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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유네스코 인정한 ‘기록의 나라’ 종이의 힘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구 2·28 민주운동 당시 보도사진을 포함한 4·19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우리나라가 기록물이 18건이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기록의 나라’가 된 데에는 종이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종이는 기록물에서부터 문살을 바르는 창호지나 방바닥을 덮는 장판지로 건축용, 산업용에까지 그 용도를 넓혀가면서 문명과 문화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종이는 인내심이 강하고 그래서 수명이 길다.그 종이에 한평생을 바친 이영걸 안동한지 대표는 지난날의 영광이나 현재의 어려움보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계승 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안동한지 전시관을 찾는 관광객이나 체험객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면서 일부 체험객들이 다시 찾고 있지만 아직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넓은 주차장에 대형버스가 가득 찼는데 지금은 한가하지 않나. 전시관이 한가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지와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는 것같아 안타깝다.-한지가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지의 특성과 자랑을 해 달라.△한지는 부드러우면서도 가볍고 그러면서도 질기다. 보존성이 좋아 수명이 길다. 공기를 잘 통해주고 습기를 빨아들이고 내뿜는 통기성과 방음 보온효과도 뛰어나다.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2015년 전통한지 재현 사업 경연대회에서 안동한지가 선정됐고 현재는 정부 훈포장지로 한지가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우리의 기록문화 유산이나 목판이나 금속활자로 전해지고 있는 유산들을 비롯, 고문서들을 복원하는데 한지가 동원되면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삼국유사 목판사업에서 한지가 이용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이니 조선왕조의궤용으로, 또 국립문화재보존센터의 문화재복원용으로 한지가 동원되고 있다.-언제부터 한지와 인연을 맺게 됐나.△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대구공고)를 중도에 포기하고 친척의 권유로 안동신시장 옷가게에서 일했다. 그러나 가게가 파산하면서 고교 복학의 꿈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 충북 제천에서 철도국에 근무하는 조카사위로부터 한지공장이 많은 제천으로 와보라는 권유를 받고 한지와 인연을 맺게 됐다.그때 나는 이미 30살로 세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주위의 권유에 용기를 내서 고향을 떠나 제천에서 새 인생을 시작한 셈이다.-한지공장 직공으로 출발했다. 창업은 순조로웠나.△3년 동안 한지공장을 내 집 드나들 듯 열심히 공정을 익혔다. 그러자 내 공장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제천시 영천동에 ‘영천한지’ 공장을 설립했다. 처음 10여 명의 종업원을 채용한 한지공장은 조그마한 가내공업 수준이었지만 오늘날 안동한지의 모태가 됐다. 공장이 궤도에 오르니 일감도 늘어나고 종업원들 월급도 올라가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주변에 한지공장들이 새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우리 공장은 신기술 도입이 늦어지면서 판로가 막히고 회사 경영에도 어려움이 닥쳐왔다. 드디어는 종업원 월급을 체불할 지경에 이르렀다. 멋모르고 시작한 한지공장은 대량생산으로 이윤만 추구하다가 신기술 도입과 품질향상에 소홀히 한 탓이었다.-회사는 도산했지만 좋은 경험이 됐을 것 같다.△제천 공장을 팔아 직원 월급과 부채를 해결하고 15년만에 고향 안동 안막동으로 돌아왔다. 늙으신 부모님이 우리 5남매를 키우시던 논밭에 부모님을 설득해서 한지공장을 지었다. 제천에서 일하던 일당백의 직원 5명이 함께 했다. 안동을 비롯, 청송 영양 등지에서부터 멀리 원주까지 가서 닥나무를 수집해서 삶아 피닥을 전국의 한지 공장에 공급해주는 창고형 공장이었다.공장을 설립하고 1년동안 꽤 많은 돈을 모았다. 그런데 연료로 폐타이어를 썼는데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고 마을을 덮치니 주민들의 민원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업은 호황이었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주민들의 민원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공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안동시가 제안한 지금의 풍산읍 소산동으로 이전하고 풍산한지로 재출발했다.-풍산으로 옮겨와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안동한지는 고급화를 지향했다. 인사동에는 전주한지가 주름잡고 있었는데 안동한지를 고급화하자 화선지와 서예지로 각광받았다. 대량생산보다는 고품질 고급제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김휘동 당시 안동시장이 더 큰 시장을 내다보고 상호를 바꿀 것을 제안했다. 안동한지로 이름을 바꾸고 시설규모를 확장하면서 안동한지는 전국적인 한지 제조업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지금 현재 직원들 중에서 제천시대부터 같이 일한 직원이 있다고 들었다.△제천 한지공장 시절부터 오늘날 안동한지 공장으로 옮겨올 때 초지공 이창건 손춘모님과 건조공 김계회님이 같이 왔다. 30여 년 같이 일하다가 손춘모 초지공은 몇 년 전 작고했고 이창건 초지공은 고령으로 더 이상 한지를 뜰 수 없게 됐다. 김계회 건조공은 현재까지 40년 넘게 같이 일하고 있다.-안동한지가 생산하는 한지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나.△한지는 용도에 따라 전문성, 실용성, 예술성으로 구분해서 생산한다. 전문성은 서예 족자용 족보 서적 전문화가용으로 쓰이고 실용성은 문종이 인테리어 장판 문화재 보수용으로 한지가 쓰인다. 예술성은 한지공예품이나 포장용으로 쓰이는 한지를 말한다.종류로는 순지 창호지에서부터 외발지 화선지 배접지 색한지 대발지 천연염색지 실크지 요철지 등 70종이 넘는다. 특히 최근에는 국보나 보물급 지류 문화재의 보수 복원용으로 안동한지가 활용되고 있으며 2016년부터 정부의 훈포장지로도 한지가 사용되고 있다.또 패션과 의류용 한지로 한복 속옷 양말에서부터 넥타이 손수건을, 공예용으로 핸드백 제기 닥종이 인형 찻상이나 쟁반 지승공예 등 80여 가지를 만들어 상설전시장에서 전시 판매하고 있다.-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의 안동방문이 안동한지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하회로 가기 전 입구에 있는 안동한지를 방문하기로 계획했고 우리도 사전에 많은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공장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다리가 없었는데 방문 며칠 전 비가 많이 와서 개울이 넘쳐 여왕의 한지공장 방문이 불발됐다. 그러나 여왕의 안동 방문 전후로 주한영국대사와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안동한지를 방문했고 여왕의 안동 방문을 계기로 가장 한국적인 안동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안동한지도 붐을 탔고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회가 됐다.-한지의 또 다른 세계적 히트 사례를 소개해 달라.△서울 G20정상회의때 회의장 실내장식에 안동 한지가 사용되면서 한지의 우수성과 전통성을 세계에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 2010년 11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정상회의 본회담장을 비롯한 15개 행사장 전체의 실내장식에 안동한지 2천500여 장이 사용됐다. G20정상회의에 참석한 세계 각국의 1만여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전통 한지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할 수 있었다.지금은 유럽 등 문화선진국에서도 문화재 복원용으로 일본의 화지 대신 우리 한지를 이용하고 있으며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한지 제조방식을 시연한 것은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인정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교황 요한23세의 애장품인 지구본을 우리 한지로 복원해 내기도 했다.-그런 한지가 지금 위기라고 했다.△한마디로 수요 부족이다. 소비가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주거환경이 한옥에서 아파트로 바뀌면서 한지 도배 장판지 수요가 많이 줄어들었고 실내장식도 유리가 한지를 대신하면서 소비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또 사회가 디지털화 될수록 한지 쓰임새도 적어지는 것 같다.-안동으로 와서 기초의원으로 지역발전에 앞장섰던 시절도 있었다.△제천에서 이사와 사업을 벌였을 때 안막동은 안동에서도 상대적으로 낙후지역이었는데 지역 발전을 위해 나서달라는 지역민들의 바람이 있었다. 또 당시 친구였던 김길홍 국회의원의 권유도 있어 출마하게 됐다. 안동시의원으로 당선된 뒤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안막동의 외곽도로를 개통하는 등 기대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닥종이 명인이기도 하다.△전통한지는 전통기법을 활용한 제조와 신상품 개발을 위해 전통한지 제조기능 보유자 양성과 원료인 닥나무 재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닥나무 명인에 신청해 2015년 종이문화재단으로부터 닥나무 명인으로 선정됐다.종이문화재단은 안동 전주 원주 등 전통한지를 생산하고 있는 전국의 한지 품질을 조사한 결과 안동한지가 가장 우수하다며 명인으로 선정했다는 것이다.-지금 한지의 주 고객은 누구인가.△지금은 한지공예를 비롯한 전통공예 예술가와 전통사찰, 문화재 관계자 등이 주 고객이다. 고문서나 고서화 같은 문화재를 복원 재현하는 박물관이나 동화사 해인사 통도사 불국사 등 사찰들이다. 또 민화 작가나 교육기관도 한지의 주요 고객이 되고 있다. 특히 민화의 전통 안료와 색감이 잘 드러나고 보존성도 좋은 것이 안동한지이다. 민화 그리기에 사용되는 한지는 값이 비싸기는 하지만 그만한 값을 하기 때문에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표구에 쓰이는 배접지로도 한지가 쓰이는데 고품질 고품격의 작품을 담을 그릇으로 한지가 제격이기 때문일 것이다.-한지의 홍보와 보급을 위해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안동에서 한지 축제를 열고 있다. 2009년 시작해서 해마다 안동에서 한지 축제를 벌이는데 올가을에도 10월 한지축제를 계획하고 있다. 한류문화의 세계화 추진 전략으로 시작됐으며 한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한지 산업의 지역 특화 및 다양화를 모색하는 행사로 한지 관련 업체 및 공예인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또 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한지 패션쇼를 벌이기도 했고 서울 운현궁에서 한지 패션쇼를 벌이기도 했다. 또 대한민국 공예문화박람회와 한국 스타일박람회 등에도 참여해 한지의 우수성을 적극 홍보했다.-안동한지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는 문제는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안동한지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은 안동한지의 우수성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것과 함께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등재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지난 3월 우동기 국가균형발전위원장과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 김형동 국회의원, 이재갑 안동시의원과 김은경 안동시 문화관광국장, 그리고 7개 대학총장 등이 안동한지를 찾아 안동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지혜를 모았다.이 자리에서 이남식 인천재능대 총장은 일본 화지는 연간 1조원 가량 유통되는데 비해 우리 한지는 1천억원대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한지 소비량을 늘이기 위해 건설업체와 협약을 맺어 신규 아파트나 주택을 건설할 때 방 한 칸을 한지로 도배해서 입주자의 건강도 위하고 한지 소비도 늘리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안동한지의 기술과 전통의 전승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나.△세대를 이어 한지를 만드는 것이다. 세상이 AI시대, 빅데이터의 시대로 발전할수록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대를 이어가며 전통문화로 한지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들(이병섭 사장)은 이미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을 하면서 한지 문화를 계승하고 있고 손자도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치면 한지를 배우고 이어갈 것으로 준비하고 있다. □ 이영걸(李永杰·83)안동한지 대표. 닥종이 명인.안동 출신. 경덕중 졸, 대구공고 중퇴, 대구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수료.제2대 안동시의원.제천 영천한지공장 설립(1970), 안동 안막한지공장 설립(1986), 안동한지 설립(1988).화엄사 고려대장경연구소에 화엄석경탁본용 한지 납품(2001).서울국립중앙도서관에 고문서 복원용 한지 납품(2004).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한지패션쇼(2006), 서울 운현궁에서 한지패션쇼(2008).자랑스러운 안동시민상 수상(2010).삼국유사 목판사업 인출 제책용 한지 납품(국학진흥원, 2015).정부포상 증서의 전통한지 재현 및 행자부 납품 시작(2016)자랑스러운 경북도민상 특별상(2017).영가문화상 수상(2020).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할 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자식들에게는 착하게 잘 살 것을 강조한다./이경우 편집위원끝

2023-06-26

“전통건축은 상품이 아닌 작품이다”

금세라도 날아갈 듯 한껏 치켜 올린 처마,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은 건축 자체의 조화에서 처마 끝까지 풍겨난다. 세계인을 놀라게 만드는 또 하나의 한류 문화다.경북도 무형문화재 김범식 대목장은 평생을 목수로 살아왔다. 한국적인 아름다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어 건축으로 살려 내는 것을 사명으로 살아온 김 대목장은 “전통건축은 상품이 아닌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얼과 문화와 전통이 건축에 스며든 것이 전통건축이라는 것이다.건축모형을 통해 우리의 전통 건축 기술을 지키고 전수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는 김 대목장은 “사람들이 장인을 이야기할 때도 목수만은 ‘목수양반’이라 불렀다”며 목수일에 대한 자긍심을 빳빳이 세운다. 조선 세종 때 숭례문 보수 총책임자였던 대목은 정5품이었고 성종 때 개축 공사를 맡은 대목은 정3품 당하관이었다고 했다. -여전히 전통 건축 보전과 기술 전수에 왕성하게 활동을 하신다.△지난해 영남대에서 건우정을 신축했고 청도 운문사의 죽림헌을 수리 보수했다. 올 3월 KBS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년 동안에는 북한의 평양 을밀대와 보통문, 개성 남대문 등 건축 모형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일 하는 것이 쉬는 것이다.-지금까지 김 대목장이 수리 보수하거나 신축한 주요 건축물은 어떤 것들이 있나.△(모두 열거하는 것은 지루하다는 듯 ‘연도별 실적 목록표’를 건넨다. 거기에는 1964년 김천 직지사 청풍료 신축에서부터 최근까지의 주요 문화재 보수와 전통건축 신축현황 200여 건이 빼곡하게 일목요연 적혀있다.)-한국전통건축연구원에 전시돼 있는 모형들을 보니 김 대목장의 열성이 느껴진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작업들을 해왔나.△(연구원에는 서울의 남대문과 동대문, 덕수궁 중화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봉 봉정사 극락전, 대구 동화사 대웅전,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김제 금산사 미륵전, 밀양 영남루, 평양 을밀대 등 남북한의 전통 건축 모형 70여 점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리고 옆 건물에는 전통가옥과 한옥모형을 축소 제작한 모형 80여 점이 들어차 있다.)△오래 전부터 한 점씩 만들어왔다. 후세들에게 우리 전통건축물을 이해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연구 교육 자료로 제작한 것이 지금은 100여 점을 훌쩍 넘겼다. 전통건축은 겉으로만 보아서는 내부 구조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부 모형 몰에서 천장과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도록 지붕을 덮지 않은 것도 있다. 실제 축적의 10분의 1크기(전체 규모는 1천분의 1)로 제작했지만 문화재 수리보고서를 보고 정교하게 재현했기 때문에 재료가 적게 들었을 뿐 시간과 공력은 본 건물만큼 걸렸다. 작게는 3개월에서 숭례문 같은 대작은 1년이 넘게 걸렸다. 마치 손목시계가 큰 벽시계보다 품이 덜 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건축 모형에서 실제 건축물의 어떤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나.△우리나라 사찰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다는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에는 소의 꼬리를 닮았다고 우미량(牛尾樑)이라 부르는 굽은 부재를 썼다. 그런데 대형 건축물이어서 거기에 꼭 맞는 굽은 나무를, 그것도 4면에 16개를 같은 크기로 찾아내 만들었는데 그걸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불국사 대웅전 포(包) 위의 돼지가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곳 모형에서 돼지 조각을 어디에 어떻게 만들어 두었는지 찾아볼 수 있다. 밀양 영남루는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서 주변 자연과 어울리게 건축물을 축조했는데 우리 전통건축이 자연과 주변에 조화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다. 또 동화서 대웅전 모형을 보면 지붕 서까래를 잇는 연침과 추녀를 고정시키는 비녀잠을 확인할 수 있는데 모두 철제 못을 사용하지 않은 전통 건축의 원형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모형마다 이런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실제 그대로 정교하게 제작됐다.-전통 건축과 문화재 보수로 60년을 살아왔다.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당시 기술은 도제식 전수였다. 스승인 김윤원 대목장은 당대 최고수인 김덕희 대목장의 아들이다. 김윤원 대목장은 특히 대자귀질과 도끼질을 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직지사 청풍료(현 박물관) 신축공사에 김윤원(5년 전 작고) 대목장이 도편수로 일을 했고 김윤원 대목장의 제자였던 내가 대패를 들고 현장에 뛰어들게 됐다. 옛날 목수들은 다양한 목공예 기술을 보유했다. 목재 가공과 조각, 연결 기술 등 다양한 기술을 숙달해서 전통 건축물을 정교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런 기술은 건축뿐만 아니라 가구, 문화재 등의 제작에도 적용됐다.-소목장인 부친의 재주를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목수일은 재주가 중요한가.△어릴 때부터 연장을 다루는 아버지에게서 배우기는 했다. 군 시절에 주특기(수송)를 무시하고 목공이 됐다. 그때 차량 바퀴에 피대(벨트)를 걸어 통나무를 켜는 재주를 발휘하기도 했다. 목수는 재주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수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전통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주변의 경치, 태양의 위치, 바람 등과 같은 요소를 고려하여 건축물의 방향성과 조망을 결정해야 한다. 풍수를 생각하면 쉽다. 특히 한국 전통건축은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중시하며 자연재료와 기술을 적절히 활용하여 건물을 건축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한옥의 경우 간결한 형태와 내외부 공간의 유기적 연결을 통해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한국 전통건축이 중국이나 일본 건축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한국 전통건축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과의 조화, 유연한 곡선미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국 전통건축은 역사적으로 장대한 궁궐과 탑, 장식적인 요소들을 포함하는 복잡하고 화려한 건축양식으로 유명하다. 중국 전통건축은 대단히 다양한 형태와 장식을 가지고 있으며, 보다 웅장하고 화려한 느낌을 주는 것을 중요시한다. 일본 전통건축은 기능적이면서도 간소하고 정제된 디자인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기둥이나 석가래, 도리를 사각재로 쓰는 등 직선적인 형태와 단순한 장식이 특징이며, 습한 기후로 인해 개방적이고 통풍이 잘 되는 건축을 추구하고 있다. 일본 전통건축은 균형과 조화, 세련된 디자인을 강조하며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다.-문화재를 수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현대 건축에서 잘못하고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문화재 수리는 단순히 외관을 복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건축물의 원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고 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재는 그 시대의 사회 문화생활 방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특정한 기능과 의미를 갖고 있는 문화재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문화재의 본래 의도와 목적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복원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재를 수리할 때는 원래 사용된 재료와 기술을 최대한 존중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사용된 자재나 기술은 문화재의 역사와 특성을 반영하며, 그에 따라 건축물의 모습과 기능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원래 사용된 재료와 기술을 사용하여 복원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현장에서 작업할 때 특별히 요구하는 금기 같은 것이 있나.△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안전교육을 하고 지신제를 지내고 공사할 때는 금주와 금연을 특히 강조한다. 또 작업 공간은 항상 청결하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모두 안전을 위해서다.-전통 건축물, 한옥의 경우 미관은 좋은데 냉난방 등 효율이 떨어지고 생활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다.△한복을 생각해보면 된다. 개량한복은 아름다우면서도 생활에 편리하다. 우리 한옥도 그렇게 시대에 맞게 개량해 나가고 있다. 한국전통건축연구회가 표준형 한옥 모델을 제작 전시하고 있는 것도 한옥의 보급을 위해서이다.-아파트나 대형 주택 등 현대 건축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현대 아파트는 대량 생산과 표준화를 통해 건설되기 때문에 일정한 형태와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개성과 독창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 있다. 전통적인 한옥의 디자인 요소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거나, 전통 건축의 조형적인 특징을 현대적인 건축물에 적용하여 고유한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다.-시멘트는 전통 건축 재료가 아니다. 그런 공법으로 시공한 문화재가 있나.△대구 만촌동의 영남제일관을 복원할 때(1979년)다. 당시엔 나라 사정이 외화가 부족해서 외국에서 목재를 수입해 올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기둥에서부터 서까래까지 90%를 목재가 아닌 콘크리트로 만들었고 심지어는 성문까지도 콘크리트로 복원했다. 목재 다루는 솜씨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결국은 눈속임이고 그 자체로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라 형편이 좋아지면 언젠가는 목재로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지금 전통 건축이 현대 건축에 밀려나고 있는 것 같다.△건축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 약점이긴 하다. 그러나 사람이 건강하게 살려면 전통 건축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하고 전통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과 건축비에 맞춰 건축을 하다보면 작품이 아닌 상품이 되고 만다. 그래서 건축 모형을 만들어 후세에 건축 기법을 전하려는 거다.-문화재 보전과 건축에서의 목수 위상으로 볼 때 정책적인 제안을 한다면.△정부가 전통 건축 보전과 전승에 좀 더 관심을 갖는 정책과 지원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문화재의 보호와 보전 정책, 전통 건축 관련 기관의 지원과 장기적인 계획과 프로그램까지 포함한다. 전통 건축을 하는 목수들은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교육과정 및 인증 시스템을 강화해 줄 것을 요구한다. 제도를 통해 목수들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지원해주면 좋겠다.-무형문화재 대목장으로서 앞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대목장은 목수의 우두머리이자 책임자이다. 전통 건축을 하는 목수로서 무형문화재 대목장 칭호를 얻었다. 경북 최고장인으로 인정받았으니 열심히 산 것 아니겠나. 이제는 전통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내게 남은 소명이다. 건축 모형 작품들을 대중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장을 만들려는 것도 그래서이다. □ 김범식(金範植·80)충남 서산.전통건축연구원장. 경북무형문화재 대목장.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재과 수료.한국전통건축연구원 대표.전 (주)정동종합건설 대표.경북도 최고장인.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 37호 대목장.1964년 김윤원 대목장 입문.1977년부터 전통건축, 문화재 200여 건 수리, 복원, 신축.교육용 전통건축 모형 140여 점 제작.2012년 대구문화예술회관을 시작으로, 경주엑스포, 대덕문화전당, 경산시민회관, 아양아트센터, 수성아트피아 등에서 개인전 52회. 초대전 60여 회.2017년 베트남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 전시, 2017년 프랑스 기메박물관 한국문화재 재현전,2018년 미국 LA 가이아 갤러리 등에서 경북 최고장인 작품전, 중국 연길 두만강 국제투자무역박람회 등 해외전시 5회.전통목조건축 관련 특허 14개, 교육용 건축모형 디자인등록 42개, 실용신안 1개.비계기능사, 온수온돌기능사, 건축도장기능사 등 자격증 7종.한식목공, 목조각공, 드잡이공 문화재수리기능자.신지식인 국회의장상.그의 평생 소망인 교육 및 건축 모형 전시관 건립 지원과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모두 무산됐다고 했다. 특히 그의 재주를 아끼고 실력을 인정해 준 김관용 전 경북도지사가 전수관을 지원해 주기로 했으나 도청 신청사 건립으로 미루어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5-15

“4차산업혁명시대에 아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이 중요”

