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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포항의 생명력이 숨 쉬는, 포항사람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포항을 알고 싶다면 어디부터 가야 할까?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죽도시장은 단연 앞 순위에 놓인다. 그렇다. 죽도시장을 모르고서야 포항을 안다고 얘기하기는 곤란하다. 어물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문어와 날랜 칼 솜씨로 생선을 손질하는 아낙, “잘 오소, 어서 사이소, 싱싱한 오징어가 좋니더” 외치는 상인의 구성진 목소리를 접해 보고, 건어물상, 청과상, 약재상, 떡집 등을 느긋한 걸음으로 슬렁슬렁 둘러본 후에 수제비 골목 좌판에 앉아 낯선 사람과 어깨를 부대끼며 뜨거운 국물 후후 불어가며 4천원짜리 수제비나 칼수제비 한 그릇쯤은 먹어봐야 비로소 죽도시장을, 포항의 속살을 잠시나마 느꼈다고 말할 수 있다.포항 원도심 한복판에 수많은 상점과 노점상이 모여 있고, 포항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죽도시장은 지역 서민경제의 심장이자 생명력의 원천이다. 동해안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전통시장으로, 14만8천760㎡ 면적에 2천5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으며, 실제로는 어시장과 농산물시장, 그리고 죽도시장 세 개를 아우르고 있는 게 죽도시장이다. 총 25개 구역에 수산물, 건어물, 농산물, 식품, 청과, 떡, 약재, 의류, 한복, 포목, 이불, 주방용품, 제수용품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고 있어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포항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면 죽도시장에 가봐야 한다.□ 포항의 역사와 함께해온 동해안 최대의 전통시장한 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은 그 지역의 역사와 궤적을 함께하기 마련이다. 강과 바다를 접하고 있는 포항은 역사적으로 타지역과 교류하기에 용이한 곳으로, 포항을 대표하는 설화인 연오랑세오녀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1732년 함경도에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환곡을 저장하는 창(倉)이 포항에 개설된 것도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기에 가능했다. 서해 강경장, 남해 마산장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장이 포항 부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형산강 덕분이다. 부조장은 포항 연안의 청어와 소금을 내륙으로 가져다 팔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산물을 거래하는 교역의 요충지로 이름이 높았으나 일제강점기에 포항과 부산을 연결하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부설되는 등 환경이 변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면, 죽도시장은 부조장의 전통을 잇는 큰 장터라 할 수 있다.일제강점기 포항의 시장 상황은 어떠했을까. 최근 발간된 두 권의 저서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포항 시장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의 상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이다. 일본인이 포항에 들어왔을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시장 거래 외에 점포를 갖춘 상인은 볼 수 없었다. 당시 포항에는 여천시장이 있었고 근처에는 연일시장, 흥해시장이 있었다. 특히 명태 거래에서 조선 남부 3대 시장 중 하나로 손꼽히던 부조시장에서는 생활필수품뿐만 아니라 많은 해산물과 곡물이 거래되고 있었다.”김진홍 엮음, ‘조선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 글항아리, 2020, 287쪽“(포항은) 1914년 제1기 축항 건설 이후 제3기의 건설 완료로 이전의 부산을 경유한 수송에서 직접 수송이 되어 본격적인 발전으로 내디뎠다. 또한 1914년 도야마현(富山縣)의 하마다(濱田) 등이 개량한 청어정치(定置)를 경영하여 성과를 냈으며, 1917~18년경부터 하야시가네(林兼) 등의 운반선이 내항하여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 무렵까지는 어업 근거지라고 하기보다는 물자 교역의 시장과도 같은 존재였다.”요시다 케이이치 지음, 박호원·김수희 옮김, ‘조선수산개발사’, 민속원, 2020, 614~615쪽요컨대 일본인들이 포항에 이주하기 전부터 여천시장, 연일시장, 흥해시장, 부조장이 자리를 잡고 오랫동안 운영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수산업을 일으키기 전의 포항은 어업 근거지라 하기보다는 물자 교역의 시장 성격이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나고 1949년 8월 포항은 읍에서 시로 승격되지만, 6·25전쟁 때 시가지가 초토화되면서 여천시장도 사라진다. 전쟁 후에 지금 칠성천 복개주차장 쪽에 좌판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고, 이것이 점차 몸집을 불리면서 상설시장이 되었으며, 1971년 11월 시장 허가를 받은 것이 죽도시장이다.죽도시장이 동해안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포항제철을 빼놓을 수 없다. 포항종합제철 제1기 종합 준공식이 열린 것이 1973년 7월 3일, 이때를 전후로 포항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물자도 많이 필요해지면서 죽도시장도 외형을 키우게 된다. 포항시와 영일군을 합한 인구는 전쟁 직후인 1954년 20만9천369명이었으며, 1970년 27만8천144명을 기록한다. 1973년 처음으로 30만 명을 넘어 30만7천548명이 되었고, 1981년 40만1천772명, 1992년 50만273명을 기록하며 상승곡선을 그린다(‘포항시사’참조). 포항이 세계적인 철강도시로 발돋움하며 많은 인구가 유입하는 과정에서 죽도시장도 덩치를 키우게 되었고, 철강산업이 정체되면서 포항과 죽도시장도 성장세를 멈춘 것이다.□ 가장 먼저 새벽을 깨우는 죽도 어시장포항의 첫 새벽을 깨우는 곳은 죽도 어시장이다. 온 세상이 깊이 잠들어 있을 새벽 4시 30분께 죽도 어시장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빛을 밝힌다. 트럭이 도착해 생선 궤짝을 내려놓으면 상인들도 재바르게 움직인다. 자정 무렵 위판장에 도착한 상인들은 쪽잠을 자다가 위판장에 생선이 들어오는 시간에 목이 긴 고무장화를 신고 새날을 시작한다.문어, 대게, 대구, 방어, 우럭, 가자미, 도루묵, 소라 등 물 좋은 생선이 위판장 바닥에 정렬된 직후 요란한 종소리를 울리며 빨간 모자를 쓴 경매사가 둥장하자 검은 모자에 각자의 고유번호를 단 중매인들도 우르르 모여든다. “허이∼ 허허이∼” 경매사가 굵은 목소리로 특유의 리듬을 타며 경매를 이끌어가고, 중매인들은 두툼한 점퍼 속에 숨긴 손을 펼쳐 보이며 갖가지 신호를 보낸다. 물 좋고 값 좋은 생선을 차지하기 위한 수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생선마다 낙찰자를 만나고, 하루를 준비하기 위한 상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는 사이 죽도시장에 여명이 밝아온다.죽도시장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붐비는 곳도 어시장이다. 대형마트와 온라인쇼핑이 급성장하면서 전통시장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고, 죽도시장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시장은 전국 곳곳에서 선도 높은 생선들이 모여들고, 가격도 괜찮은 편이어서 그나마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어시장에만 160여 개의 점포와 200여 개의 횟집이 있으며, 그보다 많은 좌판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가을이 깊어가는 이즈음 어시장에 가면 부산 고등어, 제주 생갈치, 목포 조기, 서해안 꽃게를 볼 수 있고, 제철을 맞은 방어도 만날 수 있다. 생오징어 다섯 마리에 2만 원인데, 제주 생갈치는 열 마리에 2만 원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큰 대게는 세 마리에 10만 원, 2㎏ 문어는 5만 원 정도가 요즘 시세다.찬바람이 불면 죽도 어시장은 과메기 세상으로 바뀐다. 상점마다 쫀득쫀득한 과메기가 넘쳐난다. 꽁치 과메기가 대부분이지만, 과메기 원조인 청어 과메기도 이따금 볼 수 있다. 겨울철 죽도시장 경기는 과메기가 쥐락펴락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과메기가 많이 팔려야 어시장에도 활기가 돈다.죽도 어시장에는 다른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명물이 있다. 하얀 묵처럼 생긴 개복치는 포항에서 혼사나 장례같이 큰일을 치를 때 내놓는 귀한 음식이다. 생김새는 아귀, 물곰(곰치) 같은 일종의 못난이 어류인데, 큰 개복치는 길이 3m에 무게는 1t 가량 된다. 토막 낸 상어고기를 일컫는 돔배기는 제사 때나 볼 수 있는 음식으로, 꼬치산적을 굽거나 찜, 탕 요리를 하기도 한다. 고소한 고래고기 맛을 못 잊어 대낮부터 어시장 가게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볼 수 있다.고래, 상어, 개복치 같은 대물은 아무나 손댈 수 없다. 초보자는 아무리 날카로운 칼을 잡아도 살집에 칼이 들어가지 않는다. 노련한 칼잡이라야 부위별로 깔끔하게 해체할 수 있다. 대물이 해체될 때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장면도 죽도 어시장의 진풍경이다.□ 현대화와 함께 전통시장의 매력도 남아 있는 곳전통시장에 닥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죽도시장은 2000년대 들어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시설 현대화에 많은 공을 들였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구간에 아케이드가 설치돼 전국 어느 시장보다 쾌적한 공간을 자랑하고 있다. 현대화의 흐름 속에서도 전통시장의 매력은 남아 있다. 술빵, 국화빵, 붕어빵, 대게빵, 호떡은 물론, 감주, 콩국, 우뭇가사리묵, 달고나, 강냉이 등 추억의 주전부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곳도 죽도시장이다.시장이 현대화되고 질서가 잡히기 전에는 악다구니가 넘쳤다. 상인들끼리 머리채를 움켜쥐고 장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며 살벌하게 싸우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그 싸움은 척박한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식구들의 밥상을 차리고 아이들 공납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물건을 팔아야 했고, 그러려면 자신의 손바닥만한 영역이나마 어떻게든 지켜내야 했다. 그렇게 죽도시장의 너른 품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치열하게 푼돈이든 큰돈이든 벌어 식솔을 먹여 살렸다.죽도시장은 꼭 사야 하는 물건이 있어야 가는 곳이 아니다. 일 없이도 사람 구경, 물건 구경하러 가는 곳이 죽도시장이다. 싱싱한 횟감 사라는 고함 소리, 가격 흥정하는 소리, 철지난 유행가가 뒤섞여 있고, 수제비를 푸짐하게 담아주는 후덕한 아주머니, 묵묵히 전을 부치고 있는 무표정한 아주머니, 과일 몇 알 소쿠리에 담아 놓고 좌판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할머니 등 수많은 우리들의 자화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죽도시장이다. 숱한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고, 추억이 묻혀 있으며, 가슴 뜨거워지는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 그리하여 죽도시장은 포항사람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끝사진/안성용글/김도형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예담출판사 편집장 역임. 현) 글로벌 해양수산 매거진 ‘THE OCEAN’편집위원, 현) 독도도서관친구들 이사, 현) 한국단백질소재연구조합 본부장.

2020-11-09

동학 2대 교주 해월이 대동세상의 꿈을 키운 터

“복술은 보잘 것 없는 무리이면서 감히 황당한 잡술을 품어 주문을 지어내고 요망한 말로 선동을 했다. 하늘을 위한다는 설로 비록 저 양학을 배척한다 하지마는 도리어 사학(邪學)을 본떴으며, 이른바 포덕문이라는 것은 겉으로 거짓을 꾸미고, 몰래 화를 일으킬 하는 마음을 기르고자 하는 것이다. 주문과 약, 그리고 칼춤은 평화시 난을 꾸미려 하고 은밀하게 당을 모으고자 하는 짓이다.”‘일성록(日省錄)’, 고종 1년(갑자(甲子), 1864. 2. 29.이 글은 ‘일성록’에 실려 있는 경상감사 서헌순이 올린 장계(狀啓)의 일부이다. 장계를 들은 대왕대비 조씨는 복술을 이단으로 지목하고 목을 매달아 죽이도록 한다. 글 속의 복술은 바로 수운 최제우이다. 수운은 동학을 창도한 인물이다. 동학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비변사등록’(제250책, 철종 14년 계해(癸亥) 12월 20일)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조령으로부터 경주에 이르기까지 400여 리의 10여 주군(州郡)에서 동학의 이야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듣지 않음이 없고, 경주 주위의 여러 읍은 그 이야기들이 더욱 심하니, 주막의 부녀자들과 산골짜기의 아이들까지도 그 글을 전하여 읊지 아니함이 없다.”이 글로 미루어 볼 때, 조령에서 경주까지 거의가 수운의 동학에 매료, 경도되었고, 특히 경주, 포항지역에는 주막의 부녀자에서부터 산골의 아이들까지 동학의 글을 읽고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동학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과 기대는 대단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道氣長存邪不入(도의 기운을 길이 보존한다면 사특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리니)世間衆人不同歸(세간의 뭇사람과는 같이 돌아가지는 않겠다.)- ‘입춘시’ “동경대전”방황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 기미년(1859) 10월 용담정으로 돌아온 수운이 쓴 첫 시이다. 수운의 용담정으로의 회귀는 조선사회의 현실적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던 15여 년의 방황의 세월에 대한 종지부였다. 용담정으로 돌아와서 쓴 ‘입춘시’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구이며, 대도를 이루어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1860년 4월 5일에 동학을 창도한다. 해월 최시형이 수운을 만난 것은, 1861년(철종 12년) 6월, 해월의 나이 35세였다. 수운을 만난 처음에 해월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그의 글을 통해 더듬어 보자.“내가 젊었을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로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 정하고 정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인 줄 알았다. 요순의 일을 행하고 공맹의 마음을 쓰면, 누가 요순이 아니며 누가 공맹이 아니겠는가.”‘독공(篤工)’, “해월신사법설”수운을 만난 순간이 해월에겐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꽉 닫혀있던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고, 막혀있던 갑갑증이 일시에 해소되는 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월의 이 말은 공자의 제자인 안연이 말한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舜何人 予何人]”라는 물음과 다름아니다. 안연의 물음은 “순이 사람이면 나도 사람이고, 순이 성인이 되었으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순이 자신의 안에 있는 마음을 깨쳐 성인의 경지로 나아갔다면, 나 또한 내 안의 참 나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깨쳐나간다면 성인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한마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해월은 이후 용담정으로 가서 수운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고, 8월 14일 동학의 도통을 승계하면서 동학의 2대 교주가 된다. 동학 하면 수운의 신이한 행적과 참형, 전봉준의 동학혁명, 그리고 3ㆍ1운동을 먼저 떠올린다. 특히 녹두장군 전봉준의 모습은 동학을 ‘혁명을 위한 도구’로서 ‘사회변혁을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수단’으로 이해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해월에게 와서 동학은 비로소 신비한 이적(異蹟)을 벗고, 공허한 사상의 날개도 벗고, 변혁을 위한 혁명주의적인 요소도 벗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마주하게 한다.“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제 며느리가 베를 짜는 소리입니다.”하는지라, 내가 또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라고 물으니, 서군이 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어찌 서군뿐이겠는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대인접물(待人接物)’, “해월신사법설”중세, 사람에게 귀천이 있고 상하가 엄연히 존재하던 시대, 사람을 사고팔 수 있던 시대, 결혼의 과정에서 여성의 존재가 무의미했던 시대, 해월이 던지는 “그대의 며느리가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인가”라는 물음은 큰 울림을 준다. 계층과 계급이 사람을 사람 아니게 몰고 가던 때, 며느리를 한울님(하늘, 天)이라 천명하는 해월의 선언은 그래서 위대하다. 하지만 해월도 여기에 하나의 단서를 단다.“내가 바로 한울(天)이요 한울이 바로 나니, 나와 한울은 바로 한 몸이다. 그러나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게 되므로 그 명(命)에서 어긋나고,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 있으므로 그 덕에 합한다. 그러므로 도를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이 전부 (나의) 기운과 마음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수도법(修道法)’, “해월신사법설”‘아시천천시아[我是天天是我]’이지만 나의 기운이 바르고, 나의 마음이 항상 바른 것을 행할 때 진정한 나가 되는 것이고, 이럴 때 한울님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해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도에 대한 한결같은 생각은 주릴 때 밥 생각하듯이, 추울 때 옷 생각하듯이, 목마를 때 물 생각하듯이 해라. 부귀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권력 있는 자만 도를 닦겠는가, 유식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비록 아무리 빈천한 사람이라도 정성만 있으면 도를 닦을 수 있다.”‘독공’, “해월신사법설”도는 일상을 통해서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이 도인데, “이 나라는 도 닦는 것도 부귀한 자라야, 권력 있는 자라야, 유식한 자라야 할 수 있다니”. 곧, “바른 삶, 바른 행동, 바른 마음을 지니고 실천하는 데에도 귀천이 존재하다”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태생의 귀천이 아니고, 권력의 유무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 ‘진정성 있는 태도’에 있다고 말한다.순일한 것을 정성(誠)이라 이르고 쉬지 않는 것(無息)을 정성이라 이르나니, 이 순일하고 쉬지 않는 정성(誠)으로 천지와 더불어 법도를 같이하고 운을 같이하면, 가히 대성 대인이라고 이를 수 있다.‘성경신(誠敬信)’, “해월신사법설”해월에게 대성인, 대인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한결같이 순연한 마음을 견지하는 것, 오늘 하루가 아니라 매일, 또 매일 이러한 마음을 지니면서 법도대로 살아가면 성인이 되고 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기간은 3년여이다. 이후 40여년을 동학을 이끈 인물은 바로 해월이었다. 해월은 수운의 전기인 ‘도원서기’를 비롯해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과 수운의 노래인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실제 해월에 와서 동학은 교단과 교세, 교리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경주에서 태어난 해월은 15세 무렵에 포항으로 온 이후 신광과 흥해 등지에서 생활한다. 17세 무렵에는 신광면 기일(基日, 터일) 마을의 제지소에서 일하며 성장하였고, 19세에는 흥해 매곡에 사는 밀양 손씨와 결혼하면서 이곳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28세에 신광 마북(馬北)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곳에서 마을 이장 격인 ‘집강(執綱)’의 소임을 맡았다. 이후 33세에 다시 마을 안쪽의 검곡(금등골)으로 옮겨 갔다. 이곳에 머물 때 수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학교도로서의 삶이 시작된다.동학 2대 교주 해월, 경주에서 포항 신광으로, 차디찬 현실이라는 땅을 디디고 살았지만 대동세상, 평등세상을 꿈꾼 해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삶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우리의 눈높이로 끌어내리면서, 진정성 속에 빛나는 생의 의미들을 그려나간 해월.해월이 걸어간 길 위에서 묻고 싶다. 해월이 꿈꾸던 세상은 이루어졌는가? 여전히 우리는 진정성이 결여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과 대화 속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기보다는 나와 너, 내외를 구분하면서 편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왜, 무엇이, 우리를 해월이 힘들게 걸어가야 했던 길에 여전히 머물도록 하는 것일까?사진/안성용글/신상구위덕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양동문화연구소 소장, 포항문화재단 이사. 동국대 국문과에서 ‘수운 최제우의 성경론과 문학적 실현 양상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 ‘치유의 숲’ 등 다수.

