년대 초반엔 “연인이 채석강엘 함께 가면 한 달 안에 헤어지게 된다”는 끔찍한(?) 풍문이 돌았다.그럼에도 일부러 여자 친구의 손목을 끌고 거길 가기도 했다. ‘세상 무엇도 견고한 우리 사랑을 깨뜨릴 수 없다’는 걸 증명하려고. 무모했기에 아름다웠던 시절.더 나이가 들어서는 해가 뜨는 동쪽 바닷가를 좋아하게 됐다. 동해는 원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공간이다.무섭도록 짙푸른 물빛이 그렇고, 세상을 삼킬 듯 몰아치는 높은 파도가 그렇고, 망망대해 속 섬이 드문 막막한 풍경이 주는 쓸쓸함이 그렇다.아기자기 조그만 섬들이 수백 개 떠있는 남해도 물론 아름답고,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널린 서해의 풍요로움도 재론의 여지없이 근사하다. 하지만 사람마다 ‘취향’이 있는 법. 기자의 취향엔 남해나 서해보다 동해가 맞춤했다.▲동해의 마을마다에서 떠올린 ‘뜨거운 시’ 한 편마흔 살이 넘어서면서 울진과 영덕, 포항과 경주를 찾는 일이 잦았다. 경상북도에 접한 동해는 똑같은 이 나라 동쪽이면서도 강원도 바다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지구 위에서 바다 물빛이 가장 아름답다”는 지중해와 아드리아해, 안다만 등을 빼놓지 않고 가봤다. 그러나 몰랐다. 그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더 아름다운 빛깔의 바다가 있다는 걸.동해안 작은 마을을 꿈결인 듯 산책하면서 소년 시절을 떠올리는 건 ‘한국사람’만의 특별한 권리였음을 늦게 깨달았다.그때 동시에 눈앞을 지나가는 시 한 편이 있었으니 바로 조태일(1941~199)의 ‘국토서시(國土序詩)’였다.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인 1975년, ‘바다에서의 낭만을 꿈꾸지 못했던 불행한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됐던.▲‘불의의 시대’를 의롭게 살아냈던 시인 조태일수줍게 고백하자면 기자는 조태일에게 ‘인간답게 사는 길’과 ‘부끄럽지 않은 시를 만드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딱 30년의 나이 차이.조태일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낭만과 서정보다 고통과 분노의 노래가 아름다운 시절을 살아야했다. 당시는 행복한 시인보다 불행한 시인이 많았던 시대였다.1941년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조태일은 고등학교 시절 일찌감치 신춘문예에 당선돼 시인이 됐고, 이후 1999년 타계할 때까지 초지일관 시와 조국만을 사랑한 장부였다.올망졸망한 20세기 한국 시인들 사이에서 육척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제 마음 가는대로 소리쳤던 겁 없는 문인.1974년 고은(시인), 염무웅(문학평론가), 황석영(소설가) 등과 함께 해방 이후 최초의 진보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설을 주도했고,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국토’ ‘가거도’ ‘자유가 시인더러’라는 판매금지 시집을 줄줄이 내놓았다. 스스로를 버리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긴급조치 9호 위반, 5.17계엄법 위반 등으로 여러 차례 구속됐지만, 결코 자신이 쓰는 시의 방향을 함부로 바꾼 적 없는 조태일.그 시절, 시인 신경림은 “억눌려 살아온 사람들의 모인 힘, 짓밟히고 살아온 대중의 지혜를 찾아 빛나는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말로 조 시인을 격려하기도 했다.그렇다고 조태일의 문학이 ‘저항과 반역’의 길만을 걸었던 건 아니다.살아생전 그는 누구보다 정 많은 의리의 사나이였다. 감옥에 갇힌 후배의 집에 찾아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겨울을 보낼 쌀과 연탄을 가져다주고 말없이 사라지던 따뜻한 아저씨였고, 아들 또래의 제자들에게 손수 밥상을 차려주던 격의 없는 스승이었다.그래서였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조태일을 지목해 “그의 시는 남성적이면서도 불필요한 것을 모두 걸러낸 과부족 없는 압축과 절제와 여백의 미학을 보여준다”고 상찬했다. 조태일은 시보다 삶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이제 스승은 없더라도... 홀로 동해를 다시 걷는 2020년‘국토서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이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가파른 시대. 조태일은 거칠게 갈라진 ‘발바닥이 다 닳도록’ 가녀린 ‘숨결이 모두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의 삶이 불처럼 뜨겁게 타오르기를 원했다. 동해의 차가운 파도를 뚫고 솟아오르는 해처럼.더불어 그는 커다란 덩치와는 무관하게 작고 사소한 것들을 누구보다 아꼈다. 