‘전문적인 직업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산업계의 수요에 직접 연계된 맞춤형 교육과정 운영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 마이스터고등학교는 취업을 최고 목표로 하는 전문 직업교육 고등학교다.내년이면 개교 70주년을 맞는 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는 2010년 마이스터고교로 전환한 이래 11년 평균 취업률 96%로 전자 교육의 메카로 자리를 굳혔다. 이 학교 출신 선배이자 중견기업 CEO 경력의 이준우 교장은 후배들에게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무엇을 아는 것보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며 동료에게 존중받는 기술인이 될 것을 주문한다.기업가로서의 경험을 “기업은 잘 나갈 때 새로운 먹거리를 찾거나 다른 곳으로 안착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충고도 빠뜨리지 않는다. -기업 대표에서 고교 교장으로 온 것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팬택 대표로서의 마지막 소임이었던 MA를 완수하고 진로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퇴사를 며칠 앞둔 때 구미전자공고 총동창회를 비롯한 여러 경로를 통해 모교에 교장을 새로 뽑는데 한 번 지원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망설이다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일을 하는 것도 보람이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모교여서 새로운 의욕으로 지원하게 됐다.-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최근 구미전자공고를 방문해 뉴스의 중심이 됐다.△이 회장은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지난 3월 구미전자공고를 방문해 ‘전자기기용 인쇄회로기판(PCB)’설계 수업을 참관했다. 이날 이 회장의 방문에서 인재양성에 대단히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 학교를 방문한 것도 그런 점을 격려하기 위한 행보였을 것이다. 구미전자공고가 인재 양성의 표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인정받은 것으로 본다. 이 회장에게 학교장으로서 부임 후 시스템반도체반 운영 동 특화교육과 ‘Clean Up School 캠페인’의 지속적 추진을 설명했다. 깨끗한 학교 환경 속에서 학생들의 바른 행동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3정5S’의 생활화를 통한 인성교육 프로젝트를 설명해 좋은 인상을 남겼다.-학교의 예전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내가 부임하고 학교를 신축하고 정비했다. 학교 교육의 혁신과 함께 시설투자도 추진한 결과다. 2021년 본관을 신축했고 2020년 융합전자관을 신축했다. 지난해에는 풋살장과 안내실을 준공했다. 그밖에 여학생 기숙사 주변 환경 정리사업과 본관 중앙정원을 정비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이준우 교장이 학교 경영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은 무엇인가.△시스템의 정착이다. 학교도 사회 속에서 경쟁하는 일종의 공동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속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역사상 많은 문명과 국가들이 번성하고 소멸했으며 범위를 좁혀보면 기업, 학교는 물론 많은 단체나 기관들이 경쟁에 쳐져 사라졌다. 영속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나는 취임 초부터 ‘시스템 경영의 정착’을 강조했다. 어떤 조직이든 사람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떠나기 마련이다. 조직의 수장이 바뀐다고 구성원의 합의를 통해 도출된 원칙이나 운영 시스템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가 마이스터고의 특성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나.△마이스터고는 취업을 최우선 교육목표로 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마이스터교의 목적이다. 마이스터고의 강점이라 할 방과 후 교육을 학교 재량으로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1학년부터 2학년 1학기까지는 영어와 전공을 교육하고, 그 뒤로는 전공심화교육에 중점을 두고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3년 전부터는 이를 발전시켜 학생들의 적성과 역량, 학업성취도 등을 주기적으로 평가하여 진로를 지도하는 ‘G-value Up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학생 개개인의 재능과 적성에 맞는 맞춤식 진로지도를 통해 행복한 취업을 실현하는 ‘구미전자공고 가치키움 진로지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학부모들은 대부분 공기업이나 대기업을 희망하지만 학교로서는 학생들의 능력과 적성 역량 등 데이터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최적의 취업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이제 정착 단계에 들어섰다.-구미전자공고 자랑을 해 달라.△무엇보다 높은 취업률과 우수한 취업의 질을 자랑하고 싶다. 물론 예전에도 구미전자공고의 취업률은 높았지만 마이스터고로 전환한 이후 11년 평균 누적 취업률이 96.2%를 기록했다. 직군별로 보면 대기업 44.3%, 공기업 11.5%, 중견 중소기업이 40.4%다. 마이스터고 개교 초기에는 대기업 취업 비중이 60%를 넘었으나 2016년 부임한 이래 학생들의 취업목표를 대기업과 공기업 50%, 중견 강소기업 50%로 설정하고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학교 구성원 전체의 노력으로 2019년 전국 특성화고·마이스터고 학교경영 최우수학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전자고라는 특수성에도 전자분야기관 최초로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종합 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구미전자공고만의 선도적 교육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구미전자공고는 대기업이나 공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연구인력 양성을 목표로 하는 RDE반을 운영하여 우수한 인재를 중견 중소기업에 취업시키고 있다. 2020년부터는 고교로서는 처음으로 시스템반도체 기업의 테크니션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강의는 실리콘밸리 출신 전문가와 금오공대 교수가 와서 지도하고 있다. 팹리스 기업에 반도체 인력을 공급하려는 목적인데 이는 기술 발전과 산업수요 변화에 선도적으로 대응하는 모범 사례라 할 만하다. 물론 반도체의 설계는 박사급 연구원들의 몫이지만 분석과 검증 같은 테크니션은 마이스터고에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최근 국가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대학에서의 시스템반도체 교육 강화에 앞서는 획기적 발상이고 시도다.-4차산업과 AI가 주도하는 시대에 학교 교육내용이 산업사회 현장에서 쓸모없어지는 사태가 생겨나지 않을까 걱정된다.△그런 염려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학교로서의 존재 의미가 사라질 것이다. 요즘 많은 일선 학교에서도 학과 개편이라든가 교육 내용에 변화를 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학교 홈페이지의 학교장 인사말에서 ‘미래사회는 IT 및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술이 융합되는 4차산업혁명 시대다. 새로운 시대는 첨단 분야에서 실무능력을 갖춘 기술인재인 뉴 칼라를 요구한다’고 썼다. 다만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시대라고 강조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명제에 충실한지를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SW(쇼프트웨어), 콘텐츠의 무한 변신을 보면서 앞으로의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지 궁금하다.△솔직히 정확한 답을 알지 못한다. 이 부분은 기술자나 교육자의 영역이 아닌 인류학자나 철학자의 영역인 것 같다.-교훈과 교육방침 외에 학교경영방침이 ‘Back to the Basic’이라고 붙어 있다.△학교에 오니 직원 월급 줄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제일 좋더라. 학교는 회사와 달리 예산의 효율적 집행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면 되니 경영상 리스크는 약하고 학교장의 적극적 마인드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불변하는 교훈과 달리 교장으로서 경영방침을 도입키로 하고 처음에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으로 정했다. 지금까지의 관행을 존중하면서 더 잘 해보자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2년 뒤에 학교 경영전략회의를 통해 전 구성원의 중지를 모아 ‘Back to the Basic’으로 정하고 세부 항목으로 ‘품성 동심 정진(品性 同心 精進)’으로 정했다. 학생들에게는 바른 품성을, 교직원은 학교 발전을 위해 한마음을 모으며 전 구성원이 힘써 실천하자는 의미를 담았다.-학교 경영에서 교직원이나 학생들과의 마찰은 없었나.△수천명의 조직원을 두고 연매출 3조원 이상의 회사를 경영해 본 CEO로서 고교를 운영하는데 특별한 점은 없었다. 기업은 목표를 정하면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 그러나 학교는 당장의 성과 보다는 방향을 정확히 잡고 기다리면서 천천히 목표를 향해 가면 된다. 우리 학교는 취업이라는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팬택은 어떤 회사였나.△휴대폰 업계에서 세계 10대 기업에 들었던 기술력 있는 기업이었다. 국내에서도 스마트폰 도입 초기에는 2위였다. 팬택은 수많은 세계 최초의 기술을 보유했고 그 기술력에서 세계적 자부심을 가진 회사였다. 전 직원이 일심동체가 돼 미친듯이 일한 때가 좋았다. 삼성이나 애플보다 앞서간 기술도 갖고 있었다. 휴대폰 사업 초기에는 많은 기업이 뛰어들어 모두 돈을 벌었지만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성숙기가 되면서 하나씩 사라지고 일부만 살아남았다. 팬택에 그 순서가 닥쳐왔던 것이다. 너무 잘 나갔던 것 같다.-팬택 시절을 회상하면 가장 아쉬웠던 대목은 어디인가.△몇 년 전 내가 취임했을 때 모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하겠다며 학교에 찾아와서 묻더라. 모두가 팬택은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MA를 통해 쏠리드와 인수합병을 완료했다. 회사경영을 이어달리기로 표현하면 나는 주어진 구간을 완주하고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긴 것이다. 다만 조금 더 선제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회사가 잘 될 때 휴대폰 기술과 관련된 사업 분야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거나 다른 곳에 안착시키려는 노력을 추진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학생일 때, 기업인일 때, 교장일 때, 이준우의 욕심에 차이가 있나.△욕심이라기보다 추구하는 목표가 다를 수밖에 없다. 기업인일 때는 연구원 출신이어서인지 세계 최초, 또는 대한민국 최초와 같은 제품이나 기술에 집착했던 것 같다. 기술로서는 절대 경쟁사에 뒤지지 말자는 소명 의식이 있었고 실제 성공한 예도 많다. 세계최초 one-board PCB휴대폰, 내장형 카메라폰, Endless metal case 폰, 국내 최초 지상파 DMB폰 등이 그것이다. 교장이 되고나서는 최초보다 표준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교 홈페이지에 타이틀로 ‘마이스터고의 표준’이라고 적어놓았다. 마이스터고로서는 가장 모범적이고 선도적인 모델을 추구하고자 하는 학교 구성원의 의지와 소망을 담은 것이다.-평소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졸업생들에게 사회에서는 누구보다 동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다. 직장의 상사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상사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스킬이 요구될 때도 있고, 부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자칫 관대함으로 흐르기 쉽지만 동료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동료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솔선수범의 리더십과 함께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약간 손해를 본다는 느낌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설명해 준다.□ 이준우(李俊雨·60)국립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 교장강원도 홍천. 국립구미전자공업고. 서울대 전자공학과. 포항공대 전자공학과 석사, 박사.현대전자 시스템 IC 연구소 선입연구원, 이동통신단말기본부 선임연구원(PCS단말기 HW연구실장).팬택앤큐리텔 중앙연구소 수석연구원, 상무. 중앙연구소장.팬택 부사장, 사장. 대표이사. 팬택자산관리 법률상관리인 대표이사.평소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젊은 청년으로 보아주길 바라는, 자칭 ‘보통 사람’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좀 멋지다’고 평가받고 싶어 한다.회사에서는 남들이 맡기 싫어하는 어려운 일을 솔선해서 맡아 성공시켰다. 보상이 나오면 부하 직원들에게 나눠줘 다면평가에서 늘 1등을 받았다. 시간이 되면 산에 가거나 친구들과 필드에서 운동을 한다. “구미는 가족이 있는 판교보다 여유가 있는 도시다. 선후배와 친구들도 많아서 정이 간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5-01

“대구상고 100주년 기념, 새 100년 여는 첫걸음”

1923년 대구 대봉동에서 개교한 대구상고(상원고)가 16일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이 학교 5만여 동문들은 금융 산업계를 비롯 각계에 진출해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했다. 또 야구와 럭비 등 스포츠에서도 발군의 실력으로 체육진흥을 넘어 국민 사기를 진작시켰다. 학교는 달서구 상인동으로 옮기고 후학들은 남녀공학 인문계로 바뀌어 선배들의 구국 교육열을 이어가고 있다. 이 학교 28회 졸업생 이종주 총동창회 고문(전 대구광역시장)은 “개교 100주년을 맞은 대상인의 기백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낀다”며 후배들에게 전통 계승을 당부한다. 36년여 공직생활을 한 그는 대구시 행정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대구상고 100년을 축하한다. ‘대상인’으로서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한 세기 질곡의 역사 속에서 학문과 독립애국정신을 일깨워 온 대구상고가 자랑스럽다. 5만 동문과 함께 100주년을 마음껏 축하한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개교한 모교가 민족적 갈등과 수적 열세(당시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많았다)를 딛고 오늘이 있기까지 동문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개교 100주년을 맞아 많은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개교기념일인 4월 16일 기념식부터 기념공원 조성 제막식과 운동회, 전시회 등 연중 30여 종의 행사를 통해 대상인의 저력을 과시할 계획이다. 동문들의 폭발적이고 전폭적인 참여로 100주년 기념 발전기금만도 지난해까지 27억원을 모금했다. 이번 100주년 행사는 앞으로의 100년을 시작하는 새로운 첫걸음이 될 것으로 믿는다.-대구상고의 정신을 이야기할 때 먼저 불의에 항거한 역사를 자랑한다.△1942년 일제의 내선일치 황국신민화 교육 등에 항거해 학생들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비밀결사 독립운동 태극단을 조직했다. 이듬해 이상호 등 26명이 전원 체포 구금돼 옥고를 치렀던 사실이 해방 이후에야 알려졌다. 내가 동창회장 때 현 모교 교정에 태극단 기념비를 새로 세우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동문들이 학도의병대로 참전해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1960년 자유당 독재정권에 항거한 대구 2·28학생의거에 참여한 것도 불의에 항거한 대상인의 혼을 보여준 사건이다.-운동에서도 대구상고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고교야구가 인기였고 대구상고는 전국적 스타군단이었다. 전국대회 결승전에는 대구에서 버스로 단체 응원을 가기도 했고 응원을 통해 선후배가 하나로 결속해서 대상인의 저력을 보여줬다. 6·25 직전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해서 우승기를 안고 한강을 건너온 추억이 새롭다. 정구부와 럭비부도 전국적으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공부하면서도 운동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상업교육의 산실로서 모교 출신 인재들이 우리나라 금융계는 물론 산업계에 대거 진출해 국가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대상인들은 지금도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학창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것 같다.△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키가 작아 선발되지 못했던 것 같다. 뒷날 삼성라이온즈 감독이 된 서영무와 동기였는데 영무는 야구를 하고 나는 뽑히지 못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승마였는데 6개월 동안 마굿간 청소만 시켜서 그만두고 럭비를 했다. 운동을 하고 싶었고 당시로서는 선수가 되지 않고서는 운동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지금 상원고는 남녀공학의 인문계로 전환해 또 다른 교육 비전을 갖고 전진하고 있어 든든하다. 100년을 맞은 상원의 혼을 보니 아름답고 위대하다. 후배들이 ‘푸른 꿈을 안고 오늘도 힘차게’ 대상의 혼을 면면히 이어가리라고 확신한다. 국가를 인간에 비유하면 몸과 같고 그 역사는 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세기를 맞은 대상의 체력은 굳건하고 그 기백과 영혼은 너무나 자랑스럽다. 불의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선배들의 기백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선배들의 저력을 이어 대상인의 전통을 굳게 이어갈 수 있도록 모두 노력하기를 바란다.-대구시장으로 공직생활 마감했다. 그런데 그 때 큰 사고가 났다.△시장 취임 한 달도 안 돼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상인동 가스폭발사고가 터졌다. 현장을 보니 참혹하고 앞이 캄캄했다. 그런 초대형 사고를 8일 만에 장례까지 모두 마치고 수습했다. 사상자 유가족들이 몰려왔을 때 시장으로서 직접 마주쳤다. 그때 “나는 3개월 한시적 시장이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설득했더니 모두 수긍하더라.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공직 생활 중 가장 잘한 연설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대구에 왔을 때 경호원으로부터 영접이 늦었다고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사건 수습과 관련,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10여 차례 격려 전화를 받기도 했다. 당시 대구백화점(현 롯데백화점) 터파기 공사 중 일어난 사고여서 대백 측에 ‘선보상 후구상’ 안을 확약 받은 것이 사태 해결의 결정타였다고 생각한다.-해외로 공무 출장도 다녔을 것이다.△김무연 대구시장 당시 기획관으로 일본 삿포로시와 자매결연을 맺으러 갔다. 당시 대구JC와 삿포로JC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고 사전 조율이 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현지에서 자매결연이 불발되자 호텔에 돌아온 김 시장은 위스키를 병째 들이키며 고심하고 있었다. 궁리 끝에 ‘대구-삿포로 양 도시간 정보교환협정’을 맺는 아이디어를 내서 일본 측의 흔쾌한 호응을 얻어냈다. 이후 10여 년간 양 도시의 공무원들이 오가며 서로 정보를 공유했던 적이 있었다. 대구와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 애틀란타에도 시의원들과 2번이나 다녀왔고 PACOM(아시아태평양 시장회의)에서 2번이나 대구 대표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당시 지역 정치인들과 대구시정 협조는 잘 된 편이었나.△지역 정치인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특히 박준규 의원과 김용태 의원은 대구를 위해 많은 예산을 챙겨 주었다. 1987년 대구지하철을 처음 기획했을 때 설계도만도 8t 트럭 한 대 분량이었다. 그걸 전문가도 아닌 대구시 기획관이 모두 읽고 결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담당 과장과 국장 등에게 검토하게 하고 나는 국회와 경제기획원 등 중앙부처, 철도청 등에 브리핑하러 다녔는데 정치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대구시정의 산 증인이라고들 한다. 업적을 몇 가지 들어 달라.△태종학 대구시장은 대구시의 기본 도시계획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당시 김무연 전 시장이 기획관이었고 이규이 전 시장이 공보실장이었다. 나는 공보관으로 그때 대구시립교향악단을 창단했는데 서울에 이어 두 번째였다. 시민회관을 기획 공모해서 건립하고 대구시사를 편찬 발간했으며 향교를 근대화했다. 김무연 시장 때 도시새마을운동의 하나로 반상회를 전국 처음 시범운영했고 ‘목련회의 여반장’이란 홍보영화를 제작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공로로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이상희 시장 때 보사국장으로 대구 쓰레기매립장을 현대화했고 달서구의 미나리깡을 매립해서 공단으로 개발했으며 앞산 수목원 부지, 두류공원 문화회관 부지, 쓰레기 소각장 현대화 등을 했다.-경북도내에서도 영주 구미 포항시장으로 재직하는 기회를 가졌다.△농촌도시 영주를 작은 대구처럼 만들고 싶었고 그런 그림으로 도시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구미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여서 멋진 도시를 만들고 싶었는데 당시 이판석 도지사의 부름을 받고 기획관리실장으로 불려 들어오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다. 포항시장 1년 4개월 동안 포항∼울진 간 도로 확장, 포항비행장에서 포항시내간 도로확장, 쓰레기매립장 건설, 형산강 대교 건설 등 많은 일들을 해냈다. 돌아보니 신명과 열정이 넘치던 때였다.-관선 시절에는 여차하면 사표를 내야 했다던데.△포항시장 재직 중에 대형 산불이 났다. 영일군에서 난 불이 포항시로 넘어온 것이다. 시·군이 통합되기 전이었고 대형 산불이 나면 단체장이 책임을 졌던 때였다. 소방차뿐 아니라 헬기까지 동원해서 위기를 넘겼지만 청와대에서 ‘시장 사표를 받아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전지 4장에 산불이 난 지역 주변 지도에 탄약고와 위험물을 비롯한 중요시설, 민가 등을 표시하고 풍향과 풍속, 산불저지선, 헬기와 소방차, 소방인력의 배치를 담은 산불진화작전도를 작성해서 청와대로 올라갔다. 그러나 해명 대신 ‘두고 가라’는 비서관의 말만 듣고는 포항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며 20일을 보냈더니 ‘표창장’과 함께 산불피해 복구비로 1억6천만원을 지원받았다. 여기에다 지역 경제인들의 협조로 피해복구를 할 수 있었다.-스포츠를 취미생활 이상으로 즐겼던 것 같다.△학생 때 운동을 했고 대구시청에 들어가서는 배드민턴 경북도 대표선수 생활을 10여 년 했다. 당시 경북여고 박점순 학생이 일본에서 우승하고 돌아와서 도청 마당에서 시범경기를 했고 이를 보고 배드민턴 팀을 만들었던 것이다. 1966년 전국체전에서 대표선수로 결승전에서 이기면서 경북도를 종합 3위로 올려놓았고 공으로 그해 경북도 최고체육상을 받았다.-취미생활도 다양하다. 글씨를 잘 써 달성공원의 석주 이상룡 구국 기념비 비문을 썼더라.△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구국기념비는 대구시에서 공모가 있었다. 시청 서기 시절이었는데 응모하라는 부친의 강권으로 밤낮없이 연습해서 당선됐고 쌀 1가마니를 부상으로 받았다. 이은상 시인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내가 썼다. 어려서 가친의 글 쓰는 모습을 옆에서 보았고 중학시절 서예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이 전부이고 공모전에 출품한 적이 없다. 그러나 공직 생활 중 가는 곳마다 준공 현장이나 행사 때 필요하다면 직접 썼다. 주변에서 좋은 일이 생긴 직원이나 후배들에게도 붓글씨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배에게 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기념부채를 선물했더니 그냥 학위장을 전시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누구의 무슨 체냐’고 물을 때면 내 호를 들어 ‘중산(重山)체’라고 말해준다.-그림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화첩도 내고 전시회도 열었다.△서예와 함께 동아백화점에서 회화교실을 운영할 때 그림을 시작했다. 모교 대구상고를 비롯, 수성못과 달성공원, 팔공산, 두류공원, 비슬산, 문화예술회관 등을 그렸다. 이걸 전시회를 열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사갔다. 순식간에 팔려나가 예상을 웃도는 거금을 챙겼다. 지금도 날마다 A4에 수채화를 그리고 좋아하는 시나 글을 적어 주변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날려 보낸다. 하루 인사인 셈이다.-일상을 어떻게 소일하고 있나. 지금 바람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골프 정기 월례회도 있고 가족이나 친지들과 월 두세 차례 골프장에 나간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간을 보낼 친구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나이 들어감을 새삼 느끼는 요즈음이다. 다만 후배들이 대상의 전통을 이어가고 대구가 발전하길 바랄 뿐이다.□ 이종주(李鍾宙·88)전 대구광역시장, 대구 출신. 대구상고, 영남대 행정학과. 석사.1960년 대구시청 서기보로 출발. 대구시 총무과장, 시정과장, 기획관, 기획관리실장, 내무국장, 보사국장, 중구청장, 동구청장, 대구시부시장 역임. 경북도 기획관리실장, 영주시장, 구미시장, 포항시장 역임.대구상고 총동창회장. 대구시럭비협회장. 대구스포츠맨클럽 회장. 88올림픽 대구대회 사무총장. 대구시 원로자문회의 의장. 국무령 이상룡 기념사업회 이사장. 고성이씨대구종친회장. 녹조근정훈장 수상.자서전 ‘염평봉직’, 수필집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시골버스 소묘’ ‘유화집 달구벌’ 출간 및 유화 개인전 개최.36년 동안 대구 경북에서 주무 또는 책임자로 전근대적 대구의 형태를 근대화하는 현장 행정을 수행했다. 일을 겁내지 않고 시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시정을 이끌었던 실천형 행정가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4-03

대구서 안경 수출로 경제대국 건설에 힘 보태다

자원빈국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이루고 세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여기서 우리는 산업화로 생산된 재화를 무역으로 효율을 극대화해 경제발전에 기여한 수많은 무역상들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는 우리 상품을 선전하고 신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동네처럼 누빈 대형 종합무역상사에서부터 그야말로 보따리장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대한민국 안경 산업의 메카 대구에서 안경을 통해 세계 시장을 열고 외화를 벌어들인 윤달호 전 한국안경수출협회 회장. 그는 대구 안경이 4차산업시대에 맞는 시설 투자와 인력개발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안경 수출로 평생을 보냈다. 안경 수출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대학 졸업할 때 최고 인기 직종이 무역업이었고 나도 무역을 하고 싶었는데 당시 정부에서 수출을 장려할 때였다. 마침 대구의 국제셀룰로이드라는 안경회사에서 무역업을 할 신입사원을 모집했고 그것이 무역과의 첫 인연이 됐다.-대구의 안경 산업은 어느 정도인가. 과거에는 어느 정도였고 지금은 어떤가.△대구는 한국 안경산업의 메카라 할 정도로 한국 안경의 80%, 많을 때는 90%까지 차지했다. 지금은 전국 안경 제조사 1천145곳 중 대구가 503곳(44%)이지만 한때는 80% 이상을 차지했다. 안경 생산량에서도 압도적이다. 특히 안경테는 거의 대구에서 석권했으니 지금도 수출의 70%를 대구가 차지하고 있다. 세계 안경 시장의 주요생산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지금은 중국에 밀려 침체기에 들어섰다. 안경 소재가 메탈(금속) 테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다시 금속소재가 트렌드가 되고 있다. 이 민감한 시장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새다.-왜 대구에서 안경 산업이 발흥하게 됐나.△국내 첫 안경공장이 대구에 들어선 것이 그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일본에서 안경 공장을 하던 김재수 회장(1984년 작고)이 1946년 북구 침산동에서 국제셀룰로이드라는 안경공장을 설립했다. 국제셀룰로이드는 수많은 안경 기능공들을 배출했고 그들이 곳곳에서 제2, 제3의 안경공장을 설립하면서 대구의 안경공장이 부흥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대구로 안경업자들이 몰려들었고 이미 설립된 국제셀룰로이드에 자극받아 안경산업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그러면 한국 안경의 세계시장에서의 위치는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나.△안경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그러나 노동집약적 산업이어서 고용 증대에는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지만 자그마치 260가지 공정이 들어가야 안경이 탄생한다. 그러니 내가 있던 국제셀룰로이드도 한 때는 직원이 700명이 넘었다. 그만큼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그래서 안경산업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우리나라로 왔고 이제는 중국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안경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인가.△모든 제품이 그렇겠지만 한국 안경(made in Korea)도 제품의 경쟁력이 가장 중요하다. 경쟁력이라면 가격과 품질, 서비스(Delivery 납기 등)인데 지금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다. 경쟁력이 있어야 내수도 잘 되고 수출도 잘 될 것 아닌가. 제품 경쟁력이 있으면 영어를 못해도 세계 바이어들이 안경 구입하러 한국으로 몰려온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도 말까지는 이런 현상이 이어졌다. 심지어 통역을 대동하고 오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 안경 제품의 경쟁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안경이 시력 보조용 의료기기에서 패션상품으로 변해가는 모양이다.△안경 착용이 많지 않았던 1970년도까지는 안경테가 거의 의료용구 개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후반부터는 이탈리아 제품이 세계시장을 주도하면서 안경이 패션화 되었다. 예전에는 독일제 ‘로덴스톡’ ‘마비츠’ 등 안경테가 주류였고 선글래스는 미국이 ‘레이반’이 고유명사처럼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샤넬’이나 ‘루이비통’ ‘톰포드’ ‘구찌’ 등 럭셔리 브랜드가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대구에서 다이렉트로 수출을 하는 품목이 많이 있었나.△대구가 섬유도시라지만 당시 대구의 갑을이나 동국 등 유명 섬유회사들도 서울사무소를 통해서 수출을 했고 대구에서 직접 수출한 것은 안경이 처음이다. 그러니 내가 대구지역 수출의 초창기 멤버였던 셈이다.-언제 처음 수출시장을 개척하러 갔나.△여행 자유화 전인 1980년이었다. 처음 뉴욕으로 출장을 갔을 때는 비자는커녕 여권조차도 고급관료나 갑류 무역회사 사원이라야 발급받던 시대였다. 회사에서는 큰 기대보다 ‘경험이나 하고 와라’는 식으로 출장을 보낸 것이다. 혼자서 커다란 견본품 가방과 옷가방 서류가방을 둘러메고 끌고 대구에서 김포공항까지 가서 비행기를 타고 도쿄와 호놀룰루, 앵커리지를 거쳐 뉴욕에 도착하니 기내에서 코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36시간을 비행기에 갇혀 있다가 생긴 일이었다.-아직도 기억나는 이야기가 많이 있을 것 같다.△뉴욕 맨해튼 호텔에서 바이어와 미팅을 하고 나와 짐가방을 들고 택시를 잡으려다 덩치 큰 흑인 포터를 만났다. 수고비로 1달러를 주니 ‘9달러를 달라’고 했다. 겁도 나고 해서 10달러짜리 지폐를 줬더니 1달러를 거슬러 주더라. 사람들은 나더러 ‘운 좋았다’며 ‘어떻게 9달러로 해결했느냐’고 하더라. 9달러는 내 목숨값이었던 거다. 그 뒤로는 내 별명이 ‘9달러’가 됐다.-당시 국내 수출액 중 안경이 얼마를 차지했나. 대구의 안경 수출액은 얼마나 되나.△안경은 생활필수품이 아니어서 수출액 비중은 미미하다. 현재 안경 수출액은 1억5천790만달러 정도다. 미국 현지에서 종합무역상사원들을 만나곤 했다. 그들은 한 달에 1건만 성사돼도 성공적이라 했지만 안경은 단가가 적어서 나는 하루에도 2, 3건씩 판매해야 했다. 그러나 재미도 훨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해 대구의 안경 수출액은 5천970만달러로 전국 수출의 37.8%를 차지했다. 직원 7명이던 우리 회사가 한창때는 직원 1천명의 회사와 맞먹는 한 달 70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영어는 언제부터 유창하게 했나.△국제광학 무역부에 있을 때 회장 배려로 영어회화 공부를 했다. 또 미8군 사령관 부인에게 직접 회화를 배웠고 나중에는 매일 미8군에 가서 미군에게 영어회화를 공부해야 했다. 덕분에 88서울올림픽에는 명예통역원을 맡기도 했고 한국관광공사의 명예통역안내원으로 인정받았다. 대구상공회의소의 무역실무 영어를 강의하기도 했다.-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왜 안경산업을 직접 하지 않았나.△나는 법대 출신이어서 제조에는 자신이 없었고 직종은 전문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경 수출이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을 때 종합무역상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며칠 고민하다가 내 길을 가기로 작정하고 ‘아이디자인즈’를 창립했다. 사무실 전세는 옆집 사장이 빌려줬고 칠성시장에서 중고 전화기와 타자기를 샀다. 버스 토큰 100개를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는 대중교통으로 우체국이며 세관과 은행 업무를 처리했다. 그야말로 ‘버스 안에서도 뛰어다녔다’고 했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해외 바이어를 상대하는 일도 많았을 것 같다.△덕분에 대구의 유명 호텔과 유명 요리집에서 VIP 대접을 받았다. 한창때는 대구시내 호텔에 바이어들을 분산 수용해놓고 시간차로 구매 상담을 벌여야 했다. 그런데 낮 상담도 그렇지만 밤 접대도 빠뜨릴 수 없었다. 별보기 운동을 날마다 하는 꼴이었다. 1년 중 300일 이상을 술에 절어 있어야 했으니 무역담당은 술상무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한번은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에 호텔로 바이어를 찾아가서는 커피를 타면서 설탕을 재떨이에 털어 넣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이어가 이상하게 보는 바람에 실수한 것을 눈치 채고는 ‘나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절반은 버리고 절반만 커피에 넣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적도 있다.-무역업을 하면서 안경만 팔았나.△미국 리비에라의 극동총책을 맡았다. 안경 이외에도 많은 수출품목들을 연계해 줬다. 대구에서 무역창구가 없는 회사에는 대리로 무역을 맡아주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에 유리그릇을 연계해주기도 했고 섬유나 간장 공구 등을 팔아주기도 했다. 한 액세서리 업체에서 여성 머리핀만 서너 컨테이너를 팔아주기도 했다.-리비에라는 어떤 회사인가△뉴욕 맨해튼 파크 애비뉴에 본사를 둔 유럽 ‘룩소티카’ ‘사필로’ 등 브랜드를 키운 세계 1등 무역업체다. 회장 클리오트는 유대인으로 메이시, 브루밍데일, 로드앤테일러 등 미국 백화점 매출의 50%를 점유하는 회사다. ‘세계 선글래스업계의 왕’으로 불리는 그는 출장가면 그 도시 최고의 호텔 스위트룸을 사용한다. 이탈리아에서 구입하던 선글래스를 3분의 1 가격으로 공급했는데 가격과 품질에 만족하면서 클리오트의 1등 공신이 됐고 극동책임자가 됐다. 밀라노에서 세계적인 안경 엑스포인 ‘이탈리아 미도 쇼’에 참석했다가 나오다가 택시를 기다리는 일본 안경회사 사장을 만났다. 클리오트 회장은 내게 누구냐고 묻고는 이내 내 손을 잡고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벤츠 리무진에 나를 태우고는 출발했다. 아직 부회장 3명이 전시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클리오트 회장은 일본 사장에게 나의 위신을 세워주려 했던 것이다. 프린시페 디 사보이아 호텔에서는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렸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참석했다. 내가 경호원을 뚫고 가서 인사를 하자 기꺼이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역시 세계적인 스타였다. 클리오트의 삼남 결혼식이 포르투갈 리스본의 고성에서 치러졌을 때 하객들은 전세계에서 전용기를 타고 왔다. 클리오트는 내게 결혼예식에 맞는 정장과 와이셔츠, 넥타이, 양말까지 입혀줬다. 나는 평소 하얀 양말을 즐겨 신었는데 그걸 본 미국 동료들은 ‘당신 마이클 잭슨이냐’고 놀려대기도 했다.-한국 안경산업은 어떤 위치에 있고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지금은 안경 산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다. 지금 제대로 투자하지 않으면 대구의 안경산업은 존폐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안경 사업자들이 돈을 벌어 안경 사업에 기술과 인력양성에 재투자하는데 인색하고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쓴 흔적들이 있다. 그것이 안경산업을 힘들게 만들었다. 우리 후발주자인 홍콩만 하더라도 안경 사업체가 상장된 회사도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상장사가 한 곳도 없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지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후회되는 일이나 자랑은 어떤 것인가.△돌아보니 나름 열심히 살았고 후회는 없다. 세계적인 업체에서 일하면서 대구의 안경을 세계에 알렸고 수출 불모지 대구에서 무역업의 터전을 마련했다고 나름 자부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업이 주춤했는데다 지난해엔 코로나에 걸려 처음으로 일주일 격리돼 쉬었더니 너무 좋더라. 이제 45년 몸 바친 안경업을 정리할 때라고 생각했다.□ 윤달호(尹達浩·69)대구 출신. 경대사대부고, 영남대 행정학과 졸. 전 국제광학 무역부장. 리비에라 극동담당총책. 폴라로이드 한국 에이전트. 아틀란틱 한국 에이전트. 전 한국안경수출협회 회장. 전 한국안광학산업진흥원 이사. 전 대구경실련 이사. 대구에서 안경 수출로 대구의 안경 산업과 수출역량을 키운 무역업자. 회사원일 때는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했고 회사 설립 후에는 ‘버스 안에서도 뛰어다닌다’고 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답설야중거(踏雪夜中去·눈 내린 들길을 걸을 때는 조심해서 걸어라. 지금 내가 걷는 발걸음이 뒷사람의 길이 될 것)’이라는 서산대사의 시구를 늘 좌우명으로 삼았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3-20