2020-11-04

호랑이 기운을 품은 태양과 바람의 땅

움베르트 에코는 문학 강의에서 상징은 텍스트에 의해 창출되는 의미 효과가 크며, 그렇다면 어떤 이미지나 단어, 대상이라도 상징 가치를 띨 수 있다고 했다. 호미곶은 원래 모양새가 말갈기를 닮았다고 해서 장기곶(長9B10串)으로 불리다가 2001년 12월 이름을 바꾸었다. 한반도 최동단의 이곳 지명이 호미곶으로 바뀌면서 한반도의 상징은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 풍수지리학의 대가였던 격암(格庵) 남사고는 한반도 모양새를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이라 했다. 백두산은 호랑이의 코,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에 비유하며 이곳을 천하의 명당이라 꼽았다. 일제는 한일 병탄 이후 한일 모든 교과서에 한반도는 토끼 모양이라고 실었는데, 최남선은 이에 반발해 ‘소년’ 창간호에 호랑이 지도를 발표했다. 이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만주 벌판을 향해 포효하는 ‘근역강산맹호기상도’가 잇달아 그려졌으니 이제야 호미곶이 제 이름을 찾은 듯하다. 최남선은 호미곶의 일출을 조선 십경 중 하나로 꼽았다. 호미곶은 계절에 따라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이렇듯 호미곶은 호랑이의 기운을 품은 태양과 바람의 땅이다. 이 풍광의 땅은 거칠면서도 아름답다. 파도는 해안가 인근에 유난히 많은 암초에 걸려 햇빛과 함께 부서지고, 그 거친 소리는 하루 종일 바람을 타고 호미반도에 맴돈다. 이 바람과 태양은 이 땅에 보리와 유채꽃, 그리고 말들을 키웠다.□호미곶광장 중심으로 등대, 박물관, 상생의 손 모여 있어호미곶으로 가는 길은 구룡포에서 2011년 새로 확장된 929번 지방도로를 타면 금방이다. 그러나 여유가 있다면 구룡포에서 강사리, 대보리를 지나 호미곶에 이르는 해안도로를 권한다. 이 도로를 지나면 옛길의 정취와 고즈넉한 어촌의 풍경,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위 반짝이는 윤슬을 즐기며 운전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여정 중간에 펼쳐지는 주상절리 감상이나 조용하고 아담한 해변의 정취는 덤이다. 때를 잘 맞추면 대보리와 구만리 일대에 펼쳐지는 유채꽃과 청보리밭의 향연을 감상할 수도 있다.호미곶의 심장은 단연 해맞이광장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호미곶 등대, 국립등대 박물관, 상생의 손이 있다. 국립해양조사원의 ‘동해안항로지’에 따르면 호미곶 부근에는 암초가 산재돼 있어 해안선에서 2㎞를 벗어나 통항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돼 있다. 실제로 해안 주변에는 수심 3m 내외의 암초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1907년 9월 일본 수산실업전문대학 실습선이 좌초돼 승선자 4명이 사망했다. 일제는 이 사건의 책임을 우리나라에 돌리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렸는데, 이 일을 계기로 1908년 호미곶 등대가 건립되었다. 호미곶 등대는 1900년 초반에 건설된 많은 등대 중에서 단연 압권이다. 자료나 증언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았다는 게 정설이다. 등대는 높이 26.4m, 6층짜리 팔각형 건물로 서구식 건축양식을 보여주는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오롯이 벽돌로만 쌓아 올린 후 석회 몰타르로 마무리했다.□ 견고성과 건축미 자랑하는 호미곶등대등대에 올라서면 초속 10m의 바람에도 1㎝ 이상 흔들리는데, 지금까지 보수나 증축 없이 100년 이상의 풍파를 견뎠으니 그 견고성은 물론이고, 건축미학적인 가치도 뛰어나다. 벽돌만으로 그 높이까지 축조한 터라 하부의 안정성을 위해 아래는 펑퍼짐할 정도로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차츰 좁게 만들었다. 이렇게 수직선상의 곧고 우람한 기상을 살리면서도 안정감을 살린 건축미는 오늘날에도 결코 쉽지 않다고 한다.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 양식으로 장식되었고, 여기에 정교한 사각형의 페디먼트를 각인해 르네상스풍의 품격을 살렸다. 층계는 모두 108개인데 주물로 만들어져 그 시대의 고전적 투박함이 드러나며, 바닥의 나뭇결도 세월을 이기고 그대로 살아있다.등대의 꼭대기, 등명기를 관리하는 일은 숭고한 작업이다. 적막한 밤바다를 향해 빛을 내보내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러니 층계를 오를 때마다 번뇌를 모두 잊고 숭고한 사명감만 가지라는 설계자나 시공자의 의도였을까? 등탑의 각 층마다 조선왕실의 상징인 배꽃 문양이 각인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당국은 배꽃을 철판으로 가리고 자신들의 문양인 국화를 새겨 넣었다. 해방 후 철판을 떼어내자, 그동안 숨죽이며 있던 배꽃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풍전등화의 앞날에도 주권의 위엄을 지키고자 했을 대한제국 왕실의 의지가 가슴 아프다. 2006년, 98여 년 동안 등명기를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온 등롱만 교체한 후 지금까지 1908년 12월 20일 최초로 불을 밝힌 그때 그대로이다. 국내에서는 12번째로 100년을 넘게 불을 밝혀 온 등대인 것이다. 등대에 사용되는 전구는 700와트 하나로 가로등보다 조금 밝은 정도로 12초마다 깜빡이는데, 손으로 깎아 만든 렌즈는 이 빛을 40여 ㎞까지 뿌려준다. 호미곶 등대는 1982년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대보리, 구만리는 유채꽃, 청보리밭의 향연장등대 바로 옆에는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유물관, 등대역사관, 체험관 등으로 나뉘는데, 세계 주요 등대뿐 아니라 등대의 역사, 건축 등 등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유물관에는 등대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등명기와 등명기 렌즈가 전시돼 있어 빛의 발생과 작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등대박물관을 나와 해맞이광장으로 나오면 거대한 두 손을 볼 수 있다. 오른손은 바다에, 왼손은 광장에 제작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전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지난 천년은 한 손의 시대였다. 이 시대를 청산하고 평화와 희망으로 화해하고 서로 상생하는 새천년은 두 손의 시대이다. 그래서 이 손은 상생의 손으로 불린다. 일설에 따르면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정변 10년 후에 홍종우에게 살해당한다. 김옥균의 시신은 부관참시당해 머리는 마포의 양화진나루에 걸렸고, 사지는 찢겨져 조선 팔도로 보내졌는데, 그중 왼팔은 호미곶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리에게 좀 더 인내가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긴 했지만, 완전한 자주독립과 개혁을 시도했던 그의 행동이 당시 봉건세력들과 상생을 도모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진보와 보수, 대기업과 협력 중소기업들, 이웃과 이웃, 무엇에라도 대립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 상생의 손을 되새긴다면 우리는 분명 한결 나아진 자신이 될 것이다.바다를 정면으로 광장의 왼쪽에는 전국 최대의 가마솥이 있다. 둘레가 무려 10.3m에 깊이가 1.3m나 되는 이 솥으로 한 번에 2만 명분의 떡국을 끓일 수 있다. 2004년 1월 1일을 시작으로 매년 새해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일출을 보며, 떡국을 맛볼 수 있다. 광장의 오른쪽에는 연오랑 세오녀의 동상이 있는데,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는 한반도 유일의 태양 숭배 설화이다. 호미곶에서 포항으로 빠져나가기 전인 동해면 임곡리에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이 조성돼 있다.호미곶 광장 주변, 대보리와 구만리 일대는 유채꽃과 청보리밭의 향연장이다. 10만여 평에 11월과 12월께에 파종해 4~5월에 개화하는 유채꽃과 청보리는 때를 잘 맞추어 온다면 빛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하늘의 푸른색이 유채꽃, 청보리의 노랑, 녹색물결과 바다에서 맞닿은 풍경은 우리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이다. 호미곶의 보리는 겨울을 이기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자란다. 동네 처녀들이 쌀 한 말을 다 못 먹고 시집간다고 했을 정도로 이 일대는 보리밭 지천이었다.□ 한흑구의 ‘보리’를 떠올리게 하는 곳청보리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흑구(黑鷗) 한세광이 떠오른다.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로 시작되는 수필 ‘보리’처럼 한흑구는 일제 암흑기에 태어나 젊어서는 문학과 독립운동을, 해방 후에는 3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포항으로 와 평생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시, 수필, 소설 등을 왕성하게 창작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문학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안준우 소설가. 201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악어의 눈물을 위하여’가 당선돼 등단. 단편 ‘헤밍웨이’ 등 발표.한흑구는 일제의 서슬 퍼런 억압에서도 이육사 등과 함께 단 한 줄의 친일 문학을 쓰지 않았다. 한흑구가 호미곶 보리밭 일대에서 작품 구상을 한 것은 호랑이의 기운이 그의 강건한 기개와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필자만의 억측일까.호랑이는 돌진할 때 꼬리로 몸의 균형과 속도를 조절하며, 무리를 지휘하는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만주벌판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기개의 시작이 백두산이라면 그 끝은 호미곶이다.사시사철 동해로부터 거센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이 땅의 기운이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선시대 군마들이 이 강한 기운의 땅을 박차고 거센 바람을 가르며 달렸던 곳이다.일반 말들은 이 강한 기운을 이기며 자라지도 못했을 것이다. 온 국민의 상생을 염원하는 두 손이 마주보고 있는 곳, 단 한 줄의 친일 문학을 쓰지 않았던 문학가가 사색하며 고뇌했던 곳, 호미곶은 한반도의 최동단으로 가장 역동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곳이다.사진/안성용글/안준우

2020-11-02

바닷바람과 파도에 오래된 이야기가 익어가는 곳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구룡포는 장기반도의 동쪽에 해당하는 동해안 최대 어항이다. 어선들이 러시아 수역까지 조업에 나서는 동해안 어업전진기지로, 청어·방어·오징어·대게 등 어자원이 풍부하고 성게·미역·전복 등 신선하고 질 좋은 해산물이 모이는 곳이다. 밤이면 오징어배의 집어등 불빛이 밤바다를 수놓은 곳, 새벽이면 어판장에 대게, 홍게가 희망을 쏟아내는 곳, 겨울철 포항의 대표 특산물 과메기로 유명한 곳, 해안 절경을 따라 바다와 바람의 이야기가 익어가는 곳, 청보리와 해국, 유채와 억새가 피어 절경이 펼쳐지는 곳, 많은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곳, 바로 구룡포다.□ 근대문화역사거리구룡포가 근대적 항구로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구룡포가 황금어장으로 알려지면서 1906년부터 일본인들이 구룡포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은 현대식 방파제를 건설하면서 구룡포를 동해안 최대 어업기지로 만드는 기반을 닦았다. 1932년 구룡포에 정착한 일본인은 287가구 1천161명에 이르렀다. 지금 구룡포에는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가옥 40여 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통조림 가공공장은 물론 음식점, 제과점, 주점 등이 들어서면서 구룡포는 최대의 상업지구로 이름을 떨쳤다. 그래서 이 상업지구인 장안동을 ‘종로거리’라 부르기도 했다. 구룡포 장안동 골목은 1991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거리 촬영장으로 이용되었고, 2019년 인기리에 방영된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요 촬영지이기도 했다.장안동 골목길은 새 단장을 거쳐 일본인 가옥거리, 혹은 근대문화역사거리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이다. 이 역사관은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목조 가옥이다. 그는 구룡포에서 선어운반업으로 성공해 큰 부를 쌓았고, 건물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직접 운반해왔다.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한국과 일본의 건축가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을 만큼 가치가 높은 건축물로 명성이 나 있다.□ 구룡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룡포공원구룡포 항구를 한눈에 보고 싶다면 구룡포공원에 가야 한다. 일본인 가옥거리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원에 이를 수 있고, ‘용의 승천 새빛 구룡포’라는 작품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구룡포’라는 명칭은 신라 진흥왕 때 지금의 용주리에서 용 아홉 마리가 승천한 포구에서 유래되었다. 이 작품은 용들이 서로 어우러져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으로, 용의 승천은 구룡포가 하늘길로 통하는 유일한 땅임을 의미한다. 공원에는 선원들의 무사고를 빌던 용왕당도 있다.돌계단 양쪽으로 비석을 세워놓았는데, 왼쪽에 61개, 오른쪽에 59개의 돌기둥이 있으며 비석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일군수 김우복, 영일교육감 임종락, 제일제당 구룡포통조림공장 하사룡, 이판길 등. 단기 4276년(1943년) 7월에 세웠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계단과 비석은 일본인들이 세운 것으로,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집단 거주지를 만든 후 뒷산에 공원을 만들고 비석에 이름을 새겨놓았다. 그들이 떠나자 시멘트를 발라 덮어버린 뒤 비석을 거꾸로 돌려 그곳에 구룡포 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군마’를 기르던 장기 목장성영일에도 목장이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그곳에 나고 자란 사람도 모른다. 영일 장기읍의 장기는 긴 장(長)에, 말갈기 기(9B10)자를 쓰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에 의아해한다. 도대체 영일 장기목장은 어디로 간 것일까? 조선시대 최대의 국영 목장이었던 장기목장을 누가 우리의 기억에서 지운 것일까? (중략)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영일 장기목장에서는 244명의 목자가 1천여 필의 말을 사육하였다. 장기목장에서 나고 기른 말을 ‘장기 말’이라고 하고, 조선 군마 중 최고로 쳤다.-이정한 ‘장기목장’ 중에서, ‘조선의 마지막 군마’(김일광)‘조선의 마지막 군마’는 조선시대에 나라가 운영하던 가장 큰 목장인 영일 장기목장과 그곳에서 나고 자란 조선 최초의 군마인 장기마에 관한 김일광의 동화다. 장기목장성은 일명 석병성(石屛城)이라고 한다. 구룡포읍 창주리 석문동에서 시축한 성벽은 눌태리 계곡을 거쳐 응암산을 서쪽으로 돌아 공개산 서북편 산정을 지나 동해면 흥환리 배일리에 이르는 지대에 축성해 그 동편 전역을 목장으로 사용하는 길이 25리, 높이 10척에 달하는 장성(長城)이다.장기(長9B10) 동을배곶(冬乙背串)에 대한 세종 14년의 기록에 “이제 경상도 동을배곶에 이미 목장을 설치하였사오니, 청컨대 영일과 장기 두 고을 수령으로 감목관을 겸하게 하소서.”라고 남아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장기목장에서 말을 방목하기 시작한 것은 1432년 이후로 보이며 인근 지역 영일과 장기의 수령이 함께 관리하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흥환리 진골에서부터 구룡포 사이에 목장성터가 남아 있으며, 1882년에 세워진 목장주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감목관 민치억 영세불망비’와 흥인군 ‘이최응 영세불망비’ ‘울목김부찰노연영세불망비’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목장 입구는 현 구룡포읍 구룡포 3리에 얼마 전까지 있었던 큰 석문이며, 목장의 끝은 앞의 기념비가 서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원래 기념비는 바닷가 한적한 곳에 방치되다시피 한 것을 주민들이 지금 장소로 옮겼다.영일권에는 조선 초기부터 장기목장 외에도 각 군현에 군소 목장이 있었다. 현재 흥해읍 곡강 일대에 봉림목장지, 초곡, 마장동에 마장목장지, 죽장 상옥에 경전목장지, 오천읍 일월동에 일월목장지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 각 군현에 설치되었던 군소 목장은 1651년 마정을 개혁할 때 모두 폐하여 울산목장 소속의 장기목장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장기목장성과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연결하는 탐방로가 있다. 장기목장성은 말을 방목해 키우던 석성으로, 구룡포 돌문에서 동해 흥환까지 7.6㎞의 호미반도를 가로질러 2~3m 높이의 돌울타리를 쌓은 것이다. 훼손된 구간을 제외하더라도 5.2㎞가 존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성이다. 구룡포 말목장성길(구룡포초등학교~발산리 봉수대)에 이어 동해면 흥환리에서 발산리 봉수대까지 3.1㎞구간과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연결된다.오랜 역사를 품은 장기목장성과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펼쳐지는 둘레길이 호미반도 해안둘레길과 발산리 모감주나무, 병아리꽃나무 군락지와 어울려 매력적인 휴양지로 입소문이 나 있다. 매년 가을, 구룡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해질 무렵 출발해 말목장성터를 거쳐 봉수대까지 이어지는 길을 걸어가는 구룡포 말목장성 달빛산행 축제는 구룡포를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주상절리의 절경이 펼쳐지는 ‘삼정리’구룡포에 와서 삼정리를 지나칠 수 없다. 삼정리는 주상절리(柱狀節理)의 마을이다. 신생대 제3기, 6천500만 년 전부터 170만 년 전 사이의 어느 날, 지금의 구룡포읍 삼정리에 대폭발이 일어났다. 화산이 폭발하고 나면 용암은 굳게 되는데, 이때 절리(節理)가 형성된다. 절리란, 외부에서 가해진 어떤 힘으로 인해 암석에 생겨난 금을 말하며, 기둥 모양이 발달하면 주상절리라 한다. 삼정리 주상절리는 5∼6각형의 감람석 현무암으로 이뤄진 돌기둥이 높이 5∼15m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1997년 발견돼 2000년 4월 천연기념물 제451호로 지정된 포항 연일읍 달전리 주상절리 못지않은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삼정리 해안 100여m에 절벽을 이루고 있는 주상절리는 파도에 깎여 바다에 삐죽 솟아 있는 인근 주상절리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태양이 사는 곳, 땅끝마을 석병리이곳은 이제 그대로,갯목 시,해맞이 군,일어서는 바다 읍!- 박남철, ‘위대한 고향 포항시’ 부분1980~1990년대 한국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포항 출신 시인 박남철은 ‘포항 시’와 ‘영일군’의 주소를 이렇게 적었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섬을 제외한 우리나라 최동단을 경북도 구룡포읍 석병리(石屛里)로 표기하고 있다. 이를 나타내기 위해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조형물로 만들어 세웠다. 지구본 모양의 둥그런 돌에 우리나라 지도를 양각하고 거기에 동쪽의 끝단을 표시해놓았다. ‘한반도 동쪽 땅끝,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동경(경도) 129 35 10, 북위(위도) 36 02 51’이라 새겨놓은 것이다.석병리는 마을을 끼고 있는 긴 해안선이 깎아놓은 듯한 기암절벽으로 되어 있다. 그 모습이 병풍을 세워둔 것 같다 하여 석병리가 된 것이다.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해맞이의 고장, 태양이 사는 곳 석병리에서 이렇게 외친다.땅끝마을에서 이른 새벽을 보라!가장 먼저 쏟아 오른 희망을 보라!한 해를 살아갈 힘이 있는 곳에서.사진/안성용글/김동헌시인, ‘푸른시’동인, 2003년 ‘포항문학’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2008년 ‘문장’ 신인상 수상, 포항문인협회 사무국장 역임, 시집 ‘지을리 이발소’.

