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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아쉽고 아쉽고 아쉽지만 잘 가.. 청춘

마주 앉은 상대방의 왼쪽 어깨 너머로 에펠탑 꼭대기가 보이는 프랑스 파리의 소박한 야외 카페. 가게 안 스피커에선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의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가 흘러나오고 있었다.클래식에 관해 아는 바 적지만 저건 분명 여성 바이올린 연주자다. 정돈되고 세밀한 현악기 소리가 해질 무렵 도시의 공기를 감미롭게 만들어줬다.천재성과 광기 사이에서 일생을 어지럽게 살아야했던 절름발이 화가 툴루즈 로트렉(Toulouse Lautrec·1864-1901)이 좋아했을 법한 포도주를 주문했다. 낯선 도시의 밤이 서서히 다가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지인에게 소개 받아 그날 처음 만난 청년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프랑스로 이민 왔다고 했다. 고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아들과 딸, 손자를 잘 키워냈다. 한국 대학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있었다는 청년은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와 한국어까지 능숙했다. 세칭 ‘글로벌시대에 어울리는 20대’였다.▲석양이 질 때면 떠오르는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있다프랑스어도 영어도 서툰 기자에게 한국말을 곧잘 하는 청년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 무슬림이라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한국 유학의 경험 때문인지 주석(酒席)의 분위기를 맞출 줄 알았다.나이에 관계없이 사내 둘이 만났으니 ‘여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자 이야기는 곧 ‘첫사랑’에 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스물다섯 살 어린 ‘파리 친구’는 노래를 잘 부른다는 연인 이야기를 길게 했다.그 아기자기한 스토리를 고개 끄덕여 들어주며 떠올린 시가 있었다. 청춘을 아프게 반추하는 안도현의 절창 ‘저물 무렵’이다.▲빛나는 ‘연애시대’는 중년들에게도 있었으니…지금이야 신세대들로부터 ‘고루한 아저씨’ 취급이나 받고 살지만, 1980~1990년대 청춘을 보낸 중년에게도 왜 찬란한 ‘연애’가 없었겠는가. 흰 머리카락이 날마다 늘어가는 기자와 친구들도 마찬가지.스마트폰도 멀티방도 없던 시절의 연애는 단순하고 유치했다.비가 내리는 날이면 언제 수업을 마칠 지도 모르는 ‘고등학교 3학년 오빠’를 교문 앞 골목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감청색 교복 치마의 열일곱 여고생이 적지 않았고, 여자 친구의 생일선물로 한 달 용돈을 모두 털어 주머니 위에 말(馬)이 그려진 청바지를 사는 소년도 흔했다.20세기 말 ‘연애시대’는 가난하고 순박했다. 그랬기에 애처롭지만 아름다울 수 있었다.시인 안도현은 19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 앞서 인용한 시에서 웃음보다는 눈물, 환희보다는 우울의 향기가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 아닐지.아무리 찾아봐도 데이트 할 장소가 없어 해가 지는 강둑에 나란히 앉아 불과 몇 십 km 떨어진 이웃 도시의 이야기나 들려주고, 듣는 것 외엔 별반 할 게 없었던 어린 연인들.짧디짧은 한 번의 입맞춤이 일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는 연애. 그렇다고 이걸 ‘21세기식 사랑’보다 아래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지난 세기에 10대와 20대를 보낸 이들에게 저물 무렵의 어스름과 곧 다가올 농밀한 어둠은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는 어린 노을’임을 깨닫게 해줬다. 그 힘으로 그들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년들에게 과거는 모두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로 기억될 수 있는 것.그나저나 안도현의 시를 중년이 돼 다시 읽으니 궁금해진다. 요즘 젊은 친구들도 첫 키스를 아래와 같이 수줍게 기억할까?“어느 날 그 애와 나는/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애의 여린 숨소리를/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 공식을/아아 모두 삼켜 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옛일을 떠올리며 새벽까지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가이민자의 손자인 프랑스 청년으로 인해 유쾌했던 저녁 자리가 끝이 났다. 악수를 나누고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그러고 나니 다시 혼자가 됐다.해가 지자마자 일찍 숙소로 돌아가 씻고 잠드는 건 아이들에게나 어울릴 일이지 오십에 가까운 중년사내의 여행 스타일은 아니다.파리의 어둠과 서유럽의 밤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고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해변을 산책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분으로.에펠탑 밑 벤치엔 한 세기 전 그랬듯 그날도 밀어(蜜語)를 속삭이는 연인들이 가득했고, 불 밝힌 골목의 고풍스런 극장에선 화려한 쇼가 펼쳐진다는 걸 홍보하고 있었다.더 한적하고, 더 어둡고, 더 낯선 장소로 가고 싶었다. ‘예술과 낭만의 절정’이라는 파리의 밤, 그 반대편의 맨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취기 탓만은 아니었다.이윽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센강의 지류. 오렌지빛 가로등이 드문드문 자리를 지켰으나 주위는 인적이 드물고 캄캄했다. 마침내 ‘거대 도시’ 파리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잠깐 사이에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그때였다. 강 건너편 젊은 남녀 한 쌍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일부러 보려한 건 아니지만 둘의 입맞춤은 길고도 뜨거웠다.순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게는 저런 청춘시절이 다시 오지 않겠지’란 생각이 들었고,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퍼졌다.그러나 그 슬픔과는 별개로 센강의 물소리는 신지아의 바이올린 연주처럼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아이러니한 파리의 새벽녘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1-28

함께할 수 있음에 행복한 세상 가장 소중한 ‘가족’

어머니의 남자 - 고운기섣달 그믐밤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어머니는큰오빠가 가자한다고 또렷이 말했다누구 오빠?우리 큰오빠…여동생이 한 번 더 물었어도 같은 말을 했다기쁜 듯의기소침한 듯어떤 제삿날이었을까묵묵히 지방을 써주고 가던방 어두운 한 구석의 사내를나 또한 어렴풋이 기억한다마흔 갓 넘기었나,어머니의 큰오빠 나의 큰 외숙부는전쟁통에 홀로 된 여동생의 안부를지방 써주는 날에 와서 확인하던 것인데나는 이승에서 그의 모습이그날 단 한 번으로 가물거릴 뿐이다친정아버지도 아니고아이 둘씩 낳아준 두 남자도 아니고눈이 팔팔 내리던정월 초하룻날 새벽길 걸어 와어머니를 데리고 간 남자는큰 외숙부였으리라 믿고 있다.- 톤레삽 호수에서 만난 의좋은 남매는…사진에 찍힌 남매를 만난 건 몇 해 전 캄보디아 여행에서였다.빛나는 크메르의 유적 앙코르와트가 있는 도시 씨엠립. ‘무너지고 망가진 폐허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역설적 사실을 보여주는 그곳에서 7일을 묵었다.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한 마지막 날. 일행의 권유로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톤레삽 호수’를 찾았다. 시내에서 출발해 붉은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길을 1시간 남짓 달렸다. 창문이 없는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호수 초입엔 허름하고 낡은 목선 수십 척이 북미와 유럽, 한국과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가 오래 전 본 우리나라 1970년대처럼 빈한한 시골 풍광.‘톤레삽 호수 투어’를 위해 20달러를 지불한 여행자들이 각자에게 배정된 배에 올랐다. 그때였다. 채 10살이 돼 보이지 않는 어린 남매가 나타난 것은.▲ 열 살 누나를 돕던 예닐곱 살 어린 꼬마는투어를 함께 하게 된 일행 중엔 2m 가까운 키에 100kg이 넘어 보이는 네덜란드 대학생이 있었다.그런데, 이건 뭐지? 1m쯤 되는 키에 30kg이 될까, 말까…. 조그만 여자아이가 그 유럽 거구의 손을 붙잡고는 “조심해서 건너세요”라며 승선을 돕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스꽝스런 풍경. 그 꼬마숙녀는 기자의 손도 잡아주며 배에 오르는 걸 거들었다. 기자 역시 183cm에 90kg. 손바닥만한 거리를 널빤지에서 배로 뛰어오르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누가 있어 감히 조그만 손이 내미는 권유를 마다할 수 있을까. 그 와중에 잠시 밀려든 물결이 출렁, 허술한 목선이 흔들렸다. 이때 나타난 남자애 하나가 누나의 허리를 잡아준다. 겨우 예닐곱 살이나 됐을까? 동생을 바라보는 어린 누이의 눈망울이 터무니없이 맑아서 슬퍼 보였다.남매는 10명이 넘는 우리 일행 모두를 안전하게(?) 승선시키고는 고물(배의 뒤쪽)에 나란히 앉았다.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이미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둘을 보니 이상스레 가슴이 울컥했다.“무슨 사연이 있어 저러고 사는 걸까?”그 순간 동시에 떠오른 시 한 편이 있으니 고운기(58) 시인의 절창 ‘어머니의 남자’였다. 이런 문장이다.▲ 이성적 잣대로 해석 불가한 누이와 오빠의 관계고운기의 시가 그려내는 풍경을 요약하면 이렇다. 죽음을 눈앞에 둔 엄마. 아들은 임종을 위해 집을 찾았다. 그런데 위독한 모친은 부모도, 자식도 아닌 오빠를 가장 먼저 찾는다. 마지막 생의 순간에.아들은 ‘엄마의 오빠’, 즉 자신의 외숙부를 긴 세월 저편에서 겨우겨우 기억해낸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젊어서 홀로 된 여동생을 찾아와 제사 때마다 서러운 필체로 지방(紙榜)을 써주고는 구석에 앉아 말이 없던 사내. 그 사내의 ‘말없음’을 이제는 이해하게 된 아들. 그걸 먹먹하게 지켜보는 식구들.피를 나눠 가진 누나와 남동생, 오빠와 여동생의 서로를 향한 애틋함. 그걸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단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다. 이런 문장으로 시가 끝나는 것은.‘친정아버지도 아니고/아이 둘씩 낳아준 두 남자도 아니고//눈이 팔팔 내리던/정월 초하룻날 새벽길 걸어 와/어머니를 데리고 간 남자는/큰 외숙부였으리라 믿고 있다’.이미 죽은 오빠가 이제 곧 저승에서 만날 여동생의 마지막 길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풍경. 아버지도 남편도 해주지 못한 일을 거뜬히 해내는 이름 ‘오빠’.이 시가 주는 울림이 깊고도 큰 것은 바로 이런 ‘새로운 시선’ 때문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합리적 잣대로 해석 불가한 피를 나눈 누이와 오빠남매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실체로 확인한 적은 또 있다. 인도 남부 도시 마이소르의 시끌벅적한 시장통에서다.유럽에서 왔다는 20대 관광객 네댓 명이 예쁘장한 인도 소녀에게 농담을 걸며 사진을 찍자고 하고 있었다. 부끄러워 자신이 할 말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서툰 영어로 싫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하는 소녀. 그걸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웃는 백인 청년들.소녀의 오빠로 추정되는 17~18세 소년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사내들 가운데로 나서며 “꺼져!”라고 일갈하는 ‘소년 오빠’의 눈빛에서 살의가 번득이고 있었다.외국인에게 한없이 친절한 인도 사람에게서 그처럼 무서운 기운을 느낀 건 그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기세에 눌려 소녀 곁에 있던 청년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기자가 보기에도 오빠에게 총이나 칼이 없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상황이 정리되자 여동생의 손을 잡고는 거리 저편으로 총총히 걸어가는 오빠의 등이 세상 무엇보다 든든해 보였다. 하이에나 무리에게서 새끼를 구한 수컷 사자 같았다.▲ 세상 가장 소중한 친구는 바로 남매가 아닐지몇 해 전에도 한 장의 사진이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 적이 있다. 저 먼 곳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군인들이 마구잡이로 쏘아댄 총탄에 조그맣고 가난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신발도 신지 못한 3~4살 여자 아기가 폭음에 질려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그 역시 고작 6~7살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웅크린 여동생의 어깨와 등을 꽉 끌어안고 있는 모습.카메라는 자신이 먼저 총에 맞아도 좋다는 어린 소년의 처연한 눈빛을 담아내고 있었다. 여러 말이 필요 있을까. 그는 분명 오빠였을 터.“세상이 주는 고통과 서러움을 함께 나누라고 신은 자매와 형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서술엔 무신론자도 감동시키는 힘이 담겼다.때론 곁에 있는 오빠와 여동생, 형과 누나가 밉거나 싫어질 때가 있다. 사람이란 게 그렇고, 기자 또한 그렇다. 그럴 때면 위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바꾼다. 서로를 아끼고 위해주기에도 인간의 삶은 짧다. 그게 형제와 자매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1-07