질 좋은 재료와 경험이 좋은 요리를 만든다

매스컴의 먹방과 요리 열풍은 요리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관심도를 높였고 미식가들의 입맛도 높아졌다.그 중에서도 중국 요리는 단연 세계적이다. 지구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화교가 있고 중국 음식점을 만날 수 있을 만큼 중국 요리는 그 지역에 적응해 대중화된 요리다. 대구에도 화교가 직접 운영하는 그런 중화요리점이 여럿 있다.그 중화요리로 대구시민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손보충(63) 전 대구화교협회장.그가 최근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한민국과 대구시민의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다”고 귀화한 이유를 설명하는 손 전 회장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평생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랑스럽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늦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을 축하한다. 어떻게 귀화할 마음을 먹었나.△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대한민국에서 살아왔다. 이제 중화민국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나를 키워주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대한민국과 한국인에 보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귀화하게 됐다. 대구시민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손보충은 없었을 것이다.-왜 진작 귀화하지 않았나.△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특히 화교협회 회장 등 화교로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맡아야 했고 그런 임무들을 수행하면서 귀화할 기회를 놓쳤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가 2년 전 드디어 귀화를 결정했다. 남은 인생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대구시민들과 서로 도와주면서 살고 싶다. 화교들이 대구시민들과 협력하는데도 앞장설 것이다.-화교로서 불편한 점은 어떤 것인가.△화교로서의 불편?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다. 특히 복지혜택에서 소외돼 있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자 불편이었다. 물론 세상이 달라졌고 지금은 많이 개선됐다.-귀화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대한민국으로 귀화하고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위한 법무부 시스템이 개선됐으면 좋겠다. 직접 서울까지 가야 하는 등 귀화 절차를 밟는데 1년이 걸렸다. 귀화하니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는 자부심이 생기더라. 화교로서도 명예 대구시민이자 수성구민, 남구민으로 지역 사회에 많은 기여와 봉사 등으로 참여했는데 이제 내놓고 국민이자 시민으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 자랑이다. 앞으로는 대구시민과 화교들이 모두 같이 잘 살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화교협회 회장으로 있는 동안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협회 활동을 통해 대구시와 중화민국의 민간교류에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김범일 대구시장 당시 대구화교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화교에게도 65세 이상은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화교에게 복지혜택이 너무 없었고 특히 대중교통 문제는 큰 불만이었다. 그래서 지하철 무료탑승 혜택을 건의해서 관철시켰다. 전국에서 대구가 처음으로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화교들이 대한민국에서 인정받은 사건이었다. 물론 대구의 위상도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대구시민과 화합의 차원에서 그때부터 대구 화교의 대문도 개방하고 있다.-대구에서 중국요리점을 운영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특히 손 사장의 전가복(全家福)은 인기가 높다. 전가복 때문에 손 회장의 가게를 찾는다는 고객도 많이 봤다.△그 점에 대해서는 대구시민들이 정말 고맙다. 오랜 단골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것은 내 요리실력을 인정해 준 것이다. 특히 전가복은 스스로도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재료를 넉넉히 썼고 모든 재료를 직접 구해왔다.- 도대체 전가복의 어떤 점이 그런 히트를 치게 됐다고 생각하나.△무엇보다 재료에서부터 차이가 났다고 생각한다. 송이 철이 되면 전국의 송이 산지를 찾아 1등품을 매집했고 대게 철에는 동해안을 누볐다. 전복과 해삼, 대하, 조갯살(관자) 같은 해산물을 구하러 일주일에 한 번, 많을 때는 두 번씩 전남 여수까지 갔다. 4시간씩 걸리는 먼 길을 저녁에 가서 재료를 구해 새벽에 대구로 돌아왔다. 당시로서는 정말 고생을 했지만 손님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전가복이 식도락가의 입맛을 사로잡고 IMF로 피로해진 대구시민들을 위로해 줬다고 생각한다.전가복이 히트하면서 우리 음식점도 전가복으로 유명해졌고 전국적으로도 중국요리에서 전가복 붐이 일게 됐다고 하더라.지금도 전가복을 먹으러 연경반점을 찾는 많은 고객들이 ‘가격에 비해 맛과 양이 대만족이다’고 칭찬해주어 신이 난다. 요리는 재료부터 신선하고 좋아야 한다. 나는 돈을 벌면 저축하는 대신 해삼을 사서 비축했다. 그만큼 좋은 재료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언제부터 요리에 발을 들여 놓았나.△고등학교(대구 화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요리 공부를 하러 서울로 갔다. 중화요리집에서 주방일을 하며 중화요리 수업을 하고는 서울에서 부산, 경주의 요리집을 거쳐 30년 전인 1993년 대구 이천동에서 연경반점으로 시작했다. 그때 아버지는 대구 중앙로 만경관 옆에서 중화요리집 원화반점을 하고 있었다. 당시 대구의 1세대 화교들이 운영하던 유명 중국 음식점들이 지금은 대부분 2세대로 세대교체가 됐거나 사라졌고 아버지도 몇 년 뒤엔 식당을 그만 두셨다.-아버지와의 추억은 어떤 것이 있나.△요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고 손진은·25년 전 작고)로부터 기초를 배웠다. 그러나 장사는 아버지와는 딴 판이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베풀고 퍼주는 것을 좋아했다.-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을 것 아닌가.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이제 그만 두려 해도 손님들이 찾아주어서 그만 둘 수가 없다. 장사의 기본은 손님이다. 손님이 음식을 먹고는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도록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 요리라면 손님이 먹을 수 있도록 내용부터 만족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특히 요리의 미관까지 생각해서 요리를 해야 한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내용은 충실하게 채우지 못하면서 선전만으로 음식점을 홍보하려는 경우로 있는 것으로 안다. 경험을 통해 요리를 배워야 한다.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요리도 그렇다.-요리점 소문이 나면서 에피소드도 많이 있었겠다.△돈을 싸들고 와서 동업하자고 찾아오거나, 분점을 내고 싶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직 한 곳에서만 했다. 한 곳이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음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지켰다.-도대체 중국 요리는 종류도 많다는데 얼마나 되나. 손 회장이 해 본 요리는 얼마나 되나.△중국 요리는 셀 수가 없다. 변화무쌍한 것이 중국 요리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를 응용해 만들 수 있고 열 가지를 알면 백 가지를 조리할 수 있는 것이 중국 요리다. 물론 내가 조리해 본 요리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언젠가 소꼬리 새우말이를 주문한 손님이 있었다. 갑자기 그의 주문을 받아서 재료를 챙겨보니 당장 할 수 있는 요리가 아니었다. 궁리 끝에 소고기를 얇게 저며서 새우를 말아 조리한 뒤 테이블에 올렸더니 손님이 ‘바로 이거야!’ 하면서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음식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그런데 중국 요리는 모두 불에 익힌다고 들었다. 생선회 같은 요리는 없나? 낯선 지방에 가서 음식을 모를 때는 일단 중국음식점에 가면 가장 무난하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그렇다. 육류나 어패류는 물론 야채까지 어떤 재료든 모두 불로 익혀 내놓는다. 모든 요리는 재료에 양념을 하거나 녹말가루를 묻히거나 손질해서 기름에 튀기거나 볶거나 찌거나 굽거나 훈제로 익히는 등 즉석에서 조리한다. 미리 해두는 요리는 없다. 그러니 생선회 같은 요리는 당연히 없다. 그래서 중국 요리가 위생적이고 안전하다는 거다.-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음식점은 있다고 한다. 모두 같은 중국음식인가? 심지어 중국인들은 한국의 중화요리가 중국 현지에는 없는 요리라고 한다는데.△그건 아니다. 세계 어디에도 중국음식점이 있지만 모두 현지화 된 중국음식점이라고 보면 된다. 미국에는 미국식 중국음식점으로, 일본이나 유럽에도 그 지역에 맞는 음식점으로 현지화(로컬라이즈)된 것이다. 한국의 자장면이나 짬뽕이 중국면의 한국화인 것처럼 중국 음식점이라도 메뉴들이 현지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만큼 변화무쌍한 요리가 중국 요리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서 중국인들조차도 넓은 중국 땅의 음식을 모두 모른다고 보면 된다. 중국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르고 그 음식들이 조리법에 따라 다른데 정통 중국요리라고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식당을 찾는 손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우리집에 오는 단골들 중에는 ‘알아서 해 달라’고 주문하는 손님들도 있다. 자신 있는 요리를 해 달라는 주문이다. 그럴 때는 준비된 계절 재료로 요리를 낸다. 가을이면 송이를 재료로 하듯 지금은 부추가 제철이니 부추를 재료로 한 요리를 내놓게 된다. 중국 요리집에 오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가장 즐겨 찾는 메뉴가 탕수육이다. 비슷하지만 그 탕수육으로 요리 실력을 알 수 있고 고객 입맛을 맞출 수도 있다. 특별한 메뉴는 시간이 걸린다. 동파육만 하더라도 주문하고 빨라야 1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요리 붐이 일면서 TV에서 요리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겨나고 인기 셰프들이 등장하고 있다.△같은 요리사로서 저마다 특징을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중화요리에 대해 인식을 넓혀주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식객들의 입맛도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셰프들이 TV에 나와서 시범을 보이거나 공개 강연을 하는 것을 보니 모두 대단하다. 요리들은 모두 특색이 있고 각기 선호도가 있는데 내가 평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말 대단한 실력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들이 보기 좋더라.-살아오면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인가.△맨주먹으로 출발해서 어엿한 내 가게를 가졌으니 평생의 희망이자 꿈을 일군 것이다. 맨땅에서 세집을 전전하다 내 집을 장만했다. 열심히 사는 것이다.-하고 싶은 말이 있나.△돈 많이 벌어서 가져가는 것 아니다. 베풀어야 하고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 한다. 각종 기관 단체에서 요구하는 각종 기금이나 성금에서부터 공개할 수 없는 여러 형태의 기부에 인색할 수도 없다. 연말이면 각종 단체에서 기부금 출연 요구가 줄을 이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대구시민 덕분에 오늘의 연경이 있고 손보충이 있으니 보답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귀화한 것이다.□ 손보충(孫寶忠)전 대구화교협회 회장, 중화요리 전문가.전 대구화교중 이사장. 전 중화민국 교무위원전 명예 대구시민. 현 연경반점 대표.그의 부친(고 손진은)은 중국 산동성 치하현 출신으로 해방 후 인천에서 열린 누나의 결혼식에 따라왔다가 한국전쟁이 터져 나가지 못하고 부산을 거쳐 대구에 터를 잡은 1세대 화교상이다.손보충은 1993년 대구 남구 이천동에서 연경반점으로 시작, 때마침 IMF로 지친 시민들을 전가복으로 위로해주면서 전국적 히트를 친다.귀화 전에는 명예 대구시민으로 지역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가게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각종 감사패나 표창장이 대변해준다.그의 가게는 연말이면 각종 사회단체의 기부금 출연 요구가 줄을 이었고 근본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격에다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손 전 회장은 이들의 요구에 인색하지 않았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3-06

유능한 반주자는 솔리스트를 감싸는 예술가이다

모든 시는 음악이다. 시에 멜로디를 입힌 가곡은 그래서 희노애락의 우리 감정을 한 단계 승화시키는 우리의 노래다. 품위와 격조를 갖춘 우리의 노래, 바로 가곡이다. 반주자는 그 가곡을 더욱 가곡답게 만든다. 반주 전문연주자 정혜경은 반주자나 성악가에게 더 많은 작사가와 작곡가에 대한 공부를 주문한다. 그것이 우리 가곡을 더 많이, 더 멀리 전파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피아니스트 정혜경에게 한국 가곡이란 어떤 것인가.△한국 가곡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아픈 역사의식도 함께 새겨진 시가 만들어낸 음악이다. 그렇게 우리의 희노애락이 담긴 가곡이 지금 시대에서 부르기엔 구시대적 유물처럼 폄훼되어 점점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사장되어 가는 데에 위기감을 느꼈다. ‘봉숭아’의 가사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라는 부분이 있다. 마치 우리 가곡의 미래를 예견한 듯해서 가곡을 지켜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전공이 독일 예술가곡이다. 왜 한국 가곡에 관심을 갖게 됐나.△어릴 때부터 책을 참 좋아했다. 친정아버지께서 내게 ‘책벌레’라는 별명을 주셨을 정도다. 글보다는 시가 좋았고 시보다는 시조를 더 좋아했다. 한국 가곡의 작사는 대부분 아름다운 시로 지어졌고 가곡의 효시인 홍난파의 ‘봉숭아’나 박태준의 ‘동무생각’의 작사는 시가 아닌 시조다.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우리 가곡에 대한 인식을 새로 하게 됐다. 유학 생활 중 친구의 입학시험에 반주를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심사하시는 독일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왜 너희 나라 음악은 연구하지 않고 여기에 왔니?” 그 말을 듣고 한국 가곡을 돌아보게 됐다. 유학에서 돌아와 우리 음악계의 현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됐다. 남의 나라 곡과 작곡가는 그토록 연구하면서 우리나라 가곡의 작곡가는, 또 작사자는 왜 연구하지 않느냐는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였다.-국내 음악에서 가곡의 위치와 중요성은 어느 정도인가.△가곡의 위치보다는 우리 가곡을 바라보는 우리 정신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가곡은 우리의 근본적인 부분이므로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때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깊은 물이 조용히 흐르는 것처럼. 일제가 우리나라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한 일이 우리글을 없애고 문화의 훼손과 저급화를 꾀한 일이었다. 우리의 얼이 깃든 음악과 문화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가곡의 위치에 앞서 한국 가곡을 바라보는 우리 정신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이다.-최근 K팝의 세계적 인기와 트로트 신드롬 속에서 우리 가곡의 위치는 어떠한가.△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세대는 젊은이들이 등장하고 그런 시대의 대중성을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가곡이라도 대중이 함께 그 의미를 호흡할 수 없으면 발전할 수 없다. 살아있는 생물이 되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예술적인 가곡의 대중화를 위한 협업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예술가곡과 대중가요의 콜라보는 더러 있었다. 가수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도입부는 베토벤의 ‘Ich liebe Dich(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차용한 것이며 가수 마야의 ‘진달래꽃’은 시인 김소월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대중가요 작곡가인 김희갑 씨가 작곡을 하고 성악가인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불러 크게 히트했다. 클래식을 고급으로 보면서 대중가요를 낮춰 보는 인식이 강했던 시대에 엄청난 비판을 받으면서도 앞질러 간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정지용의 ‘향수’는 작곡가 채동선이 작곡하기도 했으나 오리지널 가곡이라 할 이 노래는 지금 악보로만 남아있고 별로 불러지지 않는다. 대신 김희갑의 ‘향수’가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피아노를 선택하고 반주를 전공한 이유는.△어머니의 바람이었다. 국문과를 가고 싶었지만 원하시는 대로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결국 솔로 피아니스트보다 시와 가곡에 끌려 반주로 전향했다. 결정적 계기는 친구의 레슨 반주 중 성악 교수님의 일갈이었다. 슈베르트의 ‘겨울여행’ 중 ‘봄의 꿈’에서 사랑을 잃은 청년의 꿈 이야기를 노래할 때다. 청년이 추운 방안에서 잠시 잠들었다가 사랑하던 여인과 5월의 푸른 잔디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꿈을 꾼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닭 홰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깨었다. 이 부분을 반주에서는 빠른 16분 음표가 나오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쳤던 것이다. 그때 교수님은 “혜경아, 여기는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 것처럼 홰치는 리듬의 감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지적해 주셨다. 그 소리에 머릿속이 확 깨쳐지는 것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시와 음악, 두 마리 토끼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전문반주자로서 성악, 특히 가곡과 반주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성악가들에게 그 곡의 내용을 좀 더 알게 하고 풍부하게 하며 곡을 다듬는 일을 반주자와 함께 협업한다. 이것을 우리 음악에서는 음악코치라고 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어떤 때는 성악가들조차도 반주는 선율을 보강하거나 곡을 강조하려는 무엇인가를 보충하는 보조인식으로, 심하게 표현하면 백 그라운드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반주는 노래나 악기를 지원하는 단계(accompaniment)를 거쳐 공동 작업(collaboration)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단 가곡뿐만 아니라 음악과 협업하는 음악 코치로서 서로 음악에 대한 의견을 나누어서 무한대의 색깔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반주자와 음악과의 관계다. 반주는 솔리스트의 종속물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면 전문 반주자의 자세는 그냥 연주자와는 달라야 하나.△무엇보다 반주자는 먼저 배려하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를 빛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주자의 역량이 느껴지고 결국에는 반주자로 인해 서로가 빛나게 만드는 것이 전문 반주자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유능한 반주자는 솔리스트를 감싸는 예술가이다. 요즘 들어 내가 생각하는 전문 반주자는, 특히 내 전공인 가곡 반주자는 피아노로 시를 읊을 수 있는 피아니스트여야 한다는 것이다.-최근 ‘가곡의 시간’이라는 가곡 해설집을 발간했다.△반주를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우리 가곡은 치열하게 연습하지 않고도 연주할 수 있다는 오해를 조금이나 줄이고 싶었다. 무엇보다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다. 또 성악가들도 작사가와 작곡가를 공부하고 노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책을 쓰게 됐다.-슈베르트의 가곡 반주와 한국가곡 반주의 차이는 무엇인가.△‘가곡의 왕’이라는 슈베르트는 스스로 자신은 운명적으로 가곡 작곡가로 태어났다는 자부심으로 가곡을 작곡했다. 그가 작곡한 가곡은 유명 시인의 시나 신화 등을 작곡에 두루 반영했다. 우리 가곡은 그런 시들 외에도 역사적인 아픔과 한의 요소가 깊이 배어 있는 작품들이 많아 작곡보다는 시인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부분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반주는 당연히 서양 기법의 피아노 테크닉이지만 그 테크닉 중에서도 페달링 기법은 우리 가곡의 반주가 독일 가곡만큼 촘촘하거나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음악을 풍부하게 하고 시를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런 점이 한국가곡의 지상 레슨을 쓰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됐다.- CMAK를 결성한 이유와 활동상을 설명해 달라.△협업(Collaborative)에 의미를 둔 Collaborative Musicians Association of Korea, 클래식 음악 앙상블이라 보면 된다. 반주라는 개념이 성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주자의 능력을 다방면으로 확대하고 연주기회를 더 많이 갖기 위해 2009년 서울에서 결성됐다. 현재 피아노와 성악 관현악 작곡가 6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있다. 매년 정기연주회를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영산아트홀 등 메이저급 장소에서 개최한다. 회원들의 공부 기회를 주기 위한 작은 연주회는 연간 4∼5회 열고 있으며 대구지부도 연 2회 정기연주회를 통해 회원들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서울협회가 18회의 정기연주회와 40회의 작은 연주회. 8회의 CMAK 음악인협회 콩쿠르를 개최했고 대구지부도 21회의 정기연주회를 했다.-대구의 음악계 풍토와 대구반주연구회의 역할은 어떤 것이 있나.△대구에는 좋은 성악가가 많다. 특히 오페라 쪽이 더 강세가 있다. 또 피아노 단체의 연주들도 활발하며 특히 모던 앙상블이라는 현대음악 단체는 그 존재가 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1999년 창단한 대구반주연구회도 23년 동안 해마다 2차례 정기연주회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대구를 대표하는 반주자 공부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우리 가곡을 더 널리 보급하고 젊은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한국적인 것과 전통을 사랑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에게 예술가곡이 많이 노출되도록 해야 한다”는 유미경 도서출판 성득 대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2030세대에게 우리 가곡을 전파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일종의 사명감으로 도서출판 유 대표와 협업하고 있다.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CMAK(앙상블 음악인 협회)와 북 콘서트도 여러 차례 연주되었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또 가곡이야기와 연주를 병행하는 실버에서 청소년까지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가곡 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 서울 홍난파 가옥에서 이야기가 있는 한국가곡연주회가 3, 5, 9월에 기획되어 있다. 살롱음악처럼 작은 공간에서도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할 수 있는 연주를 모색하고 있다.-개인적인 바람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 달라.△‘지성(至誠)’과 ‘불광불급(不狂不及)’ 그리고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라는 글귀를 신조로 삼고 있다. 지극한 정성과 미쳐야만 하나를 이루고 그것에 도달할 수 있으며, 끝없는 연습만이 위대한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혜경(鄭惠卿)CMAK음악인협회(앙상블연주단체) 이사장. 반주전문 피아니스트.1963년 서울생. 선일여고 졸.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졸업독일 뒤셀도르프 슈만국립음대 대학원 졸업(피아노)독일 부퍼탈 국립음대 대학원 졸업(리트 반주)1991년 귀국 후 대구반주 연구회 창립 및 회장(현), (사)CMAK음악인협회(앙상블연주단체) 창단 및 이사장(현).‘음악저널’콩쿠르에 대한민국 최초의 예술가곡 콩쿠르 창설.20042023년 24회의 반주자 정혜경의 반주연주회 개최.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한국 등의 예술가곡 반주 음반 41매 발매.독일 인도주의재단 ‘동행’초청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연주, 주독일 한국문화원 초청 연주,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우아리바이 문화원 오픈 초청연주 등 해외연주 및 수백회의 연주.제30회 오늘의 음악가상(2010년), 제15회 대한민국 오페라대상 예술상 부문 공로상(2022년), 이화여자대학교 개교 130주년 ‘올해의 이화인’ 선정(2016년).자연을 사랑하고 순수함을 지향하며 문학과 시를 좋아한다.반주는 노래를 더욱 노래답게 만들어주며 성악가의 보조를 넘어 동행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정통 반주전문 연주자.가곡의 반주는 가사와 작곡가의 의도를 알고 충실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반주자는 성악가와의 학구적인 마찰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우리 가곡을 온 나라에 더 널리 보급하고 다음 세대에까지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2-20

“세금은 알아야 손해 보지 않는다. 아는 만큼 덕을 본다 ”