2020-10-28

우암의 정치 소신과 다산의 애민사상이 깃들어 있는 유배지

장기읍성 동문까지 승용차의 왕래는 비교적 자유롭다. 동문에 올라서면 저 위로 산 능선에서 흘러내린 성곽이 마치 꾸물거리는 뱀의 몸통처럼 아래쪽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 같다. 이곳에 유배자들을 관리하는 현청이 있었다. 현청의 동문에는 조해루(朝海樓)란 누각이 있었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조선 십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유명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성곽 위에 배일대(拜日臺)라 적힌 바위가 동쪽 바다를 보고 앉아 있다. 장기 현감이 매년 정월 초하룻날 조정의 임금을 대신해서 해맞이했다고 전해오는 유물이다. 다산 정약용도 이곳에서 ‘동문에서 해 뜨는 것을 바라보며’라는 시를 지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 220여 명의 유배객 거쳐가성곽을 타고 남문지에 올라서면 저 아래 현내뜰과 신창리 바닷가, 그리고 고개 넘어 양포항이 시야를 확 트이게 한다. 동남쪽 계원리 복길봉수와 동북쪽 모포리 뇌성산 봉수대가 기하학적으로 읍성으로 연결된다. 바다에서 침입하는 적들을 대비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이 성의 입지를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보면 장기면의 전체 입지는 삼면이 육지이고 한면이 바다에 인접해 있는 연해(沿海) 고을임을 실감할 수 있다.조선시대 유배지의 장소와 거리를 책정한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에 따르면 장기는 경성을 중심으로 유 3천리 지역에 해당하는 빈해각관(濱海各官:서울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이었다. 그래서일까.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같은 석학들을 비롯해 조선조 500년 동안 220여 명의 유배객이 이곳을 거쳐 갔다. 조선시대 장기로 오는 유배길은 영남대로를 이용했다. 한양-덕풍-경안-유춘-가흥-죽령-영주-안동-상주-함창-의흥-신령-영천-경주-장기로 연결되는 이 길은 서울에서 860리이다. 유배인들은 하루 95리를 걸어 9일 하고도 반나절 만에야 이곳에 도착하였다. 왕위 승계와 이에 수반된 당쟁, 그리고 사화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최종적으로 도착해서 신고식을 했던 읍성 바로 아래 장기초등학교가 있다. 그곳이 우암의 적거지였다고 전한다.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교정의 은행나무가 오늘따라 더 무성하다.□ 우암, 제2차 예송 논쟁에서 패해 1675년 장기로 이배우암 송시열과 장기의 인연은 어땠을까. 우암은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675년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5개월 후인 6월 10일 윤휴가 조사기, 이무 등과 함께 우암을 원악지(遠惡地)로 옮기기를 청하여 장기로 이배(移配)되었다. 장기에 도착한 우암은 장기성 동문 밖 마현리 사인(士人) 오도전 집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로부터 1679년 4월 10일 거제도로 귀양살이를 옮기기까지 우암은 4년여 이곳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살았다.우암은 동생들은 물론 부실(副室)과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함께 데리고 왔다. 이는 비록 유배객의 몸이지만 가족과 노복까지 대동할 정도여서 당시 우암의 입지를 반증하고 있다. 우암의 가솔들은 술을 빚어 모포리에 열리는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조선조의 관리나 지식인들은 유배지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는 일이 많았다. 이황과 이이는 물론이고 정약용과 박세당 등 실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4년간의 장기현 유배생활 중에 우암은 수많은 저작을 했다. 우암의 장기 배소에는 수백 권의 서책이 비치돼 있었고, 독서를 하는 여가에 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들 원고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상자 속에 간직했다.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라는 명저뿐 아니라, 1675년 6월에는 취성도(聚星圖)를 제작했다. 또한 이곳에서 ‘문충공 포은 정선생신도비문’ 외에 300수 내외의 시와 글을 지어 다양한 심회를 형상화했다.우암 거소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4년간 열심히 우암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장기현의 훈장이 되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8년 만에 우암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오도전, 오도종, 황보헌, 이동철, 오시좌, 김연, 서유원, 오도징 등 장기 향림들과 대구의 구용징, 전극화 등이 주축이 돼 죽림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들은 장기에서 노론 인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인맥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까지 존속되었다. 죽림서원에는 우암의 영정과 문집, 그리고 이곳에 유배를 왔다가 객사한 퇴우당 김수홍의 문집이 있었지만 서원이 훼철된 후 그 행방을 알 수 없다.시대의 거물인 우암이 장기에서 4년간 머물었다는 것은 장기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 전체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았다. 한양에서 무수한 고관과 학자들이 장기까지 찾아와 우암에게 문안을 올린 것은 물론 학문을 전수받기를 간청했다. 우암과 그 후학들의 영향으로 학문을 숭상하고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 풍토가 지역 곳곳에 조성되었다고 해도 결코 넘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산,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돼 1801년 장기로 유배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126년 지난 무렵, 다산이 장기로 유배를 왔다. 다산의 18년 유배생활의 시작지가 바로 장기현이다. 다산은 1801년 1월 19일에 터진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돼 1801년 2월 27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그해 3월 9일 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읍성 객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저녁 무렵 다산은 관리에게 인솔돼 장기읍성 동문으로 나와 마현리 구석골 성선봉의 집에 도착해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당시 다산이 관리를 따라 나왔던 동문은 지금 장기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조해루가 있던 곳이다. 그때 다산이 걸어 내려온 길은 지금도 거의 남아 있다. 장기향교에서 동문을 거쳐 면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황사영 백서사건 연루 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7개월 10일(220일) 동안 장기에서 머물렀다.장기에 온 다산은 틈나는 대로 장기읍성의 동문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가까운 신창리 앞바다에 나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걸 바라보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이 보리타작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담배 농사 짓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바닷가에 갔을 때는 처음으로 해녀의 물질을 구경했으며 오징어와 물고기를 보고 험한 정계에 뛰어들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처지를 우화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장기천을 따라 신창리 바다 쪽으로 녹음벽수의 장기숲이 펼쳐져 있었다. 다산은 그 숲길을 걸으며 자신의 처지를 시로 형상화하기도 했다.다산은 유배지에서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보내지 않았다. 불행한 역경을 불굴의 투지와 학문연구, 시작에 전념해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등 60제 180여 수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창작했다. 효종이 죽은 해의 효종의 복상 문제로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예론 시비를 가린 ‘기해방예변(己亥邦禮辯)’, 한자 발달사에 관한 저술인 ‘삼창고훈(三倉詁訓)’, 한자 자전류인 ‘이아술(爾雅述)’ 6권, 불쌍한 농어민의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는 ‘촌병혹치(村病惑治)’등의 저술도 이곳에서 남겼다. ‘촌병혹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의서와 약제를 알지 못하여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간단한 치료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 당시 장기의 풍속은 병이 들면 무당을 시켜서 푸닥거리만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먹고, 뱀을 먹고도 효험이 없으면 그냥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불쌍한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해 ‘본초강목’ 등을 참고하고 자신의 경험을 종합해 간단한 한방치료책을 지은 것이다. 다산이 이 책을 짓게 된 동기와 내용이 일부 적힌 서문에는 여건상 참고할 의서들이 부족한 탓에 귀양살이가 풀려서 더 많은 의서들을 참고할 수 있다면 ‘혹(惑)’이라는 글자를 뺄 수 있다고 했다. 귀양 온 자신의 처지를 잊고 백성들의 생명구제를 위해 의서를 저술한 그의 뜻은 깊고도 높다. 이 귀중한 책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 시와 저서 외에 장기에서 고향의 아들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가 전한다.다산은 장기에서 시와 저술 활동만 한 게 아니었다. 실학자답게 어부들이 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쳐버리는 것을 보고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 것을 권고하고,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궜다가 사용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개천에 보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하는 방법도 전수했다고 한다.□ 우암과 다산의 유배길, 유배문화체험촌으로 연계돼우암 송시열의 유학에 기반한 정치 소신과 다산 정약용의 실학적 실용과 애민사상은 장기고을을 학문과 교육, 효와 충과 예가 실천으로 역동하는 고을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오늘날의 장기는 어떤가. 전시대의 유배 역사를 이어 쌓으며 새로운 기질과 문화를 생성시키고 있었다. 유배 문화에 대한 지역민들의 생각과 그를 재현하려는 노력은 ‘장기 유배문화체험촌’이라는 결과물로 재현되었다. 앞으로 이 공간은 유배와 문학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 정보 습득의 전문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는 찾는 사람들의 숫자와 호응도로 예견할 수 있다. 우암과 다산의 장기 유배길은 ‘장기 유배문화체험촌’과 연계해 성찰과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다가오고 있다.사진/안성용이상준 향토사학자글/이상준향토사학자, 수필가,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제9회 애린문화상 수상, 저서 ‘장기고을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이 있다’ 등.

2020-10-26

오래된 시장에 활기와 평온을 선물하다

청림(靑林)은 도구, 구룡포로 가는 바닷길의 초입이자 포항공항으로 가는 하늘 길의 관문이다. 해병대 북문을 지나 조금만 속도를 내면 도구와 임곡을 가르는 갈림길에 이르고, 용무가 없다면 굳이 멈춰야 할 이유 없이 통과하게 되는 마을이다. 이곳에 소박한 변화를 통해 사람들이 마음을 내어 찾아오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소개한다.푸른 숲(靑林) 사이로 해와 달(日月)이 뜨는 아름다운 고장. 지명 유래를 통해 청림동을 정의하자면 이런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포은 정몽주의 시 ‘북유몰월(北有沒月) 형산(形山) 동망개월(東望開月) 형산(形山)’이라는 구절을 인용해 생겨났다는 청림의 옛 지명은 몰개월(沒開月)이다. 연오랑세오녀 설화와 관련된 일월지(日月池)가 있으며, 노송이 우거진 숲이 있어 낮에도 도적이 출몰했다는 일월동을 품고 있다.그런 지형적인 특성 때문일까. 높고 넓은 구릉지대와 해변을 낀 골짝은 시대의 필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를 지나며 일부는 중화학공장이 들어서면서 공장지대가 되었고, 군부대와 비행장 건설로 일월동 부락은 철거되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 일부가 도구와 경계를 이루는 도로변에 취락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 청림으로 우거졌던 숲은 사라지고, 비닐하우스 단지와 해수욕장, 비행장, 공장, 군부대와 사택단지 그리고 일반 주거지가 뒤섞인,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지역이 되고 말았다.□ 청림의 옛 지명은 포은의 시에서 유래한 ‘몰개월’해병대 북문을 통해 군속들이 드나들고, 면회객과 노동자로 활기차고 북적이던 마을은, 영화의 세트장처럼 그 어느 시절에 박제된 골목들, 간판들, 표정들만 남았다. 대체로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기에는 위험한 공장과 인가가 너무 가깝다. 많은 이들이 떠나갔고 마을 인구는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삶의 터전이란 신비한 것이어서 남은 사람들은 무슨 까닭이든 남아서 마을을 지탱한다. 아름다웠던 자연, 호황을 누렸던 기억, 산업화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었던 상처까지를 안고 주민들은 살아간다.필자는 저소득층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립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으며, OCI 포항 공장의 담벼락을 마주보는 곳에 사옥이 생기면서 10여 년째 이곳과 인연을 맺고 있다. 사무실을 나와 골목길을 따라 자박자박 걸어가면 청림시장이 시작되고, 상가들이 오밀조밀 모인 거리가 펼쳐진다. 시장 안에 들어있지는 않으나 분명 시장을 이루는 이 길은 10분여 만에 끝나버린다.청림시장은 1980년대 개장된 여러 상설시장과 비슷한 운명을 겪는다. 이 인근에서는 맛집으로 유명한 해룡반점과 청림반점이 여전히 분주하고, 영덕상회와 시장식육점의 불이 켜져 있으나 디귿자 형태의 안쪽은 대부분 창고처럼 닫혀 있다. 마을에서도 다방면으로 시장의 변화를 고민하지만, 딱 맞는 해법을 아직 못 찾은 듯하다. 오래된 간판 아래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상점의 문을 지나는 이 10분의 거리가 내가 10년 가까이 청림동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모든 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주민처럼 살아가지만 아무도 우리를 주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애써 관계를 쌓아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시간을 지나, 무언가 마을을 위해 우리가 쓰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겨났다. 자주 걷다보면 나쁜 공기도 정겹고, 뭐라도 해보기에 만만하고 맞춤한 이 시장과 골목이 활기를 잃고 스산히 저물어가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변화를 모색하지만 해법 못 찾은 청림시장마을주민이 원하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막연하게 일자리와 마을의 활력이 조우하기를 기대했고, 우리의 진심이 통하기를 원했다. 반쯤은 숙제를 못한 심정으로 지내던 중, 일터의 위상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마침 포항시는 도시재생에 몰두하였고, 중앙동에서는 꿈틀로가 자리를 잡아가는 등 외부적인 조건이 우리 활동에 자극이 되었다. 도시재생 지역으로 선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 청림시장 재생에 도움이 될 수는 없을지 고민했다.때마침 선물 같은 기회, 기적 같은 인연이 만나 ‘세탁소커피·청림’이 탄생했다. 포스코 1%나눔재단과 포스코케미칼(당시는 켐텍)의 지원으로 카페 사업이 선정되었는데, 그 조건은 3년 후 사회적기업 설립이라는 단 하나였다. ‘청림 살림’의 단초가 마련되는 감사한 사건이었다. 마을이 환해지고 생기가 돌게 하는 역할을 하는 공간이라면 청림시장 안에 자리 잡는 것이 좋았겠으나,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우리가 찾은 곳은 당시 멀쩡히 잘 운영되던 계명세탁소 자리였다. 정면에 잉꼬프라자가 사라지고 임시 주차장이 훤하게 열려있는 것도, 좁고 낡았으나 운치 있는 붉은 2층 벽돌집인 것도 매력적이었다. 마침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동대에 강의를 나가기 시작한 젊은 부부가 있었다. 세탁소 건물이 매력적인 공간이라 자신이 꼭 살려보고 싶다고 우리보다 더 들떴다. 평소 우리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던 동장님을 괴롭혀 세탁소 사장님을 설득했다. 월세도 조정하고 기한도 넉넉히 하는 등 ‘마을 일’이라는 마음으로 서로 합의가 잘되었다. 선대로부터 30년간 운영하던 계명세탁소는 그렇게 ‘세탁소커피·청림’에 자리를 양보하고 마을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장소를 정하고도 30년간 쌓아두었던 ‘묵은 것’을 어떻게 할지 난감했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젊은 건축가 내외는 그 좁은 공간을 5개월 이상 공들여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눈살을 찌푸렸던 굴뚝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되살려 사진에 담아가기 딱 좋은 그림 같은 창을 내었다. ‘원래의 것’을 최대한 살려보려 했으나 바닥 타일밖에 건질 것이 없어 애석해 하였다. 결국 ‘세탁소커피’라는 작명으로 30년의 흔적을 남기며, 큰 공사에서부터 컵받침 하나에 이르기까지 진심과 성심으로 고르고 배치한 정성이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스란하다.□ 세탁소 자리에 커피숍 마련하며 마을에 활기 불어넣어새롭게 탄생한 공간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5명 정도의 일자리로 구상하고 참여할 주민을 선발했다.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저소득층으로서 포항시 자활근로 사업비를 통해 임금을 받고, 커피숍을 운영해 생긴 수입은 참여자들의 자산 형성을 위한 펀드, 창업을 위한 자금 등으로 적립해 3년 후 사회적기업으로 독립할 준비를 하게 된다. 기초생활수급자 네 분이 모였다. 한부모 가장, 결혼이민여성, 약간의 장애가 있는 동네 총각이 일부러 맞춘 것처럼 이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영업 허가를 내기까지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으나, 결국 1층 커피숍 2층 ‘청림 살림’이라는 마을 공유 공간이 완성되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주민의 공간이 되도록 열어두었고, 평온을 선물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회의도 하고, 영화도 보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는. 이제 젊은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식사와 차를 즐기러 나오는 점심시간은 골목이 시끌벅적하다.세탁소와 비스듬히 마주보는 위치에 오락실 간판과 현란한 출입문이 시선을 어지럽히는 빈 점포가 있었다. 너무나 눈에 거슬리는 공간이었다. 세탁소커피가 순항하며 자리를 잡아갈 때를 맞춰 이번에는 이 공간을 탈바꿈하기로 작정했다. 수소문 끝에 건물주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건물 리모델링 비용 일부를 건물주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세탁소커피가 옛것을 되살리며 무채색으로 변신하였고,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였다면, 이 거슬리는 건물은 자연스레 ‘먹을 것’을 제공하는 공간이어야 했다. 마을 상가와 중복되지 않는 메뉴, 돌아온 군인들과 노동자들의 즐거운 먹거리를 위한 메뉴 공부가 진행되었고, 5명의 자활사업 참여 주민들이 전문가의 조력을 얻어 베트남 쌀국수, 나시고렝 등 조금은 친근한 아시아 지역의 메뉴를 다루기로 하였다. 이름하여 ‘아시안푸드·청림’의 탄생 배경이다.당초부터 그 ‘거슬림’에 주목한 건물은, 왜 그렇게 거슬렸을까 돌아봤을 때, 마을 한가운데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주차장과 건물 경계를 이루는 다 허물어진 담벼락, 주인 없이 오래 쌓여온 온갖 종류의 쓰레기, 어느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출입문 선팅, 그 문 앞에 흉하게 삭아가는 통신용 전주……. 커피숍에 그렇게 정성을 들인 것은 이 마을이 환하게 생동하기를 바람기 때문인데, 그 정면의 풍경이 이 지경이어서는 곤란했다.□ ‘세탁소커피’ 맞은편에 ‘아시안푸드·청림’ 개업버려진 보트의 주인을 찾아다니고, 마당에 풀을 뽑고 쌓인 쓰레기를 치우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갔다. 허물어진 담장을 수선하고, 우거진 잡풀과 쓰레기를 들어내자 크고 잘생긴 대추나무가 제 모습을 찾았고 매력적인 정원이 탄생하였다. 우리는 그 공간을 ‘기다리는 동안’이라고 작명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정원을 감상하고 여유롭게 보내시라는 뜻과 함께, 이 마을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생기가 돌고, 주민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소망이 담겨있다.한번 깨끗해진 공간은 쉽게 더렵혀지지 않았다. 인근 상가들이 표 나지 않게 새 단장을 했다. ‘세탁소커피·청림’과 ‘아시안푸드’가 자리를 잡는 동안, 청림시장 인근에는 커피숍 두 개가 더 생겼다. 칼국수집도 문을 열었고 맞은편 삼계탕집도 다시 문을 열었다. 한숨 자고 난 뒤의 움직임 같은, 어떤 활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걸 보면, 저 시장 안 불 꺼진 점포에서 아직 우리가 모르는 조용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대 변화에 따라 이 정도 규모의 마을과 시장이 쇠락해 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기품 있고 건강하게 잘 늙는 어른처럼, 나름의 매력을 가꾸고 유지하는 수밖에 없고, 이제 ‘청림’은 그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시작한 듯하다.송애경글/송애경시인, 사회적협동조합 포항나눔지역자활센터 이사장, 1986년 시 전문지 ‘시인’으로 등단, 포항여성회 회장 및 포항시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 역임.