길 위에서 만난 젊은 연인들,그들은 더 이상 비극이 두렵지 않았을까

그간 여행했던 유럽 다른 나라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펼쳐지는 푸른 들판은 한국의 1970~80년대 시골 풍경과 닮아있었고, 빨간 지붕의 야트막한 집들이 정겨움을 불렀다.수도인 티라나(Tirana)는 물론 마을 앞을 평화롭게 흐르는 강이 인상적인 조그만 도시 베라트(Berat)에도 이슬람교 성당인 모스크(Mosque)가 높은 첨탑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익숙하고, 또 다른 면에선 생경한 모습들.동유럽 발칸반도에 자리한 알바니아는 1479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그 영향 때문일까. 유럽 어느 국가보다도 무슬림(Muslim·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의 비율이 높다. 알바니아의 인구는 약 360만 명. 이중 70% 이상이 무슬림이다.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가톨릭신자는 약 10% 정도에 불과하다. 머리가 두 개인 독수리를 형상화한 국기와 이슬람 생활양식으로 여행자들에게 알려진 나라.▲ 잊을 수 없는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국경을 접한 마케도니아에서 티라나로 들어가 고풍스런 매력이 물씬한 베라트와 짙푸른 해변을 가진 사란다 등의 도시를 떠돌았다. 알바니아는 몇몇 국가들과 종교와 인종으로 인한 불화를 오랜 시간 겪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국민들은 친절하고 쾌활했다.시장에선 “이것 한 번 맛보라”며 낯선 여행자에게 큼직한 자두를 건네는 상인이 적지 않았고, 시골 마을 노인들은 자기 동네를 찾은 이들에게 달콤한 홍차 한잔을 내미는 것으로 여독(旅毒)을 달래주기도 했다.목가적인 풍경과 따스했던 사람들. 그것들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바로 알바니아에서 만난 연인들.모두가 알다시피 이슬람 국가에선 결혼하지 않은 남녀 사이의 연애를 어떤 형태로든 통제한다. 그 통제가 때로는 ‘명예 살인’ 같은 흉악한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자유연애’가 일상화된 국가에서 보기엔 끔찍한 일이다.중동이나 아랍 지역만큼은 아니지만 알바니아 역시 이슬람 생활양식이 보편화된 곳이니 미혼남녀의 연애가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을 터. 특히 종교와 인종이 다른 상대와의 사랑은 쉬운 일이 아닌 듯했다.그러나, 세상 어떤 규제와 제약이 심장으로 향하는 피가 펄펄 끓는 청춘들의 연애감정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겠는가.당연지사 알바니아 처녀, 총각도 사랑을 한다. 기자가 직접 봤기에 단언할 수 있다.베라트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 사흘을 머문 그곳에서 독일 사내와 알바니아 여자의 애틋한 연애를 지켜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인종과 종교가 모두 달랐다. 하지만 그 연인은 이미 세상이 강제한 금기를 훌쩍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다.티라나에선 헤어지기 아쉬워 한참 동안 서로의 몸에 감은 팔을 풀지 못하는 또 다른 연인을 만났다. 자정을 넘긴 늦은 밤. 카페 뒤 어두운 골목이 둘이 뿜어내는 뜨거운 빛으로 환해지고 있었다.그 순간 보았다. 서른이 되기 전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시와 시인을 아끼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선 여전히 스물아홉 청년으로 살아있는 기형도(1960~1989). 그의 시 한 편이 칠흑처럼 검은 하늘에 새하얀 휘장으로 펼쳐지는 걸.▲ 아름다운 세상을 완성하는 건 결국 ‘사랑’이 아닐까‘질투는 나의 힘’을 접한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자신이 청춘을 되돌아보면서, 미래의 나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희망은 다만 타인의 삶을 향한 질투뿐이었음을 깨닫고 있다”고 평했다.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완성된 형태의 사랑을 가져보지 못했던 ‘청년 기형도’는 ‘탄식’과 ‘질투’로만 점철된 세상 속에서도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으로 비루했던 한국의 20세기 말을 견뎌내지 않았을까?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젊은이들의 사랑은 유사한 양식과 지향을 가진다.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열망과 환희, 여기에 때때로 쓰라린 고통을 동반한다는 면에서 한국과 알바니아의 연애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게 분명하다. 베라트에서 만난 기독교도 독일 청년과 이슬람교 신자인 알바니아 여성의 연애는 언제 어디에서 돌팔매를 맞을지 모른다.하지만 그런 수난 또한 둘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우리가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수많은 ‘러브 스토리’처럼. 오늘이 살아있는 마지막 날이 아님에도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인양 격정적으로 포옹하던 티라나의 연인. 그들이 보수적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왜냐? 서로를 향한 둘의 사랑은 세상을 뒤엎을 용기도 줄 수 있으니까.20대 초반 풋풋하고 젊은 알바니아 연인들의 달콤한 입맞춤을 부러운 눈길로 지켜본 그날 밤. 아주 오래전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새벽 무렵, 아래와 같은 졸시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1982년, 열두 살 그 소녀에게기억은 그믐밤 회랑 같은 것이라헛디뎌 계단을 구르는 경우가 흔했다삼십 년 전, 어둠에서 비를 맞고 섰던 게너였는지 혹은, 나였는지제 두려움에 떨던 우리 안 두억시니였는지그날 그랬듯 지금도 알 수 없지만실핏줄 내비치던 네 파리한 뺨을 꿈꾼 날이면아열대 스콜 속을 걷는 양 끼쳐오는 열기용기보다 변명을 먼저 배운 건 가난 탓이고코흘리개 어린 주먹도 거짓말은 싫었지만어떤 어른도 아이를 안아주지않던 시절억지 굴신을 가르친 군인에게선박하향 로션으론 가릴 수없는 죽음의 냄새비굴하게 웃던 선생들 모진매질 견디며꺾인 무릎으로 표류하듯살았는데허나, 너를 떠올릴 때만은터무니없는 동화처럼 눈부신초여름 빗줄기새빨간 양귀비꽃처럼 터지던웃음매혹에 중독돼 다시금 견뎌야 할 세상마흔이 돼서야 온전히 살아낸 열두 살.알바니아 여행에서 돌아온 지 벌써 몇 해가 흘렀다. 기자가 갔을 땐 동양인을 만나기가 힘들었는데 최근에는 상황이 변했다고 한다.TV 속 세계여행 프로그램이 “이제 알바니아를 찾는 한국 관광객이 적지 않다”는 소식을 전해준다.어쨌건 알바니아는 아름다운 여행지가 분명하다. 초록빛 옥수수밭을 흔드는 부드러운 바람과 고요한 시골길, 모스크 지붕에서 흩어지는 눈부신 햇살은 쉬이 잊히지 않을 추억을 선물한다.여기에 하나 더. 인종과 종교, 국경까지 넘어선 연인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사랑의 풍경’은 더 말해 무엇할까.사진제공/류태규/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5-23

파란 그림 속에 빠진 듯… 맑은 호수 위를 거닐 듯눈부신 황홀함,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일상이 가장 큰 행복이란 걸 모르고 산다”고 말한 게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였던가? 아니면 발레리(Paul Valery)인가?사실 ‘여행’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길고 먼 여행을 떠나본 이들은 알게 된다. 넓은 범위에서 보자면 결국 여행도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한국인들에겐 이름도 낯선 ‘마케도니아’라는 나라의 조그만 마을 오흐리드(Ohrid)에서 한 달쯤 머문 적이 있다. 수백만 년 전 생성된 맑고 투명한 호수가 여행자의 심장을 설레게 하는.느긋한 마음으로 오래 전에 축조된 정교회성당 주변을 거닐며 발칸반도의 비극적인 역사를 떠올렸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오흐리드 호수를 바라보며 요즘 말로 ‘멍때리기’를 했다. 숙소 주변을 떠돌아다니던 귀여운 고양이와 한나절 놀아준 기억도 난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사람살이’의 풍경은 비슷하고…익숙한 한국에서의 일상이 아닌 낯선 공간에서 보내는 일상이 지속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란 세계 어느 도시나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다.오흐리드에서 만난 젊은 친구들도 포항의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미래와 연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그 문제들 때문에 울고 웃었다.시장에서 과일과 채소를 파는 상인들의 부지런함 역시 한국과 마케도니아가 다르지 않았다. 거리에 펼쳐진 좌판 주위 왁자지껄한 소음도 판박이였다.한국의 육개장과 흡사한 맛을 내는 스튜(Stew)가 맛있었던 식당의 주인 할머니는 50년을 함께 살아온 할아버지의 지나친 음주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고민 역시 우리네 옆집 노부부가 다투는 이유와 똑같았다.그랬다. 프랑스 시인이 간파한 것처럼 일상은 여행 이상의 웃음과 행복감을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이의 일상이 때마다 행복할 수는 없는 법. 가끔은 서글픔과 눈물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기도 한다.따스한 햇볕 아래서 오흐리드의 평화로운 풍경 속을 걷던 어느 날. 갑작스레 기억 속에서 소환된 시 한 편이 있었다. 문학의 촉수를 일상으로 뻗어 독자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 박철(59) 시인의 절창(絕唱)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였다.▲ 연애편지를 잘 쓰던 병약한 소년, 시인이 되다시를 쓴 박철과는 가끔 만나는 사이다. 그래서였다.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몇 해 전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어려서부터 병약했던 한 소년. 공부도 운동도 시원찮았다. 하지만 그의 낭랑하고 물기 젖은 문장은 또래 소녀들을 노란 우산 쓰고 논둑길에서 서성이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박철은 이렇게 고백했던가.“나도 한때 사랑을 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절반은 연민이었음을 안다.”소년은 나이를 먹어가며 연애편지가 아닌 시를 쓰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렀다. 변두리 극장에서 여고생의 손목을 수줍게 잡던, 그 떨리는 손으로 쓴 몇 편의 시가 문예지 ‘창작과비평’에 실린다. 스물여덟이었다.그 나이가 되도록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던 박철. 절망과 술로 탕진한 청춘이 헛되지 않았음을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아버지, 제가 시인이 됐습니다.”이 땅의 아버지들이란 아들에게 친절한 경우가 별로 없다. 박철의 부친은 기쁨을 숨긴 채 속에 없는 타박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믿으라고? 사실이면 ‘시인 증명서’를 가져와 봐라.” 알다시피 ‘시인 증명서’라는 문서는 세상에 없다.청년시인 박철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불혹(不惑)을 넘겼다. 돈 버는 능력에 관계없이 남편을 아끼는 착한 아내와 눈매가 고운 두 딸을 얻었다. 가난이 불행의 동의어는 아니라며 일부러 소리 높여 웃었다.▲ ‘눈물’과 ‘낭만’이 뒤섞인 인간의 일상어느 날 시인의 집 하수구가 막혔다. 세상엔 못 하나 박지 못하는 사내들도 많다. ‘영진설비’ 아저씨가 수리를 나왔다. 출장비와 노임은 도합 4만 원. 박철의 아내가 말했다. “며칠 안에 인편으로 보내드릴게요.”꼬깃꼬깃 4만 원을 챙겨 넣고 시인은 아내의 심부름을 나섰다. 삐걱거리는 자전거 위로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목이나 축이고, 잠시 쉬었다 가지 뭐.’럭키슈퍼 평상. 쑥국새가 우는 환청 속에 노임은 내처 마셔버린 맥주 값이 되고. 시인의 첫 번째 영진설비 행은 무산된다.그리고 두 번째. ‘이번에는 한눈팔지 말아야지.’ 럭키슈퍼 맥주의 유혹을 뿌리치고, 포장마차 소주 한잔의 손길도 떨쳐내며 시인의 자전거가 달렸다.그러나 아차! 바로 그때 조그만 화원 앞 쓸쓸히 서있는 자스민 한 그루가 시인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게 뭐람. 짐작처럼 노임은 자스민 화분으로 바뀐다. 다시 영진설비 행은 무산.참다못한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온다. “대체 난 뭘 먹고 살라는 겁니까?”아내가 슬픈 눈으로 시인을 돌아본다. 박철은 말없이 웃으며 엄마의 손을 꼭 쥔 채 ‘시인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딸의 고운 눈썹만을 쳐다본다.끝끝내 시인은 “쑥국새가 울었기 때문이야” 혹은,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가 쓸쓸해 보여서 그랬어”라는 변명을 아내와 딸에게 하지 못했다.박철의 문단 선배인 신경림(83)은 눈물겹지만 낭만 가득한 시인의 일상이 담긴 이 작품을 읽고는 “밀린 노임을 갚으러 가다가 그 돈으로 자스민을 살 수 있는 박철은 꿈꾸는 사람”이라며 어깨를 다독였다고 한다.사실 시인만이 아니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는 ‘일상’에서 ‘꿈’을 발견하며 살고 싶다. 한숨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고, 절망의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빛나는 내일을 설계하는 인간으로.멀고 먼 동유럽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 두 도시 사람들 모두의 일상이 불행보다는 행복에 가까웠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져본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류태규

2019-04-25

사랑으로 빚은 지구위 가장 아름다운 무덤

풍문을 통해 상상은 했었다. 그러나 마주한 실상은 조잡한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었다. 눈처럼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 1cm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균형미와 완벽한 좌우 대칭. 거기에 미려한 곡선의 아름다움까지.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계 최고의 석조 건물”이라 칭송받아온 타지마할(Taj Mahal) 앞에는 기자를 포함한 100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놀라움의 순간’을 사진기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타지마할은 외형적 아름다움과 함께 건물이 만들어진 낭만적 내력까지 유명하다. ‘왕의 불멸하는 사랑이 만든 왕비의 무덤’인 타지마할은 고도(古都) 아그라(Agra)의 자무나강(江) 인근에 우뚝 서있다. 17세기 이곳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22년의 시간 들여 예술작품처럼 만든 왕비의 무덤무굴제국의 다섯 번째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은 당시의 왕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자신이 통치하는 땅을 넓히고 싶어 했다. 그랬으니 이웃 나라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많은 날들을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터에서 보낸 샤 자한.그는 독특하게도 왕자들이 아닌 아내 뭄타즈 마할을 전쟁터에 데리고 다녔다. 다른 왕들과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죽음의 위협이 곳곳에 도사리는 싸움의 현장에서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왕과 왕비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둘의 사랑은 전투가 아닌 의외의 사건으로 비극적인 파국을 맞는다. 샤 자한을 따라 데칸고원으로 간 뭄타즈 마할이 초원의 천막에서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것. 왕은 절망스런 몸짓으로 오래도록 통곡했다.그 당시 최고 권력자인 왕은 대부분의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다. 군왕이 여러 여성을 취하는 게 흠이 되지 않았던 시절. 하지만 샤 자한은 달랐다. 오직 왕비 한 사람만을 영혼을 나눈 친구이자, 사랑의 대상으로 아꼈다. 둘이 결혼생활을 통해 14명의 아이를 낳은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아그라로 돌아온 왕은 왕비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심한다.‘이슬람 건축의 최정점’이라 평가받는 타지마할은 그렇게 현실로 성큼 다가섰다. 2만 명의 인부와 수천 마리의 코끼리가 22년에 걸쳐 축조한 ‘지구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지고지순한 사랑엔 ‘비극’이 개입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비극은 사랑을 완성하는 유용한 재료가 된다. 타지마할과 만났던 순간, ‘순정한 첫사랑에 끼어든 청춘의 비극’을 고통스럽게 형상화한 박남철(1953~2014)의 시 ‘첫사랑’을 떠올렸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비극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은…포항 출신의 박남철은 형식의 파괴와 극단적 시어를 통해 독특한 세계인식을 보여준 시인.그는 순수함과 무구함으로 표현되는 10대의 통상적 사랑에 진원지 불분명한 폭력적 요소를 개입시킴으로써 그 안에 존재하는 비극성을 극대화시킨다.소년은 왜 좋아하던 소녀를 때린 것일까? 소녀는 어째서 가만히 맞고만 있었던 걸까? 소년의 분노와 눈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시 ‘첫사랑’은 독자들의 가슴에 여러 가지 질문을 새긴다. 어떤 문학평론가도 그 물음에 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저 앞서 말한 것처럼 “안타깝지만 사랑과 비극은 발을 맞춰 같이 온다”는 오래된 문장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21세기를 사는 소년의 사랑이 ‘허연 분노가/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울먹이는 형태의 비극으로 왔다면, 400여 년 전 인도의 황제 샤 자한의 사랑은 어떤 비극으로 끝을 맺었을까?마침내 타지마할이 완성된 순간. 모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순백의 대리석이 햇살을 받아 휘황하게 빛났고, 사용된 돌의 육중한 무게와는 관계없이 건물은 공중에 솟아오른 듯 가벼워 보였다. 이탈리아, 프랑스, 이란에서 온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은 최고급 석재와 보석을 이용해 ‘다시 짓기 힘든 매력적 무덤’을 만들어냈다. 터키, 티베트, 미얀마는 물론 멀리 이집트에서도 주먹만 한 보석들이 상자에 담겨 공사 현장으로 조달됐다고 한다.매끈하게 조각된 아치형의 입구와 수만 송이 꽃으로 장식된 정원, 예술작품에 가까운 수로와 연꽃 모양의 수조까지….하지만 ‘보석 같은 왕비의 무덤’을 둘러싼 낭만적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타지마할은 어두운 그림자도 함께 불러왔다. 공사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을 맞은 것.그로부터 10년 후. 경제적 위기로 인한 혼란 끝에 샤 자한은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높은 탑에 갇힌다. 거기서 타지마할을 내려다보며 죽는 날까지 왕비를 그리워했다는 무굴제국의 왕.사랑하는 아내의 몸에서 나온 자식에게 배신당한 샤 자한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그 심정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느린 발걸음으로 타지마할을 둘러본 뒤 아그라의 밤거리를 걸었다. 사랑을 비극으로 이끄는 인간의 욕망에 관해 생각했고, 욕망의 상징처럼 이야기되는 뱀을 떠올렸다. 아래 졸시는 그날 밤 불면에 시달리며 쓴 것이다.뱀에 관하여철로가 지나는 도시 외곽에 사는 나는밤마다 뱀을 꿈꾼다두 개, 혹은 네 개의 발로는 모자라온몸으로 지상에 어지러이제 흔적을 꿈틀거려 놓는거대한 자기학대뒷걸음질 모르는운명적 무모함을하얀 얼굴 가느다란 손가락의 사내들비대한 욕망을 잉태한 이미 늙은 소녀들이떠다니는 도심붉고 푸른 독을 품고제 살갗에 상처를 내는황홀한 쾌락으로피 흘리는 우주, 고통의 심연으로눈을 잃은 뱀이 간다밤낮 없이 배설되는끈적이는 밑바닥으로밤꽃향기에 끌려, 뱀이눈을 잃은 뱀이 숨 가쁘게 기어간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류태규