세금,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세금이었다. 현실에서건 작품에서건 세금을 다루는 세리는 늘 악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납세가 국민의 의무로 규정됐을 만큼 세금은 피할 수 없으니 최대한 아끼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조세 전문가는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됐다. 40년 세무 행정을 담당했고 지금도 납세자의 세금 문제를 도와주고 있는 손동근 세무사. 그는 세금을 피할 수 없다면 세무사를 가까이 하는 방법이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국민들의 세금에 대한 저항이 항상 있는 것 같다.△그건 어쩌면 당연하다. 금전을 지불할 때는 개별적인 보상이 따르기 마련인데 세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국민들이 세금의 필요성을 인정할 만큼 납세 의식도 많이 개선됐다. 또다른 불만은 과세의 공평성 문제일 듯하다. 1970년대만 해도 모든 것이 수기(手記)였다. 지금은 첨단 컴퓨터와 빅 데이터 등 과학기법을 이용해 전 국민의 자산과 소득, 비용 등을 파악해 전산화하고 있으니 공평과세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불평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속설처럼, 공평과세가 무너지는데서 오는 불평불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소득을 줄여 세금을 덜 내려는 시도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본능 아닌가.△대구의 대형 재래시장에서 화재가 났을 때다. 상인들은 피해액이 엄청나다고 주장했다. 장부를 정확히 기재하지 않아 매출이나 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보험회사에서도 사업규모나 손해액 사정을 위해 국세청에 자료를 요구하는데, 신고된 자료가 없거나 소액으로 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에는 절세 차원에서 매출액을 축소 신고했다가 막상 재난을 당하면 그때는 부풀려 피해를 하소연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주변에는 판매가 6천원인 자장면을 ‘현금가 5천원’이라고 적어 놓은 가게도 있더라.△매출을 줄이기 위해 과표를 누락하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1977년 7월 시작된 부가가치세는 당초 연매출 2천400만원 미만이면 면세했고 지금은 연매출 8천만원까지는 세율을 낮춰 적용해준다. 간이과세자 제도이다. 일반사업자는 공급가액의 10%를 부가세로 납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금 결제를 간접적으로 유도하는 선을 넘어 노골적으로 현금가를 차등 적용한다고 버젓이 광고하는 것은 세무조사를 받는 등 페널티를 적용받을 수도 있다.-그런데 우리 세법이 너무 어렵고 또 복잡해서 세법 전문가인 세무사조차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는데.△세법이 바뀌는 것은 우리 경제 규모가 커지는 만큼 당연한 것이다. 5·16 혁명 후 박정희 정권에서 이낙선 당시 국세청장은 국세 수입규모 700억원 달성을 목표로 차번호를 700번으로 했다고 하더라. 그러던 우리 경제 규모가 올 세수 목표가 400조원(2022년 세수 396조원)을 넘을 만큼 규모도 커지고 형태도 다양해졌다. 경제현상에 따라 새로 생겨나는 현상들을 세법의 테두리에 가둬 반영하기 위해서는 세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해야 했던 것이다. 마치 앞에 도망가는 도둑을 경찰이 뒤쫓아 가는 형국에 비유할 수 있다.-정치적인 문제는 없나.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재인 정권의 세금 문제가 불거졌다.△세법이 바뀌는 이유 중 하나는 정권의 문제라기보다는 선거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세감면법이라 비난받는 조세특례제한법이 대표적인 예다. 세법은 세목별로 과세 대상, 과세기간과 과세표준이 있고 거기에 맞춘 세율과 납부기한 방법 등 고유 체계가 있는 것이 정상인데 여기엔 그런 것이 없다. 말 그대로 특례다. 각종 직능단체나 이익단체들이 민원성 감면조항 신설을 요구하면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수용을 하는 쪽으로 유혹을 받을 것이다. 지역구의 민원을 해결한다는 순기능도 있겠지만 너무 많은 감면 조항들이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있다 보니 세법이 어렵게 된 것 같다. 세법 제목이 그럴듯해도 들여다보면 특정 사안에 대한 특별 예외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례를 모두 뒤져봐야 한다.-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나.△꼭 선거 시기에 입법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상가건물 장기 임대 사업자 세액공제, 소형주택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액감면, 장기 임대주택 등에 대한 양도소득세 감면, 미분양 주택의 취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과세 특례 등의 규정은 비슷비슷한 조문들이 거미줄처럼 난해하게 열거되어 있고 00년 세계 00선수권대회에 대한 과세특례, 00박람회용 물품에 대한 소비세 면세규정과 같이 일회성인 경우도 있다.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을 조세 측면에서 지원하는 방안으로 입법이 되었겠지만 들여다보면 포퓰리즘 세법이라 할 이런 특례 규정들이 선거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니 세법이 더 어렵고 복잡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종합부동산세도 국민을 화나게 했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금언을 정면 배반하는 미실현소득에 대한 세금은 국민을 열 받게 만들었다.△1세대 1주택, 평생 월급쟁이로 살면서 남은 게 집 하나뿐인데 공시가가 올랐다고 세금을 올려버리니 국민들 속이 터지는 것이다. 세율은 고정됐지만 과표가 해마다 오르면서 20, 30만원 정도 용돈 규모의 재산세가 150, 200만원의 뭉치돈으로 올랐으니 서민들이 풀쩍 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동산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정치권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있는데 어쨌든 그건 세무행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부의 조세 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개인이 이해관계가 높은 세법 중 양도소득세법이 특히 어렵다고 한다.△인터넷과 온라인 서비스에 익숙한 젊은 세대라면 혼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세청 홈텍스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앞으로 사라질 전문직 중에서 세무사가 꼽히기도 한다. 그런 반면 세무전문가인 세무사조차도 양도세는 어려워 아예 ‘양포사’(양도소득세 포기 세무사)라는 자조 섞인 신조어도 나오고 있을 지경이기도 하다.-왜 그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가.△경제현상만큼 다양한 세법 특례 조항들을 시기와 사례에 맞춰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다 소급 적용은 않지만 이 법은 ‘00년 00월 00일부터 적용한다’는 시행 단서를 잘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반적인 1세대 1주택의 양도에 대해서는 양도소득세를 비과세하다가 2003년부터 6억원 초과, 2008년 10월 이후에는 9억원을 초과, 2021년 12월 8일부터는 12억원을 초과하는 주택을 고가주택이라 하여 비과세를 배제하고 세액계산특별규정이 생겼다. 또한 2020년 1월에는 2년 이상 보유조건에 2년이상 거주요건이 세액계산 특례요건으로 추가되었다. 1년 4%씩 10년 동안 소유하고 실거주하면 양도차액에서 40%씩 총 80%의 장기보유 특별공제를 받을 수 있도록 개정되어 2021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수시로 변하는 이런 다양한 조건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세법을 잘못 적용해 상당한 금액의 보상을 해 준 세무사도 있고, 그런 위험에 대비한 세무사 대상 보험 상품도 생겨났다.-양도세 문제가 불거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양도세가 어려운 것은 양도차액의 산정 때문이고 이는 매도가보다 취득가액의 산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납세자는 세금을 적게 내려는 심리에서 매입 당시 다운계약서를 작성했다가 매도하면서 이를 실거래가나 그 이상으로 부풀려 양도차액을 책정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나. 2006년 이후 매매는 등기부에 기재된 금액을 매입가로 적용하지만 그 이전에 취득한 부동산은 당시의 취득가 산정을 위해 토지등급, 공시지가 등 토지의 여러 형태에 대한 규정에 따라 토지 취득가격을 계산해야 하고 사업용 비사업용 토지 여부를 따져야 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전문가도 어려워하는 부분이다.-언제 세무사가 필요한가.△동대구세무서장으로 있을 때 대구 유명 예식장 양도세 사건이 있었다. 당시 건물주는 대구시내 2개 세무서에 210억원 정도 체납됐고 일선 구청에도 4천만원의 지방세가 체납돼 있었다. 그는 예식장 매매로 408억원을 받았지만 은행 대출금과 체납세금을 제하면 한 푼도 손에 쥘 수 없었다. 그가 예식장을 매도할 당시 매입자는 세무사 외에도 변호사와 회계사 법무사 등 7명의 전문가를 대동했지만 그는 아무런 주위 도움 없이 혼자 와서 매매계약 하는 걸 봤다. 그 과정에서 매입자 소유의 다른 지역 처리 곤란한 건물을 매수해 주는 조건으로 예식장을 매입하겠다고 하니 건물 매입대금 20억원을 체납액 충당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세법상 불가능함을 통보했다. 매매대금으로 개인재산을 취득하는 행위는 세금 납부 이후라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줬다. 그가 왜 진작 세무사와 상의해서 세금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의문이다.-개인과 법인에 따라 세금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법인이 반드시 유리한가.△회사 설립을 하면서 개인회사로 할 것인지 또는 법인으로 할 것인지는 숙고해야 할 문제다. 사실 개인사업자의 소득세는 최고 45%지만 법인세는 훨씬 낮다. 그래서 작은 회사를 법인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법인이라면 반드시 공개하고 배당을 분명히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형식만 법인으로 만들고 실지로 개인 소유의 중소기업 경우 소득세 대신 법인세를 내서 재미를 보더라도 잉여금을 처리하면서 배당 소득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는 적자를 보면서도 은행 거래 등을 이유로 분식회계를 했을 경우 이익을 주주에게 배당하면서 많은 세금을 물어야 한다. 사전에 수시 배당하는 등의 절세 방법을 세무사와 의논하는 것이 현명하다.-세무서장을 여러 곳 거쳤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사연은 없나.△대구국세청 개인납세1과장 시절 가짜 양주를 단속한 사건이 있다. 양주 박스를 인쇄해 가는 업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직원들이 추적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추적과 잠복 끝에 일당을 검거한 사건이었다. 사건 해결과 동시에 비디오 필름 보도자료를 지역 언론사에 직접 배포했다. 그랬더니 일당 검거에 동원됐던 경찰에서 난리가 났던 기억이 난다. 그 뒤 경찰에 몇 차례 화해를 요청해도 응하지 않아 결국 서먹하게 관계가 끝났다. 주류 거래는 전용 카드만으로 결제해야 하는데 이를 위반한 업주를 면허를 취소한 사건이 있었다. 상급자가 잘 알고 있었지만 선처해 줄 수 없었고 취소 이후에 지역 목욕탕에서 만나 당황하고 미안했던 적이 있었다. 행위는 법을 위반했지만 면허정지까지 시킬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했지만 인간적으로 두고두고 미안했다.-여가시간에 따로 하는 운동이나 취미생활은 무엇이 있나.△취미로 등산을 했다. 1996년부터 등산을 시작해서 한때는 1년에 40~50회 산행을 할 정도로 산에 미쳐 있었다. 매월 가는 고교 산악회는 회장을 맡기도 하고 산악회 정기등산만도 200여 차례 다녀오기도 했으니 친구들이 산신령이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손동근(孫東根·68)칠곡 출신. 경대사대부고 졸.1973년 세무서기보로 세무공무원 출발, 이후 대구지방국세청 법인세과 징세과 부동산 조사담당관실 근무, 1996년 사무관 승진 이후 구미서 부가세과장, 북대구 법인세과장, 대구지방국세청 징세과장 개인납세1과장을 거쳤다. 대구지방국세청 세원분석국장과 영덕 수영 동대구 서대구 세무서장 등 역임,홍조근정훈장과 대통령표창 받다.2013년 7월 세무사 개업.평생을 세무공무원으로 지냈으나 얼굴은 이웃집 선한 아저씨다. 부모님 권유로 공무원이 됐고 국세청에 발령난 것이 평생 직업이 됐다. 국세공무원 업무는 성격에도 맞지 않아서 너무 힘들어 모친에게 ‘그만 두겠다’고 여러 번 투정을 부리며 10년을 보냈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면서 평생을 견뎌냈다. “항상 배우는 마음으로 듣고(學心聽)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자(深思熟考)”라는 자세로 살아왔다. 마음은 맑고 신체는 깨끗하게 늙고 싶다. 노후는 고향에서 부모님의 대를 이어 땅에 기대어 살아가려 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2-06

“안동 종가음식을 한국 음식 대표 브랜드로 만들겠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90여 종가가 터를 잡고 대를 이어오고 있는 유가의 땅 안동. 동해바다의 고등어가 영덕 청송 고개를 넘어 내륙 안동에 와서는 낙동강 뱃길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을 만나 간이 밴다. 안동간고등어로 재탄생한 것이다.안동토박이 권동순 전통문화콘텐츠개발사업단 대표는 “안동간고등어는 20세기말 IMF 사태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국민식품으로 인정받았다”며 “안동 문화를 바탕으로 한 안동 종가음식으로 한식의 세계화를 이끌겠다”고 욕심낸다. 종손의 오너 마인드와 종부의 주방 카리스마로 ‘봉제사 접빈객’의 정신을 담은 ‘예미정’이란 브랜드로 식품업계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지방 주재기자 출신으로 수많은 특종을 한 그는 필생의 사업 중 하나로 이육사 기자상을 만들어내 올해 첫 수상자를 배출했다. -안동 출신 독립투사 이육사의 정신을 기리는 이육사 기자상이 첫 수상자를 냈다. 안동시민들의 성원이 밑거름이 됐을 듯하다.△역사 속 안동 사람들은 반골 기질이 강했다. 견훤에 밀려 대구 팔공산에서 안동으로 쫓겨 온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것만 해도 그렇다. 조선시대에도 청음 김상헌 같은 꼬장꼬장한 선비를 낳았다. 그 반골 기질은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로 이어졌고 경술국치 때는 최다 단식순국 사례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만주로 집단이주해 정착촌을 이루고 벼농사를 일으키며 독립운동의 근간을 구축한 것도 안동사람들이었다. 이런 흐름이 구한말 올곧은 언론인들을 배출해 냈고 이육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이러한 반골기질 안동사람들의 열화같은 성원 덕분이다.-이육사기자상 제정 동기는.△육사는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기자 활동을 했으며, 본의 아니게 기자직을 그만두고도 평생을 기자에 대한 향념을 지녔었다. 또 삼형제인 그의 형과 동생들도 모두 기자생활을 했다. 같은 안동 출신으로 같은 주재기자로 재직하면서 육사의 기자 정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집기사나 특종으로 여러 차례 기자상을 받게 된 것도 계기가 됐다. 그래서 지역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육사 기자상 제정에 뜻을 한데 모으게 되면서 어렵사리 성사된 것이다.-상 제정에는 지속가능한 재정적 뒷받침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줄 안다.△10여 년 전 용정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불필요한 부동산을 재단으로 귀속시켜 거기서 나오는 임대수익을 모아 기금을 마련했다. 당초엔 안동과 인연이 깊은 만주 용정과의 교류를 위해 재단을 준비했었다. 안동에 낙동강이 있고 이육사가 있으면 용정은 해란강이 흐르고 또다른 민족시인 윤동주가 활동했던 도시다. 재단은 정관에 기자상 시상뿐 아니라 불우이웃 돕기, 만학도 장학금 지급, 문화예술인 후원 등 다양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대구경북언론인회의 대경언론인상을 후원하는 것도 그래서이다.-안동간고등어를 상품화해서 전국 브랜드로 성공했다.△궁즉통(窮則通)이랄까. 1997년 말 IMF가 터지면서 봉급이 급격히 쪼그라든 위기의 월급쟁이가 찾은 자구책이 시작이었다. 늦둥이로 낳은 딸아이의 분유 값이 걱정되는 시골 기자가 시도한 몰래부업이었다. 1998년 봄이 오기도 전에 부도와 실직으로 절망감에 내몰린 사람들의 비극적 사건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에게도 너무나 곤궁하게 살던 여동생을 잃는 아픔이 닥쳤다. 당시 월급이 반토막 나 도와줄 수도 없는 나로서는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꽃다운 나이에 삶을 포기해버린 여동생을 잃었을 때는 또래 여성들이 모두 여동생처럼 보이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이런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창업한 것이 안동간고등어다. 겸직을 금기시하는 회사 분위기 속에서도 부업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내남할 것 없이 지독하게 궁핍했던 당시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안동간고등어가 전국적 상품이 될 때까지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인가.△너무 잘 팔려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흑자 부도라는 말을 실감했다. 판매점에 깔리는 외상값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감당할 수 없었다. 돈이 회전되어 돌아오는 시간적 여유가 극히 짧은데도 워낙 거래처가 폭증한 때문이었다. 맨 땅에 헤딩하듯 창업했으니 밑천이 달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처음엔 돈 꾸러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봉정사 총무 성묵스님이 나서 절돈을 몰래 꿔주기도 하고, 은행지점장에게 직접 호소도 해줬다. 덕분에 ‘지금 팔리는 걸 보니 6개월 후면 이만큼은 팔겠군’ 하는 소위 ‘추정매출’을 신용으로 은행에서 3억원이나 꿔줬다. 은행조차 부도나는 당시로서는 대동강물 팔아먹은 김선달 같은 이야기지만 그게 밑천이 됐다.-기술이나 제품 생산에는 어려움이 없었나.△바닷가도 아니고 농촌 소도시인 안동엔 생선 가공 기술인력은 물론이고 전문 경영인도 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기초생활보호대상자들을 생산직으로 채용해 하나하나 가르쳐 숙련공을 만들고 사내 장학제도를 만들어 사무관리 및 경영인력을 자체 양성했다. 특히 생선은 지역 생산물이 아니라서 일체의 행정적 지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도 내륙 생선가공업의 설움이었다. 지금까지도 안동시에서 수출 지원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원료가 지역산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향상품 팔아주기 사업 대상에서도 제외되어 있다.-안동간고등어가 히트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나.△IMF라는 시대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절망감에 휩싸인 도시 사람들이 간절하게 희망을 찾고자 할 때였다.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옛날 보릿고개 시절을 생각하면 이 어려움은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동간고등어가 준 것이다. 시골 어머니가 도시로 나간 자식들에게 ‘니 짭짤한 안동간고등어 먹고 다시 힘내라’라는 감성적 상품 캠페인이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먹힌 것이라고 생각한다.특히 내륙에서 생선을 특산물로 내세운 역발상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 마케팅과 2000년 초 홈쇼핑 유통사업이 처음으로 도입되는 시기에 홈쇼핑 전문상품으로 기획한 점도 히트하는데 크게 기여했다.-예미정이 안동의 종가음식 브랜드가 됐다.△매일신문 연재물 ‘향토음식산업화 맛’ 시리즈가 만든 셈이다. 100여 차례 국내외 취재를 하면서 외식산업과 식품 유통산업에 대한 안목이 생겼다. 안동간고등어로 구축된 전국 온·오프라인 유통망에 향토식품도 다양하게 유통시켜 보자는 생각에서 창업했다. 간잽이를 앞세워 간고등어만 할 게 아니라 안동 종가음식을 모토로 명예종부 맛잽이들을 육성하고 다양한 농축수산물도 더불어 팔 수 있도록 해 보자는 게 창업목적이었다.일반 한식과의 차별화를 위해 안동 종가음식이란 트렌드를 선택했고 예미정이란 당호로 식품 브랜드를 키우자면 큰 기와집도 필요했다.맛과 조리기술만 자랑하는 외식산업에서 고유의 셰프 정신과 오너 마인드가 살아 숨쉬는 안동 종가음식의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라는 종부 종손 마인드는 세계적인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예미정 종가 떡갈비는 지난해 말 첫 홈쇼핑 방송에서 대번에 인기상품으로 떴다. 새해 벽두부터 아주 좋은 조짐이다.-종가음식의 가치를 자랑하면 어떤 것이 있나.△음식에 ‘진심’을 담은 치유와 웰빙의 슬로우 푸드가 종가음식이다. 종손이 음식재료를 살 때는 결코 값을 깎지 않는다. 대신 ‘최고 식재료를 최고가로 샀다’는 자랑과 자부심이 오너의 마인드다. 종부는 목욕재계하고 정안수 떠 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자세로 조리를 한다. 생명을 걸어놓고 조리하는 종부는 주방에서 절대 권력자다. 음식 고명과 접시를 오방색으로 차림으로써 식탁에 별도의 꽃을 장식할 필요가 없다. 이탈리아나 중국 일본 태국 같은 세계적 음식이 맛과 기술을 앞세우지만 세계 음식 박람회에서 우리 종가음식의 ‘정신적 깊이’에 ‘원더풀’이 쏟아졌던 경험도 여러 차례 있다.-오랫동안 지역기자로 활동하면서 지역민들과 소통이 돼야 할 것 같다. 갈등은 없었나.△지역담당 기자로서 자칫하면 기득권과의 결탁이나 유착으로 흐를 여건이 넘쳤지만 그래도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야 한다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끝까지 지켰다.특히 고향 선후배 등 인간관계로 제보가 많아서 비판, 폭로기사로 인한 역대 국회의원과의 관계는 상호 긴장과 견제의 연속이었다.때문에 지역 정치권으로부터 보도 내용에 불만을 품은 고소 고발이 이어졌으며 헛소문 유포와 악의적인 모함도 숱하게 겪었다. 결국 당사자들이 사실을 수긍하면서 모함이 해소되긴 했지만 되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의 반복이었다. 후배를 신뢰하고 보호해 주는 걸 절대덕목으로 삼는 신문사 선배들 덕분에 험한 직업이었으나 무사히 정년퇴직을 하게 됐다고 생각한다.-기자시절 여러 차례 특종을 했다.△가장 자랑스러운 특종은 군의 구조적인 고추 군납비리 보도였다. 농협과 보안사의 조직적인 취재 방해로 자칫 단순 사건으로 묻힌 뻔 했으나 광범위한 탐문취재를 통해 경북은 물론 충북 강원 경남지역의 군납비리까지 밝혀냈다. 또 농협서 물먹인 고추를 수매하는 비리를 밝혀내기도 했다. 상인들이 납품 전 건고추에 물을 뿌려 고추 중량을 늘이고 농협 수매장에서 이를 눈감아 준 비리였다.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발생보고서 조작사건을 터뜨리기도 했고 안동호가 겨울철에 검게 변하는 턴오버(turn over)현상, 여름철 노랗게 변하는 녹조현상을 최초 발견해 안동호 수질 보존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기도 했다.-그러면 상도 여러 차례 받았을 것 같다.△군납고추 비리 보도로 제34회 한국기자상을 받았는데 재직 중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향토음식 산업화 맛’ 시리즈는 106회를 이어온 장편 연재물이었다.연재 피날레를 장식하는 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찾아다니며 전통음식을 취재할 때는 수천km를 날아다니며 취재했는데 마감시간에 쫒겨 기사는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작성했지만 보람도 많았다. 이 시리즈로 대구경북기자협회 올해의 기자상, 일경언론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한국 하회마을과 중국 려강고성, 일본 시리카와고의 전통마을을 취재한 ‘신도청시대 하회마을’(15회)은 한국지방언론대상 최우수상을 받았고 ‘부내야, 아! 부내야’라는 이름의 책으로 나왔다. 재직기간 중 15차례, 퇴직 후 지난해 운 좋게도 대경언론상을 하나 더 추가했다.-많은 것을 일궈냈다. 이제 어떤 바람이 남아있나.△800년 전 안동 하회마을에서 ‘허씨’라는 이름 없는 목공예가가 깎은 하회탈에 ‘김씨 처녀’와의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진 하회탈춤은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문화 콘텐츠가 됐다. 이육사기자상도 하회탈춤처럼 시대를 넘어 안동의 전통문화 콘텐츠가 되길 희망한다.안동간고등어는 백년 향토기업이 될 수 있도록 재정비하는 일이다. 또 예미정은 단순 음식점을 넘어서 무형 문화재급인 안동 종가음식 문화의 전승과 전통 음식 조리교육의 도장이 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를 보완하는 일도 과제다.□ 권동순(權東純·64)안동 출신. 안동고. 경북외국어대. 연세대 정경대학원 정치학 석사.전 매일신문 부장.(주)안동간고등어 창업, (주)예미정 창업.안동 병산탈춤 복원. (사)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 이사. (재)세계탈연맹(IMACO) 이사.안동석빙고장빙제 실무 부회장. 낙동강누치잡이 보존회 회장전통문화콘텐츠개발사업단 대표. (사)안동종가음식체험관 설립.(사)안동간고등어생산자협회 설립. 이육사기자상 제정위원회 위원저서 ‘향토음식산업화 맛’ ‘접신의 땅 일월산’ ‘부네야 아! 부네야’주재기자로 출발해서 안동간고등어, 예미정을 한식 브랜드로 키워내고 이육사기자상을 출범시켰으나 본인은 늘 대표 아닌 ‘고문’ 역할을 맡았다. 어려운 시절 산에 들어갈 결심을 했었다는 그는 5년 전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중이다.“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남은 생을 잘 마무리 하려고 날마다 암과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1-16

“토종개는 한류 세계화의 문화 전도사이다”