2020-10-19

문화예술의 향기로 생기 되찾은 구도심

도시는 성장하는 반면 쇠락한다. 생성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소멸되기도 하는 것. 도시화 과정에서 공간의 권력 변화는 중심에서 교외로 급속히 이동되고 재편되었다.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는 그 과정을 답습한 곳이다. 2006년 포항시청사가 대잠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부분의 상권이 동시에 이전되었고, 남은 상권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도심 기능이 사라지면서 원도심은 구도심이 되었다. 사람이 떠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의 가치를 묵혀둔 공간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공간의 소멸은 존재의 부재 그 이상이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장면이거나, 두고두고 회자될 찬란한 삶의 한 조각일지도 모를 터무니의 상실이다. 공간을 통해서만 저장 가능한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은 공감의 기제로 작동한다. 그 기제가 사라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도 허물어진다. 기억의 재생이 멈추고 공동체가 상실된 공간의 소멸 속에 지금 여기, 현재성만 있을 뿐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도 멈춘다.□ 구도심이 되고 만 원도심포항시 북구 중앙로 298번지 일대, 지금 꿈틀로라 불리는 곳이다. 행정구역상 ‘중앙’이라는 호칭이 붙은 만큼 근대적 공간 배치에서 중심을 차지했던 곳이다. 행정기관이 밀집하고 그 덕에 공생하는 행정사와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위한 맛집과 각종 상점, 호텔과 유흥업소들이 콜라주처럼 어우러져 아우라를 뽐내던 도시의 심장이었던 셈이다. 적어도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2016년 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갈 즈음, 꿈틀로의 텅 빈 거리를 마치 격동의 시기를 지내온 것만 같은 시절의 민낯으로 대면했다. 청춘의 밤을 뜨겁게 노래했던 주점과 음악다방, 예쁜 옷가게, 극장이 있던 곳이 사라지거나 덩그러니 공실로 남겨져 있었다. 서양식 외관의 모텔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슬레이트 지붕,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건물 바로 옆 노포(老鋪), 대책 없이 방치된 빈 상가,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얽힌 전신줄과 폐간판 사이로 창백한 회색빛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혼종된 풍경을 스펙터클이라 해야 할지, 골목이 주는 이질적 형상들이 파편적으로 떠돌았다.포항시는 당시 중앙로 일대 도심 공동화에 대한 자구책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땅에 딱히 뾰족한 묘수가 많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여러 차례 벤치마킹과 사례연구 끝에 몇몇 도시에서 ‘문화적’ 방식으로 도심을 바꾸어 놓은 모델을 옮겨 보기로 했다. 한때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가 그 기능이 점차 외연으로 확장되면서 공동화(空洞化)가 진행된 곳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묘안은 ‘예술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골목 곳곳 구멍 난 공실에 공공(포항시)이 예술가들에게 임대비 지원방식의 창작 지원을 통해 조금이나마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라는 기대 반 우려 반으로 21개의 개인과 그룹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고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라는 이름으로 문화재생사업이 시작되었다. 중앙로 298 거리는 그렇게 새 간판을 달고 신장개업을 했다. 분명히 열려있는 길이건만 사람의 물꼬가 막힌 길을 뚫기 위해 공공의 역할이 작동된 것이다.□ 도심 공동화 해결책으로 문화재생사업 시작돼꿈틀로 프로젝트를 시작할 2016년 당시에는 점포 공실률이 30~40%에 육박할 만큼 공동화가 심각했다. 동아세탁소, 할매떡볶이, 산촌식당, 비목쌈밥, 세대세탁소, 옛 포항이용소 등 30~40여 년 자리를 지켜온 노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꿈틀로는 정식 행정구역명이 아니다 보니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만 4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꿈틀로, 거가 어데라?” 라고 되물을 만큼 ‘아카데미 골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 혹여라도 이후 30년쯤 훌쩍 지나 오히려 “아카데미 거리? 거가 어데라?” 라고 묻는 시민들에게 화답해 줄 수 있는 곰삭은 서사가 되기엔 발효가 더 필요하다.그래서 현재 꿈틀로의 시작점은 ‘옛 아카데미 골목’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갈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아카데미극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북적이고 다양한 상권이 살아 움직이던 시절로 날아갈 수 있다면, 그 시점에서 지금의 꿈틀로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공간, 다른 이름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우울 속에 도시의 성장사가 함축돼 있다.아카데미극장은 사라졌지만, 1973년부터 30년간 극장 간판 그림을 그린 안경모 씨는 아카데미의 산 증인으로 남아있다. 이외에도 켜켜이 쌓인 시공간의 주름은 꿈틀로 곳곳에 내재돼 있다. 1987년부터 오대산 나물밥을 팔고 있는 산촌식당은 일제강점기 은행 터였고, 그 인근에 포항 최초의 극장 영일좌(迎日座)가 있었다. 이는 문화적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원도심 서사 발굴 과정에서 발굴한 사실이다. 폐쇄지적도를 통해 거슬러 올라간 꿈틀로는 흙에서 터전으로 이어온 유구한 삶의 궤적이다.그런 의미로 꿈틀로는 쇠락한 상실의 공간이 아니다. 공간은 면적과 외형적 부피로만 읽힐 수 없다. 오랜 시간 축적돼 온 기억을 꺼내 닦고 쓰다듬다 보면 이게 보물인가 싶다. 시대를 휩쓸고 있는 레트로 열풍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영화가 다하고 낡고 허물어져야 보석이 되는 것도 있다. 지금의 포항을 반추하는 공간으로서 꿈틀로는 여전히 생물적 공간이다. 생물적 삶터의 뿌리는 분절되고 잘려나간 몸통에서 새롭게 생성되기도 한다. 꿈틀로의 명소 청포도다방은 분절된 시공간을 건너 새롭게 소환됨으로써 동시대 문화적 명맥을 이어가는 공간이다.□ 포항을 반추하는 공간, 꿈틀로청포도다방은 이육사의 ‘청포도’가 영일만 삼륜포도원을 배경으로 씌어졌다는 탄생 배경을 모태로 박영달 선생이 중앙상가 행텐캐주얼 자리에 개업한 음악다방이다. 담소를 나누는 공간을 넘어 문화계 인사들의 사랑방 기능을 하는 담론의 장이자 작품 전시장이기도 했다. 그러한 활동을 밑거름으로 1976년 문화예술단체 ‘흐름회’가 탄생되었는데, ‘포항시사’에서는 이 시기를 ‘청포도 살롱시대’라 명명했다.1960년대 청포도다방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낡은 점포를 다시 살린 2020년의 청포도다방도 의미 있는 문화 담론을 생성하고 있다. 원로들의 강의를 통해 근현대 포항 문화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비롯해 북토크, 작품 전시회 등 다양한 인문·예술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문화경작소’라는 별칭에서 청포도다방의 공간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오래되었다고 우월할 수 없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이내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꿈틀로는 새로운 흐름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26개의 예술가 창작공간을 비롯해 청포도다방, 문화공판장, 청년문화 편집숍 등 소단위 다거점 형태의 문화공간이 오밀조밀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다. 분식집과 이용소, 미장원, 식당이 주류를 이루던 골목이 바닥화와 벽화, 공공조형물, 셉테드(CPTED, 범죄예방환경설계) 기법의 조명이 들어서면서 시각적으로도 변신 중이다. 이와 함께 청년 기획자들의 유입으로 신구 조화가 이루는 세대 연결이 이루어지고 있다. 청년들은 예술가들과 함께 기획을 하고 공간을 새롭게 창조한다. 이는 공간을 판매하는 장소 마케팅과는 별개의 지점이다. 자신의 이상을 분출하고 가치를 인정받는 곳으로서의 공간은 장소의 창조성을 순환시킨다. 순환의 연결고리는 주민과 예술가, 청년그룹이 함께 만들어 간다. 처음부터 장소적 가치를 살리는 일보다는 서로를 탐색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에서부터 느슨한 연대가 만들어지고 공동체는 시작된다. 생태의 가치사슬처럼 공간의 생명력은 여러 갈래의 연결고리 속에서 만들어진 공동체를 통해서만 되살아난다. 그래서 우리는 공간의 바깥만을 봐서는 안 되고 내밀한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 사람과 공간의 틈새를 무던히 메워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꿈틀로 안내 조형물□ 다양한 인문·예술활동 펼쳐지는 청포도다방밀물과 썰물의 교차처럼 낡은 것은 낡은 대로, 새것은 새것대로 어우러져 꿈틀로의 터무니가 만들어지고 있다. 매월 1회 ‘문화 반상회’라는 이름으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예술가와 상인, 주민들이 도란도란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공공이 엮어 준 프로그램 안에서 형성된 관계맺음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에서 모든 길은 열리는 법이다.그렇게 시작된 ‘문화 반상회’가 ‘문화 품앗이’로 진화하고 있다. 작가들이 여는 행사에 주민들이 협치하고, 주민들이 운영하는 상가에 작가들이 재능 기부를 한다. 공공이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발적 학습동기를 만들어주는 것. 또 예술가들이 일방적으로 주민을 해바라기 하도록 하지 않는 것.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듯이 내밀한 관계맺음 속에서 공동체의 연대를 공고히 해나가고 있다.4년의 시간이 흐른 꿈틀로의 일상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오랜 시간 굳게 닫혀있던 빈 점포가 지금은 새로운 업종으로 거의 채워져 있다. 건물의 낡음도, 어지럽게 널린 전선줄도 해결하지 못한 채. 낡은 건물에 페인트를 칠하고 보기 좋은 조형물이나 포토존을 설치하고, 대형 건물을 짓는 물리적 방식의 재생 활동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롯이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의 손을 이끌어 내는 공동체 과정에 몰입했기 때문이다.꿈틀로는 모든 사람의 기억 속 길이기도 하고 새로운 창조성을 만들어 가야 할 열린 길이기도 하다. 공간의 과거에 집착해서도, 유행에 편승해 순식간에 인기몰이를 했다가 쇠락하는 외부자 중심의 공간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더 빨리, 더 나은 골목으로 살아남기 위해 속도에 욕망하다 보면 주위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고, 지금껏 새 삶의 터무니를 만들어 온 주민, 작가들의 삶터가 밀려나는 둥지내몰림이 올지도 모른다. 꿈틀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결된 통로다. 축적된 관계와 시간을 통해서 만나는 열림과 닫힘, 삶들의 ‘사이’이다. 사진/안성용글/황상해포항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장 역임. 현재 문화공간 운영팀장으로 재직.