아래와 같은 문장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조태일이 세상을 떠난 게 벌써 20년 전이다. 기자는 그를 잘 안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젊은 시절 그랬던 것처럼 경상북도에서 강원도까지, 푸른 물결을 친구 삼아 동해로 뻗은 길을 성큼성큼 열두 번 걸었을 사람이다. 조태일 시인은.이제 스승은 사라지고, 머리칼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제자만 남았다. 올해는 홀로 동해를 걸어볼 요량이다. 조태일이 들려준 아래와 같은 잊을 수 없는 말을 떠올리며.“나는 시간을 잊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있으면 무슨 무슨 세기는 가고 무슨 무슨 세기가 닥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과연 시간이라는 것이, 시대라는 것이, 세기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시간은 순간순간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닌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09

2020년, 그래도 ‘희망’은 있다

누군가 “장시간의 비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그 답변으로 ‘책’ 외에 다른 게 잘 떠오르지 않는다.이륙 후 안정된 고도에 진입만 하면 비행기는 버스에 비해 흔들림이 덜하다. 마흔다섯 살이 넘어서면서는 이른 노안(老眼)이 온 탓에 덜컹거리는 버스나 기차에서의 독서가 힘들어졌다. 어지럽기 때문이다.기자의 경우 최장 거리의 비행은 ‘인천-프랑스 파리’ 노선이었다. 대략 12시간 30분 남짓.그 이전 태국 방콕에서 출발해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를 탄 적이 있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그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환승을 한 터라 피로와 지겨움이 덜했다. 물론 공항 대기실에서 담배도 두어 개비 달게 태우고.10시간 안팎으로 비행기를 탈 때면 항상 책 2권을 챙긴다. 시집과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시집은 때에 따라 바뀌지만, 트리나 폴러스는 항상 변함없이 여행의 가장 귀한 친구로 역할했다.‘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을 처음 접한 건 20대 초반. 단순한 문장과 더 단순한 그림만으로 징그러운 애벌레가 날개 고운 나비로 변이(變異)하는 극적인 과정을 지극히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당시도 그렇지만, 지금 다시 봐도 놀랍다. 존재를 전이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희망’을 지키고, 그걸 버리지 않는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닌 게 ‘존재 전이’.미움에서 사랑으로, 그리움에서 만남으로, 고통에서 희열로, 수난에서 성취로, 저주에서 공존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이 모든 변화 과정에서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하는 게 바로 ‘희망’이다.비행기 안. 공짜로 주는 위스키도, 좁은 좌석에 앉아 꾸역꾸역 먹는 기내식도, 이어폰을 끼고 조그만 화면으로 보는 영화도 지겨워질 때면 트리나 폴러스가 꽃과 애벌레, 나비를 통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기자를 위로했다.▲절망과 마주했을 때 더 필요한 게 바로 희망가로와 세로처럼 명확한 반대 개념은 아니지만, 희망의 반대편에 자리한 단어는 절망이 아닐까. 둘은 자웅동체(雌雄同體)처럼 우리의 인식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다. 희망은 절망과 함께, 절망은 희망과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다.‘꽃들에게 희망을’ 덮고 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있으니, 차가운 북관(北關)의 바람 앞에서도 의연했던 ‘함경도 사나이’ 이용악(1914~1971) 시인의 ‘낡은 집’이다. 행과 행 사이에서 ‘절망’의 삭풍이 뼈아프게 부는. 이런 노래다.▲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희망’을 지키는 2020년이길조선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이른바 영달(榮達)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고위급 친일파’ 몇 명만이 원했던 참혹한 시대 일제강점기. 이용악은 그 시절을 살았다. 