2019-03-28

그 어떤 색채가 이 웃음보다 고울까

‘국경(國境)’이란 단어를 발음하면 이상스레 어둡고 탁한 느낌이 몰려온다.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국경이라고 하면 정치·이념적 적으로 규정된 북한을 먼저 떠올리는 탓이 아닐까?누구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금지된 선(線)’인 남한과 북한의 국경.하지만 유럽이나 인도차이나 반도를 여행하다 보면 생각이 바뀐다. 그곳에서 국경을 넘는다는 건 공무원에게 여권을 내밀고 조그만 도장 하나를 찍어 달라 청하는 ‘수월한 요식 행위’ 정도에 불과하다.기자의 경험에 의하자면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바키아, 헝가리에서 슬로베니아, 터키에서 이란, 라오스에서 베트남으로 국경을 넘을 때 모두 그랬다. 어려울 게 없었다.국경을 지키는 경찰들과 웃으며 담배를 나눠 피울 정도로 긴장감이라곤 생기지 않았다. 이래서 “경험이 무섭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 그렇지만 어렵지 않은 유럽과 동남아시아에서의 월경(越境)과는 별개로 어느 지역이건 국경 인근 마을은 무언가 스산하고 우울한 풍경을 지녔다.무엇 때문일까? 인종과 문화, 종교와 생활양식이 다른 나라와 얼굴을 맞대고 사는 이들 특유의 표정을 지닌 국경 마을 사람들. 슬로바키아와 터키, 이란과 베트남, 헝가리와 라오스 국경 인근 주민들이 모두 비슷했다. 몸짓과 말투, 표정까지 닮아 있었다.▲ 쓸쓸한 풍경의 국경에서 만난 ‘희미한 미소’이미 100여 년 전부터 캄보디아와 태국 사이에서 영토 분쟁을 겪어온 포이펫( Poipet)은 미려한 석조 건축물이 즐비한 세계적 관광지 앙코르 와트(Angkor Wat)를 찾는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조그만 국경 마을이다.경제적으로 열악한 캄보디아의 여타 마을들처럼 포이펫 역시 먼지 날리는 도로 위를 오가는 걸인이 적지 않고, 상하수도와 전기 등 도시 인프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편하고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것이라곤 중국과 태국에서 무시로 드나드는 도박꾼을 위한 고층 카지노 건물 정도가 전부인 황량한 풍경의 마을.소녀를 만난 건 바로 그 포이펫에서였다. 사진작가인 선배와 함께 앙코르와트로 가는 택시나 버스를 알아보기 위해 주변 상인들에게 정보를 구하고 있던 때였다.갑작스레 열대성 소나기인 스콜(Squall)이 쏟아졌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기세로 퍼붓는 엄청난 비.짧은 순간에 사람들의 바짓단으로 흙탕물이 튀었다. 배낭을 둘러멘 젊은 여행자들은 빠른 걸음으로 스콜을 피해 처마 아래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이건 뭐지. 열두어 살쯤이나 됐을까? 조그만 소녀 하나가 빗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니며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 일행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흠뻑 젖은 채로. 그리고는 웃었다. 선배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소리를 내거나 잇몸이 보이는 커다란 웃음이 아닌 희미한 미소. 갑작스레 흑백 사진처럼 보였던 주위 풍경이 컬러 사진인양 환해졌다.소녀의 미소가 너무나 맑고 순정해 보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욕심 없는 웃음이었다.그 순간, 10여 년 전 감탄하며 읽었던 정희성(74) 시의 주인공 ‘민지’가 떠올랐다. 민지의 웃음도 포이펫 소녀의 미소 같았을 것이 분명하다. 환하고 순박해서 꾸밈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의 웃음.▲ 모든 소녀들이 꿈을 잃지 말기를…비단 정희성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다. 아이들은 세상의 때가 묻은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살피고 해석할 줄 안다. 그네들은 어른에겐 없는 ‘순정한 눈’이라는 강위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다.시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멀리 산골로 귀농한 제자를 찾아간 노시인. 그는 거기서 꼬마 숙녀 민지를 만난다. 꽃과 풀도 사람들처럼 아침밥을 먹어야 한다고 믿는 맑은 눈망울을 가진 조그만 아이.잡초에게도 인사를 건네며, 생명을 가진 것들 중 하찮은 것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민지는 어떻게 보면 어른들의 스승이 아닐까.‘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풋풋함’을 가졌으며, 순수한 ‘말 한마디’로 우리의 편견과 무지를 꾸짖는 당돌함. 그 당돌함 안에 오롯이 담긴 소녀 특유의 선량함.정희성은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 작품 ‘민지의 꽃’을 통해 어른들이 잊고 사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진정한 순수함에 닿으려면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인지를 독자들의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이고 있다.이제 시의 무대인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에서 다시 캄보디아의 가난한 국경 마을 포이펫으로 돌아가 보자.초라한 옷차림과 검게 탄 얼굴의 포이펫 소녀. 한빈함 속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음이 분명한 그 아이의 현재가 구구한 설명 없이도 느껴진다. 과거 또한 마냥 밝지만은 않았을 것이다.그렇다고 소녀의 미래까지 흑백 사진 속 그림자처럼 어둡고 우울하기만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부끄럽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으로서.소녀건 소년이건 세상 모든 아이들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누가 함부로 이 문장을 부정할 수 있을까.아래 졸시는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작은 행복을 느낀 날 세상 밖으로 ‘사라진 소녀’가 세상 속 ‘희망’으로 부활하는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쓴 졸시다.한국 산골 마을에 사는 다섯 살 민지도, 캄보디아 국경 마을 포이펫에 살고 있을 사진 속 소녀도 그 미래가 찬란한 무지개 빛깔로 빛나기를 진심으로 빈다.그 강, 소녀를 찾았다희망은 기어이 등을 돌렸다만취한 목소리의 사랑노래마주 걸면 따숩던 어깨의 기억을 뺏긴 우리돌아서 안타까워했을 따름이다겨우 꽃들만이 제 빛깔 지킬 뿐인추방자의 도시질척질척 비가 내리고한 치 앞도 분간 못할 안개다어둠의 혓바닥이 삼킨 작은 아이들우울하게 잦아드는 목쉰 속삭임이제는 피라미 한 마리까지 떠나버린검은 기침 쿨럭이는 강상한 가슴으로 그 앞에서면기억은 천식처럼 발작하건만팔이 아프게 돌을 던져도둥근 파문은 말이 없다십수 년 전 안개 속으로 사라진 소녀는목 메인 세상 넋두리에도 대답이 없고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부활했다던 그 옛날 선지자인 듯우리들 어설픈 믿음과 속삭임 속에그 소녀, 가라앉은 잿빛 하늘 찢으며절절한 몸부림으로 돌아올지도./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9-03-07

오래된 책의 푸근한 냄새, 누군가는 그 안에서 나무향을 맡는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엔 교보문고라는 한국에서 가장 큰 책방이 있다. 하루에 수만 명이 지나다니는 그 서점의 바로 앞엔 아래와 같은 문구를 새긴 커다란 석비(石碑)가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가끔 서울에 가서 그 앞을 지날 때면 이상하게 우울해진다. 이제는 누구도 감동시키거나 설득시키기 힘든 낡은 레토릭(Rhetoric)이기 때문이다. 책과 인간의 관계를 명료하게 요약한 글귀.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 문구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저 못 본 척 스쳐 지날 뿐. 이는 ‘책의 시대’가 망해버렸음을 실감케 해준다.하지만 세상 어디에나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 소수가 있기 마련이다. 아직도 책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안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 축적된 인류의 문화적 유산이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것을 종교처럼 믿는 이들이 그렇다.“21세기 한국인들은 책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우려에 “그렇지 않다”고 당당히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있을까? 아마 드물거나 없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도서관에서 떠올린 시(詩)3년 전쯤 프랑스 파리를 여행했다. ‘책 속에서 길을 찾고자 했던’ 청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que Nationale de France)과 ‘조르주 퐁피두 예술문화센터’를 찾았다.프랑스 국립도서관은 650여 년 전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민간도서관. 한국 사람들에겐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 빼앗긴 ‘외규장각 도서’가 보관된 곳으로 아프게 기억되는 장소이기도 하다.“모든 이들이 가장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도서관”을 지향하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공간이 아닌 수천 년 축적된 프랑스의 문화가 교육과 결합되는 공간이다.건축 디자이너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건물은 규모와 미려함 모두에서 사람들을 매혹한다. 나무와 쇠, 흙과 유리가 빼어난 교향곡처럼 하모니를 이루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보유한 3천500만 권의 장서(藏書)로도 유명하다.1977년 개관한 조르주 퐁피두 예술문화센터 내부엔 도서관이 있다. 얼핏 보면 투박한 공장처럼 생긴 외관이지만, 그 안에 ‘인류가 축적한 지식의 보물창고’라 할 도서관과 영화관, 갤러리 등을 효율적으로 배치한 것. 철골과 배관이 외부로 노출된 독특한 디자인의 퐁피두 예술문화센터는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 이상으로 미적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되기도 한다.파리 시민들은 이곳을 “책,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이 함께 숨 쉬는 복합문화공간”이라 자랑하고 있다.새롭게 출간된 소설과 시집, 미술과 음악 관련 신간들로 가득 채워진 퐁피두도서관은 프랑스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도서관에 입장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수백 미터의 줄을 만드는 풍경이 거의 매일 연출될 정도다.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1846~1870)은 책을 만드는 재료인 ‘나무’를 향해 “스스로는 위대함을 모른다”고 노래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작가들은 책 속에 스며있는 나무의 향기를 어떻게 작품 속에 녹여냈을까? 기자가 떠올린 시인은 오세영(77)이었다.▲ 책에서 ‘삶의 길’을 찾는 시대는 끝난 것일까오세영은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추위를 이기며 어울려 살아가는 나무의 선량함을 보며, 인간들 또한 ‘맑은 하늘을 우러러’ 순정하게 살아가자고 권하고 있다.기꺼이 베어져 사람들에게 필요한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무는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요구하고 있을까?아마도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버티며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지.나무와 책의 가치가 한없이 평가 절하되는 안타까운 시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기자는 책에서 ‘사람이 걸어야 할 마땅한 길’을 찾던 옛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또한 이제는 사라진 한국의 몇몇 서점을 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다.한국에 문학청년이 지천이던 1970~80년대. 기자 주위에도 책 읽기를 맛있는 요리 먹는 것 이상으로 좋아하던 세칭 ‘문학청년’이 여럿이었다. 매번 새로운 책을 사 읽을 돈이 없었던 그들은 도서관과 헌책방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즐겨 다니던 서점과 도서관에 얽힌 사연이 없을 수 없다.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은 몰려다니던 문예반 친구들이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를 만난 해다. 남부 바닷가 도시의 번화가에 자리 잡았던 H서점에서 용돈을 쪼개 불문학자 김현이 번역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랭보의 시집을 샀다.아까워 야금야금 읽으며 결심했다. ‘나도 시인이 되겠다’고. 예민한 영혼으로 상처 받은 심장을 안고 문명의 절정 파리를 떠나 아프리카를 향한 랭보의 역마살. 뒤늦게 닥친 사춘기에 어떤 것에도 열망을 느끼지 못했던 열여덟 살 소년은 ‘정주(定住)를 거부하고 떠도는 시인’에게 사로잡혔다.세계명작동화나 위인전에서 벗어나 단행본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진 것도 그즈음이다. 그랬기에 추억의 공간이었던 H서점이 경영난으로 폐업 위기를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섭섭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리운 ‘문학청년의 시대’20대 초반 자주 찾았던 D서점도 잊을 수 없다. 카페와 술집이 늘어선 부산 한복판에 돌올하게 존재했던 거기서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프랑스 혁명사 3부작’ ‘문학과 변증법’ 등을 구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칼 마르크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폼’이 나던 시대였다.그 시절 혁명을 꿈꾸던 청년들은 세상을 낙관했다. 그 낙관은 독서의 힘에서 온 게 분명했다. 그랬는데…. D서점 역시 경영난으로 2010년 문을 닫았다고 한다.동네마다 조그만 책방 하나 정도는 있던 1980년대는 이미 오래 전 기억이다. 헌책방에 서서 몇 시간이고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책을 읽던 학생들은 사라졌다. 이제 몇몇 대형 서점만이 겨우 살아남아 ‘한국에도 서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오늘.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수 없는 시대가 서글프다.“세상 가장 좋은 향기는 오래된 책 냄새”라고 말하던 한 스승의 말이 떠오르고, 가난했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던 그 옛날 문학청년의 시대가 그리워진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조용한 파리의 도서관에서 몇 달쯤 책만 읽으며 살아보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이준성