2020-10-14

바람·파도·시간이 빚어낸 아름다운 순례길

살다보면 나침반이 있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갔지만 아닐 때가 있고 잘못 간다고 여겼던 이들이 뒤늦게 보면 제대로 가고 있다. 갈팡질팡할 것 없이 나침반만 보고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평온할까. 문득 삶이 흔들린다 싶을 때 바다로 방향키를 잡아보는 건 어떨까. 오랫동안 천천히 걸어보면 더 좋겠다. 바다라는 푸른 나침반과 동행하는 해파랑길이라면 더더욱 좋겠다.해파랑길은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지는 770㎞ 길이다. 국내 최장의 트레킹 코스로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슷한 거리다. 모두 50개 코스며 영남과 강원지역 12개 도시를 지난다. 포항 구간은 13코스부터 18코스까지로 100㎞에 이른다. 포항은 가장 긴 해파랑길을 가진 도시다.□ 장기 바다와 구룡포의 아름다움 품은 13∼14코스해파랑길 포항 구간의 시작은 양포항이다. 청어잡이 배들이 줄지어 서있고 선박 사이로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는 항구다. 해파랑길 초입에서 거대한 물고기 떼가 발길을 붙잡는데 이후에도 가끔 보게 되는 방어 양식장이다. 관리인의 말을 들어보니 방어는 워낙 예민한 어종이라 인적이 드문 곳에서 키우지만 해파랑길이 생기는 바람에 길가에 나왔다고 한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면서도 100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방어를 보는 재미에 자주 걸음을 멈췄다. ‘창바우 마을’을 지나면 육당 최남선이 조선 10경으로 꼽은 ‘장기 일출암’에 이른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바위에는 생수가 솟아난다고 해서 ‘날물치’, ‘생수암’으로도 불린다는데 물이 맑아서 여름에는 물놀이객 차지가 되었다. 그에 비해 장길리 복합낚시공원에 있는 ‘보릿돌’은 낚시꾼들 차지다. 갯바위 모양이 보리같기도 하거니와, 보릿고개 시절 바위 아래 미역으로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보릿돌까지 이르는 200m의 교량에는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해파랑길 13코스에서 장기 바다의 매력에 빠졌다면 14코스는 구룡포 차례다. 용 열 마리가 승천하다가 한 마리는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아홉 마리만 하늘로 올랐다는 구룡포에서 한반도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 끝에 해당하는 호미곶까지. 곳곳에 유명한 명소들을 보석처럼 박아놓은 말이 필요 없는 길이다. 시작지점은 구룡포항. 관광객 대부분이 일본인 가옥거리로 향하기에 해파랑길은 한산하다. 항구를 벗어나 골목을 걷다보면 구룡포만의 독특한 건축물이 눈에 띈다. 관광지의 인위적인 느낌이 싫다면 북적거리는 골목을 조금 비켜나서 걸어도 좋으리라.구룡포해수욕장을 지나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 도로에 크게 써놓은 ‘길이 없음’이라는 글귀를 무시하고 해파랑길 표지판만 믿고 걷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비가 온 뒤라 바다로 흐르는 민물이 불어난 탓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비탈진 암석이 위험해 보였다. 결국 언덕 위 차도로 올라가야 했기에 좁은 골목을 헤매다가 우연히 풍경 좋은 명당을 만났다. 간혹 길을 잃기도 하고 둘러가기는 해도 바다를 나침반 삼으면 돌아갈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골목길을 걸을 때보다 지도를 덜 보게 되고 산길보다 마음이 느긋하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호미곶을 일곱 번이나 답사했다는데 둘러가는 것쯤이야. 그렇게 걷다보면 선물 같은 풍경이 또 펼쳐진다. 막대 모양 돌을 켜켜이 쌓아올린 듯한 바위, 구룡포 주상절리다. 관광객들은 주상절리 앞에 경외심을 담아 조약돌을 탑처럼 쌓고 간다. 1억 년의 시간을 간직한 바위를 보며 걷다보면 멀리서 호미곶 등대가 깜빡이고 ‘상생의 손’이 손짓을 한다.□ 노을 명승지 즐비한 15∼16코스해파랑길 15코스(호미곶 해맞이광장~흥환보건소)와 16코스(흥환보건소~송도해수욕장)는 해파랑길 전 구간 가운데 유일하게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독특한 지형에 위치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동해지만 바다를 붉게 적시는 노을 명승지가 많다. 바다 위로 떠오르고 지는 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도시가 또 있을까.최근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완공되면서 걷기는 더 편해졌다. 둘레길이 조성되기 전 15코스는 여간 힘든 길이 아니었다고 한다. 해안둘레길 개통 후 포항은 해안길이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주요 구간은 네 곳으로 해파랑길과 진행 방향은 반대다. 해병대 상륙훈련장과 도구해수욕장,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을 연결하는 ‘연오랑세오녀길’이 소박하지만 정돈이 잘 된 길이라면, 동해면 입암리에서 흥환어항까지 이르는 ‘선바우길’은 볼거리가 화려하다. 모감주나무가 유명한 ‘구룡소길’은 자갈길과 산길이 섞여있어 힘들지만 지도에 없는 신비스러운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생의 손이 반기는 ‘호미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겨울에 걷기 좋은 여행길이다.25㎞에 이르는 해안둘레길을 모두 걷기 힘들다면 ‘선바우길’만 걸어도 좋다. 데크길을 따라 걷는 6.5㎞ 구간으로 한 시간 반이면 둘러볼 수 있다. 신생대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기암괴석이 많아 해안둘레길의 백미로 꼽힌다. 우뚝 선 바위인 ‘선바우’는 모래와 자갈을 썩은 독특한 모양으로 벼락을 맞아 지금처럼 아담해졌다고 한다. 거대하고 흰 바위 ‘힌디기’ 앞에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힌디기의 큰 구멍 앞에서 소원을 빌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 때문이다. 용왕과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바위섬 ‘하선대’는 갈매기들만 노닐고, 연오랑과 세오녀를 태우고 갔다는 검은 바위 ‘먹바우’는 금방이라도 바다로 나아가려는 모양새다. 세상에 어느 유능한 석공을 데려온들 이처럼 조각할 수 있을까. 바람과 파도와 시간이 빚어낸 석조 예술품에 심취해 걷다보면 시간 가는 걸 잊을 정도. 데크길 아래로는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투명한 바닷물이 찰랑거리고 청각이며 우뭇가사리를 줍는 사람도 많다.□ 17코스 죽천 용한리는 국내 3대 서핑 성지‘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완주하고 다시 북쪽으로 나침반을 놓으면 송도와 영일대, 칠포해수욕장에 이르는 17코스와 마주한다. 포항시민이라면 굳이 해파랑길 트래킹이 아니더라도 출퇴근길이나 친구를 만나러 간다거나 산책을 하면서 오가는 생활 속 길이다. 길이라는 것이 있어서 걷기도 하지만 걷는 이들의 바람이 모여 만들어지기도 한다. 언젠가 여남갑 등대를 보며 해안길을 걷다가 길이 막혀 돌아선 적이 있다. 지금은 여남동 둘레길이 뚫리면서 해변이 깔끔해졌다. 산책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길이 생겨서 좋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이 길을 만들지만 길은 더 많은 사람을 부르는 힘이 있는 셈이다.그러고 보면 바다와 가까이 사는 건 행운이다. 조금만 움직이면 과메기와 멸치가 꾸덕꾸덕 말라가는 덕장을 볼 수 있고, 새벽 바닷가에서는 부지런한 어선들이 쏟아놓은 싱싱한 횟감을 살 수도 있다. 생선을 손질하는 인부들 곁을 맴맴 돌며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살찐 고양이들을 보는 것도 즐겁다. 여남 멸치 덕장에서 전어며 어린 돔, 전갱이 등을 바로 썰어서 파는 회를 산 적이 있는데, 서너 명 먹을 양이 만 원에 불과했다.영일만항 인근 용한리 해변은 17코스를 걷는 젊은 도보객들에게 소위 핫플레이스다. 강원도 양양, 부산 송정과 더불어 국내 3대 서핑 성지로 불리면서 전국에서 서퍼들이 몰려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보여행자는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서핑을 즐긴 뒤 다시 길을 떠난다. 길에서의 자유를 온전히 만끽하는 여행자들이다.□ 호랑이 등을 오르는 17∼18코스포항시는 해파랑길 17~18코스를 ‘영일만 북파랑길’로 다듬었다. 송도에서 송라 지경리까지 39.2㎞ 구간으로 ‘영일대길’, ‘주상절리길’, ‘조경대길’, ‘용치바위길’ 모두 4코스다. 한반도 지도에서 ‘호랑이 등’에 해당하는 구간이어서 ‘호랑이 등오름길’이라고도 한다. 자연훼손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백사장과 기암괴석, 군부대 이동로를 살리고 필요한 구간에만 데크길을 설치했다. 모래와 자갈 해변이 길게 이어진 곳을 제외하면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18코스(칠포~화진) 가운데 칠포에서 오도까지는 ‘동해안 연안녹색길’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과거 군사보호구역으로 해안경비 이동로를 트레킹 코스로 정비했다.경치 좋은 곳마다 전망대가 조성돼 여행자들이 쉬어가기도 좋다. 칠포해수욕장 근처 해오름전망대는 철망 아래로 철썩이는 파도가 짜릿하다. 100m가 넘는 ‘이가리 닻 전망대’ 선두에 서면 미지의 바다로 항해하는 선장이 되어 볼 수도 있다.7번 국도를 자주 다니지만 도로에서의 풍경과 해파랑길의 풍경은 다르다. 포항의 하재영 시인은 “바다는 넓은 귀를 가졌다”고 했다. 바다의 귀에 온갖 시름을 소근 대며 걷다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시인도 경험했을 터. “어떤 슬픔도 씻어주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주는 동해”는 해파랑길에서만 느낄 수 있다.해파랑길 포항 구간을 마무리하던 날은 비바람이 거셌다. 화진해수욕장을 가로막은 육군훈련장 탓에 자꾸 뒤집히는 우산을 부여잡고 경적을 울리는 차를 피해 걸어야 했다. 그럼에도 최근 군사시설 철거를 협의 중이라는 소식에 다시 걸을 날을 기다린다.해파랑길을 걷는 동안 햇볕이 좋은 날도 있었지만 바람이 거세거나 비가 내리는 날도 있었다. 바다는 늘 한 가지 표정으로 맞아주지 않는다. 물결이 비늘처럼 간지러운 날도 있지만 모든 걸 집어삼킬 듯 파도가 성난 날도 있었다. 그렇기에 아는 길이어도 늘 새로웠다. 그러니 당신도 조금만 나와 보시라. 나침반을 놓을 세상이 넓어진다. 가까이에 바다가 있고 길이 있다. 해파랑길이 있다.사진/안성용글/배은정 방송작가,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에서 활동.

2020-10-12

녹슨 철길, 초록으로 물들다

오래전 기차가 달리던 철길이 이제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가 되었다. 열차를 타고 이동했던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 우현동에서 효자동까지 꽃, 나무, 숲, 물, 조형물이 어우러진 ‘철길숲(Forail)’은 포항의 새로운 명소다.침체 된 원도심에 녹색 활력을 불어넣고 시민들의 건강한 삶에 기여하고 있는 철길숲(Forail)은 숲(Forest)과 철길(Rail)의 합성어다. 약 100년간 동해남부선을 달리던 기차가 멈추고 소임을 다한 철로가 숲과 공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우현동에서 옛 포항역(서산터널)까지 1차 구간(2.3㎞)이 2011년에, 옛 포항역에서 효자교회 앞까지 2차 구간(4.3㎞)이 2018년에 완료되었다. 단절구간인 효자-유강IC 구간(2.7㎞)도 곧 완성될 예정이다.철길숲은 테마별로 어울누리 길, 활력의 길, 여유가 있는 띠앗길, 추억의 길로 나눠 조성되었다. 구간마다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잘 닦여 있고, 운동기구, 벤치, 정자가 놓여져 시민들이 길을 따라 걸으며 운동과 휴식을 겸할 수 있다. 덕수공원과 어우러진 호국보훈의 길, 서산터널에서 우현동 사이 여성아이병원 뒤편으로는 태교의 길, 양학동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치매예방 보듬마을, 불종로 안심마을 등 지역 특색과 연계한 길도 눈길을 끈다.□ 어울누리 길-불의 정원, 증기기관차 등 볼거리어울누리 길은 옛 효자역 부근 효자교회 앞에서 시작된다. 입구의 커다란 표지석이 당산목 팽나무와 함께 시민들을 반긴다. 유모차나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시멘트로 덮인 철길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나란히 이어진다. 익살맞은 표정의 장승들은 웃음을 자아내고 댄싱프로미너드, 랜드폼이 흥미를 끈다. 성모병원 가는 길 인근 작은 안내소에서 철길숲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어울누리 길의 압권은 불의 정원이다. 철길숲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관정 굴착 작업 중 지하 200m지점에서 나온 천연가스에 불꽃이 옮겨붙어 현재까지 꺼지지 않고 있다. 24시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발굴 상태 그대로 보존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불의 정원 옆에는 끊긴 철길 위를 달리는 형상의 증기기관차 ‘미카’가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 서 있다. 곳곳에 정자와 벤치가 놓여 있고 단체와 개인이 기증한 수목과 장미가 숲을 이룬다.□ 활력의 길-스틸아트 작품 보는 재미가 쏠쏠활력의 길은 대잠 고가차도 아래가 출발점이다. 시민들의 주체적인 이용공간인 한터 마당에서는 에어로빅, 기체조, 심폐소생술 시연 같은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음악 바닥분수는 코로나19로 작동을 하지 않지만, 주변에는 어린이 놀이시설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소풍을 와도 좋은 곳이다. 팽나무 숲과 메타세쿼이아 길 아래에는 들꽃들이 앞다투어 피고, 반대편 대나무숲 뒤로 그린웨이 도시 텃밭이 조성되는 중이다.군데군데 스틸아트페스티벌 출품작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내일로, 자연을 보다, 물에 물주는 소녀,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 도약, 기념비적 기념물 등. 그중 오픈 스튜디오 부근 광장에 설치된 ‘만남 2017’은 역상 조각 제작으로 유명한 이용덕 작가와 포스코의 만남이 빚어낸 수작이다.□ 여유가 있는 띠앗길-숲 갤러리 지나면 구릉과 자전거길 펼쳐져이 길은 득량 건널목, 양학 건널목, 학잠 건널목을 지나 용흥 고가차도까지 이어진다. 양학동 행정복지센터 앞에 치매 보듬마을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치매 보듬마을 프로젝트는 치매 환자와 인지 저하자가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가족과 이웃의 관심과 돌봄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한 주민참여사업이다. 가정과 가족 구성원을 떠올리게 되는 구간이다.박공지붕의 숲 갤러리에는 철길숲 조성 전과 후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입구에는 첼로 형상의 식수대가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구릉과 보도, 자전거길이 동시에 펼쳐지면서 언제부턴가 잠자리 한 마리가 따라온다. 삽상한 바람이 불면 구릉길의 풀들이 정겹게 엎드린다. 말 그대로 여유가 있는 띠앗길이다. 띠앗이란 형제나 자매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다. 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낮은 집들이 어릴 적 떠나온 고향 마을 같다.□ 추억의 길-옛 포항역 거닐면 추억이 떠올라용흥 건널목에는 철도 건널목을 지키던 낡은 초소가 그대로 남아있다. 길을 건너면 자갈길과 숲길이 선택을 기다린다. 자갈길은 옛 철도 차량정비소를 지나 안포 가도까지 이어진다. 가장자리는 펜스로 이어졌고 풀들로 무성하다. 철거하다 만 것 같은 건물도 몇 동 흔적이 남아있다. 한적한 포항역 일대는 무언가 변화를 앞두고 고심하는 모양새다.옛 포항역 주변 허공으로 구름다리가 길게 떠 있다. 오래된 육교 역시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역이 사라진 일대는 도로가 개설돼 용흥동과 중앙동을 횡으로 잇는다. 안포 건널목을 건너 범죄 없는 불종로 안심마을 구역을 지난다. 서산터널이 있는 도로에 이르면 철길숲 2구간이 끝나고 2011년 조성이 완료된 우현동 유성여고 앞까지 1구간이 시작된다.□ 서산터널에서 유성여고 앞-지역과 애환을 함께한 덕수공원 만나서산터널 앞 도로를 가로질러 나루끝으로 가다 보면 수도산을 만나게 된다. 산자락에 위치한 덕수공원에는 6·25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충혼탑과 지역문화 창달에 일생을 바친 재생 이명석 선생의 문화공덕비가 서 있다. 사방이 확 트인 우현 사거리 부근에 이르면 문득 길을 잃은 듯 도로가 앞을 막아선다. 하지만 몇 걸음 비켜서면 여태 달려온 길을 한곳으로 모으려는 듯 지하통로가 열린다.그린웨이를 홍보하는 현수막 몇 장이 벽면을 장식하는 지하통로를 지나면 불미숲이다. 불미숲은 여성아이병원에서 유성여고 앞까지 엄마랑 아기가 함께하는 ‘태교의 길’을 콘셉트로 한다. 길이는 짧지만, 흙길이고 벤치가 많아 쉴 곳도 많다.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가 적힌 액자 앞에 서면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된다. 여성아이병원 앞마당으로 가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인형들로 꾸며진 광장이 보인다.□ 경의선 숲길 등 철길숲의 모범사례서울 연남동 경의선 숲길은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중 서울역에서 문산역까지 광역전철이 지하로 개통되면서 용산에서 가좌까지 지상에 조성된 숲길이다. 6.3㎞ 구간에 다양한 테마로 조성된 레트로 감성의 숲길이다. 책거리, 연트럴파크, 노벨길이 있고 핸드메이드 소품을 파는 플리마켓과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스튜디오가 운영된다.8.1㎞ 광주 푸른길 공원은 2000년 폐선된 뒤 공원으로 탈바꿈된 시민 참여형 공원이다. 오감길, 배움길, 물숲길, 이음길이 있으며 맛집, 푸른길 작은 도서관, 교복 나눔 공유센터가 있다. 토요 장터인 상생마켓도 열린다. 군산시는 폐철도를 근대문화유산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가선 트램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폐철도를 활용한 트램을 도입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전국에서 처음이다.‘서울로 7017’의 모델이 된 뉴욕의 하이라인파크는 500종 이상의 식물과 나무가 식재되어 있으며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사는 도시를 대변하듯 각종 조형물, 설치미술, 벽화, 구조물 등이 풍부하다. 하이라인파크와 연결된 첼시마켓은 수백 년 된 황량한 공장지대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뉴욕의 문화 중심지로 탈바꿈되었다. 무엇보다 지역사회가 함께한 하이라인파크는 ‘하이라인 효과(High Line Effect)’라는 용어까지 회자되게 만든, 오래된 것은 보존하고 새로움도 함께 포용한 도시재생의 좋은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시민들의 다양한 아이디어 반영해야포항시는 2016년부터 시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삶의 질 개선에 역점을 두는 도시 활성화 전략인 그린웨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숲과 물길을 더한 쾌적한 도시, 사람이 머무르는 매력적인 도시, 즐길 거리가 있는 재미있는 도시 등 3대 추진 방향을 설정했으며, 그중 철길숲을 통한 지속 가능한 미래형 녹색 도시를 만들어가고 있다.철길숲을 걸을 때마다 포항을 소재로 한 시화 전시, 책거리와 전망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옛 포항역을 복원하거나 옛 철길을 회상하고 추억할 수 있는 철길숲 체험공간이 생겨도 좋을 것이다. 일정 구간을 철길숲만의 상징으로 디자인한 트램을 운행한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떤 시설보다 사람이 먼저다.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행복한 미래를 함께 가꾸어가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폐철도 공원화 사업으로 조성된 철길숲은 이제 많은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코로나19로 지친 시민들에게 큰 활력을 주고 시민들의 휴식처와 문화공간이 된 것이다. 이 숲길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더 친숙하고 유용한 시민들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녹슨 철길이 초록으로 물든 철길숲에 시민들의 다양한 상상력이 계속 반영됨으로써 철길숲이 시민들의 진정한 자긍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진/안성용글/김영소설가,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평사리문학상·천강문학상 등 수상.