시인의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시 ‘낡은 집’에선 끝끝내 머물고 싶던 고향을 타의에 의해 버리고 낯선 곳으로 발길을 향해야 했던 당대 민초들의 절절한 아픔이 그대로 전해진다.100년 전엔 어떤 재산보다 귀했던 아들을 여러 명이나 낳고도 그 아이들이 제대로 커갈 수 없는 세상임을 알았기에 ‘소주에 취한 털보(아저씨)의 눈이 붉던’ 시대, 아이들조차도 ‘가난 속에서 늘 마음 졸이며’ 살던 시대, ‘꽃피는 철이 와도 뒤울안에 꿀벌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 참혹한 시대.인용한 이용악의 문장에선 ‘절망의 시린 바람’이 쌩쌩 불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낡은 집’에서 절망과 파국의 냄새만을 맡았다면 그건 시를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정들었던 고향 집과 식구나 다름없던 소를 키우던 외양간을 버리고, 물설고 낯선 북쪽 땅으로 쫓기듯 떠나간 사람들. 그래서 살던 집이 흉집(凶家)이 됐지만, 그들은 희망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다.그 시절 조선에서 중국이나 러시아로 떠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문학적 허구’인 시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고 있으니까.이용악의 고향 사람들을 비롯한 20세기 초반 한국의 유랑민들은 세상 어떤 정착민보다 뜨겁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살았다. 옮겨간 땅의 자랑스러운 주인이 됐다.식상한 말이지만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징그러운 애벌레도 아니고, 나라를 빼앗긴 서러운 백성도 아니다. 그러니, 왜 희망을 버릴 것인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트리나 폴러스와 이용악을 떠올리는 새로운 날의 새 아침. ‘겨울’을 절망의 은유로, ‘새’를 희망의 메타포로 상정해 지난밤 쓴 졸시를 다시 읽는다. 올해는 절망을 이기는 희망을 뜨겁게 껴안기로 다짐해본다.겨울, 그러나 희망이 온다계절 모르고 짓찧고 까불던 새취기에 깨어난 아침새하얀 첫서리에꽁지를 말아 올리며푸르르 떤다언제나 한발 늦게 세상을 깨닫는아버지 닮은 새까막까치 발을 얼리며발갛게 발갛게잃었던 계절이 온다다시 희망의 노래가 들린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02

“자선냄비에 온정을 쏙~” 아프고 슬픈 이웃과 ‘아듀 2019’

꼭 모든 것이 풍족해서 아무 것도 모자라지 않는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 최소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노인과 장애인들, 정치·종교적 박해와 절대적 가난 탓에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난민들도 배를 곯지는 않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이건 비단 기자만의 희망사항은 아닐 것이다. 이성과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믿고 싶다.그러나, 지구는 그처럼 아름답지도 공평하지도 못한 별이다. 이 명제 또한 상식과 이성을 갖춘 인간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삶에서 체득한 경험으로 이미 학습했을 터이니까. 그 이유가 자원의 부족이건, 첨단 기술력의 부재건, 부패한 정치인들 때문이건 ‘가난한 국가’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를 여러 차례 여행했다. 기자 역시 한국에선 부자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지만, 보기 딱한 ‘상대적 가난’ 앞에서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여행에서 본 ‘절대적 가난’의 풍경들인도의 뭄바이. 공항에 내려 숙소로 가는 동안 경악했다. 시간은 새벽 3시쯤. 택시와 화물트럭이 시속 100km 이상으로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수백 명이 이불 쪼가리 하나 덮지 않고 자고 있었다.가난과 관련한 놀라움은 여행 기간 내내 계속됐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택시(인도에선 ‘오토 릭샤’라고 부른다)가 신호등 앞에 멈추거나, 정체된 도로에 서있을 때면 거의 예외 없이 손이나 발이 없는 아이들이 기자의 눈앞에서 서럽게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 숫자가 모두에게 일일이 몇 닢의 돈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시내도 뭄바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햄버거나 조각 피자, 탄산음료 따위를 파는 패스트푸드점 유리창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기자를 하염없이 쳐다보는 어린애들을 보자니 차마 목구멍으로 빵 조각이 넘어가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을 통째 들고 나와 가게 앞 맨발의 아이에게 줬던 게 여러 번이다.