2019-02-21

‘나이듦’의 축복, 그 느긋한 아름다움

‘늙는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은 어느 인간에게나 서글프고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노화와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우스개처럼 “불공평한 세상이지만 이 두 가지에서만은 평등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는 염세주의자도 존재한다.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았고, 남성과 여성의 공통된 바람이었으며, 시대가 바뀌어도 그 지향은 변하지 않았다.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나라 안팎으로 사람들을 보내 불로초(不老草)를 찾게 했다. 이 ‘불가능한 프로젝트’에 젊은 남녀 3천 명이 동원됐다.그들은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 멀리 한국까지 헤매 다니며 ‘먹으면 늙지 않는 풀’을 구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약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음에도 진시황제는 겨우 마흔아홉에 죽었다.16세기 동유럽 귀족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바토리(Elisabeth Bathory) 역시 늙지 않는 삶을 원했다.40세를 넘어서면서 노화한다는 걸 스스로 느낀 그녀는 끔찍한 방법을 통해 젊음을 찾고자 했다. 10~20대 여성들의 피로 목욕을 한 것.‘불로불사(不老不死)’라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시녀는 물론 농부의 딸들까지 유인해 살해한 바토리. 수백 명에 이르는 젊은 여성을 죽인 그녀는 결국 재판을 받았고,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종탑에 갇혀 사망한다. 그때 나이 쉰넷.끔찍한 이야기가 길었다. 황당한 방법을 통해 영원히 살고자 했던 왕과 귀족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편안한 표정’이 보기 좋았던 노인들을 만나다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엔 늙음과 죽음을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인간만 있는 건 아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노화와 그에 따른 소멸을 자연스런 세상사 순리로 받아들인다.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앞에 순명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후자의 경우엔 나이를 먹어갈수록 편안하고 넉넉한 표정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적당한 체념과 포기는 정신 건강은 물론 육체적 건강에도 좋다.아무리 거부한다고 해도 노화는 피해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 모두에게.태국과 프랑스를 여행했을 때 ‘온화한 얼굴이 아름다워 보이던 노인’을 몇 명 만났다.북적거리는 시장 노점에서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 그윽한 눈길로 젊은이들을 바라보던 방콕의 영감님, 카페에서 매력적인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 파리의 할아버지, 환한 미소로 처음 만난 낯선 여행자에게 갓 구운 빵을 건네던 할머니들….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자가 젊은 시절 아껴가며 읽었던 황지우(67)의 시 한 편이 기억 속에서 불거져 나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작품이다.▲ 늙는다는 사실은 시인도 견디기 어렵지만...앞에서 재롱을 떨던 어린 딸은 어른이 돼가고, 시인인 아버지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사람들을 피해 바깥을 거닐며’ 늙어간다. 부정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세월이 눈앞에 들이닥쳤다.늙음 앞에서라면 현명한 시인도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다’.날렵하던 청년 시절의 몸은 어느새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몰골로 변해버리고, 그게 ‘어색해져서 견딜 수가 없다’고 노래하는 시인. 하지만 황지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왜냐? “시인은 전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절망적인 노화를 지켜보면서도 아래와 같은 위로를 스스로에게 전하고 있지 않은가.더 늙더라도 세상에 항복하거나 일상에 투항하지 않고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아깝게 바라볼 것’이라는 관조(觀照)와 낙관 말이다.청춘남녀가 깔깔거리며 오가는 여행자의 거리에서 하얀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말없이 앉아 있던 태국 노인과 현란한 손놀림으로 젊은 관광객들에게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들려준 프랑스 노인.황지우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이미 ‘견디기 힘든 아름다운 폐인’의 단계를 벗어난 게 아닐까?늙어가는 자신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늙음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죽음 또한 슬픔과 통곡으로만 오진 않을 듯하다. 진시황제와 엘리자베스 바토리가 이들을 봤어야 했는데….▲ ‘죽음의 향기’는 두렵기만 한 걸까?젊음을 떠나보낸 후 늙어가고 마침내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인간의 일생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다. 바로 아버지.황제도 귀족도 아니었기에 그는 언감생심 불멸 따윈 원하지도 않았다. 회갑을 넘기면서는 자신이 늙는다는 걸 웃으며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노인들처럼 간과 위가 나빴고, 혈압도 높았지만 그로 인해 주눅 들거나 하지 않았다.마침내 일흔을 목전에 두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도 천명이거니 하며 여유롭게 받아들였다.자신의 존재가 사라져 식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겐 머지않아 잊힐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거창한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어디선가 박하향이 풍겨오는, 야단스럽지 않은 조용한 죽음이었다. 인간이란 자신도 결국엔 늙고 죽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어른이 된다. 이제 기자도 어른이 돼가는 걸까? 아래는 11년 전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쓴 졸시다.아버지의 죽음에선 박하 향기가 났다도둑담배를 피우러 간 병원 계단실연한 동료를 안아주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녹슨 목련이 오래도록 나무를 붙들던그해 봄은 지나치게 길었고마약성 진통제로 견디는 노인키가 큰 레지던트의 치마는 벚꽃 빛깔이다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모래 섞인 바람이 창을 두드리면흐린 눈망울이 벚꽃을 찾고백년 같은 하루가 끝나가는 저물녘녹두죽을 끓여온 엄마가 운다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손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면모진 힘으로 뿌리치며 자꾸만 돌아눕고샤워도 양치질도 잊은 지 오래행여 숨이 끊겼을까 호흡을 확인한다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다른 세상에서 묻혀온 냄새인 듯머리칼과 목덜미에선 박하향이 났고./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9-02-14

세상 모든 슬픔이 파리의 석양 속에 스며들었을까

자신 내부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과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앞의 경우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여행을 꿈꾸는 삶을 산다면, 후자는 아이들이 부르는 단조로운 동요와 같은 일상을 그저 견디고 있을 뿐, 안타깝게도 일탈의 용기를 내지 못한다. 세상에는 이처럼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인생이란 단 한 번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기를 열망해야 할까?이런 질문과 마주 섰을 때 시인과 여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한 번 뿐인 인생이니, 당신의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게 옳지 않겠는가.”높은 연봉과 창의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이들도 가끔은 그걸 포기하고 기꺼이 ‘가난한 떠돌이’ 혹은 ‘전망 어두운 여행자’의 삶을 택한다.인도네시아의 푸른 바다 또는, 네팔의 설산(雪山)과 푸른 하늘이 던져주는 매혹에 취해서.몇 해 전 기자가 만난 백경훈 씨가 그랬다. ‘잘나가는 광고기획자’였던 그는 촬영지로 적합할 지를 검토하기 위해 우연히 회사 자료실에 비치된 네팔 관련 비디오테이프를 본 후 인생을 바꿨다. 화면 가득 펼쳐지는 히말라야의 신비로운 풍경에 완벽히 매료되고만 것이다.이후 3년의 짝사랑 끝에 마침내 휴가를 얻어 수천 미터의 설산들이 줄을 지어 달리는 히말라야에 다녀온 백경훈. 이후 그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네팔의 주술’에 걸렸고, 마침내 직업과 일상의 고리를 호쾌하게 끊어버렸다. 이후 그는 고액연봉자에서 ‘가난한 여행 작가’로 직업을 바꾼다.▲ 프랑스 파리의 저물녘 풍경을 보다비단 백 씨만이 아니다. 누구나 제 마음 안에 간직한 ‘이상향’이 있다. “낭만의 절정을 맛볼 수 있다”고 알려진 프랑스 파리도 많은 이들이 여행하거나 머물고 싶은 도시 중 하나다.바로 그 파리에 도착한 첫날. 그곳에 머물며 프랑스어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지인을 만나 가장 먼저 “에펠탑으로 가자”는 부탁을 했다. 유럽의 진홍빛 석양을 거기서 보고 싶었다. 그건 기자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잘 정돈된 거리를 달려 파리의 랜드마크(Landmark)로 불리는 에펠탑에 도착했을 땐 마침 저물녘이었다.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탑의 위 혹은, 아래서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말이 필요 없었다. 아름다웠다.하지만, 낭만과 아름다움 안에는 언제나 모종의 서러움과 눈물이 잠복해 있는 법. 한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기억 저편에서 소환된 노래 한 편이 있었으니, 허수경(1964~2018) 시인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였다.▲ ‘슬픔’ 속엔 언제나 ‘희망’이 숨어있고지나온 날보다 앞으로 펼쳐 보일 시 세계가 더 기대되던 허수경 시인은 많은 독자들의 아쉬움 속에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아직은 창창한 54세의 아까운 나이에.“우리네 삶은 슬픔을 거름 삼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나아갈 것”이라 낙관적으로 전망했던 허수경의 빼어난 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는 1988년 초겨울 출간된 동명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군사독재가 지배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고통과 어두움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당당히 살아갔던 서민들. 그들의 삶을 곡진한 문장과 진솔한 시어로 표현해낸 허수경의 시(詩)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감동적이다.그렇기에 적지 않은 문학평론가들이 허 시인을 “선명한 역사의식과 시대적인 감각을 뛰어나게 형상화해, 민중에 대한 가없는 애정과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상찬했다.‘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바람이 내려와/어린 모를 흔들 때’란 문학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읽더라도 ‘수난의 시절’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그런 상황임에도 절망하며 주저앉지 않고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을 다시 일어서는 힘으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허수경 시인.맞다.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언제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운 건 기쁨보다는 슬픔의 힘이 아니었던가. 그걸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결국 진리란 소수의 깨달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시인만이 아닌 우리도 알고 있다.그래서다. 허수경이 말한 바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는 짧은 문장은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독자들의 심장을 아프게 때리고 예술적 자각으로 이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이란 없으니…다시 ‘꿈꾸는 삶’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사람은 어쩔 수 없이 위험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세상을 산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가봐야 제대로 된 생을 산 것이라 조언했다.모든 것의 끝, 심지어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많은 이들의 열망을 알고 있기에 전할 수 있는 말이다.그곳이 네팔이건, 프랑스 파리이건 낯선 땅은 오늘도 우리를 부른다. “영혼이 자유로운 자, 내게로 오라”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제 안에서 꿈틀거리며 맹렬하게 끓고 있는 ‘순정한 욕망’을 지닌 이들은 그 유혹을 떨치기가 어렵다.백경훈은 그 유혹을 기꺼이 받아들여 히말라야의 만년설과 만났고, 기자는 아름다운 도시 파리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과 악수할 수 있었다.마침내 수만 가지 유혹과 욕망이 끝나는 날, 꿈이 사라지는 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니 그 죽음이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니리라.아래 졸시는 이런 세상사 진리를 서툴게 표현해본 것이다.망자(亡者)의 명함먹은 귀로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한때 휘황하게 생을 밝히던 네온사인 모두 꺼지고어둑한 길의 끝머리에 선 낯선 사내손짓해 그를 불렀다두려움보다 반가움이 먼저 왔다사라진다는 것이 마냥 쓸쓸한 일이기만 할까즐거움만큼이나 버거웠던 고난의 무게물 먹은 솜을 짊어진 당나귀처럼 힘겨웠다춤추며 노래하는 장미의 나날이 저 너머에 있다면어찌 신(神)의 부활만 아름다울 것인가노래가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지상에서노래가 모든 것이 되는 천상으로그는 떠나갔다. 총총한 걸음소리 높여 콧노래 부르며 사라진 가난한 사내흔들리고 때론 술렁였던 생애망자가 지상에 머문 흔적을명함 한 장만이 또렷이 증언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9-02-07

그 먼 바다, 슬픔에 빠진 시인의 기억을 건져내다

짙푸른 물빛과 투명하게 빛나는 햇살. 태국의 바다는 문학으로 세상의 중심이 되고자했던 청년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그들 사이에선 ‘전설’로 떠도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1854~1891). 그가 만약 살아 푸켓과 파타야의 파도를 보았다면 어떤 절창을 만들어냈을까?일 년 내내 더위만 지속되는 남국. 태국에선 가만히 있어도 줄줄 흐르는 땀이 사람을 힘들게 한다. 거기에다 폭염과 잠복한 게릴라처럼 일상을 습격하는 스콜(Squall). 사람을 축축 늘어지게 만드는 눅눅한 습기에 두 손 들고 항복해야 하는 나라.여행 기간 대부분 하늘은 물에 젖은 담요처럼 내려앉고 바다는 길 잃은 아이처럼 울어댔다. 흩뿌리는 소나기를 보며 방파제에 서서 듣는 파도소리는 흡사 천둥소리처럼 두렵고도 장엄했다. 낯선 나라의 익숙지 않은 날씨처럼 심란해진 마음은 쓸쓸함을 부르고, 그 쓸쓸함은 아주 먼 기억을 느리게 소환했다. 빛나는 태양 아래서의 우울증이라니….어울리지 않았지만 닥쳐온 진솔한 감정을 떨쳐낼 이유 또한 없었다.소설가 김훈(71)의 말을 빌리자면 시인이란 “누런 해가 뜨는 곳에서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슬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다.유럽과 중국 관광객이 하나 둘 빠져나간 황량한 해변, 서늘하고 푸른 바다의 적막감이 마구잡이로 밀려왔다.그것들과 만났으니 술 한 잔이 간절해질 수밖에. 나무로 만든 계단이 삐걱거리는 항구의 조그만 카페에 홀로 들어섰다. 오징어회나 우럭매운탕처럼 눈에 익은 안주는 없지만, 큼직한 게와 새우를 튀겨 독한 태국산 버번(bourbon) 위스키를 몇 잔이고 들이켰다.▲ 낯선 해변 술집에서 떠올린 ‘한국의 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달콤한 취기가 밀려왔다. 다시 방파제를 향했다. 철썩대며 밀려오는 파도의 하얀 포말을 깔깔거리며 반기는 얼굴, 푸른 눈동자의 연인들이었다.5~6살로 돼 보이는 딸을 무등 태워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젊은 아버지의 환한 웃음도 참으로 보기 좋았다.가득한 부러움으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 오래 전 인류학자들의 전언을 떠올렸다. “지구 위 모든 생명은 바다에서 왔다.”그 바다가 선물하는 새하얀 파도가 무람없이 밀려드는 조용한 이국의 해변.낯선 바다에서 익숙한 한국의 동해안이 갑작스레 떠오른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더불어 시인 최영미(58)의 가슴 아픈 문장으로 채워진 시 한 편이 눈앞으로 흘러가는 걸 봤다. ‘속초에서’다.▲ 아름다운 세상이란 ‘기댈 사람’이 곁에 있는 것새하얀 살결을 가진 어린 자식의 어깨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듬직한 팔뚝이 없다면, 밀려오는 파도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에 가 닿는 연인의 입맞춤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 애정과 연민의 힘이 세상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지.마침내 태국의 바다에서도 까무룩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었다. 몇몇 여행자들은 어두운 길을 걸어 다시 한 번 방파제로 가거나, 좀 더 농밀한 취기를 위해 또 다른 술집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난바다로 불빛을 비춰 길 잃은 배를 항구로 귀환시키는 등대와 느닷없이 찾아온 슬픔과 물기 어린 비애를 안고 산책에 나선 사람들의 앞을 밝혀주는 가로등만이 쓸쓸하게 불을 밝히는 밤.세상과 인간의 비애를 남들보다 일찍 깨달은 최 시인은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을 서럽게 기억하며 ‘하얀 거품 쏟으며’ 제 곁을 떠나간 것들을 그리워했다.하지만 최영미의 그리움은 마냥 아래로만 침잠하지 않았다.‘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 삶이고 세상이지만 희망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환하게 불 켜고 꼬리 흔들며 달려드는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지 않았을까.“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가리”라고.맞다. 제 곁에 기울어가거나, 기댈 사람이 있는 이들은 외롭지 않은 법. 그 따스함이 인간을 무엇보다 큰 힘으로 위로하니까.▲ 막막한 바다를 항해하는 게 인간의 삶이지만…태국에서나 우리나라 동해에서나 마찬가지로 우뚝 서 뱃사람들의 길잡이 역살을 하는 등대를 봤다. 제 안에 간직한 안타까운 빛으로 세상의 막막한 어둠을 잠시 잠깐이나마 비추는 등대의 몸부림에 심장이 서늘해졌다.생명이 없는 등대지만 그것에서 ‘착하고 믿음직한 향기’가 풍겨왔다. 소리 내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엔 등대만큼도 선량한 인간이 드물다”는 엄정한 사실을.바다와 파도를 처음 만난 것처럼 설렘 가득했던 그날. 기자는 ‘환하게 불 밝힌 죽음이 꼬리 흔들며 달려들기’ 전에 나의 아픔보다 타자의 슬픔 속으로 먼저 기울어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아래 졸시는 그 결심을 주절주절 표현한 것이다. 아무리 부정해도 우리는 결국 자신의 존재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그저 ‘떠도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바다, 출생의 비밀범선으로 요하네스버그를 떠나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아버지는 목덜미에 나비를 문신한 인도계 아프리카인. 파타고니아에서 태어나 해변으로 밀려온 혹등고래를 치료해준 엄마는 마드리드 뱃사람과 아르헨티나 원주민의 피가 섞인 붉은 얼굴의 메스티소였다.바나나를 따서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군도를 오가던 아버지는 초록빛 빙산을 타고 보라보라섬 사촌언니를 찾아온 엄마를 에메랄드빛 산호초가 꺼이꺼이 우는 타히티 북부 갈대숲에서 만났다. 1871년 여름이었다.엄마는 망고스틴 여섯 개를 건네는 아버지의 흙 묻은 손바닥을 얼굴로 가져가 달콤하게 핥았다. 둘이 몸을 섞은 얕은 바다에선 일만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맹그로브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웅얼거렸다. 원주민들은 뜨지 않는 달을 기다렸다.여섯 달 후. 아버지는 이슬람양식으로 만들어진 바닷빛 타일을 실은 목선을 타고 바그다드로 떠났다. 움직이는 섬에 오른 엄마 역시 북서쪽으로 흘러갔다. 외눈박이 숙부가 야자유 일곱 병을 들고 나와 배웅했다. 동아시아 낯선 항구에 도착한 엄마는 백년 후 사내아이를 낳았다. 나는 1971년 부산에서 첫울음을 터트렸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9-01-24