2020-10-07

우리네 애환 품고 영일만을 바라보고 있는 낮은 산

산과 강, 바다를 두루 품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태백 구봉산에서 솟구친 낙동정맥이 청송 주왕산을 거쳐 남하하다가 동해안 쪽으로 뻗은 산의 흐름이 은은히 이어지고,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형산강이 녹두빛 강물을 뒤척이고 있으며, 밋밋하게 전개되던 동쪽 해안선이 크게 요동쳐 호랑이 꼬리의 지세를 형성하면서 영일만을 안고 있는 곳이 포항이다.산을 두고 얘기하자면,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는 내연산과 학이 금세라도 큰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갈 듯한 비학산이 북쪽에 솟아 있고, 원효와 자장, 혜공 등 신라 고승들의 수행처인 운제산이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사이로 도음산, 천마산, 봉좌산, 형산 등이 펼쳐져 있으며, 이 흐름과 이어져 수도산, 탑산, 학산, 양학산 같은 낮은 산들이 도심에 들어와 있다. 산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고, 언덕배기 같은 도심의 작은 산에도 애환이 서려 있다. 포항 도심의 대표적인 산, 수도산과 탑산 또한 그렇다.□ 수도산, 포항사람들의 정서적 둥지포항 출신의 작가 손춘익의 대표작인 소년소설 ‘어린 떠돌이’는 6·25 전쟁 직후 서산 밑 가난한 동네에서 한 꼬마가 꿋꿋한 소년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주인공 점득이가 무시로 서산에 올라가 먼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다.나는 그 옹달샘 곁에 오도카니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없이 넓은 바다에는 흰 돛단배가 서너 척 한가롭게 떠간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워낙 내 자리였다. 어느 날이고 틈만 나면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기쁘면 기쁜 대로 또 슬프면 슬픈 대로 나는 으레 그곳을 찾아 하염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한 마리 외로운 짐승처럼.서산은 해가 지는 서쪽의 산으로, 수도산의 다른 이름이다. 주인공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이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 올라가 먼 바다, 곧 영일만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를테면, 수도산은 한 마리 외로운 어린 짐승의 포근한 둥지인 셈이다. 소설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포항사람들이 수도산에 올라가 쪽빛 영일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수도산은 포항사람들의 정서적 둥지라 할 수 있으며, 작가는 가장 포항다운 원풍경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이처럼 수도산은 과거 포항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볼거리, 즐길거리가 빈약하던 시절, 수도산이나 송도 말고는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기에 그렇다. 더욱이 수도산은 1967년 5월 25일 도시계획공원시설로 지정된 덕수공원을 품고 있으며, 조경·휴양·운동시설과 전망대 등이 곳곳에 설치돼 있어 송도 솔밭과 더불어 소풍의 단골장소이자 백일장, 사생대회가 수시로 열리던 곳이었다. ‘어린 떠돌이’의 주인공 같은 어린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가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산책로와 운동장소가 되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은밀한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도산 밑자락 철로, 현재 철길숲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으며 그 발자국마다 애틋한 사연이 묻혀 있다. 현충일 행사도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6·25전쟁 때 산화한 포항 출신 군경들의 넋을 추모하는 충혼탑이 덕수공원에 있는 까닭이다. 포항에 문화예술의 씨앗을 뿌린 재생 이명석 선생의 문화공덕비도 충혼탑 가까이에 있다.□ 수도산 명칭의 역사적 유래수도산에는 몇 개의 이름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지는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산이라고도 하는데, 용흥동 우미골에서 육거리 방향으로 연결되는 서산터널이 그런 연유로 붙여진 명칭이다. 수도산은 원래 백산(白山)이라 불렀는데,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모갈(茅葛)거사가 은둔하며 곡기를 끊고 순절한 후부터 모갈산이라 불렀다. 포항시가 1979년 11월 수도산에 모갈거사순절사적비를 조성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다. 모갈산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일제 당국이 1923년 11월 17일부터 1926년 3월 말까지 당시 숙원사업이던 상수도를 설치하면서 배수지(配水池)를 이곳에 건립했고, 그후로 수도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배수지는 돔 구조의 지붕에 육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돼 있다. 1920년대 건축물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역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배수지에는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수덕무강(水德无疆)’, 곧 ‘물의 덕은 크나커서 그 지경이 없다’는 뜻의 글씨가 배수지에 새겨져 있다. 이 범상치 않은 글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은 최근 펴낸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에서 당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그 주인공으로 추정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수도 시설이 설치되면서 ‘수덕무강’을 새겨넣곤 했는데, 그 글은 대체로 그 지역의 부윤이나 지사가 썼다고 한다. 하지만 포항이 동해안의 대표적인 상업무역항으로 급성장하면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포항을 방문한 사실을 고려할 때, 포항 배수지의 글씨는 총독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김 부국장의 견해다. 요컨대 ‘수덕무강’은 1920년대 포항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탑산, 6·25전쟁 희생자 추념하는 탑과 시설 모여 있어용흥동에 있는 탑산은 수도산과 더불어 포항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왔다. 주변의 산길과 편안하게 이어지고 전망도 좋아 영일만 등 포항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탑산의 원래 이름은 죽림산(竹林山), 대나무숲이 우거졌다는 뜻이다. 산 아래에는 죽림사라는 고찰이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가 1809년(순조 9년)에 중창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포항시사’에는 봉황이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봉비산(鳳飛山), 다리를 구부리고 있는 말등과 같다 하여 복마산(伏馬山), 말이 달리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주마산(走馬山)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탑산이라는 명칭은 6·25전쟁 후에 세워진 탑에서 연유한다. 6·25전쟁 때 포항은 치열한 격전지였다.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였고, 전선의 절박함은 학도의용군이 처음 투입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44일간 공방전이 이어졌고, 포항 도심은 제일교회만 덩그러니 남은 채 폐허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고, 포항 곳곳에 전쟁 희생자를 추념하는 시설과 조형물이 조성돼 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산 밑자락에 위치한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뒤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포항지구 6·25전적비가 우뚝 다가선다. 1980년 2월 21일 건립, 제막된 이 전적비에는 포항지구 방어의 주력부대인 국군 제3사단을 기념하는 금속 조형물이 추상적으로 표현돼 있고, 전면에는 국군이 학도병의 어깨를 감싸는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포항지구 6·25전적비의 서쪽 방면, 산 정상을 바라보면 전몰학도 충혼탑이 서 있다. 포항 전투에서 산화한 학도병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57년 8월 11일 건립, 제막되었다. 탑의 높이는 8.8m로, 전면에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상상 속 영물인 기린상이 설치돼 있다.성격이 비슷한 두 개의 탑이 가까운 거리에 세워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몰학도 충혼탑은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이자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김종영의 작품이고, 포항지구 6·25전적비는 김종영의 서울대 제자이자 구상 조각가로 이름이 높은 백문기의 작품이다. 사제지간이지만 예술관이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이 탑산에 나란히 서 있는 배경은 지역 미술가인 박경숙이 밝혀낸 바 있다. 박경숙에 따르면, 1970년 후반 군부대에서는 김종영의 작품이 추상적이어서 전쟁의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탑을 없애고 다시 건립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구상 조각가로 명성을 떨치던 백문기에게 새 작품을 의뢰하게 되었다. 작품 제작을 수락한 백문기는 스승의 작품을 해체할 수는 없어서 군 당국과 상의 끝에 새 부지에 작품을 건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포항지구 6·25전적비 뒤편에 2009년 8월 11일 편지비가 조성되었다. 이 편지비는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을 지키던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의 주머니에서 유품으로 발견된 편지를 옮겨 놓은 것이다.(상략)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허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략)인생의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숨진 한 학도병의 편지는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절절한 평화의 메시지로 다가온다.조선시대 풍수가인 이성지가 이 산을 둘러보고는 ‘구봉연실지국(九峰蓮實之局)’으로 천하의 명산이라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성지는 어링불, 그리고 흥해를 살린 회화나무 예언에도 등장하지만, 그의 존재는 어느 문헌에도 남아 있지 않아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성지가 남겼다는 말과 예언은 풍수의 특성상 구전 설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수도산과 탑산을 찾는 발길은 예전만 못하다. 이제는 굳이 이 산에 가지 않더라도 갈 곳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산에 아로새겨진 사연을 알고 나면 관심과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고, 산의 명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모갈산과 죽림산이라는 명칭이 뚜렷한 근거를 갖고 오랫동안 존재했음에도 상수도 시설이 설치되고 탑이 건립되었다고 수도산, 탑산이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작명인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애환을 품고 영일만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저 낮은 산에게 예의와 정성을 다해 더 친숙한 우리의 벗으로 다가올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안성용김도형글/김도형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예담출판사 편집장 역임. 현)글로벌 해양수산 매거진 ‘THE OCEAN’편집위원, 현)독도도서관친구들 이사, 현)한국단백질소재연구조합 본부장.

2020-10-05

바다와 육지의 정수가 만나는 곳… 해양도시 꿈 무르익어

포항을 포항답게 하는 특징적인 환경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영일만을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영일만의 물줄기가 지나가며 만들어진 동빈내항을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영일만과 동빈내항은 지역을 이루는 한 부분임을 넘어 지역의 본질을 규정하는 어떤 ‘틀’과 같다. 그리고 이 틀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이 독특함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영일만 일대는 맑고 깊고도 차가운 바닷물을 육지 깊숙이 머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바다와 육지의 정수가 가장 긴밀하게 만나는 곳으로, 그로부터 모든 신비와 독특함이 나타나고 있다.바다와 육지의 교류라 하면 대개 서해안처럼 얕은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온 리아스식 해안이나 남해안처럼 여러 개의 섬과 만이 흩어져 있는 해안을 떠올리게 된다. 그에 비해 동해안은 단조로운 해안선, 급격히 깊어지는 수심으로 인해 바다와 육지가 선명하게 나뉘는 곳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영일만은 서해안, 남해안은 물론 다른 동해안과도 사뭇 다르다. 바다와 육지가 끊임없이 서로 교류하고 합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 어떤 곳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다다운 바다’·‘육지다운 육지’가 공존하는 곳단조롭게 내려오던 동해안이 영일만에 이르러 단 한 번 크게 요동친다. 바다는 묵직하게 육지를 향해 돌진하고, 육지는 바다를 찌르고 나아간다. 우리가 보는 영일만의 모습이다. 그 형태도 심상치 않다. 바다는 거대한 바위 같은 모양으로 육지로 들어와 있고, 육지는 오히려 굽이치는 파도의 물결 같은 모습으로 바다로 몰아치고 있다. 바다와 육지가 서로를 탐한 나머지 서로의 모습마저 흉내 내면서 태극의 음과 양처럼 서로 교합하기를 애쓰고 있는 형상이 아닐까.바다와 육지가 교류하되 그 경계를 흐리면서 구분 없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격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며 서로를 향해 들어가는 모습이다. 그래서 가장 ‘바다다운 바다’와 가장 ‘육지다운 육지’가 공존하고, 바다의 정수와 육지의 정수가 제대로 교감하는 장소인 것이다. 영일만은 육지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바다 특유의 차가움과 깊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호미곶도 바다를 향해 한껏 나아가 있지만 거친 암반과 구릉이라는 육지의 본질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는다. 바다와 육지가 그 성깔은 한 치도 포기하지 않으며 서로를 향한 맹렬한 열정을 보이는 곳, 바로 영일만인 것이다. 이렇게 바다와 육지의 교류라는 지역의 특성은 태초부터 형성돼 온 틀에서부터 너무도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설화와 전설이 암시하는 것‘바다와 육지의 교류’, 그리고 ‘서로를 향해 나아감’을 새기고 있는 태초의 틀은 지역의 설화와 전설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난다. 영일만의 고래 이야기, 연오랑세오녀 이야기가 그러하다. 영일만 주변의 고대인들은 고래를 소나 말 같이 친근하게 여기고 다루면서 이를 통해 문명을 형성해갔고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시에 수백 마리의 고래가 뛰노는 장관이 영일만 일대에서 펼쳐진 기록이 남아 있다. 저 깊고도 차가운 대양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고래가 북태평양을 돌고 돌아 영일만에서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그들은 차갑고 푸른 바다이면서도 육지로 둘러싸인 영일만을 포근한 요람처럼 느껴 여기에서 새끼를 낳았다. 영일만은 수많은 북태평양 고래들의 고향 마을인 것이다. 이 고래라는 동물은 또 어떠한가. 심해와 수면을 넘나드는 바다의 주연과 같은 존재이지만, 또한 끊임없이 육지를 갈망하는 존재이다.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육지 동물처럼 공기 중에서 숨을 내쉰다. 사람처럼 의사소통을 하는가 하면, 육지와 사람을 좋아해 일부러 연안을 찾아오기도 한다. 바다의 존재이면서도 육지의 삶을 늘 동경하는 고래는 그래서 영일만 그 자체인 것이다.연오랑세오녀 설화도 ‘육지와 바다의 교류’라는 차원에서 읽을 때,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이 고대의 남녀는 당대 육지문명의 정수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육지문명의 절정인 철기문화를 구현하고 있던 고대의 창조계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육지의 안온한 삶에 머무르길 원치 않았다.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와 달을 보며 바다를 소망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바다로 나아가 바다와 합일된 해양문명의 씨앗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들이 바다로 나아갈 때 육지의 한 부분인 큰 돌을 타고 갔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바다로 나아가면서도 돌과 철로 대표되는 육지문명의 정수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육지와 바다의 결합이라는 태초의 틀이 의인화된 결과이고, 영일만이 어떤 곳인가를 알려주는 상징적 근거가 된다.육지를 갈망하는 바다의 정수 고래, 그리고 육지문명의 정수이면서 해 뜨는 바다를 소망한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는 이처럼 연속된 암시를 통해 영일만이 어떠한 곳인지를 설명해준다. 그리하여 오늘날 여기 자리 잡은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제철, 바다와 육지의 교류라는 태초의 틀에 부합하는 산업우리 민족이 파도가 넘실대는 대양보다는 안정적인 내륙을, 해안보다는 중심부를 선호하는 역사를 선택하면서 어느덧 고래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연오랑세오녀도 바다를 갈망한 고대인이 아닌, 다른 육지문명을 개척한 선구자로 해석되었다. 우리에게 바다는 교류와 합일의 대상이 아닌, 어두운 안개가 드리워져 언제 외세가 침략해올지 모르는, 무서운 경계가 된 것이다. 우리는 바다를 잃었고, 바다를 두려워하는 내륙인에 머물러야 했다.다시 현실로 와서 오늘날의 포항과 영일만을 바라본다. 바다와 교류한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만, 태초부터 형성된 틀은 그렇게 쉽사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금 바다와 교류하며 나아가는 움직임이 영일만에서 시작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50년 전 시작돼 산업화를 이끌어 온 제철산업이 그러한 움직임의 상징이다. 앞선 철기문명을 이웃 나라들과 나눈다는 점에서 연오랑세오녀의 재림에 비견되기도 하지만, 제철은 바다와 육지의 교류라는 태초의 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산업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있다. 가장 육지다운 산물인 철광과 가장 바다다운 영일만 심연이 만나서 빚어진 산업이기 때문이다. 부두에 가득 쌓인 철광석은 영일만 심연의 물로 정제돼 단단하고 빛나는 철제로 완성돼 간다. 그리고는 해 뜨는 바닷길을 따라 나아가 세계 곳곳의 철기문명으로 다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포항, 해양도시에 걸맞은 입지 요건 갖춰이제는 지역을 만들어가는 정책도 태초부터 주어진 틀에 조금씩 부응하는 것 같다.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다시금 시민들에게 바다를 향한 소망을 조금씩 불어넣고 있다. 다섯 개의 섬이 모두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도심부를 어루만지는 바닷길이 살아나면서 송도도 그 명칭의 의미를 되찾았다. 빈집으로 내버려두고 떠나야 했던 송도와 동빈내항에 햇빛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마을이 가장 어두운 곳이 되어야 했던 도시개발의 아이러니가 조금씩 극복되고 있다. 바다와 연결된 하천이 돌아오는 것도 좋은 조짐이다. 콘크리트 아래 어디쯤 지나가던 과거의 하천들이 이제 다시 우리 삶터 속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재작년 해양수산부 지원으로 포항을 포함한 우리나라 유수의 해양도시를 비교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주제는 어느 도시가 보다 바다와 잘 결합돼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바다와 잘 결합된 도시는 경관, 활용도 등 여러 면에서 유리하고 또 오늘날의 도시재생에서도 내륙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을 가진다. 도시와 면한 바닷가는 과거와 같이 산업, 물류 기능만이 아닌 다양한 시너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심정적으로 느껴 온 포항의 모습이 차가운 숫자로 표현될 객관적 결과에서도 진실로 나타날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감동적(?)이었다. 포항과 영일만은 바다와 도시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도심부 깊이 들어온 영일만, 그 자체로 인해 포항은 해양도시에 걸맞은 입지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바다와 육지의 교류라는 태초의 틀, 그것이 추상적 상징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우리 손에 놓인 해양도시의 미래송도 재생사업과 함께 도심부 해안의 큰 변화가 예상된다. 송도와 동빈내항은 변두리가 아니다. 바다와 육지를 포함한 영일만권 전체의 중심지이다. 해양도시로의 재생과 발전을 위한 명운이 걸린 곳이 아닐 수 없다. 차분히 다진 계획과 성실한 추진, 시민·전문가의 활발한 참여로 진행돼 포항이 해양도시로 전환하는 데 큰 획이 그려졌으면 한다. 모든 사업에서 선행돼야 할 것은 소명의식이다.그리고 지역의 틀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에 대한 공유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인식이 없다면 불협화음 속에 방황하다 현실 안주에 그치는 개발사업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바다와 육지의 정수가 가장 강렬하게 맞닿고 있는 곳, 그에 맞는 인식과 문화를 키워갈 때 해양도시의 미래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사진/안성용김주일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글/김주일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서울대 도시계획학 박사, 건축사,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서울의 도시구조와 기능체계’ 등 저서와 논문 다수.