인도와 필리핀만이 아니다. ‘앙코르 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시엠립과 프놈펜엔 크메르 루즈(Khmer Rouge) 집권 시절에 뿌려진 지뢰를 밟아 발목이 날아간 장애인 악사들이 곳곳에서 한 끼 밥을 위해 슬픈 현악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이란의 사막도시 쉬라즈에선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이 한국 돈 500원도 되지 않는 싸구려 초콜릿을 팔아 일곱 식구의 밥을 벌고 있었다. 바구니에 담긴 초콜릿 20개쯤을 몽땅 사줬지만,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렇다고 귀국하지 않고 매일 그 난민의 물건을 팔아줄 수도 없는 노릇.▲한국에선 ‘가난과 학대의 풍경’이 사라졌을까사실 비행기를 타고 가 먼 곳을 헤맬 것도 없다. 우리들 바로 곁에도 인도나 필리핀, 아프가니스탄이나 캄보디아 빈민처럼 아프고 슬픈 인생을 겨우겨우 견디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국민소득 3만 달러,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 안에 든다는 한국임에도 제 때 밥을 챙겨 먹지 못하는 결식아동, 곰팡이 핀 쪽방에서 한 달에 20~30만원으로 생활하는 독거노인, 정서적·육체적 학대와 모멸감에 눈물 흘리는 이주 노동자와 난민이 엄연히 존재한다. 누가 감히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추위에 강물마저 얼어붙고, 산과 들판엔 따 먹을 과일 하나 없는 황량한 겨울이 오면 울컥울컥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다. 신경림(83)의 절창 ‘가난한 사랑 노래’다.▲구세군 자선냄비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연민을...인간만의 특징이라 할 연민과 동정이 사라진 자리엔 절제 없는 탐욕과 이기적 자기중심주의가 들어서기 십상이다.옆집에서 아이가 매일같이 학대당하고 있어도, 노숙자가 역 앞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죽은 듯 엎드려 있어도 제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드물어진 세태.신경림 시인은 ‘이기적인’ 우리들에게 가난이 주는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을 다독일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일까를 아프게 묻고 있다.또한 더 이상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희구하고 있다. 시라는 문학적 수단을 통해.그래서다.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이란 시 속 구절은 동정과 연민이 사라져 더욱더 춥게 느껴지는 2019년 겨울 앞에 무방비로 선 독자들을 반성하게 한다.언제였던가? 가수이자 ‘음악을 통해 역사와 사회적 현상을 탁월하게 해석해낸’ 작가 이지상(54)이 웃음기 사라진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들려줬다. “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자리를 함께 한 모두가 심각해졌다.즐거움과 웃음이 아닌, 슬픔과 눈물이 ‘세상의 중심’이라니. 그 말에 담긴 역설적 의미를 여러 차례 곱씹어 보고서야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지상은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내가 식구들과 따스한 국과 밥으로 저녁을 먹으며 웃고 있을 때도 부모와 형제 하나 없는 외로운 이웃을 잊어서는 안 되고, 축하의 술잔이 마구잡이로 돌아가는 송년회와 동창 모임에서도 기댈 선후배와 친구 없이 사는 또 다른 이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타자의 고통을 더불어 아파해줄 수 있는 인간이고, 그런 인간이 중심에 서는 곳이 진짜 세상이다.”며칠 전엔 “계속되는 경제적 불황과 경기 침체로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액이 지난해에 비해 3%포인트 이상 줄어들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나부터 먼저 오늘 저녁엔 구세군 자선냄비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아야겠다’는 소박한 결심을 해본다. 연민과 동정이 사라진 세상은 짐승들의 세계다. 다시 한 번 이지상을 인용한다.“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2-26

‘견딜 수 없는 사랑’이 세상에 있을까?