황홀한 빛으로 세상을 껴안은 청춘을 추억하다

아주 먼 옛날이 아니다. 겨우 20~30년 전 청춘들은 아래와 같은 문장에 매혹됐다.“꿈을 꾸는 자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시간을 좀 더 뒤로 돌려보자. 16세기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청춘은 불안전한 주식에 투자할 권리가 있다”는 말로 젊은이들을 고무시켰다. 이와 유사한 말을 한두 가지만 더 인용한다.“청춘은 누가 부추기지 않아도 제 가슴 안에서 스스로 모반을 꿈꾼다.”“젊음, 그것은 빛이 없어도 스스로 반짝이는 보석에 다름없다.”가장 빛나는 생의 한때, 다시는 되돌릴 수 없기에 아름다운 시절.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청춘을 예찬하는 문장은 고금과 동서양을 불문하고 어디에나 가득하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그 단어의 배후에 ‘꿈’과 ‘모험’이 있기 때문이다. 도전과 모험, 새로운 시도와 시행착오가 없는 청춘이란 ‘앙꼬 없는 찐빵’이다. 안정적인 일상과 충분히 예측 가능한 미래를 은유하는 ‘안전한 주식’은 언제나 모반을 꿈꾸는 청춘과 어울리는 단어가 될 수 없다.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스스로 반짝이는 보석이 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것. 이게 바로 ‘불안전한 주식’이고 젊은이는 그 주식에 투자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태국 ‘여행자의 거리’에서 만난 청년들동남아시아 여행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카오산 로드’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태국의 수도 방콕에 자리한 ‘여행자들의 거리’ 카오산 로드. 한 해 수백만 명의 젊은 배낭여행자들이 이곳에 모여 정보를 나누고, 친구를 만들며, 스스로의 빛나는 청춘을 확인한다. 20대 초중반 청년들의 환호와 웃음소리가 가득한 공간. 지난해 여름 카오산 로드를 찾았다. 다섯 번째 방문이었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엔 여행자가 정말 많다. 자정을 넘긴 시간임에도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불안정한 주식’에 투자한 청춘들이 절대다수였다.영국에서 왔다는 친절한 여대생들은 즐거움에 겨워 낯선 사람의 사진기를 바라보며 거침없이 웃어보였고, 흥겨운 댄스뮤직이 흘러나오는 카페 앞에선 신나는 즉석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밤의 거리에서 만난 청년 넷은 캐나다와 독일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날 처음 본 사이임에도 이미 ‘절친’이 돼있었다. 그들의 밝은 표정과 넘치는 기운이 부러웠다. 윤동주(1917~1945)가 쓴 시 ‘사랑스런 추억’의 마지막 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꿈을 잃지 않아야 청춘많은 한국인들이 아픔과 아름다움으로 기억하는 시인 윤동주는 ‘청춘을 살다가’ 스물여덟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보낸 젊은 날은 일제강점기와 겹쳐 있었고, 분명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터.투명하고 뜨거운 영혼을 지낸 채 짧게 지상에 머물다 간 윤동주는 자신 앞에 닥쳐온 수난과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어둡고 습하며 빈곤한 생활 속에서도 삶과 철학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던 청년 시인은 자신과 더불어 나라를 끌어안고자 했다. 주위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 또한 버리지 않고 살았다. 그러한 삶의 태도는 그가 남긴 작품들 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그래서였을 것이다. ‘사랑스런 추억’ 속에선 눈물과 웃음,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느껴진다. 고뇌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사람의 그림자가 읽힌다.‘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는 서글픈 상황임에도 눈부신 햇빛 속을 날아가는 비둘기를 바라보며, 미래를 은유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청년 윤동주’.그렇기에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버리지만’ 시인은 이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새롭게 떠오를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며 이렇게 조용히 노래할 뿐.“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다시 사랑과 여행이란 ‘젊음의 단어’를 찾아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유럽과 북미의 젊은이들도 청춘시절의 윤동주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걱정 하나 없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낯선 도시의 여행자가 돼 밤새 떠들고 마시지만, 그들의 삶 속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게 분명하다. 인간 모두는 저마다의 고민과 아픔 하나씩은 가지고 산다.한국과 마찬가지로 유럽 전체를 휩쓸고 있는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은 청년들을 낭떠러지로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곳 청년들 또한 도전과 모험보다는 안정과 안락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하지만 그런 ‘어둠의 터널’을 제 힘으로 빠져나와 밝은 빛과 만나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청년들 또한 많다.또래들 다수가 안정된 직장과 편안한 삶에 매달릴 때 자신은 ‘불안전한 주식’에 과감히 투자한 용기 있는 이들을 만난 방콕 카오산 로드.그들이 청춘을 걸어 투자한 것은 다름 아닌 거침없는 모험과 때론 무모해 보일 수 있는 꿈이었다. 여행 또한 모험과 꿈의 일부인 것이 분명하다.아래는 기자가 ‘꿈’과 ‘모험’이라는 불안전한 주식에 투자했던 청춘을 기억하며 쓴 졸시다. 우리들 젊은 시절엔 사랑을 향한 에너지 또한 뜨겁고 선명했다.보잘것없는 문장이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번민하는 오늘날의 청춘들에게 작은 위로나마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진심을 다해 세상 ‘모든 청춘들’을 응원한다.동백을 보며구차히 살아온 내게도우리라는 단어 유효할 때 있으니손톱 끝마다 멍울지는 그리움비 내리지 않아도스스로 목을 꺾어온 세월주름 잡힌 어머니의 눈가에 피는 꽃신도 시기할 순홍(純紅)의 정염으로좋다. 지루했던 겨울 서성거림의종지부를 찍고순결한 걸음으로 오라여윈 가슴 모두 벌써 울컥이고 있다붉게 맺혀 떨어지는 선혈의 기억들이미 지쳐버렸을지 모를나를 기다리는쉬이 꺾어지는 모가지로참지 못할 그리움 견뎌내는스무 살피 흘리는 사랑이여.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9-01-17

소년의 눈동자가 빛난다…가난 속에서도 타오르는 生의 환희

‘가난은 실체가 아닌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풍경’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빈자가 10가지 걱정이 있다면 부자는 100가지 걱정을 하고 산다”는 옛말에 기대 현재의 곤궁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런 느긋한 태도를 취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왜냐? 가난이란 그 자체로 인간을 위축시키고 주눅 들게 하는 탓이다.각종 신문과 방송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의 슬픈 사연’은 우리를 서글픔으로 이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래와 같은 소식을 보자.10~20만원의 단칸방 월세가 없어 노숙자로 전락한 중년의 실업자, 생활비로 고민하다 가족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한 가장(家長), 끝끝내 생을 버티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결국엔 유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모녀 가정….이처럼 가난은 치명적 고통을 품은 채 우리 곁에 웅크려 있다. 아무도 예기치 않은 가난의 ‘습격’을 바라지 않지만, 누구도 가난이 주는 ‘위협’에서 피해갈 수 없다. 안타깝지만 그게 엄연한 사실이다.아프리카와 동남부 아시아엔 대부분의 국민이 ‘보편적 가난’ 속을 살아가는 나라가 적지 않다.전기와 상수도 공급 등 인간적 삶을 누릴 최소한의 인프라조차 갖춰지지 않았고, ‘사회 복지’라는 단어를 사용해본 적이 없는 국가들. 거기다가 인종과 종교,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해묵은 갈등으로 오랜 기간 지속된 끔찍한 내전(內戰)까지.▲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 소년을 기억하다미려하게 조각된 10세기 전 석조 건물 앙코르와트, 오염되지 않은 바다와 숲을 가진 캄보디아 역시 가난한 국가다.수도인 프놈펜과 한 해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시엠립과 시아누크빌을 잇는 도로 정도만 아스팔트로 포장됐을 뿐, 캄보디아 대부분의 길은 여전히 황토 먼지가 풀풀 날린다.외국에서 온 여행자를 위해 만들어진 호텔을 나와 30~40분만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만날 수 있는 캄보디아 서민들의 마을. 그곳엔 전기가 제한적으로 공급된다. 가로등이 없는 밤은 캄캄절벽이다.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을 포함한 크메르 유적으로 이름 높은 ‘오래된 도시’ 시엠립. 거기엔 학교를 다니지 않고 거리에서 조악한 기념품을 팔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들이 학생으로 살아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가난 때문이 아닐지.세 번째로 시엠립 앙코르와트를 찾았던 때다. 1천 년 전 만들어진 웅장한 사원의 돌기둥 사이에 수줍게 서있던 한 소년과 만났다. 1~2달러짜리 나무피리와 장식품을 팔고 있는. 눈동자가 너무나 선량했고, 그랬기에 더 슬퍼보였던 아이.‘가난’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초월해 존재한다. 그랬기에 가난을 노래한 문학작품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어떤 시와 소설은 탁월하고, 또 다른 어떤 것들은 시원찮기도 하다.그날 캄보디아 시엠립의 노점상 소년을 보며 기자는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시 한 편을 떠올렸다.가난을 노래한 탁월한 작품 ‘무등을 보며’다.▲ ‘빼어난 시’로도 완벽히 위로할 수 없는 고통한국 역시 아프리카나 동남아 국가처럼 대부분의 국민이 가난했던 시절을 지나왔다.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걷히지 않은 1950년대 중반. 한 대학에서 박봉을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서정주 시인 또한 가난하고, 또 가난했다.하지만 한 나라의 시인이 가난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무등을 보며’는 이런 상황에서 탄생한 노래다. 시에선 물질적 곤궁에 시달리지만 정신적 여유만은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읽힌다.현실이야 끼니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지만 맑은 눈을 들어 ‘눈부신 햇빛 속 초록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을 바라보겠다는 시인.가난이 인간의 선량한 본질까지 파괴할 수는 없다 는 완곡한 메시지. 재론의 여지없이 절창이다.산은 자신의 품 안에서 향기로운 꽃과 풀을 기른다. 그처럼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을 기르며 오늘의 결핍을 이겨나가야 한다는 건 1950년대나 2019년 오늘이나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책무가 아닐까. 서정주는 이 사실을 미학적인 문장으로 설파하며 가난에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줬다.“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라는 낙관적 세계관을 드러내며 ‘가난이 보편인 시대’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과연 뛰어난 시인답다.하지만, ‘시엠립의 소년’도 그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예술가처럼 가난을 낭만으로 받아들일 여유로움을 갖추지 못한 10대 초반의 아이. 또래 친구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돈벌이에 나서야하는 서글픈 현실. 소년에게 가난은 얼마나 크고 막막한 어둠일까?▲ 시련이 소년을 타락시키지 않았으면…가난한 나라를 여행한다는 건 사람의 심장을 흔드는 일이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결핍의 풍경을 바라보는 게 유쾌한 체험일 수는 없지 않은가.그럼에도 캄보디아와 만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가난으로 인한 어떠한 형태의 고통과 시련도 인간을 완벽하게 파괴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에. 아래는 그런 깨달음을 산문 형태로 쓴 졸시다.가난과 웃음, 그 불협화음을 철지난 훈장으로 주렁주렁 달고 사는 나라. 메콩강 지류가 잠시잠깐 머무는 동남아시아 작은 마을엔 스물두 살 키 작은 청년이 산다. 한 달을 일하면 월급으로 25달러를 받는다.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취객의 오만가지 주정을 받아내면서도 뭐가 좋은지 키들키들.열아홉, 아직 소녀인 그의 아내는 같은 술집에서 월 20달러를 받고 일한다. 한 달 내내 제 키보다 높은 테이블에 붙어 서서 스웨덴과 네덜란드,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또래 애들의 술병과 술잔을 나른다. 인근 시장 좌판에 내걸린 중국산 청바지를 생일선물로 받은 날은 울었단다. 그 얘기를 전하면서도 어린 남편은 시종 깔깔대고.그들과 양귀비꽃 흐드러진 골짜기로 소풍을 다녀온 날 밤. 잠복했던 연민의 도화선이 뜨거워졌고, 새파란 불꽃이 넘실대는 보드카 여덟 잔을 들이켰다. 술이 아닌 불을 마셨다. 자정이 되기 전 정신을 놓아버린 날 부축해 호텔방에 눕힌 건 어린 부부였다고.멈췄던 기억의 회로가 겨우겨우 작동의 스위치를 켠 아침. 450달러가 든 지갑만이 아니었다. 여권과 비행기 티켓, 주머니 속 동전 하나 없어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후 놀라움보다 먼저 찾아온 슬픔에 목구멍에선 휘발유 냄새가 났고.마을을 떠나던 날. 얼기설기 나무로 지붕을 덧댄 버스터미널에선 싫다는 그들의 손에 억지로 45달러를 쥐어주기 위한 승강이가 벌어졌다. 그 돈은 부부의 한 달 수입이었고, 태국의 하룻밤 화대였으며,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기차의 편도요금이기도 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9-01-10