개는 일찍부터 가축화 되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민족과 함께 살던 개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토종견이 됐다.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이 된 진돗개나 경산 삽살개와 경주 동경이가 그런 개들이다.하지홍 한국삽살개재단 이사장은 우리 토종개 경산 삽살개를 21세기 반려견 시대의 문화 사절이자 문화첨병이라 추켜세운다. “삽살개의 사회성이나 친화력은 반려견으로 더없이 훌륭하다”며 “애완견에서 반려견으로 신분 이동한 현대에는 개를 통한 문화 한류에도 적극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시대의 수많은 인터넷 중독증을 치료하는 치료견으로서 삽살개가 적격이란 것이다.애견문화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지금 토종개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는 것이 한류 문화를 확산하는 한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삽살개 육종학자로 삽살개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더니 토종개에 관심이 많다.△나라마다 지역마다 그 지역의 인종이 있고 그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토종개가 있다. 독일에는 세퍼드나 도베르만핀셔가 있고 영국에는 불독이 있으며 프랑스에는 푸들이 있다. 동양에도 일본에는 아키다나 도사견이 있고 중국에 차우차우나 시추 같은 토종개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일찍 천연기념물이 된 진돗개가 있고 경산 삽살개와 경주 동경이도 있다. 그 개들은 인종들처럼 각기 지역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한류가 세계를 휩쓰는 문화의 시대, 토종견이 훌륭한 문화 사절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경산삽살개가 천연기념물이 된 지 30년이 됐다.△1992년 멸종위기의 종 30마리를 고유종으로 복원해 천연기념물 368호로 지정받았다. 문화재가 된 것이다. 지금은 개체수가 늘어나 경산 육종센터에서 삽살개 400여 마리를 천연기념물로 등록해 보전 관리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분양 관리되고 있는 삽살개만도 4천 마리 이상 될 것이다. 연예인이나 유명인사에게 분양되거나 문화재를 지키는 삽살개도 있고 1998년부터는 독도에도 2마리가 파견돼 있다.-삽살개는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 아닌가. 어떤 놈이 천연기념물인가. 천연기념물이 어떻게 일반 가정이나 보호구역 밖으로 반출될 수 있나.△새끼가 태어나면 엄격한 특성 관찰과 성장 상태를 보고 표준서에 가장 근접한 개체를 골라 연구소에서 보호 관리하고 나머지 개들 중에서 원하는 일반인들에게 분양하고 있다. 개를 좋아하고 키울 여건이 되면 일정 절차를 거쳐서 분양하고 있다. 삽살개는 덩치가 커서 아파트에서는 키우기가 적당하지 않고 가정에서도 묶어놓고 키우는 것은 권장하지 않는다.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사육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경산삽살개육종센터에서 보호받고 있는 삽살개는 새벽 늘봄 행복 순호 이쁜이 등 사람처럼 모두 이름이 붙어 있다. 어떻게 관리하나.△모두 이름을 붙여주고 생년월일, 암수 구분과 부견, 모견, 체고, 체장, 체중, 골격과 모질, 외관 등 외형 같은 상세한 구분을 하고 관리한다. 같은 삽살개라도 저마다 특성이 다르니 선정 기준을 정해 보존 육성하는 것이다. 모든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생각 이상으로 세밀하게 여러 분야에 대해 관찰 연구하여 육종하고 있다. 그렇게 해마다 1년생 이상의 새로운 개체를 40마리 정도 등록하면서 그만큼 나이 든 개들은 빼내는 것이다. 삽살개 육종연구소에서는 그런 식으로 400마리 정도를 천연기념물로 관리하고 있다.-미생물학을 전공했는데 왜 삽살개 육종에 빠져들었나.△유전공학을 전공했다. 종자의 중요성을 알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때였다. 우수한 우리나라 대두 종자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몰랐고 지금은 결국 장미나 딸기 같은 식물에서부터 많은 종자들을 로열티를 주고 들여오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유전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야 했다.-천연기념물 등록을 추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애견문화는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국위를 선양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대 문헌이나 민화에는 많은 토종개가 존재한다. 이들을 찾아내 보존하는 일은 우리 문화를 지켜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일제는 진돗개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놓고 그 외의 조선 개들, 특히 삽살개같은 중대형견들은 무차별 도살해서 씨를 말렸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거제견 같은 것도 한때는 보호견으로 육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국가로부터 보호견으로 지정받고 사육 조건을 지원받지 못하면 그 종을 제대로 보호 보존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삽살개와의 인연은 오래된 것 같다.△1984년 미국에서 돌아오니 아버지(하성진 전 경북대 수의과 교수)가 운영하시던 범어동 대구목장에 삽살개 8마리가 있었다. 당시 아버지의 제자이자 수의과 교수였던 탁연빈·김화식 교수가 연구 목적으로 전국에서 수집해 온 토종개의 일부였다. 탁 교수는 1972년에는 토종개를 연구해서 처음으로 삽살개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과학기술처에 보고한 것이다. 그들 덕분에 사라져가던 삽살개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면 된다. 방치되다시피 집 지키는 노릇을 하던 그 개들을 체계적으로 사육 관리했다. 1989년에는 30여 마리로 늘어났다. 그러자 삽살개를 더욱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천연기념물로 등록되어서 좋은 것은 어떤 것이 달라졌나.△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니 삽살개 보전 육성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천연기념물로 등록되고도 상당기간 사료 정도만 보전돼 힘들었지만 최근 사육사 인건비까지 지원해주니 다른 연구에도 힘을 쓸 수 있게 됐다. 사료 값을 대느라 선친의 농장부지 중 내 몫을 거의 처분했고 직원 인건비를 못 줘서 친구들에게 빌리러 다니기도 했다. 처음 보존사업은 범어사거리 가까이 위치했던 부친의 대구목장에서 시작했는데 이후 경산시 하양읍 하천부지로 이전해서 보전사업을 지속하면서 마이너스 통장으로 인건비를 충당해야 했다. 이를 돌려 막느라 친구와 의를 상하기도 했고 부잣집 아들이 돈 빌리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분담했는데 제정신이면 못 할 짓이라고들 했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때까지 곡절도 많았을 것 같다.△이젠 옛날이야기가 됐지만 지정되기까지 힘든 시기가 있었다. 한 때는 개에 대한 동물학이나 유전학적 전문지식도 없는 일부 인사가 근거도 없이 ‘삽살개는 가짜다’라며 삽살개의 특성을 왜곡하고 일부 언론이 받아쓰기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적으로 모든 것이 규명되고 공개돼 10년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스반테 페보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장은 현대인이 갖고 있는 DNA 중 특정 유전자가 4만년 전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혀내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진돗개는 3천년 전 남방에서 유래했고 삽살개는 이보다 훨씬 이전인 5천년 전 바이칼 부근 북방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와 지역 풍토에 적응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 같으면 형사 고소감인 삽살개에 대한 악의적 비난은 과학적 연구 결과와 함께 사라졌다.-어떤 개가 좋은 개인가.△개에게도 품성이 있다. 그 품성이 좋은 개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작은 소리에도 놀라거나 돌발 상황에서 특별한 행동을 보이는 개는 좋은 개가 아니다. 그리고 반려견이라면 무엇보다 사회성이 좋아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다른 개들과의 관계도 좋아야 한다. 그런 개의 품성은 어릴 때부터 보이고 유전과 주변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좋은 개는 그 어미견을 보면 70% 정도 알 수 있다. 나머지 20~30%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삽살개는 엄격한 혈통관리를 통해 그 부모견을 알 수 있고 최고 품성의 개들을 육종해내고 있다. 그리고 분양 당시 이미 상당수준 교육을 시킨다.-반려견이 대세다. 개를 키울 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나.△자녀를 키우는 것과 같다. 반려견을 키운다는 것은 좋은 친구와 사는 것과 같다. 그러니 반려견을 키우려면 스스로 동물의 입장을 이해하는 교육이 돼 있어야 한다. 개는 개다. 특히 개는 서열을 중시한다. 그 원형은 늑대다. 늑대는 알파늑대(대장늑재)에게 절대 복종한다. 그러나 알파늑대가 늙고 힘이 없으면 사정없이 몰아친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자녀를 귀하게 키우면 버릇이 없어지는 것처럼 개를 너무 귀하게 대하면 주인을 만만하게 보게 되고 개에게 무시당하는 수가 있다. 개는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를 구별하고 그 서열을 철저히 지킨다. 할머니나 여자 어린아이들이 개에게 피해를 입는 수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삽살개는 사회성이 좋다고 했다. 삽살개가 일반개와 다른 특별한 점은 어떤 것이 있나.△삽살개는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환경에 적응하며 우리 민족들과 함께 생활해 온 토종개로 거친 음식도 잘 소화해 내며 질병에도 내성이 강하다. 털이 길어 시야에 방해를 받는 대신 청각과 후각이 뛰어나다. 특히 사람에게 친화력이 강하고 주인에게 온순하며 방어적이지만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물러서지 않는다. 사람의 표정과 감정을 살피는 능력이 탁월해서 간식이나 먹이로 유인하기보다는 애정표현을 통해 친교로 교감하는 반려견이다.-하 이사장에게 개는 어떤 존재인가.△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 하는데 그러면 개는 문화 첨병이다. 우리가 한류를 이야기하는데 음악이나 미술은 특정 재능이 있는 소수가 주도하는 문화다. 여기에 비하면 개는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좋아한다. 개가 21세기 각광받는 중요한 문화의 한 장르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애견문화가 하나의 장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우리나라의 애견 문화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세계적인 토종개들은 모두 훌륭한 문화 첨병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정상들이 외교 현장에서 자기 나라 토종개를 선물하고 그 개가 상대 나라에 가서 하는 역할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이나 중국 개들은 서구 사회에 상당한 마니아 층이 있고 실제로 많은 수가 길러지고 있으나 우리 개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애견문화 수준은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티베트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삽살개의 사회성과 친화력을 인터넷 중독 치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치유센터를 건립하는 일이다. 현재 삽살개는 대동병원과 함께 동물매개 치료활동을 하고 있다. 경산 삽살개 육종센터에도 직장이나 그룹 또는 가족단위로 와서 삽살개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히 학교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들도 삽살개를 통해 치유받고 있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자폐증, 우울증에도 삽살개는 훌륭한 치유견으로서 능력을 발휘한다. 사람을 위로해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치료견으로서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또 다른 토종개를 복원하는 일이다. 현재 민화에 등장하는 고려견을 토종견으로 복원하는 사업은 마친 상태다. 앞으로 민화에 등장하는 바둑이의 얼룩무늬를 복원하는 문제다. 더 많은 토종견을 복원시켜 우리 애견문화를 한 단계 올려놓는 것이다./이경우 편집위원□ 하지홍(河智鴻·69)대구 출생. 경북대사대부고·경북대 농대 농화학과·고려대 대학원 농화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미생물유전학 박사.경북대 자연과학대 유전공학과 교수.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정회원. 한국동물자원과학회 정회원. 산업자원부지정 지역혁신시스템(RIS) 애견사업단장.사라질 위기의 토종 삽살개를 유전학적 육종 번식을 통해 천연기념물 368호 경산삽살개로 지정받았다.한국삽살개재단 설립, 이사장. 경산삽살개육종연구소 이사장.수많은 연구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미생물학 분야보다 삽살개를 유전학적으로 연구해서 종을 보전하는 것이 학자로서 보람이고 학문적으로도 불루오션이라고 판단했다.아버지의 대를 이은 삽살개 연구 유전학자로 “삽살개 보존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우리나라 토종개의 전반적인 발전에 적용하여 한국개의 세계화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욕심낸다.

2023-01-02

“새마을운동으로 통합과 상생의 따뜻한 세상을”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밑거름이다. 가난을 극복하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다시 새마을운동이 국민 생활에 활기를 되찾아주는 모멘텀이 되겠다며 시동을 걸었다.곽대훈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은 “새마을정신은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삶의 근본”이라며 지금 시대정신에 맞는 새마을운동을 펼쳐 나가겠다고 선언했다.곽 회장은 사회갈등 해소와 공동체 의식 회복, 사회적 자본 구축을 통한 지구촌 공동 번영이라는 새마을 운동의 시대정신을 구현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라는 경쾌한 리듬이 골목골목에 울려 퍼지고 마을과 빌딩마다 푸른 새마을깃발이 펄럭이는 대한민국을 꿈꾼다. 통합과 상생의 따뜻한 세상이다. -새마을운동 하면 왠지 고풍스럽고 산업화시대로의 회귀 같다. 새마을운동의 시대정신은 어떤 것인가.△새마을운동은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에 밑거름이 된 국민운동이다. ‘잘 살아 보자’는 열망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준 운동이다. 이런 정신에 나눔과 배려, 연대를 통한 사회 통합과 상생을 이루는 것이 새마을운동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새마을운동이 경제적 선진국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모두 제 위치에서 스스로의 본분을 다하며 따뜻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새마을운동의 역할이다.-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지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을 꼽나.△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전국 각지에서 주거환경 개선, 소득증대, 인프라 구축 등 지역사회 개발과 어려운 이웃을 위한 돌봄과 나눔을 지속해 왔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는 전국 28만여개소에서 방역활동과 마스크 제작 배부, 성금과 성품 기부, 헌혈과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벌였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나 태풍 힌남노가 덮쳤을 때도 푸른 조끼 새마을 회원들의 공동체를 위한 솔선수범은 사회 통합을 선도했다. 1990년대 외환위기에는 새마을부녀회의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이 금 모으기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2007년 서해안의 기름 유출사고 때는 실의에 빠진 지역민을 위로해 주기도 했다.-새마을운동이 세계적,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것도 있나.△물론이다. 오늘날 세계 경제 강국이 된 대한민국의 새마을운동 경험은 인류 공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2015년 UNDP(유엔개발정상회의)에서는 빈곤타파 및 기아종식을 위한 최적의 수단으로 인정받았으며 2013년에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 및 민간문서, 관련사진, 영상물 등 새마을운동기록물 2만2천여 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그런 새마을운동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지금 왜 새마을운동인가.△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시대적 위기와 국가 안팎의 격변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담대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다시 새마을운동, 세계와 함께’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새마을운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재앙적 이상기후에 대해 새마을회원들은 대중교통 이용과 1회용품 줄이기 등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환경보전운동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와 함께 환경부 등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와 연대해 환경보전운동과 친환경문화 조성 사업을 벌이고 있다. 또 이웃이 사라지고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태에서 새마을 사회안전망을 통한 공동체정신 회복에도 새마을운동은 역할하고 있다. 홀몸 어르신 돌봄에 앞장서고 다문화가정과 새마을회원들이 결연을 맺어 우리 사회에 정착을 돕고 있다. 구호가 아닌 직접 행동하고 실천하면서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새마을운동중앙회장에 취임한 지 겨우 두 달이다.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나.△지난 9월 29일 선거에서 당선된 뒤 그날 오후 2시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10월 5일 국정감사를 받았고 12일에는 10여개국 대사를 포함한 50여개국 지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지구촌 새마을대회’를 가졌다. 13일에는 전국 새마을지도자 1만여명이 참석해 대회를 열었다. 숨 가빴다. 지금은 중앙회 조직과 경영상태 전반을 스크린하고 있는 중이다. 새마을운동 중앙회의 재정상태를 구체적 사안별로 점검하고 있다.-중앙회장으로 지금 새마을운동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침체된 조직에 사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일 한 만큼 평가받아야 한다. 전국 지역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북돋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조직 내에서는 소통과 협력이 필요하다. 중앙회의 사무직과 전국 시·도, 시·군·구 새마을회의 사무직, 그리고 새마을지도자들간의 소통을 통해 통합을 이뤄내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에 큰 관심을 표시하면서 곽 회장이 제시한 사회갈등 해소와 공동체 의식 회복, 사회적 자본 구축을 통한 지구촌 공동 번영이라는 새마을운동의 비전에 공감한다고 밝혔다.△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을 격려하시고는 “새마을운동 정신의 밑바탕인 자유와 연대의 정신을 살려 국민통합과 질서 회복을 위한 국민정신으로서 세대와 지역, 계층을 넘어 보편적 가치를 실천해 달라”고 당부하셨다. 대통령의 참석도 뜻밖인데다 오찬까지 함께 했는데 특히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며 새마을운동의 방향까지 제시해서 깜짝 놀랐다. 나중에 윤 대통령이 후보 시절 최외출 영남대 총장으로부터 새마을운동에 대한 과외공부를 하신 것을 알았다. 저도 영남대 총장실에서 1시간30분 동안 최 총장의 새마을 특강을 들었다. 국가지도자급 전문 인력은 대학에서 양성하면 새마을운동중앙회는 행동으로 실천하겠다고 했다.-새마을운동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젊게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필요한 것 같다.△새마을운동 조직을 보다 젊게 만들기 위해 전국 65개 대학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58개 대학에 대학새마을동아리를 결성해 새마을운동의 질적 변화를 이루어나가고 있다. 요즘 청년들은 뉴트로, 복고문화에 관심이 많을 뿐 아니라 삶의 가치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과거 근면 자조 협동을 실천 덕목으로 한 새마을정신이 캠퍼스에서 공동체 정신을 구축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구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전 인류의 과제인 환경보전은 물론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공동체 만들기에 청년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국 대학새마을 동아리 학생들은 지역별 특색에 맞춘 활동을 포함해 농촌 일손돕기, 소외계층 돌봄, 환경보전운동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동아리에서 활동한 학생들이 사회인이 돼 새마을운동으로 참여가 이어지게 되면 새마을운동이 자연스럽게 젊어질 것이고 나아가 새마을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의 정신인가, 경제적 사회적 정책인가.△지금 우리 사회는 지나친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으로 자유와 민주주의가 크게 위협받고 있다. 그로 인해 공동체 결속은 흔들리고 와해되고 있으며 국가 발전의 저해 요소가 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 재난과 재해도 급증하고 식량안보와 에너지 위기까지 고조되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현실에 처한 지금이야말로 수많은 국가적 시련과 역경을 극복해 온 새마을운동의 위대한 저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갈등해소와 공동체 의식 회복을 위한 ‘사회적 자본 구축’, 지속 가능한 발전을 통한 ‘지구촌 공동 번영’을 위해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새마을운동의 역할일 것이다.-우리 국민들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인식은 어떨 것이라고 보나.△몇 년 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전국민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가장 기여한 업적이나 정책’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새마을운동이 1위로 지목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민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거국적인 근대화 운동이 새마을운동이고 국민의식개혁과 국가발전에도 새마을운동이 원동력으로 크게 기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새마을운동 중앙회는 ‘친환경문화의 조성’, ‘공동체 정신 함양’, ‘지구촌 공동 번영’을 중점 추진하고 세대간 공감과 소통을 위한 MZ 새마을운동을 활성화하여 더 젊고 활력이 넘치도록 질적 변화를 만들어 낼 계획이다.-새마을운동의 세계화는 어떻게 진전되고 있나.△기아와 빈곤 탈출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발전 모델로서 국제사회에서도 새마을운동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현재 많은 나라들이 새마을운동 노하우를 전수받기를 원하거나 시범마을의 추가 지정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 10월 새마을운동 중앙회를 방문한 탄자니아 총리도 한국의 새마을운동 노하우와 농촌개발 경험을 자국에 적극 추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올해 10개국 42개 마을을 ‘새마을 시범마을’로 조성했다. 지난 2016년 세계 46개국의 새마을회를 하나로 연결해 새마을운동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고 지구촌 곳곳의 새마을 회원단체들이 연대해 자립적 공동체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새마을운동글로벌리그(SGL)도 창립했다.-새마을운동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대구시 국민운동지원과장으로 새마을운동과 인연을 맺고 도시 새마을운동 활성화와 미래지향적 발전방향을 고민했다. 달서구청장 재직시 회관 건립을 지원했으며 국회의원으로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 개정법률안을 공동발의하는 등 새마을운동에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고 생각한다.-정치인 곽대훈으로서 성과와 후회되는 일은 어떤 것이 있나.△당선되자마자 탄핵 정국으로 의정활동에 의욕을 가졌으나 소신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초선그룹 모임인 새벽을 만들어 활동했고 등원 초기엔 강성 발언도 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당의 시스템이 붕괴돼 버리더라. 그러면서 당내 리더들을 중심으로 그룹이 형성됐고 어느 쪽에도 가담 않은 독립군처럼 외톨이가 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이곳저곳 기웃거릴 수도 없었고 부른다고 다가갈 수도 없었다. 산업통상위원회에서는 지난 정권이 거세게 몰아붙이는 탈원전 정책에 맞서 분투했다. 특히 대구의 성서산업단지를 활성화하려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아쉽다.-이제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이 됐다. 정치와는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려 하나.△새마을운동에는 여·야가 없다. 다양한 경험을 살려 새마을운동이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도록 노력할 뿐이다. 지금 전국 시·도별로 진행되고 있는 새마을지도자대회마다 참석해서는 단체장을 만나 새마을운동에 적극 협조해 달라고 요청한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더라. 특히 호남쪽 새마을지도자 대회에서는 그곳 단체장으로부터 새마을운동을 적극 지원해 주겠다는 답변을 얻었다./이경우 편집위원□ 곽대훈(郭大勳·67)대구 출신. 경북고. 고려대 행정학과 졸.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수료.제22회 행정고시 합격.대구광역시 행정관리국장, 달서구 부구청장을 거쳐 민선 달서구청장 3연임. 제20대 국회의원(대구 달서구 갑, 새누리당).달서구청장 재임 당시 존경받는 대한민국 CEO대상과 국가생산성 정보화 부문 대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인증받은 진중하면서도 빈틈없는 지장(智將)형 리더십의 소유자다. 온정주의에 빠지지 말라며 늘 기본을 강조하고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야 큰일도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선출직 국회의원까지 했으니 스스로 복이 많다고 위로하면서 회원들이 신바람 나게 사기를 올려주고 시대가 요구하는 새마을운동으로 분열된 우리 사회를 통합하는 새마을운동을 벌이겠다고 다짐한다.

2022-12-19

“대구 교육 역사의 힘… 미래와 비전 열어가는 공간”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역사적 유물이나 예술품 등 온갖 자료들을 수집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의 기능이 보고 느끼는 공간에서 체험하고 소통하는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대구교육박물관은 대구 교육의 역사적 힘을 보여주고 대구 교육의 미래와 비전을 열어가는 공간이다.디지털 정보화 사회에서 문화 예술의 격차는 디지털 격차 이상으로 사회 발전에 치명적이다. 이를 치유할 공간이 바로 박물관이다. 서로 소통하고 통섭해서 바뀌어 갈 수 있는 현장, 인생에서 제3의 장소가 박물관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그는 “대구를 정확하게 알리고 대구의 교육현장을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다”며 대구교육박물관이 그 역할을 맡겠다고 한다. -대구에 교육박물관이 들어서고 5년이 됐다. 교육박물관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인지, 그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지 물으면 이상한가?△대구와 대구의 교육, 역사를 키워드로 밀착된 교육적 역사를 찾아내고 있다. 잊혀질 수 없는 역사,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재조명하는 곳이 교육박물관이다. 대구라는 지역을 바르고 정확하게 보고 또 대구를 자랑스럽게 만들기 위한 곳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교육도시 대구교육의 ‘숨’과 ‘결’을 드러내 보여주는 공간으로 만들어 왔다.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라고 생각했고 지난 4년 동안 한 번도 ‘왜’라는 의문은 해보지 않았다.-대구교육박물관이 다른 지역 박물관과 다른 특징은 어떤 것이 있나.△대구는 대구의 역사박물관이 없다. 그래서 대구교육박물관은 연 2회씩 기획전을 열고 있다. 대구의 역사를 드러내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대구는 6·25 전쟁 통에 대구로 피난 온 중학생들을 위한 피난학교를 열었던 곳이고 이런 피난학교는 세계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한다. 대구읍성은 대구시민들의 마음 속 문화재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에게 훼손당했다는 증오심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닌, 읍성이 생겨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축성의 교훈을 배우는 교육이 돼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또 ‘학창, 시절 인연’이라는 기획은 개개인이 저마다의 성장기 꿈과 기억을 흑백사진을 통해 소환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2·28 민주운동, 국채보상운동 등 상설전을 통해 대구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랑거리를 발굴해 가고 있다.-대구교육박물관은 어떤 콘셉트로 만들어졌나.△말하자면 고현학(考現學)과 디지로그(digilog)를 통해 대구 역사를 찾아내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고현학은 고대 삶의 풍속에서 시대를 대변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니 현대적 고고학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을 단순히 새것과 옛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존재의 본질을 통해 현대인에게 무엇인가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빗살무늬 토기를 단순히 고대 유물로만 묶어두지 않고 최신 상품 디자인으로 응용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또 디지로그는 21세기 디지털 기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날로그의 정서를 더해서 그 풍요로움을 더한다는 개념이다. 애매한 절충이 아니라 유연한 퓨전과 하이브리드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대구교육박물관 설립 당시 교육청의 주문은 어떤 것이었나.△우동기 당시 대구시교육감은 대구시교육박물관이 체험학습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육박물관을 찾도록 조례를 만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면 교육박물관을 찾아 교육을 받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초등 3학년은 생존수영을, 초등 5학년은 과학관을, 6학년은 수련원을 필수코스로 규정한 것이다. 또 중학 1학년은 자유학기제에 교육박물관 탐방을 추천하고 있다. 따라서 연 4만 명 정도의 초중학생이 대구교육박물관을 반드시 찾게 만들었다. 대구시교육청이 교육박물관의 비전을 실천할 수 있게 교육박물관을 적극 지원해주고 있다.-대구를 교육도시라고 한다. 학교가 많다고 교육도시인가, 시민의 교육 수준이나 교양 수준이 교육도시인가.△대구가 교육도시라는 것은 ‘역사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자리에서 빛나는 과거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제 ‘역사도 날개가 달려있다’는 걸 알게 하고 그 비상의 명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교육명품도시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와 현재 교육 현장의 실태를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나.△교육과 학습, 이것을 ‘즐거움(樂)’으로 묘파한 공맹의 가르침에만 갇혀 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막연하게 ‘우리 것의 소중함’을 알리는 게 아니라, 현실감 있는 교육현장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학생들이 느끼고, 느낀 만큼 행동하는 박물관으로 매순간 진화하는 중이다.-세계의 박물관을 두루 살펴봤다. 박물관에서 찾아낸 인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미국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얘기한 ‘제3의 장소’를 박물관이라고 인식하게 됐고 대구교육박물관을 그런 제3의 장소로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내외 박물관을 돌아봤는데 인간의 지속가능성은 박물관의 미래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제3의 공간이란 어떤 의미인가.△인간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주공간인 집과 삶의 공간인 일터 이외에 문화 예술과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자리인 제3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레이 올드버그가 이야기했다. 영어로 ‘The good place’라고 하는 그 공간의 역할을 박물관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영화나 연극 공연을 보고 즐기는 등의 문화 예술을 하는 공간이다.-세계 여러 박물관 중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박물관은 어디를 꼽나.△캐나다 오타와의 전쟁박물관과 워싱턴의 오럴뮤지엄이라 할 수 있는 ‘스토리코어’가 그것이다. 세계 곳곳에 전쟁박물관이 있지만 오타와의 그곳은 무명용사를 기억하는 방법이 특별히 감동적이었다. 해마다 1차대전 승전기념일인 11월 11일 오전 11시면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무명용사의 방을 비쳐주도록 설계돼 있고 건물 위쪽에 거대한 조형물은 ‘잊지 않기 위하여’라는 글자를 모르스부호로 만들었다. TV나 신문의 감동적 기사가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 누구라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미안해하고 용서하는 목소리를 담아내는 스토리코어의 의도를 알고 나면 누구라도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문화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시대적 변화와 변해야 할 것, 변하지 않은 것 등을 경험에 비춰 이야기해 달라.△지금 지역에서 누가 변화의 물줄기를 이해하고 있는가. 아무도 모르는 제4차 산업혁명을 기다리며, 문화와 예술분야에서도 막연한 융복합과정을 치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배려와 겸손인데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배려는 대화를 연성화 시킨다. 내가 한 발 양보하니 나를 향한 뾰족한 창이 무디어지는 것을 체험으로 배웠다. 겸손은 상대가 경청하더라. 특히 강의에서는 모두가 주목하더라.예산과 제도만으로 문화 예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지역의 문화예술이 성장을 멈춰버린 ‘하이랜드 증후군’을 앓는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디지털 디바이드(디지털 정보 이용 격차)보다도 아트 컬처 디바이드(예술 문화 격차)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모르는 것 같다.-한국에 들어온 지 10여 년이 됐다. 대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겠나.△이민을 가기 전 TBC 라디오 PD 시절 원로대담을 마련했다. 초대한 원로들이 말로는 ‘너희들이 해라’고 했지만 대담을 통해 그들이 다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원로들을 대접하면서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대구에 어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대구의 맨 파워를 키우기 위해서는 출향인사들을 대우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그 때 갖게 됐다. 대구사람들에 대한 정의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대구 출생이 아니면 아무리 오래 대구에서 기반을 다지고 생활해도 대구 사람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풍토가 있더라. 대구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 외국인으로 대구사람이 얼마나 있나. 이젠 거버넌스를 이뤄야 한다.-경력이 다양하더라.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방송 활동을 했다. 환경이나 수용자의 태도 등에서 한국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는 같은가.△방송 PD, 대형극장의 총감독, 박물관장의 경험을 오랫동안 쌓아왔다. 지금 생각하니 모두가 박물관에 유용한 경험으로 쓰여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해외 경험은 고작 10년이었지만 다양하고 생생한 해외 체험은 지금의 곡해된 다문화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김 관장은 지역 문화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단연 ‘삼국유사’다. 경산에서 태어나서 달성에서 득도하고 대구에서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했으며 군위에서 열반에 든 일연선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중요하다. 정말 우리가 너무 소홀히 대접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대구교육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미래의 문화유산·삼국유사’를 한 번 보시기를 권한다. 삼국유사의 현창을 위한 가장 중심도시가 대구이기 때문이다. 전국 18개 지방자치단체가 ‘삼국유사의 콘텐츠화’에 매진하고 있다. 이젠 대구가 전면에 나설 때가 됐다.-구미문화예술회관장, 천마아트센터 감독을 역임했다. 지역 문화와 한국의 위상, 세계적 추세 등 문화예술과 우리 현실을 평가하면.△한류에 대해 한 3년간 고민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현실감을 갖고 세계성을 인식하면서 지냈다. 결론은 K-문화콘텐츠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상한 쏠림 현상으로,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한류’다. 우리나라가 아닌 세계 도처에서 날아오르는 콘텐츠를 발굴, 재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재외동포 맨 파워의 바른 인식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문화선진국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지금 교육박물관이 준비하고 있는 기획 아이템은 무엇인가.△이달 23일부터 ‘대구큰장, 서문시장 100년전’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이면 서문시장이 개장 100년이다. 이번 기회에 서문시장이 정치적 파워를 과시하는 그들만의 현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대구의 영화이기도 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서 배용균 감독이 주인공 기봉을 통해 ‘사바세계’로 묘사한 곳이 서문시장이다. 또 학생들이 품고 있는 역사적 영웅이야기를 1인극으로 표현하는 ‘나의 영웅이야기’를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서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1930∼50년대 대구의 문화인물들을 역사현장 위주로 재구성한 사진앨범 ‘그리운 풍경, 살가운 얼굴들’도 제작중이다.□ 김정학(金政鶴·63)대구 출생. 영남고, 영남대 영문과, 동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행정대학원 문화행정전공 수료.BBS불교방송 PD, TBC대구방송 라디오 FM방송 편성팀장. LA미주한국일보 뉴미디어국장, 캐나다 라디오코리아 대표, LA라디오코리아 본부장, 영남대 천마아트센터 총감독, 국악방송 부장, 구미문화예술회관 관장, 대구교육박물관설립추진단장 등을 거쳤다.경력에서 나타나듯 그는 에너지가 넘치고 적극적이며 박물관처럼 박학하다. 캐나다에서 미국 LA로, 다시 한국에 와서 여러 곳으로 불려 다니면서 일했다. 주로 개업전문이었다. 가는 곳마다 첫 테이프를 끊었고 반석에 올려놓았다. 그를 만나면 누구나 시작, 출발, 그리고 창의의 DNA를 나누어 가질 듯하다.9남매의 막내지만 5대 봉제사를 지내면서 지방을 도맡았다. “전 대구시교육감이었던 삼촌(김연철)은 영문과 출신인 내게 지방을 쓰게 하셨다. 그게 한문에 관심을 갖게 했고 한문의 매력에 빠졌다”며 “한자 교육은 꼭 필요하고 한자박물관을 건립하고 싶다”고 강력히 주장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12-05