‘사막과 검은 황금(석유)의 나라’로 불리는 이란에서 왜 뜬금없이 짙푸른 바다를 떠올렸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그저 막연히 유추하자면 인간의 상상 바깥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과 바다가 주는 ‘막막함’, 아스라한 사막의 지평선과 바다의 수평선이 닮아서였을 것이라 추정할 뿐.스스로 ‘신성 이슬람 공화국’이라 칭하는 이란. 그 나라의 척추라 할 자그로스산맥 동쪽 자락엔 아름다운 천년고도(千年古都) 이스파한(Esfahan)이 있다. 한낮의 온도가 섭씨 40℃를 넘나들었던 어느 해 5월 중순. 수도 테헤란에서 7~8시간쯤 버스를 타고 그 도시에 도착했다.많은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이 “지구에서 가장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자랑하는 셰이크 로트폴라흐 모스크(Mosque of Sheik Lotfollah)와 ‘지상에서 가장 웅장한 발코니’로 이름 높은 알리 카푸 궁전(Mosque of Sheik Lotfollah)이 그 위용을 자랑하는 이스파한.매력적인 그 도시 중심에 자리한 ‘이맘 광장’(Imam Square)의 나무 그늘에 앉아 모스크와 궁전을 바라봤다.동서가 600여m, 남북으로는 500m가 넘는 거대한 이 광장은 중국의 천안문광장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크다. 규모에선 조금 밀리지만 이슬람 양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내부 건축물들의 아름다움은 천안문광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이란 꼬마숙녀의 눈에서 ‘푸른 바다’를 보다수백kg의 갖가지 보석을 박아놓은 듯 페르시아의 태양 아래서 호화롭게 빛나는 셰이크 로트폴라흐 모스크의 지붕은 이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했다. 그걸 보러 각지에서 이스파한을 찾는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모스크 맞은편 알리 카푸 궁전 입구에서 석류주스를 마시며 익숙지 않은 뜨거운 날씨를 견디던 기자 앞에 동해 물빛처럼 파랗고 투명한 색깔의 원피스를 입고 엄마 곁에서 종종거리는 이란 꼬마숙녀가 나타났다.다섯 살쯤이나 됐을까? 너무나 귀여워서 볼이라도 한 번 당겨보고 싶었던 아기의 커다란 눈망울. 그 안에 푸른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사막의 열기를 잠재우는.순진과 무구, 그리고 순수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고…. 그 순간 북한 평안도 산골에서 태어나 끝끝내 남쪽의 바다를 그리워했던 ‘20세기 최고의 가객’ 백석(1912~1996)이 스물두 살 귀때기 파랗던 시절에 쓴 한 편의 시를 떠올렸다. ‘통영 2’다.▲사막 같았을 시인의 심정, 그걸 위로해준 바다일제강점기에 청춘을 보낸 시인 백석은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영민한 청년이었다. 겨우 18세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라는 명찰을 달았고, 이후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한국으로 돌아와선 신문사 기자로 잠시 일했는데, 그때 만난 경상남도 통영 출신의 여성 박경련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신여성 박경련 역시 댄디하고 잘생긴 사내 백석에게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젊은 남녀의 사랑은 희극보다는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은 법.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박경련은 백석이 아닌, 백석의 친구에게 시집을 가버린다.‘통영 2’는 애끓는 연정을 참지 못하고 홀로 서울을 출발해 당시로선 머나먼 곳이었을 남녘 끝 바닷가 마을 통영까지 찾아간 한 청년의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실연한 20대 초반 사내는 물만이 아닌 바람까지 짠 여자의 고향에서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우는’ 소리에 눈물짓는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심사를 주체할 수가 없다. 죽음에의 유혹이었을 터다.시에 등장하는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골에 산다는 난(蘭)은 박경련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곁에 없다. ‘타관 시집’(결혼하여 타향으로 떠남)을 갔다.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래서다. 