세상 모든 기차는 추억의 힘으로 달린다

아득하게 깔린 레일 위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기차를 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추억 없이 존재하는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2019년 오늘의 한국은 시속 300km에 육박하는 초고속 열차가 보편화됐고, 북쪽 끝 서울에서 남쪽 끝 부산까지 2시간 30분이면 가닿는다. 서울과 호남의 끝자락, 서울과 강원도 역시 마찬가지. 아침 일찍 출발해 업무를 보고 오후에 돌아오는 것이 어렵지 않다.하지만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그건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비둘기호 혹은, 통일호라는 이름의 한국 기차들은 시속 60km 안팎의 느린 속도로 이 땅을 오르내렸다. 승객들의 지루한 시간을 견디게 해주려 객차 안에선 삶은 달걀과 사이다, 김밥과 땅콩 따위를 팔았다.조그만 수레를 밀며 판매원이 지나갈 때면 과자를 사 달라 떼쓰는 아이와 “자꾸 이러면 혼난다”고 야단치는 엄마를 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비행기나 버스보다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나간 날의 낭만과 추억을 소급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고 싶은 것이다. 기자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호찌민에서 나트랑까지 남중국해의 푸른 물결을 보며 달렸던 베트남 기차여행, 이스탄불에서 에르주룸을 향해 32시간을 꼬박 달린 터키 기차여행, 열차의 속도가 자전거만큼 느렸던 동유럽 알바니아에서의 여행 등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느리게 달리는 열차에서 떠올린 ‘청춘의 기억’이처럼 여러 차례의 기차여행 중 ‘추억과 함께 달린’ 최고의 경험은 인도에서였다.인도의 경제수도 뭄바이에서 서부 해안 지역인 고아로 갈 때는 엄청나게 긴 기차를 탔다. 바닥은 지저분했고 속도는 한국의 고속열차에 비할 바 아니었지만, 거기서 만난 인도 사람들은 너나없이 여행자에게 친절했다. 그들의 환한 웃음이 부러웠다.남부 깨를라에서 호수와 평원 사이를 달리던 인도 기차의 낭만도 잊을 수 없다. 객차 안에서 200~300원 남짓의 돈으로 즐기던 따뜻한 홍차 한 잔의 여유 또한 근사했다. ‘청춘’이란 이름으로 빛났던 20대의 추억이 절로 떠올랐다.인도 중부 산악지대 우티에 머물던 시기엔 선로가 좁은 협궤열차에 타고 산에 오르는 체험도 했다.그곳 조그만 간이역에서 맥주를 마시며 ‘오지 않는 기차’와 ‘더디게 오는 삶의 행복’을 기다리던 말수 적은 한 시인을 떠올렸다. 곽재구(65). 그의 시 ‘사평역에서’는 많은 문학청년들이 아껴온 작품이다.▲ 그리움과 눈물 통해 ‘희망’을 지켜낸 시인‘사평역에서’는 오래된, 그러나 세월을 뛰어넘어 아름다움을 발하는 작품이다. 쓸쓸한 풍경 속 하나의 이야기가 그물처럼 치밀한 의미망 안에서 생동감을 얻고 있는 보기 드문 절창.곽재구 시인은 1981년 이 시를 통해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왔다. 어떤 문학평론가는 ‘사평역에서’를 “아름다움을 말하기 힘들었던 1980년대를 끝끝내 극복해낸 최고의 서정시”로 평가하기도 한다.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평역’에 모여든 사람들. 세상이 그들에게 준 상처로 인해 옹기종기 앉은 이들의 얼굴은 모두 어둡다. 대합실 밖에는 언제 그칠지 모르는 눈이 퍼붓고, 조그만 역 안 공기는 서늘하고 차갑다.과거로부터 시작된 슬픔이 걷히지 않은 ‘지금 이곳’ 사평역엔 웃음보다는 한숨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그러나 모든 걸 여기에서 끝낼 것인가? 이게 마지막인가?시인은 독자들에게 답한다. “아니다. 우리 모두는 미래로 은유될 수 있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기억을 소환하는 그 위로는 따스하고 포근하다. ‘사평역에서’는 추억의 힘으로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만들어내는 노래다.곽재구는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 다음과 같은 희망적 메시지를 남겨 놓는다.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재차 부연하지 않아도 그리움과 눈물이 ‘진실’의 또 다른 측면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진실을 향한 ‘불빛’을 지켜내려는 태도. 이것은 희망을 가진 자만이 취할 수 있는 행위임이 분명해 보인다.객차에 오른 한 사람, 한 사람의 추억을 싣고 달리는 기차. 그 기차가 도착하거나 떠나는 공간인 간이역. 곽재구 시인은 거기서 세상의 진실과 희망을 발견해낸 것이다. 이미 38년 전 청년시절에.▲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추억이란 아름다움과 서러움, 빛남과 어두움과는 무관하게 인간을 애틋하게 만든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기억 모두가 행복이거나 불행일 수는 없다. 때로는 웃음이, 더 많은 순간은 울음이 지배하는 게 삶이고 세상이다.터무니없는 배짱 하나만으로 인도와 베트남, 터키와 알바니아를 떠돌아다니던 시절이 기자에게 있었다.세월이 흐른 뒤 그때의 기차여행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기차여행과 스쳤던 간이역이 ‘행복’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을 터. 그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세상사 이치가 아닐까.아무리 오래 살아도 ‘타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서울에서의 18년. 기차와 닮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즐거웠던 기억을 애써 되새기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기다리는 그것’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아래 졸시는 그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지하철 신림역에서한강 건너 당산역을 지나 신림역으로 간다. 원자력발전소가 가동을 멈췄다는 뉴스를 검색하면 날아오는 찜통 속 열기. 끝없이 순환하는 지하철 2호선은 멈추는 방법을 잊었고. 형광등 빛에 찔린 눈알이 아팠다. 죄 없이 갇힌 지긋지긋한 수형의 나날이 끝나면 토성으로 가야할까? 신림동 가난한 이들에겐 햇살조차 인색하고.공황장애와 조울증의 다른 이름 신림동. 이제 누구도 대화의 상대를 찾지 않는다. 말수 적어진 소녀들은 흙냄새 가득한 침향목처럼 무거워진지 오래. 득실대는 사내들이 만든 시끄러운 침묵에 포위된 신림동은 서울의 무인도다. 외떨어진 성채에는 이끼가 끼지 않고. 두려운 건 수백만의 비명으로 어지러운 홀로코스트만이 아니다.신림동은 술 마시지 않고도 취하는 동네. 삐걱거리는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 속 시베리아 호랑이를 만난다. 저토록 아름다운 짐승이 지구 위에 3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니. 아비 죽었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찔끔. 다시 생겨난다면 한빈한 신림동 독신가구주가 아닌 아무르 강변 어슬렁대는 호랑이로 살고 싶다. 포수 총에 맞고도 제 울음만으로 백 리 밖 산천을 떨게 만드는./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류태규

2019-01-03

무겁지 않다, 아프지 않다… 집에 돌아가면 나는 아버지니까

이제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익숙한 유럽과 북아메리카와 달리 아직은 ‘미지의 땅’으로 인식되는 인도. 여전히 물질이 아닌 정신의 우월성을 믿고, 세상 모든 사물에 신(神)의 숨결이 스며있다고 생각하는 인도 사람들.운 좋게도 30일쯤 그 나라를 여행하며 인도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건 기자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인도 여행’은 기다리고 바랐던 것이었다.짙푸른 남중국해 위를 날아 홍콩을 거쳐 도착한 인도의 ‘경제 수도’ 뭄바이(Mumbai). 그런데 이게 뭐지? 국제선 비행기가 오가는 공항이 한국의 조그만 도시 시외버스터미널 수준으로 조그맣고 지저분했다.놀라움과 탄식은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 내내 이어졌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누워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 그 곁으로 씽씽 내달리는 차량. 대체 그들은 왜 집에 가지 않고 길에서 잠을 청하는 것인지….적지 않은 돈을 주고 예약한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숙소의 문과 바닥 사이는 10cm쯤 떠있었고, 그 사이로 손가락 크기의 도마뱀이 들락거렸다.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아올 때까지 그걸 지켜봐야 하는 심정이라니…. 여성 여행자라면 비명을 지를 게 분명했다. 기자 역시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한숨도 자지 못하고 날이 밝자마자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종업원이 조식을 제공하는 식당으로 안내해 따라갔는데, 콧속으로 스미는 낯선 향신료 냄새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지사 어떤 음식도 먹지 못했다.혼잣말이 나왔다. “TV에서 본 ‘인크레더블 인디아(Incredible India)’가 이제 현실로 다가왔구나.”허기진 상태로 거리로 나섰다. 다음 날 인도 중남부로 출발하는 기차를 예약하기 위해서였다. 뭄바이역(驛)으로 가는 길. 도로는 그야말로 ‘난리 북새통’이었다. 버스와 택시, 오토바이는 물론 소가 끌고 가는 수레까지 뒤엉켜 있는 상황.패닉에 빠져있던 그때. 새까만 얼굴의 깡마른 사내 하나가 자전거를 개조해 만든 ‘사이클 릭샤(Cycle Ricksaw)’를 끌며 나타났다.“어디로 가세요?”“뭄바이역에 갈 겁니다.”“타세요. 택시 절반 가격으로 모셔다 드릴게요.”“그래요? 고맙습니다.”“제가 감사하죠. 어서 타세요.”그 조악한 ‘사이클 릭샤’의 뒷자리에 타고 20분쯤을 갔다. 달리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한국 중학생보다 조그만 사내의 등과 목덜미에서 흐르는 땀과 종아리 근육이 아프게 꿈틀거리는 걸 바로 목전에서 봐야 했던 탓이었다.뭄바이역이 가까워질 무렵. 기자는 ‘인간’과 ‘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더없이 따스한 시선으로 끈질기게 탐구한 시인 김현승의 작품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렸다. 때때로 ‘아버지’란 인간에게 신을 대위(代位)하는 존재이기도 하기에.김현승 시인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시를 썼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대학교와 숭전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던 그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서정적이며 감각적인 작품 여러 개를 독자들에게 선보였다.언급한 시에 드러나는 ‘아버지의 휴머니즘’은 적지 않은 독자들의 가슴을 흔든다. 왜냐? 바깥에서 보여지는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이 자식들 앞에선 단 하나의 모습으로 합일된다는 것. 그 ‘지향’은 바로 맹목적인 사랑. 언젠가는 사라질 인간이란 존재의 덧없음을 바라보며 변하지 않는 가치로 눈을 돌렸던 작가. 그에게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서러움과 즐거움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신과 인간에 대한 회의와 신뢰를 번갈아 보여준 김현승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맹목적 사랑을 지향하는 삶에 대한 낙관’이 아니었을까 싶다.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목적지인 뭄바이역에 도착한 사이클 릭샤 기사가 “50루피만 주세요”라고 말했다. 한국 돈으로 1천 원이 되지 않는 금액. 그 돈이면 채소를 넣어 끓인 묽은 커리에 찰기 하나 없는 밥 한 주걱을 사먹을 수 있을 터였다. 인도에서라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차비.갑작스레 진원지 불분명한 슬픔에 휩싸여 100루피를 내밀었고 “잔돈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뜻밖에 얻은 조그만 돈에도 터무니없이 기뻐하는 사이클 릭샤 기사의 웃음에 괜스레 미안해졌다.한국에서라면 커피 한 잔도 마시지 못할 100루피짜리 지폐를 받아든 그가 수차례 기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전한 뒤 다른 손님을 태운 채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땀에 젖은 낡은 셔츠와 새까맣고 야윈 다리. 아, 이상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돌이켜 생각해보면 ‘가난한 아버지’가 냉혹한 세상을 버티는 방식은 인도나 한국, 미국이나 프랑스가 다를 바 없을 터. 그들의 희생과 ‘뜨거운 포옹’이 아들과 딸을 키웠다. 그게 세상 어느 나라라고 다를까?20대에서 30대로 건너가던 무렵.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래와 같은 졸시를 썼다. 지금 보면 부끄러운 문장일지라도.아버지꽃아이는 울며 돌아왔다다그치는 나에게 학교 안 동백나무가 베어졌다는의외의 대답망연자실, 묵묵부답먼 진원지에서 서러움이 괘종시계처럼똑딱거렸다아·버·지눈썹에 이슬 맺히는자욱했던 물안개길불 맞아 웅크린 짐승의 눈빛으로선홍색 동백은 점점이 반짝였다눈물 덜 마른 얼굴로 잠든꽃 그림의 셔츠만 찾는기르는 고양이와도 얘기를 나누는식물 같은 아이나의 아이세상 젤 서러운 꽃이라던잠시 한눈이라도 팔라치면시샘하듯 목을 꺾는 생명 같은어린 목숨 같은 꽃이라던 동백아버지는 흩어진 생명목숨의 조각들로 목걸이 만들어날 무등 태웠다아이의 꿈속에서 나무는 살아날까평화로운 잠으로 가고 싶건만다시 아기가 된 아버지의 응석에모조청자는 푸른 비명으로 깨어지고아버지당신 닮은 저 아이는저 아이의 아버지인나는./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류태규