2020-09-28

‘동방의 적벽’처럼 아름다운 풍경서 큰 사상 일어나

長郊細雨草離離(장교세우초리리) 가는 빗속 너른 들의 풀은 무성한데白裌黃冠次第隨(백겹황관차제수) 흰 소매, 황관으로 차례로 걸어가네節屆曾翁言志日(절계증옹언지일) 찾아온 절기는 증옹이 뜻을 말한 날이고風輕程氏過川時(풍경정씨과천시) 가벼운 바람은 정씨가 시내 지나던 때네要看大海千流會(요간대해천류회) 큰 바다로 여러 물길 모이는 걸 보면서兼取兄山萬景奇(겸취형산만경기) 형산의 온갖 절경을 함께 찾아보네意思超然塵累外(의사초연진루외) 초연해진 생각으로 속세를 벗어나三春行樂互題詩(삼춘행악호제시) 무르익은 봄을 즐기며 서로 시를 짓네묵암(默庵) 허강(1766∼1822)이 쓴 ‘양동의 여러 친구와 함께 형산강을 거닐다(與良洞諸益, 過兄山江)’라는 시다. 묵암은 입재(立齋) 정종로(1738∼1816)를 사사했는데, 정종로는 소퇴계(小退溪)라 불리던 대산(大山) 이상정(1711∼1781)계의 문인이니,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은 인물이라 하겠다.봄날의 정오 무렵, 묵암은 가늘게 내리는 빗속에서 풀이 무성한 형산강 둑을 친구들과 함께 거닌다. 시인은 촉촉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송나라의 정호가 봄날을 즐기던 모습을 떠올리고, 더 먼 옛날 증석이 공자와 나누던 대화를 상기한다.공자가 말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너희의 능력을 알아준다면 어떡하겠느냐?” 처음에 자로가, 다음으로 염유가, 그 다음으로 공서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증석이 대답한다.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을 쓴 사람 5, 6인과 아이 6, 7명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증석의 대답에 공자는 “나도 증석과 같이 하겠다.”라고 답했다.공자는 제자의 답 중에서 증석의 답을 최고로 꼽았고, 자신도 증석과 같은 생각이라 하였다. ‘벼슬에 집착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지향하였기 때문’이었다.묵암에게 형산강은 공자가 거닐던 기수와 같은 곳이었다. 묵암은 여러 시내(川)의 물이 모여 형산강을 이루고, 이 강은 더불어 아름다운 산과 어울려 있음을, 그렇기에 기이한 경치를 지니게 됨을 말하였다.그야말로 형산강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만끽하면서, 함께 형산과 제산의 뛰어난 경치에 눈길을 던지며, 비 오는 봄날의 정취와 가벼운 바람이 이끄는 나들이에서 속세의 근심까지도 잊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묵암이 바라보던 형산강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였을까? 묵암보다 200여 년 전, 쌍봉(雙峰) 정극후(1577∼1658)의 시에서 그 아름다움의 정도를 만날 수 있다.壬戌新秋月旣望(임술신추월기망) 임술년 초가을 열엿새 날에使君來作兄江遊(사군래작형강유) 공(김존경)께서 형산강에 나들이 오셨네兄江水闊波運海(형강수활파운해) 형산강 드넓어 물결이 바다와 맞닿고子夜天淸月滿舟(자야천청월만주) 깊은 밤 하늘은 맑아 달빛 배에 환하네抹輕雲橫遠浦(일말경운횡원포) 한줄기 구름 멀리 포구까지 뻗었고數聲長笛落芳洲(수성장적락방주) 몇 줄기 긴 피리 소리 아름다운 물가에 가득하네東韓赤壁今如此(동한적벽금여차) 동방의 적벽이 바로 여기니不必蘇仙名獨留(불필소선명독류) (세상에) 소동파의 이름만 홀로 남을 필요 없으리‘형산강에 배를 띄우고 상공 김존경 좌하께 올리다(兄江泛舟奉呈金相公座下)’라는 시로 ‘쌍봉선생문집(雙峯先生文集)’에 실려 전한다. 흥해에서 태어난 쌍봉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정삼외의 둘째 아들이다. 여헌(旅軒) 장현광(1554∼1637)과 한강(寒江) 정구(1543∼1620)의 제자로, 효종의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이 시를 쓴 곳은 형산강에서도 부조장터가 있던 곳으로 여겨진다. 당시 경주 부윤이었던 김존경과 함께 형산강에 배를 띄워놓고 뱃놀이를 즐겼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달빛 그윽이 내리는 배에서 쌍봉은 형산강의 아득한 물결을 응시하고 있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과 나무하는 목동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소동파가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적벽부를 짓던 모습을 떠올린다. 동방의 적벽이 바로 형산강의 이곳이며, 동방의 적벽에서 쌍봉은 또한 동파가 되어 시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형산강에 대한 노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동방오현인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은 형산강을 어떻게 대면했을까? ‘회재선생문집’에 실린 ‘형산강가에서(兄山江上)’라는 시를 보자.湛湛江水本來淸(담잠강수본래청) 맑고 맑은 강물, 본래 맑았는데雨歇今朝濁似涇(우헐금조탁사경) 비 개인 오늘 아침에는 흐리기가 똥물 같네.萬古不隨淸濁變(만고불수청탁변) 오랜 옛날부터 청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말라 하였으니巍然江上數峯靑(외연강상수봉청) 강가 높은 곳에서 봉우리의 푸르름을 세어보누나.회재는 비 온 뒤의 형산강을 응시하며, 물길의 청탁과 산봉우리의 푸르름을 대비시켜 우리 삶의 태도와 이치를 돌아보도록 하고 있다.유학에서 공부는 내가 지닌 덕을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에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을 격물(格物)에 두었다. ‘대학’에서 “옛날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부터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할 것이니,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히 하는 데 있다”고 한 것도 그것이다.나의 마음에 있는 ‘명덕(明德, 밝은 덕)’을 밝히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을 격물에 두었으니, 이는 무엇보다 격물(格物)이 치지(致知)를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되며, 격물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앎, 참된 앎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주자도 ‘대학’의 ‘격물치지보전(格物致知補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앎을 지극히 하는 것이 격물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나의 앎이 지극히 하는 것이 사물을 접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데에 달렸음을 말한 것이다. 무릇 사람 마음의 영명함은 본래 지각을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고, 세상의 존재물은 이치를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다. 다만 이치에 대하여 궁구치 못한 까닭에 앎에 미진한 면이 있게 된다.”주자는 궁극적인 앎에 다가가기 위해 격물에 좀 더 다가가야 한다고 하여 강조한다. 회재가 탁류를 마주하면서 마음의 태도와 자세를 돌아보도록 한 것은, 사물의 이치에 깊이 다가가 그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앎에 나아가는 것임을 에둘러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형산강은 항상 아름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강좌(江左) 권만에게 형산강은 슬픔으로 마주한 강이었다. 강좌는 1728년에 형산강을 만난다. 그리고 형산강을 처음 마주한 날 시를 쓴다. ‘배를 타고 형산강을 건너다 대송의 적소를 바라본다(舟渡兄江。望大松謫所)’라는 시다. 강좌는 영일현에 유배 오던 날 시를 썼다.兄江東蹙動深坤(형강동축동심곤) 형산강의 동쪽, 땅이 다한 곳斜日揚舲渡海門(사일양령도해문) 석양에 돛단배 타고 해문을 건너네隔浦煙生槐樹綠(격포연생괴수록) 포구엔 느티나무 그늘 사이로 연기 이는데舟人說是大松村(주인설시대송촌) 뱃사공이 말하길, 이곳이 대송촌이라 하네영일현에 도착해 배를 타고 형산강을 건너 대송에 당도했을 때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강좌가 형산강에 도착했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포구에 도착할 즈음, 느티나무 그늘 사이로 저녁연기 자욱하게 이는 대송의 모습이 선하다.울산 백암산에서 발원한 형산강은 옛 진한의 땅, 옛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지나 영일만으로 흐른다. 신라가 통일을 위한 힘을 지니게 되는 첫걸음은 아달라왕의 포항 흡수가 그 출발점이었다. 그런 만큼 형산강을 함께 하는 포항과 경주는 문화적으로 지리적으로 공생의 관계였다.형산강에서 풍류도사상이, 원효의 화쟁사상이, 회재의 이기론이, 최제우와 최시형의 동학사상이 발현되었다. 우리나라 4대 사상의 발현지가 된 것이다. ‘강’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근원이고, 생명의 원천이다. 강은 문화와 문명이 일어나고 전하는 통로가 된다. 인류의 역사가 형성되는 강, 문화와 문화의 흐름과 상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 강, 신라 천년의 사직은 형산강에서 출발해 형산에서 마감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문화를 만들고 공유하면서 흐르고 있고, 또 흘러갈 것이다. 사진/안성용글/신상구위덕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양동문화연구소 소장, 포항문화재단 이사. 동국대 국문과에서 ‘수운 최제우의 성경론과 문학적 실현 양상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 ‘치유의 숲’ 등 다수.

2020-09-23

‘스틸아트시티’… 새로운 서사의 주인공으로

도시의 미래를 준비하며 발전의 동력을 문화예술에서 찾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도시 경쟁력의 핵심이 산업 생산에서 인문학과 문화예술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제가 정착되면서 지방자치단체마다 차별화된 도시 브랜드를 만들고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지자체 간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면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 확립을 위한 연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이를 문화예술로 녹여내는 작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포항도 새 활로를 열기 위해 시 차원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노력을 해보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포항시가 사활을 걸고 있는 관광산업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야심차게 준비한 해양관광도시로의 도약은 답보 상태에 있으며 미증유의 지진까지 겪어 도시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었다. 그 여파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2019년 전국 주요 관광지의 방문객 조사’에서 포항의 주요 관광지는 단 한 곳도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2018년까지만 하더라도 호미곶의 새천년기념관이 순위권에 들면서 자존심을 지켰지만, 지난해부터는 기념관 관광객 수가 100만 명을 넘지 못하면서 인기순위 바깥으로 밀려났다. KTX와 공항 같은 광역교통망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지자체의 경쟁력이 다른 시·군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다.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포항시는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19년 12월 관련 용역 계약을 체결하고 관광 활성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포항관광 2030 권역별 개발 및 활성화 마스터플랜’이 그것이다. 하지만 연구용역 중간 보고회의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인구수 16배 차 포항vs영덕 작년 관광객 400만vs576만’, 경북매일신문 2020년 8월 10일자 참조). 과연 포항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 것이며, 어떤 미래를 꿈꿔야 하는가?□ 철과 예술이 한몸이 된 페스티벌철강산업의 미래가 어둡다고 한다. 철강도시 포항의 미래도 밝을 수 없다. 이미 세계의 여러 철강도시들이 철강산업의 불황으로 쇠락하였고, 그중 몇몇 도시는 새로운 동력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철강산업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하더라도 포항에서 철은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가야 하고 더 큰 가치를 새롭게 부여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철이 포항의 미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역 문화계에서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대표적인 결과물이 스틸아트페스티벌이다. 스틸아트페스티벌의 산파역 중 한 사람인 김갑수 포항미술관장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이 페스티벌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서 기획되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1995년경에 스페인 빌바오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어요. 잘 나가던 철강도시가 형편없이 기울어버린 장면을 두 눈으로 보고 깜짝 놀랐지요. 빌바오는 그후로 대규모의 도시재생에 성공하고, 구겐하임 미술관도 유치하면서 다시 일어섰지만 당시는 대단한 충격이었어요. 그때 포스코 생각이 나더군요. 포스코도 머지않아 어려워질 수 있고, 포항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철의 쓰임새를 바꿔서 철을 예술과 한몸이 되도록 해보자. 그래서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고민이 스틸아트페스티벌까지 이어지게 되었지요.”(‘스틸아트시티 포항’ 포항문화재단, 2018년, 76쪽.)요컨대 철을 예술과 한몸이 되도록 함으로써 철강도시의 위기를 돌파해보자는 것이 스틸아트페스티벌의 근본적인 기획 취지이다. 즉 산업의 재료이자 지역의 정체성인 철이 예술가의 창의성과 첨단 과학기술을 만나고 이를 축제와 접목한 것이 스틸아트페스티벌이다.사실 ‘스틸아트’는 미술용어사전에 등재돼 있는 용어가 아니다. 금속재료를 이용한 예술장르를 통칭하는 신조어인데, 쇠는 탄소 포화도에 따라 아이언(철)과 스틸(강)로 구분되므로 철이든 강이든 금속을 주재료로 사용한 예술 장르를 상징적으로 명명한 것이다.□ 21세기형 예술도시의 의지를 반영2012년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을 처음 시작하면서 커미셔너 역할을 했던 오의석은 이 축제의 방향성에 대해 이렇게 규정했다.“전국에 넘쳐나는 수많은 축제 가운데 철을 테마로 한 예술축제는 찾기 힘든 신선하고 특별한 발상이었고 철의 도시 포항만이 기획하고 시도할 수 있는 것이기에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은 철을 산업적 코드에서 문화적 코드로 접근하고 변용해 나감으로써 예술과 산업과 기술을 융합하여 이루어가는 21세기형 예술도시로 포항의 변화를 예고하며 추구해 나가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앞의 책, 144∼145쪽.)‘예술과 산업과 기술을 융합하여 이루어가는 21세기형 예술도시’라는 표현에 스틸아트페스티벌의 방향성이 담겨 있다. 국내 유일의 스틸예술축제인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은 내년에 10주년을 맞이한다. 그동안 포항을 대표하는 예술축제로 성장한 것은 물론, 국내 문화예술계에서도 주목하는 예술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철강도시라는 무거운 회색톤의 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 예술축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은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또한 페스티벌에 출품된 스틸아트 작품 130여 점을 작품 성격과 잘 어울리는 장소에 재배치함으로써 도시경관을 개선한 것은 물론, 문화예술도시의 면모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대부분의 축제가 취소되었으나 스틸아트페스티벌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코로나 시대에 맞춰 무대행사는 지양하지만, ‘온고지신, 새로운 10년을 향하여’라는 주제를 정하고 영일대해수욕장을 비롯해 포항운하, 철길숲, 오천예술로 등지에서 작품투어 형식으로 진행된다. 스틸아트 투어앱을 개발해 작품의 위치와 해설을 제공함으로써 시민들과 소통하는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스틸아트시티 담론의 필요성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이 처음 열린 2012년부터 조각 예술가들 사이에서 포항은 스틸아트의 메카로 인정받았다. 그만큼 이 예술축제의 지향점이 확실했고, 메시지도 강렬했다. 국내 거의 모든 조각가들이 포항을 주목했고, 금속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작가군이 두터워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틸아트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작품의 수준이 획기적으로 향상되는 효과를 불러왔다. 스틸아트페스티벌 10년의 역사는 또 다른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 2018년 스틸아트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았던 김노암의 발언을 들어보자.“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이 조각과 설치미술, 키네틱아트와 미디어파사드,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현대미술로 장르와 형식을 확장해가리라 기대하면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 동북아의 대륙을 용맹하게 달리던 유목민족의 철기문명이 한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포항에서 현대의 철의 산업과 문화를 꽃피우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진 일이다. 포항의 철강산업이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조각작품, 설치미술이 만나는 아트페스티벌로서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이 현대예술과 시민이 함께 공감하고 호흡하며 대화하는 장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앞의 책, 171쪽.)오랜 세월 철을 매개로 포항 안에서 싹을 틔우고 성장해 온 포항만의 고유한 개성과 가치를 새로운 문화 담론으로 만들 때가 되었다. 그 담론을 ‘스틸아트시티’라 부를 수 있겠다. 스틸아트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품게 된 문제의식과 미학적 실험을 도시 곳곳에 전면화하는 것이 스틸아트시티이다. 그동안의 페스티벌을 통해 많은 스틸아트 작품이 도시에 곳곳에 배치되었고, 스틸아트공방에서 시민들이 스틸아트 제작기술을 배우고 있다. 지역의 철강기업이 직접 스틸아트 작품을 제작해 페스티벌에 출품하는 것도 페스티벌의 대중성을 강화하는 데 적지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스틸아트시티의 골격은 이미 갖추어져 있다. 스틸아트시티라는 새로운 담론을 통해 그동안의 문제의식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지역의 미래를 본격적으로 바꿔나가는 동력으로 만들어야 한다.스틸아트시티는 지역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철강도시가 철과 예술의 융합을 기반으로 진정한 문화예술도시로 새롭게 거듭나는 서사를 도시 곳곳에 실현하는 실험이다. 예술가와 시민, 행정기관이 창조적인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한 도시를 스틸아트공원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 작업의 연장선에서 우리는 좀 더 과감한 상상을 해볼 수 있겠다.이를테면, 2021년 폐쇄가 결정된 포스코 포항제철소 1고로를 스틸아트와 연계한 문화관광 인프라로 활용해보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스틸아트시티 실현을 위한 과제스틸아트페스티벌을 플랫폼으로 진정한 스틸아트시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점검해야 할 과제가 있다.첫째, 매년 개최되는 방식의 페스티벌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점검해보고 필요하다면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로의 전환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둘째, 국제적 수준의 스틸조각공원 조성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 스틸아트공방 등 시민참여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할 필요가 있다. 넷째, 스틸아트시티 실현을 위한 세미나, 심포지엄 등 본격적인 공론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한다면 스틸아트페스티벌 조직위원회 같은 독립된 기구에서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틸아트시티의 필요성과 방향성에 대한 시민적 공감대를 확보하는 것이다. 어떤 담론이나 정책도 시민들이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야 확실한 동력이 생긴다. 아무리 좋은 담론이나 정책도 시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생산적인 담론의 활성화는 시민의식의 수준과 도시 공동체에 대한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스틸아트페스티벌의 잠재력을 더 확장하는 것은 물론, 스틸아트시티 담론을 활성화하는 것은 매우 긴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예술이 일상이 되는 품격 높은 도시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사진/안성용류영재 화가글/류영재화가.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포항시립미술관 건립추진위원장·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운영위원장·장두건미술상 제정 및 운영위원 역임.