아래와 같은 ‘바다 냄새 나는 문장’은 시가 쓰인 1934년으로부터 85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사랑을 잃은 젊은이들의 ‘사막 같은 쓸쓸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이 저녁 울듯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녕(지붕의 평안북도 방언)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손방아(디딜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사랑에 빠진 청춘들은 수백·수천 년 전에도 있었으니해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스파한 이맘 광장에도 차도르(Chador·이란 여성들이 얼굴과 몸을 가리는 검은색 의상) 같은 어둠의 베일이 드리워졌다. 눈이 커다란 귀여운 꼬마숙녀는 엄마의 손을 잡고 멀리로 사라졌다. 기억 속에서 또렷하게 떠올랐던 백석의 시도 모래 위에 그린 그림처럼 서서히 지워져갔다. 그리고 찾아온 고요한 사색의 시간.산책하듯 돌아본 이맘 광장의 건축물 내부엔 벽화가 적지 않았다. 이슬람 율법은 미혼 남녀가 드러내놓고 연애하는 걸 엄격하게 금한다.이란을 포함한 무슬림 국가 어디에서도 겉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연인들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법률과 금기의 제도만으로 청년들의 넘쳐나는 욕망을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지금도 잊히지 않는 이스파한의 벽화. 붉은 옷을 입은 심각한 표정의 페르시아 사내가 푸른 옷의 여인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웃고 있다. 벽화가 그려진 시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그림이 완성되던 전후 상황도 짐작할 수 없지만 기자는 무턱대고 믿고 있다. ‘저들은 분명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라고. 그 믿음을 버릴 생각이 앞으로도 없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2-12

땅 위의 폐허보다 더 슬픈 건 마음속 절망… 그 속에서 희망을 찾다

유럽과 지척인 이스탄불을 출발한 기차가 쉼 없이 20시간을 넘게 달렸을 즈음이다. 2층 침대가 마련된 특실에서 꼬박 하루를 먹고, 쉬고, 마시고, 자고를 반복하던 기자의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황량한 평원 위에 모습을 드러낸 기묘한 형상의 수많은 바위들. 지구의 풍경 같지 않았다.가보지 못했지만 화성이나 목성의 지표면이 저러할까? 그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은 SF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하다”는 이야기. 외계인과 우주에서 온 괴물 에일리언(Alien)이 등장하는 몇몇 영화가 떠올랐다. 함께 하이데라파샤역(驛)에서 기차에 올라 꼬박 하룻밤을 함께 보낸 터키의 노부부는 놀라움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한국에서 온 사내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조금 더 달리면 더 기막힌 풍경이 나타날 테니 그만 놀라고 기다려봐.”▲인간의 ‘의지’와 자연이 선사한 ‘물’로 건설된 고대도시터키의 수도는 앙카라.거기서 남동쪽으로 220km 가량을 달리면 아나톨리아 고원에 우뚝 선 카파도키아(Cappadocia)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엔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그곳은 ‘황무지와 폐허가 어떻게 아름다움으로 진화하는가’를 보여준다.화산의 재가 오랜 시간 빗물에 섞여 만들어진 독특한 카파도키아의 바위는 어떤 건 버섯 모양이고, 어떤 건 우주선 모양이며, 또 다른 건 고대 유럽신화에 등장하는 용(龍)의 형상을 하고 있다.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 식수를 구하기도 쉽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도 인간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이어갔다. 자그마치 2천 년 전부터. 그 배후엔 종교 탄압이 있었다.그 옛날 카파도키아에 정착했던 이들은 고향에서 쫓겨난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중장비 하나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거대한 바위의 내부를 파내고 거기에 드넓은 지하도시를 만들었다. 곳곳에 암벽화를 그려 넣는 ‘예술적 행위’도 진행됐다. 인간은 인간이므로, 인간이 못할 일은 없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경이로운 시대였다.얼핏 보기와는 달리 그 지역엔 다행히 ‘물’이 있었다. 