2018-12-27

돌고래 뛰어올라 큰 눈 한번 흘깃, 그 속에 세상 담아 갔구나

많은 사람들은 착각 속을 산다. 자신이 발 디딘 땅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혹은 지구가 나를 가운데 놓고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이런 터무니없는 착각과 미망(迷妄)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어른’이 된다. 그런데 그건 행복할까? 이 땅에서 힘없는 어른이란 겨우 ‘외롭고 우울하며 더불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한데.인천공항을 차고 오른 비행기가 10시간 30분을 날아 호주의 브리즈번에 도착할 즈음. 내려다본 바다는 막막하고 드넓었다.지구라는 땅덩어리 전체를 보자면 호주 역시 하나의 ‘섬’이다. 그러나 그 섬이 기자가 50년 가깝게 살아온 나라보다 수십 배가 크다면….브리즈번 공항으로 마중 나온 지인의 차를 타고 시내로 향하는 길. 모든 게 한국보다 컸다. 운행되는 버스가 그랬고, 대형 차량이 달리는 도로의 폭이 그랬고, 길옆으로 보이는 공장과 호텔이 그랬다.무지막지하게 큰 땅 위에 지어진 거대한 건물과 아스팔트 길. 그게 호주를 생전 처음 본 사람의 첫 느낌이었다.비단 사물만이 아니었다. 브리즈번은 사람들도 컸다. 기자의 키는 183cm, 몸무게는 87kg 정도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선 결코 작은 체격이라 할 수 없는 몸피. 그러나 호주 사내들 앞에선 ‘아기’처럼 보였다.시내에서 만나 정류장의 위치를 알려준 청소부의 몸무게는 족히 120~130kg은 넘어 보였고, 버스운전수 역시 키가 2m에 육박했다. 뿐 아니다. 해가 저물고 술집에서 만나 맥주 한잔을 나눈 호주 술꾼이 악수를 하자며 내민 손바닥은 야구 글러브 크기였다.전우치의 황금대들보 /최두석옛날 어느 극심한 보리 흉년 쌀 흉년에 전우치는 구름을 타고 세상 임금들의 처소에 야간 돌입해 옥황상제의 궁궐을 짓는다고 속여서 금대들보 금서까래를 거두어갔다.그래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서까래를 쓰고 대들보는 남아 내 고향 들판에 묻어 두었다고 전하는데 가을 벌판이 온통 황금빛으로 출렁일 때면 정말 믿고 싶던 이야기였다.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개울이나 두엄자리에 던져두고 동무들 모두 들을 떠났다. 이발사, 운전수, 자개공, 면서기, 외판원이 되어.유일하게 남아 있던 김오중이는 땅마지기에 과수원까지 착실한 그래도 부농이었지만 마땅한 색시가 없어 시무룩했다.마침내 농약 먹고 뒷산에 묻혔는데, 오랜만에 귀향한 내가 캄캄 무소식인 채 그의 집에 들었더니, 애써 결혼한 신부의 가슴에서 젖이 물큰 솟아나왔다 한다.▲ 모든 게 다 큰 호주에서 떠올린 한국의 작은 마을놀라움은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조그만 동네에 갖춰진 바비큐장도 컸고, ‘호주 마트’의 주류 코너 하나는 어지간한 한국 마트 전체 크기만 했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다양한 종류의 포도주와 맥주, 위스키와 버번. 거기에 보드카와 테킬라까지.점심을 먹고 산책하러 간 브리즈번 ‘동네 바닷가’ 역시 그 사이즈가 어마어마했다.다음 날 1시간쯤 자동차를 타고 가서 만난 골드코스트(Gold Coast)는 ‘크기로 여행자의 기를 죽이는 호주 관광’의 절정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해변의 길이가 30km가 넘는다고 했다.부산 해운대와 강릉 경포대, 포항의 영일대해수욕장 백사장을 산책하면서도 힘겨워했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그런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람을 압도하는 호주의 거대한 풍경들 앞에서 기자는 괴이하게도 아주 ‘작디작은 한국 마을’의 말없는 한 시인을 떠올리고 있었다.▲‘가난하고 외로운 꿈’도 짓밟히지 않는 세상시인 황지우(66)로 하여금 “친구와 선후배 중 진짜 시인은 두석이 뿐이다”라고 말하게 만든 사람 최두석(62)은 서울대를 나와 교수로 일하고 있다. 10여 년 전이다. 그를 서울 북쪽의 어느 강변 허름한 식당에서 만났다.그날 동석한 소설가 두 명과 기자 하나가 취중에 오만 가지 잡설을 내뱉는 가운데서도 최두석은 바위에 새긴 부처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보일 듯 말듯 희미한 웃음만을 머금었을 뿐.최 시인은 한여름에도 울울창창 어둡고 서늘한 그늘을 만드는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담양에서 태어났다. 피 뜨거운 선비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스승 조광조의 죽음에 절망해 은둔했던 소쇄원(瀟灑園)이 있는 조그만 도시.위에 언급된 시에선 자신의 고향이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던 백성을 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던 봉건시대의 영웅 ‘전우치’가 금으로 만든 대들보를 숨겨 놓은 곳이라 믿는 최두석의 ‘문학적 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하지만 어린 날의 꿈과 순정이 깃든 고향은 더 이상 아름다운 ‘추억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선 먹고살기조차 힘들어 ‘이발사, 자개공, 면서기, 운전수, 외판원’이 돼 고향을 떠난 친구들. 어떻게든 거기서 삶의 뿌리를 내리려던 친구는 슬픈 죽음과 마주해야 했다.긴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텅 빈 창고 같은 고향을 찾아간 시인. 거기서 만난 죽은 친구 아내의 젖먹이를 보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아기’란 희망의 메타포이자 상징이다.당연한 이야기지만, 큰 나라에서 태어난 큰 인물만이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니다. 때론 조그만 마을의 보잘것없는 서생(書生)도 거대한 변혁을 꿈꾼다. 최두석 또한 그런 꿈속을 달리지 않았을까. 이는 시인의 본원적 역할이기도 할 것이기에.▲ 거대한 고래를 보며 떠올린 ‘소박한 희망’브리즈번 여행의 마지막 날. 고래를 보러 바다로 나갔다. 커다란 꼬리를 휘두르며 짙푸른 물결 속으로 자맥질하는 20m짜리 포유류. 신비롭고 아름다웠다.거대한 고래가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 오후. 브리즈번 강변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과 만났다.“당신 나라는 뭐든 다 큰 것 같다”는 동양인 여행자에 말에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호주 사내가 웃었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의외로 소박했다. “다들 고래를 꿈꾸지만 모든 사람이 고래처럼 살진 못하겠지요.”바로 그때였다. 호주 ‘큰 바다’가 아닌 포항 ‘작은 바다’에 기대 살아온 ‘평범한 사내’에 관한 시를 쓰고자 다짐한 것은. 아래 졸시는 그 결과물이다.대게잡이배 선원 철구 씨45세 철구 씨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간다여기서 구하지 못한 아내 거기라고 찾아질까성질 마른 철구 씨, 고등학교 2학년 때선배 둘 코뼈를 내려앉히고머리통 쥐어 박히며 아버지와 대게잡이 배를 탔다바닷바람은 매웠고 손등은 갈라 터졌다그러나 정직한 노동은 정직한 돈을 가져다주고솜털 같은 턱밑 수염이 어느새 억세진 서른여덟포항운하가 내려다뵈는 아파트의 주인이 됐다영어로 제 이름을 쓰지 못하는 철구 씨‘세진 베르체’라 적힌 제 집의 스펠링도 뜻도 모른다흑룡강성에서 왔다는 여자는 곰살맞았다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철구 씨 매일 웃었다그녀가 빚은 커다란 만두와 독한 고량주가 달았다겨울 태풍에 조업이 난항을 겪었다예정된 3박4일을 넘겨 현관문을 열었다.손에는 여자가 좋아하는 매운 돼지찜을 들고없었다 아무도, 아무 것도 없었다싸구려 헤어드라이어까지 사라졌다며칠을 주저앉아 제 잘못을 떠올리고자 했다그러나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칠순 노모는 같이 울었고팔순 아비는 돌아서 줄담배를 피웠다열일곱 때처럼 철구 씨 머리통을 쥐어박았다그리곤, 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 표를 내던졌다중앙아시아 사막을 내려다보며 홀로 돌아오는 길비행기 창은 왜 이리 좁디좁은 것이냐공짜 위스키에 취한 철구 씨는 눈물을 쏟았다폭풍에 흔들리는 주먹만한 배 위백척간두 목숨 앞에서도 흘린 적 없는 눈물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호주관광청

2018-12-20

메콩강변 쌀국수 한사발, 기억을 깨고 추억을 부르다

인도차이나 반도 가운데 위치한 라오스는 ‘가난한 사람들의 환한 웃음’과 ‘여행자에게 베푸는 친절’로 기억되는 나라다.얼마 전부터 TV 여행 프로그램에 자주 소개된 탓에 급속도로 ‘특색 없고 흔한 동남아 관광지’로 변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문명의 때가 덜 묻고, 영악한 장사치들의 속임수가 비교적 덜한 곳.라오스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도인 비엔티안에서 여행을 시작해 ‘작은 유럽’으로 불리는 강변마을 방비엔을 거쳐, 불교 유적이 매혹하는 루앙프라방을 향해 가는 북쪽 코스를 선호한다.조금 더 모험심을 발휘한다면 낯선 원시의 향기가 곳곳에 산재한 라오스 남부 팍세, 시판돈, 사완나켓을 둘러볼 수도 있다. 젊은이들은 이 루트도 곧잘 선택한다. 영어를 못하는 이들조차 길을 묻는 외국인에게 손짓에 발짓까지 동원해 목적지를 알려주려 애쓰는 라오스 사람들.담배와 맥주를 사러 들어간 구멍가게의 주인 할머니는 “여기까지 왔으니 저녁을 함께 먹자”며 생전 처음 보는 기자를 자기 식구들이 둘러앉은 방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한국의 1970년대와 같은 인심이 있는 나라였다. 너나없이 가진 그들의 따스함이 좋았다.정님이 - 이시영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학교도 못 다녔으면서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 주더니왜 가 버렸는지 몰라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정성껏 삼을 삼더니동지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영등포 색시집에서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방비엔 재래시장 쌀국수집에서 만난 남매라오스를 처음 찾았던 몇 해 전이다.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온 유럽 청년들이 마을 전체를 점령하다시피 한 방비엔에서 나흘을 머물렀다.조그만 보트를 타고 강 위를 떠다니거나, 투명한 물빛의 연못에서 종일 수영하는 것도 지겨워질 무렵. 낡은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재래시장을 찾았다.이름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민물 생선과 밀림에서 잡은 도마뱀 따위를 구경하는 재미가 만만찮았다.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찾았던 오일장의 기억이 떠올랐다.지친 다리도 쉴 겸 쌀국수를 파는 좌판에 앉았다. 한 그릇에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 양이 적었지만 국물 맛은 나쁘지 않았다. 그때 옆에 앉은 누나와 남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라고 해봐야 열네댓이나 됐을까? 그런데 겨우 쌀국수 하나를 시켜놓고 대여섯 살로 보이는 동생의 입에만 그걸 넣어주고 있다. 자기는 전혀 먹지 않고.그랬다. 40~50년 전이라면 한국에서도 흔했을 풍경. 시인 이시영(69)의 절창 ‘정님이’가 눈앞으로 영화 자막처럼 흘러갔다. ▲ 우리들 사이엔 있던 ‘정님이 누나’는 어디로…농경사회의 붕괴와 도시의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되던 한국의 1960~70년대. 시골마을에서 남의 집 부엌일 등을 돌봐주며 살았던 10대 여성들이 대거 도시를 향했다.학력이 높지 않았고, 든든한 배경 또한 없었던 그들 중 상당수는 낮은 임금을 받으며 노동집약적 산업현장에서 혹사당했다.그런 힘든 상황이었으니 몇몇은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술집을 찾기도 했다.대부분의 국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의 아픈 역사다. 이시영의 시에 등장하는 ‘정님이’ 누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학교를 다녀보지 못했음에도 운동회 때면 누구보다 기뻐했고’ ‘산나물 캐고, 물레를 잣고, 목화를 따던’ 순박한 처녀 정님이는 “나도 남들처럼 살아보겠다”는 독한 결심을 하고 도시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을 터. 하지만 각박한 세상은 물정 모르는 어린 여성에게 쉽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 법. 풀풀 먼지 날리는 방직 공장에도 다녀보고, 주인아주머니가 호랑이처럼 무서운 부잣집의 식모로도 일했지만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그래서였을까? 정님이 누나는 영등포 술집 여급이 된 것일까? ‘정님이’라는 시는 우리의 과거를 아프게 돌아보게 한다. 가난이란 죄가 아니지만,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누이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해그날 기자가 방비엔 재래시장에서 본 누나와 동생의 모습. 얼마 되지 않는 면발과 국물을 동생 입에만 넣어주던 ‘라오스 누나’와 반세기 전 한국의 ‘정님이 누나’는 지독하게도 닮아 있었다. 시골마을 허름한 재래시장 좌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착하디착해서 눈물겨운 누이들.라오스를 다녀온 몇 주 뒤. 아래와 같은 졸시를 쓴 것은 ‘아픔과 가난의 시대’를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버텨냈던 ‘누이들’을 향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누이 하나 가지고 싶었다어깨 둥글고턱선 고운누이 하나 가지고 싶었다멀건 멸치국물 국수 보며도제 허기보다버짐 핀 사내동생 먼저 떠올리는물 낡은 나일론치마단발머리 계집아이야물고 새침한 눈매앙다문 빨간 입술로읍내 건달 휘파람 잠재우던서슬 푸른 치마바로 그 치마 걷어 올려김 오르는 가래떡 같은 종아리로동짓달 찬 내 건너며업힌 코흘리개 달래는나눗셈 서툰 열여섯파락호 아버지 술주정에열두 살 많은 새어머니 박대노망 난 할머니 요강 수발에도달랑대는 막내 고추만 보면 웃던어깨 둥글고턱선 고운누이 하나 가지고 싶었다.다행히 한국사회가 변하고 있다.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차별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누나들’이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건 재론의 여지없이 반가운 일이다. 동생과 함께 자신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이들이 앞으로는 더 많아져야 한다.그건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에. 라오스도 마찬가지다. 방비엔 재래시장 노점에서 남동생에게 쌀국수를 먹이던 누나가 누구보다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 소박하지만 간절한 바람은 언제쯤 이뤄질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류태규

2018-12-14

쌓이고 쌓인 것은 간절함과 그리움… 돌이 아니라 누군가의 꽃이다

‘몽골’이란 단어를 발음할 때면 어디선가 풀꽃 향기가 나는 것 같다.실제로도 몽골은 초원의 나라다. 그 너른 풀밭에서 유목하는 것으로 대다수 국민들이 생계를 유지한다. 떠돎과 유랑이 보편적인 국가.수도인 울란바토르(Ulan Bator)의 풍광은 아시아의 보통 대도시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늘어선 상가와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가게, 양고기 구이와 몽골 특산 보드카를 파는 카페와 식당들….몇 해 전. 기자는 시인과 소설가가 대부분이었던 여행단에 끼어 몽골을 찾았다. 낮에는 박물관과 몽골의 대학을 찾아 세미나와 회의를 진행했고, 어둠이 내리면 ‘술 좋아하는’ 몽골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매일 같이 폭음을 했다. 무색무향의 독한 술 보드카는 기름진 고기 안주와 썩 잘 어울렸다. 한때는 지구의 1/3을 지배했던 원나라의 후예들은 그들 선조인 칭기즈칸과 쿠빌라이칸처럼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졌다.며칠이 지나니 울란바토르 도심을 벗어나고 싶었다. 갑갑함이 일탈 욕구를 불러들인 것. “내일은 회의에 빠지고 교외로 나가보자”는 한 사람의 은밀한(?) 제의에 몇몇이 웃음으로 동의를 표했다.▲ 신성한 돌무더기 ‘어워’를 보며 떠올린 연애시조그만 차량을 이용해 울란바토르 시내를 빠져나왔다. 확 트인 풍경에 가슴부터 시원해졌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이름 모를 꽃과 풀의 냄새가 자연스레 청춘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햇살 눈부신 풀밭에서 연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달콤한 사랑노래를 흥얼거리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 그때 우리는 조그만 희망에도 환하게 웃었고, 이루지 못한 작은 열망에도 크게 슬퍼했다. 너나없이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살았다.이제는 아득해진 과거를 떠올리던 그때, ‘어워’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워는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소원을 비는 몽골의 서낭당이다. 초원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 돌무더기는 내비게이션(navigation)이 보편화되지 않은 몽골에서 이정표 역할도 해준다.대체 어디서부터 걸어온 것일까? 70대로 보이는 노파가 어워에 돌 하나를 올리고는 주위를 세 바퀴 돈다. 동행했던 몽골인이 조용하고 나직한 말투로 알려줬다.“우리나라에선 이게 소원을 비는 형식”이라고.할머니는 무슨 소원을 이루려고 홀로 인적 없는 먼 길을 터벅터벅 걸었을까? 불현듯 ‘남도의 김소월’이라 불리는 송수권(1940~2016)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명징하고 올곧은 역사의식과 능수능란한 구어체로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새긴 송수권 시인.자신과 함께 존재하는 자연과 타자의 본질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노래한 그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따스하게 껴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게 시인의 마음이다.‘죄 없이 떨어지는 꽃잎’에서 연인의 모습을 보고, 애타는 마음 전하지 못한 채 돌아서 울어본 사람은 안다. ‘석남꽃 꺾어’가 얼마나 아픈 시(詩)인지를. 그러나 시는 아픔에서만 멈추지 않는다.‘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데 없이’ 피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석남꽃을 들고 ‘밤이슬에 옷자락 적시며 네게로 가겠다’는 구절엔 누구도 함부로 멸하지 못할 사랑이 오롯이 담겨 우리를 울린다.석남꽃 꺾어 /송수권무슨 죄 있기 오가다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찬그릇 마주 칠 때 그 불빛 속스푼들 딸그락거릴 때딸그락거릴 때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데 없이겁도 없이 남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석남꽃 이라는데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들고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가며네 집에 들리라.▲ 할머니의 ‘소원’과 우리의 ‘사랑’은 같은 무게가 아닐지어워 주위를 돌며 간절히 무언가를 빌던 몽골 할머니의 가슴 안에도 분명 사랑이 존재했을 터. 사물에 대한 애정 없이는 희망과 열망이 생겨나지 않는 법이다.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송수권 시인과 우리 일행, 할머니 모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랑을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막막한 초원이나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전생(前生)’을 믿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때로는 과학과 합리가 아닌 꿈과 신화(神話)에 기대고 싶은 게 인간이다. 끝을 짐작하기 힘든 드넓은 풀밭과 깎아지른 절벽, 말을 타고 달리는 소년과 몽골식 천막을 보고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자동차 안에서 아래와 같은 졸시를 끼적였다. 내 안의 ‘막막함’이 불러온 문장이었다. 타클라마칸(Taklimakan)은 몽골에서 가까운 사막이다.타클라마칸 혹은, 전생의 기억취한 눈에겐 세상이 오렌지빛거울을 올려다보면 언제나처럼 내가 낯설다집밖에서 만난 가족에게 품은 살의생은 분홍 리본 묶인 선물상자가 아니다타클라마칸의 양들은 끔찍한 기억 속을 산다열정이 부재한 시처럼 구차한 육체손목이 가는 여자에서선 더운 밥 냄새가 나고모래 섞인 바람이 지배한 사막길 위에서 길을 찾다 길에 누우면이미 나를 용서한 하늘엔 거짓말 닮은 별이 총총낙타의 눈에 깃든 막막한 암흑이곳엔 오아시스가 없다가난하고 짧은 사랑 서너 번이 이울면이윽고 황혼으로 치닫는 생돌이킬 수 없는 그 밤들 사이로전생의 아내가 울음도 없이 걸어온다.▲ ‘전생’과 ‘사랑’에 관한 생각으로 밤은 깊어가고…불어오는 바람에 풀꽃 흔들리는 초원에서 네온사인 환한 도시로 돌아온 우리는 그날 밤 늦도록 어워 앞에서 두 손을 모으던 몽골 노파와 전생,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누군가는 “내 전생은 중앙아시아 풀밭을 뛰놀던 야생마였을 것”이라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고, 그리움과 기다림의 고통에 관한 소설을 써온 한 작가는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다”는 공안(公案) 같은 문장을 읊조리기도 했다.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술자리를 파하고 잠을 청하러 모두가 자기 방으로 돌아간 시간. 자정을 넘긴 캄캄한 울란바토르 거리를 홀로 거닐었다. 머리에서 생겨난 세 가지 궁금증이 가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간절한 표정으로 돌무더기 주위를 돌던 할머니는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전생의 나는 누군가의 손가락질을 받던 악인은 아니었을까? 마흔을 넘긴 사내에게도 가슴 설레는 사랑이 다시 찾아와줄까?”모두 대답을 찾기 힘든 어려운 질문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8-11-30