2020-09-21

청동기시대 한반도 문화의 지형을 바꾼 칠포 암각화

영일만을 특징짓는 문화의 시원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암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장기면 산서 새터마을 같은 구석기 유적이나 신석기시대 유물이 나온 곳도 있지만, 그것을 지역의 특성으로 볼 만한 수준은 아니다.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의 하나이다. 유럽에서부터 인도, 인도차이나반도와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6만 기 정도가 있고, 그중 약 4만 기가 한반도에 분포한다. 그런 까닭에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 대부분은 서해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영남지방에서는 영일만 일대에서 내륙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형산강 수계를 따라가며 높은 밀도로 분포된 고인돌을 보고 사람들은 진작부터 영일만을 일러 ‘고인돌의 고장’이라 하여 왔다.□ 암각화, 다양한 소재로 이뤄진 상징성 깊은 유물영일만 일대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 무덤은 기계천 주변을 따라가며 있다. 기계면 성계리가 대표적인 곳이며, 인비리에서 구지리의 들판과 언덕에서도 고인돌은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 빼어난 것을 고르라면 문성리 고인돌을 꼽고 싶다. 가로·세로·높이 480×270×390㎝ 크기의 듬직하고 당당한 모습은 주변을 압도한다. 크기로 치자면 성계리 노당재, 속칭 칠성고개의 270톤이나 되는 고인돌도 볼만하다.영일만 문화의 시원을 고인돌만으로 다 말할 수는 없다. 고인돌은 영일만 바깥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각화를 그 자리에 놓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암각화란 자연 속에 있는 바위 표면에 그림이나 조형 이미지를 새긴 것을 말한다. 문헌 기록이 없던 시대,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나 정신적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로 암각화만한 것이 없다. 그 내용을 분석할 수 있다면, 선사시대 인류의 잃어버린 많은 것을 되살릴 수 있게 된다.영일만에서 암각화는 1985년 기계면 인비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기계면에서 기북면으로 들어가는 길목 초입에 여러 점의 고인돌이 늘어서 있다. 이를 ‘인비리 지석묘군’이라 하는데, 암각화는 그중 한 고인돌에서 확인되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고인돌 덮개돌의 남쪽 암면(岩面)에서 석검과 화살촉 모양을 새긴 것이 세 점 나온 것이다. 단단한 석영과 같은 돌을 두드려 만든 석검 모양은 검날보다 훨씬 더 큰 손잡이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암각화가 발견되면서 인비리 고인돌은 이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고인돌이 되었다.□ 칠포리 암각화, 규모와 상징성에서 각별한 의미 지녀1989년 11월부터 필자가 발견·조사한 칠포리 암각화는 한반도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는 암각화 유적으로, 해발 177m 곤륜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다. 칠포리 암각화는 곤륜산의 두 곳을 비롯해 칠포리 마을 뒤 상두들의 고인돌, 제단 유적과 함께,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소동천 옆의 농발재 및 신흥리 마을뒷산 오줌바위를 포함하면 이 일대 7개소에서 조사되었다.이곳에서 나온 암각화는 석검 손잡이 모양의 검파형암각화(劍把形岩刻畵)를 중심으로 석검형, 윷판형, 여성성기형 등이 있는데 이중 검파형암각화가 가장 많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검파형암각화 중에는 길이가 100㎝나 되는 것도 있으며, 그것은 우리나라 암각화에서 최대 크기로 기록된다.칠포리 암각화는 규모와 조형성, 상징성 등에서 다른 암각화 유적과는 차이가 크다. 또한 다른 암각화를 찾아내는 데 자극이 되었고, 우리나라 선사시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영일만에서는 칠포리 외에 동해면 신정리에서도 같은 형태의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암각화는 왜 만들었던 것일까? 한 마디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간절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선사시대 사람들의 평온한 삶을 희구하는 지순한 노력이 암각화로 표출되었다고 할 것이다.□ 석검 손잡이에 풍요의 의미 담은 작은 홈 새겨암각화가 처음 만들어진 배경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바위의 상징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그동안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저 바위가 어느 날부턴가 “사자(死者)의 시신을 가두고 영혼이 머무는 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영혼의 정화를 돕고, 마침내 재생으로 이끄는 힘이 있는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데블리트 М.А)는 것이다. 그러한 자각은 신석기시대부터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일만에서는 기원전 7∼6세기 고인돌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후 영일만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위를 바라보게 되었고 암각화를 새기게 된 것이다.농경이 크게 발전하는 단계에 와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신성(神聖)을 갈망하게 되었다. 자연 정령이라는 모호한 대상보다는 실재하는 ‘나’라는 존재의 근본으로서 조상신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생전 영웅적 업적을 남긴 조상이 머무는 신성한 공간에 그들의 소망을 담은 ‘어떤 것’을 새긴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것이 기계면 인비리의 한 고인돌에 석검 모양의 암각화로 나타난 것이다.그런 석검을 왜 새긴 것일까? 돌을 다듬어서 만든 석검은 처음부터 도구로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청동기문화의 표본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을 모방해 일종의 모조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 모조품은 광주 신창동 유적과 같은 곳에서 비파형 동검을 본뜬 나무검(木劍)이 저습지에 꽂힌 채 나오기도 했다. 또 한 번의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왜 그렇게 애를 써서 석검과 나무검을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비파형 동검은 도구 이외의 또 다른 기능이 있다. 그것은 비파형 동검을 이용해 하늘의 천둥 번개를 부르기 위한, 궁극적으로는 비를 부르기 위한 제사의 신성구(神聖具)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그 기능성에 주목해 한반도 남쪽지방에서는 결코 구하기 쉽지 않은 청동검을 모방해 돌을 깎아 석검을 만들고 나무검도 만들었다. 결국 그 모두는 기우제를 위한 것이었다.특이한 것은 형산강 주변의 사람들은 그것을 복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석검의 손잡이에 풍요 의미를 더하여 작은 홈을 새기는 독특한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그런 석검이 흥해 초곡리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바위의 상징성에 눈 뜬 사람들은 의례에 사용되는 석검을 고인돌에 새기게 된 것이다. 실물로서 석검이 바위그림으로 재현된 것이다. 검이 물의 안정적 공급을 빌기 위한 신성구였다면, 그 목적을 더 절실하게 달성하기 위해 조상의 무덤인 고인돌에 새기는 행위로 나타나게 되었다. 영일만에서 암각화의 탄생이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영일만 암각화, 선사시대 한반도 문화의 표상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인비리에서 발견된 두 점의 석검 암각화에는 손잡이에 작은 홈이 있다. 형산강 주변에서 유행한 모양 그대로이다. 이 석검 암각화는 내재적 발전을 거듭해 칠포리에서 손잡이만을 중점 묘사하는 검파형암각화로 나타났다. 도구적 기능을 완전 제거하고 온전히 상징성만을 강조한 것이다. 칠포리 사람들이 이러한 형태를 만들어내면서 영일만 암각화는 독자적 형태를 갖게 되었다. 우리 지역의 문화사적 가치를 이 새로운 조형물의 탄생에서 찾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청동기시대 후기의 조형사조는 ‘부분이 전체를 대신한다’는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로 등장하게 된 검파형암각화는 영일만 암각화의 전반을 아우르는 용어가 되었다. 경주의 석장동 암각화도 포함하는 이러한 유형이 영일만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검파형암각화는 우리나라 12개 지역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계통적 유형의 첫머리에 칠포리 암각화를 두고 있다. 칠포리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넓은 지역으로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칠포리에서 동해면 신정리, 경주 석장동을 지나 영천 보성리로 전파되었다. 점진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해간 검파형암각화는 고령 장기리, 안화리, 지산리 암각화에서도 나타났다. 그리고 지리산을 넘어 남원 대곡리 암각화로 발전하기에 이르며, 최근에는 군위 수서리에서도 새롭게 암각화가 조사되었다. 그동안 조사된 10개의 검파형암각화 외에 이 유형의 소멸기 단계 유적으로 판단되는 영주 가흥동 암각화와 경주 안심리 암각화를 포함하면, 한반도 남부지방 동쪽에서 서쪽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칠포리에서 나온 검파형암각화이다.이러한 검파형암각화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조사되면서 분명해진 것은 그 원형으로서 선사시대 영일만 문화의 중요성이다. 그런 까닭에 칠포리 암각화는 발견과 동시에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던 것이다. 칠포리에서 처음 만들어진 검파형암각화는 그렇게 그 시대 사람의 정신사적 표상이 되면서 청동기시대 후반기 한반도 남부지역의 문화사적 지형을 바꾸었으며, 지금도 우리 문화사의 중요한 표본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빛나는 가치를 다시금 증명하여 후대에 잘 전달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들의 책무로 남아 있다. 사진/안성용글/이하우울산대 반구대연구소 교수. 화가. 현재 한국암각화학회 이사. 한국·호주에서 개인전 3회, 그룹 기획전 260회 참가. ‘한국 암각화의 제의표현에 관하여’로 문학박사 취득. ‘한국 암각화의 제의성’ 등 다수의 저서와 연구논문이 있다.

2020-09-17

우리 곁을 묵묵히 지키며 영욕의 역사와 함께해 와

지구는 무수한 별 중에 가장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다. 식물이 태초의 불모지에 산소를 공급한 것은 물론, 우리가 먹고 자고 입는 것의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식물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은 이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인류의 정신문화도 식물과 연관된 것이 너무도 많다. 1천년 이상을 살아가는 나무의 생명력을 보고 있노라면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온갖 풍파를 겪으며 오랜 세월을 살아낸 노거수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다. 노거수는 단순히 나이가 많은 큰 나무가 아니라 마을의 상징이자 문화의 중심으로 역할을 해온 것이다.□ 노거수회 출범의 계기자연환경은 그 땅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포항의 자연환경은 어떨까? 한마디로 열악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먼저, 우리나라는 편서풍이 주풍인 곳으로, 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오는데 포항은 한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해 건조한 바람만 오게 된다. 이 때문에 포항은 강수량이 적어 식물이나 사람이 살아가기가 무척 어렵다.다음은 토양이다. 포항의 토양을 설명하는 좋은 예로 영일만 사방공사가 있다. 1960년대 영일만 주변 산에는 나무를 아무리 심어도 잘 살지 못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칠포에 와보니 산이 온통 이암층으로 덮여있는 게 아닌가. 대기가 건조하면 ‘떡돌’이란 이름처럼 푸석푸석 부서지고, 비가 오면 흙이 씻겨 내려가거나 배수가 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영양가는 거의 없는 토양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해병대를 동원해 산에 교통호처럼 땅을 파게 하고는 평지에서 좋은 흙을 지게에 짊어지고 와서 나무를 심게 했다. 3년간 30만 명의 인원이 투입되었다.이후 30년이 지나 큰 산불로 이 일대 나무가 모두 불탄 후 몇 년이 지나도 숲이 형성되지 않고 맨땅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포항시와 산림청은 이곳을 사방기념공원으로 만들어 과거 역사를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니 포항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도 소홀히 다룰 수 없게 되었고, 노거수회가 포항에서 처음 출범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자천손의 마북 느티나무신광면 마북 저수지 옆에 느티나무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이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지정 보호수 제1호로 ‘권씨 할배나무’라 불리며 매년 정월 대보름 동제를 지냈던 당산나무이다. 1993년부터 포항의 극심한 가뭄으로 마북 저수지 확장 계획이 결정되었다. 이 공사가 진행되면 느티나무는 물에 잠기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노거수회는 느티나무 구명 운동을 펼쳤다. 다행히 4억5천만 원의 예산을 확보해 3년간 뿌리돌림 후 1999년 3월 9일 원래 있던 곳에서 200m 떨어진 남쪽 산기슭으로 옮기게 되었다.느티나무는 이 마을 안동 권씨 입향조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무자천손(無子千孫)’으로 ‘아들은 없고, 손자가 천명’ 또는 ‘아들은 없지만, 자손은 천대를 잇는다’란 내용이다. 옛날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온갖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물살에 휩쓸려 내려갔다. 그런데 수형이 반듯한 어린 느티나무 한 그루는 센 물살에 넘어지지 않고 꼿꼿이 선 채 떠내려왔다. 이를 본 입향조 권씨가 어린나무를 건져 소반 위에 얹어서 방안에 두었다. 흙도 없고 물도 주지 않았는데 한 달이 지나도 죽지 않기에 집안 뜰에 심게 되었다. 나무가 점점 자라 집안에 둘 수 없어 마을 입구에 옮겨 심었다.자식이 없던 입향조 권씨는 친자식 대하듯 돌보았고 이런 정성 덕분에 나무는 쑥쑥 자라 늠름한 모습이 되었을 때쯤 권씨는 병으로 앓아누웠다. “내 죽거든 저 나무를 나로 알고 박주일배(薄酒一杯)를 쳐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또 권씨의 무덤자리를 정한 풍수가 무자천손 터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 나무는 커갈수록 다섯 가지가 동서남북과 중앙을 가리키듯 반듯하게 자라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주었고 권씨 유언대로 절을 받는 당산나무가 되었다.홍수에 떠내려가던 나무를 입향조 권씨가 살려주었고, 다시 물속에 잠길 운명에 있는 나무를 노거수회가 구한 것이다. 이후 노거수회에서는 매년 칠월 칠석에 이 느티나무와 만남의 날 행사를 갖고, 손자 손녀의 마음으로 막걸리를 대접하며 천수를 누리길 기원하고 있다.□ 흥해를 살린 회화나무흥해읍 성내리 흥해민속박물관 뜰에는 수령이 600년, 둘레가 6.5m나 되는 늠름한 회화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흥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조선시대 풍수가였던 이성지가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 분지를 바라보고 “흥해는 다풍질(多風疾)이어서 후손이 5대 이상 살 곳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흥해는 과거 큰 호수였던 곳으로 가뭄 걱정은 없으나 습기가 너무 많아 필시 괴질병이 창궐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집집마다 회화나무를 많이 심어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흥해군수는 집집마다 회화나무 심기를 권장하였고, 이후 흥해는 물 좋고 농사도 잘 돼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 되었다고 한다.풍수가 이성지의 안목도 뛰어나지만 이를 허투루 듣지 않고 실행에 옮긴 군수의 실행력도 본받을 만하다. 흥해 곳곳에는 회화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 흥해 민속박물관의 회화나무뿐 아니라 이곳을 옥토로 바꾼 다른 주인공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늘이 내린 선물, 모감주나무6월 중순,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황금색 꽃이 피어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 주인공인 모감주나무는 세계적 희귀종으로 국내에서도 자생지가 몇 곳 되지 않는다. 포항은 우리나라 최대의 모감주나무 자생지로, 특히 동해면 발산리의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생태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제371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포항의 천연기념물은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포함해 흥해 달전리 주상절리, 흥해 북송리 북천수(숲), 장기 뇌성산 뇌록산지 등 4곳이 있다.모감주나무는 큰 나무이면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몇 되지 않는 나무이다. 꽃 하나하나는 작지만 원추꽃차례로 달린 꽃들은 은은한 향기와 함께 벌들의 합창까지 들려준다. 곧이어 꽃이 싱그러운 채로 뚝 떨어지는데, 이를 서양에서는 골든 레인 트리(Golden rain tree)라 부른다. 노란꽃을 떨구자마자 꽈리를 닮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 보는 이의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씨앗으로 염주를 만들어 염주나무라고도 하고, 중국에서는 학자나 선비의 묘에 심는 나무라 해서 학자수, 선비수라 한다. 공자의 묘소에도 아름드리 모감주나무 두 그루가 있다고 한다.□ 명성을 되찾아야 할 장기숲장기숲은 신라시대부터 길이가 10리, 폭이 5리나 되는 큰 숲으로 ‘십리장림임중숲’으로 불렸다. 1967년 농토로 개간하면서 대부분 벌채되고 지금은 장기중학교 안팎에 느티나무, 이팝나무, 회화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다. 숲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예전 장기고을 원님은 주변 고을의 원님들에게 장기숲 자랑만 하다가 재임 기간을 마치고 갔다는 말이 전해진다.장기숲에는 다른 숲에 없는 특별한 수종이 있었다고 하는데, 탱자나무, 주엽나무, 시무나무 등 가시가 많은 나무이다. 가시 많은 나무를 심은 이유는 장기 뇌성산에 있는 뇌록(磊綠) 때문이라고 한다. 뇌록은 단청에서 옥색을 만들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초록색 암석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난다. 왜구가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 자꾸 침입하자 거대한 방책으로 조성한 것이 장기숲이다. 지금도 장기중학교 안에는 100년 이상 된 아름드리 주엽나무가 있다.장기는 다산 정약용, 우암 송시열 등의 유배지로 학문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이들이 장기숲을 거닐며 유배의 설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렇게 훌륭한 역사를 간직한 장기숲을 복원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김설보 여사의 숭고한 뜻이 서려 있는 ‘여인의 숲’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에는 한 여인의 정성으로 조성된 울창한 상수리나무 숲이 있다. 1992년 노거수회 이삼우 회장이 이 숲의 가치를 발굴해 ‘여인의 숲’이라 이름 짓고 2011년 생명의 숲, 산림청, 유한킴벌리가 공동으로 주최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 공모해 공존상을 받았다. 예전에 이곳에서 주막을 하던 김설보 여사가 땅을 사서 참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이후에 큰 홍수가 났는데 이 숲 덕분에 많은 인명과 가축, 그리고 추수해놓은 곡식을 구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감사비를 세우고 이 숲을 ‘식생이수(食生而藪)’라 불렀다. 예전에는 숲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숲에 들어선 아이들이 길을 잃을 정도였다고 하나 일제강점기부터 주택과 논이 야금야금 침범해 지금은 자그마한 숲으로 남아 있다. 2003년 노거수회의 제안과 포항시의 지원으로 ‘여인의 비’를 건립했다. 김설보 여사야말로 장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의 회화나무와 소나무겸재 정선이 청하현감으로 부임하던 중 국보 217호인 ‘금강전도’를 완성하고, ‘내연산삼용추도’와 ‘고사의송관란도’, ‘청하읍성도’를 남겼다. ‘내연산삼용추도’의 모델인 연산폭포와 관음폭포는 어느 명소에 비해도 뒤지지 않을 절경이다. ‘고사의송관란도’의 소나무는 바위 절벽인 비하대에 굽어자란 소나무가 모델인 것으로 추정돼 ‘겸재송’이라 부르고 있다. 조감기법으로 그린 ‘청하읍성도’의 큰 나무는 현재 청하면사무소 뜰에 있는 회화나무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여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청하읍성의 복원과 더불어 이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 포항의 자랑이 될 것이다. 사진/안성용글/ 강기호서울대 산림자원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 졸업. 영남대 조경학과 박사. 현재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백두대간보전부장 근무.

2020-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