그 물로 농사를 짓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이 준 물. 이 2가지가 폐허 위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게 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폐허’ 혹은 ‘황무지’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마음 한편이 쓸쓸하고 서늘해졌다.사실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모래바람 부는 황량한 땅이라고 느끼는 건 고대의 터키 사람들만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이 자신이 발 딛고 선 나라를 황무지나 폐허처럼 느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정치적 후진성과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빈곤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예술가들이 특히 그랬다.시인 최승자(67)의 ‘197×년의 우리들의 사랑’은 후진성·불평등·빈곤의 시대를 서럽고 아프게 형상화한 ‘디스토피아적 묵시록’. 이런 노래다.▲수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힘... 희망과 생존욕구까마득한 시절인 2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배척했다. 황제에게 머리 조아리는 걸 거부한 기독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카파도키아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마치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만들어놓은 은둔지(隱遁地)를 찾아가듯.척박하지만 신비로운 풍경이 그들을 매료시켰다. 이런 타의에 의한 이주는 200년 넘게 계속됐다. 또 다른 수난도 있었다. 7세기 무렵 무슬림과 벌인 종교전쟁은 살벌하고 무서웠다. 창과 칼에서는 불꽃이 튀고, 피 냄새가 진동하던 시절이었다. 신들의 다툼 아래서 인간이 희생됐다.폐허에선 꽃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카파도키아 정착민들은 희망과 꿈을 버리지 않았다. 다시 바위산을 깎고 동굴을 뚫어 또 다른 지하도시를 세우고, 배수구와 식량 저장창고 등을 만들어냈다. 어떤 형태의 수난과 시련도 인간의 생존욕구를 온전히 꺾지 못했다.최승자가 묘사하는 ‘197×년’은 실체라기보다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폐허의 시대다. 당시 한국 사회를 통치한 군사독재 정부는 젊은이들을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 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헤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기’를 원했다. 그들이 세상과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기를 바랐다.하지만, 부도덕한 위정자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시인의 말처럼 ‘노쇠한 혈관을 타고’서도 ‘그리움의 피는’ 흐르는 법. 그 시기의 한국 사람들은 처참한 현실을 거부하며 ‘꿈속에서도 행군해 나갔다’. 구원의 메타포인 ‘그리움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까.▲터키와 한국, 두 나라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카파도키아도, 우리나라도 황무지와 폐허의 시절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시대와 장소는 판이하지만 거기서 얻은 교훈은 동일하다.“땅 위의 폐허보다 더 슬픈 건 마음속 폐허다. 그걸 이겨내는 건 인간의 의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를 여행한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세상에는 여전히 폐허와 황무지가 많다는 게 눈에 보인다.전쟁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아프리카와 아랍, 인종 차별과 이민자 혐오가 지속되는 미국과 유럽, 기아와 절대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남미와 아시아…. 더 서글픈 건 사람들 마음 안에 존재하는 열패감과 허망함이다.그래서다. 기자는 오늘도 폐허를 아름다움으로 바꾼 희망을 되새긴다. 그것만이 황무지로 느껴지는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므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류태규

2019-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