뜨거운 온천과 시린 눈처럼, 시인의 슬픔이 내 기쁨을 녹였다

북한의 송이버섯이 왔고, 남한의 제주도 귤이 갔다.미국을 주축으로 한 국제사회의 엄혹한 제재. 그 속에서 70년을 헤어져 살았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미래를 위해 ‘화해의 선물’을 주고받았다.송이버섯과 귤의 향기가 핵무기로 인해 얼어붙은 이 땅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 있어 쉽게 할 수 있을까.그러나 오래 전 철학자들의 전언처럼 “희망이란 절망의 끝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지. 낙관은 언제나 비관을 가까스로 제압하며 우리의 앞길을 열어왔다.어둠이 없다면 빛도 없고, 밤의 적막이 주는 서러움을 모르는 이들은 햇살 눈부신 새벽의 희망을 노래하지 못한다. 그게 세상 이치다.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라도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것도 타자(他者)를 향한 오만이 아닐지. 인간이 산다는 것은 답하기 어려운 물음 앞에 위태롭게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홋카이도, 한적한 온천마을에서 맛본 외로움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는 아름다운 설경(雪景)으로 한국 관광객들에게 유명하다. 도청 소재지인 삿포로에서 해마다 열리는 화려한 눈 축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사할린보다 더 큰 이 설국(雪國)에 가고자 했던 이유는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처럼 ‘절대 고독’ 속에서 얼마간 머물러보고 싶다는 욕심에서였다.홋카이도의 화산지대와 호수를 둘러보고 나요로 분지(名寄盆地)까지를 확인한 후 조용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 그곳 온천이 좋다고 했다.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40도일 정도로 매우 크고, 건강한 사람도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다는 홋카이도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온천은 부정하기 힘든 매력적인 관광자원이다.그러나 기자의 선택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도착 후 30분 가량 따뜻하고 매끄러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까지는 좋았다. 헌데, 그 이후엔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시간은 겨우 밤 9시. 사방은 불빛 하나 없는 캄캄절벽이었다.한국이라면 초저녁일 그때, 24시간 편의점은 물론 백열등 밝힌 카페나 선술집 하나 찾기 힘든 일본 북부의 촌구석.갑작스레 슬퍼졌다고 말한다면 ‘감정의 과잉’일까. 아주 오래 전 읽은 ‘슬픔’과 ‘쇠퇴’에 관한 시 한 편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런 것이다.슬픔이 기쁨에게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가마니에 덮인 동사자(凍死者)가 얼어 죽을 때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추위에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정호승(68)은 바닥을 짐작하기 힘든 슬픔의 서정으로 세계와 인간의 고통을 따스하게 다독여온 시인이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적지 않은 시편이 노래로 만들어진 작가이기도 하다.위에 언급한 작품 ‘슬픔이 기쁨에게’는 그가 왜 ‘탁월한 대중적 서정 시인’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해준다.‘겨울밤 귤 몇 개 놓고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버텨온 할머니’에게 얼마 되지 않는 귤 값을 깎으며 기뻐하는 ‘먹고살 만한’ 우리에게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는 사람, ‘누군가가 얼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들에게 ‘슬픔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사람….단언할 수 있다. 슬픔 없이 사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슬픔 외에는 외면하고 사는 경우가 흔하고 흔하다.타인의 슬픔을 함께 울어주기 힘든 세상. 울음을 조롱하는 사회.적요했던 홋카이도의 밤. 여윈 어깨를 안아줄 누구도 곁에 없던 그날의 막막함. 인간이 가진 한계와 얄팍한 자기애(自己愛)를 너무나 명징하게 설파한 정호승의 시는 마음만이 아닌 ‘삶의 뼈’까지 아프게 했다.▲ 고독, 더 큰 절망 혹은 희망 속으로…사실 생각해보면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과 ‘남의 아픔에 무신경한 인간’은 비단 정호승의 시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프랑스나 오스트리아, 호주 같은 ‘잘 먹고 잘사는 국가’가 아닌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모종의 쓸쓸함과 죄스러움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게 아니었을까. 인생 내내 반복됐던 타자에 대한 무관심. 그에 대한 뒤늦은 반성.그래서였다. 적막강산(寂寞江山) 같았던 홋카이도의 밤이 깊어가던 시간. 언제 올지 모르는 새벽을 기다리며 알코올 함량 45%의 일본 보리소주에 취해 아래와 같은 졸시를 썼다.우리는 맨발로 자란다아버지는 매일같이 취해 있었다공장도 가게도 없는 국경의 오지밥을 구하는 건 엄마의 전쟁이었다먹기보다 굶기에 익숙해진 우리동네 오빠들은 열여섯이면 도시로 떠났다누구는 칼을 휘두르는 건달이 됐다 하고몇몇은 레스토랑에서 먹고 자는 웨이터로.유적지로 가는 길이 뚫리며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휘황한 네온사인의 카지노가 들어서고중국인 부자들이 언니 종아리를 힐끔거렸다열두 살 내 친구들은 껌과 담배를 팔았다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마셨고누구도 얼굴 검은 주정뱅이를 반기지 않았다.배수 시설이 없는 거리는쏟아지는 폭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때마다 물이 넘쳤고여섯 살 동생은 비를 맞으며 춤을 췄다멀리서 비행기를 타고 온 백인들그들은 웃으며 1유로 동전을 던졌다.나와 동생은 일생 신발을 신어보지 못했다미키마우스 그려진 샌들을 사온다던 오빠는열대과일 썩어가는 거리에서 칼에 맞았고그 소식 들은 날 엄마는 구걸을 나가지 않았다오늘도 우리는 맨발로 자란다.▲ 남과 북은 ‘무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지금 남한과 북한은 서로에게 얼마만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까.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걸어온 지난 10년의 남북관계는 서로에 대한 신뢰 속에서 개선될 수 있을까?북이 남에 선물한 송이버섯과 남이 북으로 보낸 귤에 담긴 함의를 생각해본다.이 선물이 북한과 남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자리했던 편견과 증오, 오해와 질시의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밀어낼 수 있을지.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와 기자가 체험한 깊은 밤 홋카이도에서 깨달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신뢰와 애정은 상대에 관한 무관심을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8-11-16

콜로세움 어떤 싸움도 축제가 될 수 없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도착한 것은 뜨거운 햇살이 거리와 고딕의 건물을 태우는 한여름이었다.알바니아에서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海)를 건너 ‘바리(Bari)’라는 이탈리아 소도시를 거쳐 나폴리에서 나흘을 묵었다. 그 기간 동안 “지구 위에서 가장 근사한 풍경”이라 이탈리아인들이 자랑하는 포지타노(Positano)와 아말피(Amalfi)를 다녀왔다.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풍스런 레스토랑에서 눈이 부시도록 멋진 바다를 내려다보며 아말피 특산 레몬차를 마시고, 담백하고 맛깔스런 본토 피자를 점심으로 먹었지만 기분은 우울했다. 8개월을 넘어서고 있던 긴 여행이 건강에 이상을 가져왔다.한쪽 눈의 시력이 급속하게 나빠졌고, 심지어 녹색과 파란색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찾아간 나폴리 병원에선 “스트레스와 누적된 피로가 이유인 것 같다”는 애매한 진단을 내놓았다. 기자도 이탈리아 의사도 영어가 서툴렀다.말이 통하는 한국의 안과에 가서 정확한 원인과 치료법을 알고 싶었다. 여행을 지속할 것인지, 귀국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이탈리아 거리에서 ‘시인 이성복’을 떠올리다나폴리에서 기차를 타고 로마로 가서는 가장 먼저 저렴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수소문했다.‘몇 군데의 여행사와 항공권 발매 대리점을 돌아보고 숙소로 가는 길. 눈앞에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콜로세움(Colosseum)이었다.책에서만 보던 걸 실물로 처음 대하는 날이었지만 정상이 아닌 컨디션 탓인지 가슴을 치는 감흥 따위는 없었다. 그저 고교 시절 읽었던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수록된 한 편의 시가 떠올랐을 뿐.어떤 싸움의 기록(記錄)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OO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마루로 다시 기어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내리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버릴 테야법(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버릴 테야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 번 소리 질렀다이 동네는 법도 없는 동네냐 법도 없어 법도 그러나나의 팔은 죄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에서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이성복은 “아픔의 개인사를 우회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세상 저변에 상존하는 고통과 눈물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학교 불문과에서 공부했다. 서울 몇몇 대학에서 여러 차례 상경을 요청했지만, 그는 대구의 한 대학 강단을 떠나지 않았다.‘어떤 싸움의 기록’은 동서양 철학을 작품 속에 탁월하게 녹여내는 중진으로 진화한 이성복이 젊은 모더니스트였을 때 쓴 시다.이 작품에서 상소리를 내뱉으며 아버지와 다투는 이가 빚쟁이인지, 앙심을 품은 원수인지, 혹은 광기에 휩싸인 혈육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시인은 ‘싸움’이라는 단어가 가진 본질과 싸움의 민낯과 대면한 ‘인간’의 막막함에 문학적 촉수를 밀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삶과 세계의 비의(秘義)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로마 정치가들이 펼친 고대(古代)의 ‘3S 정책’콜로세움은 ‘싸움의 공간’이었다. 그래서였다. 로마의 거리에 서서 기자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세상엔 축제가 되는 싸움도 존재할 수 있을까?”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 정식 명칭인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티투스 황제 때 완성됐다.직경이 180m에 달하고 둘레가 530m에 가깝다. 바깥에 세워진 벽의 높이도 50m에 육박한다.간단히 설명하자면 콜로세움은 ‘커다란 투기장’과 다름없었다.여기선 목숨을 건 검투사들의 시합이 열렸고, 사자와 호랑이, 곰과 하마, 코뿔소와 코끼리 등의 동물을 사형수와 싸움 붙였다.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엔 기독교도들을 집단적으로 고문하고 학살한 공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대다수 로마 정치가들은 우매한 대중이 세상사를 비판적으로 자각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콜로세움은 그런 정치가들의 욕망과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무료로 입장해 빵과 포도주를 제공받은 로마의 대중들은 죽고 죽이는 ‘사람 대 사람’ ‘동물 대 동물’ ‘사람 대 동물’의 선혈 낭자한 싸움을 보며 콜로세움을 함성으로 채웠다.어떤 변명을 가져다붙여도 결국 콜로세움은 ‘처참한 싸움의 공간’임을 부정할 수 없다.콜로세움을 만든 로마의 지배계급은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를 통해 사람들의 정치적 관심과 변혁의 욕구를 차단하는 ‘3S 정책’을 일찍 실천(?)한 선구자였던 것일까?앞서 “축제가 되는 싸움도 존재할까”라는 자문에 대한 자답(自答)을 내놓을 때가 됐다. “그렇지 않다”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여러분들은 어떤가?▲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지 않은 이유는?콜로세움을 돌아본 다음 날은 로마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가게 된다는 스페인 광장과 트레비 분수를 찾았다.오드리 헵번(1929~1993)이 출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린 스페인 광장은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갖가지 꽃으로 장식된 계단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여행자들이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뒤돌아서서 동전을 던지면 로마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트레비 분수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그곳 역시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높이 26m, 너비 20m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분수는 웅장함과 미적 완성도 두 가지 면에서 주목받는다. 새하얀 대리석이 여름날 태양을 받아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했다.교황 클레멘스 12세가 준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사람은 로마의 건축가 니콜라 살비. 트레비 분수가 완성된 때는 1762년이다.분수 가운데 조각된 바다의 신(神) 넵투누스(Neptunus)와 양 옆에 선 여신의 생동감이 수 세기의 세월을 뛰어넘어 분수를 찾는 이들을 매혹하고 있었다. 오후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자 ‘가톨릭 문화의 성지’로 불리는 바티칸(Vatican City)도 찾았다.그날 왜 기자는 ‘빛나는 로마의 영광’이 아닌 ‘콜로세움에 흥건했던 피’를 먼저 떠올렸을까.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 밤엔 낡은 식탁에 앉아 아래와 같은 형편없는 시를 끼적였다.테베레강(江), 늑대와 만나다캄피톨리오 광장과 스페인 계단을 채운 이방인들베니토 무솔리니와 오드리 헵번이탈리아를 암흑시대로 몰아간 퇴행의 파시즘자전거를 탄 하얀 여배우의 입술에 묻은 젤라또그러나, 무슨 상관여행이 아닌 관광을 온 이들은심각한 생각을 멈추고 바티칸의 비둘기들과 논다이민족 피와 눈물 위에 건설된 로마뻗어나가길 멈추지 않던 영토는인간 욕망의 한계없음을 비명 속에 증명했고불타는 도시를 보며 시를 읊는 미치광이를 만들었다콘스탄티노플이냐? 이스탄불이냐?두 제국 왕의 싸움에 문맹의 노예들만칼날 앞에 쓰러진 풀잎이 되고광포한 노인처럼 허물어진 콜로세움검투사 잘린 팔다리에 흐르던 피 같은붉디붉은 석양이 떨어진다모두가 아픈데 아무도 상처를 찾지 못했다15유로 싸구려 게스트하우스삐걱거리는 낡은 침대에 누워테베레강을 배회하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었다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겠다. 왜 다른 대부분의 관광객들처럼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지 않았는지. 로마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아서? 그게 아니면 슬픈 시(詩)를 불러온 ‘싸움의 역사’가 싫어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구창웅

2018-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