노래는 분함과 답답함을 해소시켜 주고 삶의 애환 함께해준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노래를 즐겼다. 노래는 분함을 삭여주고 답답함을 뚫어주며 기쁠 때는 흥을 돋워주며 슬플 때는 위로해준다. 우리 민족의 삶에 깃든 애환을 겉으로 표현하고 속으로 다독여 시로 짓고 노래의 근원을 찾아 밝히는 이동순 가요평론가. 신춘문예 출신 시인이자 명예 대학교수인 그는 “대중가요라고 깔보지 마라”며 “가요는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애환을 해소하고 여과시켜 주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삶의 치료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가요를 모두 정리해 하나의 실로 꿰어내겠다는 당찬 포부를 보인다. -올해가 김춘수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고 지금 시인 김춘수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학창시절 김춘수 시인은 거대한 언덕이었고 그런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 정말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대학 4년을 김춘수 선생을 흠모하며 시를 공부했고 석사과정에서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좋아하시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면 손을 덜덜 떨면서 담배를 피시던 스승이었다. 심지어 김춘수 선생의 기침 소리까지도 노트에 적어놓을 만큼 심취해 있었다고나 할까. 그만큼 김춘수의 초기 시는 매력적이기도 했다.-김춘수 선생의 추천을 받았나.△대학 3학년 때 시를 10편 적어서 연구실로 찾아갔다. 창밖을 내다보시며 ‘봉투를 두고 가라’고 해서 책상 위에 놓고 나왔다.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두 달 뒤 연구실에 갔더니 그 자리에 봉투가 밀봉된 채 그대로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저항심도 생겨 도로 갖고 나왔다.-김춘수 선생과의 인연은 계속됐을 것 아닌가.△4학년 때 ‘전국대학생 현상작품공모전’에 ‘장마이후’ 등 3편을 출품해 당선됐다. 시상식에서 김춘수 선생은 ‘추천하고 싶다’며 작품을 가지고 오라 하셨다. 나는 이미 마음이 떠나 대답만 하고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1973년 ‘마왕의 잠’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기억이 생생할 것 같다.△당시 아르바이트 하던 집으로 당선통지서가 속달등기로 왔다. 현기증이 났다. 먼저 김춘수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무언가 서운한 듯 축하해 주시더라. 대신 당시의 문단 흐름을 의식해서인지 ‘각별히 조심하라’고 경계의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김춘수 선생은 순수시의 대표로 참여시의 대표인 김수영 시인과 여러 면에서 대비되고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김수영에 대해 공부를 했고 김춘수에는 없는 정신을 김수영 시인에게서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김수영의 시에 매력을 느끼고 접근하고 있음을 눈치 차린 듯 경계한 것이다.-신춘문예 당선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당선 이전과 이후로 세상을 구분하게 됐다. 주위에서 누구도 하지 못한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이었다. 당선 이전에는 상처투성이에다 콤플렉스 덩어리였고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으며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일거에 해소해버리고 자신감으로 충만하게 만든 분기점이 신춘문예 당선이었다.-조부가 독립투사 이명균이다. 그 영향이 홍범도 서사시 등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보면 되나.△대학 재학 때는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밤늦게 교수 연구실에서 닭털침낭을 펴놓고 자다가 숙직에게 발각돼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2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갔고 신춘문예 당선도 그럴 때였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고 대학 재학동안 등록금을 면제받은 것이 전부다.그러나 이승에서 육신으로 만나지 못했지만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립투사 할아버지의 정신과 기질을 이어받은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유훈이 나를 길러낸 것이라 생각한다.-문학박사가 어떻게 가요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가요평론가가 됐나.△1980년 박사학위 논문이 ‘일제시대 무명 저항시가에 나타난 현실의식 연구’였다. 여기에는 일부 대중가요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가요를 좋아했던 것 같다.-유행가에 대해 뽕짝이라 하고 가수는 딴따라라는 둥 폄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때였다.△공부하다보니 우리 대중가요의 ‘가치’를 새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유행가 가사가 식민시대에는 극작가나 문학인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가요를 연구한다는 것은 가사의 미학적 가치도 있지만 사회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도 의미있다.-특히 대학에서 그런 시각이 심했을 것 같다.△대중가요에 대한 폄하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조명암을 주제로 한 학위 논문 심사에서 심사위원이던 교수가 ‘그게 무슨 논문이냐’며 모욕을 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대에서 대중가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도 나오는 등 가요사 연구가 대학가에서도 학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시인 조지훈은 고려대 교수 시절 시가 가요에 담긴 정서와 문학사적 배경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너무 외면해 왔다며 앞으로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대구가 유별 근대 대중가요의 메카가 된 배경은 뭔가.△1950년대 당시 오리엔트레코드사가 대구에 있었고 수많은 전쟁 가요들이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녹음됐다. ‘굳세어라 금순아’가 녹음되던 날은 새벽 5시 곡 녹음이 끝나려는 순간 ‘두부사려’ 하는 두부장사 목소리와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끼어들어 다 된 녹음을 이튿날 다시 하는 비극도 있었다. 이병주 사장의 집념은 대구를 대중가요 메카로 만들었지만 오리엔트레코드사는 지금 헐어지고 그 자리에 오피스텔이 지어지고 있다. 그 자리를 ‘대구근대음악박물관’으로 만들자고 여러 단체장들에게 제안했고 내가 자료를 모두 제공하겠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타깝고 아쉽다. 나는 계명문화대 평생교육원 내에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를 만들고 음반전시관을 개관했다. 많은 레코드판을 모두 기증했다.-노래에 천부적 재질이 있었던 것 같다. 유전은 아닌가. 가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인가.△아버지가 흥얼거린 걸 들은 적은 있지만 잘 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목소리도 얼굴도 모른다. 그러나 어릴적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 왠지 좋았다. 특히 여가수는 모두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표지도 없는 유행가 책에 ‘이동순’이라고 이름을 기록했을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다. 따라 부르면 곧 곡조가 익혀졌다. 가사를 받아쓰고 노래를 익힌 것이다. 누나들의 칭찬을 들으면서 레퍼토리를 늘려 나갔다. 중학생 때 벌써 500곡 이상의 노래를 익혔던 것 같다.-어머니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기억은 평생을 여가수 목소리에 목매달게 만들었던 것 같다.△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고 10달이 채 못돼 돌아가셨다. 6·25 전쟁 때 동네에 인민군이 들어오자 나를 잉태한 채 4km나 떨어진 문중 종산 산지기집으로 피난 가 있다가 3달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나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 해 나한테는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한 채 43살에 돌아가신 거다. 나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은 내가 모든 여가수의 목소리를 들으면 모두 어머니 목소리로 여기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여가수 목소리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다더라.△고교시절 소풍 가서 학반대항 노래자랑 대회가 열리면 내가 늘 반 대표로 나갔고 또 1등을 했다. 우쭐했다. 심판을 맡은 선생님들은 나를 불러 소주를 한 잔 권하며 칭찬해 주셨는데 싫지 않았다.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재수할 때는 같이 공부하던 친구의 부모님이 일부러 불러서 노래를 시키고 특식으로 라면을 끓여 주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너는 대학 가지 말고 가수 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군대에 가서도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대학원을 졸업하고 뒤늦게 군에 갔는데 나보다 나이 어린 고참들이 곧잘 노래를 시켰다. 노래사역이었다. 그러면 부동자세로 ‘어머니’ 관련 노래나 ‘전선야곡’ 같은 노래를 불러 고참을 울렸던 기억이 난다.-시인으로 살면서 늘 대중가요와 함께 했다. 세기적인 가요대항전은 어떻게 생겼나.△시인 김지하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나왔을 때다. 김지하 시인은 술을 마시면 혼자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라. 그 때 한 후배가 ‘형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르는 후배 시인이 있다고 합니다’하고 염장을 질렀던 모양이었다. 김지하 시인이 당장 누구냐고 묻고는 직접 확인하겠다며 내가 있던 청주로 내려와 기상천외의 노래 대결이 펼쳐진 것이다. 그 상황을 소설가 김성동이 내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의 발문에서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전채린 교수의 13평 아파트 거실에서 저녁 10시에 시작해서 새벽 5시에 김지하 시인의 항복으로 결판난 사건이다.-지금 K팝이 세계 한류의 대세가 되고 있다. 우리 가요와는 어떤 관련이 있나.△물론이다. 비록 현재 아이돌이 중심인 K팝이 옛 가요와 시·공간적 분위기가 달라도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과 핍박, 오욕과 영광의 정신사적 계보를 이어 온 것만은 분명하다. 결코 평지돌출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 노래? 이난영의 ‘진달래시첩’ 같은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BTS나 블랙핑크 같은 아이돌 가수가 세계무대에 내놓는다면 또 다른 히트 한류가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시인의 노래는 창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까 두려워하며 가슴 저 밑으로 지그시 눌러가며 불러대는 맛이 있다.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노래에 맞춰 부는 퉁소 소리처럼 애잔하고 그러면서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그런 소리다. 겉으로는 흔들리지도 않더라.△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좋아하고 ‘명동 블루스’를 즐겨 부른다. 밤새도록 김지하와 노래 대결을 벌였을 때 김지하 시인은 온 힘을 다해 절규하듯 노래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길 것이라고 예견했다.- 시인이자 가요평론가로서의 이동순의 정체를 스스로 설명해 달라.△27살에 교수가 돼 안동간호대에서 3년을 보내고 30대에는 충북대에서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40대에 영남대 교수로 와서 정년 할 때까지 25년동안 시와 함께 가요 연구와 수집 채록으로 보냈다. 수많은 가요들이 모두 사연을 담고 있다. 그걸 그 시대와 함께 조명해보는 것이 목표다. 노래와 예술의 사회사가 될 것이다. 지금은 가요황제인 남인수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출생에서 데뷔하고 임종하기까지의 동선을 모두 찾아냈다. 그의 인간적 풍모와 그가 부른 노래의 가치를 풀어내려고 한다. 제주도에서 석 달 작정하고 있다. □ 이동순(李東洵·72) 시인, 문학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김천 출생, 경북대 인문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발견의 기쁨’, ‘강제이주열차’, ‘고요의 이유’ 등 21권 발간.민족서사시 ‘홍범도’(전 5부작 10권) 발간.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시전집’ 발간(1987년, 창비)하고 시인을 문학사에 복원시킴.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민족시의 정신사’, 가요에세이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노래따라 영남을 걷다’, ‘한국근대가수열전’. 기행에세이 ‘실크로드에서의 600시간’, ‘시가 있는 미국기행’ 등 저서 70여 권.대구MBC라디오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 이야기’에서 5년간 MC로 활동.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라디오에서 ‘남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 ‘시로 만나는 남과 북’ 프로 10년 동안 매주 방송. 방송사 가요사 전문 패널로 활동.신동엽 창작상, 김삿갓문학상, 시와 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충북대학교 인문대 국문학과 교수,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역임.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옛 가요 사랑모임 ‘유정천리’ 전국회장,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이경우 편집위원

2022-11-21

의료인력 불균형 해결은의료정책과 진료환경 개선부터

의료인력은 부족하지 않다. 공공의료 확대나 의대 신설은 의료인력 과잉을 가져오는 재앙이 될 수 있다. 의료인력 수급정책과 진료환경 개선이라는 구조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행위는 의사 면허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다. 그것이 기득권이라는 시선은 오해라고 항변하는 이우석 경북도의사회장.비윤리적이거나 불법 의료행위를 하는 의사들은 의사세계 내부에서도 근절돼야 한다고 판단한다는 이 회장은 “의사회에 비리를 사전 스크린 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주장한다. 아예 의원개설에서부터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다.코로나19 팬데믹에 헌신한 의사에 대한 보상은커녕 실비에도 못 미치는 의료수가 현실화가 없다면 또 다른 위기에서 국가는 의사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것인지 묻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의료계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대규모 감염병 사태는 응급실과 중환자실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의료대란을 몰고 왔다. 그러면서 필수의료분야의 붕괴가 가속화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계는 환자 진료와 예방접종을 통해 지역사회에 코로나 전파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한다. 일신의 안위보다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하다 코로나19에 감염돼 숨진 의사들도 있었다. 경영상 어려움이 닥쳐 휴폐업하거나 손실로 고통 받는 의사도 많았다. 그럼에도 선별진료소를 자원하는 의사들의 행렬이 멈추지 않은 것은 의사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정권이 바뀌고 의료정책에서 예상되는 변화와 우려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새 정부가 제시한 보건복지분야 국정과제는 ‘필수의료 기반강화 및 의료비 부담 완화’ 등 11개다. 모두 의료계도 공감하고 타당하게 여기는 시의적절한 사안들이다. 그런데 초고령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추진중인 지역사회 통합 돌봄 기본계획과 모델 등에 의료가 빠져있다. 지금부터라도 의료를 중심으로 커뮤니티 케어의 틀을 재설계해서 국민 불만을 사전에 막고 사회적 비용을 줄여야 한다. 동네 병의원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일차 의료 중심의 커뮤니티 케어 체계를 구축하고 방문진료 활성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의료정책에 의료전문가들의 견해가 반영되지 않는다면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도시와 농촌의 의료수급 불균형이 국가적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경북지역에는 의사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우리나라 의료 인력의 절대 수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추세라면 공급 과잉까지도 우려된다. 다만 인력 배치가 불균형한 문제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고른 분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가 필요하다. 똑같은 국민인데 의료시설 불균형으로 동일한 수준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하기도 하다. 대형 의료기관과 상급 종합병원이 특정 지역에만 치우쳐 있는 문제는 고질적인 의료불균형의 주요인이다.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사망률이 달라지는 현실은 고쳐져야 한다.-그렇다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의료 확대는 해결책이 될 수 있나.△그렇다고 공공의료 확대가 해법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역 간 의료격차 및 의료취약지 등의 인력부족 문제는 의사 수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의사인력 수급 정책과 지역 및 의료취약지의 열악한 진료환경 등으로 인한 구조적 문제다. 의과대학 신설은 향후 의사 공급 과잉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다. 이보다는 현재 의사인력 및 의사 교육 시스템 안에서 의과대학 교육과정에 공중보건 및 지역의료 등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 지역의료기관에 대한 행정 재정적 지원과 함께 지역 주민의 진료가능한 지역권 설정 등을 통한 지역의료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최근 대리수술이 문제가 되면서 수술실 카메라 설치가 논의됐다.△수술실 CCTV 설치가 내년 9월이면 시행될 예정이지만 문제해결보다는 오히려 민감한 개인정보 유출과 의료인과 환자간 신뢰 붕괴, 의료인의 자기결정권 침해 등 득보다 실이 훨씬 클 것이다. 하위법령에 수술실 CCTV의 정당한 촬영거부 기준과 설치위치, 보관기준 등 쟁점에 대해서도 최대한 의료인과 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수술실 CCTV 설치보다는 수술실 출입자 규제 강화와 의사단체의 자정 노력을 통한 해결, 전문가 평가제 활성화 및 자율규제 기구 설립 추진이 필요해 보인다.-필수의료 붕괴를 막고 의사들의 비윤리적 행위나 불법행위 의료기관 개설을 막기 위해 의사회가 적극 역할을 할 수는 없나.△필수의료 붕괴를 막고 지역간 의료인력 불균형도 해소하고 하려면 지역 의료기관에 대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강력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 환자진료나 의료행위와 관련 없는 경제사범이나 형사범에 대한 면허 취소는 의사들의 진료행위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의료분쟁조정특례법이나 의료사고특례법 같은 입법지원으로 분만 사고나 불가항력적 사고에 대한 의사들의 보호가 뒤따라야 한다.무엇보다 의료기관 개설 신고 시 의사들의 불법적, 비윤리적 결격사유를 사전 스크린하고 제재할 수 있도록 의사단체가 권한을 가진다면 불법행위를 크게 막을 것으로 본다.-의료보험 수가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 같다.△의료수가는 의료기관들의 희생과 높은 직원고용률, 천정부지로 치솟은 임금 및 물가인상률 등을 반영해 합리적으로 결정돼야 하는데 턱없는 수치에 그치고 있다. 의원급 의료기관 종사자들이 더 이상 실망하지 않도록 충분히 인상돼야 한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의사들의 헌신과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 대가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또 언제 다시 당할지 모르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는 어떻게 의사들의 협조를 구할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일부이지만 의료기관의 과잉진료나 비보험 진료가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말 그대로 과잉진료는 일부 의료기관의 문제다. 이 또한 전체 의료기관의 문제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오히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우리나라 의료기관들은 정부에서 정한 수가제도의 통제 하에 있다. 건강보험제도 당연지정제라고 하는데 비보험 진료는 예외 항목들이다. 그래서 비보험에서 보험 급여가 가능해지는 항목은 심사평가원의 심사를 받게 되는데 의학적 필요에 따른 치료보다는 건강보험 재정을 고려한 한정된 치료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제때 적절한 치료가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비보험 진료는 최선의 진료를 해나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의료보험 수가는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나. MRI 등 비급여의 급여화를 포함한 문재인 케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건강보험 저수가는 일차 의료기관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소다. 만성적인 저수가 문제는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된 1989년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수가 정상화는 의사의 진료권 보장과 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실현돼야 한다. 문재인 케어는 도입 당시부터 무분별한 급여화가 의료이용량 증가를 유발해 막대한 재정 지출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해 왔다. 건보 보장성 확대 결과는 예상대로 초음파 MRI 진료비가 2018년 1천891억원에서 2021년 1조8천476억원으로 3년 만에 10배로 늘어났다.-안과의 경우는 어떤가. 백내장 문제는 잘 해결된 셈인가.△안과의 백내장 수술은 보험사 입장에서는 실손보험 적자의 주요인이다. 백내장 실손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실손보험사들이 늘어나 환자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금융감독원이 나서기도 했다. 의료보험과 실손보험사 간 분쟁은 실손보험이 대중화되면서 계속돼왔다. 보험사들은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의료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보험업계가 백내장 갑상선 도수치료 미용성형 등을 상대로 보험사기 특별신고 보상금 제도를 운영할 정도가 됐다. 실손보험으로 인해 환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정부가 실손보험의 문제점을 영리기업인 민간보험사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가입자의 장기적 보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 같다.-정부가 원격진료와 비대면진료를 추진하고 있는데 환자입장에서는 편리할 것 같다.△환자를 위한 최선의 진료는 대면진료라고 확신한다. 첨단 헬스케어 기기를 활용하면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편리할 수 있겠지만 원격진료 비대면진료만으로는 진료의 기본이 되는 시진 촉진 청진 타진 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진의 위험성이 우려되는 것이다. 현재 의료계에서는 원격진료와 비대면진료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 입장이 아닌, 시대적 흐름을 감안해 의협을 중심으로 보조적 수단에 한해 유연하게 대처하는 등 여지를 두고 접근하고 있다. 환자들이 부정확한 진단 진료 가능성이나 의료사고 발생 문제 등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정보의학전문위원회 운영 등을 통해 의료계가 원격진료 비대면 지료 관련 사안에 대응해 나갈 예정이다.-의사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기득권이다. 이를 놓지 않으려 한다는 지적도 있다.△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기득권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오해이자 잘못된 판단이다. 의사의 의료행위는 건강보험제도 등 의료관련 제도권 속에서 각종 규제와 통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의료는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고귀한 행위로서 의사 면허를 가진 자만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 이를 기득권과 결부시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의사로서 지역민과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을 든다면.△지난 태풍 힌남노가 포항을 강타했을 때 의료기관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남구 오천지역에서는 벽에 걸린 TV만 남기고 컴퓨터와 X레이, CT 등 의료기기를 모두 잃은 병원 등 의료기관 28곳이 피해를 입었지만 의사라는 이유로 정부 지원에서도 제외됐다. 대구시의사회에서 성금을 모금해 위로해 주었다. 경북도의사회는 사회공헌사업단을 발족시켜 의료봉사 등 사회공익사업과 보건교육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늘 낮은 자세로 지역민과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의료기기의 발전과 함께 의술도 발전하고 병원 접근성도 좋아지고 있다. 안과 전문의로서 특별히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나. 의료환경 추세는 어떠한가.△지금은 의료보호제도가 있어 어려운 사람들도 본인부담 없이 필요한 수술을 받을 수 있지만 안과전문의가 됐던 초기엔 백내장 본인부담 수술비가 소 1마리값인 100만원이나 되기도 했다. 그 때 가난한 농부의 눈을 뜨게 해주고는 ‘달아나라’고 귀띔한 적도 있다. 병원 측에서 환자를 찾아갔지만 워낙 형편이 어려워 수술비를 받지 못했고 결국 의료진들이 서서히 갚아나간 기억도 있다. 환자들도 의사에 맞춰 찾는 것 같다. 개원 초기엔 라식 수술을 하려는 젊은 환자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중장년층과 백내장 수술 환자들이 많은 것 같다.-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이젠 나도 건강검진을 받아봐야겠다. 2024년까지 남은 임기 동안 의사회를 무탈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첫째 소망이다. 그리고 나 자신과 가족의 건강이다. 병원 운영은 그 다음이다. 소아과 전문의셨던 아버지는 한창 일할 63세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쌍둥이 중 한 아들은 휠체어에 의지해서 겨우 눈빛으로 의사소통만 하는 정도의 중증 장애다. 그 아들을 돌보던 아내의 건강이 나빠졌다. 내가 역할을 분담해야 할 때라고 본다. 포항시의사회에서 경북도의사회까지 가족보다 의사회를 위해 보냈던 더 많은 시간을 이번 임기 뒤에는 내려놓고 이젠 자신과 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이우석(李祐碩·59) 경북도의사회장·안과 전문의포항 출신, 서울 숭문고. 계명대 의대 졸, 계명대 의학대학원 의학박사.포항 선린병원 안과과장 역임.미국 존스홉킨스 의대 월머 안과연구소 펠로우십(2005∼2006년).포항시의사회장(2014~2015년)경북도 보건단체의료봉사단장(2016~2020년)경북도의사회 코로나19 대책위원장(2020년 2월~2021년 3월)자랑스러운 경북도민상(2021년)현 경북도의사회장,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초교 6년 때 서울로 유학 가서 고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돼서 다시 고향 포항으로 내려왔다.포항시장애아수영연맹 부회장을 비롯, 사회단체에서부터 더러는 익명으로 수많은 사회단체를 통해 기부와 의료봉사를 해왔고 특히 장애인과 학대 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노력해왔다. 아버지의 이름(이병철)으로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기도 했으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으로 실천하는 의사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11-07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교육은 다양한 아이들을 각기 수준에 맞게 길러내는 개별화된 과정이어야 한다. 결코 일률적이고 획일적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교육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교육자와 학습자가 서로 도와가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다. 그렇다면 지금 교실의 붕괴는 현장을 제대로 장악하고 수습하지 못하는 교사에게서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70여 년을 여성교육에 집중해 온 조양교육재단의 이욱 이사장(대구사립중고교연합회 회장)은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며 “현모양처는 오늘날에 더 절실히 요구되는 가정의 근본이며 우리 사회의 근간”이라 강조한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면서 3대를 이어오고 있는 교육자 집안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그다. -대구 경북지역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한 조양회관이 건립 100주년을 맞았다. 조양회관 건립자의 후손으로서, 또 조양회관 이사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떠오르는 우리 민족의 희망의 상징으로 설립된 조양회관이 우리지역 독립운동사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번 조양회관 건립 100주년을 기하여 선열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 낸 자주독립의 소중한 가치를 잊지 않고 기리고 경배하는 후손이 되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한다.-원화여중고의 학교재단 이름도 조양회관이다. 어떤 의미인가.△원화여중, 원화여고는 조양회관에서 설립되었고 ‘조선의 빛이 되어라’는 의미를 간직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청소년 교육이라는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 왔다고 자부한다. 조양회관이 원화이고 원화가 곧 조양회관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100년 원화를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동암 서상일 선생의 정신이 원화여중고 교육에도 지켜지고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원화의 건학이념은 무엇인가.△우리 학교의 건학이념은 ‘나라사랑 겨레 사랑’이다. 학교 교육 전반을 통해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소중함을 늘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 이해하고 과거의 역사적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역사교육과 국제이해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강조하는 평화교육도 우리 학교의 중요 교육과정 중 하나다.-왜 여학교를 설립했나. 배경이 궁금하다.△당시 대구지역에 남학교는 여럿 있었지만 여학교는 경북여고와 신명여고 정도였다. 동암 선생은 여성과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 열정이 상당하셨던 것 같다. 해방과 더불어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동암 선생과 창주 이응창 선생은 원화여중과 여고를 잇달아 설립했다. 원화에 야간부를 뒀고 여군반과 여승반도 있었다. 창주 할아버지 장례 때 운구차가 2군사령부 앞을 지나자 여군들이 도열해서 경례로 전별하기도 했을 정도다.-학교를 대신동에서 현 성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조양회관의 운명도 바뀌었다.△평준화 이후 급격히 늘어나는 중등교육 수요를 수용하고 보다 현대화되고 쾌적한 학습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학교를 이전하게 됐다. 대신동의 1천177평이었던 학교부지는 9천737평으로 10배 가까이 넓어졌다. 이 과정에서 재단은 대신동 교사와 함께 가창의 원화동산 2만평과 대명동 사택, 수익용 주식까지 모두 매각해야 했다. 학교는 1981년 현재 교사로 이전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대구 사학의 대표학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학교 교무실과 강당 등으로 이용하던 조양회관을 함께 이전하지 못하고 현재의 망우공원으로 이전 복원하게 됐다.-할아버지 창주 선생과 동암 선생은 어떤 관계인가.△두 사람은 장인과 사위 관계이지만 부자(父子) 같은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동암 선생에게는 4명의 따님이 계셨는데 저의 할머니(서옥주)가 동암 선생의 맏따님이었다. 동암 선생과 증조부이신 우재 이시영 선생은 절친이셨는데 한 분은 외국에서 항일독립투쟁을, 한 분은 국내에서 경제활동과 국민계몽운동을 하신 것이다. 동암은 만주에서 무력항일투쟁을 하는 친구를 위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또한 홀로 남은 친구 모자를 가족처럼 보살펴 주셨다. 그리고 경성사범을 마친 친구의 아들(이응창)을 대구사범을 졸업하신 할머니의 배우자로 선택하시고 사위로서, 그리고 교육동지로서 함께 하셨다. 당시 서문시장 인근에서 곡물과 숯을 파는 태궁상회를 운영한 동암 선생은 달성공원 인근에 100여호를 소유할 정도로 부를 이루셨지만 딸 넷에게 모두 고등교육을 시켰을 뿐 집 한 칸 마련해 주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경주 산내에서 초임교사를 시작한 할아버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대구 서부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할머니와 부부교사 생활을 했던 것이다.13살에 아버지(우재 이시영)를 잃고 외동으로 자란 창주 선생은 5남1녀를 모두 훌륭하게 대학교육까지 시킨 헌신적인 부모였다. 동암 선생은 해방 후 서울에서 나라 정치를 하시느라 따님들과는 다소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신 듯하다.-동암 선생은 몇 차례 옥살이를 하는 등 가산을 털어 넣고 육체적 고통을 당해가면서 민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그 활동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적절했다고 생각하나.△동암 선생은 일찍이 미곡상을 하시면서 대구지역의 손꼽히는 경제인으로 성장하셨다. 1921년 대구지역 지도자들은 대구구락부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신동 1번지 자신의 땅 500평에 조양회관을 짓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우재 선생을 통하여 해외 항일무장 투쟁도 지원했다. 나라를 잃고 백성이 고통을 받을 때 자신보다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가산을 기꺼이 내놓으신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민주화운동을 빌미로 희생자의 후대에까지 지나치게 보상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되돌아보아야 한다. 나라와 겨레를 위한 국가의 보상은 상징적 의미일 뿐 적절성 논란은 선열의 희생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지금 교육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또 교육자로서 어떤 대책이 있나.△무엇보다 급격한 학생 수의 감소가 문제다. 국가적 어려움이기도 한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인구 감소가 예상되지만 대책이 없다는 거다. 일본이 반성하고 있는 여유교육(餘裕敎育)의 부정적 효과가 우리 학교 현장에도 나타나고 있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위계층 학생군에서 심각한 학업성취 부진이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 규명하는 것이 선결과제이고 대증요법보다는 개별화된 전문적 지원과 지도가 필요하다.-사학의 자율성을 달라고 하는데 동의하나. 사학에 대한 가장 큰 규제는 무엇인가.△우리 사학은 근대교육이 시작된 해방 이후 국가가 담당하지 못했던 절대 다수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교육입국을 통한 국가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1969년 중학교 무시험제도,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를 통해 국민 다수에게 중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국가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사립학교에 대한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수용했다. 그러나 사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약속에 못 미치고 있다.-사학의 비리가 언론에 자주 오르곤 한다.△사학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나는 사학을 건강한 우리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퍼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극히 일부 사학의 비리를 일반화하여 사회악처럼 영화로 희화화하거나 척결 대상으로 내모는 작금의 편견이 너무 안타깝다. 지난 100년간 묵묵히 국가와 겨레를 위해 헌신하신 사학 원로와 선배들의 노고와 헌신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멀리 날기 위해서는 힘찬 양날개가 필요한 것처럼 국공립학교와 사립학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한 쪽이 없이는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는 영원한 한 팀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학에 대한 지원은 사립재단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국가가 사립학교에 위탁한 정당한 납세자 자녀에 대한 당연한 지원임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사립학교는 위탁교육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학교법인의 건학이념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구현해 나가고 싶다.-지금 학생 인권에 비해 교권을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 중고교 교육 현장의 변화와 대응하는 모습에서 가장 뚜렷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오늘의 교사들은 최고 엘리트들이지만, 무한한 가능성과 엄청나게 다양한 욕구를 표출하는 학생들 사이의 괴리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성실과 모범의 표상인 교사집단과 개성과 다양성,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학생들 간에는 ‘우리’라는 교집합의 공감이 일어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진짜 문제는 품행방정하고 모범적인 학생보다는 저마다의 개성을 추구하는 더 많은 학생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지닌 교사를 선발하여 진정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교실붕괴를 막기 위한 방안은 어떤 것이 있나.△임용고사 성적만으로 교사를 임용하는 현재의 제도는 개선돼야 한다. 교사의 인지적 유능함 뿐만 아니라 정서적 도덕적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여러 분야의 전문 지식과 소양을 갖춘 교사들을 선발할 수 있도록 채용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다양성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원화여고의 사례를 들어보고 싶다.△우리 학교는 지난 30년 동안 교사 임용에 앞서 인턴제를 실시해 왔다. 기간제 교사로 1, 2년 근무하면서 동료 교사와 학생, 학부형으로부터 인정받은 후 검증된 교사들을 채용해 왔다. 사립학교 특성상 한 번 임용하면 30년가량 같이 근무해야 하는데 우선 동료들과의 협업 능력과 상호 신뢰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코로나19 팬데믹이 교육계에 끼친 영향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비대면 원격 수업이 일반화되면서 교사 사회가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로 더욱 분명히 구분됐다. 학습과 학생 지도에서 현장과 경력을 앞세우던 교사들이 우세하던 교직사회가 디지털 이론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들의 우위로 역전된 것 같다. 그래서 명퇴 신청도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여학교의 장점이 있나. 원화만의 교육 목표는 무엇인가.△남녀평등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성의 역할은 분명 있다. 가사나 육아를 물리적으로 분리할 수는 있지만 야구에서 포수가 리드하듯 가정을 지키는 것은 아내이자 엄마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사회는 여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지식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배워야 한다. 그래서 현명한 아내와 어진 어머니로 대표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지금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자녀는 엄마의 사랑으로 키운다”고 가르치고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남편 책상 하나는 꼭 놓아두라”고 ‘엄부자모’의 모습을 강조한다. ‘자유의 원화’를 모토로 원화의 딸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주역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욱 대구사립중고교연합회 회장. □ 이욱(李旭·63)대구 출신. 학교법인 조양학원 이사장. 대구사립중고교연합회 회장.청구고. 경북대 지리학과 졸,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교육행정학 석사, UC버클리대 교육행정학 박사.원화여고 교장, 영남대학교, 계명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전(前) 대구사립중고등학교 교장회 회장.미국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31살에 귀국해서 교장과 이사장으로 3대째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 설립자의 정신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혜택은 없고 불이익은 많아 ‘억울한 것을 생각하면 끝도 없다’면서도 외부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는 자긍심 하나로 버틴다.1971년 조부 이응창 초대교장이 경북도문화상을, 1992년 부친 이용 선생이 대구시교육상을 받은 데 이어 이욱 이사장도 2019년 대구교육상을 받았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10-24

“모든 국민들이 편하게 법의 보호 받도록 주민 곁에 있을 것”

우리는 법의 우산 아래에서 살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권을 보호받고 행사하기 위해서는 더욱 법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가 다양화하고 다원화할수록 법률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생기는 억울한 문제가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발생할 수도 있다.배희건 대구경북지방법무사회 회장은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일, 복잡하고 어려운 법률 절차를 시민 편에서 쉽고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률전문가가 법무사”라고 말한다.“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법은 멀고 높은데 있다는 인식이 존재한다”는 배 회장은 법무사를 “국민 편에서 법률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생활 법률 전문가”라고 자신한다. -국민들로서는 여전히 법률이 어렵고 문턱은 높은 것 같다. 법무사는 어떤 직업인가.△법무사는 국민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법률전문가다. 등기, 공탁, 경매사건 입찰대리, 회생 파산신청사건 대리, 민사소장, 가압류 가처분, 형사소장, 비송사건 등 업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법원이나 검찰청에 제출하는 서류의 작성과 제출 대행 업무를 하고 있다. 법원에서 이뤄지는 재판 이외의 사건들에 법무사가 지원해주는 것이다.-법률전문가로는 변호사가 있다. 변호사와 어떤 차이가 있나.△변호사는 법무사의 업무를 포함하여 법률사무 전반에 대해 일을 할 수 있다. 실제 업무에서는 변호사는 소송 대리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소송이 아닌 생활 법률사무는 법무사들이 맡고 있다고 보면 된다. 특히 등기 업무나 회생과 파산신청사건은 법무사가 처리하는 것이 의뢰인에게 경제적이고 시간적으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재판에서 법무사와 변호사의 차이를 쉽게 설명해 달라.△법무사는 법률전문가이지만 소송대리권이 없다. 법무사의 업무는 소송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을 대행하는 권한만 있고 법정에 소송대리인으로 출석할 수 없다. 그래서 법무사가 재판 관련 서류를 작성하더라도 재판에는 민원인이 직접 당사자로 출석해야 한다.-그렇다면 민원인으로서는 구태여 법무사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실제로 소송사건 중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은 많지 않다. 그러니 재판 당사자가 어느 정도 지식과 능력만 있으면 구태여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더라도 법무사의 도움만으로도 법정에 출석해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 법무사가 시간과 경제적인 조건에서도 훨씬 유리하다는 거다. 법무사는 전국 곳곳에 포진해 있어 국민들이 주거지 주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법률 조언을 받을 수 있다. 경북도내 시군마다 법무사 없는 곳은 없다. 무엇보다 경비도 저렴하다. 변호사는 법정에 출석해야 하니 수임료가 비쌀 수밖에 없지만 법무사는 그런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법무사와 변호사의 직역 간 다툼은 없나.△법무사와 변호사는 경쟁 관계가 아니다. 서로 보완하면 윈-윈 할 수 있다. 이석화 대구지방변호사회장도 자주 만나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소통한다. 지난 여름 대구 변호사사무실 방화 참사사건 때도 우리 법무사들이 ‘도와줄 일이 없나’ 하고 먼저 제안했고 성금 2천만 원을 모아 변호사회에 전달했다. 국회에서 검수완박 법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대결 국면에 들었을 때는 대구 법무사회도 반대 현수막을 내걸어 변호사회의 입장을 지지했었다.-최근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쏟아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변호사들이 생존경쟁을 위해 활동 반경을 넓히면서 충돌이 생길 법도 하다.△사실 개업 변호사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그런 우려가 일부 보이기도 한다. 법무사회에서 변호사회에 선의의 경쟁을 벌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등기사건에 대해 법무사와 변호사가 같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는 덤핑은 하지 말자고. 그래야 등기 시장이 건강하게 살아나고 법무사와 변호사가 모두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등기의 경우 1천 세대 정도 등기 업무를 맡으면 한 때는 수억 원대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지나갔다. 지나치고 무질서한 경쟁 탓이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시공사가 하는 보존등기나 입주자가 하는 이전등기, 은행이 하는 설정 등기 등에서 경쟁자는 많고 수요와 공급이 밸런스를 이루지 못하니 규정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거다. 그래서 시장이 제대로 건강하게 돌아가야 한다며 변호사와 법무사가 선의의 경쟁을 해서 공존하자고 제안한 것이다.-현재 개업 변호사는 전국적으로 2만6천명 정도 되고 올해 변호사시험에 1천700명이 합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법무사는 얼마나 되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법무사는 전국 7천500여 명이다. 대구경북 회원 640명(9월 현재) 중 시험으로 법무사가 된 회원은 104명(16%) 뿐이고 법원 출신이 344명, 검찰 출신이 192명으로 대부분이 법조 경력자다. 법무사 시험은 어렵고 까다롭다. 로스쿨 못지않다. 그렇지만 해마다 120명 정도 인맥이나 경험도 없이 새로 진출하는 법무사에게 법률시장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젊은 변호사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법무사와의 영역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이력이 특이하다. 중졸로 고졸자격 검정고시 출신으로 검찰 수사관이 됐다.△농사짓다가 평생 농군이 될 수는 없다며 스물일곱 청년시절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성주에서 대구로 나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하루 4시간 자고도 정신은 초롱초롱했다. 시험에 떨어지면 농사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몰아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20대 1이라는 경쟁을 통과했으나 절박하면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경험을 얻었다.-하필 어렵다는 검찰사무직을 택했나.△당시 검찰사무직 시험은 수학이 없었다. 다른 과목은 독학으로도 가능했지만 수학의 미분 적분은 정말 해결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검찰사무직을 택했는데 지금 보니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다.-검찰청에서는 주로 어느 부서에서 근무했나. 당시 검찰청 수사관과 검사와의 관계는 어땠나.△주로 특수부와 형사부 검사실에서 근무했다. 검찰수사관은 관리부서에 근무해야 승진 기회도 많은데 검사실에서 근무했다. 수사에는 베테랑이 됐고 사건처리를 잘 해서 내가 근무하는 검사실에는 미제사건이 적었다. 검사와 업무 협조가 잘 되었는데 그것이 후임검사에게 인수인계되면서 관리부서에서 근무할 기회를 놓친 셈이다. 검사로서는 미제사건이 적으니 고과점수가 높았겠지만 덕분에 나는 검사실 근무를 오래 하게 된 것이다. 강력통 검사로 알려진 김홍일 전 대검 중수부장은 대구지검에서 초임검사 시절 대부분의 검사나 수사관들이 기피하는 끔찍한 강력사건 현장이나 시신 부검 현장 지휘를 자발적으로 도맡다시피 했다. 끝까지 현장을 고집한 김 검사는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곡동 사건을 맡아 해결하는 등 그 능력을 인정받아 대검 중수부장과 부산고검장까지 승진해 법조인들이 존경하는 검사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검찰청에서 근무할 당시 기억나는 일화가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억울한 사건은 내 일처럼 해결해줘야 직성이 풀렸다. 모두가 외면했지만 ‘반드시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끈기 있게 민원인의 이야기를 들어 해결해주어 ‘한을 풀어 줘서 고맙다’는 큰 절을 받기도 했다. 정동기 전 민정수석이 대구지검 특수부장일 때 대구 유명인사의 아들 사기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는 몇 차례 고소해도 사건은 무혐의 처리되었고 고소인만 오히려 사업이 부도나서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됐다. 고소인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한을 풀어 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정 부장에게 보고해서 ‘철저히 수사해 보라’는 허락을 얻고 수사해보니 피고소인은 “내가 누군데…. 네가 뭔데….”라며 안하무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YS(김영삼 대통령)와 직접 통하는 사이였고 여러 차례 진정과 고소에도 사건은 유야무야되고 있었던 것이다. 피고소인에게 “합의 안 되면 구속할 수밖에 없다”고 했더니 내가 거부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지 당시로서는 유명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러고도 피해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구속함으로써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고위층 관련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해 해결한 것이다. 당시 고소인의 늙은 부모들이 검찰청에 찾아와서 진심으로 감사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정 수석은 대구지검장과 고검장 시절에도, 그 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연락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법무사로서도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준 사건이 있나.△최근 한 친구가 찾아와서 ‘내 어머니를 찾아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후취로 들어와 삼남매를 낳았으나 호적에는 그들 모두 큰어머니(전처) 소생으로 등록돼 있다는 것이다. 70대의 친구는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생모가 자식 하나 없다는 것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하기도 하다”며 한을 풀어 달라는 것이다.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도 일만 복잡하고 돈 되지 않으니 자신이 없다면서 아무도 수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관련 판례를 찾아보고 60년 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등 입증서류를 수집해 판결을 받아 친구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보람이었던 이런 사건이 법무사가 해결해야 할 생활 법률사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변호사 수가 늘어나면서 법조일원화는 미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법무사와 변호사의 법조직역 일원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등기 업무는 실무적으로 법무사가 오히려 유리하다. 법정의 소송사건이야 당연히 변호사가 전문이지만 사법보좌관의 업무, 서류 작성이나 절차법 같은 법무사가 유리한 영역이 있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절차법에는 변호사보다 법무사가 오히려 유리한 점이 있을 수도 있다. 서로 조화롭게 보완하면 변호사와 법무사가 상호 공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후배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말이 있나.△“우리는 국가의 혜택을 받았음을 잊지 말자”고 강조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도 회장으로서 후배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사무실도 건물 안쪽에 자리 잡았다. 우연히 들르는 고객이 아닌, ‘일부러 알고 찾아오는 민원인’을 고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직원에게도, 후배에게도 “우리는 장사꾼이 아니다. 돈 안 되고 귀찮은 고객일수록 친절하게 대해라”고 강조한다. 법률 서비스를 통해 법률로부터 소외되고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법무사가 한 부분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 배희건(裵熙建·73)대구경북지방법무사회장. 성주 출생. 고졸 자격 검정고시. 1975년 가을걷이를 마치고 대구로 나와 1년 동안 독학 후 검찰수사관으로 출발. 주로 검찰에서 특수부장 형사부장실 검찰수사관으로 수사업무에 주력. 18년 대구지검 근무동안 검사장, 법무부장관 표창 등 5회 수상하고 1995년 법무사 개업.‘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좌우명이다.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자체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늘 최선을 다하자’고 스스로 다짐하고 후배들에게도 강조한다. “독학으로 검찰수사관이 되고 보니 긴장이 풀렸는지 더 이상 노력하는데 느슨해졌다. 그 때 계속 공부해서 7급 공채에 도전했다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는다.”법조직역인 변호사들에게는 ‘병 안의 새를 꺼내려면 주먹을 펴야 한다’며 공생을 강조한다. 욕심 부리지 말고 같이 가자는 것이다./이경우 편집위원

2022-10-10

자기실현과 사회정의 실현에 충실한 인간이 되라

세상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다움, 사람답게 사는 것,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다. 일체 권위를 배제하고 모든 이데올로기와 권력과 결별하고 비주류 이단자로 나답게 살아가는 주체적 아웃사이더,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는 자유 자치와 자연을 이상으로 삼고 나답게 살기 위해 스스로에게는 무섭게 엄격하다.박 교수는 “우리 사회가 더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주의 출세주의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젊은이들에게는 끝없는 욕심을 버리고 정신을 살찌우라고 충고한다. 노인들에게는 스스로 홀로 서는 연습을 권한다. -법학자 박홍규가 철학자, 인문학자 박홍규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나는 지금도 법학자다. 경북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이고 학회 활동도 하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주차 문제로 자주 송사가 벌어지는데 그러면 나에게 자문을 구하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차법이 아닌 노동법을 전공했다’고 말해준다. 내가 철학자나 인문학자라고 하기는 부끄럽다. 나는 법대 교수를 시작할 무렵부터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며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그래서 80년대부터 이반 일리치 책을 번역해 내고 91년에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해 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사람들의 사상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는데 아무도 번역을 안 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얼마나 책을 써 왔나. 작업은 주로 언제 하나. 농사일도 하고 있다. 퇴직 전후의 하루 일과가 어떻게 달라졌나.△100권은 훨씬 넘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헤아려보지는 않았다. (저서와 번역서 모두 150권도 넘을 듯.) 집필 작업은 주로 새벽과 오전에 한다. 저녁 8시면 잠자리에 들고 새벽 1,2시면 일어나 쓰거나 읽는다. 농사일은 아침과 저녁에 한 시간 정도씩만 한다. 자급자족을 위해 유기농법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농사에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농약을 아예 쓰지 않으니 주변 농민들로부터 (잡초나 병충해 때문에) 싫은 소리도 가끔씩 듣는다. 퇴직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집과 농장, 그리고 학교 도서관을 맴도는 일과다.-그동안 저술과 번역한 책의 원고료나 인세 수입만도 상당할 것 같다. 특별히 애정이나 의미를 두는 책은 어떤 책들인가.△내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은 없으니 인세 수입은 보잘 것 없다. 게다가 인세를 받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 중에 제일 많이 팔린 책은 1991년에 번역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31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나가고 있으니까. 같은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도 내가 아끼는 책이다. 물론 내가 쓴 모든 책을 사랑한다.-청소년기 미술에 소질을 보였고 지금도 직접 그리는 서양 회화는 상당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림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또 법학을 택한 계기가 따로 있나.△그림이 의미가 있으니까 그리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만사를 잊을 수 있고, 자연이나 대상의 묘사에 집중할 수 있으며,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게 희열을 느끼게 만든다. 법학을 택한 이유는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한 1970년 겨울에 대구 출신의 노동운동가 전태일 씨가 분신자살을 하면서 노동법 책을 태웠다. 그것을 보고 노동자들을 위한 법률가가 되려고 결심하고 법학을 택했다.-현실과 배치되거나 괴리가 있는 법률들은 대표적으로 어떤 것이 있나.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의견을 하나로 집약시킬 수 없으면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상식 아닌가.△노동법은 노동자들을 위한 법인데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헌법에서도 그런 노동법의 제정을 촉구하는데 우리나라의 노동법에는 아직 문제가 많이 있다. 다양한 의견이 있을 때 다수결에 따른 것이 상식이지만, 지금 우리 노동법이 그런지는 의문이다. 그밖에도 헌법에서 정한 인권과 괴리되는 법률도 많다.-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급에서 독서를 제대로 하지 않고 그것이 사상의 빈곤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들이 자주 나오고 있다.△독서를 해야 사상이 풍부해지는데, 독서하지 않은 자들이 지도급이니 그 사회가 빈곤한 사상, 즉 무식에서 나오는 독선과 독주에 의해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지도급이 그 모양이니 대중들도 마찬가지로 책을 읽지 않아 무식하게 된다. 해결책은 모두들 독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독서 버릇을 심어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입시용 수험 중심이니 평생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는 독서를 하지 않는 인간을 기르고 있는 셈이다.-SNS로 소통하는 시대다. 그것이 즉흥적이고 피상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활자매체 시대 아날로그식과 비교해서 불편함이나 단점은 없나?△나는 SNS를 하지 않아 잘 모르지만,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깊이가 없고 단편적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니 사고를 하지 않고 적당하게 베끼거나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다. 소위 지도자급이 쓰는 석사나 박사의 학위논문까지 그 모양인 걸 잘 알지 않나? 이래서야 학문도, 사상도, 지성도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해라’고 강조해 왔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돼야 하는 것 아닌가.△물론이다. 먹고 사는 거야 기본이고 그것을 보장하는 사회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모두들 너무 잘 먹고 살아야 한다고, 모두들 벼락출세를 하고, 최고급 아파트에 외제 자가용을 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나는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면 ‘하고 싶은 것을 해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열심히 찾아가는 진지한 젊은이들이 많다고 본다.-지방대학을 나와 지방대학에 근무하면서 콤플렉스를 가졌던 적은 없나. 살면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었나.△미국 대학에서 연구할 때도 그런 느낌을 가졌다. 서울 학회에 갔을 때 ‘아직도 그 학교에 있느냐?’고 이죽거리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콤플렉스를 주는 요인들을 잘 알고 그것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경멸하며 이겨냈다. 서울 일류대학에 다니는 자들은 나보다 훌륭한 인간이 아니라 시험공부에만 열중한 속 좁은 인간들이라고 경멸하는 식이다. 그들을 숭배하거나 나 스스로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적으로 나는 더 훌륭하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우리 사회의 학연 혈연 지연이라는 인적 네트워크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다. 패거리문화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신 적이 있나.△엄청나게 자주 경험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사회의 선거만이 아니라 대학의 총장 선거 등에서도 경험했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너무 자주 겪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일본에 있을 때도 국내의 지역주의를 일본에까지 끌고 와서 경상도 출신이라고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그것도 진보라는 청년 유학생들이. 또 언젠가 경북대학교에서 노동교육을 하는데, 지방 출신의 어떤 노동운동가가 뒤에 가서 노동자들에 반하는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했더니, 한 사람이 일어나 ‘그 정치인이 당신의 고등학교 동창인데 그렇게 비판할 수 있느냐?’고 하더라. 이런 식으로 동창이면 무조건 지지해야 하고 선거에서도 찍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패거리 짓는 것을 싫어하고 인연을 중시하는 풍토를 비판한다. 그러면 학교나 학계에서 대표나 임원으로 활동하신 경력은 어떤 게 있나.△1990년대 후기에 민주주의법학연구회장을 하면서 전두환 노태우 재판에 앞장섰고, 2000년대 초기에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을 지내면서 아나키즘 연구를 했다. 최근 20여 년 간 한국과 일본의 노동법 학자들이 모인 한일노동법포럼의 한국 대표를 지냈다. -우리 사회는 교수를 지식인이자 기득권층으로 인식한다.△교수가 지식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껏 300∼400만원 월급쟁이인데 무슨 선택받은 기득권인가? 지금 내가 사는 시골 마을 앞뒷집에 군대 하사관으로 제대한 분이나 학교 직원으로 퇴직한 분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다들 나보다 잘 살고 있다. 그런데 무슨 선택을 받았다는 말인가? 교수가 학문을 하는 사람이니 지식인 대접이야 받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그게 무슨 명예인가? 나는 교수가 그렇게 잘 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평범한 시민이라고 강조하고 싶다,-지성인으로서, 대학교수로서 정치인과 재벌 등 기득권에 늘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 왔다. 필요할 때는 필요한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하나. 지금 우리 사회에 충고를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나.△글쎄, 필요할 때마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할 기회가 반드시 많지 않았으니 항상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제발 과도한 물질주의, 출세주의, 성장주의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된다. 내 주변을 보면 다들 잘 먹도 잘 살고 있다. 그런데도 욕심이 끝이 없어 보인다.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그 대신 정신을 살찌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두 돈 욕심만 부리니 기후변화도 오고 코로나도 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반성을 하지 않는다. 정신 차려야 한다.-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정체성과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스스로의 경험을 살려 충고를 해 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싶나.△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남보다 더 잘 먹고 살려고 하지 말고, 자기실현과 사회정의 실현에 더 충실하길 바란다.-우리 사회가 급격히 고령화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국민소득보다 행복을 이야기할 때가 되지 않았나.△노인들이 행복하려면 홀로서기 연습을 해야 한다. 40년 전 일본에 있을 때 마을마다 도서관이 있는 것이 부러웠다. 그 도서관이 문 열기 전부터 노인들이 줄서서 기다리다가 문 열면 들어가서 제각기 자기 공부를 하더라. 거기엔 시험 공부하는 중고생이나 대학생은 없더라. 우리도 노령사회를 맞아 노인들이 외로움을 견디고 이겨내는 자기만의 학습이 필요하다. 그런 것이 행복이 되어야 한다. /이경우 편집위원□박홍규(朴洪圭·70)영남대 명예교수(법학), 저술가.구미 출신, 경북고, 영남대 법대, 영남대 법학석사. 일본 오사카시립대 법학박사.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법학자로 모든 분야에 관심을 보였고 초기엔 헌법과 전공인 노동법 관련 저서를 쓰다가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철학과 문화 예술 관련 저술에 집중.‘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 수상(1997).노암 촘스키, 에리히 프롬, 반 고흐, 에드워드 사이드, 존 스튜어트 밀, 톨스토이, 이반 일리히, 조지 오웰, 간디, 카프카, 루쉰 등의 평전을 썼고,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니체는 틀렸다’, ‘제우스는 죽었다’, ‘인문학의 거짓말’, ‘독서독인’,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메트로폴리탄 게릴라’, ‘플라톤 다시보기’,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등 저서를 썼다.패거리를 거부하고 정치권력과 결탁한 모든 문화 권력을 혐오하며 주류 사회로부터 자발적 따돌림에서 오는 고독을 즐기는 아웃사이더이자 진정한 자유인. 아나키스트. 지독한 엄격함이 때로는 오만함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2022-09-19

독립 유공자에게 정당한 공적 평가로 보훈해야

광복절 77주년을 맞았지만 광복의 의미는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것 같다.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감격했던 기억이 추억이 되고 있는 것처럼.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태극기와 독립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국민정신으로 승화시키겠다고 선언한 광복회가 한때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오상균 광복회 대구시지회장은 “독립유공자 유족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닌 만큼 겸손하고 선열의 이름을 욕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사과한다.친일청산에 대해서는 “당연히 해야 한다. 목표는 맞지만 방법은 학자와 관계자들의 연구를 거쳐야 한다. 급진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 다시 광복절을 맞았다. 광복회 지회장으로서 광복절을 맞는 소회부터 듣고 싶다.△77주년 광복절을 맞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광복절 행사가 축소된 것이 무엇보다 아쉽다. MZ세대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자꾸 줄어드는 것 같아 더욱 그렇다. 나는 광복회 지회장으로서 젊은 세대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알려주고 또 그 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하겠다.- 독립유공자 유족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독립유공자 유족이지 본인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겸손하고 선조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거다. 선조들의 풍찬노숙하면서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국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그 고결한 정신을 생각하고 이어받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광복회 대구지회장으로 취임한 지 한 달여가 지났다.△그동안 지역에 ‘사과’하러 다녔다. 광복회 중앙회에서 일어난 작금의 사태가 유족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워 대신 사과하면서 광복회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광복회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다짐이다.지금 중앙회장은 장준하 지사의 손자인 장호권 씨가 맡고 있다. 보궐선거에서 김구 선생의 손자 김진 씨 등과의 선거에서 이겼다. 어쨌든 김원웅 직전회장의 여러 불미스러운 일과 이번 회장 선거 과정에서 독립유공자 자제들이 선조들의 위명에 먹칠을 하는 추태를 보이거나 들추어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유공자는 얼마나 되며 또 지역의 독립유공자는 얼마나 되나.△국가보훈처 자료에 의하면 7월14일 현재 1만7825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유공자의 세대 중 1명만이 유공자증을 받고 광복회원이 되고 다른 가족은 유족이 된다. 독립유공자의 본적지를 국가자료로 추정하면 대구와 달성군을 합쳐 180명 정도 되고 경북이 2천282명으로 합계 2천400명 정도 된다. 이는 전국 독립유공자의 13.8%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 우리 지역이다.- 대구 경북지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특별히 많이 배출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이 지역은 유림의 고장이자 선비의 고장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국제 성세를 판단하고 민중을 지도하는 사회지도층으로는 유림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 선비의 고장인 이 지역에서 자연히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결과였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서 항일 정신과 독립 의식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석주 이상룡 선생이나 왕산 허위 선생의 가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직 서훈 받지 못한 유공자들은 얼마나 될 것으로 보나.△정확히는 판단할 수 없지만 여러 자료를 보면 20만~40만명으로 추산한다. 50년 일제 강점기 동안 얼마나 많은 분이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국가가 다루어야 할 문제다. 특히 만주나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하신 분들은 남북분단으로 자료 접근이 어려워 역사 속에 묻혀버린 감이 있다.3·1운동 집회인원이 204만6천938명이었고 사망자가 7천508명, 부상자 1만5천849명, 수감자가 4만6천306명이었다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기록했다. 거기에 비하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서훈 받은 독립운동가가 1만8천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적은 숫자다.현재 보훈처가 발굴하고도 후손이 없거나 소재파악이 안 돼 서훈을 전수하지 못한 독립유공자가 6천800명이나 된다.- 우리나라의 유공자 보훈은 어떤 것이 있고 독립유공자의 보훈은 어느 수준인가.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과 보상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는 것 같다.△국가보훈처에서 관리되고 있는 국가유공자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독립유공자와 호국유공자, 그리고 민주화유공자가 그것이다. 독립유공자는 동시대에 겪은 신체적·재산적 고통과 피해는 엄청나게 그 후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독립유공자는 ‘3대에 걸쳐 망했다’는 자조적인 말이 나돌 만큼 후손들에게 준 피해는 컸다. 다른 단체도 후손에게 영향을 주지만 독립유공자 유족과 비교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조상의 독립운동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후손들이다. 국가에서 독립운동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발적인 헌신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과 기득권을 버린 독립운동가들은 그야말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슈퍼에고’에 해당하는 분들이다.그러나 그 후손들은 가난한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뒷전에 밀려나기도 했으니 유공자들의 공적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의료혜택이나 보훈수당 등에서 지자체마다 다르고 국가보훈처에서는 타 보훈단체와의 형평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재 독립운동가,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 절차와 방법에서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독립유공자가 받는 포상에는 5단계의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과 건국포장, 대통령장으로 나누어진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독립유공자의 훈격을 결정할 때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즉 같은 독립운동이라도 훈격이 달라 유족들이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 할 때 후세가 보상금 받으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하는 반응이 나올까 두려워 선뜻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또 자칫 선대의 빛나는 독립운동 사실에 흠이라도 될까 우려해서 유족들이 서훈이 낮게 평가되어 있다며 재심요청을 해도 국가보훈처 공훈심사 부처에서는 재심의를 해주지 않고 있다.- 선친인 오기수(吳麒洙·1892~1952) 지사의 행적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 달라.△나는 아주 어렸을 때 문중에서 큰아버지인 오 지사의 양자로 입적됐다. 큰집의 두 분 누님과 함께 자랐다. 그래서 내 기억에는 안방에 앉아 계시던 눈먼 노인의 기억밖에는 없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아 고생을 하셨던 것이다.어렸을 때는 선대의 많은 재산을 선친 옥바라지에 날려버렸다는 집안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어릴 때 가난하게 자랐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대개 그러하듯 재산적 피해로 제대로 공부를 못 한 분들이 많다. 나 또한 반항심을 많이 가졌지만 지금 이 나이에는 무한한 자긍심을 느낀다.- 석주와 함께 오 지사의 건국훈장 애족장이 훈격으로서 부족하다고 했다.△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라면 훈격이 매우 낮은 편이다. 또 오 지사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보니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너무나 과소평가돼 있었다. 그래서 지난 2005년 보훈청에 재심을 신청했더니 “미서훈된 분에 대한 공적심사를 우선 하고 있다. 따라서 기서훈자에 대한 훈격 조정을 위한 공적 심사는 계획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답변을 해 왔다.- 오기수 지사의 서훈은 어떻게 받았나.△내가 20대 초반이었던 1977년 신간회의 박노수 지사께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할 때 “나보다 오기수 지사의 공적이 큰데 같이 포상 신청을 올려야 한다”며 우리집을 찾아 왔다. 그렇게 해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고 1990년에야 건국훈장을 받았다.오 지사가 1919년 6월 중국 만주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대구지법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1920년 9월 대구 남문시장에서 동지들과 일제에 협력한 조선 관리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해 암살하려건 계획으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 복역한 것이 서훈 공적의 전부다.- 그렇다면 오지사의 주요 행적과 서훈 받지 못한 활동 이력은 어떤 것이 있나.△사실 확인과 재판 기록을 발굴해보니 실제 감옥살이도 3차례 4년10개월이나 됐다. 1929년 8월 만주 장춘경찰서에 붙잡혀 신의주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언도받고 상소해서 징역 2년 판결 받아 1931년 석방됐다. 그때 고문으로 상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고향 의성으로 내려왔다.2년 뒤인 1933년 12월 의성적색독서회 사건 주범으로 체포돼 대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관련자 2명은 오 지사보다 적은 징역 2년6월 판결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 사건 하나만으로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당시 오 지사는 결국 무죄판결을 얻어낼 때까지 1년7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에 따르면 4년 10개월 수형기간은 애국장(5년 이상 활동 또는 4년 이상 옥고)을, 활동기간을 기준으로 하면 독립장(8년 이상 활동)에 해당된다고 보고 재심을 신청했다.- 유족으로서 오 지사에 대해 평가하면.△오 지사는 의성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서울로 유학, 경성관립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했다가 의성으로 귀향한 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멀어 힘든 노후를 보내야 했다.1920년대 후반부터 독립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주로 사회주의 운동을 했으나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 활동을 접고 자유민주주의로 건국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의성을 뒤흔든 ‘의성적색독서사건’은 당시 신문에 의성 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보도되었다. 자유민주주의자로 전향했음에도 ‘공산당’ 말만 나오면 움츠려드는 시대에는 쉬쉬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보훈 절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겠다.△이처럼 재심을 바라는 유족들이 많으나 상훈법에 따른 제약과 공훈을 욕심내는 후손으로 비춰질까봐 재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대한민국 역사에 영원히 남을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선친의 독립운동 사실 중 만주 의성에서의 기록들이 공훈록에 등재되지 못하여 유족으로서 죄송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다.공훈법이 개정되어 독립유공자의 공훈에 정당한 평가를 해주기를 바라며 독립운동으로 피폐해진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려는 유족들의 간절한 바람이 회한으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경우 편집위원

2022-08-09

감염병 시대의 라이프 케어는 한의약의 일상화로

‘얼마나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가 화두가 되는 세상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의 대유행은 주기가 짧아지고 일상화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제 보건의료 패러다임도 질병 중심의 ‘헬스 케어(Health care)’에서 생애 전주기 삶을 관리하는 ‘라이프 케어(Life care)’로 바뀌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정창현 한국한의약진흥원장은 “한의약은 오랜 세월 수많은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했다”며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에도 한의약이 해답을 줄 수 있다고 자신한다.바이러스를 죽이는 치료법이 아닌, 바이러스가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데 중점을 두는 한의약은 수시로 변이하는 바이러스의 종류에 상관없이 증상에 따라 곧바로 적절한 치료를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한의약은 과학화를 통해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해 왔다는 정 원장은 “국민들의 한의약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한의학을 예방의료로 일상화 생활화 대중화 하겠다”고 말한다. - 한국한의약진흥원장으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났다. 진흥원이 하는 일은 주로 어떤 것인가.△한의약 산업을 육성하고 이를 통해 국민 건강과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것이다.한의약 발전 정책 개발과 관련 제도 개선, 한의약 혁신기술 개발, 한의약 산업 육성 및 세계화, 한의약 중심 지역 건강 복지 증진 등 진흥원은 한의약과 관련된 국민 복지와 산업 전반에 대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한의약 산업 발전을 위해 한약제재생산센터와 한약비임상시험센터 등 전담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한의약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의약이라고 하면 비과학적이라는 인식이 있다.△그야말로 편견이다. 서양의학에 고대 중세 근대 현대 의학이 있듯 한의학도 시대적 구분이 있다. 지금 한의학은 현대 한의학이며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게 표준화 과학화를 이루고 있다. 한의학은 그동안 끊임없는 연구와 토론, 임상실험을 통해 변화 발전해 왔다.설명도구나 접근 방식이 서양의학과 다르다고 비과학적이라 단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입증이 안 됐을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최근 첨단물리학의 입자, 파동, 양자 관련 이론이 한의학 이론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점은 눈여겨 볼 일이다. 과학의 발달로 한의약의 효과가 하나 둘 밝혀지고 있기도 하다.우리에게는 ‘동의보감’처럼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우수한 한의학 문헌들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임상경험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문헌이 비과학적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한의약진흥원은 이런 소중한 자산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그 가치를 밝히고 소중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표준화하고 있다.- 한의약진흥원의 임상경험 표준화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낸 것이 있나.△한의약진흥원이 2016년부터 6년동안 진행한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이 대표적이다. 의료 현장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기 위한 근거 기반 기술서라고 할 수 있다. 감기, 견비통, 고혈압, 만성 피로, 갱년기 장애 등 30개 질환에 대해 총 330억원을 투입해 국제적 수준의 지침을 개발했다. 여기에다 현재 후속으로 추진중인 한의약 혁신기술개발사업을 통해 2029년까지 70여 종의 질환에 대한 한의표준임상지침을 개발해 고도화하고 연구 성과를 확산 보급해 나갈 계획이다. 한약과 양약 병용 투여 연구와 중점질환 연구센터 지원 등 근거 중심의 한의약 과학화, 표준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의약의 대중화가 무엇보다 시급해 보인다. 이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어떤 것인가.△과학화 표준화 현대화를 통한 한의약의 대중화 일상화가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학문이든 산업이든 사상이든 그 어떠한 것도 대중과 함께 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마련이다.한의약은 수천 년 동안의 임상 경험과 연구를 통해 방대한 정보를 갖고 있으며 그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담겨 있다. 이를 현대적 언어와 개념으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진흥원이 현재 한의약 임상정보 빅데이터 구축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도 그 중 하나다.- 한의약의 대중화에는 빅데이터 구축만큼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물론이다. 지금까지 한의약계는 표준화 현대화 과학화를 통해 유효성과 안정성 입증에 노력해 왔다. 이제는 이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 한의약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개선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아울러 문화의료, 예방의료로서 한의학의 특징을 살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의식주 전반에 걸쳐 한의학적 요소를 접목시켜 한의학의 일상화, 생활화, 대중화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한의약의 표준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한의약 기술개발이 필요할 것 같다.△진흥원은 한의약 혁신기술 개발사업을 통해 의료서비스의 질적 개선을 위한 질환별 가이드라인 개발과 의료 기술 최적화를 통한 질 향상, 그리고 첨단의료 및 과학기술의 융합을 통한 치료기술 개발 등 국민 건강증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또 지금까지 축적한 연구 성과, 인프라 및 우수 연구인력 등을 적극 활용해 한의약 관련 기업의 신기술 신제품 개발과 산업화에도 지원하고 있다.- 국민 건강 증진과 의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적용 질환 및 절차 등 한의약 건강보험급여에 대한 제도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첩약을 비롯한 한방의료의 건강보험급여 적용 확대는 한의약계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다. 한방의료의 건강보험급여는 국민건강보험 전체 급여의 3%에 불과하다. 2021년 실시한 한약소비실태조사에서 한방의료 분야의 개선점으로 50% 이상이 보험급여 적용 확대를 꼽았다. 한의사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현재 한방의료의 건강보험 급여는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추나요법을 비롯해 한약제제, 한방물리요법 분야에서 일부 적용되고 있다. 첩약(탕약)은 현재 안면신경마비, 뇌혈관질환 후유증, 월경통 3개 질환에 대해 건강보험 시범사업으로 진행되고 잇다. 그런데 적용 일수 등 급여 범위가 낮고 처방 절차도 복잡해 보완이 필요하다.- 코로나19 감염병이 재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감염병 전문가로서 어떻게 전망하며 한의약계의 대응은 무엇인가.△감염병의 유행과 위험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예견됐던 일이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감염병 대유행 주기가 짧아지고 미래는 감염병이 일상화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현재와 같은 서양의학 일변도의 감염병 관리체계는 나름 성과도 있지만 여러 한계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바이러스가 조금만 모습을 바꿔도 기존의 치료제나 백신은 무용지물이 된다. 새로운 치료제나 백신 개발을 위해 우리는 또 수개월, 수년을 기다려야 한다. 시간과의 싸움인 감염병 관리에서 오랜 공백은 실로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또 다른 문제는 항바이러스제의 경우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입한 후 24~48시간 이내에 투여해야 유효하며 그 이후는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항생제나 스테로이드제 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한의약은 이같은 문제들을 보완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어떤 질병이든 변종이 가능하다. 바이러스 규명을 위해 굳이 수개월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한약의 유효성을 의심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약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한의약계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다.△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한의약계의 활동이 보이지 않았다고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의사협회는 여러 차례 보건당국에 참여를 제의했고 감염병 단계별 대응 매뉴얼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대한한의사협회에서는 지난해 12월 22일부터 올해 4월 15일까지 코로나19 재택 치료자와 코로나 후유증 및 백신접종 후유증 환자를 대상으로 ‘코로나19 한의진료접수센터’를 운영했다. 하루 최대 2만 명이 진료 및 치료한약을 요청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또 한의진료접수센터를 통해 진료 받은 8천4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만족도 조사에서 비대면 한의약 치료를 받은 재택치료자 중 94.4%가 만족감을 표시해 한의약이 감염병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한국한의약진흥원도 범 한의계의 구심점이 되어 감염병 대응 매뉴얼부터 제도적 기반 마련, 한약제제 개발과 산업화까지 국민 건강을 지키는 큰 울타리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바이러스 치료에서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서양의학의 치료법이 바이러스만 죽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한의학은 바이러스가 살 수 없는 인체환경을 조성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지금처럼 바이러스의 규명과 제거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인류는 감염병을 극복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수시로 변이하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바이러스 유형보다는 그것이 일으키는 질병의 특성을 중시하므로 바이러스 종류와 상관없이 증상에 따라 곧바로 적절한 치료를 시행할 수 있다. 한의학은 감염병을 초기 중기 말기 단계별 80여 가지 유형의 병증으로 나누고 바이러스 특성에 맞춰 처방하는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처럼 한의학의 장점으로 서양의학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면 감염병으로부터 보다 안전하게 국민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의약이 국민 건강과 의료에 미치는 영향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은.△앞으로의 시대는 안타깝게도 ‘전염병과 고령화로 인한 만성병’이 풀어야 할 가장 큰 난제일 것으로 보인다. 최대 화두는 ‘얼마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되고 있다. 유병장수가 아닌 무병장수가 인류의 가장 큰 소망이기도 하다. 천문학적 의료비 증가로 국가 재정은 날로 악화되고 전 세계적으로 저비용 다효능의 방편으로 전통의약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또한 신종 감염병 등 난치성 질환이 늘어나면서 질병의 치료보다 예방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한의약은 질병의 예방과 회복에 장점이 있고 경제성 안전성 효율성 면에서도 탁월하다. 최근 코로나 후유증 치료를 위해 한의원을 찾는 환자수가 크게 증가한 것이 그 한 예이다.보건의료의 패러다임이 ‘헬스 케어(Health care)’에서 ‘라이프 케어(Life care)’로 바뀌고 있다. 예방이나 치료의 질병 중심 사고에서 생활 전반에 걸쳐 적절한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생애 전주기 관리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한의약의 장점 중 하나인 양생의학은 라이프 케어에 최적화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의약은 미래 의약을 주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경우 편집위원 □ 정창현(丁彰炫·54)전남 보성 출생. 광덕고, 경희대 한의학과 졸, 경희대 한의대 한의학 석사·박사. 경희대 한의대 교수. 한의학과 학과장. 한의학고전연구소장.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UNC) 아시아센터 방문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교학부학장. WFMC(세계중의약학회연합회) 중의약문화전업위원회 부회장. 대한 한의학원전학회 수석부회장. 경희대학교 교수회의 사무총장.대학에서 한의학의 원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을 주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한의학의 사상과 가치를 가르쳤다. 학술적으로는 실용방면의 연구를 좋아했고 특히 양생실천방면과 전염병 분야 전문가다. 양생이론의 실상을 알고자 도가사상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산림치유, 무용치유 등에 관한 한의학적 개념을 정리했다.한방분야의 감염병학인 온병학(溫病學)을 보급, 최초로 정규과정에서 강의했다.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는 한의감염병학회 창립을 주도했고 코로나19 사태 때는 코비드19 한의방역지침 작성에 참여했다.지금은 한의약진흥원이 미래 한의약 산업을 선도하는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고 그 후 대학으로 돌아가 후진 양성과 연구에 전념하겠다고 한다.

2022-07-25

순간의 감동을 영상으로 전해주는 사진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변화의 순간을 찰나의 빛으로 포착해 붙잡아 둔다. 사진이다. 사진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은 기록이고 그것은 때로 증언하고 고발하는 역사가 된다.그런데 피사체의 순간을 일정한 틀 속에 가두면서 사진가의 의도가 개입된다. 무엇을 어떻게 어느 순간을 선택하느냐 하는 선택은 전적으로 사진가의 안목이다.50여 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 온 사진가 강위원. 그는 “자신이 느낀 감동을 영상언어를 통해 보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사진이라고 한다.사진을 오래 찍으면 촬영 기술이 발전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대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경륜이고 그래서 사진가는 ‘아는 것만 보이고 보이는 것만 찍을 수 있다’고 한다. - 요즘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동영상을 촬영한다. 동영상과 사진의 차이는 무엇인가.△동영상은 전후의 움직임과 소리를 넣을 수 있어서 보다 사실적이다.그러나 사진은 정지된 화면 속에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보다 더 섬세한 조율을 필요로 한다.- 주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왔다. 신문 사진과 사회고발성 사진 등과 어떻게 다른가.△다큐멘터리 사진과 저널리즘 사진 사이에는 비슷한 것과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한다.둘 다 보는 사람들에게 의사전달(Communication) 기능을 가지지만 다큐멘터리는 스토리를 가지며 여러 장의 사진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저널리즘 사진은 한두 장의 사진에 모든 것을 집어넣어야 한다. 특히 신문 사진은 독자의 눈높이에 맞는 사진과 신문의 마감시간이라는 시간적 제약을 받는다. 사회고발성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다루는 소재로서 마감시간에 여유가 있는 잡지 등에서 테마로 다루고 있다.나의 작업은 다큐멘터리 작업인 경우가 많지만 사회 고발적이거나 저널리즘적인 요소보다는 기록적인 면을 중시하여 역사적이거나 민족적으로 의미 있는 ‘그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 교육적인 면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사진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어디에 있나.△사전적 의미에서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이념이나 사상 등을 가지고 개인적 작업을 하느냐로 구별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프로 사진가는 의뢰를 받은 대상이나 개인적인 작업에 관계없이 철저한 사전조사와 준비를 갖추고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작업은 언젠가는 매체의 요청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 대해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아마추어의 특권은 주제나 이즘 등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즉 어떠한 소재라도 본인의 욕구에 따라 작업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아마추어들은 대부분 목적의식 없이 작업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들은 유명인들이 발표해서 성공한 대상들을 소재로 다루거나 공모전 입상을 목표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 찍기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취미로 사진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를 택하라’고 권한다. 나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는 논어 구절을 사진 작업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그만큼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는 쉽게 접근할 수도 있고 깊게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경우라도 깊은 관찰과 노력이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성취를 이룬 사람이 사진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면 훨씬 깊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권한다.- 예술사진이란 어떤 사진을 말하나. 모든 사진은 예술사진인가.△사진은 예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제작 당시에 예술적인 목적으로 작업을 하며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서도 예술사진으로 대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출발은 저널리즘이나 다큐적인 사진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서는 예술작품의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로버트 커파의 ‘쓰러지는 병사’나 ‘노르만디 상륙작전’ 같은 사진은 촬영 당시에는 저널리즘에 속했지만 지금에는 그것들이 예술사진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예술사진은 철저하게 미학적으로 계산되어 만들어진 Making Photo쪽의 사진이거나 시공을 초월한 걸작들을 일컫는 말이다.- 촬영 현장에서 연출하고 싶은 충동이나 유혹은 없었나.△현장을 정리하거나 재구성하는 경우와 현장을 조작하는 것은 엄청나게 다르다. 이는 본질을 유지하느냐, 본질을 왜곡시키거나 형태를 변화시키느냐의 문제다.사진을 시작할 당시 내 생활 주변을 무대로 촬영했는데 지금 보면 연출한 사진도 있다. 차츰 대상을 넓히면서 있는 그대로 가식 없는 모습을 촬영하려 애썼다.결정적 순간, 감동을 주는 순간을 찾으려 애쓰면서 연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가식 없는 모습’을 담았다. 당시에는 주목 받지 못했지만 그 모습들이 사라진 지금 보면 본질에 충실한 도큐멘트였다.- 잘 찍은 사진과 좋은 사진은 같은 말인가.△기술적으로 잘 찍은 사진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사진은 아니다. 좋은 사진은 촬영자의 의도를 보는 사람에게 제대로 의미전달을 하면서 감동을 주어야 한다. 사진을 보는 순간 무엇인가 큰 울림이 있으면 완벽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에서 찍는 기술이나 기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사진에서 인문학은 소용없나.△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고 기술적인 면을 습득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누구나 짧은 시간에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문제는 쉽게 터득할 수 없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갖는 다양한 영상문법을 터득해야만 가능하다. 인문학적인 요소는 사진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사진이 단순한 기술적인 매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조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사진 속에 인문학적인 바탕이 깔려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사진은 사진 독자적으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진이 다른 분야와 호흡을 맞출 때에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예술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광고 사진이 모두 인문학과 연결돼 위력을 발휘하는 사진들이다.- 50여 년 사진작업을 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자랑하고 싶은 작품은.△내가 촬영하고 발표한 모든 사진들이 하나하나 기억을 자극한다. 기억, 한 장 한 장 사진을 볼 때마다 촬영했던 당시가 생각나며 느꼈던 감동을 되살려 준다. 내가 감동을 받지 못했던 대상을 가지고 누구를 감동시킬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했다.특히 기억을 되살린다면 처음 사진에 입문해서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을 기록한 사진들이다. 50년이 훨씬 지났다. 모두가 사라지고 누구도 믿지 않을 모습이다. 사진의 기록성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백두산을 많이 찍었다. 계기가 있나.△1990년부터 수십 차례 백두산을 찾아 촬영했다. 1980년대 후반 대구 시민회관에서 구보다 히로시(久保田 博二)의 ‘북녁의 산하’라는 사진전을 보면서 언젠가는 백두산을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1990년 당시 경북산업대학(현 경일대학교) 교수들을 포함한 지인들이 관광을 포함한 탐사팀을 만들 때 합류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백두산 촬영은 그 뒤 10여 년 동안 계절을 달리하면서 한 해 서너 차례씩 수십 차례 계속됐다.언제나 천문봉 부근 기상대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움직였다. 천문봉 자하봉 화개봉 등에 접근했고 때에 따라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새벽 3시면 출발해 해 뜨기 전에 촬영장에 도착해서 해 뜬 후 1 ~2시간 촬영하고 11시면 기진맥진해서 숙소로 돌아왔다.천의 얼굴을 가진 백두산 날씨는 종잡을 수 없었다. 백두산에서 300일 이상의 밤을 지냈지만 정말 운이 좋은 날이 있었다. 그 날은 필름을 80통이나 찍을 수 있었다. 내 백두산 10년 사진 중 최고작 40편을 꼽으면 절반이 그날 하루 찍은 것이었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공공기관 등 곳곳에 걸려있더라.△백두산 작업을 모아 1993년과 1995년 전시회를 열고 작품집을 발간했다. 특히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백두산 4계와 야생 동식물전’은 나의 사진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영광스러운 전시였다.촬영에는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행운도 누렸고 학교의 지원으로 전시회를 열 수도 있었다.인문학자와 공동 연구가 가능한 것이 백두산 사진의 성공이 됐고 같이 갔던 사진기자가 자기 이름으로 회사에 전송해 이름을 도용당하기도 했다. 백두산 자연보호국에 근무하면서 백두산과 야생 동식물을 촬영한 중국인 왕영씨와 함께 한 전시로 경향 각지에서 개최됐다.백두산 촬영을 통해 지금까지의 풍경 사진에 대한 개념을 바꾸게 됐다. 돌 한 개, 나무 한 그루라도 단순한 시각에서 벗어나 의미를 찾고 역사적 사실과 연결시켜 정신적 요소까지 강조하는 이퀴발란스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진기자로 월남전에 종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한국 기자들이 취재가고 있다.△월남전과 우크라전은 모든 것이 다르다. 월남전을 회고하면 전쟁이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당시 월남의 마을에 남자라고는 팔 다리가 떨어져나간 부상자와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모두 도회지 술집으로 나갔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현장을 찍었어야 했다. 전쟁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진이니까.- 사진가로서 평시에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일반인과 어떻게 다른가.△사진을 처음 접하는 순간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진 속에 빠져서 살아왔다. 초기의 사진과 지금의 사진 속에서 사진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단지 인간적으로 숙성이 되고 인문학적으로 단련이 되어서 대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50년이 넘는 시간을 사진이라는 분야에 외골수로 파묻히다 보니 대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뜨이는 것 같다. 내가 표현한 이미지가 어떤 느낌을 보여줄 것인가는 항상 고민하는 화두다.□ 강위원(姜衛遠·73)사진가. 전 경북산업대 교수. 영상인류학자.대구출생. 대구공고, 영남대 공대 화학공학과 졸. 홍익대 산미대학원 사진전공 미술학석사.경북공고 교사, 경일대 사진영상학부 교수 역임.연변대 예술학부 초빙교수 역임, 북경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운영위원장, 심사위원 역임. 대구사진대전 초대작가, 운영위원, 심사위원 역임.‘팔공산’ ‘백두산의 사계’ ‘조선족의 오늘’ ‘보고싶다’ 등 사진집 및 저서 16권.광복 50주년 기념 ‘백두산 4계와 야생 동식물전’ 등 국내외 개인전 27회,금복문화상(2002), 녹조근정훈장(2010), 대구시문화상(2018),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2018) 수상.외삼촌의 영향으로 화학공학을 전공했으나 1968년 월산예술학원에서 사진에 입문하면서부터 사진에 매료됐다. 자연을 재해석해 환상적인 색의 세계를 보여준 ‘Fantasy of Nature’ 사진집 출판과 개인전으로 주목을 끌었고 사진집 ‘팔공산’으로 인정받았다. 스스로를 ‘영상인류학자’로 정의하는 그의 사진 작업은 사진예술의 한계를 초월해 시대를 기록하고 역사적 흔적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이경우 편집위원

2022-07-18